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Forgotten Merman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다. 멍들고 끝이 다 깨진 손톱을 안으로 말아 쥔 채, 앞에 앉은 아버지의 눈치만 봤다. 벌벌 떨리는 손끝이었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상태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문제는 왜 틀린 거지?”
“…….”
아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어제 보았던 진급 시험에서 에이든 테일러는 한 문제를 틀렸다. 채점표를 받아들자마자 아이는 파랗게 질렸다. 아버지께 혼날 텐데… 또 손톱을 맞아야 할 텐데…….
“시, 실수… 실수였어요……. 다 아는 문제예요!”
아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다 아는 문제였는데, 실수로 틀렸다고. 다시 풀면 만 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한스 테일러는 말 같지도 않은 말로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 테일러, 네가 뭘 아는지 모르는지는 네 점수로 보여 주면 될 일이야. 네가 몇 점짜리인지 말이다.”
“…….”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군.”
이렇게 덜떨어져서야. 한스 테일러는 마뜩찮다는 눈빛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그의 어린 아들은 어딘가 모자란 놈처럼 굴었다. 이렇게 약해 빠져서는 바깥세상에 내놓기가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조금 더 호된 교육이 필요했다.
“손을 펴고, 맞을 때마다 하나씩 다시 말해.”
“…….”
아이는 울먹이며 손을 폈다. 손톱이 보이도록 쫙 펴진 그 위로 모진 회초리가 날아들었다.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는 여린 손톱과 부딪히며 단호한 소리를 냈다. 아이의 푸른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물며 몸을 움찔했던 에이든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한 문장씩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제게 언제나 기억하라 했던 것들을.
“모르는 게 있어도… 모,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시 떨어지는 매질에 손끝이 곱아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에도 아이는 손을 접지 않았다. 아니, 접지 못했다. 제 맘대로 손을 숨겼다간 더 혼날 뿐이었다.
“잘못한 게 있어도… 먼저 고개 숙이지 않는다…….”
“다음.”
또 한 대를 맞았을 땐 결국 입에서 울음이 터졌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던 흐느낌이 입에서 나오자 아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제 입을 막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역시 들킬 새라 빠르게 옷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하…….”
하지만 모두 제 무서운 아버지에게 들킨 뒤였다. 한스 테일러는 정말 못 봐 주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깊게 뱉어지는 숨소리에 에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결국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닦아 봤자 소용없었다.
“그 다음이 뭔지 말해 봐.”
“무슨 일, 이 있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잘 알고 있는데, 왜 울지?”
필사적으로 아이는 목 뒤로 울음을 삼켰다. 작은 몸이 흐느낌에 들썩였다. 울면 안 되는데…….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얕잡아 볼 거라고, 자신을 무시할 거라고 했다.
벌벌 떨리는 손끝을 마주 잡으며 아이가 눈을 꼬옥 감았다. 커다란 눈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보다, 한스 테일러는 뒤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아이는 묵직한 소음이 들리자 눈을 떴다. 나무 테이블 위로 책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분명 소설책은 읽어선 안 된다고 했을 텐데.”
“……!”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은 제 책이 맞았다. 아버지께 들킬까 몰래몰래 읽었던 그 책. 데미안.
책을 보자마자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눈물로 흥건한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분명 엄청… 엄청나게 혼날 거였다. 진급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혼날 게 분명했다. 아버지의 말을 어겼으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겁먹은 눈으로 서 있던 아이는 제 앞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서늘한 그 눈을 보던 아이가 황급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뛰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아이의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에이든 테일러!”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움찔했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본능과도 같았다. 열세 살의 아이는 절박한 얼굴로 제 아버지에게서 도망쳤다.
‘무서워, 무서워…!’
슬프게도 아이는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넓고 호화로운 저택, 도망쳐 봤자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였다. 대리석 바닥에 미끄러진 아이가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아이는 아프지도 않은지 벌떡 일어나 이층으로 향했다.
그리곤 다급한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번갈아 보더니, 방문 하나를 열었다. 아이는 안으로 들어가 책상 아래에 몸을 숨겼다. 열세 살이라고 보기엔 조금 큰 몸을 어떻게든 그 좁은 공간에 욱여넣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자꾸 울음이 샜다. 그 아래에서 덜덜 떨고 있기를 몇 시간,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너,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
볼에 눈물이 다 말라붙은 에이든이 고개를 들어 방의 주인을 바라봤다. 제 누나였다. 아이는 슬쩍 눈치를 보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누나 방에는 절대 안 오시잖아……. 나 여기 조금만 있으면 안 돼?”
“…당장 나가.”
“누나는 손톱 한 번도 안 맞아봐서 그래…!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나가라고!”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에 참았던 눈물이 다시 고이기 시작했다. 누나는 하나도 몰랐다.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단 한 번도 그 서재에 들어가 혼나 본 적이 없으니 저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거였다.
무릎에 고개를 묻고 한참을 앉아 있던 아이는, 슬며시 책상 밑에서 몸을 꺼냈다. 피멍이 든 손을 맞잡으며 제 누나의 옆을 지나쳐 나왔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작게 그녀를 비난했다.
“누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전부 다 싫어…….”
“고마워, 나도 너 싫거든.”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어린 에이든 테일러에게 제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
다음 날, 레오나 테일러는 새파란 제 손톱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인조 손톱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녀는 오늘 일부러 시험을 망쳤다. 제 아버지에게 손톱을 맞기 위해서.
“…….”
하지만 그녀의 손톱은 푸르게 멍들지도 않았고, 다 깨져 피가 나지도 않았다. 대신 파란색 가짜 손톱이 붙여져 있을 뿐이었다. 여름이니 시원해 보이는 게 좋지 않겠냐며, 수다스러운 직원이 추천해 준 색이었다.
제 침대에 멍하게 앉아 있는 그녀는 조금 전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다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저도 손톱을 맞아야 하는 거냐고, 반쯤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던 말에 줄리아 테일러가 말했다.
- 여자애가 손톱 망가지면 어쩌려고. 넌 가지 않아도 돼.
- …….
- 손톱은 왜 이렇게 짧게 깎았니? 조금 길러서 네일을 받는 게 좋겠구나.
- 손톱이 길면 펜을 쥐는 게 좀… 불편해서요.
레오나가 흐린 낯으로 대답했다. 제 어머니는 뭉툭하게 깎여진 손톱이 탐탁지 않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 그럼 펜을 쥐지 않으면 되잖니.
- …….
너무 쉽게 뱉어진 그 말에 레오나 테일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생각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는 아무도 관심이 없지? 분명 자신이 에이든 테일러보다 나았다.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다. 그의 자랑스러운 첫째 딸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게 관심이 없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서재, 제대로 나눠 본 적 없는 대화……. 손톱 열 개가 다 깨져 나가도 좋으니 저도 관심을 받고 싶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에이든 테일러의 앞날만을 걱정했다. 그 아이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왜 자꾸 그렇게 청개구리처럼 구는 건지.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에이든 테일러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레오나는 무언가 깨달은 낯으로 침대에서 일어섰다. 맞아, 에이든 테일러 때문이었어. 걔가 세상에 태어난 뒤로… 두 분 다 나한테 관심이 없어진 거야.
‘전부 다… 전부 다 에이든 테일러 때문이야!’
아름다운 푸른 눈이 탁해지고 있었다. 한참이나 역겨운 손톱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곤 맞은편에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안에서 책을 읽던 에이든은 화들짝 놀라며 원래 읽던 책 밖으로 다른 책을 세웠다. 형편없이 멍든 손이 쥐고 있는 것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에이든은 그 두껍기 짝이 없는 책을 열심히 읽는 척하려 했지만, 쾅 소리를 내며 원래 읽고 있던 책이 바닥을 굴렀다.
“…….”
“…….”
떡하니 보이는 책 표지에 에이든이 낭패라는 얼굴을 했다. 어제 아버지가 버린 것을 주워 온 건지 책이 너덜너덜했다. 레오나는 바보 같은 짓거리라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제 누나를 보며 간절한 표정을 했다.
“아버지한테 말하지 마…, 응?”
제발……. 에이든이 작게 애원했다. 레오나 테일러는 그 모습을 보다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그래, 좋아. 말 안 할게.”
“고마,”
“대신 나랑 잠깐 어디 좀 갈래?”
“……?”
평소 그녀답지 않게 상냥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에이든은 의아한 낯을 했다. 같이 어딜 가자고…? 제 누나는 한 번도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안 가? 그럼 아버지한테…”
“아, 아냐! 가! 갈게!”
에이든이 책을 서둘러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나는 따라오라는 듯 먼저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손톱을 맞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
한참이나 걸어서 도착한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데 위치한 요트 선착장이었다.
“요트 타려고…? 오늘 저녁부터 비 온다고 했는데……. 나중에 타면 안 돼?”
“지금 해가 이렇게 쨍쨍한데 무슨 비야.”
레오나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에이든은 성큼성큼 요트 위에 몸을 올리는 그녀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테일러’라고 적혀 있는 그것은 그닥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크기의 요트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가서 말해도 돼? 너 소설책 그것만 가지고 있는 거 아니지?”
“…….”
망설이던 에이든은 결국 요트 위로 몸을 실었다. 레오나는 익숙한 손길로 요트에 시동을 걸었다. 몇 번 친구들과 타고 놀았던 경험이 있는 까닭이었다. 요트가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고, 레오나의 푸른 눈엔 점점 비정상적인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요트는 생각보다 더 먼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배가 선착장과 멀어질수록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다 한가운데로 나갈수록 물살 역시 세지고 있었다.
“누나,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
“레오나?! 이러다가 다신 못 돌,”
“시끄러워.”
에이든은 제 뒤로 멀어지고 있는 육지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제 누나는 옆에 앉은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운전하고 있었다. 마치 목적지가 정해진 것처럼. 하지만 제가 알기로 이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섬도, 육지로 나갈 수 있는 다른 선착장도.
점점 하늘엔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이내 얇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뜯어말렸다.
“레오나, 정말 안 돼!”
“돼.”
“대체 어딜 가려는 거야! 돌아가자, 응?”
“돌아갈 거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몰라 에이든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요트는 물살이 거세지자 선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로 물이 넘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될 것 같아.”
“……?”
레오나는 바다 한복판에 요트를 세웠다. 갑작스럽게 꺼진 엔진에 에이든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레오나는 차분한 얼굴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더 크면 힘들어질 것 같아서.”
“…레오나?”
“네가 나보다 작을 때는 앞으로 없을 거니까.”
에이든은 멱살이 잡힌 채 자리에서 끌어올려졌다. 그리곤 운전석에 억지로 앉혀졌다. 푸른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지금 이게 무슨……. 시동이 잠시 꺼졌던 요트는 강한 소음과 함께 엔진이 켜졌다. 레오나는 사나운 표정으로 키 몇 개를 만지더니 말했다.
