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Shoot the gun (6/16)

(2) Shoot the gun

레오나 테일러의 표정은 차게 굳어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훑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손에 들린 종이가 약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어렵사리 입을 뗐다.

“현재 제 동생과 그의 연인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추측성 기사들에, 저희는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밝힙니다. 앞으로 억측과 가십성으로 보도되는 기사와, 그를 작성한 기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여지없이 모두 고소할 예정입니다. 제 동생의 사생활을 보호하지 않는 언론사 및 방송 채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카메라에 비친 그녀는 수척했다. 화장기가 하나도 없이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많이 피곤해 보였고, 또 슬퍼 보였다.

“언론이 보도하고 있는 해당 사건은 저희 가족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으며, 이 일로 제 동생이 상처를…….”

레오나가 말을 멈췄다. 그리곤 표정을 숨기려는 듯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앞에 서 있는 카메라들에서 플래시가 빠른 속도로 터져 나왔다. 앉아 있던 기자들도 바삐 손가락을 움직였다.

“…….”

그녀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울음을 삼키려는지 목울대가 몇 번 울리기도 했다. 한동안 기자회견장에는 카메라의 셔터소리만 가득했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녀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붉어진 채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쇳소리가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당시에 대해서는 그 어떤 구체적인 말씀도 드릴 의향이 없습니다. 저희 가족과 진 헤니 선수의 아버지가 원만한 합의를 통해 넘어간 일입니다.”

안타까운 표정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 동생과 연인인 진 헤니 선수가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희는 이 일과 진 헤니 선수를 별개로 보고 있으며, 진 헤니 선수에 대한 모욕성 기사들에 대해서도 모두 고소 조치할 예정임을 밝힙니다.”

이상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오나는 빠르게 회견장을 나섰다. 그녀의 뒤를 기자들이 벌떼처럼 따라붙었다. 많은 카메라들과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그녀의 표정은 곧 무너져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경호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거의 뛰는 걸음으로 그들에게서 도망친 레오나 테일러는 기자회견장 밖에서 대기 중이던 롤스로이스에 급히 몸을 실었다. 바깥에서도 끊임없이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롤스로이스의 문이 닫히고,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춰 덮고 있던 레오나 테일러가 그 손을 내렸다. 손바닥 아래 감춰져 있던 서늘한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어금니를 물었다.

“하…….”

“레오나 님, 혹시 이거 필요하시면…….”

레오나 앞으로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그녀의 비서가 내민 것이었다. 레오나는 걱정 어린 표정의 릴리 콜린스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활짝 웃었다.

“다정하기도 하지. 챙겨 줬는데 쓸 일은 없어서 미안하네.”

“…….”

“그래도 모처럼 챙겨 준 거니까 받기는 해야겠지?”

레오나는 손수건을 받아들더니 피식 웃었다. 긴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그녀가 말했다. 손수건은 차곡차곡 접혀져 레오나 테일러가 입고 있던 수트 안쪽 주머니에 자리했다.

“울 거라 생각할 때 울면 재미없으니까.”

“…….”

“오히려 울지 않는 게 씨발, 존나 불쌍해 보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레오나의 표정이 사나웠다. 자신이 눈물을 참으며 말을 잇지 못했던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은 더 슬퍼하고 분노할 게 눈에 훤했다. 레오나의 입에 비린 웃음이 떠 있었다.

“이제 나 대신 멍청한 사람들이 울어 줄 거예요.”

게다가 진 헤니를 감쌌으니 바깥에서 알아서 물어뜯어 줄 거였다. 아주 너덜너덜할 정도로. 상황은 손쉽게 뒤집힐 예정이었다. 기름을 열심히 뿌려 둔 곳엔 작은 불씨만으로도 큰 불이 날 테니까. 진 헤니는 한동안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만큼 반작용을 감당해야 했다.

이제 중요한 건 한스 테일러가 두 새끼의 역겨운 연애놀음에 어떤 입장을 가졌냐 따위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피해자의 입장에서, 완벽한 피해자의 말만을 하면 될 일이었다. 모든 건 감정적으로 호소될 테고, 심지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옹호와 동정의 여론은 들끓을 게 분명했다.

참 쉽다니까. 하나 같이 다 병신 같고. 레오나 테일러가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앉은 릴리를 돌아봤다. 정치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순진한 자신의 비서는, 표정이 굳은 채였다. 레오나가 상냥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릴리, 햄버거 좋아해요? 나 햄버거 먹고 싶은데.”

“아… 그럼 목적지를 돌리겠습니다.”

“인 앤 아웃 먹으러 가요. 나 LA 와서 한 번도 안 가 봤어. 하, 씨발… 내가 오늘 이거 때문에 삼 일이나 밥을 못 먹었어요. 아까는 진짜 나도 모르게 막 쌍욕 할 뻔했다니까?”

회색의 롤스로이스가 목적지를 변경했다. 차는 소음 하나 없이 편안하게 도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 있던 레오나 테일러는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맞다. 그 LA포스트 기자 중에… 얼마 전에 백인 남자애 죽은 거 쓴 사람, 누구예요?”

“제시카 윌슨 기자로 알고 있습니다.”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그쪽으로 박스 두 개만 더 보내 줘요.”

여자들이 일처리는 깔끔하지. 변사체로 발견된 백인 남자아이 사건은 이번 해프닝을 더 활활 타게 만들어 준 고마운 일이었다.

유괴, 납치, 변사체. 기사의 타이밍이 훌륭했다. 동양인에 의해 납치됐던 아이가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주검으로 발견된 상황. 그 사건에 슬퍼하던 사람들은, 이번 사건에도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다. 마치 열세 살의 에이든 테일러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여론이 난리였다.

하, 진짜 에이든 테일러가 변사체로 발견됐으면 이딴 일도 필요 없었을 텐데. 아쉬운 표정의 레오나 테일러는 문득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 정신 차려. 넌 죽었다 깨나도 그 새끼한테 원하는 건 못 받아.

씨팔, 건방진 새끼가 누가 누구한테 충고질이야? 그녀가 원하는 건 한스 테일러의 인정이 아니었다. 그 인정 뒤에 따라올 모든 권력과 재산이었지. 자신이 가져야 마땅한 모든 것들, 원래 제게 주어졌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레오나가 서늘히 웃었다.

“릴리, 이번 주 중으로 아버지께 찾아뵙겠다고 메모 남겨 놔 줘요.”

테일러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별 등신 같은 감정에 휘둘려서 모든 일을 그르치는 그 새끼가 아니라.

***

호텔방 안은 조용했다. 에이든 테일러가 라이터 뚜껑을 달각이는 소리를 제외하곤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멀쩡히 켜져 있던 커다란 TV는 화면이 다 깨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원만한 합의란 건, 시발,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금품을 노린 유괴란 소리지.”

헛웃음과 함께 뱉어진 말이었다. 삐뚤게 웃던 에이든 테일러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조용해진 진 헤니를 바라봤다. 지친 표정의 그는 벽에 기대 앉아 제 앞에 깨져 있는 유리조각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젠 아니란 말도 안 하네?”

“…….”

“잘 생각했어.”

더 부실 것도 없잖아. 빈정거리는 목소리 위로 라이터 뚜껑이 닫히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자리했다. 아니라는 말, 오해라는 말을 할 때마다 호텔방은 엉망이 돼 갔다. 진은 힘없는 손길로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젠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에이든은 어떤 말도 들어 주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진은 홧홧한 통증이 오르는 목에 손을 가져다댔다가, 작게 인상을 찡그리며 팔을 내렸다. 침을 삼키는 것도 여의치 않을 만큼 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곧 죽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조여졌던 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 얼마 전까지 섬에서 살면서 핸드폰도, 은행 계좌도 없었다는 헛소리보다 레오나 테일러 얘기가 훨씬 그럴듯하니까 좀 분발해 봐.”

“…….”

“열세 살 때 나를 구해서 어쩌고저쩌고… 개소리는 그만하고. 걔가 어떻게 말하라고는 안 가르쳐 줬어?”

하긴, 걔가 뭘 알려 줬으면 그딴 병신 같은 소리는 안 했겠지. 에이든 테일러는 고장 난 것처럼 앉아 있는 진을 보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깝게 다가오는 에이든에 진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진은 저와 눈높이를 맞춰 앉은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봤다. 마주친 푸른 눈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조각조각 해체할 것만 같았다. 그 눈은 본 적 없는 차가움을 뿜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은 다 애들 장난이었다는 듯이.

“어디까지 얘기가 됐고, 앞으로 뭐가 남았는지 말해.”

“…….”

“나한테 접근한 목적이 뭔지 말하라고.”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없는 진을 보다 에이든 테일러가 뭔가 깨달은 낯을 했다. 한쪽 눈썹이 들려올라가는 모양새가 불안했다.

“아, 맨입으로 말하라고 해서 그래?”

“……?”

진은 멱살이 잡혀 끌어올려졌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던 몸은 우악스러운 손에 질질 끌려 침대로 내팽개쳐졌다. 여태 초점 없이 흐리던 검은 눈에 선명한 공포가 드리웠다.

“에, 이든 제발…….”

“왜? 돈은 그쪽에서 충분히 받아서 필요 없는 거 아니었어?”

에이든 테일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진이 침대에서 벗어나려 몸을 일으켰지만 어딜 가냐는 손길이 그를 다시 침대로 처박았다. 위에 올라타 내리누르는 무게감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전신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진의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모든 행위도 전혀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과는 결이 달랐다.

“뭣도 아닌 말 몇 마디로 잘만 휘두르더니, 지금은 왜 아무 말도 못해, 진.”

“에이든……!”

진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는 툭툭 소리를 내며 억지로 뜯어졌다. 진은 에이든의 손을 부여잡으며,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어떻게든 쥐어짜 애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고이고 있었다. 체념했던 모든 마음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 다시 눈을 적셨다.

“절대, 아니야…! 전부 다, 아니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 사이로 서러움이 샜다. 맹세코 아니었다. 레오나 테일러와 무언가를 약속한 적도, 그녀를 도운 일도 없었다. 에이든이 한 달 동안 섬에 있었던 그때도 절대 유괴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럼 왜 출신을 속인 건지, 네 말대로 유괴가 아니면 왜 내가 한 달이나 집에 못 돌아갔던 건지 똑바로 설명해.”

“…….”

그 질문에 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목구멍이 턱 막혀 왔다.

“제대로 이유도 못 댈 거면서 아니란 말은 왜 하는지 모르겠네.”

그것 보라는 에이든 테일러의 눈빛이 매서웠다. 진은 십 년이나 지난 그때를 생각하며 자책했다. 그때도, 지금도… 전부 다 제 욕심 때문에 엉망이 되고 있었다. 그를 조금 더 보고 싶어서, 에이든을 조금 더 가지고 싶어 부렸던 이기심이 부른 결과였다.

알고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은 욕심이 많은 겁쟁이일 뿐이란 거…. 이제 너무 늦어 버린 게 분명했다. 사실대로 말하고, 그에게 용서와 사랑을 구할 시간을 놓쳐 버린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진의 눈에 자괴감과 절박함이 가득했다.

“한 번만, 믿어 주면 안 돼…?”

“…어떻게?”

가깝게 숙여진 상체에 진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모르겠다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진에게 말했다. 그는 정말로 답을 알고 싶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어떻게 하면 널 믿을 수 있는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오던 에이든 테일러가 결국 제 감정에 항복했다. 검은 속눈썹을 적시며 줄줄 울고 있는 얼굴, 그 모든 걸 내려다보며 그가 인상을 구겼다. 여유로운 체를 하던 푸른 눈이 조금씩 흐린 빛을 띠기 시작했다.

“아닌 척, 모른 척 숨겨 온 게 대체 몇 개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이야?”

“…….”

“전부…?”

그의 물음에 진이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벙긋거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침대시트를 그러쥐었다. 선고를 기다리는 이처럼 입안이 마르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빨리 말 못해서, 미안해…….”

“…….”

“그거 말곤, 아무것도… 속인 적, 없어. 정말이야…….”

엉망인 목소리 뒤로 흐느낌이 따라붙었다. 제 아래 가둬진 채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다, 에이든 테일러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저 눈물과 말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웃음이 났다. 차라리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줬으면 싶기도 했다. 그것만이 에이든 테일러가 믿을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누가 봐도 이상한 진 헤니라는 사람의 기록과 여태 그가 모른 척 해 온 모든 것들. 게다가 진 헤니의 아버지의 전과 기록을 조회해 보면 손쉽게 ‘유괴’라는 글자를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실과 기록들은 정확했다. 진 헤니가 말하는 터무니없는 ‘그때’보다 훨씬 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장 큰 문제는 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고 싶어지는 자신이었다. 대가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볼 수 있게, 눈에 보이는 걸로 증명해.”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잠시나마 감정이 넘실거리던 푸른 눈은 다시 비정상적으로 차분해졌다. 진 헤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믿을 수 있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의 말은 사실이어야만 했으니까.

“내가 믿게 만들어, 진.”

에이든 테일러는 진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구겨졌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어떻게든. 할 수 있지?”

“…….”

“내가 널 믿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네가 이 방에서 나갈 일은 없을 거야.”

상체를 세워 앉은 진은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을 했다. 검은 눈은 에이든 테일러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그 눈을 외면하며 방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든…?!”

지금 이곳엔 친절히 상황을 정리해 줄 사람 따윈 없었다. 두 사람만큼이나 엉망이 돼 버린 호텔방 안에는, 저마다의 상처로 여유를 잃은 이들뿐이었으므로.

호텔 복도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에이든 테일러가 걸음을 옮기며 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하지만 케이스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짜증난다는 표정의 에이든은 대마 대신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전화기 건너의 상대방은 언제나와 똑같이 신호음이 채 두 번이 가기도 전에 그의 전화에 응답했다.

“레오나 테일러랑 약속 잡혔죠? 언제예요?”

이미 끝난 게임이라도 순순히 져 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면, 레오나 테일러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비리게 웃으며 생각했다. 만약 가지게 되더라도 넝마가 된 채로 가져야 할 거라고.

다 부서져 버린 거짓말이라도 어떻게든 손에 쥐어 보려는, 지금의 자신처럼.

***

발소리가 급했다. 아니, 급했다기보다는 짜증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한스 테일러의 사무실로 향하고 있는 그녀는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옆에서 그녀를 따라 걷고 있는 릴리 콜린스는 긴장한 기색이었다. 뒤에 줄줄이 따라붙어 있는 자금관리팀의 몇몇 데스크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나가 성가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24시간 안에 3억 달러 전부 다 쪼개 와요.”

“그게…….”

“쪼개서 깨끗하게 가져오라고.”

그 말과 함께 묵직하게 바닥을 때리던 레오나 테일러의 발자국 소리가 우뚝 멈췄다. 레오나는 멈춰서 뒤를 따라오던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이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매만지던 남자 하나는 퍼뜩 손을 내렸다. 그리곤 차근히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버진아일랜드 쪽으로 돌리는 채권이 이미 한계치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들킬 수,”

“그래서?”

“예?”

“내가 지금 히스토리나 듣고 있어야 돼요? 내가 한가해 보여요?”

레오나는 충격적이란 얼굴을 했다. 말이 이따위로 안 통해서는 대체 어떻게 같이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랑도 이런 식으로 일하는 거 아니죠?”

“…….”

“축하해요. 안 죽고 용케 살아 있네.”

그 성격에 답답해서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희한하네. 레오나가 빈정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곤 다시 한스 테일러의 사무실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뒤를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이제 복도엔 그녀와 그녀의 비서가 만들어 내는 발자국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릴리, 파나마 쪽으로 껍데기만 있는 회사 좀 만들려고요.”

“네, 음… 4개 정도면 충분할까요?”

수첩에 그녀의 지시사항을 적던 릴리 콜린스는, 러시아 쪽으로부터 들어오고 있는 선거 비자금을 쪼개려면 대략 4개의 유령 회사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릴리는 말간 얼굴로 레오나 테일러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레오나는 제 대답을 기다리는 릴리를 보다 상냥히 웃었다.

“네, 맞아요. 4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꼼꼼히 수첩에 받아 적는 비서를 보다 레오나가 뿌듯한 낯을 했다. 그녀는 조금 풀린 기분으로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려다, 약간 열려 있는 문을 그대로 열고 들어섰다. 자리를 비운 건가? 약속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 그리고 러시아 쪽으로 답례품은 그림 몇 점…….”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잇던 그녀는 한스 테일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까 머저리 몇 명을 상대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표정이 사나워졌다.

“한스 테일러는 러시아에 친구들이 많은가 봐.”

“…….”

“너희 아버지는 잠깐 나갔어.”

에이든 테일러는 책상 위를 구경하며 말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검은색 수트를 멀끔히 차려입은 채였다. 그는 만년필이 몇 개 놓여 있는 펜 트레이를 달그락거리다, 그중 가장 비싸 보이는 펜을 들었다. 책꽂이에서 아무 서류나 마구잡이로 집어든 에이든이 그 위로 선을 낙서하듯 그렸다. 이제 그는 별 대답이 없는 레오나를 바라봤다. 레오나 테일러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치 제 자리인양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앉은 꼬라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까지 들었어?”

“뭐, 파나마에 4개?”

“…….”

“아니면 러시아로 그림 보내는 거?”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열 살짜리 애도 아니고, 에이든은 흰 종이 위에 제 이름을 필기체로 쓰고 있었다. 그는 이름을 두어 개 정도 더 끄적이며 말했다.

“걔네는 취향이 고상하네. 그림을 선물로 받고.”

러시아 애들이 원래 그랬던가? 알고 있는 바랑 좀 다른데. 그가 적당히 백치 같은 얼굴로 말했다. 다 알아들었으면서 가증스럽게 모른 척하는 낯을 보다 레오나가 피식 웃었다. 하긴, 네가 들어서 뭘 어쩔 건데?

상관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잔머리는 굴릴 줄 알았지만, 진짜 대가리는 굴리지 못하는 새끼였으니까. 기껏 해 봤자 남자 하나 끼고 스캔들을 만드는 데 그치는 정도였다. 페이퍼 컴퍼니나 그림으로 자금 세탁을 하는 일 따윈, 들어봤자 그가 어쩔 수 있는 게 없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나?”

“너도 같이 간단 소린 하지 마.”

에이든 테일러의 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 뚜껑이 딱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는 예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몰랐나 봐?”

레오나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을 보며 에이든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을 테니까.

***

빅토르 디얀체코. 러시아 정계의 거물이었다. 그 옛날, 쿠데타를 모두 진압한 옐친이 혁명가로 불릴 적에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옐친의 힘이 시들해졌을 때,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도 역시 빅토르 디얀체코였다. 지금의 러시아 총리는 그가 세우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 뒤로 그는 정계에서 ‘블러디 빅토르’로 불렸다. 그가 손대는 곳에는 피칠갑이 된 승리가 뒤따른다는 의미였다. 승리한 자의 피인지, 아니면 승리를 위해 토막 낸 자들의 피인지는 상관없었다. 일단 승리했단 게 중요하니까.

2미터가 족히 넘어 보이는 그는, 에이든 테일러가 작아 보일 만큼의 풍채를 지닌 사람이었다. 커다란 몸은 그가 가진 욕심의 크기를 대변하는 듯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가 고집스러운 성격을 드러내듯 바짝 뒤로 넘겨져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한스. 아니지, 의원님.”

“그러니까 말이야. 아주 오랜만이네.”

두 중년남성은 오랜 친우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했다.

네 사람은 고급스러운 프라이빗 룸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게 네 사람이란 소리였다. 빅토르 디얀체코는 호색한이라는 소문답게 옆에 여자 하나를 끼고 앉아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바비인형 같은 여자였다. 그는 습관인 듯 여자의 허리와 엉덩이를 쓸어가며 말했다.

레오나 테일러는 그가 옆에 끼고 있는 여자의 긴 머리칼을 훑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긴 금발의 머리카락. 공들여 셋팅 돼 있는 머리였다.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나의 시선에 싱긋 웃어 보였다. 마치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안 그래도 가라앉아 있던 레오나의 표정이 조금 더 무거운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녀가 앞에 있던 물을 들이켰다. 분명 술이 아닌 물이었지만 속이 홧홧한 느낌이었다.

“캠프에 백인이 아닌 것들을 더 받아 놨으니, 동정을 넘어 존경까지 가고 있던데. 그런 일을 당했어도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나중에 만났을 땐 대통령이라 부르게 될 수도 있겠군. 안 그런가?”

러시아 남자의 얼굴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한스 테일러도 별다른 대답 없이 입술을 비틀어 올릴 뿐이었다. 굳이 아니란 부정은 필요 없었다.

“이쯤 되면 아들이 열세 살 때 유괴를 당한 게 다행인 수준이군.”

“뭐, 지금 보니 그런 것도 같고.”

별 쓰레기 같은 빅토르의 말에 한스 테일러가 턱을 쓸며 답했다. 그가 십 년 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뒤로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대면서 좀 성가셔지긴 했지만, 지금은 용서해 줄 의향이 있다고. 잘하면 중간 선거 이후에 대선까지도 노려볼 만한 타이밍이 오고 있었으니까.

“사실 오늘 보자고 한 건… 내가 자네니까 말하는 거지만…….”

러시아 남자는 뭔가 말하려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할지 말지 조금 고민이 되는 눈치였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이런저런 저울질을 마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러시아는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네. 이왕이면 믿을 수 있는 곳에서 고르고 싶기도 하고.”

빅토르 디얀체코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두었던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두 늙은 새끼들이 무슨 말을 하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던 에이든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레오나 테일러의 눈 역시 가늘어졌다.

“중간선거와 대선 이후에도 새로운 먹을거리가 필요하지 않겠나?”

에이든 테일러가 속으로 비린 웃음을 지었다. 저 새끼만큼의 거물을 만나는 자리에 굳이 자신을 데려갈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신상품을 선보이는 것. 어쩐지 동행하겠다는 말이 너무 쉽게 받아들여졌다 했지.

한스 테일러의 ‘다음’이 되지 않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지난날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목표물은 수정된 지 오래였다. 에이든 테일러가 옆에 앉아 있는 레오나 테일러를 힐끗 쳐다봤다. 그녀의 푸른 눈에 욕심이 한 가득이었다.

“아버지를 아주 많이 닮았군. 다른 것들도 닮았기를 바라네. 여러모로 관심 속에 있던데, 나쁘지 않지. 대중의 눈을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게다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좀 시끄럽게 살아 볼 필요도 있다네. 그 말과 함께 상자는 에이든 테일러의 앞으로 놓였다. 제게서 비껴가는 상자에 레오나 테일러의 낯이 무섭게 굳기 시작했다.

“난 내 투자처엔 지원을 아끼지 않지. 초면이니 작은 인사 정도로 받게.”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안에 크리스탈로 돼 있는 술병 하나가 보였다. 옅은 갈색이 도는 액체, 술병에 든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함께 넘실대고 있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였다.

***

진은 몇 시간째 멍하니 창밖만 보는 중이었다. 이젠 시간도 제대로 계산되질 않았다. 그냥… 해가 졌구나… 하는 정도로밖에 알 수 없었다. 에이든이 방에서 나간 뒤로 약 하루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방문은 아무리 힘주어 당기고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믿게 만들기 전까지 나갈 수 없을 거란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믿게… 어떻게……?’

예전 일을 조금이라도… 에이든이 그때를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오해를 풀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왜 아무런 기록도 가지고 있지 않은지, 왜 그렇게 뒤를 따라다녔던 건지…….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설명하려 했던 일들이지만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모든 말을 무시했다.

조금만 기억해 준다면……. 침울한 표정으로 바깥을 보던 진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뒤를 돌아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방에 가끔 간식거리나 물 따위를 채워 주러 오는 호텔 직원이었다. 진은 그가 들어오자마자 반가운 기색으로 가깝게 다가갔다. 직원은 정말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비꼈다. 딱 세 번 봤을 뿐이지만, 그는 진이 뭘 말할지 아는 눈치였다.

“닉, 딱 한 번만 부탁할게요. 저 정말 여기서 절대 안 나가요. 그냥 핸드폰 충전만 하면 되는 거니까… 네?”

“…….”

진은 죄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디아도, 알렉스도 전부 다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다. 지금쯤 기사가 났을 거고… 그럼 많이 걱정할 텐데……. 거기다 자신은 연락도 되지 않으니 나디아는 정말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에게 어떻게든 괜찮다는 메시지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닉이라는 남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옆에서 간절한 눈길로 저를 보고 있는 진 헤니를 애써 무시했다. 말도 해선 안 됐고, 핸드폰을 충전해 주는 일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하라는 일만을 하고 유령처럼 사라져야 하는 존재였다.

테이블 위로 간단한 간식거리와 물 몇 병을 올려놓고, 닉은 빠르게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진이 서둘러 그 팔을 부여잡았다.

“잠깐만요…! 딱 한 번만 도와,”

“딱 한 번만, 뭐?”

두 사람은 방문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닉은 제 팔을 잡고 있던 진 헤니의 손을 털어내고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에이든 테일러의 서늘한 눈빛이 그가 지나가는 궤적을 쫓아 움직이고 있었다.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진은 에이든의 눈치를 힐끗 보다, 그가 평소와는 다른 상태임을 알았다. 그는 지금 한계까지 취한 상태가 분명했다. 항상 깔끔하게 올라가 있던 머리가 조금 흐트러진 채였다.

“응? 뭐가 딱 한 번 만인데?”

“…….”

