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LA-LA land in New York
진 헤니는 같은 페이지만 두 시간째 펴 놓고 있었다. 늦은 저녁, 책상에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은 멍했다.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 상태가 시작된 건 오늘 아침이었고, 밤 열 시가 넘어가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코칭 이론서 따위, 오늘 공부는 물 건너간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좀… 이상한가 봐.’
검은 눈이 책 위에서 흔들렸다. 흰색은 종이였고, 검은색은 글씨였고, 저는… 저는 변태였다. 할로윈 이후부터 상태가 안 좋았다. 정신이 나간 게 확실했다.
“대체 왜 그런 꿈을 꾸는 걸까…….”
정말 의아하다는 목소리였다. 이젠 혼잣말까지 하는 중이었다. 왜 그런 꿈을 꾸는 건지, 진 헤니도 알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맨날 밉다, 싫다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스스로도 알았다. 언제, 어디서든 에이든을 볼 수 있을 만큼… 자신은 에이든을 그리워해왔다. 그는 나쁜 사람이라 몇 번을 욕하면서도, 아픈 건 아닌지 매일 가슴 졸이기도 했다.
그게 스스로와 제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할 테니 절대 아니라 외면해 왔던 것뿐이지…….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눈 가리고 아웅을 해 왔던 2년이었다. 나쁜 에이든 테일러마저 인생에서 내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에게 속수무책인 건 너무 당연했다. 그러니… 그런 꿈을 꾸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 몰랐다.
“맞아… 내가 변태라서 그런 게 아니야…….”
진 헤니는 지난 밤 내내 어떤 향수 냄새에 시달려야 했다. 밤새도록 에이든 테일러의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꿈에선 안겨 있었단 게 포인트였다. 사박거리는 이불 안에서 마주 안고 있었다.
꿈속에서 에이든 테일러는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잠이 덜 깨 보였는데, 다정하게도 웃으며 머리와 뒷목을 감싸 안던 그였다. 잠에서 막 깨어나 조금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잘 잤냐고 물었고, 그제야 진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여기서 또 다른 포인트는, 이게 전부라는 것이었다. 그냥 품에 꼬옥 안겨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둘 다 옷도 잘 챙겨 입은 상태였다. 그래 놓고 변태라니, 진 헤니가 변태가 되기엔 십 년은 일렀다. 하지만 진은 심각했다. 정말 많이 심각했다. 이젠 인상까지 찌푸리며 자아성찰에 나서던 그는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진, 내일 조금 추울 것 같으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와. 야외 상영회라 밖에 오래 있어야 하니까, 알겠지? - 에이든 테일러」
“…….”
진은 핸드폰 화면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반짝하며 켜졌던 화면이 다시 까맣게 빛을 잃었다. 검은 눈이 흔들렸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그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진 헤니가 이상한 이유로 혼자 부끄러워 할 동안,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벌써 자나…? 그가 핸드폰 액정을 톡톡 치며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아서, 에이든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앞에 틀어져 있던 영화를 껐다.
그가 새로 구입한 맨하탄의 아파트는 LA에서 살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집 자체의 분위기가 다른 건 물론이고, 안을 채우고 있는 것들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휑하던 LA의 집과는 다르게, 뉴욕의 아파트는 무언가로 가득했다.
예를 들면, 지금 아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끄고 있는 블루레이 플레이어라든지… 그런 것들이 새롭게 집을 채웠다. 그는 할로윈 바로 다음 날,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모든 셋팅을 마쳤다.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있다면, 여러 영화의 블루레이 DVD가 있는 것도 당연했다. 못 봤던 영화를 몰아 보는 중이란 진의 말에 준비한 것들이었다.
조금 전까지 커다란 TV 화면을 채우던 영화는 ‘아이언맨’이었다. 분명 진은 저게 저와 잘 어울린다고 말했었는데……. 에이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잘 어울린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지만 기쁘지 않았다. 감상은 간단했다. 에이든이 보기에 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돈이 많은데, 주변에 사람은 없고, 저밖에 모르는 데다 무엇보다… 재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저렇게 보이는 거면… 안 되는데…….”
에이든 테일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던 때에 핸드폰이 울렸다. 반가운 기색으로 화면을 확인하던 그는 더 기분이 더러워져서는 화면을 껐다. 제시 제퍼슨은 많이 끈질겼다. 고개를 저으며 그가 뉴스 채널을 틀었다. 그는 뉴스를 틀어 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찬장에서 약병 세 개를 꺼내 들었다. 커다란 아파트에는 심야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스포츠 잡지, 퀸닷 스포츠가 올해의 인물로 수영선수 알렉스 그레이를 선정하면서……. ]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뉴스에 에이든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는 알약 세 개를 삼킨 뒤 TV 앞에 섰다. 채널을 돌리려던 그가 가만 화면을 들여다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던 그가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이번엔 전화였다.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하곤 또 무언가 생각하더니 통화버튼을 눌렀다.
[ 그래, 받는 게 좋은 선택이야. 일하겠다고 할 때까지 연락할 거니까. 너도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살 필요가 있어, 안 그러니? 새 삶을 얻었으니까 이젠, ]
“대신 조건이 있어요. 난 일을 최우선으로 둘 일 없어요. 다른 게 제일 먼저니까.”
화면에는 아직도 알렉스 그레이의 재수 없는 낯이 나오는 중이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훈련을 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지. 그딴 것들이 줄줄이 화면을 채웠다. 알렉스 그레이는 아주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짜증나게.
제시의 말대로 새 삶을 얻은 만큼, 이미지를 바꿀 필요는 있었다. 지금은 딱히 누구를 엿 먹일 필요도 없었고, 일부러 모자란 새끼처럼 굴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하는 일도 없는 양아치 새끼보다 뭐라도 능력 있는 사람인 쪽이 훨씬 매력적임은 당연했다.
[ …갑자기 마음이 왜 바뀌었대? 불안하게. 아무튼… 그럼 뭐가 최우선인데? ]
“있어요, 그런 게. 없으면 죽는 거.”
[ 너 지금도 반 정도는 죽어 있는 거 아니었니? 뭐, 그래. 그럼 하는 걸로 안다? 말 바꾸는 거 없어. 나 이거 다 녹음했어. ]
제시 제퍼슨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녀는 구두계약도 효력이 있는 거라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다 이제 저는 뉴욕에 안 가도 된다며 신난 목소리를 했다. 제시와의 통화가 끝나고, 에이든은 그 뒤로도 한동안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유치하고도, 일차원적인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퀸닷 정도면…….”
에이든의 한쪽 눈썹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그는 제 목표를 정하곤 피식 웃으며 TV를 껐다. 알렉스 그레이가 퀸닷에 실렸다면, 자신은 그 이상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 포브스라든지 타임지라든지……. 앞으로 제 이름을 실을 잡지며 신문을 쭉 떠올리던 그가 조금은 살벌한 낯을 했다.
지금은 알렉스 그레이가 가장 좆같지만, 사실 누구에게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됐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가 가진 안목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알았다. 제 눈에 좋고, 자신이 보기에 훌륭한 건 누가 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젠 제 몸집을 키워야 했다. 감히 제게 덤빌 수 없도록, 감히 뭣도 아닌 것들이… 진을 넘보거나 탐낼 수 없도록.
***
11월의 센트럴파크는 단풍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녹음이 우거졌던 곳은 노란색, 붉은색, 초콜릿처럼 짙은 갈색으로 색을 갈아입었다. 가을 특유의 단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이제는 조금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고, 깨끗하고도 달달한 공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진 헤니는 옅게 웃으며 여기저기를 눈에 담았다. 사박거리는 잔디에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읽는 연인들과, 이제 막 걸음을 뗀 아이가 제 부모님께 걸어가 안기는 모습. 아이는 양손을 앞으로 뻗고는 뒤뚱뒤뚱 걸었는데, 앞에 있는 엄마와 아빠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아이가 조금 휘청이면 눈을 크게 뜨다가도, 꿋꿋이 걷는 모습에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제 아이를 바라봤다.
이제 곧 추워지는 날씨에도 사방은 사랑과 생기, 식지 않는 애정으로 가득했다. 진은 밝게 웃으며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보다 슬쩍 옆을 돌아봤다. 바로 마주치는 푸른 눈에 진이 잠시 시선을 비꼈다. 어쩔 줄 모르던 진은 다시 슬며시 그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는지 모를 푸른 눈에 괜히 쑥스러워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드디어 제게 맞춰진 눈에 옅게 웃었다. 에이든의 눈이 예쁘게 곡선을 만들었다. 푸른 눈 안에는 단풍 냄새만큼 단내가 돌고 있었다. 오늘은 진의 기분이 좋아 보여, 저까지 기분이 들떴다. 이른 오후의 센트럴파크는 진이 좋아할 법한 것으로 넘쳐서, 오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칭찬했다.
“진, 춥진 않아?”
“응? 아… 안 추워!”
“이따 상영회는 해 다 지고 해서… 추울 수도 있는데.”
에이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을 살폈다. 진은 도톰한 남색 니트 하나만 입고 있었다. 에이든은 휑해 보이는 진의 목덜미를 보며 고민하는 낯을 했다. 그는 센트럴 파크와 가깝게 있는 백화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저녁까지 있기에는 옷이 얇았다. 담요 같은 게 필요했다. 백화점 1층엔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도 있으니 간식거리도 함께 사오면 좋을 것 같았다.
“진, 저쪽 나무 아래 잠깐 있을래? 나 잠깐 어디 좀 들렀다 올게.”
에이든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으라고 말한 뒤에 빠르게 사라졌다. 뭔가 급해 보였다. 진은 그 뒷모습을 보다 옅게 웃었다. 뭔가 마음이 들뜨고, 따뜻한 하루였다. 그래서 하나도 춥지 않았다.
나무 벤치로 걸어가는 잠시 동안에도 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것에 애정을 가득 담은 눈이 나무를 올려다봤다. 센트럴 파크엔 꽤나 많이 왔었지만, 한 번도 지금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때보다 지금이 훨씬 아름다웠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풀 하나하나가 생기로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예쁜 빛으로 길을 채우는 게,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뿌듯하게 웃으며 벤치에 앉아 있던 그는 갑자기 제게로 뛰어 들어오는 금색의 털뭉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나 강하게 품에 안겼는지 퍽 소리가 날 정도였다.
“잭! 그러면 안 된다니까!”
“……?!”
진에게 안겨든 건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였다. 금색의 꼬리가 붕붕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남자는 개의 목줄을 놓친 건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잭이라 불린 개는 헥헥거리고 있었는데, 그게 꼭 웃는 것만 같아서 진이 밝게 마주 웃었다. 진은 품에 콧잔등과 얼굴을 부비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이제 막 달려온 주인을 바라봤다.
“아, 죄송해요…. 얘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혹시… 만져 봐도 되나요?”
진이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주인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떨어진 허락에 진이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잭은 무슨 놀이라도 하는 줄 아는 건지, 진의 손을 코끝으로 툭툭 쳤다. 뭔가를 던져 주거나 간식을 주려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코로 툭툭 손을 건들던 잭은 제 머리 위를 가만 쓰다듬는 손길에 진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꼬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붕붕거렸다. 진은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다 품에 꼬옥 안아 주었다. 그리곤 눈을 살며시 감고는 북실북실한 목덜미에 제 얼굴을 기댔다. 그러자 잭이 뺨을 핥으려 하는 통에 진이 결국 얼굴을 뗐다.
“하하… 귀여워라. 안녕, 잭. 나도 반가워.”
“그… 진 헤니 선수 맞죠?”
“아… 네.”
이제 선수는 아니지만, 정정해 주기도 뭐했다. 진은 그냥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다시 잭을 바라봤다. 두툼한 앞발이 저를 보라는 듯 진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에 다시 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은 털이 복실한 발 위로 가만 손을 올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개의 주인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망설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사인 받을 수 있을까요…? 제 동생이 수영을 하는데 진 헤니 선수가 롤모델이라서요.”
“네…?”
사인……? 롤모델…? 검은 눈이 흔들렸다. 사인…? 사인…?! 진 헤니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거였다. 사인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적인 물음을 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대체 왜 제 이름 쓴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가 펜이랑… 그런 게 하나도 없는데…….”
“괜찮아요, 제가 있어요! 핸드폰 케이스에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개랑 산책을 하는데 펜이 또 왜 있는 건지. 진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을 몇 번 해 보지도 않았지만, 그냥 너무 부끄러웠다. 심지어 아직도 사인이랄 게 없었다. 잭의 주인은 메고 있던 작은 크로스백에서 까만색 펜을 꺼냈다. 진 헤니는 아주 멋쩍게 그 펜과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곤 눈을 꾸욱 감았다 뜨더니 언젠가처럼 정직한 사인을 시작했다.
“진?”
“아, 에이든…! 잠깐만…!”
이제 막 도착한 에이든 테일러는 벤치에 앉아서 곤란한 낯을 하고 있는 진과, 그 앞에 서 있는 남자 하나, 그리고 진의 품에다 얼굴을 부비고 있는 개새끼 하나를 바라봤다. 무슨 용건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남자는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에이든 테일러 딴에는 단순히 용건을 묻는 눈빛이었지만, 남자가 보기에는 굉장히 공격적이었던 것이다. 아니, 무슨…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게이인 것도 아니고, 방어가 과했다. 물론 진 헤니는 스트레이트가 보기에도 매력적이긴 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목구비가 굉장히 묘한데, 섹시한 그런 느…….
진을 빤히 보며 그렇게 생각하던 남자는 뜨끔한 낯을 했다. 에이든의 표정이 점점 살벌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애써 그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제게 내밀어진 핸드폰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써진 글씨를 보며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그냥 ‘진 헤니’라 쓰는 거랑 뭐가 다른지, 그게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진은 그 표정 변화를 보며 급히 입을 뗐다.
“아, 제가… 사인이 따로 없어서……. 이, 이름 쓰는 걸론 좀… 그런가요?”
“아뇨…! 아뇨,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남자는 옆에 서 있는 에이든 테일러를 힐끗 바라봤다. 그리곤 서둘러 자리를 뜨려했다. 푸른 눈이 빨리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도 꼬리가 붕붕거리고 있는 제 개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잭은 갈 생각이 없어 보여 아주 난감했다.
“잭…! 이제 가야지! 안 돼, 빨리 와.”
“잘 가, 잭. 다음에 또 보자…!”
진은 개의 머리에 짧게 입을 맞춰 주곤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금색의 털뭉치를 보며 진은 웃음을 숨기질 못했다. 나도 강아지 키우고 싶다……. 하지만 좁은 아파트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진이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키우고 싶어도 개한테 못할 짓이었다.
아쉬운 얼굴로 잭의 뒷모습을 보던 진은 제 어깨에 둘러지는 포근한 담요에 시선을 돌렸다. 에이든은 진이 앉아 있던 벤치에 앉으며, 부스럭거리는 종이봉투를 품에서 꺼냈다.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에이든은 바나나 푸딩이며 컵케이크를 봉투에서 꺼내다, 진에게 슬쩍 물었다.
“사인해 달라고 한 거야?”
“어? 아, 응…. 이젠 사인을… 멋있는 걸로 하나 만들까 봐…….”
진이 시무룩해서 에이든이 웃음을 삼켰다. 그때처럼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쓰진 않았지만, 정직한 사인인 건 똑같았다. 진 헤니의 필체는 그와 느낌이 비슷했다. 그는 딱딱하면서도 둥근 알파벳들로 ‘진, 헤, 니’를 썼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인이랑 좀 다르긴 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던 에이든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냥 만들지 마. 앞으로 사인 안 해 주면 되지.”
“응…? 그래도 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래.”
“진, 이거 바나나 푸딩 먹어 봤어? 여기 이거 유명한데.”
“바나나 푸딩…?”
대화의 화제전환이 아주 빨랐다. 앞으로 사인을 해 달라 하면 다 죽일 기세의 눈빛이었지만, 에이든은 서둘러 살벌한 빛을 숨겼다. 그리곤 컵에 담긴 포동포동한 바나나 푸딩을 진에게로 내밀었다. 커스터드 크림과 바나나, 적당히 촉촉한 빵으로 이뤄진 푸딩은 뚜껑을 열자마자 ‘나, 엄청 맛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향긋하고 달달한 바나나 냄새에 진의 검은 눈이 황홀함으로 반짝였다.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맛있었다.
에이든은 환히 웃으며 진에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베이커리에서 조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그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나나 푸딩이랑 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진을 보는 걸로 충분했다. 좋아할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에이든도 표정관리가 잘 안 됐다. 사실 관리할 필요도 없고.
“입에 맞아?”
“어, 마이어…!”
입에 우물거리고 말하느라 발음이 뭉개졌다. 진은 방싯방싯 웃으며 바나나 푸딩을 퍼먹었다. 그는 기뻐 보였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니, 어쩌다 여태 안 먹어 봤는지…. 인생을 헛산 기분이었다. 하긴… 여태 좀 헛살긴 해서 갑자기 슬펐다. 아직도 저는 못 먹어 본 것도 많았고, 못 가본 곳도 너무 많아서……. 숟가락을 물고 있는 진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에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따뜻한 커피를 조심스럽게 내밀며 말했다.
“왜…? 목말라? 여기 커피도 있어, 진.”
“응… 고마워…….”
“뜨거우니까 조심히 마시,”
“아, 뜨…!”
혓바닥을 잔뜩 데어서 눈물이 찔끔 맺혔다. 입술이며 혓바닥, 입천장까지 홧홧했다. 진의 표정이 더 시무룩해져서 에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걱정스러운 낯이었다. 그런 에이든을 슬쩍 보던 진이 별거 아니라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멋쩍은 얼굴이었다.
“아, 그냥… 앞으로 맛있는 거 다 먹어 보려면… 오래 걸리겠다 싶어서…….”
“왜?”
“응…?”
무슨 말인지 다 알면서…. 정말 왜냐고 묻는 눈빛에 진 헤니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에이든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아함에 물든 검은 눈은 푸른 눈이 가진 애정과 따뜻함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긴장도. 에이든 테일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진, 내가… 내가 세상에서 맛있는 건 전부 다 먹게 해 줄게. 내가 옆에 있으면 오래 안 걸릴 텐데… 어때…?”
“아…….”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진이 당황한 낯을 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를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검은 눈동자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한참 동안 어쩔 줄 모르던 진은 저 멀리서 들리는 영화 오프닝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이든은 눈치도 없이 시작되고 있는 영화에 어금니를 물었다.
“우, 우리 저쪽으로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응, 자리 옮기자.”
진은 벤치에 있는 걸 주섬주섬 챙겨 들고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다정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숨이 났지만, 괜찮았다. 조급하게 굴지 않기로 했는데… 자꾸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제멋대로 입을 열고 뛰쳐나가는 수준이었다.
너를 좋아해, 너를 사랑해. 같이 있어 줘. 내 곁에 있어 주겠다 말해 줘. 너도 나를 좋아한다 말해 줘. 에이든 테일러의 푸른 눈과 그가 뱉는 모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 헤니에게 매 순간 제 마음을 고백했다.
해가 짧아진 지금, 센트럴 파크는 6시만 돼도 어둠이 깔렸다. 밖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천연 조명이었다.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진 헤니가 생각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꼴이 상상이 됐다. 귀가 이렇게 뜨거운 것만 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제 귓바퀴와 뒷목이 발갛게 물들어 있다는 걸.
***
아주 절묘한 우연이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곳을 피해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잔디밭에 털썩 앉아 커다란 화면을 보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화면을 채우고 있는 영화의 타이틀에 흐뭇하게 웃었다. ‘라라랜드’였다. 사실 절묘한 우연은 아니었고, 무슨 영화가 하는지 먼저 홈페이지를 찾아본 뒤에 온 거긴 했다.
가을 밤공기 특유의 청량함이 두 사람의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진은 제 무릎 위에 있는 담요의 따뜻함에 웃다가, 휑한 에이든 테일러의 다리를 바라봤다. 슬쩍 에이든의 눈치를 보던 진이 담요를 크게 펼쳐 그의 무릎 위로도 올렸다. 다정한 손길에 에이든이 눈을 휘어 웃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뮤지컬 영화란 걸 알리듯 화려한 오프닝 시퀀스가 이어졌다. 꿈을 찾아 LA에 온 사람들의 노래가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채웠다. 진은 화면과 노래에 푹 빠져들었다. 야외 상영회라 화면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충분했다. 화면 속에 있는 인물들의 기분과 마음은 선명하게 느껴졌으니까. 저도 언젠가 LA에 갈 때, 저렇게 들뜨고 부푼 마음을 가졌던 게 떠올랐다.
진은 영화를 보면서, 보지 않았다. 화면을 보고 있는 검은 눈은 저 안의 LA와, 제 안의 LA를 오갔다. 참 대책 없던 탈출이었는데……. 밖에 가서 수영을 하고 싶다는 말로 부모님을 설득해 봤지만, 처음에는 잘 통하지 않았다. 나디아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많이 힘들었겠지.
아버지랑 싸우기도 엄청 싸워야 했다. 나중에는 서로 상처만 주는 말만 한참을 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여기서 나가는 순간, 앞으로 아들이 죽었다 생각하겠다는 그 말에… 그러라 대답하고 나왔던 때가 떠올랐다.
- 그러세요. 저는 이제 아버지 아들 아니에요. 오늘부터… 아들 죽었다 생각하고 사세요.
그렇게 말하며 집을 나서던 때, 그때 어머니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자, 어머니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가… 또 고개를 끄덕이셨다. 가라고, 이제는 가라고……. 여태 미안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눈빛에 진은 어금니를 물며 집을 떠났다. 그리고 배에 올라 한참을 울어야 했다.
섬을 떠난 날은 기쁘면서도 슬펐다. 어서 에이든을 만나서 여러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저 그거 하나만 보고 LA 땅을 밟았다. 여태 어떻게 지냈는지, 그때 섬을 떠나서는 별일은 없었는지… 상처는, 그 상처는… 잘 치료 받았는지……. 나는 네가 많이 그리웠는데, 너도 혹시 그랬는지.
막상 에이든을 보니 말을 걸기가 덜컥 무서웠다. 혹시나… 저를 기억하지 못할까 무서웠고, 기억하더라도… 정말 그 말을 지키려고 왔냐며, 저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무서웠다. 그때 꼭 그러자고 약속을 했는데… 저는 섬에서 그 약속만 보고 지낸 사람이었고, 에이든은 넓은 세상에서 저 말고도 다른 소중한 것들이 많았을 테니까. 진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멀찍이서 바라만 봐야 했다. 그거라도 해야 했다.
진 헤니의 눈앞으로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참… 쉽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에이든을 우연찮게 마주쳤던 그 밤도,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던 그 이후의 일들도.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많이 행복했고, 또 아팠다. 많이 힘들었고, 또 소중했다. 뭐라 명확하게 말하기 참 어려운 날들이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다른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말도 안 되는 그 ‘거래’를 거절할 수 있을까? 더 아프기 전에 그를 떠날 수 있을까…? 흐린 눈으로 화면을 보던 진은 제 귓가로 낮게 떨어진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진, 저기 우리 그때 갔던 데야. 네가 가자고 했던 천문대.”
“아…….”
정신을 차리고 눈에 초점을 맞추자, 화면에는 분홍색과 보라색이 가득했다. 두 주인공은 서로에게 속절없이 빠져들고,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별이 흐르는 하늘에서 춤을 췄다. 서로를 만난 것이 황홀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에이든은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실 영화에 관심 없었다. 영화를 보는 진 헤니만이 모든 관심의 중심에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의 표정이 가라앉아 있어서 에이든은 마음이 무거웠다. 힘들었던 LA를 떠올리고 있는 건지, 그럼 안 되는데…….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화면의 빛을 받은 진의 눈, 코, 그리고 얼굴의 아름다운 곡선이 반짝였다. 흐린 눈으로 진을 보고 있던 에이든이 속으로만 작게 감탄을 삼켰다. 진은 기쁠 때는 물론이고, 슬플 때마저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황홀했다.
모두가 영화의 황홀함에 젖어 있을 때, 그만이 제 옆의 사랑하는 이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진은 슬플 때도 반짝였지만, 환히 웃을 때가 훨씬 아름답다는 걸, 에이든 테일러는 알고 있었다. 에이든이 진의 귀 가까운 곳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나랑 저 천문대에 다시 가 줄래…?”
“…….”
“나… 너랑 다시 하고 싶은 게 되게 많은데, 같이 해 줄래…?”
다시 행복한 기억들로만 채워 주고 싶었다. 이전의 기억들을 지울 수 없다면, 덮어쓰기라도 하고 싶었다. 나중에는 LA를 떠올렸을 때, 그가 환히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오늘처럼 슬픈 낯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저 때문에… 전부 자신 때문이라서, 제가 다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귀 옆에서 속삭여진 말에 진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진은 바로 앞에 보이는 푸른 눈을 바라봤다. 언제나 자신이 사랑해 왔던, 그의 푸른 눈을. 에이든의 눈빛은 답지 않게 많이 절박했다. 진의 입은 굳게 닫혀 있어서 에이든이 초조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더 넓은 세상에 같이 다니기로 했었는데, 나 지금이라도 그럴 수 있을까…? 네가 여태 못 보고, 못 해 온 것들… 전부 다 내가 같이 보고, 같이 하고 싶어…….”
“…….”
“실망시키지 않을게. 내가 많이 노력하고, 내가 다 잘할게…….”
가깝게 자리한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두 사람 사이로 화면의 빛이 시시각각 다른 빛으로 빛났다. 어두웠다가, 밝았다가… 그리고 또 따뜻했다가, 차가운 빛을 뿜었다. 검은 눈과 푸른 눈이 서로를 한동안 바라봤다. 서로의 눈 안에서 답을 찾는 것처럼.
진은 푸른 눈에 떠 있는 많은 감정들을 읽고자 노력했다. 그의 눈 안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진이 알 수 있는 거라곤 딱 하나뿐이었다. 저 푸른 눈을 가까이서 볼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모두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사실, 하나.
바보 같고, 슬프고… 스스로를 힘들게만 했던 선택들이었지만, 저는 멍청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다 말하겠지만, 진은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감정에는 이해도, 설득도 필요 없으니까. 열셋, 제게 더 큰 세상의 이야기와 더 큰 세상의 공기를 싣고 왔던 저 푸른 눈을 사랑했다.
에이든 테일러가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두 사람의 코끝이 맞닿았다. 두 사람의 기다란 속눈썹이 내리깔리고,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온 상대방의 입술 끝을 바라봤다. 서로의 숨소리가, 입에서 뱉어지는 떨리는 감정이 모든 감각을 차단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서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의 입술만 보던 에이든이 슬며시 눈꺼풀을 올렸다. 에이든의 짙은 시선에 진 역시 슬며시 눈을 들었다. 치켜떠진 푸른 눈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내가, 그래도 되겠냐고. 내가 네게 입 맞춰도 되겠냐고. 그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눈빛에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이든 테일러가 조금 더 거리를 좁히려 했을 때, 진 헤니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뒤로 물렀다.
“…….”
“…….”
에이든 테일러가 얼어붙었다. 명백한 거절의 몸짓에 푸른 눈이 우뚝 멈췄다. 그대로 굳어 있던 그는 제 뺨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무언가에 정신을 차렸다. 비였다. 한두 방울씩, 톡톡 떨어지던 것은 이내 작은 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진을 바라봤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웃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아, 비… 진, 비 온다. 더 많이 오기 전에 얼른 어디 들어가자.”
진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에이든이 허둥대며 짐을 챙기는 통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진은 조금 멋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서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깔깔 웃으며 가을비를 맞았다. 조금 내리려나 싶었던 비는 이내 굵어져, 사람들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흠뻑 적셨다.
짐을 챙기고 있던 진과 에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쏟아지기 시작한 비 아래에서 당황한 얼굴을 했다.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질 만큼 내리는 비에 두 사람은 속절없이 젖을 뿐이었다.
진 헤니는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내리는 비를, 다 젖어 버린 제 옷과 머리를. 이젠 정말 항복이었다. 빗줄기 말고도 많은 것들이 진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을 더 이상 피하거나 모른 척할 길은 없었다. 저를 흠뻑 적시고 있는 감정들에, 그는 온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비를 맞고 있던 진은 제 앞에서 뭔가 망설이고 있는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는 입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 나 아파트가 여기 근처인데… 우리 옷이 너무 젖어서, 이대로 돌아다니면 감기 걸릴 것 같아. 너 괜찮으면 잠깐 들렀다가 나올까? 옷 갈아입고 다시 나오자. 바로 여기 옆이야.”
“아, 응. 그러자…! 고마워.”
“아냐, 고맙긴.”
에이든이 옅게 웃었다. 두 사람은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앞장 서 걷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은 조금씩 흐려졌다. 제 표정이 굳어가고 있는 게 느껴져서 그는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진 않아서, 그가 작게 고개를 떨궜다. 차라리 비가 내려서 다행이었다.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든 말든, 꼴사납게 울며 그에게 애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진 헤니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는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를 꼼지락거리다가, 반바지로 시선을 내렸다. 분명 저는 작은 몸이 아닌데, 에이든의 사이즈는 제게 커서 헐렁했다. 그는 멋쩍은 낯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 다음으로 씻고 나온 에이든은 부엌에서 뭔가를 달그락거리는 중이었다.
진은 어색한 낯으로 에이든의 집을 둘러봤다. 거실 테이블에는 DVD 케이스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 중에는 ‘아이언맨’, 그리고 ‘라라랜드’도 있었다. CD들 옆으로는 그가 할로윈 때 말했던 그 책이 보였다.
「데미안」
책갈피가 책의 중간쯤 꽂혀 있었다. 그것들을 훑어보던 진은 컵 두 개를 들고 오는 에이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걷던 에이든 테일러가 움찔 멈췄다. 컵에 담겨 있던 것이 조금 넘쳐 그의 손등을 적셨다. 하마터면 없어 보이게 뜨겁다고 호들갑을 떨 뻔해서 그가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뜨겁긴 뜨거웠다. 화끈한 손등을 애써 모른 척하며, 그가 컵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여기, 이거 마셔, 진.”
진은 제게 내밀어진 것에 옅게 웃었다. 마시멜로우가 잔뜩 올라가 있는 핫초코였다. 제게 따뜻한 것을 내민 남자는 아까랑 또 다른 사람 같았다. 잘 셋팅돼 있던 머리가 편안하게 내려와 있는 모습이 그와 잘 어울렸다. 에이든 역시 편안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다. 뭘 해도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편안한 모습이, 저도 편안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에이든 테일러는 핫초코를 마시는 진 헤니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따뜻한 물로 샤워도 다 했고… 옷을 얼른 입혀서 보내야 하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애매한 상태로는 아니었다. 뭐라도, 뭐라도 더 말해야 했다. 구질구질해 보여도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부릴 자존심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저기… 진, 아까는… 내가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마음이 많이 급한가 봐. 부담스러웠을 텐데… 미안해.”
“……?”
미안하다는 말에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데였던 혀를 보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핫초코를 마시고 있었는데, 말짱 도루묵이었다. 뜨거운 것이 다시 입 안을 화끈하게 만들어서, 진이 작게 인상을 썼다. 문제는 그걸 에이든 테일러가 봤다는 거였다. 그리고 아주 크게 오해했다. 진의 좋지 않은 표정에 에이든의 심장이 덜컥였다.
에이든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눈이 잔뜩 흔들렸다. 무서웠다. 이러다가… 그저 그런, 어색한 사이가 돼 버릴까 봐. 어떻게든 진의 곁에 있고 싶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로, 사랑한다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있고 싶었다.
차분하게, 멋지게 말하는 건 이제 포기였다.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서 초조하고, 절박한 목소리가 뱉어졌다. 푸른 눈이 애절하게 저를 향하는 모습에 진이 잠시 숨을 멈췄다.
“진, 나… 많이 안 바랄게. 나 절대 많이 안 바랄게……. 전처럼 좋아해 주는 거는 나… 그런 거 하나도 안 바라. 그냥…….”
“…….”
“생각보다 내가 더… 잘할 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물론 내가 전에 했던 것들 때문에 믿기 쉽지 않겠지만, 나 진짜 자신 있어. 한 번만 기회를 주면 내가 꼭… 네 마음에 들도록 할게. 후회 안 하도록 잘할게.”
애원이었다. 사랑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옆에만 있게 해 달라는 애원.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에이든은 말을 급히 덧붙였다. 뭐라도 더 말해야 했다. 제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를 소중히 생각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진, 나 네가 절대 힘들지 않게 할게. 내가 다 맞출게. 너 원하는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
“에, 에이든.”
진이 그의 말을 막았다. 에이든은 곧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라, 진은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무슨… 아니, 왜 갑자기 이러는지는 대충 예상이 되긴 했지만… 이게, 이게 아닌데. 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오해를 풀어 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에이든이 왈칵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렁그렁한 것도 같았다.
“그게… 아, 아까는… 그게…….”
“……?”
말하기가 참 난감해서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진 헤니는 분명 꼴사납게 빨개졌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려 덮었다. 진은 눈을 한 손으로 덮은 채, 입술을 꼬옥 말아 물었다. 그리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쪽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운 건지, 반대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아까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
“싫어서 그런 게 아닌…….”
아까 피한 건… 창피해서였다, 창피해서. 그리고 지금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창피했다. 손으로 눌러 덮은 눈, 손바닥 아래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정말… 미치겠네……. 진 헤니는 어디 땅굴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저를 찾지 말아 달라 손을 흔들고 이 집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진의 뒷목이며 귀가 몽땅 새빨갰다.
“…….”
“…….”
커다란 집에 정적이 감돌았다. 진 헤니는 아주 더웠다. 겨울이 다 와 가는 이때에, 반팔에 반바지였는데도 온몸이 후끈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뛰쳐나가는 게 맞았다. 속으로 5초만 세고 이 집에서 탈출을 해야 했…….
“……?!”
진은 뒷목에서 느껴지는 것에 몸을 움찔했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입술이었다. 에이든은 조심스럽게, 살포시 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뒷목에 머물던 입술은 조금 자리를 옮겨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진의 눈이 질끈 감기고 있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피부를 간질이듯 떨어지고, 그 자리마다 불이 붙은 것처럼… 아니,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감각이 울렸다.
“진…….”
“…….”
“나 좀 봐 줘.”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귓바퀴에 입 맞추며 말했다. 귀 안을 직접적으로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곤란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저에게도 들릴 정도인데, 에이든에게도 들릴 게 뻔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어깨를 움츠리던 진은 제 뺨을 감싸오는 손에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에이든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꾹 감긴 속눈썹이 흔들려서, 그 위로 입술을 내렸다. 기다란 속눈썹, 그 아래 발그레 달아오른 뺨, 오똑한 코끝까지. 언 땅위에 조용히 눈이 내리듯 이어진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졌다. 진이 슬며시 눈을 떠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코앞에서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센트럴파크에 앉아 있던 그때처럼, 많은 감정들이 푸른 눈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아까와 똑같이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눈이 말하고 있는 게 뭔지, 제게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멍청이인 저도 한 번에 알아챌 만큼 직접적이었으니까.
아까와 다른 단 한 가지는, 저를 허락해 줄 거냐는 푸른 눈에 진 헤니가 그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떴다는 거였다. 느릿하게 감겼다 떠진 검은 눈이 에이든 테일러의 눈을 다시 바라봤다. 에이든은 제게 떨어진 허락에 그대로 진을 끌어당겼다. 진의 뒷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었다.
진 헤니는 뒷목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에서부터 전신으로 열이 퍼진다고 느꼈다. 강하게 끌어당긴 것과는 다르게 에이든 테일러의 입술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짧게 머금었다 떨어지는 움직임에 입술이 저릿저릿했다.
입술끼리만 부벼지던 입맞춤은 아주 잠시 뒤에 달라졌다. 에이든이 진의 아랫입술을 혀로 핥아 올렸을 때부터였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는 진의 입술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결국 진의 입에서 짙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섰다.
두 사람의 입 안에선 핫초코 냄새가 났다. 맞닿아 비벼지는 달디 단 혀에 절로 침이 고였다. 혀는 입술 안의 여린 살을 쓸고 지나간 뒤에 강하게 얽혀왔다. 그 움직임에 진이 임상을 찌푸렸다. 뒷목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커피와 핫초코에 데인 혀가 마구잡이로 문질러지고 있었다. 입 안이 뜨겁게 달궈졌다. 혀의 뿌리와 뒷목이 모두 저릿했다. 숨이 계속 가빠지고 있었다.
애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진 헤니 하나만이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더 깊게, 깊게 혀를 밀어 넣고 빨아올리며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진의 뒷목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물론이고, 왼손은 애꿎은 소파만 뜯고 있었다. 천천히… 급하지 않게…….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어 봤지만 점점 이성이 끊어지는 중이었다.
진에게서는 저와 똑같은 향이 났다. 제 향수와 같은 라인으로 맞춰 둔 바디워시와 샴푸의 냄새가 그의 온몸에서 끼쳐왔다. 그게, 그게 정말 못 견디게 만족스러웠다. 그의 온몸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머리에 빼곡하게 들어섰다.
소파만 뜯던 왼손은 진 헤니가 입고 있는 헐렁한 티셔츠 끝자락을 쥐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커다란 손에는 핏줄이 보일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옷 속으로 당장에라도 집어넣고 싶었다. 탄탄하고 부드러운 살갗을 쓸어 올리고 싶었다. 손바닥을 펴 골반에서부터 가슴까지를 쓸면 그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터지는지를 알았다.
혀와 타액들은 한참이나 질척거리고, 젖은 소리를 냈다. 이미 단순한 입맞춤이라고 보기에 어려웠다. 입에서부터 시작된 열기는 이미 두 사람의 발끝까지 돌고 있음이 분명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붙어 있던 입을 잠시 뗐다.
탁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다. 흐리게 풀린 검은 눈을 보며 그가 말했다.
“진, 싫으면… 멈추고 싶으면, 말해. 안 할게.”
이미 열에 절어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단전 아래에서부터 긁어 올린 것만 같은 목소리가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서 나왔다.
“근데… 네가 안 된다고 말 안 하면, 나… 내가 먼저 멈출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가쁜 숨소리와 함께 뱉어진 말이, 에이든이 이미 한계까지 흥분해 있음을 보여줬다. 진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을 작게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금니를 물던 에이든 테일러가 다시 그의 입술을 삼켰다.
티셔츠 끝자락을 맴돌던 커다란 손이 안으로 들어섰다. 옆구리와 등허리를 쓸어 올리는 느낌에 진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서로의 살갗이 하나로 감겨드는 건 아닐지, 착각이 들 만큼 정신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몸이 점점 무너지고, 이제 진 헤니는 소파에 눕혀져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는 잔뜩 말려 올라간 채, 그의 잘 빠진 허리와 배를 드러냈다. 두 사람의 탄탄한 허벅지가 엇갈려 맞물리고, 에이든 테일러가 몸을 내려 하체를 밀착했을 때…….
“아……!”
“하…….”
결국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얇은 바지를 사이로 서로의 열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상체 이곳저곳을 훑던 손바닥이 통이 넓은 반바지 아래로 침입해 들어갔다. 허벅지부터 예민한 곳을 타고 오르는 느낌에 진이 몸을 뒤틀었다.
툭 튀어나와 있는 골반뼈와 단단하게 자리해 있는 허벅지 안쪽 근육. 에이든의 손가락이 그 모든 걸 확인하듯 움직였다. 절반 정도 일어서 있던 진 헤니의 성기는 허벅지로 꾸욱 압박당하는 느낌에 결국 완전히 단단해졌다. 그 기색을 알아챈 에이든이 바지 안에서 움직이던 손을 망설임 없이 더 안으로 집어넣었다.
“으응…! 아!”
하, 씹……. 진의 입에서 뱉어진 신음에 에이든은 욕을 간신히 눌러 담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곤 손을 움직였다. 이미 선단에서 투명한 물을 흘리고 있던 것이 엄지손가락에 문질러지고, 진의 허리가 들썩였다.
에이든은 나머지 손을 올려 진의 티셔츠를 밀어 올렸다. 절반 정도 말려 올라가 있던 옷은 그 손길에 의해 입은 게 무의미할 정도로 끌어올려졌다. 상체가 훤히 드러나자 에이든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졌다. 아냐, 천천히……. 그가 눈을 꾸욱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바지 안에서 움직이는 손은 멈추지 않은 채라, 진의 입에선 끊임없이 안타까운 소리가 터지는 중이었다.
“아…! 에, 이든… 바지, 하… 바지 더러워져…!”
“하, 젠장.”
험한 말이 결국 뱉어졌다, 진의 성기를 쥐고 흔들던 손이 바지 밖으로 급히 나왔다. 바지가… 하, 바지가 더러워지면 안 되지. 에이든은 아랫입술을 꾸욱 물다가 진이 입고 있던 바지를 끌어내렸다. 헐렁했던 반바지는 손쉽게 벗겨졌고, 동시에 진 헤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 덮던 진은 별안간 눈을 크게 떴다.
“아으…! 하, 아… 이거는…! 잠깐, 나 이러면…!”
성기가 습하고 뜨거운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몸이 절로 뒤틀렸다. 에이든은 진의 골반을 잡아 눌러 고정했다. 몸을 피할 수 없도록. 사납게 치켜떠진 눈이 진을 살피다가 아래로 다시 내리깔렸다. 단단하게 일어서 있던 진 헤니의 페니스가 에이든 테일러의 입 안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예민하게 부풀어 있던 끝이 울퉁불퉁한 입천장에 비벼지는 느낌에 진저리가 쳐졌다. 혀가 넓게 펴진 채 기둥을 훑어 올리다가도, 끝이 뾰족하게 세워져서는 말도 안 되는 곳을 후벼파듯 움직였다. 아래에서부터 웅웅 울리듯 쏟아지는 자극에 진의 표정이 무너졌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내려가,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는 에이든의 머리칼을 쥐었다. 뜨거운 입술과 마찰되는 느낌에 점점 아랫배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 나… 나올 것 같, 에이든… 으응! 이제… 이제 비켜…!”
진은 제 다리 사이에 있는 머리를 떼어내려 버둥댔지만, 아래에서 울리는 축축한 소리는 멈추질 않았다. 삼켜지지 못한 타액이 진 헤니의 성기를 타고 흘렀다. 타고 흐르는 그 작은 감각마저도 발끝까지 타고 흘렀다. 진의 버둥거림이 커졌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허리가 들리고, 고개가 뒤로 꺾였다. 사정감이 전신을 뒤덮고,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하으… 아! 아으응! 하… 아, 흐으…….”
허벅지가 절로 벌벌 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넋을 놨던 진은 혀가 주욱 훑어 올리며 뱉어진 성기에 몸을 움츠렸다. 그는 허리 아래가 진탕으로 녹아내리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 것처럼 눈을 떴다. 에이든의 입 안에다 사정한 게 생각난 진이 상체를 일으켰다. 휴, 휴지라든지… 뱉을 게 필요…….
“……?!”