“잘 가, 에이든.”
“……?!”
요트 엔진이 비정상적인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요트의 조작법 따위 당연히 알 수 없는 열세 살의 에이든은 차가운 낯의 누나를 올려다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미 요트는 출발했고, 레오나 테일러는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누르며 요트에서 뛰어내린 후였으니까.
이제 레오나가 할 일이라곤 전화기에 대고 헐떡이며, 겁에 질린 듯 우는 것 정도였다.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제 동생이 사라졌음을 알리는 것도 함께. 구조대와 전화가 연결되기 전, 레오나가 건조하게 말했다.
“꼭 죽길 바랄게.”
그게 그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
물속에서 자신이 본 것은 분명 인어였다. 정말이었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인어가 세상에 어디 있냐고 다들 비웃을 거야……. 에이든 테일러는 덮고 있는 담요 안으로 손을 숨기며 생각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멍했다.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집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에이든 테일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제 볼을 가만 꼬옥 꼬집어 봤다. 아닌데. 아픈 거 같은데……. 인상을 작게 찌푸리고 있던 아이는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올렸다.
“…….”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고 있는 사람은 제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 하나를 든 채 방으로 들어오던 아이는, 놀란 건지 입을 작게 벌리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너무 놀란 표정이어서 덩달아 에이든 테일러까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어, 일어났, 깨어났는데… 엄, 엄마가 없…….”
“……?”
무슨 소리야? 에이든 테일러는 지금 제가 듣고 있는 게 영어가 맞는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더듬더듬 뱉어지는 말이 문장을 온전히 만들지 못하고 끊기고 있었다. 아이는 손에 들고 있는 컵을 내려다봤다가, 저를 쳐다봤다가, 그리고 문 밖을 돌아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핫초코… 하나밖에 없는, 아냐, 이거 마실래…?”
“……?”
“핫초코를 마시면 안 되나…? 아, 아프니까 안 될 거 같아. 그게… 너, 너는 안 주고 나만 마시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아이는 울상인 얼굴로 뭐라 말을 하다가, 그제야 무언가 생각 난 듯 급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우당탕탕 이어지는 발소리 뒤로 아이의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앗, 뜨거!”
손에… 그걸 들고 뛰면 어떡하자는 건지……. 에이든 테일러가 인상을 찌푸렸다. 눈을 뜬 곳에… 웬 바보 하나가 있었다.
***
“네가 알려 준 번호로 전화를 해 봤는데, 집에 아무도 없는 건지 받지는 않더구나. 우선 메시지를 남겨 뒀으니까 곧 부모님이랑 연락이 될 거야.”
“…….”
에이든 테일러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수잔은 아이의 경계 어린 눈빛에도 그저 온화하게 웃었다. 그녀는 제 어린 아들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막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수잔은 에이든이 덮고 있는 이불을 꼼꼼히 여미며 말을 덧붙였다.
“엊그제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배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야. 조금만 여기서 지내다가 가렴.”
“…….”
“음… 일단, 이틀이나 자고 일어났으니 뭘 좀 먹어야겠지?”
에이든 테일러는 다정한 말들에 하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낯선 환경에 잔뜩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수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살짝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제 어린 아들의 작은 머리가 빼꼼 보였다.
“진, 거기서 뭐하는 거니?”
“…깼어요? 이제 안 아파요…?”
“괜찮은 것 같구나. 들어가서 인사하렴.”
진 헤니의 검은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문 바깥에서 슬쩍슬쩍 안을 훔쳐보던 아이는 쭈뼛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 제 방이건만, 들어가도 되는 건지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주춤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진은 가까워질수록 눈에 가득 들어오는 에이든의 얼굴에 작게 탄성을 뱉었다.
눈이 엄청 파란색이야…! 제 주변이나 섬에 사는 사람들의 눈은 밝은 갈색이나 검은색이 대부분이었다. 머리카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두운 갈색인데… 아이의 것은 많이 달랐다. 태양으로 실을 뽑으면 저런 색이 아닐까, 라고 어린 진 헤니가 생각했다. 태어나서 본 중에 가장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아, 안녕.”
“…….”
“내 이름은 진 헤니야, 너는?”
진은 몸이 배배 꼬이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진 헤니는 부끄러운지 괜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제 이름을 알려줬는데도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진이 슬쩍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나랑… 말하기 싫은가? 아직 아픈가? 엄마가 괜찮은 것 같다고 했는데……. 진의 얼굴이 걱정으로 울상이 되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진이 갑자기 울 것처럼 굴자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든이 인상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진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래도 아픈 게 맞나 봐…! 진은 어쩔 줄을 모르며 에이든을 요리조리 살폈다.
“어디가 아퍼…? 잠깐만, 엄마 불러올게…!”
“…….”
“엄…….”
“아, 안 아파. 나 안 아파….”
아이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나가려 하자, 에이든이 작게 아프지 않다 대답했다. 진은 옷소매로 눈물을 슥슥 닦으며 다시 에이든에게로 돌아왔다. 정말? 작게 묻는 목소리에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끝이 빨개진 진을 보며 괜히 죄책감을 느끼는 에이든이었다.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사실 에이든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중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센 척을 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 낯선 장소. 갑자기 제 앞에 펼쳐진 것들에 에이든은 많이 당황스럽고, 엄청 무서웠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집에는 언제 갈 수 있는 건지…. 울음이 터지려 했지만 울면 안 됐다. 울면… 울면 혼나니까.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얕잡아 보이면 안 됐다. 최대한 강해 보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랬던 건데…….
“다행이다…. 이틀 내내 잠만 자서… 진짜 한 번도 안 깨고 계속 자서… 혹시…….”
“…….”
“혹시 못 일어날까 봐… 못 일어나면 안 되는…….”
그 뒤로 와앙 하는 울음이 터졌다. 스프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들어오던 수잔은 제 아들이 엉엉 울고 있는 것에 놀란 표정을 했다. 그리고 에이든을 쳐다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저도 모르게 손사래를 쳤다. 제가 울린 거 아니에요…! 푸른 눈이 필사적으로 결백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진, 아이가 놀라잖니. 그만 뚝 그쳐.”
“아프면 안 되는데…!”
수잔은 엉엉 울며 제 옷자락을 꼬옥 쥐어오는 손길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진은 이틀 내내 아이의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끔 숨을 안 쉬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지 코와 입 근처로 귀를 대 보기도 했고,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릴라치면 부리나케 제게 달려오곤 했다. 그때마다 통통한 볼이 눈물로 축축해서, 수잔은 정말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몇 번이나 심장을 쓸어내려야 했다.
“진이 걱정을 많이 했어. 어디가 안 좋으면 꼭 나한테 말하렴. 네가 조금만 끙끙거려도 요 녀석이 지금처럼 엉엉 울 테니까, 그 전에 말해야 해.”
매번 가슴이 철렁할 순 없잖니. 수잔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눈물로 흥건한 제 아들의 볼을 다정히 닦으며 속삭였다. 에이든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진, 매번 이렇게 울면 어떡해. 이거 봐, 콧물이 이게 뭐야. 눈도 땡땡 붓고. 자꾸 우니까 못생겨지잖니…!”
“……!”
진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제 앞에 앉아 있는 인형 같은 남자아이를 바라봤다. 에이든은 갑자기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 눈만 깜빡였다. 팔락거리는 긴 속눈썹이 정말 인형 같아서, 진은 옷소매로 콧물을 슥슥 닦았다. 콧물이 찔찔 난 얼굴로는 아이의 앞에 서기 조금 창피했으니까.
수잔은 사랑스러운 제 아들을 바라보다 에이든의 무릎에 트레이를 올려 주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금색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수잔의 손길에도 가만히 있는 걸 보니, 에이든은 아까보다 경계를 푼 것 같았다.
“이거 먹고 진이랑 같이 바깥에 다녀올래? 물론 몸이 괜찮다면 말이야.”
“…….”
“진, 네가 섬을 구경시켜 주렴.”
조금 전이었다면 그 손을 쳐냈겠지만, 에이든은 그저 가만히 따뜻한 손길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곤 기대에 차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진 헤니란 이름의 아이. 물기에 반짝이는 검은 눈을 보다 에이든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에이든의 고개가 끄덕여지기가 무섭게, 진 헤니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히 웃었다.
***
바닷가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침대 위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내내 아이의 집요한 시선을 견뎌야만 했다. 진 헤니는 에이든 테일러가 숟가락을 한 번 들 때마다 작은 탄성을 뱉었다.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 빤히 쳐다보는 시선은 바닷길을 따라 걷는 지금도 계속됐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피해 봤지만 하나도 소용없었다. 옆에서 저렇게 헤실헤실 웃는데, 계속 모른 척하는 게 더 어려웠다.
“너, 왜 자꾸 그렇게 봐?”
“응? 예뻐서!”
“…….”
에이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나온 대답에 잠시 고민했다. 예뻐서?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에이든은 아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 확신했다. 아무래도 진 헤니는 제가 여자아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더 오해하기 전에 말해 줘야 했다.
“나는 남잔데…….”
“응, 알아!”
안다고? 진은 여전히 헤실헤실 웃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진에게 말했다. 아주 중요한 걸 알려 준다는 듯이.
“남자한테는 예쁘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왜…?”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멋있다고 해야 돼.”
사실 왜인지는 에이든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얼버무렸다. 진은 에이든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모래바닥을 바라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진은 에이든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 보다 말했다. 아무리 봐도 제 말이 맞았다.
“멋있는 거랑 예쁜 건 다르잖아.”
“…….”
“넌 예쁜데… 그럼 뭐라고 해…?”
진 헤니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 말에 에이든 테일러의 얼굴 역시 심각해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두 열세 살짜리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에이든이 무언가 찜찜한 표정으로 진에게 물었다. 남자 대 남자로, 진지하게 묻는 거였다.
“그럼… 네가 보기엔 난 별로 안 멋있어…?”
“어?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게 어… 멋있는데… 뭐라고 해야 되지? 그게…….”
에이든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진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아이는 허둥대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론은 멋있지는 않고 예쁘단 소리였다. 분명 학교에선 제가 제일 멋있단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진은 뭔가 화가 난 것 같은 에이든을 보다 다급하게 말했다.
“나, 나는 예쁜 게 더 좋아. 그리고 내가 본 것 중엔 네가 제일 예뻐.”
“…….”
“정말로.”
전에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것도 딱히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네가 예쁜 걸 더 좋아하는 거랑, 내가 안 멋있는 게 무슨 상관이야? 이것도 결론이 이상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생각을 꺼내진 않았다. 어차피… 말이 좀 안 통하는 것 같았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아, 음… 유리무덤!”
“유리무덤?”
