포가튼 머맨 외전
1. Behind Episode with Nadia : Fuck you, Aiden Taylor, Fuck you!
벌써 다섯 병째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버드와이저 병이 테이블에 놓였다. 맥주병을 내려놓은 사람은 테이블을 부술 심산으로 보였다. 아니라면 저따위로 내려놔서는 안 되는 거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힐끗 그 테이블을 쳐다봤다. 그리곤 조금 겁먹은 낯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전부 검은 수트를 입고 있는 데다가, 다들 한 덩치 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 새라 시선을 돌렸고, 다시 자신들의 대화에 열중했다.
맥주병의 주인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 사람을 제외한 남자 네 명이 눈치를 봤다. 그중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떡해? 계속 저렇게 둬도 돼? 그렇게 묻는 거였다. 한 명은 흐리게 웃으며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언제든 경찰을 부를 수 있도록 통화 창이 켜진 채였다. 마지막 한 명은 혹시 테이블이 박살난 건 아닌지 고개를 숙여 살폈다.
테이블을 살피던 에릭이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옆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는 나디아를 바라봤다. 오늘 근무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한참 허공을 노려보던 그녀는 다시 맥주병을 들었다. 병의 주둥이를 물고 고개를 뒤로 꺾는 폼이 격했다. 그녀는 병을 또 다시 꽝, 하고 내려놨다. 이번엔 옆 테이블 사람들의 어깨까지 움찔할 정도였다. 그들은 퍽 불만 어린 눈빛으로 나디아를 흘겨봤다. 에릭과 다른 팀원들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양해를 구했다.
‘동생이 웬 호로잡놈이랑 결혼한대요. 좀 봐줘요.’
에릭은 제 옆에 앉아 있는 나디아를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아, 그런 비극적인 일이!’라는 표정을 짓다가, 안됐다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은 ‘여러분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동받았습니다.’라는 뜻으로 가슴 쪽에 손을 가져다댔다. 옆에서 허공을 뚫을 듯 바라보던 나디아가 별안간 에릭을 돌아봤다. 에릭이 화들짝 놀라며 무해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의 마음이 소리쳤다.
‘또, 또 그 말 하려고 하는 거지, 또? 제발, 하지 마. 그냥 맥주 마셔!’
에릭이 눈으로 그렇게 말해 봤지만 하나도 소용없었다. 그의 푸른 눈이 호소하듯 나디아를 바라볼수록 나디아의 기분은 오히려 더러워졌다. 나디아가 빽하니 소리를 지르듯 입을 열었다.
“씨발, 좆같은 퍼런 눈깔 저리 안 돌려?! 그 눈깔만 보면 다 뽑아다가 피클 담구고 싶으니까 당장 눈깔아!”
“그래, 미안하다.”
에릭이 호다닥 시선을 돌렸다. 나디아는 그를 한참 노려봤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에릭은 제 머리가 갈색인 것에 안도했다.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만약 금발에 푸른 눈이었다면, 나디아의 손에 대가리가 뜯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 금발이랑 시퍼런 눈깔 저리 안 치워?!’라고 소리치며, 모가지를 뜯었을 거였다.
그는 뒤통수에 직격으로 꽂히는 눈빛을 애써 무시했다. 나디아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생각을 해 봐! 나도 알아! 걔가 개씨발새끼랑 결혼을 하든 말든! 지가 하고 싶다는데 내가 뭐 어떡해! 어?! 해, 해! 근데 생각을 해 봐!”
나디아가 말했고, 에릭은 여전히 나디아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대답했다.
“그래. 네 동생이 엄청나게 좆나게 착한데 걔를 막 대하고, 심지어 때리기도 한 것 같고, 억지로 약도 시킨 놈이랑 결혼하는 게 말이 되냐고, 지금 오십 번째 물어봤어. 나는 이번까지 오십 번째 ‘씨발! 말도 안 되지!’라고 말했고. 그렇지?”
“씨발! 말이 안 되잖아! 생각을 해 봐! 나도 알아! 걔가 개씨발새끼랑 결혼을 하든 말든! 근데 어?! 생각을……!”
“그래, 나디아. 내가 지금 오십 한 번째로 생각을……. 하…….”
에릭이 흐린 눈을 했다. 그는 정말 지쳤다는 듯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려 덮었다. 맥주 다섯 병으로 만취하는 주제에, 바에 같이 가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몇 시간 전의 제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디아가 그런 그의 뒤통수에 말을 쏟아냈다.
“그 새끼가 지금은 안 그러든 말든! 지금은, 지금은 엄청 잘해 줘서 애 데리고 매번 여행도 밥 먹듯이 다녀오고, 애가 어디서 이상한 판초 사진을 찍어서는 ‘나디아! 이것 좀 봐. 이거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하는 기쁜 메시지를 보내든 말든! 그 새끼가 맨날 몸에 좋은 음식만 해 먹여서 이제 파파존스 피자 같은 건 안 먹든 말든! 씨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나쁜 건 나쁜 거지!”