휴지를 찾던 진은 꿀꺽 울리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놀란 표정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뿌듯해 보이기까지 해서 진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왜 먹…….”
“…….”
“뱉어야… 아윽…! 하, 아! 입… 아응! 거기 입을 왜…! 아아!”
진이 다시 눕혀진 건 순식간이었다. 허벅지 뒤가 잡힌 채, 반쯤 몸이 접힌 채였다. 진은 믿을 수 없는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이거는…! 검은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안으로 파고들려는 혀 때문에 허벅지와 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하, 하지 마…! 에이든! 이건… 아! 싫, 으응…! 이건 싫어…!”
“하…….”
싫다는 말에 에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허벅지 안쪽에 쪽쪽 입을 맞추던 그가 이를 세워 피부를 약하게 긁어내렸다. 허벅지와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진의 옆구리를 타고 올라왔다. 내내 아래에 있던 에이든도 위로 올라와 진과 눈을 맞췄다.
“왜? 별로야?”
“하… 거기 입을 왜 대…!”
“못 댈 건 또 뭐야.”
에이든 테일러가 혀로 입술을 쓸며 말했다. 푸른 눈은 거의 절반 정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진 헤니의 뺨과 목, 툭 튀어 나와 있는 쇄골뼈… 그리고 탄탄하게 벌어져 있는 가슴팍에 입을 맞췄다. 간간히 내밀어진 혀는 살갗을 맛보듯 움직였다. 에이든은 다시 상체를 세워 앉더니, 제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끌어올려 벗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몸, 한쪽 어깨를 두르고 있는 타투. 진 헤니에겐 그것만 해도 과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는데… 더 한 시각적 자극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손가락 두 개를 입으로 집어넣곤 꼼꼼히 핥았다. 아래에 있는 진과 눈을 맞춘 채였다. 위에서 펼쳐지는 선정적인 장면에 진 헤니의 넋이 나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로 예쁘게 웃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정도인데, 이건… 말도 안 됐다.
에이든은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을 입에서 빼곤 눈을 휘어 웃었다. 제게 향한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단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은 방금 전까지 그의 입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진은 아래를 파고드는 손가락에 정신을 차렸다. 꽉 다물린 곳을 뚫고 들어오는 것에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흐아… 아윽! 아!”
“하…….”
하나였던 손가락은 이내 두 개로 늘어났고, 곧 세 개로 늘어났다. 아래에선 찌걱거리는 소리와 젖은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두껍고 기다란 손가락이 안을 오갔다. 안과 밖을 찔꺽이며 오가다가도, 무언가를 찾듯 안을 휘젓기도 했다. 그리곤 손가락 세, 네 개 정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을 넣기 위해 입구를 넓혔다. 이 행위는 꽤나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진 헤니의 허리 아래가 눅진하게 풀어질 때까지.
진은 허리와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몸에서 모든 긴장이 풀릴 때까지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마지막으로 제게 안겼던 기억 그의 몸을 얼어붙게 하지 않도록. 에이든은 한계까지 일어서 있던 제 성기를 손으로 훑다가, 진에게로 상체를 내렸다.
끙끙 앓는 소리를 뱉던 진은 에이든과 시선을 맞췄다. 진의 눈꼬리와 광대뼈에 입맞춤이 떨어지고 있었다. 에이든이 진의 검은 머리칼을 슬며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진, 하고 싶지 않으면… 힘들면, 그만하라고 해. 당장 멈출 테니까. 네가 싫으면 안 해. 네가 조금이라도 힘들면 안 할게.”
“하… 아으…….”
푸른 눈이 고개를 끄덕이는 진의 상태를 살폈다. 진의 눈이 괜찮다고 말했다. 진 헤니는 알고 있었다.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기억했다가 영화를 찾아 봤을 그가 저를 아프게 하지 않으리란 걸. 언제 올지도 알 수 없는 저를 위해, 집에 핫초코와 마시멜로우를 사 놓은 그가 저를 함부로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에이든은 진의 목과 귀에 양해를 구하듯 입 맞췄다. 그리곤 페니스를 진의 몸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두꺼운 끝부분이 입구와 맞춰지고, 안으로 조금 들어서자마자 진의 몸이 긴장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몸 안으로 끼쳐들고 있었다. 잔뜩 조이는 곳에 에이든의 턱에도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아…! 으응, 너, 너무…….”
“진… 괜찮아…. 급하게, 안 할게.”
너무… 너무 두꺼웠다. 손가락으로 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전에는 저걸 몸에 어떻게 집어넣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의 눈과 입 모두 크게 벌어졌다. 밀어 넣어진 건 끝부분뿐이어서 사실 넣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에이든은 진을 달래기 위해 목과 어깨에 입술을 비볐다.
잠시 멈춰 있던 에이든은 진의 몸이 조금씩 이완되자 다시 허리에 천천히 힘을 실었다. 더 깊숙하게 진입하는 것에 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였다.
“하악…! 나, 아프… 아파… 에, 이든… 나…….”
“하…….”
에이든 테일러는 아프다는 말에 바로 몸을 뺐다. 절반 좀 안 되게 들어갔던 게 주욱 빠져나갔다. 진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자 에이든의 얼굴이 속상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눈물 흐르는 곳 위로 입술을 내렸다. 긴장으로 굳은 어깨와 허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에이든이 귀 옆에서 속삭였다. 미안해, 미안해. 괜찮아.
무언가를 받아 들인지도 너무 오래된 데다, 애초에 그런 거에 익숙하지도 않았던 몸이니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진은 저를 꼬옥 안고 토닥이는 손길에 눈을 꾹 감았다. 긴장했던 몸에 다시 안정이 찾아들었다. 적당한 무게로 내리눌러지는 몸과 코로 끼쳐 들어오는 에이든 테일러의 향기. 긴장이 풀린 진 헤니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진은 몽롱한 눈으로 제 앞에서 옅게 웃고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때 그 꿈처럼, 사방이 에이든 테일러의 향기로 가득했다. 제가 누워 있는 침대, 덮고 있는 이불…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서도. 심지어는 제 머리칼과 몸에서도 에이든의 향기가 났다. 전신을 흠뻑 적시듯이 향기가 내려앉은 아침, 창가에는 아침 해가 밝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만 깜빡이고 있던 진은 제 왼쪽 손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에이든이 손목을 조심스럽게 쓸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손목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다. 시계가 없는 게 좋았다. 진이 시간을 들여다보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꿈결 같은 장면이지만 꿈이 아닌 게, 참을 수 없이 벅찼다.
“잘 잤어?”
에이든이 진의 머리칼을 넘기며 물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 같은 모습에 에이든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예쁜 눈썹과 눈,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 쓸던 그가 진에게 조금 더 가깝게 몸을 붙였다. 단단한 팔이 진 헤니의 허리를 둘러 감았다. 어디 가지 말라는 것처럼.
몸이 가깝게 붙자, 에이든의 어깨 위 타투가 더 선명히 보였다. 진은 잠결에도 손을 들어 그 위를 쓸었다. 에이든은 상처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는 진을 보다, 그의 이마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쪼듯이 내려지던 입술은 이내 장난기를 품고 움직였다. 꾹꾹 도장을 찍듯이 얼굴 여기저기를 문대는 입술에 진이 이게 뭐냐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어서 에이든의 뺨에도 예쁜 보조개가 졌다.
“뭐 하는 거야…….”
“뽀뽀.”
대답이 너무 뻔뻔하고 심각하게 간지러워서 진의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을 살피는 진 헤니의 눈이 말했다. 낯설게 왜 이러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든 테일러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행복했다, 정말… 정말, 정말 행복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푸른 눈에는 벅찬 감정이 넘실거렸다. 제 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아름다웠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맨살끼리 부벼지는 감각은 황홀했다. 에이든은 부드러운 살결을 쓸고, 또 그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입맞춤을 내렸다. 그리곤 진과 눈을 맞추며,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진… 사랑해.”
진 헤니는 언제나 차가워 보이던 푸른 눈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뜨겁다 느꼈다. 그 눈 안의 감정들이 제게 말했다. 사랑해, 고마워. 사랑해… 사랑해……. 이제야 그가 누구인지 진 헤니는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끄러워서 자꾸 도망만 다녔는데……. 이젠 부끄러울 것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저를 사랑하는 에이든 테일러라고. 그리고 여태까지 자신이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에이든 테일러라고.
외전 2. Would you be my Santa, Baby?
사내 메신저창은 쉴 틈 없이 깜빡였다. 뉴욕에 위치한 블록체인 기업, 코어체인 파운데이션의 헤일리와 제시카는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쉬지 않았다. 둘 다 어딘가를 힐끗거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번 파일럿 실험 끝나고 하이드는 휴가 간다는 거지? - 제시카 콘웰」
「그렇대, 아무래도 곧 크리스마스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하이드 말고 지킬이 휴가 가는 거지. 오랫동안 갈 거래. 너무 좋아lol - 헤일리 베이커」
「지킬이든 하이드든, 어쨌든 둘이 하나잖아! 뭐든 얼른 좀 갔으면 좋겠어. 같이 사무실에 있으면 피 마른다고! - 제시카 콘웰」
제시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통유리로 뚫려 있는 사무실 하나를 바라봤다. 안에 있는 아름다운 남자는 살벌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아마 사탄과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왜요, 또 무슨 일인데요……. 예감이 좋질 않았다.
제시카 콘웰은 제 자리 한쪽에서 말라가는 샌드위치를 들어 올리며 우는 낯을 했다. 정말… 며칠째 집에 못 가는 건지를 모르겠네. 내 꼴이 지금 이게 뭐야……. 12월 초인 바깥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한데, 나는 이 황량한 사무실에서 다 말라가는 샌드위치라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그녀는 다 식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이거라도 마셔야 덜 퍽퍽할 것 같았다. 하긴, 샌드위치 너보다 내 삶이 더 퍽퍽하구나……. 한숨을 쉬던 제시카가 깜빡거리는 메신저창을 클릭했다.
「처음엔 뭣도 모르는 게 와서 고깝긴 해도, 일은 편하겠다 싶었는데……. 뭣도 모르긴 개뿔. 이젠 사탄이 왜 하이드랑 동업하는 건지 알 것 같아. - 헤일리 베이커」
「둘 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서. - 헤일리 베이커」
「둘이 대체 무슨 조합인가 했는데, 최악의 조합이었어. 나 이거 나라에다가 신고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을 붙여 놓는 건 불법인 것 같아. - 헤일리 베이커」
헤일리 역시 퀭한 낯으로 다 식은 카페모카를 들어 올렸다. 커피를 지금 몇 잔째 마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지금 제 피는 전부 다 커피와 레드불로 이뤄져 있음이 분명했다. 몸 한 바퀴를 다 돌아 정화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거였다.
「최악의 조합인데 밖에선 최고의 조합이라고 난리잖아, 짜증나게! - 제시카 콘웰」
「사탄이랑 하이드 전부 말도 섞기 싫어, 쳐다도 보기 싫어. - 제시카 콘웰」
「하이드 말할 때 눈빛 알잖아! 내 보고서 한 줄, 한 줄 깔 때가 최악이야. 무슨 열등한 생물이 된 기분이야. - 제시카 콘웰」
헤일리 베이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기 싫긴 한데,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악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서 요새 증권가와 업계를 씹어 먹는 건 맞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여태 알아온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아, 물론 싸가지 없는 건 똑같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했다. 특히 주식이나 증권 거래 쪽으로는 머리가 남다르게 트여 있는 수준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적임자도 이런 적임자가 없었다. 잘난 걸 알아서 더 짜증났다.
키보드를 공격적으로 두드리던 헤일리는 제 어깨를 조심스레 톡톡 치는 손길에 뒤를 돌았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하나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헤일리… 밖에 손님 오셨는데,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 하는데요…….”
“지금? 미팅은 아니고요? 하긴, 오늘 미팅 없는데?”
“네, 그래서 미리 약속 안 잡은 거면 못 만날 것 같다고 말했는데… 잠깐이면 된다고 그러는데, 어떡해요?”
누가 겁도 없이 선약도 안 잡고 에이든 테일러를 만나러 왔……. 거기까지 생각하던 헤일리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갔다. 잘못 안내하기 전에 빨리 제가 뛰쳐나가야 했다. 이거 그냥 손님이라고 응대했다간…!
헤일리가 의자를 뒤로 물리자마자 비극은 벌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신입이 하이드의 사무실을 노크했고, 손님이 왔다고 알린 모양이었다. 전화 중이던 에이든 테일러의 한쪽 눈썹이 비틀려 올라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직원이 비상 상황임을 감지했다. 헤일리의 입에서 험한 말이 터지고 있었다.
“씨발, 망했네. 이러면 안 되는데!”
“……?”
“아씨! 어쩌지?!”
에이든 테일러가 삐뚤게 웃으며 제 사무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표정이 살벌해서 헤일리는 직감했다. 이미 망했다는 걸. 아주 잘못된 판단을 한 신입 하나는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손님 아닌 손님을 데리러 간 모양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밤을 샌 에이든 테일러가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어금니를 잔뜩 문 채였다. 출입문 근처에 다다른 그가 살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문 밖의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빠 죽겠는데 어떤 씨발새끼가 약속도 안 잡고 대뜸 찾아오…….”
“…….”
좆됐다. 헤일리와 제시카는 체념한 낯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오늘은 그냥 좆된 거였다. 문 밖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진 헤니가 그 증거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얼어붙은 하이드, 아니, 에이든 테일러가 두 번째 증거였다.
“아… 미안, 에이든. 나는 그냥 여기 지나가다가… 점심은 먹었나 해서…….”
진 헤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들린 봉투를 들어 보였다. 멍하니 진을 보고 있던 에이든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손으로 제 턱 근처를 가렸다. 며칠 동안 거지꼴로 있느라 면도도 제대로 못한 상태였다. 당황한 푸른 눈이 제 티셔츠에 묻은 커피 자국을 보다, 속으로만 쌍욕을 했다.
“이거… 먹으면서 해. 나는 그럼 가 볼…….”
“아, 아냐. 진… 잠깐만 안에서 기다릴래?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어…? 아니야…! 바빠 보이는데… 갈게.”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봉투를 건넸다. 에이든은 그 봉투를 보며 뭐 마려운 개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봉투와 진, 그리고 제 티셔츠를 번갈아 보던 그가 주먹으로 입 근처를 가린 채 다시 말했다.
“진,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 안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면 안 될까…?”
간절한 부탁에 결국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색한 낯은 그대로였다. 품에 봉투를 안은 그가 에이든 테일러의 사무실로 들어가고, 에이든은 어디론가 급히 뛰어갔다.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던 에이든은 멀끔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왔다. 티셔츠도 새 걸로 갈아입었고, 턱에 물기가 있는 걸 보니 급히 면도도 한 모양이었다. 흐트러져 있던 머리도 나름 깔끔히 올라가 있었다.
급한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간 에이든 테일러는 이제 지킬이었다. 통유리로 뚫려 있어서 보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훤히 보였다. 헤일리와 제시카는 헤벌쭉 벌어진 그의 입을 보며 혀를 찼다. 둘 다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헤일리가 헛웃음을 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저 정도면 안면 근육 괴사한 거 아니야? 얼굴 흘러내린 것 같은데. 좋아 죽네, 좋아 죽어. - 헤일리 베이커」
「지킬인 시간이 오래 가면 좋을 텐데. 하이드로 돌아오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니까 :) 스위티가 오늘은 오래 있어 줬으면 좋겠다, 제발. - 제시카 콘웰」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잠시 하이드가 등장했다. 다정하게 웃으며 진 헤니와 무슨 얘기를 하던 그는 통유리 근처로 와서 섰다. 그는 손에 있는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곤 예쁘게 웃으며 유리에 탁하니 노트를 갖다 댔다.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다 그 노트를 바라보며 허망한 얼굴을 했다.
「내일, 3pm, 회의실」
사형선고였다. 선고 이후에는 안을 보지 못하게 유리에 발이 쳐졌다. 오늘은 아니라니… 다행이네. 모두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눈치를 보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두 명뿐이었다.
***
에이든이 옅게 웃으며 커피를 내렸다. 진은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질 않는 사무실을 보다가, 봉투에서 베이글과 샌드위치를 꺼내는 중이었다.
“내가 요새 일 때문에 좀 예민해서… 아까 놀랐지? 미안해, 진.”
“아냐, 내가 대뜸 온 건 맞는데, 뭐…. 전화를 하고 오려 했는데 계속 통화 중이어서…….”
요새 두 사람은 각자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에이든 테일러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던 과거의 저를 총으로 쏴 버리고 싶었다. 그때 제시 제퍼슨이 왜 그렇게 끈질겼는지, 요즘 들어 이해가 됐다. 둘이 나눠서 하는데도 일이 많았다. 그냥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절로 욕이 나오는 정도였다.
진 역시 센터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중이라 짬이 잘 안 났다. 둘이서 ‘연애’라 부를 수 있는 걸 저번 달에 시작했는데 참 슬픈 일이었다. 슬픈 일이긴 한데, 차라리 둘 다 바쁜 게 나아서 진은 나름 만족했다. 둘 중 누구 하나만 바빴다면 더 슬펐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진 헤니가 에이든의 눈치를 슬쩍 봤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기색이었다.
에이든은 방금 막 내린 원두커피 두 잔을 들고, 응접용 소파에 앉았다. 그는 저 먹으라고 사다 준 샌드위치며 베이글을 보다가 밝게 웃었다. 그 얼굴에 진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센터에서 오는 길이야?”
“아, 응. 점심 사려고 잠깐 나왔다가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요즘 계속 일정이 엇갈려서 못 봤으니까.”
에이든은 다정한 제 연인의 말에 미안한 얼굴을 했다.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는 주를 통으로 쉬려다 보니 시간을 하나도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한 주 내내 같이 있고 싶었다. 처음으로 같이 보내는 크리스마스니까 마음도 많이 들뜨고, 하고 싶은 것도 엄청 많았다.
슬프게도 진 헤니는 에이든 테일러가 무리해서라도 한 주를 다 뺐다는 사실을 몰랐다. 에이든이 시간을 내는 게 쉬운 것처럼 말한 까닭이었다. 사실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는 주는 뉴욕 센터의 선수들이 집중 훈련을 하는 기간이었는데, 아직은 보조 코치인 진은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에이든도 부득불 진과 쉬는 날을 맞췄다. 하지만 문제는 일정에 조금 변화가 있다는 거였다.
“저기, 에이든… 크리스마스 끼어 있는 주에 나 쉰다고 했던 거 있잖아…….”
“응, 한 주 다 쉰다고 했던 거?”
“어? 아, 응… 그거.”
에이든은 잘 잘려 있는 샌드위치 하나는 진의 앞으로 놓고, 제 몫의 것을 크게 베어 물었다. 진은 야무지게도 먹는 모습을 보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에이든은 뭔가 말하기 힘들어하는 진을 살피다 샌드위치를 내려놨다.
“진, 무슨 일 있어?”
“아, 그게… 사실 그때 국가대표 선수들도 훈련을 따로 하는데, 와서 참관하거나 모니터링 해 볼 생각 없냐고 그러더라고. 도움 많이 될 거라고…….”
에이든 테일러는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다 피식 웃었다. 국가대표……. 입에 있는 걸 씹는 턱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갔다. 에이든은 최대한 상냥히 웃으며 진에게 물었다.
“누가? 알렉스 그레이가?”
“응, 며칠만 가서 보려고. 코너 코치님도 오신다니까 옆에서 배울 것도 많을 것 같고…….”
이 씨발새끼가. 에이든 테일러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 새끼를 어떻게 하면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는지, 당장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맨날 고민만 하고 실행을 안 했는데, 이제는 실행을 해야 할 때가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새끼가 생각하는 게 뭔지 빤해서 같잖지도 않았다. 크리스마스에 불러내는 이유가 뭔지 안 봐도 뻔했다. 뭐라도 어깃장을 놓으려는 게 점점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언제 가는데? 내가 너한테 일정 맞출게, 진.”
“아, 그게…….”
진은 에이든의 말에 핸드폰을 꺼내더니 캘린더를 켰다. 그의 캘린더에는 총 4일이 체크돼 있었다. 무려 7일 중에 4일이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에도 동그라미가 쳐져 있어서 잠시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시 속으로 할 말을 골랐다. 그가 멍하니 뭔가를 생각할 동안에 진 헤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문제는 에이든의 귀에 입력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에이든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났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나랑 보내야 하지 않을까?’였다. 같이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인데, 이건 조금 서운했다. 사실 조금 많이. 조금도 아니고 엄청 많이 서운했다. 서운한데… 요새 진이 얼마나 열심히 센터를 다니고 있는지도 알았고, 코치 일에 진지한 마음을 가진 것도 알고 있었다. 속 좁아 보이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크리스마스만 같이 보낼 것도 아니고, 괜찮아……. 에이든 테일러가 흐리게 웃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 에이든, 그래도 괜찮을까? 이게 일정이 어쩌다 보니까… 미안해. 근데 이번 선수들이 워낙 특출 난 선수들도 많고 가서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진, 나는 괜찮아. 사실 나도 요새 일이 많았어. 너 시간될 때 보자. 그런 걸로 너무 신경 쓰지 마.”
진이 너무 어쩔 줄을 몰라 해서 에이든이 상냥하게 말했다. 진 헤니는 다정하게 웃는 에이든의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이따가 알렉스한테 가겠다고 전화해야겠다……. 이번에 훈련에 참가하는 선수들 대부분이 엄청난 실력자인 데다, 이제 막 선발돼 올라온 새로운 얼굴들이 많아서 꼭 보고 싶었다. 어떻게 경기를 준비하는지, 코치들은 각기 다른 선수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진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이든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자신은 진에게 서운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만나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서운하기는 무슨……. 아는데도 입 안이 썼다. 에이든 테일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진, 나 오늘 일 끝나고 너희 집으로 가도 돼?”
“아, 응…! 너 시간은 괜찮아…? 요새 계속 밤새도록 일하는 거 아니었어…?”
“응, 이제 괜찮아.”
크리스마스 한 주를 다 뺄 필요가 없어졌으니, 당연히 괜찮았다. 물론 그 내막을 진은 모르겠지만. 그때 4일이나 못 보는 거면 지금 굳이 만나는 걸 참을 필요가 없었다. 에이든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진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가 이어지고, 베이글과 샌드위치는 모두 두 사람의 위장 안에 얌전히 들어갔다. 에이든 테일러와 진 헤니는 서로 마주 웃고, 간간히 장난을 치며 이야기를 나눴다. 에이든은 때때로 이 순간이 꿈만 같아서 가끔 진의 손목을 바라봤다. 앞으로 평생 진이 시계를 안 찼으면 좋겠다고,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그럼 이따 봐, 진. 가기 전에 연락할게.”
“응, 이따 봐.”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진은 예쁘게 웃다가 사무실을 떠났다. 진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미어캣 같이 고개를 빼고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 진이 어색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좀 꼴불견이겠지……. 아무리 가려져 있다고 해도 다들 밖에서 일하는데……. 앞으로는 오는 걸 좀 자제해야겠다……. 진 헤니가 멋쩍게 웃으며 사무실을 떠났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스위티가 일찍 간다며 우울한 낯을 했다. 스위티… 좀 더 있어 줘, 매일 와 줘…! 매일 지킬만 있었으면 좋겠어…! 하이드 꺼져! 소리 없는 아우성이 사무실에 가득했다. 헤일리는 문을 나서는 진의 뒷모습을 보며 울망한 눈을 했다. 그녀는 아련한 얼굴로 스위티와 작별했다. 진이 완전히 나갔을 때쯤, 에이든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 모습에 헤일리가 퍼뜩 고개를 숙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가 나오자 모두 코를 박고 일하는 모습에 옅게 웃었다. 소름 돋게 예쁜 낯으로 웃던 그가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했다.
“제가 원래 크리스마스 주간이 휴가였는데, 좀 조정이 돼서요. 내일부터 크리스마스 주간까지 팀 단위로 저랑 회의 좀 하면 좋을 것 같네요. 다들 준비해 주세요.”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대답 따위를 바란 말이 아니었다. 말을 마친 에이든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쿵 소리가 나며 닫힌 문에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얼어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제가 맡은 부분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팀 단위로 회의를 하자는 말은… 팀 단위로 하나, 하나… 각개격파를 하겠단 소리였으니까.
제시카와 헤일리가 우울한 얼굴로 다시 메신저창을 켰다. 우다다다 키보드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두 사람의 뒷담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
회사 건물에서 나온 진 헤니는 알렉스 그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훈련 중인 건지 응답이 없어서 진이 메시지를 보냈다.
「알렉스, 나 네가 말한 훈련 모니터링하는 거 가고 싶어서」
「21일이랑 22일에 갈게!」
이제 우린 모두, 작은 오해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굉장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대화를 할 땐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을. 에이든 테일러가 멍한 낯으로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야 함을 생각하고 있을 때, 진 헤니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은 21일과 22일, 이틀을 가서 보고 싶다고.
한 주를 다 같이 보낼 순 없지만… 그래도 나머지 날은 같이 보낼 수 있으니까…! 이 작은 오해를 알 길이 없는 진이 뿌듯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둘이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홀리데이라 그도 마음이 많이 들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난 숙제들이 있으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센터로 돌아갈 것 같던 진 헤니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는 5번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가 있는 그 거리였다. 조금 들뜬 발걸음이 신호등을 건넜다. 날은 많이 추워져서 이제 입김이 났다. 추운데, 춥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때문이었다.
12월 초의 뉴욕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생각에 벌써부터 도시 전체가 들떠 있었다. 곳곳에는 빨간색과 초록색이 눈에 띄었다.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들은 저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분명 이 도시에서 2년을 지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를 처음 보내는 사람처럼 마음이 들떴다, 에이든을 다시 만나고 나서는 모든 풍경이 색달랐다. 색다르다기보다는, 의미가 다른 거겠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면 좋을 텐데…….”
진이 방긋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서둘러 걷던 그는 눈앞에 보이는 목적지에 결연한 낯을 했다. 그가 들어간 곳은 ‘버그도프 굿맨’으로, 뉴욕을 대표하는 백화점 중 하나였다. 건물부터가 고풍스러운 이곳은 누구나 알 법한 브랜드와, 아는 사람들만이 아는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었다. 진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도 많았다. 다른 백화점에서는 유리 케이스 안에 진열될 법한 상품들도 이곳에선 그냥 만져 보고, 들어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사실 진 헤니는 하이엔드 브랜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엄청난 샹들리에에 기가 눌렸다. 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오늘의 목표는 분명했으니, 다른 건 살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예쁘고 화려하게 진열된 가방들과 구두,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마네킹들을 지나쳤다.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가던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쥬얼리관이었다. 진 헤니는 그곳에서 남성 라인을 찾아 움직였다. 사실 브랜드 네임은 전부 생소하니까, 이름을 보고 움직이는 건 무의미했다. 진 헤니가 찾을 건 딱 하나였다.
“파란색…….”
푸른 보석이 박힌 팔찌를 찾아야 했다. 언젠가 에이든과 그날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가 환자복을 입고 바다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맸던, 둘이 다시 재회했던 그날. 대체 거기서 찾고 있었던 게 뭐냐고 묻자 에이든이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팔찌를 찾고 있었다고.
에이든이 처음에 팔찌라 했을 땐, 제가 준 그 팔찌라곤 진은 상상도 못했었다. 12달러짜리 싸구려 팔찌 하나를 찾자고 그 밤에, 아픈 몸으로 모래를 헤집고 있었다니… 말도 안 됐다. 진 헤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그저 웃었다. 그 팔찌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그 스스로만 알 수 있었으니까.
진은 에이든이 습관적으로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림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만져 보다 무언가 없는 걸 느끼고 흠칫 놀라곤 했다. 흠칫 놀란 뒤엔 진 헤니의 손목을 매만졌다. 그러고 나서야 조금 안도한 표정을 했다. 진 헤니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그에게 그 팔찌가 생각보다 큰 존재란 것만 알 수 있었다.
잃어 버렸다면, 다시 사 주면 될 일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좋은 걸로. 진은 그의 눈동자와 비슷한 푸른색을 찾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웠다. 에이든 테일러의 눈처럼 아름다운 걸 찾는 일은 행운과도 같았다. 그의 눈은 푸르다가도 때때로 회색빛을 뿜었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짙은 남색과 옅은 보라색을 띄기도 했다. 에이든 테일러의 눈동자는 모든 각도에서, 저마다의 빛으로 아름다웠다.
그때 산타모니카에서 푸른색과 회색빛을 동시에 가진 그 팔찌를 찾은 건 아주 대단한 우연이었다고, 진 헤니가 쇼윈도 안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직원이 이것저것 안내를 해 줬지만, 그의 마음에 쏙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인상을 쓰고 한숨을 쉬던 그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래, 21일이랑 22일로 알고 있을게 - 알렉스 그레이」
「22일엔 훈련 끝나고 나디아랑 같이 볼까? - 알렉스 그레이」
「크리스마스니까 - 알렉스 그레이」
원래 크리스마스는 나디아랑 알렉스랑 같이 보내던 날이었는데……. 왠지 배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진이 뒷목을 긁적였다. 그러자고 답장을 보낸 뒤에 진이 쥬얼리관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에이든에게 줄 선물을 사는 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다른 백화점에도 가 볼 필요가 있었다. 아직 크리스마스까지 시간은 많으니까 괜찮았다.
진은 아쉬운 얼굴로 백화점에서 빠져나왔다. 건물을 돌아보던 그는 오늘 밤에 집으로 온다 했던 에이든의 말을 떠올렸다. 첫 번째 숙제가 실패했으니, 이번엔 두 번째 숙제를 풀어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숙제는… 바로 풀 순 없었다. 진은 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코끝과 뺨을 문지르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 택배가 도착할 것 같긴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택배가 왔다는 메시지였다.
진은 핸드폰 화면을 빨리 껐다. 좀 부끄러웠다. 아냐, 그냥 끄면 안 되지. 다시 핸드폰을 켠 그는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삭제했다. 추위에 언 뺨은 원래도 빨갰지만, 왠지 모르게 더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두 번째 숙제를… 오늘 풀면 참 좋을 텐데. 진이 다시 센터로 향하며 생각했다. 결전의 날이라고.
***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건 진 헤니뿐만이 아니었다. 나디아 놀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선은 알렉스 그레이를 향한 채였다. 알렉스는 아주 신중하게 쇼윈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당장 나오라 해서 허겁지겁 뛰쳐나왔더니만……. 백화점에서 선물 고르는 걸 도와달란 거였다. 그녀는 안쓰러운 알렉스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야, 곧 크리스마스인데, 혼자 보내냐? 주변에 좋은 사람 하나 있는데… 만나 볼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나디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안쓰러워서 그런다, 안쓰러워서…! 차마 그렇게 말은 못하고, 그녀가 그냥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보던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나디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디아, 나는 운동선수잖아.”
“근데, 뭐.”
나디아 놀즈는 쇼윈도 안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디아는 이럴 때면 진이 좀 미웠다. 자신이 누구보다 예뻐하는 진 헤니였지만, 야속한 놈이었다. 알렉스뿐만 아니라 제게도 서운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점점 표정이 펴지는 걸 보면, 못되게도 약간의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옆에서 지 선물이나 고르고 있는 저 새끼가 얼마나 불쌍한 놈인지, 진은 상상도 못할 거였다.
“아, 운동선수인데 뭐!”
“기본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말하려는 거야.”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디아가 알렉스를 바라봤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자, 알렉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원래 경기라는 게, 끝날 때까진 진짜 끝난 게 아니야. 중간에 안 될 것 같다고 포기하면 이길 것도 못 이겨.”
“미친…….”
“그리고 난 원래 기권 같은 거 안 해. 지금은 좀… 작전 타임 비슷한 거지.”
“수영에 작전 타임이 어디 있어! 뭔 축구야?! 하,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야…….”
나디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저만 정상인 게 분명했다. 하나 같이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 주변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사랑에 영혼까지 팔 기세였다. 이미 판 것도 같았다. 그녀는 뭐 씹은 표정으로 알렉스 그레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적휘적거렸다.
“아, 거 좀… 아무거나 사, 그냥!”
“크리스마스 선물을 어떻게 아무거나 사.”
“이거 예쁘네, 이거.”
그녀가 손끝으로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대충 아무거나 가리킨 줄 알았더니, 정말 괜찮아서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겠네. 알렉스가 직원을 불러 포장을 부탁했다. 직원이 공들여 선물 포장을 하는 동안, 나디아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진은 원래 검은색 좋아해. 걔 맨날 까만색만 입는 거 보면 견적 딱 나오지. 머리랑 눈이 까매서 그런지 잘 어울리기도 하고…….”
“아, 죄송한데… 포장 너무 화려하게는 하지 말아 주세요. 부담스럽게 보이면 안 돼서요.”
“근데 보통 검은색은 좀 차가운 느낌이잖아? 왜 어울리지? 바보랑? 하긴, 애가 맨날 맹하게 헤실거려서 그렇지… 무표정할 때는 좀… 느낌이 다르긴 해. 하여튼 특이해……. 눈이 옆으로 길어서 그런가?”
“그 빨간색 끈은 그냥 묶지 말아 주세요.”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참 정다운 대화였다. 심지어 한쪽은 다른 사람이랑 말하는 중이었다. 둘 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썼다. 알렉스는 포장하는 과정까지 꼼꼼히 바라봤다. 너무 비싸 보이거나, 화려해 보이면 진이 당황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포장은 좀 심플할 필요가 있었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포장지 밖으로 벨벳 소재의 금색 리본이 둘러졌다. 그리고 그 위로 빨간색의 작은 포인트 스티커가 붙었다. 리본을 묶은 직원이 종이봉투 하나를 밑에서 꺼냈다. 작은 검은색 봉투 안에 나름 묵직한 상자 하나가 들어갔다. 봉투 입구에 금색 리본을 통과시켜 꼼꼼히 묶고 나면 포장은 끝이었다.
심플한데, 적당히 고급스러워서 알렉스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제게 내밀어진 봉투를 받으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때까지 옆에서 진 헤니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던 나디아가 말을 멈췄다. 그녀는 뿌듯하게 웃고 있는 낯을 보다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야, 너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냐?”
“뭐.”
“이거는 지금… 메달 따는 경기 같은 게 아니라는 생각 말이야.”
봉투를 들고 매장을 나서던 알렉스가 나디아를 바라봤다. 나디아 놀즈는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초록색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툭하니 던져진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모습에 알렉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디아는 괜히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난 뭐,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러네. 넌 아니면 말고.”
“…….”
“야, 배고프다. 잠깐 뭐 먹으면 안 되냐? 나도 우리 귀염둥이 줄 거 사야 되는데. 당 충전부터 하자. 어우, 당 떨어져. 네 새끼 거 골라 주느라 그런 거니까 네가 사라.”
나디아가 알렉스의 등을 툭툭 치며 발을 옮겼다. 알렉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흐리게 웃었다. 그리곤 제 손에 들린 걸 다시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까 조금 호불호가 갈릴 물건이기도 해서 고민이 됐다. 제 딴에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걸 줘야, 틈틈이 제 생각이 날 것 같아 준비한 거긴 한데……. 진이… 시계를 별로 안 좋아하면 어쩌지. 알렉스 그레이는 잠깐 생각하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빨리 와! 죽고 싶냐?”
“하… 간다, 가.”
알렉스 그레이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 그 봉투 속에선 검은색 시계가 주인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샤워기가 틀어져 있었는데, 그 아래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몸을 씻는 거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욕실 안에 있는 거울은 이미 수증기로 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였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뜨거운 물과, 두 사람의 입에서 뱉어지는 숨으로 욕실 안은 희뿌연 수증기가 가득했다. 물줄기가 툭툭 소리를 내며 살갗을 때리고 지나갔다. 진 헤니는 제 갈비뼈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확인하듯 움직이는 손길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입을 얼마나 맞대고 있었는지, 윗입술이 조금 아린 것도 같았다. 진 헤니는 제 앞에 있는 아름다운 연인의 뒷목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금색의 뒷머리칼을 그러잡다가도 물에 젖어 있는 앞머리를 뒤로 넘겨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입맞춤은 깊어졌고, 에이든 테일러의 손과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엇갈려 있던 두 사람의 허벅지가 더 꽉 맞붙었다. 진의 상체에서 한참을 머물던 손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의 허리와 엉덩이를 쥐고 있는 손에는 힘줄이 돋을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강한 힘으로 밀착돼, 진 헤니와 에이든 테일러의 단단한 몸 사이에는 한 치의 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으응…!”
“하…….”
근육이 잘 짜인 아랫배 사이에서 둘의 성기가 문질러졌다. 예민한 살갗이 비벼지고 맞닿아 문대지는 감각에 허리가 저릿저릿했다. 에이든은 양손을 모두 내려 진의 엉덩이를 쥐곤 진의 귓가에 입 맞췄다. 제 귀와 가깝게 붙어 있는 에이든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터지고 있었기에, 진은 점점 애가 타고 있었다.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는 손이 강한 힘으로 쥐어 벌릴 때마다 더 애간장이 녹았다. 빨리, 그냥 빨리……. 진 헤니의 손이 에이든 테일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진의 목에 고개를 박고 있던 에이든의 턱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 고민하듯 눈을 꾹 눌러 감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진의 어깨에 입 맞추던 그가 뒤에 있던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단단하게 일어서 서로 문질러지던 성기가 이젠 에이든의 손바닥 안에서 강하게 압박됐다. 진의 아랫배가 거친 숨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진은 작게 인상을 쓰다 에이든의 손 위로 제 손을 내렸다.
“에이든, 아…! 이거, 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삼켜졌다. 잠깐만…! 젖은 소리를 내며 손이 움직일 때마다 진의 허리와 엉덩이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아니, 이것도 좋기는 한데…! 맞닿은 입에서는 진의 끙끙거리는 소리와 에이든이 낮게 신음하는 소리만 오갔다. 진 헤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아!’ 따위가 아니었음에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차오르는 사정감에 진의 다리가 바르작거리자 손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이게,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는데, 몸으로 끼쳐드는 감각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은 결국 고개를 젖힌 채 절정을 맞았다. 예민하게 달궈진 성기는 사정 이후에도 마찰돼서 욕실 안에는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으응…! 하, 아! 아윽… 에이든…!”
“하… 잠깐만…….”
“아니, 그게 아닌… 아!”
이대로라면 평소랑 똑같은 엔딩이었다. 잠깐 기다려 보라 말하려던 진은 이미 제 배와 에이든의 배에 뿌려진 체액에 포기한 얼굴을 했다. 오늘도 숙제를 풀기엔 글러먹은 것 같았다. 에이든이 진의 뺨과 목에 입 맞췄다. 그리곤 정액으로 더러워진 진의 몸을 씻겨 주는 동안, 진 헤니의 머릿속엔 오늘 도착한 택배 상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큰맘 먹고 윤활제를 사도, 쓸 일이 없으니…….
에이든 테일러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삽입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진이 아파서 눈물까지 흘리는데, 굳이 할 필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조금 참아 보라 할 생각도 없었고, 하다 보면 익숙해질 테니 견뎌 보라 할 마음도 없었다. 안 하면 됐다. 물론 강한 충동이 머리에 시시때때로 들어찼지만 참을 수 있었다. 진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에이든이 그렇게 생각할 때 동안, 진의 고민은 깊어졌다. 서로 살을 맞대고 만지는 걸로도 좋았지만, 이걸론 좀 부족했다. 전에는 분명… 전에는 다 들어갔었으니, 지금도 조금… 그, 일단 시도를 해 보다 보면… 다시 잘 될 거였다.
진 헤니 역시 아주 혈기왕성한 나이의 성인 남성이었고, 연인과 나눌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도 직접적인 스킨십을 원했다. 섹스가 전부는 아니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부끄러울 만큼 솔직한 감각들을 나누길 바랐다. 맨살로, 남들과 나눌 수 없는 가장 깊숙한 것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예상은 갔다. 에이든은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하다가 울기까지 했으니, 배려해 주는 게 분명했다. 저를 배려해 주는 건 좋은데… 마치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포기하는 건 싫었다.
힘든 시간을 거쳐 만났으니 이제는 평범한 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아직도 2년 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제게 미움 받을까 불안해했고, 그것들은 저와 에이든 사이에 얇은 벽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도 모르는 게 산더미였다. 차라리 혼자서 그를 졸졸 따라다닐 때가 더 많은 걸 알고 있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진은 약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제 몸에 둘러지는 커다란 타올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에이든은 작은 타올로 진의 머리를 문질러 말리는 중이었다. 정성스럽게 손을 움직이던 그가 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밝게 웃었다. 진 헤니도 그저 마주 웃었다. 웃긴 웃는데, 속은 복잡했다. 표면적으로는 ‘삽입섹스’라 보일 수 있는 이 숙제는, 진에게 있어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아주 중요한 숙제였으니까.
“진, 이제 나갈까?”
“응, 그러자.”
샤워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커다란 몸 둘이 눕기에는 약간 좁지만, 아늑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사실 에이든은 좁은 이 침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꼭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품 안에 있는 진의 몸이 뜨끈뜨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에이든이 그를 더 꽉 껴안으며, 아늑한 집 안을 둘러봤다.
진 헤니의 집은 여전했다. 진은 청소와 정리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책상에는 책과 노트가 마구 쌓여있었다. 그 옆으로는 프링글스 몇 통과 초콜릿 박스가 보였다. 에이든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진이 불량식품 같은 것만 먹어서, 그는 걱정이 많았다.
진은 먹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끼니를 잘 챙겨 먹거나 요리를 직접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끼니는 매번 샌드위치나 베이글로 때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에이든이 작게 한숨을 쉬며 진의 머리칼을 쓸었다. 머리카락을 빗어 주는 손길에 잠이 오기 시작해서, 진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에이든, 나…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고 싶어. 브라이언트 파크에 크게 열리는 거 있잖아, 그거.”
“그래, 어디든 다 가자.”
“오후엔 밖에 돌아다니다가 해 지면 맛있는 거 사서 들어오자. 집에서 영화도 보고…. 에이든, 너는 하고 싶은 거 없어?”
진의 목소리가 점점 잠에 잠기고 있었다. 그 기색을 알아챈 에이든 테일러가 웃음을 삼켰다. 머리를 빗어 주는 손은 멈추지 않은 채라서 진이 넓은 품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 결국 에이든의 입 밖으로 웃음소리가 샜다.
“나는 진 너랑 같이 하는 거면 다 좋아.”
“나도 다 좋아…….”
작게 웃던 에이든이 이번엔 책상 옆 책장을 바라봤다. 책장 한 칸에는 책 대신 액자 하나가 서 있었다. 액자 안에는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 끼워져 있었다. 인어였다. 푸른 바다 위에서 헤엄치고 있는 인어. 빤히 그 그림을 보던 에이든이 진을 내려다봤다.
“진, 저 그림은 누가 그려 준 거야?”
“응……? 아, 저거. 애기가 그려 줬어….”
“애기……?”
잠에 취한 진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애기라는 말에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다시 액자로 시선을 돌렸다. 인어……. 에이든은 피식 웃으며 진에게 말했다.
