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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Where are you? (9/16)

(2) Where are you?

진료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안에 앉아 있던 의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환자는 언제나 진료실에 들어올 때마다 저 지랄을 했으니까. 조나단은 쾅하니 닫히는 문에 어깨를 움츠렸다. 젠장, 아직 여기까지 안 놀라기엔 내공이 조금 부족했다.

“내가 아침에 부르지 말라고 했죠.”

“아침부터 잔소리를 해놔야 또 이상한 짓을 못할 테니까 아침에 오라고 하는 거예요.”

조나단 파커는 사나운 푸른 눈을 보며 말했다. 자신도 귀찮다는 말투였다. 손에 들고 있던 차트와 모니터 화면 속 검진 결과를 보며 그가 혀를 찼다. 매번 상태가 이러니 안부를 수가 없지.

“아직도 그 약 먹죠?”

삐뚠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별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의 눈이 ‘먹으면 뭐, 어쩌라고?’를 말하고 있어서 조나단은 어이가 없었다.

“그거 심장약이랑 성분 충돌하니까 먹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

“아니, 왜 자꾸 정신과 약을 같이 먹냐고요! 누가 먹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의 피검사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주, 아주 좋지 않았다. 심장약은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맨날 애꿎은 약을 같이 주워 먹으니 좋을 리가 없었다. 그의 진료 차트를 보면 향정신성약 복용 기록이 있으니 무슨 약을 먹는지는 대충 알았다.

클로자핀이었다. 환청이나 환영을 겪는 환자들이 복용하는 약.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는 지금 환청을 듣지도, 환영을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그 약을 먹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대체 그 약이 어디서 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이거 보이죠, 이거? 예?!”

“…….”

“엑스레이에서까지 이제 보이잖아요! 폐에 까만색으로 점 같은 거 생기는 거.”

조나단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리킨 것은 에이든 테일러의 엑스레이 사진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폐 쪽에 까맣게 반점이 생기고 있었다. 진료 초기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반점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중이었다. 이제 곧 폐 전부가 까맣게 뒤덮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아까랑 표정이 똑같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딱 그거였다. 지금 그는 이 심각성을 전혀 느끼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조나단 파커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아파오는 머리를 싸맸다.

“이게 왜 까맣게 되냐면요, 에이든 테일러 씨?”

“…….”

“세포가 죽어서 그러는 겁니다.”

엑스레이에서 폐가 까맣게 보이는 경우는, 폐렴 같은 질병을 앓아 폐세포가 다 죽은 경우였다. 그리고 폐세포가 전부 죽으면, 그 폐를 달고 있는 인간도 죽는 건 당연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약 먹는 거 멈추세요. 그리고 심장약을 좀 꼬박꼬박…….”

“죽고 싶나 보죠.”

에이든 테일러의 목소리는 무감했다. 그가 뱉은 말이랑 잘 매치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누가 들으면 ‘오늘 날씨 괜찮네요.’ 따위를 말하는 줄 알 법한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조나단 파커는 그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자신의 환자는 담당 주치의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나 하는 아주 못된 사람이었다. 그는 제게 진료를 보러 온다기보다는 약을 타러 오는 거나 다름없었다. 사실 조나단도 알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이란 걸.

“그럼 심장약도 먹지 마요! 스트레스 왕창 받아서, 어? 그냥 당장 숨 못 쉬어서 심정지 와서 죽으면 되지, 왜 자꾸 약은 또 타러 와요!”

 “아, 그건 또 좀 곤란해서…….”

삶에 미련은 없는데, 당장 죽기는 곤란한… 아무튼 이상한 사람이었다. 조나단 파커는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유가 약 2년 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일 거라 추측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까지 한꺼번에 나쁜 일이 생겼었던 그때. 조나단은 측은해지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에이든 씨, 혹시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거면 제가 그쪽에 연락을…….”

“그런 씨발 좆같은 건 전혀 필요 없어요.”

“아니, 그럼 대체 그 약은 왜 먹냐고요…!”

“끝났죠?”

사실 안 끝났어도 상관없고. 에이든 테일러는 떫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질 않으면 약을 주질 않으니, 귀찮아도 와야만 했다. 의사나 병원을 바꾸든지 해야지, 점점 귀찮아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가끔 아침에 부를 때마다 진료실을 다 박살내 버릴까 조금 고민이 됐다. 그럼 아침에 안 부르지 않을까 싶어서. 아침마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지금 뭣도 아닌 이따위 검진결과나 듣고 있을 순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할 말 다 했냐는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봤다. 조나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얼른 가보라는 듯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에이든은 올 때와 똑같이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중요한 일’을 하러 가야만 했으니까.

***

우체국이었다. 에이든은 급한 걸음으로 우체국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는 품 안에 넣어놨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봉투는 아직 입구가 붙여져 있지 않았다. 그는 안에 종이가 잘 들어있는지 다시 꼼꼼히 확인을 하고,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달그락 소리를 내는 상자가 열리고, 에이든 테일러는 안에 들어있던 것 하나를 꺼내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우체국 안에 있던 풀로 봉투 입구를 잘 밀봉했다.

“오늘도 거기로 보내시는 거죠?”

일련의 과정을 멀찍이서 보고 있던 우체국 직원이 물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별말 없이 그에게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든 직원이 키보드 소리를 내며 우편물 처리를 하고 있었다.

「수신인 : 진 헤니」

수신인의 이름을 입력한 직원은 익숙하게 ‘쿠알라 아일랜드’ 쪽 주소를 찾아 마우스를 움직였다. 아마 이 LA에서 쿠알라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에이든 테일러 한 사람일 거라 확신하며.

그는 대체 무슨 편지를 보내는 건지, 거의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우체국을 왔다. 진 헤니랑 장거리 연애라도 하는 건지, 뭔지. 그렇다 해도 대체 이 아날로그적인 소통 방식은 또 뭔지 알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편지를 부칠 때의 에이든 테일러는 많이 슬퍼 보여서, 눈치 없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직원은 봉투를 가만 만져보더니 볼록한 곳을 피해 도장 몇 개를 쿵쿵 찍었다. 처음엔 안에 들어 있는 뭔가 볼록한 것 위에 쾅하고 찍는 바람에 살벌한 눈빛을 견뎌야 했으니까.

편지를 부치는 일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창구 앞에 왠지 초조하게 서 있던 에이든은 직원에게 작게 물었다.

“혹시 중간에 유실됐다거나…….”

“제가 매번 말씀드리지만 보내시는 모든 우편물은 전부, 아주 잘, 보내는 곳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그는 조금 굳은 얼굴로 그 위에 사인했다. 직원은 위에 있던 영수증은 자신이 보관하고, 아래에 깔려 있던 종이 하나는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에이든은 영수증을 자켓 주머니에 넣으며 우체국을 나섰다. 그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편지가 유실돼도 문제, 안 돼도 문제였다. 편지를 못 받고 있다면 끔찍했고, 받았는데도 연락이 없는 거라면… 그것 역시 끔찍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가 허공에 피식하는 웃음을 뱉었다.

한스 테일러가 뒤지고 딱 하나 아쉬운 건, 사람 뒷조사 하나를 제대로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진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전화번호도 알 수 없었고, 어디 있는지는 더욱 알 수 없었다. 진의 전화번호는 해지된 지 오래였고, 주소지는 이전에 살던 LA에서의 것만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몇 번 사람을 시켜 알아보기도 했으나, 몽땅 헛수고였다. 비슷하다 생각하면 진이 아니었고, 드디어 찾았다 생각하면 또 진이 아니었다.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저를 엿 먹이는 것만 같을 정도로. 숨바꼭질 같았다. 진 헤니는 에이든 테일러로부터 도망쳐서, 꽁꽁 숨어버린 거였다. 완전히.

에이든이 알고 있는 거라곤 아주 예전에 사람을 시켜 알아봤던 진의 인적사항들뿐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의 가족이 뭐라도 진에게 전달해 주기를 바라며, 그렇게 매일 섬으로 편지를 보냈다.

에이든은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그가 편지를 받아 보고 조금이라도 저와 얘기하고 싶어지진 않을까 싶어서, 오늘은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싶어서.

“하…….”

핸드폰을 손에 꾸욱 쥐고는 다음 행선지로 발을 옮기려던 찰나,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확인하던 에이든은 화면의 이름을 보곤 전화를 거절했다. 그리곤 또 다른 목적지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득달같이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 진짜… 짜증나게.”

에이든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봤다. 거절해 봤자 받을 때까지 거는 사람인 걸 알기에, 그는 결국 통화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내가 기다리는 전화 있으니까 쓸데없는 걸로 전화하지 말라고 했죠.”

[ 안 쓸데없어. 쓸데없는 건 네가 타지도 못하는 배 타려고 맨날 그 앞에서 끙끙대는 일이지. 너 지금 어디니? ]

회사로 잠깐 들어와. 그렇게 덧붙여진 말에 에이든이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거길 왜 가요.”

[ 아, 좀 와! 회사에 대표는 두 명인데 왜 일을 나 혼자 해야 되냐고! ]

“난 이름만 빌려준 거니까 당연히 일은 제시 혼자 해야죠.”

[ 이름이랑 얼굴이랑 같이 빌려주기로 했잖아. 이건 약속이랑 많이 다르지 않아? 나 그냥 당장 대표 때려 칠 테니까 너 혼자 이거 다 해! ]

그러기 싫으면 당장 회사로 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에이든은 이럴 때마다 이미 죽은 새끼지만 정말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스 테일러가 남긴 많은 사업체들은 정리가 쉽지 않았고, 아직까지 저를 이따위로 귀찮게 만들었다.

제시 제퍼슨도 가끔 이렇게 귀찮게 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만한 사람을 또 구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다음 행선지가 교체되고 있었다.

***

“넌 어째 볼 때마다 몸에서 생명력이 날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거니?”

제시 제퍼슨은 점점 말라가는 에이든 테일러를 보며 물었다. 에이든은 별말이 없었다. 회사 일에 하나도 관심이 없는 그가 제시와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그 뜨문뜨문 이어지는 만남마다 제시 제퍼슨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에이든 테일러는 가끔 이렇게 만날 때마다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 창백한 낯을 보며 혀를 차던 그녀는 그를 회사로 부른 본론을 꺼냈다. 일단 시체손이라도 빌려야 할 지경으로 일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동정심이나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 대신 출장 좀 가.”

에이든 테일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뭔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제시 제퍼슨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얼굴 빌려주기로 했잖아. 가서 나 대신 사람들 좀 만나.”

“하… 진짜 별 쓸데없는 거 가지고 오라고 한 거였네.”

에이든은 정말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시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출장을 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당장에 바쁜 일도 없잖아! 나 진짜 일 너무 많아서 그래!”

“나 충분히 바빠요.”

“거짓말하지 마. 맨날 어디 바다 가서 앉아 있고, 항구 앞에 죽치고 있는 거밖에 더 해?!”

“거 봐요. 바쁘네.”

제시 제퍼슨은 어이가 없었다. 한 1년 전에 저 말을 들었다면 ‘그래, 바쁘긴 하겠지.’라며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정말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빈정거리는 거였다.

에이든 테일러가 사람 뒷조사에 영혼이라도 바친 것처럼 굴 때는, 실제로 바쁘긴 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제시가 에이든에게 말했다.

“너, 요즘에도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지?”

“그러고 다니는 게 뭔데요.”

“스토커처럼 굴고 다니냐고.”

제시의 말에 에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무언가 해탈한 것만 같은, 그런 이상한 표정이었다.

“사람 시켜서 알아보면 딱 하나 확실해지는 게 있어요.”

“……?”

“찾을 수 없다는 사실, 딱 하나. 그래서 관뒀어요.”

제시는 무슨 말인지를 몰라 그냥 인상을 찌푸렸다. 앞뒤를 다 잘라먹고 말하니,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에이든은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종의 후유증을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희망 뒤엔, 언제나 커다란 절망이 따라붙었다. 심장이 당장 멈춰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진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두려움이 제 심장을 파먹었다.

“어쨌든, 바쁘니까 다신 부르지 마요.”

에이든이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나갔다. 제시 제퍼슨은 끓어오르는 욕을 가까스로 집어넣으며 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이건 완전히 착취였다, 착취. 계약할 때랑 말이 달라도 아주 달랐다.

‘분명 이 회사의 대표는 저 새끼랑 나랑 둘인데, 왜 나 혼자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냐고!’

다 쓰러진 ‘테일러’지만 어쨌든 테일러는 테일러였다. 앞으로 삼 대가 충분히 먹고 살 게 분명했다. 그는 모든 유산을 포기했지만 여러 사업체들을 짊어져야만 했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 뻗쳐 있기 때문에, 웬만한 기업들은 저 망나니 같은 ‘에이든 테일러’를 통하지 않고선 사업을 전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도 가끔 그의 이름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번 출장 건처럼 자신의 이름에 꽤나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일 경우라든지.

“하…….”

제시는 자신이 혼자 소화해야 할 많은 일정들을 생각하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절대 못 가. 무려 그 주에 개발자 미팅이 4개나 있었다. 제시 제퍼슨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의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난데요. 티켓 좀 준비해 주세요. 네, 맞아요.”

에이든 테일러 이름으로, 다음 주에 출발하는 뉴욕 행 비행기요.

***

실제로 아주 바빴다. 하는 일이 없다니, 자신은 매일 일분일초를 초조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건 어느 해변에 앉아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로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 에이든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2년 전, 진과 처음 마주했던 그 바닷가였다. 뭘 찾냐며 진을 불러 세웠던, 그때 그 바닷가.

그는 습관처럼 왼쪽 손목에 있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그러다 조금 초조한 낯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

“…….”

오늘도 안내 음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에이든은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 쓸어 보았다. 입가에 흐린 미소가 자리했다. 많이 보고 싶었다. 목소리도 너무 많이 듣고 싶었다.

에이든은 핸드폰에 박혀 있던 고개를 들어, 제 앞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봤다. 캘리포니아는 언제나 이렇게 화창했고, 눈부셨다.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에 맞게 로스앤젤레스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왠지 모르게 모든 장면들이 다, 흑백처럼 느껴졌다. 그의 세상은 둘 중 하나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진이 있거나, 진이 없거나.

그리고 진이 없는 지금은 아무런 감각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고여 있는 시간에서, 도돌이표 같은 삶을 살았다.

그의 하루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인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에이든은 진 헤니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뜨고, 품에 편지 하나를 품고선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게 잘 도착하고는 있는 건지 초조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묻고, 진에게 전화를 걸어 보곤 했다.

그럼 전화기에선 진이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리듯 다시 확인하라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없는 거 알면서 왜 자꾸 이러냐는 것처럼.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 씁쓸하게 웃다가 항구로 향해 티켓을 하나 끊고, 어떻게 해도 배에 한 발도 오를 수 없는 자신을 비난하다 저녁을 맞이했다.

사방에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면 그는 여러 곳을 정처 없이 배회했다. 진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게 오늘은 이곳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바다. 바보처럼…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쓰레기처럼 굴었던 이곳.

에이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전부 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이번엔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를 단번에 알아보고, 저를 찾아와 준 그를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고맙다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다.

기침이 터졌다. 에이든은 그 자리에 꼬박 반나절을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혼자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을 때까지.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말소리들은 에이든 테일러만을 비껴갔다. 그에게 허락된 소리라곤 가끔 핸드폰을 들어 올릴 때마다 들리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성뿐이었다.

에이든은 달이 휘영청 떠있는 바다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걸었다.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하면 간간히 몸을 숙여 손을 뻗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것을 달빛에 비춰보다가 바닷물에 잘 헹궈 주머니에 넣었다. 이 역시 하루 일과 중에 하나였다.

에이든은 손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고는 한숨을 쉬었다. 사방으로 진 헤니를 찾아 헤매는 바쁜 하루가 오늘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진 헤니의 침대 위로.

***

에이든 테일러는 바다를 걷고 있었다. 아까 그 바다. 해가 졌지만 날이 밝을 때보다 사방은 더 뜨겁고 끈적한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뜨거운 백사장의 열기에 사람들을 넋을 놓고 이 여름을 즐겼다.

발아래에서 푹푹 모래가 꺼지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발을 옮기고, 또 옮겼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그는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눈을 가늘게 뜨며 커다란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제 뒤를 따라오던 사람은 당황한 것 같았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그 모습을 보다 에이든 테일러가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조금 더 숨어 있을까. 아닌가, 너무 놀리는 건가…….

푸른 눈이 가만히 제 앞에 있는 사람을 살폈다. 허둥대고 있는 남자는 길게 내려온 앞머리가 거슬리는 건지 몇 번이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두꺼운 안경을 추켜올리며 이곳저곳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 옅은 미소가 자리했다. 아무래도 지금쯤 나가야겠지.

“뭐 찾아?”

“……어?”

“나 찾아?”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걷던 에이든 테일러가 물었다. 제 앞에 서 있는 진 헤니에게.

진은 조금 놀란 건지 입을 벙긋거리다 뒤를 돌아 도망쳤다. 달리기도 못하면서……. 에이든이 애써 웃음을 감추며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제 어깨를 꾹 잡아오는 손길에 진의 몸이 튀어 올랐다. 검은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그, 그게…!”

“진.”

“응……?”

진 헤니는 바로 앞에 보이는 에이든 테일러의 얼굴에 잠시 넋을 뺐다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꿈뻑거리는 검은 눈을 보다 에이든 테일러가 밝게 웃었다. 그리곤 그를 한가득 품에 안았다.

갑자기 품에 안겨진 진은 삐거덕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춘 채였다. 에이든은 제 품에 안긴 진의 어깨를 가만 쓸다, 그와 눈을 맞추고 섰다.

“하하…….”

“……?”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대체 이 안경은 어디서 산 거야?”

에이든 테일러는 목으로 웃음을 삼키며 진의 안경을 벗겼다. 갑자기 사라진 안경에 진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에이든은 이제야 눈앞에 바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눈을 휘어 웃었다. 그리고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진.”

안 그래도 동그랗게 떠져 있던 진의 눈이 더 크게 뜨였다. 잠시 놀라 굳어 있던 그는 그 어떤 때보다 맑게 웃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길고 커다란 눈, 기쁘다는 듯 길게 호선을 그리는 도톰한 입술. 에이든 테일러는 그 모든 모습을 꼼꼼히 눈 안에 담았다.

“오랜만이야, 에이든…!”

짧은 인사였지만 충분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를 다시 한번 꼬옥 안았다가, 숨이 막혀 켁켁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품에서 놔줬다. 진은 조금 머쓱한지 머리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둘은 어색하고, 동시에 편안한 기분으로 함께 바다를 걸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뚫고, 진 헤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네가 기억 못할 줄 알고… 엄청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

“고마워, 진. 찾아와 줘서 고마워.”

많이 늦은 인사였음에도 진은 뿌듯하게 웃었다. 십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렇게 바다를 걷고, 또 걸으며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LA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버지랑 얼마나 또 싸워야 했는지. 진은 옛날처럼 조잘조잘 많은 얘기를 했다.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얼마나 네 생각을 많이 했는지도. 에이든 테일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 옅게 웃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거의 매일을 만나야 했다. 십 년 동안 나누지 못한 말들은 너무 많아서, 매일매일 떠들어도 부족할 지경이었으니까. 하루는 같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했고, 또 다른 하루는 주말마다 서는 장에 가서 온갖 걸 먹고 돌아오곤 했다.

진은 그때마다 아이처럼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진이 푸드트럭 앞에서 넋을 놓고 있었던 날엔 에이든은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 웃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보건 말건, 그는 사랑스러운 진을 보며 웃었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은 어느 펍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둡고 빨간 조명, 가게 벽 곳곳에 설치돼 있는 네온사인이 유혹적인 곳이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여기저기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긴장이 되는지 자꾸 맥주만 들이켰다.

에이든 테일러는 걱정이 됐다. 여러 번의 데이트 동안,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저에겐 데이트인데… 진에게는 아닐 수도 있단 사실을. 그냥 오랜만에 만난 친구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 헤니는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구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주 앉은 남자가 속이 타서 맥주를 계속 홀짝이는 거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에이든은 망설이다 진에게 물었다. 뱉어진 목소리가 어딘가 자신이 없었다.

“그… 진, 오늘은 우리 집에 갈래…?”

“집? 너희 집? 왜?”

“그냥… 넷플릭스도 보고…….”

“…넷플릭스가 뭔데?!”

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갑자기 가슴 저 아래에서 차오르는 죄책감에 에이든이 말을 멈췄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어서 괜히 뒷목만 만지작거렸다. 붉은 조명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쉬면서… 영화나 드라마도 보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러자!”

진이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졌다. 기쁘긴 했지만, 동시에 아까 전의 걱정이 더 짙어졌다. 진은 지금 대화의 맥락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전형적인 작업 멘트를… 하긴 그가 알 리가 없었다.

쿵쿵거리는 에이든 테일러의 심장은 그의 집 소파에서도 여전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그와 다르게 옆에 앉아 있는 진은 영화에 엄청나게 집중해 있었다. 그는 작게 입을 벌리고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품에 안고 있는 팝콘 통에 자신의 손이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에이든은 복잡해지는 머리에 눈썹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걱정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진은 그냥… 그냥 저를 친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가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왼손의 팔찌를 매만졌다. 에이든은 입술을 작게 씹더니 뭔가 결심한 낯으로 입을 뗐다.

“진, 그… 좀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데, 어… 나는 네가 많이 좋아……. 십 년 전부터 쭉, 지금까지.”

“……?”

TV만 보던 눈은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에이든을 향했다. 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뭘 그런 당연한 걸 말하냐는 목소리로.

“응, 에이든. 나도 네가 많이 좋아.”

“…….”

아니, 그렇게 좋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진에게 말하려면 조금 더 직접적인 대사가 필요했다. 턱을 매만지던 에이든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는 그러니까 네 연인이 되고 싶다는 거야. 좋아하는 친구 말고.”

진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에이든 테일러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에이든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는 걸 느끼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나는… 애인으로는 좀… 별로야?”

가슴에서 울리는 쿵쿵 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진이 아무 말을 하지 않을수록 에이든의 속이 타들어갔다. 아무래도 더 신중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망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친구로도 못 지내는데… 등신처럼 마음만 급해서는…….

입술을 씹던 에이든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진의 목소리가 뱉어졌다. 진은 팝콘통을 바라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 입을 뗐다.

