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Open your eyes (10/16)

포가튼 머맨 4권

외전 1. Who are you?

* * *

(1) Open your eyes

에이든 테일러는 2년 만에 굉장히 생경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정말 얼마 만에 ‘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 잔 건지, 상쾌하고도 몽롱했다. 눈과 코, 손끝에 하나하나씩 끊겼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시야가 돌아오고, 코끝으로 조금 화한 병원의 냄새가 끼쳐 들어왔다.

누워서 눈을 깜빡이던 에이든이 옆을 돌아봤다.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까닭이었다. 멍한 얼굴로 옆을 바라보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눈에는 하나로 단정 짓기 어려운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안도한 것도 같고 슬픈데 기쁜 것도 같고… 아무튼 그랬다. 에이든은 뭐라 말을 못하고 작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 제가 혹시 또 약을 먹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병원에 입원하면서 짐이랄 걸 챙겨 오지 못해서, 제겐 그 약병이 없었다.

작게 인상을 쓰던 에이든은 이제야 뇌 한구석도 제 기능을 하는 기분을 느꼈다. 몽롱하던 정신이 조금씩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저는 지금 뉴욕에 있는 병원에 있었고,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진이 맞았다.

“너… 대체…… 왜 이제 일어나는,”

“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은 에이든 테일러는 어찌 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진 헤니는 침대 옆의 작은 간이의자에 앉아,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에이든 테일러만 노려봤다. 눈에서는 눈물이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진은 무언가 화난 기색이었다. 에이든을 바라보던 진이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환자가 깨어났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진, 울지 마…. 내가 또 뭐 잘못했어…? 내가, 내가 다 미안해…….”

“…….”

진은 대답이 없어서 에이든이 입을 달싹였다. 제가 또 뭘 잘못한 거 같았다. 그는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제가 잘못한 걸 찾아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왜 이제 일어났냐고 물었으니, 아마 잠을 오래 잔 것 같았다. 옆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던 모양이라, 에이든이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간호사와 의사가 조금 급한 걸음으로 그의 병실에 도착했다. 그들은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진 헤니는 굳은 얼굴로 일어나 병실 구석에 섰다. 에이든 테일러는 혹시 그가 병실을 나가 버릴까 봐 불안한지 이불을 꾹 눌러 잡았다. 그리고 앞을 막고 있는 간호사와 의사 사이로 어떻게든 진 헤니와 눈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저기, 진… 잠깐만, 거기 잠깐만 있어줘. 나 이거 금방 끝…….”

“금방 못 끝납니다, 에이든 테일러 씨.”

“……?”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에이든의 말을 끊었다. ‘금방 끝나기는 대체 뭐가 금방 끝나요?’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이든이 그 눈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의사는 조금 귀찮다는 말투로, 혹은 약간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12일 만에 의식이 돌아오셨는데, 절대 일찍 못 끝나죠. 이 뒤로 줄줄이 검사부터 받으셔야 해요.”

열흘 넘게 잠을 잤다는 소리에 에이든 테일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곤 멀찍이 서 있는 진을 다시 바라봤다. 진 헤니는 입을 꾹 다물고 소리도 없이 줄줄 울고 있었다. 저를 질책하는 검은 눈에 에이든의 입꼬리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야 진과 만났는데, 첫 시작부터 아주 좋지 못했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재회라니, 아주 제대로… 망한 거였다.

***

“우선 잠들어 계신 동안 약물을 투여했던 게 효과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심장이랑 폐는 원래 안 좋은 거 알고 계셨죠?”

“…….”

“소견서에는 클로자핀류 향정신성 약의 처방을 엄금한다고 쓰여 있네요. 분명 심장약과 같이 복용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안내가 나갔을 텐데… 이거 드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

병실 침대에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입에 꿀이라도 발랐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가끔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진 헤니는 어디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굳은 표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선 폐는 약물요법이랑 같이 재활치료부터 받으시고, 심장 질환은 드시던 약 잘 챙겨 드시고요. 단번에 낫는 질환들은 아니니까 뭐든 꾸준히 하셔야 해요. 이게 이 약만 안 드셨어도 이렇진 않았을 텐데… 참…….”

“…….”