진 헤니는 들뜬 발걸음으로 모래를 푹푹 밟았다. 작게 콧노래를 부르는 것도 같았다. 그 뒤를 따르고 있던 에이든은 주변에 많아지기 시작하는 커다란 나무들에 위를 올려다봤다. 초록색 잎사귀들 사이로 주황색 노을이 통과해 땅을 비추고 있었다.
“조심히 와!”
“…….”
진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에이든에게 조심히 걸으라 당부했다. 여기에 길게 자란 풀이 많다는 둥, 발을 잘못 걸리면 넘어지니까 안 된다는 둥. 진은 재잘재잘 말이 많았다. 에이든은 그저 진이 말이 많다고 여겼지만, 사실 진 헤니는 엄청나게 노력하는 중이었다. 아이랑 친해지기 위해.
아직 이름도 못 들었어…! 진은 속으로만 우는 소리를 냈다. 아까 전,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엄마는 엄청 진지한 얼굴로 제게 못생겼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맨날 자기 닮아서 잘생겼다고 했으면서…! 이건 명백한 배신이었다.
그 때문에 진은 조금 위축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렇게 예쁜 아이니까… 내가 못생겨서 맘에 안 들 수도 있어…. 통통한 입술이 삐쭉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은 작전을 세웠다. 제가 가진 가장 예쁜 것들을 아이에게 보여 주기로. 원래는 아무한테도 안 보여 주고…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곳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방법 밖에 없었다. 결연한 표정의 진 헤니의 머릿속엔 언젠가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재생되고 있었다.
- 너희 아빠는 솔직히 말하면… 잘생긴 건 아니잖니? 엄마 정도 만나려면 그 얼굴론 택도 없단다, 진. 네가 엄마를 닮았으니 망정이지…….
- ……?
- 아무튼…! 너희 아버지가 엄마한테 그러더구나. 평생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보며 살게 해주겠다고. 그 고집 세고, 무뚝뚝한 사람이 덜덜 떨면서 그러는데… 뭐, 어쩌겠니. 엄마가 살아 주는 거지.
분명 열세 살짜리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수잔은 그저 옆에 앉아 있는 안토니오가 들으라고 한 얘기였지만, 이 이야기는 진에게 엄청난 감명을 주었다.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거…! 내가 가진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걸 보여 줄 거야. 그럼 예쁜 아이랑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진의 통통한 볼이 흐뭇하게 달아올랐다.
진은 아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며 숲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조개 몇 개로 표시해 놓은 제 비밀 표지판들을 지나, 나무를 쌓아 집처럼 만들어 놓은 곳으로 향했다.
“여기야!”
“……?”
에이든 테일러는 곧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그곳을 보며 잠시 주춤했다.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 그가 망설이는 동안 진은 이미 오두막 같은 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에이든은 잠시 고민했지만 나뭇잎으로 된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어두웠다. 전구고 뭐고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대신 얼기설기 세워진 나무판자의 사이로 바깥의 노을이 스며들었다. 동화책에나 나올 것 같은 곳이었다. 비현실적이고 꿈결 같은 느낌이었다.
“그… 있잖아, 이름… 안 알려 줄 거야?”
넋을 놓고 안을 둘러보던 에이든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아이를 바라봤다. 진은 조금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스며든 노을 때문인 건지, 아이가 서 있는 주변만 밝고 따뜻하게 빛났다. 아이 뒤로 쌓여 있는 무언가가 반짝였다. 눈부신 장면이었다.
“나, 나는 에이든 테일러야…….”
왠지 모르게 말을 더듬어 버려서 에이든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은 에이든의 이름을 안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웃었다. 길고 커다란 눈이 휘어지며 예쁜 곡선을 만들었다.
“너는 이름도 예쁘구나…….”
“…….”
“에이든, 여기가 내 유리무덤이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에이든은 쏟아지는 빛무리에 작게 입을 벌렸다. 그리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제 머리를 채우는 것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에이든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 헤니가 웃자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이든이 잠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진은 유리더미를 살폈다. 얼마 전에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 어수선해서, 진이 서둘러 유리들을 정리했다. 조막만한 손이 유리알과 옆에 작게 쌓인 조개껍질을 조심스레 치웠다. 그리곤 아직 멍하니 서 있는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 여기, 이거 봐봐…!”
진이 이리 오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에이든은 그제야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뺨이 조금 달아오른 것만 같아서, 에이든이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진의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 쌓여 있는 곳, 그 앞에.
에이든은 앞에 있는 유리알 하나를 들어올렸다. 진은 유리를 구경하는 에이든 테일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냥… 유리 아니야?”
“응, 유리야.”
에이든은 손에 든 유리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유리잖아. 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게 예쁘기는 했다. 하지만 대단하진 않았다. 에이든이 보기에는 정말… 깨진 유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바닷가에 가면 파도에 잘 깎여진 유리조각들이 떠밀려 와! 바깥에서 한참 떠돌다가 여기 도착한 것들이야.”
“…….”
“예쁘지?”
진 헤니는 조금 두근두근한 기분이었다. 제 눈에 가장 예쁜 것들을 에이든도 좋아했음 싶었다. 진에게 있어 유리들은 섬 바깥,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그것들이 깨지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진은 한 조각씩 바깥의 세계를 모았다. 반짝이는 것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하나하나가 모두 보물과도 같았다.
“그냥 바깥에서 밀려 온 쓰레기 아니야?”
“…….”
쓰레기라니……? 진은 한가득 쌓여 있는 제 보물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에이든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말했을 뿐이었다. 어딜 봐서 이것들이 예쁜 건지, 에이든은 한참이나 들여다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아… 그게 어쨌든… 그… 렇기는 하지…….”
“……?”
작게 인상을 찡그리고 유리를 보던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속도 없이 배시시 웃던 아이의 얼굴이 많이 흐렸다. 아이가 슬픈 얼굴로 유리 하나를 주워 올리며 말했다.
“바깥에는 더 반짝이고… 더 예쁜 것들이 많을 테니까… 그럴 수 있지…….”
“…….”
“에이든 너한테는… 안 예쁠 수도 있지…….”
말하는 게 뭔가 이상했다. 진 헤니는 바깥의 것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아이의 말에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 표정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는 몰라도 진이 더듬더듬 말을 덧붙였다.
“아, 그게…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섬 밖에 가본 적이 없어서… 사실 이것보다 예쁜 것도 본 적이 없고…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
“그, 그래서 나한테는 이 유리들이 엄청 예쁘고… 그런 거야…!”
제 보물들에 대한 변명, 혹은 변론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상처 받지 않으려 스스로 최면을 거는 걸지도 몰랐다. 나한테는 예쁘니까, 충분히 예쁘니까… 괜찮아! 진은 괜히 멋쩍고, 사실은 많이 슬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집에 갈까?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라… 엄마가 찾으시겠다…!”
“…….”
진은 서둘러 오두막을 나섰다. 에이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쪼그려 앉은 그대로 잠시 굳어 있었다. 섬 밖에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에 들고 있는 붉은색 유리 하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작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래도… 아주 단단히 말실수를 한 게 분명했다.
***
수잔은 애매한 저녁 식사 분위기에 멋쩍게 웃었다. 진과 에이든은 저녁 식사 자리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까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고 나서 기류가 이상했다.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건지…….
“많이들 먹어. 에이든, 많이 먹으렴.”
“감사합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앞에 놓아지는 요리들에 작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을 힐끗 살폈다. 아까 점심을 먹을 때는 계속 저만 쳐다보더니, 지금은 고개가 접시에 틀어박혀 올라올 줄을 몰랐다. 에이든은 손에 쥔 포크만 만지작거리며 진의 기색을 살폈다.
“진, 섬은 잘 구경시켜 주고 왔니?”
“네…!”
진이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앞에 있는 토마토 파스타를 먹는 둥 마는 둥 입에 집어넣었다. 작은 입 주변에 빨간 소스가 치덕치덕 묻는지도 모르고 일단 스파게티를 욱여넣었다. 푸른 눈이 진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애매하고 어색한 분위기는 저녁을 다 먹고 잠을 잘 때까지,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지난 밤, 에이든은 진의 침대 위에서 한참이나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바닥에서 자고 있는 아이가 신경이 쓰이기도 했고, 아까 일에 대해서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
“…….”
말을 걸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침 식사 후,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안토니오 헤니의 고집으로 TV나 라디오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기에, 거실은 심각하게 조용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수잔은 핫초코 두 잔을 타서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위에는 뽀송뽀송해 보이는 마시멜로우가 잔뜩 얹어져 있었다.
“자, 하나씩 마시렴.”
진은 컵 두 개를 가만 살피다 마시멜로우가 더 적게 들어간 컵을 골라 들었다. 수잔은 마시멜로우라면 없어서 못 먹는 제 아들을 떠올리다, 그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그리곤 다른 컵을 에이든에게 내밀며 말했다.
“오늘은 바닷가 근처에 안 나가니? 날씨도 엄청 좋던데, 집에만 있지 말고 에이든이랑 산책이라도 다녀오렴.”
“…….”
에이든은 그 말에 진을 바라봤다. 푸른 눈이 기대에 차 있어서 수잔은 말없이 속으로 웃을 뿐이었다. 싸운 것처럼 굴길래 걱정했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제 얼굴만한 컵을 들고 말없이 핫초코를 마셨다. 사실 지난 저녁부터 진 헤니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가장 예쁘고 좋은 거였는데… 아무래도 바깥에서 온 아이에게는 시시하고 재미없는 게 분명했다. 재미없는 건 둘째치고 쓰…….
“…….”
“……?”
쓰레기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진의 표정이 갑자기 울상이 돼서 옆에 있던 에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랑 같이 산책을 나가란 소리에 진은 죽기보다 싫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표정에 에이든의 얼굴도 울상이 됐다.
수잔이 출근을 위해 거실을 떠나고, 두 아이는 또 다시 적막 속에 앉아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색한 표정으로, 진 헤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오늘은 바닷가에 안 가…?”
“……?”
“어, 어제 다 못 봤잖아.”
진은 핫초코 위에서 녹아내리는 마시멜로우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보고 싶다면 보여 줘야 했다. 그 대신… 실망스럽고 별로 재미없어도 내 잘못 아니야……. 핫초코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진이 일어났다. 에이든도 서둘러 컵을 두고 그 뒤를 따랐다.
종종거리는 발이 집 근처를 지나, 해안가 주변에 발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에이든은 아무 말 없이 걷고 있는 진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는 중이었다.
“진? 오늘은 거기, 유리무덤에는 안 갈 거야…?”
“응, 안 가….”
“아, 그럼 유, 유리는 언제 모아? 어디서 모아?”
진 헤니는 뜬금없이 유리 타령 중인 에이든을 돌아봤다. 멈춰서 저를 돌아보는 시선에 에이든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진은 가만 에이든을 살피다 바닷가 근처로 손을 뻗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에 유리가 제일 많아. 모래에 박힌 것들을 줍는 거야…….”