“에이든, 만약에…….”

“…….”

“우리 처음이… 정말 이랬으면 지금쯤 많은 게 달랐겠지…?”

그랬겠지…? 그렇게 말하며 진이 손에 있는 팝콘을 만지작거렸다. 표정이 흐렸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피식하는 웃음이 샜다. 그가 눈썹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좀… 빠르네.”

두 사람의 입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했다. 진 헤니는 왼쪽 손목에 있는 까만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이제 가야겠다고. 에이든은 몸을 일으키는 진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

“…….”

“가지 마, 진. 더 있어, 응?”

나랑 있어 줘. 그가 진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나랑 있어 줘. 가지 마. 푸른 눈에 점점 눈물이 고여 들었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에도 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에이든이 뺨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 진, 나 많이 아파. 엄청 아파. 너 없어서 나… 약 안 먹으면 숨도 잘 못 쉬고, 오늘은 병원에 갔었는데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

“나랑 있어 줘… 나 불쌍하게 여겨 줘. 동정이라도 해 줘…! 그래 주면 안 될까?”

진이 그를 내려다보며 슬픈 얼굴을 했다. 그리곤 손을 들어 에이든의 뺨에 흐른 눈물을 가만 닦아 줬다. 에이든은 제 뺨에 얹힌 진의 손을 그러쥐었다. 진이 아무리 닦아줘도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으니까.

“잘할게. 나 이제 진짜 잘할 수 있어. 정말이야…! 나, 나 조금 서툴러도 잘 노력할게. 네 맘에 드는 사람 될 수 있게 내가 다 노력할게.”

“…….”

진 헤니는 손목의 시계를 다시 보더니 에이든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진, 나 제발…….”

푸른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이든이 기침을 했다. TV에서는 계속 영화 소리가 들렸다. 옆에 놓인 팝콘 통도 그대로였다. 그 공간에서 제 모습을 잃은 건 진 헤니와 에이든 테일러뿐이었다.

에이든은 텅 비어 버린 맨션에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팠다. 그의 입에서 아이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커다란 맨션에 있는 에이든의 입에서도, 허름한 아파트에 누워 있는 에이든의 입에서도.

침대 위의 에이든 테일러는 갑자기 돌아오는 시야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의 얼굴은 잔뜩 흘린 눈물로 엉망이었다. 입에서 뱉어지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조여 오는 심장에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누워 있는 침대 옆, 서랍장 위에는 흰색의 약병이 뚜껑이 열린 채 뒹굴고 있었다. 언제나 가득 약이 들어 있던 그 병은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병 안에 남아 있는 약은 이제 다섯 개뿐이었다.

“하…….”

심장약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킨 그는 무언가 후두둑 떨어지는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 에이든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헛웃음과 함께였다. 그의 손바닥에는 축축한 눈물과 코에서 흐른 피가 흥건했다. 흰색의 약은 그에게 진 헤니의 환영을 데려다줬지만, 다른 무언가도 함께 데리고 오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는 상관없었다.

이젠 차라리… 그 안에서 죽어 버리는 게 나았으니까.

***

「GX World Wide Financial Conference in NY」

제시 제퍼슨은 전화기를 들고 출장 관련 서류를 보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있을 행사는 생각보다 조금 규모가 있는 편이었다. 단순한 미팅으로 끝날 거라 예상했는데… 컨퍼런스에 대표들끼리 참석해야 하고, 사진도 몇 장 찍혀야 했다. 얼굴마담으론 또 에이든 테일러만 한 게 없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 건너편의 사람에게 말했다.

“이거 행사 참석하는 거, 경호업체가 어디예요? 우리 쪽에서 따로 고용할 필요 없는 거죠?”

[ 네, 행사 진행하는 쪽에서 경호 인원은 모두 고용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

“알겠어요. 숙소는 맨하탄 한복판으로 잡아 주세요. 행사장에서 가까우면 더 좋고. 따로 많이 이동할 필요 없게.”

제시 제퍼슨은 마지막으로 일정과 예약 내역을 확인하곤 파일을 덮었다. 그녀는 에이든 테일러를 어떻게 구슬려 비행기를 태울지, 그것만 고민하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고민하던 그녀는 갑자기 메신저창에 도착한 메시지를 바라봤다. 그리곤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싸매고 미팅룸으로 향했다. 발걸음에 짜증이 가득했다.

미팅룸에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종이를 죽죽 찢고 있었다. 종이를 쥔 손은 핏기 없이 희게 질려 있어서 흰 종이와 색이 구분되지 않는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오늘 아침 들렀던 병원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 에이든 테일러 씨, 오늘 정신과에서 진료를 보셨더라고요? 그런 씨발 좆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시더니 말이 좀 달라지셨네요?

- …….

- 네, 제가 에이든 씨의 기록에 클로자핀과 그 비슷한 류의 향정신성약은 절대로 처방하지 말라고 적어 놨으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어딜 가도 절대 못 받습니다. 못 받는다고요, 아셨어요?!

의사들이 바보인 줄 압니까?! 그렇게 덧붙여진 말은 정말 한심하다는 표정과 함께였다. 에이든은 아무래도 이 일이 생각보다 어려울 거라 짐작했다. 약을 어디서 구하지……. 일반 약국에서는 절대 안 파는 약이니 뒤로 몰래 구하든 해야 했다.

그의 손에 있던 종이는 분쇄기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게 찢어지는 중이었다. 종이를 찢는데 여념이 없던 에이든은 열리는 문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들어오는 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들어온 사람은 마주 웃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지만.

“너, 티켓 취소했어?!”

제시 제퍼슨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저 웃으며 제 손에 찢기고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결재 서류와 예약 내역이었다. 이제는 다 취소된, 뉴욕 행 비행기의 예약 내역.

“진짜… 에이든, 삼 일만 대신 가 줘. 내가 진짜 부탁할게. 나 좀 살려줘!”

“거긴 아무것도 없어서 안 돼요.”

에이든은 조각난 것들을 더 잘게 찢으며 말했다. 제시는 어이가 없었다. LA엔 뭐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는 사실 이 로스앤젤레스 땅에도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이곳에 가족도 없었고, 제가 알기론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대체 있는 게 뭐야?! 아무것도 없으면서!

“너 여기에도 아무것도 없잖아.”

“…….”

“아,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너 어디 돈 묻어 놨니?!”

에이든 테일러가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더 힘이 빠지고 있었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앞으로 쓸데없는 걸로 부르지도 말고 이딴 짓도 하지 말란 말 하려고 온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여기 절대 안 와요, 나.”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미련 없이 일어섰다. 제시 제퍼슨은 신경질적으로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다 뭔가 퍼뜩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이번에 뉴욕만 다녀와 주면 내가 대표에서 네 이름 빼 줄게! 그럼 귀찮게 이런저런 서류 안 봐도 되잖아!”

“…….”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는 제시의 무리수에 인상을 찡그렸다. 대표에서 이름을 안 빼도, 어차피 이런저런 서류 검토를 안 하면 그만이었다. 고개를 젓던 에이든이 다시 문 밖으로 몸을 빼려 하자 절박한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내, 내가 그거 뉴욕까지 같이 보내 줄게, 어? 여기에 있다는 그거, 갖고 뉴욕에 가! 그럼 됐지? 해결?”

“천문대를 뉴욕까지 옮기긴 힘들 텐데.”

“뭐? 천문대?!”

얘가 지금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제시 제퍼슨은 정말 진지한 표정의 에이든 테일러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든은 역시 그것들을 뉴욕까지 옮기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 문 밖으로 나섰다. 네 발자국 정도 걷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뉴욕에 가서도 그리피스 천문대랑 산타모니카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으니까.

에이든이 다시 몸을 돌려 미팅룸의 문을 열었다. 제시 제퍼슨은 이제 다 포기한 낯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래,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가라, 가.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문틈에 서서 말했다.

“제시, 나 그럼 약 하나만 구해 줘요.”

“…….”

점점 가관이네. 약을 구해 달란 말에 제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쩐지 곧 죽을 것 같이 변해가는 게 이유가 있었네. 하긴, 네가 죽지 내가 죽냐. 그녀는 출장을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에이든 테일러가 죽는 것 정도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뭐. 코카인? 헤로인? 뭐, 말만 해. 뉴욕 마약계의 큰손, 이런 거라도 알아봐 주랴? 그냥 이참에 원 없이 해! 내가 뉴욕에서 마약 그거, 아주 그냥 한바가지 하게 해 줄 테니까.”

“하… 아니, 그 약 말고.”

에이든이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에 그가 어금니를 씹었다. 아직까지 그 약을 하면 자신은 사람 새끼가 아니었다.

“내가 먹는 약이 있는데, 다 먹어 가는 중이라. 대신 좀 구해 줘요.”

“……?”

다섯 개로는 살 수 없었다. 물론… 그 다섯 번 안에 죽는다면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에이든이 그렇게 생각하며 제시를 바라봤다. 제시 제퍼슨은 정말 그거면 되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에이든 테일러에겐 아주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그럼 다음 주 출발로 알고 있을게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나가.”

이제 아껴먹을 필요 없겠네. 이젠 어디서든, 언제든… 진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 기쁘고, 동시에 슬픈 미소가 자리했다. 그는 이제야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그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늘도 제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에이든은 한숨을 쉬며 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

“…….”

에이든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푸른 눈이 흐렸다. 그러던 와중, 그의 앞에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에이든은 인상을 찡그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천문대 얘기가 나온 김에 다시 그곳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짙게 한숨을 쉬며 걷던 그는 갑자기 흔들리는 시야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눈앞의 빛이 번져서 에이든이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목 뒤로 비린 물이 넘어오고 있었다.

“하… 진짜 좆같이 안 멈추네…….”

남은 거 다섯 개 먹기 전에 죽을 수도 있겠는데.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코에서 흐른 피가 그의 셔츠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

밴드 밖으로 피가 줄줄 흘렀다. 남자는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피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계속 아프더라니. 속으로 한숨을 쉬던 그는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고개를 털었다.

차가 오지 않는 걸 확인한 그가 서둘러 길을 건넜다. 약속 시간에 많이 늦어서 걸음이 급했다. 분명 일찍 퇴근을 했는데 왜 이렇게 늦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굉장히 억울했지만, 아마 다른 직원들은 그가 약속 시간에 늦은 이유를 단번에 댈 수 있을 거였다. 그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오늘도 그랬다.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이 밀집한 구역, 남자는 어느 극장 맞은편 레스토랑에 서둘러 들어갔다. 그리곤 제 일행들을 찾았다. 안을 급히 훑어보던 검은 눈이 익숙한 갈색 머리를 발견하고 옅게 웃었다.

혼자 앉아 있던 남자는 제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누군가에 고개를 들었다. 메뉴판에만 박혀 있던 초록색 눈이 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보고 다정한 빛을 냈다.

“어서 와, 진.”

눈을 찌를 듯 길게 내려온 앞머리, 전보다는 봐줄 만하지만 역시 커다래서 얼굴을 다 가려 버리는 검은색 안경. 아주 예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진 헤니였다.

누군가는 불편하지 않냐고 묻겠지만, 전혀 반대였다. 진은 언젠가 얼굴이 가려져야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언젠가 날카로운 시선들을 너무 많이 받았던 게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 나디아는 안 왔네?”

“응, 좀 늦는대.”

“내가 꼴찌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디아한테 등짝 맞을까 봐 엄청 서둘러 왔는데…!”

알렉스, 너는 안 맞아 봤지…? 엄청 아파. 진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으며 말했다. 바깥은 이제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어 공기가 차가웠는데, 서둘러 걷다 보니 몸에 열이 올랐는지 너무 더웠다. 습관처럼 앞머리를 매만지던 그는 손에 굳어 있는 피에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진, 너 손이 왜 그래…?”

“아, 이거 오늘… 음료수 만드는 볼 세척하다가 베였어. 날이 생각보다 날카롭더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알렉스는 오른손을 타고 흐르는 피에 얼굴을 굳혔다. 그리곤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진이 뭐라 대답할진 알지만, 그래도 몇 번이고 말해야 하는 일이었다.

“진,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건 이제 그만두고 다시 수영하자.”

“…….”

진은 그 말에 대답 없이 굳어있는 피를 닦았다. 다 닦은 뒤에는 어색하게 웃으며 메뉴판을 들어올렸다.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알렉스가 조심히 그 메뉴판을 빼앗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까워서 그래. 너도 수영하는 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잖아. 웬만하면…….”

“알렉스, 나는 물에 있는 건 좋은데, 경기하는 건 싫어…….”

어차피 이젠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수영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 굳이 기를 쓰며 헤엄치고 싶지 않았다. 물에 있는 거랑 경기는 아주 다른 일이었다. 애초에 진 헤니는 ‘수영선수’와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알렉스 그레이와는 아주 다르게.

알렉스 그레이가 수영하는 목표가 금메달이었다면, 진 헤니의 목표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목표는 아예 사라져 버린 지 오래 돼서, 굳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진 헤니는 그저 아무런 목표 없이, 하루하루 미적지근한 삶을 살아 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일하는 거 되게 좋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되게 친절하고, 상냥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

“이거 서로인 스테이크 맛있어 보인다, 그치? 아, 너는 식단 조절하느라 못 먹겠구나. 나디아는 언제 오려나……. 전화해 볼까?”

그가 최선을 다 해 말을 돌렸다. 진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가 무섭게 뒤에서 나디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저 그때 오프인 거 아시죠? 아, 나 오프라고!”

그녀는 항공점퍼 한쪽에 손을 꽂아 넣고 통화를 하다 빽하니 소리를 질렀다. 레스토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남들이 쳐다보든 말든 성큼성큼 걸으며 말을 이었다.

“팀장님, 이거 진짜 아니잖아. 자꾸 나만 이렇게 굴릴 거예요?! 몰라, 나 안 가. 배 째.”

배 째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갈색 눈에 짜증이 드글드글했다. 진과 알렉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나디아 놀즈는 그제야 한숨을 쉬며 인사를 했다.

“미안, 아니 오늘도 자꾸 근무를 연장시키잖아. 어디 가서 일을 잘하면 이 꼴이 나는 거예요. 진, 알겠지? 어디 가서 일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지 말고. 누나 말 잘 새겨들어라.”

“그, 그래…….”

“참 좋은 거 가르친다…….”

이어지는 저녁 식사는 편안했다. 세 사람은 간간히 웃고 떠들고,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나눴다. 알렉스는 다시 수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국가대표 선발군 중 한 명이었다. 그만둘 것처럼 굴더니, 다시 시작한 이유가 뭔지 나디아는 알고 있었다.

- 아무 능력도 없는 쪽보다는… 뭐라도 잘하는 게 낫지 않아?

뭐가 나은지는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나디아는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든 열심히, 착실히 하렴. 이 우직한 등신 같은 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 그레이의 어깨를 툭툭 칠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착실히 진 헤니를 꼬드겨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 각자의 집으로 향하기 직전이었다. 알렉스는 진에게 작은 명함 하나를 건넸다. 진은 그걸 멋쩍게 받아들고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알렉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진, 경기하는 게 별로인 거면… 여기 이분이, 나 있는 곳에서 유소년부 코치하시는 분이야. 주말에만 자기 보조해 줄 사람을 구하고 있대. 한번 생각해 봐.

- 내가 수영을 어떻게 가르쳐. 나는 그런 거 못 해……!

- 가르치는 거 아니고 아이들이랑 같이 시간 보내면서 편안히 노는 거에 가까울 거야. 그건 경기 아니고 물에만 들어가는 거잖아, 맞지?

손에 들린 작은 종이, 그걸 바라보는 진의 표정이 복잡했다. 고민이 됐다. 아냐, 그래도 내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오른손에 아직도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을 내려다봤다.

“…….”

두 번째 손가락에서부터 손바닥을 타고 내려온 피는 언젠가의 상처 위에 붉은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그 상처는 다 아문 지 오래 됐지만, 오늘 흘린 피 때문인지 방금 막 다친 것처럼 보였다. 열심히 잘 아물도록 노력한 게, 하나도 보람 없는 장면이었다.

진은 명함을 내려놓곤 상처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그는 핏자국이 빨리 없어지기를 바라며 손가락으로 꾸욱 문대 닦았다. 하지만 그가 그 위를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닦이기는커녕 옆으로 붉은 자국이 번지고 있었다. 진의 표정이 점점 슬퍼졌다.

“하…….”

결국 한숨이 흘렀다. 그는 다시 차오르려는 여러 생각들에 머리를 싸맸다. 분명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때는 괜찮은데… 왜 혼자 있을 때면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검은 눈이 그가 앉은 책상 서랍 어딘가를 힐끗 쳐다봤다. 아니야, 안 돼. 안 된다고 했어. 어제도 결국 꺼내 봤잖아. 진은 고개를 몇 번 젓더니 다시 명함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굳은 얼굴로 핸드폰에 명함 속 연락처를 입력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진 헤니라고 하는데요…! 알렉스 그레이 소개로, 아… 네, 맞아요.”

긴장한 목소리가 더듬더듬 통화를 이어갔다. 뉴욕 센터의 코치는 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호의적인 대화가 계속됐다.

“이번 주 주말부터… 네, 괜찮아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지금보다 더 많이 줄여야만 했다.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

진은 오랜만에 입은 수영복이 너무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괜히 눈썹이며 뒷목을 매만지던 그는 반신 수영복 위로 저지 한 장을 걸치고 락커룸을 나섰다. 하마터면 바보처럼 안경을 그대로 끼고 갈 뻔해서, 그가 안경을 호다닥 락커 안에 집어넣었다.

수영장으로 나가자 특유의 물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맡는 냄새에 기분이 좀… 이상했다. 진이 주춤거리며 나오자 코너라는 이름의 코치가 반가운 기색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진은 제게로 내밀어진 손을 어색하게 부여잡고 악수했다. 마주 잡은 쪽에서 너무 세게 흔들어서 관절이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아, 전화 받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내가 진짜 팬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아, 네…! 만나 뵙게 돼서 저도 반갑습니다.”

“뭘 또 그렇게 딱딱하게 그래요! 에이, 코치 보조일 같은 거 말고 선수랑 코치로 만나야 되는데, 아쉽네.”

진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건 생소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한 일이라, 이럴 때마다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렉스 선수한테 대충 들었겠지만, 엄청난 교육을 한다기보다는 어린 선수들이니 멘탈 관리에 신경 써주면 돼요. 제가 혼자 보면 가끔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니까.”

“네, 혹시… 주의해야 할 점이라든지, 알아 둬야 할 거 있을까요?”

코치는 잠시 고민하더니, 중요한 걸 놓칠 뻔했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어서 진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영장의 모퉁이, 가장 마지막 레인에 걸터앉아 물장구를 치고 있는 아이 하나가 보였다.

“유소년팀에서 가장 수영 잘하는 아이예요. 이름은 토미 잭슨. 잘 신경 써 줘요. 낯을 많이 가리니까 별 반응이 없어도 너무 당황하지 말고요.”

진은 고개를 푹 숙이곤 휘적휘적 발장구만 치고 있는 아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수영을 잘한다고 하니, 제가 신경 쓸 일이 있을까 싶긴 했다. 딱히… 내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작은 의문은 금방 풀렸다. 서로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토미는 아무 말도 없이 제 할 일만을 했다. 가끔 제 옆으로 누군가 지나가면 조금 움찔하며 길을 비키고, 다른 레인으로 옮겨 다시 수영을 했다.

정말… 수영만 했다.

“선생님, 선생님! 제프리도 선생님처럼 신기록을 세우고 싶대요! 그리고 저도 꼭 세울 거예요!”

“제가 먼저 세울 거예요!”

쉬는 시간, 진은 조잘조잘 말이 많은 아이들을 보며 옅게 웃다가 다시 토미를 힐끗 쳐다봤다. 토미는 저와 마주치는 눈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물 아래로 잠수해 들어갔다.

‘눈이 마주쳐 버렸어…!’

물 아래에서 인상을 잔뜩 찡그리던 아이가 슬며시 수면 위로 올라섰다. 이제 안 보고 있겠지…? 슬쩍 위로 올라오던 토미는 바로 앞에 보이는 진에 화들짝 놀라 코로 물을 들이켰다. 코가 화끈한 느낌에 양손으로 코를 부여잡아야 했다.

“아으…! 내 코…!”

“아, 미안…! 놀랐어?!”

놀란 아이 앞에서 진이 허둥댔다. 작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토미가 슬며시 위를 올려다봤다. 진은 제게로 향하는 새파란 눈동자에 잠시 숨을 멈췄다.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파란 눈이 언젠가 보았던, 또 다른 푸른 눈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젠 별별 거에 다 이러네… 정신 차려, 좀.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진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토미에게 말했다.

“토미, 잠깐 쉬자…!”

“…….”

토미는 다른 곳을 보고 가만 서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여태 계속 훈련만 했잖아. 이제 쉬어도 돼.”

“…….”

아이는 또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울상이라 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약하게 인상을 쓰던 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토미는 다른 레인으로 슬며시 넘어갔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다 끝나고, 그날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토미는 진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진이 조금이라도 다가갈라치면, 토미는 놀란 기색으로 도망갔다. 그 술래잡기 아닌 술래잡기는 몇 번이나 반복됐다. 진은 결국 토미에게 다가가기를 포기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낯을 많이 가린다고 했으니까… 조금씩 친해지면 되지, 뭐.’

훈련이 모두 끝난 시간, 진은 가방을 둘러매고 락커룸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다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는 토미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토미, 너 여기서 뭐 해? 집에 아직 안 갔어?”

“…….”

아이는 무릎 위에 있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진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다가 토미의 밝은 갈색 머리도 조금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

“너… 머리를 다 말리고 나와야지. 요즘 밖에 점점 추워지는데…! 그러다 감기 걸린다?”

“…….”

“안 되겠다, 들어가서 다시 말리고 나오…….”

“토미.”

토미는 제 이름이 들리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진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아이를 부른 여성을 바라봤다. 어머니인 것 같았다. 투피스 회색 정장을 입은 그녀는 귀에서 전화를 떼지 않은 채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데리러왔다고 하잖아! 나도 주말까지 일해야 하는 거 알면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 왜 이렇게 당신만 생각해! 돈은 당신 혼자 벌어?!”

토미는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제 엄마에게 쭈뼛쭈뼛 다가섰다. 두 손을 꼭 맞잡은 아이는 주춤거리며 걷다가, 뒤에 서 있는 진의 눈치를 힐끗 봤다. 진은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에게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잘 가. 또 보자, 토미.’