대체 왜 그랬냐는 눈빛이 에이든 테일러를 훑고 지나갔다. 에이든은 쓸데없는 말을 굳이 덧붙이는 의사를 노려보다, 진이 저를 쳐다보자 표정을 관리했다. 그는 순한 양처럼 앉아 진을 힐끗 바라봤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였다.

약물치료며 재활치료며… 지금 당장 그딴 걸 받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에이든이 치료와 관련된 동의서를 보고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자 진이 서류를 대신 받아들었다. 그리곤 그걸 에이든에게로 내밀었다. 사인하란 의미였다. 에이든이 서둘러 그 위로 사인을 했다. 그 서류를 챙겨들곤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나갔다.

“…….”

“…….”

진은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에이든은 뭐라 말을 건네야 할지를 몰라 이불만 말아 쥐고 있었다. ‘안녕?’은 당연히 등신 같았고, ‘오랜만이야.’는 12일이나 자고 일어난 주제에… 무슨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안 될 말이었다. 그가 말을 골라내는 동안, 진 헤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약… 그것 때문에 몸이 안 좋아졌다는 게 무슨 소리야…?”

“…….”

“예전에 먹던 그 약이지…? 그 약은 왜 먹게 된 거야…? 사고 때문에…?”

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에이든은 조금 놀란 낯을 했다. 진이 그 약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예상 밖인 탓이었다. 푸른 눈이 사랑하는 사람을 꼼꼼히 살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진이 상처 받지 않고, 슬퍼하지 않을지 고민이 됐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을 하려면 조금 긴데…….”

“…….”

“진, 내가 섬에서 나간 뒤에… 잠깐 병원에 있었어. 그때 치료를 받았었는데, 그 약도 먹고 이런저런 주사들도 맞고… 아무튼 그래야 했어.”

에이든이 흐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끔 삑, 삑 하며 소리를 내는 기계음이 그의 말 중간중간 섞여 들었다. 조용한 병실에 별로 기쁘지 않은 대화가 공간을 채웠다. 진은 고요하게 이어지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치료를 받고 나면 기억이 잘 안 났어. 섬에 있을 때의 일들도, 진 너도…. 나중에는 아예 없던 일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졌어. 가끔씩 그때 기억이 떠오를 때면, 좀… 많이 힘들었어.”

“…….”

“내가 헛것을 본다고 생각했었거든.”

약을 먹는 게 나중엔 기분이 나빠서 다른 나쁜 방법들을 많이 썼다고, 에이든 테일러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진 헤니는 그 모든 말들을 굳은 얼굴로 듣고만 있었다. 에이든은 조금 인상을 쓰며 이불을 그러쥐었다. 그 뒤에 꼭 해야 할 말들이 있었으니까.

“진, 나 지금은 다 기억났어. 그 전에는 그냥… 장면, 장면이 생각나는 정도였고, 지금은 전부 다 기억나.”

“…….”

“내가 전에 했던 말은… 기억나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했던 건, 내가 그때를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어, 그게… 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좀 아니었, 아… 그게 제정신이 아니면 그래도 된다는 말은 아니야!”

말하기 힘든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얼굴이 점점 난처함과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푸른 눈이 조금 흔들렸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달싹이던 그가, 눈을 한 번 꾸욱 감았다 뜨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 내가 전에 널 함부로 한 거나… 방에 가둬 놓고는 멋대로 군 거, 다 미안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도 내가… 너를 억지로 안았던 것도, 약을 억지로 시킨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게…….”

“…….”

“미안하다는 말로 다 안 되는 거, 나 잘 알아……. 그… 어떻게, 내가 어떻게 용서를 구하면 좋을지… 방법을 알려주면 내가 그대로 할게.”

모든 말을 듣고도 진 헤니는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동안 제 발만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라도 더, 조금 더 좋은 말들이 없을지……. 그는 잔뜩 속이 탔다. 에이든 테일러는 예쁘고 다정하게 말하는 법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툴지만 이게 그의 최선이었다. 진이 입을 뗀 건, 에이든이 초조하게 뭐라 말을 덧붙이려 할 때쯤이었다.

“에이든, 아마… 내가 너를 용서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완전히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용서할 수 있는 방법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

진 헤니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려 노력했다. 눈빛 역시 너무 흔들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때’는 진에게도 말하기 힘든 주제였다. 진은 에이든의 말이 끝나고 곰곰이 생각을 했다. 괜찮다고, 용서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결국 괜찮지도, 용서하지도 못할 일들이었다. 어떠한 방법을 써도 잊지 못할 테니 방법이랄 것도 없었다.