“나도 예전에 인어 그림 많이 그렸는데.”
“응……?”
“헤엄치는 인어는 아니고, 모래사장에 앉아 있는 인어긴 했어.”
진은 에이든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노곤하게 풀어진 검은 눈에 궁금증이 서렸다. 에이든이 그런 진의 눈 위로 입을 맞췄다.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에이든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진, 네가 날 구해줬을 때 있잖아. 난 그때 물에서 인어를 봤다고 생각했어.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어.”
에이든의 머릿속엔 과거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진을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몇 번이고 흰 벽에 그림을 그렸던 예전이 떠올랐다. 그때 보았다 말했던 인어는 헛것이 아니었다. 지금 제 옆에, 제 품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증거였다. 작은 몸으로, 험한 파도를 뚫고 저를 구해준 사람.
“내 인어인데…. 함부로 그리는 건 안 돼. 애기라고 해도 봐주는 건 없어, 진.”
짓궂은 목소리였다. 그 말에 진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이었다. 피식 웃던 진은 조금 더 에이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곧 잠들 게 분명했다. 에이든은 저 아래에 있던 이불을 더 위로 끌어올렸다. 진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준 뒤엔 꼭 감겨 있는 눈 위로 짧게 입을 맞췄다. 눈에 떨어진 입맞춤에 별안간 진이 번쩍 눈을 떴다. 뭔가 좋은 생각이 생각난 것처럼 진이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 같이… 만나러 가는 게 좋겠어.”
“누굴?”
진은 대답 없이 밝게 웃었다. 에이든은 해사하게 피어나는 진의 얼굴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푸른 눈이 황홀하다는 빛으로 연인을 바라봤다. 진이 그런 에이든의 뺨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21일 오후에 시간 괜찮아…?”
“나는 언제든 괜찮아. 진, 너 그날 센터 간다고 했던 날 아니야?”
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응, 오후에 잠깐 누구 만나려고 했는데… 너한테 소개시켜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같이 점심 먹자.”
에이든은 잠시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푸른 눈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곤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는 잠기운에 눈을 감았다. 에이든 역시 제 품 안으로 더 파고드는 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21일은 아예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잠깐이라도 봐서 기쁘다고 생각하면서.
***
12월 21일, 사방에서는 캐롤이 울려 퍼졌다. 연휴가 끼어 있는 달은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에이든은 곧 내려간다는 진의 메시지를 확인하곤 센터 정문을 바라봤다.
진을 다시 만난 지 이제 세 달이 지나가는데, 매일매일 많이 설레고 가슴이 뛰었다. 처음엔 심장이 아파서 고장이 났나 싶었는데, 그냥 진을 생각하면 고장 난 것처럼 뛰는 것뿐이었다. 세 달이든, 삼 년이든 앞으로도 쭉 그럴 예정이었다.
에이든은 들뜬 마음을 숨길 수가 없는지, 결국 기쁜 낯으로 웃었다. 자꾸 바보처럼 웃음이 났다. 못 보는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날 수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추운 날씨에 입김이 나고, 손끝이 조금 얼긴 했지만 마음이 따뜻했다. 이런 게 ‘행복’인 것 같다고, 에이든은 시시때때로 깨달았다. 느껴 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가능하다면 평생 느끼고 싶었다.
그의 푸른 눈이 문에 틀어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제 사람을 기다리기도 잠시, 이윽고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이가 보였다.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 예쁘게도 휘어졌다. 그는 진을 보자마자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
“선생님!”
옆에서 들린 앳된 목소리에 에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진을 부른 또 다른 사람도 에이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두 사람의 파란색 눈이 옅은 경계의 빛으로 서로를 살폈다. 백팩을 추켜올리던 진 헤니는 계단을 내려오다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곤 급한 걸음으로 호다닥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토미…! 선생님이 그쪽 센터로 간다니까 왜 여기 와 있었어. 추운데…!”
“점심에 갑자기 엄마가 오신다고 해서… 그냥 도망쳐 나왔어요…!”
당연히 작은 아이 쪽이었다. 토미는 옆에 서 있는 에이든을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진은 얼어있는 아이의 뺨과 손을 매만져 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한창 클 때라 그런지 못 본 새에 키가 많이 자라 있어서 괜히 저까지 뿌듯했다. 토미는 아주 귀여운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진 헤니는 뺨이 발갛게 얼어 있는 아이가 마치 눈사람 같다고 느껴졌다. 품에 안으면 녹는 건 아닐까…?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정말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안아 주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어서, 결국 진이 아이를 품에 가득 안았다.
“토미, 해피 홀리데이.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토미도 방싯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사랑스러워라……. 진의 입이 거의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한참을 헤실거리던 진 헤니는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 하나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저 아래에 있는 작은 아이 하나랑 진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고 있어서 진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인사부터 해야 했다.
“아, 에이든…! 이쪽은 토미야. 내가 오늘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했던……. 토미, 이쪽은 에이든 형이야. 선생님이… 사랑하는 사람.”
진의 어색한 소개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두 사람 다 사람에 대한 경계가 강했고, 무엇보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물론이고 아주 어린 토미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저 사람이… 저와 비슷한 사람이란 걸.
***
“오…! 또 그림책 한 권 다 썼구나? 기특하기도 해라.”
편안한 분위기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토미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섬주섬 제 그림책을 꺼내 진에게 내민 참이었다. 그때 다 너덜해진 것과는 다르게 빳빳한 새 스케치북이었다. 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한 장, 한 장 토미의 그림을 감상했다.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해도, 토미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인 건 알 수 있었다. 역시 누텔라 성이랑 갈기 달린 용을 그릴 때부터 범상치 않았어……. 진 헤니는 거의 아들바보 같은 마음가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매일 열심히 그려서 그런지, 조금씩 그림이 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토미, 이 그림은 바다야?”
“네…! 바다예요! 주황색 바다. 환타라서 그래요. 오렌지 환타 바다에는 오렌지 맛만 살 수 있는데, 여기… 요쪽에 보면 보라색이 포도 맛 게예요. 숨어 있는 중이에요. 오렌지 가재한테 선물을 주고 싶은데, 자기가 안에 들어가면 바닷물 색이 섞여서 못 가고 있어요.”
오렌지 환타 바다에는 해마 젤리들이 떠 있었다. 전부 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물고기들 가운데에 혼자 떨어져 있는 보라색 게 한 마리가 보였다. 게는 슬프게 우는 모습이었는데, 토미 말을 듣자하니 친해지고 싶은 가재가 있어도 안에 가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예술 세계는 심오했고, 동시에 솔직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설명을 듣던 진이 아이를 보며 옅게 웃었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는데… 쉽지 않은 거구나. 진은 혼자 구석에서 울고 있는 보라색 게를 손가락으로 가만 쓸어주었다.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고 있었다. 토미는 낯을 많이 가려서… 새로 적응하기 쉽지 않을 텐데…….
“토미, 요즘엔 수영하는 거 어때? 괜찮아…?”
“아… 괜찮아요…! 그냥 여태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여태 하던 대로 하는 게 안 괜찮은 거라, 진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토미는 선생님의 표정이 슬퍼지는 걸 알고는 방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번 경기에서도 1등이었고, 엄마아빠도 이번엔 잘했다고 하셨고……. 가끔 선생님한테 그림도 보여 드리고… 그래서 저는 엄청 좋아요! 그림책은 비밀이라서 혼자만 알아야 했는데, 선생님이랑 말하면 더, 더 재밌어요!”
에이든은 옆에 있는 진의 표정이 점점 슬퍼지는 걸 알았다. 여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그는 진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그림책을 가져왔다. 토미는 제 그림책을 가져가려는 에이든 테일러를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한테나 보여 주는 거 아닌데……. 아이의 푸른 눈이 보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뾰족해진 눈빛에 에이든이 피식 웃었다.
듣자 하니, 대충 상황이 파악이 됐다. 수영을 하는 아이인데, 그림을 그리는 건 비밀이고. 저번 경기‘도’ 1등이었다고 하는 걸 보니… 수영을 꽤나 잘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수영만 시키려는 거였고. 그것부터가 영 별로인데, 심지어는 1등을 해도 칭찬에 박한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그림 속, 울고 있는 보라색 게를 보다가 에이든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환타 오렌지 맛이랑 포도 맛 섞어 먹어 봤어?”
“……?”
갑자기 던져진 아주 이상한 물음에 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토미도 대체 뭔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에이든만 뻔뻔한 얼굴이었다. 그는 뭔가 생각하더니 지나가는 서버를 불러 세웠다.
“환타 오렌지 맛이랑 포도 맛 하나씩 주세요.”
“에이든…?”
“사실 나도 섞어 먹어 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네.”
주문을 하기가 무섭게 컵과 음료 두 잔이 나왔다. 에이든 테일러는 빈 컵 하나에 두 음료를 부었다. 색깔이 아주 이상해지고 있었다. 토미는 앞에 앉아 있는 형의 이상한 짓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든은 음료를 섞은 컵을 토미에게 내밀었다.
“색이 이상하긴 하네……. 마셔 봐.”
아이에게 내밀었던 컵은 진 헤니가 다시 수거해 왔다. 진이 눈으로만 에이든에게 물었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냐고. 에이든은 그 눈빛을 읽고는 진의 손에 들린 컵을 뺏어 그대로 제 입에 가져갔다. 작은 컵 절반 정도 담겨 있던 요상한 색의 음료는 에이든 테일러의 목으로 모두 넘어갔다.
“……?”
“……?”
에이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다 마신 컵을 내리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제 앞에 있는, 푸른 눈을 가진 아이에게 말했다.
“색은 좀 별로긴 한데, 맛있네. 음료수는 눈으로 마시는 거 아니고 입으로 마시는 건데, 색이 뭔 상관이야.”
“…….”
“넌 왜 먹어 보지도 않고 그래. 안 좋은 버릇이네, 고쳐.”
토미가 놀란 표정으로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봤다. 진 헤니는 그제야 그가 뭘 말하려는 건지를 깨닫곤 웃음을 숨겼다. 참… 에이든 테일러다운 방식이었다. 누구를 위로한다는 것 자체가 그답지 않아서 이 상황이 낯설기도 했다. 그는 용기를 가지고 친구에게 다가가 보라는 다정한 위로 대신, 직설적이고 냉정한 충고를 택한 거였다. 맛있으면 됐으니까, 그냥 섞으라는 소리였다. 먹어 보지도 않고 왜 그러냐니……. 정말 엄청난 위로였다.
“토미, 섞으면 더 맛있대…….”
“아…….”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쓰고 있던 모자의 방울이 달랑거려서 결국 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 내 웃던 진 헤니가 옆에 앉아 있는 제 연인을 바라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저를 보며 웃는 진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곤 저도 피식 웃었다. 네가 웃으면 됐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에이든 테일러의 위로 아닌 위로는 계속됐다. 진 헤니가 전화를 받느라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에이든은 토미를 빤히 바라봤다. 왜 소개시켜 주고 싶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에 대한 경계와 겁, 위축된 푸른 눈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본 것 같은 걸 넘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야, 너네 엄마아빠가 그림 그리지 말래?”
“…….”
묻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토미는 별 대답 없이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작은 아이는 제 손에 비해 커다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었다. 하지만 잘 썰리지 않는 건지 낑낑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든이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여덟 살짜리 애한테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에이든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무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가서 좆 까라고 해.”
“…….”
“대신 살아 줄 거 아니면 꺼지라고. 네 인생이지 너네 엄마아빠 인생이야? 너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손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빼앗았다. 커다란 손이 익숙하게 토미 앞의 고기를 썰었다.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인생을 거의 평생 동안 살아왔는데, 유쾌하지 않았다. 그건 정말 좆같은 일이라 굳이 권하고 싶진 않았다. 진이 아끼고, 예뻐하는 아이라면 더더욱. 진은 저 푸른 눈을 가진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저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래도 너는…….”
“……?”
“여덟 살 때부터 인생에 진 헤니가 있잖아. 운 좋은 줄 알아.”
부럽네. 에이든 테일러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표정이 씁쓸했다. 토미가 힐끗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두 사람의 푸른 눈이 잠시 마주쳤다. 에이든 테일러는 고기를 다 썰곤 포크를 토미에게 내밀었다. 토미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 포크를 쥐었다.
“많이 먹고 잘 커야 엿도 먹이고… 뭐, 그러는 거지. 지금은 네가 좀 작아서 무리고…….”
“…….”
“내가 이런 말한 건, 네 선생님한테는 비밀이야.”
“네……!”
여태 에이든의 말에 아무 대답이 없던 토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색하게 웃던 아이는 포크로 커다란 고기를 푹 찍더니,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제게 내밀어진 포크를 보며 에이든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이상해서, 이상한 표정이 지어졌다.
“나 먹으라고?”
“네… 제일 큰 거예요…!”
토미의 파란 눈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겐 이 정도만 해도 큰 용기를 낸 거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고기를 빤히 보다가 포크를 받아들었다. 토미는 뿌듯한 표정으로 에이든이 고기를 먹기를 기다렸다. 파란 눈이 반짝거려서 에이든이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다가 토미에게 말했다.
“진한테 인어 그림 그려서 준 거, 너지?”
“아, 네……!”
“곤란하네.”
에이든은 곤란하다고 말한 뒤에, 제게 내밀어진 포크를 바라봤다. 그리곤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포크를 받아 들었다. 토미가 그런 에이든에게 방긋 웃어보였다. 에이든은 피식 웃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 그림을 그린 ‘애기’가 이 아이라면 좀 너그러워질 의향이 있었다.
“특별히 봐줄게. 네가 하나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난 원래 누굴 봐주고 그런 사람이 아니야.”
“……?”
“그리고 진이 그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이번만 넘어가 주는 거야.”
에이든이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토미는 작게 웃었다. 이미 마음이 활짝 열린 아이에게 에이든의 표정은 장난스러운 얼굴일 뿐이었다. 아이는 아주 작은 관심과 위로에도 금방 마음을 열었다. 애정이 고프고, 사랑에 취약해서. 에이든은 저를 빼다 박은 것 같은 아이를 보다 입에 스테이크를 넣었다. 아이의 푸른 눈이 제 앞에 있는 형을 보며 예쁘게 휘어졌다. 비밀을 또 나눌 사람이 생겨서 기쁘다는 듯이. 맑게 웃고 있는 아이를 보다 에이든이 되물었다.
“너네 엄마아빠한테 뭐라고 하라고?”
“아… 그, 좆 까라고요…!”
“그래, 잘했어.”
에이든 테일러도 뿌듯하게 웃었다. 통화를 끝내고 안으로 들어오던 진 헤니는 마주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저 없는 동안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진이 생각한 방향과는 다르게 친해졌지만, 어쨌든 친해진 건 맞았다. 진은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소개시켜 주길 잘한 것 같았다.
흐뭇하게 웃던 진은 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토미에게 내밀었다. 고급 스케치북 몇 권과 물감, 크레파스와 색연필이었다.
“토미, 이거는 선생님이 주는 선물이야.”
“우와……!”
“메리 크리스마스.”
토미는 밝게 웃으며 그것들을 품에 안았다. 비싼 것도 아니고, 대단한 선물도 아닌데… 아이가 너무 기뻐해서 행복한 동시에 안쓰러웠다. 진은 괜히 시큰해지는 코끝에 뒷목을 매만졌다. 에이든은 눈물이 맺히려 하는 검은 눈을 보다가 옅게 웃었다. 진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랑도…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토미를 다시 센터에 데려다 준 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었다. 진은 에이든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고, 에이든은 그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진이 생글생글 웃자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진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상처받은 얼굴로, 안쓰러워 보이게.
“아까 나는 아는 척도 안 하던데… 난 내가 투명인간이라도 된 줄 알았어…….”
“응……?”
“아냐, 그럴 수 있지 이해해……. 자주 보다 보니까… 이젠, 뭐… 그럴 수도 있지.”
깊은 한숨 소리에 진이 뜨끔한 얼굴을 했다. 걸음을 잠시 멈춘 진 헤니가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달싹였다. 정말 당황한 것 같아서 에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난을 더 쳤다간 정말 미안하다고 할 것 같아서, 에이든이 작게 한숨을 쉬며 진의 앞에 섰다. 진 헤니와 마주 선 에이든 테일러가 진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도 너 같은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물론 딴 마음만 엄청 먹었겠지만.”
능청스럽게 뱉어진 말에 진이 그를 흘겨봤다. 에이든 테일러가 환히 웃자, 진 헤니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은… 자기 얼굴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 자신의 얼굴과 저 표정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는 거였다. 아름답고, 야하게 보인다는 걸 알고 저러는 게 확실했다.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어감이 좋은데… 아쉽네. 아니지, 아쉬울 건 없지.”
“하지 마…….”
“왜? 그냥 좋다는 건데. 무슨 생각해?”
에이든 테일러가 짓궂게 웃었다. 둘은 그 뒤로 작게 티격태격하며 걸었다. 농담으로 해 본 말인데, 정말 생각보다 어감이 괜찮아서 에이든의 장난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러다간 정말 언젠가 침대 위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를 기세라 진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선생님, 저는 선물 없나요?”
“에이든…….”
“선생님, 그런 목소리로 부르시면 제가 좀 곤란한데…….”
날은 추웠고, 두 사람의 마음은 따뜻했다. 지금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안고 가는 아이의 마음도 따뜻할 게 분명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가 지낸 겨울 중에, 이렇게 춥지 않은 겨울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이든, 근데 아까 그거 진짜 맛있었어…?”
“아니, 맛없었어. 이상한 맛이야.”
한참 장난을 치던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손을 잡고, 그의 손등 위로 제 입술을 내렸다. 그의 존재와 삶에 대한 찬미의 의미로. 이 세상에 내려온 축복 같은 사람. 그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보다 더, 선물 같은 사람인 그를 향한… 찬미.
***
12월 22일, 진과 나디아는 알렉스의 집에서 간단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집주인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셋이서 저녁을 먹기는 오랜만이었다. 원래는 틈틈이 만나고 또 만났는데, 진 헤니의 상태가 안정된 뒤로는 만나는 게 많이 뜸해졌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에이든 테일러가 생긴 뒤로 셋이서 만날 일은 많이 없었다.
“달링, 나는 달링 눈이 세 개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두 개네?”
“응…?”
“얼굴 까먹겠다고, 이 자식아! 어?!”
케이크를 자르고 있던 진은 등짝을 맞아야 했다. 나디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랬다. 서운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해서 진은 그냥 묵묵히 등을 맞았다. 나디아에게는 빚진 것들이 많았다. 앞으로 평생 갚아도 부족할 만큼.
“진, 그거 알아…? 나는 가끔 자다가도 울분에 차서 깨! 내 아파트로 그 커다랗고 뒤지게 무거운 박스가 도착할 때의 꿈을 꿔!”
“미안해…….”
“내 마음에 큰 짐을 지워 놓고, 행복하지 않기만 해 봐. 그때도 말했지?! 진, 나 총 엄청 잘 쏴. 잊지 마.”
진은 레드벨벳 케이크를 크게 한 조각 잘라 나디아에게 내밀었다. 예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나디아는 기가 찼다. 원래도 난처할 때면 웃어넘기는 버릇이 있긴 했는데, 지금 건 결이 달랐다. 이거… 여우같은 새끼랑 붙어 있다 보니 점점… 비슷해지는 것 같은데…….
“진,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안 돼.”
“……?!”
“결혼은 안 돼. 걔가 무슨 말을 하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나디아가 진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이 상태로 가다간 그 불여시 같은 새끼가 이 멍충한 놈을 낚아갈 게 분명했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것만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지금은 에이든 테일러가 전과 조금, 그래… 많이 다른 건 알지만 그래도 맘에 안 드는 건 매한가지였다. 나디아가 대답 없는 진 헤니를 노려보고 있던 때,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미안. 생각보다 인터뷰가 길어져서.”
“어서 와, 알렉스.”
“야, 빨리 와. 배고파.”
알렉스 그레이가 입고 있던 코트와 머플러를 벗으며 급히 집으로 들어왔다. 뛰어온 건지 숨이 거칠었다. 제가 오기 전까지 이미 테이블은 셋팅이 끝나 있었다. 집 안에는 꼬마전구와 작은 트리가 보였고, 트리 밑으로 선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디아가 핸드폰을 꺼내 적당한 배경음까지 재생시키니 제대로 된 분위기가 났다. 알렉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진을 바라봤다.
“해피 홀리데이, 진.”
“미친, 야… 너 시신경에 문제 있냐?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지금 망막에 내가 안 맺히나 본데? 아, 진짜 짜증나서 집에 가든지 해야지.”
“넌 저번에도 봤잖아. 굳이 또 듣고 싶어? 해피 홀리데,”
“됐어, 그냥 앉아. 이미 누나 마음 다 상했다. 이 썩을 배은망덕한 자식들 같으니라고.”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됐다. 세 사람은 맡은 바가 확실했다. 나디아가 괄괄하게 무슨 말을 하면, 알렉스가 정색을 하며 말을 끊고, 그리고 싸움이 이어졌다. 그럼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진은 중간중간 둘 중 한 사람의 말을 거들었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진은 이 일상적이고도, 아주 특별한 시간이 감사했다. 두 사람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 건 처음이 아니지만, 오늘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어떤 것도 제 마음을 괴롭히지 않았다. 진 헤니는 밝게 웃으며 커다란 볼에 있는 파스타를 그릇에 덜었다. 그리곤 볼 한 가득 미트볼 파스타를 넣었다. 그 모습에 알렉스와 나디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맨날 잘 먹지도 못하고 깨작대더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식사를 마치고는 간단히 샴페인과 와인을 마셨다. 작은 트리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세 사람은 각자 준비한 선물을 나눴다. 나디아는 진이 제게 내민 아주 작은 상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작은가 의심이 됐다.
“빨리 열어 봐…!”
“왜 받는 나보다 주는 네가 더 신나 보이지, 달링? 불안하게?”
진은 아주 들떠 보였다. 나디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박스의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차키였다.
“나디아, 너 바이크 사고 싶다고 했잖아. 저번에 나한테 사진으로 보여 줬던 거! 아, 근데 옵션 같은 건 잘 몰라가지고 내가… 일단 거기서 추천해 준 걸로만 했…….”
“…….”
“나디아…?”
나디아 놀즈는 난처했다. 갑자기 주책맞게 눈물이 나서 창피했다. 결국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가려 덮었다. 아니, 이 자식… 돈이 어디서 나가지고, 이거 엄청 비싼데……. 게다가 저렇게 밝은 모습도 오랜만에 봐서 그냥 눈물이 났다. 뭔 말도 잘 안하고, 뭘 물으면…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 괜찮아… 그렇게만 말하던 게.
“야, 너는… 뭐 이렇게 비싼 걸 샀어! 정신 안 차릴래?!”
“아… 나디아, 나도 생각보다 많은 대회에서 상금을 탔더라고…! 밖에 나가서 수영한 건 다 네 덕분이잖아. 그래서…….”
“진, 넌 그걸 지금 확인했어…?”
알렉스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진은 그냥 웃었다. 사실 상금이고 뭐고 관심도 없었고, 계좌를 확인해 본다거나… 그런 건 몽땅 다 낯선 일이라 여태 묵힌 돈이었다. 나디아는 뺨에 흐른 눈물을 슥슥 닦더니 진에게 박스 하나를 내밀었다. 꽤나 큰 데다 묵직한 무게에 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도 빨리 열어 봐. 이건 사실 내가 주는 선물이라기보다는… 아, 어쨌든 열어 봐.”
“뭔데…?”
진은 박스의 리본을 풀고, 포장을 벗겼다. 그리고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놀란 낯으로 나디아를 바라봤다.
“너희 어머니가 박스 보내면서 같이 보내신 거야. 유리무덤이 오두막 같은 곳이었는데… 비 왔을 때 다 부서졌었다며? 어머니가 나중에 발견하시고 거기 있던 거 모아 두셨나 봐.”
“…….”
“크리스탈 케이스 멋있지? 그건 내가 준비한 거야.”
투명한 원기둥 모양의 케이스 안에는 색색깔의 유리와 반질한 돌멩이들이 들어 있었다. 진 헤니의 눈에도 울망울망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다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제 어린 시절의 보물들이었다. 뭐라 말은 못하고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모습에 나디아가 괜히 진의 등을 때렸다. 저도 다시 눈물이 나려고 해서 아주 큰일이었다.
“아, 그러니까! 연락을 이제 좀 드려!”
“나디아, 고마워…….”
결국 검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알렉스가 진에게 티슈를 내밀었다. 그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나디아를 바라봤다.
“아니, 둘이서 이러면… 내가 뭐가 돼.”
“뭐가 되긴 뭐가 돼. 진 헤니랑 알게 된 지 3년밖에 안 된 알렉스 그레이가 되는 거지. 이제 알겠냐? 너는 애초에 나한테 상대도 안 돼.”
두 사람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걸 알아서 진은 눈물을 빨리 닦았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제 선물을 진에게 건넸다. 이미 망한 것 같긴 했지만, 나디아의 말대로 어차피 두 사람의 사이는 제가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 나는… 별거 아냐.”
의기소침한 알렉스의 모습에 진이 크게 웃었다. 진은 제게 내밀어진 검은색 종이봉투에서 리본을 푸르고, 안에서 박스 케이스를 꺼냈다. 달각이며 열린 상자 안에는 다이얼판이 검은 시계가 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자마자 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2년 전 보았던, 비슷한 시계가 생각났다.
“시계… 혹시 별론가?”
“어? 아냐! 고마워, 알렉스.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야…?”
진이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나디아는 옆에서 제가 고르는 걸 도와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둘이서 또 한참을 투닥대서 진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진은 망설이다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속마음을 말해 본 적이 많이 없어서… 언제나 참 어려웠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니까, 말하고 싶었다.
“알렉스, 그… 전에는 그냥 수영부에서 가끔 보는 친구였는데, 지금은 나디아랑 같이 크리스마스도 보내고… 많이 고마워. 너랑 누구보다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있어서 기뻐…!”
“그래… 나도 기뻐.”
진 헤니가 말한 마지막 문장에 알렉스가 흐리게 웃었다. 진은 좀 어색한지 손에 들린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선물해 준 건데… 바로 차 봐야지. 진 헤니가 제 왼쪽 손목에 검은색 시계를 둘렀다. 선물은 알렉스가 줬는데, 자꾸 에이든 생각이 나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
12월 23일, 그리고 24일… 에이든은 아주 바빠 보였다. 진 헤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댔다. 그는 에이든이 없는, 에이든의 집에 있었다.
에이든은 23일 아침, 아주 미안하고 난처한 목소리로 저녁에 봐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급한 일이 터졌는데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그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 말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도 이틀이나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일을 했으니까.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23일에 조금의 시간도 낼 수 없었고, 당연히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23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24일인 오늘까지 일을 하고 있는 건 조금 예상 밖의 일이라, 슬픈 표정이 잘 숨겨지질 않았다. 오늘 아침부터 에이든에게 어디냐고 연락을 했는데, 회사라고 해서 진은 당황스러웠다. 어제의 일이 마무리가 되질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후쯤에는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은 벌써 저녁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 끝나는 건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진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그가 흐린 표정으로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다시 연락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에이든, 아직도 회사야? 우리 그럼 언제 볼 수 있어…?」
그가 메시지를 전송하곤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일이 급하다는데… 왜 오늘 못 만나냐고 징징거릴 수도 없었고, 지금 네 집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 말하기도 애매했다. 빨리 오라 부담 주는 것 같으니… 안 될 말이었다.
‘괜찮아, 아직 크리스마스이브고 진짜 크리스마스는 내일이니까…!’
진은 자꾸 마음이 쪼글쪼글해지려는 걸 어떻게든 펴 보려 노력 중이었다. 꾸깃한 걸 어떻게든 펴 놨는데, 막 도착한 메시지가 다시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진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응, 난 오늘 계속 회사에 있을 것 같아 - 에이든」
「우리 26일 아침에 볼까? 크리스마스 마켓은 다행히 다음 주까지 하는 것 같아, 진 - 에이든」
26일…? 진 헤니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크리스마스는…? 잠시 굳어 있던 진은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에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돼서.
「아직 센터에 있어? 저녁은 잘 챙겨 먹었어? - 에이든」
“센터…?”
갑자기 웬 센터…? 눈을 꿈뻑이던 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소파에 걸어 놨던 코트와 머플러를 챙겨 입었다. 까만색 캐시미어 니트 밖으로 긴 검은색 코트가 덮이고, 포근해 보이는 까만 머플러가 진의 목에 둘둘 둘렸다. 워커를 신는 손길이 급했다. 진 헤니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리스마스가 땡하고 시작되는 밤 12시를, 이렇게 맞이할 순 없었다.
***
에이든 테일러는 불이 다 꺼진 사무실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 당연히 회사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만나느라 바쁜 날이니까. 저만 빼고. 집에 혼자 있으면 괜히 서운하고 어쩌고, 외로워서 이상한 생각만 할 게 분명했다. 차라리 회사에서 일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어제라도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했는데, 웬 거지같은 오류 하나 때문에 LA부터 뉴욕까지가 전부 비상이었다. 일을 최우선으로 둘 일 없다고 못 박았지만, 사실 그는 무책임하게 다 내팽개치고 갈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회사 전체가 정신없는 와중에, 저는 크리스마스 연휴니 가보겠다고 하는 데스크는… 그런 게 세상에 있어선 안 됐다.
“씨발, 그냥… 애초에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었어.”
에이든의 사나운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엄청나게 잘못된 선택을 한 거였다. 그는 신경질이 가득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지금 그의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지금 아주 부족했다. 잠, 기력? 그딴 거 말고, 진 헤니가 부족했다. 21일부터 지금까지 본 시간이 얼마 되질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매일, 매 시간, 아침에 눈 떠서 잠들기 전까지 품에 안고 입을 맞춰도 부족한데, 얼굴 자체를 못 보는 일은 아주 가혹했다.
진 헤니가 부족한 이 욕구불만 상태는 어제 꾼 꿈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의 꿈은 아주 적나라했고, 솔직했다. 그는 회사 한쪽에 있는 제 방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 한참이나 미친 것처럼 헛웃음을 뱉었다. 내숭 떠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가끔 혼자 해결하기까지 했지만 해소되지 않았다.
꿈에서 그는 진을 침대에 엎어 놓고는, 말 그대로 발정난 개처럼 허리를 때려 박았다. 진이 줄줄 울면서 앞으로 기어나가면 다시 다리와 허리를 잡아 질질 끌어내렸다. 대체 얼마나 안에다 싸질러 놓은 건지… 성기가 안을 푹푹 쑤셨다 나올 때마다, 안에 있던 정액이 울컥이며 밖으로 새어나오는 지경이었다.
진의 몸 안에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마치고 성기를 주욱 뽑아 낸 뒤에는,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체액을 집요하게 감상했다. 너무 오랜 시간 제 것을 꽂고 있던 입구는 붉게 달아올라 벌름거렸다. 진은 흐느끼며 허리를 떨었는데, 묵직한 것이 한 번에 빠져나가자 잘 닫히질 않는 모양이었다.
제 사랑스러운 연인의 엉덩이와 허벅지에는 잇자국이 나 있었고, 강한 힘으로 쥐고 있었던 허리에는 붉은 손자국이 보였다. 에이든은 진의 몸에 있는 제 흔적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그리곤 엎드려 있던 진의 몸을 뒤집어 그와 눈을 맞췄다. 열에 달뜬 검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힘든 건지 색색거리며 숨을 뱉던 진이 한숨처럼 말했다.
- 좋아, 너무 좋아.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잠에서 깨어나 한참을 웃어야 했다. 힘들면 안 하겠다, 아프면 안 넣으면 된다, 제 입으로 말해 놓곤 꿈에서는 개새끼도 그런 개새끼가 없었다. 아무래도 저는 근본부터가 글러먹은 놈인 것 같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을 꾸욱 감고 있던 에이든은 제 사무실 문이 슬며시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
어두운 가운데에도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에이든은 눈앞의 진을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진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에이든을 살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그가 앉은 자리 근처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 어두운 공간에는 진 헤니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아무도 출근 안 했는데, 왜 혼자 여기 이러고 있어…….”
“…….”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에이든…….”
진이 그의 앞에 다가가서 섰다. 에이든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진 헤니의 왼쪽 손목을 쥐었다. 에이든의 손에 덜컥이며 검은색 시계가 만져졌다. 에이든은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피식 웃으며 진을 올려다봤다.
“이젠 약을 안 먹어도… 너무 보고 싶으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나 봐.”
“…….”
“아니면… 여태는 가짜로 미친 거였으니까, 지금은 진짜로 미친 걸지도 모르겠네.”
자조적인 말이었다. 진은 무슨 소리인지를 몰라 인상을 썼다. 그리곤 에이든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 시간을 확인하려 했다. 12시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안 돼. 진, 나는… 네가 시계 볼 때가 제일 싫어. 게다가 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왜 벌써 시계를 봐…….”
“……?”
“네 말대로 크리스마스이브잖아. 같이 있어 줘… 조금만 더.”
에이든 테일러가 제 앞에 서 있는 진의 몸을 껴안았다. 그는 진의 상체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라도 같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면서. 진은 제 왼쪽 손목을 꾸욱 눌러 쥔 에이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에이든은 제가 시계를 보지 못하게 했다. 저는 평소에 시계를 차고 다닌 적이 없는데, 시계를 볼 때가 제일 싫다니……. 잠시 인상을 쓰던 진은 제가 보고 싶을 때면 약을 먹었다는 말을 떠올리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약을 먹고 봤다는 제 환영이 시계를 차고 있던 거였다. 시계를 확인하다, 시간이 다 되면 사라지고… 자신은 그를 혼자 두고 가버린 모양이었다. 그 혼자서 외롭게, 안쓰럽게…….
“에이든…….”
“사실 되게 기대했는데, 크리스마스… 엄청 같이 보내고 싶었어. 좀 의미가 다르니까. 나는 누구랑 크리스마스 보내 본 적도 없고… 그냥 매일 똑같은 하루 중에 하나였는데, 이번엔 좀 달랐거든.”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에게 말할 수 없는 걸, 또 다른 진 헤니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마음이 많이 불안하고, 그가 저를 질려하거나… 혹시, 실망하면 어쩌나 싶어 말 못 하는 것들이었다.
둘이 다시 만난 지 세 달, 행복하고 다정한 표면 아래에 두 사람은 나름의 고충을 지니고 있었다. 둘 다 제 속에 솔직한 사람이 아닌 까닭이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속으로 꽁꽁 숨기도록 자라난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 저를 털어놓는 게 낯선 사람들이라, 솔직한 마음을 나누는 게 참 어려웠다.
“그냥 같이 보내자고 하면 되지, 왜…….”
“그래도… 네가 거기 가서 이것저것 보고 배우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지.”
에이든이 진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진 헤니는 오른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에이든은 다정한 손길에 옅게 웃으며 말했다.
“속 좁아 보이면 안 되잖아.”
“…….”
“진, 나는 너한테 이해심 많고, 다정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럼 날 조금이라도 더… 좋아해 줄 것 같아서…….”
진 헤니의 오른손, 상처 위로 에이든이 입을 맞췄다. 제 앞에 있는 환영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마치 진짜 진 같았다. 그게 너무 행복하고, 또 슬펐다. 많이 보고 싶었다. 옆에 있고 싶었다. 모두가 들뜨고 행복한 이 크리스마스를, 저도 남들처럼 보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어, 진. 지금 당장…….”
“…….”
“이렇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저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애처로워서, 진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제가 크리스마스를 센터에서 보낼 일은 애초에 없었다. 저 역시 에이든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많이 기대해 왔으니까. 속이 상했다. 뭐라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거렸을 그가 상상됐다. 저도 오늘 하루 내내 그랬으니, 그 마음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진은 에이든의 뺨을 조용히 쓸다가 왼손을 들었다. 에이든은 시계를 보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그냥 조금 더 있어 주지……. 슬픈 표정의 에이든이 진을 품에서 놔 줬다. 이제 가라는 것처럼. 진 헤니는 제 왼쪽 손목에 있는 걸 보다, 망설임 없이 시계를 풀었다.
“……?”
“이제 조금 있으면 진짜 크리스마스야, 에이든.”
“진…?”
에이든의 눈이 흔들렸다. 시계를 푸른 진은 놀란 얼굴의 에이든에게 가깝게 고개를 숙였다. 진이 에이든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뺨에도, 그의 눈꼬리에도, 그의 귀에도, 평소 그가 제게 해 주던 것처럼. 귓바퀴에 입 맞추던 진이 입을 열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낮게 떨어진 목소리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에이든의 귀를 거쳐, 머리와 가슴에 닿았다. 그 감각은 소름 돋을 만큼 아득하고 아찔했다. 에이든은 어금니를 물었다. 제 연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전신에 소름을 일으켰으니까.
***
현관부터 난리였다. 두 사람은 입술을 떼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벽에 등과 머리가 쿵쿵 부딪히는 와중에도 절대 입술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손이 급했다. 두꺼운 옷 따위는 빨리 벗고 싶었다. 상대방이 입고 있는 코트, 셔츠… 그딴 건 지금 전혀 필요 없었다. 겨울이라 입고 있는 옷이 하나 같이 두껍고, 또 많아서 더 애간장이 타고 있었다.
“에이든, 하… 빨리… 나 빨리…….”
진 헤니의 윗옷을 헤집던 손은 여기는 포기라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니트까지는 끌어올려 벗겼는데, 그 아래 있는 셔츠에 단추는 왜 그렇게 많은지……. 전부 다 뜯어버리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달뜬 목소리에 셔츠를 포기했다. 에이든은 진이 입고 있던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진 헤니 역시 에이든 테일러의 바지 지퍼부터 내리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집은 또 더럽게 넓어서, 침대까지 가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에이든은 커다란 침대에 진을 눕혔다. 그리곤 제가 입은 니트와 티를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그 뒤엔 진의 바지를 끌어내려 벗겼다. 그 뒤엔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 자제가 안 될 것 같아서 아주 큰일이었다. 에이든은 인상을 찌푸리곤 침대 헤드를 그러쥐었다. 천천히… 다치지 않게…….
진 헤니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에이든을 보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양보할 수 없었다. 오늘은 꼭 숙제를 풀어야 했다. 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에이든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침대로 내리눌렀다. 갑자기 침대에 눕혀진 에이든이 놀란 낯을 했다. 크게 뜨인 푸른 눈이 제 위에 올라탄 연인을 올려다봤다.
숨을 몰아쉬던 진이 에이든의 성기를 쥐고, 제 뒤에 들어갈 수 있도록 끝을 맞췄다. 더 이상의 자극은 필요 없을 정도로 발기해 있는 것이 예민한 곳에서 느껴졌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커 보이는 건… 그냥 기분 탓이라 생각하며, 진이 그대로 몸을 내리려 했다. 에이든은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뛴 진의 몸을 막았다. 허리를 잡은 손길이 다급했다.
“진, 이거… 이거 이러면…….”
“하…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진, 잠깐만.”
“괜찮아. 너 오기 전에… 해 놨어.”
뭘…? 에이든 테일러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지금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갑자기 백치가 된 기분이었다. 에이든이 잠시 멈칫할 동안 진이 다시 몸을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성기에 에이든 테일러가 어금니를 물었다. 에이든이 없는 동안 저 나름대로 열심히 잘… 준비를 했는데, 막상 또 넣으려니 쉽진 않아서 진의 허벅지가 후들거렸다. 역시, 손가락 같은 걸로는 좀… 안 될 일이었다.
잠시 멈췄던 진 헤니는 침대 옆 서랍을 급히 열었다. 진의 손에 들린 투명한 튜브를 보다가 에이든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은… 오늘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 참을 수 있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딴 문제는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였다.
제가 산 것도 아닌 윤활제가 진의 손에, 그리고 제 성기 위로 뿌려지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이를 악물기도 잠시, 다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감각에 에이든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하…….”
“아으…! 하… 아!”
진은 제 아래 있는 에이든을 바라보며 조금씩, 끝까지 다 삼킬 수 있도록 허리를 내렸다. 단단하고 뜨거운 게 제 몸 안을 넓히며 들어올 때마다 등허리에 소름이 올랐다. 벌어져 있는 다리가 벌벌 떨리고, 아랫배와 허리가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진이 아래로 몸을 내릴 때마다 에이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진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약하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위에 올라타 있는 진에게는 그 무엇보다 만족스럽고, 야한 장면이었다.
“아응…! 아!”
“하, 씹…!”
절대로 끝까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던 페니스는 뿌리 끝까지 푹하니 몸 안에 박혀들었다. 두 사람 다 제 몸에 찾아드는 황홀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를 흡입하듯 머금은 곳은 잠시 뒤에 질척이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진이 에이든의 가슴 위에 손바닥을 짚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그런 진의 허리를 잡고 있는 에이든의 손에 힘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 으응… 하, 아윽!”
축축한 소음을 만들며 몸이 맞붙었다 떨어졌다. 어금니를 물고 눈을 감고 있던 에이든이 작게 욕을 씹으며 눈을 떴다. 그는 잠시 진의 몸을 멈췄다. 그리곤 제 위에 올라 타 있는 몸을 손으로 당겨 움직였다. 에이든이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대어 앉았다. 그 짧은 찰나에도 제 것을 물고 있는 입구가 재촉하듯 오물거려서, 진의 엉덩이를 쥐어 벌렸다. 그리곤 제 몸이 들어가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 손길에 진의 몸이 비틀렸다. 야한 연인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사나웠다.
“하, 네가… 원하는 만큼, 움직여.”
긁듯이 목소리가 뱉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진의 몸이 흔들렸다. 근육이 잘 빠진 허벅지와 배, 엉덩이가 황홀하고도 가장 동물적인 감각을 쫓아 움직였다. 몸 안이 마구잡이로 헤집어지고 있었다. 묵직한 것은 몸 안의 여리고 예민한 피부와 마찰하고, 어딘가를 쿡쿡 찌르기도 했다. 애가 탔다. 더, 더 깊이 넣고 싶어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말도 안 되는 느낌은 아랫배에서부터 시작돼 손끝과 발끝을 모두 곱아들게 만들었다. 허리에 전기가 오르는 것만 같았다.
“으응! 아, 아으…! 아, 나… 아응, 에, 이든…….”
“후… 나도, 좋아.”
한숨 같은 말이었고, 진 헤니는 그 목소리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허리가 움직이는 속도를 높일수록 감각이 고조됐다. 에이든의 탄탄한 배에 문질러지고 있는 제 성기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앞과 뒤 모두에 참을 수 없이 간지럽고, 뜨거운 감각이 몰려들었다. 안타까운 느낌에 절로 눈물이 고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조금 뒤에 제 몸에 찾아들, 그 기분을 빨리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나고 있었다.