“아, 그렇구나…….”
에이든이 바닥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제가 서 있는 곳 주변에는 유리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져 보았지만, 그곳에도 딱히 반짝이는 유리조각은 없었다. 조금 더 찾아다닐 필요가 있었다.
“그럼 오늘은, 같이 유리… 주워도 돼?”
“……?”
유리를 같이 줍자고…? 왜…? 진은 제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 아이를 보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이 줍겠다면, 줍는 거였다.
***
진은 모래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닥을 가만 쳐다봤다. 여기는 없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미련 없이 다른 쪽을 향해 걸었다. 작은 발자국이 도장처럼 콩콩 찍히고 있었다.
진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에이든의 등을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유리를 같이 줍자고 한지는 모르겠지만, 에이든은 생각보다 열심히 찾고 있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가 바닥에 박혀 올라올 줄을 몰랐다.
바깥에는 유리보다 훨씬 예쁘고 좋은 것들이 많겠지? 나도 바깥에 나가 보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진은 발밑에서 반짝이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래에 파묻혀 있던 것은 푸른빛이 도는 유리였다. 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파란색 유리는 흔치 않았다. 보통 초록색이나 흰색, 혹은 붉은빛의 갈색이 많았으니까.
작은 손바닥 위에 놓인 유리는 아직 여기저기가 뾰족했다. 둥글어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도… 충분히 예뻤다. 신비로운 빛이었다. 마치 아이의 눈동자처럼.
진은 여태 슬펐던 마음은 다 잊었는지 신이 난 발걸음으로 에이든에게 향했다. 빨리, 빨리 보여 주고 싶었다.
“에이든…!”
“……?”
“에이든, 이 유리 좀 봐. 파란색인데 회색빛이 돌아. 네 눈동자 색이랑 비슷하다, 그치?”
아이의 들뜬 목소리에 에이든의 표정이 덩달아 밝아졌다. 진은 손바닥을 쫙 펴서는 에이든의 앞으로 내밀었다. 에이든은 환히 웃으며 그 유리를 바라봤다. 그리곤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제 손에 들린 것들도 진에게 내밀었다. 모래투성이의 손 위로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자, 이거 너 가져.”
“우와……!”
에이든의 손에는 갖가지 색의 유리가 있었다. 약간 노란색인 것도 있었고, 까만색 유리도 있었다. 까만색은 진짜 한 번도 못 봤는데…! 정신을 놓고 유리를 보던 진 헤니의 시선이 아이의 손톱으로 향했다. 감탄으로 젖었던 검은 눈에 걱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은 에이든의 손바닥 위에 있던 유리가 바닥으로 다 떨어지든 말든, 저보다 조금 큰 에이든의 손을 쥐곤 손등이 보이도록 돌렸다. 손톱 여기저기가 푸르게 멍들고 깨져 있었다.
“에이든, 너 손톱은 왜…….”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든은 급히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창피한 것들이었으니까. 제가 바보 멍청이에다 모르는 것도 많고, 시험도 만 점을 받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진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멍청이인 걸 알면 많이 실망할 것 같았다.
당황한 에이든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유리들을 서둘러 주웠다. 유리를 손에 꼬옥 쥐고는 앞에 선 진의 눈치만 봤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진의 얼굴이 걱정으로 구겨지고 있었다.
***
‘바다에 빠졌을 때 다쳤던 걸까? 왜 여태 몰랐지…?’
척 봐도 엄청 아파 보이는 상처였다. 진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에이든이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라 물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이불을 펴는 진의 표정이 심각했다. 제 몸보다 크고 두꺼운 걸 펄럭이고 있으려니 에이든이 침대에서 내려와 함께 이불을 잡아 줬다.
“…바닥에서 자면 안 불편해?”
“응, 괜찮아!”
“네가 침대에서 자…! 원래 네 침대잖아.”
“아냐, 나는 바닥이 좋아.”
진은 그렇게 말하며 이불 위로 털썩 누웠다. 침대 위에 있던 에이든은 뭔가 불편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럼… 나도 아래에서 같이 잘래.”
“……?”
혼자 푹신하게 자기가 민망해서 한 말이지만, 진 헤니는 굉장히 다르게 알아들었다. 아무래도 에이든은 혼자 잠을 자는 게 무서운 모양이라고. 진의 얼굴에 측은함이 떠올랐다. 자신은 여섯 살 때부터 혼자 잘 수 있었는데, 에이든은 생각보다 겁이 많은 것 같았다.
진은 에이든이 누울 수 있게 옆으로 조금 비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옆자리에 살며시 누운 에이든은 망설이다 진에게 물었다. 하루 종일 궁금하고, 묻고 싶었지만 괜히 또 슬프게 만들까 봐 못했던 말이었다.
“진, 근데 섬 밖에는… 왜 안 나가 봤어?”
“아… 우리 아버지가 섬 밖을 싫어하셔. 그래서 못 나가…….”
“왜 싫어하시는데?”
“밖은 위험하고, 나쁜 것만 많다고.”
진은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방문을 잠시 힐끗 바라봤다. 아무래도 목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밤에 돌아오는 아버지께 혼날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이 발치에 있던 이불 하나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덮었다.
“……?”
에이든은 제 위로 덮이는 이불에 놀란 눈으로 진을 바라봤다. 진이 에이든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의 표정은 진지해서 에이든이 꼴깍 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게다가 가까이서 본 아이의 검은 눈이 너무 신비로웠다. 아이가 예쁘다고 말하는 유리조각들보다 진의 눈동자가 백 배정도는 더 예뻤다.
진은 이불 아래에서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넋을 놓고 있던 에이든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이든, 밖에 정말… 다 나쁜 것만 많아? 아니지? 밖에는 예쁜 것도 엄청 많잖아.”
“그, 그렇지…….”
“너는… 뭘 제일 좋아해? 뭐가 제일 특별해?”
제일 좋아하고, 특별한 거? 뭐가 있지…? 에이든 테일러의 머릿속엔 많은 것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특별한 것들은 많았다. 어머니가 항상 모으는 비싼 새들이라든지, 차고에 세워져 있는 많은 차들. 아니면… 앞으로 바다가 펼쳐져 보이는 비싸고 넓은 저희 집이라든지.
이것저것 생각하던 에이든은 그 모든 것들이 특별할지언정 제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님을 떠올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나한테 특별한 거……. 한참 눈을 깜빡이던 에이든은 좋은 게 생각난 것처럼 웃었다.
“나는 소설책이 제일 좋아.”
“소설책…? 아기 돼지 삼형제 같은 거?”
“아,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벌거벗은 임금님?!”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하자마자 에이든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 헤니가 아는 소설책이라곤 두 권뿐이었으니, 이미 아는 책이란 책은 다 말한 상태였다. 둘 다 아니야?! 바깥에는 엄청난 소설책이 많은 모양이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뭔데?”
“나는 데미안이 제일 좋아.”
역시… 바깥엔 대단한 것들이 많았다. 이름부터 멋진 책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진 헤니의 검은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눈빛에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졌다. 무지 똑똑해 보이겠지? 에이든이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그 책에 엄청 멋있는 말이 있어…!”
“뭔데?!”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알은 세계다’까지 말해 놓고 뒤가 생각이 안 나 인상을 찡그렸다. 그 다음이 뭐였지? 아는 척은 다 해 놨는데, 모양이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태어나려는… 뭐였는데. 태어나려면 알을 깨뜨려야 된다는 소리였나?
에이든을 바라보는 진 헤니의 표정은 심각했다. 머릿속엔 나름대로 심오한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알은…? 알?! 무슨 알……? 계란?!
“계란이… 세계라고…? 왜……?”
“어, 아니… 계란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럼 거북이 알…?”
세상에 존재하는 알이란 알은 다 나올 기세였다. 그리고 계란이든 거북 알이든, 진에겐 굉장히 무서웠다. 세계를 정복한 닭이나 거북이 따위가 생각났다. 미끄덩거리는 거북이는 싫었다. 차라리 닭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닌가, 닭은 부리로 쪼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에이든은 점점 찡그려지는 진의 표정을 보다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게, 알이 무슨 알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새는 아기일 때 알 안이 세계의 전부니까, 알이 세계란 소리야! 근데… 어… 거기가 따뜻하고 좋겠지만, 힘들어도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된다는 거지…!”
“음…….”
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에이든은 제가 맞게 말한 건지 알 수가 없어 조금 식은땀이 났지만, 들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에이든, 근데… 껍데기 밖으로 나왔는데 잡아먹히면 어떡해?!”
“응?”
“그럼 알 안에 있는 게 낫잖아! 밖에는 막 엄청 무서운 동물이 많을 텐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와 만남과 동시에 제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후들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진 헤니는 바보같으면서도 아주 무서운 아이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에이든이 좋은 해결책을 찾았다.
“껍데기를 깨고 나오면 커다란 새가 될 수 있으니까, 날개로 훨훨 날아다니면 되지!”
“오……!”
진의 감탄 어린 시선에 또 다시 뿌듯해졌다. 에이든은 확신했다. 지금은 좀 많이, 왕똑똑해 보였을 거라고. 흐뭇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이불 밑, 두 바보의 입에선 키득거리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두 바보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바닷가를 걸었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얼굴들이 푹 익은 찐빵 같았다. 특히 진은 눈을 거의 반밖에 뜨지 못했다. 땡땡 부은 눈두덩이 때문에 더는 뜰 수가 없었다. 왠진 모르겠지만 입술도 팅팅 불어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에이든은 하품을 하다 화들짝 놀라야 했다. 그리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웃으면 상처 받을 텐데……. 입을 틀어막고 슬픈 생각을 해 보려 했지만 몽땅 소용없었다. 결국 에이든의 입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하하! 얼굴 엄청 부었어! 살찐 병아리 같아!”
“웃지 마…!”
“그러게 내가 울지 말라고 했지?”
“…눈물이 나는데 그럼 어떡해!”
섬 바깥의 세상을 이야기하다, 진은 자기도 밖에 가고 싶다며 엉엉 울었다. 아버지가 못 나가게 해서 밉다는 게 결론이었다. 아버지는 밖에 맨날 나갔다 들어오면서 자기는 못 나가게 한다며, 서럽게도 울었다.
에이든은 쩔쩔 매며 아이를 달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눈물이랑 콧물이 엉망으로 흐른 볼따구니를 닦아 주는 게 전부였다. 나중에는 자기랑 같이 가겠다며 꼬옥 안겨 오던 진이었다. 콧물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어째 불안했지만 에이든은 그냥 아이의 등을 토닥여 줬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또 달래 주다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간 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얼굴이 저 모양 저 꼴일 수밖에 없었다. 에이든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진을 보다 말했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살찐 병아리.”
