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가튼 머맨 2권
(1) Trigger
「칼튼 윌리엄스입니다. 요청하신 자료는 오늘 댁으로 발송하겠습니다. - 칼튼 윌리엄스」
에이든 테일러는 도착한 메시지를 무심히 확인했다. 답장은 따로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늘 자료가 온다는 게 아니라, 도착할 그 자료였으니까. 그는 다시 홈웨어 섹션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가 아이보리색의 편안해 보이는 면 티셔츠를 행거에서 꺼내 들었다. 그 옷의 어깨선이며 팔 길이 따위를 살펴보던 그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짓을 할 뻔했네. 에이든이 미련 없는 손길로 그 옷걸이를 다시 행거에 걸어 두었다. 어차피 진 헤니가 제 집에서 몸에 뭔가를 걸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을 테니까.
“자기는 체형이 예뻐서 그런지 진짜 뭘 입혀도 예쁘네.”
에이든은 사만다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핏이 약간 넉넉한 데님셔츠와 발목이 살짝 보이는 기장의 블랙진을 입고 나온 진 헤니였다. 그는 제게 쏟아지는 사만다의 칭찬이 머쓱한 건지 셔츠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순둥이 같은 진을 보며 사만다가 짓궂게 웃었다. 이거 이러면 놀리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는데.
“자기 같은 몸은 쓰레기봉투를 입어도 예쁠 거야.”
“네…?”
“아니면 맥도날드 종이봉투라든가, 뭐 그런 거적때기 같은 거 있잖아.”
“거적때기요…?”
사만다는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되묻는 진을 보다, 그가 아직도 지분거리고 있는 셔츠의 소매를 접어주려 손을 뻗었다.
“물론 이런 몸은 아무것도 안,”
능글맞게 말하던 목소리는 그녀의 손을 쳐내는 에이든 테일러에 의해 끊겼다. 철썩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쳐내는 손길에 사만다가 안심하라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겠어. 안 만지면 되잖아.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장난기가 가실 줄을 몰라서 에이든이 인상을 굳혔다. 차가운 푸른 눈이 꺼지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그녀는 이쯤하고 물러나야 했다.
‘저쪽은 처음 봤을 때랑 그대론데, 이쪽은… 전혀 아니란 말이지.’
사만다가 그 ‘이쪽’의 주인공을 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리 봐도 그때랑은 분위기가 차원이 달랐다. 그때도 나름대로 끈적한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하던 에이든 테일러지만, 지금은 끈적하진 않은 대신 좀 무서웠다. 손이라도 댈라 치면 손목이 날아갈 기세였다.
게다가 이건 또 연기가 아닌 것 같고……. 사만다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쪽’에게 웃어 보였다. 차게 식은 얼굴로 그녀를 보던 에이든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런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진 헤니는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에이든의 표정이 아주 살벌해서 진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이런 때에 뭐라고 말했다가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닥치란 말 아니면… 음, 죽고 싶냐는 말이라든가……. 그런 말을 들을 게 뻔했다.
에이든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던 진으로써는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기 전, 슬쩍 가격표를 확인한 진은 이걸 어쩌면 좋을지 당황해야 했다.
‘셔츠 하나에 이천 달러면 대체 뭘로 만든 셔츠인 걸까…. 그리고 이천 달러짜리 옷을 받으면…….’
속으로 끙하는 소리를 내며 말할 타이밍을 보던 진은, 에이든이 품에서 카드를 꺼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그 손을 덥썩 쥐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그… 아, 아무래도 돈을 아껴야 하지 않을까, 에이든?”
“하… 하하!”
웃음소리는 멀찍이 서 있던 사만다에게서 나왔다. 이름이 그 ‘테일러’인 사람한테 돈 걱정을 다 해 주고, 착한 친구네. 그녀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에이든 테일러 역시 제 지갑 사정을 걱정해 주는 진 헤니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라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수준이었다.
“부모님 돈이니까 너무 막 쓰면 좀 그렇잖아…!”
“…….”
일단 돈을 못 쓰게 하기 위해 아무 말을 시작했다. 말해 놓고 스스로도 이번 건 좀 많이 멍청이 같다고 생각한 진 헤니였다. 저도 모르게 정말 막 나온 말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도 황당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물론 일부러 그 새끼 돈을 펑펑 써 재끼는 건 있었지만, 제가 가진 돈 전부가 한스 테일러에게서 나온 건 아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에이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차명주식 계좌에는 매일 아침 분 당 사천 달러의 수익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진 헤니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아침마다 게임하듯 분 단위로 주식을 사고파는 그에게 한 장에 이천 달러짜리 옷은 1분 값도 안 됐다.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이, 망나니처럼 굴고 다니는 ‘에이든 테일러’의 이미지를 제 손으로 만들긴 했지만, 이건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조금 많이.
결국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 삐뚠 미소가 걸렸다. 진은 그 살벌한 미소에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요즘엔 드물게 짓는 표정이지만, 뭔가 대단히 심기를 거슬렀을 때 짓던 표정이었다.
“그딴 걱정은 안 해 줘도 돼, 진. 돈은 평생 써 재끼고도 남아서 죽을 때 같이 불태우지 않으면 억울한 수준이니까.”
에이든이 제 손을 잡고 있는, 정확히 말하면 제 카드를 잡고 있는 진 헤니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다시 사만다에게로 향하는 그 카드에 진의 표정이 울상이 되고 있었다.
안 되는데……. 이거 받으면……. 진 헤니는 사만다가 카드를 받아가기 직전 그 카드를 낚아챘다. 에이든과 사만다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진은 뭔가 우물쭈물 하더니 에이든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 옷 받으면… 다른 건…….”
“뭐?”
“혹시 이거 받아서 다른 걸 못 받는 거면… 이건 안 받을래….”
다른 거? 아…… 그 다른 거. 무슨 소린지 몰라 잠시 인상을 쓰던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말을 이해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진은 별다른 대답이 없는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슬쩍 위로 치켜떠지는 그 검은 눈에, 에이든의 입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언제나 맹해 보이는 진 헤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때는 조금 달랐다. 조금 망설이더라도, 작은 목소리로 요구하더라도 절대 말하지 않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원하는 것’의 당사자인 제가 보기에 아주 기특했다.
아까 그 살벌한 미소와는 다르게 에이든 테일러의 눈꼬리가 기분 좋은 것을 티내듯 예쁘게 접혔다. 또 다른 의미로 살벌한 웃음이었다. 진은 활짝 웃는 에이든의 얼굴을 보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역시 언제 봐도 에이든의 얼굴은… 시각적 자극이 과했다.
“진.”
“…어?”
원래도 조금 가깝게 붙어 있던 몸이 조금 더 제게로 다가왔다. 언제나처럼 옅은 대마 냄새와 그가 자주 뿌리는 향수 냄새가 훅하니 끼쳐 들어왔다. 진은 그 향수 냄새에 지난 언젠가를 절로 떠올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드레스룸에서 그 몰래 얼굴을 묻어 봤던 흰 셔츠, 그리고 에이든의 셔츠를 입게 된 이유인… 길었던 그 밤까지.
향수의 향은 분명 청량하고 깨끗했음에도 뒷목에 솜털이 일어설 만큼 자극적이었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긴장되는 기분에 진이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귀와 가깝게 숙여진 에이든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리자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심해. 앞으로 그건 네가 받기 싫어도 내가 주는 만큼 전부 받아야 할 테니까.”
“…….”
“됐지?”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귓바퀴가 붉어지는 것까지 확인하곤 몸을 뒤로 물렀다. 입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가 웃으며 사만다에게로 카드를 넘겼다. 에이든이 능청스러운 얼굴과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얼른 사고 가야겠네. 생각해 보니까 그때 못 준 것도 있잖아.”
“모, 못 준 거라니….”
“기억 안 나? 내가 그때 그건 따로 주겠다고 했잖아.”
앞으론 잘 메모해 놔. 떼먹히면 안 되잖아. 결제가 끝난 카드를 받아들며 에이든 테일러가 말했다. 말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갈까?”