“뭐야, 네 동생은 엄청 행복하게 잘 살고 있…….”
“안 닥쳐?!”
거의 융단폭격이었다. 에릭은 뒤통수가 축축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뒷머리를 한 번 만지려 손을 뻗었다가, 이내 주춤거리며 손을 거뒀다. 정말 침이 흥건할 것 같았으니까. 에릭은 뒤를 슬쩍 훔쳐봤다. 나디아가 씩씩대고 있었다. 나디아를 살피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근데 분명 외동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디서 나온 동생인지를 모르겠네…….”
“동생이라고!”
에릭이 작게 중얼거린 말에 나디아가 답했다. 맥주를 마시려던 그녀가 입에 대고 병을 탈탈 털었다. 남은 게 없었다. 몇 번이나 병을 털던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갈색 눈에 눈물이 일렁이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네 남자 모두 낯을 굳혔다. 에릭은 나머지 세 놈에게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야, 그냥 너네는 당장 꺼져. 그런 뜻이라서 세 명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세 명이 모두 사라졌을 때쯤, 에릭이 한숨을 쉬며 눈썹 부근을 매만졌다. 눈물을 한두 방울씩 뚝뚝 흘리던 그녀는 결국 허엉, 하고 목 놓아 울었다. 나디아가 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동생이 왜, 없어! 내 동생, 나 진짜 동생 엄마 뱃속에서 하늘나라 갔을 때, 그때 걔가 동생 대신, 같이 놀아 준다고, 했단 말이야! 씨발! 그러니까, 걔가 내 동생, 이지!”
“알겠어, 야, 나디아, 미안하다. 내가 몰랐다…….”
에릭이 테이블에서 냅킨을 두둑이 집어 들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말에 꽤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에릭은 어색한 손길로 나디아에게 냅킨을 건넸다. 나디아는 꺼이꺼이 울기밖에 하지 못해서, 결국 그가 냅킨 뭉탱이로 그녀의 얼굴을 툭툭 두드려야 했다. 그의 솥뚜껑만한 손이 허공에서 주춤거렸다. 나디아가 그 냅킨을 낚아채서는 제 얼굴을 가렸다.
“그 새끼 때문에, 내가 왜 진이랑, 싸워야, 되는데……!”
어제의 일이었다. 나디아가 그때를 떠올리며 흐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싸운 건 아니다. 분위기가 이상했던 거지. 결혼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표정이 애매했다. 진은 나디아와 알렉스의 눈치를 봤고,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디아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 가득했던 정적이 잊히지 않았다. 세 사람 사이는 안개라도 낀 것처럼 공기가 답답했다.
정적을 깨기 위해 나디아가 몇 번 입을 달싹였지만, 차마 뱉어지질 않았다.
‘정말? 너무 축하해! 정말 잘됐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해? 신혼여행은?’
그런 말을 해야 하는데 맘처럼 쉽지 않았다. 진은 그런 나디아와 알렉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진이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 다녀와서 식사라도 같이 하자……. 언제까지고 에이든을 없는 사람 취급할 순 없잖아…….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였다. 나디아가 그제라도 뭐라 말해 보려 했지만 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런 몸짓에 그녀는 인상을 썼다. 가라앉아 있는 검은 눈이 나디아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죄책감이란 건 방어적인 자기합리화, 그리고 반항심과 이어져 있었고, 나디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디아는 제 마음이 죄책감에 짓눌리자마자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반감이 불쑥 치솟음을 느꼈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 버린 거였다.
- 진, 좀 더 신중할 수 있는 거잖아…!
그 뒤로는 다시 정적이었다. 알렉스는 눈을 질끈 감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망했다는 뉘앙스였다. 진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냥 웃었다. 그리곤 아직 몇 입 먹지도 않은 음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 나 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 미안해…….
나디아는 저 ‘미안해’라는 말이 귓구멍에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쓸쓸하고 슬프던 진의 목소리가 하루 종일 귀에 맴돌았다. 미안해? 뭐가? 네가 뭐가 미안해? 나디아는 하루에 몇 번씩 화가 났다. 미안해야 할 사람은 진 헤니가 아니라 따로 있다. 그 새끼가 그런 짓만 안 했더라면, 저도 활짝 웃으며 진을 끌어안아 줄 수 있었다. 축하한다고, 너무 잘됐다고 말하며 제 일처럼 기뻐할 수 있었다.
냅킨으로 눈물을 닦던 나디아는 진동하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에서 웅웅거리며 울리는 건 그녀의 핸드폰이었다. 울먹이던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가 훌쩍이며 말했고, 전화기 너머 상대방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렸다. 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그쳤다. 옆에 어쩔 줄 모르며 앉아 있던 에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디아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작게 인상을 쓴 채였다.
“뭐, 누구?”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 혹은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거였다. 상대방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말하진 않았다. 그녀가 몰라서 되묻는 게 아님을, 푸른 눈의 남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본론을 꺼냈다.
