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가튼 머맨 3권
(1) Here I am
빅토르 디얀체코는 제 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 레오나 테일러를 보며 헛웃음을 쳤다. 아버지와 동생이 모두 죽은 사람치고는 낯빛이 너무 맑았다. 그는 대충 그려지는 그림에 입에 비린 미소를 띠었다. 소문을 들었을 때도 꽤나 인상 깊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난년이었다.
“그때 다 못했던 투자처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요?”
레오나 테일러는 제 앞에 있던 글라스를 비우고 말했다. 낯색 하나 바꾸지 않고 육십 도에 육박하는 술을 마시는 그녀였다. 빅토르 디얀체코는 무언가 가늠하듯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지만, 투자라는 건 언제나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는 법이지.”
“굳이 말 안 하셔도 알아요. 그쪽이 제 전문이거든요.”
뭐 그런 쓸데없는 말을 다 하냐는 목소리였다. 뉴욕 월가에서 구르고 있는 그녀에게 투자니 수익이니… 기본 알파벳 같은 소리를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누가 누굴 가르치려고 드는지. 남자 새끼들은 하여튼……. 레오나는 질린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얼마를 투자해서 뭘 회수하고 싶은 건지부터 말씀하세요.”
“나한테 있는 가방 하나를 팔려고 하네. 문제는 가방의 부피가 많이 크다는 거야.”
빅토르는 앉아 있던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대앉으며 말했다. 본론을 꺼내라 채근하니, 저도 갖고 있는 패를 꺼낼 차례였다. 그의 말에 레오나의 눈썹이 들려올라갔다. 가방……?
“얼마짜리 가방인데요?”
“글쎄, 자네 피카소 그림 좋아하나?”
피카소 얘기가 나오자마자 레오나는 대충 각을 잡았다. 가방은 그 가방이 아님이 당연했고, 가방 안에 담긴 것들을 팔아 그 돈을 미국에 녹이려는 계획이었다. 그림을 이용해서, 깨끗한 돈으로. 부피가 크다고 하는 걸 보니 러시아가 파는 것들은 뻔했다. 무기였다.
“피카소, 좋죠. 무슨 그림 제일 좋아하세요?”
“나는 피카소 그림은 다 좋아하네. 하긴, 몇몇 개는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
빅토르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피카소 그림은 한 점당 2억 달러에 육박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무기길래 이래? 레오나 테일러는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취향이 아니더라도 다 사들여야 하거든. 나는 피카소 그림이 한 오십 개는 필요한데, 가능하겠나?”
백억 달러. 생각보다 큰 판돈에 레오나 테일러의 입술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피카소 오십 개, 뭐… 별로 안 어렵네.”
빅토르 디얀체코는 꽤나 도전적인 눈빛을 보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오나 테일러는 그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세탁해 줄 수 있다는 얼굴이었다.
“오십 개를… 깨끗하게 잘 닦아서 갖고 오기가 힘들 텐데……. 아무리 자네라도 말이야.”
떠보는 듯한 눈빛과 말투에 레오나가 비린 미소를 띠었다. 전이었다면 표정관리든 뭐든 했겠지만,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젠 할 필요도 없었고. 어차피 이 러시아 새끼 역시 미국에서 그 정도 규모의 돈을 세탁할 수 있는 게, 저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밀매 얘기를 먼저 꺼냈겠지.
“깨끗하게 잘 닦아서 집 거실에까지 걸어드리면, 나한테 뭐 줄 건데요?”
“뭘 받고 싶은가?”
“저도 피카소 좋아해요. 난 오십 개까진 뭐… 필요 없고, 한 스물다섯 개 정도만 갖고 싶네요. 그럼 앞으로도 계속 피카소든, 고흐든… 제가 잘 닦아다 갖다 드릴지도 모르잖아요.”
오십억 달러는 제 앞으로 돌리란 소리였다. 계약금이 커도 너무 컸다. 빅토르 디얀체코는 헛웃음을 쳤다. 레오나 테일러는 별말이 없는 그를 보며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왜요, 그 정도로는… 돈이 없으세요?”
측은하다는 눈빛에 빅토르가 크게 웃었다. 계약이 성사되고 있었다. 레오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앞에 있던 잔을 들어올렸다. 축배였다. 거지같은 새끼 둘 모두 뒈져 버린 데에 대한, 그리고… 드디어 이 테일러 가가 제대로 된 주인을 찾은 데에 대한, 축배.
***
그녀는 취기라곤 단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눈빛과 걸음걸이로 걸었다. 옆에 서 있는 비서는 꽤나 감명 깊다는 눈으로 레오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까만색 롤스로이스를 보다 피식 웃었다. 그녀의 회색 롤스로이스보다 조금 더 차체가 크고, 여러 것들이 커스터마이징되어 붙어 있는 차. 한스 테일러가 평소 대외적으로 타고 다니던 차는 이제 그녀에게 물려져 내려왔다.
“차를 좀… 바꿔야겠네. 이거 팬텀이죠, 미첼?”
“네, 맞습니다.”
미첼이라고 불린 붉은 머리의 비서는 차를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레오나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거, 갖다 버리고 내 전용으로 다시 맞춰 놔요. 뒤진 새끼 차타는 거 기분 더러우니까.”
같은 차종으로, 훨씬 호화롭게. 레오나 테일러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새로운 비서 역시 그녀 옆자리로 앉으며,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 급히 준비하라 하셨던 보도 자료입니다. 약속에 가시기 전에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주세요. 지금 보면 되니까.”
레오나는 파일 안에 들어 있던 종이 몇 장을 무감한 낯으로 훑었다. 흰색의 복사용지 위로는 커다란 요트 사진과 에이든 테일러의 사진, 그리고… 릴리 콜린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평소 정신착란을 앓고 있던 에이든 테일러, 여성 한 명을 총기로 살해한 뒤 자살」
「피해 여성은 레오나 테일러의 비서, 릴리 콜린스로 밝혀져…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있던 것으로 추정」
그녀는 릴리의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낯이었다.
“미첼, 미첼은… 내가 뭐든 괜찮으니까 갖고 싶은 거 말하라고 하면 뭐 달라고 할 거예요? 음, 만약 미첼이 나한테 엄청 많은 도움을 줘서, 내가 선물을 준다고 하면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물음의 내용은 단순했기에 붉은 머리의 비서는 곧바로 대답했다.
“돈이나, 집. 아니면 주식이나 작은 회사 하나 정도 달라고 하겠죠?”
“그렇지? 그게 맞는 건데…….”
그날, 일을 모두 마치고 난 뒤 레오나는 에이든 테일러의 차를 뒤지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곳엔 제 순종적인 비서가 서 있었다. 레오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쯤 됐으면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를 말하라고. 릴리 콜린스는 부러진 왼팔을 덜덜 떨고 있는 레오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 저는… 바라는 거 없어요. 그저 계속 일을 도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레오나 테일러는 그 대답에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잘못된 대답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잘못된 대답이었다. 그냥 돈이나 차, 아니면 뭐라도 달라고 하면 되잖아.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릴리, 차라리 뭐라도 달라고 했어야지.
- …….
- 왜 자꾸 아무것도 필요 없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동과 감정은 세상에 없었다. 그저 제 비서 일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도, 모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릴리 콜린스에게 받은 도움이 많았다. 그녀는 훌륭한 비서였고, 쓸 만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제게 준 도움만큼 돈이든, 권력이든… 뭐라도 제게 요구해야 마땅했다.
- 바라는 게 없다는 건 전부 개소리예요.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다거나.
그럼 싹부터 잘라야지. 에이든 테일러의 차에는 적당한 물건이 있었다. 두 사람의 죽음에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어 줄 물건. 예를 들면, 권총이라든지.
- 이렇게 하죠. 평소 정신착란을 앓고 있던 제 동생이 유산 상속 문제로 저랑 다투다가 총을 잘못 쏜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자살한 거지. 괜찮지 않아요?
- 레오…….
총성이 울린 건, 릴리 콜린스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던 레오나 테일러가 차가운 낯으로 보도자료를 치웠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려 자켓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녀 손에 잡힌 것은 핸드폰이 아니라 다른 물건이었다. 제 손에 들린 걸 바라보는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언젠가 제게 눈물을 닦으라고 줬던, 전 비서의 손수건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낯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바깥에 버리고는 말했다.
“자료 괜찮네요. 그대로 전달하고, 엠바고 걸어 놔요. 바로 내보내진 않을 거니까. 한꺼번에 둘 다 뒤지면 내가 좀… 이상해지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파나마에 있는 것들, 돌릴 준비하라고 하세요.”
계약금은 무조건 선금이었다. 바로 제게 떨어질 돈을 생각하며 레오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앞으로 모든 건, 한스 테일러가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공격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오십억 가지고는 배가 안 부르지.”
그녀는 오십억 달러 정도로는 배가 차지 않는 사람이었고, 큰돈들은 더 크게, 그리고 더 크게 몸집을 불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 모든 건, 공격적인 스탠스로 진행하세요.”
세상이, 내가 누군지 똑똑히 알 수 있게. 레오나의 푸른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
호텔이라 부르기 힘든 곳에서, 직원이라 부르기 민망한 사람이 데스크에서 껌을 짝짝 씹고 있었다. 호텔 데스크에서 일하고 있는 필립은 앞에 있는 사람을 수상쩍다는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는 키를 줄까 말까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필립에게 방 하나를 달라고 요청한 남자는 모자를 푹 눌러 써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들고 있는 짐이라곤 손에 든 신문이랑 패드뿐이었다.
“그… 저희 호텔이 신분증을 요구를 안 하기는 하는데…….”
“…….”
“막 뭐 킬러라든지, 마약 팔고 그런 거 아니죠?”
껄렁거리는 말투로 필립이 물었다. 덩치하며, 풍기는 분위기하며… 좀 위험해 보이는데…?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더 수상했다. 필립은 모자 아래 가려진 얼굴이 슬쩍슬쩍 보이는 것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숙였다. 뭐 하는 사람…….
“……?”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필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상한 남자가 데스크 위로 현금뭉치를 올려놓았다.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좀 더 깊게 눌러 쓰며 말했다.
“키나 내놔요.”
“아, 넵.”
씨발, 킬러든 마약을 팔든……. 알게 뭐야. 원래 영화에서 보면 이런 데서, 어? 사람도 하나 재끼고 하는 거지. 필립은 제 이번 달 월급을 훨씬 웃도는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실실 웃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키를 내밀었다. 짤랑이는 소리를 내는 은색의 키는 퍽 구시대적이어서 모자를 쓴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 달리 선택지가 없지……. 남자가 키를 주워들어 방으로 향했다. 필립은 그 등 뒤에다 대고 말했다.
“누구 죽일 거면, 내일 죽여요. 내일은 제가 오프거든요.”
“…….”
모자 아래에 가려진 푸른 눈은 조금 아쉬운 눈치였다. 맘 같아선 죽이고 싶긴 한데……. 방법이 지금은 없네. 정말 아깝다는 듯 커다란 손이 턱 주변을 쓸었다.
방문 앞에 도착한 남자는 키를 열쇠구멍에 넣고 돌렸다. 달각이는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안으로 조금 꿉꿉한 냄새가 나는 방이 있었다. 남자는 방문을 닫으며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금색의 머리를 손으로 털며 모자를 침대에 던져놓았다. 손에 들고 있던 패드와 신문을 테이블이라 부르기 멋쩍은 곳 위에 올려놓으며 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죽이진 못할 것 같긴 한데… 일단 없애 놓긴 해야지.”
그래야, 진한테 갈 수 있으니까. 레오나 테일러와 같은 색의, 같은 빛의 푸른 눈이 가라앉았다. 진 헤니를 호텔방에다 가둬 두고 나왔던 그날, 에이든 테일러는 그날과 아주 다른 사람이면서 아주 똑같은 사람이었다. 서늘한 낯의 그는 그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 것을 박살냈다면, 그녀 역시 무엇도 온전하게 가질 수 없었다. 아무것도.
***
그 시간, 진 헤니는 제 앞에 놓인 커다란 박스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열어 보니 온통 까만 옷밖에 없는 게… 제 물건들이 맞았다. 나디아와 알렉스는 그가 뉴욕으로 가겠다고 말하자마자 모든 걸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진은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조심스레 뒤적였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왜, 뭐가 없어?”
박스 안을 초조하게 살피는 진을 보며 알렉스가 물었다. 진은 그 물음에 뭐라 대답은 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알렉스는 그저 빤히 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진이 묻고 싶은 게 뭔지 알고 있었다. 그 쓸데없는 사진들은 없었냐고 묻고 싶겠지.
에이든 테일러의 사진.
“너한테 필요한 건 전부 챙겨 온 거야.”
“아… 응, 고마워.”
진이 단호한 알렉스의 말에 밝게 웃으며 답했다. 알렉스 그레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정하게 마주 웃었다. 비 내리는 창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그날 이후, 진 헤니는 부쩍 평소와 비슷해졌다. 그는 자주 웃었고, 가끔은 나디아와 쓸데없는 수다를 떨기도 했다.
“아, 피자 시킨 거 왜 이렇게 안 와?”
“나디아, 시킨 지 아직 삼십 분밖에 안 됐잖아…….”
“진, 네 그 더러운 방 정리하느라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었거든?!”
나디아의 짜증 섞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관문 쪽에서 벨이 울렸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여태 본 중 가장 빠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렉스는 제게 내밀어진 나디아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돈 내 놔.”
“진짜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나는 분명 피자 먹기 싫다고 했다.”
“나는 먹고 싶다고 했다. 진, 아까 이 자식 카드내역 잠깐 봤는데 얘가 생각보다 돈이 많더라고. 뉴욕에서 먹고 살 걱정은 없겠어.”
나디아 놀즈는 알렉스에게 엄지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자, 됐지? 너를 어필해 줬어. 알렉스 그레이는 그 눈빛에 헛웃음을 켜며 카드를 건넸다. 그녀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커다란 파파존스 피자 박스를 받아들었다.
“나머지 정리는 먹고 하자. 배고파 뒤질 것 같아.”
“진, 너도 얼른 와서 먹어.”
“응…!”
진은 박스를 잠시 쳐다보다 부엌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무슨 피자를 시킨 거냐고 물으며 자리에 앉았다. 맑게 웃는 얼굴을 보다 알렉스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저녁 식사는 평범했다. 하지만 그는 이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시간이 끝나면 어떤 밤이 시작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새벽 한 시, 진 헤니는 먹은 걸 전부 게워내고 있었다. 희게 질린 손끝이 벌벌 떨렸다. 피가 통하지 않는 손과 발이 저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 속이었지만 몸은 진정을 할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 고개를 처박고 있던 진이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로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하던 그가 입술을 물며 흐느낌을 참았다.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진은 이래선 안 된다는 듯 다시 한 번 찬물로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진은 그대로 찬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덮었다.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세면대 물줄기 소리가 제 흐느낌을 가려 덮어 주기를 바라며 울었다. 언제 괜찮아지는 건지 알고 싶었다. 나디아가 말한… 그 아무렇지 않아지는 때가 대체 언제인지, 괜찮아지기는 하는 건지…….
저만 이렇게 힘든 것도 다 서러웠다. 나쁜 건 에이든이었다. 약속도 하나도 안 지키고, 자신을 기억도 못한 사람은 에이든이었다. 심지어 그때를 기억했음에도, 다 필요 없다며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것도 그였다.
진 헤니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고, 자신이 알던 열세 살의 그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란 걸. 그냥 어떻게든 그의 곁에 있고 싶어서, 그래서 많은 걸 스스로 외면하고 합리화 해 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왜… 사진이 한 장도 남지 않았다는 거에 마음이 그렇게 덜컥 주저앉는지……. 앞으로 평생, 다시는 그를 못 볼 거란 사실을 알기에 진 헤니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럼 가끔 보고 싶어질 때는 어떡하지…? 가끔 생각날 수도 있……,
“……진.”
알렉스였다. 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울음을 목 뒤로 넘겼다. 화장실 문 너머에서 알렉스는 조금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이럴 가치도 없는 사람 하나 때문에 아픈 걸 보면 좀…….”
“…….”
“좀 짜증이 나.”
신경질 섞인 손길이 눈썹을 매만졌다. 웬만하면 에이든 테일러 그 새끼와 관련된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싶었다. 해 봤자 좋을 게 없단 걸 알았다. 진에겐 단지 시간이 필요했고, 알아서 절로 치유될 것들이었다. 나디아가 말한 대로 사랑이란 게 그랬다. 당장엔 죽을 것 같지만, 결국 잊고 또 다른 사랑을 하게 될 거였다.
하지만 진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에이든 테일러 하나인 것처럼 굴었다. 그의 몸에,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힌 그 새끼 하나인 것처럼.
“진, 에이든 테일러는… 네가 이럴 만한 사람이 아니야.”
“…….”
“그 새끼는 애초에 너랑은 하나도 안 맞는 사람이야, 그 어떤 것도. 너도 잘 알잖아.”
진 헤니는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 옆엔 그가 가진 순수함과 다정함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세상이 밝아지는지… 그걸 아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했다. 적어도 그게 에이든 테일러는 아니었다, 절대로.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어쨌든 너한테는 나디아도 있고…….”
“…….”
“나도 있어. 그것만 알아주면 돼.”
그 말을 끝으로 화장실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진 헤니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흰 얼굴에서 핏기가 도는 곳이라곤 울어서 붉게 달아오른 눈가뿐이었다. 아직도 눈물이 채 가시지 않은 검은 눈은 머쓱한지 제게 꽂히는 시선을 애써 피했다.
“그냥… 아까 먹은 게 잘 소화가 안 돼서… 그래서 그런 거야.”
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렉스는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아까 먹은 게 소화가 안 돼서라기엔 진 헤니는 거의 매일 새벽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에, 알렉스 역시 모른 척해왔을 뿐이었다.
“나 때문에 깼구나, 미안…….”
“아냐, 나도 다른 데로 갈 생각 하니까 잠이 잘 안 왔어.”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진의 턱에 맺혀있던 물기를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가 앞으로 울지 않았으면 했다. 진 헤니의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면 꼭 말하고 싶었다. 자신은 울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이렇게 슬픈 얼굴로 울음을 꾸역꾸역 참을 일 따윈,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저에게도, 진에게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시간은 알아서 절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어떤 경기에서든 조급하게 구는 순간 호흡이 흐트러질 뿐이었다. 기다릴 수 있었다. 언제고, 얼마든.