“…….”
진 헤니의 얼굴에 옅은 두려움이 떠올랐다. 싱긋 웃는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과 대비가 심했다. 아무래도 자기 무덤을 제대로 판 진이었다.
***
방금 막 걸친 새 옷은 입은 보람도 없이 벗겨지는 중이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체향이 은은히 나는 침대 위, 진은 커다란 몸 아래 깔려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셔츠 아래를 들추고 침입한 커다란 손바닥이 아랫배부터 가슴까지를 쓸어 올렸을 때는 결국 막힌 신음이 터졌다.
요즘 들어 에이든 테일러의 가짜 애인 역할을 하는 일은, 바보인 진이 생각하기에도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강했다. 제 입으로 돈 대신… 에이든 테일러를 달라 하긴 했지만, 뭔가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일부러 보란 듯 스킨십을 하거나, 사람이 많은 곳만 골라서 데리고 다닐 때랑 지금은 아주 많이 달랐다. 언뜻 보면 정말 연인들이 보내는 평범한 주말 같았기 때문이다. 맛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천문대 같은 곳을 가거나 오늘처럼 쇼핑을 하거나 그런 평범한 일상.
‘이제는 좀 더 막… 그런 건 필요 없어진 건가? 이렇게 그냥 집에 들어와도 괜찮은…….’
“아윽…!”
딴 생각을 잔뜩 하고 있던 진은 목덜미가 깨물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진 헤니가 감히 에이든 테일러의 걱정을 하고 있는 동안 셔츠며 바지 버클은 엉망으로 풀어헤쳐져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아래에서 잔뜩 흐트러진 채, 무려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진 헤니를 빤히 내려다봤다. 에이든의 눈썹이 삐뚤게 올라섰다. 사나워진 그 표정에 진이 꿀꺽 침을 삼켰다. 에이든은 겁을 집어먹은 그 검은 눈을 보다 다시 목으로 입을 내렸다.
목을 잘근거리는 느낌에 진이 속으로 신음을 삼키다, 무언가 퍼뜩 생각난 듯 에이든의 고개를 떼어냈다. 제 상체를 밀어내는 그 손길에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더 무섭게 구겨졌다.
“아, 그, 그게… 이게, 이러면 혼나서…….”
“…….”
“저번에도 알렉스한테 엄청 혼났…….”
푸른 눈이 차게 가라앉는 걸 보자마자 진 헤니는 말을 멈췄다. 뭔가 대단히 잘못 말한 게 분명했다. 뭐라 변명을 덧붙여 보려 했지만 입만 달싹일 뿐 나오는 말은 없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
“뭐라고 혼났는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진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에이든이 물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예쁘게 웃으며 물어오는 통에 진은 뭐에 홀린 듯 사실대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자기 몸이 어떤지 자각도 없고 관리도 못한다고…….”
“그래?”
진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이든 테일러는 잘 빠진 진 헤니의 몸을 찬찬히 뜯어보다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 몸이 어떤지 아는 거… 중요하지.”
“……?”
에이든 테일러는 분명 웃고 있는 게 맞았다. 분명 맞는데……. 눈을 접어 웃는 그 얼굴을 보며 진이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본능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도망가야 했다. 몸을 뒤로 빼 에이든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그 커다란 몸이 제 위에 올라탄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잔뜩 겁에 질린 진 헤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에이든 테일러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끌어올렸다.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간 채였다.
“그럼 내가 좀 도와주지, 뭐.”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대사였다. 게다가… 들어 본 장소와 상황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지 않았다. 사악하게 웃는 에이든의 얼굴에 진 헤니가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진 헤니에게 그의 몸이 어떤지 알려주는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진 헤니의 고개는 아래로 숙여져 올라올 줄 몰랐다. 눈은 질끈 감겨져 있었고, 아랫입술을 잔뜩 씹고 있었다. 오늘 산 이천 달러짜리 데님셔츠는 제 원래의 용도를 잃고 다른 곳에 쓰이는 중이었다. 진은 손목에 묶여진 그 데님셔츠가 구겨지든 말든, 일단 꼭 쥘 수밖에 없었다.
“진, 잘 봐야지. 자기 몸이 어떤지도 모른다고 혼났다며?”
“흐으…!”
숙여져 있던 진 헤니의 고개는, 뒤에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손에 의해 들려올라갔다. 진이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리려 했지만, 턱을 강하게 쥐고 있는 에이든의 손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눈 떠.”
“…….”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진을 보다가, 에이든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아, 하으…! 으윽, 아! 하… 아아!”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꼿꼿이 서 있던 것을 쥐고 흔들자 몸이 절로 들썩였다. 문제는 몸을 뒤틀거나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뒤에 들어차 있는 것이 몸 안을 문질러 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거였다.
“아! 흐… 에, 이든… 으응!”
“…….”
“하… 아으…!”
강하게 쥐고 흔들던 손이 일순 뚝 멈췄다. 애가 닳았다. 진의 표정이 엉망으로 무너지고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에 근육이 잘 짜여진 복부가 멋대로 함몰했다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벌어진 입이 다물릴 줄을 몰랐다.
“눈 떠.”
귀 옆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얼굴이 울상이었다. 그래도 절대 눈을 뜨지 않는 진이었다.
“눈 뜰 때까지 이럴 건데.”
“…….”
“아니면 이렇게 하는 쪽이 취향이야?”
“아, 아니야… 아으응!”
에이든의 손이 다시 한계까지 발기한 진의 성기를 쥐었다. 쥐기만 해도 진 헤니의 안이 난리였다. 들어차 있는 제 것을 오물거리듯이 조여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그곳에 에이든 테일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진의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고, 속삭이듯이.
“아니긴.”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 헤니의 허리가 잘게 흔들렸다. 제멋대로 새어나온 투명한 체액은 에이든 테일러의 손과 마찰되며 질척이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엉망으로 신음하던 진은 다시 손이 뚝 멈추자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 아! 흐윽…! 제발…!”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에 진의 흐느낌이 커졌다. 참을 수 없이 애가 타고 안타까운 기분에 결국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진, 싸고 싶어?”
“아흐으…!”
“눈만 뜨면 돼.”
성기를 쥐었던 손은 그대로 아랫배와 가슴을 쓸고 올라와, 진의 목을 틀어쥐었다. 진의 등줄기에 소름이 올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진은 결국 감았던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진 헤니의 눈앞에는 다리가 활짝 벌려진 채,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를 꽂고 있는 제 몸이 있었다. 깨끗한 거울에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성기를 꽂고 있는 곳이 제멋대로 수축하며 움찔댔다.
문제는 그 모든 게 제 눈에도 뚜렷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뒤에서 제 상체를 속박하듯 안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 땀에 젖어 거친 숨으로 들썩이는 두 사람의 상체,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가 처박힌 곳까지. 거울 속은 난잡했고, 외설적이었다.
에이든은 짙게 웃으며 진의 허벅지를 쥐어 벌렸다. 자신이 들어차 있는 곳이, 더 훤히 드러날 수 있도록. 결국 진 헤니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가서 그 새끼한테 말해 줘, 진.”
“흐으… 흑…!”
“에이든 테일러가 잘 알려줬다고.”
거울에 비친 에이든의 미소가 사나웠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었으나, 허벅지를 잡고 있는 손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진은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어깨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라치면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제 고개를 앞으로 고정했다.
활짝 벌려진 다리와 수치를 모르고 꺼떡이는 성기가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다. 그 수치심에 덧붙여 강하게 붙잡혀 있는 다리와 묶여져 있는 손목, 아래에 들어차 있는 성기까지……. 제 몸을 속박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진은 에이든이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갑자기 화가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 헤니는 정말 억울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은 눈에 서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거울에 비친 울먹거리는 그 표정에 에이든 테일러가 진의 뒷목에 입을 맞췄다. 달래듯 입 맞추며 동시에 손으로는 아랫배를 짓누르는 그였다.
“하… 아윽! 아!”