“아니야!”
“맞는데 뭘 아니래? 살찐 병아리.”
“아니라니까!”
진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에이든은 코웃음을 쳤다. 안 그래도 통통하게 부은 진의 입술이 끝을 모르고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알겠어. 그럼 못난이 병아리.”
“……!”
못난이…?! 진 헤니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어떻게든 크게 떴다. 못난이라고 저를 놀린 에이든 테일러는 아침에도 얼굴이 반질했다. 조금 부었는데 그건 그거 나름대로 예뻤다. 붓기 전이 비현실적인 인형 같은 느낌이면, 붓고 나니 뺨이 통통한 게… 사랑스러운 인형 같았다. 저와는 다르게.
에이든은 그저 입을 삐죽이는 걸 놀리느라 그런 거였지만, 아주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었다. 진의 기분은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에이든의 눈에는 제가 못나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가 가진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걸 보여 줬을 때도 처참하게 실패했는데, 이젠 못났단 소리까지 들으니 확실해졌다. 실연이었다. 그렇게 열세 살의 진 헤니는 인생 첫 번째 실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은 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땅바닥만 보며 걸었다. 에이든에게 얼굴을 보여주기가 창피했다. 표정이 점점 시무룩해지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걷다, 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유리 같이 모을 거야…?”
하지만 물음에도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아마 못생겨서 대답도 해 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진은 눈물이 일렁거리는 눈을 들어 에이든을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려 했는데…….
“…에이든?”
앞에 있어야 할 에이든이 보이질 않았다.
***
에이든 테일러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분명 뒤에 있던 진이 홀랑 사라져 버린 데다,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푸른 눈에 조금씩 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진…?!”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어디로 발을 떼야할지 몰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푸른 눈이 허공을 헤매다, 제 앞에 펼쳐진 바다를 향했다.
“…….”
진과 함께 걸을 때는 예쁘기만 하던 바다가 돌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철썩거리는 파도가 저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그 푸른 물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바다에게서 도망친 에이든은 달렸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달렸다. 도망쳐야 했다, 어떻게든.
무언가에 쫓기듯,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뛰었다.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한참을 달리던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발을 멈췄다.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에이든은 누군가에게 들킬까 서둘러 볼을 닦았다.
‘안 돼… 울면 혼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멍청이라고 생각한댔어!’
머릿속에 제 아버지의 호된 매질이 떠올랐다. 엄한 얼굴과 차가운 목소리.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그 눈빛. 자신은 모르는 게 있어서는 안 됐고, 감정에 휘둘려서도 안 됐다.
눈물을 슥슥 닦은 아이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난 모르는 것도 없고, 바보처럼 울지도 않아. 나는… 지금 하나도 안 무서워. 나는 하나도…….
“에이든…!”
멀리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에이든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진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강한 척을 하던 푸른색 눈동자에 안도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티내선 안 됐다. 내가 여기서 바보처럼 길도 모르고, 울고 있었던 걸 들켜선 안 돼….
“여기 길도 모르면서 혼자 어딜 갔던 거야…!”
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이든에게 향했다. 급히 걷던 종종걸음은 이내 약하게 뛰어서 에이든에게 도착했다. 가까이서 본 에이든은 왠지 모르게 눈빛이 뾰족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가시를 세워 제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아니거든, 나는 길 같은 건 다 알아…!”
진은 약한 원망이 서린 푸른 눈을 보다, 에이든이 등 뒤로 손을 감추고 있음을 깨달았다. 길을 잃어서 많이 놀랐는지 어깨가 잘게 떨렸다. 게다가 아이의 코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 운 모양이었다. 진이 아이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그리곤 뒤에 감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거짓말하지 마. 그리고 길 좀 모르는 게 뭐가 어때서…….”
제 손을 잡아 주는 손길에 에이든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강한 척하던 눈빛에 다시 약한 두려움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물이 차오르려 해서 에이든이 고개를 털며 말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혼난단 말이야…….”
“…내가 비밀로 해 줄게. 그러니까 나한테는 모른다고 해도 돼. 그럼 됐지?”
풀 죽은 목소리에 진이 대답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렇게 재차 말한 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긋 웃었다. 달달 떨리는, 푸르게 멍든 손끝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에이든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세웠던 가시가 아직은 다 들어가질 않아서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나는… 여기가 어딘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날 잘 데리고 다녀야지. 다 너 때문이야…….”
“응, 내가 미안해.”
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 가자고. 그리곤 에이든의 손에 깍지를 꼈다. 희게 질릴 만큼 주먹을 말아 쥐고 있던 손이 펴졌다. 아이의 손끝을 내려다보는 진의 표정이 흐렸다.
손톱, 아이가 어떻게든 감추려하는 건 손톱이었다. 혼날 거라 말하며 손끝을 떨던 에이든을 생각하며, 진 헤니는 마음먹었다. 엄마에게 말해야 했다. 오늘 저녁에 돌아오시면 말해야 해…….
그리고 그날 저녁, 진은 엄마의 옷을 꼬옥 쥐고 말했다. 에이든을 집으로 돌려보내선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안 된다고만 말하던 진이 울음을 터뜨리고, 수잔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다에 빠졌을 때 생겼을 거라 생각했던 상처들은, 원인이 아예 다른 곳에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전화나 메시지에 응답이 없는 걸까…? 수잔의 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상도 못할 게 뻔했다. 그녀가 남기는 모든 메시지는, 에이든 테일러가 절대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누군가에 의해 매번 깨끗하게 삭제되고 있음을.
진이 울다 지쳐 잠을 자고 있는 밤. 수잔은 인상을 찡그린 채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빤히 그것을 보던 그녀는 버튼 몇 개를 눌렀다. 혹시, 남겨진 메시지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메시지 : 0개」
화면을 바라보던 수잔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를 죽여 걷던 그녀는 뒤를 돌아 다시 전화기를 바라봤다. 검은 눈이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 다른 전화기에도 같은 화면이 떠 있었다.
「메시지 : 0개」
메시지가 깨끗하게 비워졌음을 확인한 푸른 눈은 차가웠다. 오늘도 레오나 테일러는 무표정한 낯으로 모든 메시지를 비웠다. 그녀의 뒤에선 줄리아 테일러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정말 우리 애를… 이대로 못 찾는 건 아니겠죠? 정말 저 바다 밑에 있는 건 아니겠죠?! 네?!”
“줄리아, 일단 진정해.”
“경찰도 그렇고, 구조대도 그렇고… 다 못 찾았다는 말만 하잖아요!”
아들이 없어졌지만 한스 테일러는 필요 이상으로 차분했다.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쉴 뿐이었다. 남자애가 필요해서 만들어 놨더니, 일이 귀찮아지고 있었다. 레오나는 표정이 좋지 않은 부모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말했다.
“저는 안 된다고 했는데… 에이든이… 요트가 타고 싶다고 졸라서… 그래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레오나는 전부 다 제 잘못이라고,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울먹이며 용서를 구했다. 밑으로 숙여진 고개,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녀의 푸른 눈에는 서늘함이 고여 있었다.
그 새끼가 돌아오는 순간, 모든 건 다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절대, 절대로 돌아와선 안 됐다. 더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꼭 죽었어야 했는데! 제 계획이 아주 많이 틀어지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그녀의 어머니는, 푹 숙여진 고개를 품에 안아 주며 다정하게도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그녀가 뺨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제 어머니를 따스히 마주 안았다.
‘맞아,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하나도.’
하지만 열일곱의 그녀가 매일, 24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줄리아 테일러가 수잔 헤니의 메시지를 확인한 건 그로부터 약 열흘 뒤의 이야기였다.
***
에이든 테일러는 이제 진과 저만이 아는 비밀장소를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바닥에 박힌 조개들을 따라 걸었다. 경쾌한 발걸음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날이었다. 하늘이 화창했고, 햇빛도 따사로웠다.
‘얼른 갖다 주고 싶다…!’
화사하게 웃는 아이의 손에는 반짝이는 것들이 한 가득이었다. 유리며 반짝이는 흰 조개껍질을 잔뜩 들고 있는 손, 그 손끝은 이제 막 푸른 멍이 가시고 연분홍색의 살이 보이고 있었다.
“진!”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문을 통과하며 에이든이 진을 불렀다. 유리무덤 한 가운데 털썩 누워있던 진이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손바닥을 아이의 앞으로 내밀었다. 진이 반짝이는 것들을 보며 웃었다. 웃기는 웃는데….
“왜 그래…? 배고파…?”
“…….”
웃는 표정이 평소랑은 다르게 흐려서 에이든이 물었다. 진이 슬픈 표정을 지을 때는 몇 되지 않았다. 배고플 때가 거의 유일하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었다. 힘없는 웃음에 에이든이 손에 들린 것들을 급히 옆에 쌓아 두곤 진을 살폈다.
“진…?”
“에이든, 너… 집에 돌아가야겠지? 그렇겠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에이든은 어색하게 웃는 진을 보다 저도 심각한 표정을 했다. 사실… 여기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집에 가고 싶다 느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보고 싶다거나, 돌아가고 싶다거나……. 어차피 돌아가 봤자 집에는 다 무섭고,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돌아가야… 겠지?”
그래도 가야하는 건 알았다. 여기서 계속 지낼 수는 없으니까……. 에이든이 그렇게 대답하자 진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사실 진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침에 엄마에게 들은 말을 곱씹고 있었다.
- 진, 에이든의 부모님이랑 연락이 닿았어. 이제는 어쩔 수 없단다. 에이든을 보내줘야 해. 전화나 메시지가 오면 받았다가 엄마한테 꼭 알려주렴.
그렇게 말하던 수잔의 목소리는 많이 단호했다. 사실 그녀는 줄리아 테일러가 남긴 메시지에 많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메시지 속 줄리아는 우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진은 엄한 낯으로 말하는 엄마를 보며, 더 이상 에이든과 있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슬펐다, 너무 많이……. 자꾸만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에이든이 그런 진을 보며 슬며시 물었다.
“진, 내가… 집으로 돌아가도 나중에 꼭 만나는 거지?”
“그럼…! 내가 꼭 널 찾아 갈게. 내가 널 찾을게.”
약속할게. 진은 그렇게 말하며 애써 웃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밝아질 줄 모르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어떻게 해 줘야 하지? 아이가 웃었으면 싶었다. 언제나 밝고, 해사하게. 아이가 웃으면 세상이 다 밝아지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럼 나도 약속할게!”
“……?”
에이든이 진의 손을 꼬옥 잡았다. 밝게 웃는 에이든의 모습에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중에 나를 찾아오면, 진 네가 궁금해 하던 엄청, 엄청 큰 세상을 같이 보러 다니는 거야.”
“……정말?”
“정말.”
그러니까 꼭 와야 해, 기다리고 있을게.