[ 나랑 좀 봤으면 하는데. ]
***
훅, 하니 숨을 뱉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로 주먹이 뻗어졌다. 나디아와 마주 서 있는 스파링 상대는 식은땀을 흘렸다. 잽일 뿐인데 뻗어지는 속도나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감정이 잔뜩 실렸다는 증거였다.
이제 막 경호팀에 들어온 신참이 링 밖을 힐끗 바라봤다. 도와달라는 눈빛이었지만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주르륵 앉아 있는 네 명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우리도 방법이 없어. 그냥 맞는 수밖에 없어. 그런 대답에 신참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그 표정에 나디아가 마우스피스를 신경질적으로 제거했다.
“야! 너 집중 안 해?!”
나디아의 권투 글러브가 신참의 옆구리와 충돌하며 팡, 하는 소리를 냈다. 오른쪽 갈빗대로 꽂혀 들어오는 주먹에 신참의 입에선 절로 컥, 하는 소리가 샜다. 나디아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다시 마우스피스를 꼈다. 그녀의 갈색 눈 가득 화가 고여 있었다. 나디아는 주먹을 한 번 뻗을 때마다 그녀의 표현으로 ‘개호로잡놈’ 하나를 생각했다.
‘씨발, 목소리 깔아서 보자고 하면 내가 지를 보러 나갈 줄 알아?!’
다시 한 번 신참의 얼굴 앞으로 주먹이 뻗어졌다. 오른쪽.
‘그 새끼가 진한테 어떻게 했는데!’
턱을 향해 꽂히는 주먹은 왼쪽.
‘애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녀의 상체와 골반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유연하게 회전했다. 팡, 하는 소음이 복싱장을 울렸다. 바디에 꽂힌 건 라이트 스트레이트. 빠르게 파고드는 펀치에 신참의 상체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의 몸은 점점 코너로 몰렸다. 주먹은 무차별적으로 꽂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패턴화된 움직임이란 걸 아래에 있는 네 명의 남자는 알고 있었다. 많이 맞아 봤으니까.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신참을 보던 에릭이 말했다.
“이 뒤에 2콤보 더 들어가고 넉다운 된다에 50달러.”
“난 4콤보에 50달러.”
“4콤보? 야, 너무 후하게 쳐주는데. 이 뒤에 이어지는 레프트 훅 맞아 봤냐? 나디아 쟤는 왼손 오른손도 존나 상관없어. 그냥 다 아파, 똑같이 아파. 솔직히 저게 손이냐? 발이지! 저건 발로 차는 거지! 바디에 맞으면 옆구리 찢어지는 거야, 그냥. 앗, 내 갈비뼈!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이러고 빌빌거리면서 다녀야 돼. 좀비처럼 막 옆구리 싸매고, 어어, 어어, 이러면서!”
“기어를 하는데도 피멍든다니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왜 그러지?”
“왜 그러긴 왜 그래. 기어를 뚫고 충격이 꽂히니까 그렇지. 바보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신참의 몸이 링 위를 뒹굴었다. 그의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던 때에 경기는 허무하게 끝났다. 에릭이 4콤보에 걸었던 놈에게 손을 뻗었다. 까딱거리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50달러 지폐가 꽂혔다. 거봐, 2콤보라니까. 에릭의 푸른 눈이 거들먹거렸다.
“다음.”
낄낄거리던 네 남자가 나디아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다음? 네 남자 모두 절대 다음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얼룩덜룩한 달마시안이 돼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네 명이 서로에게 고갯짓을 했다. 네가 먼저 가! 싫어, 네가 가! 왜 나한테 지랄이야! 소리 없는 반항이 그들 입술 끝에 고였다.
“다음!”
그녀의 신경질적인 고함에 네 남자가 울상을 지었다. 아무도 나설 생각을 않자, 나디아가 헤드기어를 벗으며 링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스윽 쓸어 올리며 한 놈씩 살폈다. 네 남자의 눈동자가 허공을 쏘다니는 날파리처럼 여기저기를 헤맸다. 주르륵 훑던 그녀의 갈색 눈은 한 곳에 꽂혔다. 푸른 눈. 저 좆같은 푸른 눈! 하필이면 나디아와 눈이 마주쳐버린 에릭이 다음 타자로 낙점됐다. 에릭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나디아. 나는 이미 너랑 스파링 경험도 많고, 다른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내가 요즘 너의 불주먹을 너무 독점하고 있…….”
“기어 차.”
“아냐, 나디아. 기회는 공평해야지! 다른 친구들도 권투의 참맛을 볼 필요가 있…….”
“기어 차라고!”
에릭이 체념한 낯을 했다. 그는 아이처럼 울먹거리며 헤드기어를 들었다. 에릭이 입술을 삐쭉이며 생각했다. 오늘 죽는다. 오늘 진짜 죽는 거야. 나 아직 할리데이비슨도 못 뽑아 봤는데. 그거 꼭 타고 싶었는데. 그는 최대한 굼뜨게 밍기적거리며 기어를 썼다. 일 분이라도 더 삶을 영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야, 너 빨리 안……!”