몸을 더 깊게 꽂아 내리는 손길에 진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아까 전부터 절정 전에서 멈추길 반복했던 몸은 이제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배 안쪽 어딘가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한참이나 에이든 테일러의 성기를 꽂고 있던 곳은 지금보다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아흐… 에이든…!”
“왜?”
애가 탔다. 진은 지금 제 몸을 어쩔 줄을 몰랐다. 에이든 테일러는 저를 부르는 진 헤니에게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사실 그 역시 별로 여유롭진 않았다. 제 것이 박혀 있는 구멍과 몸 안이 빨리 움직이라는 듯 성기를 쥐어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숨을 몰아쉬며 거울에 비치고 있는 적나라한 모든 것들을 감상하듯 훑었다. 진 헤니의 검은 눈이 조금씩 흐려질 때마다, 그의 푸른 눈 역시 나른히 풀려갔다. 잘게 경련하고 있는 허벅지에 시선을 주던 에이든은, 투명한 액을 줄줄 흘리고 있는 진의 성기를 보며 삐뚤게 웃었다.
“진, 이런 걸 좋아하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아으…! 아니, 흐윽, 아니야…!”
“하… 아무래도 자기 몸이 어떤지 잘 모르는 게 맞나 보네.”
가만 박혀 있던 에이든의 것이 안을 문지르듯 움직였다. 자극을 원하던 몸에 뭉근한 열이 다시 지펴지자 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하악…! 으응!”
감질나게 움직이는 그것에 저도 모르게 진 헤니의 허리가 흔들렸다. 움직여. 진의 몸은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에이든 테일러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 야해빠진 채근에 에이든이 몸을 세게 박아 넣었다.
“아! 아으응!”
“하…….”
결국 진 헤니의 성기에서 정액이 울컥 새어 나왔다. 원래도 예민하기 짝이 없던 몸이지만 오늘은 입에서 터지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에이든 테일러가 나른하게 웃으며 진에게 속삭였다.
“잘 봐.”
“흐으… 하윽!”
“가만히 꽂고 있기만 해도 정액이 질질 새잖아.”
뭐가 아니라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의 몸이 다시 한 번 수축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강하게 조여 오는 구멍에 낮은 탄식을 삼켰다.
진은 지금 수치심으로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귀 옆에서 쏟아지는 천박한 말들에 눈물이 차올랐다. 문제는 그것들에 참을 수 없이 달아오르는 몸이었다. 진의 허리가 결국 다시 흔들렸다. 검은 눈에선 이미 이성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해 달라고.”
“하… 빨리……!”
“똑바로 말을 해야 알아듣지.”
쑤셔 줘? 에이든 테일러가 사나운 목소리로 귀 옆에서 속삭였다. 진이 몸을 바르작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으로 말해.”
“흐윽… 흡, 쑤셔… 흐으, 쑤셔 줘…….”
결국 제 입에서 뱉어진 난잡한 말들에 진이 흐느꼈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등허리를 울리고 있는 섬뜩함과 안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간지러움. 빨리 이 모든 걸 해소하고 싶었고, 진은 본능적으로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애처롭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진을 보며 에이든이 말했다.
“어딜?”
“안에… 하, 빨리… 흐윽, 에이든…!”
안에… 빨리… 움직여. 안타까운 목소리로 보채던 진은 에이든의 손에 의해 침대에 고개가 처박혔다. 그리곤 허리가 높게 들린 채 엉망으로 신음해야 했다. 쩍쩍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삽입되는 성기에 이미 정신이 날아간 지 오래였다. 후벼 파여지길 기다리던 몸 안이 난리였다. 탄탄한 몸 둘이 맞붙으며 철썩이는 소음을 만들어 냈다. 내벽이 푹푹 짓이겨지는 동안 진의 성기에선 정액이 울컥이며 뿜어졌다.
“으응! 아! 하… 아으응! 아아!”
뒷목을 강하게 눌러오는 손길에 목덜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생리적인 눈물이 눈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아래에서 야한 목소리로 울고 있는 진 헤니를 보며 허리짓에 속도를 붙였다. 오늘따라 그 안이 제멋대로 경련하고 있어서 에이든이 어금니를 씹으며 말했다.
“하… 씹, 그 새끼도, 후… 알아?”
“아, 아흑! 으응…! 하윽! 아아!”
“네 몸이, 이따위인 걸… 하, 그 새끼도 아는 거면…….”
씨팔, 둘 다 곱게는 못 죽을 줄 알아. 사납게 뱉어진 말에 진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허리가 징징 울리고 있는 느낌과 제 뒷목을 강하게 처박고 있는 손이 주는 오싹함,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쾌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
욕실에서 씻고 나온 에이든 테일러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진 헤니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 구겨진 데님셔츠 대신 원래 입고 왔던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조금 서두르는 손길로 워커의 끈을 묶고 있었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촉촉이 젖은 검은 머리에선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중이었다.
진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묶던 리본을 빠르게 마무리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와 시선이 땅에 박혀 올라올 줄을 몰랐다.
“아, 그… 나 돌아가 볼게…!”
“……?”
황당한 표정의 에이든 테일러가 서둘러 집을 나서려는 진 헤니의 팔을 낚아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가겠다고? 어딜? 제게서 빨리 벗어나려는 진 헤니 때문에 에이든의 기분은 아주 빠른 속도로 불쾌해지고 있었다.
몸을 잡아끄는 손길에도 진의 시선은 땅바닥에만 박혀 있었다. 진은 무언가 굉장히 당황스러운 듯, 혹은 난감한 듯한 표정이었다. 바닥을 헤매고 있는 검은 눈을 보며 에이든이 얼굴을 굳혔다.
“너…….”
“아, 맞다…. 나 다음 주 토요일에는 약속이 있어서… 일요일만… 될 것 같아.”
“뭐?”
“그럼 갈게…!”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팔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서둘러 나가려던 진은 또 다시 탈출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강하게 붙잡혀 다시 몸이 돌려진 진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빨리 가야… 가야 되는데…….
에이든 테일러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더러웠다. 제가 샤워를 하는 동안에 말도 없이 가려던 것도 좆같은데, 일부러 빗겨가는 시선과 제게 등 돌리는 몸은 참아 주기가 힘들었다.
“이것 좀… 놔 주면…….”
“…….”
“에이든…? 아, 아파…!”
점점 힘이 더해지는 에이든의 손아귀에 진이 팔을 빼내려 몸을 뒤틀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진 헤니의 사정 따위, 관심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좆같이 굴지?”
“그게…….”
푸른 눈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진은 슬쩍 그 눈치를 보곤 다시 땅바닥에 시선을 처박았다. 진이 정말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우물쭈물거렸다. 에이든 테일러의 한쪽 눈썹이 삐뚤게 들려올라갔다.
“그게…….”
진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댄 순간, 그의 배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정말 배가 고프면, 몸에서 이런 소리가 날 수도 있구나… 싶은 소리가. 누군가는 녹음을 못해서 아쉬워 할 수도 있을 정도의 대단한 소리였다.
“…….”
“…….”
진 헤니의 배에서 울리는 굉장히 솔직한 사운드에 에이든 테일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덮었다. 거울 앞에서 그… 러고 있을 때보다 진의 얼굴은 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늘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모든 게 다 창피한 날이었다. 정신력과 체력이 모두 고갈된 진은 참을 수 없는 허기짐을 느끼고, 제 배가 에이든 앞에서 창피한 소리를 내기 전에 도망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모든 시도가 에이든에게 막힐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그랬다. 진 헤니는 그냥… 배가 고파서 집에 가고 싶었던 거였다. 그냥은 아니고, 사실 엄청 많이.
***
까만색 볼캡을 이리저리 만져 보던 진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그 모자를 눌러썼다. 작은 얼굴이 모자의 챙에 전부 가려졌다. 에이든은 아직 드레스룸 안에 있었다. 진은 드레스룸의 문을 슬쩍 보다 황량한 거실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집에… 정말 아무것도 없네.’