“결국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몰라…….”

에이든 테일러가 고개를 떨궜다. 침대의 이불을 쥐고 있는 손끝이 잘게 떨려서, 그가 일부러 꾸욱 그것을 그러쥐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최대한 참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릴 사람은 제가 아니었다. 에이든이 넋이 나간 채 생각했다. 곁에… 곁에만 있고 싶은데……. 푸른 눈이 정처 없이 이불 위를 헤맸다. 진 헤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이든을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그냥 그렇게 지내자, 같이.”

“…….”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나도 고민해 볼게.”

숙여졌던 에이든의 고개가 슬며시 올라왔다. 푸른 눈이 조금 크게 뜨인 채였다. 진 헤니는 그런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 모든 걸 깨끗하게 용서하진 못하겠지만, 그럼 그렇게 지내면 될 일이었다. 진 역시 그를 제 삶에서 내쳐 버리는 게 더 힘이 들었으니까. 미워도, 제겐 그가 필요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게 내려진 아주 너그러운 형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진. 고마워. 작게 말하는 그의 입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염치도 모르고 많이 기뻤다. 진 헤니는 그런 그를 보다 말을 덧붙였다. 많이 지친 목소리였다.

“나 오늘은 이만 가 볼게…….”

“아… 응, 알겠어.”

진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병실을 나가려 하자, 에이든이 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진, 그럼… 그럼 나, 연락은 어디로 하면 돼…? 전화도 하고, 그러고 싶은데…….”

“…….”

“아, 혹시 전화가 좀 별로면 메시지는 안 될까…?”

푸른 눈이 절박했다. 진 헤니는 그를 보며 놀란 표정을 했다. 초조해 보이는 에이든의 얼굴이 낯선 까닭이었다. 제게 많이 미안해하고 있음은 알았지만… 연락하고 싶다고 쩔쩔매는 모습을 직접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앞으로 두 사람의 모습은 조금 다를 예정이었다. 서로가 없던 시간과 그때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두 사람이 좁혀야 할 거리는 아직 멀었다. 더듬더듬 이어졌던 대화 아닌 대화도, 초조한 푸른 눈과 놀란 듯 뜨인 검은 눈도… 전부 다 앞으로의 예고일 뿐이었다.

***

에이든 테일러의 퇴원까지 남은 시간, 21일. 진 헤니의 검은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앞에 앉은 에이든은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진은 그가 말했던 대로 가끔 병원에 왔다. 몸은 좋아지고 있는 건지, 재활치료는 잘 받고 있는지… 그런 것들의 감시를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다친 마음을, 에이든 테일러에게 치료 받아야 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툭툭 서러움이 치고 올라왔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응어리져 있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진은 그냥 울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에이든을 빤히 바라보면서. 2년 동안 참아온 눈물을 여기서 다 쏟아 내리라 다짐한 사람처럼 울었다. 그때그때 진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달랐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는 에이든에게도 많이 힘든 주제였다.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고…….”

“진…! 그건… 네가 내 인생을 어떻게 망쳐…!”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원망과 슬픔이 검은 눈에 넘실댔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에이든 테일러의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그런데 심지어 제 입에서 나온 말이 맞았다. 아무리 기억도 없고, 약에 취해 있었대도 그렇지… 자신은 죽어야 마땅했다. 진 헤니가 제 인생을 망칠 방법 같은 건, 세상에 없었다. 당장에 숨 쉬고 목숨줄을 달고 있는 것 자체가 그가 있기에 가능한 일인데…….

“진,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는 소리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네가 내 인생을 어떻게 망쳐…! 그건 내가… 내가 헛소리한 거야. 내가 다 미안해…….”

“일찍 보냈으면 병원에 안 갔을 거라고 그랬잖아…….”

언제나 진 헤니의 마음 한구석에서 커다란 돌에 눌려져 있던 말이었다. 저 때문에, 그의 인생이 망했다는 말. 뚝뚝 눈물만 흘리던 울음은 이제 흐느낌이 가세했다. 진은 그가 말했던 병원과 치료가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그가 많이 힘들어졌단 것만 알았다. 대체 세상에 어떤 치료가 기억을 잃게 만드는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누군가에게 손톱이 파랗게 멍들고 다 깨질 때까지 맞아야 했던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어떤 일들을 겪었을지 가늠도 안 됐다.