나디아의 말이 끝맺어지기 전에, 열려 있던 복싱장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쿵쿵, 하는 소리에 안에 있던 모두가 문 쪽을 바라봤다. 문에 서 있는 사람 때문에 나디아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또 다른 푸른 눈이 복싱장 안을 스윽 훑었다. 그리곤 네 명의 남자 한가운데 서 있는 나디아에서 멈췄다. 에이든은 나디아를 한참 바라보다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그때 이상하더라니. 에이든이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언젠가 뉴욕에 출장을 왔을 때 본, 그 경호원이었다.
에이든이 복싱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나디아는 화가 드글드글한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네 남자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스멀스멀 멀어졌다. 에릭이 헤드기어를 내던지듯 버리고 도망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바닥에 있던 보호 장비는 에이든이 주워 올렸다. 그는 피식 웃으며 이 거래가 얼마나 남는 장사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저를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죽었다 깨어나도 셋이선 저녁을 안 먹겠다는 것도 아니다. 진은 가장 친한 친구인 그녀를 집에 초대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녀가 오게끔 해야 했다. 그녀가 오지 않겠다 대답한다면, 진은 하루 종일 우울해 할 게 뻔했다. 에이든은 10분 동안의 신체적 고통보다, 1분이라도 진이 슬픈 게 더 힘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간단히 맞아 주고 얻는 바가 더 컸다.
에이든이 헤드기어를 바라보며 앞에 있는 나디아에게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10분이면 다음 주에 저녁을 먹는 거야. 진이랑 나랑, 너랑. 우리 집에서.”
“그 전에 쓰러지면 안 먹어. 10분 채워. 그리고, 내가 너 때렸다고 진한테 이르기만 해 봐.”
나디아가 손의 붕대를 다시 묶으며 말했고, 에이든이 여상한 낯으로 대답했다.
“대신 얼굴은 안 돼.”
“뭐?”
“진이 걱정할 테니까.”
그는 헤드기어를 옆으로 툭, 던져 내려놨다. 나디아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삐뚤게 올라간 채라 동의의 제스처는 퍽 불량스러웠다. 몸에 두르는 보호 장비도 있었지만 에이든은 관심 없어 보였다. 나디아도 차라고 할 생각이 없었다. 둘 다 이 10분의 목적이 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건 스파링도 아니고 훈련 따위도 아니다. 응징일 뿐이었다. 고통을 상쇄시키는 장비는 목적과 알맞지 않았다.
나디아가 붉은 글러브를 다시 끼는 동안, 탈의실 문에는 네 명이 매달려 있었다. 문에 머리통 4개가 열매처럼 열렸다. 얼굴만 빼꼼 뺀 채 밖을 보던 에릭이 말했다.
“기어 안 차면 죽을 텐데. 진짜 죽으면 어떡해? 구급차, 구급차! 구급차 불러 놔야 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세게 때리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 사람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나디아의 글러브에서는 팡, 하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런 경쾌한 파열음 대신 뻑, 하는 둔탁한 소음이 났다. 네 남자의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그렇게까지 때리겠냐 말했던 사람은 핸드폰을 급히 찾아 들었다. 아무래도 구급차가 필요한 게 맞았다. 에릭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거 10분을 어떻게 맞냐…….”
“그래도 맷집 좋은데요? 나였으면 한 방 맞고, 어우…….”
누군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뒤에 있던 곰 같은 남자가 말했다.
“야, 몸이 저렇게 두꺼운데 저 정도는 버텨야지.”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에 에릭이 헛웃음을 쳤다. 그가 곰 같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몸 존나 두툼한데 왜 못 버티냐. 너 저번에 나디아랑 스파링하고 울었지? 어? 찔찔 짰지?”
“닥쳐! 그땐, 그때 어? 땀 닦은 거야!”
“넌 씨발 땀이 눈깔에서도 나고 좋겠다, 야. 여름에는 오열을 하겠네, 아주.”
또 뻑, 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네 남자의 목이 놀란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히익! 방금 왼쪽 갈비뼈 나간 거 아니야? 야, 빨리 구급차 불러!”
“야이씨, 갈비뼈가 나갔으면 저렇게 서 있지도 못해!”
“아냐, 방금 소리가 이상했……!”
그 뒤로 이어지는 난타에 네 남자의 입이 꾹 다물렸다. 복싱장에는 한동안 둔탁한 파열음만 이어졌다. 나디아가 무의식적으로 에이든의 왼쪽 턱을 향해 손을 뻗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금니를 꾹 물고 있던 에이든은 제 얼굴로 뻗어진 손목을 잡고, 내려치듯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나디아의 몸이 링 위로 엎어졌다. 나디아가 분노와 경악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가 지금 나를 패대기쳐? 그렇게 묻는 갈색 눈에 에이든이 대답했다.