“잠 안 오면 같이 뉴욕 맛집 리스트나 뽑을까? 맛있는 거 많더라. 가자마자 하나씩 도장깨기를 할 필요가 있어.”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진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진이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진 헤니와 에이든 테일러에게 허락된 시간은 야속하리만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계속 골이 울리는 느낌에 어금니를 물었다. 바다에 빠져서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몸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열이 오르는 느낌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에이든은 집중이 안 되는지 결국 보고 있던 신문과 패드를 내려놨다. 이럴 때가 아닌데……. 빨리 진한테 가려면 일을 서둘러 끝낼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죽었다고 여겨질 때, 레오나 테일러가 안심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 모든 걸 끝내야 했다.
살아 있다는 걸 들키는 순간 즉사였다. 그때야말로 진에게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못해 보고,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였다. 그건 좀 곤란했다. 아니, 사실 아주 많이 곤란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앞에 있던 핸드폰 하나를 들어올렸다. 언젠가 호텔방에서 눈치도 없이 울렸던, 진 헤니의 핸드폰이었다. 에이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머리가 더 아파왔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제 손에 맞아 코피를 뚝뚝 흘리던 진의 모습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잇새로 작게 욕이 샜다. 갑자기 모든 게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진에게 돌아간다 해서, 그가 자신을 받아 주리란 법은 없었다. 진에게 용서를 구한다 해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럼 그땐…….
“하…….”
그럼 그땐 어떡해야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작게 숙여진 고개가 한참동안 올라올 줄을 몰랐다. 자신은 이제야 다 기억이 났는데, 이제야 진을 제대로 다시 만났는데… 스스로 모든 걸 다 망쳐 버린 뒤였다. 그리고 제가 다 망친 걸 알면서도 염치없이… 너무 많이 보고 싶었다. 정말 너무 많이…….
에이든은 한참이나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속이 복잡했다. 아냐,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진의 곁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못할 게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돌아가야만 했다. 자신 없던 표정의 그는 눈을 꾸욱 눌러 감았다가 떴다. 그리곤 내려놨던 패드를 들어올렸다. 패드의 화면에는 주식 그래프들이 있었다. 에이든은 다시 차분한 눈빛으로 그 곡선들을 바라봤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매일 들여다보고 있는 건 다른 뭣도 아닌 주식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확신이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분명 어떤 때보다 더 공격적으로, 어떻게 보면 조금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몸집을 불리려 할 거란 확신.
레오나 테일러는 한스 테일러보다 훨씬 더 몸집을 키우려고 들 게 분명했다. 아무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도록, 대단했던 자신의 아버지보다 본인이 훨씬 뛰어남을 과시할 거였다.
한스 테일러를 넘어서는 부와 권력. 그녀가 원하는 건 그거였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가장 자신 있는 방법을 사용하겠지. 예를 들면, 그녀의 특기라고 볼 수 있는 주가조작이라든지 말이다.
월가에서 구르던 그녀의 주종목이었다. 실체 없는 회사 하나를 번듯한 기업처럼 공시하고, 눈 먼 돈들을 때려 박아 주가를 조작하는 것. 그건 거액의 자본으로 누가 봐도 매력적인 상승곡선을 만들어 놓는 일이었다. 그럼 거기서 풍기는 단내에 개미들이 바글바글 몰려들 테니까. 그렇게 주식은 더, 더 끝 모르고 올라 상한가에서 굳어질 거였다.
아주 낮은 금액에서 시작했던 주식은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초기에 투입됐던 주인 없는 돈은 뻥튀기되어 레오나 테일러의 품에 돌아가는 구조였다. 그녀가 만들어 둔 파나마의 페이퍼컴퍼니에서 깨끗하게 세탁되어서.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알아챌 수 없게 조용히 돈을 쪼개 빼다 나르는 일이었다. 한 번에 큰돈이 빠져나가면 수상해 보이니까.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는 그녀가 조용히 일을 성공시키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파나마에 네 개…….”
페이퍼컴퍼니는 파나마에 네 개라고 했었다. 차트를 살피는 푸른 눈이 바빴다. 상한가가 아주 높은 지점에서 굳어진 주식은 총 일곱 개, 그 중 기업이 공시된 지 얼마 안 된 건 다섯 개, 파나마에 기업을 두고 있는 곳은 세 개.
세 개 중 어떤 게 레오나 테일러가 움직이는 회사일지는 알 수 없었다. 세 개 다 일수도 있었고, 물론 하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눈썹을 매만졌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패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뭐… 알게 뭐야.”
뭘 고민하는 거야?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지금은 뭐가 맞고 아닌지를 따지거나 알아볼 시간 따위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갖고 있는 걸 전부 쏟아 붓는 것뿐이었다. 백퍼센트 도박이었지만…….
“세 개에 전부 다 꼴아박지, 뭐.”
아주 작은 확률에 그는 가진 모든 걸 배팅했다.
패드 위에서 움직이던 손가락은 할일을 마치곤, 미련 없다는 듯 그것을 침대 위로 던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끊임없이 아픈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결국 싸구려 담뱃갑을 찾아들었다. 고급 대마를 제외하곤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어서 그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입에 물자마자 훅하니 끼쳐오는 싸구려 냄새에 역한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데서 티가 났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쨌든 그런 집에서, 그런 사람들과 살아온 이였다. 그들이 아무리 그를 불량품이나 덜떨어진 새끼 취급을 해도 그 역시 그들과 많은 걸 공유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찍어 누르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제 손에 가장 많은 걸 쥘 수 있는지. 그가 살면서 배운 거라곤 그딴 것뿐이었다.
‘대체 뭘 배웠냐니, 레오나. 너랑 똑같은 걸 배웠지.’
에이든 테일러가 그렇게 생각하며 싸구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뒤,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의 계좌에서 거액의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일은 겉보기에 아주 순조로웠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레오나 테일러는 제가 원하던 대로 아주 예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래프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동물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푸른 눈이 가늘게 뜨이고, 손톱이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동자가 그래프 여기저기를 뜯어보고 있었다.
“씨발, 어떤 새끼가…….”
알 수 없는 큰돈이 어디선가 유입되고 있었다. 개미들이 야금야금 주식을 사 나르는 것과는 달랐다. 다른 판을 짜는 누군가인지, 뭔지는 판단이 되질 않았지만 돈을 빼야 했다. 가뜩이나 러시아에서 들어온 큰돈이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까딱 잘못했다간 전부 다 발각될 수 있었다. 그냥 단순한 큰돈도 아니었다. 무려 그 ‘가방’에 걸린 돈이었다. 어금니가 까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레오나는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파나마에 가 있는 돈이랑 주식들, 적당히 쪼개서 빼기 시작해요. 아무래도 흐름이 이상한 것 같으니까.”
단위가 큰돈이라 쪼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지금부터 빠르게 빼야했다. 레오나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빠르게 빼되, 조급해선 안 됐다. 큰돈이 한 번에 움직이기 시작하면 곧바로 수사대상이 될 테니까.
“지금부터 최대한 빠르게 빼서 이번 주 안에 전부 다 회수해요.”
[ 이번 주 안으로 말씀이십니까? ]
“왜요, 어려워요?”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상대는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에게나 어렵지 않은 일이지, 저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오십억 달러를 어떻게 이번 주 안으로 다 회수하라는 건지. 말도 안 됐다.
“못하겠어요? 이것도 못해서 어떡하지? 다 잘라야 되나?”
[ 아, 아닙니다. 지금부터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
“나도 곧 그쪽으로 갈 테니까, 오늘 장 닫힐 때까지 최소한 오억 달러는 빼 놔요.”
살벌한 레오나의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제는 그녀가 또 다른 사무실로 이동하기까지, 그 시간동안에 일어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직원들은 지금 막 도착한 레오나 테일러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이나 화면만 보는 중이었다. 눈빛이 살벌해서 그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보고하거나, 현재 진행상황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떤 씹새끼가 이따위 장난질이지……?”
그냥 단순히 큰돈이 유입되는 것 같다, 에 그치던 상황은 조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장이 닫히기 직전, 그래프는 거의 일직선으로 꺾여 위로 솟아올랐다. 티 나지 않게, 안정적으로 돈을 불려오던 그녀의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어떤 또라이 같은 새끼 하나 때문에.
이 상황이라면 슬슬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수사가 따라 붙을 거였다.
“내일 아침부터, 이틀 안에 전부 다 빼요.”
레오나 테일러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리고 상냥했다. 하지만 그 뒤에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사무실 안의 직원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이틀 안에 빼, 전부 죽고 싶지 않으면.’
정적이 감도는 사무실엔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에이든 테일러는 때를 기다리는 짐승처럼 가만히 패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제 장이 닫히기 직전, 세 개의 주식에 비슷한 금액의 돈을 넣은 그였다. 셋 다 그래프가 거의 일직선으로 꺾여 올라갔다. 이제 장이 서는 순간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면 될 일이었다.
턱을 매만지며 시계를 보던 그는, 주식 시장이 열리자마자 조금씩 아래로 꺾이기 시작하는 그래프 하나를 바라봤다. 한쪽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바로 빼는 걸 보니 마음이 좀 급한가 보네. 뭘 얼마나 처넣어 놨으면…….
레오나 테일러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자신도 숫자를 갖고 놀거나, 돈을 굴리는 데에는 나름대로 취미가 있었지만, 그녀만큼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갖고 굴리는 돈의 단위부터 달랐고, 무엇보다 그녀는 직감적이고 기민하게 돈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돈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걸. 푸른 눈이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래프를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 에이든과 같은 그래프를 보고 있는 레오나 테일러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대체 뭐 하는 새끼야? 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아무 데나 꼴아박는 새끼가 아니고서야, 하는 짓이 뭔가 수상했다.
“조금 더 서둘러서 빼요.”
“더 큰 단위로 뺐다간 조금 위험,”
“저 새끼가 돈 집어넣는 타이밍 봐서 내 돈은 빼면 되잖아. 그래프에 티 안 나게.”
답답하다는 목소리였다. 이 이상한 짓거리는 장이 끝나갈 때까지 계속됐다. 레오나 테일러는 결국 신경질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파나마에 있는 저 페이퍼컴퍼니, 최대주주가 누구로 잡히고 있냐고. 허둥대던 직원 하나가 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베, 벤자민 프랭클린입니다.”
“뭐, 누구?”
레오나 테일러는 아예 처음 듣는 이름에 인상을 찡그렸다. 들어 본 적이 없는 걸 보니 차명계좌였다. 씨발, 어떤 새끼가 장난질…….
“…….”
푸른 눈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멈칫했던 레오나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말도 안 됐다. 그 새끼는 지금쯤 바다 저 아래에서 부패하고 있는 게 당연했다. 스스로가 생각해 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한참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던 레오나는 직원들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장이 거의 닫히기 직전, 그래프는 일직선으로 꺾여 바닥에 처박히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의 낯이 무섭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장면에 넋을 놓고 있던 그녀는 책상 위에서 울리는 제 핸드폰을 바라봤다. 메시지였다.
「너만 급한 게 아니라서. 나도 급한 일이 좀 있어.」
“하, 씨발… 다 같이 죽자는 거였네.”
그녀의 입술이 삐뚤게 올라섰다. 이 개새끼가……. 오십억 달러가 휴지조각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가장 문제인 건 따로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페이퍼컴퍼니를 두고 돈장난을 하고 있던 게 까발려지고도 남았다. 거기다 러시아 돈까지 개입된 이상…….
「잘 가, 레오나」
그녀는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체념한 낯으로 어금니를 물었다. 메시지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사무실엔 불청객 여럿이 들어왔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자꾸 웃음이 나려고 했다.
“레오나 테일러, 당신을 주가조작 혐의 및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레오나 테일러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있었다.
***
그냥… 한 장만, 딱 한 장만…! 모자를 푹 눌러쓴 진은 아랫입술을 씹으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곤 주머니에 넣어 놨던 키를 꺼내 들었다. 손이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철컥이며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슬며시 열린 문 안으로, 짐이 대부분 비워져 허전한 집이 보였다. 몇몇 가구들과 작은 짐들을 제외하곤 모두 치워져 있었다. 그런 안을 둘러보는 진의 눈길이 초조했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었다. 아직 에이든 테일러를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진은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렇게 한 번에 다 없어져 버리는 것보다, 준비가 됐을 때, 제 손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이렇게… 갑자기는 안 될 일이었다.
진이 한쪽 벽에 쌓여 있는 책더미에 다가섰다. 그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책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 권, 한 권 들춰 보는 손길이 많이 조급했다. 알렉스가 가져다 준 상자에 분명 일기장이 없었는데… 여기 어디에 있어야 하는데…….
깨끗하게 쌓여 있던 책이 우르르 무너졌다. 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일기장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남아 있는 책이 얼마 없어지고 있었다. 진의 표정이 점점 울상이 되기 시작했다.
“왜 없지…? 분명 여기 어디에 있어야…….”
작게 울먹이던 목소리가 멈췄다. 일기장이었다. 진 헤니는 드디어 찾은 것에 안도하며 웃었다. 노트를 펼치는 손이 급했다. 그는 펄럭이며 종이를 펴다 툭하니 제 발 아래에 떨어진 것을 바라봤다.
“…….”
진은 그대로 가만 얼어 있었다. 제 발 아래에 떨어져 있는 건, 사진이었다. 흰색의 뒷면만 보이고 있었지만 진은 알 수 있었다. 제가 찾던 사진이 맞았다. 사진은 얼마나 꺼내 보고, 만지작거렸는지 모서리가 조금 낡아 있었다.
한참이나 그 네모난 종이를 내려다보던 진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사진을 들어올렸다. 앞으로 돌려진 사진에는 밝게 웃는 에이든 테일러가 있었다. 앞에 나설 자신이 없어서 그를 몰래 따라다니며 훔쳐보기만 했던 반 년. 그때동안 딱 한 번 봤던 표정이었다.
열세 살 때와는 다르게 웃는 일이 드문 그였기에, 진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었다. 가장 많이 들여다보며 가끔은 마주 웃어 보기도 했던 사진. 전에는 이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났는데, 지금은… 지금은 눈물이 났다.
진 헤니는 또 속도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이를 악물었다. 며칠 전까지는 마냥 슬퍼서 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에이든이 미워서 눈물이 났다. 이젠 그가 아무리 해사하게 웃어도,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이래서 알렉스가 사진을 다 버린 게 분명했다. 어차피 봐 봤자 화만 나고, 제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진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사진 속 에이든을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과 화가 가득했다.
진은 사진을 다시 일기장에 끼워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뺨과 턱에 흐르는 눈물을 슥슥 문대 닦고는, 일기장을 바닥에 툭하니 던져 놓았다. 그리곤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막상 사진을 보니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사진 같은 거 필요 없어. 없어도 돼.’
아직도 흥건한 눈물을 닦으며 현관문 밖으로 나서길 세 발자국. 진 헤니는 복도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표정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바보 같았다. 자신은 바보멍청이가 확실했다. 세 발자국도 채 못 가서 다시 가지고 오고 싶을 거면, 대체 왜 저기에 두고 온 거냐고 속으로 물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한 답은 진 헤니 스스로도 몰랐다. 진은 눈을 꼬옥 감았다 뜨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집 안에 들어갔다 나온 그의 주머니에는 흰색의 종이, 그 모퉁이가 뾰족하니 튀어나와 있었다.
진은 그 길로 집에서 나와 다시 알렉스 그레이의 집으로 향했다. 잠깐 앞에 간식을 사러 간다 해 놓고, 나와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진 헤니가 알렉스 그레이의 집 앞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그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알렉스였다. 아무래도 너무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진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 진, 너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더니 대체 어디야! ]
“응, 알렉스…! 나 지금 바로 들…….”
거의 뛰는 걸음으로 돌아가던 그때, 진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말을 멈췄다.
“…….”
“…….”
서두르던 발도 멈춘 지 오래였다.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은 그 어떤 말도 먼저 꺼내지 못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저 조금 초조한 낯으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진?!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
진 헤니는 크게 떠진 눈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이 뉴욕에 가기까지 5일이 남은 시점이었다.
***
오면서 분명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고 했지만, 막상 진을 보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에이든 테일러의 머릿속이 진창이 되고 있었다.
일을 적당히 마무리 지은 에이든 테일러는 그 길로 진 헤니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거의 미친 것처럼 운전하는 차에 도로가 난리였다. 그는 차에 엑셀 밖에 없는 것처럼 운전했다. 혹시 벌써 다 정리하고 떠나 버린 건 아닐지,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진의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그는 버스에 오르는 진 헤니를 보고 급히 핸들을 꺾었다. 에이든은 안도했다. 제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진이 영영 떠나버리지 않았음에. 작게 한숨을 쉬던 에이든 테일러는 진이 탄 버스와 속도를 맞춰 운전했다.
모자에 가려져 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전보다 많이 여위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창문가에 앉은 진은 입을 꾸욱 물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손에 든 종이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는 그 종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젓거나, 고개를 더 깊게 숙이곤 했다.
입술을 꾸욱 깨물며 고개를 젓기를 몇 번,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하자 에이든 테일러 역시 바빠졌다. 그는 버스에서 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차를 버리듯 주차했다. 그리고 서둘러 내려 진에게 달려갔다.
‘먼저… 먼저 미안하다고 얘기를… 아니, 일단 길거리에서 말하기는 좀 그러니까… 주변에 어디든 들어가서…….’
심박수가 높아지고 있었다. 진과 한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정신을 잃을 것처럼 뛰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이 고개를 들어서 눈이 마주쳤을 때, 에이든 테일러는 모든 사고가 정지하는 걸 느꼈다.
“…….”
“…….”
전부 다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혹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시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으니 뭐든 말해 줄 수 있냐고. 이제야 제대로 기억이 돌아왔는데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염치없는 거 알지만 네 곁에 있을 수 있을지……. 기회만 준다면 평생 옆에서 용서를 구하며 살고 싶은데…….