그가 테이블에 들고 온 상자 두 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걸음이 조금 휘청여서 진이 저도 모르게 그를 부축하기 위해 가깝게 다가섰다. 다가서고 나서는 차마 그의 몸에 손을 대기가 무서워 잠시 움찔했다.

“왜 대답이 없어? 이젠 나랑 말도 하기 싫어?”

“…….”

“뭐… 그래, 좋아.”

에이든 테일러는 피식 웃으며 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진은 그 손길에 질질 끌려 테이블 앞 소파에 앉혀졌다. 에이든은 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담배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입에 문 대마에 불을 붙이는 손길이 평소보다 둔했다. 몇 번이나 찰칵거리던 라이터는 네 번째의 시도 만에야 불꽃을 뱉어냈다.

“내가 선물을 좀 준비했어.”

“…….”

앞에 놓여 있던 첫 번째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원목 상자 안에는 술병이 들어 있었다. 병에 무어라 써져 있는 것도 같았지만 영어가 아니라서 읽을 수가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술병을 꺼내 진 앞에 세워 놓았다.

“가질래?”

“……?”

별다른 대답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진을 보다 에이든이 술병을 들어올렸다.

“왜, 다이아몬드는 별로야?”

그는 안에 찰랑이고 있는 것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이어진 술자리는 살벌했다. 누가 러시아에서 온 새끼 아니랄까 봐, 가져온 술은 전부 술이라 부르기 힘든 액체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길 때마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모든 술을 받아 마시던 레오나 테일러였지.

그녀의 눈에 그득그득 들어차 있던 독기를 생각하며 에이든 테일러가 손에 든 병을 흔들었다. 안에서 다이아몬드들이 일렁이며 빛을 반사했다. 입에 물고 있던 대마를 깊게 빨아올린 뒤 그가 말했다.

“이걸 못 가져서 꽤나 화가 나 있겠지만…….”

“…….”

“진, 그거 알아? 난 이딴 거엔… 좆도 관심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술병이 곤두박질쳤다. 병이 박살나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간을 울렸다. 안에 들어 있던 액체와 다이아몬드가 엉망으로 바닥에 쏟아졌다. 그 꼴을 바라보는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 차가웠다.

“생각은 해 봤어?”

병이 깨지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진은, 다정한 목소리로 던져진 물음에 슬쩍 눈을 떴다. 에이든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진에게 물었다.

“어떻게든 잘 믿게 해 보라고 했잖아. 생각 안 해 봤어?”

“그게… 에이든, 그때는…….”

“증거도 없는 말을 또 늘어놓을 거면, 그냥 계속 닥치고 있는 편이 나을 거야.”

진의 입이 다물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말을 믿어 줄지 알 수 없었다. 아까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진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난감한 표정의 진을 보며 에이든이 두 번째 상자를 제게 가깝게 가지고 왔다.

“뭐, 그럴 줄 알고 내가 대신 준비했어.”

에이든은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두 번째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진은 안에 들어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에 작게 인상을 썼다.

“다 참으면 조금은 믿길지도 모르겠는데.”

대마를 빨아올리는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 짙은 미소가 자리했다. 진은 이 방에 처음 갇혔을 때와 똑같이 설명을 요하는 눈빛을 했지만, 에이든은 별달리 말이 없었다.

“네 절절한 진심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고.”

말은 필요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냥, 직접 증명해 보이면 될 일이었다.

***

에이든 테일러의 앞으론 다 태운 대마가 수북했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잔뜩 늘어져 있는 그는 술과 대마의 기운에 절어 있었다. 연기를 뱉던 그가 옆에서 들리는 작은 흐느낌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의 진을 보는 눈길은 건조했다.

“왜 그래. 아직 20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그가 왼쪽 손목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 정도도 못 참냐는 목소리에 진이 흐느낌을 삼켰다. 흐느끼는 소리가 작아진 것과는 달리 윙윙거리는 진동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진의 뒤에 꽂혀진 플라스틱 덩어리가 진동하며 조금 더 안을 파고들어왔다.

“흐윽…….”

“진, 넌 몰랐겠지만 사실 난 그냥 보는 쪽을 더 좋아해.”

직접 넣으면 가끔, 기분 더럽거든. 엉망으로 울고 비는 모습을 보는 걸로 충분했다. 일종의 성벽처럼 에이든 테일러가 검은 것들에 집착했던 이유는 서열정리의 차원과 비슷했다. 감히 제 인생을 이따위로 만든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다분히 폭력적인 욕구였다.

따지고 보면 진 헤니는 예외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한참이나 예외였지. 여태까지의 그가 아래 깔아왔던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들과는 취급이 많이 달랐으니까. 그간 진 헤니에 대한 특별취급이 과했음을 반성하며, 에이든 테일러는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의 버튼을 눌렀다. 달각이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엎어져 있던 진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 아흐윽!”

절로 우는 듯한 신음이 터졌다. 에이든은 ‘20분밖에’라고 말했지만, 진 헤니는 믿을 수 없었다. ‘밖에’라니,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 게 확실했다. 커다란 플라스틱 덩어리는 한참 전에 몸 안으로 들어와, 그걸 물고 있는 곳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진동의 세기를 더할 때마다 제멋대로 플라스틱은 배 안쪽을 찔러댔다. 그것에 닿아있는 예민한 점막들이 거센 진동에 과하게 달아올랐다.

딜도가 꽂혀 있는 곳에서는 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거세질수록 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불규칙적으로 진동하며 안을 휘젓는 것을 당장이라도 빼 버리고 싶었다. 진은 그 충동을 참기 위해 애먼 침대시트만 그러쥐었다.

“아직 참을 만한가 봐?”

“하… 아으…!”

진은 아랫입술을 씹으며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만해 달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에이든 테일러의 조건이었다. 절대로 뒤에 꽂힌 딜도를 빼지 말 것, 그만이라고 말하지 말 것. 안 된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잘 참고 있는 진 헤니를 보며 에이든 테일러는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진의 몸이 긴장했다. 검은 눈이 불안함에 잔뜩 흔들렸다.

“하으…! 아! 아응…!”

에이든 테일러가 꽂혀 있던 것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 있던 질척한 젤이 밀려나왔다. 쿨쩍이는 소리를 내며 몸속을 휘젓는 플라스틱 때문에 진은 어쩔 줄을 몰랐다. 가만 꽂혀 있을 때와는 또 달랐다. 달궈져 있던 몸 안이 들쑤셔지자 입에선 그만하란 애원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하… 아으…! 에이든…!”

“왜, 그만해?”

찌걱거리며 안을 드나드는 플라스틱을 보면서 에이든이 물었다. 그만할 거냐고. 진은 달뜬 숨을 터뜨리며 흐느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침대에 박혀 있는 고개가 작게 저어졌다. 그 모습에 에이든 테일러가 나른히 웃으며 딜도를 꾸욱 눌러 넣었다.

“아…! 하악! 아아!”

깊게 박혀 오는 커다란 것 때문에 진은 몸에 힘이 들어갔다.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깊이 들어온 플라스틱이 뱃가죽을 뚫고 나갈 것만 같았다. 몸 안 깊은 곳에 방출되지 못하는 열기가 고이고 있었다. 진의 성기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든 테일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렇게 좋아하면 이 짓을 하는 의미가 없는데.”

움찔거리는 구멍은 마치 플라스틱을 안으로 더 빨아들이고 싶은 것 같았다. 오랜 시간 딜도를 꽂고 있느라 붉게 달아오른 그곳에 에이든 테일러가 손을 가져다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가락을.

“……?!”

이미 한계까지 벌어져 있는 곳을 손가락이 억지로 뚫고 들어왔다. 진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신음도, 무엇도 나오지 않을 만큼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참는 것뿐이었다. 경악으로 벌어진 입에선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잘하면 더 들어가겠는데?”

제 검지손가락을 삼킨 곳을 바라보며 에이든이 말했다. 그 말과 함께 손가락이 주욱 빠져나가며 침대가 기울었다. 여태 침대 밖에 서 있던 에이든 테일러가 침대 위로 몸을 올린 까닭이었다.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안 좋은 예감이 진 헤니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지익하고 울린 소리는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맞았다. 진은 급히 뒤를 돌아보며 그를 막아 보려 했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뒤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압박감에 진이 앞으로 기어 도망가려 했다.

“이러면 안 되지.”

“에, 에이든…! 제발… 제발…!”

에이든 테일러가 그런 진 헤니의 뒷목을 꾸욱 눌러 잡아 고정했다. 채집당한 곤충이나 다름없었다. 진은 필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애원했다. 찢어질 게 분명했다. 에이든 테일러의 것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둘 다 넣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 개는 별로야? 생각보다 좋을 수도 있잖아.”

“흐으… 제발!”

“제발, 뭐? 제발 넣어달라고? 어떻게 해 달란 건지 똑바로 말해.”

그만하라고, 안 된다는 말이 나오기 일보직전이었다. 무서웠다. 몸이 고장 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뒤덮었다. 진이 결국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엉망으로 흘러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이 잘게 떨리고, 입 밖으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만할까?”

에이든 테일러의 물음에 진은 대답이 없었다. 서러움과 눈물로 절어 있는 얼굴이 애처로웠다. 아무 말 없이 줄줄 울기만 하던 진이 고개를 떨궜다. 침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하면 그만할게.”

“…….”

귀 옆에서 뱉어진 속삭임에도 진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안으로 울음을 삼키는 뒷모습을 보다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입구에 닿아 있는 제 성기를 꾸욱 누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억지로 벌어지는 몸이 더 뻣뻣하게 경직되고 있었다.

“아악…!”

“다 거짓말로 치고 그만하면 되잖아. 그만할래? 그럼 밖으로 나가게 해 줄게.”

“…….”

“응?”

상냥한 목소리에도 진은 답하지 않았다. 침대에 고개를 박고 있는 진은 모르겠지만, 목소리와 다르게 에이든의 눈빛은 정상이 아니었다. 다 거짓말이었다고, 그만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죽여 버릴 기세였다.

그렇게 말하면 방 밖으로 나갈 순 있겠지. 숨이 끊어진 채로. 에이든이 진의 뒷머리를 쥐어, 처박혀 있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검은 속눈썹이 눈물에 푹 젖어 꾸욱 감긴 채였다. 진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은 눈과 마주치자마자 에이든이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언제나처럼 좆같은 갈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가 아까보다 약간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은 그 대답에 흡족하게 웃으며 뒤에 박혀 있던 딜도를 주욱 잡아 뺐다. 투명한 액이 울컥하며 함께 뱉어지자 진이 작게 몸을 떨었다. 한동안 속을 채우고 있던 것이 급히 빠져나가고, 대신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가 처박혀 왔다.

“아! 아으응…!”

“하, 씹…!”

인위적인 진동으로 예열돼 있던 몸이 그의 침입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묵직한 살덩어리가 안으로 쑤셔 넣어지자, 안이 제멋대로 수축하고 이완하기를 반복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찢어질지도 모른단 공포에 휩싸였던 몸은 긴장이 풀리자 제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으응! 하… 아윽, 아!”

여린 살을 들쑤시며 왕복운동을 하는 성기에 진 헤니의 검은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사나운 빛을 뿜던 에이든 테일러의 푸른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한 특별취급을 반성했던 시간은 수포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성기는 진 헤니의 몸 안으로 흡입되듯 머금어졌다. 예민한 살덩이에 감겨오는 점막에 에이든이 탄식을 뱉었다. 직접 넣는 게 별로라고 말했던 건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절망스러울 만큼, 황홀한 몸이었다. 일단 이 몸을, 진 헤니를 어떻게든 가져야만 했다.

에이든이 유려한 곡선을 만들고 있는 진의 허리를 꾸욱 눌러 쥐며, 안에 들어차 있던 성기를 급히 빼냈다. 그리곤 엎드려 있던 진의 몸을 뒤집었다. 눈물과 땀, 타액으로 얼룩진 얼굴이 에이든을 향했다.

에이든이 진의 기다란 다리 한쪽을 어깨에 걸었다. 반쯤 접히는 몸에 진이 신음했다. 그 언젠가처럼,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서로의 얼굴이 자리했다. 땀에 절어 있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에이든 테일러가 물었다.

“진, 좋아?”

“하… 하으….”

“대답해.”

이젠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진 헤니의 눈꼬리에서 흘러내렸다. 지친 마음으로 가쁜 숨을 쉬던 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상처가 울퉁불퉁하게 남은 오른손이 에이든 테일러의 뺨에 살짝 얹어졌다. 진은 왜인지 모르게 에이든이 곧 울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좋아…….”

“…….”

좋아해, 에이든.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가 말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뺨에 닿아오는 온기에 흐리게 웃으며 다시 진 헤니의 안으로 몸을 처박았다. 진 헤니의 고개가 뒤로 꺾이고,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짓말.’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에이든 테일러의 속 안에서 부서졌다. 두 사람 모두에게 절박한, 동시에 절망적이기만 한 밤이 지나고 있었다.

***

발밑에선 값비싼 크리스탈 조각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무심한 낯으로 테이블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이아몬드를 즈려밟았다. 옷매무새의 정돈을 마친 그는 담배 케이스를 챙기기 위해 테이블로 향한 참이었다.

- 정신은 너나 차려. 걔가 널 진짜로 사랑하는 것 같아? 너를?

하, 씨팔 좆같은 게……. 눈빛이 사나웠다. 검은 케이스를 들어 올린 그는 안에 들어 있던 대마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침대 위의 진 헤니는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에이든 테일러의 눈빛이 탁했다. 진 헤니를 뒤로 하고, 그는 호텔방을 나섰다.

호텔 정문 앞, 그의 흰색 마세라티가 기사와 함께 대기 중이었다. 입에 문 대마에 불을 붙이며 그가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자동차는 부드럽게 출발하여, 에이든 테일러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새벽이 다 돼 가는 시간, 창밖을 바라보며 대마 연기를 들이마시던 그는 별안간 뒷머리를 울리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엔 둔통과도 같았던 감각은 조금씩 뾰족해져, 뇌 어딘가를 긁어대고 있었다.

“이런 씨발…….”

점점 강해지는 날카로운 감각에 에이든이 어금니를 씹었다. 이 통증은 전조증상과도 같았다. 그는 이후에 이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두개골이 사방팔방으로 쪼개지는 두통 뒤에는 언제나…….

- 미안해. 우리 아빠는 너한테 화난 게 아니라… 그냥…….

환청이 뒤따랐다. 손가락 사이에 꽂혀 있던 대마가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짓이겨져 불꽃을 잃었다. 이젠 독한 대마도 소용이 없어졌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전신에 소름이 일어났다. 답답해지는 가슴에 에이든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 내가 다 미안해, 에이든…….

기억들은 에이든 테일러에게 경고하듯 깜빡였다. 매섭게 파도치는 검푸른 바다, 화창한 언젠가의 모래사장, 반짝이는 무언가가 잔뜩 쌓여진 비밀스러운 공간도. 크게 떠진 눈앞으로 잔상들이 휙휙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눈알의 실핏줄이 터져나가고, 으득 소리가 날 만큼 턱에 힘이 들어갔다. 바다 아래에 잠긴 사람처럼 몸이 둔해졌다. 그리고 물을 마구잡이로 들이켠 것처럼 코와 입으로 화끈거리는 통증이 이어졌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는 백미러로 그 모습을 흘끗 보다 갓길에 차를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하… 거기 옆, 에… 씨발… 약 좀 꺼내.”

힘들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기사는 서둘러 글러브 박스를 열어젖혔다. 덜컥이며 열린 것 안에는 권총과 흰색 알약이 들어 있는 약병 하나, 그리고 얇은 틴케이스 하나가 있었다. 기사는 작은 약병의 뚜껑을 열어 몇 개를 손바닥에 털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게로 내밀어진 알약 몇 개를 보다 비리게 웃었다. 저건 또 언제 저기에 넣어놨는지 모르겠네. 온몸의 혈관이 조여지고,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그 약을 보자마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알약은 자신이 미친 새끼란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 증거를 삼키는 건 정말 거지같은 일이었다. 물론 저 약 몇 알만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은 정상으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 상태를 과연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효가 돌기 시작하면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지고, 덜떨어진 새끼처럼 멍해졌다. 온몸의 힘이 풀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헛소리를 주절거리기도 했다. 약을 먹은 뒤의 무기력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좆같았다. 한마디로 저 약을 먹을 일 따위… 앞으로 없을 거란 얘기였다.

“그 약, 말고.”

“……?”

실핏줄이 다 터져 붉게 핏기가 오른 눈이 글러브 박스 안을 향했다. 기사는 그제야 말을 알아듣고 알약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곤 틴케이스를 꺼내 들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엔, 얇은 주사기 다섯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

화면 속 한스 테일러는 흑인 MC가 진행하는 선거 유세에서 적당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MC로 세운 연예인은 근래 가장 핫한 동시에, 많은 인권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이미지가 최고조에 이른 가수였다. 처음엔 섭외에 응하지 않다가 일련의 사건 이후에 다시 연락이 온 케이스였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투샷을 타이트하게 잡고 있었다. 하이파이브를 하다가, 이내 다정한 악수를 하는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던 레오나 테일러가 리모컨으로 TV 전원을 껐다. 앞으로는 보나마나였다.

선거는 승리가 확실했다. 러시아 새끼의 말마따나 중간선거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앞으로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진 헤니 덕분이었다. 진 헤니에 대한 분노가 치솟을수록, ‘테일러’에 대한 동정과 사랑이 높아지고 있었으니까.

대중의 관심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많은 기대와 사랑 뒷면에는 언제 그를 끌어내릴 수 있을지, 타이밍만 엿보는 시선이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먹이를 던지기 전에 ‘동양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까지 충분히 만들어 뒀으니, 미국은 진 헤니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자근자근 밟고도 남을 일이었다. 애초에 다른 인종에 너그러운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오나 테일러는 뿌듯해 보이지도,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모든 건 그녀가 원했던 곳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레오나는 무언가 마뜩찮아 보였다. 까맣게 빛을 잃은 TV 스크린을 보는 눈이 사나웠다. 탁한 눈은 지금이 아닌 어젯밤을 헤매고 있었다.

- 러시아는 새로운 투자처를 찾고 있네.

그 말과 함께 내밀어진 상자는 자신이 아니라 에이든 테일러 앞에 놓였다. 왜? 씨팔, 대체 왜? 그건 당연히 자신이 가져야 할 물건이었다. 지금의 판을 짜고, 한스 테일러를 승리로 이끈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러시아의 새로운 투자처가 돼야 할, 앞으로 미국 정치를 손에 쥐고 흔들 사람도 자신이었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할 능력도 없는 거지같은 에이든 테일러 새끼가 아니었다.

그날 에이든 테일러는 앞에 놓인 상자를 빤히 보다, 퍽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레오나 테일러는 그제야 그의 목표물이 바뀌었음을 직감했다. 어쩐지, 그딴 자리에 나오는 놈이 아니었는데. 앞으로 그는 자신을 물 먹이는 데 모든 사력을 다할 게 분명했다.

‘건방진 새끼가, 감히 누가 누굴?’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레오나는 문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레오나 님, 릴리 콜린스입니다.”

“들어와요.”

오늘도 포멀한 수트를 정석적으로 차려입은 그녀의 비서가 작은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흰 우유였다. 레오나는 약하게 인상을 쓰며 릴리를 바라봤다. 이게 뭐냐는 눈빛에 릴리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 숙취가 있으실 것 같아서요. 흰 우유가 위장 보호에 좋다고…….”

“…….”

“…혹시 알러지가 있으신가요? 몰랐습니다. 죄송합,”

“아뇨,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쟁반 위의 머그잔을 들어 올리며 레오나가 말했다. 상냥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릴리는 속으로 뿌듯함을 숨겼다. 레오나 테일러에게 칭찬을 받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능력 있는 주인에게 쓸 만한 비서가 되고 싶었다.

“한스 테일러 님과의 약속은 내일 저녁으로 잡아 두었습니다.”

“네, 고마워요.”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머그잔은 릴리 콜린스의 섬세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적당한 온도의 우유를 들이키며 레오나가 물었다.

“알아보란 건 알아봤어요?”

“네, 진 헤니는 집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이든 테일러 님의 집에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핸드폰 역시 꺼져 있어 위치추적이 어렵습니다.”

“죽은 건 아니고?”

“아직 거기까진 파악 되지 않았습니다.”

그 성격에 죽이려면 진즉 죽였을 수도 있었다. 원래 그런 새끼였는데 이상하게 진 헤니한테만 지랄 맞은 성격이 비껴갔던 거니까.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골똘히 생각하던 레오나가 비리게 웃으며 말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죽이진 못했을 거예요. 여태 해 왔던 또라이짓의 타겟을 바꿀 만큼, 그 새끼한텐 진 헤니가 중요한 모양이니까. 일단 계속 연락은 해 보세요. 핸드폰 켜지면 바로 위치부터 찾고.”

“아니면… 어제 에이든 테일러 님 차를 운전했던 기사를 알아볼까요? 달리 들른 곳이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다 비워진 컵을 내려놓으며 레오나가 릴리 콜린스를 바라봤다. 순종적인 비서의 얼굴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어떻게든 레오나 테일러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영특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비서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릴리 콜린스도 그녀에게 옅게 마주 웃었다. 그녀는 주인의 인정과 상냥함에 중독되고 있었다.

“그렇게 해 주세요.”

“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레오나가 흡족한 얼굴로 쟁반 위에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꾸 건방지게 구니까 안 해도 될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성가시게.”

“…….”

“굳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릴리 콜린스는 이런 상태의 레오나에게 자신의 대답은 필요 없음을 알고 있었다.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레오나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했다. 애초에 약점인 걸 티를 내면 안 됐지. 병신 같은 게.

“진 헤니는 찾아서…….”

“…….”

“나한테 데려와요.”

그를 가지고 생각보다 많은 걸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진은 일부러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려니 자꾸 머리가 멍해져서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약간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이 넓은 호텔방을 가로질렀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아으…….”

몇 걸음 걷던 그가 신음하며 자리에 우뚝 멈췄다. 침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지난 밤 내내 혹사당한 몸은 통증과 함께 옅은 열을 동반하고 있었다. 첫날 졸려진 목은 편도가 엉망으로 부어올랐는데 마땅한 치료도, 처치도 못한 이유가 컸다. 거기다 어젯밤까지 엉망으로 울고, 가학적인 모든 행위를 견뎌야 했으니 몸이 고장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어렵사리 다시 침대에 도착한 진 헤니는 사박거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 하… 진, 내일부터 문, 은 후… 안 잠겨, 있을 거야.

- 아…! 아흑! 너무 빨… 라! 천천히… 아! 으응!

- 씨발, 힘… 빼. 하… 그래도, 나가지 않을 거지?

아래에서 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에이든 테일러가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문을 잠그지 않겠다고.

조건은 같았다. 몽땅 다 거짓말로 인정하고 여기서 나가든지, 아니면 끝까지 여기서 그를 믿게 만들든지. 진 헤니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선택은 너무도 당연하게 후자였다.

에이든은 끊임없이 진 헤니를 시험했고, 시험대에 오른 진은 모든 걸 견뎌야만 했다. 머리끝까지 올린 이불 아래에서 진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주 잠깐만 나갔다 오는 건 안 되겠지…? 잠깐 전화만 하고 싶은데… 아니면, 메시지만이라도.

마음속에 그득그득 충동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은 괜찮을 수도 있잖아. 다시 돌아올 거니까. 누구도 모르게 다녀오면 되잖아.

빼곡히 차오르는 유혹들을 애써 털어내며 진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안 될 일이었다. 그가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가지 말란 소리는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지만, 진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진은 애써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슬렀다. 에이든과 같이 갔던 그리피스 천문대 위, 밤이 되자 예쁘게도 반짝였던 건물의 빛들. 그리고… 얼마 전에 갔던 가로등이 빼곡히 들어 서 있던 그곳……. 제가 그 옆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던 무심하고 다정했던 얼굴도.

“흐윽…….”

마음이 추슬러지기는커녕 오히려 복잡해지고 있었다. 참으려던 울음이 샜다. 진 헤니는 어떤 일을 겪어도 결국 에이든 테일러를 사랑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말했으면 달랐을까? 아니면 열세 살 때, 그때부터 잘못된 걸까?’

울면 안 되는데…. 목이 더 부을 텐데……. 안 그래도 열이 오르던 몸은 진이 울기 시작하자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불 밑에서 숨죽여 울던 진은 점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에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아랫입술을 꾹 감춰 물고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이불을 내렸다.

닉이었다. 그는 오늘도 애써 진 헤니를 외면하며, 테이블 위로 먹을 것들을 셋팅하기 시작했다. 진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불편한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향했다. 손바닥으로 젖은 뺨을 닦으며 닉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닉, 저… 해열제 같은 거 받을 수 있을까요?”

“…….”

“아니면 타이레놀이라도…….”

닉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엉망인 테이블 아래를 정리하고, 생수병 몇 개와 깨끗한 컵을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무표정한 그는 진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옆에 서서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진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몸이 아파서… 진통제 하나만 안 될까요?”

“…….”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네?”

서러움이 가득한 눈에서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진은 샤워가운의 소매로 뺨을 눌러 닦으며 조금 더 가깝게 닉에게 다가갔다. 닉의 표정에 난처함이 가득했다. 아무리 모른 척하라는 지시를 받았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이곳 관리를 배정받았을 때부터 무시하기 힘든 것들이 있었다. 이 방은 치울 때마다 무언가 깨져있거나 박살 나 있었고, 흐느끼는 소리나 크게 소리 지르는 소음이 멈추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가 미친놈인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물론 근래의 뉴스를 보니 진 헤니도 정상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까지……. 닉은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서 있는 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강하게 목이 졸렸던 건지 검붉은 멍자국을 달고 있었다. 젠장, 괜히 봤어.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제발 도와주,”

“가, 가져다 줄 수는 있는데… 전부 다 없었던 일이에요.”