진이 손을 흔들며 입모양으로 인사하자, 토미가 차에 서둘러 올라탔다. 회색의 자동차가 출발하고, 그 뒷모습을 보던 진도 다시 발을 옮겼다. 얼굴이 잔뜩 굳은 채였다.

***

진 헤니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가 멍하니 들고 있던 햄버거에서는 소스며 양상추가 줄줄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응? 뭐라고 했어…?”

“저번 주 주말에 센터 갔던 거 어땠냐고. 무슨 생각하는데 그래…….”

알렉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진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잔뜩 흘러내린 야채들을 보다 햄버거를 내려놨다. 입맛이 별로 없었다. 진은 옆에 있던 밀크쉐이크를 마시며 말을 돌렸다.

“그냥… 애들이 귀엽더라고. 생각보다 일도 편하고. 소개해 줘서 고마워. 나디아는 왜 안 오지? 요즘 많이 바쁜가봐.”

자꾸 그 파란색 눈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아이의 눈 안에 가득 고여 있던 건 약간의 두려움과 자기방어였다. 진 헤니는 그런 눈빛을 처음 마주한 게 아니었다. 제게 도와 달라 말하던 푸른 눈은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쉐이크의 빨대를 만지작거리던 진이 속으로만 한숨을 삼켰다. 자꾸 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요즘엔 좀 덜했던 감정들이 또 다시 머리와 가슴에 덕지덕지 달라붙고 있었다.

그 작은 계기 하나로도 이렇게 마음이 덜컥였다. 분명히 이제 정말 다 괜찮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머리랑 가슴은 가끔 이렇게 따로 놀아서, 몸의 주인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분명 머리가 시키는 대로 여기까지 잘 와놓고 때때로 가슴언저리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냐면서 자꾸 제 피를 말렸다.

돌아가…? 어딜…? 애초에 내 자리가 아니었던 곳인데, 어딜 돌아간다는 건지…….

피식하는 비웃음이 잇새로 샜다. 생각과 마음은 초단위로 싸워댔고, 진은 가끔 이럴 때마다 자신이 드디어 미친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했다.

“진, 너 요즘 괜찮은 거지?”

“응, 나야 뭐… 항상 괜찮지!”

혼자 고개를 젓고, 피식 웃고. 진은 뭔가 속이 복잡해 보였다. 그런 진을 바라보던 알렉스가 물었고, 진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쉐이크의 빨대를 빨아올렸다. 알렉스는 애쓰고 있는 진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머릿속엔 언젠가의 진 헤니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나… 나 이제 에이든한테 가 봐야 될 것 같아…….

진은 멍한 눈을 한 채 말했다. 검은 눈은 알렉스를 향해 있었지만, 보고 있지 않았다. 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현관으로 갔다. 그는 신발 한 짝만을 신은 채, 현관문을 열려고 했다. 잠들어 있는 게 분명한 진 헤니는 현관을 열지 못했고, 절박한 얼굴로 알렉스를 돌아봤다.

화를 삼켜내듯,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삼켜내듯, 알렉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 헤니가 흐린 눈으로 현관문을 서성이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곤 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 들어가자, 진.

- 안 돼. 엄청… 아파 보였는데, 내가… 그날, 알렉스… 내가 그날 그냥 두고 왔어…….

- 진…….

- 나 이제 가야 돼…! 나, 나 이제 돌아갈래……!

그때, 진의 표정과 목소리는 절박했다. 안 된다고 데리고 들어오려 하면,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정해진 순서와도 같았다. 진은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엔 다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었다. 지난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1년 반 전의 진 헤니였다. 잠시 같이 지내던 때, 그때를 떠올리던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은 이제 잠든 채 서성이진 않았지만, 깨있을 때에도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헤매는 것 같았다. 괜찮게 지내나 싶었는데, 오늘 상태를 보니 또 다시 걱정이 깊어졌다.

“나디아! 여기야…!”

한숨을 쉬던 알렉스는 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는 굉장히 짜증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요즘 들어 짜증이 아주 많은 걸 보니, 정말 바쁘긴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은색 수트를 아래위로 갖춰 입은 채였다. 구불거리는 회갈색의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모습은 그녀가 퇴근한 지 얼마 안 됐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옷을 편안한 걸로 갈아입을 새도 없이 바로 온 거였다.

진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그녀를 보다 옅게 미소 지었다. 나디아는 저 차림을 ‘작업복’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진이 보기엔 그 ‘작업복’이 그녀와 가장 잘 어울렸다. 진과 키가 비슷한 나디아는 검은 수트와 아주 잘 어울렸다. 진이 생각하기에 그녀는 수트를 입고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멋졌다.

“뭘 그렇게 봐, 진. 누나 뚫어진다.”

“아니, 그냥… 그러고 보는 게 오랜만이라서.”

진은 왠지 모르게 제가 다 뿌듯한 느낌이라 자꾸 웃음이 났다. 나디아는 그 모습을 보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귀여운 자식 같으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옆에서도 느껴지는 시선에 알렉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또 뭘 쳐다 봐. 눈깔 안 돌려?! 눈으로 그렇게 말하자 알렉스가 헛웃음을 쳤다.

“그래, 나도 알아. 너무 멋있어서 웃음이 나지? 이해해.”

“그래… 그렇다고 하자…….”

알렉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디아는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진을 보며 귀에 꽂혀 있던 인이어를 제거했다. 그녀의 입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알렉스, 내가 예전에 나디아가 사람 매치는 걸 봤었는데… 나디아한테 절대 까불면 안 돼.”

“알겠어, 참고할게.”

장난기 가득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오갔다. 둘이서 그러거나 말거나 나디아는 진이 먹다 남긴 감자튀김을 주워 먹고 있었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씨…….”

“……?”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그녀는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감자튀김을 주워 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그녀는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때 오프라고 했죠. 아, 이 스케줄표 뭔데?!”

[ 행사가 워낙 커서 인원 추가 투입해야 돼. 너는 사정 잘 아는 애가 왜 그러냐?! ]

“나 저번 달에 휴일 다 반납했잖아요, 팀장님. 이거 진짜 너무해…!”

[ 오프날 뛰는 거니까 내가 돈 두 배로 쳐 줄게, 됐지?! 그리고 너… LA 가느라 휴가 말도 안 되게 오래 쓴 거, 그거 내가 봐준 거 잊지 마라. ]

통화는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그녀는 쉬게 해 달라 몇 번을 말하더니, 결국 설득이 되지 않았는지 체념한 낯으로 전화를 끊었다. 얼굴이 울상이었다. 내 소중한 오프, 내 소중한 휴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케줄표를 쳐다봤다.

「경호 인원 추가 배치 : GX World Wide Financial Conference in NY - 나디아 놀즈」

“아, 왜 행사를 다 이렇게 몰아서 하고 지랄이야…!”

그녀의 말대로, 능력 있는 경호원인 나디아 놀즈가 추가 배치를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시각, 어느 호화로운 호텔. 같은 행사에 참여할 또 다른 누군가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건지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그의 손에 있는 흰색의 약병이 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네, 저 방금 뉴욕 도착했어요. 지금 호텔이고요.”

에이든 테일러가 제시 제퍼슨에게 말했다. 지금, 뉴욕에 도착했노라고.

***

행사 당일, 나디아 놀즈는 궁시렁거리며 인이어를 꼈다. 행사가 크다더니, 정말 크긴 컸다. 원래 인원으로는 좀 커버가 힘들 정도로. 뭔 행사길래 기자들도 많고… 뭔데 그러는 거지? 그녀는 허리의 벨트에 권총을 집어넣고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그리곤 ID 카드를 찾다가 낭패란 얼굴을 했다. 아씨, 또 놓고 왔네. 없으면 몇몇 구역은 아예 통행이 안 되는데…….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 나디아, 무슨 일이야? ]

“어, 진… 나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 나 집에서 ID 카드 좀 갖다 줘. 여기가 해럴드스퀘어 근처인데, 혹시 괜찮으면 내가 주소 찍어 보내 줄게.”

[ 응, 괜찮아. 주소 보내 줘! ]

“미안, 야… 지금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

진짜 미안. 그녀가 몇 번이나 사과하자, 진은 이런 게 백수 친구의 장점 아니겠냐며 웃으며 답했다. 그가 곧 가져다준다며 전화를 끊었고, 나디아는 약간 멋쩍은 얼굴로 주소를 찍어 보냈다. 나중에 맛난 거라도 사 맥여야지…. 갖다 줄 때까지는 공동 구역에서 기다려야겠다.

“나디아 놀즈, 일단… 투입이요.”

[ H홀에 커버 인원이 제일 많이 필요하니까, 나디아는 그쪽으로 붙어. ]

“팀장, 나 지금 ID 카드 없어서 H홀은 못 들어가는데…….”

[ 넌 진짜 자꾸 왜 그러냐…? ]

몰라, 나 바본가 봐. 껄껄 웃으며 말하던 그녀는 입구에 등장한 사람 하나에 웃음을 멈췄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게, 여기 있었다. 나디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 정신을 차렸다.

“아, 나… 이런 젠장,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시트에서 저 새끼 이름 못 봤는데?!”

나디아는 다시 핸드폰을 급히 찾았다. 진에게 전화를 거는 손이 급했다. 진은 뭘 하는 건지 전화를 받지를 않아서,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대신 메시지창을 서둘러 열었다. 손가락이 바빴다.

「진, 그냥 내가 갖ㅣ러 갈 테니ㄲ ㅏ 갖고 오지 마」

「안 갖다 줘도 돼!」

갖고 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한 열 개 정도 보낸 그녀였지만 답장이 없었다. 나디아 놀즈는 낭패란 표정으로 홀의 입구를 바라봤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진짜 에이든 테일러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 씨… 얘는 왜 전화를 안 받아?!”

망했단 소리였다.

***

속이 안 좋았다. 그때처럼 코피는 안 났지만 컨디션은 훨씬 별로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희게 질린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하든 말든, 그는 컨퍼런스룸에 앉아 곧 시작될 토론회를 기다렸다.

“제시 제퍼슨이 안 오고 그쪽이 왔네요? 쓸데없이.”

“…….”

눈썹과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던 에이든은 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상태가 거지같은데, 이런 때에 대체 어떤 새끼가 시비를 걸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와서 뭐 얘기는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컨퍼런스에 오면 뭐 해요. 듣는 걸 이해를 못하는 거 아니에요?”

“하…….”

헨리 차일드는 실실 쪼개고 있었다. 제시 제퍼슨이 제일 싫다고 말했던 그 사람. 그는 어떻게 보면 에이든 테일러와 아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상류층 백인 남성에, 날 때부터 쥐고 태어난 게 많으니까.

에이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제게 주어진 것들에 아주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거였다. 그리고 둘 다 대외적인 이미지는 그다지 똑똑하지 못했지만, 에이든과 다르게 이쪽은 진짜 바보였다. 헨리 차일드는 돈만 믿고 여기저기 사업을 벌이는 등신새끼, 딱 그거였다.

그런 주제에 언제나 제시 제퍼슨을 라이벌처럼 두고 언론 플레이를 했다. 라이벌이라니. 제시에겐 그런 게 없었다. 블록체인 업계에서 제시 제퍼슨의 위치는 독보적이었으니까. 뭣 모르는 에이든이 봐도 그녀는 컴퓨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는 엔지니어였고, 퍼포먼스가 공격적인 실무자임과 동시에 시장 전체를 쥐고 흔들 줄 아는 오너였다.

떫은 표정으로 헨리 차일드를 보던 에이든이 백치 같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저는 블록체인 같은 거 하나도 몰라서 그쪽이랑은 말이 안 통하니까 말 걸지 마시죠.”

“…….”

“아닌가, 얘기가 잘 통할 수도 있지. 그쪽도 별로 머리에 든 게 없어 보이는데.”

주변에서 헨리 차일드와 함께 서 있던 몇몇이 헛기침을 했다. 공개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데 면역이 없는 백인 남자는 잠시 자신이 들은 소리를 정리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꼬라지를 보며 에이든이 혀를 찼다. 수준이 안 맞아서 말하기 싫은 건 이쪽이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고개를 작게 저으며 자리를 옮겼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헨리 차일드가 어금니를 물었다. 얼굴 좀 반반하다고 헐리웃에서 물고 빨아 주니까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 별 싸구려 같은 짓거리나 하고 돌아다니던 새끼가……. 이제 다 망한 ‘테일러’ 주제에. 헨리 차일드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토론회가 곧 시작될 모양이었다. 에이든과 비슷한 푸른색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가 작게 기침을 하는 에이든을 보며 삐뚤게 웃었다.

사회자가 토론회의 시작을 알리고, 에이든은 자리에서 심드렁한 낯으로 여러 얘기들을 흘려보냈다. 다들 알아서 그를 잘 건너뛰고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왼손에 묶인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에이든은 제게로 향하는 질문 하나에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저희 회사와 경쟁 구도이니만큼, 이번에 새롭게 개발한 저희 플랫폼에 대해 의견을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아직 테스트 단계긴 하지만, 어떠셨나요? 설마… 안 써 보신 건 아니죠?”

“…….”

“어쨌든 다 같이 상생하는 구조 아니겠습니까? 업계를 이끌어가는 회사의 전문적인 견해를 좀 구하고 싶네요.”

헨리 차일드는 대놓고 그에게 망신을 주고 싶은 것 같았다. ‘전문적인’을 유난히 강조해서 말하는 꼬라지만 봐도 딱 그랬다. 에이든은 제시 제퍼슨과 그녀의 사무실에 있을 흰색 약을 떠올렸다. 뭐, 제시한테 받은 것도 있고… 맘대로 지랄하라 했으니까. 그가 아까와 비슷한 얼굴로, 멍청하게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네, 제가 잘 모르긴 하지만…….”

“…….”

“돈이 너무 많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으신 건 아닌지, 뭐… 그런 생각은 드네요. 근데 사실 돈도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 않아요? 우리 집 망했는데도 나보다 돈 없는 것 같던데.”

잘 모른다는 말에 피식 웃던 헨리 차일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든 테일러가 말을 이었다. 정말 의아하다는 목소리였다.

“후발 주자로 나온 플랫폼이 확장성도, 상호운용성도 형편없는데 뭘 개발했단 건지도 모르겠고. 개발돼 있는 다른 거 따라하면 뭐 달라지나… 업그레이드할 생각을 해야지. 돈을 꼴아 박으면 뭐 해요? 1세대보다 못한데.”

“…….”

“거래 수수료는 평균보다 높게 책정돼 있는데, 다른 토큰은 쓰지도 못하잖아요. 사용자들이 뭘 보고 그쪽 플랫폼으로 옮겨가야 되는 건지 경쟁력을 하나도 모르겠네요. 머리가 달렸는데, 어쩌다 그딴 걸 만들었지?”

별 쓰레기 같은 거 만들어 놓고 우리 회사랑 경쟁 구도는 무슨. 그 뒤로 넓은 홀엔 정적이 가득했다. 다들 난감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기 바빴고, 에이든 테일러만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 제시 제퍼슨한테 뭐 열등감 있어요? 애초에 비교가 돼요? 급이 서로… 안 맞지 않나?”

“이게 무슨…!”

“저는 잘 몰라서 여기까지밖에 말을 못하겠네요. 저보다 유식하신 분들이 더 말해 주실 거예요.”

뭣 모르는 제 눈에도 빤하다는 소리였다. 에이든 테일러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이크의 버튼을 눌러 껐다. 그는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헨리 차일드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만하면 됐냐는 눈빛으로. 푸른 눈이 근래에는 잘 볼 수 없었던 사나움을 품고 있었다. 에이든이 제 앞의 백인 남자에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병신.’

헨리 차일드는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고 어금니를 물었다. 에이든은 그 하찮은 꼬라지를 보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에이든 테일러의 기본 생각 구조는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였고, 제시에게 가장 필요한 걸 받았으니 그만큼 돌려줄 의향이 있었다. 에이든은 어떤 부분에선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

진은 나디아의 ID 카드와 샌드위치 박스를 들고 회의장 근처를 서성였다. 잘 찾아온 거 맞는데… 나디아는 어디 있지? 고개를 빼고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진은 별안간 뒷목이 잡혀 끌려가야 했다.

“나, 나디아…?!”

“야, 너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이거 들고 오느라…!”

진은 조금 억울해 보였다. 나디아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ID 카드를 뺏듯이 가져갔다. 아직 뒷목을 쥔 손은 놓지 않은 채라, 진이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나디아, 왜 그러는데…!”

“너 빨리 가!”

“나 너랑 같이 저녁 먹으려고 이것도 가져왔는데…?!”

진이 손에 있는 샌드위치 박스를 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끼니를 잘 못 챙겨 먹고 있을 것 같아서, 제가 일하는 카페에서 부랴부랴 만들어 온 거였다.

“안 돼, 얼른 가! 여긴 얼씬도 하지 마…!”

나디아는 빨리 가라며 진의 등을 밀었다. ID 카드도 가져다주고, 심지어 저녁까지 챙겨다 준 놈을 이렇게 쫓아내긴 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랑 절대 마주치면 안 되니까.

“알겠어…! 갈게, 가면 되잖아…!”

“얼른 뛰어가. 여기서 십 초 센다. 빨리 십 초 안에 저기 신호등까지 뛰어…!”

그녀가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던 진이 울상을 했다. 나디아, 대체 저기까지 십 초 안에 어떻게 가. 나는 달리기를 못한단 말이야…! 그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갈게, 그럼…. 이거 가지고 가서 챙겨 먹어.”

“진, 고마워.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줄게. 아씨, 내가 지금… 아냐, 얼른 가.”

나디아는 죄책감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얼른 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진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샌드위치 박스 두 개를 건넸다. 그리곤 뒤돌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뛰었다. 뛴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그의 최선이었다.

진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나디아가 등을 돌려 메인홀로 향했다. 저 속도 없이 착한 게… 에휴, 시발. 한숨을 쉬던 그녀는 제 옆을 스쳐지나가는 익숙한 누군가에 발을 멈췄다. 에이든 테일러였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성큼성큼 걷는 에이든을 봤다가, 아직도 거북이마냥 얼마 가지도 못한 진 헤니를 바라봤다. 저건 왜 저렇게 느려 터졌어?! 두 사람을 초조하게 번갈아 보던 나디아가 눈을 꾹 감더니 에이든에게로 향했다.

“에, 에이든 테일러 씨?”

“……?”

에이든은 갑자기 저를 부르는 누군가에 걸음을 멈췄다. 나디아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제 목소리에 욕을 씹다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표정을 관리했다. 아씨, 그냥 때려서 기절시켜?! 아냐, 그건 안 되겠지…? 그녀가 에이든 테일러의 앞을 막아섰다.

“경호 인원 없이 행사장 밖으로 나가는 건 제한돼 있습니다.”

“…….”

“행사 참석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유명인사인 경우, 조금… 특별 관리 중입니다.”

구라였다. 나디아 놀즈는 지금 시간을 벌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최대한 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뭔 개소리냐는 표정의 에이든 테일러 때문에 긴장이 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었다.

나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진을 힐끗 쳐다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뭔가 수상쩍은 그녀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옮기려했다. 하지만 다시 제 앞을 막아오는 움직임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런 안내를 받은 적이 없는데…….”

“그래서 지, 지금 안내해 드리잖아요?”

그녀가 다시 한번 진이 서 있는 곳을 쳐다봤다.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꾸 제 뒤를 힐끗거리는 눈빛에 뒤를 돌아보려 했다. 진은 이제 막 신호등을 건너고 있었다. 나디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다 급히 말을 덧붙였다.

“지금! 지금 빨리 안으로 돌아가시죠?!”

뒤를 돌아보려던 에이든은 갑자기 크게 뱉어진 소리에 다시 나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뭔가를 살피듯 나디아를 보다 곧바로 뒤를 돌아 걸었다. 이건 지금… 제게서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였다.

“에이든 테,”

“내가 그렇게 바보가 아니라서.”

나디아는 뒤따라가 그를 잡으려 했지만, 살벌한 목소리며 눈빛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그녀가 뭐라 말을 덧붙여 볼 새도 없이 에이든 테일러가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큰 보폭으로 걷는 뒷모습을 보며 나디아가 샌드위치 박스를 꾸욱 눌러 쥐었다. 아, 씨… 쟤는 왜 또 걸음이 저렇게 빨라?!

“아, 제발… 진, 좀… 빨리 좀 걸어라…!”

골목에서 진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에이든 테일러가 저 속도로 걷는다면 곧 마주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나디아는 타들어가는 속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절대 마주치면 안 됐다. 저 상태의 에이든 테일러는… 진에게 쥐약과도 같을 테니까.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마주했던 에이든 테일러는 아파 보였다. 그것도 조금 많이. 나디아 놀즈는 2년 전과는 다른 그의 모습에 잠시 움찔해야 했다. 처음엔 아예 다른 사람인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녀가 보기에 2년 전의 그는 굉장히 날카롭고 언제나 공격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에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랐다.

그는 뭔가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삶에 아무 감흥도, 아무 목적도 없는 사람처럼 무감한 얼굴이었다. 살이 더 빠져서 이목구비는 더 날카로워졌는데… 가까이서 보면 날이 다 무뎌져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가 아파서 당장 돌아가 봐야 된다던 진이 떠올랐다. 나디아는 제발 진이 아픈 에이든 테일러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에이든 테일러는 무언가를 찾듯이 움직였다. 성큼성큼 걷고 있는 그는 양쪽 길과 가게 이곳저곳을 살피며 걸었다. 아무래도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저와 마주쳤던 경호원은 제 뒤를 힐끔거리며 어떻게든 제 시선을 잡아 두려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뒤를 돌아 나가지 못하게 한 거겠지. 그는 왠진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찾아야 한다는 기분이었으니까.

그의 푸른 눈이 길거리의 사람들과 가게를 하나하나 훑었다. 농구공을 들고 가고 있는 흑인 두 명, 밖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베이글 가게 하나, 핸드폰을 보면서 걷는 백인 여성. 걸음이 계속 빨라졌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느 길로 가는지도 모르고 일단 빠르게 걸었다. 그의 눈동자도, 여기저기를 살피느라 움직이는 고개도 바빴다.