“내가 그때 어머니한테 그런 말만 안 했으면 집에 일찍 갔…….”

“진.”

“…….”

“나한테는 화만 내 주면 안 될까…? 그냥 욕하고 화만 내 줘, 응?”

에이든의 목소리가 슬프고 답답했다. 저한테 화내고 욕만 해야 맞는데, 진은 바보처럼 착해서 자꾸 속이 상했다. 여기서 제게 미안한 것처럼, 진이 자책을 하면 정말 그땐 나가 죽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가 제 인생을 망쳤다니. 다 망가진 걸 추슬러 인간처럼 살게 해준 게 그였다. 그때의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를 가져보겠다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만들고, 그를 탓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여태까지의 모든 일들 중에 네 잘못은 당연히 하나도 없어. 전부 다 내 잘못이고, 다… 그 사람들 잘못이야. 그때 내가 너무 비겁해서… 내가 비겁하고, 이기적이었어. 진. 내가 다 잘못 했어…….”

“…….”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게 다 네가 옆에 있어줘서인데……. 진, 너한테는 내 인생을 망칠 방법 같은 게 없어. 어떻게 해도…….”

작게 흐느끼던 진은 그제야 마음을 놓은 것처럼 목 놓아 울었다. 꺼이꺼이 우는 그를 안아주고 싶은데, 감히 제가 그래도 될지를 알 수 없어 속이 탔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앞에서 슬프게도 우는 진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그가 병실 침대 옆에서 휴지를 뭉텅이로 뽑아서는 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울지 마, 응? 그렇게 덧붙여진 말에 진의 흐느낌은 더 커졌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나빴어… 미안해, 진…. 미안해…….”

진 헤니의 마음에 있던 돌덩이 하나가 아주 슬며시, 옆으로 치워지고 있었다.

***

에이든 테일러의 퇴원까지 남은 시간, 14일. 피검사 결과도 전보다 훨씬 좋았고, 재활치료 경과도 나름 괜찮았다. 에이든은 뿌듯한 낯으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팔과 손목, 손등에는 주사자국과 멍이 빼곡했다. 강도 높은 약물치료와 검사를 받은 흔적이었다.

「진, 나 방금 검사 받았는데 폐랑 심장 전부 전보다 훨씬 좋아졌대.」

답장은 없었다. 에이든은 기대에 찬 눈으로 화면을 보고 있다가,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 요즘 학교를 알아보는 중이라 했으니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사실 많이 안 바쁘더라도 진이 제 메시지에 꼬박꼬박 답장해 줄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메시지를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주제도 모르고 자꾸……. 흐려지던 에이든의 낯은 진동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그리곤 환히 웃으며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연락이 아니었다. 에이든은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하곤 한숨을 쉬었다. 표정에서 짜증이 뚝뚝 떨어졌다. 부탁해 둔 것들이 있으니 안 받을 수도 없었다.

“네.”

[ 네가 말했던 집이랑 차는 사 놨어. 너 때문에 내 비서만 무슨 개고생이니? ]

“이번 달엔 월급 두 배로 준다고 해요.”

[ 곧 죽어도 고맙단 말은 먼저 안 나오나 보네. 그래, 그래야 에이든 테일러지. 새 삶 얻었다고 사람이 확확 바뀌면 그게 말이 안 되지. ]

제시 제퍼슨은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미안하다 혹은 고맙다, 뭐 그런 말들은 에이든 테일러 같은 놈이랑 안 어울렸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게 셋팅된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오히려 방금 ‘나 때문에 미안해요. 고맙다고 전해 줘요.’ 따위를 말했으면 이제 드디어 저 새끼가 갈 때가 됐나보다, 하면서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핸드폰 건너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제시는 슬쩍 간보듯 말을 이었다.

[ 너, 뉴욕에서 지내는 김에 그쪽에서 일 좀 해. ]

“내가 왜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할 거면 끊어요.”