“얼굴은, 안 된다고 했어.”
뱉어진 목소리가 탁했다. 에이든이 여태 제대로 쉬지 못했던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나디아는 엎어져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일어선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헤드기어를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글러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뒤에는 헐거워져 있던 회갈색의 머리를 다시 올려 묶었다.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에릭이 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10분 되려면 몇 분 남았냐.”
“아직 3분 남았는데, 왜요?”
“아, 그러냐…….”
에릭의 머릿속엔 3분 안에 사람 하나가 죽는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그 걱정만 가득했다. 그가 다시 폼을 잡는 나디아를 바라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살의로 번들거리는 나디아의 갈색 눈을. 에릭이 중얼댔다.
“애가 눈이…… 맛이 갔네……. 좆됐다.”
***
약속은 약속이었다. 나디아는 잘 빠진 검은색 세단에서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그냥 죽였어야 했는데. 그럼 여기 안 와도 되잖아. 그 새끼랑 밥 안 먹어도 되잖아. 그런 한숨이었다. 나디아가 살인을 저지르지 못한 것을 반성할 동안,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다 준 자동차는 유유히 떠났다.
“걔는 뭔데 맷집이 그렇게 좋아? 원래 그 정도 때렸으면 한 7분 정도 됐을 때 뒤지는 게 맞는데. 희한하네…….”
그녀는 중얼거리며 잘 관리돼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작게 인상을 쓰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날, 에이든이 했던 말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 됐지? 10분 다 맞았으니까 진이 전화하면 아주 기쁘게 알겠다고 말해. 저녁, 같이 먹겠다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에이든은 그녀의 환심을 사려하거나 잘 보이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이 어떤 기분인지, 진이 원하는 게 뭔지, 그것만 중요한 사람처럼 굴었다. 다른 사람에겐 자신이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미안하다고, 자신은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호소하지도 않았다.
에이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건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그가 이제 와서 되도 않는 소리를 했다면, 나디아의 손에 광대뼈나 코뼈 둘 중 하나가 주저앉았을 테니까. 나디아가 오묘한 낯으로 에이든을 바라볼 동안, 그가 작게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 어차피 네가 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할 일 없다는 거 알아. 좋아해서도 안 되고. 진이 잘 지내는지 아닌지, 그건 네가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 말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믿기 편한 거 알아.
에이든은 그 말을 한 뒤로 끙, 하는 신음을 삼켰다.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많이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용건이 끝난 뒤에 별말 없이 복싱장을 나갔다.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당부하긴 했다. 그날 저녁처럼 진을 실망시키지 마, 라고. 그가 말하는 ‘그날 저녁’은 나디아가 말실수를 한 그날이 분명했다. 나디아가 짙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발이 움직일 때마다 발아래의 풀들이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뉴욕이라는 도시와 맞지 않게 평화롭고 고요한 곳이었다. 나디아의 복잡하고 짜증나는 속과는 영 딴판이었다.
“누가 누구한테 충고야, 누구한테!”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괜히 마당을 한 번 퍽, 하고 발로 파헤치기도 했다. 그녀가 파헤진 곳 외에도 구덩이들은 많았다. 구덩이의 주인은 안 봐도 뻔했다. 구덩이 말고도 원반이나 밧줄로 된 장난감 따위가 보였다.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흔적들에 나디아의 짜증이 옅어졌다. 그녀는 곧 만나게 될 천사 같은 강아지 하나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현관에서 아담이 총알 같이 튀어나왔다. 나디아의 표정이 환히 피어났다.
“아담! 우리 아담! 이리 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였다. 흡사 갓난아이 앞에서 갖은 재롱을 떠는 이모의 모습이었다. 나디아가 팔을 펴 보이자, 아담은 안아달라는 것처럼 몸을 일으켜 매달렸다. 매달리다가도 발라당 배를 까고 눕기도 했다. 방금 밥을 먹었는지 통통해진 배가 보였다. 나디아가 그 배를 벅벅 긁어 주며 말했다.
“누나랑 오랜만에 보지?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누나는 우리 아담 엄청 보고 싶었는데!”
“나디아!”
나디아는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진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나디아를 봤다가, 제 뒤에 서 있는 에이든을 봤다가, 어쩔 줄을 모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디아. 와 줘서 고마워.”
“달링, 보통 초대받은 사람이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야.”
“어쨌든, 고마워.”
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고, 나디아는 가지고 온 샴페인을 그에게 내밀었다.
“빈손으로 오기 좀 그렇잖아. 곧 축하할 일도 있으니까 샴페인으로 사 왔어.”
그녀는 무심함을 가장한 채, 다정한 말을 했다. 눈치라곤 없는 진도 ‘축하할 일’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 저녁식사 때 미처 못한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결혼, 축하해.’라고.