나름대로 정리했던 말들은 무거운 침묵에 깔려 하나도 소리가 되지 못했다. 크게 떠진 검은 눈을 보다 에이든 테일러는 주먹을 꾸욱 눌러 쥐었다. 뭐라도… 뭐라도 얘기를 해야 했다. 이렇게 등신처럼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진, 저기…….”
“…….”
그가 한 발자국 진에게 다가서자 진이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에이든 테일러는 겁에 질린 그의 눈을 보다 숨을 삼켰다. 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에이든 테일러의 푸른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은 깨닫고 있었다. 예쁘게 웃는 에이든의 사진, 그 사진을 보며 혼란스럽던 마음은 단번에 깨끗해졌다. 그는 에이든 테일러를 실제로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섬에서 함께 유리를 줍던 에이든 테일러는 더 이상 없었다. 지금은 제 목을 틀어쥐고 사납게 웃던, 그 에이든 테일러만 있을 뿐이었다. 그를 보니 언젠가 주사바늘에 찔렸던 곳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왜… 나, 나한테 아직 볼 일이 남았어…?”
“…….”
“인정하면… 내보내 준다고 했잖아…!”
말하는 목소리가 많이 흔들렸다. 에이든은 제게서 뒷걸음질 치는 진을 따라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에이든은 숨을 들이마신 뒤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숨이 턱하니 막힌다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사람한테 돈 받은 거 맞아. 내가 전부 다 거짓말한 거야…. 네 말이 맞아…! 거짓말한 거, 인정하면 나가게 해 주겠다 했잖아…!”
진은 다시 그 방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를 마주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제가 평생 사랑해 왔던 열세 살의 에이든을 더 이상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예쁘고 반짝이는 기억들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어떻게 해도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자신을… 사랑할 일 따위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자신은 놔 주면 될 일이었다.
대체 다시 나를 찾아올 일이 뭐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진의 검은 눈이 흔들릴수록, 에이든의 입 안이 말라갔다.
진은 제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인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말하고 있었다. 그를 보는 에이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참 멍하던 푸른 눈에 때를 잊은 눈물이 차오르려 하고 있었다.
절박한 낯의 에이든이 다시 한발자국 진에게로 다가섰다. 더듬더듬 뱉어진 그의 목소리도 많이 떨리고 있었다.
“진, 나 너한테 할 말이…!”
“내가… 내가 그, 약속한 거, 그거 안 지켜서 그래?”
약속…? 에이든 테일러는 약속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한 발자국을 더 다가섰다. 발걸음이 초조했다. 약속을 안 지킨 건 진이 아니라 저였다. 약속, 나… 지금 다 기억났는데, 우리 약속했던 거… 그거 지금이라도 지키고 싶…….
“세 달 못 채워서 그러는 거야…? 아직도 그거 필요해? 왜…?!”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진과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에이든이 서로를 마주봤다. 잠시 멈춰 있던 에이든은 진 헤니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지금 세 달의 계약 기간을 말하고 있는 거였다. 제 옆에서, 가짜 애인 행세를 하기로 약속했던 시간.
에이든의 표정이 무섭게 구겨지자 진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아무래도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에이든 테일러가 저를 찾아올 일은 없었다. 세 달을 채우려면 아직 2주나 남아 있었다. 주말만 만나는 거니까… 네 번.
네 번……. 흔들리는 검은 눈이 여기저기를 불안하게 헤맸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진은 또 한걸음을 뒤로 멀어지며 에이든에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거리는 어떻게 해도 좁혀지질 않았다.
“네, 네 번만 더 채우면, 그럼 다시는… 안 만나도 되는 거지? 그런 거지…? 그럼 나 필요 없잖아…!”
에이든은 다시는 안 만나도 되냐는 소리에 낯을 굳혔다. 안 될 일이었다. 저한테 필요 없는 건 진 헤니가 아니라, 그딴 거지같은 가짜 애인 행세였다. 에이든이 초조한 얼굴로 진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거 아니야…! 진, 잠깐 내 말 좀……!”
조금씩 좁혀지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누군가에 의해 가로막혔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앞을 막고 선 사람을 보다 사나운 눈빛을 했다. 에이든 앞에 서 있는 사람 역시 험악한 낯으로 어금니를 씹고 있었다.
“어쩐지 애가 안 들어온다 했더니, 웬 개새끼한테 잡혀 있었네.”
이를 악물며 뱉어진 목소리였다. 빈정거리는 낯으로,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초록색 눈에 에이든이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저 녹색 눈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좆같았다.
“…비켜.”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알렉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그럽게, 자신이 들어 주겠다는 표정으로. 에이든은 점점 험한 말이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어금니를 무느라 에이든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는 나오려는 욕을 목 뒤로 넘기며, 알렉스의 뒤에 선 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 나한테 잠깐만 시간을,”
“답답하네. 머리가 나쁜 건지, 씨발, 개새끼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나한테 얘기하라니까?”
“하, 이 씹새끼가…….”
결국 참았던 욕이 입 밖으로 샜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알렉스 그레이를 바라봤다. 맘 같아선 빈정거리는 낯을 당장에라도 뭉개고 싶었으나, 뒤에 서서 불안한 낯을 하고 있는 진을 보자니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에이든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하, 네가 뭔데 너한테 얘기를 하라 마라야.”
“그러는 넌 뭔데. 넌 뭐라도 돼? 아닐 텐데?”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초록색 눈이 더 이상 참아 주기가 힘들었다. 에이든의 눈빛이 사나워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뒤에 있던 진이 제 옷자락을 당기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점점 험해지는 분위기에 진은 많이 불안해 보였다. 진은 알렉스를 보며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얼른… 그냥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언젠가 에이든 테일러에게 맞아 피를 철철 흘리던 호텔직원 하나가 떠올랐다. 괜히 저 때문에 맞아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그 사람. 일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도… 또 겪고 싶지 않았다.
진은 입술을 씹다 무언가 결심한 낯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이제야 저를 향하는 시선에 무어라 말하려 급히 입을 뗐지만 진 헤니의 단호한 목소리가 먼저였다.
“진, 나 기억…….”
“네 번이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할게, 그럼 됐지? 그럼 다 끝난 거지…?”
진 헤니의 표정은 절박했다. 네 번만 더 그 일을 하면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어서 그렇다고 말하란 표정이었다. 에이든은 말하려던 입을 멈추고 잠시 얼어 있었다. 불안한 검은 눈을 보다 그가 대답했다.
“그래…….”
네 번, 지금의 그에겐 그거라도 필요했다. 지금 에이든 테일러에게 필요한 건 네 번의 애인 행세가 아니라, 네 번이나마 진 헤니와 둘이서 뭐라도 얘기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에이든이 무겁게 가라앉은 낯으로 한숨을 쉬다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여기로 데리러올게.”
“뭐? 지금 무슨……!”
“아, 알겠어.”
알렉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진이 알렉스를 잡아끌었다. 어서 들어가자는 것처럼. 알렉스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진에게 설명을 구했다. 저 새끼가 데리러온다는 게,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일단 들어가자.”
“…….”
“알렉스…?!”
알렉스 그레이는 조금 더 강하게 저를 잡아오는 손길에 결국 걸음을 옮겼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저 그 모든 걸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초록색 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를 훑고 멀어졌다.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에이든 테일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네 번, 자신에게 주어진 단 네 번의 기회를 생각하며.
***
진의 이야기를 듣고는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말… 말도 안 되게 화가 나는 소리였다.
“그딴 짓을 왜 더 해야 되는데!”
“그냥… 네 번이면 되니까…….”
“네 번이든 한 번이든 그게 뭐가 중요해!”
터지는 큰소리에 진이 어깨를 움찔했다. 알렉스는 그 모습에 아차 싶은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터지고 있었다.
진 헤니는 크게 소리를 지르는 거나, 화가 난 얼굴에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알렉스 그레이 역시 일종의 트라우마 비슷한 걸 겪고 있었다. 다시는 그딴 무기력함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지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함이야말로 알렉스 그레이에게 가장 생소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처럼 아무런 노력도 해 보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서 진을 잃고 싶지 않았다.
“진, 그 새끼가 다시 찾아올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면… 그냥 뉴욕에 갈 때까지 답답하더라도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 그럼 되잖아.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아니야, 차라리 잘된 것 같아….”
“……?”
알렉스는 이해되지 않는 말에 작게 인상을 썼다. 진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눈을 꼭 감고 말을 이었다.
“알렉스, 나한테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줘…….”
“…….”
“나디아랑 네가 이것저것 빨리 정리해 줘서… 편한데, 편하기는 한데… 괜히 어디에 뭐가 있고, 뭐는 없고… 자꾸 찾게 되는 거 같아.”
꼬옥 감았던 눈을 뜨고, 진이 알렉스를 바라봤다. 알렉스는 진지한 검은 눈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그의 물건들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또 동시에 에이든 테일러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거니까 내 손으로 정리하고, 내가 버리고… 그렇게 할래. 그래야 나중에 괜히 들춰 보거나 찾지 않을 것 같아.”
진은 오늘 책더미를 뒤지며 심장이 쿵쿵 뛰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불안했다. 어떻게든 다시 찾아서 가지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찾던 사진을 손에 쥐었을 때, 그리고 오늘 에이든 테일러를 봤을 때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저를 꼭 기억하겠다 말했던 에이든 테일러와 그깟 기억이 다 무슨 소용이냐 말했던 에이든 테일러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여태껏 자신이 혼동해 왔던 거였다.
그래선 안 됐다. 차라리 오늘처럼 그를 직접 마주하고, 자신이 생각하던 사람과 다른 사람임을 스스로 깨닫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말도 안 되는 미련이 없을 거 같았다.
“네 번이면 다 깔끔하게, 그렇게 될 거야…….”
설령 깔끔하게 마음이 정리되지 않더라도 어차피 뉴욕으로 떠난 뒤일 테니까. 진 헤니는 흐린 낯으로 알렉스 그레이를 바라봤다. 초록색 눈이 무거운 눈빛으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진은 제가 없어졌을 때 많이 걱정했던 알렉스와 나디아를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때처럼 걱정할 일 없게 할게. 연락도 자주하고…….”
“…….”
에이든 테일러 앞에서 당황하고, 겁먹었던 진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알렉스 그레이는 알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그를 찾아온 이유는 꼴 같지도 않은 애인 행세가 더 필요해서가 아님을.
앞으로 걱정할 일은 진이 다시 어디에 갇히거나 그 새끼한테 나쁜 짓을 당할지 말지가 아니었다. 알렉스 그레이는 제 앞에 서있던 에이든 테일러의 절박한 눈빛을 진작 알아챘다. 그는 진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거였다. 진 헤니를 다시 제 품에 찾아오고 싶은 거였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알렉스 그레이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일이었다. 짜증이 났고, 신경질이 났다. 열세 살 때부터 에이든 테일러만을 그리워했다는 진 헤니가, 그가 나쁜 사람인 걸 알면서도 결국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돌아갈까 봐.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렇게 되도록 둘 생각도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진 헤니의 곁에 있기 위해 전부를 걸 수 있는, 혹은 이미 전부를 건 사람은 그 하나만이 아니란 거였다.
“그래, 네 번… 진, 네 번만이야.”
알렉스의 말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흐리게 웃는 진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대신 계속 나한테 연락해야 해. 걱정되니까. 그리고… 어디 있는지 말하면 내가 데리러갈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
“데리러갈게.”
목소리가 단호했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보내 줄 수는 있었지만, 다시 되찾아오는 건 제 몫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초록색의 눈은 생각보다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이제껏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었던 건 사실 딱 한 가지 이유였다.
그는 많은 이들이 제 뒤로 뒤쳐지는 걸 좋아했다. 제게 패배하여 아쉬움을 삼키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알렉스 그레이는 일단 경기에 들어선 이후엔 모두를 앞지르고, 결국 제 목에 메달을 걸어야 성에 차는 사람이었다. 그건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빼앗기지 않을 거였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
진을 만나러 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약속 시간 두 시간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까만색 천에 싸여진 무언가가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에이든은 지금 그의 맨션이 아니라, 집에 있었다. 집이라 부를 수 없는, 그 집.
“이쪽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문서 몇 장을 바라보다 앞에 있는 만년필을 들었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름을 적어 넣었다.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정말 굳이 이럴 필요가 있는지, 저까지 아까워지는 지경이었다. 어차피 본인은 수사나 조사 대상에서 빠졌는데 굳이……. 남자가 조금 전 사인하라고 내민 문서는 유산 상속 포기 각서와 더불어…….
“말씀하신 대로 한스 테일러 님이 남기신 모든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는 걸로 진행하겠습니다.”
“네, 보도 자료도 내가 말한 때에 잘 나갈 수 있게 해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서류였다.
레오나 테일러는 그 길로 구속됐다. 하필이면 한스 테일러와 그녀가 쥐고 있던 돈이 러시아 돈이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러시아 쪽에 워낙 민감한 미국 정치계로서는 아마 ‘테일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모두를 감옥에 처넣고 싶을 거였다.
그러니 어느 정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마땅했다. 여태껏 그렇게 불려온 돈을 사회에 모두 환원한다든지, 뭐… 그런 방법들로. 어차피 별 관심도 없던 돈이라 에이든은 아깝지도 않았다.
물론 미국이 ‘테일러’를 감옥에 처넣고 싶어도 한 명은 이미 죽어서 불가능했고, 다른 한 명은 이미 감옥 안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수사 대상에서 제외였다. 정말 웃기게도 여태 미친놈처럼, 바보마냥 굴고 다녔던 보상이었다.
세상이 아는 ‘에이든 테일러’는 검은 돈, 정치자금과 연관 짓기엔 너무 멍청한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증거라 볼 수 있는 차명계좌는 이미 공중분해 시킨 지 오래였다.
저를 뺀 또 다른 한 명은……. 지금쯤 호흡기를 차고 병원에 누워 있을 줄리아 테일러를 떠올리며, 에이든 테일러는 제 옆에 늘어선 것들을 바라봤다. 검은 천 아래로 반질한 금색의 꼬리가 보였다. 평생 썩지 않도록 약품이 덕지덕지 먹여진 깃털이었다.
한스 테일러와 레오나 테일러가 모두 그렇게 되고, 줄리아는 충격으로 쓰러져 영영 병원 침대 신세를 지는 몸이 됐다. 몸 껍데기는 남아 있지만, 생은 담겨 있지 않은 상태로. 어떻게 보면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지나치게 아름답고 완벽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안이 텅텅 비어 있는, 절대 날개를 펼칠 일 따위 없는 이 역겨운 새들처럼.
“이것들은 전부 태워요. 최대한 빨리.”
“네, 집을 처분하면서 함께 처리하겠습니다.”
에이든은 제가 사인한 종이 두 장을 두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경 써 입고 왔던 셔츠가 조금 구겨져서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다시 들러서 옷을 갈아입을까. 맘에 들지 않는단 표정으로 옷을 살피던 그가 터지는 기침에 입을 틀어막았다.
바다에 빠져 두 번이나 죽을 뻔한 몸은 내구성이 조금 약해진 것 같았다. 깨어나서 바로 치료를 받지 못했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장께가 뻐근해지는 느낌에 그가 어금니를 물었다.
“그 새끼가 먹던 심장약이라도 먹어야 되나…….”
한스 테일러가 뒤지면서 남긴 돈들은 하나도 물려받지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그가 가지고 있던 다른 것들이 제게 물려 내려온 기분이었다. 하여튼 그 새끼는 뒤져서도 기분을 좆같이 만든다니까. 에이든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렇게는 진을 보러가기가 좀… 그랬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옷도 좀 갈아입고 머리도 다시 만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거지같은 곳에 머물던 꼬라지로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진 헤니가 알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로, 그에게 가고 싶었다.
***
옷을 뒤지는 손길이 급했다. 계속 옷을 갈아입고 있으려니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아무리 찾고 찾아도 마음에 드는 옷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옷걸이를 휙휙 넘기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건 너무 꾸민 것 같아서 별로였고, 저건 또 너무 신경을 안 쓴 것처럼 보여서 별로였다. 그가 잔뜩 찌푸려진 눈썹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왼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삼십 분 뒤면 출발해야만 했다.
옷을 한참이나 뒤지던 에이든 테일러는 결국 네 번째로 입어 봤던 셔츠를 다시 입기로 결정했다. 어디다 걸었지? 찾으려니 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에 그가 혀를 찼다. 첫 시작부터 뭔가 잘 안 풀리는 기분이라 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조급하게 옷걸이를 넘기던 손이 짙은 푸른색의 셔츠를 들어올렸다. 입고 있던 것을 벗고 그 셔츠를 걸친 에이든이 거울 앞에 서 단추를 잠갔다.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도록 소매를 조금 접어 올린 그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금색의 머리칼이 적당히 깔끔한 모습으로 넘겨졌다.
그는 급히 드레스룸을 나서려다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다시 뒤를 돌았다. 향수, 그때 그 향수가……. 그는 언젠가 진에게 입혀 보냈던, 그 셔츠에 뿌려진 향수를 찾고 있었다. 그는 여러 바틀 중에서 푸른색 병을 들어올렸다. 마치 파도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병이었다.
에이든은 향수를 손목에 뿌리다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진을 만나러 가기까지, 그리고 그에게 용서를 구하러 가기까지 긴장이 많이 됐다. 그리고 긴장, 초조함과 더불어 제가 느끼고 있는 건 주제도 모르는 설렘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십 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까. 그는 이제야, 십 년 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과 다름없었다. 긴장이 안 될 리가 없었고,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에게 많이 잘 보이고 싶었다. 어떻게든, 뭐라도 잘 보이고 싶었다.
“하…….”
잘 보여야 하는데… 겁에 질려 있던 검은 눈이 생각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오늘부터 조금씩… 잘 얘기하면 달라질 수 있을 거야. 에이든 테일러는 자꾸 떨어지는 자신감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이젠 정말 그에게 갈 시간이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차키를 들어 올리며 에이든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연습이었다. 그때처럼 무슨 말도 못해 보고, 바보처럼 굴다가 돌아올 순 없었다. 그는 진과 만나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할지, 지난 밤 내내 고민했던 것들을 입으로 되뇌었다. 차에 올라, 진을 데리러가는 내내.
잘못했다고 말하고, 그 다음에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묻고… 만약 용서를 못하겠다고 하면…….