아프다는데 대체 어떡하냐고……. 도와달라는 말에 결국 닉이 항복했다. 줄줄 우는 애처로운 얼굴에 그가 작게 혀를 찼다. 드디어 제 말에 대답한 닉을 보며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가 떠오르는 얼굴에 닉의 표정이 구겨졌다. 진통제 한 알 가져다준다 했다고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죄책감이 든 까닭이었다.

“잠깐 기다려요…….”

닉은 작은 한숨과 함께 서둘러 방을 나서려 했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는 붙잡힌 팔에 잠시 뒤를 돌았다. 진 헤니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닉은 제게 건네진 핸드폰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제발… 딱 한 번만요.”

“…….”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은 눈을 보다가 닉이 망했단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게 확실했다.

***

“어쩐지! 에이든 테일러만 존나 따라다닐 때부터 수상했다니까?!”

“음침한 건 알고 있었는데 유괴범 아들일 건 또 뭐야.”

“집안 전부가 막 이상한 성도착증 같은 거 있는…….”

경박스럽게 낄낄대던 목소리는 쾅 소리를 내며 닫힌 철제문에 멈췄다. 알렉스 그레이는 서늘한 빛으로 천박한 소음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불대던 입들이 꾸욱 다물려 있었다.

“가뜩이나 선발전 전이라 신경이 예민해서… 씨발, 쓰레기 같은 소리 좀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

“할 짓 없으면 가서 훈련이나 해.”

알렉스 그레이는 머쓱한 표정의 선수들을 지나쳐 락커룸을 나섰다. 뒤에서 왜 저러냐는 볼멘소리가 터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알렉스는 짜증 섞인 손길로 갈색머리를 헝클었다.

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4일 째였다. 말도 안 되는 뉴스가 세상에 터진 뒤, 서둘러 그의 집을 찾아간 나디아와 알렉스였지만 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전화도 되질 않았다. 그의 핸드폰은 꺼진 채 켜질 줄을 몰랐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더 신경질이 났다. 고작 해 볼 수 있는 건 핸드폰이 응답할 때까지 전화를 거는 것뿐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그 새끼 역시 진 헤니가 사라진 그 뒤로,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거지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잇새로 욕을 씹던 그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나디아의 전화였다.

[ 오늘도 연락은… 없었지? ]

“…….”

[ 하, 시발 진짜 미치겠네. ]

나디아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진이 사라진 그날부터 제대로 잠을 못 자는 것 같았다. 자꾸 나쁜 꿈만 꾼다며, 잠을 자기 싫다 말하던 그녀였다. 나디아도, 알렉스도 모두 참을 수 없는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 어디서 나쁜 맘이라도 먹은……. ]

“나디아.”

알렉스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말을 멈춘 나디아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우는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그녀가 충분히 감정을 쏟아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고, 특히 진에 대해서는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 알렉스, 내가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

“…….”

[ 걔는… 진 헤니는 정말 그 새끼 하나만 보고 뭐든 결정할 수 있다는 거야…! ]

울먹이는 목소리가 처절했다. 진 헤니가 에이든 테일러에게 가진 집착은 그 정도였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처음 시야에 담은 것을 어미로 졸졸 따르듯, 그는 에이든 테일러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마치 그 새끼만이 세상의 전부인 양.

아직 날개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어린 새가 어미라며 따르는 것은 송곳니가 성성한 짐승이었다. 제 발로 그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뾰족한 이빨에 여린 살이 다 뜯어지고 헤질 게 분명했다.

전부 다 에이든 테일러 때문이었다. 그때 물에 잠겨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것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대체 어디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건지. 나디아는 전부 무섭기만 했다. 바깥에서 떠들고 있는 ‘그 일’까지 모두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절대 유괴는 아니었다. 진 헤니의 아버지라면 에이든 테일러를 하루라도 빨리 돌려보낼 사람이지, 그를 한 달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돈을 요구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집에 안 간 거면 몰라도, 못 갔을 리가 없었다.

[ 나는 혹시 모르니까 섬에 다녀올게…. 뭐라도 알게 되면 연락 줘. ]

“그래, 틈틈이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알렉스 그레이가 짙은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반쯤 체념한 낯으로 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걸어 봤자 듣게 될 소리는 뻔했다. 전화기가 꺼져 있으니 다시 걸라는 말…….

“……?!”

터덜터덜 걷던 그가 자리에 멈춰 섰다. 녹색 눈이 크게 뜨여진 채였다. 자신이 드디어 미친 게 아니라면, 귓가에 들리는 건 분명한 신호음이었다.

***

「나 괜찬ㅎ아 또 연락할ㄱ - 진 헤니」

알렉스 그레이는 제 책상 앞에 앉아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녹색의 눈은 끝을 모르고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신호가 가던 전화는 뚝 끊긴 후 연결되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거절한 까닭이었다. 알렉스는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주 급히 보낸 것 같은 메시지가 온 뒤로 핸드폰의 전원은 다시 꺼진 채였다.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 덮었다. 대체 뭐가 괜찮아, 뭐가. 속 안에서 뱉어지지 못한 말들이 응어리지고 있었다. 하나도 괜찮지 못했다. 한숨을 쉬고 또 쉬어도 답답한 속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무기력함은 알렉스 그레이에게 생소한 감정이었다. 매뉴얼이 정해져 있는 훈련과는 달랐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질 않았다. 그는 지금 뭘 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무엇 하나 시도도, 행동도 해 보지 못하고 패배한 기분이었다.

답답함에 또 한숨을 쉬던 그는 제 앞에 있는 종이 몇 장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주말, 함께 가기로 했던 놀이공원의 티켓이었다. 제일 위에 있는 티켓에는 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만 쓸어 보았다.

진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들이 참 많았다. 남들은 질려서 재미없다 말하는 이 놀이공원이 진에게는 그저 새롭고 신기하기만 한 곳이었을 텐데……. 그가 천진난만하게 웃는 순간에, 그 옆에 함께 있고 싶었다. 진은 화창한 주말에, 그것보다 더 맑은 얼굴로 웃었을 게 분명했다.

조금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자고 하면, 아이 같은 얼굴로 긴장할 그가 떠올랐다. 그때 짓궂은 얼굴로 놀리면 몇 번은 아니라고 부정하다, 결국 못 타겠다며 뒷걸음질 쳤을지도 모르지. 그럼 자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 크게 웃었을 게 뻔했다. 그냥… 그냥 나디아가 뉴욕에 데려가자고 할 때, 그때 진을 데리고 어디로든 갔어야 했는데.

수많은 메달과 트로피, 그가 여태껏 노력으로 얻어 왔던 모든 것들 가운데에 알렉스 그레이는 패배자로서 앉아 있었다. 고철덩어리들은 눈치도 없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녹색의 눈은 빛을 잃고 있었다.

“대체 어디 있는…….”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결국 표정이 엉망으로 무너졌다. 나디아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역시 많이 무서웠다. 진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이든 자꾸 최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참이나 커다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 덮고 있던 그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까맣게 점멸했던 화면이 켜지고, 진과 나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던 그의 체크리스트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때와는 다르게 엉망진창으로 작성돼 있는 체크리스트 따위, 알렉스 그레이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선발전이 다음 주였지만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그는 메시지창을 켰다. 알렉스는 무언가에 쫓기듯 보낸 진의 메시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차오르려는 화와 신경질을 내리누르며 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언제든 연락 줘」

알렉스 그레이는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무능한 자신이 싫었다. 참을 수 없는 패배감이 알렉스 그레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

릴리 콜린스는 수트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메시지를 확인하곤 옅게 웃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나 테일러는 뒤에서 따라 걷던 그녀가 멈춘 걸 느끼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 릴리는 메시지 내용을 보고했다.

“그때 에이든 테일러 님의 차를 운전했던 기사를 찾았습니다.”

“그래요? 최대한 빨리 가져오고 싶은데, 이 뒤로 내 일정이 어떻게 됐죠?”

화려한 호텔 복도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한스 테일러와의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는 중이었다. 릴리 콜린스는 언제나 품에 넣어 두는 손바닥만 한 다이어리를 꺼내 제 주인의 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을 마친 그녀가 곤란한 낯을 했다. 자신의 주인은 기사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기엔 조금 바빴다.

“저… 레오나 님?”

“네?”

레오나 테일러는 의아한 낯으로 자신의 비서를 바라봤다. 자신의 똑똑한 비서는 언제나 결론부터 말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식으로 말을 머뭇거리는 게 생소한 까닭이었다. 레오나는 무슨 일이냐는 낯으로 릴리를 바라봤다. 릴리 콜린스는 아주 짧은 시간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후 일정이 많이 바쁘신데, 그 기사는 제가 대신 만나도 될 것 같습니다.”

“…….”

“아, 물론… 허락해 주신다면요…!”

식사를 하시는 동안 빠르게 만나고 오겠습니다. 덧붙여진 말에도 레오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릴리 콜린스는 자신이 건방지게 그녀를 대신하겠다 말한 건 아닌지 조금 무서워졌다. 굳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누구보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그녀가 만나기엔 시간낭비였다. 그 정도의 일은 제가 대신 처리해도 될 거라 생각해서 했던 말인데…….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

“기분이 상하긴.”

레오나가 별말을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간 위축돼 있던 릴리 콜린스는 환히 웃는 제 주인의 모습에 안도했다. 이렇게 웃는 얼굴 뒤에는 언제나…….

“고마워요. 그럼 그건 릴리가 대신 해 주세요.”

자신에 대한 인정과 인사가 뒤따랐다. 릴리 콜린스는 약간 고무되는 기분으로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일 오전까지 보고드릴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여기 요리가 꽤나 맛있는데, 아깝게 됐네요.”

“괜찮습니다.”

“그래요. 뭐, 나중에 따로 오면 되니까.”

레오나 테일러는 그렇게 말하며 수트 안주머니에서 머니클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까만색 카드 하나를 꺼내 릴리 콜린스에게 내밀었다. 릴리는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제 앞에 있는 네모난 플라스틱을 바라봤다.

“일단 가져가요.”

“아뇨, 괜찮,”

“저녁도 비싼 걸로 사 먹어요.”

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제 손에 쥐여지는 카드에 곤란한 낯을 했다. 레오나 테일러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신의 비서는 파악하기 쉬웠다. 그녀는 칭찬에 목마른 사람이었고, 자신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는 사람이었다.

“제 대신이라면서요?”

“…….”

“먹고 싶은 거든 사고 싶은 거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카드로 사요. 난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상냥한 말 몇 번, 다정한 감사인사 몇 번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가끔의 특별취급 정도를 덧붙이면 더 좋았다. 잘했다는 칭찬 하나로 자진해서 열 개, 스무 개를 내놓고도 남을 사람들이었으니까.

릴리 콜린스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카드를 챙겨 들었다. 그녀는 짧게 인사하곤 ‘제 대신’이 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레오나 테일러는 꽤나 쓸 만한 데다, 꽤나 다루기 쉬운 그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비린 미소가 떠 있는 채였다.

이제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하나였다. 레오나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는 일반 라운지를 지나, 안쪽에 위치한 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던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들어가려 했던 곳, 그곳의 문이 약간 열린 채였다. 문틈을 바라보는 레오나 테일러의 눈이 예리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가늘게 떠진 푸른 눈이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여분의 약은…, ……있네. 하마터면…”

“더 불편한 곳은…, 부족하……, …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한스 테일러의 말 중간 중간 마른기침이 이어졌다. 열린 문틈 사이론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가 보였다. 낯빛이 많이 창백했다. 곧 죽을 것 같은 그의 앞으로 물과 알약 몇 개가 자리했다.

그녀가 가깝게 열린 문 앞으로 조금 더 다가섰다. 푸른 눈이 집요하게 그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약을 삼키는 한스 테일러의 입술은 푸르게 질린 채였다. 레오나 테일러는 언제나 거대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갑자기 얇은 종잇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갈기갈기 찢어 없애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종이.

끊이지 않는 마른기침, 푸르게 질린 입술. 누가 봐도,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레오나 테일러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아름다운 푸른 눈은 잔인한 빛을 뿜었다. 어쩐지……. 변호사를 왜 찾나 했네. 가지런한 치열이 환히 보일 정도로, 그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유언장을 쓴 모양이지?

“그래… 안 그래도 요즘 노망이 드는 것 같긴 했는데, 그쯤 됐으면 깔끔하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한스 테일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제 앞으로 떨어질 그날을 상상하며 그녀가 웃었다. 환히 웃던 레오나 테일러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너무 기뻐 보여도 조금 수상하니까. 온화한 미소를 입에 건 그녀가 문을 살며시 열었다.

안에 있던 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스 테일러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저 왔어요. 조금 늦었네요. 죄송해요.”

살뜰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비워져 있는 의자에 앉으며 인사했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용건은?”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스 테일러가 물었다. 약간 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오늘 한스 테일러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러시아의 새로운 투자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빅토르 디얀체코와 따로 자리를 만들고자 한스 테일러의 손을 좀 빌리려 했던 건데……. 이렇게 되면 굳이 그의 도움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시체의 손 따위는 필요치 않았으니까.

레오나 테일러는 그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도 뵙고 같이 저녁 먹으려고 하는 거죠, 뭐.”

“…….”

“맛있게 드세요.”

이런 값비싼 음식을 목구멍에 집어넣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인데. 입 밖으로 뱉어지지 못한 말은 적당히 씁쓸한 와인과 함께 넘겨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일정이 정리됐다. 일단 유언장부터 찾아서 확인하고, 다 죽어 썩어가는 반송장을 대신할 사람으로서 빅토르 디얀체코를 만날 일만 남아있었다.

‘언제 죽으려나 모르겠네……. 뭐, 여차하면 장례식을 당기면 되니까.’

그녀가 정갈한 손길로 제 앞에 놓인 송아지 고기를 썰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린 고깃덩이가 레오나의 입안으로 들어가 찢어졌다. 새빨간 살점을 이로 질겅일 때마다 핏물이 새어나왔다. 그녀의 입 속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

꽤나 젠틀하고 우직한 남자였다. 피터 코웰이라는 남자는 말해도 괜찮다며 몇 번을 안심시킨 뒤에야 그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물론 그를 안심시키는 방법에는 레오나 테일러가 줬던 검은 카드가 훌륭한 역할을 했다. 릴리는 그 카드로 제게 허락된 비싼 저녁 대신, 제 주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구매했다.

릴리 콜린스는 조금 전 계산이 끝난 작은 상자를 그의 앞으로 밀어놓으며 싱긋 웃었다. 난처한 얼굴을 하던 피터는 주변을 짧게 두리번거리더니 상자를 급히 챙겨들었다. 아무리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더라도 일단 큰돈이 걸리면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원래 원칙상 고객의 행선지나,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해선 안 되는데…….”

“피터, 괜찮아요. 그날 당신이 운전했던 차는 제가 모시는 분의 동생께서 타신 거예요.”

“하… 그러니까, 그… 호텔은 월도프 아스토리아였어요. 윌셔 대로랑 사우스 산타모니카 대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거기요.”

유려한 필체가 수첩에 호텔 이름을 적었다. 진 헤니가 여기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일단 뒤져 보면 될 일이었다.

“다른 특이점은 없었나요?”

“어디가 좀… 아파 보이긴 했는데…….”

릴리 콜린스는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 코웰은 짧게 한숨을 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 보였고, 글러브 박스에서 약을 꺼내 달라고 했어요.”

“혹시 약병에 따로 뭐라 적혀 있던 건 없었고요?”

“아, 그게… 적혀 있던 건 없었어요. 그리고 저도 달라는 게 그 약인 줄 알았는데…….”

그 약이 아니더라고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수첩 위에서 움직이는 릴리 콜린스의 만년필이 바빴다.

“뭔가 고통스러워하기 전에는 대마를 피웠는데, 그걸론 좀… 부족했던 것 같았어요.”

“…….”

“이 정도가 제가 아는 전부예요.”

“네, 고마워요.”

릴리 콜린스가 다이어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상냥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창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흰 낯에 어디에서 본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이제 제 주인의 미소를 따라 지을 수 있었다.

***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베버리힐스 내에서도 손꼽히는 초호화 시설을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음식도 훌륭했다. 방송에도 몇 번 나올 정도로 유명한 셰프가 주방을 책임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명성이 무색하게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오는 음식들은 며칠 째 절반 정도가 남겨진 채 방을 나갔다.

오늘도 음식은 다 남겨질 모양이었다. 진은 포크로 접시 위의 음식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눈은 손에 들린 핸드폰 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까맣게 꺼진 화면을 바라보는 눈빛이 복잡했다.

“전화를 엄청 많이 했던데…….”

나디아도, 알렉스도…. 진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진은 두 사람에게 제대로 전화도, 메시지도 못하고 서둘러 전화를 꺼야만 했다. 진통제 한 알과 해열제 한 알, 그것과 함께 다시 제 손에 돌아온 핸드폰은 고작 10퍼센트 정도가 충전돼 있었다.

아마 약을 가지러 가면서 잠시 꽂아 뒀을 테니, 10퍼센트라도 충전된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제게 핸드폰을 내밀던 닉은 겁에 질려 있었다. 진 헤니는 그에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했지만 닉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방을 나갔다. 한 번 더 부탁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내일쯤 다시 켜서 둘한테 메시지라도 제대로… 남겨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진은 접시 옆에 컵과 함께 놓여 있는 알약 두 개를 바라봤다.

- 진통제를 안 먹게 관리를 잘해야 될 거 아냐.

언젠가 들었던 꾸중을 떠올리며 그가 흐리게 웃었다. 그러게…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를 모르겠네……. 흰색의 진통제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선발전이든, 대회든 모두 의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약을 바로 먹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 전에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탓이었다.

복잡한 눈으로 한참이나 약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진통제를 입안에 넣었다. 알약은 물과 함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약을 삼킨 진의 얼굴엔 체념의 빛이 감돌았다. 에이든 테일러를 믿게 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래인지는… 모르겠지만.

진 헤니가 믿는 건 딱 하나였다. 에이든이 자신과 그 옛날의 일을 조금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렇다면 제 말을 믿어 줄 게 분명했다. 제게 그날의 기억이 아름답고 소중한 만큼, 에이든에게도 그러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냥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거야…. 진은 애써 마음속에 들이차는 우울한 생각들을 외면했다. 절대로 그 기억들이 하찮아서, 기억할 가치도 없어서 잊고 산 게 아닐 거야. …그것만은 절대로 아니어야 했다.

“해열제는… 나중에 열이 심해지면 먹어야겠다.”

점점 더 슬퍼지려는 마음에 진이 잡생각을 털어내며 말했다. 이 와중에 진은 약을 아껴 두었다. 그는 빨간색 캡슐에 들어 있는 해열제를 침대 옆 서랍에 넣었다. 핸드폰도 함께.

서랍을 닫고 방을 쭉 둘러보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방문으로 향했다. 빤히 문을 보던 진 헤니는 홀린 듯 그 문 앞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움직인 그가 고급스러운 나무문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가만 그 표면을 쓸던 손은 백금으로 장식된 손잡이에 멈췄다. 그것을 꾸욱 눌러 잡은 손바닥 안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손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잡이를 내려다보는 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잡이가 철컥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문을 여는 데에는 큰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잡고 있던 손잡이를 작은 힘으로 눌러 내리는 정도면 충분했다. 정말로 열린 문에 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이든이 말했던 대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충동들이 진 헤니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맥박이 빨라졌다. 에이든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오니까 그 전에만 돌아오면… 그러면 되지 않을까? 아예 나가는 게 아니야. 에이든이 오기 전에 돌아오면 되잖아. 나디아와 알렉스를 만나고 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핸드폰을 조금 더 충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 그래도 나가지 않을 거지?

아주 잠깐… 아주 잠깐만…….

“…….”

호화스럽지만 모든 게 엉망진창인 호텔방 안, 진 헤니는 문틈으로 들어온 빛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밝은 빛이 반사된 검은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열린 문의 좁은 틈새로 들어오던 빛이 조금 더 넓은 각도로 방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진 헤니는 그 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꼬옥 주먹을 쥔 손에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

눈빛이 멍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호텔방 문 앞에 서 있는 그는 위태로워 보였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는 술과 대마, 그리고 아직 옅게 남은 코카인의 기운에 휘청이고 있었다.

잠시라도 약이나 술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고, 때문에 쓰레기 같은 것들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는 중이었다.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왜 못 들어가고 이러고 있는지를 모르겠네. 그는 문을 열기 무서운 사람처럼 굴었다. 한창 약기운이 돌았을 때는 끝을 모르고 치솟던 기분이, 이제 바닥으로 처박혀 다신 올라오지 않았다. 몸과 뇌가 흐물해지고 있었다.

두려웠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안에 있어야 할 게 없을까 봐. 제 입으로 문을 열어 두겠다 했고, 다분히 삐뚠 오기로 문을 잠그지 않았다. 나가지 않을 거지? 그럴 거잖아. 확인하고 싶었다. 진 헤니 스스로 이곳에 갇히는 걸 선택하길 바랐다.

에이든 테일러는 한참이나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손잡이가 끼익하는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열린 문 사이로 조용한 방이 보였다.

“…….”

안으로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가 무거웠다.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룸의 중앙, 식사를 하다 만 접시가 가장 먼저 보였다.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의 손끝이 움찔했다. 조급한 눈길이 방 안을 훑었다. 인기척이 없는 내부에 푸른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급히 침실로 향했다. 대리석 바닥이 불안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침대 가깝게 다가간 그는 그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진 헤니에 우뚝 멈췄다. 그의 부재를 확인하자마자, 발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푸른 눈 안에는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눈물이 고여 들었다.

- 좋아해, 에이든

애절하게, 절박하게 믿어 달라 말하던 진 헤니는 이 방에 없는 모양이었다. 다 거짓말이라고? 전부? 그냥 다…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고? 그렇게 알면 되는 거야? 아니지?

에이든의 푸른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사람이 많은 길 한복판에서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그는 아무도 없는 호텔방을 두리번거렸다. 당장의 상황이 머릿속에 빠르게 입력되지 않았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지금 이게….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할 만큼 술과 약기운에 절은 뇌였지만, 단 한 가지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진 헤니를, 그를 다시 찾아와야 했다. 다시 찾아서 이번에는 절대 어디도 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크게 떠진 푸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려 할 때쯤, 에이든 테일러는 방 밖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 건, 등 뒤에서 욕실의 문이 열릴 때였다.

“에이든…?”

“…….”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이 멈추고, 푸른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렀다. 우뚝 멈춰 서 있던 그가 뒤를 돌았다. 그곳엔 놀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진 헤니가 있었다. 방금 막 샤워를 한 건지 머리가 젖어있었다.

진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에이든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했다. 에이든은 어제 봤을 때보다 더 낯빛이 좋지 않았다. 핏기 없는 얼굴을 보다 진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섰다.

“…너 괜찮아?”

“하…….”

진 헤니의 물음에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실성한 듯 웃는 모습에 진이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한 발자국 더 에이든에게 다가섰다. 검은 눈에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어디 아파…?”

“…….”

“병원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까만 눈이 언제나처럼 저를 살피고 있었다. 눈에 가득한 다정함이 에이든 테일러를 절망케 했다. 전부 다 진짜 같아서, 그냥 그렇게 믿고 싶어서. 눈물이 엉망으로 흘렀다.

문 앞에 섰을 때부터 바닥을 질질 기고 있던 약한 마음은, 이제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를 포기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앞에 선 진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커다란 품에 안긴 진은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아 굳어 있었다. 에이든은 진의 목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목에 닿아오는 입술이며 숨이 많이 뜨거워서 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정말 아픈 게 맞는 모양이었다.

미열이 있는 제 몸에도 이렇게 뜨겁게 느껴질 정도면, 에이든의 상태는 좋지 않은 게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진은 저를 꼭 안고 있는 그를 잠시 떼어내려 했다.

“아프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

“에이든…? 잠깐 이것 좀…….”

안색을 살피기 위해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이 허락하지 않았다. 몸을 빼려하자 더욱 강하게 속박해 오는 통에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단한 품 안에서 허둥대던 그는 별안간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움츠렸다. 목에 잇자국을 남긴 에이든 테일러가 진의 목에 입술을 댄 채 말했다.

“아프면, 여기서 이러면 돼.”

“그게 무슨 소리…….”

뒷말은 입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뒷목을 감싸 쥔 손이 진의 고개를 강하게 당겨 잡았다. 진은 제 입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움에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혀가 절박하게 얽히고 있었다.

***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진 헤니가 입은 샤워가운은 몸에 걸친 의미가 하나도 없을 만큼 죄다 흐트러진 채였다. 허리께에 묶여 있던 매듭은 묶여 있다고 보기엔 애매할 만큼 풀어 헤쳐져 있었고, 가운의 앞섶은 잔뜩 벌어져 있었다.

“하… 아으…!”

그는 지금 꽤나 오랜 시간동안 에이든에게 온몸을 내어 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온몸에 입을 맞출 작정인 것 같았다. 뜨거운 입술과 혀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진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열이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입은 뜨겁다 못해 아릴 정도의 기분을 느끼게 했다.