이제 사거리였다. 에이든은 작게 인상을 쓰며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발이 주춤거리며 이후의 경로를 골라내고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왼쪽 손목의 팔찌를 매만지다, 건너편 골목에 선 누군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멈칫했던 그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곧바로 건너려던 에이든은 클락션을 울리며 지나가는 차에 몸을 뒤로 물렀다. 그 와중에도 푸른 눈은 한곳에 틀어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진……?”

누군가와 아주 닮은 뒷모습이 제 앞에 있었으니까.

***

해럴드스퀘어 근처에서 한참을 내려와, 진 헤니는 타임스퀘어 중앙을 걷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나디아는 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한 스무 통을 보낸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진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그가 새로 온 메시지 하나를 열었다.

「갑자기 미안해요! 혹시 내일 잠깐 나와 줄 수 있나 해서. 유소년부 경기 있거든요. 아침 9시부터예요. - 코너 코치님」

진은 잠시 자리에 멈춰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네! 괜찮아요. 그럼 8시쯤 센터에 가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낸 뒤, 그의 머리엔 자연스럽게 한 아이가 떠올랐다. 움츠러들어 있던 작은 어깨와 뒷모습도 함께. 진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

금요일 저녁의 타임스퀘어는 언제나처럼 사람으로 가득했다. 커다란 빌딩숲 사이,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아주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여행을 왔는데 구글맵이 말썽인 것 같았다.

뉴욕의 모든 건 빠르고, 화려했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랐고, 커다란 전광판에 틀어진 광고들이 요란하게도 번쩍였다. 그 중앙에 선 자신만 모든 게 느릿느릿한 느낌이었다. 분명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 제 시간만 이 사람들과 다르게 가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

분명 제가 듣기로는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엉터리인 것 같았다. 모든 걸 걸어 사랑한 만큼 후련하기는커녕 여기저기에 지독하게 흉이 졌다. 다 나아 피가 안 날 뿐이지, 결국 제 몸에 박힌 채 없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 진 헤니는 속이 홧홧할 때마다 마음속에 불이 난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원망스러웠고, 너무 많이 미웠다. 불쑥불쑥 화가 났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불씨는 아직도 꺼지질 못해서, 이렇게 작은 바람만 불어도 불길이 번졌다.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은 그가 모르는 새에 마음을 조금씩 태워 재를 만들고 있었다.

번잡하고 분주한 사람들 가운데, 진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기를 잠시, 진은 누군가 제 팔을 잡아오는 느낌에 뒤를 돌았다.

“저기.”

진은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푸른 눈동자에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췄다.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은 여자는 진이 너무 놀란 것 같아 서둘러 사과를 했다.

“핸드폰 떨어져서요…! 몇 번 불렀는데 못 듣는 것 같아서 옷을 잡아야 했어요.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멈춰 있던 진은 그제야 고개를 털며 인사를 했다. 제게 건네진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체 왜 자꾸 이렇게 놀라고 그러는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세상에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그쪽도요.”

제 자신이 한심해서 피식 웃던 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임스퀘어에서 사람들을 헤치며 뛰고 있는 사람은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히든 말든 한곳만 보고 걸음을 옮겼다.

“진!”

그의 목소리는 주변의 소음에 묻혀 금세 사라졌다. 조금 더 서둘러 발을 옮기던 그는 갑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관광객 무리 하나에 발을 멈췄다. 진을 놓칠까 봐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고개를 빼고 있었다.

“진!!”

답답함과 초조함에 어금니를 물던 그가 결국 사람들을 가르고 뛰었다. 거칠게 밀쳐진 사람들이 그의 뒤에서 욕지기를 뱉었지만 에이든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찌릿한 통증을 호소하는 심장도,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쫓던 뒷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제 막 손 뻗으면 닿을 거리.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뛰던 에이든이 남자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에이든의 푸른 눈에 앞에 선 이의 모습이 비쳤다. 검은 눈, 검은 머리. 에이든 테일러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곧, 멈출 수도 있을 정도로.

***

심장이 빠르게 뛰는 느낌은, 진정 살아있다는 기분과 곧 죽을 거란 느낌을 함께 선사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크게 뜨인 검은 눈은 많이 놀라 보였다. 에이든은 진 헤니에게 아무 말도 못한 채, 입만 달싹였다.

진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그는 제 팔을 잡고 있는 에이든의 손을 떼어내려 몸을 뒤틀었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그의 손목을 쥐어뜯고 있었다. 흔들리는 검은 눈 안으로 두려움과 공포가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

진은 필사적으로 에이든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작은 소동에 힐끗거리며 그 둘을 지나쳤다.

에이든의 머릿속은 희게 휘발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을 만나게 되면, 정말로 찾게 되면……. 언제나 생각해왔던 일이지만, 막상 벌어지고 나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제게서 벗어나려는 진의 팔을 조금 더 강하게 쥐는 것뿐이었다.

“진, 나…….”

“그냥… 그냥 나 이제 놔 줘, 에이든…! 제발!”

검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 헤니가 울며 소리쳤다. 이젠 제발 자신을 놔 달라고. 에이든은 잠시 말을 멈췄다. 많이 보고 싶었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다 바로잡고 싶어. 모든 말은 그의 목구멍 뒤로 넘겨졌다. 푸른 눈 안에 절망적인 진 헤니의 얼굴이 비쳤다. 그 얼굴을 담고 있는 푸른 눈 역시 절망적이었다.

“그냥 이제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살면 안 돼…? 없던 사람처럼 살면 되잖아!”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찾지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지나쳐가는 사이. 진 헤니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다 말했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이든은 절박한 얼굴로 진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진, 그건… 안 돼. 그것만 빼고 내가 다 할 수 있어. 진, 나 뭐든 할 수 있어…! 우리 잠깐 얘기를…….”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

진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흘러 그의 볼을 적셨다. 진은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너 없이 편하게 살고 싶어! 아무렇지도 않게! 나 이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나 그냥 그렇게 지내게 해 줘, 에이든…!”

제발. 그렇게 덧붙여진 말에 에이든의 눈이 흔들렸다. 저 없이 편하게 살게 해 달란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의 왼팔을 쥐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뜯어내려는 손길에 생채기가 난 제 손, 그 손을 빤히 보던 에이든이 시선을 내렸다.

“…….”

검은 시계가 보였다. 진 헤니의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는 건 시계였다. 모든 게 다 가짜라는 증거.

에이든은 어금니를 물며 눈을 감았다. 그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입에서 허탈함이 터졌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눈을 꾹 감고 있던 에이든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사방에서 바삐 걷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 섰다. 타임스퀘어의 시계 역시 초침을 멈췄다.

“이건 좀… 서운하네……. 진, 꿈에서까지 나한테서 도망가고 싶어?”

“…….”

“그래도 조금은… 행복한 꿈을 꾸게 해 줘야지….”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팔을 더 강하게 쥐며 말했다. 아무리 가짜라도, 보내 줄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에이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 찾지 마. 그냥 다 없던 것처럼 살아…! 그 이상한 약도 먹지 말고, 그냥 잘 지내면 되잖아, 에이든…!”

“진, 그게 뭐가 잘 지내는 거야.”

매일매일 진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며 사는 게 훨씬 더 ‘삶’과 가까웠다. 진이 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시체처럼 지내란 소리였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살아내라는 소리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이미 죽은 채로 많은 날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짧은 평생 동안 누군가의 대체재로 키워졌고, ‘테일러’라는 상표가 달린 물건처럼 자라났다.

그들의 기준에 흠집이 난 상품은 주인 아닌 주인에 의해 여러 번 고쳐져야 했다. 그리고 고쳐질수록 에이든 테일러는 망가져갔다. 그게 좆같아서 아무 곳이나 헤매며 살았다. 그의 인생은 딱 그것뿐이었다.

숨 쉬지만 호흡하지 않는 날들 중, 진짜 ‘에이든 테일러’로 살았던 날은 몇 되지 않았다. 진 헤니만이 진짜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런 진마저 자신을 잊는다면, 그거야말로 완전한 죽음이었다.

에이든이 인상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렸다. 젖어 있는 진의 뺨 위로 에이든의 손이 자리했다. 에이든은 눈물을 가만 닦아 주며 말했다.

“걱정해 주는 거면… 약 먹은 보람은 있네.”

“너는… 어떻게 바뀐 게 하나도 없어…!”

진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오지 말라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울며 에이든에게 말했다. 에이든은 엉엉 우는 진을 품에 안았다.

“맞아, 진… 나는 하나도 안 변했어.”

“…….”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변함없이 널 많이 사랑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이든의 입에서 기침이 터졌다. 그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샜다. 진에게 짧게 입 맞출 시간조차 없이, 그의 꿈이 끝나가고 있었다.

***

에이든 테일러가 꿈에서 깨어난 늦은 밤, 그는 전화기 건너편의 상대방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늘 오후 타임스퀘어에서 봤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인 줄 알고 잡아 세웠던 그 사람은 진이 아니었다. 그건 못 견디게 절망적이어서, 에이든은 다시 알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보고 싶었으니까.

[ 아, 내가 그 새끼 얼굴을 직접 봤어야 했는데! 너무 아깝네. 다음에 또 그럴 때는 녹화 좀 해 주면 안 되니? ]

“…….”

한편, 건너편에서는 크게 웃음소리가 울리는 중이었다. 제시 제퍼슨이었다. 컨퍼런스에서 있던 일을 들은 모양이었다. 에이든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귓가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던 터라, 그의 표정이 조금 애매해지고 있었다. 그런 에이든의 앞으로 산처럼 쌓인 피 묻은 휴지가 보였다.

[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넌 원래 애가 그렇게 내숭이 심하니? ]

“…….”

[ 내가 쭉 듣고 나니까 여태 혼자 일한 게 좀 억울해지더라고. ]

이건 또 무슨 대화의 흐름인지 알 수 없었다. 에이든은 인상을 작게 찌푸리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골이 울려 죽겠는데, 대화가 향하는 곳이 좀 이상했다. 예감이 좋질 않았다.

“끊어요.”

[ 너……. ]

제시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통화는 종료됐다. 약에 대한 소소한 대가지불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좀 꼬여가고 있었다. 혀를 차던 에이든 테일러는 피칠갑이 된 손으로 휴지더미를 모아 쥐었다.

화장실로 향한 그는 휴지통에 피 묻은 것들을 던져 넣고 세면대 앞에 섰다. 물을 틀어 손을 씻자 흰색의 세면대에 붉은 물길이 생기고 있었다. 손이 깨끗해진 걸 확인한 그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꼴이 가관이었다.

“이건 너무… 그로테스크한데…….”

에이든은 정말 재미있다는 목소리로 말하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손을 들어 코와 턱, 목까지 이어져 있는 핏자국을 닦았다. 적당히 잘 닦인 걸 확인하곤 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흰색의 셔츠는 죄다 붉게 물들어, 다신 입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는 세면대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뱉어냈다. 그리곤 눈을 떴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많이 지쳐 보였다. 이제 좀 그만하고 싶다고, 뭐든. 푸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낯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푸른 눈은 조금 더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서 있던 그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에이든은 핸드폰을 들어, 1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같이 전화를 했던 번호 하나를 찾았다. 그리곤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오랜만에 웬일이냐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조금 경박스러운 목소리가 겉치레 같은 인사를 끝내고 바로 물었다.

[ 또 그 사람 찾는 거예요? ]

“뉴욕이랑 뉴저지 쪽을 다시 찾아 봤으면 해서.”

[ 대단하네. 그럼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을 연결시켜 줄게요. ]

통화는 간단했고, 빠르게 끊겼다. 에이든 테일러는 침대 옆 협탁에서 엽서 하나를 주워들며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이곳에서 진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고. 그렇다면 찾아야했다.

에이든 테일러가 들고 있던 엽서, 그 위로 검붉은 피 한 방울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제 피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서 도망쳐, 가짜라도 가져보려 발버둥치는 것. 그것에 대한 대가 같았다. 에이든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번엔 꼭 찾고 싶다고. 정말로 제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 발악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수영장 안은 곧 시작될 경기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어린 선수들이지만 다들 욕심껏 몸을 풀고, 부모님과 대화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어수선한 말소리가 돔 안을 채우고, 음향을 체크하는 건지 스피커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분주했고, 생기가 넘쳤다.

진은 경기장의 열띤 분위기에 웃다가, 발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서 다친 건지……. 아침에 보니 발이 무언가의 쓸린 상처로 가득했다. 분명 다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이상했다.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쉬던 진이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토미였다. 코치님이랑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왜 혼자 있지? 의아한 낯으로 토미에게 다가가던 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토미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진은 잔뜩 얼어붙어 있는 아이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이는 긴장이 많이 되는 건지 두 손을 꾹꾹 주무르고 있었다. 토미는 제게 다가온 진을 보며 흠칫 어깨를 떨었다.

“토미, 부모님은 어디 계셔? 스트레칭은 잘 했어?”

“…….”

환히 웃으며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냥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앉아 있을 뿐이었다. 토미를 살피던 진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 겁먹은 푸른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긴장되는구나? 에이, 긴장하지 마. 열심히 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

“저번 주에도 열심히 훈련했잖아. 선생님이 다 봤는데…?! 그럼 어떤 결과든 다 괜찮아.”

진이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혹시 몸에 손대는 걸 안 좋아할까 싶어, 그가 슬쩍 아이의 눈치를 봤다. 아이는 제게 다가오는 손에도 입술을 꾹 물고 가만 앉아 있었다. 피하지는 않는 모습에 진이 다정하게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희게 질린 손이 생각보다 더 차가워서 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아이의 손끝은 새파랗게, 얼핏 보면 보랏빛처럼 차게 질려 있었다. 긴장으로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이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끝을 덮어 쥐며 말했다.

“괜찮아, 토미. 전부 다…. 정말이야.”

“…….”

커다란 손이 아이의 작은 손을 한참이나 품고 있었다. 그의 온기를 나눠 주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라고, 조금이라도 아이의 손끝이 제 색을 찾으라고.

[ 유소년부 50m 접영, 선수 대기 바랍니다. ]

경기가 곧 시작될 모양인지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토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진에게서 제 손을 빼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주섬주섬 수경과 수영모를 챙겨 스타트라인으로 향했다.

“토미, 선생님이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게…!”

“…….”

진이 아이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제 위치로 향했다. 의기소침한 뒷모습을 보며 진이 한숨을 쉬었다.

출발신호가 울리고, 이윽고 경기가 시작됐다.

***

진은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버저가 울리자마자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태 초조하게 경기를 보던 그가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1위 : 3번 레인, 토미 잭슨」

활짝 웃던 진은 혹시 다른 아이들이 상처 받을까 싶어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너무 환히 웃어 버려 조금 머쓱했다. 진은 괜히 콧등을 긁적이다 힐끗 토미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제 조금 마음을 놓았으려나 싶어서.

“……?”

기쁘게 웃고 있을 거란 생각과는 다르게 토미의 표정은 아까보다 좋지 않았다. 아이는 이제 얼굴과 입술까지 보랏빛을 띠려 했다. 전광판 속에서 제 이름을 확인한 푸른 눈이 크게 뜨이고, 슬픈 표정의 토미가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떨궜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진이 서둘러 아이에게로 향했다. 아까 전부터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였는데, 경기 도중에 몸이 아파졌다거나… 그런 걸지도 몰랐다. 바보처럼 아이 상태 하나 제대로 판단을 못하고 경기에 내보낸 것 같아 진의 마음이 급해졌다.

“토미…!”

“…….”

토미에게 도착한 진이 아이를 꼼꼼히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토미는 정말 곧 울 것만 같았다. 푸른 눈 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를 안아 들려 했다.

“토미, 어디 아픈 거면 지금 빨리 처치실에…….”

“아, 아니에요….”

토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이는 바닥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진을 지나쳐가려던 토미는 갑자기 달랑 들려 올라가는 몸에 눈을 크게 떴다.

“아니야, 처치실에 가는 게 낫겠어.”

“아, 안 가도 되는데…! 진짠데…!”

진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아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아이가 됐다고 하거나 말거나, 진의 표정은 단호했다. 아이를 한쪽 어깨에 짊어진 그는 처지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 헤니는 여덟 살짜리 남자아이가 무겁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처치실에 도착한 진이 아이를 침대에 조심히 앉혀놓고, 물이며 따뜻한 핫팩 따위를 찾기 시작했다. 나름 철저한 선생님인 척하려 노력 중이었지만, 중간중간 서랍에서 물건이 우르르 떨어져서 진이 어깨를 움츠렸다. 단호한 코치 역할은 약 십 초 만에 강제 종료되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다 떨어졌네. 이거 어디 있던 거더라…….”

“…….”

허둥대던 진의 얼굴 위로 파스 뭉치가 떨어졌다. 진은 콧등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잠시 코를 감싸 쥐었다. 눈물이 찔끔 맺힐 만큼 아파서 그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끙하는 소리를 속으로만 삼키고 있던 그가 슬며시 눈을 떠 토미를 바라봤다.

“…….”

“…….”

대체 뭐 하고 있냐는 눈빛이었다. 토미는 약하게 인상을 찡그리곤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진은 그런 아이의 눈치를 보다, 그저 멋쩍게 웃어 보였다.

“토미, 일단 음료수부터 마셔. 이거 찜질용 팩은 시간이 좀 지나면 따뜻해질 거야. 아까부터 입술이랑 손톱이랑… 너무 파랗게 질려 있어서…….”

“…….”

토미는 제게 내밀어진 스포츠음료를 받아들곤 목을 축였다. 진은 옅게 웃으며 찜질용 팩의 코드를 꽂고 온도를 조절했다. 그는 아이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준 뒤 그 안으로 따뜻한 팩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밝게 웃으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경기 들어가기 전엔 엄청 긴장하는 것 같더니… 거 봐,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었지?”

“…….”

“사실 선생님은 걱정 하나도 안 했어. 토미 열심히 한 거 다 아니까. 열심히 한 만큼 결과도 너무 좋아서 다행이다.”

아이는 1등을 해도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기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슬퍼 보였다. 아이의 앞에 작은 스툴을 끌고 와 앉은 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토미, 오늘 무슨 일 있니…?”

“…….”

“오늘 경기에서 뭐가 마음에 안 들었다거나…….”

토미는 오늘 경기에서 1초나 기록을 당겼다. 이전 기록보다 무려 1초를 더 당기는 일은 성인 선수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아이가 열심히 했다는 말이었고, 절박하게 경기에 임했단 소리였다. 최선을 다했는데, 뭐 때문에 슬픈 건지 알 수가 없어 진의 걱정이 깊어졌다.

토미는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병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기록이 좋은데… 그럼 다음에 또 기록을 당겨야 되니까…….”

“……?”

“이번에 많이 당기면… 다음에 더 많이 잘해야 되잖아요…….”

근데 더 잘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덧붙여진 말에 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는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엄마아빠가… 라이벌은 항상 자기 자신이니까, 무조건 이전 기록보다 좋아야 된다고 하셨어요…. 안 그러면 열심히 한 게 아니랬어요…….”

토미는 음료수병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다가, 아무 말도 없는 진을 힐끗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검은 눈이 바닥을 향한 채 올라오지 않았다. 가만 앉아 있던 진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라이벌이 자기 자신은 맞는데… 해석이 조금… 특이하시네…….”

“……?”

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토미에게 말했다. 그리곤 아이의 밝은 갈색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이불 안에 있는 찜질용 팩과,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손바닥의 따뜻함에 옅게 웃었다. 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라 아이의 경계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기록이 거의 다 신기록이죠…? 엄마가 그때 선생님이 보조 코치인 거 아시고 많이 배워 오라고 했어요. 운동선수가 신기록 하나쯤은 있어야 된다고…….”

“…….”

“어떻게 하면 신기록이 많아져요…?”

푸른 눈이 약한 기대를 담고 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신기록이 많아지는지……. 가만 생각하던 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아이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답 없이 흐린 낯으로 앉아 있는 진 헤니 때문에 아이가 조금 눈치를 봤다.

“토미, 빠르게 수영을 하려면…….”

“…….”

“이전의 기록이 얼마였는지를 생각하거나 어떻게 훈련할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입은 고민이 되는지 꾸욱 다물렸다.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없이 있던 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토미가 제일 좋아하는 걸 생각하면서 수영하면 돼.”

“…….”

“제일 좋아하는 걸 위해서 수영한다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빠를 수 있어.”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지 토미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진은 아이의 눈을 보며 그저 웃었다.

“토미는 뭐가 제일 좋아? 토미한테… 제일 소중하고 특별한 게 있을 거 아니야. 토미한테 보물 같은 거.”

“보물이요…?”

동그랗게 떠진 푸른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요리조리 굴러다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의 표정이 점점 흐려졌다. 마음에 돌이 얹힌 것 같은 느낌이 다시 들고 있었다.

“…….”

아이는 뭐라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안색이 밝아졌다. 제 보물을 생각하는 아이의 눈은 벤치에 앉아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파란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에 갇혀 있던 겁과 두려움이 옅어질수록 기뻤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왜 두려운 기분이 드는지는… 그냥 모르는 걸로 하고 싶었다.

“선생님, 이건 사실… 비밀인데요…….”

“…….”

“알려드려도 다른 사람한테 말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엄마아빠한테 혼날지도 몰라요…….”

토미는 작게 눈치를 보더니 진에게 말했다. 그는 똘망똘망한 아이의 눈을 보며 잠시 말을 골랐다. 푸른 눈을 한동안 쳐다보던 진이 따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비밀로 해 줄게.”

다정하게 웃는 낯에 푸른 눈에도 따뜻함이 넘실댔다. 제 몸에 꼼꼼히 둘러진 얇은 이불, 안에서 적당한 열기를 내고 있는 팩, 그리고 포근한 느낌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바닥. 아이의 마음이 허물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

그 시각, 나디아 놀즈는 걱정이 됐다. 진 헤니는 야속하게도 먼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디아는 진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 물어야 할지 말을 골라내는 중이었다.

‘설마 어제 마주친 거 아니겠지? 뭐라고 물어야 대충 낌새라도 알 수 있을지…….’

그녀는 한참을 끙끙댔다. 핸드폰을 빤히 쳐다보던 나디아는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입을 열었다.

“야, 너 오늘 진한테 좀 가.”

[ 뭐? ]

“가서 별일 없는지 좀 보고 와.”

[ 갑자기 무슨 일인데. ]

건너편에서는 알렉스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어린 목소리가 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나디아는 잠시 한숨을 쉬다 말했다.