“…….”
점점 가까워지는 목적지에 목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용서를 못하겠다고 하면… 일단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원하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 옆에 있을 수 있게만……. 핸들을 쥔 손에 자꾸 땀이 났다. 에이든은 제 눈앞으로 바로 보이는 어제 그곳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집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에이든은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약간 내려온 머리를 다시 만졌다. 머리를 좀 잘라야 되나. 왜 자꾸 모양이 거지같이 흐트러지는지를 모르겠…….
“……!”
약하게 인상을 쓰고 거울을 보던 그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옆을 돌아봤다. 진이었다. 에이든은 조금 크게 떠진 눈으로 창문 밖을 보다, 급히 차 문의 잠금을 풀었다. 달각이는 소리가 들리자 진이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에이든은 옆에서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 진을 보며 핸들을 꾸욱 쥐었다. 뭐라 말하고 싶은지 입이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뱉어지지 못했다.
“…….”
“…….”
진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옆에 앉은 에이든 테일러에겐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질 않았다. 그저 아래에 있는 제 손만 바라보며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 점심은 아직이지? 그럼, 점… 심부터 먹으러 갈까?”
“…….”
“예약을 해 두긴 했는데, 혹시 먹고 싶은 게 따로 있으면…….”
그제야 에이든 테일러를 향한 진의 눈빛은 마치 왜 그런 걸 제게 묻냐는 듯했다. 평소답지 않게. 어차피 자신의 의견 같은 거, 중요한 적 없었으면서. 에이든은 그 눈을 보다 흐리게 웃으며 핸들을 잡았다. 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왔냐는 인사 한마디를 제대로 못해서 등신 같이 입만 벙긋대고…. 에이든 테일러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연습해야 할 건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
진 헤니는 많이 불편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불편했다. 먹고 있는 음식이 얹히는 중이었다. 분명 체한 느낌이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예약을 해 놨다는 곳은 상상이상으로 많이 화려한 곳이었다. 몇 번 갔었던 테라스에서의 식사나, 조금 유명한 레스토랑 정도가 아니었다.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도록 따로 분리된 룸이라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 이런 차림으로 들어와 있으려니 자꾸 민망하고 창피해졌다.
진은 에이든이 제게 입으라며 사 줬던 옷들을 찾아 입으려 했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데리고 다니기 쪽팔리니까 제대로 챙겨 입으라는 말이 찾는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찾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알렉스와 나디아가 짐을 정리하면서 어딘가에 둔 모양이었다. 제 눈에는 한참을 보이질 않아, 결국 그가 가진 옷들 중 그나마 괜찮은 옷들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제가 가진 괜찮은 옷이라 해 봤자 결국 검은색 티셔츠에 검은색 진, 검은색 워커일 뿐이었다. 진 헤니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런 곳과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옷을 내려다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의 진을 살피고 있었다. 자꾸 입 안이 말라서 물을 찾게 됐다. 분명 자신은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말을 꺼내려 하면 목 끝에서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차에서 딱 한 번 마주쳤던 검은 눈은 다신 제게로 향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긴장이 됐다.
이렇게 계속 어색하게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무슨 말이라도 좀…….
“옷은… 내일은 네가 입으라고 했던 걸로 꼭 입을게.”
정적을 깬 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에이든 테일러가 아니라 진 헤니였다. 옷? 약간 의아한 낯으로 진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든은 이어지는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비싼 옷은 네가 입으라 했던 것들밖에 없는데 지금 찾을 수가 없어서…. 남은 세 번은 창피할 일 없게 할게. 어쨌든… 그래 보여야 되는 거니까.”
뭐가 창피해…? 에이든은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제가 언젠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급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그런 거는 하나도 신경 안 써도 돼. 진, 그냥 너 편한 대로 입어. 옷 같은 건 전혀…….”
“……?”
에이든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접시에 틀어박혀 있던 진 헤니의 고개가 슬며시 들려올라갔다. 그를 보는 진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에이든은 눈치도 없는 제 몸에 속으로 욕을 씹었다. 터지는 기침을 어떻게든 삼키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그냥 아무것도 신경 안 써도 돼.”
“…….”
“그… 진, 사실은… 내가 어제 말을 하려다가 못한 게 있는데…….”
약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진을 보며 에이든이 잠시 망설였다. 머리가 또 복잡해지고 있었다. 무심한 낯의 진을 보고 있자니 계속 자신이 없어졌다. 검은 눈은 단 한 번도 제게 차가운 빛을 냈던 적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은 눈길에 자꾸 몸이 얼어갔다.
“내가 기억이 났는데, 그 우리 열세 살 때, 그때 기억이 나서…….”
“…….”
에이든 테일러는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연습한 건 다 소용이 없었다. 그는 등신마냥 더듬거리는 스스로를 속으로 작게 비난했다. 진 헤니는 조금 더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에이든은 안 좋아지는 진의 표정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여태 너한테 했던 것들 다, 사과하고 싶,”
“기억 난 거 알아. 그때도 났다고 네가 말했잖아.”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끝이 조금 떨렸다. 진 헤니는 제 입으로 ‘그때’를 꺼내 놓고 움츠러들었다. 체한 위장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그때 겪었던 말도 안 되는 환촉들이 다시 목에서부터 시작되려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푸른 눈이 테이블을 헤맸다. 사실 그때는 기억이 났다고 말하기 보다는 조각난 장면을 봤다고 말하는 편이 맞았다. 약에 취해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던 때가 생각났다. 기억이 나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냐며, 무슨 소용이냐 했던 말들. 어쨌든 네가 내 인생을 망친 게 아니냐고 지껄였던 개소리들.
“그, 진… 내가 다 미안해. 물론 이게 미안하다는 말로만 되는… 그런 거 아닌 거 알아. 그때는 기억이 난 게 아니라, 아니, 난 건 맞는데…….”
“……”
“그게, 사실은 내가 섬에서 나온 뒤에 병원에 잠깐 있었는데, 그때 약물 치료 같은 걸 받…….”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에이든 테일러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머리에 입력되지 않을 만큼. 진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칠게 밀리는 의자가 끼익하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횡설수설하던 에이든 테일러는 뛰쳐나가는 진 헤니의 등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든의 심장이 평소의 박동을 잊고 멋대로 뛰어댔다. 또 다시 기침이 나오고 있었다. 입을 막고 기침을 하던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어 가렸다.
두 사람 사이에 꼬여 있는 것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도, 화장실에서 먹은 걸 전부 게워내고 있는 진 헤니도.
진은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이 덜덜 떨렸다. 먹은 걸 전부 토하고 있다는 말이 민망할 만큼, 위액만 울컥 뱉어지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몸은 계속 뭐든 뱉어내라 진 헤니를 강요했다. 잠잠해질까 싶으면 다시 위가 조여지며 입이 크게 벌어졌다.
잇새로 흐느낌이 샜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비참했다. 애써 무시하고 기억 안 나는 척하려던 모든 것들이 역했다. 사실 진 헤니는 그의 목에 약물이 주사된 뒤,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속이 뒤집어질 만큼 진을 비참하게 만드는 건 에이든 테일러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진 헤니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 그 스스로였다. 뒤가 다 찢겨 피가 줄줄 나면서도, 왜 굳이 옛날을 기억해야 하냐는 말과 함께 목이 졸리고도… 그에게 안기는 게 역겹게도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아무리 약에 취했대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하나도 기억 안 나는 척 자신을 속여 봐도 소용없었다. 밤새도록 그를 끌어안고 울어댄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역겨웠다. 제 손으로 정리하고 버린다 해 놓고는… 결국 주머니에 사진을 쑤셔 넣고 돌아온 자신이, 작은 기침 하나에 그를 살피게 되는 스스로가.
눈물을 줄줄 흘리던 진 헤니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짧은 신호음이 가고,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전화를 받았다.
[ 진, 지금 어디야. ]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당장.
***
진은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에이든의 속이 타들어갔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았다.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면 안 됐는데… 순서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분명했다.
“하…….”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던 그가 아직도 저릿한 느낌의 심장 부근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대충 꼬라지를 보아하니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이러는 것 같았다.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눈치도 없이 나오는 기침에 신경질이 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깊게 한숨을 뱉던 에이든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문을 바라봤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밖으로 향했다.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 긴 복도, 성큼성큼 그 통로를 걸어 나가던 에이든이 찾던 뒷모습을 발견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진은 레스토랑의 정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그의 모습에 에이든이 다급한 목소리로 진을 불렀다.
“진……!”
진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큰 보폭으로,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걷고 있었다. 에이든은 거의 뛰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조급했다.
“진!”
진 헤니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에이든은 눈에 들어오는 희게 질린 얼굴에 놀란 표정을 했다.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진은 울었는지 아직도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살피고 있는 에이든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진, 너 어디 아픈…….”
“……!”
에이든은 얼굴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 주려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손은 허공에서 우뚝 멈춰야 했다. 진은 에이든의 손이 올라오자, 눈을 꽉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에이든은 놀란 얼굴로 급히 손을 내렸다. 그리곤 제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진은 마치 에이든 테일러의 손바닥이 얼굴을 내려치기라도 할 것처럼, 어금니를 꽉 물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런 진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형편없이 흔들렸다. 잠시 그렇게 굳어 있던 에이든은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진, 집에 가자.”
“…….”
알렉스 그레이가 굳어 있던 진 헤니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감싸며 다가왔다. 꽉 감긴 채, 떠지지 않을 것 같던 눈은 그제야 들려올라갔다. 길고 검은 속눈썹이 무의식적인 두려움에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을 감싸 안고 있는 손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알렉스 그레이는 그 어이없는 표정 변화를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아직도 자신이 그의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새끼가.
“차는 저기 앞에 세워놨어.”
“…….”
진은 알렉스의 말에 제 앞에 서 있는 에이든을 잠시 바라봤다가 등을 돌렸다. 제게서 멀어지는 그를 보며, 에이든 테일러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진은 자신을 많이 무서워했다. 그를 어떻게 할까 봐, 때리기라도 할까 봐…….
다 제가 자처한 일이었다. 아는데… 다 아는데……. 다시 가슴이 뻐근해지고 있었다. 커다란 바늘이 심장을 후비는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갔다. 인상을 찡그리고 어금니를 잔뜩 물고 있던 에이든 테일러는 갑자기 다시 돌아선 진 헤니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진 헤니는 뒤를 돌아 다시 에이든 테일러에게로 걸어갔다. 에이든은 제게로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낯색을 밝혔다.
진과 아직 못한 말이 많았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아직 점심식사도 채 못했는데… 같이 있던 시간이, 나눈 말이 몇 되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아까처럼 그렇게 바보천치처럼 굴지 않고, 뭐라도 진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진…….”
“오늘 치 돈… 받으려고.”
그렇게 말하는 진 헤니의 눈은 바닥에만 처박혀 있었다. 아주 약간 밝아졌던 에이든 테일러의 얼굴빛이 다시 차게 굳었다. 에이든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에 뭐라 대답을 못하고 진만 바라보고 있었다.
진은 에이든이 대답이 없자 바닥에 있던 시선을 올려 그를 쳐다봤다. 돈을… 받아야 했다. 언젠가 에이든이 말했던 대로, 지금 이 만남과 시간들엔 돈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어선 안 됐다. 절대로 안 됐다.
자신은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앞으론 절대 그에게 끌려 다니지 않을 거였다. 진 헤니는 속으로 몇 번이나 최면을 걸듯 되뇌었다. 더 이상 비참해질 순 없었으니까.
검은 눈이 뭐 하고 있냐는 눈빛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 멍한 얼굴로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머니클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안에 꽂혀 있던 백 달러짜리 몇 장을 뽑았다.
진은 그의 손이 제 앞으로 가깝게 내밀어지기도 전에 손에 들린 지폐를 채갔다. 그리곤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제… 다른 건, 필요 없어…….”
“…….”
진 헤니는 말했다. 이제 에이든 테일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그 말을 알아들은 에이든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진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뒤를 돌았다. 그리고 갓길에 세워져 있던 알렉스 그레이의 차에 곧바로 몸을 실었다. 에이든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진이 사라진 자리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렉스 그레이는 멍청히 서 있는 에이든 테일러를 잠시 바라보다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이 탄 차는 빠른 속도로 출발했다.
몇 번이나 다시 입어보고, 또 입어보며 골랐던 푸른 셔츠,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자 뿌렸던 향수. 하지만… 아마 진 헤니는 오늘 그가 무슨 색깔의 옷을 입었는지 기억도 못할 게 분명했다. 에이든 테일러를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으니까.
에이든 테일러에게 주어진 첫 번째 기회가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
진 헤니는 차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알렉스 그레이 역시 그에게 아무것도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진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가만 내버려 두는 게 나았다. 들쑤셔 봤자 좋은 꼴이 나지 않을 테니까.
바깥은 한낮이었다.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모두 평화로웠다. 작은 농구코트에서 공을 튀기며 한낮의 싱그러움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친구들끼리 몰려나와 길거리에서 크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날이 좋았다. 그리고 진 헤니는 그 모든 게 화가 났다. 제 속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스스로가 병신 같아 속을 게워내도 세상은 한 터럭도 달라진 게 없었다. 저만 이렇게 아프고, 슬프고, 비참했다.
지나가는 저 사람은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 또 저기 둘이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연인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또 왜… 왜 자신에겐 그런 사소한 행복 하나 허락되질 않은 건지. 나는 뭘 그렇게 잘못해서, 내가 뭘 그렇게…….
서러움이 켜켜이 쌓였다. 진은 울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손에 들고 있는 지폐를 꼬옥 쥔 채였다. 나는 괜찮아. 하나도 안 슬퍼. 그냥… 곧 전부 다 아무렇지 않아질 거야. 분명 이것도 다 지나갈 테고, 무뎌질 거였다. 진은 그렇게 최면을 걸며 가까스로 스스로를 달랬다.
차가 알렉스의 집 앞에 멈추고, 두 사람이 현관을 향해 걸었다. 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미…….”
“점심은 제대로 먹은 거 맞아? 나디아 와있을 텐데, 셋이 같이 점심이나 먹자.”
알렉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나 희게 질린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점심을 하나도 못 먹었을 테고, 먹었어도 조금 전 다 토한 게 분명했다. 뭐라도 먹여야 했다.
진은 조금 멋쩍게 웃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알렉스의 말대로 집에 있는 나디아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나디아 놀즈는 척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은 진을 살피다, 뒤따라 들어오는 알렉스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알렉스는 눈으로 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리곤 속으로 한숨을 숨겼다. 나디아가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였다. 알렉스 그레이가 생각하기엔 그게 가장 최악의 경우였다. 진 헤니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도록 가만 둬야 했다. 진은 아무렇지 않은 거여야만 했다.
그가 절대로 제 감정을 자각하거나, 다시 돌아보도록 만들면 안 됐다. 스스로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볼수록 분명…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미련을 발견할 테니까. 잘게 쪼개진 마음이 물 아래로 잘 가라앉도록 둬야 했다. 휘저어봤자 거지같은 불순물이 다시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진에게 이로운 건지, 알렉스 그 자신에게 이로운 건지 알 수 없는 배려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아무리 그러고 싶다 한들, 평생 동안 진 헤니를 봐온 나디아 놀즈의 눈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나디아는 진이 한쪽 손에 꼬옥 쥐고 있는 지폐와 지쳐 보이는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사납게 떠진 눈으로 알렉스 그레이를 바라봤다. 알렉스가 낭패라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나디아가 그 얼굴에 헛웃음을 치며 진에게 물었다.
“너, 얼굴 꼴이 왜 이래?”
“아…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진이 흐리게 웃으며 답하자 나디아가 뒤에 선 알렉스를 다시 바라봤다. 그는 굳은 낯으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인상을 작게 찡그린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디아가 어이없다는 낯을 했다.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에이든 테일러 만났어? 왜? 지금 네가 걔를 만날 일이 뭐가 있어?”
“하…….”
나디아의 물음이 뱉어지자마자 알렉스가 눈을 가려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진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이고 서 있었다. 나디아 놀즈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왜 자꾸 그딴 쓰레기 같은 새끼한테 끌려 다니는 건지,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진, 어떤 이유든 그냥 아예 만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게 나아! 그딴 쓰레기 같은 새끼를 왜 자꾸 다시 찾아가는 거야?!”
“…….”
“열세 살 때 에이든 테일러랑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는 아예 다른 사람이야! 대체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
“나도 알아, 나디아.”
무거운 목소리였다. 진이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손에 들린 지폐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나디아를 바라봤다. 여태껏 잘 달래며, 다독여 놨던 서러움들이 빼꼼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진의 눈에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다 제 잘못이었다. 다 제가 바보인 탓이었고, 나쁜 사람인 거 알면서도 아픈가 싶어 걱정이나 하는 자신이 등신이었다. 화가 나고, 원망스러웠다.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미웠다. 에이든 테일러도, 바깥의 화창한 날씨도… 나디아도, 전부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도 알아! 에이든이 나쁜 사람인 것도 다 알고, 내가 바보 같은 것도 다 알아!”
나디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한 번도 큰 소리를 내는 진을 본 적이 없어서, 그녀는 화가 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이든이 나쁜 사람인 거, 나디아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근데…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나라고 안 답답한 줄 알아?”
“…….”
“내가 제일 답답해, 나디아…! 내가 제일 답답하다고!”
결국 진이 참아 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도 우는 그였다. 아무렇지 않지가 않았다. 에이든이 뭐라 말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였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괜히 입술을 물게 됐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제 맘대로 이리저리 튀어 다녔다. 그가 미웠고, 걱정됐고, 슬프다가… 괜찮았다가, 화가 났다.
“어떻게… 내가… 나는 나디아, 십 년 동안 에이든을 만날 날만 기다리고… 그 애만 생각하면서 살았어…! 근데 어떻게 나한테… 어떻게 그런 사람을 한 번에 다, 쓰레기 치우듯 치우라는 거야, 대체…!”
눈물이 세 갈래, 네 갈래로 흐르고 진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나디아와 알렉스가 제 짐을 치우듯 치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가 대신 치워 줄 수도 없었고, 단번에 정리할 수도 없었다.
“나도 빨리 아무렇지 않고 싶어…! 그래서 노력하잖아! 나한테도… 뭘 정리할 시간을 줘야지!”