긴 다리를 가르고 그 사이에 자리한 에이든은 진 헤니의 존재를 확인하듯, 그가 실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듯 입 맞췄다. 목덜미에 잇자국을 잔뜩 내던 그가 먹음직스럽게 튀어나와 있는 진 헤니의 목울대를 물었다.

“아…!”

치명적인 약점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진의 몸이 뒤틀렸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팠다. 에이든은 몇 번 더 이로 목젖을 잘근거리다, 그 위로 혀를 문댔다. 따끔하게 느껴지던 상처에 축축하고 뜨거운 것이 닿자 진의 표정이 무너졌다. 숨이 자꾸 가빠지고 있었다. 목에 한참 머물던 입은 넓게 벌어진 진의 어깨와 쇄골, 탄탄한 가슴팍과 배를 지나기 시작했다. 살갗을 물고 빨 때마다 전신을 울리는 안타까운 느낌에 진이 이불을 그러쥐었다.

“아… 하윽…!”

“…….”

목, 어깨, 가슴, 그리고 갈비뼈를 지나 배와 옆구리까지. 상체를 하나하나 조립하듯 입 맞추며 확인할 동안, 커다란 손은 진의 허벅지 안쪽을 쓸어 올렸다. 가운 아래를 마음대로 벌리고 들어온 손바닥은, 살갗을 쓸다 손자국이 날 만큼 강한 힘으로 허벅지를 꾸욱 쥐었다. 진 헤니의 성기는 이미 터질 듯 발기해 있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손은 일부러 꼿꼿이 선 성기를 비껴갔다. 건드릴 것처럼 주변을 맴돌다가도 이내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애가 탔다. 진의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마다 에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 아! 에이든, 그……!”

“…….”

“흐윽…!”

진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그만하라 말하려던 그는 일련의 ‘약속’과 ‘조건’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그만이라고 말하면 안 되니까.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쓸던 에이든 테일러는 그 기색을 알아채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만했으면 좋겠어?”

“…….”

“그만해 줄 수는 있는데…….”

평소보다 더 나른하고 느리게 뱉어진 말이었다.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까닭이었다. 잘게 떨리는 허벅지 안쪽 살을 보던 에이든이 나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정작 여긴 원하는 게…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묻는 거야.”

손가락 끝이 진의 성기를 약하게 쓸어 올렸다. 뿌리에서부터 선단까지, 주욱 훑어 올리는 손가락에 진이 급히 숨을 삼켰다. 강하게 잡고 흔들고 싶은 충동이 머리에 들어찼다.

에이든은 다 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이불을 쥐고 있던 진의 손을 뜯어내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진 헤니의 오른손 손바닥에 입 맞추던 그는 상처 위를 핥았다. 꽤나 공들여 입 맞추던 에이든이 그 손을 진 헤니의 성기로 가져갔다.

에이든 테일러의 타액으로 축축히 젖은 손바닥은 진저리 쳐질 만큼 뜨거웠다. 한계까지 일어서 있던 것이 제 손에 쥐여지자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에이든은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허락해 줄게.”

“……?”

“아니면 내가 해 주는 게 좋아?”

어쩌지, 내 손은 지금 좀 바빠서.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진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망설이는 그를 내려다보던 에이든 테일러가 진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곤 시범을 보이듯 아래위로 손을 움직였다. 마찰되는 성기에 진 헤니의 입에서 밭은 숨이 터졌다.

“하아… 아!”

“자, 할 수 있지?”

원하던 자극을 한 번 느끼자 진의 눈앞이 흐려졌다. 탁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보는 푸른 눈이 집요했다. 겹쳐 쥐었던 손을 뗀 에이든 테일러는 관람하듯 진 헤니를 훑어 내렸다. 아주 짧은 망설임이 지나고, 진 헤니가 신음하기 시작했다.

“하으…!”

진이 서툰 손길로 자신의 성기를 마찰했다. 에이든은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에이든이 눈을 휘어 웃자, 진의 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성기를 마찰하는 손길이 빨라지고 있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손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허리와 아랫배를 울리는 감각이 커질수록, 진의 숨이 거칠어졌다. 황홀한 감각에 젖은 진의 얼굴이 약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은 솔직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엉망일지.

“아응…!”

진은 고개를 작게 젓다가, 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이거라도,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었다. 에이든이 시선이 점점 짙어지는 걸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미 발가벗겨져 있었지만. 심지어는 벗겨진 채 부끄러운 짓까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저 밑바닥까지 낱낱이 파헤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은 곧 에이든 테일러에 의해 치워졌다. 진은 다시 훤히 드러난 제 얼굴에 고개를 모로 돌렸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행동에 작게 터지던 앓는 소리가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어딜 보는 거야.”

“하… 으응…!”

“날 봐야지.”

에이든은 진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힘주어 고정했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고 있는 진의 아랫배를 쓸었다. 그 손길에 진의 뱃가죽이 멋대로 경련했다.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붉어진 뺨이었지만 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부끄러워 입술을 잔뜩 깨물면서도, 그의 눈은 에이든 테일러의 푸른 눈을 직시했다. 달뜬 열로 풀린 진 헤니의 눈에 황홀함이 감돌았다.

에이든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설령 자신을 아프게 하더라도, 슬프게 하더라도. 진은 그의 눈동자가 차가운 얼음장 같이 느껴지다가도, 느리게 너울거리는 여름날 바다의 표면 같다 느껴졌다. 그리고 둘 중 어느 것이더라도 상관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라면,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하… 아…!”

감각이 고조되고 있었다. 위에서 저를 뚫을 듯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 오싹함이 등허리를 내달렸다. 축축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던 손에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작게 벌어진 입에서 색색거리는 숨이 끊이질 않았다.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에이든의 입술이 기분 좋게 올라갔다.

검은 눈이 품은 열기가 제게로 향하는 것이 좋았다. 그 열기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진의 검은 눈에 박혀있던 에이든의 시선이 천천히 진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들썩이는 허리와 배, 그리고 단단하게 부풀어 손에서 마찰되고 있는 성기까지.

“아…! 하으! 응…!”

“진, 내가 지금 기분이 꽤나 좋아서… 그래서 말하는 건데.”

“하… 하아…! 아아!”

“그냥 들키지만 마.”

위에서 진 헤니를 감상하듯 내려다보던 에이든이 상체를 내렸다. 달큰한 소리가 끊임없이 나는 입 위로, 당장에 키스할 듯 고개를 숙인 그였다. 입술 끝과 끝이 부딪히고, 그 사이로 두 사람의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에이든 테일러의 바지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지익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그는 한참 전부터 한계까지 부풀어 있던 것을 꺼내, 곧 정액을 뱉어낼 것 같은 진 헤니의 것과 함께 그러쥐었다. 예민한 살끼리 비벼지는 감각에 두 사람의 입에서 모두 탄식이 흘렀다.

“그냥, 하… 무슨 수를 쓰든, 들키지만 마.”

“에이든…! 아…!”

“끝까지 아닌 척 해.”

두 사람의 것을 모두 쥔 에이든 테일러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성기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에 진의 몸이 바르작거렸다. 들썩이는 진의 허리에 에이든이 작게 욕을 씹으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인 걸 어떻게든 숨겨.”

“하…! 아, 에… 이든! 나… 으응!”

“뭐라도 하나, 하… 눈에 띄면, 씨발… 그땐 정말 뭔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나… 아! 하윽… 하아! 나올 것 같…! 아아!”

가쁜 숨이 이어지고, 진의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울컥이며 뿜어진 정액이 진 헤니의 배와 가슴팍을 더럽혔다. 몸에 들이차는 감각에 검은 눈이 끝을 모르고 탁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에이든 테일러의 역시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후벼 파일 듯한 시선이 오가고, 에이든 테일러의 손이 조급하게 움직였다. 사정 이후에도 문질러지는 성기에 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뒤로 꺾이며 훤히 드러난 목에는 빨간 생채기가 가득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잇자국이 가득한 진 헤니의 몸을 내려다보며 탄식을 삼켰다. 뱉어지지 못한 말이 낮은 신음과 함께 목구멍을 넘어갔다.

‘끝까지… 아무것도 들키지 마. 날 사랑하는 척해. 끝까지.’

진의 상체가 두 사람의 체액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다.

***

품 안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올려,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커다란 에이든 테일러의 몸이 진 헤니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진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잠든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대낮부터 이어진 행위는 언제 끝났는지 진도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신경 쓰기엔 계속해서 정신이 없었고, 그의 손길과 눈빛에 질질 끌려 다니다 까무룩 잠이 들었으므로.

바깥은 벌써 동이 트고 있는 모양이었다. 커튼이 쳐지지 않은 통유리 창문으로 밝다고 하기엔 어두운, 어둡다고 하기엔 눈부신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진은 멍한 시선으로 한참이나 창문을 바라보다, 품에서 뒤척이는 움직임에 에이든을 내려다봤다. 맨살로 닿아오는 그의 몸은 뜨거웠다. 그 모습을 보는 진 헤니의 표정이 걱정으로 구겨졌다.

그는 아프거나 다친 상태의 에이든 테일러에는 면역이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상태는 무섭기만 했다. 어리고 무력했던 그때와는 많은 게 다른 지금이었지만 진에게는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아픈 에이든을 보는 건.

“병원을 가라니까…….”

여기서 저랑 이럴 게 아니었다. 속상한 얼굴의 진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잠시 주춤했던 손끝이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약간 열이 있는 제가 느끼기에도 에이든의 이마는 불덩이 같았다. 진은 이마에 들러붙은 에이든의 앞머리를 가만 쓸어 올리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

단단한 팔이 진의 허리를 꼬옥 잡고 놓지 않았다. 에이든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좋지 않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상체를 일으키던 진은 제게로 더 붙어오는 몸에 결국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진은 다시 사박거리는 호텔 이불 위로 풀썩 누웠다. 그리곤 바로 앞에 보이는 에이든의 속눈썹을 바라봤다. 기다란 속눈썹을 보며, 진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에이든이 이 방으로 들어오기 직전의 일을.

철컥 소리를 내며 열린 문, 그 사이로 빛이 새어들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진은 결국 손잡이를 놓았다. 나무로 된 문이 무거운 소음을 만들며 닫혔다. 그 앞에 선 진의 얼굴엔 옅은 체념이 떠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아니, 나가선 안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나갔다간 다신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 방에, 에이든 테일러에게…. 그에게서 도망치거나,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속할 곳은 에이든 테일러뿐이었다.

잠시나마 온몸에 끼쳤던 따뜻한 빛은 금방 사라졌다. 다시 방 안의 차디찬 적막이 진을 감쌌다. 그 어떤 것도 온전치 않은 이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만이 제게 허락된 일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일은 뭔가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가 알아서 저를 기억해 줄 때까지 넋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내일은 꼭 예전 일들에 대해서 에이든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때가 기억이 난다면 지금은 믿기지 않는 것들도 다 이해가 될 터였다.

7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살아온 자신을, LA에 와서 계속 그의 주변만 맴돌아야 했던 자신을 다… 이해해 줄 거였다. 그리고 왜 그때 당시가 유괴가 아닌지도… 다 알게 될 거라고, 진이 생각했다.

“그때 분명 약속했으면서…….”

서운한 목소리였다. 그 말과 함께 진은 흐린 낯으로 에이든의 왼쪽 어깨를 바라봤다. 새까맣게 어깨와 쇄골 부근을 덮고 있는 것은 사실 에이든과 썩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사납고 위험한 느낌이 지금의 그와 비슷했다.

하지만 진 헤니는 타투 아래에 어떤 게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가까이서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타투 아래, 길게 찢긴 상처를. 위협적으로 바깥을 두르고 있는 검은 잉크는 그걸 가려 덮으려 노력한 흔적이었다.

진이 조심스레 손을 상처 위로 가져갔다.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한 건지 살결이 울퉁불퉁했다. 어떻게든 아물고자 애를 썼을 여린 살이 측은해 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슬며시 상처를 쓸던 손은 뒤척이는 에이든에 잠시 멈췄다. 깨웠나 싶어 얼어있던 진은 품안에 파고들어오는 커다란 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 있던 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옅게 웃으며 그를 품에 안았다. 자신보다 조금 더 큰 에이든이 유독 아이 같아 보이는 새벽이었다. 제 허리를 꼬옥 껴안고 있는 그를 보며 진 헤니가 말했다.

“나는… 약속한 거 하나도 안 까먹었어, 에이든…….”

“…….”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기로 했으니까.”

완전히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의 짧은 순간, 진 헤니는 에이든 테일러의 손과 손톱에 정성스레 입 맞췄다. 그리곤 무언가 떠오른 낯으로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품에서 떨어지지 않는 에이든 테일러 때문에 어렵사리 빨간 알약을 꺼낸 진이, 아직도 땀을 쏟고 있는 그를 내려다봤다. 지금 당장 가진 게 이것밖에 없지만, 이거라도 그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

잠시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진은 비워져 있는 옆자리를 보며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머리가 산발이었다. 그는 반쯤 덜 떠진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내렸다.

‘몸은 괜찮아졌는지 모르겠네…….’

진 헤니는 목에 검붉은 멍울과 빨간 잇자국을 여러 개 달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에이든 테일러의 걱정을 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익숙해진 손길로 새 샤워가운을 꺼내 입었다. 이 방에 갇힌 첫날, 옷은 걸레짝이 된 지 오래였으니 그가 마땅히 걸칠 거라곤 가운뿐이었다.

산발인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내리며 진이 생각했다. 오늘은 꼭 나디아와 전화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일이 있는지, 아버지께 물어봐야 했으니까. 사실 직접 전화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긴 싫어…….”

진 헤니의 검은 눈이 고집스러웠다. 그리고 어차피 아버지도 자신과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서로에게 불편한 통화일 테니, 나디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켜자, 배터리는 7퍼센트 정도가 남아 있었다. 진이 옅게 인상을 썼다. 잘못하다간 제대로 말도 못하고 끊기겠는데… 어쩌지…? 차라리 메시지를 달라고 할까…?

진이 고민하는 동안 배터리는 6퍼센트로 떨어졌다. 그 불안한 꼴을 보며 고민하던 진은 갑자기 열리는 문에 허겁지겁 핸드폰을 서랍에 던져 넣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뒷목에 서늘함이 지나갔다.

“…….”

“…….”

침대 옆에 어색하게 서 있던 진은 저를 보고 있는 푸른 눈에 당황해야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긴장한 기색의 진 헤니를 가만 쳐다보고 있었다. 남색 수트를 입고 있는 그는 한쪽 손에 작은 스테인레스 트레이를 든 채였다.

“뭘 그렇게 놀라?”

“…….”

에이든 테일러는 연고며 소독약이 들어 있는 트레이를 유리 테이블 위로 올려 두었다. 진을 살피는 푸른 눈이 가늘게 뜨였다. 진 헤니는 낭패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은 지금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그냥… 자연스럽게 말할걸. 그냥 섬에 같이 살던 친구한테 그날 일을 물어보려 한 거라 말할걸. 허겁지겁 숨기니 정말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돼 버려 난감했다.

정적이 계속 흘렀다. 당황한 낯으로 한참 서 있던 진은 뭐라도 말하려 어렵사리 입을 뗐다.

“어, 어제 열 많이 나던데 몸… 은 괜찮아?”

“…….”

“병원에는…….”

“왜 말을 돌리는지 모르겠네.”

결국 에이든 테일러의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약이 담긴 트레이만 살짝 놓고 가려던 그의 계획이 조금 변경됐다. 에이든이 진 헤니에게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냐, 어차피 핸드폰에는 알렉스랑 나디아 전화번호 정도밖에 없고… 의심 살 만한 전화도 한 적 없으니까 제대로 말하는 게…….

“에이든, 그게…….”

제게 가깝게 다가선 에이든이 침대와 서랍을 눈으로 쭈욱 훑다, 서랍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진동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에이든 테일러의 주머니에서.

서랍을 열려던 에이든은 동작을 멈추고, 제 자켓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진 헤니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눈초리는 거두지 않은 채였다.

“네, 곧 가요.”

“…….”

에이든은 전화를 끊으며 왼쪽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바로 출발해도 늦는 시간이었다. 속으로 작게 혀를 차던 그가 핸드폰을 자켓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진에게 말했다.

“약은 쓰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아, 응…….”

진의 목을 힐끗 보던 그가 뒤돌아섰다. 괜히 손가락 끝만 쥐어뜯고 있던 진이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안도했다. 지금 자신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말주변이 없는 제가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긴장되던 마음이 조금 놓이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큰 보폭으로 진에게서 멀어지고, 문을 막 열려고 할 때쯤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

“…….”

불행하게도 서랍 안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두 사람 대신 그 소음이 넓은 공간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나무판자가 핸드폰의 진동에 요란하게도 울어댔다.

“…….”

“…….”

문 앞에 가만 멈춰서있던 에이든 테일러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진을 바라봤다.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하던 그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리곤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진은 서늘한 낯의 그를 보며 급히 입을 뗐다.

“그게… 어릴 때 섬에 같이 살던 친구한테 연락을 해서 뭘 좀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그냥 갑자기 놀라서 나도 모르게…”

“내가 분명 배터리가 나간 걸 확인했던 것 같은데…….”

“나 핸드폰 번호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내 번호 아는 사람도 친구들밖에 없어…!”

진이 허둥지둥 설명을 하든 말든, 에이든은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서랍이 거칠게 열렸다. 핸드폰은 에이든이 서랍을 열자마자 그 진동을 멈췄다. 화면이 부재중 전화를 알리고 있었다.

「발신번호 표시제한」

“어릴 때 친구라고?”

“……?”

“친구끼리 번호를 숨겨서 전화하진 않을 테고…….”

뭐, 확인해 보면 될 일이지.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에이든 테일러가 삐뚤게 웃었다. 에이든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은 눈 가득 당황이 서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번호 몇 자리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규칙을 가진 숫자들과 그 뒤로 진 헤니의 핸드폰 번호가 이어졌다. 숫자를 제대로 입력했는지 확인한 에이든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발신번호 표시제한이라니…. 한 번도 그런 전화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진은 더 이상 오해를 사기 전에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다.

“에이든, 나 정말,”

[ 네, 릴리 콜린스입니다. ]

에이든 테일러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때 잠시 스쳐지나갔던 레오나 테일러 비서의 목소리였다. 무표정한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차가운 낯으로 아무 말 않던 그는 정말 난감하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였다.

“그쪽이랑은 끈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었나 보네.”

그쪽…? 당황한 얼굴이었던 진이 그 말을 알아듣곤 얼굴을 굳혔다. 그가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이곳에 있는 것도, 자신을 시험하는 것들도 견딜 수 있었지만 이건 좀 달랐다. 진은 자꾸만 제 진심을 왜곡하는 일들에 마음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실이라 생각하는 에이든 역시 야속하기만 했다. 아닌데, 정말 아닌데.

“에이든,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다른 거 다 떠나서 그냥 들키지만 말라고 했잖아, 그게 많이 어려워?”

푸른 눈에 실망이 떠올랐다. 진 헤니가 거짓이란 증거들, 그게 하나씩 눈에 보일 때마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손끝이 저릴 만큼 화가 났고, 동시에 온몸의 맥이 탁 풀릴 만큼 힘이 빠졌다.

“…날 갖고 놀면 재밌어?”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과 함께 뱉어진 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조금이라도 더 침대에 머물고 싶다 생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 삐뚠 웃음을 입에 건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어젯밤까지 이로 짓이겨놓은 여린 살에는 붉은 상처가 가득했다. 엄지손가락으로 가만 그 생채기를 쓸며 에이든이 말했다.

“내가 널 이 이상으로 어쩌지 못한다는 거 알아서, 그래서 그러는 거지?”

“제발 내 말 좀,”

“그러게… 나도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네.”

차라리 없애 버리는 게 편할 수도 있었다. 없애 버리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이든 테일러는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스스로가 생각해 놓고도 참을 수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어제 진 헤니의 부재를 확인했을 때,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 뒷목을 기어 다녔다.

여태 살아온 것처럼 거슬리면 없애고, 기분이 나쁘면 그대로 갚아 주면 되는데 왜 자꾸 그게 안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를 휘두르는 게 아닌, 휘둘리는 기분은 언제나 더러웠다. 제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몇몇 엿 같은 존재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푸른 눈이 서늘해졌다.

차가운 표정의 에이든이 왼쪽 손목의 시계를 풀며 말을 이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였다.

“분명 이 방에 드나드는 새끼가 하나였던 것 같은데…….”

“……?”

“진, 거짓말이란 증거가 눈에 띌 때마다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기억해.”

그렇게 말하며 에이든 테일러는 제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그가 목에 매고 있던 넥타이가 신경질적으로 풀어지고 있었다.

***

“내가 부탁해서 그런 거야…! 닉은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충전해 달라고…”

“아, 이 새끼 이름이 닉이야? 이름까지 알고… 생각보다 친한 사인가 보네.”

진 헤니는 필사적으로 에이든 테일러를 말리는 중이었다. 그의 팔이며 몸을 뒤로 잡아끌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호텔 직원을 바라보며 삐뚤게 웃었다. 직원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분명 손바닥으로 몇 대 맞았을 뿐이었는데, 뺨이 푸르게 멍들고 입술이 죄다 터져 피가 질질 나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올 때 조건이 뭔지 말해 봐.”

“안에… 있는 사람과 마, 말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잘 아네.”

근데 왜 그랬지? 에이든 테일러는 그렇게 말하며 닉의 멱살을 끌어올렸다. 억지로 일으켜지는 몸에 닉 젠슨이 몸을 버둥거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에이든의 눈이 사나웠다.

“다시 한 번 말해 볼까?”

“안에 있는 사람과 말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직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뺨을 맞은 건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억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의 충격이었다. 바닥에 다시 쓰러진 닉은 턱이 부서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셔츠의 소매를 접더니, 다시 호텔 직원의 멱살을 끌어올렸다. 계속되는 구타에 그의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닉은 잘 벌어지지도 않는 입을 벌려 어떻게든 용서를 구하려 했다. 죄다 찢어진 입에서 발음이 질질 샜다.

“죄, 죄송… 죄송합…….”

하지만 그 사과가 무색하게 다시 한 번 커다란 손이 위로 들려올라갔다. 닉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턱이 부서질 거라 생각했다. 제 얼굴을 향해 오는 손바닥을 보던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흔들거리는 어금니를 잔뜩 문 채였다.

“……?”

철썩하는 소리가 났음에도 뺨에 느껴진 충격은 없었다. 닉은 슬며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크게 뜨인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었다. 그의 푸른 눈엔 당황이 가득했다.

“너…….”

“…….”

진은 골을 울리는 충격에 잠시 휘청였다. 귀에서 찢어질 듯한 이명이 울렸다.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다시 초점을 잡았다. 입 안 여린 살점들이 터져 핏물을 뱉어내고, 그의 코에선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방바닥에 고였다. 모로 돌려진 채 한참을 돌아오지 못하던 진의 고개가 앞을 향했다. 흐린 검은 눈이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아무 잘못 없어.”

“…….”

“내보내 줘.”

단호한 목소리였다. 진은 샤워가운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말했다. 흰 색의 가운이 검붉게 젖고 있었다.

“얼른 나가요…….”

닉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해 봤자 역효과만 난단 걸 알았다. 진은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호텔직원은 에이든 테일러의 눈치를 보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둥대던 그가 급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방 안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진의 얼굴과 샤워가운을 엉망으로 적시고 있는 피를 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크게 뜨인 푸른 눈이 진의 터진 입술을 살폈다. 신경질이 나고 있었다.

“씨발, 그러니까 거길 왜 끼어들어…!”

“…….”

진은 코피를 닦으며 지친 표정을 했다. 어젯밤, 아니… 몇 시간 전까지 그의 머리칼을 넘기다 잠이 든 게 다 꿈같았다. 하찮고 허무맹랑한 꿈. 에이든은 제 핸드폰에 걸려온 전화가 거짓말인 증거라 말했다. 거짓말이 아닌데 왜… 왜 그런 증거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진은 입안의 핏물을 삼키며 에이든에게 물었다.

“왜… 내 말은 하나도 안 믿어 줘…?”

흐리게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에 원망과 슬픔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한 번 입 밖으로 뱉어진 말은 생각보다 더 큰 파장을 만들며 진 헤니의 서러움을 부추겼다. 갇히라면 갇힐 수 있었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내놓으라면 뭐든지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왜 자꾸만….

“거짓말이 아닌데 왜 자꾸 거짓말이라고 해!”

결국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해도 결국 거짓말이라고 할 거면서, 어떻게 해도 결국 날 믿지 않을 거면서. 서러웠다. 원망스러웠다.

지친 목소리로 소리치는 진을 바라보며 에이든이 인상을 구겼다. 그 역시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진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뭐…?”

에이든 테일러는 여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을 쫓으며, 가져온 사람. 나머지는 다 헛된 것들일 뿐이었다. 그런 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건, 그에게 있어 실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짓말이란 건 다 눈으로 보이는데. 네 말은, 네가 말하는 그 진심은 하나도 확인할 수가 없잖아.”

에이든에게 진이 가깝게 다가섰다. 표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눈으로 보여, 에이든…!”

“…….”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나한테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런 게 다 어떻게 눈으로 보여!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

소리치는 목소리가 처절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피와 눈물로 엉망이 된 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어떻게 눈에 안 보이는 걸 믿어?”

“…….”

“어떻게…?”

“제발… 에이든, 내가… 내가 널 많이 사랑해.”