“그 새끼, 지금 여기 있어. 그 개새끼 지금 뉴욕에 있다고!”

[ ……. ]

“어제 둘이 마주칠 뻔했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괜히 너랑 나랑 또 우르르 몰려가면 애 부담스러워 하니까 너라도 가서 봐! 어?! 이런 건 나보다 네가 낫잖아!”

자신이 가 봤자 분명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진을 다그칠 게 뻔했다. 그러니 알렉스가 가는 게 훨씬, 훨씬 나았다. 나디아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술을 씹었다.

[ 알겠어. 오늘 훈련 끝나고 가 볼게. ]

알렉스가 대답했고, 그 뒤로 통화는 조금 더 이어지다 끝났다. 나디아는 속이 복잡했다. 둘이 만났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녀는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바라봤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나디아가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수잔 아주머니…!”

[ 나디아, 지금 전화 괜찮니? ]

다정한 목소리에 나디아가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근황을 나눴다. 뉴욕은 곧 콧물이 얼 정도로 추워질 것 같다고, 나디아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작은 웃음소리가 오가기도 잠시, 수잔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진은 요즘 잘 지내니? ]

이 자식이 전화 좀 드리라니까…! 진은 이상한 데서 자꾸 고집을 부렸다. 분명 속도 없이 착한 놈이 맞는데, 이상하게 제 가족에게는 이렇게 얼간이처럼 굴었다. 물론 아저씨랑 사이가 많이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속으로 혀를 차며 나디아가 대답했다.

“네, 진은 요즘… 잘 지내요. 어린 아이들 수영을 가르치는데, 나름 잘 맞나 봐요. 얘는 왜 전화를 하라는데도 안 하는지… 제가 내일 다시 말할게요.”

[ 괜찮단다, 나디아. 아들 안 하겠다고 뛰쳐나간 놈이 먼저 전화 걸기도 애매하겠지. ]

“하하…….”

[ 하여튼 지 아빠 닮아서 고집은……. 그냥 못 이기는 척, 슬쩍 전화하면 왜 전화했냐고 따져 묻기라도 한다니? 나디아, 너도 알겠지만 우리 진은 가끔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란다. ]

덧붙여진 수잔의 목소리가 심드렁했다. 나디아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수잔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 나디아, 혹시 뭐 하나 부탁해도 될까…? ]

나디아는 조심스러운 수잔의 목소리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뭘 부탁하시려고……. 수잔이 이런 목소리를 할 때는 극히 드문 일이라, 나디아는 괜스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 별다른 일은 아니고……. ]

“…….”

통화가 이어지고, 나디아는 수잔의 말을 가만 듣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의 마음은 아까보다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나디아는 제 귀에 들리는 모든 말들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진 헤니는 이제 괜찮았다. 밤에 그 새끼한테 돌아가야 한다며 헤매지도 않았고, 밥을 못 먹고 다 토해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 상태 그대로, 그대로 있고 싶었다.

[ 진이랑은 연락이 되질 않으니, 나디아 네 쪽으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괜찮겠니……? ]

수잔은 나디아의 기색을 읽은 건지, 조심스럽게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디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가 들은 말들을 정리했다. 그리곤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편지를 왜…….”

그녀가 성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괜찮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전혀 괜찮지 않았으니까. 나디아의 눈이 질끈 감기고 있었다.

***

진 헤니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서점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단 느낌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아무리 간단한 보조라 해도… 아무 준비도, 지식도 없이 무책임하게 하겠다고 한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쓰였다.

경기 직후, 토미가 파랗게 질려 있던 모습이 진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가 제대로 살펴보질 못해서 아픈 아이가 경기에 나간 건 아닌지……. 진은 짧은 시간동안 많은 자책을 해야 했다.

유니온스퀘어에 위치한 커다란 서점, 그 입구에 서 있는 진 헤니는 안내 표지판을 꼼꼼히 읽어 내렸다. 수영 코칭 관련된 책은… 그럼 삼 층에 있으려나…? 진은 메고 있던 백팩을 추켜올리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은 특유의 책 냄새로 가득했다. 진 헤니의 키를 훨씬 넘는 높다란 책장들, 그 안에는 가득가득 책들이 꽂혀 있었다. 진은 책장 사이에 서서 책 제목을 하나하나, 꼼꼼히 훑어보았다.

유소년 수영에 대한 책은 따로 없는 건가…? 진은 약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그나마 제가 찾는 것과 가장 비슷한 책을 뽑아들었다. 그의 손 안에서 종이가 사르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안을 들여다보는 표정이 진중했다.

한참이나 심각한 얼굴로 책을 보던 그가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너무 취미 수영 위주의 내용이라, 선수들에게 적용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진은 조금 더 옆으로 걸어가 다른 책을 찾았다. 눈으로 책 제목들을 하나하나 살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책장의 끝, 수영 관련된 서적은 더 이상 없어서 진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코치님께 혹시 공부할 만한 책 갖고 계신지 여쭤봐야겠다…….

책을 찾지 못한 진 헤니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른 책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여유롭게 걸음을 옮긴 곳은 소설책 섹션이었다.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며 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진 헤니는 책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베스트셀러 대부분이 초면이었다. 아냐, 모든 사람이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책 구경을 하던 진은 툭하는 소리에 바닥을 바라봤다.

그가 서 있는 책장의 반대편, 책이 조금 비어 있는 마지막 칸 너머로 누군가 떨어뜨린 팔찌가 보였다. 팔찌의 주인은 떨어뜨린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주워 줘야 되는 건지 잠시 고민하던 진이 몸을 숙이자마자, 커다란 손이 팔찌를 주워들었다.

몸을 숙인 게 머쓱해진 진이 상체를 일으키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표정은 멋쩍음과 동시에 흐린 빛을 띠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졌던 팔찌가 조금… 익숙한 모양이라서.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건지……. 요즘엔 이상하게 여기저기서 제게 에이든 테일러를 들이미는 기분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쉬던 진이 책장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습관적으로 백팩을 추켜올리며 걷던 그는 제 눈을 잡아채는 책 한 권에 발을 멈췄다. 이번엔 밖으로 한숨이 샜다.

요즘 진짜 왜 그러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책을 빤히 보던 그가 결국 그 책으로 손을 뻗었다. 진의 손에 들린 책은 양장으로 되어 단단하고, 두꺼웠다. 많이들 사가는 책인 건지, 책장에는 단 한 권만 남아 있었다.

「데미안」

굳은 표정으로 종이를 넘기던 그가 어떤 페이지에서 잠시 손을 멈췄다. 한 글자씩 책의 내용을 읽어 내리는 검은 눈이 고요했다.

「그녀가 말했다. “사랑은 간청으로 얻는 것이 아니에요.”」

「“싱클레어, 지금 당신의 사랑은 내게 끌려오고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나를 끌어당길 거예요.”」

「“그럼 내가 당신에게 갈게요.”」

「“나는 당신에게 쟁취되겠습니다.”」

마지막 구절까지 읽은 진은 책을 덮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아무래도… 제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저와는 하나도 안 어울리는 책이었고, 읽어 봤자 이해도 못할 것 같았다.

진은 책을 꽂아 넣곤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겼다. 그가 중앙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진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그가 서 있던 책장 사이로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섰다.

“…….”

남자의 손에는 엽서 뭉치와 만년필용 잉크가 들려 있었다. 몇 장 안 남아 있던 엽서에 피칠갑을 해 놨으니, 새로 사야 했다. 그 역시 책 제목을 하나하나 살피며 느릿느릿 걸었다. 평소에 너무 만지작거린 건지 팔찌를 조이는 끈이 조금 아슬아슬해서, 간간히 손목을 쳐다보기도 했다. 매듭을 다시 한번 강하게 묶던 그가 어떤 책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에이든 테일러는 오랜만에 보는 책 제목에 흐리게 웃었다. 커다란 손이 두꺼운 책을 꺼내들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 책을 쓰레기통에 몇 번이고 처박으면, 저는 몇 번이고 그 너덜너덜한 걸 되찾아오곤 했었다. 군데군데 종이가 찢기고, 더러운 것들이 묻어나도 상관없었다. 가끔 종이 한 장이 다 날아가 버리면, 거기 쓰여 있던 내용이 못 견디게 궁금하긴 했지만…….

“한 권밖에 안 남았네…….”

책을 펴 종이를 넘겨보던 그가 어떤 구절에서 눈을 멈췄다.

「그녀가 말했다. “사랑은 간청으로 얻는 것이 아니에요.”」

그 구절을 빤히 보던 푸른 눈이 허공에서 몇 번 깜빡였다.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던 그는 중얼거리며 책을 덮었다.

“간청이라도 해야지. 지금 보니까 엉터리네…….”

피식 웃던 에이든은 한 권 남았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아래로 향했다. 엽서를 샀으니, 호텔에 들렀다가 바다에 가야했다. 조금 있으면 더 어두워질 테니까.

그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에이든은 손에 들고 있던 엽서를 다시 꼼꼼히 살폈다. 종이는 충분히 두꺼운지, 만년필로 쓰면 잉크가 번지진 않을지…….

엽서를 만지작거리는 에이든 테일러의 등 뒤,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는 검은 머리의 누군가가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진은 그 책이 꽂혀 있던 곳으로 서둘러 향했다. 책을 뽑아 가지고 가려던 그는 이미 비어버린 곳을 보며 낭패란 얼굴을 했다.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을 잠시 벗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

저도 모르게 속이 상해 한숨이 나왔다. 그거 잠깐 꽂았다고… 바로 없어질 건 또 뭐야……. 진 헤니는 정말 남아 있는 게 한 권도 없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아쉬운 얼굴로 뒤를 돌았다. 아직 미련이 남는 건지 걷다가도 몇 번이고 그 책장을 바라봤다.

서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진 헤니는 좁지만 안락한 제 집으로, 에이든 테일러는 넓지만 쓸쓸한 호텔로.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두 사람의 머릿속엔 같은 문장 하나가 반복되고 있었다.

「사랑은 간청으로 얻는 것이 아니에요.」

진 헤니는 몇 번이고 그 문장을 곱씹었다. 그의 머릿속엔 언젠가 에이든 테일러에게 매달려 했던 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비참하고, 처절했던, 사랑한다고 애원하는 말들. 진은 인상을 작게 찌푸리곤 고개를 저었다. 요즘엔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져서 큰일이었다.

진은 조금씩 힘이 없어지는 걸음을 다잡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런 진 헤니는 알지 못했다. 제 뒤로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

진 헤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뉴욕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갈 만한 곳은 뻔했다. 왜 여태 못 찾고 헤매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차 안에 앉아 있는 제이콥이 생각했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핸드폰 화면 안에는 진 헤니의 사진이 보였다. 의뢰는 간단했고, 쉬웠다.

물론 지금 진 헤니의 모습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 헤니’와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거야 일반인들 눈에나 그렇다는 소리지, 저 같이 사람 찾는 게 일인 사람들에게는 아니었다. 머리를 길러 눈을 덮고, 커다란 안경을 쓴다 해도 기본적인 인상착의는 가려지지 않았다.

제이콥은 의아한 낯으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집을 바라봤다. 늦은 밤, 약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집. 진 헤니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뢰인에게 메시지를 전송하려 했다.

「진 헤니, 뉴욕 거주 중, 플러싱 지역. 주소지 : 42-11 크레센트 스트」

‘스트릿’을 입력하려던 그는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창문을 아주 조금 밑으로 내렸다. 그리곤 밖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뭡니까?”

“하……. 얼마 받아요?”

밖에서는 정말 질렸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 게, 알렉스 그레이는 정말로 지긋지긋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젠 포기했나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제이콥은 알렉스의 말을 뭐라 해석한 건지는 몰라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 같은 거 안 파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보,”

“나도 약 같은 건 관심 없고. 에이든 테일러가 얼마 주냐고요.”

“……?”

차 안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알렉스는 조금 더 거친 손길로 차창을 두드렸다. 더 내리라는 소리였지만, 짙게 선팅된 창문은 미동이 없었다. 알렉스는 차창을 한 번 바라봤다가, 진 헤니의 집을 바라봤다.

나디아의 명의로 돼 있는 집이지만, 이제 여기도 안전하지 않았다. 다른 집을 알아보든지 해야 했다.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만 포기하면 모두가 행복 할 수 있는데. 아주 욕 나오게 질리는 놈이었다. 혀를 차던 알렉스가 차창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얼마를 받든, 두 배로 쳐 줄 수 있어요.”

“…….”

“여긴 아무도 안 사는 거예요. 그쪽이 찾는 사람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 얼마 받는지 말해요. 귀찮게 시간 끌지 말고.”

초록색 눈은 차가웠다. 남자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안에 앉아 있는 제이콥은 이제야 이해했다. 의뢰인이 왜 아직까지 ‘진 헤니’를 찾지 못한 건지. 제이콥은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두 배라……. 잠시 생각하던 그가 창문을 내렸다. 알렉스가 상체를 조금 숙여 제이콥과 눈을 맞췄다. 제이콥은 능청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에선 이거 알면 세 배까진 쳐줄 것 같은데.”

“하…….”

알렉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제이콥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시선은 제이콥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향하고 있었다. 제이콥은 쉽게 이뤄진 흥정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것보다 더 쳐줄 테니, 사진이 있는 핸드폰이나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제이콥 역시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뒤로 거래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이뤄졌다. 에이든 테일러가 돈을 써서 사람을 샀다면, 자신은 더 비싸게 다시 사면 그만이었다. 돈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치우는 건 간단했다.

알렉스가 현금을 건네자 남자는 돈을 챙겨들곤 자리를 떴다. 알렉스의 손에는 남자의 핸드폰이 들린 채였다. 진 헤니의 집 앞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고요한 어둠만이 자리했다.

알렉스는 작게 욕을 짓씹다가 핸드폰을 바닥에 내버리듯 던졌다. 핸드폰 액정은 파열음을 내며, 그의 발아래에서 부서졌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저었다. 곧 진을 만나니 화가 난 표정을 최대한 숨겨야 했다.

조급하게 굴면 다 망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 그레이는 목 끝까지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제 뒤를 누군가가 바짝 따라잡은 것만 같은 기분. 한 마디로 기분이 더러웠다. 에이든 테일러는 지금 뉴욕에 있고, 이젠 포기했나 싶었던 ‘진 헤니 찾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렉스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몇 번 더 한숨을 쉬던 그는 진 헤니의 집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자 놀란 낯의 진이 현관으로 나왔다.

“알렉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나 메시지 엄청 보냈는데, 못 봤어? 전화도 안 받고….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진.”

“아, 그랬구나. 미안…….”

진은 알렉스의 말에 허둥댔다. 알렉스는 그런 진을 보며 다정하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아니고…….”

“……?”

“진, 나 오늘 너희 집에서 자도 돼?”

방금 전까지 차가운 빛을 냈던 초록색 눈은 따뜻했다. 항상 다정한 낯, 따뜻한 눈빛의 알렉스지만, 사실 그는 조금 짜증이 났다. 언제까지 거지같은 자식들한테 돈을 쥐어 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조바심이 났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진에게 저를 봐 달라 말할 수 있는 건지, 이젠 알고 싶었다.

***

“비싼 집인데… 왜 갑자기 수도관이 고장 났지…? 나 있을 때는 뜨거운 물이 너무 콸콸 나와서 문제였는데…….”

“그러게.”

진이 의아한 기색으로 말하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그저 옅게 웃으며 젖은 머리를 탈탈 털 뿐이었다. 조금 전,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찬찬히 진 헤니와 집을 살펴봤다. 나디아와 제가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진의 상태도, 집도 모두 언제나와 같았다. 평범했다. 다행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진은 안경을 잠시 벗고 눈을 비볐다. 알렉스는 그 옆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요즘 센터에서 일하는 건 어때? 별일은 없고?”

“응, 뭐……. 항상 똑같지! 좋아.”

“그래, 다행이다.”

진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곤 다시 안경을 썼다. 아무래도 앞머리가 너무 많이 길어져 불편하긴 했다. 진이 속으로만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를 수도 없고……. 저를 숨겨 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가끔씩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렉스는 불편한 진 헤니의 기색을 금방 알아챘다. 진은 눈을 비비거나, 앞머리를 넘기려다 멈칫하기를 반복했다. 왜 그런지, 알렉스는 알고 있었다. 진 헤니는 그를 숨기고, 가리고 있는 것들이 불편한 거였다. 하지만 다 알고 있음에도 머리를 자르라고 할 수 없었다. 얼굴이 알려져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알렉스가 조금 복잡한 낯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언제나 진을 살피고, 돌보는 데에 익숙해진 알렉스 그레이에겐 힘든 일이었다. 진 헤니의 불편함을 모른 척하는 건. 눈에 보이니 더 그랬다. 알렉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제 시야에 들어온 진의 발을 보다 인상을 찡그렸다. 진 헤니의 발은 어딘가에 쓸린 것처럼, 혹은 할퀴어진 것처럼 상처가 나 있었다.

“진, 너… 발이 왜 그래?”

“아, 이거? 나도 잘 모르겠네……. 저번 주말 이후에 이러더라고…! 어디서 다쳤나 봐. 수영장에서 다친 건가…?”

“저번부터 손도 그렇고, 조심해야지. 너는 애가 어떻게 변하질 않냐…….”

진은 알렉스의 말에 맹하게 웃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그 얼굴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요새 진은 전보다 많이 밝아졌다. 가끔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지만, 그것도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때때로 진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알렉스 그레이의 마음은 기대로 부풀었다. 이젠 괜찮을 것 같아서. 이제는… 조금 더 다가가도 될 것만 같아서.

알렉스는 무어라 말하려 입을 달싹였다. 초록색 눈이 제 앞에 앉은 사람의 기색을 살폈다. 진은 저를 힐끗 쳐다보는 눈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을 보며 알렉스가 원래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곤 다시 진 헤니의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발에 연고 바르고 밴드라도 제대로 붙여. 그러고 또 수영장 들어가면 물 묻어서 제대로 아물지도 않잖아.”

“알렉스, 너는 잔소리가 너무 심해…. 나디아보다 심해…….”

“해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

비상약은 다 어디에 뒀어? 알렉스가 말을 덧붙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몇 번 와 본 것을 티내기라도 하듯, 익숙한 손길로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장에서 비상약통을 찾은 그가 진 헤니에게 다가왔다. 소파 아래에 털썩 주저앉은 알렉스가 진의 발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자 진 헤니는 화들짝 놀라며 제 발을 소파 위로 올렸다. 그리곤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 아니… 괜찮아! 내가 할게…!”

“또 뭐 덕지덕지 붙이기나 하겠지. 안 봐도 뻔하니까 그냥 얌전히 내놔.”

“아, 아니! 괜찮……!”

알렉스가 진 헤니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생각보다 상처가 커서 알렉스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것에 깊게 패인 것 같았다. 이렇게 다치는 걸 몰랐다고…? 소독약을 꺼내는 알렉스의 표정이 심각했다. 초록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비슷한 상처들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기에,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었다. 멍한 검은 눈을 떠올리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그럴 리 없었다.

버둥거리던 진은 발에 닿는 솜의 느낌에 어깨를 움찔했다. 그 뒤로는 연고가 묻은 면봉이었다. 차라리 소독약은 따갑기라도 하지, 연고는 참기 힘들었다. 진은 발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몸을 뒤틀었다.

“아니, 내가… 내가 할게…!”

“가만히 있어 봐. 상처가 생각보다 크잖아.”

“으악…! 알렉스, 너무, 간지러워…!”

진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간지러운 건지 버둥대는 걸 멈추지 않아서, 알렉스는 발목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알렉스의 입에서도 피식하는 웃음이 샜다.

“가만히 좀 있어 봐!”

“가만히, 못 있겠으니까 그러지…!”

연고를 발라야 하는 곳엔 제대로 바르지도 못하고, 발 여기저기에 면봉이 문대졌다. 진 헤니는 참아보려 눈을 꽉 감았다가, 이젠 정말 못 참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알렉스의 손에서 제 발목을 빼내려 했다.

“이제, 이제 됐어…!”

“되긴 뭐가 됐…….”

진이 다리를 강하게 빼내려 함과 동시에 알렉스의 몸이 진에게로 딸려갔다. 초록색 눈이 크게 뜨였다. 눈 바로 앞에 진 헤니의 목덜미가 보였다. 알렉스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무너진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곤 앉아 있는 진을 슬쩍 올려다봤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됐어, 진짜로…! 밴드는 내가 붙일 테니까, 그거 나한테 줘…!”

“…….”

진은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밴드를 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초록색 눈, 그 눈을 보다 진이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스?”

알렉스 그레이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기색으로 입을 벙긋거렸다. 진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전, 알렉스의 목 뒤로 삼켜졌던 말이 조금씩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진, 너…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 왜, 그때 내가 그랬잖아. 너한테는 나디아도 있고, 나도… 있다고.”

“응, 기억 나. 갑자기 왜…?”

“아니, 잘… 알고 있나 해서.”

발에 연고를 발라 주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알고 있냐는 소리가 뭔지 알 수 없어서, 진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연고가 덕지덕지 묻어 있을 제 발을 내려다봤다. 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두 사람 다 나 챙기느라고 힘든 거 알아…! 고마워.”

“진, 너는 내가 고맙기만 해…?”

“응……?”

어색하게 웃던 진의 얼굴이 다시 찡그려졌다. 알렉스가 원하는 대답이 이게 아닌 모양이었다. 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스무고개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확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미안해…?”

“…….”

“아니면, 든든해…? 그것도 아니면…….”

“…됐다, 자라.”

알렉스가 일어서며 말했다. 진은 멋쩍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지만, 알렉스는 빨리 침대로 가라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진이 어색한 낯으로 소파를 벗어나려 하자, 그의 손에 밴드를 들려주는 건 덤이었다.

알렉스의 입에선 작은 한숨이 샜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소파에 풀썩 누웠다. 침대로 향하던 진이 그런 알렉스에게 인사했다. 여전히 멋쩍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잘 자, 알렉스…!”

“그래, 얼른 자.”

눈을 꾹 감으며 알렉스가 말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건지, 참 어려웠다. 진 헤니는 새까만 제 속을 하나도 모를 거였다.

알렉스는 아까 상체가 무너졌던 그 상태 그대로 진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누가 봐도 그런 타이밍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고마움 이외의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는지 묻고 싶었다. 아주 조금의 긴장이나 열기, 그런 것들은 느껴지지 않는 건지.