진 헤니의 집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진의 집은 생활감이 너무 넘쳐서 문제였고, 에이든 테일러의 집은 마치… 모형 집 같은 느낌이라 문제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조심스럽게 거실을 서성이던 진은 테이블 위에서 제가 언젠가 주었던 팔찌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팔찌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물론… 차고 다닐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씁쓸한 미소가 진의 입꼬리에 걸렸다.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상자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그래, 여기 잘 있어라. 어디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고 그러면 안 돼. 팔찌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진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에이든 테일러 역시 얼굴을 다 가릴 수 있는 까만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현관 쪽을 향해 걷는 에이든을 따라 진 역시 문으로 향했다.
“그… 우리 어디 가?”
“집에서 시체 치우긴 싫으니까 나가야지.”
“시체?”
“그 정도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것 같던데.”
에이든 테일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진은 그냥 멋쩍게 웃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죽기 일보 직전이 맞긴 맞았으니까. 흐리게 미소 짓는 그 얼굴에 에이든이 속으로 피식하는 웃음을 삼켰다.
에이든을 따라 쫄래쫄래 차고로 향하던 진은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짧은 LA에 빠르게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잠시 하늘을 감상하던 진은 제 눈앞에서 사라진 에이든에 잠시 당황해야 했다.
어… 아, 요즘 자주 타는 차가 저 흰색…! 빠른 걸음으로 흰색 마세라티에 다다른 진이었지만,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굴에 떠 있는 당황스러움이 한층 짙어졌다. 마세라티 앞에서 허둥거리던 진은 뒤에서 작게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밤에 그거 타고 나갔다가 머리에 바람구멍 뚫릴 일 있어?”
다른 차들보다 훨씬 낡고, 엄청 험하게 탄 듯한 까만색 벤츠였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에이든이 얼른 타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반쯤 뛰는 걸음으로 차에 탄 진은 저도 모르게 방긋 웃었다. 방싯거리는 그 얼굴에 에이든이 별걸 다 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는데?”
“그냥… 오늘 하루가 다시 시작된 느낌이라서.”
주말 이른 오후에 만나 에이든의 차에 오르는, 그런 느낌이었다. 주말을 기다릴 때면 평일은 지독하리만큼 시간이 가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를 만나는 그 시간까지의 기다림은 진 헤니에겐 정말 고역이었다. 하지만 차에 오른 지금은… 손꼽아 가며 기다리는 그 주말이 다시 시작된 느낌이었다. 손꼽아 기다린 너를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그 느낌.
‘매일이 주말이면 정말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진이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저를 보며 기쁘다는 듯 웃는 그 얼굴을 보다 고개를 작게 저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진 헤니는 정말 정상이 아닌 게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입에 삐뚠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평소처럼 차가운 느낌은 아니었다. 에이든이 차에 시동을 걸며 진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은데.”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다. 진은 무심하게 뱉어진 그 물음에 순식간에 진지한 얼굴을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백미러로 인상까지 쓰며 고민 중인 진을 보고 있었다. 진은 여태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야식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음… 핫도그…?”
에이든 테일러가 입에 대마를 물며 엑셀을 밟았다. 입에 걸린 옅은 미소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고, 진은 차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운전하고 있는 에이든을 슬쩍 보다, 슬금슬금 라디오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곤 다시 힐끗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그 굉장히 소심한 손가락과 눈빛을 목격한 에이든 테일러는 네 맘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였다. 그 무심한 허락에 진이 베시시 웃으며 라디오의 전원을 켰다. 차 안은 지독하리만큼 조용했는데, 사실 조금 어색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진이었다. 그렇다고 에이든에게 뭐라 말을 걸거나 떠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옆에서 떠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라디오를 켜는 게 훨씬 나을 테니 다행이었다.
오후와는 다르게 밤이 되자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드는 지금, 라디오에서는 앳되면서도 몽환적인 목소리의 노래가 나오는 중이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차 안에 그 소리가 작게 울리기 시작했다.
[ 난 꽤 오랫동안 너를 지켜봐 왔어. ]
[ 네 푸른 눈을 바라보는 걸 멈출 수가 없어. ]
[ 네 푸른 눈 속에 퍼지는 열다섯 개의 불꽃들. ]
빠르게 달리는 차의 소음,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 소리들과 노랫말이 뒤섞여 차 안을 채웠다. 진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LA의 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늦은 시간, 대부분의 가게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가끔 사람이 거의 없는 버스가 차 옆을 지나가기도 했다. 그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이 드는 장면들에 진의 마음이 약하게 가라앉았다.
[ 이건 불공평해. 넌 나를 울게 할 방법을 알고 있잖아. ]
[ 네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나는 무서워. ]
밖을 보던 진은 귀에 들리는 가사에 흐리게 웃었다. 저와 같은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가 아닌 모양이었다. 맞아, 무서운 기분이지……. 그 무서움이 어떤 것인지 진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 안에서부터 꼬옥 붙들리는 그 느낌. 에이든 테일러의 푸른 눈은 언제나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에 진 헤니는 항상 무력해졌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눈이 자신을 쳐다봤을 때부터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를 사랑하는 일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던 것처럼, 진 헤니의 의지나 이성과는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 네 푸른 눈 속으로 빠져들어. ]
[ 너의 그 바다 같은 눈동자. ]
바다 같은 눈동자……. 그 부분만 진과의 감상이 달랐다. 진은 속으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푸른 바다와 그 위에서 부서지는 햇빛을 사랑하는 진이었지만, 에이든 테일러의 눈은 바다 같지 않았다. 제가 사랑하는 바다보다 훨씬, 훨씬 더 찬란했으며 섬뜩하리만큼 황홀했으니까. 그래서 바다를 버리고, 그를 찾아온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진이 백미러를 힐끗 쳐다봤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에이든의 푸른 눈이 비치고 있었다. 그 푸른 눈은 모자의 챙에 약간씩 가려졌다가도 살짝 보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 눈을 빤히 쳐다보던 진은 갑자기 마주쳐오는 시선에 화들짝 놀랐다.
“내려.”
“아, 응…!”
감상에 빠져있던 진은 에이든의 목소리에 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차가 멈춘 곳은 ‘핑크스 핫도그’라는 곳이었다. 밤인데도 그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유명한 곳인 모양이었다. 앞서 걷는 에이든을 따라 진이 서둘러 걸었다. 큰 보폭으로 걷던 에이든 테일러는 옆에 있어야 할 게 없는 것을 발견하곤 잠시 뒤를 돌아봤다.
에이든의 뒤를 따라 걷던 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저를 돌아보는 그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그 옆에 도착했다. 진이 도착하자마자 에이든은 다시 무심히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진 헤니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
진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핫도그를 담은 종이봉투에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칠리 핫도그, 엄청 맛있어 보였어. 얼른 먹고 싶다. 봉투 안에서 솔솔 새어나오고 있는 그 맛있는 냄새에 조금씩 인내심이 깎여가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앉아서 핫도그를 먹을 만한 곳을 찾는 중이었다. 어두워진 밤거리를 걷던 진은 저 멀리 보이는 가로등 불빛의 무리를 발견하곤 작게 감탄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의 가로등이 서 있었다.
“우와……!”
눈이 반짝반짝해져서는 ‘우와’를 연발하는 진 헤니를 바라보다 에이든 테일러가 목적지를 변경했다. 아무 데나 앉아서 먹이려던 계획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아무 데나 앉아도 저기만 바라보며 ‘우와’를 멈추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건 좀 귀찮으니까.
에이든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어반 라이트’라 불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쓸데없이 가로등을 한 이백 개쯤 뭉탱이로 세워 놓은 그곳은 LA에서 손꼽히는 명소였다. 해가 지면 다들 몰려나와서는 그 가로등 사이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물론 해가 지기 전에도 사람은 언제나 바글거렸지만.
진은 봉투를 바스락거리며 서둘러 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든 테일러가 헛웃음을 지었다. 검은 눈은 그 가로등들에 틀어박혀 다른 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검은 눈동자에 그 가로등들의 흰 불빛이 반짝이며 비치고 있었다.
“저거 다 가로등… 으악!”