절망적인 고백이었다. 제 셔츠를 그러쥐며 가깝게 다가오는 진 헤니는 절박한 얼굴이었다. 검은 눈에선 눈물이 끝도 없이 흘렀다.

“그 바다에서 너를 건져 올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내가 널 많이 사랑해.”

“…….”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에이든, 나는 바깥을 하나도 몰라서… 하나도 모르게 커서 네가 말한 은행 기록도 뭣도, 아무것도 없어…! 너도 알잖아, 너도…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고작 유리나 모으는 일이었던 거… 다 알잖아!”

왜 기억을 못해, 왜…! 진은 많이 답답해 보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엉엉 울며 말하는 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 에이든, 이 유리 좀 봐. 파란색인데 회색빛이 돌아. 네 눈동자 색이랑 비슷하다, 그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언젠가 들었던 음성이 웅웅거리며 뒷머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진 헤니에게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널 찾아오라고 했잖아. 나랑 약속했잖아…! 그래서 나는 전부 다 버리고 너한테 왔어… 전부 다!”

“…….”

- 꼭 만나러 와야 해.

- 응! 그럴게. 꼭 갈게!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한 발자국 더 도망쳤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막혀오려는 숨에 작게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만…….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고, 숨이 막혀 곧 죽을 것처럼 바닥을 기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아버지랑 싸우고 집밖으로 나간 날… 그날, 에이든 네가 약속했잖아.”

“그만…….”

“너를 찾아오면 꼭,”

“닥쳐.”

더듬더듬 이어지던 말은 에이든 테일러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멈췄다. 진의 절박한 목소리는 멈췄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볼을 적셨다. 커다랗게 떠진 검은 눈에서 눈물이 세 갈래, 네 갈래를 만들며 흘렀다.

“그럼…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들어 주지도, 믿어 주지도 않는 너한테 내가…….”

“…….”

“뭘 하면 되는 건데…? 눈에 보이는 게 뭔데…?”

그게 대체 뭔데, 에이든…? 에이든 테일러는 더듬더듬 이어지는 진 헤니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푸른 눈은 조금 멍해 보였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진 헤니가 말하는 그 사랑이란 게 눈에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사랑이란 게 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 걔가 널 진짜로 사랑하는 것 같아? 너를?

- 십만 달러 정도면 손바닥 찢기는 건 우스울 수도 있잖아? 잘 아는 애가 왜 그래?

저를 한껏 비웃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진 헤니가 너를 진짜로 사랑하는 것 같냐는 그 말. 다른 누구도 아닌 에이든 테일러를. 나처럼… 제정신이 아닌 미친 새끼를.

그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의 말처럼, 차라리 십만 달러를 받고 손바닥을 내어주는 게 더 쉬운 일일 수 있단 걸.

에이든 테일러는 한참을 굳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저 사랑이란 걸 확인할 수 있는지, 머리가 복잡했다. 에이든이 침묵할수록 진의 흐느낌이 거세지고 있었다. 가라앉은 낯의 에이든이 진에게 물었다.

“네가 하는 그 사랑이란 게…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는 건데?”

그가 아는 방법이라곤 이딴 것뿐이었다. 상응하는 대가와 가치를 보이는 것. 자신을 사랑한다는 진 헤니가, 어디까지 스스로를 버릴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곁에 머무는지를 시험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

한스 테일러는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약속 상대가 건방지게도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헛웃음을 뱉으며 입고 있던 수트의 자켓을 벗었다. 옆에 서 있던 칼튼 윌리엄스는 능숙한 손길로 그 옷을 받아 정리하며 말했다.

“에이든 님은 다시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그 새끼가 일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군. 빅토르에게는 사과의 의미로 뭐라도 하나 보내게.”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명줄을 부여잡고는 있지만 사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한스 테일러는 부쩍 늘어난 마른기침에 계획해 둔 것들을 서두르는 중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를 어떻게든 여기저기에 선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요새는 부쩍 고분고분하게 그런 자리에 동행하나 싶더니만…….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가 어디서 뭔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아보도록 해.”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지금 뭔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건 에이든 님이 아닙니다.”

서랍의 맨 아래 칸, 작게 설치된 비밀번호 키패드를 누르던 한스 테일러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의 한쪽 눈썹이 비틀려 올라가는 걸 확인한 칼튼은, 앞으로 일어날 성가신 일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늘 레오나 테일러가 마이클 채플린을 만난 것 같습니다.”

마이클 채플린, 유언장 작성을 위해 불렀던 변호사였다. 한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비밀번호 여덟 자리를 입력했다. 탁 소리를 내며 열린 서랍 안에는 밀봉된 그의 유언장과 약병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눈치 챘나 보군.”

“아마 쉽게 설득은 못했을 겁니다. 워낙 꼬장꼬장한 데다 머리 굴리는 건 빠른 양반이니.”

“그래, 똑똑한 머린데 잘 간수해야지. 목이 잘리면 달고 있기 힘들지 않은가.”

그 말을 끝으로 한스 테일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약병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아련한 추억을 이야기하듯, 온화한 미소를 입에 걸며 말했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

“자기 것이 아닌 걸, 자기 거라 생각하는 그 오만함. 주제를 잘 알려주며 키웠다 생각했는데… 내가 아직 아비로는 많이 부족한 모양이야.”

그는 정말 스스로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있었다. 조금 더 확실히 알려줬어야 했다. 꿈조차 꾸지 못하게끔 했어야 했다. 그게 레오나 테일러를 위하는 길이었을 거라 생각하는 한스 테일러였다.

차라리 아예 희망조차 없도록 만들었어야, 그녀도 제 주제를 알고 힘든 삶을 살지 않았을 거였다. 그냥 고분고분히 다른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과 결혼하게끔 키워서, 순종적이고 안온한 삶을 살도록 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군.”

한스 테일러는 턱을 쓸며 고민하는 낯을 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쓸모가 많은 물건이더라도 제 자리를 침범한다면 버려야 마땅했다. 무엇보다…….

“빠르게 처리해야 뒷일이 복잡해지지 않으니.”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약병을 열었다. 붉은색의 심장약은 이내 입 안으로 들어가 삼켜졌다. 약을 삼킨 한스 테일러의 낯은 서늘했다.

서랍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닫혔다. 밀봉돼 있는 유언장은 다시 그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스 테일러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그 약병들도 함께.

“잘 보내 주게.”

내가 아주 미안한 만큼, 잘 예우를 갖춰서, 최대한 확실하게 말이야.

***

레오나 테일러는 저와는 눈도 맞추지 않고, 산처럼 쌓여진 문서만 들여다보고 있는 마이클 채플린 앞에 앉아 있었다. 두 번째 찾은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레오나는 거지같은 찬밥 취급을 받는 중이었다.

그녀는 유언 공증 증서의 확인을 위해 마이클 채플린을 찾아온 상황이었다. 비밀로 작성된 그걸, 먼저 뜯어 보고 고칠 건 고쳐야 했다.

“멀리 보셔야죠, 변호사님. 곧 죽을 예정이라 유언장 작성한 사람 끈을, 계속 잡고 계실 거예요?”

“…….”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거면 다른 걸 말해 보세요. 맞춰 드릴 테니까요.”

깡마른 늙은 변호사는 그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꽤나 고지식해 보이는 그는 쓰고 있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무감하게 말했다.

“그걸 봐도 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요.”

“그건 일단 제가 보고 나서 같이 말씀을 나눠 볼까요?”

“어디 가서 가짜 유언장이나 만들지 왜 이렇게 귀찮게,”

“변호사님, 제가 그렇게 병신으로 보이세요?”

레오나 테일러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눈을 예쁘게 접어 웃던 그녀는 서늘한 눈빛으로 제 앞의 늙은 남자를 바라봤다.

“유언장에 그딴 장치도 안 해 놓을 새끼가 아니니까… 제가 여기 와서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

“다른 유언장은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 박아 놨을 텐데 왜 씨발 모른 척을 하지?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사나워지는 목소리에도 마이클 채플린은 제 앞에 놓인 서류만 훑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점점 기분이 좆같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꽤나 신사적으로 접근하려던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한심해졌다. 더 있다가는 유언장을 뜯어보거나 고치기도 전에 저 새끼를 죽일 것 같으니, 오늘은 이쯤 해야 했다.

“다시 왔을 때는 생각이 좀 달라지셨으면 좋겠네요.”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거요.”

“제가요? 왜요?”

“그 유언장을 보고 내용이 뭔지 알게 된다 해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오.”

당신은 안 돼. 레오나 테일러는 단호하게 덧붙여진 한마디에 낯을 굳혔다. 그녀의 턱이 어금니를 짓씹었다. 어이가 없었다. 한동안 살의 가득한 눈으로 늙은 남자를 보던 그녀는 헛웃음을 켰다. 입에 삐뚠 미소가 걸렸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될지 안 될지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결정해.”

“…….”

“하나 알아두실 게 있는데, 저도 보고 배운 게 있어서 인내심이 그렇게 많진 않아요.”

그럼 또 봬요. 레오나 테일러는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릴리 콜린스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 제 주인의 뒤를 따랐다. 푸른 눈에는 분노가 가득해서 릴리는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뭐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아, 진 헤니의 위치는 완전히 확보했습니다.”

“그래요?”

“네, 그때 운전기사가 말했던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있었습니다. 핸드폰이 켜져서 마지막으로 확인 마쳤습니다.”

두 사람은 롤스로이스가 주차된 곳을 향해 빠르게 걷고 있었다. 기쁜 소식에도 레오나 테일러의 얼굴은 계속해서 굳어 있었다. 릴리는 작게 아랫입술을 씹더니 좋은 생각이 난 사람처럼 낯빛을 밝혔다.

“아, 그리고…….”

“……?”

그 뒤로 이어진 말에 레오나는 걸음을 멈췄다. 말을 마친 릴리는 작게 제 주인의 눈치를 봤다. 레오나 테일러는 릴리 콜린스를 빤히 쳐다봤다. 무언가 가늠해 보듯이. 푸른 눈이 저보다 작고 마른 비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그저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

제 주인이 어떤 게 필요하다 느끼기도 전에, 그 필요와 부족을 해소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일이었다. 적어도 릴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것이 제 존재의 이유이며 레오나 테일러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어요?”

“예?”

“집에 누구 아파요? 아니면 빚이 많다거나.”

“아뇨, 아닙니다…!”

릴리가 당황한 낯으로 손사래를 쳤다. 레오나 테일러의 눈썹이 삐뚤게 올라갔다. 잠시 차 앞에 멈춰 릴리 콜린스를 보던 그녀는 비린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뭐, 돈이 크게 필요하면 말을 해요. 그 정도는 릴리한테 안 아까우니까.”

“…….”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비서는 사실 많지 않거든요.”

레오나가 웃으며 차에 몸을 실었다. 릴리 콜린스는 큰돈이라는 단어보다 그게 아깝지 않다는 말에 환히 웃었다. 밝게 웃으며 차 뒷좌석에 함께 올라탄 그녀는 조용히 수첩을 꺼내 해야 할 일을 적었다. 허락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럼 릴리가 말한 것들,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진 헤니는…….”

출발하는 차 안, 레오나 테일러는 제 순종적인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무심하게 차창을 바라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말을 멈췄다. 마이클 채플린의 사무실에서부터 쌓여오던 사나운 감정이, 커다랗게 떠진 푸른 눈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하… 씨팔, 이 개새끼들이…!”

커다란 화물용 트럭은 표적을 향해 최대속도로 달렸다. 두 차의 충돌까지 걸린 찰나의 시간, 그 뒤로 이어진 큰 굉음이 LA 다운타운 한복판을 울리고 있었다.

***

큰 경적소리와 함께 배가 멈췄다. 나디아 놀즈는 얼마 있지 않은 짐을 살뜰히 챙겨 배에서 몸을 내렸다. 나디아와 함께 내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워낙 외진 섬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엔 나디아 홀로 배에 타 있어야 했다.

어두워진 섬은 길을 찾기 쉽지 않았지만, 나디아는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성큼성큼 걸었다. 섬은 나디아의 속도 모르고 평화롭고, 평온했다. 한밤중의 섬은 오싹할 만큼 아름다웠다. 너울거리는 검은 바다의 표면에 별과 밤하늘이 부서지고 있었다.

“진 헤니 이 망할 새끼, 이 거지 같은 새끼!”

나디아는 모래와 자갈을 푹푹 밟으며 중얼거렸다. 진 헤니의 열여덟 살 생일, 그가 이 바닷가에 앉아 나디아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나고 있었다. 그때도 바다가 오늘처럼 오묘한 박자로 춤추던 밤이었다.

- 나디아, 나는 사실 섬이 싫다거나… 그렇진 않아. 오늘도 봐. 저런 바다를 어디에서 또 보겠어.

그는 바닥의 모래를 가만 쓸며 옅게 웃었다. 곱게 바스라지는 것들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렀다.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 그리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들도 이해 못하는 거 아니야. 바깥은 여기랑 다르게 복잡할 거고, 또… 위험한 일들도 많단 거 알아.

- 그래, 너 같은 멍청이한테는 좀 힘든 곳이지.

그 말에 피식 웃던 진은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모래를 보다, 작게 주먹을 쥐었다. 슬쩍 펴 본 손바닥에는 가장 고운 모래들만 남아 반짝거렸다.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맞아 곱게 부서진 모래들. 가장 반짝이는 것들은 언제나 가장 애처로운 것들이었다.

- 그곳의 바다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여기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해도… 그래도 그 애가 있는 곳이라면 괜찮아.

- …….

- 나 혼자 이곳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것보다, 그 애랑 같이… 그 애가 있는 불안하고 위험한 곳에서 함께 지내고 싶어. 지금도… 많이 보고 싶어…….

그리고 많이 걱정돼…….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낯이 슬펐다. 나디아는 흐리게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다, 모래로 더러워진 진의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표정에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득했다. 진은 손바닥을 때리는 건지, 모래를 털어 주는 건지 모를 그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하, 시발. 이 나디아 놀즈가 너의 열여덟 살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다가…….

- ……?

- 어쩔 수 없지. 너의 사랑을 응원한다, 진.

그 길로 진을 질질 끌고 그의 집으로 가서는, 마치 결혼 허락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비장하게 허락을 구했다. 진은 수영을 해야만 하니까, 바깥으로 보내 주시라고. 그날 나디아는 별별 쇼를 다 해야만 했다. 진 헤니를 위한 최후의 변론이나 다름없었다.

“씨발, 내가 대가리가 어떻게 됐던 거지. 응원을 하기는 개뿔!”

예전 일을 떠올리던 나디아의 눈에 너울너울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아냐, 울면 안 돼. 아주머니가 걱정하실 테니까, 울면 안…….

“나디아? 나디아 맞니?”

“…….”

나디아는 진 헤니네 집 대문을 바라봤다. 그곳은 작은 알전구들이 여기저기 걸려,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래, 진과 똑닮은 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밤공기를 쐬러 나왔던 그녀는 섬을 떠났던 나디아가 이곳에 있음에 반가운 낯을 했다.

“아주머니…….”

“어쩐 일로 섬에 왔니? 어머니 때문에? 아직도 많이 아프시니…?”

“아뇨, 아니에요! 이제 괜찮으세요.”

진의 어머니, 수잔은 맑게 웃으며 나디아의 손을 그러잡았다. 다행이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디아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울지 않으려 노력하던 나디아는 그 따뜻한 손길에 결국 표정이 무너졌다.

“나디아…?”

“…….”

눈물이 엉망으로 뺨을 적셨다. 제 손을 꼭 잡고 우는 나디아를 보던 수잔이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른 사람처럼 낯을 굳혔다.

“나디아, 우리 진한테 무슨 일 있는 거니…?!”

“아주머니…….”

말도 못하고 줄줄 울기만 하던 나디아는 뒤에서 등장한 커다란 인영에 눈을 꼬옥 감았다.

“진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화가 난 얼굴,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나온 그 사람은 진의 아버지… 안토니오 헤니였다.

***

나디아는 중간에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수잔의 표정은 많이 차가웠다. 그래서 안토니오 헤니는 아무 말 없이 빤히, 질책하듯 바라보는 시선을 견뎌야만 했다.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제 아내의 검은 눈은 오늘처럼 차가운 빛을 뿜는 날이 드물었다. 문제는 한 번 차가워진 이상 쉽게 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별일도 아니고, 걱정할까 봐 말을 하지 않았던 거요, 수잔.”

“별일이 아닌가요?”

안토니오 헤니는 곤란한 얼굴이었다. 나디아는 평소 괄괄한 데다 고집 세던 그가 찍소리도 못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혐의로 풀려난 일이라…….”

“그럼 뭐가 별일인가요? 아니면 저 같은 건 몰라도 된다 그런 말인가요?”

“수잔…!”

“당신 때문에 애가 곤란해졌다잖아요! 그런 일이 있단 걸 처음부터 알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에요!”

엄밀히 말하면 안토니오 헤니 탓은 아니었다. 수잔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이 답답하고 화가 나 괜히 그를 탓하게 됐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자신한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가 있는지……. 수잔 헤니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나디아에게 말했다.

“나디아, 그 아이가 우리랑 한 달 동안 있었던 건 맞단다. 당연히 유괴 같은 건 아니었지만…….”

“…….”

“어떻게 보면…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 할 말은 없구나.”

“……?”

나디아는 수잔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아한 표정을 했다. 돌려보내지 않았다니? 수잔은 충격으로 크게 떠진 나디아의 눈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처음에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 아이의 집으로 여러 번 전화를 했었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메시지도 여러 번 남겼었고…….”

하지만 전화가 다시 오질 않더구나. 수잔이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화가 다시 오지 않는 것에 덧붙여, 가끔은 상대방 쪽에서 전화에 응답하더라도 아무 말 없이 전화가 끊기곤 했다. 마치 전화를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가족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경찰서나 구조대에 연락하셨어도 됐잖아요.”

나디아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수잔은 그녀의 물음에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경찰서나 구조대에 연락을 해서 빨리 데려가게 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진 뒤였단다. 바로 돌려보내기엔…….”

수잔은 마음이 복잡했다. 열세 살, 그때의 제 아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눈 한가득 걱정을 품고 와서는 자신에게만 살짝 말했던 말들…….

- 엄마, 에이든을 지켜 줘야 해요…….

어린 아들의 손이 꽤나 단호하게 제 손을 맞잡았던 때. 간절하게 떠진 검은 눈은 그 어떤 때보다 순수했고, 그 어떤 때보다 고집스러웠다.

-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걸 싫어할 거예요…. 엄마도 그냥 모른 척해 주세요, 네?

- 그래도 엄마가 확인을 해야…….

- 그냥… 저를 믿어 주시면 안 돼요? 보내야 되는 거 알아요…! 아는데… 조금이라도 더 여기서 지내면 안 돼요?

저를 믿어 달라 말하던 어린 진은 눈물이 나려는지 팔로 슥슥 눈가를 문댔다. 수잔은 콧잔등이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고집스럽게 입술을 꾸욱 물고 있는 제 아들을 바라봤다.

-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떼를 썼던 게, 그것 때문이니?

- …….

- 진, 네 말이 다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있을 권리나 자격은 없단다.

엄하게 꾸짖는 목소리에 진의 고개가 작게 숙여졌다. 서러운지 입꼬리가 자꾸 아래로 향했다. 수잔은 그런 진을 보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 보내야 되는 걸 안다고 했지, 진?

- 네…….

- 집으로 빨리 돌려보내지 않는 건 큰 잘못이란다. 네가 나중에 크게 혼날 수도 있는데 괜찮니?

-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잘못이라는 말에 죄책감이 드는지 잠시 머뭇거린 진이었지만, 이내 분명히 말했다. 그는 많은 선택지와 죄책감들 사이에서 가장 옳고, 가장 소중한 것을 골라낼 줄 아는 아이였다. 수잔은 제게 대답하는 어린 아들을 보며 따스히 웃었다. 그리곤 아들의 작은 머리통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 그래, 진… 약속은 어기면 안 되지.

그제야 마음이 놓인 건지 제 품에서 엉엉 목 놓아 울던 열세 살의 진이었다.

“나디아, 사실 그때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지금도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더군다나 우리 진이 그날들 때문에 곤란해졌다면 그른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

“…….”

“하지만 그 이야기들을 듣고 선뜻… 그런… 가족들한테 보내기가 쉽지 않았어.”

“그 이야기라뇨?”

수잔은 가라앉은 낯으로 말했다.

“아이가… 학대를 받고 있는 것 같았어.”

***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온 나디아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수잔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집 문을 나서던 나디아는 채비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진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LA로 가시게요?”

“그래, 지금 당장 진을 데려,”

“아니, 안토니오 당신은 안 가요.”

단호한 목소리에 안토니오가 움찔했지만, 이내 인상을 쓰고 제 아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더 늦기 전에 데려오는 게 맞아, 수잔.”

“나디아, 진이 섬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한 적 있었니?”

“어… 아뇨.”

수잔은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제 남편을 바라봤다. 하지만 안토니오도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커진 채였다.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이렇게 된 이상 고집을 더 받아 줄 순 없어!”

“고집은 당신이 피우는 거죠. 어떤 선택이든 결과든, 그 아이의 몫이에요. 당신은 그냥 뒤에서 가만히 있다가, 그 아이가 돌아오고 싶다고 하면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역할이고요.”

수잔의 말은 냉정했다. 당장에 제 아들을 찾아오겠다는 안토니오보다 사실 그녀가 더 엄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행동과 선택에 대한 결과는 오롯이 그 아이의 것이었다. 물론 진에게 그저 나쁜 일이 생겼다, 정도로만 말했으니 그녀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거겠지만.

나디아는 두 사람을 보며 안토니오와 수잔을 적당히 섞으면 진 헤니가 나올 거라 확신했다. 아저씨의 고집과 수잔 아주머니의 다정함.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디아는 등 뒤에서 들리는 수잔의 서늘한 목소리에 등을 움찔했다.

“그리고 당신은 나랑 할 얘기가 남았잖아요, 안토니오.”

“…….”

“…당장 들어와.”

아직 싸늘한 진 헤니를 본 적은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가 제 집으로 향했다. 나디아는 최대한 헤니 부부를 모른 척하며 알렉스 그레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섬에 와서 두 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야. 진한테는 다시 연락 없었어?」

「없었어. 핸드폰도 다시 꺼졌고 - 알렉스 그레이」

다시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쉬며 메시지 하나를 더 전송했다.

「오늘 얘기를 들었는데 진도 유괴 이야기는 아예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일단 메시지로 진한테 말해 놓을게. 언제든 켜지면 읽을 수 있게.」

지금까지 들었던 긴긴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해진 나디아였다.

***

집 안 꼴이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다 깨진 재떨이와 글라스, 술병이 나뒹굴었다. 언제나 깨끗하고 생활감이 없던 맨션은 전례 없이 지저분하고 난장판이었다.

- 내가 아버지랑 싸우고 집밖으로 나간 날… 그날, 에이든 네가 약속했잖아.

“하, 씨발…!”

어제 들었던 진 헤니의 목소리가 골을 울리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당장에라도 제 뇌를 후벼파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손이 형편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 에이든, 여기가 내 유리무덤이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반짝이는 무언가가 가득한 곳이었다. 나무가 얼기설기 서 있는 그곳은 조악한 비밀장소였다.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잔상들에 에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든, 대마든… 당장에 씨발, 뭐라도… 뭐라도 당장에 필요했다.

- 널 찾아오라고 했잖아. 나랑 약속했잖아…! 그래서 나는 전부 다 버리고 너한테 왔어… 전부 다!

불안한 걸음으로 걷던 그는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들어차는 울림에 자리에 멈췄다. 머리를 쪼갤 듯 시작되던 두통은 점점 익숙한 감각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숨이 막혀오고 있었다. 에이든은 벽을 부여잡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 다시 코와 입으로, 폐와 내장으로 물이 들이차고 있었다. 시야가 점멸하고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숨을 쉬려는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필사적으로 산소를 들이마셔 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켜 줄게.

조각 나 있던 기억들은 안간힘을 쓰며, 제자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기어 다녔다. 언제나 환청으로 흩어져 머리에 남지 않던 것들이 이번은 조금 달랐다. 그것들은 어떻게든 에이든 테일러의 뇌에 들러붙으려 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두 번 다시 잊지 못하게, 환청이라 무시할 수 없도록.

-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왜 기억을 못해, 왜…!

문제는 에이든 테일러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을 생각이 없단 거였다. 그는 컥컥대는 목을 부여잡고 옆에 있는 서랍을 열어젖혔다. 덜덜 떨리는 손이 서랍을 통째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쾅하는 큰 소음과 함께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엉망으로 바닥에 쏟아졌다. 어금니에 금이 갈 정도로 턱을 바짝 물고 있던 그가 바닥에 떨어진 얇은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물로 개어진 코카인이었다.

뾰족한 바늘이 급히 허벅지에 꽂혔다. 당장에 팔을 걷어붙일 여유도 없었다.

- 그 바다에서 너를 건져 올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내가 널 많이 사랑해.’

에이든의 눈에 형편없이 물이 고여 들었다. 이내 그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진 헤니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여태 단단하게 뭉쳐 있던 제 뇌 어딘가를 해체하고 있었다. 안에 든 것들이 조각조각 찢기고, 숨을 쉬지 못하는 폐와 심장이 제 속도를 잃고 뛰었다.

- 제발… 에이든, 내가… 내가 널 많이 사랑해.

무서워. 전부 다. 하나도 모르겠어, 진. 그냥 계속… 그냥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 굳이 다 알아야 할 필요 없잖아. 내가 굳이 다 기억할 필요 없잖아. 알고 싶지 않아. 죽을 것처럼 힘들고 싶지 않아.