저를 기다리겠다는 약속에 진이 밝게 웃었다. 더 큰 세상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에이든이 저를 기다린다는 말에 더 활짝 웃는 진이었다. 나중에… 더 커서, 더 멋진 사람이 돼서 에이든을 만나러 가야지…!
“어… 에이든, 근데 내가 널 어디로 찾으러 가야 해…?”
“아, 음… 우리 집은 여기야. 그리고… 만약에 이사를 가면…….”
“……?”
바닥에 나뭇가지로 주소를 끄적이던 에이든은 당황했다. 이사를 가면 어떡하지?! 한참 땅바닥을 보며 인상을 쓰던 그는 집주소 옆에 이름 몇 개를 적었다. 진은 가만히 그것들을 읽어 보았다. 케일스…? 케일스가 누구야…?
“여기가 제일 공부 잘하는 학교래.”
“학교…?”
“나는 공부를 제일 잘할 거니까, 아, 아니 잘하니까 여기에 있을 거야.”
“오……!”
다시 밝은 빛을 띠는 검은 눈에 에이든이 흐뭇하게 웃었다. 기분이 나아진 진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나중엔 저는 공부를 못하는데 못 가면 어떡하냐고 울먹여서 에이든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진이 제 옷을 꼬옥 쥐어오는 게 좋아서 괜히 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못 만나지 않겠냐고, 부러 슬픈 얼굴을 하자 결국 품에 폭 안겨오는 아이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진은 사랑도, 눈물도 많은 아이였다. 맨날 저만 쫓아다니는 강아지 같았다. 똑같은 나이의 남자애인데, 자신이랑은 많이 달랐다.
“못 만나면 어떡해…!”
“…….”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목소리에 에이든은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 분명 제 어깨가 콧물로 범벅이 됐겠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콧물쯤이야…! 에이든의 입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새는 한낮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떠들다 저녁이 다 돼서 집으로 돌아왔다. 진의 배가 배고픔을 호소했기 때문에 더 이상 비밀장소에 숨어 있을 수 없었다.
아직 엄마가 안 오셨나 보네…. 조용한 집안을 둘러보던 진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기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그리곤 받을 생각은 없이 전화기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달각이는 소리와 함께 전화기는 메시지로 넘어갔다.
[ 줄리아 테일러예요. 아이를 데리러 가고 싶……. ]
메시지는 작은 손에 의해 끊겼다. 이거, 이거 어떻게 했더라…? 허둥거리는 손이 버튼을 이리저리 찾아 헤맸다. 아니야,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전화기 위를 헛돌던 손이 아무 버튼을 마구잡이로 누르기 시작했다.
「삭제하시겠습니까? Y / N」
화면에 뜨는 창에 진이 황급히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는 깨끗해졌다. 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누가 전화를 했는지도 모르게끔. 작은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아니야… 에이든도 여기 더 있고 싶을 거야. 거기 가면… 나쁜 사람들이 막 때리고…
“진?”
“……?!”
진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수잔은 전화기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제 아들을 불렀다.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의아한 낯으로 진을 살폈다. 진의 검은 눈동자는 잠시간 흔들리더니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진? 왜 여기 이러고 서 있니? 에이든은 어디 있고?”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했어요…. 에이든은 화장실에…….”
“그래? 배가 고팠구나? 미안, 금방 맛있는 걸 해 줄게. 오늘은 고기를 먹어야겠어.”
아, 혹시 오늘 에이든 부모님께 전화나 메시지는 없었니? 그렇게 덧붙여진 물음에 진이 잠시 망설였다. 아이는 입고 있던 자신의 티셔츠 자락을 말아 쥐었다. 검은 눈에 순수하지만, 그렇기에 더 무서운 욕심이 가득했다. 아직은 안 돼.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돼…! 안 보내겠다는 게 아니라… 조금만 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 이상하네… 곧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는 거였다. 아주 조금만 더… 에이든과 함께 있고 싶었다. 이렇게 당장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건 진 헤니의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
낮과는 다르게 밤이 되자 비가 많이 왔다. 지금 저녁식사의 분위기와 딱 어울리는 날씨였다. 에이든은 제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곤 눈이 마주칠 새라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항상 밤이나 새벽에 들어오던 안토니오 헤니는 오늘따라 귀가가 일렀다.
“왜요…? 왜 저는 따라가면 안 되는데요?!”
“안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저는 왜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진 헤니.”
무서운 목소리였다. 진은 순간 어깨를 움찔했지만, 이내 검은 눈이 사나워졌다. 수잔은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 덮었다. 이 부자 사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는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럼 나중에는요? 지금은… 어려서 그런 거지만 크면 가도 되잖아요!”
“커도 안 돼.”
“왜요?! 아버지가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다 알아요! 다 나쁘고 위험하기만 한 거 아니잖아요! 밖에는 예쁘고 좋은 것도 많다고 했어요!”
그 말에 안토니오 헤니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에이든이 곧 집에 돌아갈 거란 얘기가 나오자마자 진은 저도 같이 갈 거라며 고집을 피웠다. 그러다 대화가 이렇게 흘러간 거였다. 항상 이 주제로 이어지는 대화는 끝이 나지 않음을 알기에 안토니오가 피곤한 얼굴을 했다.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더 고개를 숙였다. 왠지 그냥… 저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저녁식사 자리의 대화가 이 지경에 이른 것도, 진이 아버지와 싸우는 것도… 왠지 제가 잘못한 것 같았다.
수잔은 중간에 끼어 눈치를 보고 있는 에이든을 살피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 때문이 아니란다. 입모양으로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에이든이 흐리게 웃어 보였다. 수잔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흘렀다. 수잔은 제 남편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해야만 했다. 그녀는 제 남편을 많이 사랑했고, 그가 가진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시간을 주기로 했으니까.
그는 제 동생이 바깥에서 총기 사고로 생을 다한 뒤, 진을 절대 밖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여섯 살 차이가 났던 그의 남동생, 크리스티안. 그는 안토니오가 아들처럼 키운 이나 다름없었다.
크리스티안은 언제나 순수하고 호기심 넘치는 사람이었고, 바다 너머의 세상을 사랑해 섬을 떠났다. 그리고 차디차게 식은 몸으로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수잔은 안토니오가 그를 땅에 묻을 때, 그때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 상실감에 뒤덮인 검은 눈…….
총을 얼마나 맞은 건지, 구멍이 숭숭 난 그 몸을 안토니오는 한참이나 바라봤다. 수잔은 그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 거라 생각했지만, 단 한 방울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진을 품에 꼬옥 안을 뿐이었다. 소중한 걸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시간이 흐르고, 사랑스러운 제 아들은 클수록 크리스티안을 닮아갔다. 아이는 언제나, 모든 것에 검은 눈을 반짝였다. 궁금한 건 왜 그렇게 많은지. 알고 싶고, 보고 싶은 건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수잔은 진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 할 때마다 안토니오의 기색을 살펴야 했다. 사랑하는 제 남편은 지금 초조해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금발머리의 작은 아이가 진을 데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역시 빨리 내보내야 했어.”
“안토니오!”
“바깥이 너를 다 망쳐 놨구나. 진 헤니, 당장 네 방에 들어가.”
흐린 낯으로 가만 앉아 있던 수잔의 입에서도 큰소리가 터졌다. 에이든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네 방에 들어가라는 말에 진이 거칠게 일어섰다. 쿠당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의자에 안토니오의 낯이 험악해지고 있었다.
“저를 망치는 건… 아버지예요.”
“뭐……?”
“저를 망치는 건 바깥이 아니라 아버지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제일 미워요!”
제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한참이나 안토니오를 노려보던 진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집밖으로 뛰었다.
“진?!”
“…….”
수잔이 급하게 아이를 잡아 보려 했지만 이미 손을 빠져나간 뒤였다. 안토니오 헤니는 제가 들은 말에 우뚝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수잔은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대로 뛰어나가려던 그녀는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에 낯이 희게 질렸다. 바깥은 바람이 매서웠다. 높고 커다란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얘가 이 날씨에 대체 어딜 간 거야…!
“안토니오…!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애를 찾아야 할 거 아니야!”
“…….”
안토니오 헤니는 굳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곤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바깥으로 향했다. 우산도 들지 않은 맨몸이었다. 어차피 이런 날씨에는 우산을 들어 봤자였다. 그저 온몸으로 비를 맞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에이든, 넌 안에 있으렴. 밖이 많이 위험해. 절대 나오면 안 돼.”
“하지만…!”
“우리 둘이 가면 되니까 괜찮아. 밖에 나오면 안 돼, 나오지 않겠다고 약속하렴.”
수잔이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에이든을 보며 말했다.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섬에서 비바람이 치기 시작하면 작은 몸으로는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까딱하면 두 아이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엄한 목소리에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꼬옥 깨물고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수잔은 그런 에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밖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모두 집을 나서고, 큰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혔다.
에이든은 거실 소파에 앉아 현관문만 쳐다봤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바깥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날이 궂어지는 중이었다.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에이든의 눈에도 겁이 차올랐다.
‘진… 빨리 와…!’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현관문만 쳐다보기를 세 시간. 해가 진 섬은 한치 앞도 보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눈에 무언가가 보일 때라곤 가끔 번개가 칠 때뿐이었다. 소파에 앉아 손톱만 만지작거리던 에이든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돌아온 건 두 사람뿐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수잔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얼굴을 손으로 가려 덮었다. 안토니오는 급한 발걸음으로 지하실로 향했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커다란 손전등이 들린 채였다.
“……?”
“어떡해…! 응? 안토니오…! 어떡해! 우리 아들… 우리 진! 대체 어디 있는…….”
“안에 들어가 있어, 수잔.”
수잔의 얼굴이 눈물과 비로 엉망이었다. 엉엉 울고 있는 그녀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에이든은 엉망으로 울고 있는 수잔을 멍하니 바라봤다. 진이 없다고……? 비가…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겁에 질려 있던 아이가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수잔에게 다가갔다.
“유, 유리무덤에는 가 보셨어요…?”
“……?”
수잔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을 했다. 가 봤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유리무덤이라는 게 뭔지, 그 존재조차 몰랐으니까. 에이든의 푸른 눈이 바쁘게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다. 아무래도 진은 거기 있는 게 확실했다. 그곳에서 혼자 슬프게 울고 있을 거였다.
“진은 거기에 있을 거예요…!”
“에이든, 거기가 어디니? 응?”
“그게 말로 설명할 수가…….”
입술만 씹던 에이든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곤 뒤에 있는 수잔을 돌아봤다. 수잔은 저를 따라오라는 눈빛에 잠시 고민했다. 바깥은 아이가 나가기엔 너무 위험했다. 비도 너무 많이 오고, 어두운 데다…….
“빨리요…!”