“……!”
멀리에 눈을 박고 걸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지. 에이든 테일러가 몸이 앞으로 쏟아지려던 진 헤니의 허리를 받쳐 잡았다. 인도의 턱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핫도그고 뭐고, 크게 넘어질 뻔한 진이었다. 크게 떠진 진의 눈이 이번엔 핫도그 봉투로 향했다.
내 소중한 핫도그……! 80년 맛집에서 산 엄청난 핫도그가…! 심각한 표정의 진 헤니는 그 봉투 안을 들여다보며 소중한 것의 안위를 살폈다. 안 돼, 소스가 흘렀어…. 작게 중얼거리며 울상을 짓던 진은 위에서 터진 헛웃음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 아…! 아, 미안…!”
“…….”
진은 그제야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을 느꼈다. 넘어지지 않도록 상체를 받쳐 안고 있던 에이든 테일러는 후다닥 품에서 벗어나는 진 헤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하루가 멀다 하고 볼 때마다 더 바보 같아지는 중인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게다가 아까와의 갭이 커도 너무 컸다.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정도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위에 앉아서는 얼른 움직이라며 허리를 떨던 진 헤니를 떠올리다 옆을 돌아봤다. 옆에 있는 진 헤니는 핫도그를 무슨 아기 안듯 소중히 품고 걷는 중이었다. 표정이 심각했다.
그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은 어반 라이트 근처 계단에 털썩 앉을 때까지 계속됐다. 다행히 오늘 밤은 사람이 덜했다. 두 사람은 가로등빛이 조금 약하게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봉투 안에서 핫도그를 꺼내 들었다. 요리조리 살피더니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반짝거리는 눈으로 입을 크게 벌리는 그였다.
“아… 먼저 먹을래?”
“…….”
진이 핫도그를 먹으려다 말고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약간 찌푸려진 눈썹 때문에 괜히 눈치를 보게 됐다. 나 뭐 또 잘못 했나…? 검은 눈동자가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다. 제게 슬쩍 내밀어진 그 칠리 핫도그를 보던 에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대마를 새로 꺼내 물었다.
진은 멋쩍게 웃으며 그 핫도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먹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표정에 에이든이 헛웃음을 삼켰다. 진 헤니는 정말 단순했다. 진짜로. 그에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몰아붙여도 입에 핫도그만 하나 물려주면 그깟 일은 모두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 모양이었다.
“어청 므시써…!”
“뭐라고…?”
진 헤니는 입 안에 가득 든 것을 빠른 속도로 씹고 꿀떡 삼키더니 말을 다시 이었다.
“엄청 맛있어…! 진짜 안 먹어?”
“안 먹어.”
“왜?!”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냐는 표정과 목소리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에도 에이든 테일러는 말없이 대마를 피울 뿐이었다. 아니, 진짜 맛있는데 왜 안 먹겠다는 거지? 이렇게 맛있는 것들이 세상에 많은데, 제 주변에는 이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알렉스라든지, 에이든이라든지…….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핫도그는 처음 먹어 봐.”
그렇게 말하며 진이 입 안 가득 한 입을 더 집어넣었다. 볼이 빵빵해져서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이든 테일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핫도그 집, 하와이에도 있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 헤니가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사레가 걸린 건지 가슴팍을 퍽퍽 치고 있는 그를 보다 에이든이 인상을 쓰며 콜라 컵을 내밀었다. 집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시체를 치우고 싶진 않았다.
진은 콜라를 급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콜라 덕에 하마터면 뿜을 뻔한 핫도그들을 무사히 위장에 넣는 데 성공했다. 난처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 떠올랐다. 하필이면 하와이에 있을 건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핫도그로 행복하던 마음이 또 답답해지고 있었다.
애초에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 자체가 진 헤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표정에서 티가 났고, 사실 에이든 테일러가 조금만 더 그를 관심 있게 쳐다봤다면 무언가 수상한 점을 느끼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그 애매한 기색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지만,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진 헤니는 바보라서.’로 귀결되고 있었다. 진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진은 약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에이든을 보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달싹거렸다. 절반 정도를 먹은 핫도그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말을… 지금이라도…… 하는 게….
“에이든, 그게… 어…….”
“……?”
그런 진을 보고 있는 푸른 눈에 약한 의아함이 담겼다. 뭔가 말하고 싶은 기색의 진 헤니는 말을 하려다 말고 다른 곳을 보거나, 입술을 깨물길 반복하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헤매던 진의 눈은 앞에 보이는 가로등 불빛들에 멈춰 섰다.
진은 그 빛무리를 보며 너무 밝은 곳에 앉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밝은 불빛 아래에선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었다. 제 위를 환히 비추고 있는 그것들에 부끄러움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의 손에 들려 있는 콜라 컵에서 물방울들이 똑똑 떨어졌다. 얼음이 들어 차가운 컵의 표면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 안에선 얼음이 녹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든 테일러와 함께 할 수 있는 주말, 그리고 몇 마디 되지 않지만 나눌 수 있는 말들. 제가 그 옆에 설 때까지 가만 멈춰 서 자신을 기다리던 그 무심한 푸른 눈도. 사실을 말했다간 사라질 수도 있는 모든 것들…….
컵을 쥔 손에도 물기가 흥건했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 쓸어내리던 진은 흐리게 웃으며 에이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당장 사실대로 말하기엔 너무 겁쟁이였다.
“그… 저 가로등… 예, 예쁘다고.”
“……?”
뭔 소리야? 에이든 테일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다 타들어간 대마를 바닥에 지져 끄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진 헤니는 뭔가 수상했다.
진이 에이든의 눈치를 보다 제게로 향한 푸른 눈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에이든 테일러의 파란색 눈 안에 가로등 불빛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그의 눈 안에서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 황홀한 광경을 가만 보던 진이 옅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입 밖으로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제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침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그래도 내가…….”
“…….”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엔… 네가 제일 예뻐.”
깨끗한 검은색 눈동자가 솔직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게 꽂혀 들어오는 그 직선적인 감정에 잠시 숨을 멈췄다. 새까만 눈이 열기와 다정함을 품을 때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그 누구에게서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시선이었으니까.
그는 지금 처음 맞닥뜨린 길 어딘가, 길을 물을 사람도, 지도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를 몰라 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옮겼다간 다시 제자리에 되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가보지 않은 길을 굳이 걷고 싶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답지 않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그 스스로는 이 모든 감정을 단순한 불쾌함으로 받아들였다. 기분이 나빴다. 아주 많이.
진은 약간 크게 떠진 푸른 눈을 빤히 보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뱉은 말임에도 참을 수 없이 쑥스러워지고 있었다. 진 헤니는 괜히 빨대를 물고 잘근거렸다.
에이든은 신경질 섞인 손길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방금 대마 한 대를 막 태운 참이었지만, 그딴 건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예민하게 치솟는 감각을 내리누를 게 필요했으니까.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가 대마에 불을 붙였다. 찰칵이는 라이터의 소리가 초조했다.
서늘한 밤공기와 별이 가깝게 내려앉은 것만 같은 수백 개의 가로등 불빛. 그 아래 얕은 어둠에 잠겨 있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 사람은 콜라의 빨대를, 또 다른 한 사람은 대마의 끄트머리를 잘근대고 있었다.
“…….”
“…….”
두 사람 다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한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심장의 두께가 얇아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작은 진동도 가슴을 쿵쿵거리며 크게 울리고 있었다.
무력한 밤이 계속되고, 결국 가로등의 불빛이 모두 꺼질 때까지 진 헤니와 에이든 테일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에 멈춰 있는 것처럼.
***
에이든이 집 안으로 들어서며 모자를 벗었다. 약간 찌푸려진 표정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모자와 함께 서류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던져 놓았다. 집 현관문 앞에 놓여 있던 서류봉투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도,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기에 누가 보냈는지 확실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금색의 머리를 무심하게 쓸어 넘겼다. 찡그려진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 무엇인지 솎아내는 중이었다.