“하…….”

아니, 사실은 묻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묻지 않아도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마움, 미안함, 든든함. 진이 나열한 그 단어만으로도 충분했다. 진 헤니가 ‘알렉스 그레이’라는 사람에게 내어줄 수 있는 감정은, 딱 저만큼이란 소리였다.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왜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딱 한 번만 제대로 저를 봐줄 순 없냐고, 묻고 싶었다. 곁에서 얼마나 더 맴돌아야, 진의 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다른 곳만을 봤다. 그의 옆에서, 그의 사랑을 바라는 제 눈빛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이렇게 바보처럼 다 티가 나는데도.

그래서 차마 입 맞출 수 없었다. 입 맞추면, 옆에서 진을 지켜보는 것마저 다 끝날지도 몰랐다. 지금보다 더 먼 곳에서 뒷모습만 봐야할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제 마음을 다 쏟아냈을 때, 어색한 얼굴을 할 진이 상상됐다. 불편한 표정으로, 제 눈치를 보는 검은 눈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최악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알렉스는 몸을 뒤척였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알렉스가 뒤척이는 소리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진이 발에 밴드를 붙이는 모양이었다.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뒤에는 불이 꺼졌다.

진 헤니의 작은 공간이 어둠에 잠겨 들고, 두 사람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만 같은 밤은 어느 순간 깨졌다. 무언가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괜찮은 척하던 일상이 박살나고 있었다.

***

진 헤니가 컴컴한 밤 한복판을 헤맬 동안, 뉴욕에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LA의 해변을 거닐었다. 진이 언젠가 함께 오자고 했던, 그 산타모니카였다. 뉴욕과 달리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느낌에 에이든이 흐뭇하게 웃었다. 옆에 있는 진이 많이 신나 보여서, 저도 덩달아 신이 났다.

“저번에 나디아랑 알렉스랑 같이 왔었는데, 그때 엄청 좋았어. 그래서 너랑 꼭 같이 오고 싶었는데…!”

“나도 너랑 와서 좋아, 진.”

에이든의 말에 진이 밝게 웃었다. 신발을 벗고 얕은 물에 발을 담구고 있던 진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물에서 나왔다. 발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더니 들고 있던 신발을 구겨 신으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 저 위에 놀이기구도 있고 엄청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어.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놀이기구는 왜 빼?”

“아… 놀이기구… 타고 싶어…?”

조금 겁먹은 기색의 진 때문에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짓궂은 낯으로 진에게 말했다. 그러자 진 헤니가 뜨끔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며 에이든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진을 놀리는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랑 놀이기구는 안 타고 싶어…?”

“어…? 아…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럼 무슨 문젠데…?”

“그건… 내가 너를 아무리 좋아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진은 정말 진지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이건 에이든 테일러를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놀이기구를 탔다간 정말 그대로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다. 에이든에게… 제 시체 치우는 일을 시킬 수야 없었다.

에이든은 진의 흐린 낯을 보다가 뺨에 입을 맞췄다. 볼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느낌에 진의 뺨이 붉어졌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던 에이든이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얼른 와, 진. 아이스크림 먹자.”

“아, 응…!”

진이 말했던 대로 해변가 위에는 관람차와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들이 있었다. 에이든이 슬쩍 바라보자, 진은 삐거덕거리며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타자고 할까봐 불안한 건지 자꾸 제 눈치를 봤다.

“타자고 안 할게. 왜 자꾸 더 멀어지지? 얼마나 더 멀리서 걸으려고 그래, 진.”

“아이스크림 어떤 맛으로 먹을래…?!”

“이번엔 말을 돌리네…….”

진은 힐끗 에이든 테일러의 눈치를 보다가, 바닐라 맛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에이든은 다정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뜬 목소리의 진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개를 시키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돌아왔다.

“진, 그럼 놀이기구 안 타는 대신 다른 거 하기로 해.”

“응? 다른 거 뭐?”

“저거.”

진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에이든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리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있는 두 사람은 들뜬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진, 안으로 더 들어가. 나 자리 없잖아.”

“우리 둘이 들어가기엔 너무 좁은 것 같은데…!”

“아냐, 충분해. 더 들어가 봐.”

작은 포토부스 안에 커다란 몸 둘이 들어가려니 맘처럼 쉽지가 않았다. 구석에서 끙끙거리던 진은 이 상황이 웃긴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둘이 안 된다니까!”

“아냐, 다 들어왔어. 지폐 넣는 데가 어디지?!”

“이게 뭐가 다 들어온 거야! 에이든, 너 어깨가 절반은 나가 있는 것 같은데?!”

에이든은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꾸역꾸역 그 입구에 밀어 넣었다. 입구가 자꾸 지폐를 퉤하며 뱉어내서, 그가 바지에 지폐를 문대 다시 집어넣었다.

“됐다. 진, 빨리 카메라 봐!”

“카메라가 어디 있는 거야?! 이거야?!”

“이거 아니야…?”

“아닌데? 이거 아니야?!”

둘이 정신이 없었다. 어디가 카메라인지 찾는 와중에 찰칵하며 첫 번째 사진이 찍혔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두 사람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작게 웃던 진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나중엔 배까지 감싸 쥐고 웃었다.

“아니, 이건… 이러면 안 되지. 이건 무효지.”

“하하! 엄청 바보처럼 나왔어, 둘 다!”

에이든이 정색을 하고 뭐라고 말을 하던 와중에 또 한 장이 찍혔다. 결국 에이든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이제 두 사람 다 정상적인 사진을 찍기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두 사람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은 이미 다 녹아 끈적하게 손을 적시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두 사람 사이의 가득한 열기에 항복한 것 같았다. 진은 웃는 와중에도 다 녹아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다가, 제 입에 닿아오는 입술에 웃으며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입술은 차가웠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은 곳에서 단내가 진동을 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끈적한 당분이 혀와 입천장, 입술과 여린 점막 사이사이에 들러붙은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뒷목을 잡고 제게 가깝게 당겨왔다. 입술 끝과 혀끝이 간지럽게 마찰되던 입맞춤이 조금 더 깊어졌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혀가 강하게 얽히고, 또 문질러지자 두 사람 다 애가 타기 시작했다. 입 안은 언제 차가웠냐는 듯이 뜨거운 열기를 품기 시작했다. 오가는 타액이 못 견디게 달아서 두 사람의 입에서 한숨 같은 탄식이 터졌다.

아랫입술이 약하게 깨물리는 느낌에 작게 인상을 쓰던 진이 슬쩍 눈을 떴다. 포토부스에는 까맣게 커튼 따위가 쳐져 있었는데, 그 아래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발이 보였다. 진은 조금 곤란한 낯으로 입술을 떼어냈다.

“에이든, 밖에 사…….”

조금 밀어내기가 무섭게 입술이 다시 붙어왔다. 진은 난처하게 웃다가 다시 한번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결국 입을 뗀 에이든이 불만스러운 낯으로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우리 사진 다 나왔겠다. 창피하니까 누가 보기 전에 얼른 가지러 가자…!”

진이 맑게 웃으며 부스에서 먼저 몸을 빼냈다. 에이든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부스를 나섰다. 부스 바깥, 인쇄된 사진을 주워든 진이 또 배를 붙잡고 웃는 중이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엄청 이상하게 나왔어…!”

사실 에이든 테일러는 사진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냥 밝게 웃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진 헤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입술을 더 오래 대고 있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진의 손에는 끈적한 아이스크림이 잔뜩 묻어 있어서, 그는 손끝으로만 사진을 집어 어렵사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이미 못 먹게 돼 버린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곤 찐덕이는 손바닥을 가만 바라봤다. 검은 눈에 장난기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같이 아이스크림을 버리고 있던 에이든은 그 기색을 눈치 채곤 곧바로 몸을 돌려 달렸다. 진은 그 자리에 서서 옅게 웃으며 말했다.

“빨리 다시 와, 에이든.”

“…….”

꽤나 멀리까지 달려갔던 에이든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진을 슬쩍 흘겨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다시 진에게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얼굴에 체념이 가득해서 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제 바로 앞으로 와서는 가만 서 있는 모습에 진의 눈이 예쁘게도 휘어졌다.

그는 끈적이는 양손을 들어 에이든의 양쪽 뺨을 감쌌다. 찐덕한 느낌에 에이든의 표정이 요상해지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아 진에게 말했다.

“진, 언젠가 복수하리란 것만 알아둬.”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진은 그렇게 말하며 에이든에게 입 맞췄다. 두 사람의 입술이 짧게 맞닿았다 떨어지고, 진은 그제야 에이든의 얼굴을 놔줬다. 기분 좋게 올라간 진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에이든은 무언가 가만 생각하더니 입을 뗐다.

“이거라면 한 번은 봐줄게. 아니지… 봐주면 안 되는 거구나. 복수를 꼭 해야 되는 거지.”

그 말에 진이 아이처럼 웃었다. 두 사람의 장난은 해가 다 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밝게 웃던 진은 중간중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낯이 흐려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애써 모른 척하며 팔찌를 파는 가판대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때 그 팔찌 없으려나?”

“…….”

“비슷하긴 한데… 아닌데…….”

에이든 테일러는 팔찌를 하나하나 유심히 보고 있었고, 진 헤니는 그런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은 또 다시 흐린 낯을 하더니 왼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 했다. 에이든은 그의 왼쪽 손목을 감싸 쥐곤 시계를 가려 덮었다.

“…그때 시계 말고 다른 걸 사 줬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에이든… 오늘 너무 길어…….”

“하나도 안 길어.”

에이든 테일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낯을 굳혔던 그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팔찌를 찾았다. 진은 작게 한숨을 쉬다가, 팔찌를 찾고 있는 에이든의 손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

그의 손목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진 헤니가 산타모니카에서 사다 준 그 팔찌. 언제나 옆에 두고 잠들고, 항상 손목에 차고 다니던… 그 팔찌가 보이지 않았다.

***

몇 시간 전, 차게 질린 손은 모래를 마구 헤집어야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이 상황이 하나도 이해되질 않았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손목에 있던 게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이 상황이.

“안 돼, 이… 이건 안 돼…. 이러면 안 돼…….”

서늘한 뉴욕의 밤바다, 찬바람이 에이든의 뺨과 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너무 놀란 눈에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여기저기를 헤매 다녔다. 자신이 왔던 길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찾고, 또 찾았다. 옷 여기저기에 더러운 흙이 묻고, 뾰족한 유리 조각들이 에이든의 손을 엉망으로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팔찌를 찾았다. 안 된다고, 이건 정말 안 된다고.

제게 남은 건 그 팔찌 하나뿐이었다. 굳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제 삶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준 단 하나였다. 혹시 언젠가는… 그렇게 환히 웃는 모습을 또 볼 수 있지는 않을지, 말도 안 되는 희망이라도 갖게 해 줬으니까.

“제발… 제발…….”

그 푸른 팔찌는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했던 때의 유품과도 같았다. 네가 내 옆에서 웃고, 이름을 불러 주고, 나를 사랑했던 때. 제발 제게 돌려 달라 애원하는 에이든의 목소리가 결국 울음에 잠겨들었다.

“왜… 이거 하나 정도는… 가질 수 있는 거잖아……. 나, 이거 하나만이라도…….”

아득하게,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그는 팔찌를 찾고, 또 찾았다. 모래를 헤집는 손, 그 옆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어둠이 내린 곳에 잠시 빛이 들었다. 눈물이 툭툭 떨어지던 푸른 눈이 액정 위로 시선을 옮겼다.

「뉴욕, 뉴저지 모두 없는 것으로 보임」

에이든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모래 위에 있던 손, 그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건지, 찾을 수는 있는 건지. 이제 뭘 붙들고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은 마치 실명이라도 한 것처럼, 앞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희뿌옇게 번지는 시야에 에이든은 그저 눈을 감기를 선택했다. 그 어떤 때보다 진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에이든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에 삼킨 약은 아주 행복한 장면들을 그에게 선물했다. 에이든이 가판대에서 팔찌를 찾기 전까지는.

꿈속, 에이든의 손은 초조했다. 아무리 찾고 찾아도, 똑같은 팔찌가 보이질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분명 지금 행복하고, 아주 즐거운 한 때인데 눈치도 없이 눈물이 나려고 해서 그가 이를 악물었다.

“에이든…….”

“나 오늘 안 갈 거야, 진.”

“…….”

“나… 이제 그냥 여기 있을래. 그게 나을 것 같아.”

흐린 낯으로 옆에 서 있던 진이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손을 그러쥐었다. 이제 그만하라는 것처럼. 결국 푸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뱉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흔들리고, 엉망으로 갈라졌다.

“진, 나… 나한테 남은 건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거, 너도 알잖아…….”

“…….”

“근데 내가 그거 바보같이… 오늘 내가 바다에 가서 유리를 주웠는데… 줍다가 보니까… 아니, 중간에 분명… 매듭짓는 부분이 헐거워진 거 알았는데 내가…….”

“에이든.”

낮게 뱉어진 진의 목소리에 에이든이 말을 멈췄다. 가판대의 팔찌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한참 소리 없이 울던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를 바라봤다.

“나 그냥 너랑… 여기 계속 있을래. 나 가라고 하지 마. 나랑 있어 줘.”

“…….”

“너도… 바다 좋아하잖아. 그때 네가 산타모니카에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내가 말 같지도 않은 짓 하느라, 같이 못 왔었으니까… 우리 여기 계속 있자, 응?”

에이든이 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과 눈물이 가득했다. 진은 눈을 꾹 눌러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대답에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에이든, 나는 여기에 없어.”

“…….”

“여긴 아무것도 없어, 에이든…….”

그 말을 끝으로 모든 조명이 빛을 잃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행복한 소음들이 뚝 끊겼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밤바다에 서 있었다. 더 어두워질 수 없을 것 같던 공간이 어두워지고, 또 어두워졌다. 진의 얼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에 빛이 돌아오는 건 고통스러웠다. 에이든 테일러는 결국 다시 눈을 떠야만 했고, 그게 못 견디게 절망스러웠다.

“정신이 들어요?! 에이든 테일러 씨? 지금 목소리 들립니까?”

주변이 분주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몸에 꽂혀드는 주사바늘의 느낌에 그냥 눈을 감았다. 어쩌면… 어쩌면 다시 그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바다에서 돌아온 뒤, 바로 흰색의 약을 삼킨 그는 이번에도 그곳에 머무는 데 실패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단 하나뿐인 진 헤니의 흔적은 허무하게 사라졌고, 이제 에이든 테일러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걸 잃어가는 그에게 딱 하나 늘어난 거라곤, 반강제로 늘어난… 뉴욕에서 지내야하는 시간뿐이었다.

***

진은 잠을 못 자 퀭한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중이었다. 어제 분명 일찍 잠들었는데, 말도 안 되게 피곤했다. 무슨 꿈을 꾼 것도 같았다. 내용은 정확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덜컥이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 꿈은 마음에 무언가 얹힌 것처럼 답답한 느낌이었다. 그러다가도 소중한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공허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마 서점에서 그 책을 봐서 그런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가 떠오르는 날이면, 잠자리는 언제나 뒤숭숭했다. 지금처럼, 잠을 자도 하나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저기… 선생님, 어디 아파요…?”

벤치에 앉아 한숨을 푹푹 쉬던 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에 걱정이 가득해서 진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야, 선생님은 괜찮아. 토미, 너 들어 보니까 이번 연습 경기에서 기록 엄청 단축했다며…?”

“아, 네……!”

진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아이가 옆자리에 앉으며 덩달아 작게 대답했다. 진의 검은 눈이 아이를 꼼꼼히 살폈다. 그때처럼 엄청 위축돼 있거나, 기록 때문에 걱정이 되는 눈치는 아니었다. 토미는 남들이 들을까 걱정이 되는지 주변을 살피다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게 맞았어요…!”

“…….”

“좋아하는 걸 위해서 수영하면 되게 빨라지는 것 같아요…!”

아이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진도 덩달아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웃기를 잠시, 진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나 오늘 일찍 끝날 것 같은데, 같이 저녁 먹을래? - 알렉스 그레이」

「이번엔 샐러드바 가자고 안 할게 - 알렉스 그레이」

“자, 이제 다들 정리하고! 마무리 스트레칭하고 돌아가자!”

훈련이 끝났음을 알리는 코치의 목소리가 들리고, 진은 잠시 고민하다 옅게 웃으며 답장을 했다.

「그래, 샐러드바 가도 돼!」

「조금 이따가 정문에서 보자」

메시지를 보내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토미는 진이 일어서는 걸 보며 저도 집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물건을 꼼꼼히 챙겨든 두 사람이 락커룸으로 향했다. 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지 돌아가는 내내 진과 토미는 웃고 떠들었다.

가끔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을 하면, 진이 밝은 갈색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어 놓으며 장난을 쳤다. 아이의 뒤에 앉아 머리를 말려 주고 있는 지금도.

“토미, 넌 평소에 머리를 잘 말리지 않았지. 감히 감기에 걸릴 뻔했던 벌이다.”

“악! 머리 이상하게 말리지 마세요! 그러는 선생님도… 선생님도 잘 안 말리잖아요!”

“난 너보다 키가 일 미터는 더 크잖아!”

“키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일 미터 큰 거 아니잖아요! 전 벌써 키가… 아, 내 머리!”

진은 짓궂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요상하게 빗고 있었다. 염소가 핥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머리 모양에 아주 민감한 여덟 살짜리 남자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제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이는 정문으로 함께 나갈 때까지 진을 흘겨봤다. 진 헤니는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려 주면 이상하니까 앞으로 토미 네가 잘 말리고 다녀. 선생님 없어도, 알겠지?”

“…선생님 없어요? 왜요…? 이제 안 와요…?”

머리를 매만지던 토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푸른 눈이 진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어서, 진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며 저도 모르게 손사래까지 치고 있었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니고… 선생님이 매일매일 오진 않으니까 매번 말려 줄 수 없잖아. 그러니까 토미가 혼자서라도 잘 말리라는 말이야. 알겠지?”

“네…….”

“토미, 그럼 다음 주에 보자. 집에 조심히 들어가…!”

진은 아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는 조금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 정문의 계단을 두 개 정도 내려갔을 때쯤, 토미는 아주 당연하고도 익숙하게 계단에 털썩 걸터앉았다.

아이는 처음 봤던 그날처럼, 계단에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곤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던 진이 그 모습을 발견한 건, 아주 잠시 뒤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곤 다시 계단을 거슬러 올랐다.

“오늘도 부모님 기다리는 거야…?”

“네…! 조금 있으면 오실 거예요…!”

“…….”

진이 굳은 얼굴로 아이를 가만 바라봤다. 아이는 애써 웃으며 진의 시선을 피했다.

“진!”

아래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계단 아래에서 알렉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은 그를 보며 옅게 웃다가, 다시 뒤의 아이를 돌아봤다. 그가 아이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토미는 제게서 멀어지는 등을 보다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엄마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오늘은 아빠가 오실까? 머리 안 말리고 나왔으면 조금 추웠겠다……. 혼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아이는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토미 옆에 털썩 주저앉은 진은 아래에 있는 알렉스에게 손으로 인사했다. 그리곤 저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나도 뭐 기다리는 거 있었는데, 깜빡했네. 같이 기다리자. 토미 없었으면 나 혼자 엄청 심심할 뻔했네…….”

“……?”

“오늘은 안 보여 줄 거야? 저번에 그 그림책 얼마나 더 그렸어?”

그림책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가 밝게 웃으며 매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가져왔다. 신이 난 손길이 서둘러 지퍼를 열고, 그 안에 있던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아이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진에게 건넸다.

“그때 그렸던 엄청 큰 성 뒤에 용을 그렸어요…! 두 마리!”

“오… 두 마리나?!”

진은 제 손에 들린 종이를 보다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용… 인가. 내가 아는 용이랑 다른 용인가? 세상엔 용이란 상상 속 동물이… 하나 더 있는 걸까? 내가 바보라서 모르는 걸까…? 용인데 왜 사자처럼 갈기가 있을까. 표정이 애매해지자 토미가 슬쩍 눈치를 봤다.

“용… 이네. 누가 봐도 용이다. 내가 본 용 중에 제일 멋지다, 토미.”

“여기 이 초록색 용이 형이고, 빨간색 용이 동생인데 둘이서 성을 지키는 거예요. 성 안에는 맛있는 음식이 엄청 많거든요! 엠앤엠 초콜릿이랑 트롤리 젤리 같은 거!”

아이의 천진난만한 말에 진이 웃음을 참았다. 토미는 퍽 진지했기 때문에, 절대로 웃어선 안 됐다. 처음에 성에 발린 시멘트들이 모두 누텔라 잼이란 소리를 듣고 웃다가, 토미의 질책 어린 시선을 견뎌야만 했다. 아이의 상상력은 정말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토미는 초콜릿을 엄청 좋아하는구나. 선생님도 초콜릿 좋아해.”

그렇게 말하던 진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가방을 열었다. 작은 주머니에서 초콜릿 몇 개를 꺼낸 그가 토미에게 그것들을 내밀었다. 토미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손을 뻗다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먹으면 혼나요…….”

“혼나…? 왜…?”

“열량이 높은 간식은 먹으면 안 돼요…….”

아이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초콜릿을 보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침을 꼴깍 삼키는 모습에 진이 잠시 고민을 했다. 토미는 아직 여덟 살이었고, 이런 식으로까지 식단 관리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고작 초콜릿 하나였다.

“토미, 네가 열심히 수영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 드리면… 나중에는 그림도 배우게 해 주실지 모른다 그랬던 거, 기억나?”

“……?”

“토미 너도 그림 그릴 생각을 하니까 수영하는 것도 하나도 안 무섭고, 물에 있는 것도 더 재미있다고 했잖아.”

토미는 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아직도 요상한 모양으로 뻗쳐 있는 아이의 머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거 봐, 뭐든 네가 즐겁고, 재미있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즐거워야… 잘할 수 있으니까. 이번 연습 경기에서는 1등도 했는데… 초콜릿 하나 정도는 열심히 한 토미한테 상으로 줘야지.”

그래야 수영하는 게 더 재밌지. 진이 다정하게 웃으며 다시 초콜릿을 내밀었다. 아이는 진의 말에 고민이 되는지 입술을 꼬옥 감춰 물었다. 그리곤 눈으로 진에게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냐고.