수잔 헤니는 저를 채근하는 목소리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나가기 전에 신발장 안에 넣어 놨던 작은 손전등 하나를 챙겼다. 에이든은 들이치는 비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입을 앙다물고 뛰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멈춰 섰다. 그리곤 표지판과 같은 조개껍데기들을 찾기 시작했다. 조개가 보이질 않았다. 에이든이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여기 이쯤 있어야 했지만, 없었다. 저를 진에게로 데려다 줄 조개들은 거센 바람 때문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에이든은 조금 아득해진 기분으로 나무들을 올려다봤다.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휘청이고 있었다. 에이든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아이의 흰 얼굴 위로 비가 투둑투둑 떨어지고 있었다. 아냐, 갈 수 있어. 진한테… 갈 수 있어. 에이든이 그렇게 생각하며 제 얼굴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표정이 결연했다.
아이는 입을 앙다물고 몸에 익은 길을 찾아 움직였다. 여기서 왼쪽으로, 그리고 여기선 오른쪽으로. 아이는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숲 안의 땅은 비에 젖어 질척거리고 엉망으로 흙탕물을 튀겼다.
작은 몸이 몇 번이나 미끄러운 땅에 휘청거렸다. 바닥에 넘어지기도 했다. 돌부리에 무릎을 찧어 피가 줄줄 났지만, 에이든은 아픈 내색도 없이 바로 일어섰다. 작은 아이가 커다란 나무 사이, 사이를 가르고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에이든…!”
수잔은 제 앞으로 한참 앞서가는 아이를 불렀지만, 에이든은 멈출 줄을 몰랐다. 거센 빗소리에 저를 부르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수잔은 시야를 가리고 있는 나뭇가지들과 커다란 나뭇잎들을 치우며 뛰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뭇잎을 치우고 앞을 봤을 때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에이든?!”
아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커다란 나무들이 세찬 바람에 휘어지고, 나뭇잎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울어댔다. 거센 빗줄기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 수잔은 말 그대로 앞이 까마득해짐을 느꼈다.
“에이든!!”
그녀의 찢어지는 절규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
이쪽에선……! 에이든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얼굴이 난감해 보였다. 숲의 중앙까지 들어온 아이는 손을 꼬옥 말아 쥐었다. 스산한 바람소리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에이든은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을 번갈아 바라봤다. 양쪽 다 어둡고 무서웠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아이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에 고개를 저었다. 무서워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저보다 진이 더, 훨씬 더 무섭고 외로울 테니까. 에이든은 다시 입술을 꼬옥 물었다. 그리곤 기억을 되짚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없이 달렸다. 아이는 뒤에 따라오던 수잔이 없어진 줄도 몰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진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혼자서 많이 무서울 거야… 빨리 내가 같이 있어 줘야 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한참이나 뛰던 아이는 제 눈앞에 보이는 엉성한 나무오두막에 서둘러 그 안으로 향했다. 나무가 얼기설기 덧대져 있는 그곳은 강한 바람에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진……!”
애타게 이름을 부르며 들어간 곳엔 다행히도 아이가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엉엉 울고 있던 진은 에이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진을 찾은 에이든의 푸른 눈에 안도가 감돌았다. 진은 작은 입을 오물거리더니, 소심한 목소리로 에이든에게 말했다. 안토니오가 저녁을 먹으며 했던 말이 못내 마음에 남은 모양이었다.
“미안해. 우리 아빠는 너한테 화난 게 아니라… 그냥…….”
“아냐,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다 미안해, 에이든…….”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에이든한테 그러는지, 나쁜 건 아버지면서……. 진 헤니의 마음속에 다시 원망과 미움이 잔뜩 쌓이기 시작했다. 검은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던 에이든이 진에게 가깝게 다가갔다.
“진, 빨리 돌아가자. 응? 비가 너무 많이 와…!”
“싫어, 안 갈 거야…!”
진은 고집스럽게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판자들이 끼익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에이든은 진의 앞으로 가깝게 다가가 무릎을 꿇어앉았다. 진이 다시 고개를 들어 에이든을 바라봤다. 볼에 서러운 눈물이 끝도 없이 흐르고 있었다.
“나도 밖에 가고 싶어…. 나도 너랑 같이 가고 싶어…!”
“지금은 못 가도 나중에 꼭 만나기로 했잖아. 조금 더 크면 아저씨도 보내 주실 거야!”
“안 보내 준다고 하잖아… 안 된다고! 왜 나는 밖에 못 나가는 건데…!”
진이 엉엉 울며 말했다. 에이든의 마음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달래지질 않았다. 푸른 눈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무판자들을 불안하게 훑었다. 덧대어진 조악한 판자들 사이로 빗줄기가 엉망으로 새어 들어왔다. 위를 바라보며 입술을 씹던 에이든은 갑자기 꽝하는 소리를 내며 울리는 천둥에 어깨를 움츠렸다.
“진, 나랑 멀리멀리, 더 큰 세상을 보러 다니기로 했잖아. 지금 아저씨가 많이 화나셔서 나중에도 안 보내 주시면 안 되잖아! 얼른 집에 가자, 응?”
“나중에 언제…? 나중에 내가 너무 늦게 가서 에이든 네가 까먹으면 어떡해…! 약속한 것도 까먹고, 나도 까먹으면 어떡해…!”
에이든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가 하는 걱정은 터무니없었다. 절대로 까먹을 리가 없었으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뭐가 어떠냐며, 제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었다. 바보처럼 눈물을 글썽일 때, 자신이 더 슬픈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제 집에선 쓰레기 취급 받던 소설책도,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런 아이를…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심지어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나는 절대 안 까먹어, 진.”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아니야, 안 까먹어. 이것도 약속할게. 진 너도, 너랑 한 약속도 전부, 꼭 기억하기로.”
진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아이는 고민이 되는 것 같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일부러 상처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진, 네가 까먹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
“아, 아니야…!”
“그럼 나중에 만나야 하니까 아저씨가 더 화나시기 전에 빨리 돌아가자.”
잠시 망설이던 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볼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든이 안도하며 옅게 웃기도 잠시, 세차게 들이치는 바람에 판자들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아이가 겁에 질린 눈으로 위를 바라봤다. 나무가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뜯겨져 나가고 있었다. 먼저 입구 앞에 서 있던 에이든 테일러가 초조한 목소리로 진을 불렀다.
“진, 빨리… 빨리 나와!”
“……!”
진이 한 발을 내딛자마자 그 앞으로 부서진 나무판자 하나가 쾅하며 떨어졌다. 검은 눈이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다리가 그 자리에 들러붙어 한 발도 뗄 수가 없었다.
“진!”
바람은 계속해서 강해졌다.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던 에이든이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얼어붙은 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불안한 소리가 들렸다. 진이 서 있는 곳 옆에서 나무판자 하나가 부서지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아이의 손을 잡아끌기도 전에 뾰족한 것이 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 헤니의 검은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였다. 겁에 휩싸여 있던 아이가 끔찍한 소리로 울기 시작한 건 잠시 뒤였다.
***
수잔과 안토니오는 에이든이 들어간 숲 근처에서 아이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숲을 비추고 있는 손전등 하나는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잔은 자꾸 머리에 맴도는 나쁜 생각들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기… 우리 아기가…!”
수잔의 목소리에 안토니오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비에 젖은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이가 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걱정, 후회와 슬픔이 넘실거렸다. 두텁고 투박한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진, 대체 어디에 있…….
“진?!”
“……?!”
수잔은 멀리서 보이는 작은 인영 두 개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달렸다. 다리와 팔이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쓸려 다 찢어지든 말든 달렸다.
“진! 에이든?!”
“엄마……!”
가깝게 다가간 곳엔 진과 에이든이 있었다. 진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요란한 빗소리도 아이의 우는 소리를 가려 덮지 못했다. 수잔은 진의 옆에 있는 에이든을 살피다 입을 틀어막았다.
“에이든이, 엄마, 에이든이 많이 다쳤어요…!”
아이의 왼쪽 어깨가 무언가에 찢겼는지 피로 흥건했다. 진 헤니는 유리무덤에서부터 숲 한복판까지 에이든 테일러를 부축해서 나와야 했다. 에이든은 의식이 거의 없었다. 잠시 얼어 있던 수잔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안토니오 헤니는 굳은 얼굴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에이든을 안아들며 말했다.
“수잔, 힘들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정신 차려야 해. 아이는 내가 먼저 데려갈 테니까 당신은 진이랑 조심히 와.”
“아, 알겠어…….”
수잔은 비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정신없이 울고 있는 제 아들에게 등을 내밀었다. 어서 업혀, 진. 그렇게 말해 봤지만 아이는 제 옷과 손에 묻은 흥건한 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엄마, 에이든이… 저 때문에, 다쳤어요. 나무가… 부서졌는데, 에이든이 막아 주다가…….”
“진, 일단 얼른 돌아가야 에이든을 치료해 주지. 그렇지?”
수잔은 횡설수설하는 아이의 뺨을 쓸어 주며 말했다. 그리곤 아이의 손바닥을 펴 빗물에 슥슥 씻었다. 작은 손바닥에 고여 있던 검붉은 피가 비에 씻겨 내려갔다.
“진, 네가 그랬잖니. 에이든을 지켜 줘야 한다고. 어서 가서 네가 지켜 줘야지.”
진이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에이든에게 가야 했다.
***
집에 의사가 다녀간 지 한 시간이었다. 열세 살의 에이든 테일러는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아이를 지켜보는 수잔은 자꾸만 속이 타고 있었다. 왜… 다시 연락이 안 돼, 왜…!
아이의 집과는 다시 연락이 되질 않았다. 내일 아침, 물이 불어났든 말든 우선 아이를 바깥의 큰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수잔은 다시 한 번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입력하는 손가락이 초조했다.
진은 에이든의 옆에 꼭 달라붙어 물수건을 짜고 있었다. 작은 손이 두꺼운 수건을 꾸욱 눌러 짜고, 땀이 맺힌 에이든의 이마를 닦아 주기를 반복했다. 아이의 입에서 끊임없이 흐느낌이 샜다.
‘에이든이 빨리… 밖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제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물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 주는 것뿐이었다. 이런 걸로는 에이든을 아프지 않게 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열세 살의 진 헤니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의 옆에서 죄책감과 공포감에 끝없이 울며, 이마를 닦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픈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음은 끔찍하게 무기력했다.
“벌… 흐윽, 벌 받는 건가 봐, 에이든…….”
내가 거짓말해서 그런가 봐. 내가 그때 엄마한테 사실대로 말했으면… 네가 여기서 이렇게 다쳐서 아프지도 않고, 지금쯤 집에 가서 잘 있었을 텐데. 내가 거짓말해서… 그래서 그런가 봐.
“나는 그냥… 흑, 같이 오래… 있고 싶었…. 네가 가는 게 싫어서 그랬어, 가는 게 싫어서….”