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느낀 것은… 어이없게도 허전함이었다.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허전하다고? 뭐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에 붙일 다른 이름을 찾는 중이었다. 불쾌함, 짜증남 같은 단어들을.
그 단어들을 쭉 나열하던 에이든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그는 지금 덩그러니 혼자 있단 사실이 불쾌하고 짜증난단 걸 애써 무시했다. 지금 자신은 그냥 짜증이 나는 거였다. 그 이유가 뭔진 몰라도, 그저 오늘따라 집은 더 황량했고 기분 더럽게 조용했다.
테이블 앞 소파에 앉은 그는 서류봉투를 대충 뜯어 열었다. 봉투 안에는 진 헤니에 대한 문서가 들어 있었다. 종이의 첫 장부터 무심히 읽어 내리던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
에이든 테일러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요즘 들어 차가움이 덜했던 그 푸른 색 눈이 그 어떤 때보다 서늘하게 빛났다.
“하와이가 아니네?”
진 헤니가…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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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훈련이 끝난 뒤, 락커룸에서 가방을 챙기던 진은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표정이 흐렸다. 지난 주말 밤부터 지금까지 진 헤니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마음에 커다란 돌이 얹어진 느낌이었다. 잠도 잘 오지 않고, 뭘 먹든 아무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때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는데…….’
또 다시 어영부영 넘어가 버린 날이었다. 처음엔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게 다행이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에이든을 속일 순 없는 문제였다. 죄책감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고 있었다. 이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야 했다.
물론… 에이든과 제 사이에 앞으로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의 표정이 조금 더 우울해졌다.
아냐, 원래 LA에 온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봐. 진이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자꾸 쪼그라들려는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에이든을 찾아서… 많이 보고 싶었다고 얘기하고, 너와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자랑스레 말하려고 온 거잖아. 그리고 에이든과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고… 그러려고…….
그와 약속했던 가짜 연인 행세는 앞으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정말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진은 우울한 표정으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문을 나섰다. 그러다 다시 한 번 울리는 진동에 잠시 고개를 내렸다.
「빨리 안 오면 죽는다, 진 :) - 세계최강핫걸 나디아」
피식 웃으며 알겠다 메시지를 하려던 진은 손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가는 누군가 때문이었다. 진이 제 옆을 스쳐지나가는 다른 선수들을 바라봤다. 약하게 인상을 쓴 채였다.
“씨발, 원래도 재수 없었는데 요즘엔 좀 심하지 않냐?”
“엉덩이 대주고 신문에도 나고, 존나 대단한 능력이지. 야, 그냥 인정해.”
아, 나는 하라고 해도 못하지. 그들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했다. 마주친 눈에 경멸의 빛이 떠 있었다. 입에 걸려 있는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모든 유치한 짓거리들에 진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그 뒤로도 가만 서 있는 진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가는 선수들이 몇 명이나 더 있었다. 결국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흘러내렸다. 툭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 가방에 진이 어금니를 물었다. 절로 한숨이 터졌다.
“하…….”
락커룸 안에 혼자 남을 때까지 진은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던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주워 올렸다. 산 지 6개월이 조금 넘은 핸드폰 액정에 엉망으로 금이 가 있었다. 쩍쩍 갈라져 있는 그 화면을 보던 진이 굳은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일단 서둘러 가야겠다…. 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말했다. 그리곤 가방을 다시 들어 올리며 흐리게 웃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그날따라 아주 무겁고, 걸리적거린다 생각하는 그였다.
***
키보드 소리가 요란했다. 나디아는 조금 전까지 핸드폰과 씨름을 했고, 그리고 지금은 노트북이었다. 그녀는 뭔가 결연한 표정으로 알렉스에게 당장 노트북을 내 놓으라 말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티켓을 사고 있던 알렉스는 순순히 노트북을 넘겼다. 갈색 눈동자에 떠 있는 희번뜩한 빛 때문이었다.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알렉스의 메달과 트로피를 구경하던 진이 나디아를 돌아봤다. 나디아는 단단히 화가 나 보였다. 키보드 위의 손이 굉장히 공격적이어서, 진 헤니의 얼굴에 옅은 걱정이 어렸다. 진이 그녀가 앉아 있는 책상 근처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나디아, 무슨 일,”
“저리 가, 너.”
진이 가깝게 다가가려 하자 나디아는 퍽 소리가 날만큼 강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알렉스의 얼굴에도 의아함이 떠올랐다.
“저리 가라고.”
“알겠어…….”
한 번 더 단호하게 가라 말하는 그녀 때문에 진은 뒤로 걸음을 물렀다. 조금 풀이 죽은 진을 보며 알렉스가 얕게 인상을 썼다. 뭔데 저래? 진 헤니가 뭘 잘못했다고. 안 그래도 애가 오늘 기분도 안 좋아 보이는구만.
나디아가 멀어지는 진을 확인하곤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몇몇 인터넷 기사 사이트가 떠올라 있었다. 알렉스가 그녀의 뒤에 서서 슬쩍 그 화면들을 훔쳐봤다.
「대중이 사랑하는 스포츠 스타 1위, 수영선수 진 헤니」
「미국 수영계를 이끌 차세대 얼굴」
LA포스트의 기사였다. 타이틀 한 번 촌스럽네. 알렉스가 기사의 제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좋은 건데 왜 화를 내고 있어? 아닌 게 아니라, 나디아는 지금 전투모드였다. 멈출 줄 모르는 손가락을 보며 알렉스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갔다.
- 동양인 잡종 주제에 어떻게 미국을 대표하는 얼굴이야? 존나 맘에 안 드네.
- Re) 씨발, 얼굴 흰 것들 중엔 진 헤니보다 수영을 잘 하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띨빡아.
- Re) Re) 너 진 헤니냐? 니네 나라로 돌아가. 요즘 너 같이 더러운 칭챙총들 때문에 미국이 오염되고 있다고.
“…이런 씨발 새끼가.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자란 사람한테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게 말이야 뭐야?!”
“…….”
뒤에 서 있던 알렉스의 표정도 차게 굳었다. 그 밑으로도 도를 넘은 몇몇 댓글들이 보였다.
- 대중이 사랑한다고? 엿 먹으라 그래. 엉덩이 팔아서 얻은 1위겠지.
- 솔직히 에이든 테일러랑 사귀는 것도 다 돈 때문 아니야? 에이든 테일러는 지금 이용당하고 있다고! 분명 곧 수영 그만두고 연기자나 모델 한다고 하겠지. 역겨워.
- Re) 게이포르노 데뷔라면 봐 줄 의향은 있음. 백인 여럿한테 돌려가며 당하는 컨셉으로.
- 난 쟤가 꼴 같지도 않게 요셉룸 옷 입고 다니는 거 보면 짜증난다니까. 하나님, 더러운 것들로부터 에이든 테일러와 미국을 지켜 주세요. 아멘.
마지막 댓글 끝,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이모지가 붙어 있었다. 나디아는 그 꼴 같지도 않은 노란색 손을 보다가, 화면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표정이 사나웠다.
물론 정상적이거나 진을 응원하는 댓글이 더 많았지만, 중간중간 보이는 미친 새끼들 때문에 나디아는 혈압이 올라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요즘 들어 정신 나간 새끼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그녀 역시 근래 길거리를 다닐 때면 한층 더 험악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요즘엔 이상하리만치 히스패닉과 동양인 범죄자들에 대한 기사가 많았다. 때문에 이런 더러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덩달아 많아지고 있었다. 제게 꽂히는 그 차별의 시선이나 말들은, 기분이 엿 같았지만 참을 순 있었다. 또라이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더더욱 이 미국이란 나라가 그랬다. 겉으로는 상냥하지만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차별과 무시는, 이 땅에선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견딜 수 없었다. 누가 사랑해 달래? 누가 관심 달라 그랬냐고. 조용히 살던 저 멍청이를 꺼내다가 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게 에이든 테일러였다. 근데, 뭐? 누가 누굴 이용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화들이 나디아의 마음에 그득그득 쌓이고 있었다.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다. 안 돼. 지금 당장 데려갈 거야. 씨발, 이젠 못 참아.