“진,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왜 다들 나한테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의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랑 받고 싶었다. 그거 하나 바랐는데, 자신은 그럴 자격도 가치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다들 제 잘못인 것처럼 말했다. 서러운 흐느낌이 뒤따랐다. 진은 손에 들린 돈을 꼬옥 쥐고는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나디아는 그의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참았다.
결국 세 명은 점심을 먹지 못했다. 상황이 정리된 건, 알렉스가 나디아를 데리고 진 헤니의 집을 정리하러 떠나고 나서였다.
***
알렉스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던 일기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버리기 전, 슬쩍 펴 봤던 걸 후회하고 있었다. 별로 기분이 좋질 않았다. 진 헤니가 얼마나 에이든 테일러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를 지켜봐왔는지 따위는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며 말했다.
“진 앞에서… 그 새끼 얘기하지 마.”
“…….”
나디아는 알렉스의 말에 대답 없이 한숨을 쉬었다. 진을 위한다고 한 말들이었지만, 이번엔 알렉스의 말에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엉엉 울며 소리치던 진이 많이 힘들어 보였으니까.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맞았다.
깊은 한숨이 한 번 더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마음이 복잡했다. 진의 집은 이제 완전히 깨끗해졌다. 정말 곧 진을 데리고 뉴욕에 간다는 게 실감이 나고 있었다. 다행이었고, 동시에 걱정이 됐다. 오늘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알렉스, 진을 데리고 가는 게… 잘하는 짓이겠지?”
“당연한 걸 왜 물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허름한 복도를 나서며 알렉스는 단호한 낯을 했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뭐라 더 대답하기도 애매했다. 나디아 역시 괜한 걸 물었다는 표정으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알렉스는 집에 혼자 있을 진을 생각하며 귀가를 서둘렀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켜져 있던 라디오가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 레오나 테일러가 주가조작 및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구속된 데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에이든 테일러는 해당 사안에 대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
알렉스 그레이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다른 주파수를 찾았다.
[ 지난 달, LA포스트가 전했던 에이든 테일러 유괴 사건 기사를 정정합니다. 해당 기사에서는 유괴라 보도된 것들은 모두 혐의로 그친 것으로……. ]
인상을 찡그리던 그가 또 다른 채널을 찾았다. 나디아는 옆에 앉은 알렉스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 테일러 가에 대한 뉴스가 연일 화제죠? 한스 테일러의 장례 이후 곧바로 레오나 테일러가 구속되고, 줄리아 테일러까지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혼자 남은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
결국 라디오는 아예 전원이 꺼졌다.
“하…….”
알렉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디아한테 말하지 말라 해 봤자, 여기저기가 에이든 테일러로 난리였다. 뉴스 속 에이든 테일러는 아주 불쌍했고, 측은했다. 짜증나게.
알렉스 그레이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집에 가자마자 TV랑 노트북부터, 당장에 치워야 한다고.
***
알렉스가 진 헤니의 집을 정리하고 돌아온 건, 밤이 다 된 시간이었다. 그는 깜깜하게 모든 불이 꺼진 걸 보곤 발소리를 죽여 걸었다. 진은 자는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잠들기를 힘들어 하는데, 깨워선 안 됐다.
주방으로 향한 그는 복잡한 낯으로 찬물을 들이켰다. 속이 많이 답답했다. 아까 전, 엉엉 울던 진 헤니가 떠올랐다. 나쁜 사람인 거 아는데,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다며 울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질 않았다. 결국, 나쁜 사람이더라도 그를 사랑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알렉스는 작게 인상을 쓰며 컵을 싱크대 안으로 내려놨다. 아직도 생생했다. 욕조에 앉아서는 넋을 넣고 있던 진의 모습이, 그의 몸에 가득했던 말도 꺼내기 싫은 상처들이. 녹색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런 새끼는 사랑해서는 안 됐다. 사실 진의 마음에 남은 건 사랑이라 할 수도 없었다. 미련이었다.
사랑과 미련은 달랐다. 나디아가 말한 대로 진이 기억하는 열세 살의 에이든 테일러와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는 다른 사람이었다. 진에게 알려줘야만 했다. 지금 너의 마음에 남아 있는 건, 절대로 사랑이 아니라고. 진이 사랑하는 건 에이든 테일러가 아니라, 예쁘고 소중했던 그때의 기억일 뿐이었다.
굳은 낯의 알렉스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간간히 깊게 한숨을 쉬거나 어금니를 꽉 깨물곤 했다. 아무래도 물을 한 잔 더 마시든지 해야 했다. 그가 찬장에서 다른 컵 하나를 더 꺼내려 했을 때, 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활짝 열려 있는 문 밖으로 진의 흐느낌이 샜다. 끙끙거리며, 겁에 질려 우는 소리였다. 알렉스는 손에 들었던 컵을 급히 내려놓고 제 방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당연히 진에게 내주었던 그의 방으로.
진은 방문을 닫고 자지 못했기 때문에, 문을 열 필요도 없었다. 그는 문이 닫히는 걸 극도로 무서워했다. 문이 닫히면 다시는 그 안에서 못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진…?”
알렉스가 다급하게 진을 불렀다. 진은 끊임없이 앓는 소리를 내며 식은땀을 흘렸다. 안 좋은 꿈을 꾸는 건지 고개를 작게 젓기도 했다. 알렉스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요즘 뜸하게 꾸는 것 같던 악몽이, 에이든 테일러를 만나자마자 다시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진…!”
진의 어깨를 쥔 손이 그를 강하게 흔들었다. 힘들고 슬프기만 한 꿈에서 그를 꺼내 와야 했다.
“진!”
크게 불린 이름에 진이 눈꺼풀을 급히 들어올렸다. 검은 눈이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헤맸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무서웠다. 허공을 휘적이던 손이 제 어깨를 쥐고 있는 손을 잡았다.
“나야, 진. 나야.”
“…….”
알렉스였다. 진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크게 떠진 눈은 아직도 많이 놀라 있어서, 알렉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진의 얼굴을 타고 내린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저를 달래는 목소리에도 진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는 듯 울었다. 자꾸 무서운 꿈을 꿨다. 꿈속에서 에이든 테일러는 어깨가 찢어져 피가 났고, 제 목에다 주사를 꽂아 넣었다. 허름한 나무 오두막은 비바람에 다 무너졌고, 제 오른손이 칼에 찢겨 피를 질질 흘리기도 했다.
꿈 속, 자신이 갇힌 괴상한 방에선 나갈 수 없었고, 동시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말도 안 되게 무서웠다. 나갈 수 없는 게 두려웠으며, 나갈 수 있어서 끔찍했다.
“무서워…….”
진은 흔들리는 목소리로 몇 번이나 무섭다고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아직도 제 팔을 꼬옥 붙잡고 있는 손을 보다, 불을 켜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 안 돼.”
“…….”
“혼자 있기 싫어…….”
진 헤니가 다급히 그를 잡아 세웠다. 알렉스는 그저 불을 켜려 했을 뿐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초록색 눈은 무언가를 가만 생각하더니 이내 다정한 빛으로 진을 바라봤다.
“안 갈게. 여기 있을게.”
여기 있을 거라는 말에 진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이 되는 것 같았지만 아직도 알렉스의 팔을 꾸욱 잡고 있는 손은 간절하고 애절했다. 알렉스는 말없이 그에게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 앉았다. 땀에 젖은 머리를 가만 쓸어 넘기다 일부러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눕기엔 좀 좁긴 한데…….”
“……?”
“옆으로 좀 가 봐. 나 오늘 짐정리 하느라 엄청 피곤해.”
얼른 옆으로 가라는 듯, 허공에서 휙휙 저어진 손에 진이 옆으로 몸을 옮겼다. 알렉스는 제게 조금 내어진 자리에 털썩 몸을 뉘였다. 침대는 그리 크지 않아서 옆으로 누운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깝게 자리했다.
“요즘 웨이트 트레이닝을 안 해서 몸이 좀 얇아졌으니 망정이지, 평소 같았으면 절대 못 누웠겠네.”
“…….”
“근데 뭐… 누울 수만 있으면 됐지. 얼른 자. 여기 있을 테니까.”
별거 아니라는 목소리로 알렉스가 말했다. 진은 제 앞에 바로 있는 녹색 눈을 바라보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망설였다. 알렉스의 입으로도 말했지만, 진이 보기에도 그는 요즘 수영이나 훈련을 하지 않았다. 항상 저와 함께 집에 있거나, 가끔 뉴욕에서 지내기 위한 준비들을 하러 밖에 나갈 뿐이었다.
“그… 알렉스, 요즘엔 수영 안 해? 그때 선발전도… 그냥 기권한 거지?”
“…….”
“방에… 트로피랑 메달도 다 없고……. 혹시 전에 내가 좋아하기는 하는 거냐고… 주제넘게 말해서 혹시…….”
“맞아, 네 말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수영을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
진은 혹시나 싶어 물었던 것에 맞다는 소리를 듣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제가 했던 말이 진짜로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진이 뭔가를 말하려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알렉스가 먼저였다.
“생각해 보니까 따로 좋아하는 게 있었어. 그래서 요즘엔 그거만 신경 쓰기도 바빠서 수영 안 해. 어차피 별로 재미도 없고.”
“…….”
“트로피랑 메달이 다 무슨 소용이야. 좋아하지도 않는 거, 제일 잘해 봤자 의미 없잖아.”
약간 거들먹거리는 얼굴과 목소리였다. 그런 알렉스의 모습을 보며 진이 약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자기가 제일 잘한단 소리였다. 알렉스는 요상해진 진의 표정에 짓궂게 웃었다. 그러다 별안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쓸데없는 트로피가 문제가 아니야. 갑자기 또 뉴욕 갈 생각하니까 억울하네.”
“……?”
“뉴욕에는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없고… 엄청 가고 싶었는데……. 나는 그 티켓 산 돈, 환불도 못 받았어…….”
알렉스 그레이는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러모로 진 헤니를 난감하게 하는 대화였다. 잘하던 수영을 그만하게 된 것도 제 말 때문이었고, 놀이공원에 간다고 해 놓고 갑자기 없어져 버린 것도 자신이었다. 진은 당황스러운 낯빛으로 허둥지둥 입을 뗐다.
“그, 티켓 값은 내가 줄게…!”
“그럼 뭐 해. 뉴욕에는 없,”
“찾으면 있지 않을까…?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아니더라도… 놀이공원 가면 되지…!”
시무룩했던 알렉스의 표정은 그제야 원하는 말을 들었다는 듯 밝아졌다.
“그래, 꼭 같이 가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저를 도와주는 그에게 그 정도 티켓값과 놀이공원에 함께 가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렉스에게는 빚진 것들이 많았다. 지금 제가 누워 있는 침대부터, 바보 같은 저를 달래기 위해 오가는 소소한 말장난들까지.
“이제 얼른 자. 나도 졸리다.”
“응, 잘 자…!”
진 헤니는 눈을 감는 알렉스 그레이를 보며 저도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가 아니라서 조금 전처럼 막연하고 무서운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섬뜩한 느낌으로 깨어난 이상, 다시 잠들긴 무리였다. 알렉스가 옆에 있다 해도 마음 저 밑바닥의 무서움은 다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 또 에이든을 만나려면 자야 되는데……. 그래야 바짝 차린 제정신으로 만날 수 있을 거였다. 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눈을 꾸욱 눌러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그가 잠든 사람처럼 있기를 몇 시간…….
알렉스 그레이는 진 헤니의 옆에서 슬쩍 몸을 일으켰다. 떠진 눈에는 피곤함도, 아주 조금의 잠기운도 없었다. 그는 잠든 진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방을 나섰다. 그리곤 어둠에 잠겨 있는 거실을 쭈욱 둘러봤다.
그는 TV와 연결돼 있는 콘센트를 뽑고, 거실 테이블 위에 있던 노트북을 들었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더니 벽에 쌓여 있던 박스 하나를 열었다. 잡동사니가 들어 있는 그 상자에 노트북을 쑤셔 넣곤 그대로 뚜껑을 닫았다. 절대로, 다시는 제 눈에 띄지 말라는 듯이.
***
그 시간, 잠들지 못하는 사람은 진 헤니 하나만이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새벽의 푸른빛을 온 몸으로 맞으며 앉아 있었다. 언제나 황량하고 서늘한 맨션 안에는 에이든과 썩 잘 어울리는 공기가 가득했다. 춥고, 외로운 공기.
에이든은 뻐근해지는 가슴에 인상을 찡그리며 기침을 했다. 커다란 손이 지친 얼굴을 쓸어내리길 몇 번을 반복했다. 잠이라 부르기 힘든 선잠에 들었던 동안, 그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몇 번이고 마주쳐야 했다. 정말 몇 번이고.
그는 꿈에서 제가 연습했던 모든 말을, 아주 차분하게 진에게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모든 말이 소용없을 정도로 차갑던 진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네가 아무리 용서를 빌고 또 빌어도 바뀔 일은 없다는 듯이 에이든 테일러를 괴롭혔다. 밤새도록.
에이든 테일러는 꿈에서 깨어난 뒤, 멍한 낯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푸른 원석이 박힌 팔찌 하나가 들린 채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가, 제 손에 들린 그 팔찌를 한 번 쳐다보고, 또 한숨을 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소심한 손길로 작은 원석을 만지작거렸다. 에이든의 입엔 흐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든 게 다 엉망이 되기 전에, 진이 바다에 가고 싶다 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 팔찌도 그가 처음으로 산타모니카에 갔을 때 샀다고,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던 것도 떠올랐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남은 건 몇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아무 의미 없던 돈이나 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주변은 폐허나 다름없이 모든 게 다 박살 난 채였다. 그런 그에게 허락된 건 이 작은 팔찌 하나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나마… 두 사람이 행복할 수도 있었던, 그때의 기억들만이 에이든에게 남아 있었다.
에이든은 한참이나 팔찌를 들여다보다가, 왼쪽 손목에 그것을 둘러 감았다. 혼자서 채우기엔 좀 어려웠지만, 공들여 팔찌를 차곤 옅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선물을 받아 놓고… 여태 준 게 하나도 없네.’
준 거라곤 오늘 진이 말했던 ‘비싼 옷’들 뿐이었다.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에게 지껄이면서, 입고 다니라고 줬던 것들. 에이든 테일러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일은 저도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추억에라도 호소해 봐야 했다. 그래도 좋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면 조금이라도 저를 돌아봐 줄지도 몰랐다. 아주 조금이라도.
***
진 헤니는 밖에서 통화 중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통유리로 뚫린 창 너머의 진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시계를 바라봤다. 종류별로 꺼내진 시계들은 척 봐도 아주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에이든은 평소 검은색을 좋아하는 진을 떠올리며, 플래티늄 소재의 시계 하나를 들어올렸다. 시계의 둥근 베젤이 검은색 세라믹으로 둘러져 있어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초침이 돌아가는 다이얼 판이 검은색이라 진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자기야, 그거 플래티늄인 거 알지? 엄청 비싸. 전 재산 환원했는데 어떻게 사?”
“…….”
“역시… 돈 없는 거 아니지? 뭐, 사실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사만다는 진지한 낯의 에이든에게 말했다. 에이든은 피식 웃을 뿐 별 대답이 없었다. 또 다시 조용히 시계를 고르고 있는 그를 보며 사만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밖에서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정말 버라이어티한 커플이네…….’
사만다가 보기에 두 사람은 또 분위기가 달랐다. 첫 번째랑 두 번째 봤을 때도 확연히 다르더니, 지금은 지나가던 개도 알 수 있을 만큼 분위기가 안 좋았다. 괜히 가볍게 이것저것 던져 봐도 에이든 테일러는 반응도 없고, 표정이 무거웠다.
사만다의 눈이 이번엔 에이든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로 향했다. 그리곤 대충 분위기를 알겠다는 듯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그가 절대로 차지 않을 것처럼 생긴 팔찌는 선물 받은 물건인 것 같았다. 선물의 답례로 시계를 사 주려는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선물을 골라야 할 검은색 멍멍이는 왜 안 들어오고……. 에이든 테일러가 힐끗힐끗 바깥을 바라볼 때마다 사만다는 왠지 모르게 제 속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빨리 들어오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다. 그리고 그 주문이 먹힌 건지, 진이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싸운 건가? 좀 도와줘야 되나.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약간 긴장해 있던 그녀는 진을 보자마자 모든 생각을 접었다. 진의 표정이 많이 차가웠다. 그리고 많이 지쳐 보였다. 이럴 땐… 그냥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진, 여기 이쪽에 있는 게 제일 나은 것 같아. 한 번 골라 볼래…?”
에이든 테일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만다는 역시 끼어들어선 안 된다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제 눈앞에 있는, 거의 모든 걸 가졌다고 봐도 되는 푸른 눈의 남자는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 그는 시계 몇 개를 진에게 가깝게 가지고 오며 힐끗 진 헤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진은 제게 내밀어진 시계들을 바라보다 작게 인상을 썼다. 그 표정에 에이든이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사만다는 괜히 저까지 긴장되는 느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여튼 눈썰미는 좋다니까…! 내가 봐도 이거 네 개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조금 무거운 쪽이 좋아요? 아니면 가벼운 쪽?”
“아, 저는 이런 거… 잘 몰라서…….”
진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찡그려진 채 펴질 줄 모르는 눈썹을 보다가 에이든이 아까 봤던 그 플래티늄 시계를 들어올렸다.
“이거,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거는 어때?”
“그럼 그걸로 할게.”
“…….”
묻기가 무섭게 바로 대답이 떨어졌다. 그냥 그렇게 하자는 어투였다. 에이든이 멋쩍은 얼굴로 손에 든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사만다는 그 이후로 별말이 없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에이든은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다른 하나를 들어올렸다.
“이것도 가볍고 괜찮은 것 같아. 판이 청색이긴 한데…….”
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에이든이 말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사만다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둘 다 한 번 차 봐요! 시계가 그냥 볼 때랑 손목에 찼을 때 느낌이 또 다르니까, 응?”
“…….”
사실 진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부담스러운 모든 상황이 불편했다.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하찮고, 누더기 같은 자신이 계속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에이든 테일러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 빨리 사고 나가고 싶었다.