샴페인을 보던 진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가 고맙다고 말하며 샴페인 병을 품에 안아 들었다. 진은 몇 번이나 샴페인의 라벨을 읽었고, 병의 주둥이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눈에는 감동했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샴페인이란 걸 처음 본 사람처럼 검은 눈은 환희에 차 있었다.
그는 수영을 하면서 여러 트로피를 받았었지만, 그 어떤 것도 이런 손길로 만진 적이 없었다. 이런 눈길로 바라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진은 세상 가장 값지고, 둘도 없는 것을 얻은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그리곤 가벼워진 마음으로 힐끗 제 뒤의 연인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그런 진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진이 머뭇거리다가 나디아에게 에이든을 소개 했다.
“나디아, 에이든이야. 물론 알고 있겠지만……. 에이든, 이쪽은 내가 제일 사랑하는 친구인 나디아야. 나디아 놀즈.”
어색한 소개였다.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에 에이든과 나디아 둘 다 이상한 낯을 했다. 진은 중간에서 멋쩍어 보였다. 에이든이 피식 웃다가 나디아에게 인사했다.
“에이든 테일러야. 만나서 반가워. 진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했다. 복싱장에 왔을 때처럼, 차갑거나 무표정한 낯도 아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연인의 친구에게 최대한 점수를 따고 싶어 하는 사람, 딱 그 모습이었다. 에이든이 나디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에 나디아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만나서 반갑다.”
하나도 반가워 보이지 않는 표정과 목소리였다. 악수는 1초를 채 넘기지 않았다. 악수가 아니라 손이 스쳤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았다. 나디아는 에이든의 손을 잠깐 잡고 흔들다가,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이 손을 뗐다.
그래도 그녀 역시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디아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려 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그녀는 가식적인 것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사람이었다. 나디아의 입꼬리는 부들거렸고 광대뼈는 경련했다. 그녀의 표정은 경계 어린 단모 치와와가 앞니를 드러낸 것과 비슷했다. 그녀는 치와와라고 말하기엔 몸집이 컸지만, 치와와만큼이나 성질머리는 사나우니 딱이었다.
그녀의 이상한 미소에 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이든 역시 한쪽 눈썹을 삐뚤게 들어올렸다. 두 남자는 웃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악 물었다. 진은 웃음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려는 뺨을 샴페인 병에 문댔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피식, 하니 새는 웃음에 나디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진. 너 왜 웃어?!”
“아, 아니……. 좋아서, 좋아서 웃었…….”
그 뒤로 끄윽, 하는 웃음이 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샴페인 병 뒤에 숨어서 웃었다. 미안, 미안해, 나디아. 그렇게 몇 번 중얼거리기도 했다. 옆에 서 있던 에이든은 그런 진을 보며 웃었다. 삼자대면의 첫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
진은 아담의 장난감을 정리하겠다며 잠시 마당에 남았다. 일부러일지도 모른다고, 복도를 걷고 있는 나디아가 생각했다. 에이든 테일러와 제게 감히 ‘대화’라는 걸 시키려는 속셈이 확실했다. 대화? 대화는 무슨.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걷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뭔 놈의 복도가 이렇게 길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기도 했고, 혀를 차기도 했다. 쯧, 하는 소리를 내던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 때문이었다.
액자가 참 많기도 했다. 그녀의 갈색 눈이 사진 속 진 헤니를 하나하나 훑었다. 사진 속의 진은 하나같이 밝게 웃고 있었다. 들떠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여태 굳었던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체코에서 찍은 거야. 이건 파리고. 이건 지난 크리스마스에 독일 갔을 때. 이건 아담 처음 왔을 때.”
목소리는 나디아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에이든은 사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사진을 살피던 그의 입에도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나디아는 그를 슬쩍 돌아봤다가, 인상을 한껏 찡그렸다. 에이든도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자마자 웃음기를 거뒀다.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사진을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말해 준 거야.”
“안 궁금해.”
“그래? 아닐 텐데.”
나디아가 한껏 그를 노려봤다. 에이든은 다시 무감한 낯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은 깔끔했다. 따뜻한 빛의 조명이 곳곳에 켜져 있었고, 벽 이곳저곳에는 원목 액자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대부분의 프레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언젠가 옷더미가 잔뜩 쌓여 있던 진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한쪽에 마구잡이로 펼쳐져 있던 피자 박스도 떠올랐다. 거긴 사람 사는 곳이라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진이 그때보다 훨씬 사람답게 사는 건 확실했다.
한참 걷던 두 사람의 발이 멈춘 곳은 부엌이었다. 나디아는 부엌 내부를 살폈다. 커다란 냉장고가 두 개나 있었다. 남자 둘이 사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특히나 진의 위장을 감당하려면 두 개는 기본이었다. 나디아가 냉장고 쪽으로 가깝게 다가섰다. 문에는 쪽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약속1. 갈아 둔 거 남김없이 마시고 출근하기」
「약속2. 나 출장 가 있을 때 피자로 끼니 때우지 않기(저번에 박스 버린 거 다 봤어.)」
「약속3. 저녁은 같이 먹도록 노력하기(야근이 너무 잦아, 진. 제발 빨리 와. 난 분명 외로워서 단명할 거야.)」
꽤나 닭살스러운 ‘약속’들이었다. 그것들이 적힌 포스트잇 밑으로 다른 메모들도 보였다.