[ 나 이제 출장 다니기도 짜증나 죽겠어! 내가 머리를 굴릴 테니까, 넌 얼굴을 굴리고 다녀. 너무 완벽한 조합이라 할 말이 없네, 안 그래? 사실 머리도 좀 굴릴 줄 아는 거 다 알아. 내숭 떨지 마, 구리니까. ]

에이든의 표정이 더 찌푸려졌다. 이 말을 대체 몇 번을 하는 건지……. 제시 제퍼슨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그때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한 거였다. 헨리 차일드를 엿 먹여준 건 나름의 대가지불이었는데, 도리어 그 엿을 제가 먹게 생긴 상황이 되었다. 짧게 혀를 차던 에이든 테일러는 진동이 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시지였다.

[ 이번에 증권사랑 같이 하는 프로젝……. ]

“끊어요.”

언제나처럼 상대방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에이든은 서둘러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에이든 - 진」

진에게서 온 답장에 흐뭇하게 웃던 그가 무언가를 망설였다. 핸드폰 액정 위에서 헛돌던 손가락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귀 옆에 핸드폰을 가져다 댄 그가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이내 진이 전화를 받았다.

“아… 진, 지금 통화 괜찮아?”

[ 응, 무슨 일이야? ]

“그냥… 뭐 하나 해서.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요새 많이 바쁘지?”

진은 며칠 째 병원에 오지 않았다. 매일 이곳에 와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절대로 용서가 안 돼서 앞으론 보고 싶지 않다고 할까봐. 이럴 땐 진의 목소리라도 들어야 진정이 됐다.

[ 학교 알아보는 게 생각보다 복잡해서… 그냥 계속 상담 다니고 있어…! ]

“그렇구나…….”

두 사람의 대화는 참 어색했다. 제대로 된 대화란 걸 해 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상적이고 다정한 말들을 나눠 보지 못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특히 진 헤니는 제게 절절매는 에이든 테일러가 아직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때는 그렇다 치지만, 대체 이건 누군가 싶은 정도였다.

전화를 하고 있는 진 헤니의 앞에는 많은 입학 관련 서류들이 있었다. 여러 학교의 이름이 보였다. 하나 같이 다 체육대학교들이었다. 책자가 한 더미였는데, 그 중 형광펜으로 체크돼 있는 것들은 전부 ‘체육교육자’ 과정이었다. 에이든과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질 않아서 진은 어색한 낯으로 그 종이들을 뒤적였다.

[ 진, 그… 혹시 내일은… 내일은 병원 오기 좀 그렇겠지? ]

“…….”

[ 아, 오라는 건 아니고, 너 괜찮으면… 와 주면… 좋을 것 같아서……. ]

결국 오란 소리나 다름없어서 에이든 테일러가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오라 가라 하는 것처럼 들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얼굴을 보고 싶은데……. 결국 에이든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맛있는 저녁을 살 테니 만나 달라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오라하기가 애매했다. 그러니 빨리 이 지긋지긋한 병실에서 나가야 했다. 드디어 다시 만났는데, 맨날 환자복이나 입고 있는 꼬라지도 짜증났고, 매번 진이 병원으로 와 주는 상황도 답답하기만 했다.

“진, 나 그냥 말해 본 거야. 혹시 괜찮나 해서……. 바쁜데 미안해.”

[ 내일은 이미 일정이 있어서… 이번 주는 조금 힘들 것 같아. 다음 주에 갈게. ]

“아… 응, 바쁠 텐데 고마워.”

다음 주에라도 오겠다는 대답에 에이든 테일러가 밝게 웃었다. 그의 뺨에는 오랜만에 보조개가 졌다. 에이든은 많이 기뻐 보였다. 그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웃었다. 조금 전의 통화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라, 병실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누군가 지금 에이든 테일러를 봤다면, 많이 아프더니 미쳤다는 결론에 다다랐을 테니까.

***

에이든 테일러의 퇴원까지 남은 시간, 8일. 에이든은 링거대를 끌며 병원 정문을 서성였다. 10월 중순의 뉴욕은 날이 서늘했는데, 그는 환자복만 입은 채였다. 그는 초조한 낯으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우뚝 멈췄다. 그리곤 저 아래에서부터 보이는 진의 모습에 활짝 웃었다.