밖에서 알렉스와 통화를 하는 내내 겪었던 눈빛들도 그의 기분이 가라앉는 데 한몫을 했다. 진 헤니는 많이 위축돼 있었다. 저를 보고 귓속말을 하며 지나가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눈빛이 아직도 제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진, 한 번… 차 봐. 이거 검은색은 좀 무거울 수도 있어.”
“그냥 아무거나 상관없다니까.”
지친 목소리가 뱉어짐과 동시에 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이 뒷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에이든은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 그 안에 떠 있는 이름에 무섭게 낯을 굳혔다. 그 새끼였다.
“나 잠깐 전화 좀…….”
“…….”
진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사만다는 야속한 그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굳은 표정의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봤다. 그의 목울대는 무언가를 삼켜 내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초조하기만 하던 푸른 눈이 사나움을 머금고 있었다.
“이거 전부 다 포장해 줘요.”
“전부……?”
사만다는 진 헤니의 앞에 있던 시계 네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네 개를 말하는 게 맞냐는 손짓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귀가 잘 안 들리냐는 표정으로 사만다를 바라봤다. 사만다가 혀를 찼다. 그래, 이게 에이든 테일러지…….
“알겠어, 다 포장하면 되잖아.”
대체 이거 네 개를 한꺼번에 사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되는 거야?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을 하긴 뭘 해. 사만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계 네 개를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금 부담스러운 눈치였는데, 오늘따라 무서운 멍멍이가 이걸 좋아할지 모르겠다고.
***
알렉스와의 통화는 사실 별 게 없었다. 그냥 어디에 있는 건지, 잘 있는 건 맞는지를 묻는 것뿐이었다. 어제 이후에는 빈도가 잦아져서 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제 제가 엉엉 울어 버린 데다, 다시 악몽을 꾼단 걸 알고는 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저녁쯤 갈 것 같아……. 그때 전화할게…!”
[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
짧은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기고, 진은 제게 걸어오는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는 손에 생각보다 큰 종이봉투를 든 채였다. 시계 하나를 포장했다고 보기엔 조금 과했다.
다른 걸 샀나? 자신이 중간에 나와 버렸으니, 제 것이 아니라 그냥 에이든이 사려던 걸 산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그게 나았다. 비싼 걸 받아 버리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해줘야 할지도 몰랐다. 나름대로 결론을 낸 진의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 헤니는 차 조수석에 몸을 싣자마자 제게 내밀어지는 봉투에 당황해야 했다. 진이 에이든에게 이게 뭐냐는 눈빛을 보냈다.
“아, 그… 아까 같이 봤던 시계, 전부 괜찮은 것 같아서. 다 너랑 잘 어울리기도 하고…….”
“…….”
슬쩍 안을 본 봉투 안에는 박스가 네 개나 있었다. 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리곤 조금 겁먹은 낯으로 에이든에게 물었다.
“나… 오늘 해야 되는 일이 뭔데…?”
오늘 갔던 그 브랜드는 모르긴 몰라도 엄청 비싸단 것만 알았다. 셔츠 한 장에 이삼천 달러가 넘는단 걸, 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셔츠가 그런데, 하물며 시계는…….
진은 자신이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능숙하게 이런저런 ‘척’들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저는 아니었다. 대체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길래 이런 걸 주는지, 겁부터 나고 있었다.
에이든은 해야 되는 일이 뭐냐는 물음에 인상을 찡그렸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는 대답에 진이 의아한 낯을 했다.
“해야 되는 거, 그런 거 없어.”
“…….”
“저번에 너한테 선물도 받았는데 내가… 제대로 인사를 못한 것 같아서. 좀… 늦기는 했는데 그래도 받아 줄래?”
“……?”
에이든은 긴장이 됐다. 양손 가득 유리를 주워다 진에게 가져다줄 때의 기분이었다. 그가 좋아했음 싶었다. 그땐 유리밖에 갖다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최대한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다. 사실 어느 정도의 과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진의 핸드폰에서 알렉스 그레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그는 주저 없이 전부 포장하는 걸 선택했다.
그 자식보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훨씬 많음은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과 제 사이에 있는 시간들은 누구랑 비교하거나 견주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쁜 수준이었다. 어딜 끼어드려는 건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 자신이 아니라 그 새끼였다.
에이든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들뜬 마음으로 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 헤니는 별말이 없었다. 그저 조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이든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다 핸들을 잡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손, 왼쪽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평소 차고 다니던 값비싼 시계 대신에 조악하고 싸구려 같은 팔찌가 있었다.
살 때도 느꼈지만… 정말 그와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진 헤니의 마음속에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 터졌다. 대체 그땐 무슨 정신으로 저걸 사다 줬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장에 뺏어다 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했다.
아랫입술을 꾸욱 물던 진이 다시 제 품에 있는 검은색 봉투를 내려다봤다. 저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시계 네 개…. 종이봉투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진 헤니가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와 또 한 발자국 멀어지고 있었다.
***
진은 창밖만 바라봤다. 해가 진 LA 풍경이 휙휙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하게 바깥은 평화로웠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엉엉 울면서 뭐라도 쏟아 내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에이든을 처음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기도 했다. 편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토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무뎌지는 거였다. 오늘처럼 그와의 거리감을 느낄수록 마음의 정리는 훨씬 수월해지고 있었다. 역시 만나는 게 나을 거라는 제 생각이 맞았다.
그래도 나디아한테는… 꼭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나디아한테 소리를 버럭 질러 버려 진은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어제는 이상하게 감정 조절이 잘… 안 됐었다.
바깥만 보며 나디아 생각을 하던 진 헤니는 도시 한가운데와 멀어지는 풍경에 밖을 살폈다. 고개를 조금 빼고 창문을 여는 모습에 에이든이 옅게 웃었다. 조금 비린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물에 대해선 아무 말도 듣진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제게 마음을 열어 주려면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걸 알았다. 품에 시계를 안고 있어 주는 것만 해도 많이 고마웠다.
씁쓸하게 웃던 에이든 테일러는 빨간 신호에 차를 세우고 다시 한번 진을 바라봤다. 차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어서, 그가 언젠가의 진 헤니처럼 라디오를 켰다.
그때와 비슷하게, 차 안에는 초저녁의 나른한 공기와 함께 노랫말이 채워졌다. 갑자기 들리는 노래에 진이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드디어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 조금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 늘 무언가가 날 다시 너에게로 데려가 ]
[ 그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지 ]
덤덤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노래 속 여자는 슬프지도, 그렇다고 무감하지도 않게, 말하듯 노래했다. 이제 막 누군가를 떠났다가, 정말 어쩔 수 없는 중력에 이끌려 다시 발걸음을 돌린 사람처럼.
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품 안에 안겨 있던 종이봉투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꾸욱 눌러 쥔 손바닥 아래에서 봉투가 구겨지고 있었다.
[ 나를 풀어 줘 ]
[ 나를 내버려 둬 ]
[ 또 다시 너의 중력에 추락하고 싶지 않아 ]
에이든은 백미러로 힐끗 진을 바라봤다. 잠시 저를 바라봤던 진의 눈은 다시 창밖만 향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울 것 같은 표정이라 에이든의 얼굴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 널 떨쳐 낼 수 없겠지 ]
[ 넌 계속 날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려 ]
소리는 갑자기 뚝 끊겼다. 에이든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진을 바라봤다. 진은 단호한 손길로 라디오의 전원을 눌러 끈 참이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에이든은 화가 난 것 같은 진에게 뭐라 말하려다, 도착한 목적지를 보며 말을 삼켰다.
진 헤니 역시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자마자 작게 입을 벌렸다. 제 눈에 한가득 들어오는 풍경이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워서.
정말… 바다였다,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
***
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말리부에 위치한 ‘엘 마타도어 비치’는 산타모니카와 다른 분위기의 해변이었다.
산타모니카가 사람으로 북적이고, 조금 더 휴양지 같은 분위기라면 그들이 도착한 이곳은 어떻게 보면 진이 지내던 섬의 바다와 비슷했다. 상대적으로 한적했고, 해변 곳곳에 큰 바위가 서 있기도 했으며, 한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보이기도 했다.
바위 꼭대기에 앉아 있던 갈매기가 갑자기 등장한 두 사람에 놀라 도망갔다. 적당한 높이로 치는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끼룩거리는 새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의 마음속과는 다르게, 사방이 평화로웠다.
커다란 바위 사이를 통과해 걷던 두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널따란 해변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진은 눈 한가득 들어오는 푸른 바다에 저도 모르게 옅게 웃었다. 바다였다. 본 지 너무 오래된, 바다.
진은 멀찍이 서 있던 에이든을 슬쩍 바라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든 테일러는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있었다.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 에이든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다까지 왔는데, 발은 담가야지.”
“…….”
사실 발까지가 한계였다. 더 들어가고 싶어도 물이 무서워서 절대 못 들어갈 테니까. 에이든은 조금 놀란 표정의 진을 보다 시범을 보이듯 얕은 곳에 발을 넣었다. 차가운 물과 젖은 모래가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던 에이든이 걷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물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땅과 바다의 경계를 걸었다. 한손에 신발을 들고 걷던 그가 따라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진을 돌아봤다.
“진, 얼른 와.”
“…….”
“아, 바지 걷는 거 깜빡했다. 다 젖었네…….”
끝자락이 차게 젖은 느낌에 에이든이 투덜거렸다. 잠시 상체를 굽혀 바지 끝단을 접은 그는 뒤따라 걷기 시작한 진을 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진 헤니 역시 한쪽 손에 신고 있던 워커를 들고, 바지는 조금 접은 채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
“…….”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시원한 파도 소리가 귀에 들리는 전부였다. 둘은 어린 날, 언젠가의 오후처럼 그렇게 바다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부는 바람에 에이든 테일러의 머리칼이 제 모양을 잃고 나부꼈다. 푸른 눈에 조금씩 지기 시작한 태양의 빛이 고여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파도쳤다. 바다에 몸을 담그기 시작하는 해를 보다 그가 뒤를 돌았다.
그의 뒤를 가만 따라 걷던 진 헤니는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 에이든 테일러와 눈을 맞췄다. 금색의 머리는 평소와 다르게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그 모습이 본 것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에이든이 말했다.
“그때 길 잃어 버렸을 때, 사실 엄청 무서웠는데.”
“…….”
“네가 빨리 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나 진짜 이상한 데 가있었을지도 몰라.”
옛날이야기에 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검은 눈이 복잡한 색으로 빛났다. 옆에서 지고 있는 붉은 태양의 빛, 제 앞에 선 남자의 푸른 눈빛이 눈 안에서 마구 뒤섞이고 있었다. 진은 자꾸 떠오르려는 열세 살의 그를 애써 지워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은 그때의 에이든이 아니고, 절대 헷갈리면 안 되는…….
“진, 내가… 약속해 놓고 못 지켜서 미안해.”
“…….”
“잊고 싶어서 잊은 게 아니라, 섬에서 나가고 나서 병원에 잠깐 있었는데… 약물 치료를 받고 나면 그때 기억이 잘… 안 났어. 그게 치료라고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아직 그대로였다. 멀리서 서로를 조금 흐리게 바라봐야 하는 거리. 에이든 테일러가 조금 긴장한 낯으로 한 발자국을 다가섰다.
“진, 나 너만 괜찮으면 앞으로 약속했던 거 꼭 지키고 싶은데…….”
“…….”
“혹시 허락해 줄 수 있을까…?”
초조한 목소리가 파도 소리와 함께 진 헤니의 귀를 울렸다. 에이든 테일러가 조심스럽게 한 발을 더 다가섰다. 제게로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에 진이 어깨를 움찔했다. 에이든은 그 기색을 살피며 잠시 발을 멈췄다.
“내가 여태 많이 잘못한 거 알아. 그… 용서하기 힘든 것도 잘 알아.”
“…….”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옆에서 용서를 구하면서 지내고 싶어.”
에이든이 작게 입술을 씹으며 한 발자국을 더 움직였다. 진 헤니는 반 발자국 정도를 뒤로 물러섰다. 아까보다는 가까웠지만, 절대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다. 에이든 테일러의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었다. 조금 급한 마음으로 그가 한 발을 성큼 다가서자 진이 뒤로 두 발자국을 물러섰다. 아차 싶은 마음에 에이든이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이 자꾸 급해졌다. 이렇게 진과 마주보고 설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없다는 걸 알아서 계속 조급해졌다. 오늘은 꼭… 무슨 일이 있어도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멀찍이서 걷는 것도 좋았지만 진과 가깝게 있고 싶었다. 마주보며 웃고, 바람을 함께 맞으며 걷고 싶었다.
“진, 나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에이든 테일러의 말은 진 헤니의 핸드폰이 진동함과 동시에 멈췄다. 진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주 조금 가까워질 것 같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진 헤니가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가며 멀어졌다.
***
진은 약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걸었다. 귓가에 무슨 말이 들리는지 하나도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 진, 너 괜찮은 거 맞아? ]
“어? 어…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 ……. ]
발아래의 물이 철퍽철퍽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충분히 괜찮고, 또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바다를 봤더니 몸이 고장이 난 것 같았다.
[ 지금 어디야? ]
“아, 나 지금… 여기가… 바다야. 어딘지는 잘…….”
[ 바다……. ]
수화기 건너편에서 작은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를 듣기엔 진은 너무 정신이 없었다. 수평선 너머로는 해가 절반 이상 몸을 감추고 있었다. 주황빛이 돌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밤이 되고 있었다.
[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니까 조금 이따가 바로 전화해. 어딘지는 그 새… 걔한테 물어봐서 알려줘. 데리러갈게. ]
“응, 알겠어.”
별 내용은 없지만,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고 있는 통화가 끊겼다. 진은 깊게 숨을 마셨다 뱉으며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생각보다 많은 거리를 그에게서 도망쳐 온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이대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냥… 오늘도 빨리 가야겠어…….’
진은 결심한 낯으로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랐다. 여기가 어딘지 묻고, 빨리 알렉스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조금 빠르게 걷던 걸음은 이내 뛰는 걸음으로 변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게 다시 가까워지는 진을 보며 긴장한 낯을 했다.
“나 돌아가 볼…….”
“진, 이거 봐.”
에이든이 뒤에 감췄던 손을 앞으로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 알록달록한 유리 몇 개와 예쁜 색의 돌멩이, 그리고 조개껍데기가 있었다. 진이 없는 동안 바닷가 한구석에서 커다란 몸을 쪼그려 주운 것들이었다. 바닥에 박혀 있는 유리를 보고 있자니 줍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는 되게 자랑스럽게 너 가지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좀… 그 말은 못하겠네.”
“…….”
“그래도 가질래? 아, 꼭 가지라는 건 아니야.”
에이든 테일러는 제가 말해 놓고도 무슨 소리인지를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그는 지금 과거에 호소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비겁하다 해도 상관없었다. 뭐라도, 용서 받을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는 진에게 몇 번이고 말하고 있었다. 나라고, 내가 지금 여기 있다고. 함께 바닷가에서 유리를 줍던, 바다를 걸으며 함께 웃고 떠들던 그 에이든 테일러라고.
손바닥 위, 유리를 쳐다보고 있는 진은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자꾸 바보처럼 굴어서 정말 자신이 바보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지금 조금씩… 자신이 휘둘리는 것도 다, 아는 게 분명했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고, 멍청이처럼 보이면…….’
제가 몇 번이고 그때를 얘기하고 뭐라도 설명하려 했을 때, 닥치라며 전부 무시한 건 그였다. 그래 놓고 지금……. 진 헤니는 손바닥 위의 유리를 보다, 다 필요 없다는 듯 그것들을 손으로 쓸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에이든은 놀란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유리들을 바라봤다.
“너는 내가 아직도 쉽고 만만해서 그러는 거지…?”
“……?”
차갑게 던져진 말에 에이든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진, 나는 그냥…!”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닌 게 아니었다. 바다에 데리고 오고, 유리 몇 개 주워 주면 바보처럼 기분이 풀릴 거라 생각한 거면서. 여기가 어디든 그냥 혼자서라도 돌아가야 했다.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았다. 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뒤를 돌았다.
“진…!”
“놔!”
뒤에서 제 팔을 잡아오는 손길에 진의 몸이 휘청였다. 급한 손길로 진을 잡아 세운 에이든은 절박한 얼굴로 입을 뗐다.
“진,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전부 다 잘못했어. 나 제발…….”
“놔!!”
팔을 쥐고 있는 에이든을 뜯어내려 진이 안간힘을 썼다. 에이든 테일러는 초조한 낯으로 입술을 씹다, 급히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가 앉은 자리로 차가운 물이 들어왔다 나가며, 입고 있던 옷을 엉망으로 적셨다.
“나 여태 너한테 해선 안 될… 그런 일들 많이 한 거 알아!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응? 나 네가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할게!”
무릎을 꿇어앉은 에이든 테일러가 애처롭게 저를 올려다보든 말든, 진은 그의 손을 뜯어내곤 그대로 뒤돌아섰다. 에이든은 곧바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진에게 뭐든 말하려는 목소리가 제멋대로 덜덜 떨렸다. 푸른 눈이 애절했다.
“진, 네가 마음 풀릴 때까지 맞으라면 맞고, 그거로도 안 된다고 하면 뭐든 나…….”
“상관없다며.”
진에게서 차게 뱉어진 말에 푸른 눈이 움직임을 멈췄다. 눈에서는 주제도 모르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억이 나든 말든 다 상관없다며.”
“진, 그때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진 헤니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다 죽어 생을 잃어버린, 열세 살의 저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그때 반짝이던 유리들이, 태양에 붉게 물들던 푸른 눈이… 다 죽어 없어진 데에 대한 눈물.
진은 또 바보 같이 흐르려는 눈물을 어떻게든 참았다. 이를 악물고 에이든 테일러를 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큰 보폭으로 급하게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또 다시 제 팔을 잡아오는 손길에 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잠깐만, 진… 그건, 그거는 내가 다 설명할게…! 내가 원래 사고 이후에 약을 먹었,”
“내가 그렇게 설명하겠다고 할 때는… 한 번도 들어 준 적 없잖아.”
진 헤니의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이젠 정말 지쳤다 얘기하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만 달싹였다. 푸른 눈에서 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놔.”