“진, 너…….”
“나디아.”
나디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진을 부르다, 제 말을 막은 알렉스 그레이를 바라봤다. 분노와 짜증이 잔뜩 어린 나디아의 갈색 눈과 무섭도록 차분한 알렉스의 초록색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디아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주면 선발전이야. 그것만 끝나면 아무 걱정 없이 갈 수 있어.”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
“나디아, 네 말대로 미국에 있는 그 어떤 수영선수보다 진이 가장 뛰어나. 보란 듯이 전부 다 엿 먹이는 게 도망치는 것보다 나아. 도망치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될 뿐이야.”
진을 그렇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지? 낮게 덧붙여진 말에 나디아가 알렉스를 째려봤다. 그리곤 저 멀리서 굳은 얼굴로 제 눈치를 보고 있는 진을 쳐다봤다.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 진이 다시 한 번 조심히 물었다.
“나디아, 너 괜찮아…?”
“…안 괜찮아! 너 때문에 하나도 안 괜찮아!!”
“…….”
속이 상한 나디아가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진은 원망 섞인 그녀의 눈빛에 별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을 보다 나디아가 결국 눈을 가려 덮었다.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단 좀… 가라앉히고 있어. 진 데리고 잠깐 나갔다 올게.”
“…….”
“그리고 저거 보지 마. 정신 나간 새끼들이 하는 소리니까.”
알렉스는 진정이 필요한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였다. 그리고 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진이 알렉스에게 눈으로 물었다. 나디아는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이야? 알렉스는 그 걱정 어린 눈빛에 그저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었다.
“나디,”
“진, 지금은 그냥 혼자 둬.”
진은 얼굴을 손으로 가려 덮고 있는 나디아를 뒤로 하고 잠시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진의 눈에서 걱정이 뚝뚝 떨어졌다.
나디아는 진에게 소리를 지른 게 견딜 수 없이 후회가 됐다. 저 착한 것이 뭘 잘못했다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결국 나디아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작은 흐느낌이 텅 빈 집을 채우기 시작했다.
***
집 주변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알렉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진을 보다 툭하니 말을 던졌다.
“손바닥은 이제 괜찮나 보네.”
“아, 응. 다 나았어, 이제.”
“그럼, 누가 관리해 준 건데. 다 나아야지.”
능청스러운 알렉스의 말에 진이 손바닥을 매만지며 흐리게 웃었다. 울퉁불퉁한 큰 상처가 남아 있긴 했지만 이제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오른손이라 약을 바르는 거나, 붕대를 감는 게 어려웠는데 그때마다 꼬박꼬박 도와주던 알렉스였다. 진이 작게 고맙다고 말하며 옅게 웃자 알렉스 역시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나디아는 왜…….”
“넌 오늘 왜 기분이 안 좋았는데?”
“…어?”
“오늘 만났을 때부터 기분 별로였잖아. 아니야?”
알렉스의 물음에 진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굳어 있는 진의 표정에 알렉스는 잠시 기다렸다. 그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속으로 말을 고르던 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알렉스, 만약 누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걸 알게 되면… 아무래도 많이 화나겠지?”
“무슨 거짓말인데?”
“음… 그냥… 거짓말.”
뭐라고 설명하기가 참 애매했다. 에이든을 처음 만났던 열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를 전부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알렉스는 그런 진을 보며 대답했다.
“되도록이면 빠르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다 나중에 양치기 소년 되니까.”
“양…? 양을 쳐야 해…? 거짓말하면…?”
“…….”
이 심각한 분위기에 웃을 수도 없고……. 사실 웃을 일이 아니기도 했다. 아니, 애를… 대체 어떻게 키우신 거예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진 헤니의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깊은 한숨을 쉬던 알렉스가 말을 이었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 버리면 나중에는 사실을 말해도 안 믿어 줄 테니까, 빨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다는 거지.”
“아…….”
“무슨 거짓말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평소에 가까운 사이였으면 용서해 줄 거야.”
작은 거짓말 하나 때문에 아예 잃고 싶진 않을 테니까. 알렉스 그레이는 나디아와 진을 생각하며 덧붙인 말이었지만, 진 헤니는 전혀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까운 사이… 작은 거짓말……. 둘 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의 말대로 더 늦기 전에 말하는 게 맞았다. 진이 알렉스에게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맥아리가 없어지는 진 헤니의 얼굴에 알렉스가 서둘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주에 유니버셜 스튜디오 가는 거, 프론트 라인 패스로 사는 게 낫겠지?”
“……?”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스는 그 모습을 보다 속으로 피식 웃었다. 누구한테, 뭘 묻는 건지……. 조금 전까지 거짓말하면 양을 쳐야 하냐고 물었던 사람이, 프론트 라인 패스가 뭔지 알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알렉스가 자문자답을 시작했다. 주말이라 사람 엄청 많을 테니까. 맞아, 그냥 좀 더 비싸더라도 그걸 사는 게 나아. 간 김에 다 타야지. 턱을 매만지는 알렉스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다.
가서 뭘 먹이지. 거기 심슨 도넛이랑… 아냐, 일단 쥬라기 파크 쪽에서 고기를 먹이고……. 목에다 미니언 팝콘통도 하나 걸어 줘야 하나. 알렉스는 노란색 팝콘통을 목에 매고 있는 진 헤니를 상상하다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하마터면 밖으로 웃음이 새어나올 뻔해서, 그가 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아, 맞다. 아까 전에 결제 직전까지 다 했는데 노트북을 뺏겨버렸네. 그거 프린트 해 놔야 되는데.”
“저기, 알렉스. 고마워…….”
“뭐가?”
알렉스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은 계속 손바닥의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알렉스 그레이 역시 그 길게 찢어진 상처로 시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상처의 원인인 미친놈 하나가 떠올랐다. 차분하기만 하던 눈에 옅은 살의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안 챙겨 줘도 되는 건데, 매번 도와줘서 고마워. 정말이야. 나디아가 막무가내로 끌고 다니는 것도 있고, 내가 바보 같아서 착한 네가 마음 써 주는 거겠지만…….”
“…….”
“그래도 어쨌든 너한테는 귀찮은 일일 수도 있는 거고…….”
“안 귀찮아. 그냥 내가…….”
알렉스 그레이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제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에 그 스스로가 흠칫한 까닭이었다. 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 저 혼자 붕대를 매 보겠다고 끙끙거리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고, 주말마다 몸 상태가 엉망이 돼서 오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진 헤니가 맨발로 산타모니카의 해변을 걸을 때처럼 언제나 밝게 웃기를 바랐고, 아이스크림 콘 하나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변치 않길 바랐다. 남들 다 흔히 보고 먹던 것들에 하나하나 감탄하는 진 헤니가, 그것들을 전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 좋아하는 건… 음…… 내일이 기대되는 거 아닐까…?
언젠가 진이 제게 말했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알렉스는 그제야 당황한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내일이 기대되는 거…….
자신은 지금 그 어떤 것보다 진 헤니의 내일이 기대되고, 소중했다. 그의 내일이 오늘보다 행복하기를 바랐다. 이 세상에는 밝고 즐거우며, 좋은 것들이 많았다. 그가 어릴 때 해변에서 주웠다던 그 유리조각들보다, 빈말이라도 절대 좋은 거라고 말할 수 없는 에이든 테일러보다.
진은 갑자기 말을 멈춘 알렉스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알렉스 그레이는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 진 헤니와 눈을 맞췄다. 동그랗게 떠진 그 검은 눈을 보다 알렉스가 옅게 웃었다.
“뭐, 굳이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는 없지.”
“……?”
약한 당황이 서려 있던 그의 초록색 눈은 점점 확신으로 단단해졌다. 진이나 나디아의 눈에는 그가 그저 착실하고 성실한 수영선수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사실 조금 결이 달랐다.
알렉스 그레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동안 누군가를 앞지르고 그 보상을 목에 걸어 온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 메달들은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들이 아니더라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타고난 승부사였고 하찮은 상대방에게 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하는 것을 찾은 이상, 절대 양보는 없었다.