진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그 소리에 에이든이 힘겹게 눈을 들어올렸다. 진이 그에게 제 거짓말을 고백했다. 전화가 왔었는데, 너를 데려가는 게 싫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엉엉 울며 말하는 아이들 뒤로 어른들의 큰소리가 이어졌다.
애초부터 아이를 집에 데리고 오면 안 됐다는 안토니오의 이야기와, 아픈 애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냐는 수잔의 높은 목소리가 집을 울렸다. 아이의 울음소리, 어른들의 고함소리. 집 안이 엉망이었다. 화난 얼굴로 한참이나 전화기 앞을 서성이던 수잔은 울리는 벨소리에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네, 수잔 헤니예요.”
[ 줄리아 테일러예요…! ]
다급한 목소리가 오갔다. 이젠 정말 에이든 테일러를 집에 보내 줄 시간이었다.
***
아이가 집에 돌아온 지 한 달째였다. 아이가 있는 곳은 집이 아니었지만. 흰색 병원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아이는 멍해 보였다. 아직은 다 자라지 않은 몸이라, 짧은 다리가 침대 위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아이의 푸른 눈은 허공을 헤매다가 다시 흰색 벽으로 향했다.
‘내가 그린 건가? 언제 그렸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흰색 벽에 크레파스로 그려져 있는 것들은 넓은 바다와 해변이었다. 그려 놓은 모래사장에는 색색깔의 무언가가 콕콕 박혀 있었다. 그리고 해변가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머리 하나, 까만색으로 칠해진 머리 하나.
그림을 바라보던 에이든 테일러는 그 앞으로 가만 다가가 앉았다. 꿈뻑이는 푸른 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작은 손을 들어 그림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무언가 기억이 날듯 말듯 한 느낌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러다 벌컥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그림 위에 얹었던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아, 저 그림 지운다는 게… 깜빡했네. 조이! 이것 좀 지워 줄래요?”
“…….”
“안녕, 에이든. 몸은 좀 어떠니? 어제 약을 맞아서 오늘은 괜찮지?”
상냥한 얼굴의 의사였다. 그녀는 에이든 테일러의 앞에 무릎을 쭈그려 앉았다.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한 눈이었다.
“너희 아버지께서 걱정을 많이 하셔. 그래도 조금만 더 치료 받으면 곧 밖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상담 내용도 괜찮은 것 같고…….”
“…….”
아이는 별 대답이 없었다. 의사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다, 뒤이어 들어온 간호사를 바라봤다. 그리곤 간호사가 들고 있던 차트를 넘겨받으며 말했다.
“결국 단순한 혐의로 종결됐다면서요?”
“네, 아무래도 아이의 진술이 좀… 영향을 끼쳤나 봐요. 또, 어쨌든 그쪽에서 금전적인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아서 임시보호 같은 느낌으로 넘어간 거죠.”
의사가 혀를 찼다. 섬에서 나온 아이는 저를 데리고 온 남자 하나를 필사적으로 감쌌다고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경찰서에서 줄리아 테일러에게 매달려 몇 번이나 말했다. 아저씨가 자기를 데리고 간 게 아니라고, 유괴 같은 거… 절대로 아니라고.
경찰서에 있던 날, 줄리아 테일러는 기억나는 대로 그때 당시를 다 말해 보라 했다. 레오나 테일러는 멀쩡히 집으로 돌아온 상황에서, 너는 대체 누가, 왜 거기로 데리고 간 거냐며. 저 사람들이 나쁜 맘을 먹고 너를 데리고 간 게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 목소리에 에이든 테일러는 한참이나 입술을 씹어야 했다. 인어… 인어라고 하면, 다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인어였는걸. 아이의 푸른 눈이 제 앞에 서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차가운 낯의 한스 테일러가 제 아들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에이든은 무의식적으로 제 손끝을 손바닥 안으로 말아 쥐었다. 안 돼, 인어라고 하면 혼날 거야.
아이의 연약한 푸른 눈이 흔들렸다. 인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에이든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제가 있는 방 밖에 앉아 있는 안토니오 헤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눈썹을 매만지고 있었다. 안토니오 헤니는 뭔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게, 예감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 잘못하면 다신 섬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 말을 못하는 걸 보니 맞나 보군, 바로 조사를…….
- 저는… 저는 인어가 구해 준 거예요. 인어가 그 섬에 데려다줬어요!
에이든은 밖의 안토니오 헤니를 보며 급히 입을 뗐다. 제 아들의 입에서 나온 미친 소리에 한스 테일러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뭐가 구해줘? 에이든은 제 아버지의 푸른 눈이 살벌해지는 걸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아저씨가 저를 유괴한 것도 절대 아니었고, 저 때문에… 아저씨가 섬으로 못 돌아가선 안 됐다.
- 바다에 빠졌을 때, 검은 눈의 인어가 절 구해준 거예요…. 아저씨가 저 데려가신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한스 테일러의 표정은 살벌했다. 세상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에이든은 그 길로 병원에 갇혀야 했다. 저 미친 새끼가 정상이 될 때까지 제 눈에 띄게 하지도 말라는 게, 한스 테일러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이가 병원에 갇힌 뒤, 줄리아 테일러는 가끔 제 아들을 보러 왔다. 그녀의 눈 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아픈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완벽하던 제 아들을 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병실 한쪽에 앉아,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며 버둥대는 아이를 보는 눈은 차가웠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아이의 팔을 붙잡고 질질 끌어가며 말했다.
- 오늘도 또 벽에 그 그림을 그렸잖아. 그게 네가 아직 아프다는 말이란다. 치료를 하면 되니까 걱정 말…….
- 까먹는단 말이야!! 안 그러면… 자꾸 까먹는단 말이야!
- 그걸 까먹어야 다 나은 거야. 알겠니?
- 이거 놔! 놓으라고!! 흐윽… 제발, 제발 놔주세요. 제발요!
아이는 어떻게든 흰색의 방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바닥을 긁던 여린 손톱이 다 뒤집혀 까지고, 처절한 눈에서 눈물이 엉망으로 흘렀다. 그리고 줄리아 테일러는 그 모든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리알 같은 눈에 혐오가 스쳐지나갔다. 고장 나기 시작한 생명체에 대한 혐오였다. 줄리아는 고개를 잠시 젓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목에 주사바늘이 꽂히고 있는 제 아들을 보며 말했다. 손톱이 다 뒤집혀 피가 나는, 아이의 손을 꼬옥 잡은 채였다.
- 에이든, 기도하고 회개하면 된단다…! 그럼 그 더러운 게 몸에서 떨어져 나갈 거야!
줄리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랐다. 이 아이의 몸에 붙은 악마가 한시 빨리 떨어져 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 흠집 하나 없이 예쁜 아이를 제게 돌려달라는, 기도.
울며 저항하던 아이는 또 다시 그 흰색의 방에 갇혀야만 했다. 그리고 줄리아가 말하는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주사를 맞아야만 했다. 벽에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때까지. 진 헤니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바로 이 순간까지.
“에이든, 그래서 저 그림에 그린 게… 저기 앉아 있는 게, 네가 말한 인어니?”
“…….”
의사는 지워지기 전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멍한 푸른 눈이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 끝에는 검은 머리의 사람이 있었다. 해변가에 앉아 노을 지는 바다를 보고 있는 사람. 에이든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다 입을 뗐다.
“…잘 모르겠어요.”
잘… 기억이 안 나요. 아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의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뒤에 도착한 청소부를 보며 아이에게 말했다.
“이제 곧 나갈 수 있겠구나. 네가 나아지고 있어서 선생님은 아주 기쁘단다. 그림을 지워야 하니까 옆으로 잠깐 나와 줄래?”
“…….”
에이든은 옆으로 나오라는 그 말에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지우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우지 말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며 입을 달싹이던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힘없는 발걸음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에이든은 다시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앉았다.
그림 위로 독한 세제가 뿌려지고, 냉정한 손길이 크레파스로 칠해진 것들을 뭉개 없앴다. 에이든 테일러는 왠지 모르게 손톱 끝이, 그리고 왼쪽 어깨에 왜 있는지 모를 상처가 아픈 느낌이었지만 무시했다.
손끝이 저릿저릿한 기분에 에이든이 제 눈앞에 손바닥을 쫙 펼쳤다. 왜 자꾸 손톱이 아프지? 의아한 낯으로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팔락거리는 긴 속눈썹이 세 번째로 감겼다 떠졌을 때, 아이의 손은 더 이상 작지 않았다. 바닥에 닿지 않던 다리와 발은 이젠 제 발로 땅을 디디고 설 수 있었고, 초점이 없던 푸른 눈은 이제야 깨끗한 빛을 되찾았다.
“…….”
사나운 낯의 에이든 테일러가 과거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가라앉은 푸른 눈이, 다 지워져 희게 변한 벽을 바라봤다. 이제야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는 화를 참는 것처럼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한참이나 벽을 보던 그는 깨달았다. 저를 가둬왔던 이 흰색의 방에서 당장 나가야 한단 걸.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열셋, 그때에는 제 손으로 열어 볼 엄두도 못 냈던 문을 망설임 없이 열어젖혔다. 열린 문 너머엔 언젠가 바람에 다 쓰러졌던 엉성한 나무오두막이 있었다. 날이 맑았다. 비바람 같은 건 맞은 적도 없다는 듯이, 그때와 똑같이.
- 에이든, 빨리 와!
유리가 반짝였다. 저를 부르는 앳된 목소리에 에이든 테일러의 얼굴이 무너졌다. 푸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약속을 지키질 못했는데 내가 너에게 가도 되는지. 내가 무슨 낯으로 너한테 가야 하는지…….
- 조심히 와야 해…! 여기 길게 자란 풀들이 많아.
하지만 가야 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진에게 줬던 상처들에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그가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눈물과 빛이 한껏 고였던 눈에 시야가 번졌다 돌아오고, 제가 보고 있는 것들의 형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축 늘어져 있던 손이 조금씩 움직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몸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에이든은 쿨럭이며 바닷물을 뱉어냈다.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졌다.
바다는 이제 돌아가라는 듯 그를 뭍으로 밀어 올렸다. 그리고 이제 에이든은 위치를 알 수 없는 해안가에 있었다. 그는 손에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모래의 느낌에 눈을 감았다. 그리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었다. 마치 산소를 처음 마셔 보는,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숨을 고르던 그가 눈을 떴다. 에이든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그리곤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며 발을 뗐다. 모래바닥에 푹푹 발자국이 패였다. 푸른 눈엔 생기와 더불어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가득했다. 자신은 용서를 구해야 했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선…….
“하, 씨발… 오랜만에 동생이랑 요트 좋아하시네…….”
먼저 돌아갈 자리부터 만들어야 했다.
2권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