“혼날까 봐 걱정되는 거면… 내가 비밀로 해 줄게. 그럼 됐지?”

아이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기색으로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작은 초콜릿 하나에도 아이의 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언제나 위축돼 있던 푸른 눈이 생기를 찾아갈 때마다 진 헤니 역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 진 헤니가 유일하게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어젯밤까지 마음에 얹혀 있던 쓸데없는 감정들은 아이와 웃고, 떠들 때마다 흐려졌다. 푸른 눈을 가진 이 아이가 웃을 때면… 저 역시 지키지 못한 약속 하나를, 지금이라도 지키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으니까.

“토미.”

“저 이제 그럼 갈게요…!”

오늘은 아버지였다. 아이는 아래에서 들리는 제 이름에 허둥지둥 스케치북과 초콜릿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곤 계단을 호다닥 내려가다 뒤를 돌아 진에게 다시 손을 흔들었다. 진도 따스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또 보자, 토미.”

“네!”

토미는 차에 올라서도 창문에 대고 인사를 했다. 진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이 따뜻했다. 진은 시야에서 멀어지는 차를 보며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저 사랑스러운 아이가 행복하기를 그리고 이번엔… 제가 꼭 지켜줄 수 있기를.

그리고 진은 이 세상에 신 같은 건 없음을, 바로 다음 날 확신할 수 있었다.

***

진 헤니는 아침부터 코치에게 연락을 받고 센터에 와 있었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이만 보고 있었다. 앞에서 아이의 부모님이 뭐라 떠들든, 진은 낯을 굳히고 앉아 아무 말이 없었다.

“이게 이 센터 교육 방침인가요? 저는 정말 할 말이 없네요. 애가 정신을 못 차리고 딴짓거리를 하면 제대로 정신을 교육시키는 게 코치들이 하는 일 아닌가요?”

“…….”

“보조 코치로 진 헤니 선수가 왔다고 해서 저희가 얼마나 기대했는지는 아세요? 근데 애한테 헛바람이나 집어넣고, 여태 쌓아온 아이 커리어를 다 망치면 책임지실 거예요?!”

격양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한참이나 아이를 보던 진은 테이블 위의 스케치북과 초콜릿을 쳐다봤다. 토미는 크게 터지는 소리에 몸을 움츠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가 선생님한테 떼써서… 초콜릿 먹고 싶다고 졸라서 주신 거예요…….”

“넌 조용히 못해?!”

“선생님이 그러신 거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건데…….”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푸른 눈에는 진에 대한 미안함과 이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바닥에만 붙어 있던 푸른 눈이 슬쩍 진의 눈치를 봤다. 혹시나… 선생님이 저를 미워할까 봐.

그 눈빛을 읽은 진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검은 눈이 차게 가라앉고 있었다. 점점 사나워지는 분위기에 옆에 앉아 있던 코너가 입을 열었다. 그는 최대한 서글서글한 얼굴로 토미의 부모님에게 말했다.

“원래 이… 어린 선수들에게 제일 중요한 건 수영에 대한 흥미가 끊기지 않는 겁니다, 예. 벌써부터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기 시작하면 오래 수영하지 못,”

“세상에 정신적으로 압박을 안 받는 운동선수가 어디 있답니까? 압박을 이겨내야 더 커지는 거죠.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이 왜 이러시는지를 모르겠네요.”

이번엔 귀찮다는 낯으로 앉아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말을 거들었다. 그 말에 드디어 진 헤니가 입을 열었다.

“토미는 아직… 여덟 살이에요.”

“네, 알아요. 그리고 마이클 펠프스는 일곱 살에 수영을 시작했죠. 알렉스 그레이 선수는 여섯 살에 시작했잖아요! 저희 토미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요!”

“토미는 아직 여덟 살이라 뭘 해도 하나도 늦지 않았어요!”

결국 진 헤니의 입에서도 큰 소리가 터졌다. 여태 차게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에 화가 가득했다. 토미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진을 바라봤다. 진은 잔뜩 겁먹은 파란 눈을 보다 말을 이었다.

“다들… 다들 왜 그러시는 거예요? 아이가 물에만 들어가면 파랗게 질리는 건 알고 계세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다들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토미는 이제 막 키가 자라고, 여기저기에 애정과 호기심을 품을 나이였다. 그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든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이 생겼다면 응원 받아야 마땅했다.

“토미가 뭘 가장 좋아하는 지에는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네, 관심 없어요.”

“……?”

너무 당연하다는 듯 뱉어진 말에 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의 엄마가 관심 없다고 말하자, 옆에 있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토미가 뭘 가장 잘하는지에 관심이 있어요. 좋아하는 것 말고요.”

“…….”

“그리고 실제로 수영을 잘하죠. 가르쳐 봤자 돈도 안 되는 미술보다, 아이가 잘하는 수영에 투자하고 키우는 게 맞는 일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투자……. 진 헤니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다들 바보들이었다. 분명 저보다 더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모르는 건지.

토미가 그림책 얘기를 할 때면 얼마나 밝게 웃는지, 제가 그린 성과 용을 보여 줄 때면 푸른 눈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그런 걸 다 한 번도 못 봐서 그런 게 분명했다. 아이가 그렇게 행복해 하는데, 대체 왜…….

“대화를 해보니까 알겠네요. 저희는 그냥 센터를 옮길게요.”

“……?”

“에이, 토미 어머님… 잠시만 좀 앉아 보세요. 어린 선수들은…….”

“저희 토미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인데, 저희가 굳이 여기를 보낼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센터를 옮기겠다는 말에 진도, 토미도 놀란 눈으로 부모님을 바라봤다. 가자, 토미. 그렇게 말하며 두 어른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토미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곤 제 부모님과 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토미, 어서 일어나지 못해?!”

“저, 저는… 저는 선생님이랑 같이 수영하고 싶어요…!”

“얘가…? 당장 일어나!”

아이의 엄마가 토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토미가 엉엉 울며 제 엄마의 손을 잡았다.

“제가 1등 많이 하면 되잖아요… 네? 이번에 연습 경기에서도 기록 엄청 많이 당겼어요…! 정말이에요! 다음에 더 당길게요, 많이 당길게요…!”

아이의 말에 멍하니 앉아 있던 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는 제 엄마와 아빠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제가 잘하겠다며 울었다. 여기에 다니고 싶다고, 선생님이랑 같이 수영하고 싶다고.

아이의 작은 등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응접실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닫혔다. 그리고 그제야 진 헤니는 참았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의 검은 눈에서, 여태까지 필사적으로 참았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

알렉스 그레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여느 때와 같은 저녁 식사 자리인데, 두 사람 다 상태가 좋지 못했다. 둘 다 애쓰고는 있었지만, 진 헤니와 나디아 놀즈는 연기에 영 소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알렉스 역시 오늘만큼은 표정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나디아는 굳은 얼굴로 몇 번이나 진을 살폈다. 진은 어딘가 멍해 보였는데, 제 앞에 있는 음식을 포크로 뒤적이기만 할 뿐 입에 가져가진 않았다. 그리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옅게 웃었다.

검은 눈에 슬픔이 보일 때마다 나디아의 마음이 찢어졌다. 이러려고 여기 데리고 온 게 아니었다. 소중한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어떻게든 비행기에 태운 거였는데…….

진의 기색을 알아챈 알렉스도 조금씩 얼굴을 굳혔다. 두 사람 다 저 상태의 진 헤니를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모든 걸 다 토하던 그때. 알렉스의 머릿속엔 엊그제 밤이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조금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망설이던 나디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진, 요즘 애들 가르치는 건 어때? 괜찮아?”

“아… 그거…? 응, 항상 괜찮지.”

“…….”

진이 흐리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은 항상 괜찮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니까.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잘… 최대한 잘 지내고 싶었다.

2년이나 흘렀는데, 잘 지내지 못하는 게 바보였다. 그래서 진 헤니는 스스로가 바보라고 확신했다. 잘 지내지 못하는 자신이 이해가 안 됐고, 그래서 잘 지내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쉽지가 않아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혹시 괜찮으면, 나 먼저 일어나 봐도 될까? 아이들 가르치는 거 때문에 공부할 게 좀 있어서…….”

“그래, 진. 어서 들어가 봐. 조심히 들어가고.”

진이 눈치를 보며 말하자 알렉스가 대답했다. 이럴 땐 혼자 있도록 해 주는 게 나았다. 어차피 저희랑 있어 봤자, 불편하기만 할 테니까. 나디아도 어서 가 보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진 헤니가 서둘러 음식점을 나갔다.

“…….”

“…….”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진 헤니뿐만이 아니라 나디아도, 알렉스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던 나디아가 먼저 입을 뗐다.

“알렉스, 내가 너한테 예전에 물어봤던 거 기억나? 진을 뉴욕에 데리고 가는 게… 잘하는 짓인지 물었던 거.”

“…….”

“아직도 똑같이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서 그래. 내가 등신 같이 마음 약해지고 있는 걸까 봐.”

알렉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도 속이 답답한지 앞에 있는 물만 연신 들이켰다. 나디아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될 일이었다. 그냥…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가끔 생각이 나고, 불현듯 떠오르고 그러면 갑자기 우울해지는 건 당연했다. 많이 사랑하던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 자식 때문에 힘든 게 아닐지도 몰랐다. 나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정리됐던 생각들은 알렉스 그레이의 말에 의해 전부 풀어헤쳐졌다.

“나디아.”

“……?”

“진은 예전부터 자기 마음이나 생각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네가 그랬었잖아.”

나디아는 뜬금없는 말에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알렉스는 그 말을 하고는 또 가만 앉아 있었다. 초록색 눈은 이후에 이어질 말을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골랐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 모두가 슬퍼질 얘기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진은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고, 말하고 싶은 사람한테만 말하는 걸 거야. 자기가 지금 어떤지, 기분은 좋은지 슬픈지… 뭘 하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그런 것들 전부…….”

“…….”

“그리고 너랑 나는 그 사람에 포함되지 않은 거야.”

알렉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입 안이 텁텁하게 마르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나디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전화했던 그날, 진한테 다녀왔는데… 너랑 내가 걱정했던 일은 없었어. 에이든 테일러랑 마주치진 않은 것 같아.”

“…….”

“근데 이젠 차라리 마주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흐리게 웃었고, 나디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알렉스는 그날 밤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물었다.

진이 맨발로 현관을 서성이고 있던 그날 밤. 진 헤니가 또 다시 에이든 테일러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 거였다. 진을 데리고 들어오려 하자, 그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들어 저를 바라봤다. 그리곤 이름을 불렀다.

- 에이든……?

진은 그 뒤로 한참을 울었다. 여태 듣지 못했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곳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며 속이 썩어갔는지……. 괜찮지가 않다고, 힘이 든다고, 울먹이는 진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패배였다.

진이 가진 상처가 커서, 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필요했다. 애석하게도 그를 상처 입힌 사람만이 어디에, 어떻게 상처가 났는지 알아봐 줄 테니까.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인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딴 건 정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제가 진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그런 것들뿐이었다. 자신은 그가 맨발로 밖을 헤매지 않도록 해 줄 수 없었다. 그가 불편한 앞머리를 자르고, 마음껏 웃게끔 해 줄 수가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진 헤니를 더, 더 깊숙한 곳으로 숨기는 일뿐이었다. 그럴수록 진의 마음이 짓물러간다는 걸, 이젠 인정해야만 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알렉스 그레이의 얼굴에는 체념과 얕은 화가 공존했다. 믿을 수 없지만 열심히 해도 세상엔 안 되는 게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 받고, 또…… 잊는 일.

“나디아, 내가 생각할 땐…….”

“…….”

“진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든 뭐든… 너랑 나로는 안 돼…….”

나디아는 그의 말에 흐리게 웃었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에게 몇 번이고 묻고, 또 물어도… 단 한 번도 알려준 적 없는 그 유리무덤이 떠올랐다. 평생을 그와 지냈지만 여태 제게 숨겨온, 그 장소. 그녀의 입에서 몇 번이고 한숨이 터졌다.

알렉스의 말을 듣고 나서, 나디아는 한참이나 무언가를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그녀는 나중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진 헤니가 행복해지는 것.

“못된 새끼……!”

서운한 마음에 괜히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샜다. 나디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진 헤니 나쁜 자식만을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복잡한 속을 달랬다. 그렇게 슬프고, 답답한 저녁식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

진 헤니는 제 위로 크게 드리운 나무그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곧 해가 지려는지 노을빛이 숲에 가득했다. 그는 녹음과 주황색의 빛이 빼곡한 숲을 보다, 눈앞의 작은 오두막을 바라봤다. 언젠가 다 쓰러져 이제는 세상에 없는, 제 보물창고.

“…….”

언제 비바람을 맞았냐는 듯, 오두막은 예쁘게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진은 굳은 얼굴로 그 작은 비밀공간을 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나뭇잎으로 된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젠 자신이 너무 커버려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입을 꾸욱 다물고 한참을 서 있던 그는 안에서 들리는 앳된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진…? 너야?”

“…….”

진 헤니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숲은 고요했다. 가끔 작은 짐승들이 움직이는 소리만 사박사박 들릴 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검은 눈에는 그리움과 약간의 두려움이 넘실거렸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손끝이 한참만에야 움직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커다란 나뭇잎을 젖히고, 고개를 숙여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그대로였다.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유리들, 유리 옆에 조그맣게 쌓여져 있는 조개껍질들. 나무판자 사이로 새어드는 주황색의 햇빛.

“……?”

“…….”

그리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푸른 눈을 깜빡이고 있는 아이까지도.

***

아이는 손에 낡은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혼자 이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읽고 있던 책이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책. 책 모서리와 표지가 어딘가에 잔뜩 쓸려 너덜너덜했지만, 아이는 상관없어 보였다.

“누구…….”

“…….”

낯선 사람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가 경계 어린 눈빛을 했다. 여기는 진과 저밖에 모르는 곳인데,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책을 꾸욱 쥐더니 울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진이 허둥대며 입을 뗐다.

“아, 나는… 나는 진 헤니 형이야…!”

“진은 형이 없…”

“사, 사촌 형…….”

에이든 테일러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람을 힐끗 살폈다. 사촌 형이라고 하니… 닮은 것도 같았다. 푸른 눈에 감도는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긴 했지만 완전히 가시지는 않아서, 진이 최대한 무해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에이든.”

“…….”

제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진과 아는 사람이 맞는 것 같아서 에이든이 경계를 풀었다. 진 헤니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앉는 동안 커다란 몸이 여기저기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에이든이 그런 진을 힐끗 째려보긴 했지만, 앉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혼자 뭐 해…?”

“기다려요…. 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서…….”

아이는 책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표정이 좋지는 않아서, 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진은… 지금 어디 있는데?”

“…저도 잘 몰라요.”

“…….”

“그래도… 곧 올 거예요.”

에이든이 슬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앞에 앉아 있는 진 헤니의 얼굴이 조금씩 흐려졌다.

“이제 곧 해도 질 텐데… 그냥 집에 가서 기다리자. 혼자 여기 있지 말고…….”

“괜찮아요…! 진은 제가 여기 있는 거 안 까먹었을 거예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아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진은 고집스러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숲은 밤이 되면 위험하고, 어두워서 더 이상 있기엔 무리였다.

“에이든, 이제 가자. 여기 더 있으면 안 돼.”

“안 가요…….”

진 헤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갑자기 일어서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책을 뺏어가는 손길에 화난 얼굴을 했다. 사납게 떠진 푸른 눈이 진 헤니를 노려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 헤니 역시 엄한 낯으로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돼. 이제 가야 돼.”

“싫어요!”

“에이든,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진이랑 같이 갈 거예요! 갈 거면 형 혼자 가세요!”

에이든 테일러는 진이 들고 있는 책을 다시 뺏으려 끙끙거렸다. 내 책…! 하지만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진은 책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여기에 아이를 혼자 두고 갈 생각도 없었다. 진이 다시 한번 뭐라 입을 떼려던 그때, 바깥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이었다.

“……?”

“……!”

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안 좋은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머리를 뒤덮고 있었다. 진 헤니는 아까보다 더 급한 손길로 아이를 일으키려 했다. 안 돼, 이제 진짜 안 돼…. 여기 있으면 안 돼…….

바람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오두막에 덧대진 나무들 역시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중이었다. 진 헤니는 그 위태로운 모습을 살피다가 에이든 테일러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아이를 향한 순간, 둘 사이로 나무판자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진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나는… 나는 이제 다 컸고, 아이가 다치지 않게 해 줄 수 있어!’

쩌적쩌적 소리를 내며 뜯겨진 나무판자는 자비 없이 땅바닥을 향해 꽂혀들었다. 푸른 눈에 가득 찬 공포가 진 헤니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얼른, 얼른 이리 와, 에이든…!”

“…….”

“에이든!”

제게로 오라는 말에도 아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눈물과 두려움이 잔뜩 차오른 눈으로 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뗐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서… 기다려야 돼요…….”

“……?”

무너지는 오두막, 그 안에 선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푸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잠시 멍한 얼굴로 아이를 보던 진 헤니가 급히 그를 안아 들려는데, 그때 모든 시야가 어두워졌다.

갑자기 돌아오는 빛에 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가 덜컹이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던 그는 식은땀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진 헤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이가 오두막에서 잘 나갔을지,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나무판자가 그때처럼……. 머리가 복잡했다. 안아들고 나왔어야 했는데, 뭘 망설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제 팔이든, 어깨든… 다치더라도 아이를 품에 안았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앉은 자세로 한숨만 쉬고 있는 진,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는 낡은 종이 하나가 보였다. 너무 많이 만지작거려서 모서리가 다 닳아 있던 그 사진.

“하…….”

여러 자괴감들이 진 헤니의 마음 안에 차올랐다. 제가 어떻게 해도, 지키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푸른 눈을 가진 두 사람 때문에 그는 오늘 잠을 이룰 수 없을 게 분명했다.

***

토미가 센터를 옮긴 지 일주일째였다.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믿을 수 없게 허전했다. 진 헤니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센터에 나왔다. 원래 주말만 맡아 주기로 했던 일은 스케줄이 달라진 지 오래였다.

“선생님, 이제는 주말 말고도 볼 수 있어요?!”

“응, 앞으로 선생님은 평일에도 올 거야.”

진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코치는 장난스럽게 삐친 척을 하기도 했다. 여태 가르친 게 다 부질이 없다며 우는 소리를 하면, 진은 그저 맹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도 아이들 가운데서 옅게 웃던 그는 저를 부르는 손에 고개를 돌렸다. 코치가 잠시 보자며 입모양으로 말하고 있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그때 부탁했던 책들이에요. 읽고 싶다고 했던 것들.”

“아… 감사합니다. 제가 서점에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감사히 읽겠습니다.”

진 헤니가 묵직한 책 몇 권을 받아들며 말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진은 책의 무게만큼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코치는 책을 살펴보는 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토미 일이 마음에 쓰여서 그래요?”

진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맞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그가 대답을 않자 코치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토미네 부모님이 조금 유별나기도 하고, 또… 교육관이라는 게 참… 그래요? 맞다, 틀리다 말하기도 애매하고, 뭐랄까… 애를 그렇게 키우겠다는데 뭐라고 훈수 두기도 참… 그렇고?”

“…….”

“무슨 말인지 알죠? 진 헤니 선수 잘못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린 선수들 부모를 상대하다 보면 십 년을 일한 저도 진이 다 빠진다며, 코치는 일부러 앓는 소리를 했다. 저를 위로하려는 걸 알아서 진 역시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그냥… 토미가 좀 걱정될 뿐이죠…….”

“워낙 잘하는 아이니까, 어딜 가든 괜찮을 거예요.”

진은 대답 없이 웃었다. 잘하는 것과 어딜 가든 괜찮은 일은 별개지만, 코치는 모르는 눈치였다. 격려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손이 멀어지고, 진 헤니 역시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그는 책이 젖지 않도록 제 가방에 넣고, 평소와 같은 얼굴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쉬는 시간에는 한 명, 한 명 수영 폼을 봐 주기도 하고,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하루는 정신없이 빨리 갔다. 다행이었다. 혼자 있으면 또 말도 안 되는 생각만 많아지고, 아주 별로였으니까.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락커룸에서 제 짐을 싸는 이 짧은 순간마저도 그랬다.

- 토미가 뭘 가장 좋아하는 지에는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 네, 관심 없어요.

짐을 싸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진 헤니는 이를 악물고 가방을 정리했다. 관심 없다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 당연해서 화가 났다. 그 모든 걸 옆에서 듣고 있던 토미가 안쓰러워 참을 수 없이 짜증이 치밀었다.

- 먹으면 혼나요…….

- 혼나…? 왜…?

- 열량이 높은 간식은 먹으면 안 돼요…….

작은 초콜릿 하나, 그거 하나 먹는다고 수영 실력이, 그 아이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다. 초콜릿에서 눈도 못 떼면서 먹으면 안 된다 말하던 아이였다. 그거 하나 정도는…….

“지켜주기는…….”

결국 쾅하는 소음이 텅 빈 락커룸을 울렸다. 비웃음 섞인 말은 진 헤니 스스로를 향하고 있었다. 지켜줄 능력도 뭣도 없으면서,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거짓말쟁이에 비겁한 놈밖에 안 됐다. 그 무엇도, 단 하나도 제대로 지켜 낸 게 없었다. 아무것도.

그날도 센터를 바꾸겠다는 토미 부모님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제가 말한 방법이 처음부터 잘못된 거일 수도 있었다. 코너 코치님의 말대로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는 전적으로 부모의 영역이었다. 바보처럼 감정만 앞서서는… 제대로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진이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매고 걸음을 옮겼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정문으로 나온 그는 계단에 쪼그려 앉은 뒷모습을 보고 발을 멈췄다.

“토미……?”

“선생님…!”

토미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은 아이에게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에 눈을 잘 맞추질 못했다. 전처럼 다시 위축된 푸른 눈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무서웠다. 제 마음이 이젠 견디지 못하고 다 무너질까 봐.

아이는 제게서 빗겨가는 시선에 어깨를 조금 더 움츠렸다. 아무래도… 그때 이후로 선생님은 제가 미워진 것 같았다. 엄마가 막 소리 지르고 화를 냈으니… 저까지 싫어진 것 같았다.