「에이든, 대체 뭘 넣고 갈아야 그렇게 맛이 없어? 색깔도 이상한 것 같아. 너무 초록색이야. 가끔은 너무 보라색이잖아. 나를 독살하려는 거라면 그만 둬. 정말 맛없어. 안 먹고 싶어 :D」
「네가 출장을 안 가면 될 것 같아 :D」
「한 번만 더 단명한다고 해 봐 :D」
진의 메모 밑으로는 커다란 메모지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메모는 경고문처럼 빨간색으로 큼지막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진, :D 만 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야 :D」
“난리가 났네…….”
나디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말에 에이든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는 표정이 잔뜩 썩어서는 에이든을 돌아봤다. 그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뻔뻔하지 못한 건 방금 막 뒤따라 들어온 진뿐이었다.
“아, 이게. 이거는…….”
진이 허둥대며 쪽지들을 뗐다. 부끄러운지 귓바퀴가 달아올라 있었다. 나디아는 흐린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부엌에 따라 들어온 아담을 내려다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담, 네가 고생이 많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아담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괜찮아, 난 이미 익숙해. 그런 대답일지도 몰랐다.
“앉아, 저녁 먹어야지.”
에이든의 말을 시작으로 나름 단란한 저녁식사가 시작됐다. 어색하던 자리는 이내 진의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진이 웃으면 나디아가 퉁명스럽게 무슨 말을 했고, 에이든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밝게 웃던 진이 아쉽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알렉스는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못 왔어. 오늘 같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나디아가 에이든을 힐끗 바라봤다.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집게를 들었다. 그리곤 샐러드를 한 움큼 진의 그릇 위로 올려놨다. 나디아가 그 꼴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마 걔는 평생 동안 시간이 안 될 거야.”
“응……?”
“그러니까 그냥 물어보지를 마.”
걔가 만약 시간이 된다고 하잖아? 그럼 에이든 테일러가 시간이 안 될 거야. 너희 셋은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을 일이 없어. 그냥 그런 거야. 이 뒷말은 모두 삼켜졌다. 에이든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디아가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다 들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굳이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는 진이 앞으로 영원히 알렉스 그레이의 마음 따위, 눈치를 채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길 바랐다.
나디아는 꽤나 맛있는 음식들을 먹다가 물었다.
“이거 어디서 산 거야? 이 집 음식 잘하네.”
“아, 에이든이 한 거야.”
진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고, 나디아는 음식을 씹던 것을 멈췄다. 그리곤 옆에 앉아 있는 에이든을 힐끗 바라봤다. 에이든은 나디아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나디아는 갑자기 모든 식욕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녀는 입 안에 든 것을 느릿하게 씹었다. 저 새끼 얼굴에 뱉고 싶은데, 안 되겠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음식을 삼켜냈다.
나디아가 맛있는 음식에 자존심 상해 할 동안, 에이든은 진의 그릇 위로 삶은 콩과 잘 익은 스테이크 조각들을 올렸다. 그리곤 절반 정도 비어 있는 진의 물컵을 채웠다. 살뜰한 손길에 진이 예쁘게도 웃었다. 고마워. 그가 에이든에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진은 행복해 보였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저녁을 먹는 이 자리가 행복했다. 그리고 많이 고마웠다. 특히 기꺼이 이 자리에 함께해 준 나디아에게. 그녀가 함께 저녁을 먹지 않겠다 했으면 내내 슬펐을 게 분명했다.
“나디아, 정말 고마워.”
진이 말했고, 나디아는 이제 그만하라는 듯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진, 제발 그만해! 그만 고마워!”
“그래도 고마워.”
“아, 나 진짜 미치겠네!”
그녀가 앞에 있던 엔칠라다를 퍽퍽 썰었다. 진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괜히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였다. 진이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테이블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진의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알렉스와 셋이 있을 때랑은 또 다른 대화들이 오갔다. 나디아는 여태 경호를 맡았던 이들에 대해 말했다.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다. 대신 ‘미친놈’, ‘얼간이’, ‘또라이’, ‘빌어먹을 새끼’들로 이름이 대체됐다.
에이든은 나디아가 하는 말을 가만 듣다가, 그 가명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맞추곤 했다. 나중에는 퀴즈쇼처럼 변해서 진은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관람했다. 에이든은 나디아가 내는 수수께끼 아닌 수수께끼를 꽤나 잘 맞혔다. ‘미친놈’은 얼마 전 회사 두 개를 합병하고 콧대가 높아진 50대 CEO, ‘얼간이’는 아버지 빽만 믿고 나대는 중인 30대 벤처사업가였다. 그럼 나디아는 ‘씨발, 나 고소당하는 거 아니겠지?!’라고 말하며 뒷담화를 이어갔다. 왁자지껄했고, 유쾌한 자리였다.