너는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나는 다 모른 척 너를 만나러 가면 되잖아. 그냥… 그렇게 계속 있으면 되잖아. 몸 안으로 약기운이 돌기 전까지, 에이든 테일러는 절망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유약했고, 모든 게 두려웠다. 주체가 되지 않는 감각들로 몸이 벌벌 떨릴 때마다 다정한 품이 생각났다. 창문으로 따뜻한 빛이 스며들었던 아침, 다 괜찮다는 듯이 저를 끌어안고 있던 그 품.

진에게 가고 싶으면서도, 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진 헤니를 방에서 찾지 못했던 단 오 분간 느꼈던 허무함과 막연함. 그리고 그런 약한 마음이 불러오는 부작용이 뭔지, 에이든 테일러는 알고 있었다.

아무렴 상관없어질 게 분명했다. 그가 거짓이든 뭐든, 그 품 안에서 살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이따위 쓰레기 같은 약을 맞아야 하는 지금처럼, 하루 종일 독한 대마로 애써 모든 걸 외면해 왔던 것처럼……. 한순간도 빠짐없이 진 헤니가 필요해질 게 뻔했다.

약은 살 수 있고, 대마는 언제든 태울 수 있다. 진 헤니와는 다르게. 그게 가장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를 완전히 가질 수 있는지를 몰랐다. 그가 하고 있는 사랑이란 건 너무 쉽게 변질되는 감정이었고, 에이든 테일러는 불확실한 것에 제 자신을 걸고 싶지 않았다. 분명 한 번 자신을 주기 시작하면, 모든 걸 걸어 그를 가지려 할 게 뻔했기에 더더욱.

차라리 진 헤니를 통째로 박제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에이든의 푸른 눈은 누군가와 비슷한 빛을 뿜었다. 생명력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눈. 어느 중년 여성의 유리알 같은 눈과 흡사했다. 말도 안 되는 충동과 함께 푸른 눈 한가운데, 동공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뇌가 약에 절고 있었다.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얼굴에 감각이 없어졌다. 동시에 여태껏 마음속에 들이차던 나약한 감정들은 약기운에 쓸려 사라졌다. 짙은 한숨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

어떻게 가져야 할지… 아니야. 가지면 돼, 어떻게든. 에이든 테일러는 혈액이 미친 듯이 돌기 시작함을 느끼며 고개를 살짝 털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망설이게 하던 모든 것들은, 하찮게 구겨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푸른 눈이 비정상적인 빛을 뿜었다.

‘가지면 돼. 아니, 이미… 이미 내 거야.’

차 키를 드는 에이든의 손이 위태로웠다.

***

넋을 놓고 있던 진은 거칠게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지난 밤, 도망치듯 방에서 떠났던 에이든 테일러였다. 사랑한다며 몇 번이나 그의 옷자락을 쥐어 봤지만, 결국 단 한마디도… 그 어떤 대답도 돌려주지 않던 에이든 테일러.

침대에 앉아 있던 진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오늘도 잘 있었어, 진?”

“…….”

환히 웃으며 제게 다가오는 그는… 뭔가 이상했다. 진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에이든 테일러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는 사랑한다더니… 오늘은 또 아니야?”

“…….”

“맞아, 원래 그게 좀 그런 편이지. 이해해.”

말이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불안한 걸음이었지만, 목표물은 명확해 보였다. 그는 침대 옆에 긴장한 채 서 있는 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불안한 낯으로 서 있던 진은 저를 안아오는 에이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든 테일러의 커다란 손이 진의 뺨과 목덜미, 귓가를 쓸어내렸다. 진은 귀 옆에 가깝게 붙여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어깨를 떨었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

그는 보고 싶었다며 귀와 뺨에 몇 번이고 입 맞췄다. 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찡그려진 눈썹은 펴질 줄을 몰랐다. 지금의 에이든 테일러는 마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듣기에 달디 단 말을 한다 해도, 진 헤니는 그 정도도 분간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목덜미를 쓸던 손은 그대로 내려와 가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한손으로 가운을 풀어헤쳐 끌어내렸다. 이딴 건 필요 없다는 듯이. 풀썩 소리를 내며 떨어진 가운에 진이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에이든, 이거 놓,”

“왜? 그만해?”

“…….”

“안 될 텐데. 그만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이 살벌했다. 뚫을 듯 검은 눈을 바라보던 에이든은 다 터져 피딱지가 앉은 입술로 시선을 내렸다. 어깨와 허리를 쓸던 손이 얼굴로 올라섰다. 엄지손가락이 진 헤니의 입술을 가르고 입안으로 넣어졌다.

“박제는 아마 힘들 거야.”

“……?”

에이든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진은 다 터진 입 안의 살들이 따가운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다, 무언가 깨달은 낯을 했다.

“그래도 갖고 싶은데… 아냐, 사실 원래 내 거야. 그렇지?”

약이었다. 진의 눈이 잔뜩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마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한참이나 입 안을 휘젓던 그는, 진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하체를 밀착했다. 이미 그곳도 약기운으로 한계에 이른 지 오래였다.

“하, 생각해 보니까 어제 대답을 안 했잖아…?”

“…….”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냐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었어.”

듣고 갔어야 됐는데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과 함께 진의 뒷머리칼이 강하게 잡혀 당겨졌다. 목이 뒤로 꺾이는 고통에 진이 신음을 삼켰다.

“윽…!”

“오늘 같이 확인하기로 해, 진.”

네가 날 위해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는지. 잘 보여 줘, 알겠지? 덧붙여진 말에 진이 에이든의 팔을 그러쥐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그 예감은, 슬프게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

조금 아무나 싶었던 입안과 입술의 상처는 엉망으로 뜯어지고 있었다. 입에 넣기에는 버거운 사이즈였다. 진은 목구멍까지 쑤셔 넣어지는 것에 고개를 뒤로 빼려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안 돼. 조금 더…….”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뒷목을 손으로 꾸욱 눌러 잡았다.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진은 본능적으로 에이든을 밀어냈다. 입 안에 멋대로 쑤셔 넣어진 것이 입술을 쓸며 오갈 때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삼키지 못한 타액들이 진의 턱에 흘렀다. 막히는 숨과 버거운 행위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에이든은 줄줄 울고 있는 진을 보며 뒷머리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하, 씨발…!”

묵직한 것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느낌에 진이 몸을 뒤틀었다. 몇 번 좁은 곳을 헤집던 것은 목과 입 안으로 울컥이며 비린 액들이 쏟아냈다. 사정 이후에도 입 안에서 나가지 않던 것은, 질질 늘어지는 타액과 함께 뱉어졌다. 에이든 테일러의 것은 한 번 사정했음에도 핏줄이 보일 만큼 발기해 있었다.

진은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했다. 작게 벌어진 입에서 핏기가 섞인 타액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눈은 많이 지쳐 보였다.

“벌써 힘들어?”

“…….”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떡하지…? 큰일이네…….”

정말 걱정스럽다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진을 일으켜 침대에 내리누르는 손은 친절하지 않았다. 진은 전희랄 것도 없이 바로 뒤에 닿아오는 성기에 눈을 크게 떴다.

“에이든…!”

“아냐, 될 거 같아.”

될 리가 없었다. 당연히 될 리가 없었다. 진은 뻑뻑한 곳을 억지로 뚫고 들어오려는 것에 몸에 힘을 주었다

“아윽…! 에이든! 안…….”

안 된다고 말하려던 입은 에이든 테일러의 손에 의해 막혔다. 진 헤니의 입을 틀어막은 에이든은 엎드려 있는 그의 뒤통수 가까이에서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되잖아, 진. 잊었어?”

“아악…!”

“힘을… 빼, 하, 씨팔… 힘 빼라고.”

몸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열리는 몸에 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젤이 흥건히 발라져 있어도 받아들이기 벅찬 것이었다. 진 헤니는 살이 멋대로 찢어지는 것을 느끼며 어금니를 물었다. 눈물이 엉망으로 흘렀다.

사랑한다고 말한 게, 바로 어제였다. 제발 자신을 기억해 달라 애원한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그 사랑이란 걸 어떻게 보일 수 있을지 몰라 발만 동동 굴러야 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흩어지는 중이었다.

“흐읍… 윽!”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야, 에이든? 뱉어지지 못한 말들은 진 헤니의 마음 속 허공을 떠돌았다. 어디까지 내가… 어디까지 내가 망가지면 돼? 다 망가지면, 그러면 그제야 믿어 주는 건지… 그제야 그날들을 기억해 줄 건지. 진은 알 수가 없었다.

다 망가뜨리며 얻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윽! 아…!”

“진, 사실 솔직히 말하면… 하, 아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니야.”

“……?”

탁한 신음을 목 뒤로 삼키며 울던 진은 가볍게 던져진 말에 낯을 굳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크게 떠진 검은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네가 유리를, 모았다던 거기… 나무로 쌓여진 데 말하는 거잖아.”

“…….”

“근데, 후… 이딴 거를 하나씩… 하나씩 기억하기에는 내가… 좀, 별로야.”

진의 엉덩이를 쥐어 벌리며 에이든이 말을 덧붙였다. 찌걱이는 곳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냥 계속… 아무것도 기억하지 말고, 이대로 있으면 되잖아, 응?”

“…….”

“나를, 하… 어쨌든 사랑한다며?”

진 헤니가 믿고 있던 단 한 가지였다. 그가 그날들을 기억한다면… 나를 기억해 준다면 분명…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그날들은 에이든 테일러에게도 소중한 기억일 거라는 그 믿음.

진은 에이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음속에서 무언가, 아주 얇은 끈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간의 노력이 무색했다. 어떻게든 부여잡아 보려 했던 것은 쉽고 허무하게 손을 빠져나갔다.

눈물이 가득 차 있던 검은 눈은 생을 잃은 사람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슴 어딘가가 쥐어뜯는 것처럼 아파왔다. 자신이 지켜왔던 소중한 기억과 그에 대한 사랑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이러, 이러면… 이러면 안 돼, 에이든. 이래선 안 돼. 제발…….’

그를 위해 뭐든 내놓을 수 있었다. 진 헤니에겐 이따위 고통도, 아픔도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이건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모든 감정이, 그날의 약속들이… 진 헤니의 마음 안에서 박살나고 있었다.

***

트레이닝복 차림의 알렉스 그레이는 이어폰을 끼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선발전 당일이었다. 코치나 주변 사람들 모두, 그가 국가대표로 선발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알렉스 그레이 스스로조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 경기는 너무 쉬우리라는 걸.

“…….”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해도, 정신이 집중되기는커녕 자꾸 다른 곳을 향했다. 예를 들면, 원래 이 자리에 함께 있었어야 할 한 사람이라든지.

“하, 진짜 미치겠네."

결국 그가 이어폰을 빼며 머리를 헝클었다. 나디아가 돌아오면 우선… 나디아부터 만나고,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를 물은 다음에 진을… 진을 대체 어디서 찾…….

“……?”

복잡한 마음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징징 울리는 제 핸드폰을 바라봤다.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옆집에서 살고 있는 이웃 아주머니였다. 뜬금없는 전화가 아닐 수 없었다.

“네, 여보세요?”

[ 알렉스, 지금 전화되는 거 맞아요? 다른 건 아니고, 집주변에 좀 수상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

“…수상한 사람이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되묻던 그는, 이어지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락커룸에 함께 있던 다른 선수들이 놀란 낯으로 그를 돌아봤다. 락커룸으로 들어오고 있던 알렉스의 코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무슨 일 있냐?”

“…….”

알렉스는 전화를 서둘러 끊고 제 짐을 챙겨들었다. 코치는 뜬금없이 짐을 싸고 있는 그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곧 대회가 시작인데 너 지금 뭐 하는…….”

“죄송해요.”

아니, 사실 하나도 안 죄송해요. 그는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뒤에서 코치가 대체 어딜 가냐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락커룸을 나섰다. 걸음은 점점 빨라져, 나중에는 그가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 차에 몸을 실었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모를 시간이었다. 그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사람처럼 운전했다. 간간히 옆에서 들리는 욕설도, 제 차를 향한 클락션 소리도 모두 무시했다. 알렉스 그레이에겐 지금 그딴 게 문제가 아니었다.

거의 버리듯 차를 주차하고 집 앞으로 향한 알렉스는 그 ‘수상한 사람’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제 집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후드를 쓴 데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다 터진 입술을 가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알렉스는 가까워질수록 눈에 들어오는 그 참담한 꼬라지에 점점 낯이 험악해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제가 가깝게 다가가자 슬며시 들려올라가는 고개에 잠시 숨을 멈췄다.

“…….”

“…….”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알렉스는 너무 속상하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단 걸 지금 처음 알았다. 입 밖으로 말하기에 너무 신경질이 나는 말이었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말랐어. 초록색 눈으로 분노와 화가 차오르고 있었다.

사나워지는 알렉스의 눈빛에 진은 괜히 눈치를 보게 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에 의해 학습된 행동이었다.

“알렉스… 그게… 내가 지금 달리 갈 곳이… 없어서…….”

“…….”

“조금만 신세 질 수 있…….”

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듣다 못한 알렉스는 진을 제 품에 안는 것을 선택했다. 화가 일렁거리던 녹색 눈엔 다른 것들이 차올랐다. 안도, 그리고 눈물.

하지만 그 녹색 눈과는 다르게 지친 검은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는 것 같은 알렉스를… 잘 달래 줘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결국 손을 들어 올리지 못한 진이었다.

상실감으로 뒤덮인 검은 눈이 모든 생명을 잃고 있었다.

***

진은 욕조 안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맞고 있었지만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다 죽어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딱 하나 진 헤니의 몸에 돌고 있는 감각은 피부 아래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느낌이었다.

진 헤니는 아무리 긁어도 사라지지 않는 벌레들에 인상을 찡그렸다. 멍하게 떠진 검은 눈이 지난 밤 한복판을 헤매고 있었다.

- 놔, 놔 줘…. 에이든… 기억… 난 거면… 나랑 얘기를…….

제대로 얘기를 해야 했다. 진은 다 박살난 것들을 어떻게든 손으로 그러모으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이렇게는 안 돼. 엎드려 있던 몸을 뒤틀자 에이든은 짜증난다는 듯 그의 등과 뒷목을 손으로 짓눌렀다.

- 기억이 나면, 뭐. 어쩌라고?

- …….

- 그게 뭐가 중요해.

에이든의 말에 진은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 에이든은 사나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더 깊게 집어넣었다. 투둑 소리를 내며 찢어지는 몸에 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파… 아파. 뒤를 억지로 벌리고 들어온 것에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이 들었다. 에이든 테일러라면 어떤 것이라도 괜찮다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었다. 제자리 아닌 제자리를. 진이 그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버둥댔다.

- 놔…! 윽, 놔!

- 하, 씨팔… 진짜 짜증나게.

코카인에 제정신이 아닌 에이든 테일러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약기운이 최고조에 이른 뇌는 에이든의 무의식 끝에 있는 모든 폭력성을 뱉어냈다. 몸속에 코카인이 돌기 전까지 나약한 소리를 해대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약한 소리를 지껄이던 에이든 테일러는 두꺼운 비닐에 밀봉된 채,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음이 분명했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 왜, 아파서 그래?

- 그만… 그만해!

- …….

- 제발 그만해, 에이든…….

그만하라고?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입에서 뱉어진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만하라 말한 진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었다. 제발 그만해…. 산산조각 난 것들은 그것도 모자라다는 듯, 에이든 테일러의 발아래에서 가루가 되고 있었다. 그것들을 어떻게든 쥐어 보려던 진 헤니의 여린 맨손도 그 발에 마구잡이로 짓밟혔다.

제발 더 이상 망치지 마, 나한테는…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야…….

-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 미안.

- …….

- 자켓에 하나가 남아 있는 것 같긴 한데.

엉엉 울던 진은 뒤에서 빠져나가는 몸에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몸으로 어떻게든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그는,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에 다시 눕혀졌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에이든 테일러가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 저와 함께 있는 사람이 에이든이 아닌 것 같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던 진은 얼굴 옆으로 툭하니 던져진 것에 울음을 멈췄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흐르고, 뿌옇게만 보이던 인영이 뚜렷해졌다.

- 비싼 거라 아마 뒤끝이 나쁘진 않을 거야.

- ……?

- 처음 해 봐?

그럼 내가 도와줄게. 주사기 뚜껑을 입에 물어 연 그 사람은, 에이든 테일러가 맞았다. 아래에 깔려 있는 진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그만해! 놔! 이거 놔! 에이든!

- 진, 내가 생각이 바뀌었어.

- 제발… 그만…….

- 따지고 보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한 게 맞잖아. 왜 그렇게 오래 데리고 있었어…. 그냥 빨리 좀 돌려보내지. 그랬으면… 그딴 좆같은 헛소리도 안 하고, 그럼 씨발, 그딴 역겨운 데에 안 갔을지도 모르… 아니야, 됐어.

혼자 중얼거리던 에이든은 말하기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뾰족한 바늘 끝에서 투명한 액이 뱉어졌다. 잘 나오는지 허공에 확인한 그는 진 헤니의 목을 쥐었다. 버둥대던 진의 눈에 선명한 공포가 드리웠다.

모든 게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진이 제 목을 쥐고 있는 에이든의 손을 쥐어뜯듯 잡았다. 검은 눈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몸 안으로 저게 들어온다면, 다 끝이었다. 사랑하는 에이든 테일러를 찾아 이곳에 왔던 진 헤니도, 그를 위해 필사적으로 수영하던 수영선수로서의 진 헤니도, 모두 끝이었다.

- 그러니까 네가 그만하라고 해도… 안 보내 줄래.

- …….

- 공평하지?

그냥 평생… 여기서 나랑 이렇게 있어. 다정한 목소리였다. 버둥대던 진은 목덜미를 꾸욱 쥐어오는 손길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움직이면 다쳐. 그게 진이 제정신으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어젯밤을 떠올리자 몸 안에 기어 다니는 벌레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아지고 있었다. 진은 잇자국이며 검붉은 멍울이 자리한 목덜미를 벅벅 긁어 댔다.

“진, 너 괜…….”

“…….”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진이 걱정됐는지 알렉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렉스는 놀란 눈으로 진을 바라봤다. 진은 멍한 낯으로 그런 알렉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초점이 없는 검은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벌레가 있는 것 같아, 알렉스.”

“…….”

“근데 이게… 안 없어지는 것 같은데…. 물로 씻는데… 왜 안 없어지지…?”

알렉스 그레이는 굳은 얼굴로 목을 긁던 진 헤니의 손을 떼어냈다. 얼마나 긁어댄 건지 손톱 끝에 피딱지와 살점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 알렉스는 진의 목에 자리하고 있는 좆같은 상처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목이 졸렸던 건지 붉게 남아 있는 멍울, 이로 씹어댄 잇자국 위로 자리한 피딱지들. 그리고 손톱으로 긁어대 남은 생채기들과, 그 언저리에 주사바늘이 통과한 자국까지. 진이 느끼고 있는 피부 아래의 환촉은 코카인의 부작용이었다.

그 모든 걸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알렉스는 욕조 바닥에 고여 있는 핏물들에 어금니를 씹었다. 계속 쏟아지는 물줄기도 그 핏물들을 씻겨 내리지 못했다. 어디선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으니까.

“하… 이 씨발, 개새끼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초록색 눈에 고이고 있었다.

***

나디아 놀즈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진 헤니의 목소리만 생각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때가 있었는데, 막상 그를 보니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디아는 진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진은 말없이 스크램블 에그만 깨작대고 있었다.

알렉스의 말로는,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아까 전보다 상태가 좋은 편이라 했다. 저게, 저게 좋은 편이라고. 목에 붙여진 거즈 밖으로도 핏자국이 보여서 나디아는 흐린 눈을 했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걸, 그녀는 진을 보며 깨달았다.

“왜들 그렇게 봐…?”

“…….”

“…….”

진은 두 사람에게서 쏟아지는 시선에 슬며시 물었다. 둘 중 누구도 대답하진 않았다. 굳어 있는 두 사람의 표정에 진이 거스러미가 잔뜩 일어난 입술을 뜯었다. 무언가 설명하거나, 화가 나 보이는 두 사람에게 사과를 하기에는 그 역시도 너무 지친 상태였다.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

“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네가 왔으면 됐어.”

나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오렌지 주스가 들어 있는 잔을 그에게 가깝게 밀어놓았다. 진은 그저 흐리게 웃을 뿐이었다. 웃는다고 보기에 어려운, 그런 웃음. 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포크로 제 앞의 계란만 뒤적거렸다. 그런 진의 앞으로 핸드폰 하나가 내밀어졌다. 언젠가 진이 나디아에게 선물로 줬던 거였다. 진은 고개를 들어 나디아를 바라봤다.

“네 명의로는 안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이거… 나는 핸드폰 하나 더 있어. 급한 대로 이거라도 잠깐 써, 진.”

“핸드폰이 하나 더 있어…? 왜…?”

“…….”

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디아는 그 물음에 잠시 난처한 낯을 했다.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그녀를 보다, 진이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있었구나?”

“진, 그게… 너한테 숨기려던 건 아닌데… 아무래도…”

“괜찮아, 나디아.”

이제 상관없어, 아무것도. 진은 그렇게 말하며 컵을 들었다. 시큼한 오렌지 주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진이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뺨을 맞아 다 터진 입 안, 그 안을 멋대로 쑤셔대던 것 때문에 목은 무언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헤진 상태였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진을 살피다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진 헤니의 손에 들린 컵을 빼앗아 싱크대로 던지는 손길이 거칠었다. 알렉스는 입 밖으로 터지려는 욕을 간신히 눌러 담으며, 찬장에서 새 컵을 꺼냈다. 컵에는 흰색의 우유가 가득 채워졌다.

그는 그 컵을 진의 옆으로 내려놓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참아 보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거지같은 흔적들이 보일 때마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 날짜가… 오늘이 며칠이야…?”

“…….”

이런 것들도 포함해서. 알렉스는 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욕을 짓씹었다. 나디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날짜를 알려 줬다. 그 말을 듣고는 진이 조금 커진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렉스, 너… 선발전은? 잘 끝내고 온 거야…?”

“…….”

“지금 한창… 경기할 시간 아니야…? 너 여기 있어도 되는…”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돼. 당연히 여기 있어도 되니까.”

그 말에 나디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경기를 포기하고 왔다고? 알렉스는 제게로 향한 그녀의 눈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이든 뭐든, 그딴 건 알 바 아니었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호한 초록색 눈을 보다 나디아가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표정이던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진을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대체 뭘 먹은 건지 알 수 없는 그릇만 보고 있는 진 헤니를.

한참이나 진을 바라보던 그녀가 알렉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렉스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디아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진, 내가 사실… 뉴욕에서 계속 지냈었어. 집도 다 있고, 너는 그냥 몸만 오면 돼.”

“…….”

“같이 가, 나랑. 그리고… 알렉스랑.”

진은 그 말에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흐린 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디아는 아무런 말없이 저를 보고 있는 진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조금 더 단호하고 조금 더 분명한 목소리로.

“우리랑 같이 가, 진.”

이딴 거지같은 로스앤젤레스는, 에이든 테일러는 버리고.

***

뜬금없는 호출이었다. 원래 이런 시간에 부르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칼튼 윌리엄스는 급히 맨 넥타이를 정리했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급한 발소리가 쾅쾅 울리며 서늘한 적막을 깼다.

“의원님, 칼튼 윌리엄스입니다.”

한스 테일러의 사무실 앞, 조심스러운 노크에도 안에서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칼튼 윌리엄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의원님, 칼튼 윌리엄스입니다.”

다시 이어진 노크 소리에 문이 슬며시 열렸다. 내부는 어두웠다. 책상 위의 스탠드 몇 개만 켜진 채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밝히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긴 했다. 책상 근처를 제외하곤 모두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한스 테일러는 그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칼튼 윌리엄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아 있기만 한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이 시간까지 업무를 볼 일이 뭐가 있길래 자신까지 호출한 건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별안간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낯을 굳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상냥한 인사와 함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칼튼 윌리엄스는 제 옆에서 말갛게 웃고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창백한 흰 얼굴, 친절한 낯으로 웃고 있는 사람은… 릴리 콜린스였다.

칼튼은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을 내려다보며 낭패어린 표정을 했다. 경악으로 크게 떠진 눈을 보던 릴리는 뭘 바보 같이 서 있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가라는 그녀의 고갯짓에 칼튼이 어금니를 물었다. 실패해선 안 될 일을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모든 게 어둠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은, 그가 안으로 가깝게 들어갈수록 조금씩 형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기분 나쁜 울림이 대리석 바닥과 공간을 울릴 때마다, 그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제가 원래…….”

“…….”

“담배를 끊었었거든요?”

한스 테일러의 책상에 가깝게 다가서자 그 맞은편 창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어두운 곳,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만 곳에선 담배 불의 빨간 빛만이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 피운 게… 열여섯 살 때였나, 아니다… 열일곱 살 때였어요.”

“…….”

“그때 여자애가 무슨 담배냐고, 어머니께 엄청 혼났었는데…….”

빨간 불빛이 약해졌다 강해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길게 내려온 금색의 머리칼이 힐끗힐끗 모습을 드러냈다. 담배를 물고 있는 입술 근처엔 상처를 치료한 밴드와 솜들이 붙어 있었다.

“다시 피우니까 좋네요.”

“…….”