“선생님… 제가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

아이는 주춤주춤 진에게 다가서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손이 스케치북을 꺼내들었다. 빳빳했던 그 그림책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해서, 진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스케치북에서 주욱 종이 한 장을 뜯어 낸 아이가 진의 눈치를 봤다. 건네려던 손이 흔들렸다. 진이 인상을 쓰고 있는 게 계속 마음이 걸리는지 결국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미워지신 거 알아요…. 그래도, 이거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아냐, 토미. 선생님이 토미를 왜 미워해. 하나도 안 미워. 선생님은 토미 엄청 보고 싶었어.”

진이 화들짝 놀라 아이에게 대답했다. 밝은 갈색 머리를 쓰다듬던 그는 축축하게 젖어있는 걸 보고 한숨을 쉬었다.

“토미, 머리 잘 말리고 다니라니까…!”

다정하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아이가 안심했다. 그때와 똑같이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토미는 옅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걸 진에게 내밀었다. 진 헤니는 조심스럽게 건네진 걸 받아 들고 아이를 쳐다봤다.

“그게… 제가 그린 선생님이에요…!”

아이의 푸른 눈에는 기대와 약간의 초조함이 감돌았다. 혹시 별로 안 좋아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진은 종이 안에 그려진 걸 한동안 말없이 들여다봤다.

“선생님보다 훨씬 덜 멋있기는 하지만…….”

“선생님보다 훨씬 멋있는데? 큰일이네. 자랑하면 다들 그림이 더 낫다고 할 것 같은데…….”

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토미가 밝게 웃었다. 진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아이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웃었다. 진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저는… 몰래 온 거라서 이제 가야 돼요. 다른 센터에 엄마가 곧 데리러 오실 거예요…….”

“그래… 토미, 또 보자.”

“네……!”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진에게서 멀어졌다. 진 헤니는 제 손에 들린 걸 빤히 내려다보다 슬프게 웃었다. 집으로 향하는 그는 최대한 마음을 눌러 담았다. 꼴사납게 거리에서 쏟아지지 않도록, 몇 번이나 터지는 감정을 욱여넣어야 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나디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디아는 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진은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집 안을 서성였다.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종이 한 장에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인어가 그려져 있었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림을 보던 진은 뒷장을 보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는 이제 제 감정을 참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선생님, 저를 잊으시면 안 돼요. 약속하기로 해요!」

삐뚤빼뚤 써진 글씨에 진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얼굴을 가려 덮고 한참을 울었다. 꾹 눌러 새지 않게 하려던 흐느낌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잘게 떨리는 손이 머리 그리고 눈과 뺨, 턱… 어쩔 줄을 몰라 여기저기를 맴돌았다. 아이처럼 소리 내 울던 그는 울리는 핸드폰을 들었다. 나디아였다.

[ 진,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야. 나 안 그래도 너한테 가고 있었는데. ]

“…….”

[ 진? 듣고 있어? 여보세요? ]

최대한 울음소리를 죽여 보려던 진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고 오른 감정이 이제 더는 안 된다 말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나디아, 나… 나 그냥……,”

[ ……. ]

“섬으로 돌아가려고.”

사방에서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나 다 정리하고, 이제… 그냥 섬으로 갈래. 거기는 좁으니까, 그러니까… 한군데만 힘들면 돼.”

[ ……. ]

“나 이제 못하겠어…! 나도… 다 괜찮게 지내고 싶었는데, 여기서 지내면… 아니, 어디서 지내든 바깥에 온 사방에 다 그 애밖에 없어…. 그래서 나 이제 못 하겠어…….”

진이 엉엉 울며 말했다. 저도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이제는 참을 수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나디아는 그의 말에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한번 터져 나온 감정은 끝을 모르고 그의 볼을 적셨다. 여태 참은 걸 벌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번 화가 났다가, 슬펐다가… 미웠다가, 걱정이 돼……. 나는 내가, 내가… 요즘엔 그냥 미친 것 같아.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어…….”

[ ……. ]

“이번에는 꼭… 정말 이번엔 꼭 지키고 싶었는데… 나는 분명… 그때랑 다르게 다 컸는데, 그때도, 지금도… 그냥 거짓말쟁이에 바보멍청이밖에 안 되잖아!”

[ 진……. ]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에, 나디아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럽게 울며 말하던 진은 그 목소리를 뭐라 해석했는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 눈에 나 답답해 보이는 거 알아…! 대체 왜 저러나 이해 못하는 것도 알아. 그깟 열세 살 때 기억, 그거… 그게 다 뭐라고… 나도 다 알…….”

[ 진, 문 좀 열어 봐 ]

“……?”

진은 갑자기 문을 열라는 소리에 말을 멈췄다. 그리곤 제 집의 현관문을 바라봤다. 문을 열라니……?

“문 열어, 진 헤니!”

“……?”

쾅쾅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문에 진이 핸드폰을 바라봤다. 나디아와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아직 울음은 멈추질 않아서, 그가 작게 흐느끼며 현관문을 열었다.

“하…….”

“나디아…?”

나디아는 엉망으로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한숨을 뱉었다. 여러 감정이 그녀의 속 안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안쓰러움, 그리고 죄책감. 그냥… 저렇게 속이 다 문드러질 때까지 아무런 힘이 돼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슬펐다. 갈색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박스 하나를 툭하니 진의 앞으로 던져 놓았다. 꽤나 묵직한 그 박스가 넘어지며 안에 있던 것들이 진 헤니의 앞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이게 다… 뭐야…?”

“하… 그래, 너희 둘 다… 이제 그만하자.”

“……?”

“야, 아무리 그래도 너는 어떻게… 넌 어떻게 나한테 섬으로 다시 가겠다는 말을 해! 진, 너… 진짜 그건 아니지!”

나디아는 진이 얼마나 그 섬을 나오고 싶어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제 부모님과의 연을 끊으면서까지 떠나온 곳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매 순간 꿈 꿔오던 바깥인 걸 알았다. 그런 그가 바깥을 나갈 수 있길, 누구보다 바랐던 것도 저였다. 그러니 그가 이곳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진이 말했던 대로, 이제는 편하게…….

“너 진짜… 섬으로 돌아간다고 한번만 더 해 봐…….”

그 말을 끝으로 나디아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진은 제 앞에 쏟아진 것들을 빤히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하나를 주워 올렸다.

「수신인 : 진 헤니」

「발신인 : 에이든 테일러」

박스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것들은 편지였다. 놀라 크게 뜨인 검은 눈에서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이게, 이게 다 뭐야…? 그의 손이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안에는 빳빳한 엽서 하나가 들어 있었다.

“…….”

엽서를 꺼내던 진은 봉투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봉투를 쥐고 거꾸로 털자 예쁘게 닦인 유리 한 알이 손바닥에 자리했다. 진 헤니는 작게 인상을 쓰더니 엽서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렸다.

「사랑하는 진에게

진, 나야. 오늘 하루는 잘 지냈어?

난 어제 네 꿈을 꿔서 오늘은 조금 지낼 만 할 것 같아.

사실 꿈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어제는 너를 만났어.

꿈에서 같이 영화를 봤는데,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까 영화를 잘못 골랐던 것 같아.

그때 네가 라라랜드 봤냐고 물어봤었잖아. 그걸 같이 봤어야 했는데.

다음에는 꼭 같이 보자.

찾아보니까 그때 우리 같이 갔던 그리피스 천문대도 나오는 것 같던데,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었구나. 몰랐어.

내가 이거저거 너무 많이 서투르고 바보 같아서 미안해.

진, 아직도 내가 많이 미울 거란 거 알아.

그래도 나 한 번만 더 너랑 얘기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얘기할 마음이 들면 아래 번호로 전화 줄래?

욕하고, 화내고 싶어도 전화 줘.

뭐든 전화 줘, 진.

혹시 내 전화번호 없을까 봐 아래 남겨 둘게.

언제든 연락 줘. 기다리고 있을게.

- 사랑을 담아, 너의 에이든이」

「진에게

진, 오늘은 잘 지냈어?

나는 일 때문에 잠깐 뉴욕에 와 있어.

오늘 타임스퀘어 근처에서 너랑 닮은 뒷모습을 봤어.

분명 그때는 너이기를 바랐는데…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네가 아닌 걸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안심했더라고. 이상하지?

너를 만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매번 연습하는데도 연습한 대로 잘 되질 않아서…

정말 너였으면 또 바보처럼 굴기만 했을 거야.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해서 멍청하게 ‘안녕, 오랜만이야.’ 같은 말이나 했겠지…….

내가 생각해도 최악인 것 같아.

진, 네가 많이 그리워.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있을까?

이번엔 열심히 연습해서 바보처럼 굴지 않을게.

네가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을게.

똑같이 다 돌려받으라면 전부 그렇게 할게.

뭐든 괜찮으니까 곁에만 있고 싶어.

조금이라도 얘기할 마음이 들면 아래 번호로 전화 줄래?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게.

- 사랑을 담아, 너의 에이든이」

「진에게

진, 나야.

슬프게도 나는 예정보다 뉴욕에 오래 머물게 됐어.

네가 여기저기에 있는 LA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쉽지 않네.

뉴욕은 바다가… 별로인데.

그래도 다시 한번 가긴 해야 해. 찾을 게 있거든.

진, 있잖아.

혹시 이 편지 이후에 다른 편지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너를 잊어서도, 너를 만나길 포기해서도 아니야.

더 이상 편지가 도착하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해도 내가 너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고,

너를 너무 만나고 싶기 때문일 거야.

혹시나 오해할까 봐.

진, 내가 진짜로 살아 있는 동안에 너를 잊을 일은 없어.

내 삶에 기억할 만한 건 너 하나밖에 없으니까.

이번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리 인사를 전할게.

메리 크리스마스, 진.

많이 보고 싶어. 그 어떤 때보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네가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

그 가운데 가끔, 아주 가끔은 나도 떠올려 주기를…….

네가 나를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때부터, 언제까지고 너를 많이 사랑해.

- 에이든 테일러」

눈물이 차올랐다 흐르고, 또 다시 차올랐다 흘렀다. 진 헤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수많은 편지를 뜯고, 또 뜯었다. 편지를 뜯을 때마다 반짝이는 유리가 그의 옆에 하나씩 쌓여갔다. 푸른 색이 도는 유리, 초록색… 흰색과 노란색.

셀 수 없이 많은 편지와 유리, 그리고 쏟아져 내린 감정들 사이에 진 헤니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가 유리들을 한 알, 한 알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는 해가 다 질 때까지 한참을 넋 놓고 앉아 있다,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번호를 입력하는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신호음이 끝나고,

“…….”

진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

오늘 밤, 당직은 율리아였다. 그녀는 링거액과 주사, 체온계가 카트 위에 있는지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것들이 전부 있음을 확인한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 이 병원에 입원한 에이든 테일러는 건강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LA에 있는 주치의에게서 날아온 소견서와 진료기록만 봐도, 그의 몸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몸에 무슨 짓을 해 온 건지… 차트를 보던 담당의가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였다.

피검사 결과도 별로인 데다, 심장과 폐는 조금 있으면 제 기능을 못할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아주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고, 약물치료를 받지 않는 이상… 곧 죽을 몸이란 소리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한 번 깨어난 뒤엔 며칠 동안 눈도 못 뜨고 잠만 잤다. 그는 편지 하나를 부쳐주기를 부탁하곤, 현실에서 도망치듯 잠에 빠져들었다. 간간히 앓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많이… 아주 많이 슬퍼 보였다.

“돈도 많고… 뭐가 부족해서 그러지…?”

율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병실로 향했다. 아주 성공한 인생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돈도 많았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살기도 편할 거였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로 돈이 많았으면… 불로불사약 같은 거나 사 먹지, 몸을 이렇게 쓰진 않을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녀가 병실 문 앞에서 작게 노크를 했다. 어차피 안에 있는 사람은 의식이 없으니, 무의미한 짓이지만… 그래도 기본 에티켓이니까.

“들어가겠습니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트 위의 주사기와 약병들을 확인하던 그녀가 환자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

율리아는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찡그렸다. 눈을 꼭 감고, 밀랍인형처럼 누워 있어야 할 에이든 테일러가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텅 비어 버린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급히 주머니 속에서 작은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VIP 병동, 에이든 테일러 환자 병실 내에 없습니다…! 시큐리티 좀 불러 주세요!”

당황한 목소리가 그의 부재를 알리고, 그녀는 병실 안에서 어쩔 줄을 몰라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그녀는 침대 옆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발신인을 확인할 새도 없이 그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에이든 테일러 환자 보호자 되시나요?!”

목소리가 다급했다. 혹시 그의 보호자일지, 그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인 건지. 그녀는 무작정 전화기 건너편의 사람에게 지금 상황을 알렸다. 여기는 뉴욕에 있는 병원이고, 입원해있던 에이든 테일러가 병실에 현재 보이지 않는다고.

“네…? 바다요…?”

뜬금없는 말에 율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다에 가봐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전화를 끊은 진 헤니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다, 그를 찾기 위해선… 바다에 가야 했다.

***

어디에도 없었다. 팔찌는… 정말 어디에도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환자복을 입은 채로 해가 진 바다를 걷는 중이었다. 추운 날씨에 겉옷도 없이, 그는 땅바닥만 보며 걸었다.

그는 한참을 자고 일어난 상태였다. 며칠인지는 몰랐다. 그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대로 계속 잠드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싶기도 했다. 어차피 제게 남은 건 이제 하나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이것마저도 저는 가질 자격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 팔찌에 스민 예쁜 눈빛과 마음을, 저 같은 사람은 가질 자격이 없어서… 그래서 잃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뭐라 변명할 말이 없어서 입이 썼다.

그는 신발도 없이 맨발로 모래들을 꾹꾹 밟았다. 가끔 그가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차올라 바지의 끝단이 조금 젖어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보였다.

그는 지금 춥지도 않았고, 매번 아프고 아리던 심장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숨이 잘 안 쉬어지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모든 감각이 하나씩, 하나씩… 끊겨가는 느낌이었다.

바다에서 두 번이나 죽을 뻔했던 삶이니, 이젠 정말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제게 썩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병실에서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주변에는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가 푹푹 모래를 밟는 소리만 작게 들려왔다. 그는 땅만 보며 걷다가,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이면 잠깐 몸을 웅크려 앉았다. 그리곤 희게 질린 맨손으로 모래를 헤집었다. 혹시나… 있을까 봐.

찾고 싶었다.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많이 찾고 싶었다. 제발, 그거 하나만이라도 가지고 가고 싶었다.

한참이나 모래 안을 뒤적이던 그는 팔찌가 아닌 걸 보곤 몸을 일으켰다. 슬프게 웃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입에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제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따져 보려면, 아마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부러워할지도 모를, 그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 그때로 돌아가야 할 거였다. 그래서 아주 무의미했다. 자신은 그 사람들을 선택한 적 없으니까.

“하…….”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이든 테일러가 허공에 헛웃음을 뱉었다. 그 뒤로 제가 선택한 것들이 하나같이 거지같은 까닭이었다.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에 오갔다.

처음부터 진을 알아봤더라면, 아니면… 그 말도 안 되는 기사가 난 날, 조금이라도 그의 말을 들어보려 했었다면.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를 사랑하고 있단 사실을, 인정했더라면.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천문대에 가고 싶었다. 이렇게 높은 데서 해지는 걸 처음 본다며 네가 감탄하면, 나는 그런 네 모습을 보며 감탄할 거였다. 어차피 야경 따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테니까. 노을을 머금어 아름다운 네 눈과 코, 뺨… 그것만 한참을 들여다보다 내려올 게 분명했다.

네가 쑥스러운 얼굴로 팔찌 하나를 건네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을 수 있었다. 프러포즈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면 오히려 서운할지도 몰랐다. 혹시 저와 평생을 함께하는 게 별로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내내 고민할 거였다.

내 눈동자를 닮아, 그 바다에서 내 생각이 났다는 네 말에 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질 게 분명했다. 우는 건 조금 창피해서 괜히 코끝을 문지르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눈이 붉게 달아오른 걸 들키지 않으려 네 뺨에 입을 맞추고, 품에 꼭 안아 줄 거였다.

‘고마워, 사랑해.’

몇 번이나 네 귓가에 말해 주고 싶었다. 네가 이제 그만하라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아니… 웃음을 터뜨리고도 한참동안을 말해 주고 싶었다.

야경을 다 보고 내려와서는 함께 핫도그를 먹으러 가고 싶었다. 그 핫도그 집은 유명한 곳이라 밤에도 줄을 서서 먹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하나도 지겹거나, 지루하지 않겠지. 우리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한참을 시답지 않은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칠 테니까…….

그렇게 산 칠리 핫도그 두 개를 들고 가로등 아래로 가고 싶었다. 검은 눈에 박힌 별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울 게 분명했다. 네가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면, 황홀한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바보처럼 소스를 다 흘릴지도 몰랐다. 그럼 너는 그런 나를 보고 바보라며 짓궂게 놀릴 거였다.

수백 개의 가로등, 그 사이사이를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불이 다 꺼지고, 남아 있는 사람이 우리 둘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사방에 어둠이 깔리면 네 입에 입 맞추고 싶었다.

네게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다. 곁에 있어서 행복해, 너를 많이 사랑해. 언제고… 언제까지고 옆에 있어 달라고.

에이든 테일러가 흐리게 웃었다. 그리곤 제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전부 다… 제게 있었을지도 모를 날들이었다. 왜 그러지 못한 건지, 대체 왜…….

조금씩 흐르던 눈물은 이제 모래 위로 툭툭 떨어져 길을 만들었다. 제가 왔던 길을 아무리 거슬러 오르고, 또 거슬러 올라도 팔찌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제게 다시 그날들은 돌아올 일이 없었다.

“진…….”

결국 그가 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었다. 눈물로 시야가 희뿌옇게 번져서, 그가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고개가 간절했다.

차가운 모래를 밟고 있는 발, 얼음장 같은 바닷물에 얼어 버린 손끝. 그것들이 한참동안 바다를 헤매고, 또 헤맸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그가 잠시 발을 멈춘 건, 이제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생각했을 때였다.

뒤에서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가만있던 에이든 테일러가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았다.

“…뭐 찾아?”

“…….”

“나 찾아…?”

크게 떠진 푸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전과 달리 여위고 푸석해진 얼굴도, 모래를 잔뜩 묻히고 있는 손과 발도… 전부 다 화가 나서. 잘 지내고 있을 거란 생각과는 다르게, 그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

“…….”

마주 서 있는 두 사람 가운데로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앞에 보이는 사람에 숨을 잠시 멈췄다.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야 했다.

“내가… 약을 안 먹었는데, 왜…….”

“…….”

이젠 약을 안 먹어도 헛것이 보이는 게 확실했다. 너무 간절해서, 죽기 전에 환영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가 고개를 저었다. 현실이라 하기엔 너무 꿈같았다.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에이든 테일러가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을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 발자국, 또 다시 한 발자국을 다가갔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살피던 푸른 눈이 또 다시 눈물에 잠겼다.

“진, 만약에…….”

“…….”

“이게 현실이 아니라서 또… 내가 병실 침대 위에서 눈을 떠야 되는 거면…….”

에이든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가깝게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그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이번엔 절대로 눈을 뜨지 않을 거야.”

“…….”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울음을 삼켰다. 에이든 테일러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바다의 쓸쓸한 소음만이 자리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있기를 한참, 에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 네가 그랬잖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근데 나는 있잖아… 여기든, 거기든… 어차피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

“네가 진짜라고 해 줘… 제발…….”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덧붙여진 말에 진 헤니가 입을 달싹였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말을 고르던 그가 말했다.

“나… 에이든, 나는 지금 네 앞에 있어…….”

에이든 테일러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진 헤니의 눈에서도 이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가 희게 질린 에이든 테일러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왜 어디가…….”

“진…….”

“어디가 아파서 이러는 건데…….”

답답하다는 목소리였다. 여태 미워하고, 원망했던 제가 미안하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지… 왜 이렇게 자꾸 저를 힘들게만 하는지. 잘 눌러서 달래 왔던 마음들이 쩍쩍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새로 참을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이 흘러 나왔다.

“너는 왜 이렇게 나를…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만 해…!”

“진, 나…….”

“왜 이렇게 너만 생각해…! 왜!”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울지 마. 에이든 테일러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 손을 들었다가, 제 손끝이 모래로 엉망인 걸 보고 등 뒤로 팔을 감췄다. 앞에서 우는 진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마음이 문드러졌다.

“내가 다 잘못했어, 진… 울지 마, 응? 울지 마…….”

푸른 눈을 가진 남자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울지 않기를 바라며, 그 앞에서 몇 번이고 미안하다 말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울음소리가 커져서 그는 애가 타 어쩔 줄을 몰랐다.

검은 눈을 가진 남자는 이제야 그가 가진 감정들을 쏟아낼 수 있었다. 여태 애써 괜찮은 척해 왔던 마음이,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말했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괜찮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 줄 테니까. 몇 번이고 미안하다 말하며 상처를 보듬어 줄 테니까.

밤바다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2년 동안, 아니… 어떻게 보면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누군가가 진짜이길 바라며 살아온 사람과, 누군가에게 진짜가 되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해야만 했던 사람.

밤바다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짧은 평생 동안 ‘삶’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던 사람과, 그런 사람에게 진짜 ‘삶’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또 두 사람이 있었다. 더 큰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해 준 사람과, 더 큰 세상이라도 그가 없다면 결국 의미가 없는 사람.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만 나던 곳에는 다른 소음들이 툭툭 튀어 올랐다. 바다는 그냥 잠자코 모른 척을 했다. 투닥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법도 했지만, 푸른 바다는 그저 물을 조용히 밀어 올리며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뒤에 떠 있는 달이 보기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었다. 이제는 푸른 눈을 가진 남자가 가깝게 다가서도, 검은 눈을 가진 남자가 겁에 질려 몸을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지만, 아직 천천히 좁혀야 할 것들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철썩이는 바다도, 밝게 빛나고 있는 달도 두 사람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모든 게 평탄하거나 평화로울 거란 얘기는 아니었다. 여태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온 만큼 앞으로도 가끔 매끄럽지 못한 길을 만날 거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혼자 걷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이 한참을 찾아 헤맸던 삶과 구원, 넓은 세계와 사랑.

그거면 충분할 테니까.

과거에 고여 있던 시간이, 드디어 제 속도로 흐르기 시작한 밤.

모래 곳곳에 박힌 유리가 별처럼 빛나는 밤이었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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