식사가 다 끝나고 나디아는 아담과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놀았다. 아무래도 아담은 이 집 말고 저희 집에서 살아야겠다며, 갈 때 납치해 가겠다고 나디아가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진은 케이크와 차를 거실 테이블 위로 셋팅하며 웃었다. 두 사람만 지낼 때와는 다른 에너지가 집에 가득 찼다. 나디아 특유의 밝고 호탕한 목소리에 아담도 많이 신나 보였다.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가 거실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해가 지고, 달이 떴을 때쯤 나디아가 현관 앞에 섰다.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진보다 먼저 나와 있던 에이든이 말했다.
“오늘 다행이네. 약속을 어겼으면 여러모로 서로 더 불편해졌을 거야. 나도 사람 쓰는 거 귀찮거든.”
“짜증나니까 말 걸지 마. 줘 패기 전에.”
“정문 밖으로 나가면 검은 차가 한 대 서 있을 거야. 그거 타고 가면 돼.”
나디아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가 정말 싫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존나 싫어.”
“그래.”
에이든이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뻔뻔히 대답하기가 무섭게 진이 현관으로 나왔다. 진은 나디아를 보며 방긋 웃었다. 뒤따라 온 아담 역시 헥헥거리며 웃는 낯이었다. 나디아가 툭하니 던지듯 말했다.
“너희 신혼여행을 존나 길게도 가니까, 아담은 나한테 맡기고 가. 어차피 나 그때쯤 정기휴가 내려고 했으니까.”
“어? 아니야, 나디아! 괜찮아! 어차피 낸시라고 펫시터 친구가 있…….”
“그래, 고마워.”
진이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했지만, 에이든은 그저 고맙다고 인사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나디아가 ‘사과’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난 말실수에 대한 사과일 거였다.
그녀는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으로 잠시 푸른 눈을 흘겨봤다. 인정하긴 싫지만, 진 헤니처럼 멍청하고 둔한 놈 옆에는 저런 여우같은 놈이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나디아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진, 넌 가끔 너무 눈치가 없어!”
그녀의 말에 진이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그리곤 뒤에 서 있던 에이든에게 작게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내가 이따 따로 말해 줄게, 진.”
에이든이 목을 울려 웃었다. 진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 두 놈이 닭살 떠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 당장 떠나야 했다. 그녀는 이 집을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진의 앞으로 가깝게 다가섰다.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내 나디아가 그를 품에 가득 안았다. 그녀가 그의 넓은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진, 결혼 축하해.”
“고마워, 나디아. 정말 고마워.”
진이 그녀를 꼬옥 마주 안았다. 나디아는 괜히 콧물을 마셨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려고 해서, 그녀는 진의 등짝을 후려치며 말했다.
“아담 데리고 올 때 사료랑 장난감이랑 제대로 다 챙겨 와!”
“알겠어. 고마워, 나디아.”
“그만, 고마워, 그만!”
질린듯한 나디아의 목소리에도 진은 그저 헤실헤실 웃었다. 나디아는 결국 진 헤니 특유의 바보멍청이 웃음에 패배했다. 그녀는 졌다는 듯 한숨을 쉬다가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에이든을 발견했다. 나디아의 표정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먹은 걸 다 토하고 싶진 않으니 이제 진짜 갈 시간이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고마워’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또 다시 널따란 마당을 가로질러 걸었다. 걸음은 경쾌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발걸음이 무겁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여태 답답했던 마음이 뉴욕의 밤공기에 흩어졌다. 나디아는 옅게 웃었다. 오늘은 달도 밝고, 날씨도 좋았다. 진 헤니와 에이든 테일러가 날이 좋은 때에 결혼을 해서 다행이었다.
물론 변함없이 에이든 테일러는 싫었다. 하지만 그와 원하는 건 같았다. 나디아는 제 예쁜 동생이 언제나 웃고 행복하길 바랐다. 슬프게 상처가 난 과거는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건 앞으로의 나날들뿐이다. 과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날들을 놓칠 순 없었다.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으니까.
나디아가 생각했다. 앞으로는 진의 입에서 ‘미안해’말고 기쁨에 들뜬 ‘고마워’를 더 많이 듣고 싶다고. 온몸에 닭살이 돋고, 민망함에 손가락이 오그라들지만 그게 더 좋았다. 기뻤다.
“에이든 테일러랑 떠드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뭐……. 가끔 짜증나면 복싱장으로 불러내고, 그러면 되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시지였다.
「나디아, 네 마음 다 알아. 미안해하지 마. 괜찮아. 정말 고마워 :D」
그녀의 ‘사과’를 에이든에게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밝게 웃으며 답장했다.
「진, :D 붙인다고 다 괜찮아 보이는 거 아니거든!」
뉴욕의 밤공기가 더없이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