“냄새도 쓰레기 같고, 안 그래요?”

창틀에 기대 앉아 담배 연기를 뱉고 있는 그녀는, 망했단 표정을 짓고 있는 칼튼 윌리엄스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씨발, 애초에 뭐든 그냥 내 맘대로 했어야 했는데.”

사납게 웃는 레오나의 앞으로, 검은 천에 얼굴이 뒤덮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칼튼 윌리엄스는 밧줄로 목이며 팔, 다리까지… 모두 의자에 묶여 있는 그 남자를 보며 숨을 삼켰다. 그리곤 이 모든 상황에도 아무 말도 없이 책상에 앉아 있는 한스 테일러를 돌아봤다.

“……!”

눈이 크게 뜨여진 채, 이미 숨이 멈춘 한스 테일러를. 그 모습을 본 칼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그는 제게 다가올 앞으로의 일을 쉽게 예감할 수 있었다. 죽이지 못했다면, 죽을 차례였다. 벌써부터 목이 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굳은 채 움직이지 않는 중년의 비서를 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던지더니, 무심하게 즈려밟았다. 꺼질듯 말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불꽃이 그녀의 발에 짓밟혀 빛을 잃었다.

“내가 쉽게 죽질 못하는 거 보니까, 크게 될 사람인가 봐. 그렇지 않아요?”

“…….”

“핸들을 조금만 더 늦게 틀었어도 뒈졌을 텐데. 아깝겠어요.”

창틀에 앉아 있다 몸을 일으키자 허리며 갈비뼈가 울리는 느낌에 레오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왼쪽 팔에 둘러진 깁스가 불편해 괜히 몸을 한 번 뒤틀던 그녀는, 한스 테일러 책상 앞으로 가깝게 다가섰다.

“저희 아버지께서… 원래 심장병이 좀 있으셨는데, 알고 계셨죠?”

“…….”

“완전히 죽은 거 맞나? 맞겠지, 뭐. 어쨌든, 아버지께서 유언장 관련해서 저랑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셨을걸요? 레오나가 한스 테일러를 빤히 쳐다보며 덧붙였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문 그녀는 잘 켜지지 않는 라이터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 오랜만에 하려니까 이것도 잘 못하겠네.”

찰칵이며 헛도는 라이터에 짜증이 치밀려던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조심스럽게 빼앗아 가는 손이 있었다. 가느다란 흰 손가락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라이터를 켰다. 레오나는 상냥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릴리 콜린스는 그저 옅게 웃으며 라이터의 뚜껑을 닫았다.

여러모로 기특한 그녀를 보던 레오나는, 한스 테일러 앞으로 자리한 찻잔 하나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절반정도 마신 홍차는 다 식어 씁쓸할 게 분명했다. 다른 게 섞여 있으니 더더욱.

“들어 보니까, 드시는 약이 되게 예민하고 민감한 약이더라고요.”

“…….”

“다른 약이랑 잘못 먹으면 급성 심부전이나 심정지가 온다고 하던데. 특히 심장병 있는 사람들……. 그렇죠, 릴리?”

“네, 맞습니다.”

그러게 좀 조심하셨어야지. 딱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그녀는 한스 테일러의 얼굴 바로 앞에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저와 똑같이 생긴 중년 남성의 얼굴엔 생에 대한 집착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추하기는. 뭐, 아무래도 놓고 가는 게 많으니… 그럴 수도 있지.’

레오나는 절반 정도 태운 담배를 한스 테일러의 어깨에 지져 껐다. 그가 입고 있던 값비싼 양복은 작은 불꽃에도 형편없이 타들어갔다. 부질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오나의 표정이 서늘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을 놓고 가시려고, 나를 씨발… 죽이려고 했는지 확인을 해야지.

“서랍, 비밀번호 입력해요, 칼튼.”

“모릅니다.”

한스 테일러의 뒤에 서 있던 칼튼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른다고? 레오나 테일러는 별 거지 같은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크게 웃던 그녀는 다친 갈비뼈가 아려오는 느낌에 웃기를 그만 뒀다.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뱉어진 목소리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칼튼, 재미없게 굴지 말고 당장 열어요.”

“모릅니다.”

“왜지? 이미 뒤졌는데… 뭐가 문제예요? 같이 따라 뒤지고 싶은 건가?”

레오나는 정말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손에 죽은 걸 본 이상, 그냥 빠릿하게 줄을 갈아타면 될 일이었다. 칼튼 윌리엄스는 테일러 가의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한스 테일러의 수족, 그 자체인 사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모름지기 ‘개’란 어디에 고깃덩이가 있는지, 그 냄새를 맡고 움직일 뿐이니까.

다 부패해 썩은 고기를 먹을 작정인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칼튼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정말 몰라요?”

“모릅…….”

모른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 가득한 총성이 공간을 찢었다. 칼튼 윌리엄스는 제 허벅지를 뚫고 들어온 총알에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만 한 권총을 들고 있는 레오나 테일러는 성가시다는 표정이었다. 제 아래에 무릎 꿇은 중년의 남성,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싸늘했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지? 내가 평소에… 너무 상냥해요? 아닌데? 왜 말을 하면 안 들어요?”

“…….”

“말로 잘 설득할 때 들으면 좋잖아. 나는 최대한 인간적이고 신사적으로 하는데… 그냥 니들이 평소에 하는 대로 처음부터 다짜고짜 총이나 쏘고 그런 게 나아? 그래야 바로 알아들을 거예요?”

바닥에 주저앉아 허벅지를 부여잡고 있던 칼튼 윌리엄스는 눈앞에 바로 보이는 레오나 테일러의 권총에 숨을 몰아쉬었다. 레오나는 칼튼 윌리엄스를 빤히 보다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아… 먹을 게, 나한텐 하나도 없어서 그러는구나?”

“……?”

“전부 에이든 테일러 그 새끼 앞으로 돌려 놨어…?”

이를 득득 갈며 뱉어진 말 뒤로 권총이 다시 한 번 화약을 뿜었다. 칼튼 윌리엄스는 다른 허벅지에 박히는 총알에 몸부림쳤다. 입에선 고통에 찬 신음이 새고 있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유언장을 썼길래 내가 못 고칠 거라 생각하는 거야?”

“어차피 당신은 아무것도 못 가지…….”

“이런 씨발 새끼들이.”

레오나 테일러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칼튼 윌리엄스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질질 끌어가는 손길에 무릎으로 기어 서랍 앞으로 가야했다. 총알에 찢어진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바닥엔 검붉은 혈흔이 질질 이어지고 있었다.

“자, 그럼 우리 같이 한 번 봐요. 보통 사람들이 비밀번호를 뭘로 할지.”

“…….”

그녀는 비밀번호 키패드를 진지한 얼굴로 들여다봤다. 하긴, 한스 테일러를 보통 사람이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그라면, 아무도 믿지 않는 그라면……. 대체 뭘 비밀번호로 해 놨을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칼튼 윌리엄스를 힐끗 보며, 레오나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칼튼, 다시 한 번 물을게요. 진짜 몰라요?”

“…모릅니다.”

“아… 진짜 모르는구나, 미안해요. 난 또 아는데 모른 척하는 줄 알았어요.”

레오나 테일러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칼튼을 보며 정말 미안하단 표정으로,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로 모르는 거였다. 왜냐면 한스 테일러는… 어디로 새어나갈 비밀번호 따위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그는, 자신 이외엔 아무도 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게 뻔했다.

“이거, 비밀번호 키패드인 척하면서 생체 인식이죠?”

“……!”

“비밀번호가 없으니 모른다 그러지. 번호 상관없이 자리 수만 맞춰서 자기 손가락으로 누르면 되는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수수께끼를 맞힌 아이처럼 환히 웃었다. 그리곤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썩어가는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시체를 옮기기엔 좀 힘든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필기구가 있는 트레이에서 커터 칼 하나를 들어올렸다. 드르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드러났다. 그녀는 무표정한 낯으로 제 죽은 아버지의 손을 쥐며 말했다.

“…엄지손가락이겠지?”

서걱이는 소리에 칼튼 윌리엄스는 숨을 참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미친 사람이었다. 그녀를 과소평가 해 온 거였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에 칼튼 윌리엄스가 이를 악물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깔끔하게 잘리지 않는 손가락을 거의 뽑다시피 해선, 다시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음… 나라면, 네 자리는 너무 짧고 여섯 자리는 애매하지. 그럼 여덟 자리?

삑삑거리는 소리와 함께 레오나는 망설임 없이 여덟 자리의 번호를 입력했다. 절단된 엄지손가락에선 피가 줄줄 나와 그녀가 입고 있는 셔츠 소매를 적셨다. 서랍이 철컥이며 열리고, 그녀가 환한 낯으로 웃었다.

“생각하는 게 뻔하지, 뭐. 내가 저 사람 딸로 큰 게 몇 년인데.”

레오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안에 들어있는 유언장을 꺼냈다. 유언장 바깥에 부착된 종이에 두 명의 증인이 적혀 있었다. 칼튼 윌리엄스와 줄리아 테일러. 레오나는 망설임 없이 밀봉된 종이를 열어젖혔다.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유언장을 읽어 내리던 그녀가 그 종이를 들고 다시 창문 근처로 향했다. 의자에 묶여 있던 남자는 제게로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몸을 비틀었다. 검은 천에 시야가 가려진 채 소리만 듣는 것은, 어마어마한 공포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차분히 그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는 검은 천을 위로 올려 벗겼다. 벗겨진 천 아래, 늙은 변호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그의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눈이 조금씩 초점을 잡아갈수록,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붉은 피에 절은 금색의 머리칼. 그 다음은 알 수 없는 생기로 번뜩이고 있는 푸른 눈. 온전히 돌아온 시야, 흰 셔츠가 피로 흠뻑 젖은 레오나 테일러가 보였다. 두려움에 질린 그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해 힉힉 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와… 진짜 전부 다 에이든 테일러 앞으로 해 놨네? 너무하지 않아요?”

현금 및 부동산을 포함한 재산 일체는 모두 차남인 에이든 테일러의 앞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자필로 작성된 해당 유언장만 인정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추후 작성된 그 어떤 유언장도 효력이 없다는 소리였다. 가짜 유언장을 새로 작성하지 못하도록 한 거였다. 또한, 최초 작성 이후 수정된 내용은 효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적혀 있었다.

“또한 본인인 한스 테일러의 자필이 아닌 것은 모두 인정하지 아니 한다….”

레오나 테일러는 내용을 읽어 내리며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늙은 변호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 못 고칠 거라 했잖소!”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레오나 테일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마이클 채플린을 바라봤다.

“제때 잘 죽었네. 이거 이렇게 헐겁게 쓴 거 보니까, 한스 테일러는 진짜 노망이 든 게 맞는 것 같아요.”

“……?”

“난 수정 안 해.”

추가할 거거든. 레오나 테일러는 한스 테일러의 책상으로 다가가, 피가 흥건한 그 책상 위를 대충 소매로 문대 닦았다. 그 위로 자필 유언장을 펼친 그녀는 한스 테일러의 오른손에 만년필 하나를 쥐어 주었다.

“자필이어야 하니까 직접 쓰셔야죠.”

엄지손가락이 잘려 피가 뚝뚝 흐르는 그 손, 핏기 없이 푸르게 질려가는 손을 레오나가 감싸 쥐며 말했다. 그녀의 손바닥에 붉은 피가 엉망으로 묻고 있었다.

“제가… 아버지를 닮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이것저것.”

“…….”

“근데 언제나 저한테는 관심이 없으셨죠. 맨날 그 씨발, 에이든 테일러, 에이든 테일러…. 사실 당신이랑 제일 닮은 건 난데, 그걸 왜 몰라서 이 꼴이 나는지…….”

하긴, 지금 보니까 당신보다 내가 더 나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 테일러는 한스 테일러의 오른손을 감싸 쥔 채 펜을 움직였다. 유려한 필체로 쓰이는 글씨는 그녀 아버지의 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 위 조항이 적시하는 차남인 에이든 테일러가 유명을 달리할 경우, 모든 재산과 사업체는 장녀인 레오나 테일러에게로 귀속된다. ]

“감사해요, 아버지.”

레오나는 피가 여기저기 묻은 흰색 종이를 들어 올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곤 그대로 다시 마이클 채플린에게로 향했다. 늙은 변호사는 비정상적인 이채를 띠는 푸른 눈에 체념한 낯을 했다.

“우리 그럼, 공증 절차를 시작해 볼까요? 마침 여기 상속인을 제외하고 증인이 두 명이나 있는데.”

피칠갑이 된 그녀의 흰 셔츠, 그리고 흰색 유언장에선 레오나와 썩 잘 어울리는 냄새가 났다. 공간을 진동하고 있는 피비린내, 그 비린내에 흠뻑 취해 있는 레오나 테일러는 아름다웠다.

***

릴리 콜린스는 그 어떤 때보다 밝은 표정의 레오나 테일러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기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른손으로 입을 가려 덮고 있는 레오나는 자꾸 바보처럼 나오는 웃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아, 미안해요. 기분이 너무 좋아서 표정관리가 잘 안 되네.”

“아닙니다.”

릴리는 전혀 그럴 거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오나는 이제 웃음을 숨길 생각도 없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릴리 덕분에 이것저것 좀 쉽게 가네. 고마워요. 뭐 필요한 건 없어요?”

“아, 없습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레오나는 바로 없다고 대답하는 제 비서를 보며 이상하단 표정을 했다. 릴리는 그저 말간 얼굴로 그녀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뭐…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요, 뭐든. 얼마만큼의 돈이든, 어디 회사에 무슨 직책이든. 상관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 주면 돼요.”

“그냥 저는… 계속 레오나 님의 비서 일을 하면 충분합니다.”

“와, 진짜? 그럼 나야 좋죠. 대신 좀 큰 선물을 줄게요. 아, 맞다. 지난번에 준 손수건도 돌려 줘야 하는데. 미안해요.”

밝게 웃으며 말하는 레오나에게 릴리는 뿌듯한 얼굴을 했다. 잔인하기에 더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었다. 바깥으로 보이는 외관만이 아니라, 그녀 자체가 그랬다. 키도 작고 마른, 그리고 무엇보다 병약하고 약해 보이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

그녀는 언제나 제가 원하는 것들을 주저 없이 손에 쥐는 사람이었고, 릴리 콜린스는 그런 그녀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음에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모두가 제 아래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릴리가 보기엔 실제로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닮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칭찬 받고 싶었다. 누구보다 쓸 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레오나 님, 그럼… 에이든 테일러 님과의 약속을 잡을까요? 아니면 사람을 붙일까요?”

“걔? 걔는 왜?”

“유언장엔…….”

“아, 아… 그거?”

릴리는 다음 차례로 에이든 테일러가 필요한 게 아니냐는 얼굴을 했다. 레오나는 악의라곤 한 톨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녀의 흰 얼굴을 보며 크게 웃었다.

“릴리는 정말 재밌는 사람이네요.”

“……?”

“빨리 처리하면 좋긴 한데… 에이든 테일러는 내가 부르면 안 와. 그리고 그 새끼 눈치가 얼마나 빤한데. 좀 덜떨어지긴 했어도 보고 배운 건 있거든요.”

그냥 처리하기엔 쉽지도 않고, 사실… 곱게 보내 줄 생각도 없고. 레오나가 품에 넣어 놨던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불꽃을 빨아올린 레오나 테일러가 말했다.

“아직 못 쓴 좋은 미끼가 하나 있잖아.”

그럼 걘 거기에 알아서 엮여 올 거예요. 무심한 푸른 눈 안에서 매캐하고 독한 불꽃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

살가죽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뼈가 다 부서지고, 내장이 조여지는 기분.

“진, ……신 차려!”

문 밖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뼈가 하나씩 조각나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에게서 멀어질수록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눈에 차오른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시력을 잃고 있는 건지 진 헤니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고, 그래서 제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볼 수 없었다.

“진, 정신 차려봐!”

끔찍했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세워서 문 앞에 섰을 때의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진 헤니는 아직 약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머리로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문손잡이를 쥐고 아래로 내렸을 때 자신의 세상이 종말을 맞이했음을.

진 헤니에게 삶의 목적지는 하나였고, 속하고자 했던 세계 역시 단 하나였다.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곳은 잘못된 목적지였고, 에이든 테일러라는 세계는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단 걸.

에이든 테일러에겐 그때가… 그리고 그때의 자신이, 전부 다 하찮고 잊고 싶은 기억일 뿐이었단 걸… 왜 그제야…….

“진!”

제 몸을 쥐고 강하게 흔드는 손길에 눈꺼풀이 급히 들려올라갔다. 진 헤니는 땀에 잔뜩 젖어서는 방금 막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옷을 그러쥐었다. 당장에 놓치면 죽을 것처럼 절박하게.

크게 떠진 검은 눈 안으로 녹색의 눈이 비치고 있었다. 새벽 세 시, 알렉스 그레이는 고통에 찬 진 헤니의 목소리에 그를 흔들어 깨워야만 했다. 진은 눈을 뜨고도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흔들리는 검은 눈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나야, 진. 정신이 들어?”

“…….”

“진?!”

“…알렉스.”

진은 한참만에야 그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어서, 알렉스 그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 헤니는 자꾸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가 잘 수 있는 시간은 한두 시간 뿐이었다. 그걸 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야 깊게 잠이 들었네, 싶으면 방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슬프고 애처로운 소리였다.

“따뜻한 거라도 좀 마실래?”

“…….”

“잠깐 기다…….”

나가려던 알렉스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손길에 걸음을 멈췄다. 진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

혼자 방 안에 있는 건 무서웠다. 왠지 모르게 방문이 잠길 것만 같았다. 다시는 방에서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허무맹랑한 두려움이 진을 괴롭혔다. 알렉스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진을 살피다, 아무 말 없이 침대 위의 이불을 챙겨 들었다. 방을 나서려던 알렉스는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은 갑자기 옷장 문을 여는 그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옷은 갈아입는 게 낫겠어.”

알렉스는 입기 편한 면 티셔츠와 팬츠를 꺼내 들며 말했다. 손에 든 이불도 잠시 쳐다보더니 옷장에서 조금 얇은 담요를 하나 꺼냈다. 그리곤 제 뒤에 서 있는 진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칼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땀으로 젖은 옷이며 이불은 안 될 말이었다. 진 헤니를 살피는 녹색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혹여나 감기에 걸리진 않을까 걱정하며 방 밖으로 다시 나서는 그였다.

***

진 헤니는 알렉스 그레이의 걱정이 무색하게 감기를 앓아야 했다. 소파에 앉아 마른기침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며, 알렉스는 얇은 담요를 꺼냈던 자신을 비난했다. 애가 몸이 저렇게 안 좋아 보이는데 얇은 게 뭐야, 얇은 게. 깊은 한숨이 터졌다.

‘잠이라도 일찍 재울 걸…….’

진 헤니와 알렉스 그레이는 밤을 꼴딱 새서 영화를 봤다. 두 사람 다 TV를 보고 있지만, 보지 않는 시간이었다. 진은 그저 멍하니 화면을 보는 것에 가까웠고, 알렉스 그레이는 그런 진 헤니를 살피느라 영화든 드라마든 아무 것도 집중하지 못했으니까.

“잠을 못 잤어?”

“아, 어…….”

나디아 놀즈는 피곤해 보이는 알렉스를 보며 물었다. 알렉스는 조금 충혈 된 눈을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대답했다. 그 역시 얼굴이 많이 거칠었다. 나디아는 상태가 안 좋은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리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진한테 다시 물어보긴 했어…? 뉴욕 가는 거.”

진 헤니는 함께 가자던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낯으로 나디아와 알렉스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왜 바로 알겠단 소리가 나오질 않는 건지. 나디아 놀즈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나디아, 지금은 그냥… 다시 묻지 마.”

“왜…? 빨리 데리고 가야지!”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애를 데리고 어딜 가.”

“그러니까 더 빨리 가야 될 거 아니야!”

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하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져버린 그녀였다. 콜록거리던 진의 눈이 나디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디아가 혀를 찼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진의 몸이 많이 좋지 않고, 안정이 필요하다는 걸. 하지만 그래서 더 빨리 이 거지같은 LA를 떠나야만 했다.

나디아는 무언가 마음먹은 것처럼, 진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알렉스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약하게 인상을 쓴 채였다.

“나디아, 일단 몸이 더 괜찮아지면 그때…….”

“진, 갈 거지?”

“…….”

소파에 앉아 있는 진은 제 앞에 선 나디아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갈색 눈이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안 떠나도 돼. 그냥 갈 거라고, 갈 거라고만 말해.”

“…….”

“갈 거지? 응?”

나디아는 무언가 불안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되물었다. 진은 조금 당황한 낯으로 입을 벙긋거리다 고개를 작게 숙였다. 나디아의 갈색 눈에 화가 차오르고 있었다.

“왜 대답을 못해!”

“나디아!”

답답하다는 듯, 크게 질러진 소리에 알렉스가 진의 앞을 막아섰다. 알렉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사나웠다. 알렉스 역시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진, 너 여기에 남고 싶어? 왜?”

“…….”

진은 손에 들고 있는 머그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무 말도…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저도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으니까.

“여기에 뭐 그렇게 대단한 게 있어서? 왜 대답을 못해…! 그냥 가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

“그만해.”

알렉스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으로 나디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디아는 저를 진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손길을 뿌리치며 다시 다가섰다. 이번엔 진의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아, 애원하듯 말했다.

“진, 나랑 같이 갈 거지? 응…? 그럴 거지?”

나디아 놀즈는 불안했다. 어릴 때부터 소중한, 가족과도 같은 진 헤니가 혹여나 이곳에 남겠다고 할까 봐. 이 지경이 돼서도 에이든 테일러의 곁에 있고 싶다 할까 봐.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되잖아, 가겠다고.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나디아, 잘 모르겠어….”

“…….”

“그냥 잘… 모르겠어, 다…….”

진이 나디아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진 헤니도 알고 있었다. 이곳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로스앤젤레스에 남을 이유 따위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떠나겠다는 그 말이 단번에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뭐에 미련이 남아서 그러는지…….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

“왜… 에이든 테일러 때문에?”

“…….”

나디아는 대답하지 못하는 진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진, 너는 네가 하는 사랑이 대단한 것 같아? 착각하지 마! 아니야!”

멍하기만 했던 검은 눈이 크게 뜨이고 있었다. 나디아 놀즈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건 말건, 진 헤니를 노려봤다. 그녀의 갈색 눈에도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 죽을 것처럼 굴고, 밥도 제대로 안 먹는 거… 그거 삼 개월? 반년이면 다 아무렇지도 않아져! 서로가 없으면 세상 끝날 것처럼 굴던 사람들도 다 그래!”

“…….”

“힘들어도 가서 힘들면 돼. 아파도 가서 아프면 돼! 그러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면 돼!!”

그녀가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았다. 나디아 놀즈는 이번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에게 너무 많이 서운했다. 그의 곁에는 그를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하지만 진 헤니는 에이든 테일러 하나만 중요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는 사람을. 그러니 그 새끼에게서 진 헤니를 떼어놓는 게 진을 위하는 길이었다. 저더러 나쁜 년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나쁜 년이 돼도 진 헤니를 데려갈 수만 있다면.

“진, 내일까지… 말해 줘. 가겠다고.”

“…….”

나디아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 진에게서 뒤돌아섰다. 등 돌리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목으로 흐느낌을 삼키며 알렉스의 옆을 지나쳤다.

현관문이 열리고, 나디아가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어울리지도 않게 화창했다. 열린 문 사이로 빛이 잠시 스며들어왔다. 하지만 밝은 빛이 끼어들 틈도 없이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빛은 꼬리가 잘려 더 이상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밝은 햇살이 허공에 부서져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

해가 지자마자 비가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진 헤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디아가 다녀간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같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가끔 이어지는 마른기침에 인상을 찡그릴 때를 빼곤 아무 표정이 없었다.

‘서로가 없으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굴던 사람들도 다… 괜찮아진다고…….’

진 헤니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나디아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흐리게 웃었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굴었던 건… 저 하나뿐이었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진 헤니 같은 건 그다지 필요치 않은 존재였다.

- 따지고 보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한 게 맞잖아.

- 기억이 나면, 뭐. 어쩌라고? 그게 뭐가 중요해.

아니, 오히려 없애 버리고 싶은 존재일 수도 있었다. 혼자 많은 걸 착각해 온 거였다.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에이든에게 갈 날만을 꿈꿨던 지난 십 년. LA에 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반 년, 그리고 짧지만 곁에 있을 수 있었던 지난 시간들.

그 모든 날들이 저 혼자 기대하고, 저 혼자 들떴던 시간이었다. 바보처럼, 내가 뭐라고….

“진,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지. 너 계속 기침하잖아.”

“…….”

“아까 사 온 단호박 스프 데울까?”

창 밖, 빗방울들이 땅으로 낙하하며 투둑투둑 소리를 냈다. 바닥에 속절없이 부딪히는 그 물방울들을 보다 진이 고개를 들었다. 녹색의 눈이 진 헤니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알렉스…….”

“먹을 거 여기로 갖다 줘?”

“뉴욕은… 여기랑 많이 다르겠지…?”

알렉스는 조금 겁먹은 듯한 검은 눈을 보며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속으로 잠시 고민하던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전부 다 다를 거야, 진.”

“…….”

“대신 나디아랑 나는 그대로일 테니까 괜찮아.”

전부 다를 거고, 달라야만 했다. 알렉스는 단호한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만은 부드러웠다. 진은 그런 알렉스를 가만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그래…….”