제 안으로 에이든의 성기를 푹푹 쑤셔 넣던 진 헤니는 전신에 끼치는 소름 돋는 감각에 입을 벌렸다. 허벅지와 허리에 전기가 오르고, 페니스가 들어차 있는 곳이 수축하고 이완하기를 반복했다. 입고 있던 흰 셔츠는 땀에 젖은 지 오래였다. 강하게 조여지는 감각에 에이든이 어금니를 씹었다.
“아으윽! 하… 으응! 하악!”
위에 있는 진의 몸이 벌벌 떨리고, 결국 그의 성기가 에이든의 상체 위로 정액을 뿜었다. 한 번 전신에 타고 오른 감각은 쉽게 가시질 않아서, 진은 제 몸을 어쩔 줄을 몰랐다. 입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흘렀다. 에이든의 상체 위에 있던 손은 그의 어깨를 쥐었다가, 팔뚝을 쥐었다가… 갈 곳을 모르고 헤맸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배와 가슴, 그리고 턱 끝과 입술에 묻은 진 헤니의 정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것을 물고 있는 곳이 경련하듯 페니스를 쥐어짜고 있어서, 그도 이젠 한계였다. 에이든이 제 입술에 묻은 정액을 혀로 핥아 올렸다. 열에 달아올라 그런지 혀는 평소보다 훨씬 더 공격적인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입술에 튀어 있던 흰색의 체액은 뜨거운 입 안을 지나 꿀꺽 삼켜졌다. 그가 푸른 눈을 사납게 치뜨며 입을 열었다.
“하… 다 했어…?”
“흐윽… 아으, 하, 나… 잠깐만…….”
몸이 진정이 되질 않아서 진이 거의 흐느꼈다. 에이든은 숨을 몰아쉬며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여태 손으로만 잡혀 있던 허리가 단단한 팔에 감기고 있었다. 에이든은 양팔로 진의 몸을 강하게 고정한 뒤에 다시 물었다.
“다 했으면… 이제 나 해도 돼?”
“흐으… 응…?”
“알지, 진? 힘들면… 힘들면 말해.”
멈추려고 노력은… 해 볼 테니까. 사나운 목소리가 뱉어지기가 무섭게 진의 시야가 흔들렸다. 제가 움직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몸 안이 들쑤셔지기 시작했다. 단단한 팔뚝으로 진의 몸을 아래로 내리눌러 고정시킨 채, 에이든이 허리를 쳐올렸다. 아까까지는 제가 봐준 거였다는 듯이.
“아! 하으윽…! 으응, 에이든… 아! 아, 나 방금 갔…!”
결국 진의 상체가 무너졌다. 허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쩍쩍 소리를 내며 맞붙었다 떨어지는 몸에 정신이 아찔했다. 잔뜩 벌어져 있는 입구가 두껍고 뜨거운 것과 빠르게 비벼져서, 자꾸만 움찔거리게 됐다. 신음은 거의 울음소리로 바뀌어 방을 울렸다. 안 그래도 몸이 진정이 되질 않았는데, 자극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진 헤니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미처 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에서 흘렀다. 진은 에이든의 목과 어깨에 얼굴을 박은 채 한참을 울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처박힌 것에 진이 비명을 질렀다. 진이 다리며 팔을 버둥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악! 아! 아으응! 이거, 잠깐… 나 이거 안, 이거 너무 깊어, 아…! 너무, 깊어!”
진의 입에서 터지는 소리에 에이든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그는 진이 몸을 벌벌 떠는 곳만을 찾아 몸을 쑤셔 넣었다. 그럴수록 제 것에 달라붙어 오는 점막들이 더 빠르게 움찔거렸고, 에이든 테일러의 정신도 아득해지고 있었다. 에이든의 성기에 발려져 있던 윤활제가 입구에서 뚝뚝 떨어졌다. 철썩이는 소리가 끝을 모르고 빨라지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몸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아! 아응…! 하, 윽! 하악!”
“윽…!”
배에 문질러지던 진 헤니의 성기가 다시 체액을 뿜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 역시 깊게 처박힌 채 움찔거리는 중이었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험한 말들이 목구멍을 쳤다. 씨발… 욕을… 하, 욕을 안 하려고 하는데… 맘처럼 잘 되질 않는다고, 에이든이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 역시 몸에서 잘 가시지 않는 감각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후으… 에이든… 에이든…….”
“하… 사랑해, 진… 사랑해.”
에이든의 목에 얼굴을 부비며, 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열에 푹 잠긴 목소리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게 쓰러지듯 안겨있는 몸을 꼬옥 감싸 안았다. 황홀하고, 또 화끈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진짜 산타 할아버지께서 선물을 놓고 가려 오셨다면, 화들짝 놀라 돌아가실 만큼.
***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제정신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뒤에서 머리를 말리는 커다란 손 때문에 잠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번엔 참아야 했다. 곧 정말 크리스마스였으니까.
뜨거운 바람을 내뿜던 드라이기가 달칵 소리를 내며 꺼졌다. 에이든은 뽀송하게 마른 진의 검은 머리 위로 입을 맞췄다. 진의 입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숙제 하나를 방금 막 끝마쳤다는 뿌듯함의 미소였다.
방싯 웃고 있는 진의 얼굴에 에이든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한쪽 뺨에 짙게 보조개가 들어가고, 눈이 예쁜 곡선을 만들었다. 그가 몇 번이나 진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오늘 훈련이 일찍 끝났어? 25일까지 이어서 하는 것 같더니…….”
“그래, 그거. 에이든, 나 21일이랑 22일만 간다고 했잖아…!”
진이 에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왜 그런 오해를 했냐는 표정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때 분명 캘린더에 4일이 체크돼 있었는데……. 에이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24일이랑 25일에 체크돼 있던 건 뭐야?”
“아… 그거는…!”
무려 ‘결전의 날’ 표시였다. 자꾸 마음이 쪼그라들거나 부끄러워서 어디 숨고 싶어지면 마음을 다잡기 위한 표시였다. 에이든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이브부터 크리스마스까지의 밤. 날이 날이니만큼 그와 사랑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일종의 표시였다. 진은 차마 설명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동안 에이든 테일러는 어디서 손톱깎이를 가져 와서는 진의 손을 쥐었다.
“어쨌든, 나는 이틀만 간다고 말했어…!”
“미안, 내가 잘못 들었나 봐. 미안해, 진.”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손톱을 조심스럽게 깎으며 사과했다. 예쁘고 곧게 뻗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매만지며, 아프지 않게 적당한 길이로 손톱을 또각또각 깎았다. 푸른 눈은 퍽 진지하고, 손길이 정성스러워서 진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24일이랑… 25일에 간다고 했어도, 그날은 같이 보내자고 말을 해야지, 에이든…….”
그 말에 에이든은 그냥 웃었다. 그는 오른손이 깔끔히 깎인 걸 확인하고 진의 왼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진은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입을 달싹였다. 뭔가를 말할지 말지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진은 결심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비장하게 말하기는 좀… 요상한 말이긴 하지만…….
“나는… 나도 평범한 서, 성인 남자잖아?”
“……?”
뜬금없는 말이라 에이든이 잠시 고개를 들어 진을 바라봤다. 진은 목부터 오르기 시작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뺨까지 붉어지는 중인 게 확실했다. 얼굴도 뜨거웠다.
“에이든,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지만,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남들처럼 사랑하고 싶어. 그냥 평범하게…….”
“…….”
“네가 나랑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도 너랑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계속 기대해 왔어, 에이든.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
우리가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진이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푸른 눈은 조금 크게 뜨여 있었다. 진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제 속을 숨기며 살아 왔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는 저를 잘 알아 줄 거란 기대가 있었다. 아무도 몰랐던 유리무덤에서, 서로만 아는 비밀 얘기를 털어 놓던 한 사람만은… 알아 줄 거라는 믿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 보지 못한 두 사람이라 많은 것들이 어색했다. 삐걱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뭐든 말을 하면서 맞춰 가면 될 일이었다. 서로만은 서로를 알아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될 일이었다. 진은 속상한 낯으로 웃었다. 에이든은 아직도 별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진을 볼 뿐이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하고 있는 생각은 진 헤니가 알면 슬퍼할 생각이었다. 저 역시 진과 평범한 연인이 되고 싶지만, 돼선 안 된다는 것. 감히 제가 그와 평범한 사랑을 할 순 없었다. 남들처럼 싸우고, 속상해서 모진 말을 하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였다. 그가 하고 싶다면 하고, 하기 싫다면 하지 않을 거니까. 그게 진이 말하는 ‘평범’과는 거리가 조금 멀어서 에이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제게 너그러운 그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고마워, 진.”
그렇게 말하며 뺨에 입술을 부비던 에이든은 아주 사랑스러운 소리 하나에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 다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 진 헤니의 배를 내려다봤다.
“…….”
“…….”
진의 위장이 맹렬하게 허기짐을 알렸다. 진은 제 배에서 나는 소리에 손으로 눈가를 가려 덮었다. 하필이면 이 진지한 순간에… 최악이었다. 하지만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에이든을 기다리느라 저녁도 안 먹었고, 그 상태에서 한참을 뒹굴었으니 당연했다. 그건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큰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목을 울려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먹을 게 있어야 되는데…….”
그가 냉장고에서 두툼한 베이컨과 야채를 꺼냈다. 원래 밖에서 음식을 사 올 예정이었기에, 이것 이외에 다른 식재료는 많이 없었다. 에이든은 잠시 고민을 하다 야채며 베이컨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오븐용 트레이 위로 올렸다. 찬장에서 허브 솔트를 꺼내 위로 툭툭 뿌리고는 오븐을 예열시켰다. 진은 뒤에 서서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맛있겠다…….”
“조금만 기다려, 진. 금방 익을 거야.”
에이든이 예열이 끝난 오븐 안으로 트레이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벌써 침이 고이는 느낌이라 진이 초조한 얼굴을 했다. 그 사랑스러운 낯을 보며 작게 웃다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에이든이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방에서 나온 그의 품에는 무언가, 엄청나게 커다란 게 안겨 있었다. 빨간색의 천가방 같은 거였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짊어지고 다니는 선물 주머니처럼 커다랗고, 뭔가가 많이 들어 있었다.
“뭐야…?”
“아, 이게… 설명을 하자면 좀 길어…….”
품에 있던 것들을 거실에 내려놓은 에이든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였다. 진 헤니는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다가, 그 역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 사람은 작은 박스와 선물 뭉치를 두고 마주 앉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다가, 25일이 되자마자 선물을 한 아름 진에게 안겼다. 진 헤니는 크게 소리 내 웃으며 포장을 풀었다. 리본을 풀어 안을 들여다보던 진이 고개를 들어 설명을 요구했다. 에이든이 조금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선물을 뭘 주면 좋을까 고민을 하면서 백화점에 거의 매일 갔었는데…….”
“갔었는데…?”
“그냥 네 생각이 날 때마다 샀더니, 그렇게 돼 버렸네…….”
선물 보따리 안에는 별별 게 다 있었다. 어떤 상자에 들어 있는 건 워커였고, 작은 상자에 들어 있는 건 따뜻해 보이는 장갑이었다. 또 다른 상자를 열자 고가의 필름 카메라가 보였다. 그리고 보드라워 보이는 머플러, 노트북과 패드. 비싸 보이는 니트 몇 벌과 셔츠 몇 장. 그것 말고도 박스는 엄청 많았다.
“하하…! 진짜 산타 할아버지네…….”
“진, 할아버지라니…….”
불만스러운 에이든의 목소리에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에이든이 보기에 몽땅 진에게 필요하고, 잘 어울릴 법한 것들이었다. 평소에 진이 워커 신는 걸 좋아하니까 하나 더 사 주고 싶었다. 추운데 물에 자꾸 들어가다 보니 손이 트는 것 같아서, 따뜻한 장갑도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앞으로 같이 여기저기 다닐 거니까 카메라도 필요했다. 그가 보는 모든 장면들이 기록으로 남길 바랐다. 지나가는 순간을 담았다는 느낌이 나도록, 필름 카메라가 좋을 것 같았다. 보따리 안에 있는 선물 전부가 진을 떠올리게 했다. 뭘 봐도 진 생각밖에 나질 않아서, 하나하나 사다 보니 저 지경에 이른 거였다
“여태 같이 못 보낸 크리스마스 선물, 한꺼번에 받았다고 생각해, 진.”
“고마워, 에이든.”
“해피 홀리데이, 메리 크리스마스.”
에이든 테일러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진 헤니는 마음이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올랐다. 뭘 봐도 제 생각이 났다는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선물들을 품에 안고 웃던 진은 제가 준비한 것을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작은 박스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게 내밀어진 박스를 보며 웃다가, 들뜬 손길로 포장을 풀었다. 안에 들어 있던 케이스의 뚜껑이 열리고,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약하게 일그러졌다.
“팔찌… 잃어버린 거는 이제 그 바다에서 잘 지내라고 하고, 앞으로는 더 좋은 걸로 차고 다녀, 에이든.”
“…….”
“잃어버린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냥 새로, 우리 전부 다 새로 하자. 더 좋고, 더 예쁘게.”
케이스 안에는 푸른 보석이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그 팔찌를 바라봤다. 진은 그냥 앞에 가만 앉아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에이든의 입에서 말이 뱉어지기 전에, 눈에서 눈물이 먼저 떨어져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소리도 없이 울던 그가 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눈물이 가득 차 있는 푸른 눈이 제게 향하자 진이 황홀한 얼굴을 했다. 저 팔찌가 본 것 중에는 그나마 가장 예뻤는데, 그래도 역시… 에이든의 푸른 눈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물기가 맺혀 반짝이는 눈은 세상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진, 나는 태어나서… 지금이 제일 행복해.”
울음을 참느라 잠긴 목소리가 말했다. 에이든 테일러가 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를 품에 가득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진은 따뜻하고, 포근해서… 언제까지고 이렇게 품에 안고 있고 싶었다. 제 추운 삶에 이처럼 따뜻한 사람이 처음이라, 감사했다.
“난 태어난 걸 한 번도 감사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태어나서 감사해.”
꼭 감긴 에이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슬퍼서가 아니라, 행복해서. 진 헤니가 에이든의 너른 등을 마주 안았다. 이렇게 크고, 이렇게 단단한 사람인데… 가끔 아주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래서 꼭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앞으로 그의 모든 크리스마스가, 오늘처럼 행복하기만 했으면… 진 헤니가 그렇게 생각하며 에이든에게 입 맞췄다. 한참을 품에 안겨 있던 진이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이든.”
“응?”
“…배고파. 베이컨이 다 익은 것 같아……. 엄청 맛있는 냄새 나…….”
그때까지만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에이든 테일러가 크게 웃어젖혔다. 그 뒤로 두 사람의 크리스마스는 아주 따뜻하고, 후끈했다. 체력을 보충하고 나서 할 일은 하나였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은 물론이고, 크리스마스는 아침부터 집 안이 아주 요란뻑적지근했다.
한바탕 일을 치르고, 두 사람은 늦은 오후가 다 돼서야 외출을 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진이 가고 싶다 말했던 크리스마스 마켓이었다. 온 거리가 크리스마스로 들썩였다. 가만히 길을 걷기만 해도 행복했다. 모든 사람들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다.
둘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수다를 떨고 장난을 쳤다.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컵케이크를 종류별로 시켜 먹기도 했고, 길거리 매점에서 산타 모자를 사서 서로에게 씌워 주기도 했다. 에이든은 진이 밝게 웃을 때마다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더니, 나중에는 적응이 된 건지 진 헤니의 표정도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품에 안았다가, 이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두 사람은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가도 찰나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애가 탔다. 모든 입맞춤과 오가는 시선이 서로에게 속삭였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네가 더… 나를 사랑해 주기를.
진은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웃다가, 갑자기 제게 뛰어든 털 뭉치 하나를 바라봤다. 이번엔 까만색이었다. 진의 눈에 또 다른 빛의 애정이 넘실거렸다. 진은 꼬리를 붕붕 흔들고 있는 개를 보다가, 난처한 낯의 주인에게 웃어 보였다.
“아니,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만져 봐도 될까요?”
“아, 네! 덴버, 앉아!”
에이든은 개를 껴안고 쓰다듬는 진을 보며 무언가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게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진이 매번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거나, 감자칩만 먹는 식습관을 고치는 데에도 좋은 해결책이었다. 옆에 서 있던 에이든 테일러는 아쉬운 낯으로 개와 작별하는 진에게 물었다.
“진, 너는 개 키우면 어떤 종이 좋아?”
“사실… 생각해 둔 게 있어.”
진은 몇 번이나 덴버를 돌아봤다. 사실 생각해 둔 게 있다니,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에이든은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는 골든 리트리버가 좋아.”
“왜? 순하고 똑똑해서?”
골든 리트리버는 워낙 인기가 많은 종이라서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생각하는 낯으로 가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제 연인의 머리칼을 바라봤다. 언제나 찬란한 금빛의 머리칼. 제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시선에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품에 안고 있으면 네 머리 같고 좋을 것 같아.”
“진… 내가 지금 잠깐 생각이 든 건데, 눈이 푸르면 다 좋다거나… 머리가 금발이면 다 좋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그때 그 꼬맹이 눈도 파랬고… 뭔가 이상한데…….”
“글쎄… 모르겠네…….”
진 헤니가 짓궂게 웃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바른 대로 말하라며 에이든이 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진은 모르겠다고 말하며 몸을 피했다. 두 사람은 이 작은 걸로도 한참 동안 장난을 쳤다. 두 사람의 뺨에 눈송이가 내려앉을 때까지. 뺨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눈 오려나 봐…!”
진이 아이처럼 웃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한두 송이씩 떨어지던 눈이 조금씩 큼지막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내리는 흰색의 눈 아래, 그보다 맑고 깨끗한 빛의 검은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 나도 골든 리트리버 좋아.”
“응?”
“집을 새로 사야겠네. 우리 개를 위해서는 마당 있는 집이 필요하겠어.”
내리는 눈 아래에서 진이 놀란 낯을 했다. 에이든은 긴장한 얼굴로,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아침에 눈 뜨면 바로 볼 수 있게… 우리 같이 살자, 진.”
“…….”
“그래 줄래?”
눈송이는 굵어져 함박눈이 되고 있었다. 온 세상에 사랑과 애정이 넘실거렸다. 사랑스러운 제 연인의 검은 머리칼과 어깨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검은 눈이 기쁘다는 듯 휘어지는 모습에 에이든의 마음이 덜컥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래서, 금발이면 다 좋은 거냐고 물어봤는데 왜 대답이 없어?”
“하하…! 아니, 설마 그런 거겠어?!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진 헤니를 껴안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왼쪽 손목, 그 손목에서 푸른 보석이 반짝였다. 다신 잃어버리지 않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제 인생에 찾아와 준 축복.
행복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에이든 테일러가 기도했다. 이 행복한 순간이… 언제까지고 영원하기를.
외전 3. Would you marry me?
불이 다 꺼져 있는 집에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 하나와 그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엎드려 있는 개의 숨소리가 전부였다. 커다랗고 넓은 집, 벽 한쪽에는 인화된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찍은 사진들과 작년에 함께 체코에 갔을 때 사진, 그 이외에도 소소한 일상을 찍은 사진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그 앞으로는 크리스탈 케이스에 담긴 유리들이 보였다. 섬에서 모았던 것 이외에 에이든 테일러가 모아 보낸 유리들까지 담아 둔 케이스는 유리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라면 빛을 머금어 반짝여야 할 유리알들은 어둠에 탁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소파 옆, 작은 서랍장 위에서 핸드폰을 들어 올린 그는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밤 11시였다. 핸드폰에는 별다른 메시지나 연락이 없었다. 그는 두통이 오려고 해서 눈썹이며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매만졌다. 제 주인의 기색을 알아챈 개가 고개를 들었다. 걱정하듯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담, 오늘도… 너희 아빠가 늦네…….”
아담이라고 불린 골든 리트리버는 저를 쓰다듬는 손길에 꼬리를 쳤다. 제 주인이 슬퍼 보여서, 아담은 괜히 그 품으로 파고들어 안겼다. 남자는 흐리게 웃으며 개를 안아 줬다. 제 뺨에 코를 부비는 행동에 남자가 기특하다는 듯이 아이의 콧잔등을 쓸었다.
“너도 진이 보고 싶지?”
에이든 테일러가 아담에게 물었다. 아담은 대답 없이 소파에서 내려갔다. ‘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아담은 현관문 앞에 앉았다. 그리곤 웃는 것 같은 낯으로 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곧 아빠가 올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복잡한 낯의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다 습관처럼 제 손목의 팔찌를 매만졌다. 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음을 손으로 만져 확인해도, 또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불을 켰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빛을 받아 찡그려졌다. 이젠 다 나았다 생각했던 기침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작게 콜록거리다가 부엌 찬장에서 약병을 찾아 들었다. 세 개를 먹어야 했던 약은 이제 하나만 먹어도 괜찮았지만, 차라리 약을 세 개나 먹었던 때가 더 나았다고… 에이든 테일러가 생각했다.
“하…….”
약을 삼킨 그가 황량한 거실을 돌아봤다. 봄이지만 찬 공기가 도는 거실, 에이든 테일러는 그런 거실을 떠나 제 서재로 들어갔다. 그가 서재로 들어가자, 뒤에서는 탁탁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담이 에이든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저를 혼자 두지 말라는 것처럼.
에이든 테일러는 서재 제일 안쪽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뽑았다. 그 책은 제목이 보이지 않게끔 반대로 꽂혀 있었는데, 여기저기 접혀 있거나 인덱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산 지는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매일 보고, 이것저것 메모를 하기도 하는 책이었다.
그 책을 한 쪽 옆구리에 끼고 책상으로 가던 그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냐, 우린 아무 문제도 없어. 왜 자꾸 이렇게… 감정적으로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를 들었다. 벨벳으로 돼 있는 상자가 열리고, 안에 들어 있던 반지가 반짝였다. 누가 봐도 프러포즈용 반지였다.
에이든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반지를 쓸어 보다가, 흐리게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 어제 책에서 봤는데 이건 너무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러니… 너무 당황하거나, 무서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안정됐다는 소리니까, 계획대로, 원래 예정대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책상 의자에 털썩 앉은 그가 책을 폈다. 아담은 그가 책을 펴는 걸 보고는 옆에 털썩 엎드렸다. 이런 상태의 제 주인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책만 읽곤 했으니, 옆에서 기다려 줘야 했다. 에이든은 책갈피가 꽂혀 있는 부분을 체크하곤 내용을 읽어 내렸다.
「권태기 연인들을 위한 7번째 지침 <혼동 금지> : 오래된 연인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든 것과 권태기를 헷갈리곤 한다. 연애 초기에 느꼈던 설렘과 성적 긴장감은 함께한 시간이 늘어갈수록 안정과 두터운 신뢰로 치환된다. 이는 당연한 단계이며,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관계는 더욱 성숙하게 무르익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기를 권태기라 단정 지으면 오히려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혹시 지금 자신이 안정기와 권태기를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만난 지 2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히 관계는 안정기였다. 전처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랑 똑같을 순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금 헷갈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문제도 없는데, 자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쓰이는 거였다. 오히려 진이 제게 신뢰를 갖고 있다는 거니까, 좋은 일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을 넘기던 에이든은 현관에서 들리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담 역시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담은 약간 열려 있던 서재의 문을 코로 밀어 열고는 에이든을 돌아봤다. 빨리 나오라는 소리였다. 에이든도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았다. 그대로 나오려던 그는 책상 위에 있는 반지 케이스를 들곤 주변을 두리번댔다. 이걸 어디에……. 허둥대던 그가 서재 한쪽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자켓 주머니에 케이스를 집어넣었다. 그리곤 서둘러 서재를 나섰다.
“진…!”
“아, 에이든… 아직 안 잤어? 먼저 자지 그랬어.”
진은 조금 지친 낯으로 들어왔다. 에이든은 옅게 웃으며 그런 진의 곁에 섰다. 진은 꼬리를 치며 제 주변을 뱅뱅 돌고 있는 아담을 쓰다듬다가, 옆에 있는 연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에이든은 제게 입 맞추는 그를 품에 가득 안았다. 에이든의 얼굴엔 안도의 미소가 떠 있었다. 그가 제게로, 함께 사는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였다.
집에 돌아온 진은 샤워를 했고, 에이든은 그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던 그는 방으로 들어오는 진을 보며 예쁘게 웃었다. 진 역시 마주 웃으며 침대 안으로 몸을 뉘였다. 에이든은 켜져 있던 스탠드를 끄고 진을 바라보며 누웠다. 진은 많이 피곤한 건지 눕자마자 잠이 들 기세였다. 에이든이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오늘도 많이 바빴어? 더 마른 것 같은데…….”
“아… 이제 곧 올림픽이기도 하고, 선수들 관리하는 게 수영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아……. 이것저것… 그냥 좀 그러네…….”
진의 목소리는 이미 졸음이 뚝뚝 떨어졌다. 요즘에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정신력 소모가 아주 심했다. 하루가 끝나면 곧바로 녹초가 되는 지경이었다. 진 헤니는 저를 쓰다듬고 있는 연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런 진의 몸 위로 이불을 꼼꼼히 덮었다. 아주 복잡하고도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역시 권태기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진이 바빠서 그런 게 분명했다. 그 책에서는 권태기가 오면 작은 스킨십도 하지 않게 된다 했는데, 그건 아니었으니까. 오늘 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 뺨에 입을 맞추기도 했고, 지금도… 지금도 제게 안겨 잠들고 있으니 절대 아니었다.
잠에 빠져들고 있는 진을 보며, 그도 눈을 감았다. 뭐라도 몸에 좋은 걸 사 먹여야지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눈을 감고 있기를 몇 시간, 새벽 공기가 방에 가득한 시간에 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 헤니는 진동소리에 눈꺼풀을 급히 들었다. 아직도 잠기운이 가시질 않은 몸이지만,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에이든의 품에서 제 몸을 빼냈다. 그리곤 에이든이 깨지 않았는지를 살폈다.
진 헤니는 발소리를 죽여 방에서 나갔다. 에이든 테일러가 깨진 않았는지, 몇 번이나 더 확인을 하면서. 문이 작게 달칵이며 닫히자마자 에이든이 슬며시 눈을 떴다. 지금은 새벽 두 시였고, 대체 이 시간에 진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푸른 눈이 닫힌 방문을 빤히 바라봤다. 새벽에 전화가 오면 진은 금방 침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온기를 머금었던 옆자리가 차게 식을 때까지, 괜찮다고 어떻게든 다독였던 마음이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진 헤니가 새벽에 전화를 받거나, 에이든 테일러를 피해 전화를 받기 시작한 건… 한 달 전부터였다.
***
에이든 테일러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제시 제퍼슨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잡지 한 부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죽상이야? 타임지에 이름 박겠다고 재수 없게 굴더니, 막상 네 이름 실리니까 별로니?”
“…….”
“사진 잘 나왔네. ‘올해 세계 경제를 선도할, 각 분야의 새로운 피’가 되신 기분이 어때? 내가 봤을 땐 정작 ‘새로운 피’이신 분은 피가 말라서 죽어가는 것 같은데…….”
이번 호, 잡지 커버에는 에이든 테일러가 실렸다. 그는 남색 수트를 입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고, 약간 내리깔아 보는 눈부터 그를 이루는 모든 게 건방지고 오만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에이든 테일러와 아주 잘 어울렸다. 아직 커버까진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화제성이 남다르다 보니 실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미국은 유명인들의 2세에 죽자고 열광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심지어 또라이에 쌩양아치처럼 굴고 다니던 놈이 번듯해졌으니, 요즘엔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가족들이 전부 나쁜 일을 겪고 나서 개과천선한 재벌 2세라니, 무슨 소설 주인공도 아니고… 줄거리부터 최고였다. 아, 사실 재미있는 일이 하나 더 있긴 했다.
“설마 진 헤니가 너랑 결혼 안 하겠대?”
“…….”
“진짜?!”
에이든 테일러는 닥치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제시 제퍼슨은 사나운 얼굴을 보며 깔깔 웃었다. 남의 불행이 제일 재밌는 그녀로서는 ‘진 헤니의 프러포즈 거절’은 대박 토픽이었다. 에이든이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음을 그녀에게 말한 건 아니었다. 어쩌다가 반지 케이스를 들켜 버려서 이 지랄인 거지.
“걔 취향이 양아치 쪽인 거 아니니? 너 요즘 성실해서 매력 없나 보지.”
“입 다물어요. 아직 프러포즈 못했으니까.”
“뭐야, 시시하네. 둘이 얼마나 만났지? 2년? 헤어질 때가 되긴 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리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났다. 에이든 테일러는 이제 진짜 닥치란 표정을 지었다. 제시 제퍼슨은 자꾸 새려는 웃음을 숨겼다. 진 헤니를 직접 본 건 딱 한 번뿐이지만, 그녀는 단번에 알았다. 그는 에이든 테일러를 구하러 이 땅에 내려온 천사, 뭐 그런 거였다. 에이든 테일러가 그에게 절절매는 이유도 이해가 됐다.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푸른 눈을 보다가 토할 뻔 하긴 했는데, 나름 신기한 광경이라 좋은 구경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진 헤니가 에이든 테일러의 프러포즈를 거절할 일은 없었다. 그의 검은 눈에도 단단하고 확고한 애정이 빼곡했으니까. 진 헤니는 그가 양아치든, 타임지 커버를 장식한 잘나가는 놈이든 상관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둘은 천생연분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그냥 놀리려고 하는 말이었는데, 생각보다 에이든 테일러의 반응이 격했다. 프러포즈를 앞두고 예민하고, 불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무려 저 ‘에이든 테일러’가. 그래서 괜히 더 입이 근질거렸다.
“2년 정도 만나면 뭐… 서로 색다른 것도 없고, 지루할 때지. 거기다 같이 살기까지 하면 맨날 편한 모습만 보고, 뭐가 재밌겠니? 질리지. 괜히 다른 사람도 눈에 들어오고.”
“…….”
건조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피식 웃으며 말하던 제시는 에이든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걸 보며 입을 다물었다. 뭐야, 진짜 요즘 사이가 별로야…? 그럴 리가 없는데? 이쯤 되면 저희 둘은 절대 안 그렇다며 쌍욕이라도 해야 하는데, 에이든 테일러는 별말이 없었다. 푸른 눈이 조금 멍해 보이기까지 했다.
“얘, 너 혹시 지금 내 말 진지하게 듣고 있니? 평소처럼 그냥 개무시를 해야지, 얘가 왜 이래? 너 뭐 잘못 주워 먹었니?”
“…미팅은 참석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나가요.”
에이든 테일러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꺼지라고 말했다. 제시 제퍼슨은 제가 아주 잘못된 지점을 건드렸음을 깨달았다. 낌새를 보아하니 정말 사이가 별로인 거였다.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 말을 덧붙였다간 개싸움의 시작이었다.
“이번 주 목요일이야. 사실 뭐, 안 와도 돼. 같이 가면 좋기야 하겠지만.”
“알겠다고요.”
제시 제퍼슨이 뉴욕에 있는 이유는 이번 주 목요일에 있을 미팅 때문이었다. 그쪽에서도 대표 두 명이 오니까, 이쪽도 성의를 보일 필요는 있었다. 근데 저 자식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 뭐… 여차하면 혼자 가도 상관없고. 제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에이든은 그녀가 사무실을 떠나고도 한참동안 가만 앉아 있었다. 뭔가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털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을 이어지도록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에이든은 초조한 기색으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결국 응답하지 않아서,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눌러야 했다. 또 다시 긴 신호음이 가고, 이번에는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응, 에이든…! 무슨 일이야? ]
“아, 진… 바쁜데 미안해. 혹시 오늘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나 해서.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먹을까? 맨날 집에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랜만에 좋은 데 가서 밥도 먹고,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 오늘…? 아… 나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일이 좀… 있어! ]
“그렇구나……. 훈련 때문에…?”
진은 요즘 밤늦게 들어오는 게 너무 잦았다. 물론 운동선수들에게 평일과 주말이 무의미한 건 알지만, 심지어는 주말까지 아주 바빴다.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정도였다. 바쁜 와중에도 얼굴을 틈틈이 보려고 같이 산 건데… 오히려 같은 집에서 지내다 보니 빈자리가 훨씬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에이든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훈련 때문이냐고 물었고, 왜인지 알 순 없지만 진은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에이든의 표정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 아, 응, 훈련 때문에…! 오늘도 집에 좀 늦게 갈 것 같아. 먼저 자, 에이든. 피곤하게 기다리지 말고. ]
“늦게 끝나면 내가 데리러 갈까?”
[ 응? 아냐! 뭐 하러 그래, 너도 피곤한데. 아, 나 지금 가 봐야겠다. 에이든, 저녁 잘 챙겨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어! ]
에이든 테일러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는 급하게 끊겼다. 그는 흐린 낯으로 제 책상 위에 있는 잡지를 바라봤다. 그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많이 참고 기다렸는데, 요즘 들어선 괜히 그랬단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제시 제퍼슨이 말한 대로, 그가 저를 지겨워하기 전에… 재미없다고 느끼기 전에, 어디 도망가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저와 묶어 놨어야 했는데……. 잘못 생각한 거였다.
커다란 손이 잡지를 들어올렸다. 그는 커버에 박힌 제 사진을 보다, 쓰레기통에 잡지를 던져 넣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가 머리와 눈썹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러다 책상 서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가 언젠가 서재에서 열심히 체크를 해 가며 읽던, 그 책이었다. ‘권태기 연인들을 위한 지침 100선’이라는 제목의 책. 그는 굳은 표정으로 책의 중간 지점을 폈다.
「권태기 연인들을 위한 44번째 지침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모습을!> : 혹시 이미 일상적으로 굳어진 데이트 코스가 있진 않은지 점검해 보자. 언제나 둘 중 한 명의 집에서 넷플릭스나 보고 있지는 않은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정적인 장소보다는 활동적인 장소를 찾아 움직여 보는 것도 좋다. 또한,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것도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둘 사이에 색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여태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 주고, 새로운 매력을 어필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제시 제퍼슨이 말한 것도 일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매일 집에서 편한 모습으로만 보고…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 매일 그냥 티셔츠에 편안한 바지만 입고 있으니… 더 이상은 안 될 일이었다. 스타일에 변화……. 에이든 테일러는 제 머리를 괜히 쓸어 넘기다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조금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머리를… 전처럼 조금 짧게 자르고, 염색을 해 볼까……. 에이든의 머리엔 별별 생각이 다 들고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관심 받고 싶어서.
이번 달 타임지 커버에 사진이 실리고, 세간의 모든 관심을 받고 있는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의 눈길 한 번이 더 고팠다. 오늘은 집에 가기 전에 머리를 잘라야겠다. 스타일링도 좀 다르게 할 방법을 찾아보고……. 초조하게 얼굴을 매만지던 그가 생각했다. 머리를 자른 후에 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그는 정말 퇴근하자마자 샵을 들렀다. 옆머리는 짧고, 앞머리가 길어서 항상 뒤로 넘기던 머리는 확 짧아졌다. 많이 어색해서 에이든은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백미러에 비친 제 모습을 보던 그가 짧게 한숨을 쉬며 진에게 전화를 했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으니, 지금쯤은 끝났어야 했다. 안 끝났다면… 조금 기다리면 되니까……. 하지만 진은 또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가 전화를 끊고 차에서 몸을 내렸다. 센터의 정문으로 걷던 그는 가방을 메고 나오는 선수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아, 실례지만 지금 훈련 중인 선수나 코칭 스탭들 만나려면 어느 건물로 가야 하죠?”
“스탭들이요? 어…? 아, 진 코치님 찾아오신 거죠? 본관 4층으로 가면 되긴 하는데…….”
“네, 감사합,”
“근데 오늘 코치님 센터 안 오셔서… 가도 안 계실 거예요. 급한 일 있다고 하셨어요.”
진이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앞에 서 있던 선수는 잠시 눈치를 보다 갈 길을 갔다. 제가 들은 말에 굳어 있기도 잠시, 진동하는 핸드폰을 느낀 그가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댔다.
[ 에이든, 전화했었어? ]
“응, 진. 아직 센터야…? 많이 늦으면… 내가 데리러 가려고.”
[ 어…? 응! 아, 그게… 오늘 늦게 끝나니까 그냥 먼저 자! ]
그는 제 앞에 있는 건물을 빤히 쳐다봤다. 진은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진은 아직 여기라고 말하는 건물. 핸드폰을 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그래, 알겠어.”
전화를 끊고도 에이든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를 믿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그의 말이 맞는 건데…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진이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푸른 눈이 조금씩 탁해지고 있었다.
***
진 헤니는 오늘도 11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고, 씻고 침대로 돌아오자마자 끙끙거려야 했다. 선잠에 들어있던 에이든 테일러는 제 옆이 누군가의 온기로 채워지기가 무섭게 눈을 떴다. 하루 종일 그립고, 보고 싶었던 제 연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가 갈급한 사람처럼 입술을 찾았다.
“하… 에이든, 잠깐만…!”
한참이나 젖은 소리를 내며 맞붙어 있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진 헤니의 눈, 코, 입… 그것들을 찬찬히 뜯어보다 뺨에 입을 맞췄다. 진은 공격당하듯 이어진 입맞춤에 정신이 없어서, 잠시 숨을 골랐다. 에이든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입술부터 삼켜졌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진, 보고 싶었어…….”
에이든이 진의 목에 입술을 부비며 말했다.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달라고 칭얼대는 강아지처럼, 그는 코와 입을 진의 뺨과 목, 어깨에 비볐다. 진 헤니는 저를 눌러 덮은 커다란 몸을 잠시 떼어내려 했다. 물론 안 떨어지려 해서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에이든, 보고 싶었다면서 왜 얼굴을 안 보여줘…! 나 좀 봐봐.”
진은 그의 어깨를 떼어내며 옆에 있던 스탠드를 켰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든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가 아주 짧게 잘려 있어서 이목구비가 훨씬 훤히 드러나 있었다. 물론 전에도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겨서 아름다운 얼굴이 잘 보이긴 했지만… 느낌이 또 달랐다. 짧게 잘린 금색의 머리는 거친 느낌이 났다. 그게 섬세하면서 굵직한 선의 얼굴과 대비됨과 동시에 잘 어울렸다. 진은 한참을 그의 머리와 얼굴을 바라보다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머리 잘랐어?”
“…….”
에이든은 대답 없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진이 좋아할 지 확신이 없었다. 새롭게 보이는 건 좋은데, 이전이 더 취향이라면 좀 곤란했다. 에이든은 왠지 자신이 없었다. 그가 조금 흐린 얼굴로 머리를 만지고 있자, 진 헤니도 그의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짧은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잘 어울린다. 뭘 해도 예쁘겠지만…….”
“…마음에 들어?”
조심스럽게 뱉어진 물음에 진이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냐는 표정이었다. 제 위에 있는 에이든을 바라보던 진이 다정하게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뭘 해도 마음에 들어, 에이든.”
“…….”
“예쁘다.”
에이든은 그제야 웃었다. 흐리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의 눈에 예쁘다면 된 거였다. 할 수 있다면 더, 더 많이 예쁨 받고 싶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약간 초조해 보이기도 했고, 수줍어 보이기도 했다. 진은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옅게 마주 웃었다. 에이든은 다시 입술을 내렸다. 가볍게 떨어지던 입맞춤은 또 다시 깊어져서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입고 있던 티셔츠 아래로 손이 들어오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의 등허리를 쓸다가 티셔츠 끝자락을 잡고 가슴께까지 위로 끌어올렸다. 진 헤니의 몸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집요했다. 흥분으로 오르내리는 탄탄한 배,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면 달큰한 소리를 내는 빗장뼈… 아직도 자극당하는 게 낯선 건지, 입을 대면 당황스러워하는 가슴까지. 푸른 눈과 커다란 손이 제 아래에 있는 몸을 꼼꼼히 확인했다. 에이든의 눈은 무언가를 찾듯이 움직였다. 제 눈에 절대 띄어선 안 되는 게 있으니까.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흔적 같은 것.
왜 찾고 있는 건진 에이든도 알 수 없었다. 절대… 절대 진을 의심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딴 건 없었고, 에이든은 깊이 안도하며 진의 몸 위에 입 맞췄다. 전부 다 제 것임을 확인하는 것처럼, 혀를 내 핥아 보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깨물기도 했다,
“진, 사랑해… 아직도 처음처럼, 아니, 처음보다 많이 사랑해…….”
“하으… 아!”
매끈한 몸 위로 에이든 테일러가 새긴 흔적들이 하나씩 자리했다. 전부 다 제 것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한 톨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내쉬는 숨, 내뱉는 말… 향하는 시선과 눈에 가득 차 있는 따뜻함까지 전부 다 제 것이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편안한 사람인 척 내숭을 떨어오던 본성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진 헤니를 통째로 삼켜 버리고 싶은 욕망이 단전부터 차올랐다. 내 입을 거쳐 뱃속에 들어가면 다른 누구도 너를 못 볼 텐데,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진, 너는…?”
“하… 아윽!”
“나 사랑해?”
진의 옆구리를 깨물던 에이든이 검은 눈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너는, 나를 아직도 사랑하냐고. 진 헤니는 제게 내려오는 시선에 약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색색거리는 숨을 뱉던 진은 어딘가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에이든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푸른 눈이 절박했다. 어서 말해 달라고, 어서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이든, 나도 사랑해. 많이.”
얼마나…? 그 물음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이 저를 사랑하냐 물어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에이든은 그게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진에게 입 맞출 뿐이었다. 마음 안에 그득그득, 전하지 못한 말들이 차오르고 또 차오르는 밤이었다. 진에게 몸을 몇 번이나 욱여넣고, 그의 몸 안에 제 정액을 잔뜩 뱉어 놓아도 불안은 해소되질 않았다. 진 헤니 역시 에이든 테일러의 아래에서 몇 번째인지 모를 사정을 방금 막 마친 참이었다.
“으응…! 잠, 깐만… 에이든, 나 잠깐만…!”
“하…….”
에이든 테일러는 아래에서 들리는 애원에 잠시 허리를 멈췄다. 땀에 젖어 윤기가 흐르는 두 사람의 몸이 거친 숨으로 들썩였다. 움직임을 멈춘 에이든은 벌어져 있던 진 헤니의 다리를 더 넓게 벌리고 허벅지 뒤를 잡아 눌렀다. 그리곤 제가 들어가 있는 곳을 끈질기게 바라봤다. 끈적거리는 것들이 엉망으로 묻어 움찔거리는 곳. 그는 한동안 그 모습을 보다 몸을 더 깊이 쑤셔 넣었다. 네 몸 안에 더 깊이 들어갈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푸른 눈이 서늘했다.
“하악! 아! 아으…!”
“후… 진… 나 사랑해…?”
몸을 더 깊게 박아 넣으며 에이든 테일러가 물었다. 저를 사랑하냐고. 깊게 넣어진 것 때문에 고개를 젖히고 덜덜 떨던 진 헤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입에서 말도 안 되게 부끄러운 신음과 울음이 터지려 했다. 입술을 꼬옥 물고 있자,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입술을 가르고 엄지손가락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결국 벌어진 입 밖으로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고, 잠시 멈춰 있던 몸 역시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찔꺽이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아응! 아… 에, 이든…! 아! 흑, 으응!”