진 헤니는 약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저를 보며 환히 웃는 에이든의 얼굴이 낯설 뿐이었다. 진은 이럴 때마다 대체 어째야 할지를 몰라 난감했다. 뜨문뜨문 병원에 들를 때마다 봐왔던 모습이지만,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진 헤니의 마음속에 있는 에이든 테일러와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는 너무 갭이 심했다. 아예 다른 사람인 수준이었다.

“오느라 힘들었지? 와 줘서 고마워.”

“아냐, 안 힘들었어…! 얼른 들어가자.”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그래도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로 갈 때까지만 해도 나름 선방이었다.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고, 에이든 테일러가 생각하기에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물론 둘 다 어색한 건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았으니 이 정도면 아주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에이든이 속으로 흐뭇해 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병실로 온 주치의가 지금까지의 경과와 앞으로의 통원치료를 얘기하면서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진 것이다.

“에이든 테일러 씨가 빠른 퇴원을 원하셔서 강도 높게 치료가 진행된 만큼, 차도는 좋습니다. 피검사 결과도 이제 정상 수치를 보이고 있고, 심장이나 폐 쪽도 재활치료 결과가 좋으니… 퇴원은 다음 주 정도에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같은 말을 들은 두 사람의 반응은 굉장히 달랐다. 에이든 테일러는 뿌듯하게 웃었고, 진 헤니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그는 뭔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진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에이든은 그저 좋았다. 퇴원이니까.

“약은 총 3개를 복용하셔야 하고, 앞으로는 통원치료로 돌려서 상태를 계속 살피셔야 합니다. 거의 2년 동안 몸이 망가졌으니 완치가 쉽게는 안 되실 거예요. 퇴원 직전에 한 번 더 검사하시고, 수속 밟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사는 이후로 간단히 몇 마디를 더 하더니 병실을 나갔다. 에이든은 들떴다. 다음 주에 퇴원을 하게 되면 진과 뭘 해야 좋을지, 벌써부터 설레었다. 진 헤니만 표정이 안 좋았다. 진은 굳은 표정으로 침대에 있는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는 에이든의 손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그의 손은 주사자국과 멍자국이 가득했고, 약물로 인해 퉁퉁 부어 있었다.

“왜 치료를… 이렇게 힘들게 받았어…?”

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든은 조금 놀란 얼굴로 아무 말을 못했다. 진이 화가 나 보였으니까. 저를 질책하듯 보는 눈에 에이든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약… 그 약 먹어서 몸 아프다고 했던 거, 그래서 왜 먹었는지 나한테 말 안 했었지…? 그거 왜 먹은 거야…? 그것 때문에 완치가 안 될 정도인데…?”

“아, 그냥 그걸 먹어야 덜 힘들어서…….”

“그걸 먹어서 아픈 거잖아.”

에이든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흐렸다. 치료를 힘들게 받은 이유도, 몸을 망치는 약을 먹어 온 이유도 모두 하나였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진이 상처 받을 게 뻔해서 에이든은 입을 열지 못했다. 너를 빨리 만나고 싶어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약을 먹어야 살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

“…….”

진 헤니는 말이 없었다. 그냥 에이든 테일러를 빤히 보고 있었다. 정말 그게 전부냐는 눈빛이었다. 진은 죄다 멍든 손과 어쩔 줄 모르는 푸른 눈을 번갈아 바라봤다. 검은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오를수록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한테 숨기는 게 뭐야…?”

“진, 그거는…….”

에이든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그 기억들 때문에 평생 힘들었다는 것도, 진에게는 전부 이제야 안 사실들이었다. 알아도 이해하진 못했다. 말을 해도 온전히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제가 직접 겪어 본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더 말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가 쌓이고, 또 쌓일 거였다.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산더미인데,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진, 그건 그냥 별거 아니야…….”

진은 눈물은 흘릴지언정,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금니를 물며 대답할 말을 골랐다. 그냥 다른 이유라도 만들어 말해야 하는 건지, 머리가 복잡했다. 에이든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떻게… 뭐라고 말을…….

“대체 뭐 때문에 말을 못해! 그냥 계속 오해하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지내면 돼? 그러길 바라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말을 못,”

“보고 싶어서 그랬어, 보고 싶어서…….”