“…….”

“그러자….”

나디아가 말한 대로 제 사랑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냥 조금 죽을 것 같을 뿐이었다. 그를 떠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뇌 어딘가가 고장 난 사람처럼 삐걱댈 뿐이었다. 다정한 온도로 데워진 스프도, 따뜻한 차 한 잔도 전부 넘기지 못해 게워낼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계속 살면 되는 일이었다. 사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대도 어쩔 수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사랑 받을 방법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나 기회는 제게 허락되지 않았다. 진은 체념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어디든…….”

어차피 어디서 살든, 매한가지일 테니.

천둥이 쳤다. 비가 많이 올 모양이었다. 번쩍이는 번개에 진은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뒤로 화가 난 것 같은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하늘이 찢어진 것 마냥 울어대고 있었다.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는 진 헤니를 대신하는 것처럼, 그날 밤 내내 비가 쏟아졌다.

***

파나마에 만든 유령회사들, 그와 관련된 서류를 검토하던 레오나 테일러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진 헤니가 없다고요?”

“네, 현재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눈치 채고 어디다 숨긴 거 아니야?”

이러면 골치 아파지는데……. 서둘러 진행한 한스 테일러의 장례식 이후, 사람들은 재산 상속에 대해 지대한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유언장은 비밀로 작성되어 세상에 새어나갈 일은 없었지만, 모두의 관심 속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에이든 테일러가 총에 맞아 죽거나, 교통사고로 뒤져 버리면 누가 봐도 범인은 자신이었다. ‘정황’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그딴 조악한 수법으로는 안 됐다.

레오나 테일러는 짜증난 표정으로 턱을 쓸며,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는 시체를 확인할 수 없도록 불살라진 그녀 아버지의 책상이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릴리 콜린스는 습관적으로 책상을 톡톡 치고 있는 레오나의 손톱을 바라봤다. 릴리 역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호텔을 샅샅이 뒤졌지만 진 헤니는 그곳에 없었다. 심부름을 시켰던 남자의 말을 들어보면 방 상태도 조금 이상했다. 매일매일 누군가 드나들며 깨끗하게 치워야 할 고급 호텔방은 음식도, 이불도 모두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했다. 굳이 제 주인에게 보고해야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릴리 콜린스는 그저 속으로만 의문을 삼켰다.

그리고 레오나는 이런저런 상황들을 솎아내고 있었다. 어디로 숨겼지, 대체? 허공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푸른 눈이 갑자기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린 문, 레오나 테일러는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며 한쪽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제 발로? 레오나 테일러는 비린 웃음을 숨기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입에 물고 있던 대마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리며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레오나 테일러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잔뜩 충혈 된 눈, 강하게 힘이 들어간 턱 뭔가 불편한 건지 자꾸 코와 입 주변을 쓸어 대는 손……. 이 새끼 요즘 약 하나 보네. 정상이 아닌 에이든 테일러의 상태에 레오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제정신이면 네가 네 발로 여길 걸어 들어올 리가 없지.

에이든 테일러는 책상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가 사납게 떠진 푸른 눈으로 레오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을 긁듯 뱉어진 목소리였다.

“내 놔.”

“뭘?”

“가져간 거 내놓으라고.”

“그러니까 뭘 내놓으라는 거야.”

짜증 섞인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이 거친 손길에 쓸려 추락했다. 유리컵과 철제 트레이가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 냈다.

“씨발, 모른 척할 거야?”

“…….”

“진 헤니 내놓으라고.”

아, 너한테도 없구나? 레오나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제 동생을 바라봤다. 에이든 테일러는 어렸을 때부터 이랬다. 그는 언제나 아닌 척했지만, 사실 그는 불량품이 맞았다. 덜떨어지고 덜 만들어진 새끼. 에이든 테일러는 그 싹부터가 잘못된 놈이었다. 나한테 이걸 티내면 어떡해, 에이든…?

“내가 옛날부터 느낀 건데 넌 너무 감정적이야.”

“…….”

“대체 크면서 뭘 배운 거야?”

그녀는 정말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에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푸른 눈,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그는 절박해 보였다. 레오나는 저 밑에서부터 끌어올려진 그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볼 수 있었다.

진 헤니를 잃은 그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게 다 뭐라고… 얼마나 찾고 싶었으면 나한테까지 왔어, 에이든. 레오나의 눈에는 모자란 제 동생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다. 자신보다 열등한 생물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정말 안 됐다는 듯이 뜨인 눈이, 가증스러웠다.

“너, 지금 머리가 잘 안 돌아가나 본데, 너한테 다시 줄 거면 내가 뭐 하러 갖고 와?”

“아직 더 필요해? 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내가 좆같이 절절매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레오나 테일러는 마치 진 헤니를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것 마냥 말했다. 에이든은 이 정도로 망가졌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목소리였다. 레오나는 그 말에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에이든의 표정이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내놔. 네가 원하는 대로 평생 그 새끼한테 휘둘리면서, 병신처럼 살아 줄 테니까.”

“글쎄, 줬다 뺏으니까 효과가 더 큰 것 같은데? 별로 구미가 안 당기네.”

그녀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서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레오나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물론 모두 계산된 표정과 대사들이었다. 거래의 기본은 아쉬운 티를 내면 안 된다는 거였다. 모든 거래는 절박하고 아까운 쪽이 숙이고 들어오게 돼 있으니까.

“하, 알겠어. 돌려줄게. 돌려줄 테니까…….”

“…….”

“대신…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줄래?”

솔직히 내가 밑지는 장사지만… 네가 그렇게까지 달라니까, 뭐. 레오나는 적당히 아쉬운 얼굴로 에이든에게 말했다. 에이든은 대체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표정을 했지만, 싫다는 말은 없었다. 레오나는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 모자란 혈육은 아무래도 학습 능력이 없는 게 분명했다.

***

왜 문을 안 잠갔지? 그날 에이든 테일러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의 후회는 굉장히 애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회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

에이든 테일러는 호텔 방 한가운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가 많이 어지러웠다. 술, 대마 그리고 코카인. 또 다시 술, 대마 그리고 코카인. 그는 필사적으로 제정신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면 모든 걸 감당할 수 없을 게 뻔했다.

- 제발 그만해, 에이든…….

기억은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엉엉 울며 제게 애원하던 애처로운 얼굴만이 생각날 뿐이었다. 그리고 잔뜩 공포에 질려 있던 까만 눈. 약으로 어떻게든 뭉개 보려 했던 것들은 다시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를 비난하는 것처럼.

에이든 테일러는 모든 비난을 그저 받아들였다. 비겁하게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때 했던 행동과 말들은 제 밑바닥 아래에 있던, 가장 날 것의 감정이었다. 두개골이 박살나는 감각을 느끼면서까지 그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갖고 싶었다.

“…괜찮아, 다시 가져오면 되니까.”

아픈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호텔방을 쭉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유리 테이블 위의 음식은 먹다 남긴 접시에서 썩어갔고, 뽀송해야 할 이불은 혈흔이 말라붙은 채 침대를 뒹굴고 있었다. 치우거나 건드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썩어가는 음식 위에 파리 떼가 날아다녔다. 음식이 상하는 냄새에 비위가 상할 법도 했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아무렴 상관없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이 안이 깨끗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날 그대로, 모든 건 그대로 있어야 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는 진 헤니가 사라진 뒤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굴었다.

뒷머리를 쥐어짜는 두통, 에이든 테일러는 그 고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지럽고 혼란한 머릿속엔 온통 진 헤니를 찾아와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진 헤니를 레오나 테일러에게서 가져오려면…….

- 이번 주말에 공화당 사람 몇 명이랑 약속이 있어. 가서 사이좋은 척 해 줄 수 있지?

레오나 테일러의 의중은 알 수 없었다. 아마 유산 상속의 문제로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새끼가 뒤지면서 남긴 것들에는 관심도 없었고, 사실 생각을 깊게 할 수 없는 상태라 보는 게 맞았다.

- 선상 파티 비슷하게 할 건데… 아냐, 좀 힘들겠지? 됐어, 그럼.

- …너 지금 나랑 장난해?

- 왜? 너 어차피 배에 타지도 못하잖아. 됐어, 그냥 없던 일로 하자.

레오나 테일러는 괜한 걸 물었다는 듯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는 그녀 앞에서 에이든 테일러는 속이 타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적당히 시간을 끌다 말을 덧붙였다.

- 그 사람들 만나는데 약이나 하고 올 건 아니지? 내가 체면이 있지.

- …….

- 돌려받고 싶으면 적당히, 잘, 최대한 정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와.

에이든은 그 말을 곱씹다 헛웃음을 쳤다. 허공에 대고 한참을 웃던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실실 웃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갔다.

“최대한 정상인 것처럼…….”

배에 오르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뭔지, 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제가 정상처럼 보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정상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였지만, 가장 제정신에 근접하긴 했다. 에이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 방법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면서, 죽을 만큼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알만 삼키면 진 헤니를 다시 되찾아 올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어떻게든 먹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그 약. 평생토록 저를 괴롭혔던, 자신이 미친놈이라는 그 증거. 에이든 테일러는 이제 그냥 스스로를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미친놈이 맞았다.

진 헤니를 찾아올 수 있다면 그깟 약은 얼마든… 몇 번이고 삼켜 낼 수 있었다.

***

차림은 화려했다. 그가 여태 입은 옷들 중, 가장 ‘테일러’다운 옷차림이었다. 차에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커다란 요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요트의 존재감은 어둠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비싸다는 요트. 진 헤니와도 언젠가 올랐던 그 요트였다. 오기와 치기로 올랐던 그곳에서 벌벌 떨어야 했던 때가 생각났다. 다급하게 약을 찾아 씹었던 때,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그때.

진 헤니는 엉망인 몸으로 제 옆에 쪼그려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몸에 두르고 있던 담요가 제가 덮기에는 너무 포근하고 따뜻해서, 쥐어뜯듯 그곳에 두고 내려야만 했다.

답지도 않은 감상에 빠져있던 에이든 테일러가 삐뚤게 웃었다.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레오나 테일러가 제게 덜떨어진 새끼라고 하는 건 다 이런 이유였다.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거추장스러운 감정들에 에이든 테일러가 고개를 털었다.

「올라와」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누가 보낸 건지는 뻔했다. 메시지를 보던 에이든은 굳은 얼굴로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권총 옆,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약병이 바로 보였다.

“…….”

안에서 달각거리는 흰색의 알약들, 그것들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흐리게 가라앉았다. 에이든은 약병의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털었다. 약들은 에이든에게 제 존재를 과시하듯 우르르 쏟아졌다.

잠시 멈춰 있던 그는 약 하나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금니가 알약을 부수고, 또 부쉈다. 입 안이 아릴만큼 씁쓸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언제나 좆같은 약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리가루라도 삼킨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잠시 인상을 찡그리던 에이든이 차 문을 열고 몸을 내렸다.

풀려 있던 수트의 단추를 잠그며, 그가 요트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찍이서 보아도 커다랗던 요트는 앞으로 다가설수록 위압적인 크기를 자랑했다. 요트는 에이든의 위로 큰 몸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잠시 요트를 올려다보던 에이든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에이든 테일러 님. 제가 안으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창백한 얼굴의 여자는 레오나 테일러의 비서였다. 그녀는 가만 서 있는 저를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표정이었다.

그는 기분 나쁜 기시감을 느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릴리 콜린스는 레오나 테일러에게로 그를 데리고 가며 옅게 웃었다. 좋은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

에이든은 제게 내밀어진 샴페인을 바라봤다. 릴리는 요트에 오르며, 테라스에 준비돼 있던 잔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한스 테일러의 장례식이 고작 며칠 전이었는데, 벌써 샴페인 뚜껑을 딴 모양이었다.

“드시겠어요?”

“…….”

그는 별말 없이 릴리를 지나쳤다. 기포가 잔뜩 올라오고 있는 그걸 받아 마시는 게 등신이었다. 릴리는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그 잔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에이든 테일러는 의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조금 더 나이 먹은, 누군가보다 더.

넓은 테라스를 지나 선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레오나 테일러가 보였다. 그녀가 말했던 다른 정치인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오나는 나름 신경을 쓴 듯한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곤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평소에도 좀 그렇게 하고 다니지 그랬어. 거지처럼 하고 다니더니.”

“기분은 지금이 제일 거지같으니까 그냥 닥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에이든 테일러의 신경은 아주 뾰족하게 곤두서 있었다. 애써 덤덤한 척하는 그였지만, 사실 배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였다. 손과 발끝이 저릿저릿한 느낌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에 약효가 확실히 돌아야…….

“생각보다 괜찮나 보네? 나는 막 배에 타면 네가 미친 새끼처럼 헛소리나 하고 그럴까 봐 엄청 걱정했거든.”

“…….”

“아쉽네. 그건 그거대로 좀 궁금하긴 했는데.”

레오나는 밝게 웃으며 제 앞에 있던 잔을 들었다. 그리곤 그의 앞으로도 다른 잔을 밀어놓았다. 에이든은 아까부터 자꾸 제게 뭔가를 마시도록 하는 두 사람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왜, 샴페인 싫어해?”

“넌 내가 병신으로 보여? 아까 전부터 좆같이 구는데 그냥 포기해.”

“축하할 일이라 같이 한잔하자는 건데 뭘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안 마실 거면 됐어. 내가 다 마시면 되니까.”

레오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이든의 잔을 다시 가까이로 가져왔다. 들고 있던 잔을 쭉 들이키더니, 에이든에게 주었던 잔 역시 깔끔히 비운 그녀였다.

그녀가 저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거나 말거나, 에이든은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인상을 찡그렸다. 단추가 끝까지 채워진 셔츠, 그리고 넥타이 때문인지 자꾸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목 근처로 손을 가져가던 그는 엔진이 작동되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오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던 다른 공화당 사람들은 하나도 없이, 커다란 크루즈 요트가 출발하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오랜만에 동생이랑 같이 요트 타는 거지, 뭐.”

사이좋게. 레오나가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에이든의 푸른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급히 일어섰다. 발을 디디고 있는 바닥이 울렁이고 있었다.

“지금 내리기라도 하려고? 어디로?”

“너, 이 씨발…….”

에이든이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레오나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테이블 위에 있던 카라멜 하나를 까서 입에 집어넣었다.

“뭐 찾아? 왜, 내가 몸집 큰 남자 여럿 데리고 타서 널 어떻게라도 할까 봐?”

“…….”

끈적끈적한 카라멜을 씹고 있는 레오나는 발음이 부정확했다. 달달한 게 입에 들어가서 그런지, 혀가 아릴 정도로 침샘이 자극되고 있었다. 그녀는 썩 나쁘지 않은 카라멜의 맛을 음미하다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어. 너 정도는 뭐…….”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거?”

점점 표정이 굳어 가는 에이든과는 다르게 레오나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와 닮은 얼굴을 가진 남자는 아까 전부터 숨 쉬는 게 불편한지 자꾸 목을 만지작거렸다. 에이든은 결국 넥타이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오나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로 안 될 텐데…….”

에이든의 동공이 점점 확장되고 있었다. 커다란 배가 물살에 일렁일 때마다 뒷목이 뻐근해졌다. 숨을 쉬는 게 조금씩 답답해지더니 기도가 조여지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넌 차에 약병 같은 걸 대체 왜 놓고 다니는 거야? 그런 건 간수를 좀 잘해.”

코로 물이 들이차는 느낌에 에이든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시작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그 과정이. 점점 무너지는 커다란 몸을 보다 레오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은 목을 감싸 쥔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에 핏줄이 잔뜩 일어나고, 크게 떠진 푸른 눈은 실핏줄이 몽땅 터져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수트는 잘 다린 보람도 없이 형편없게 구겨지고 더러운 바닥에 문대졌다.

“그러니까 잘 확인하고 챙겨 먹어야지. 그냥 먹기만 하면 다야?”

“너… 하, 너……!”

제 동생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그녀는 열심히 에이든 테일러를 관람했다. 잔인한 푸른 눈에는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그의 상태는 물 밖으로 건져 올린 금붕어 같았다. 짧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어떻게든 숨 쉬려고 발버둥치는 게, 죽어가는 금붕어와 똑같았다. 동물원에 처음 온 어린아이처럼 레오나가 눈을 반짝였다.

“약을 안 먹으면 이렇구나? 힘들겠네.”

에이든이 먹은 건 그의 약과 아주 똑같이 생긴, 단순한 진통제였다. 그걸 먹고 배에 올랐으니 당연히 진정될 리가 없었다. 에이든은 몸이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떻게든 산소를 들이마시려 했지만 컥컥거리는 소리만 날 뿐, 소용없었다.

한참이나 그를 구경하던 레오나는 사납게 웃으며 그의 멱살을 쥐었다. 다친 왼팔에는 아직 깁스가 둘러져 있어 오른팔만 써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190cm가 넘는, 커다란 남자를 한손으로 질질 끌고 가는 그녀는 어떤 때보다 힘이 넘쳤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어금니를 꽉 깨문 턱엔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를, 이 세상에서 없앨 수만 있다면.

“네가 아까 나한테 물었지? 원하는 게 뭐냐고.”

“…….”

“나는 네가 뺏어갔던 모든 걸 되찾기를 원해.”

목소리가 살벌했다. 에이든을 갑판으로 끌고 간 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밤바다를 보며 웃었다. 길게 찢기는 입술이 만족감에 취해 있었다. 레오나의 푸른 눈이 저랑 비슷한 색의 다른 눈을 바라봤다.

“네가 가진 것들은 원래 내 거야.”

“…….”

“네가 주제도 모르고 갖고 있던 건 원래 다 내 거라고!”

에이든은 레오나를 바라보다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저를 비웃는 그를 보며 레오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어?”

“내가… 내가 뭘, 가졌, 는데…?”

쥐어짜듯 뱉어진 목소리였다. 푸른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적시며 흘렀다.

내가 뭘 가졌어…? 정말이었다. 제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 갖고 싶었던 것마저 너는 그런 걸 가질 자격 따위 없다는 듯, 제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에이든 테일러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레오나…….”

“…….”

“하나도…….”

욕심냈던 하나는 따뜻함, 오직 그것 하나였다. 살면서 딱 한 번 느껴 봤던 온기와 애정. 차라리 죽을 때까지 몰랐다면……. 그럼 이렇게까지 그 온기에 허덕이며, 어떻게든 진 헤니를 가져 보려 발버둥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기침이 쉬지 않고 터졌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몸에서 생이 꺼져가고 있었다. 언제나 미련 없다 생각했던 삶이 간절했다. 에이든은 다정한 검은색 눈이 제 앞에 아른거림을 느끼며 울음을 삼켰다. 애써 외면했던 제 나약함은 이제 손쓸 수 없었다. 인정해야만 했다.

언젠가의 아침처럼 그 품에 있고 싶었다. 다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저를 다독여 줬으면 했다.

레오나 테일러는 무표정한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빤히 에이든을 보고 있는 그 눈이 어딘가 멍해 보였다. 그녀 역시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서 뱉어진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가진 게 하나도 없다니…?

“에이든…….”

“…….”

“네가 뭘 가졌는지조차 모른다는 게, 네가 전부를 가졌단 소리야…….”

뭘 가졌는지, 손에 꼽아 볼 필요조차 없었으니 모르는 거였다. 항상 차갑고 차분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는 참을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고임을 느꼈다. 화가 났다. 분했다.

가지고 싶어 악다구니를 써 본 적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어도 다 손에 쥐여 주니까…! 가진 게 없어? 진짜 가진 게 없음이 뭔지 몰라서 할 수 있는 소리였다. 여태 아등바등 살았던 제 인생에 대한 모욕이었다.

두 사람의 푸른 눈에선 저마다의 이유로 눈물이 흘렀다. 화려한 요트 위에 선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했다.

레오나 테일러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수치스럽다는 듯이 닦아냈다. 그리곤 갑판의 가장 높은 곳, 그곳으로 에이든 테일러를 끌고 올라갔다. 그를 억지로 일으키려던 그녀는 한 손으론 무리임을 깨닫고 망설임 없이 왼팔을 뻗었다. 다 부러진 왼팔이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에이든은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레오나의 푸른 눈이 언제 눈물 따위를 흘렸냐는 듯, 잔인한 빛을 뿜었다.

“이번엔 꼭 죽길 바랄게.”

잘 가, 에이든. 레오나 테일러는 그의 어깨와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 미련 없이 힘을 풀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몸이 새까만 바다로 낙하했다. 검은 바다가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삼키고 있었다. 물의 표면을 찢고 들어간 그가, 깊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

바다는 차가웠다. 제게 바다란 가장 무섭고, 가장 두려운 공간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일지도 몰랐다. 그 안은 뼈와 살이 분리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추웠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으니까. 제 인생과 비슷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새까만 바다에 가라앉으며 눈을 감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삶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죽기 직전, 이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들 했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의 머릿속엔 지난 한 달, 그때만이 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제 인생에서 기억할 만한 가치를 지닌 시간은 그때뿐이었으니까.

- 안녕, 에이든?

차에 오르며 밝게 웃던 얼굴. 언제나 다정한 빛으로 시선을 맞춰 오던 검은 눈. 그는 웃을 때면 눈꼬리가 예쁘게도 아래로 휘어 내려갔다.

- …너 괜찮아? 그래도 크게는 안 다쳐서 다행이야…….

피가 철철 흐르던 손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던 피, 진 헤니는 그의 손이 다 뜯어진 줄도 모르고 제 안색부터 살폈다. 부어오른 뺨, 터져서 핏방울이 맺힌 입술….

- 해 지는 거, 이렇게 높은 데서는 처음 봐.

- 버려도 괜찮아, 에이든. 그냥… 그냥 주고 싶었어. 받기만 해 줄래?

해 지는 거, 그게 다 뭐라고,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그였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건, 바닥으로 가라앉는 태양 따위가 아니었다. 붉은 빛을 모두 흡수한 검은 눈동자, 따뜻한 색으로 빛나는 그 눈이 제게 향할 때마다 에이든 테일러는 심장이 주저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제 눈동자가 생각나서 샀다며 팔찌 하나를 건넸었다. 자신에게 진 헤니의 눈동자와 비슷한 걸 사 오라 하면, 아무것도 사지 못해 멍청하게 서 있을 게 뻔했다. 그 눈과 비슷한 게 세상에 존재할 리 없으니까. 그런 빛깔로 빛나는 것은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많이 갖고 싶었다. 어떻게 가져야 할지를 몰라 형편없이 헤맨 날들이었다. 그렇게라도 그가 제 거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바보처럼 방법을 몰랐다. 막연했고, 무서웠다. 바다가 제 몸을 삼키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더 두려웠다.

‘진…….’

소리가 되지 못한 이름이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서 물방울이 되어 부서졌다. 언제나 헛것에 불과했던 바닷물이 이번엔 진짜로 그의 코와 입, 폐와 내장을 채웠다. 울컥이며 들어온 것들은 비워져있던 어딘가를 꾸역꾸역 채우려 들었다.

- 내 이름은 진 헤니야. 너는?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려올라갔다. 푸른 눈의 홍채가 풀어졌다 조여지기를 반복했다. 폐가 짜디 짠 바닷물에 젖을수록, 차가운 물이 기도를 틀어막을수록 에이든 테일러는 공허했던 어딘가가 가득 차오름을 느꼈다.

- 길 좀 모르는 게 뭐가 어때서.

- 모르는 게 있으면 혼난단 말이야…….

- 내가 비밀로 해 줄게.

바닷가 근처 어딘가에서, 겁에 질린 채 하염없이 걸었던 날이었다.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모든 게 낯설기만 하던 그곳. 에이든 테일러는 갑자기 제 시야에서 사라진 아이 때문에 입술만 씹어야 했다. 어디 있어…? 나는 여기를 하나도 모른단 말이야.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어디 있어?

진, 어디 있어?

모든 걸 체념한 채 가라앉기만 하던 몸이 버둥거렸다. 언제나 단단한 껍데기에 쌓여 있던 뇌 한구석이, 바스라지는 소리를 내며 깨지고 있었다. 그곳은 기다렸다는 듯 제가 소중히 감춰 왔던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에이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 줄게.

유리가 가득 쌓인 곳, 들키지 않기 위해 엉성하게 나무판자를 세워 놓은 그 장소에서 아이가 말했다. 나무 사이로 바깥의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새어 들어온 빛줄기는 유리 한 알, 한 알에 고여 반짝이고 있었다.

- 내가 집으로 돌아가도 나중에 꼭 만나는 거지?

- 그럼…! 내가 꼭 널 찾아 갈게. 내가 널 찾을게.

약속할게. 언제나 맑게 웃던 아이였지만 그날의 미소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열세 살의 저는 그 얼굴이 안쓰러워 손톱 끝만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해 줘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만 벙긋대던 어린 에이든은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밝게 웃었다.

- 그럼 나도 약속할게!

- ……?

아쉬움에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검은 눈이 에이든을 향했다. 유리에 반사된 빛이 아이의 순수한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별이 박힌 것 같은 그 눈을 보며, 에이든 테일러가 약속했다.

- 나중에 나를 찾아오면, 진 네가 궁금해 하던 엄청, 엄청 큰 세상을 같이 보러 다니는 거야.

- ……정말?

- 정말.

슬픔에 가라앉아 있던 아이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아이가 환히 웃는 걸 보며 안심했다. 그리곤 저도 맑은 얼굴을 따라 함박웃음을 짓는 그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바다 저 깊은 곳이 에이든 테일러를 감싸 안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