“진, 대답, 해… 하… 나 사랑해?”
탁한 숨소리와 뱉어진 물음은 절박했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몸이 쩍쩍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졌다. 한계까지 벌어진 진의 다리와 에이든 테일러를 받아들인 곳 모두 벌벌 떨리고 있었다. 진 헤니는 날아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제 위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 랑해… 에이든… 아! 하윽…! 사랑, 해…….”
에이든 테일러가 몸을 내려 진 헤니를 껴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한 치의 공간도 없도록 꼬옥 안은 뒤, 맨살을 부비고 그 위로 입을 맞췄다. 진을 완전히, 전부 다 가지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어서 자꾸 애가 탔다. 어떻게든 더 깊게, 깊게 몸을 박아 넣고 있는 지금까지도.
행위는 길었고, 진은 죽은 것처럼 잠에 빠져 있었다. 새벽 내내 에이든 테일러는 잠든 진 헤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매일 아침 너와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 같은데, 너도 그런지.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너를 사랑하는데, 너도 그런지.
자신은 매일 절망적일만큼 황홀하게 그와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은 그의 다감한 눈빛이, 또 다른 날은 그의 낮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제게 진 헤니는 언제나 새롭고 다 가지지 못해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2년이나 만나서 지겨워지고, 재미없어지는… 그딴 건 제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무슨 일이 있든, 제겐 그가 필요하니까. 그가 제게 거짓말을 해도… 그냥 그럴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제게 무언가를 숨기든, 거짓말을 하고 다른 곳에 가 있든… 그냥 다 없는 일이었다. 괜히 캐묻고 무슨 일이었냐 물었다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더 깊게 알게 됐을 때, 이런 관계마저도 가질 수 없는 게 최악이었다. 그럼 굳이 알 필요 없었다.
에이든이 잠들어 있는 진 헤니의 머리칼을 쓸었다. 진, 너는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가끔 참을 수 없이 무기력해져. 아무것도, 너 이외엔 아무것도 잘 모르겠어……. 네가 내게 오래 머물러 줬으면 좋겠어. 될 수 있다면 평생. 내가 다 참고, 내가 다 견딜게. 가끔 마음이 식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대로니까 괜찮아……. 난 너라면 다 괜찮아.
프러포즈는 예정대로 진행해야만 했다. 진이 많이 바빠서 계속 미뤄야 했던 걸, 이제는 제대로 해야만 했다. 몇 시간 뒤, 진이 잠에서 깨어나면 이번 주말은 꼭 제게 시간을 내 달라 청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에이든 테일러는 몇 번이고 진 헤니의 눈썹과 뺨을 쓸었다. 이제 곧 해가 완전히 뜰 것 같아 그가 몸을 일으켰다. 진이 일어나면 함께 먹고 나갈 수 있도록 따뜻한 차나, 간단하게 먹을 스프를 데우고 싶었다. 진 헤니가 깨지 않게 조심히 움직이던 그는 서랍 위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시 몸을 멈췄다. 진의 핸드폰이었다.
짧은 진동은 두 번 울렸다. 메시지가 온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푸른 눈에서 많은 감정이 엇갈리고 있었다. 보지 마, 그냥 그대로 나가. 어차피 아무것도 아닐 테니 굳이 확인하려 하지 마. 나가서… 그대로 평화롭고 따뜻한 아침을 준비하라고, 머리가 말했다. 하지만 푸른 눈이 갈등으로 흔들렸다. 머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제 마음은 전혀 다른 걸 말하고 있었으니까. 흔들리던 눈이 멈추고, 그가 뒤를 바라봤다.
에이든 테일러가 몸을 돌려 다시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잠시 허공을 보고 있던 그는 시선을 핸드폰 액정 위로 내렸다. 메시지를 읽어 내리는 눈이 차가웠다.
「일어나셨어요? 바뀐 전화번호는 이거예요. 이걸로 다시 저장해 주세요.」
「그리고 저도 보고 싶어요, 엄청 많이요.」
그러게… 보지 말라고 했지? 제 머리가 저를 비웃었다. 보면, 네가 이제 뭘 어쩔 거냐고. 에이든의 턱에 강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앞으로의 모든 건 예정대로였다. 진과 제 사이에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굳은 표정을 한 채 부엌으로 향했다. 진을 위해 스프를 데우고, 간단히 과일을 깎아야 했다. 토스트도 구워서 잼과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커피도 내려야 하고…….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 멍한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푸른 눈이 흐리게 풀려 있다가도, 이따금씩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친 감정을 품었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는 손길 역시 거칠었다. 아담은 이른 아침부터 소음이 나고 있는 부엌으로 따라 들어왔다. 제 아빠한테 아는 척을 해 봤지만 저를 봐 주질 않아서, 귀가 뒤로 내려가고 있었다.
사과를 반으로 자르기 위해 그가 과도를 꺼냈다.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힘이 들어간 손이 사과 위에서 헛돌았고, 결국 손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손을 베고 지나간 과도를 싱크대에 쾅 소리가 나게 던져 넣고 멍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왼손 검지 손가락이 깊이 베여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제 주인이 다친 걸 알고는 아담이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뱅뱅 돌았다.
“에이든…? 아침부터 뭐 해…?”
진은 아직 반도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왔다. 들리는 소음에 잠이 깬 모양이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옆으로 온 그는 에이든의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에 정신을 차렸다.
“에이든, 너… 손이… 조심해야지! 잠깐만, 비상약이, 우리 비상약 통이 어디 있었지?”
“…….”
깊은 상처에 놀란 진이 허둥댔다. 그는 찬장과 서랍장을 급히 열다가, 제 손목을 잡는 손길에 시선을 돌렸다. 에이든 테일러가 옅게 웃으며 진에게 말했다.
“진,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돼?”
“이번 주…?”
“응, 이번 주 주말에 꼭 같이 저녁 먹고 싶은데… 하루는 나한테 시간 내주면 안 될까?”
“에이든,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고 얘기하자. 이거 잠깐만…….”
진은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더욱 강하게 쥐어오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눈이 제 앞에 있는 연인의 상태를 살폈다. 걱정 어린 눈빛이 에이든을 향하고, 그런 눈빛을 읽은 에이든은 그저 웃으며 되물었다. 그의 손에서는 아직도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진, 이번 주 주말에, 나랑 저녁 먹어 줄래?”
모든 건, 모든 건 다… 예정대로였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없어야만 했다.
***
알렉스 그레이는 안색이 좋지 않은 진을 살폈다. 수영장 한쪽 구석, 벤치에 앉아 있는 진은 머리가 아픈 건지 제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모습을 보다 작게 한숨을 쉬며 그에게 향했다.
“진, 너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모니터링만 해도 힘든데… 뭐 하러 선수들 페이스메이커 역할까지 하려고 해. 하지 마.”
“아, 그냥… 그냥 내 욕심이야. 괜찮아…!”
진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알렉스가 생각하기엔 과했다. 스탭들이 전부 돌아가고 난 뒤에도, 그 혼자 선수들의 훈련 일지를 보거나 경기 영상을 분석하는 걸 알았다. 가끔은 페이스메이커까지 자처했다. 물론 곧 올림픽이라 헤드 코치를 도와서 뭐라도 하려는 건 알겠는데,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지… 속내를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상도 되질 않았다.
진 헤니는 저를 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알렉스에게 그냥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요즘 일 때문에 컨디션이 별로인 것도 있지만, 그것 말고도 신경 쓰이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진은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는 건지, 한쪽 손에 핸드폰을 꼬옥 쥐고 있었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지…? 자꾸 불안해졌다. 입술을 씹으며 핸드폰을 흘낏대던 진은 웅웅하고 울리는 핸드폰에 반가운 낯을 했다. 그는 환히 웃으며 벤치에서 일어났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 여보세요? 네, 지금 통화 괜찮아요.”
“……?”
어딘지 모르게 설레고, 들떠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통화하는 사람은 에이든 테일러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건가…?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무엇보다 둘이 헤어졌다고…? 알렉스가 진의 뒷모습을 보며 한쪽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진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통화 중인 그는 인상을 작게 찡그렸다가, 건너편에서 무슨 말을 한진 몰라도 아주 밝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알겠다 대답했다.
“네, 그럼 이번 주 수요일, 바로 내일 맞나요…? 아…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될까요? 그러게요, 저도 얼른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네, 그럼 그때 뵐게요.”
답지 않게 덧붙이는 말도 많았다. 수요일에 누군가와 약속을 잡은 그는 뿌듯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수요일, 바로 내일이었다. 진은 벌써 마음이 많이 들떴다. 아무래도 많이 기다렸으니까……. 진이 조금 달아오른 귓가를 매만졌다. 흐뭇하게 웃던 그는 뭔가가 생각난 건지 조금씩 낯빛이 흐려졌다.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보던 그는 어디론가 연락을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선수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그리고 알렉스가 느낀 것처럼 조금은 과하게 일을 했다. 안 그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초조한 표정이었다.
오늘 훈련이 모두 마무리되고, 진은 스탭실에서 제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는 가방에 이런저런 자료들과 노트, 다이어리를 넣었다. 물건을 챙기던 그는 제 사물함에 넣어 놨던 잡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번 달 타임지였다. 에이든 테일러가 표지를 장식한, 그 잡지.
“…….”
진은 옅게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쉬던 그는 표지에 박힌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봤다. 표지 속의 에이든은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돈도, 명예도… 전부 다 가진 사람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진 헤니는 표지를 가만 손바닥으로 쓸었다. 검은 눈동자 속 감정이 복잡했다.
그가 생각했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아직도 진 헤니라는 사람이 필요할지, 잘 모르겠다고. 그는 흐리게 웃다가 잡지를 사물함에 두고 문을 닫았다. 잡지 속 에이든 테일러는 사물함의 캄캄한 어둠 안에 혼자 놓였다. 진은 닫힌 사물함의 문을 보며 한숨을 쉬곤,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갔다. 자꾸 마음이 약해져서 큰일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수요일이라고 했으니, 질질 끌 필요 없이 목요일이 좋겠어……. 조금이라도 더 제게 시간을 준다면 분명 겁쟁이처럼 굴 게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못 하겠다면서 쥐구멍에 숨으려 할 게 분명했으니, 생각할 시간을 줘선 안 됐다.
진 헤니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에이든 테일러와 약속을 잡기 위해서. 밖에서 만날 시간이 안 된다면, 집에서라도 말하면 되니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그의 검은 눈이 결연했다.
***
「권태기 연인들을 위한 83번째 지침 <조약돌을 자처하지 말라> : 혹시 당신은 상대방에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진 않은가? 혹시 당신은 스스로의 일상을 모두 제쳐두면서까지 상대방에게 시간을 맞추거나, 그와의 만남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또 그 책이었다. 서재에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그는 입에 약을 넣고, 물을 마시면서도 책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누가 봐도 제 얘기였다. 약을 삼킨 그는 왼손의 팔찌를 매만졌다. 그리곤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렸다.
「만약 그렇다면 상대방에게 매력 없는 연인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언제든 원하면 만날 수 있으니, 당신의 존재가 당연해질 수도 있다. 희소한 것이 가치 있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얻기 어려울수록 갖고자 하는 욕망은 커지기 마련. 다이아몬드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언제든 고개를 숙이면 주울 수 있는 조약돌이 되지 말자. 당신이 자처한 조약돌은 매력적이지 않다. 상대방이 당신과 보내는 시간을, 그리고 당신 자체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하라.」
어려운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아파지는 머리에 마른세수를 했다. 제 생활은 당연히 있었지만, 진보다 중요치 않았다. 당연히 다 제치고 그에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말라 하니,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복잡한데 대체 다들 연애를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에이든, 손은 이제 괜찮아? 상처가 크던데, 병원에 꼭 가. - 사랑하는 진」
「좀 급하게 묻는 거긴 하지만… 목요일 저녁에 시간 괜찮아? - 사랑하는 진」
「나 그때 일찍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이 밖에서 저녁 먹을까? - 사랑하는 진」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에이든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어두워졌다. 목요일은 제시 제퍼슨과 미팅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아냐, 어차피 오후에 끝날 거고… 저녁까지 이어지면 그냥 빠져 나오면 되는 거니까.’
제시도 꼭 저까지 참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했으니 괜찮았다. 일정이 생겨도, 제쳐두고 만나고 싶었다. 계속해서 바빴던 진이 먼저 밖에서 보자고 하는데, 제가 뻗댈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다시 들뜬 표정으로 답장을 했다. 그러자고, 꼭 그러자고. 목요일에 시간이 났다고 저를 먼저 찾아 줘서 기뻤다. 누구인지도 모를 그 새끼 말고, 나를. 대체 어떤 씨발새끼인지 알 순 없었지만, 그 새끼보다 제가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 진과 알아온 시간도 훨씬 많았고… 나눠온 추억도 훨씬 많으니까. 물론… 처음에 제가 크게 잘못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지만… 그래도 여태 잘 지내왔으니까…….
푸른 눈이 흔들렸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떠오르려 해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사주한 사람들에게 얻어맞던 모습, 희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든 수영하던 모습… 그를 막 대하던 거지같은 제 말과 행동들……. 제가 손만 들어 올려도 겁에 질려서 이를 악물던 것도.
에이든 테일러가 다시 한번 고개를 털었다. 진이 그때 크리스마스 때 분명 그랬었다. 잃어버린 것들은 그대로 두고, 다시… 전부 다 새로 하자고. 앞으로 많이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니까……. 앞으로는 좋은 기억들만 갖게 해 줄 수 있었다. 평생, 평생 그가 쥐고 있는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었다. 가끔 다른 것들이 예뻐서 시선이 가도, 어쨌든 그의 손에 있는 건 저였으니까 괜찮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설레는 것과 동시에 하루에도 몇 번씩 견딜 수 없는 갈등에 시달렸다. 그의 손에 있고 싶은데, 그가 손바닥을 털어 버리면 끝이라는 생각이 에이든을 괴롭혔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손에 붙어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당신은 상대방에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진 않은가?」
조금 전까지는 분명 진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들뜨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또 조금 뒤에는 만나는 게 잘하는 짓인 건지 확신이 들질 않았다.
「언제든 원하면 만날 수 있으니, 당신의 존재가 당연해질 수도 있다.」
내가 너무 시시한지, 항상 너만 졸졸 쫓아다니고 바라봐서 질리는 건지… 그래서 다른 사람이 더 좋아진 건지. 매시간 에이든의 마음이 요동쳤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목요일은 와 버렸다.
「에이든, 오늘 6시에 여기에서 보자 - 사랑하는 진」
진이 보낸 장소를 확인하며 에이든 테일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뭐라 답장을 하려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트의 단추를 잠갔다. 옆에 있던 제시 제퍼슨 역시 오늘 미팅 상대를 맞이하기 위해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둘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미팅 몇 시에 끝나는데요.”
“모르지. 쟤네가 영국에서 왔는데… 일찍 끝나겠니? 접대 같은 거 안 해 본 놈처럼 왜 그래? 알 거 다 알면서.”
제시 제퍼슨이 여유롭게 웃으며 런던증권거래소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능숙하고, 또 능숙했다. 제시와 인사를 끝낸 두 남자가 에이든 테일러에게 다가왔다.
“잡지 커버에서 봤을 때 모습이랑은 또 느낌이 다르시네요. 뵙게 돼서 기쁩니다. 조 스펜서라고 합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에이든 테일러입니다.”
능숙한 표정으로 웃고 있지만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저도 모르게 계속 그 책의 구절을 상기하고 있었다. 진에게 사랑해 달라 엉망으로 매달리고 싶은 저와, 그러면 받을 사랑도 못 받겠다고 비웃는 제가 시시때때로 싸워댔다.
「혹시 당신은 스스로의 일상을 모두 제쳐두면서까지 상대방에게 시간을 맞추거나, 그와의 만남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상대방에게 매력 없는 연인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에이든은 메시지 하나를 전송했다. 마지막으로 전송하는 버튼을 누르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푸른 눈을 스쳐지나갔지만… 결국 메시지는 보내진 뒤였다.
「진, 미안한데 오늘 미팅이 늦게까지 이어질 것 같아. 대신 이번 주 주말에 훨씬 좋은 데서 저녁 먹자.」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에게 사랑 받고 싶었다. 그에게 관심 받을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이든 쓰고 싶었다. 하지만 맞는 방법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진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어떻게 하면… 나 하나만 사랑해 줄 수 있겠냐고.
재력과 명성, 아름다운 외관을 두른 남자는 겉으로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 속이 유약하게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7시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씩 넋이 나가고 있었다. 오늘 못 만날 것 같다는 메시지에 진은 간단히 알겠다고 답했고, 그게 전부였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랑 간간히 웃고, 농담을 하거나 사업과 관련된 얘기를 나눴다. 요즘 스페인과 영국이 블록체인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얼마나 많은 금융 스타트업 기업들에게 투자하고 있는지… 하나도 쓸모없고, 재미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8시가 됐다. 제시 제퍼슨은 옆에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상태가 안 좋음을 알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때때로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또 짐짓 여유로운 척,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잇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에이든은 말을 하다가도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더 온 연락은 없는지 메시지창을 열어 보기도 했고, 부재중 전화가 찍힌 건 없는지도 확인했다.
하지만 아주 안타깝고 슬프게도… 메시지도, 부재중 전화도 없었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든 그는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제 앞에서 영국 억양으로 뭐라 말을 하고 있는 저 남자 하나도, 지금 제가 앉아 있는 곳 옆 테이블에서 사랑에 겨워 웃고 있는 연인 한 쌍도… 전부 다 이상했다. 갑자기 멀미라도 나는 것처럼 속이 좋질 않았다.
제가 지금…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사랑하는 진과 초저녁부터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아까 진이 보낸 레스토랑은 꽤나 로맨틱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여유롭게 얼굴을 보고, 그동안 못 했던 얘기도 많이 하고… 그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제게 중요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사람들과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 갑자기 다 이상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푸른 눈이 흔들리다, 옆에 앉아 있는 제시 제퍼슨을 바라봤다. 제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여기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얼른 꺼지란 소리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마지막까지 열심히 표정과 목소리를 관리했다. 적당히 센스 있고, 매너 있는 모습으로 그는 자리를 벗어났다. 뚜벅뚜벅 걷던 걸음은 조금씩 빨라져, 이내 뛰는 걸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모든 손길과 발걸음이 급했다. 빨리, 빨리 돌아가야 했으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진을 만나서 같이 있고 싶었다. 등신 같이 무슨 생각으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선택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시동을 걸며, 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아, 진…! 그,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그게, 갑자기 못 만날 것 같다고 해서 미안해. 내가…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지…? 미안해, 진. 나 지금 빨리 돌아갈게. 아… 저녁은 먹었어?”
[ ……. ]
“혹시 안 먹었으면 잠깐만 기다려 줄래?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 내가 들어가는 길에 먹을 거 사서 갈게. 아니면… 저녁 먹었으면 케이크랑 와인 같은 거라도 사 갈까?”
에이든의 목소리가 조급했다. 그는 빨리 진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진 헤니는 왜인지 대답이 없었다. 에이든이 아직까지 문이 열려 있을 유명 제과점을 급히 생각해 낼 동안, 진은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 에이든, 나 지금 밖에 나와 있어……. ]
밖이라는 말에 에이든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졌다. 밖에? 밖에 어디? 누구랑 있는데…? 튀어나가려는 질문들을 가까스로 막고, 그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렇구나……. 많이… 늦어? 나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볼일 다 보고 들어와, 진.”
[ 그게… 언제 들어갈지 잘 모르겠어……. ]
그 뒤로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핸들을 쥔 에이든의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진. 에이든은 속으로만 그에게 물었다. 진 헤니도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누구와 있는지, 언제쯤 갈지, 늦게 들어갈 예정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알겠어, 진. 일단… 나 집에 있을게. 들어올 때 연락해.”
[ 응……. ]
아주 이상한 통화는 그렇게 끝났고,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 멍한 낯으로 운전을 했다. 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케이크를 사기 위해 베이커리로 향했다. 늦게라도 들어오면… 오늘 미안했다고 얘기를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갑자기 약속을 취소해 버려서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거의 영업이 끝난 베이커리에 급히 들어갔다. 마감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서, 주인은 조금 곤란해 보였다. 에이든은 케이크를 꼭 사고 싶다고, 답지 않게 멋쩍고 어색하게 웃으며 몇 번이나 양해를 구했다. 주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기엔, 그가 많이 절박해 보였다.
에이든은 체리가 들어간 초콜릿 케이크를 샀다. 하나만 사기에는 뭔가 아쉬워서 남아 있는 파이와 쿠키도 포장했다. 적당히 쌉쌀한 레드와인도 차의 조수석에 놓였다.
와인과 케이크 박스, 파이와 쿠키가 들어 있는 박스를 잔뜩 안고 들어온 에이든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담이 그의 주변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와인 잔과 예쁜 그릇들을 꺼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부엌을 채웠다. 테이블 위로 셋팅을 마친 그는 조금 휑해 보이는 것 같아 인상을 찡그렸다. 부엌의 조명을 끄고, 옆에 서 있던 인테리어용 스탠드를 켜 보던 그가 적당한 조도에 그나마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캔들 같은 걸 좀 사 놓는 게 좋겠다……. 급히 준비하다 보니 엉성하기 짝이 없어서 아쉬웠다. 테이블을 죽 둘러보던 그는 그제야 자켓을 벗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까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그냥 셔츠와 수트의 바지를 입고 있기로 했다. 넥타이만 푸르고, 너무 편하게 있는 것도 별로니까……. 그는 셔츠 윗 단추 하나를 풀고, 소매의 단추를 푼 뒤에 접어 올렸다. 이때의 시간이 9시였다.
“아… 아담, 오자마자 인사를 못했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옆에 앉아 있는 아담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담은 이제야 절 봤냐는 것처럼 꼬리를 붕붕 치고 있었다. 이제라도 봐 줘서 기쁘다는 듯 웃고 있어서, 에이든이 금색 털을 가만 쓸어 주었다. 아담은 한참 동안 그 손길을 받고 있다가, 에이든의 발치에 엎드렸다. 둘 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한 사람만 기다리고 있었다.
10시, 11시… 12시. 언제쯤 오냐는 메시지에도 진은 대답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이든의 낯은 점점 차갑게 굳어 갔다. 그는 제 앞에 있는 초코 케이크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위에 얹혀 있던 생크림은 조금 녹아서, 형체를 잃고 무너지는 중이었다.
1시, 2시… 그리고 3시. 아담은 아직도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아빠를 앞발로 툭툭 두드렸다. 에이든은 한손으로 눈가를 가려 덮은 채, 아직도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아담이 이제 들어가서 자라는 듯이 에이든의 무릎을 콧잔등으로 밀었다.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만 부엌에 울릴 뿐이었다.
4시, 5시… 마지막으로 6시. 에이든의 발아래에 엎드려 누워 있던 아담이 귀를 쫑긋거렸다.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담은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 앞에서 꼬리를 치다가, 뒤를 돌아봤다. 원래라면 저와 함께 문 앞에서 아빠를 맞이해야 하는데, 에이든이 따라오지 않는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아담은 어서 오라는 것처럼 작게 짖었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성마른 얼굴을 쓸어내릴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진이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
“…….”
“…….”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에이든은 평소와 다른 차림의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를 다녀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신경 쓴 모습이었다. 평소에 수트를 입는 게 어색하다며 잘 입지도 않던 그는 까만색 수트를 입고 있었다. 언제나 수수하게 내려와 있던 머리도 신경 써서 드라이 돼 있었다. 에이든은 그런 진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낮게 공간을 울렸다.
“어서 와, 진…….”
“에이든…?”
집으로 들어오던 진 헤니는 에이든과 그 앞에 놓인 것들을 살피다 작게 인상을 썼다. 대체 왜 이러고 있냐는 것처럼. 에이든은 흐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에게 가깝게 다가가던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에게서는 옅은 술 냄새와 그가 입에도 대지 않는 담배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해 오던 게…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었다.
진은 아직도 술기운이 가시질 않은 건지,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에게 가깝게 다가가 어서 오라는 의미로 뺨과 입에 입을 맞추려 했다. 뺨에 떨어지는 입술에 잠시 움찔했던 진 헤니는 에이든이 입술에 입을 맞추려 하자,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몸을 뒤로 물렀다. 에이든 테일러의 푸른 눈에 사나움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아… 나 술 냄새 나서…….”
“…갑자기, 웬 술을 마셨어, 진…….”
“그냥… 친구들이랑 잠깐 만났어…….”
진 헤니가 입고 있던 검은 자켓을 벗으며 말했다. 그는 에이든에게서 벗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하려 했다. 술 냄새도 나고 있었고, 진 헤니도 제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고 있음을 알았다. 썩 유쾌한 냄새들은 아니라서 옷을 갈아입고, 얼른 씻고 싶었다. 진이 한 손에 자켓을 들고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에이든은 저와 눈도 잘 맞추지 않고 품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에 주먹을 꾸욱 쥐었다.
에이든이 드레스룸으로 향하던 진의 팔을 강하게 낚아채듯 잡아 세웠다. 자켓을 쥐고 있던 팔이 흔들리고, 자켓 주머니에서 무언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닥에 떨어지며 활짝 열린 상자, 그 안에는 반지 하나가 보였다.
두 사람 다 아무 말 없이 상자만 보고 있었다. 당황으로 얼어 있던 진이 급히 상자를 주워 올렸다.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이내 꾸욱 입을 다물었다. 검은 눈이 많이 흔들려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에이든의 표정이 점점 흐려졌다.
“이, 이거는…….”
“…….”
“에이든, 이게 그러니까…….”
진은 거의 울 것 같았다. 에이든은 말없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반지 케이스를 바라봤다. 그때 메시지에서 봤던, 그 사람이겠지. 그 새끼가 결혼하재…? 막연히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진은 반지 케이스를 매만지고 있었다.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소중하게. 에이든 테일러는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진, 있잖아.”
“……?”
“다른 건 다 모르겠지만, 내가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은 너를 사랑했다가도,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야.”
진 헤니는 굳은 얼굴의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봤다. 아직도 반지 케이스를 꼬옥 쥔 채였다. 에이든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푸른 눈이 흐린 빛으로 진을 바라봤다.
“진, 나는… 너처럼 숨쉬고, 너처럼 눈을 깜빡이고… 너처럼 웃고, 너처럼 말하고, 너처럼 걷는 사람만 사랑해. 근데… 세상에 그게 너밖에 없어서, 나는 너만 사랑해. 나는 너만 필요해, 진.”
“…….”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나는 평생 너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어. 근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은… 굳이 네가 아니어도 되잖아. 그 사람들은 언제든 너를 떠날 수 있잖아…….”
절박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손에 들려 있던 반지 케이스를 빼앗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진 헤니는 제 앞에 있는 에이든 테일러를 살폈다. 그가 지금 말하는 것들이 무슨 소리인지……. 다른 사람…? 영문을 알 수 없는 진 헤니의 표정이 점점 찡그려졌다. 에이든은 그 표정을 뭐라 해석한 건지, 갑자기 제 서재로 향했다. 진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아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는 것밖에 하질 못했다.
서재에서 나온 에이든은 새벽 내내 밖에서 연락도 되지 않던 제 연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진 헤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에이든이 제 손에 들고 있던 반지 케이스를 열며 진에게 말했다.
“진, 그냥… 이렇게 돌아만 와. 평생 내가 기다릴 수 있어. 밖에서 누굴 만나든, 마지막엔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 와, 응?”
“에이든…?”
“그 새끼보다 내가 훨씬 잘할 수 있어. 마음에… 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면, 말을 해 주면… 내가 고칠게. 내가 노력할게, 진.”
그 새끼…? 진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런 진을 올려다보는 에이든의 표정도 점점 슬퍼졌다. 평소에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말을 해 줬다면… 제가 다 고쳤을 거였다. 지루하거나 질렸다면… 뭐라도 새롭게, 머리를 바꾸든… 옷을 달리 입어 보든… 다 할 수 있는데, 말만 해 주면 다 할 수 있는데…….
“진, 내가 전부 다 맞출,”
“에이든, 혹시… 이틀 전쯤에 내 핸드폰 봤어…?”
진 헤니는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입을 달싹이다 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핸드폰… 을 내가 막 뒤져 보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때 메시지가 왔는데 어쩌다가 본…….”
“하…….”
진 헤니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얼굴을 가려 덮었다. 깊은 한숨에 에이든 테일러의 말이 멈췄다. 핸드폰을 뒤지거나, 진을 의심하고 감시한 게 아니었다. 그런 게 절대 아니었다. 에이든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진. 나… 나 안 그랬어. 뒤져 본 거 아니야. 정말이야…! 그게, 어쩌다가…….”
“에이든…….”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에 에이든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정이 다 떨어졌을까 봐, 진이 이제 더 이상 저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봐 무서웠다. 진 헤니는 제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에이든을 보다가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진은 제 핸드폰에서 에이든이 본 것 같은 메시지를 열었다. 그리곤 에이든에게도 화면을 보여줬다.
“에이든, 이거지…? 네가 본 거.”
“그게…….”
“에이든, 이거는…….”
진은 정말 미치겠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든, 이거는 토미야…!”
“…응?”
“토미… 하, 토미가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어…! 자, 이거 봐.”
진 헤니는 메시지창을 아래위로 움직여가며 그간 주고받은 문자를 에이든에게 보여 줬다. 에이든의 푸른 눈이 깜빡거렸다. 멍한 눈이 메시지들을 읽어 내렸다.
「일어나셨어요? 바뀐 전화번호는 이거예요. 이걸로 다시 저장해 주세요. - 천사 토미」
「그리고 저도 보고 싶어요, 엄청 많이요. - 천사 토미」
여기까진 에이든 테일러가 봤던 메시지였다.
「토미, 선생님도 엄청, 엄청 보고 싶어. 오늘은 훈련 어땠어? 니콜이랑은 많이 친해졌니?」
「오늘도 재미있었어요. 니콜이랑은 많이는 못 친해졌어요. 니콜은 인기가 너무 많아서 말 걸기가 무서워요. - 천사 토미」
「그럴 수 있지. 선생님도 알아. 그래도 괜찮아, 토미. 계속 그 애랑 말하고, 친해지다 보면 니콜이 너의 진가를 알아 줄 날이 올 거야.」
메시지를 읽던 에이든이 진의 눈치를 봤다. 진 헤니는 이제 됐냐는 표정으로 제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 헤니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대체 어쩌다… 저런 오해를…….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려 덮던 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에이든, 나는 다른 사람 같은 거 없어…!”
“…….”
“나한테도 너밖에 없는 거 알면서… 왜 그런…!”
진이 말을 멈추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긴,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저런 내용이었으면… 저 같아도 가슴이 덜컥 떨어졌을 거였다. 충분히 오해할 수 있던 내용이라 괜히 속이 상했다. 대체 그게 뭐냐고 묻지도 못했을 게 뻔해서, 괜히 저까지 마음이 답답했다. 에이든은 멍한 낯으로 진에게 물었다.
“그럼 저 반지는…?”
“하…….”
진 헤니는 또 깊게 한숨을 쉬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아까의 에이든 테일러처럼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검은 눈에 체념이 가득했다. 어차피 이미 다 망한 거였다. 진은 흐린 얼굴로 케이스를 열고, 에이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에이든… 나랑 결혼해 줄래…?”
“……?”
“다 망했어…. 망한 거야…….”
검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서럽고 창피하고, 부끄럽고… 술기운 위로 별별 감정이 다 섞여들고 있었다. 계속 넋을 놓고 있던 에이든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이든은 급히 진과 시선을 맞춰 앉았다.
“진…!”
“내가 이거 반지… 프랑스에서 받아 보느라… 맨날 새벽에 잠도 못 자고, 전화 받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뒤로는 통곡이었다. 이미 망한 거니, 더 이상 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은 엉엉 울었다. 여태 프러포즈를 준비한답시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맞춘 반지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건지…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핸드폰만 붙잡고 있어야 했다. 중간중간 뉴욕에 있는 분점에 들러서 케이스의 재질이나, 랜더링 된 디자인을 확인하러 가기도 해야 했다.
수요일에 반지가 뉴욕에 도착한단 연락을 받고 얼마나 들뜨고, 긴장이 되던지……. 커스터마이징한 반지라 실물을 볼 생각에 잠도 안 왔다. 예쁘게 잘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사이즈도 잘 나왔어야 하는데,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들었다.
“오늘, 오늘 좋은 데서… 말하고 싶었던 건데… 갑자기 못 만난다고, 나는 거기… 약속 시간 두 시간 전부터 나가 있었,”
“진,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다른 사람이 어디 있어, 다른 사람이…! 내 핸드폰에, 네가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파파존스 사장님밖에 없어!”
에이든과의 약속이 취소되고, 진 헤니는 급하게 나디아에게 연락을 했다. 생각보다 마음에 타격이 커서, 누구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나디아 놀즈는 진에게 전화를 받자마자 튀어나왔다. 먼저 나오란 소리를 잘 하는 놈도 아닌데, 목소리까지 영 아니었으니 그녀에겐 비상상황이었다.
그녀는 진의 옷과 머리를 보고 대략적인 이유를 추측해 냈다. 그리곤 그런 진을 질질 끌고 바에 갔다. 진 헤니를 마음고생 시키는 놈은, 똑같이 마음고생을 해 봐야한다는 게 그녀의 철칙이었다. 그렇게 반강제로 이뤄진 외박이었다. 물론 절반 정도는 자의였다. 진 헤니도 제게 그런 반항심이 있음을, 이번에 새롭게 깨달았다.
“진, 나는… 내가 오해해서 미안해…….”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진이 아이처럼 엉엉 우는 통에 에이든이 그의 뺨과 눈가를 닦아 줬다. 프러포즈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데다가, 맘처럼 풀리지 않는 것에 속이 많이 상했던 건지 진 헤니의 눈물은 쉽게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술과 먼 진 헤니는 몰랐겠지만, 그의 주사는 아마… ‘울기’ 같았다. ‘한탄’은 덤이었다.
“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 자꾸, 너는 자꾸 막… 더 유명해지는데…!”
“……?”
“자꾸 마음은 급하고… 나는 여태, 해 온 것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결혼하자고 말을 하려면, 나도 뭐가 있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
그 뒤로 와앙 하고 터지는 울음에 에이든 테일러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새려고 해서 아주 곤란했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계속 자신이 없어지는데… 내가…!”
“진…….”
“그 잡지, 다른 사람들이, 못 보게… 다 불태워 버리고 싶은데…! 방법도, 없고…!”
“하하, 진짜 미치겠네…….”
항복이었다.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환히 웃었다. 환하게 웃는다고 표현하는 걸로도 부족할 만큼 밝고, 해사하게. 행복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제 앞에 있는 사람의 사랑스러움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 버린 웃음이었다.
“진, 네가 나한테 자신이 없어질 일이 뭐가 있어…….”
“그럼 네가 앞으로 잡지에, 실리지 마…!”
“알겠어…….”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를 품에 껴안았다. 바보처럼 계속 웃음이 나왔다. 온 세상에 있는 사랑스러움을 다 모으면 진 헤니가 나올 것 같았다. 에이든은 마음이 많이 벅찼다. 목까지 애정과 사랑이 차올랐다. 에이든이 진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머리칼, 톡 튀어나와 있는 눈썹 근처의 뼈, 이마, 광대뼈……. 하나하나가 전부 다 사랑스럽고, 어여뻤다.
“진, 그럼 나랑 결혼해 줄 거야…?”
귀 옆에서 속삭이듯 뱉어진 말에 진이 조금씩 울음을 멈췄다. 얼마나 맹렬하게 눈물을 뿜어댄 건지, 진의 눈은 벌써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째려봐도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저를 노려보는 눈을 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웃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진 헤니는 그런 에이든 테일러를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너는… 나랑 결혼해 줄 거야…?”
“진,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네가 먼저 대답해…!”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바보 둘이었다. 뭔 이상한 대화인지, 엉엉 우는 소리에 낑낑대던 아담마저 두 사람을 외면했다. 아담은 두 사람의 사랑싸움이 큰 일이 아니란 걸 느꼈는지, 소파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바보들 싸움에 끼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진은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 에이든을 노려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눈을 휘어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오물거리던 입이 드디어 대답을 했다.
“나는 에이든 너랑 결혼하고 싶어…….”
“응, 진.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입에 입을 맞췄다. 쪽쪽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지던 입술이, 나중에는 짙게 입술을 삼켜 물었다. 진의 입에선 알싸하고 달달한 술 냄새가 났다. 겨우 칵테일을 마시고 이만큼 취한 것 같았다. 보드카나 위스키도 아니고… 초코맛 칵테일을 앞에 두고 심각한 낯을 한 그가 상상이 됐다. 이렇게 섹시한 검은색 셔츠를 입고는 베일리스 밀크 같은 걸 시켜 먹다니, 정말 큰일이었다. 한참이나 혀를 얽던 에이든이 진의 허리를 강하게 당겨 안으며 말했다. 커다란 손이 셔츠 위를 훑어 내렸다.
“진, 앞으로 수트 같은 건… 입지 마.”
“왜…? 안 어울려…? 이상해?”
“…응, 안 어울려. 절대 입지 마. 앞머리도 다 내리고 다녀. 얼굴 안 보이게.”
에이든 테일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진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오든 말든, 에이든은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절대 입으면 안 되니까. 앞머리를 뒤로 넘기니까 매끈하게 잘 올라간 눈매가 너무 잘 보여서,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에이든은 바지 안으로 들어가 있는 셔츠를 위로 끄집어내려다, 눈을 가늘게 떴다. 잘 빠지질 않는 걸 보니…….
“진, 안에 셔츠 가터 했어…?”
“응…….”
“…그래?”
정말… 아주 큰일이네…….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등을 쓸어 올리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자꾸 음흉하게 웃게 돼서 얼굴을 보여주면 안 됐다. 진의 목과 턱에 입 맞추던 그가 귓가에서 낮게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침대로 갈까…? 아담이 놀라면 안 되잖아.”
진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르는 걸 보며 에이든이 웃음을 삼켰다. 진 헤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에이든 테일러의 미소는 짙어졌다.
아담은 슬쩍 눈을 떠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두 아빠는 저를 돌아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참나, 하루 종일 아빠 둘만 기다렸는데… 한 사람은 부엌에서 멍 때리느라 저를 보지도 않았고, 한 사람은 집에 오자마자 저한테는 인사도 안 하고 엉엉 울더니만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담은 빛이 밝게 들어오는 창문을 보다가 푹하니 한숨을 쉬었다. 아침밥은 좀 챙겨 주고 들어가지……. 착한 제가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담이 눈을 감았다. 새벽 내내 아빠 하나를 지켜주느라 피곤했으니, 이제 잠을 자야했다.
“아으…! 잠깐, 아! 으응… 천, 천히…!”
영특한 골든 리트리버는 애써 방 안의 소리를 모른 척했다. 아빠가 끙끙거리면 원래 도와줘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 없는 끙끙댐이란 걸 숱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아담이었다. 아침밥도 조금 이따 먹어도 되고, 저를 아는 척도 안 한 건 다 이해할 테니까, 대신 그냥…….
“하악! 아…! 아, 나… 나, 이거는…!”
“하… 진, 힘… 빼, 너무, 윽… 너무 조여…….”
이젠 조용히 잠을 좀 자고 싶었다, 제발.
***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여유로운 오후를 맞이했다. 아침부터 사랑이 불타올랐으니, 금요일은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둘 다 아주 자연스럽게 회사와 센터를 재꼈다. 그간 열심히 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라 핑계를 대면서.
진은 사실 좀 걱정하면서 헤드 코치에게 못 나갈 것 같다고 전화를 했는데, 오히려 코치가 그의 결근을 쌍수 들고 환영하는 지경이었다. 제발, 제발 좀… 무리해서 좀 하지 말라는 게 코치의 마지막 전언이었다.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는 어차피 자기 회사였으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사실 그의 결근은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었다. 하이드가 안 나왔다며 모든 직원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게 뻔했다.
에이든은 다정히 웃으면서 진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정확히는 반지를 끼고 있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진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이 땡땡 부은 게 느껴져서 이불과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에이든은 진의 얼굴을 덮고 있는 이불을 치우며 밝게 웃었다. 대체 왜… 진은 울고 나면 왜 입술이 부을까…? 정말 알 수 없었다.
“살찐 병아리.”
“하지 마…….”
“근데 진짜 입술은 왜 붓지…? 신기하네…….”
“보지 말라고!”
진의 얼굴은 다시 이불로 가려졌다. 에이든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고 있는 제 연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불을 덮으면 뭐 해… 내가 이불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에이든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도 이불을 머리까지 위로 올려 덮었다. 흰색의 이불 아래, 두 사람의 다정한 시선이 오갔다. 진은 조금 창피하고 멋쩍은 건지 슬쩍 눈을 피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도 행복해 보였다.
“진, 그때 이불 아래서 나한테 물어봤던 거… 다시 물어봐 주면 안 돼? 뭐가 제일 좋냐고, 뭐가 제일 특별하냐고 물어봤었잖아.”
“…….”
“빨리 다시 물어봐 봐.”
진은 점점 능글맞아지는 에이든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물어보라는 건지, 제가 아무리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자꾸 쑥스럽고 부끄럽게……. 한숨을 푹푹 쉬던 진은 슬쩍 눈을 떠 제 앞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봤다. 빨리 물어보라는 듯이 반짝거리고 있어서, 결국 진이 입을 열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에이든에게 물었다.
“너는… 세상에서 뭐가 제일 좋고, 특별한데, 에이든…….”
“나는 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고, 제일 특별해.”
“…….”
“제일 사랑해.”
밝게 웃으면서 말하는 에이든 테일러의 모습에 결국 진 헤니도 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은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든,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네가 제일 예뻐.”
“…….”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계속해서 진 헤니의 네 번째 손가락을 매만졌다. 이제 손목을 만져 보는 습관 대신, 또 다른 버릇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제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버릇도 조금 달라질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엔 진 헤니가 준비했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각자가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를 끼고, 서로에게 평생을 약속했다. 두 사람 모두 예쁘게 웃으며 그 반지를 매만졌다. 제 연인이라는 확인, 저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는 증거. 이젠 평생… 행복할 예정이었다, 둘이 함께.
외전 4. Tell me what you want
아주 쾌청한 날씨, 뉴칼레도니아 섬의 한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행복한 오늘과 어울리는 밝은 색들로 빛났다. 햇살이 성당 안에 따뜻한 색으로 들어서고, 한 남자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그 빛 아래 서 있었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윤기 있게 반짝였다. 그가 입고 있는 검은색 턱시도의 어깨도, 그가 신고 있는 검은 구두의 코끝도.
진 헤니는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성당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당에는 축하를 위한 하객도, 주례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슴이 많이 뛰었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쿵쿵거리고 있었다. 이제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제 사랑하는 사람이… 아주 아름답고,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리란 걸 알았으니까.