진 헤니의 화난 목소리 뒤로 에이든 테일러의 다급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말을 하고 나선 에이든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진은 이해가 되질 않아 잠시 말을 멈췄다. 보고 싶어서라니……. 검은 눈이 에이든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에이든은 눈을 꼭 감고선 말을 이었다.

“그 약… 먹으면 환영처럼 네가 보였어. 그렇게라도 너 만나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그랬어…….”

“너…….”

검은 눈에 화가 차올랐다. 여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진은 제 목구멍이 타들어간다고 느꼈다. 목에 울음이 홧홧하고 뜨겁게 고여 들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너 일부러… 나더러 미안하라고 이러는 거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그 약 먹은 건,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야. 너 없이 지내는 게 나는 너무 힘들어서… 너무 보고 싶은데 볼 방법이 없어서…. 너 탓하는 게 아니…….”

“그러니까 왜 그랬어, 왜!”

저라고 그를 떠나고 싶어 떠난 게 아니었다. 저라고 그를 떠나 2년 동안 행복한 게 아니었다. 왜 나를 떠나게 만들어야만 했는지… 대체 왜……. 시간을 돌릴 수 없단 걸 알아도 다 원망스럽기만 했다. 대체 그때 제게 왜 그랬는지. 그렇지만 않았으면, 둘 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왜 내가 널 떠나게 만들었어, 왜…!”

“진…….”

“나는… 난 너라면 다 괜찮았어, 에이든. 나 정말… 자존심도 없이 다 참을 수 있었어…! 그 방에서 마지막 날 있었던 일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미안해, 내가 미안해…….”

진 헤니는 말을 멈췄다. 제 입으로 말하기 비참했다. 진은 약하지 않은 힘으로 에이든을 쿵쿵 때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고개를 숙이고 저를 때리는 손을 가만 맞고만 있었다. 큰 몸이 휘청일 정도로 강한 힘이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제겐 아플 자격이 없었으니까.

“잘못했어, 진…….”

푸른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참아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퍽퍽 소리를 내는 손이 한참동안 에이든의 어깨며 등을 때렸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씩씩거리며 때리던 진 헤니는 다 부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둘 다… 하나도, 행복하지를 못했는데… 행복하기는커녕 아프기만, 했는데…! 누구한테, 누구한테 다 보상받아, 누구한테…!”

“내가 미안해…….”

에이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몇 번이나 미안하다 말했다. 다 제 잘못이라고, 잘못했다고. 진 헤니는 여태 참아온 말들을 쏟아냈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얼마나 비참했는지.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에이든 테일러의 마음이 찢어졌다.

대체 왜 그랬냐는 원망과 슬픔이 오랜 시간 병실을 채웠다. 병실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병실을 힐끗거렸다. 늦은 오후의 해가 다 지고, 밤이 돼 서늘한 공기가 병실을 채울 때가 돼서야 울음소리는 멈췄다.

진은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그는 양손으로 에이든 테일러의 손을 살포시 잡고 있었다. 푸르게 멍든 손이 아프진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꼬옥 눌러 잡지도 못한 채였다. 에이든은 침대에 모로 누워 그 모습을 가만 보고만 있었다. 푸른 눈에서는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그리곤 가만 쓸어주다 눈을 꾸욱 눌러 감았다. 자꾸 울음이 새려 해서,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았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염치도 없이 많이 감사했다. 진이 앞으로는 매 시간, 매 순간…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그가 말한 대로 보상 받을 수 없는 시간들이기에, 기회만 준다면 앞으로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이젠 진의 진짜 연인이 되고 싶었다.

***

에이든 테일러의 퇴원 하루 전날. 에이든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 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진중했다. 왜냐면 내일 오전에 퇴원하자마자 샵에 들러 머리를 잘라야 했으니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내일은 퇴원이고, 드디어 밖에서 진을 만날 수 있었다. 날도 딱 좋았다. 에이든은 금요일에 진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어서 기뻤다. 데이트 신청을 할 때만 해도 거절하면 어쩌지 걱정이 많았는데. 진이 선뜻 승낙해 줘서 더 기뻤다.

예약을 마친 에이든은 열심히 구글링을 했다. 금요일 저녁, 무려 첫 번째 데이트를 위한 장소를 검색해야 했다. 그는 진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루프탑 같은 데 가도 좋을 것 같은데……. 그는 퇴원과 동시에 아주 바빴다. 저녁에 보는 거니까, 오후에 일찍 나가서 적당한 옷들도 사 둬야 했다.