“…….”
진이 차갑게 제 팔을 뿌리쳐도, 잡을 염치가 없었다. 알지만… 알지만 그래도 잡아야 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염치없어도 빌고 또 빌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에이든 테일러가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제게서 등 돌려 멀어지는 뒷모습, 그 뒤를 급히 따라가 진을 멈춰 세우려던 순간이었다. 거지같은 통증이 다시 올라왔다. 얼마 전부터 시작됐던 단순한 통증과는 조금 달랐다. 쿨럭이는 기침이 뱉어질 수도 없을 만큼 심장이 조여들고 있었다.
에이든이 헛숨을 들이마셨다. 진을 잡아 세우려던 손은 뻐근한 심장 위로 자리했다. 커다란 몸이 아래로 무너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닷물이 들어오는 경계에서 그가 쓰러지듯 무릎을 꿇어앉았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아리던 심장이 덜컥이며 숨을 뱉었다. 크게 기침이 터지고 있었다. 저 앞으로 급히 걷던 진 헤니의 귀에까지 들릴 만큼.
진은 제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아냐, 나랑 상관없어. 나랑 하나도 상관없어.’
그는 복잡한 낯으로 고개를 털었다. 끊임없는 기침소리에도 단호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진 헤니의 발걸음이 멈춘 건,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뚝하니 멈춘 소리와 함께 진의 몸도 우뚝 멈췄다. 여태 애써 차가운 척하던 낯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
귓가엔 파도소리만이 들렸다. 해가 거의 다 진 이곳엔 바다 특유의 차가운 바람이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에 서 주먹을 꾸욱 말아 쥐던 진 헤니는, 결국 뒤를 돌았다. 크게 떠진 검은 눈에 한가득 맺힌 건, 차가운 바닷가에 쓰러진 에이든 테일러였다.
***
병실에 앉아 있는 진 헤니는 무표정했다. 사실 무표정한 게 아니라, 멍한 상태에 가까웠다. 그의 앞에는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에이든 테일러가 있었다. 진은 그 곁에 앉아 손끝만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호흡기를 급히 꽂아 두었지만 에이든의 몸은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숨을 쉬지 않는 것만 같았다. 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리곤 에이든의 입과 코 근처에 귀를 가져다 댔다. 혹시나 정말 숨을 쉬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
그 옛날에 느꼈던 감정들이 발끝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물에서 어떻게든 건져 올렸던 아이가 제 침대에서 이틀을 내리 잠들어 있던, 그때의 무기력함. 그리고 저 때문에 어깨가 다 찢겨 피를 철철 흘리던 그때. 그때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보는 검은 속눈썹이 흔들렸다. 손바닥 안에 땀이 차고 있었다. 진 헤니는 자꾸 떨리려고 하는 손을 맞잡다, 들리는 진동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제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이었다.
진은 오는 전화를 받을 생각은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집요하게 이어지던 진동이 뚝 끊기고, 잠시 밝아졌던 핸드폰 화면은 다시 빛을 잃었다. 진은 그 모든 걸 빤히 보고 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병실 문으로 다가섰다. 문을 여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진은 애써 무시했다. 가야 돼……. 여기 있으면 안 돼. 본능이 말했다. 여기 있어선 안 된다고.
“진……?”
“……!”
뒤에서 들리는 힘없는 목소리에 진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진 헤니는 놀란 얼굴로 잠시 멈춰 있다 급하게 문을 열었다. 조금 어둡던 병실 안으로 바깥의 밝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은 생각도 하기 싫은 어떤 공간을 떠올리며 어렵게 발을 뗐다.
여기서 나가야 돼…. 지금 나가지 못하면… 영영 나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진…!”
진 헤니가 급한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가고, 에이든 테일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세워지는 상체에 어깨 아래부터 갈비뼈까지가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에이든은 몸을 울리는 고통에 잠시 어금니를 물었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코의 호흡기를 제거했다. 팔에 꽂혀 있던 주사바늘도 마구잡이로 쥐어 뽑았다.
“진, 나 잠깐만…!”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가 어떻게든 진 헤니를 찾아 불렀다. 거기서 그렇게 쓰러질 건 또 뭔지. 가지고 있는 몸뚱이는 정말 제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꼭 기억해야 할 걸 여태 잊고 살아온 머리도, 지금 눈치도 없이 조여 대는 심장도.
휘청이는 커다란 몸이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입에서 뱉어지는 숨이 거칠었다. 푸른 눈이 병원 여기저기를 헤매며 진 헤니를 찾고 있었다. 허공을 서성이던 눈이 급히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발견하곤 크게 뜨였다. 뒤따라가는 발이 조급했다. 제대로 호흡을 하지 못하는 몸이 당장에 병실로 돌아가라 말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앞이 핑핑 돌고, 골이 흔들리는 느낌에 에이든은 몇 번이나 병원 벽을 잡아야 했다. 분명 최대한 빠르게 걷고 있는데, 몸이 천근만근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답답했다. 빨리 가야 되는데, 빨리 가서… 진에게 말할 것들이 많았다.
“진……!”
에이든이 아무리 부르고 불러도 진은 뒤돌아보질 않았다.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돌아봐 줬으면 좋겠는데……. 잠깐만 기다려 주면 내가 곧 갈 수 있는데.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 결국 커다란 몸이 다시 무너졌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병실 복도는 차가운 빛이 가득했다. 차디찬 병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는 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었다.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건… 아니, 이제 남은 거라고 볼 수도 없는 단 하나는 진밖에 없었다. 십 년 전에도, 지금도 그 하나뿐이었다. 많이 소중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방법을 몰랐다. 에이든 테일러는 평생 동안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사랑 받고, 또 주는 것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바닥에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부터라도 잘할 수 있었다. 정말이었다. 곁에서 평생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 약속한 것들을 꼭 지키고 싶었다. 온 사방이 반짝이던 그 오두막에서 두 손을 꼭 잡고 약속했던 것들.
자신을 지켜주겠다 말했던 진은 맨손으로 칼을 쥐었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몸이 저 때문에 엉망이 되고도, 어디 다치진 않았냐며 제 걱정을 먼저 했다. 나중에 더 멋진 사람이 돼서 저를 찾아오겠다는 약속도, 진은 잊지 않고 지켰다.
하지만 자신은 그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 주겠다던 말도, 그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던 약속도… 하나도 지킨 게 없었다. 그를 억지로 가져 보겠다며 좁은 방에 가뒀고, 기억이 나는 게 무슨 소용이냐며 그의 진심을 무시했다.
- 그 바다에서 너를 건져 올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내가 널 많이 사랑해.
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제발 믿어 달라고 제 팔을 쥐어오던 손, 피로 물들어 있던 흰색의 샤워가운,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애절한 목소리까지. 더 일그러질 수 없을 것 같던 에이든의 얼굴이 엉망이 됐다.
안 그래도 제멋대로 뛰던 심장은 호흡이 곤란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에이든 테일러의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
빠른 걸음이었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걸었다. 진 헤니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저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상관없는 것처럼.
해가 완전히 진 밤의 LA는 길가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진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쉴 새 없이 진동하는 핸드폰도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문이 닫힌 방 안에 에이든 테일러와 둘이 있는 건 무서웠다.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가 죽은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는 것도 무서웠다. 둘 다, 참을 수 없이 두려웠다.
진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매번 저를 찾아오는 나쁜 꿈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휙휙 스쳐지나가는 중이었다.
꿈속에서 에이든 테일러는 저 때문에 어깨가 찢어져 식은땀을 흘렸다. 그 작은 몸뚱아리, 윗옷에는 피가 흥건했다. 어렵사리 떠진 푸른 눈이 그 와중에도 괜찮다며 저를 달랬었다. 괜찮다고, 안 죽는다고. 울지 말라고…….
빗속을 뚫고 저를 찾으러 왔던 어린 그는 무릎이 다 깨져 피가 줄줄 났었다. 어디서 얼마나 넘어진 건지, 무릎과 정강이 여기저기가 전부 피와 멍으로 가득했다. 줄줄 흐르던 그 피는, 어린 에이든의 무릎과 어깨만이 아니라 지금의 제 손에서도 뚝뚝 떨어졌다. 오른손이 다 헤져서 쩍하니 벌어져 있었다. 시뻘건 살점과 의료용 실, 엉망으로 엉겨 붙은 진물이 제 손바닥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검은 눈이 갈피를 잡질 못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히기도 했다. 몸이 부딪힌 사람들이 그에게 뭐라 욕을 하며 지나갔지만 진은 아무 말도 들리질 않았다. 그렇게 하릴없이 걷던 진이 걸음을 멈췄다. 어느 가게, 그 안의 TV가 그의 흔들리는 눈길을 잡아챘다.
통유리로 뚫려 있는 그곳은 TV 여러 대가 놓여, 저마다의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야시간에 걸맞게 하찮고, 자극적인,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들이 진 헤니의 검은 눈을 더럽게 만들었다.
[ 가족이 전부 안 좋은 소식에 휩싸인 가운데 에이든 테일러는 또 요셉룸에 갔다는데, 거의 싸이코패스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
[ 돈 많던 아빠가 죽어서 신났나 보죠, 뭐. ]
싸구려 가십 채널의 사회자들은 낄낄거리며 에이든 테일러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머리 위로 천사링을 달고 혀를 쭉 빼놓고 있는 한스 테일러의 그림, 죄수복을 입고 있는 레오나 테일러의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병원복을 입고 바비인형 포장지에 싸여진 여자 하나가 더 있었다. 어머니인 것 같았다.
TV 속,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그림은 홀로 떨어져 있었다. 그의 그림 주변으로는 커다란 집과 여러 비싼 차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분명 그림 속의 에이든 테일러는 환히 웃고 있는데… 제 눈엔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다.
[ 아, 이 집이랑 차는 에이든 테일러가 못 가지죠? 깜빡했네. ]
사회자는 과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에이든 테일러의 옆에 있던 값비싼 것들은 전부 사라졌다. 대신 그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혼자, 우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
진은 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눈을 감았다. 그의 아버지는 죽었고, 누나는 감옥에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프신 모양이었다. 그에게 남은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왜 자꾸…….”
TV 여러 대가 번쩍이며 골목을 어지럽혔다. 그 앞에 서 있던 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왜 자꾸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지. 대체 어디가 아파서 그렇게 쓰러지는 건지, 가족들이 다… 죽고, 아프다는 게 무슨 일인 건지.
“왜 자꾸 이래, 왜…….”
눈물이 나진 않았다. 스스로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분명 병실에서 나왔는데도 나오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저는 그 방 안에 갇혀 있는 게 분명했다. 이래선… 정말 이래선 안 됐다.
***
새벽이 다 돼가는 시간,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알렉스 그레이는 열리는 문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너 대체 어디 있다가 지금 와…! 전화는 왜 안 받고!”
“…….”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진은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알렉스는 진에게 가깝게 다가가다 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눈치 채곤 낯을 굳혔다. 진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너, 왜… 무슨 일 있었어…?”
“…….”
“진…?!”
진 헤니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달싹였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인상을 찡그리고, 또 뭔가를 말하려다 피식 웃었다. 고개를 젓거나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리곤 제 손바닥을 보다가 손을 꾹 말아 쥐기를 반복했다.
“일단… 일단 좀 앉아.”
“…….”
알렉스는 힘이 하나도 없는 진의 몸을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그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차게 질린 진의 얼굴을 보다 그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따뜻한 뭐라도 마시게 해야 했다. 찬장을 뒤져 티백 따위를 찾던 그는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알렉스…….”
“어, 왜? 어디 안 좋아? 그냥 병원에 갈까?”
커피포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을 끓였다. 뜨거운 물이 다 끓었음을 알리듯 새벽 공기를 찢고 알람이 울렸다. 신경질적으로 삐빅거리는 소음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알렉스 그레이는 소파에 앉아 있는 진 헤니에게 가깝게 다가가 서 있었다.
“알렉스, 나… 아무래도 뉴욕 가는 거, 일정을 좀… 바꿔야 될 것 같아.”
“…….”
멍하니 뱉어진 말에 알렉스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일정을 바꾸다니. 안 될 말이었다. 오늘 또 그 새끼가 뭔 소릴 어떻게 했길래, 애가 이렇게 엉망이 돼서 들어온 건지. 왜 갑자기 일정을 미루자고 하는 건지. 역시 에이든 테일러를 만나도록 두는 게 아니었는데…….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거였다.
“진, 뭣 때문에 그러는 건진 몰라도… 잘 구분해.”
“…….”
“네가 열세 살 때, 그래, 그때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 이해해. 뭔지는 사실… 내가 감히 다 이해한다고 말은 못하겠는데, 그래도 그게 마음에 걸릴 거란 거 알아.”
진 헤니는 조용히 이어지는 말에 흐리게 웃었다. 그 미소를 뭐라 해석한 건진 몰라도 알렉스가 조금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못 보고 살았다는 바깥은 훨씬 넓고, 걔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도 많아. 지금 당장에는… 걔가 전부인 것 같아도 결국 아닐 거야, 진.”
“…….”
“나랑… 삼 일 뒤에 꼭 가기로 해. 삼 일 뒤에, 응?”
그러겠다고 해 줘. 알렉스의 목소리가 초조했다. 진은 그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알렉스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진, 대체 왜…”
“아니야, 알렉스. 그 말이 아니야…….”
“……?”
무슨 말인지를 몰라 녹색 눈이 진 헤니를 살폈다. 그 말이 아니라니? 그가 인상을 찡그리기도 잠시, 진이 지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빨리 가는 게 좋겠어.”
출발을 당겨야겠다고.
***
늦은 저녁, 병실의 에이든 테일러는 인상을 한껏 찡그리고 있었다. 옆에 들러붙어 있는 의사며 간호사가 그를 굉장히 귀찮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최소한 이틀은 더 있어야 된다니까요?!”
“하… 필요 없다고. 내가 대체 몇 번을 말하는지를 모르겠네.”
뱉어진 목소리가 사나웠다. 이를 꽉 깨물고 말하는 에이든 테일러에 의사는 어이가 없었다. 의사가 입원을 해야 한다는데, 그는 자기 멋대로 퇴원 수속을 밟고 있었다. 대체 뭐가 필요 없다는 건질 알 수 없었다.
“이틀은 더…….”
“내가 이딴 거지같은 데 누워 있을 시간이 없다고 얼마나 더 말해야 돼요? 왜 자꾸 나를 이렇게 짜증나게 하지? 그냥 내가 나가겠다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병실 문을 나섰다. 가뜩이나 병원에서 하루를 날려서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르는데, 계속 잡아 대는 사람들 때문에 돌아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병실을 나서자 뒤에 서 있던 의사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의사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럼 약이라도 제대로 받아 가세요. 기침 심해지면 꼭 드시고요.”
“…….”
에이든 테일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틀이나 더 병원에 있을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어제 못 다한 이야기를 하기도 부족한데, 말도 안 됐다. 진을 빨리 만나야 했다. 그가 제게 마음을 더 닫아 버리기 전에.
에이든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은 좀… 늦었고, 내일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진에게 연락을 하기 위함이었다. 조금 긴장한 손끝이 진 헤니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귓가에 들리는 신호음에 에이든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신호음이 가기를 세 번, 에이든 테일러는 제 옆쪽에서 들리는 진동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뒤를 돌자마자 걸었던 전화가 끊겼다. 상대방에서 전화를 거절한 거였다.
그가 서 있는 복도에는 아무도 없어서, 에이든이 약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든은 다시 전화의 통화버튼을 누르며 빈 복도를 눈으로 훑었다.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
그는 무언가를 찾듯 가만 움직이다,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럴 리가 없었다. 진이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애타게 불러도 한 번을 돌아봐 주질 않던 그가, 자신이 있는 병원에 올 리가 없으니까.
그럴 리 없는데……. 멈췄던 발이 설마하는 기대에 다시 움직이려던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퍼뜩 놀라 고개를 내린 그는 별로 달갑지 않은 전화에 인상을 찡그렸다. 재산 처분을 위해 만났던 변호사였다.
“네.”
그가 귀찮은 전화에 응답하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스 테일러가 남기고 간 건 왜 또 그렇게 많은지, 지금 걸리적거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진 통화는 결국 에이든 테일러가 맘대로 하라며 전화를 던져버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는 밤이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손에는 봉투 두 개를 든 채였다. 하나는 의사가 꼭 챙겨가라며 닦달을 해댔던 약이 담긴 봉투, 또 다른 하나는… 진이 어제 차에 두고 내린 시계가 담긴 봉투였다.
에이든은 검은색 봉투를 조심히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그리곤 부엌으로 향했다. 약봉지를 찬장에 던져 넣는 손이 거칠었다. 쿵소리와 함께 봉지 안에서 갈색의 약병 몇 개가 굴러 나왔다.
그는 찬장 안에 있던 꼴도 보기 싫은 흰색의 알약과, 이제 막 받아온 붉은색 알약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저는 평생 약이나 처먹다 뒤질 팔자가 분명했다.
의사는 제게 심장과 폐가 모두 안 좋아졌다 말했다. 특히 스트레스가 심할 때 심기능이 극도로 떨어지니 조심해야 한다고. 그 좆같은 사고 이후 살아있는 게 기적인 수준이니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숨 쉬고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했다. 살아있어야 용서를 빌든, 뭐든 할 수 있으니까.
“하…….”
깊은 한숨이 샜다. 그는 푸석푸석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그리곤 진의 핸드폰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에이든은 조금 초조한 기색으로 입술에 잔뜩 일어난 거스러미를 뜯었다.
신호음이 가기를 다섯 번, 전화는 건너편에서 거절한 건지 뚝하고 끊겨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에 에이든이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지금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이든이 흐린 낯으로 메시지창을 켰다. 피가 잘 돌지 않는 건지 희게 질린 손끝이 액정 위에서 움직였다.
「진, 나 아직 두 번 남아 있는 거 맞지…?」
「우리 주말 말고 내일 만날 수 있을까?」
아직 두 번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하니 웃음을 뱉었다. 두 번이 지나면 포기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었다. 용서해 줄 때까지 따라다녀야 했다. 구질구질하다 해도 상관없었다.