땀이 차오르는 주먹을 괜히 작게 쥐었다 펴던 그는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바깥의 빛이 문 안으로 끼쳐 들어오고, 그 빛 무리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화사하고 밝은 빛보다 더 빛나는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세상에 있다면, 태양도… 달도… 아무것도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저렇게 환하게 빛나는데…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제 세상에 그 하나만 있다면 충분했다. 밝은 빛 아래 서 있던 사람은 큰 보폭으로 성당에 걸어 들어왔다. 그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진 헤니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쁘게 웃던 진은 결국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선명한 코발트블루색의 턱시도를 입은 에이든 테일러는 그 품에 한 가득 빨간 장미를 안고 있었다. 장미는 대체 몇 송이인지도 모를 만큼 많았다. 그것들은 에이든의 품에서 한두 송이씩 떨어지기도 했고, 그 꽃잎이 바닥에 톡톡 떨어지기도 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아름다운 남자의 품에선 향기로운 꽃잎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게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벅차고, 행복해서 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진 헤니의 앞까지 걸어온 에이든 테일러는 벌써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그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에이든은 품에 있던 장미를 저와 진이 서 있는 곳 주변으로 흩뿌리듯 내려놓았다. 멋지게 차려 입은 두 사람 주변으로, 두 사람의 마음만큼 정열적이고 새빨간 장비가 뿌려졌다. 에이든은 따로 묶어둔 장미 꽃다발을 제 앞의 연인에게 내밀었다.
“부케 대신이야, 진.”
“하하…….”
진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소리 내 웃는 와중에도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렀다. 에이든 테일러는 예쁘게도 우는 진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진은 핫초코에 마시멜로우를 올려 먹는 걸 좋아했는데, 여태 그와 함께 먹었던 그 핫초코가 심장을 절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에이든 테일러는 가슴이 많이 뜨겁고 따뜻했다. 또 동시에 달고 말랑말랑하다고 느껴졌다. 진이 핫초코 위로 왕창 뿌려둔 마시멜로우들이 제 심장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가만 바라봤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푸른 눈과 검은 눈에 가득 차있는 사랑과 가슴 벅찬 많은 감정들.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가 느끼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해, 너만, 평생토록. 두 사람의 눈이, 내뱉는 숨이, 깜빡이는 속눈썹이… 그리고 눈에 차올라 결국 뺨으로 흐르는 눈물이 쉴 새 없이 사랑한다 말했다. 단 한 음절도 소리로 뱉어지지 않았지만, 둘 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 짓궂게 눈을 떴다. 그는 진 헤니가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뽑았다. 가시가 없는지를 잘 확인하던 그는 그 꽃을 진의 귀에 살며시 꽂아 주었다. 진은 쑥스러운 얼굴로 맑게 웃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과 발그레한 뺨을 손바닥으로 가만 쓸어 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잘 모르겠어, 진.”
“…….”
“세상에 있는 어떤 단어를 갖다 붙여도… 너를 설명하거나, 너를 표현할 수 없을 거야.”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금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네가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플 만큼 떨리게 하는지… 하나도 설명할 수 없을 거였다. 그래서 자꾸 목이 메었다. 지금 이 순간을 감히 말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했다.
진 헤니는 푸른 눈에 고여 있는 눈물과 행복, 그리고 옅게 보이는 슬픔과 후회를 읽을 수 있었다. 제 뺨의 눈물을 닦던 진은 품에 있는 장미 한 송이를 뽑았다. 그리곤 밝게 웃으며 에이든 테일러의 귀에도 꽃을 꽂아 줬다. 진은 그의 눈가를 가만 쓸어 주었다. 괜찮다는 것처럼. 에이든 테일러는 그 다정한 손길을 가만 느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한다는 그 책에서 그랬는데… 사랑은 간청으로 얻는 게 아니라고.”
“응……?”
뜬금없는 말이라 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웃었다. 에이든은 진지하다는 듯이 인상을 잠깐 찡그렸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진은 알겠다는 것처럼 표정을 관리했다. 진중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검은 눈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가시질 않았다.
“요새는 그 책이 틀렸단 생각을 해. 그때는 멋지고 정답이라 생각했던 말들도, 진 네 앞에 가면 다 소용이 없어서……. 앞으로 내 인생의 모든 답은 너 하나일 거야.”
“…….”
“답도 없는 삶이었는데… 네가 와 줘서, 나는 많이 감사해.”
너를 간절히 청해서, 네가 내게 와 줬으니 그 책은 틀린 거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쓴 책들도 진의 앞에선 다 무용지물인 게 분명했다. 그만이 제 인생의 정답이고, 그만이 제 삶의 진리였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그 진리 하나만을 숭배하고, 좇을 준비가 돼 있었다. 진은 에이든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가만 생각했다. 그리곤 다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든, 나는 네가 간청해서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
“네 사랑이 나를 끌어당겨서 너를 사랑하는 거야.”
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다 작게 속삭였다. 나도 그 책 읽었어. 에이든 테일러가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진은 뿌듯한 얼굴로 웃다가 에이든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을 가만 쓸던 진이 제 사랑하는 사람을 올려다봤다.
“에이든, 앞으로 평생…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지켜줄게…….”
“…….”
“약속할게.”
이제 에이든의 손톱은 푸르게 멍들거나 깨질 일이 없었다. 누군가 그의 손을 잡을 때, 겁먹은 낯으로 손을 등 뒤로 숨길 일도 없을 거였다. 그때의 저는 어리고, 약해서… 그를 지킬 방법이 없었고,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아픔과 어둠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오늘 저 문밖에 서 있었을 때처럼, 그는 밝고 화창한 햇빛 아래에 있을 거였다. 저와 함께. 앞으로 둘이 함께하는 시간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기를…….
진이 에이든의 손을 들어올리고, 그의 손등과 손톱 위로 정성스레 입을 맞췄다. 에이든은 그 과분한 따뜻함에 옅게 웃었다. 제 손으로 톡톡 떨어지는 눈물이 감사했다. 그에게 나쁘고, 못된 짓만 했던 저를 너그럽게도 품어 준 사람이었다. 진 헤니가 고개를 들어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보며 웃었다. 에이든 역시 그의 손을 잡고 약속했다.
“진, 앞으로 평생… 네게 더 넓은 세상을 선물할게. 이 세상에 네 발과 눈이 닿지 않은 곳이 없도록, 아름다운 곳들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네가 머물 수 있도록.”
그의 말에 진 헤니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좁은 섬에서 자라, 바깥세상만을 바라며 살았던 남자는 제 연인의 말에 마음이 벅찼다. 여태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들이 세상에 많았다. 많이 기뻤고, 기대가 됐다. 바보처럼 우느라… 중요한 말을 못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진의 애가 탔다. 더 넓은 세상을 선물하는 거 말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너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부에, 내가 꼭 곁에 있을게. 약속할게.”
“응…….”
그게 가장 중요한 말이었다. 진이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에이든 테일러가 그의 이마 위로 입을 맞췄다. 더 넓은 세상에 나와도 결국 그가 없다면 무용지물이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맛있는 것들을 보고 먹어도 에이든 테일러가 없는 세상은 좁고, 슬프기만 했다. 그가 있어야 풀이 싱그러운 빛으로 빛나고, 그와 함께 먹어야 바나나 푸딩의 단내가 코끝에 돌았다. 제게 더 넓은 세상은, 에이든 테일러라는 사람… 그 자체였으니까.
너무 많은 시간을 돌고, 또 돌아서야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다시는 바보처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사랑과 행복에 겨워 입 맞추는 두 사람의 가운데로 밝은 빛이 새어들었다.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몇 번을 다시 태어난대도 약속하고 싶었다. 너를 지켜줄게, 네게 더 큰 세상을 보여 줄게. 아프고 힘들 걸 알아도 또 다시 서로를 선택할 거였다. 나를 차가운 물에서 건져 올려 준 너를, 나를 좁디좁은 섬에서 이 넓은 땅으로 나오게 한 너를. 백 번을 약속하고도, 또 다시 천 번을 약속해. 사랑해, 사랑해…….
말은 필요치 않았다. 지금 제 뺨을 감싸 안고 입 맞추는…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아름다운 날이었다.
***
성당에서와 똑같이, 비행기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개인 비행기였으니까.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두 사람은 기내 안전 따위는 신경도 안 썼다. 벨트를 매야 하는데, 에이든에게 벨트란 얼마 전 봤던 진의 가터벨트밖에 없었다. 어차피 좌석에 앉을 일도 없었다. 뭐, 진이 앉아서 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의향은 있었지만.
“에, 이든… 하… 나 목 말라…….”
“응, 잠깐만.”
목이 마르다는 말에 에이든 테일러가 박혀 있던 몸을 주욱 빼며 일어섰다. 뒤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에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댄 건지, 이미 진 헤니의 목소리는 쉰 지 오래였다. 진은 비행기 안에 마련돼 있는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가는 길인데…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진, 여기.”
진 헤니는 제게 건네진 물을 마시면서도, 때때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진이 상체를 살짝 일으켜 물을 마시는 와중에도 에이든의 손과 눈은 쉬지 않았다. 그는 예쁜 곡선을 만들고 있는 허벅지부터 엉덩이까지를 눈으로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탄력 있는 살결을 훑어 올렸다. 허벅지 안쪽의 살을 손가락으로 쓸던 그는 매끈하게 올라간 엉덩이를 꾸욱 움켜쥐었다. 그 손길을 느낀 진이 입에서 컵을 떼며 다급하게 말했다.
“에이든, 이러다 이거… 여기 적은 거 해 보지도 못하고 가기 전에 죽어…!”
“진,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오히려 못 하면 죽을 거였다. 사람이 쉽게 죽진 않는데, 만약 못하게 하면 저는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성적인 인간이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무려 진 헤니랑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을 가는 길인데, 지금 제정신인 게 더 이상했다.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거였다.
싱긋 웃던 에이든은 쥐고 있던 엉덩이를 놓고, 갈라져 있는 그 사이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굵직한 손가락 하나가 예민한 입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바깥을 문지르다가도 깊게 쑤셔 넣어질 것처럼 힘을 실어 끝을 넣기도 했다.
진은 컵을 내려놓고 그 손목을 저지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진 헤니가 엎드려 있는 곳 앞으로는 패드 하나가 보였다. 화면 안에는 신혼여행에서 할 것들의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유럽 전역을 도는 일정이었는데, 날짜나 지역 별로 작성돼 있는 게 아니어서 특이했다. 두 사람은 지역이나 날에 상관없이 그때그때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래서 일정이라기보다는 ‘To do list'에 가까운 메모였다.
“아… 에이든, 진짜 죽어…! 이거 이제, 아! 그만하고… 으응, 리스트 다시 좀 봐봐…! 이제 곧 도착, 하으, 도착하잖아!”
“응, 보고 있어.”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잡아 벌리며 말했다. 다른 손 역시 열심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에이든이 보긴 보는데, 아주 엄한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진 헤니는 포기했다. 하… 그냥 될 대로 돼라……. 도통 에이든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아서, 진의 끙끙거림도 멈추지 않았다.
“흐윽, 으응…!”
안을 느릿하게 오가는 손가락에 진이 어깨를 떨다가 눈을 꼬옥 감았다. 아랫입술을 물며 고개를 숙이는 것까지 확인한 에이든이 짙게 웃었다. 제 정액이 흥건히 묻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헤집던 그가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척척 소리를 내며 슬슬 움직이던 손가락은 조금 더 강한 힘으로 왕복하기 시작했다. 푸른 눈에 서늘하고도, 참을 수 없이 뜨거운 욕망이 가득했다.
“진, 우리 도착하면 호텔 들렀다가 저녁 먹고 상그리아부터 마시러 갈까?”
“으응… 아, 좋아…….”
“어떤 게 좋다는 건지 좀… 헷갈리는데.”
에이든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찌걱이는 소리가 빨라지고, 안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은 세 개로 늘어났다. 본격적으로 안을 다시 넓히는 움직임에 진의 입이 벌어졌다. 비행기에 오른 뒤로 계속해서 에이든의 성기가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진입은 수월했다. 손가락은 진입 후에 안을 휘저었다. 그 손길에 진의 허리가 절로 꺾이고 비틀렸다. 에이든은 비틀리는 허리를 손으로 잡아 세웠다. 높게 들린 허리와 엉덩이에 진의 목소리가 더 애달파졌다. 다른 이의 눈에 환히 보일 제 몸이 부끄러운 동시에 정신이 아찔했다.
“아으응…! 아! 아윽, 상그리아, 아… 좋다고…!”
“그럼 이건 안 좋아?”
에이든 테일러는 진이 지금 엎드려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틈틈이 사나워지는 제 표정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안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기도 하고, 꾹 누르면 진이 크게 소리 지르는 곳을 찾아 힘을 싣기도 했다. 예민한 몸의 반응을 바라보며, 에이든 테일러는 저 혼자, 마음속으로만 리스트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진은 그런 게 리스트에 추가됐을지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둘 다 즐거울 테니 괜찮을 거였다.
“아…! 하악!”
어떤 곳을 누르거나 문지르면 진은 곧 절정을 맞을 것처럼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의 성기는 정액을 뱉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투명한 액을 흘리며 꺼떡이기만 할 뿐이었다. 진의 몸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에이든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자리했다. 분명 다정하게 웃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진, 넣어도 돼?”
“하으… 아…!”
낮게 긁는 듯한 목소리가 허락 아닌 허락을 구했다. 뒤에 꽂혀 있던 손가락이 더 깊숙한 곳에서 쿨쩍이며 움직이고, 진은 어깨를 떨다 뒤의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냔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이 열에 달뜬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눈가가 붉고, 눈물이 맺힌 채라 에이든이 보기엔 야할 뿐이었다. 에이든이 깊이 박혀 있던 손가락을 얕은 곳까지 빼내고 물었다. 얕은 곳에서 꾹꾹 누르듯 움직이는 것들에 입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응? 안 돼? 그만할까…?”
넣으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그냥 그것 때문에 물어보는 거면서…! 진 헤니가 울먹였다. 입술을 꼬옥 물고 있던 진이 다시 제 심술궂은 연인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하… 빨리…!”
“응?”
“빨리… 아흐, 빨리 넣어 줘…….”
에이든 테일러가 눈을 휘어 웃었다. 그의 성기가 진 헤니의 몸 안으로 처박힌 건 아주 잠시 뒤의 일이었다. 넣기만 해도 허리가 잔뜩 꺾이는 모습에 에이든 테일러가 어금니를 물었다. 진의 몸은 아주 솔직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진은 부끄러워 하긴 해도, 약간은 천박할 만큼 노골적인 행위나 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에이든은 넣어 달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말하도록 만든 게 아니었다. 듣는 것도 물론 즐거웠지만, 넣어 달라 말한 뒤에 이어지는 진 헤니의 몸이 더 즐거웠다. 제 입으로 넣어 달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예민해지는 몸, 오물거리듯이 달라붙어 오는 입구와 거의 흐느끼듯 뱉어지는 신음. 이미 그의 몸은 충분히 달아올라 조금만 그 안을 쑤셔도 금방 비명이 나올 게 분명했다.
제 몸이 꽂힌 곳을 내려다보던 에이든이 무언가를 확인하듯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진 헤니의 골반과 배를 훑고 내려간 손은 꺼떡이고 있는 성기로 향했다. 이 상태의 몸이라면 이미 정액을 싸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에이든은 제 예상대로 아무것도 뱉지 않은 성기를 훑다가 사납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 신혼여행에선 제 사랑스러운 연인의 몸이… 대체 어디까지 야해질 생각인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할 두 사람의 리스트는 평범했다. 첫 행선지인 스페인에서의 체크리스트는 ‘5리터짜리 상그리아 둘이서 다 마시기’, ‘오페라 감상하기’, ‘파두 레스토랑에 가기’ 등등 일반적이었다. 맨 마지막에 에이든 테일러가 혼자 마음속으로 추가한 ‘뒤로만 가게 하기’ 빼고.
***
「 To do list 1 : 5리터짜리 상그리아 둘이서 다 마시기
※ 진 헤니의 메모 : 상그리아는 포도주에 여러 가지 과일과 탄산수, 설탕, 레몬즙 등을 넣어 숙성시킨 음료로 칵테일의 일종이다. 스페인 전통 음료라고 한다! 레드와인으로 만들어졌는데… 둘이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에이든은 술을 못 마시니까 내가 잘 챙겨 줘야지 :)
※ 에이든 테일러의 메모 : 내기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음. 나중을 위해.」
외진 골목에 있는 한 타파스 바,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다. 진은 제 앞의 음식을 야무지게 먹는 중이었다. 볼이 빵빵했다. 에이든은 사랑스러운 제 연인을 보다가, 목에 걸고 있던 필름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찍었다. 찰칵거리는 소리에 진이 불만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먹는 건 찍지 말라는 기색에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내려야 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좁지만 안락한 느낌이 드는 식당이었다. 두 사람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연어가 올라간 타파스와 하몽 플레이트, 버거와 감자튀김, 거기다 레드와인을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진, 맛있어?”
“어, 어청 마이써.”
입에 음식이 들어 있어서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 대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비행기에서 바닥을 쳤던 기운이 회복되고 있었다. 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음식을 한 입 집어넣을 때마다 방싯방싯 웃었다.
진 헤니는 지금 모든 게 다 좋았다. 옆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스페인어도, LA나 뉴욕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공간도, 전부 다 좋았다. 마음이 많이 들떴다. 그리고 지금 먹고 있는 음식들도 너무 맛있었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이거 버거도 맛있을 거야. 안에 들어가 있는 고기가 소꼬리 부분이야.”
“꼬리…?”
“먹어 봐.”
입에 있던 타파스를 꿀떡 삼긴 진 헤니의 표정이 심각했다. 꼬리…? 꼬리에 살이 어디 있어서 먹어…? 스페인 소들은 꼬리가 통통한가…? 막 뼈가 씹힌다거나……. 진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버거를 살피고 있었다. 에이든은 속으로 웃다가 제 앞에 있는 버거를 시범을 보이듯 먹었다. 진이 약하게 인상을 쓰고 에이든의 반응을 기다렸다.
“안심하고 먹어도 돼, 진. 그냥 고기야.”
“음…….”
에이든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웃어 버리면 진이 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거두지 않을 테니, 참아야 했다. 진 헤니는 버거를 손으로 들어 올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한 입 가득 넣으려다가 고민이 됐는지, 입 크기를 조금 작게 수정했다. 작게 베어 물고 씹는 모습이 진지했다. 입에 있던 걸 다 씹어 삼키고는 진이 손에 있는 버거를 바라봤다. 그는 심각하게 버거와 대치중이었다.
“왜, 별로야?”
“…….”
에이든이 작게 물었고, 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손에 들린 걸 빤히 보다가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입 크기는 또 수정됐다. 아까보다 벌어진 입의 크기가 컸다. 이번엔 한 입 가득 집어넣는 모습에 에이든이 결국 목을 울려 웃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진의 앞으로 와인 잔을 밀어놓았다. 천천히, 목 메이지 않게 먹으라는 뜻이었다.
“꼬이가 어래 마이나?”
“응…?”
심각한 표정의 진이 물었고, 에이든은 무슨 소리인지를 못 알아들어 되물었다. 진은 약하게 인상을 쓰고 입 안의 음식을 빠르게 씹었다. 에이든은 진이 음식을 넘길 때까지 가만 기다려 줬다. 입에 든 걸 꿀떡 삼키고 와인까지 한 모금 마신 진이 정말 진지하게 물었다. 에이든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꼬리가 원래 맛있나?! 에이든, 너는 다른 동물 꼬리도 먹어 봤어…? 원래 다 먹는 거야…?”
“모든 동물… 은 아닐걸.”
“그렇지…?”
진은 인상을 쓰며 버거를 바라봤다. 꼬리고기라니… 세상에 그런 게 있었다니……. 저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꼬리고기를 먹으면서 살았던 걸까…? 갑자기 오만생각이 다 들었다. 가만 생각하던 진은 이제라도 꼬리고기를 많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버거를 한 입 크게 물었다.
에이든도 앞에 있는 타파스를 만족스러운 낯으로 먹었다. 진이 많이 먹고 체력을 잘 쌓아 두는 게 저도 좋았다. 많이 먹여놔야 꼬리든, 몸이든… 뭐든 잡아먹을 수 있으니까. 일단 포동포동하게 살찌우는 것이 먼저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체력이 남아돌아서 어쩔 줄 모르는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저도 좀 인내할 필요가 있었다. 더 큰 보상을 위한 인내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 연인의 낯이 필요 이상으로 상냥했지만, 진 헤니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릇 위에 있던 모든 음식이 두 사람의 위로 차곡차곡 들어갔다. 둘은 새로 몇 가지 음식을 더 추가로 시켜 먹기까지 했다. 진은 부른 배를 가볍게 문지르며 음식점을 나오는 중이었다. 방긋 웃는 낯에 뿌듯함과 흐뭇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에이든의 표정도 밝았다.
“진, 상그리아 마실 수 있겠어? 배부르지 않아?”
“무슨 소리야, 에이든. 약한 소리 마. 얼른 가자.”
밝게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져서 에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진 헤니는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먹어 볼 기세였다. 실제로 그런 각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해가 진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사람이 많았다.
골목, 골목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이크 하나 없이, 오롯이 목소리만으로 덤덤하고도 아름답게 노래했다. 적당히 시원한 밤공기와 들리는 노랫말,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마음이 들떴다. 에이든 테일러는 간간히 옅게 웃으며 카메라를 들었고, 진 헤니는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웃을 때면 카메라 위, 에이든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걷거나 껴안고 싶었지만, 둘은 조금 떨어진 채 걷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신경을 안 쓸 순 없었으니까. 대신 슬쩍슬쩍 눈을 맞췄다. 걷다가 손등이 스칠 때면 괜히 새끼손가락을 한 번 꼬옥 잡았다가 놓기도 했고,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갈 때에는 허리를 약하게 당겨 안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의 입에는 옅은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검은 양’이라는 이름의 펍에 들어갈 때까지도.
오늘의 해야 할 일, ‘5리터짜리 상그리아 마시기’는 아주 비장하게 시작됐다. 구석진 자리, 어두운 조명 아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진지했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고, 열려 있는 창문 밖으로는 기타 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상그리아가 담긴 피쳐 글라스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진짜 괜찮겠냐는 의미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진, 먼저 취하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어때?”
“에이든, 솔직히… 너보다는 내가 잘 마실 수 있어.”
“그래? 아닐걸?”
에이든 테일러가 예쁘게 웃었고, 이번엔 진 헤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이든은 그런 진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덧붙였다.
“뭐, 진 네가 술 못 마시는 건… 나도 아니까, 그냥 하지 말까? 너무 불공평하지?”
“…….”
진 헤니는 앞에 있던 잔 두 개에 상그리아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 한 잔을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내기의 시작이었다.
***
진은 눈을 깜빡이며 앞에 있는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 안에서는 레드와인 냄새와 과일의 달달한 향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몇 잔째 마신 건지 기억이 안 났다. 몇 잔 마셨더라…? 되게, 되게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모르겠네……. 눈을 멍하니 뜨고 있던 진 헤니는 앞에 있는 에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이든, 네가 졌어. 난 하나도 안 취했는데, 너는 취했잖아…! 그치?”
“응, 내가 졌어.”
“……?”
에이든 테일러는 그냥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모습에 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순순히…? 뭔가… 뭔가 이상한데……. 진 헤니의 상체는 약간 휘청거렸다. 옆으로 조금 기울어지는 어깨를 보다가, 에이든 테일러가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진의 어깨를 잡아 제 위치로 돌려놓았다.
도수가 낮지 않은 레드와인이라 몸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어깨가 잡힌 곳이 불에 데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 헤니의 몸도, 에이든 테일러의 손바닥도 모두 뜨거웠다. 몸에 불이 붙는 것 같은데… 계속 꾸욱 쥐고 있으면 좋겠다고, 와인으로 절여져 있는 진 헤니의 머리가 생각했다.
주변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술 취한 사람들이 크게 소리 지르는 소음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두 사람만 아무 말이 없었다. 진은 약간 멍한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깜빡거리는 검은 눈 때문에 에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깨를 쥐고 있던 에이든의 손은 진의 팔뚝과 팔 안쪽의 여린 살을 스치고 내려왔다. 차라리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면 이렇게 안타까운 기분이 아니었을 텐데, 손끝이 닿을 듯 말듯 피부를 건드리고 지나가서 괜히 입술을 씹게 됐다. 제 팔을 스쳐지나가는 손을 빤히 보던 진이 다시 눈을 들어 에이든과 시선을 맞췄다. 에이든은 술기운과 미열에 들뜬 검은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진, 네가 이겼는데… 소원은 바로 쓸 거야? 딱 하나만 들어주는 거니까 잘 생각해야 해.”
“바로… 는 안 쓸래. 나중에… 꼭 쓰고 싶은 거 생기면 쓸래…….”
“그래, 나중에 소원을 꼭 써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잘 아껴 놔.”
에이든이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취한 건 진 헤니 쪽이지만, 에이든은 무슨 생각인 건지 기분 좋은 낯으로 웃고만 있었다. 진의 뺨이 달아오른 걸 보던 에이든이 아직 절반은 남아 있는 상그리아를 보며 말했다.
“진, 이거 다 먹을 거 아니지? 우린 충분히 선방했어. 나 이제 더 먹으면 몸에서 사과 냄새 날 것 같아.”
“난 이미 나는 것 같아…….”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에이든 테일러가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곤 나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진 헤니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펍에서 나와 밤공기가 가득한 골목길을 거닐었다. 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주 기분 좋게 웃으며 숨을 뱉었다. 정말 입에서 사과 냄새 나네……. 사과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둘은 아까처럼 거리를 걸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 손등이 가끔 맞닿아 스칠 수 있도록. 길거리에 인적이 점점 드물어질수록 손등이 스쳐지나가는 횟수는 많아졌다.
에이든은 진의 손끝이 움찔거리는 걸 빤히 내려다보다가, 엄지손가락으로 진의 손바닥 안쪽 살을 쓸어내렸다. 바닥을 보며 걷느라 아래로 뻗어 있던 검은 속눈썹이 흔들렸다. 진 헤니는 아까 술집에서처럼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봤다. 레드와인이 검은 눈까지 차오른 건 아닌지, 에이든 테일러는 그런 착각이 들었다. 진의 눈은 분명 검은색인데, 왜 저렇게 선명하고 자극적인 붉은색으로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에이든은 제 연인의 달뜬 시선에 결국 손가락을 얽었다. 진 헤니의 손에 깍지를 껴잡은 그는 큰 보폭으로 골목을 걸었다. 진은 저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조금 휘청이며 뒤를 따랐다. 열을 머금은 검은 눈이 크게 뜨인 채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점점 깊은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고,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좁은 골목길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깝게 붙어 서 있었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좀 그래.”
“응……?”
에이든은 정말 몰라서 되묻는 거냐는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진은 입을 달싹이다가 시선을 피했다. 다 티가 났나 보네……. 조금 민망해진 진은 에이든을 바라보진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병뚜껑들만 보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둠 속에서도 확실히 볼 수 있는 붉어진 귀와 뺨을 내려다보다가, 손으로 진의 뺨을 감쌌다. 뺨에 닿아오는 뜨거운 손바닥에 진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진, 진짜 숨에서 사과 냄새 나…….”
뺨을 쓸던 손이 진 헤니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에이든의 말대로 두 사람의 숨에서는 사과 냄새가 났다. 레드와인 특유의 단내와 약간은 쌉쌀한 냄새도 함께였다. 술기운 때문인 건지 자꾸 모든 감각이 비현실적으로 뾰족하게 일어났고, 동시에 뭉근하게 둔해졌다. 진 헤니는 제 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남자를 보다 잠시 넋을 놓았다.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입술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해 줄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이 붙었다. 진은 에이든의 뒷목과 뺨을 감싼 채 입을 맞췄다. 여태… 계속해서 바라고, 또 바랐던 입맞춤이었으니, 참거나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가 저를 만져 줬음 했다. 스페인으로 오는 내내 몸이 연결돼 있었는데… 그래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혀뿌리와 입천장까지 전부 다 뜨끈뜨끈했다. 오가는 타액이 달아서, 두 사람은 더 깊게 서로의 혀를 빨아 당기고, 또 입술을 아프지 않게 씹어댔다. 누가 더라고 할 것도 없이 둘 다 서로의 입 안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손바닥이 진 헤니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입술을 붙인 채, 에이든 테일러가 말했다. 손으로는 진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예뻐.”
예쁘다는 말에 진이 눈을 깜빡였다. 에이든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아직 붙어 있는 입술끼리 천천히 문지르고, 비비다 입을 열었다.
“에이든… 예쁜 건 너지…….”
“……?”
“나는 잘생긴 거라고 하자…….”
능청스럽고도 진지한 대답에 에이든이 진의 윗입술을 머금으며 웃었다. 진은 뭐 그런 이상한 말을 하냐는 표정이어서, 에이든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진 헤니에겐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저한테 예쁘다고 말하는 건 대체 무슨 심리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예쁜 사람한테 예쁘단 소리를 들어서 이상했다. 누가 봐도 저는 ‘예쁘다’에 어울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에이든은 진의 검은 눈이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든 말든, 다시 말했다.
“내 눈엔 예뻐.”
“…….”
“전부 다.”
제 눈에 예뻐서 예쁘다고 하는데, 그럼 그냥 예쁜 게 맞았다. 물론 진의 말대로 잘생긴 것도 맞았고. 눈을 잔뜩 휘어 웃는 모습에 진 헤니는 별말 없이 에이든 테일러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기를 선택했다. 다시 깊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서, 진이 붙어 있던 입술을 떼며 말했다.
“에이든, 여기서 우리 여기서 호텔이… 멀었나?”
“…조금.”
“그래…? 그럼 어쩌지…?”
정말 난감하다는 표정에 에이든이 웃으며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멀면… 멀면 안 되는데……. 진은 제 목에 느껴지는 축축한 혀의 느낌에 눈을 감았다. 안 되는데… 멀면……. 안타까운 숨이 진 헤니의 입에서 터지고, 에이든 테일러가 고개를 들었다.
“뭐, 굳이 그 호텔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
“……?”
어디든, 일단 몸만 뉘이면 됐다.
***
호텔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민박집 비슷한 거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루 종일 손도 제대로 못 잡았던 두 사람에겐 호텔이든 민박집이든, 중요치 않았다. 21세기의 지성인과 교양인답게 길거리에서 일을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약간 삐걱이는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은 계속 입을 맞췄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입만 맞췄다.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한참을 붙어 있던 입이 떨어지고, 에이든은 입을 벌려 보라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진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진 헤니는 몽롱한 얼굴로 작게 입을 벌린 채, 제 위의 연인을 바라봤다. 이러면 되냐는 것처럼.
“넌 혓바닥도 예쁘네.”
에이든 테일러의 두 번째 손가락이 진 헤니의 혓바닥 위를 문질렀다. 빨갛게 달아오른 게 예쁘고 야했다. 손가락은 젖은 소리를 내며 혓바닥 위와 혀끝,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송곳니를 오갔다. 그 안을 들여다보는 에이든의 눈빛이 집요했다. 혓바닥이 간지러운 느낌에 진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한참동안 입 안을 휘젓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진 헤니가 약간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든…….”
“응?”
“그… 계속 옷… 입고 있을 거야…?”
진이 생각했던 전개와는 조금 달랐다. 급하게 방을 잡아 들어왔는데, 둘은 아직도 옷을 단 하나도 벗질 않아서… 의아했다. 진은 에이든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중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왜 옷을 벗지 않냐 묻는 연인을 보다가 다정하게 웃었다.
“응, 계속 입고 있을 거야.”
“왜…?”
“벗으면… 나도 좀 힘들 것 같아서.”
뭐가 힘들어…? 진이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에이든은 눈을 휘어 웃다가 진의 위에서 몸을 내렸다. 갑자기 휑한 느낌이 드는 몸 때문에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다란 남자 둘이 눕기에는 조금 좁은 침대 위, 에이든은 진의 옆에 누워 그의 몸을 꼬옥 껴안고 말했다.
“안고 자자.”
“……?”
“비행기에서 내가 너무 괴롭혔잖아. 내내 힘들었을 텐데… 그냥 이렇게 자자, 오늘은.”
오늘 신혼여행에서 보내는 첫날밤인데… 그냥 안고 자자고…? 진 헤니의 마음속에서 소리가 되지 못한 물음과 의아함이 조금 전 먹은 상그리아와 함께 둥둥 떠다녔다. 근데 또 그의 말대로 비행 내내 그… 좀 그렇긴 했어서, 뭐라 말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게 됐다.
그 와중에 아직 에이든의 티셔츠 끝자락을 잡은 손은 그대로여서, 에이든이 웃음을 삼켰다. 진은 지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입술만 물고 빨고 끝나기엔 아쉬운,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진이 아직 고민이란 걸 할 수 있는 상태라면… 안 될 일이었다. 에이든은 진의 이마 위로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정말 이대로 잘 것처럼.
“에이든…?”
“응? 왜, 잠이 안 와?”
에이든 테일러는 능청스러운 낯으로 진 헤니의 몸을 토닥였다. 정말 저를 재우려는 모습에 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티셔츠를 잡고 꼼질거리는 손 때문에 에이든은 표정관리가 좀 힘들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지는 진의 시선 역시, 아주 힘들었다. 이대로 잘 거냐는 연인의 눈빛을 견디는 건 제게도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참을 필요도, 참을 이유도 없는 신혼여행이었다.
“에이든……?”
진은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이번엔 돌아오는 대답조차 없었다. 에이든은 필사적으로 잠든 척을 했다. 이름을 두어 번 부르는 걸로는 아직 좀 부족했다. 진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제 이름이 아니라 당장에 넣어 달라는 애원이었다. 그 말을 제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딜 때까지 참아야 했다.
“자……?”
참아야 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을 테니까.
「 To do list 1 : 5리터짜리 상그리아 둘이서 다 마시기 ✓ 완료(다 마시진 못함)
※ 진 헤니의 평가 : ★★★ 역시 에이든보다 내가 더 술을 잘 마셨다. 상그리아는 맛있긴 했는데… 5리터는 아무래도 너무 많았던 것 같다!
※ 에이든 테일러의 평가 : ★★★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함.」
***
「 To do list 2 : 엘 에르모소 대극장에서 오페라 <카르멘> 감상하기
※ 진 헤니의 메모 : ‘엘 에르모소 대극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오페라 극장 중 하나라고 한다! 브로드웨이에서 몇 번 뮤지컬은 봤었는데, 오페라는 처음이라 떨린다!
※ 에이든 테일러의 메모 : 두 시간 반.」
오페라 하우스는 화려했다. 객석은 무대를 두고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는데, 거대하고 웅장한 느낌이었다. 저 무대에 선다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얼마나 아찔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내부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화려하게 반짝였다. 천장에는 강한 색채의 그림과 커다란 샹들리에가 보였다. 공간 자체가 유혹적이고, 또 과시적인 곳이었다.
에이든 테일러와 진 헤니는 오페라 관람을 위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새 역시, 이 극장과 비슷했다. 교양 있지만 유혹적이고 과시적인 느낌의 옷. 진 헤니는 몸에 꼭 맞도록 맞춰진 수트의 소매 끝을 매만졌다. 검은색 수트 자켓 아래로는 역시 어깨선이 딱 떨어지는 흰 셔츠가 자리하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도 검은 수트 차림이었다.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던 진은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슬쩍 바라봤다. 눈을 깜빡이던 진은 화려한 금색의 머리와 잘 뻗어 있는 콧날, 넓게 벌어진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검은 수트도 멋졌지만, 그는 화려하고 선명한 색이 훨씬 잘 어울렸다. 결혼식에서 입었던 코발트블루색이라든지……. 에이든 자체가 화려해서 그런 것 같았다. 화려하고, 야한 느낌.
“진, 우리 자리 저기야. 3층 박스석.”
“…….”
에이든 테일러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모른 척했다. 저를 보는 시선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는 중이었고, 꽤나 만족스러웠다. 신혼여행에 와서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밤을 보낸 적이 없으니 반사작용 같은 거였다. 에이든은 역대 최고의 인내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 역시 진 헤니의 저런 시선만으로도 서는 지경이었지만, 더 큰 보상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두 사람은 3층에 위치한 박스석에 앉았다. 진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박스석이라서 박스처럼 칸막이가 쳐져 있는 건가…? 두 사람만 앉아서 관람할 수 있도록 돼 있는 곳이었다. 빨간색 벨벳 의자에 앉은 진은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은 에이든을 보며 의아함을 삼켰다. 엄청 비싼 자리인 것 같았는데…? 무대랑도 멀고, 잘 안 보이는데, 왜 비싸지…? 의아함과 호기심을 담은 검은 눈이 공간을 둘러봤고, 에이든 테일러는 짙게 웃을 뿐이었다. 뭘 궁금해 하고 있는 건지 알 법 했다.
그 궁금증은 제가 풀어 줄 거니까, 지금은 오페라에 집중하는 편이 좋았다. 집중하고 싶어도 곧 못하게 될 테니까. 그래도 진이 처음 보는 오페라인데, 어느 정도는 보여 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두 시간 반 전부를 볼 필요는 크게 없었다. ‘카르멘’은 워낙 유명하니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후반부는 나중에 보면 되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았다.
극이 시작되고, 약간 긴장해 있던 진 헤니는 제 귀와 눈에 입력되는 것들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오페라의 주인공은 담배공장에서 일하는 ‘카르멘’이라는 여자였다. 무슨 소리인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녀는 아주 매력적이고 치명적인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음이 확실했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갈망하고, 그녀 역시 모든 사람을 갈망했다. 카르멘을 연기하는 가수의 목소리는 관능적이었다. 뮤지컬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진은 넋을 놓고 공연을 감상하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아리아 중 하나라는 ‘하바네라’가 시작될 때쯤이었다.
진은 제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턱을 괸 자세로 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손가락 끝을 건드리면서. 진은 제 손을 덮고 있는 커다란 손을 보다가 다시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아리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하바네라’는 카르멘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순수한 남자, 돈 호세를 유혹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가사를 못 알아들어도 선율 자체만으로 충분히 뇌쇄적인 곡이었다.
진은 이미 오페라에 푹 빠져서 에이든 테일러는 거들떠도 안 봤다. 에이든은 옅게 웃으며 진의 손톱을 톡톡 건드리다, 들리는 가사에 피식 웃었다. 유혹적이기 그지없는 모든 것들을 순수한 남자, 진 헤니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됐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때 당신은 날 조심해야 해요 ]
손끝에서 느껴지던 간지러운 감촉은 손등으로 옮겨왔다. 에이든의 새끼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이 진의 소매 끝을 맴돌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의 손끝은 전기가 오른 것처럼 움찔거렸다.
[ 사랑이여, 사랑은 집시 아이 같아요 ]
소매 안에서 움직이던 손은 스윽 빠져나갔다. 진은 최대한 무대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내 허벅지 위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커다란 손바닥 때문에 어깨를 움찔해야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의 허벅지에 손을 대고 있다가, 톡 튀어나온 무릎 뼈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가서 진은 작게 고개를 털었다.
[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
무릎 뼈를 매만지던 손은 다시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곤 괜찮으니까 긴장을 풀라는 것처럼, 토닥이듯 허벅지를 두드렸다. 긴장을 풀라고 해 놓곤 스윽하고 훑어 올리는 손길에 결국 진이 에이든의 손목을 막아 세웠다.
“에, 에이든…….”
작게 그를 부르자 에이든 테일러가 그제야 진을 바라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조용히 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진은 입을 꾹 다물고 제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서는 손을 내려다봤다. 아니, 이러… 이런데 어떻게 조용히 해…!
[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때 당신은 날 조심해야 해요 ]
“아…!”
허벅지 안쪽을 타고 올라온 손이 페니스 위를 압박하듯 누르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진은 제 입에서 나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에이든은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연인을 보며 활짝 웃었다.
하지 말라는 것처럼 제 손목을 잡고 있기는 한데, 이 정도 힘으로는 막아 봤자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에이든은 조금씩 부피를 키워 가는 진 헤니의 성기를 정장 바지 위로 누르고, 쓸어가며 손을 움직였다. 그러다 진에게로 가깝게 고개를 움직여 귀 옆에서 속삭였다.
“진, 박스석은 무대를 잘 보라고 있는 게 아니야…….”
“흐…!”
“잘 보이라고 있는 거지.”
“……?!”
옛날부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다른 귀족들의 옷, 그들이 하는 행동과 말… 그걸 보기 위한 자리임과 동시에 잘 보이기 위한 자리, 박스석은 관람이 아닌 관음을 위한 자리였다. 그 말에 진 헤니의 눈이 급히 정면을 향했다. 에이든의 말을 듣고 보니 다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 제 모습을 누군가 보고 있을 것만 같은 오싹함이 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티 나지 않게 조심해, 진. 다 보이니까.”
[ 사랑이 멀리 있다면 기다리겠지만, 기다릴 필요 없어요 ]
“하으…,”
[ 바로 여기 있으니까 ]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오페라 하우스, 그에 걸맞게 격식 있는 차림의 두 남자는 바빴다. 한 남자는 손이 바빴고, 다른 한 남자는 터지려는 천박한 소리를 막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바빴다. 진은 나름 포커페이스 중이었다. 가끔 표정이 무너지려 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냈고, 에이든은 그럴 때마다 손을 조금 더 깊고 강하게 움직였다.
진의 성기는 검은색 수트 바지 밖으로 완벽하게 굴곡을 드러냈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잡고 흔들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천을 사이에 두고 마찰되는 감각에 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진의 아랫배가 불규칙한 숨으로 들썩여서 에이든이 짙게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아랫입술을 물고 있던 진은 이미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성기의 끝이 압박당하자 더 이상 표정관리가 불가능했다. 진이 절박한 눈빛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눈빛을 읽은 에이든 테일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보는 게 낫겠지?”
진 헤니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풀어 놨던 자켓의 단추를 잠갔다. 그리곤 곤란한 낯의 진을 바라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때 당신은 날 조심해야 해요 ]
“일어나, 진.”
진 헤니는 순수하긴 했지만… 유혹적인 제 연인에겐 속수무책인 남자였고, 결국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검은색 수트의 바지는 지퍼가 내려간 채였고, 흰색 셔츠는 커다란 손에 잡혀 올라가 탄탄한 아랫배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오페라를 감상하고 있을 때, 에이든 테일러는 화장실 칸 안에서 제 연인의 신음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이 훨씬 그의 취향이었다.
“하… 아흐…!”
변기에 앉혀진 진 헤니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소리를 참아야 되는데… 뜨겁고 축축한 혓바닥이 부풀어 오른 성기의 끝을 핥는 통에 불가능했다. 숨이 거칠어서 아랫배가 멋대로 오르내렸다. 불규칙한 숨이 진 헤니의 코와 입에서 터지고, 그럴 때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입 안 더 깊게 진 헤니의 성기를 빨아 당겼다.