진을 얼른 만나고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긴장이 됐다. 만나서 잘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너무 등신처럼 굴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에이든은 진에게 매력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적당히 유쾌하고, 여유롭게 대화할 줄도 알고 보기에도 매력적인, 그런 사람. 진의 마음에 많이 들고 싶었다. 만회해야 하는 것들이 산더미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에이든은 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언제나 긴장이 돼서 뒷목을 매만지게 됐다. 신호음이 흐르고, 진이 전화를 받자마자 에이든이 옅게 웃었다. 이제 건너편에서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나오지 않아서, 때때로 기분이 이상했다.

“아, 진…! 지금 통화 괜찮아?”

[ 어? 아, 괜찮아…! ]

“내일 여섯 시쯤에 너 있는 데로 내가 데리러 갈게.”

[ 아… 안 데리러 와도 돼! 거기 내가 말한 정류장에서 보자. ]

아니라고, 네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몇 번 더 말했지만 진은 극구 오지 말라며 거절했다. 에이든의 미소가 조금씩 슬퍼졌다. 아냐, 못 만나겠다는 것도 아니고……. 에이든은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지금은 뭐 해? 집이야…?”

[ 어? 응, 집이야…! ]

진은 좀 불편해 보였다. 대화는 여느 때처럼 잘 이어지질 않았다. 에이든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진과 거리를 좁히려면 아직 한참 멀어 보였다. 그는 슬프게 웃으며 몇 마디를 더 건넸다. 오늘은 잘 지냈는지, 내일 만나서 하고 싶은 건 있는지. 하지만 진의 대답은 길지 않았고, 에이든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를 위해 일찍 전화를 끊었다.

“하…….”

내일 만나서 잘할 수 있겠지. 에이든이 어두운 낯으로 한숨을 쉬었다. 데이트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긴장이 됐다. 꼭… 꼭 잘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에이든 테일러가 긴장으로 잠 못 이루는 밤, 진 헤니 역시 아주 요상한 기분으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을 자려 노력은 하고 있는데,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진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에이든은 진이 통화를 불편해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불편한 건 아니었다. 진은 전보다 훨씬 더 편안한 얼굴로 에이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가끔 병원에 가서 에이든 테일러에게 이런저런 감정을 털어 놓는 일은 진 헤니에게 많은 부분 도움이 됐다. 상처가 많이 나 있던 마음은 피가 멎고, 딱지가 앉았다. 아프고 힘들었다고 말할 때마다, 에이든이 잘못했노라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새 살이 돋았다. 흉은 졌을지언정, 피가 철철 나진 않아 다행이었다.

대신 고민은… 앞으로 에이든 테일러를 어떤 낯으로 대해야 할지였다. 앞으로 그와 저의 사이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그게 뭔지를 몰라서 그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나한테 미안해하는 에이든 테일러’는 편한데, ‘나한테 다정한 에이든 테일러’는 좀… 뭔가 당황스럽고 적응이 되질 않았다. 오늘은 잘 지냈냐니, 굉장히 생경한 물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우린 대체 무슨 사이지……. 진이 생각하기에 둘의 사이는 아주 여러 개로 정의될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확실한 건 ‘미안한 사람’과 ‘사과 받는 사람’이었다. 헤어졌던 연인… 이라기엔 일단 연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연인이 아니었다.

“친구는 절대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사는 데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없으면 아주 힘들고, 아프다는 것도. 천장만 빤히 바라보던 진이 또 한 번 몸을 뒤척였다. 베개 밑에 손을 집어넣고 옆으로 누운 그는 멍한 눈을 깜빡거렸다.

내일… 어쩌지? 아냐… 그냥 편하게 대하면 되지, 뭐……. 왜 긴장이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자야 했다. 진 헤니는 잠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눈을 억지로 눌러 감았다. 내일부터 새로운 에이든 테일러와 잘, 친하게 지내보자 다짐하면서.

사실 진 헤니만 몰랐다. 둘 사이는 단순한 ‘연인’, 그 이상이고 그런 이름표는 무의미할 뿐이란 걸. 지금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다시 사랑에 빠질 짧은 시간, 그리고 필요하다면…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작은 기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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