메시지가 전송되고, 그때까지 부엌 테이블 주변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가 의자에 앉았다. 공간은 어두웠다. 부엌에 있는 작은 스탠드만이 켜진 채였다. 에이든은 빤히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혹시 메시지는 바로 대답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핸드폰 액정이 어두워질라 치면 그가 손가락으로 액정을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핸드폰만 보고 있기를 이십 분.
“…….”
에이든 테일러는 돌아오지 않는 답장에 다시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진, 전화 괜찮을 때 메시지 줘」
「기다리고 있을게」
메시지를 전송한 뒤, 그는 핸드폰을 꼬옥 쥐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검은색 봉투 안의 박스 하나를 들어올렸다. 달각이며 열린 상자 안에는 검은색 베젤의 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진과 가장 잘 어울리는, 그 시계.
작게 기침이 터져서 에이든이 입을 막았다. 내일은 손목에 채워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슬프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시계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폈다. 혹여나 작은 흠이라도 있을까, 걱정하는 시선이었다. 선물인데… 그래선 안 되니까.
시계를 살피던 그는 제 손목에 있는 팔찌를 바라봤다. 입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에이든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슬며시 닫아 테이블 위에 따로 빼두었다. 그리곤 제 손목에 있는 팔찌를 풀어 손에 쥐었다.
팔찌를 쥔 그가 소파에 몸을 뉘였다. 푸른 눈 바로 앞에 푸른색의 원석이 자리했다.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조심스럽고도 애틋했다. 많이 예뻤다. 제 눈동자를 닮아 샀다던 이 팔찌도, 그 바다에서 제 생각이 났다던 그도.
내일은 꼭 진이랑 얘기를 많이 하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고맙다는 말이 먼저였는데, 고맙다는 말은 쏙 빼고 시계부터 내민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바보 같고 등신 같은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한숨만 푹푹 났다.
“제일 중요한 말도 못했네…….”
입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에이튼 테일러는 이토록 서투르고,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내일 할 말을 정리했다. 정리한다고 그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용서해 달라고, 뭐든 할 테니 곁에만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내가… 너 없이 살 수 없는 것 같다고. 그게 사랑이란 거라면,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내일은 말해야 했다. 꼭 진에게 말하고 싶었다. 또 다시 잘게 기침이 터졌다. 진과 함께 있는 내일을 생각하며, 그가 차가운 새벽을 견뎌내고 있었다.
***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에이든 테일러는 다음 날 눈 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창에는 그가 보낸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에이든이 흐린 낯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그리고 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
“…….”
그가 결국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서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어금니를 물며 급히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진한테 당장 가야 했다. 에이든 테일러의 머릿속에 어제의 그가 재생되고 있었다.
진은 아직도 제가 쉽고 만만하냐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에게 진 헤니만큼 어렵고 긴장되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그 앞에만 서면 온 몸이 삐걱대는 느낌이었다. 하고 싶은 말들도 목구멍에 턱턱 걸려서는 뱉어지질 않았다. 뱉어 봤자 등신처럼 더듬대는 것밖에 하질 못해서, 속으로 몇 번이나 욕을 씹어야 했다.
차게 가라앉은 검은 눈을 볼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차고, 심장이 덜컥이며 기침을 뱉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저를 봐 줬으면, 아니… 보지 않았으면.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러니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었다. 만만하냐니……. 그냥… 예전 일을 조금이라도 떠올리면 다시 저를 돌아봐 주지 않을까 싶었던 건데. 진이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 꼭 말해야 했다.
에이든은 급히 신발을 신는 와중에도 현관의 전신거울을 힐끗 살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거친 얼굴도, 거스러미가 일어나 갈라진 입술도,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이때에 꼴이 거지같았다.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터졌다.
그가 현관을 나서며 다시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한손으로는 차키를 꺼내고 있었다. 차고로 향하던 그는 제 귀에 들리는 소리에 잠시 우뚝 멈춰 섰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
에이든 테일러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멍한 눈이 자신이 제대로 건 게 맞는지 번호를 확인했다.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번호가 없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 ]
“…….”
크게 뜨인 푸른 눈이 허공을 헤맸다. 핸드폰을 꾸욱 쥐고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던 그가 급히 차에 몸을 실었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거는 손이 몇 번을 헛돌았다. 오늘따라 시동도 왜 이렇게 걸리질 않는 건지. 그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차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빠르게 출발하고, 에이든은 넋이 나간 채 운전했다. 너무 놀란 눈에는 눈물이 맺힐 여유도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방금까지만 해도 전화가 되던 번호가 왜…….
아무래도 자신이 병원에 누워서 쓸데없이 잠을 잘 동안, 진이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빨리 가서 오해를 풀어야 했다. 제가 하루 종일 전화를 안 한 게, 그를 포기하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절대 아니었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했는지 모를 시간이었다. 에이든은 삼십 분이 걸리는 거리를 십 분 만에 달려 도착했다. 중간에 사고가 안 난 게 다행인 지경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마자 그가 급히 몸을 내렸다.
알렉스 그레이의 집이었다. 에이든은 현관으로 달려가서는 문을 두드렸다. 쿵쿵거리며 문이 흔들렸다.
“진……!”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초조한 몸이 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핸드폰을 들어 다시 진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바뀌지 않았다.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
“진!!”
에이든 테일러의 절박한 손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의 푸른 눈에 이제야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네 번이라고 했잖아, 우리 네 번 만날 수 있는 거였잖아. 나 아직… 두 번 더 만날 수 있는 거잖아. 너랑 두 번 더 얘기할 수 있는 거잖아.
“진!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잠금이 반쯤 허술하게 잠겨있던 문이 세게 두드리는 손길에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익하니 문이 열리고 드러난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런 가구도, 무엇도 없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
에이든 테일러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눈으로 들어오는 장면들을 뇌가 해석하지 못했다. 머리가 먹통이 됐다.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허공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눈, 그 푸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그는 주춤거리는 발을 옮겨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서도 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서 떨리는 손과 눈이 여기저기를 헛돌았다. 깨끗하게 치워진 집은 이제 정말 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진, 나… 아직, 나 아직 할 말이, 못 한 말이 있는데…….”
툭툭 떨어지기만 하던 눈물이 뺨에 길을 만들며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걸 알지만 그는 방 여기저기를 들어가 보며 진을 찾았다. 길을 잃어 버려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에이든은 빈 공간에 몇 번이고 진의 이름을 불렀다. 혹시나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진, 제발…….”
그가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려 덮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연습했던 말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의 서투른 사랑 고백은 이제,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
“진, 우리 이제 가야 돼.”
“…….”
알렉스의 말에도 숙여진 고개가 올라올 줄을 몰랐다. 진 헤니는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짐을 챙겨들던 나디아는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에 인상을 찡그렸다.
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새벽부터 공항에 앉아 있는 내내 멍했다. 모자의 챙에 가려져 눈도, 표정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서 마음이 답답했다. 그냥 어딘가에 쓸려 다친 듯한 손등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뉴욕으로 가는 제트블루 항공 이용 고객께서는……. ]
“진.”
다시 한번 저를 부르는 소리에 진의 고개가 올라왔다. 그는 지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있던 검은색 백팩을 둘러매곤 비행기 티켓을 챙겨 들었다.
‘그래, 괜찮은 것도 다 확인했으니까…….’
큰 문제가 없으니 병원에서 나왔겠지. 그렇게 큰일도 아니고…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니고. 그냥… 내가 죄책감을 가지면 안 되니까. 확인하기를 잘했어.
에이든이 쓰러져 병원에 누워 있던 날, 진은 그 길로 티켓을 하루 앞당겼다. 급히 구한 티켓이라서 하루라도 당길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하루가 무슨 차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거라도 당겨야 했다. 한 번이라도 더 에이든을 마주했다간 영영 그를 떠날 수 없단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진은 그날 새벽, 몇 번이나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제 발을 다잡았다. 그렇게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야… 나랑은 상관없어. 많이 아파 보였는데……. 아냐, 하나도 안 불쌍해.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심장은 엇박으로 뛰었다. 차에서 들었던 노랫말처럼 그는 에이든 테일러라는 중력에 추락해 바닥을 기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리고 그래선 절대로 안 됐다.
진이 또 다시 차오르려는 쓸데없는 생각들에 고개를 털었다. 병원 복도에서 봤던 희게 질린 낯이 진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터벅이며 걸음을 옮기던 발은 탑승 게이트 바로 앞에서 다시 멈춰 섰다. 가방끈을 쥐고 있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그가 입술을 씹으며 뒤를 돌아봤다.
이제 정말 LA를 떠나는 거였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 넓은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가 스쳐지나갔다. 들뜨고, 설레고… 너를 만날 생각에 헬륨가스가 잔뜩 들어간 풍선 같았던 날.
그 뒤로도 부푼 마음은 꺼지질 않았었다. 바보 같은 제가 몇 번이나 집 계약을 허탕치고, 네가 다닐 거라 말했던 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면서 손을 덜덜 떨었지만… 그래도 다 행복했다. 너랑 같은 땅을 밟고 있어서, 너를 곧 만날 수 있어서.
‘그랬었는데…….’
이른 아침의 공항은 사람으로 북적였지만, 어쩐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진은 그 공허함에 인상을 작게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 앞에서 알렉스와 나디아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은 두 사람을 보며 발을 옮겼다.
비행기 안에는 저마다의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출장을 가는 사람, 연인과 함께 여행을 가는 사람, 아니면 가족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 그들은 비행기 안에서 들뜬 얼굴로 떠들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진의 표정만 잔뜩 굳어 있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티켓과 짐칸 아래에 적힌 숫자를 번갈아 보며 자리를 찾았다. 그의 자리는 창문 옆이었다. 진은 매고 있던 백팩을 한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백팩 위에 안 올려도 괜찮아?”
“아, 나는 괜찮아.”
알렉스가 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제 품에 있는 가방을 내려다보다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짐은 정말 별것도 없어서 허무한 수준이었다. 나디아가 짐을 정리하라며 캐리어를 줬지만, 캐리어가 필요 없었다.
굳이 가지고 갈 필요가 없는 물건들은 모두 버리고, 남은 건 이 백팩 하나였다. 제게 남은 게 이다지도 적고, 하찮고, 별것도 없었다. 이곳에서의 7개월이 남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구잡이로 상처 입은 추억도 남은 거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만이 제 손에 있었다.
그는 쓰라린 손등을 다시 매만졌다. 에이든의 손 위에 있던 유리를 쓸어버리며 생긴 생채기들이었다. 잔상처들은 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쓰라리고 따가웠다. 계속해서 신경이 쓰여 손이 갔다. 그는 이렇게… 어떤 방법으로든 제게 상처만 남기는 사람이었다.
이내 비행기가 몸을 띄우고 LA 땅에서 멀어졌다. 진 헤니는 먹먹해지는 귀에 눈을 감았다. 알렉스의 말대로 그는 여섯 시간 뒤면 아예 다른 땅에 발을 붙일 예정이었다. 그게 너무 어이가 없었다.
에이든을 만나려 애썼던 시간은 십 년이었다. 그런 그를 떠나는 건, 여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진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샜다. 나디아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언제나 품에서 반짝이며 아름다웠던 제 사랑은 별게 아니었다. 별게 아니라서 화가 났다.
바깥의 날씨는 화창했다.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비행기는 그의 새 출발을 응원하기라도 하듯, 찬란한 하늘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밝고 빛나는 풍경에 진은 눈이 시큰하다고 느꼈다. 눈에 눈물이 고인 이유는, 바깥이 너무 밝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는 뺨에 흐른 눈물을 황급히 닦으며 속으로만 인사했다. 이 LA에게, 바보 같고 어리석었던 그때의 자신에게. 그리고… 그런 자신이 사랑했던 그에게.
‘안녕, 에이든.’
이젠 정말 안녕이었다.
***
아무래도 며칠 전처럼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에이든 테일러가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딱 한 번 몸을 뉘였던 적이 있는 싸구려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진이 원래 지내던 아파트에는 이 침대 하나만 남은 채였다.
“…….”
옆으로 누워 있는 그의 눈에서 새삼스럽지도 않은 눈물이 흘렀다. 멍하게 떠진 푸른 눈앞에는 어젯밤처럼 팔찌가 자리하고 있었다. 눈물이 고였다가 흐르고, 고였다가 흐를 때마다 앞에 있는 팔찌가 흐려졌다 또렷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알렉스 그레이의 집에서 나와 원래 진이 지내던 곳에 도착했을 때, 한 번 더 심장이 멈추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이미 다 정리된 방 안에서 그는 한참을 서성였다. 분명 좁디좁은 아파트였는데,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리게 됐다. 그는 언젠가 섬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손을 꼬옥 말아 쥔 채 어쩔 줄을 몰랐다. 문제는 이제 그를 찾으러 달려와, 괜찮다며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한참이나 진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든은 오후 내도록, 저를 찾으러 와 줄 진만을 기다리며 뻐근해지는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덜컥이던 심장이 제 박자를 찾은 건 그가 무언가를 깨닫고 나서였다.
이건… 지금 절대 현실이 아니었다. 꿈인 게 분명했다. 아직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거였다. 날이 밝고, 아침이 오면 꿈에서 깨서 진을 만나러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 꿈에서 깰지 알 수 없었다. 꿈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많이 무서웠다. 진이 너무 보고 싶었다. 아니면… 사실은 처음부터 전부 꿈인 건 아닐지, 그가 팔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부 다 나쁜 꿈이어서, 눈을 떴을 땐 저를 꼬옥 안고 있는 진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나쁜 꿈을 꿨다고 말하며 품을 파고들면 진은 작게 웃을 게 분명했다. 다 컸는데 아직도 혼자 자면 무섭냐고 저를 놀리며, 그렇게 둘이 아침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그럼 자신은 혼자 자면 무서우니까, 앞으로는 절대 혼자 두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뺨과 목에 입을 맞출 거였다. 절대…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한참이나 팔찌를 바라보던 에이든 테일러가 눈을 꾸욱 눌러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것 같았다. 전부 다 악몽이니까, 잠에서 깰 때만 기다려야 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좁은 아파트 안으로 끼쳐 들어왔다. 해가 지고, 조금 허술한 창문으로 밤의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 때까지… 에이든 테일러는 그렇게 눈을 감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그를 깨울 때까지.
좁은 아파트에 있는 침대는 그 뒤로 언제나 누군가의 온기로 채워졌다. 침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곳에 펜과 종이, 약병 몇 개와 생수가 자리를 차지했다. 침대 옆의 협탁이라 부르기 민망한 서랍장 위에는 티켓 같은 종이들이 뭉텅이로 쌓여 있기도 했다.
또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어제와는 또 다른 해가 뜨고, 해가 졌다. 그때마다 쌓여 있는 종이의 장수가 많아졌고, 약병과 생수 역시 숫자를 늘려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떠올랐고, 이윽고 밤이 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방 안으로 커다란 인영이 들어섰다. 그는 자켓을 벗으려다 제 손끝을 바라봤다. 아까 분명 손을 씻는다고 씻었는데, 모래가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을 툭툭 털었다. 그리곤 익숙한 손길로 자켓을 벗어 침대 한쪽에 접어 두었다. 그가 자켓 주머니에서 티켓 하나와 영수증,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서랍장 위로 올려 두었다. 서랍 위에 있는 티켓들은 하나 같이 새 거였다. 입장권처럼 보이는 그것은 한쪽을 뜯어 사용하게끔 돼 있었는데, 뜯겨 있는 티켓은 단 한 장도 없었다.
피식하는 웃음이 허름한 공간을 채웠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정말 거지같은 일이었다.
영수증에는 그의 사인이 있었다. 이제는 창구 직원이 그를 알아보는 지경이라 따로 무언가를 작성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매일 아침에 직원에게 봉투를 내밀고, 그걸 받아든 직원이 정말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면 일은 금방 끝났다.
그는 그 티켓과 영수증 뭉텅이를 한동안 보다가 침대 위로 몸을 올렸다. 끼익하며 소리를 지르는 스프링들이 이제는 그만하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위에 누운 사람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에이든 테일러는 오늘도 옆으로 누워 팔찌를 들여다봤다. 커다란 손이 푸른색의 돌멩이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작게 터지는 기침에 입을 막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자꾸 기침이 멈추지 않아서 그는 협탁 위의 약병을 들었다. 그는 손에 잡힌 갈색의 약병을 보다가, 뒤에 놓인 흰색의 병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약이 바닥나는 중이라 아껴 둬야 했다. 에이든은 갈색의 약병을 열곤 입안으로 붉은 알약을 집어넣었다.
꿈속에서 사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왜 꿈에서 깨지 못하는 건지…. 대체 언제쯤… 꿈에서 깰 수 있는 건지, 혹시 진은 알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약을 먹으니 몸이 노곤노곤 풀어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그는 곧 잠이라도 들 것처럼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기가 무섭게 자켓 안에 넣어 놨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에이든은 곧바로 눈을 뜨고 자켓을 뒤졌다. 핸드폰을 찾는 손길이 많이 급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곤 바로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을 보자마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하, 진짜… 짜증나게…….”
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대방은 그가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본론부터 꺼냈다. 짜증난다는 목소리였다.
[ 결재 서류 빼먹으셨잖아요. ]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요.”
[ 아니, 위에서 사인을 해야 뭘 알아서 하죠! 곧 출장 건 때문에 급하다고 몇 번을 말, ]
“제시한테 전화해요, 나 말고.”
통화는 에이든에 의해 끊겼다. 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종료버튼을 누르곤 머리를 싸맸다. 입에선 헛웃음이 터졌다. 꿈은 많이 생생했다. 그때랑 똑같이. 마치 꿈이 아닌 것처럼 자신은 기침을 했고, 가끔은 뻐근하게 조여 오는 심장에 약을 먹어야 했다. 병원에 가서 정기적으로 검진도 받아야 했고, 오늘처럼 별 거지같은 전화를 야밤에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를 꿈에서 깨워 줄 전화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에이든은 침대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있는 그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이젠 정말 그만 꾸고 싶었다.
그가 지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 다시 침대로 몸을 뉘였다. 다시 깊게 잠이 들면 오늘은 꿈에서 깰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그가 눈을 감았다. 에이든 테일러가 이 말도 안 되는 악몽을 꾼 지,
오늘로 561일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