“으응…!”
진 헤니의 허리와 허벅지를 꾸욱 잡은 채, 에이든 테일러의 고개는 쉬지 않았다. 진의 페니스는 축축한 소리를 내며 그의 입 안에서 굴려지고, 마찰됐다. 에이든은 일부러 진의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그의 몸이 활짝 열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숨길 것 없이 다 드러나 있는 기분이 들도록.
벌어지는 다리에 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금니를 잔뜩 물고 있어서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숨을 뱉던 진은 점점 오르는 사정감에 에이든의 머리칼을 쥐었다. 그리고 제 성기를 물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길게 내리깔려 있던 속눈썹이 치켜떠지고, 푸른 눈이 저와 시선을 맞췄다. 사납게 떠진 푸른 눈에 진 헤니의 눈이 흔들렸다. 야한 장면에 사정감은 곧바로 치솟아, 곧 정액을 뱉어낼 것처럼 성기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윽…! 하… 이제, 비켜… 아흐…!”
“…….”
“에, 이든…! 나, 하… 나올 것 같, 아…!”
이대로라면 입 안에 뱉어낼 것 같아서 진의 바르작거림이 커졌다. 허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진 헤니는 고개를 저으며 에이든의 머리칼을 잡았다. 눈을 질끈 감던 진은 에이든의 얼굴을 잡아 떼어내는 데 성공했고, 다행히 그 뒤에 사정할 수 있었다.
“하… 아으응…!”
“…….”
진 헤니는 눈을 감은 채 숨을 골랐다. 덜덜 떨리던 검은 속눈썹이 들려올라가고, 진은 아직 제 다리 사이에 있는 에이든을 바라보다 흠칫 놀라야 했다. 야하고 아름다운 얼굴 위, 제 흔적이 뿌려져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진은 낮은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에이든은 제 뺨과 눈꺼풀 위로 뿌려진 정액에 피식 웃고 있었다.
“아, 이게… 티, 티슈가…!”
“가끔 나는… 진 네 취향을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아니긴. 에이든 테일러가 속으로만 말을 삼켰다. 그리곤 제 수트 자켓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꺼풀 위의 정액을 닦았다. 진은 허둥대며 그의 손에서 손수건을 뺏어들곤 얼굴에 묻은 체액을 꼼꼼히 훔쳤다. 중간중간 작게 미안하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에이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미안할 건 없었다. 얼굴에 좀 쌌다고 미안해야 하면… 저는 사형감이었으니까.
에이든은 몸을 일으키며 진의 손에 있던 손수건을 뺏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진은 작게 그의 눈치를 보다가, 제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 입술을 씹었다. 진 헤니는 애써 못 본 척하며 제 바지 지퍼를 올렸다. 앉은 채 옷매무새를 다듬은 진은 다시 힐끗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의 성기도 잔뜩 발기해 옷 밖으로 부피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를 쳐다보던 진은 조금 부끄러운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 호텔로 바로 갈까…?”
“호텔? 우리 이 뒤로 성당도 가고, 저녁도 먹어야 되는데?”
“어… 아, 그럼 너는… 어떻게…….”
더듬더듬 이어진 말이 뭘 말하는지, 에이든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속으로만 사악하게 웃던 그가 앉아 있는 진 헤니의 턱과 목을 쓸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진의 턱 밑을 감싸 쥐었고, 에이든은 그 상태로 제 바지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가 진 헤니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한쪽 발을 올려 디뎠다. 본격적으로 잡힌 자세에 검은 눈이 잔뜩 흔들리다가 조금 곤란하다는 빛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아, 나는 그… 입으로 잘… 못… 그게, 너무 큰…….”
“입으로 해 달라는 거 아니야.”
검은 눈이 동그래지기가 무섭게 에이든이 해사하게 웃었다. 단단하게 발기해서 핏줄이 보일 정도인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는 그의 손에서 마찰되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한 손으로 진의 고개를 고정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성기를 흔들었다. 눈앞에 쏟아지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 때문에 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
에이든은 앉아 있는 진 헤니를 내려다보며 손을 움직였다. 내리깔린 푸른 눈 아래에서 진은 사냥당한 초식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오갈 데 모르고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가 제 바로 앞에 있는 성기를 힐끗 쳐다봤다. 커다랗고 단단해 보이는 성기는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초식동물이었던 진 헤니는 맛있는 음식을 바라보는 육식동물처럼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에서 눈을 못 뗐다. 조금 몽롱하게, 멍하게 뜨인 검은 눈이 흔들리다가도 욕망하는 눈빛을 품었다. 빤히 성기를 보던 진은 스스로의 시선에 놀라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분명 조금 전에 사정을 했는데… 부족한 느낌이었다. 진은 눈앞에 있는 저게 제 몸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감각을 알았다. 몸이 한계까지 벌어져서 안이 잔뜩 쓸리고 마찰되는 그 감각. 허전한 기분이었다. 뭐가 허전한진 모르겠지만… 허전하고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진 헤니의 검은 속눈썹이 팔락거리며 흔들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런 진 헤니의 턱을 더 강하게 쥐며 웃었다. 검은 눈에 가득 들어찬 욕구가 짙어질 때마다, 아주 즐거웠다.
정장 차림의 진은 오묘했다. 미성숙한 소년이 정장을 걸치고 있는 것도 같았는데, 막상 그의 눈빛은 닳을 대로 닳아 알 걸 다 안다는 빛으로 빛났다. 그러다가도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많은 정복욕을 불러일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진 헤니는 말도 안 되게 야해빠진 사람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길게 뻗은 검은 속눈썹과 힐끗 저를 올려다보는 눈, 가끔 꿀꺽이며 울리는 진의 목울대에 어금니를 물 수밖에 없었다.
강하게 손을 움직이던 에이든이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떼고, 진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멍하니 있던 진은 에이든을 올려보며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와 똑같이, 이러면 되냐는 눈빛이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흐뭇하게 웃으며 진 헤니의 벌어진 입에 성기의 끝을 맞췄다.
“윽…….”
혓바닥까지 예쁘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진 헤니는 정말 입 안의 혓바닥과 어금니, 혀 아래에 일어서 있는 푸른색 핏줄까지 다 예뻤다. 새빨간 혓바닥 위로 에이든 테일러의 정액이 툭툭 떨어지고, 진 헤니는 그가 사정을 마칠 때까지 입을 닫지 않았다. 기특하게도.
더운 숨을 몰아쉬던 에이든은 입 안에 든 것을 확인하듯 진의 입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그 뒤엔 입에 고여 있는 흰색의 체액을 휘저었다. 에이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진의 턱을 잡았다. 그리곤 상냥한 얼굴로 입을 닫도록 도와줬다. 삼키란 소리였다. 진은 제 입을 다물게 한 손이 턱 밑과 목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목울대를 울렸다. 꿀꺽이며 목을 넘어간 것에 에이든 테일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쁘기도 하지.”
에이든 테일러는 예감할 수 있었다. 제가 기다리던 말은 이제 곧 진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예정이었다. 필요한 시간은 아주 조금, 아주 잠깐이었다. 곧… 몸 안에 얼른 쑤셔 넣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게 될 테니까.
「 To do list 2 : 엘 에르모소 대극장에서 오페라 <카르멘> 감상하기 ✓ 완료(다 보진 못함)
※ 진 헤니의 평가 : ★★ 나중에… 뮤지컬로 다시 봐야겠다…!
※ 에이든 테일러의 평가 : ★★★★ 이제 곧.」
***
「 To do list 3 : 리스본에서 파두 레스토랑 가기
※ 진 헤니의 메모 : ‘파두’는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으로 뱃사람들의 삶을 담은 노래라고 한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조금 아쉽지만 기대된다!
※ 에이든 테일러의 메모 : 좁은 레스토랑을 찾아 봐야 함.」
진 헤니의 표정은 아주 만족스러움과 동시에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저 웃으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뿐이었다. 리스본의 날씨는 아주 청명하고 맑았다.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빛났고, 그 위를 떠다니는 구름은 그림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하늘색 아래에는 주황색의 집과 지붕들이 골목을 빼곡히 채웠다. 그 아래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는 말도 안 되게 아름답고 맑아서, 끊임없이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오페라를 보고… 물론 봤다고 하기 좀 애매하지만. 어쨌든 그날 밤, 진 헤니는 에이든 테일러를 덮치는 것에 실패했다. 진은 에이든이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신혼여행에 와서 무슨 일인지… 진은 점점 애가 닳고 있었다. 원래 에이든 테일러라면 아침, 점심, 저녁을 쉬지 않고 남았을 사람인데, 그걸 알아서 더 애가 탔다. 짙은 키스나 몸을 만지는 것 이후의 것들이 필요했다. 진 헤니는 점점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게 인상을 찡그리던 진이 에이든을 흘겨봤다. 에이든은 그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랑스럽기는……. 그저 귀엽고, 귀여운 표정이었다. 그날 밤, 진이 제 위에 올라타서 입을 맞추는 통에 잠깐 정신이 끊길 뻔했지만, 용케도 참아낸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때 이성을 잃고 일을 쳤으면 저 귀여운 표정을 못 봤을 거였다. 귀여운 표정은 물론이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야한 모습도 못 봤을 거였다. 이제 곧 볼, 그 모습.
“진, 배는 안 고파?”
“…….”
“응?”
“배고파…….”
다정한 물음에 진 헤니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에이든은 목을 울려 웃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를 한 번 확인했다. 그 뒤에 진의 머리칼 위로 입을 맞췄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한 푸른 눈에 진이 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옅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리스본 구시가지에서 유명한 카페 하나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브런치를 먹기 위해서였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많은 골목, 두 사람은 트램 하나에 올랐다.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트램엔 바람이 끼쳐 들어왔다. 창문가에 앉아 있는 진 헤니는 제 머리칼과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맑게 웃었다. 바깥으로는 오밀조밀 모여 있는 색색깔의 집들과 거리를 걷는 사람들, 음식점 테라스에 앉아 한낮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른하고, 여유롭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절로 웃음이 났다.
“진, 사랑해.”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사랑을 고백했다.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진은 옆을 돌아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막, 사랑에 빠져서 입 밖에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진 헤니는 푸른 눈을 보다 슬쩍 그의 두 번째 손가락을 잡았다. 손가락을 꼬옥 쥐고는 키득거리며 웃는 모습에 에이든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보조개가 패인 에이든의 뺨을 바라보다가, 진 헤니가 그의 손바닥에 손가락 끝을 세워 글자를 하나씩 썼다.
「내가 더.」
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스러운 모습에 에이든이 결국 소리 내 웃었다. 진의 머리칼이 바람이 흩날리고,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진 검은 눈이 따뜻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그 모든 건 말도 안 되게 황홀해서, 도저히 사랑한다고 말을 안 하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제 옆에서 아이처럼 맑고 순수하게 웃고 있는 저 사람이, 저와 평생을 약속한 사람이라니… 비현실적이었다. 진 헤니 자체가 꿈결 같은 사람인데, 제 연인이라는 건 더 말도 안 돼서 마음이 덜컥였다. 에이든은 진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모든 게 다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밝게 웃던 에이든은 진의 손을 꽉 얽어 잡았다. 너무 행복해서, 많이 불안했다. 그가 평생 저를 지켜주겠다 한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다… 막연하게, 사라지면 어쩌지…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바깥에 있는 주황색 고양이를 바라보던 진 헤니는 제 손을 강하게 잡는 느낌에 다시 에이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스본의 하늘보다 푸른 눈은 약간의 두려움을 머금고 있어서, 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때때로 겁먹은 눈을 했는데, 이럴 때면 조금 속이 상했다. 속으로 한숨을 쉬던 진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에이든, 내리자.”
“응, 그래.”
트램에서 몸을 내린 뒤, 진은 에이든의 팔을 질질 끌고 골목 하나로 들어갔다. 그는 좁은 골목길에서 아까 그 주황색 고양이를 마주쳤다. 고양이는 진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여서, 진은 다정하게 웃었다. 안녕. 그렇게 인사하자 고양이는 겁먹은 눈으로 진과 에이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폴짝 뛰어 사라졌다. 이제 깊고 좁은 골목에는 두 사람만이 자리했다.
진 헤니는 주변을 잘 둘러보다가 제 뒤의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은 약간 의아한 낯이었다. 진 헤니는 옅게 웃으며 그런 그에게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 둘이 짧게 붙었다 떨어졌다. 한 번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에 진이 두 번 정도 더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붙였다. 그리곤 뺨에도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진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환히 웃는 얼굴을 보다가 진을 껴안았다. 그는 제 다정한 연인의 목에 얼굴을 묻고 몇 번이나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 진.”
“나도 사랑해.”
“사랑해…….”
“…배고파, 얼른 밥 먹자.”
아이 같은 말에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뺨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두 사람의 입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
진은 아직 티셔츠에 묻어 있는 나타의 가루를 털었다. 엄청 맛있었어……. 이따 또 먹고 싶다…….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이후에, 두 사람은 정신없이 디저트를 먹으러 다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 헤니가 먹고, 에이든 테일러는 구경만 했다. 먹지 않아도 배불렀기에 상관없었다.
진은 앉은 자리에서 나타 4개를 먹고, 크루아상과 머핀도 3개씩 해치웠다. 유명하다는 초콜릿 라떼도 거의 한 번에 들이킨 수준이었다. 입으로 쉴 새 없이 들어가는 달달한 것들을 보며 에이든 테일러는 감탄밖에 못했다.
“맛있었어?”
“응, 이따 또 먹자.”
“…….”
눈을 크게 뜨던 에이든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 헤니는 행복하게 웃으며, 이제 곧 해가 질 것 같은 리스본의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두 사람은 성조르주 언덕에 올라 있었다. 배도 부르고, 단 것도 엄청 많이 먹었고… 해가 질 것 같은 하늘은 오묘한 빛으로 빛나고, 무엇보다… 옆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최고였다.
조금씩 석양이 지고 있는 리스본의 하늘, 주황색의 지붕들이 붉은 빛을 받아 더 짙은 색을 뿜었다. 진은 눈앞에 펼쳐진 동화 같은 장면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언젠가 둘이서 봤던 LA의 야경과도 느낌이 달랐다. 물론 두 사람 자체도 그때와 달랐다.
진은 그때를 잠깐 떠올리다 제 앞의 연인을 바라봤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조금 초조해 보였다. 웃고는 있는데 작게 눈치를 봐서, 진 헤니가 그의 왼쪽 손목을 매만졌다. 그가 언제나 소중하게 차고 있는 팔찌가 진의 손에 느껴졌다.
가만 무언가를 생각하던 진은 에이든의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빼선, 제 목에다가 걸었다. 진 헤니는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맞추고, 렌즈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남자를 필름에 가뒀다. 지금 제 옆에 있는 이 순간을, 저를 사랑하고 있는 저 푸른 눈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작게 찰칵 울리는 소리에 에이든이 옅게 웃었고, 진은 또 다시 셔터를 눌렀다.
“에이든, 그거 알아?”
“응?”
“네 생각보다… 나는 널 더 많이 사랑해. 알면 놀랄걸…?”
진이 카메라를 내리며 덤덤히 말했다. 그리곤 약간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이든은 그의 표정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가끔은 불안하고… 네가 더 잘나질 때마다 심술이 나긴 해…….”
“하하….”
“우리 둘 다 너무… 숨기고 말 안 하는 게 많아서 문제잖아. 그냥… 앞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도 많이 하자. 오해 안 하게……. 그때도 나는 네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지 몰랐단 말이야.”
고질병 같은 거니 고쳐야 했다. 적어도 서로에게는 뭘 느끼고, 뭘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야 했다. 그래야 그때처럼 바보 같은 오해도 안 하고, 바보처럼 혼자 끙끙거리지도 않을 거였다.
프러포즈 소동 이후, 진은 그의 서재에서 ‘권태기 연인들을 위한 100가지 지침’ 따위의 책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아야 했다. 웬 권태기…? 충격을 받아 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을 에이든에게 가져가자, 그는 창피하다는 얼굴로 그때를 설명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이든, 앞으로 가끔 그때처럼 좀… 삐걱거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계속 같이 있자. 그럴 거지?”
“맨날 멋진 건 다 뺏겨서 큰일이네…….”
“멋있었어?”
우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진의 모습에 에이든 테일러가 환히 웃었다. 능청스럽게 웃는 모습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제가 평소에 짓는 표정과 비슷했다. 진 헤니는 이제 에이든 테일러처럼 웃을 수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 역시 진 헤니만큼 다정한 눈빛을 지을 줄 알았다. 차갑기만 하던 푸른색 눈은 진 헤니를 바라볼 때면 세상 무엇보다 따뜻하게 빛났다.
둘 다 당장 입을 맞추고 싶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껴안고 체온을 느끼고 싶지만… 조금 뒤에,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아쉬운 낯의 진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우리 그래서 파두 언제 보러 가…? 저녁도 먹어야지!”
“…아까 그렇게 먹고 저녁이 또 먹고 싶어?”
“지금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는 거야…?”
“아냐, 구박이라니, 진. 감탄이었지. 나도 네가 많이 먹는 게 좋아. 오늘은 많이 먹어 둬.”
오늘은…? 진은 에이든의 마지막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푸른 눈은 조금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진은 그의 눈에 옅게 보이는 장난기와 짓궂음에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시간을 확인하다가 고갯짓을 했다. 이제 슬슬 가자는 소리였다. 진 헤니는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에이든을 흘겨봤다. 에이든은 아까 전의 진 헤니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두 사람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내내 투닥거렸다. 서로를 통째로 삼키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연인 같다가도, 동갑내기 친구들처럼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리스본을 밝히던 해가 지고, 밤이 내린 거리를 걷는 내내.
어두운 골목을 따라 내려온 두 사람은 반지하에 위치한 파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슬슬 공연이 시작될 시간이라 조금만 더 늦었다면 자리에 앉지 못할 뻔해서, 진이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내부는 어둡고, 좁았다. 테이블이 6개 정도밖에 없었다. 한쪽 벽은 주방과 뚫려 있어서, 안에서 요리를 하는 게 다 보이도록 돼 있었다.
조명은 짙고 어두운 붉은 색이었다. 두 사람은 구석진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공연 관람이 용이하도록 자리는 조금 특이하게 돼 있어서, 마주 앉는 것이 아니라 옆에 앉는 구조였다. 에이든은 진의 옆에 앉으며 속으로 뿌듯하게 웃었다. 역시, 좁은 레스토랑을 알아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는 대구 요리와 와인이 놓였다. 에이든은 진이 먹기 좋도록 생선의 살을 발랐다. 진은 벽에 걸려 있는 많은 액자들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어캣처럼 여기저기를 보기도 잠시, 옆에서 들리는 기타 선율에 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오늘의 가수는 좁은 곳 가운데에 편안히 서서 노래를 시작했다. 마이크도 없이 노래했지만 좁은 공간을 크게 울렸다. 모든 사람이 숨죽여 가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진 헤니 역시도. 진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은 뿌듯하게 웃으며 그의 허리를 손으로 감쌌다.
공연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두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레드와인의 잔 수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진 헤니의 허리에 가만 얹혀 있던 손바닥은 옆구리를 뭉근하게 쓸고 있었다.
‘이러고 또… 또 그냥 잘 거면서…!’
진은 괜히 타들어가는 속에, 앞에 있는 와인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에이든은 그런 진을 보며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가 진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귓가에서 작게 속삭였다.
“진, 너 술도 못 마시는데 이제 그만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왜 술을 못 마셔…! 내가 너보다 잘 마시는데…!”
“오늘은 취하면 안 되는데… 맨정신이어야 하는데…….”
또 ‘오늘은’이었다. 진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인상을 쓰며 제 어깨에 기대 있는 에이든을 바라봤다.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에이든은 저를 바라보는 그에게 예쁘게 웃어 보였다. 눈이 휘어지고, 입술에 옅은 미소가 지는 웃음. 그가 진 헤니를 꼬실 때면 짓는 표정이었다. 진은 오늘따라 그가 아주, 심각하게 수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기타 선율에 입을 작게 벌리고 있기도 잠시, 진은 제 어깨와 뒷목에 떨어지는 짧은 입맞춤에 흠칫 몸을 굳혔다. 진은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살폈다. 내부가 아주 어둡고, 모두가 다 공연만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은 뭐 하는 거냔 표정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오페라를 볼 때보다 더 난감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는 데서… 안 될 일이었다.
“에이든…!”
“진,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
진 헤니만 들을 수 있도록 낮고 작게 뱉어진 목소리였다. 진의 귀 바로 옆에서. 에이든 테일러도 주변을 슬쩍 돌아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오페라 볼 때 말이야.”
“…….”
“무슨 생각했는지 물어봐도 돼?”
예상 밖의 질문에 진 헤니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뒷목에 소름이 오름과 동시에 그때 화장실에서 봤던 장면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나갔다. 제 반응을 살피느라 치켜떠진 푸른 눈, 제 성기를 물고 있던 붉은 입술, 아름다운 얼굴에 뿌려졌던 체액……. 바로 눈앞에 보이던 에이든 테일러의…….
“말하기 곤란하면 여기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정도로만 대답해, 진.”
“…….”
“알겠지?”
입술을 씹던 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가 궁금하길래……. 여태 공연을 보느라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등 뒤에서 저를 감싸 덮고 있는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갑자기 몸을 긴장시켰다. 담담한 노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고,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들은 그 노래 소리에 묻혔다. 진 헤니만 들을 수 있도록.
“손으로 만지는 걸론 좀 부족했지?”
진은 눈을 꼬옥 감더니 에이든을 돌아봤다. 정말 대답해야 되냐는 표정이었는데, 에이든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라고. 진은 다시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곤 입술을 씹었다. 잠시 망설이던 진 헤니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입은?”
“…….”
“빨아 주는 걸로는 충분했어?”
점점 목소리가 사나워지고 있었다. 진에겐 보이지 않는 에이든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진은 이번에도 곧바로 대답을 못했다. 입으로 소리 내 대답하라는 것도 아닌데 많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부끄러워하기를 바라며 하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와중에도 대답을 하는 게 중요했다. 스스로 인정하고,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했다.
“진, 내가 빨아 주는 걸로 충분했어?”
“…….”
진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천박하고 난잡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 내 얼굴에 싸고 기분 좋아 보였는데… 아니었나 보네. 왜지…?”
“…….”
“싸고 나서도 부족했어?”
검은 눈이 흔들렸다. 귀 옆에서 뱉어지는 목소리에 점점 정신이 날아가고 있었다. 분명 사정을 했는데… 그 뒤로도 해소되지 않은 느낌이었던 걸 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랫배가 허전했고, 말하기에 수치스럽고 창피한 곳도 허전했다. 진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대답이 없어서 에이든이 질문을 바꿨다.
“왜, 뒤에 넣고 싶어서?”
이번엔 침이 꿀꺽 넘어갔다. 진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주변을 살폈다. 누가 듣고 있을 것 같아서. 말도 안 되게 부끄럽고 난잡한 말들을, 누가 듣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줄기에 오싹함이 내달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연인의 반응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그때, 싸고도 부족해서… 뒤에 박히고 싶었지?”
“하…….”
“대답해.”
수치심이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부끄러운 말에 진이 몸을 움츠릴수록, 믿을 수 없게도 몸은 달아올랐다. 진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한참 만에 대답했다. 작게 끄덕이는 고개가 말했다. 그랬다고.
동시에 몸이 걷잡을 수 없이 예민해지는 게, 진 스스로도 느껴졌다. 앞으로 가고 나서도 부족해서,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가 제 몸 안으로 들어왔음 했다. 조금은 강하게, 어떻게 보면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세게 몸 안에 넣어 줬음 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아니까.
에이든은 옆구리에 있던 손을 진의 허벅지로 내렸다. 예상대로 반쯤 서 있는 성기에 짙게 웃던 그가 말을 덧붙였다. 낮게 목을 울려 웃는 소리가 귓가에 자리했다.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미안하네…….”
능청스러운 말과 함께 에이든이 붙어 있던 몸을 뗐다. 제게서 멀어지는 체온에 진이 입을 달싹였다. 닿고 싶어, 만지고 싶어……. 머릿속에 충동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이 있는 길거리에서는 손도 못 잡고, 안지도 못해서 자꾸 애가 닳는데… 게다가 신혼여행이라고 와서는 며칠 째 제대로 몸을 섞지도 못했으니, 이젠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 놓고, 슬쩍 한 발을 빼는 에이든이 답답하기만 했다. 왜… 왜 자꾸…….
진의 원망스러운 눈길이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은 태연한 낯으로 파두 공연을 보고 있었다.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도 그는 진을 바라보지 않았다. 진이 그를 돌아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말은 못하고 입술을 꼭 깨무는 모습에 에이든이 다시 고개를 진에게 가깝게 숙였다. 아직도 시선은 노래하는 가수를 바라본 채였다.
“진, 소원 하나 있었잖아.”
“…….”
“지금 쓸래?”
푸른 눈이 슬쩍 진 헤니에게로 향했다. 어쩔 거냐고. 넌, 어떻게 하고 싶냐고. 에이든 테일러는 흔들리는 검은 눈을 보다가 달싹이는 입술을 내려다봤다. 말해. 에이든의 눈이 진 헤니를 재촉했다. 진은 입을 달싹이다가 에이든 테일러의 귀 근처로 고개를 숙이고 작게 속삭였다.
“지금 당장 돌아가서… 하고 싶어.”
한숨처럼 뱉어진 말에 에이든이 예쁘게도 웃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가 비워진 건 순식간이었다.
***
키스부터 애가 닳아서, 진 헤니는 정신이 없었다. 옷을 어떻게 벗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호텔에 들어오고 난 뒤로는 본능이 이성을 앞서고 있었다. 그냥 딱 하나 알 수 있는 건, 지금 당장 제 뒤에 꽂혀 있는 손가락이 몸 안을 들쑤실 때마다 아랫배가 홧홧해진다는 사실뿐이었다.
“아으…! 하, 으응!”
“하, 뒤에… 쑤셔 주는 걸 이렇게 좋아해서, 어떡하지?”
“아! 하… 아흐, 그런 말, 하지 마…!”
에이든은 커다란 몸으로 진을 속박하듯 안고, 한 손으로는 오물거리는 입구를 찔꺽이며 쑤시는 중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는 사람치고는, 그런 말을 하니 반응이 격해져서 에이든은 사납게 웃었다. 찌걱찌걱 소리를 내는 곳은 손가락도 만족스럽지가 못한 건지, 움찔거리며 안으로 더 깊게 빨아들이고 싶어 했다.
“손가락으로도… 하, 별로인 것 같은데…….”
“으응…! 아, 하으… 에이든… 나, 아윽! 나…….”
입구와 배 안쪽 어딘가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굵직한 손가락 세 개가 들어찬 곳은 이걸론 안 된다는 듯이 움찔거렸다. 더 깊은 곳이 눌렸음 했다. 배 안 쪽 깊숙한 곳. 애가 달아 진은 눈앞이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진은 에이든의 입술을 찾아 혀를 급히 집어넣었다. 뭐라도 더 필요했다. 허리가 자꾸 제멋대로 흔들리고 비틀렸다. 에이든은 덜덜 떨리고 있는 허리와 아랫배를 보다가 들어차 있던 손가락을 한꺼번에 뺐다.
“아흐…!”
아래가 엉망으로 움찔거리고 벌름거렸다. 진은 제게서 몸을 떼고 일어나려는 움직임에 안 된다는 듯이 손으로 에이든의 목과 어깨를 잡아 내렸다. 에이든은 제 허리에 감겨오는 기다란 다리에 어금니를 물었다. 진의 다리가 에이든의 허리를 힘을 실어 눌렀다. 얼른, 얼른 넣으라는 것처럼.
“진, 오늘은 나랑 약속 하나 해.”
“하… 하으, 빨리…!”
“오늘은 절대 앞엔 손대지 않는 거야.”
말을 잠시 멈춘 에이든이 서랍장 위에 있던 콘돔 하나를 찾아 들었다. 진은 콘돔을 뜯는 에이든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검은 눈이 흐렸다. 콘돔을 뜯은 에이든은 그걸 그의 성기가 아닌 진 헤니의 성기로 가져왔다. 콘돔을 씌우는 게 아니었다. 그는 성기의 뿌리에 콘돔으로 매듭을 묶고 있었다. 진은 아래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몸을 비틀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사악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싸고 싶어지면 말해.”
“……?”
근데 안 싸도 충분히 기분 좋을 거야. 그 말은 에이든의 속으로 삼켜졌다. 여태 무언가를 품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몸은 뒤만으로도 충분히 절정을 맞고도 남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애가 타 어쩔 줄 몰라 하는 입구에 성기의 끝을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진의 고개가 뒤로 젖혀져서, 그는 잠시 입구에 성기 끝을 비비고 문지르며 애를 태웠다. 들어올 듯 말듯 하지만 결국 넣어지지 않는 것에 진이 애달픈 목소리로 애원했다. 시키지 않아도, 진은 뭐에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으응…! 하아… 넣어 줘… 응? 에이든, 넣어 줘…!”
“하… 넣기만 하면 돼? 원하는 걸 똑바로 말해야지, 진.”
“아흐…!”
“앞으로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하기로 했잖아. 솔직하게.”
끝이 조금 박혀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자 진의 허리가 비틀렸다. 엉덩이 사이에 비벼지는 딱딱한 게, 빨리 안으로 들어와 줬음 싶었다. 에이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다리가 바르작거렸다. 그의 허리에 살갗을 비비기도 하고, 얼른 들어오라고 그를 끌어당기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말하기 전까진 안 된다는 듯, 무릎에 입을 맞췄다. 결국 진이 입을 열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안에… 안에 넣고 움직여 줘, 응?”
“진, 빨아 주는 거보다 뒤에 박히는 게 더 좋아…?”
“하… 좋아, 뒤에 넣어 주는 게, 흐… 더 좋아…….”
멍한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 입으로 말해 놓고 몸에 열이 올랐다. 더 이상 애탈 수도 없게 달아오른 몸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스로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에이든은 흐뭇하게 웃으며 성기의 끝을 얕게 삽입했다. 그것만으로도 신음이 터지며 진의 아랫배가 들썩였다.
“왜? 안에, 하… 쑤셔 주면 어떤데?”
“아응…! 기분, 좋아… 아! 안에, 쓸려서, 으응… 기분 좋, 아…….”
좋아, 그러니까 빨리……. 안을 쑤셔 달라 졸라대는 목소리에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다리를 넓게 벌려 잡았다.
“하, 씨발… 진, 오늘은 내가… 미리 다 미안해.”
“아… 하악!”
“내가 다 미안해.”
한 번에 깊게 처박힌 것에 둘 다 잠시 몸을 굳혔다. 드디어 원하던 것을 머금은 입구는 움찔거리며 그의 침입을 반겼다. 에이든 테일러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쥐어짜듯 오물거리는 곳이 얼른 움직이라 그를 재촉했다. 에이든은 진의 무릎 아래를 강한 힘으로 쥐어 누른 채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윽…! 하, 아응…!”
쩍쩍 붙었다 떨어지는 몸에 전신이 다 흔들렸다. 푹푹 몸을 박아 넣던 에이든은 별안간 몸을 한꺼번에 잡아 뺐다. 주륵 하고 빠져나가는 것에 진이 몸을 떨었고, 벌어져 있던 뒤가 닫히기도 전에 뒤에서 다시 강한 힘으로 성기가 쑤셔 넣어졌다.
“으응! 아! 흐윽…! 에이든, 아… 나 이거, 이 자세 너무… 아으응…!”
옆으로 눕혀진 진은 한쪽 다리가 에이의 손에 잡혀 들린 채였다. 에이든은 진의 무릎을 제 팔에 걸고, 손바닥으로는 아랫배를 짓눌렀다. 후벼 파듯 몸을 집어넣었을 때, 그가 소리를 지르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배 안쪽을 푹푹 쑤시고 나올 때마다 진의 허리가 비틀렸다.
“하악! 아…! 아, 나… 잠, 깐만…!”
배 안으로 뜨거운 감각이 고였다. 앞을 자극하지 않아도 정액을 뱉어내게 만드는 그 느낌이었다. 잠깐이라는 말에 오히려 에이든의 허리짓은 더 빨라지고, 더 강해졌다. 그가 몸을 박아 넣고 있는 곳 역시 더 빠르게 움찔거리고 있었다. 진은 몸 안에 차오르는 느낌에 허리와 상체를 버둥거렸다.
“으응…! 아! 아윽…! 에, 이든…! 이거, 잠깐…!”
허리가 꺾이는 각도가 커지고, 마찰되는 내부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의 눈앞이 하얗게 번지고 있었다. 그는 제 아랫배 위에 있는 에이든의 손을 쥐어뜯듯 잡았다. 몸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속도는 계속 빨라졌다. 결국 몸에 강하게 힘이 들어가고 눈이 질끈 감겼다. 과민해진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악! 아… 아으응!”
“하, 씹…….”
진은 제 몸에 찾아든 감각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냥 계속 허리가 비틀렸다. 입에서는 이제 흐느낌 같은 소리가 새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으로 몸을 덜덜 떨고 있기도 잠시, 에이든이 진의 귀 옆에서 속삭였다. 만족스럽게 웃는 낯이었다.
“진, 더 좋은 수준이 아니라, 이젠… 하… 뒤에 박히기만 해도, 충분한 것 같은데.”
“……?”
“안 싸도, 후… 뒤에 쑤셔 주기만 해도 기분 좋아?”
진 헤니는 그 말에 제 성기로 시선을 내렸다. 에이든의 말대로 제 성기에선 아무것도 나와 있질 않아서, 검은 눈이 흔들렸다. 흐느낌 같은 신음이 정말 흐느낌으로 바뀌고 있었다. 검은 눈은 겁먹은 것처럼 제 뒤의 연인을 바라봤다.
이거 왜……. 이걸 묶어 놔서 그런 게 분명했다. 못 나오게 막아 놔서. 저는 남자인데… 사정을 하지 않고도 기분이 좋은 건 뭔가 이상했다. 뒤에 오가는 것 때문에 사정을 하게 되는 것까지는, 기분이 좋으니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몸이… 몸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이거… 흐으, 이거, 풀어 줘… 에이든, 응?”
“왜? 충분히 기분 좋아 보이는데.”
“아니야…! 나, 이거 이상해… 이상한 것 같아, 에이든. 이거 풀어 줘…!”
울먹이는 목소리가 도움을 구했다. 에이든은 진의 어깨와 뒷목에 입을 맞출 뿐,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 헤니는 다시 움직이려는 그의 허리를 손으로 막아 세웠다. 그리곤 아랫배를 누르고 있는 손을 떼어내선 제 성기로 가지고 갔다. 풀어달라고.
“풀어 줘… 흐으, 응? 에이든, 풀어 줘… 제발…….”
“하… 진짜 몸이 이상해졌나? 어떡하지…?”
“흐윽… 빨리, 풀어 줘… 에이든…!”
진짜 이상해진 거 아니냐며 에이든이 빳빳하게 선 성기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제대로 만져 줄 생각은 없었지만. 진은 겁이 나는 건지 계속해서 풀어 달라 흐느꼈고, 그 절절한 애원에 에이든이 손을 내려 매듭을 풀었다. 압박감이 사라진 성기가 꺼떡거렸지만 역시 사정을 하진 않았다. 에이든은 빨갛게 달아오른 진의 성기를 내려다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무언가를 시험하듯 다시 허리를 치받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신음이 방을 채웠다. 쩍쩍거리는 소리와 몸이 드나드는 입구에서 나는 젖은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제 에이든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진의 상체를 뒤에서 안은 채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강하게 속박된 몸은 뒤를 뚫고 들어오는 것에 속절없이 흔들리다, 이내 다시 몸을 굳히며 절정을 맞았다. 진 헤니는 제 뒤에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허리를 쥐어뜯듯 잡고 있었다. 아랫배가 벌벌 떨리는 중이었다.
“하악! 아…! 하으, 아응! 아, 하으윽!”
진 헤니의 고개가 또 한 번 뒤로 젖혀졌다. 덜덜 떨리며 강하게 조이는 몸에 에이든 역시 어금니를 물었다. 너무 오물거리는 통에 이번에는 결국 진의 몸 안에서 사정해야 했다. 사정 후에 숨을 고르던 에이든이 아래를 보며 목을 울려 웃었다. 그는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 씨팔, 진짜 미치겠네.”
진의 상체를 안고 있던 손 하나가 뒤로 젖혀져 있던 진 헤니의 턱을 쥐었다. 그리곤 잘 보라는 것처럼 진의 고개를 아래로 숙여 내렸다.
“진, 안 묶어도… 별다를 건 없는 것 같은데.”
“흐윽… 하으, 아니야… 이게, 이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의 성기는 투명한 액이 끝에 고여 흐를 뿐, 이번에도 정액을 뱉어내지 않았다. 진 헤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검은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뚝뚝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몸에 오른 감각이 가시질 않아서, 진은 몇 번이나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뱉어야 했다. 제 성기를 내려다보던 진이 손을 갖다 대려 했다.
“안 되지.”
“나… 나 뭔가 이상해, 흐으… 이거, 잠깐만…!”
“손대지 않기로 했잖아.”
에이든은 진의 양쪽 손목을 뒤로 모아 잡고,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꾸욱 눌러 내렸다. 진 헤니는 허리만 높게 들리고, 침대에 고개가 처박힌 채였다. 위에서 느껴지는 압박감과 속박된 손이 주는 오싹함에 진이 흐느꼈다. 에이든이 그 상태로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잘 쪼개져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근육이 움직임에 따라 조여지고, 때때로 풀어졌다.
“하, 진… 사실 이게, 씹… 될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하, 나도 몰랐어.”
“아으응…! 아! 하으… 흐윽!”
“씨발… 너를, 하… 진짜 어떡하지…?”
표정이 사나웠다. 진 헤니를 진짜 어쩌면 좋을지, 에이든 테일러는 감도 안 왔다. 뒤가 뚫리고, 쑤셔지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이 야해빠진 몸을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넓게 벌어진 어깨하며, 현역 선수일 때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잘 짜인 근육까지도 전부 말도 안 됐다. 이런 몸을 갖고선 뒤로만 간다니, 환장할 일이었다.
“에, 이든… 나, 나 싸게 해 줘…. 흐으… 무서워…!”
“뭐가, 하… 뭐가 무서워, 진.”
“하윽! 싸고, 싶으면… 아응! 말, 하라고… 흐으, 했잖아… 응?”
싸게 해 달라고 울먹이는 목소리에 에이든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려 진의 성기를 쥐었다.
“하… 싸게 해 줄게. 근데…….”
“……?”
“이게 더 무섭지 않을까?”
에이든이 허리를 움직임과 동시에 손으로 진의 성기를 마찰했다. 진은 앞과 뒤에서 쏟아지는 자극에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뒤로는 비명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진은 제 성기를 흔들고 있는 손을 잡았다가, 움직이고 있는 에이든의 허리를 막아 세우려 했다가, 나중에는 흐느껴 울었다. 척척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손끝에서 진의 성기가 금방 정액을 뱉어냈지만, 에이든은 손과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계를 넘어서는 자극에 진은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다물지 못한 입에서 타액이 늘어지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덜덜 떨리는 몸에서 에이든이 성기를 빼준 건, 진의 성기에서 묽은 액이 후두둑 떨어질 때쯤이었다. 진의 비명 같은 신음 뒤로, 에이든의 낮은 탄식이 뒤따랐다. 침대 위가 체액으로 흥건했다. 진이 덜덜 떨리는 몸을 침대 위에서 웅크렸다.
“하…….”
“하으… 흐윽…!”
성기가 빠져나가고 나서도 진의 몸은 저 혼자 움찔거렸다. 얼마나 강하게 때려 박아댄 건지 안에 싸질러놓은 정액들이 밀려나와 진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흐르는 중이었다. 에이든은 먹음직스러운 엉덩이 사이에 다시 손가락을 가지고 갔다. 그리곤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 우리가 며칠 째 못했더라?”
“……?”
“그동안 내가 너무 애태웠으니까, 사과의 의미로 앞으로 열심히 할게.”
흐리게 풀린 검은 눈이 꼬옥 감겼다. 에이든은 지금도 안에 넣어 달라 말하는 것 같은 입구를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진 헤니가 제 좆이 안을 오가며 쓸어대는 게 기분이 좋다는데, 열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론 지금보다 더 많이 먹어 둬, 진.”
이젠 참을 일이 없을 테니까. 체액과 젤로 엉망이던 곳이 또 다시 무언가로 들어찬 건 아주 잠시 후였고, 그 뒤로 쉽게 빠져나가지 않았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혼여행의 시작이었다.
「 To do list 3 : 리스본에서 파두 레스토랑 가기 ✓ 완료
※ 진 헤니의 평가 : ★★★★ 오페라보다 좋았다! 중간엔… 기억이 좀 없지만…!
※ 에이든 테일러의 평가 : ★★★★★ 제대로 된 더티토크를 하면 진은 대체 어떻게 반응할까.」
「 To do list ?? : 뒤로만 가게 하기 ✓ 완료
※ 진 헤니의 평가 :
※ 에이든 테일러의 평가 : ★★★★★★★★★★」
***
두 달 간 유럽을 돌고 집에 돌아온 진 헤니는 곧바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나디아에게 연락을 해야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아담을 찾으러 간다고 말해야 하는데……. 진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에이든은 많이 지쳐 보이는 진의 머리칼 위로 입을 맞췄다.
“씻고 자야지. 물 받을 테니까 기다려, 진.”
“…….”
베개에 고개를 박고 있던 진은 얼굴을 들곤 에이든을 노려봤다. 원망의 시선에도 에이든 테일러는 다정하게 웃을 뿐이었다. 신혼여행에서의 진 헤니는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쁘고, 아름답고, 멋있고, 야하고를 혼자 다 했다. 신혼여행을 한 번 더 가고 싶을 정도였다. 두 달 내내 하루 종일 물고 빨 기회는 흔치 않았다. 에이든은 엎드려 있는 진의 허리와 엉덩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 우리 결혼 다시 할까?”
“뭐……?”
“신혼여행 가게. 아, 둘이 다시 결혼하면 신혼이 아닌가…? 뭐라고 해야 되지? 재혼여행인가?”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은 아파오는 머리와 온몸을 힘들게 하는 근육통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에 에이든이 웃음을 삼켰다. 그리곤 진의 뒤통수에 한 번 더 입을 맞추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목욕물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의 휴식기 아닌 휴식기 이후,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달려야 했던 나날들이 진 헤니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진 헤니가 생각하기에 에이든 테일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지만 그래도 저는 운동선수였던 사람이고, 심지어 지금도 운동량이 전혀 적지 않았다. 일반인을 훨씬 웃도는 체력과 건강함은 진이 생각하기에도 스스로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 입에서 살려달란 소리가 나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하…….”
건강해서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그래, 좋은 거지……, 언젠가 잔뜩 말라서는 기침을 콜록콜록 하던 에이든의 모습이 생각남과 동시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이 좋은 거지. 앞으로…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진이 그렇게 속으로 다짐할 때쯤, 진 헤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리고 화면에 뜬 번호를 보던 그가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검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진, 안에 물 받아 놨어. 같이 씻자.”
“…….”
“진?”
진은 에이든과 핸드폰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은 그는 답지 않게 손톱을 질겅였다.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에이든이 낯을 굳혔다. 그리곤 조심히 진에게 다가섰다. 무슨 일인데. 눈으로 묻자 진이 한숨을 쉬었다. 눈을 한번 꼭 감았다 뜬 진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댔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섰다.
“…네, 어머니.”
수잔 헤니로부터의 전화였다. 크리스마스 이후에 전화를 드렸지만, 언제나 부모님과의 통화는 쉽지 않았다. 그 뒤로 잘 드리지도 않았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진에게도 불편한 일이었다.
굳은 얼굴로 통화하는 진 헤니의 모습에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도 점점 안 좋아졌다. 방에서 무슨 일인지 걱정하던 에이든도 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곧바로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모르는 번호라서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에이든 테일러입니다.”
전화를 받은 에이든 테일러는 상대방의 말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피식 웃었다. 즐겁게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씨발… 돌아오자마자 난리네. 그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말했다. 입가에 비린 웃음을 지은 채였다.
“아, 어차피 저밖에 없어서요.”
“……?”
멀찍이 서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랜만에 듣는 사나운 목소리였다. 진은 에이든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머니와의 통화를 이어갔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얼굴이 굳어가는 밤이었다.
외전 5. Mr. Henney and Mr. Henney and another Mr. Henney
비가 많이도 오는 날이었다. LA에 비가 오는 날은 드물었는데, 그 드문 날 중 하나였다. 아주 공교롭게도. 굵은 비 아래에 서 있는 남자 두 명은 비가 옷을 적시든 말든 상관없어 보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무감한 얼굴로 묘비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매장이 끝난 묘지 옆에 세워진 거였다.
「줄리아 테일러, 이곳에 잠들다」
옆에 서 있던 진 헤니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에이든은 한참을 묘비만 바라봤다. 그의 속눈썹 끝에서 빗방울이 고였다 떨어졌다. 마치 울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이든의 눈이 감았다 뜨일 때마다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에 진의 표정이 슬퍼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옆을 돌아봤다. 그리고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왜 그래, 진.”
“…….”
“슬퍼할 필요도 없는 일인데.”
네가 슬퍼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 하는 게, 나는 슬퍼. 진은 속으로만 말을 삼켰다. 진은 그저 에이든의 어깨를 가만 쥐었다가, 그 위로 제 이마를 기대었다. 병원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결국 유명을 달리 했다. 에이든은 제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바로 장례를 준비했다. 장례를 치를 사람이 저밖에 없는 게 참 별로라고 말하던 목소리는 건조했다.
“둘이 나란히 누워서 지옥에서 잘 살겠지, 뭐.”
“에이든…….”
에이든은 그녀의 묘비 옆에 보이는 한스 테일러의 묘비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저도 지옥에 갈 것 같은데, 만약 죽어서 또 봐야 되는 거면 좀 곤란하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혀를 차던 에이든은 저보다 더 슬픈 낯을 하고 있는 연인을 바라봤다. 진은 많이 슬퍼 보여서 에이든이 빗물에 젖은 그의 뺨을 가만 쓸며 말했다. 부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에 진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다.
“나중에 나 죽으면 묘비에 ‘에이든 헤니 테일러’라고 새겨지겠네. 마음에 들어. 미들네임으로 넣길 잘한 것 같아.”
“벌써 죽을 때 얘기를 왜 해, 에이든…….”
“맘 같아선 성을 갈고 싶었는데, 아쉽네.”
좆같은 ‘테일러’는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눈빛이 차가워지려 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진이 걱정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싱긋 웃었다. 진 헤니는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단 걸 알았다. 아무리 나쁘고, 평생 미워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세상에 남아 있는 그의 ‘가족’이 이젠 전부 없어진 거였다. 누나 한 명이 남아 있었지만 감옥에 갔고, 에이든은 그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그녀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저와 있었던 일만으로도 많은 게 예상이 됐다. 레오나 테일러는 에이든의 불행을 위해 많은 것들을 이용하고 오해하도록 만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제 예상보다 더 많은 일들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을 거라고, 진 헤니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 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 기색을 알아챈 에이든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다음 주에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데, 빨리 뉴욕에 돌아가서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에이든, 우리 부모님 뵙는 거는… 나중에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왜? 가서 옷 골라 줘, 진. 나 사실 엄청 긴장된단 말이야……. 너희 부모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 나 아직 기억하실까…? 나 싫어하시면 어쩌지?”
에이든은 이제 가자는 것처럼 그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진은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은 땅이 두 남자의 구두 아래에서 철퍽철퍽 소리를 냈다. 진은 걱정 어린 눈길로 제 연인을 바라봤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꽃도, 그 무엇도… 아무것도 없는 두 사람의 묘지. 그런 작은 성의나 마음도 줄 생각은 없다는 듯 휑하게 비어 있는 곳. 진은 그 황량한 모습을 보다가 다시 에이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든이 그의 부모님을 용서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가족을 미워하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가족을 미워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란 걸, 진은 알고 있었다. 왜 저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있는 건지, 누구를 원망하기도 애매할 거였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나의 부모 혹은 형제…. 다른 사람들이 가족과 다정한 시간을 보낼 때, 저는 왜 그러지 못하는 건지… 외로울 마음을 알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풍족하지 않아도 마음이 따뜻한 그런 시간들을… 그도 갖고 싶어 했을 테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내는 곳으로 오겠다는 어머니에게 그러시라 말했다. 이젠 남들처럼, 평범하게, 에이든과 가족을 꾸리고 싶었다.
진 헤니는 다시 옆에 있는 제 연인을 돌아봤다. 남들처럼 살지 못한 두 사람 모두, 이제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기절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지금 하는 중이었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간 건지, 왜 벌써 그 ‘다음 주’가 돼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제 모습을 살피려고 거울을 봤고, 진 헤니는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 충분히 멋있어…….”
“멋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 혹시 막… 예전에 그런, 나 예전에…….”
“우리 부모님은 바깥에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셔, 괜찮아.”
에이든은 혹시 부모님께서 예전 일을 알고 계시냐 묻고 싶은 거였다. 망나니짓이나 하고 다니던 제 모습도, 혹시 알고 계신다면 큰일이었다. 진은 걱정 말라는 것처럼 그의 등을 토닥였다. 집에 TV며 아무것도 없는 게 여전할 테니, 아실 리 없었다. TV가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할 때가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진 헤니가 에이든이 준비한 선물봉투를 챙겼다. 잘 챙기라니까. 또 두고 가려고……. 진이 에이든에게 봉투를 내밀자 그는 아차 하는 얼굴로 받아들었다. 봉투 안에 있는 건 기프트 카드였다. 뉴욕에 계시는 동안 쓰시라고 준비한, 꽤나 거금의 기프트 카드.
“역시 좀 커다란 걸 살 걸 그랬나…?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게 더 낫,”
“에이든…….”
“진, 너희 부모님이 나 싫,”
“에이든, 괜찮아. 우리 아버지는 나도 싫어하시는데……. 원래 누구한테 그렇게 살가운 분이 아니니까 안 좋은 소리 막 하셔도 그러려니 해. 대충 알잖아…….”
에이든 테일러의 모든 말들은 진 헤니에 의해 잘렸다. 진은 뭔가 득도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저도 전화는 몇 번 했었는데… 만나 뵙는 건 5년 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하지만 저까지 덜덜거리면 에이든이 정말 기절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대충 눈에 그려지는 것들이 있었다.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는데…….
약속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맨하탄에 있는 유명 파인다이닝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도 진이 어머니와 통화하는 소리에 에이든은 괜히 핸들을 더 강하게 잡아야 했다. 그는 백미러로 힐끗 통화 중인 진의 눈치를 봤다.
“네, 저희도 가고 있어요.”
[ 그래, 덕분에 편하게 와서 쉬고 있었다고 전해 주렴. 호텔도 엄청 좋더구나. 만나서 다시 인사하겠지만 그래도, 미리 말해 줘. ]
“그럴게요.”
에이든은 조금 어색한 낯으로 진을 바라봤다. 진은 언제나 사랑스럽고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부모님께만은 달라서…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무뚝뚝한 목소리와 표정이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거리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에이든, 부모님이 고맙다고 전해 달라 셔. 고마워, 나도…….”
“아니야. 진, 나 뵙고 잘할 수 있겠지…? 나 이상한 말하면 바로 막아 줘야 해.”
“하하…….”
혼자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는 에이든 때문에 진은 그제야 웃었다. 작은 한숨과 함께였지만. 그 사이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두 사람이 차에서 몸을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에이든 테일러와 진 헤니임을 확인한 웨이트리스는 두 사람을 안쪽 룸으로 안내했다. 일행 분들은 먼저 와 계시다는 작은 안내와 함께였다.
웨이트리스가 고급스러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에이든은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해 보려 노력하며 걸음을 옮겼다. 진 역시 옆에서 자기최면을 걸고 있었다. 아버지랑 싸우면 안 돼, 아버지랑 싸우면 안 돼. 두 사람이 룸 안으로 들어서고, 안에 앉아 있던 안토니오 헤니와 수잔 헤니가 들어서는 이들을 바라봤다.
에이든이 무어라 인사하려 입을 벙긋거리기가 무섭게 수잔 헤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든은 제게 다가오는 수잔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잔은 에이든의 얼굴과 훌쩍 커 버린 키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그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반갑다는 듯이 휘어지는 눈에 에이든 테일러의 긴장이 녹아내렸다. 누가 봐도 진 헤니의 어머니인 중년의 여성은 다감하게 웃으며 에이든에게 인사했다.
“에이든, 어릴 때 얼굴이 많이 남아 있구나. 이렇게 예쁘고 멋있게 잘 커서 느낌이 이상하네.”
“잘… 지내셨어요?”
“종종 생각나더구나.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가끔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랬어.”
수잔이 에이든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만난 어머니처럼, 짙은 갈색의 눈이 제 앞에 선 커다란 남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진짜 제 아들을 쳐다봤다.
“일찍 좀 보여 주면 어디 덧나니? 일찍 보여 주고, 일찍 만나면 좋았잖아, 진.”
진은 한숨을 쉬며 어머니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옆에 어색하게 서 있던 제 아버지와 눈이 마주쳐서 약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냥… 뭐라도, 잘 지내셨는지, 어떻게 지내셨는지… 그냥 말하면 되는 일인데 맘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직 마음에 응어리진 감정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굳은 표정의 진은 다시 힐끗 안토니오 헤니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예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언제나 커다랗고 무서워 보이던 사람은… 어딘가 약해 보여서, 진은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안토니오 헤니를 살피던 진은 지금 제 아버지가 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수잔은 어색해 보이는 두 헤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에이든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마 그렇게 편안한 자리는 아닐 예정이었다. 중간에서 에이든이 눈치를 볼 걸 생각하니 벌써 측은했다.
“다들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이제 밥 먹어요. 배고파.”
에이든은 배고프다는 수잔의 말에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누가 맨날 하는 소리라서. 에이든은 안토니오와 마주 앉는 자리에 착석했다. 뭐라 인사하려 하자 진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는 뜻이라서 에이든이 멋쩍게 웃었다. 조금 어색하고, 많이 불편한 식사가 시작됐다. 간간히 수잔이 농담 섞인 이야기를 꺼내면 그때만 분위기가 유해졌다. 예를 들면…….
“에이든, 그거 아니? 사실 너 우리 집에 있을 때 나디아라고, 진이랑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가 널 보러온 적이 있었는데……. 아, 혹시 서로 아는 사이니?”
“어머니… 그 얘기는 갑자기 왜 하,”
“그때 진이 널 절대 안 보여 줄 거라고 얼마나 찡찡거리던지……. 그때 뭐라고 그랬더라…?”
진은 이제 포기였다. 어머니가 이렇게라도 분위기를 풀어 보시려는 걸 알아서, 낯부끄러운 얘기들이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대체 어릴 때를 어떻게 저렇게 많이 기억하고 계시는 건지……. 저는 잘 기억도 안 나는 것들 투성이었다.
“아, 맞아. 그때 진이 그랬단다. ‘안 돼, 천사는 너무 예뻐서 나디아 네가 보면 너도 좋아하게 될 것 같아.’라고.”
“아니, 그건… 제가 언제요…!”
“네가 그랬잖니. 나디아는 엄청 친한 친구인데, 둘 다 같은 사람을 좋아하면 친하게 지낼 수가 없으니까 절대 보여 주면 안 된다고.”
“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이든 테일러가 크게 웃었다. 진은 얼굴을 가려 덮고 한숨을 쉬었다. 에이든은 귀가 빨개진 제 연인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했다. 천사라고 불렀단 말이지……. 열 살배기 진 헤니의 통통한 뺨에다 마구마구 뽀뽀를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스럽긴. 지금도 마구 뽀뽀를 해 주고 싶지만, 좀 참아야 했다.
옅게 웃던 에이든은 아무 말 없이 식사만 하고 있는 안토니오를 바라봤다. 그는 대화에 잘 끼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제몫의 음식만 먹었다. 어릴 때부터 진과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았다. 바깥에 나가겠다는 진을 계속해서 못 나가게 가두어 키웠다는 것도. 에이든이 안토니오의 기색을 살피자, 진 헤니 역시 제 아버지를 힐끗 바라봤다.
수잔은 두 사람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 사람이 모두 어색하고 힘들어 하는 이 자리를 일찍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녀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 나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되니?”
“네, 그러세요.”
“사실 내가 자유의 여신상이 너무 보고 싶지 뭐니. 아들이랑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갑자기 뜬금없는 자유의 여신상 소리에 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페리 같은 걸 타자고 하시는 거겠지. 아, 페리면…….
“어머니, 그게… 에이든은 배를 못 타는데…….”
“저런, 그러니…?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거 하고 싶으신 건 없,”
“그럼 나랑 진이랑 둘이서 다녀와야겠구나.”
에이든 테일러와 진 헤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잔은 다정하게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그녀는 정말로 진과 단 둘이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갈 기세였다. 진은 곤란한 얼굴로 잠시 그녀를 저지했다.
“에이든이랑 아버지 둘이서는…….”
“진, 나는 괜찮아. 저희는 뭐 할까요?”
에이든이 진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말했다. 조심스럽게 안토니오에게 뭘 할지까지 물었다. 에이든은 최대한 살뜰하게 웃었다. 진의 가족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사실 그간…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신다면, 절대로 소중한 자식을 허락해 주실 리 없었다. 뭐든 다 맞춰야 했다. 다정하고, 다감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진에게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 주셨으면 했다. 점수를 따는 게 제일 급선무였다.
수잔은 제가 먼저 괜찮다고 말하는 기특한 아이를 보며 흐뭇한 낯을 했다. 아마 둘이서 따로 얘기하고 싶은 기색을 읽은 모양이었다. 수잔은 옆에 있는 제 남편을 보며 괜찮겠냐는 눈빛을 보냈다. 안토니오는 투박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수잔은 어딘지 위축돼 보이는 그의 어깨를 잠시 쓰다듬었다.
“안토니오, 맨날 노래를 부르던 거 하나 있었잖아요. 그거 같이 해 달라고 해요.”
“…….”
“네, 저랑 같이 하러 가세요.”
수잔은 저를 꼭 빼닮은 아들 하나와, 그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껴 왔던 천사 하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흐뭇한 그녀의 표정 뒤로 얕은 긴장이 보였다.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갈까?”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리고 그 행복한 순간들에 이제는… 가족들을 허락해 주기를 원했다.
***
페리가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점점 가까워졌다. 횃불을 들고 있는 동상은 거대했다. 매해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 동상 하나를 보기 위해 뉴욕에 오고, 또 페리를 탔다. ‘자유’를 상징하는 저 동상. 진은 페리의 난간을 잡은 채 동상을 빤히 바라봤다. 정작 수잔은 동상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수잔 헤니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제 아들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 그녀는 어딘가 아련한 눈으로 제 아들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새 더 선이 굵어지고, 어린 티를 많이 벗은 얼굴이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안쓰러웠다. 진이 어른이 돼 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니, 마음이 이상했다.
“진, 행복하니?”
“…….”
진 헤니는 뜬금없는 질문에 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도 제 어머니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5년 전에 비해 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세월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자잘한 주름이 생겼고, 언제나 굵고 윤기가 흐르던 머리는 조금씩 빛이 바래고 있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검은 눈이 복잡해 보여서, 진은 잠시 대답을 멈췄다.
“사실 엄마는 자유의 여신상 같은 건 관심 없단다.”
“…….”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에서 살고 있을 네가 어떤지만 궁금했지.”
수잔은 조심스럽게 제 아들의 손을 잡았다. 예전에는 조막만 하던 게… 이제는 저보다 훨씬 큰 손바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큰 손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직도… 네가 우리를 많이 원망한단 걸 알아, 진. 미울 거란 것도…….”
“…….”
“너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만,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들이었단다. 진, 너희 아빠도 나도… 많이 무서웠어. 네가 품에서 떠나는 게. 바보 같지? 언제나 품에 품고 있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진은 조용하게 이어지는 말에 그저 입술만 씹었다. 수잔은 한 번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결심한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약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그녀의 표정도 조금 일그러졌다.
“진,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너는 기억도 못하겠지만, 네 삼촌이 있었단다. 너희 아빠가 얼마나 예뻐했는지, 동생이 아니라 거의 아들이었지.”
“…….”
“네 삼촌이 딱 네가 섬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이였을 때… 밖에서 안 좋은 일로 세상을 떠났어. 그때부터 너희 아빠는 많이 무서워하고, 불안해했단다. 네가 밖에 나가서 아예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 그렇게 아프고 슬픈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올까 봐. 그러지 않기 위해선… 네가 밖에 나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잘못된 방식이었단 걸 일찍부터 알았지만, 그녀 역시도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공포와 두려움에 쉽게 진을 보내 줄 수가 없었다. 진과 몇 번이나 싸우고 소리를 질러대던 안토니오보다, 오히려 저가 더 비겁하고 나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둘 사이에 숨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제가 더…….
“진, 우리가 너무 서툰 부모라서 미안해…….”
“…….”
“미안하다, 진.”
그녀의 눈에 눈물이 일렁였다. 후회와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흐르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제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사랑하는 남편이 떠올랐다. 그는 아들을 만나러 간단 생각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밖이라면 질색을 하던 사람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항구에 갈 준비를 하던 모습도 생각났다.
“진, 그거 아니?”
“…….”
“너희 아빠는 너희 삼촌을 땅에 묻을 땐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는데… 네가 그렇게 섬을 나가고는 매일 혼자 울었단다.”
제게 안 들키기 위해 소리 죽여 울던 걸 수잔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고집스럽고 우악스럽던 사람의 넓은 어깨와 등이… 참 작아 보이던 때였다. 많이 서툴고 투박한 사람임을 알아서, 그래서 제 아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 한 마디 건네지 못하는 걸 알아서… 오늘도 식사 내내 그가 신경 쓰였다. 안토니오는 레스토랑에 도착한 뒤에 긴장한 낯을 했다. 들떠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이 도착하고 나서는 괜히 얼굴을 굳혔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거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진은 모를 거라서, 수잔은 마음이 아팠다.
“너희 아빠랑 지금 당장 사이좋게 지내란 소리가 아니야, 진. 우리를 당장에 용서해 달란 소리도 아니란다.”
“어머니…….”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은…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네가 이렇게 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구나. 네가 기쁠 때, 슬플 때… 그때마다 너희 아빠랑 내게도 말해 주면 안 되겠니? 네가 이렇게 커서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드는데 우리도… 함께할 수 있게 해 주렴. 우리도 가족이잖니.”
가족. 진 헤니는 그녀의 말에 제 손을 내려다봤다. 주름이 지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손이 초조한 기색으로 제 손을 토닥이고, 쓰다듬고 있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크고 거대하기만 했는데… 언제 이렇게 손이 작아지신지 알 수 없었다. 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걸 바라고 부모님께 오시라 한 거였으니까. 그의 검은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어서, 수잔은 기쁘게 웃으며 아들을 안아 주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아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혼식 사진은 좀 없니?”
“네…?”
“결혼사진을 봐야겠어. 비디오도 있니?”
수잔은 진지했다. 제가 놓친 아이의 순간들이 궁금했다. 진은 어떻게 그녀가 제 어릴 적 일들을 그렇게 많이 기억하고 있는지 의아했겠지만, 사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어려웠다. 저와 똑 닮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처음으로 저를 엄마라고 부르던 때는 아직도 생생했다. 아이의 모든 순간은 어제 같았다. 모든 순간이 아직도 마음을 부풀게 만들었다. 아이가 말하고, 보고, 웃던 순간들.
“앞으로는… 우리도 좀 끼워 주렴.”
“그럴게요…….”
그녀가 서운한 기색으로 말해서, 진이 옅게 웃었다. 아들의 웃는 모습에 수잔 역시 다정하게 마주 웃었다. 진은 바깥에서 온 아이 하나를 천사라고 불렀지만, 그녀에게 천사는 제 아들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착하고, 올곧게 자란 아이만이 제 생에 유일한 천사였다.
수잔은 제 기특한 아들의 뺨을 가만 쓸어 주었다. 여태 제 아버지를 미워하며 살았을 아이의 속도, 말이 아닐 거란 걸 알았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마음속에 있을 미움과 약간의 죄책감 따위는 이제 버리고, 행복하기만을.
***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다가,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는 안토니오 헤니를 바라봤다. 거나하게 취해 있다고 하니 굉장히 많이 마신 것처럼 들리지만, 그건 아니었다. 술을 좀 하냐고 묻는 말에 긴장을 했는데, 괜한 긴장이었다. 진의 아버지는 놀랍도록 술이 약했다.
“더 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고급스러운 바에 앉은 두 사람은 별말이 없었다. 안토니오 헤니가 복잡한 표정으로 술만 마셨으니까. 에이든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안토니오는 이깟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에이든은 그와 적당히 박자를 맞추며 술을 기울였다. 진의 어머니가 말하신 ‘평소에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대체 뭔지… 알 수 없었다. 에이든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술을 마시던 때에, 안토니오가 망설이는 낯으로 물었다.
“그… 진은, 요즘 어떻게 지내나?”
“아, 수영선수들 코치 일하면서 지냅니다. 국가대표 팀에 있어요. 같이 운동하는 선수들이 많이 의지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은 워낙 상냥하고 다감한 사람이니, 선수보다 코치 일이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에이든이 뿌듯한 낯으로 제 연인을 자랑했고, 안토니오는 그것보다 더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원래 우리 진이 어릴 때부터 수영을 잘했지.”
“네, 수영 잘하죠.”
“한 번도 수영을 가르친 적이 없는데 말이야. 어릴 때부터 배웠으면 더 잘했을지도 모르지. 우리 진이 처음 물에 들어갔던 게 다섯 살 때였는데, 가르치지 않아도 혼자 척척 했었어.”
안토니오 헤니는 제 자식을 자랑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영특했는지, 얼마나 똑똑하고 사랑스러웠는지 떠들었다. 그는 어린 진 헤니가 옆에 있는 것처럼 가끔 다정한 눈빛을 하기도 했다. 에이든은 그런 안토니오를 가만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제 아들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한참 아들 자랑을 늘어놓던 안토니오는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에이든에게 사과했다.
“자네 우리 집에 있었을 때, 내가 못나게 굴었던 건 다 미안하네…….”
“하하…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그때는 진이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게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랬네.”
안토니오의 투박한 손이 작은 글라스 잔을 만지작거렸다. 에이든은 움츠러들어 있는 안토니오의 어깨를 보다가 잠시 슬픈 낯을 했다. 자꾸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얼마 전에 있던 장례식이 생각보다 제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쓸데없이 거지같은 생각들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다 뒤지고 없는 사람들인데. 에이든 테일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 우리 진은… 아직도 나를 많이 미워하겠지?”
“…….”
술기운이 들어간 중년의 남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도 제 아들이, 저를 미워하냐고. 에이든 테일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뭐라 생각한 건지 안토니오 헤니는 시큰해지는 콧등을 문질렀다.
“아마 평생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겠지…….”
“…….”
“오늘도, 참… 뭐라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아비가… 뭐가 좋겠어.”
안토니오는 결국 눈가를 문질렀다. 그 나름 많은 말들을 생각했는데, 평생을 서툴게 살아와서 쉽지가 않았다. 뭐라 다정한 말을 건네 본 적이 없어서 더 많이 긴장이 됐다. 저를 슬쩍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 괜히 위축이 됐다. 못난 아버지인 걸 스스로도 너무 잘 알아서 더 그랬다. 에이든은 눈물을 훔치고 있는 안토니오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이 많이 착한 거 아시잖아요.”
“그렇지. 우리 진이 아주 착하지. 생각도, 마음도 깊고…….”
한 마디가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자식 자랑이었다. 에이든은 작게 웃다가 다시 입을 뗐다.
“진은… 다른 건 다 잘하는데, 누구를 미워하는 일에 소질이 없더라고요.”
“…….”
“제가 알기론 그래서요.”
에이든의 말에 안토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글라스 안에 있던 술을 들이켰다. 중년의 남성은 다시 투박한 손을 들어 제 눈가를 훔쳤다. 작은 위로의 말이었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안토니오는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며 콧물을 마셨다. 에이든이 티슈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티슈를 들어 눈물을 닦던 안토니오 헤니는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이가 잘 지내는 것 같아 얼마나 다행인지, 안토니오 헤니는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 다행이라고, 너무 다행이라고. 에이든 테일러는 그 앞에서 가만 웃었다. 진 헤니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 같은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나온 게 확실했다.
진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선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한다고 정했으면, 그렇게 했다. 그건 그의 아버지로부터 나온 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다감한 눈빛과 말들, 상대방을 살피고 배려하는 따뜻한 눈빛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나온 거였다.
제 아들을 자랑하기 바쁘고, 그 아들에게 미움 받는 것이 마음 아파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라니……. 진 헤니의 가족은 전부 진 헤니 같았다. 그러니 곧 관계가 회복되고 사랑이 넘칠 게 분명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금방 상상할 수 있었다.
“정말 더 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안토니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하지만 그는 제 아내에게서 온 전화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안토니오, 어차피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뭘 그렇게 오래 있어요? 당장 돌아와요. ]
“곧 돌아가리다, 수잔.”
에이든 테일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정말…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었다.
***
“지금 묵고 계신 호텔 위층에 저희도 따로 잡아 놨어요. 내일도 같이… 어디든 다니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꾸나. 뉴욕엔 뭐가 맛있니?”
“뉴욕에 맛있는 거 많아요, 엄마.”
진 헤니와 수잔은 호텔을 향해 걷고 있었다. 뭘 먹을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진은 이제껏 제가 먹기에 맛있었던 것들을 늘어놨다. 저쪽에 스테이크 하우스가 있는데 거기가 어떻고, 그 뒤쪽에는 맛있는 디저트집이 있는데 거기서 먹었던 타르트가 어땠고, 그런 대화가 이어졌다. 수잔 헤니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제 아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진, 근데 아까 호텔에 체크인할 때 보니까 에이든 이름이…….”
“아, 네. 미들네임으로 저희 가족 성을 넣었어요.”
“그래…?”
수잔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 뿌듯하게 웃었다. 그녀가 흐뭇해하는 동시에 얼큰하게 취해 있는 제 남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예쁜 아이 하나도. 호텔 정문 앞에서 만난 두 일행은 어색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과 안토니오가 어색해 보였다. 진은 뭐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잘… 다녀오셨어요?”
“그, 그래……. 잘 다녀왔지.”
둘의 대화에 수잔과 에이든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수잔은 운 것처럼 보이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숨겨야 했다. 나이가 먹더니… 왜 저렇게 마음이 여려지고, 눈물은 많아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커다란 곰 같은 제 남편을 보던 수잔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이 알게 되면 아주 기뻐할 일이었으니까, 얼른 말해 주고 싶었다.
“안토니오, 맨날 아들이랑 둘이서 술 마시면서 인생 얘기를 하고 싶다 노래를 부르더니, 좀 많이 했어요?”
“……?”
진과 에이든, 그리고 안토니오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들? 에이든 테일러는 그제야 그가 매일 노래를 불렀다는 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들이랑 둘이 술 마시기라니, 참 소박하고 정겨운 소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에이든은 이어지는 수잔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이든 헤니 테일러면, 어쨌든 절반은 헤니 아니겠니? 안토니오, 에이든이 저희 성을 미들네임으로 넣은 거래요. 앞으로 아들 하나 새로 생겼다고 생각하고 종종 술도 마셔요.”
“에이든 헤니면… 아들이지.”
“네…?”
진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처럼 되물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에이든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에게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낯설어서, 대체 지금 제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토니오는 아주 뿌듯하게 웃으며 에이든의 등을 두드렸다. 그새 뭔 일이 있었던 건지 아주 친해진 모양이었다.
“둘째 아들이지! 아니, 가만… 누가 생일이 먼저지?”
“안토니오,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냥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아들이 하나 더 있는 건 중요하지.”
에이든은 제 어깨에 둘러져 있는 안토니오의 손을 바라보다 진을 쳐다봤다. 진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미안하다 말했다. 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할 거 없었다. 오히려 조금 기쁜 것 같으니까. 에이든은 아들 타령을 하던 안토니오가 수잔에게 질질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곤 옆에 있는 진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술이 약하시네.”
“에이든, 너까지 왜 그래…….”
“앞으론 둘째아들이 잘 조절을 해 드려야겠어.”
능청스러운 표정에 진이 졌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에이든은 제 사랑스러운 연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우리도 올라갈까? 그렇게 눈으로 묻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더 제 머리칼로 떨어지는 입맞춤에 진 헤니의 미소가 짙어졌다.
***
입맞춤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진 헤니의 얼굴이며 머리칼에 입 맞추는 건 의식적이라기보다는 이제 버릇 같은 거였다. 두 사람은 이미 맨살이 된 지 오래였고, 침대는 한 차례 격하게 삐걱이고 난 뒤였다. 서로를 바라보고 누워 있는 두 사람은 몸을 가볍게 만지고, 손바닥으로 쓸고, 또 입 맞춰가며 체온을 느꼈다.
“진, 어머님이랑 같이 얘기는 많이 했어?”
“응, 그냥… 부모님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셨나 봐…….”
“아버님도 그러신 것 같았어. 아들이랑 술 마시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잖아.”
에이든이 진의 뺨에 입 맞추며 말했다. 진은 옅게 웃으며 그의 어깨 위 타투를 쓸었다. 그 위에 입을 맞추자 에이든이 진 헤니의 오른손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떨어지던 입맞춤은 에이든이 진의 뒷목을 잡아당기며 깊어졌다. 탄탄한 다리끼리 다시 얽히고 있었다. 에이든이 몸을 일으켜 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짓궂은 표정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감이 좋질 않았다.
“하긴, 이번에 소원을 이루셨잖아. 아들이랑 술 마시기.”
“하…….”
진 헤니는 제 다리 사이를 꾸욱 누르는 허벅지에 숨을 터뜨렸다. 에이든은 금방 달아오르는 연인의 몸을 보며 목덜미에 입을 내렸다. 혀를 내 가볍게 핥던 그가 귓바퀴를 물며 말을 이었다.
“진, 너는 어떤 쪽이 취향이야?”
“하, 뭐가…?”
“형이 좋아, 동생이 좋아?”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질 않아서, 진이 에이든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만하란 뜻이었지만, 그 정도 반항으로 장난을 멈춰 줄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절반 정도는, 아니, 절반 이상은 장난이 아니었다. 에이든의 커다란 손이 진의 상체를 쓸어내렸다. 살갗 위에서 손가락에 약하게 힘을 줘 쓸면, 그의 배와 가슴이 아름답게 들썩였다.
“네가 진짜 친형이었으면 큰일이었을 거야……. 상상하면서 자위하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하으… 하지 마…….”
“결국 한 열여덟 살 정도에 침대를 타고 올랐겠지.”
그쯤만 해도 많이 참은 거 아닐까? 에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진의 가슴 위로 입을 내렸다. 손은 진의 탄탄한 허벅지부터 골반, 옆구리와 갈비뼈를 쓸어 올렸다. 가슴에서 내려온 입은 갈비뼈 근처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위에서 작게 터지기 시작하는 신음에 에이든이 흐뭇하게 웃었다.
“진, 너도 동생한테 박히는 쪽이 좋아?”
“하윽…!”
“나도 내가 동생인 쪽이 좋겠어.”
아래는 이미 더 이상 풀 필요 없을 정도로 흐물흐물해져 있으니, 제 야한 형이 좋아하는 걸 넣어 줄 차례였다. 에이든은 제 성기를 몇 번 손으로 훑다가, 진의 몸으로 커다란 걸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몸이 잔뜩 벌어지는 감각을 진이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으응…! 아!”
“친형이 뒤에 좆 받는 걸 이렇게 좋아하면, 동생이 참기가… 하, 힘들지.”
“하윽! 하… 그냥 빨리…!”
“이거 봐.”
에이든 테일러가 목을 울려 웃었다. 진 헤니의 다리를 잡아 벌린 그는 아직 절반 정도 들어가 있는 제 성기를 바라봤다. 그는 손을 내려 엄지손가락으로 그 입구를 매만졌다. 진은 안 예쁜 데가 어디일까? 찾을 수가 없네. 정말 큰일이라는 표정으로 그가 혀를 찼다. 그리곤 조금 더 허리에 힘을 실어 느릿하게 몸을 집어넣었다.
“흐응…! 아, 빨리… 넣어, 줘…!”
진이 허리를 흔들려고 해서, 에이든 테일러가 골반을 꾸욱 잡아 눌렀다. 신혼여행 이후 진은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았을 법한 말들을 제법 자연스럽게 했다. 역시 뭐든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나면 그 뒤는 아주 쉬웠다. 처음만 제대로 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뿌듯한 낯의 에이든이 움찔거리는 입구를 보며 허리를 움직이려 할 때였다.
“이이가 진짜 미쳤나 봐…!”
“아무리 생각해도! 첫째아들이랑도 내가 술을 마셔야겠어, 수잔…!”
두 사람이 동시에 호텔 방문을 바라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고, 진 헤니는 입을 작게 벌리고 어쩔 줄을 몰랐다. 어차피 두 분이 방에 들어올 수는 없겠지만, 상황이 아주 흥미로웠다.
에이든은 제 아래에서 당황 중인 진을 내려다봤다. 진은 잔뜩 흔들리는 눈으로 에이든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진은 에이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푸른 눈에 떠 있는 건, 명백한 장난기와 짓궂음이었다. 두 분 가시면…! 가시면…! 진이 눈으로 열심히 말해 봤지만, 에이든은 예쁘게 웃을 뿐이었다.
“소리를 잘 참아야겠네, 형.”
“아, 에이든…! 잠깐, 잠깐만…!”
“부모님한테 들키면 안 되잖아.”
“아… 하악…!”
절반 정도 삽입된 채 느릿하게 움직이던 성기는 한꺼번에 처박혔다. 에이든은 진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고,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썩이며 붙었다 떨어지는 몸에 진이 어금니를 물었다. 밖까지 들릴 일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소리를 참아야 했다. 밖에선 부모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진은 정말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흡… 으윽…!”
진은 한손으로 제 입을 덮었다. 소리가 새려고 했다. 에이든은 생각보다 소리를 잘 참고 있는 진을 보다가 뭔가 아쉬운 낯을 했다.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진의 성기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옆에 서랍장 위에 뒀던 윤활제의 뚜껑을 열었다. 찐득하고 미끌거리는 윤활제가 진 헤니의 아랫배와 성기에 잔뜩 뿌려지고 있었다. 진은 소름끼치는 감각에 몸을 비틀다가, 제 성기를 쥐는 손길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형을 너무 괴롭혔던 것 같아서… 반성하는 의미로.”
“으응…! 에이든, 아… 그거 같이… 같이 하지 마, 응?”
“물론 뒤에 박아 주기만 해도 충분한 거 알아. 그래도… 여기도 가끔 써야 형 말대로 몸이 이상해지지 않지, 그치?”
굉장히 이상한 친절이었다. 에이든은 제 아래에서 움찔거리는 연인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침대 위에서 그는 언제나 저런 미소를 지어서, 진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 에이든의 손이 찌걱이며 움직이고, 성기 역시 후벼 파듯 진의 안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진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응…! 하악! 아, 아흐…! 아, 나… 흐윽, 나 어떡…….”
“하, 소리… 너무 크잖아. 잘, 윽… 잘 참아야지.”
“아으응! 이거 손, 하으… 손 놔, 줘…!”
“손 좋다고?”
손과 허리 모두 속도가 빨라졌다. 쩍쩍거리는 소리가 앞과 뒤 모두에서 울렸다. 진의 허리가 절로 비틀렸다.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려 막고 있던 진 헤니는 몸 안으로 강하게 처박히는 성기에 입을 크게 벌렸다. 다리를 바르작거리던 그는 귀 옆에서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
“형, 좋아…?”
“하윽…! 아으응!”
진은 허리에 오르는 전기에 몸을 떨며 사정했다. 배와 가슴 위로 툭툭 떨어지는 정액에 에이든이 사납게 웃었다. 진은 사정 이후에 몸을 어쩔 줄을 몰랐다. 강하게 조였다 풀어지는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진은 아래를 오물거리며 제 성기를 씹다가, 잘게 허리를 흔들었다. 야한 꼬라지를 지켜보던 에이든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진. 나는 가끔… 네 취향을 알다가도 모르겠어.”
“아흐…! 에이든, 이거… 아으…….”
빨리 움직이라는 것처럼 감겨오는 다리에 에이든이 어금니를 물었다. 정말… 진 헤니는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성기를 때려 박기 시작했다. 호텔방은 흐느낌 같은 신음과 살이 부딪혀 철썩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에이든은 아래에서 울고 있는 진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제 야한 연인의 취향을 따라가려면 더 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 밤이었다.
***
에이든 테일러가 두 사람의 묘지를 찾은 건, 거의 한 달 만이었다. 회사일로 잠시 들렀던 LA, 그는 진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을 들렀다. 장례식 때처럼 비가 오진 않았다. LA는 언제나처럼 맑고 화창했다. 에이든은 빛을 한껏 받고 서서 두 사람의 묘비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강한 햇빛을 받은 금색의 머리칼은 거의 백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가만 두 사람의 묘비를 살피다, 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묘비에 내려놨다. 새빨간 장미였다. 가시가 잔뜩 돋쳐 있는 장미를 한 송이씩 놓고, 그가 입을 열었다. 조화로서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장미, 그는 푸른 눈으로 그 빨간 장미를 보다 피식 웃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살라는 의미로 주는 거예요.”
에이든 테일러는 두 사람의 묘비를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제 부모를 이제 와서 용서한다거나, 감상에 빠지려는 건 아니었다. 여태 많은 외로움 속에 저를 밀어 넣은 사람들이었고, 단 한 번도 사랑이 뭔지 느끼지 못하도록 저를 키운 사람들이었으니까. 그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가족’이라는 것과 달랐다. 어차피 저희는 가족이 아니었다. 그냥… 같은 성을 공유하는, 미친 사람들이었지.
이 사람들이 딱 하나 제 역할을 한 걸 꼽자면, 저를 세상에 낳은 것뿐이었다. 자신이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에 태어나서 다행이었다. 이곳에서 자라고 삶을 꾸려서, 진을 어떻게든 만난 것만이 다행이었다. 그것만이 이 사람들이 한 역할이었다.
“지옥에서 살고 있으면, 나중엔 나랑 마주칠 텐데… 되도록이면 서로 볼 일 없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냥 그 말하려고 왔어요.”
혼잣말 같은 대화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무감한 낯으로 가만 서 있다가, 저를 찾는 제 연인의 전화에 밝게 웃었다. 아까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일 만큼, 그는 환하고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진 헤니의 전화를 받았다.
“응, 진. 나 이제 곧 출발해. 뭐 필요한 거 있어? 이따 저녁쯤에 도착할 것 같은데.”
[ 아, 안 그래도… 에이든, 미안한데 내가 오늘 밤에나 끝날 것 같아서 그러는데……. ]
“괜찮아, 진. 뭔데?”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쁘고 유쾌한 곳도 아니니, 빨리 진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에게 안겨서 출장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제시 제퍼슨은 또 얼마나 저를 구박했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럼 진은 다정하게 웃으며 제 등을 토닥이고, 그랬냐며 입을 맞춰 줄 거였다. 그럼 그 뒤로는 진이 이야기할 차례였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에 저는 까만 머리칼을 쓸어 주고, 손가락에 있는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릴 거였다.
[ 에이든, 아담 사료가 다 떨어져 가는데… 그것 좀 사다 줄래? ]
“응, 그럴게.”
[ 아, 맞다. 그때 아담 병원 갔을 때, 사료 바꾸라고 했었는데…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
“내가 전화해 볼게. 사료 말고 필요한 건 없어? 아담 먹일 거 말고, 너 먹을 거는 안 필요해?”
장난스러운 말에 진이 소리 내 웃었다. 집에 많아서 괜찮아. 그렇게 이어지는 말에 에이든 역시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경쾌하게 발을 움직였다. 아까 전까지 굳었던 표정은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행복한 낯으로.
[ 그리고 아버지께서 너 잘 지내냐고 궁금해 하신대. ]
“하하…….”
[ 대체 둘이서 뭘 했길래 그렇게 친해진 거야…? ]
“술 친구했지, 뭐.”
술만 마셨는데 이 정도라고…? 진의 의아한 목소리에 에이든은 그저 웃었다. 아마 안토니오 헤니는 제 아들 자랑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거기다 맞장구까지 쳐주면 더 좋고. 그러니 에이든 테일러가 가장 제격이었다. 둘 다 서툴렀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진 헤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아버지께는 둘째아들이 전화하겠다고 해 줘.”
[ 정말… 못 살아……. ]
“왜, 형? 형도 아버지께 전화,”
[ 그만해. ]
한참 걷던 에이든 테일러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해가 쨍쨍하게 내려오는 LA의 한낮, 묘비 두 개 위로 빨간 장미 한 송이씩이 보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몰랐겠지만, 그의 표정은 슬프고 아팠다. 이제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으리란 걸 알았다. 저 꽃 한 송이가 그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제 성의였다. 앞으로 저는 다시 아버지도, 어머니도,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살 예정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새로운 가족이 있으니까.
[ 얼른 집에 와, 에이든. 보고 싶어. ]
“…그럴게. 나도 많이 보고 싶어, 진.”
에이든 테일러는 제 어두운 슬픔 따위는 단번에 사라지게 하는 그에게, 진 헤니의 존재에 다시 한번 하늘에 감사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제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옥에서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언젠가 자랑을 하고 싶었다. 그 뒤로 나는 내 가족들이랑 많이 행복했다고. 내게도 있었다고.
사랑하는 가족이.
Forgotten Merman 외전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