***
진 헤니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알렉스의 집에 돌아왔다. 안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는 중이었다. 진의 얼굴에 잔뜩 물음표가 떴다. 진은 살금살금 걸으며 나디아의 기색을 살피려 노력했다.
“빨리 들어와. 식기 전에 먹어야 되니까.”
나디아는 뒤를 힐끗 보며 진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진은 빠른 걸음으로 주방에 도착했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믈렛이 있었다. 진의 눈이 반짝거렸다.
“야, 알렉스. 계란 좀 썼다.”
“뭐든 다 써도 돼.”
“그래? 그럼 치즈랑 베이컨도 쓸래.”
알렉스의 말에 나디아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식재료를 마구잡이로 꺼내기 시작했다. 진이 그런 나디아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저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던 진이었다.
“저기, 나디아… 혹시 내가 뭐 잘못,”
“너 빨리 저기 앉아.”
“나디아…….”
“저기 앉으라고, 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통에 진이 다시 시무룩하게 걸음을 돌렸다. 나디아가 끝까지 저와는 눈도 맞추지 않아 진은 풀이 죽어 있었다. 나디아는 그저 운 티가 나는 붉은 눈을 숨기기 위해 그런 것뿐이지만, 진은 많이 속상해 보였다. 꼬리와 귀가 축 처진 대형견이 의자에 낑낑거리며 앉는 중이었다. 알렉스 그레이는 그런 진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자, 우주최강 오믈렛이야.”
“와……!”
“많이 먹어.”
진의 앞으로 어마어마한 오믈렛이 놓여졌다. 진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오믈렛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위에 맛깔나게 올려진 모짜렐라 치즈와 잘 구워진 베이컨이 없던 배고픔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뭐야, 내 거는 왜 이래.”
“너는 알렉스 그레이고, 쟤는 진 헤닌데 당연히 다르지.”
알렉스는 제 앞으로 놓인 작은 접시를 보며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디아는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차별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알렉스가 불만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나디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뭐, 어쩌라고. 그 표정에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계란이랑 다 내 냉장고에 있었던 거, 기억하지?”
“어차피 또 뭐 식단이 어쩌고 하면서 안 먹는다고 할 거잖아.”
“먹을 거거든.”
“그래? 웬일이래?”
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알렉스가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향했다. 여기 어디에 쉐이크를 넣어 놨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흘리듯 나디아에게 말했다.
“선발전 끝나고 뉴욕 가는 거, 나도 같이 가.”
“뭐?”
“나도 같이 간다고.”
나디아 놀즈는 작게 인상을 쓰며 알렉스 그레이를 살폈다. 뉴욕에 가겠다고? LA에서 계속 살던 애가 갑자기 왜?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기색을 살피던 나디아는 확신에 찬 초록색 눈과 마주치자마자 피식 웃었다.
“너 뉴욕에 자리 잡을 돈은 있냐?”
“내가 여섯 살 때부터 메달만 땄겠냐. 저 돌덩이랑 같이 상금도 주는 거 몰라?”
알렉스는 쉐이크를 흔들며 거들먹거렸다. 나디아가 그 모습을 보며 계란 두 개를 더 꺼냈다. 표정이 좀 재수 없긴 한데. 봐주지, 뭐.
“등신을 탈출한 기념으로 더 크게 만들어 줄게.”
“그래. 저건 너무 작아.”
솔직히 저건 너무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저를 흘겨보는 초록색 눈을 보다, 나디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저 나머지 한 놈만 바보를 탈출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탈출은 진 헤니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선발전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무조건.
“…식기 전에 먹어도 돼?”
“그럼, 당연하지.”
조심스럽게 묻는 진에게 나디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과 기분이 풀린 걸 확인한 진도 그제야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런 진을 바라보던 알렉스의 입에도 옅은 미소가 걸렸다. 다정한 미소와는 다르게 그의 초록색 눈이 단호한 빛을 뿜고 있음을, 나디아만이 알아채는 순간이었다.
***
「에이든, 이번 주말에는 같이 바다에 가도 돼? - 진 헤니」
「다른 데 갈 곳 없으면 산타모니카에 가고 싶은데 - 진 헤니」
「꼭 할 말도 있고 - 진 헤니」
소파에 깊게 기대앉은 에이든 테일러는 눈으로 그 메시지들을 훑을 뿐,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들어 올리진 않았다. 밝게 켜졌던 핸드폰의 화면이 다시 까맣게 빛을 잃었다. 그 모든 걸 지켜보는 푸른 눈이 무거웠다.
- 그래도 내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엔 네가 제일 예뻐.
지난 밤, 제게 그렇게 말하던 진 헤니는 사실 하와이에서 온 게 아니었다. 쿠알라 아일랜드라는 아주 생소한 곳 출신이었다. 미국에 그딴 섬이 있는지 처음 알았네. 그렇게 생각하는 에이든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대체 왜? 왜 그딴 걸 숨겼지? 왜 그딴…….’
그때, 에이든의 핸드폰이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푸른 눈이 발신인을 확인하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뒤에 붙어 있는 자료, 설명 좀 해 봐요.”
[ 은행 기록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는 상대방이 간단히 인사를 하기도 전에 본론을 꺼냈다. 그따위 거추장스러운 인사를 주고받기엔 에이든 테일러는 지금 참을성이 없었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엔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왜 그렇게 쉬운 자료를 다시 되묻냐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가만히 칼튼 윌리엄스가 말할 내용을 기다렸다.
에이든은 자신이 읽은 내용이, 자신이 해석한 바가 맞는지 판단이 되질 않았다. 대가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금 스스로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 진 헤니의 은행 계좌와 카드는 모두 정확히 7개월 전에 열렸습니다.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특이점은 사용처가 거의 다 도련님의 카드 사용처와 일치합니다. ]
“…….”
[ 그 전까지 기록은 전무합니다. 핸드폰 사용 기록도, 은행 기록도 없습니다. ]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불가능했다. 이따위 기록으로는 마치…….
[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LA에 온 목적 자체가 도련님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전 기록이 아예 없는 것도 사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의도적으로 삭제된 건 아닌가 싶습니다. ]
더 차가워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푸른 눈이 끝을 모르고 가라앉았다. 처음 자료를 읽었을 때 자신이 내렸던 결론과 동일했다. 그래, 사용처가 거의 다 일치하는 것까진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었다.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실들이 거기에 덧붙는다면 말이 좀 달랐다.
“하, 이러면 곤란하지.”
[ 예? ]
헛웃음이 끝을 모르고 터졌다. 삐뚤게 걸린 미소, 잇새로 꽉 다물려진 어금니가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그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목울대가 몇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했지만 신경질은 삼켜지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기록이 삭제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7개월 전부터 자신의 뒤를 따라다녔고, 제게 무언가를 숨겨 왔다면……. 지금 알게 된 건 그의 출신 하나였지만, 이렇게 되면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무섭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차갑기만 하던 푸른 눈이 끓어올랐다. 분노, 허탈함, 거기에 오묘하게 섞여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배신감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자신이 ‘배신감’ 따위를 느끼고 있음이 어이가 없었다.
왜? 믿기라도 했나 보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믿어? 누가? 누굴? 뭘 믿었다는 거야? 에이든 테일러는 애써 그 감정을 모두 뭉개 없앴다.
검은 눈이 품은 애정도, 저를 볼 때마다 기쁘다는 듯 웃던 맑은 미소도, 단 한 순간도 믿은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그 애정에 기댄 적 없었다.
병신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었다. 세상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감정도, 사랑도 존재할 리 없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자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이든 테일러는 넓은 거실 한쪽, 날짜순으로 정리돼 있는 신문을 모두 꺼내 들었다. 그가 앞에 쌓여 있는 많은 신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 헤니가 나온 모든 면들을 훑는 그의 눈이 살벌했다. 이젠 모든 게 다 의심의 대상이었다. 언젠가부터 많아지기 시작한 진 헤니에 대한 기사들까지, 전부.
진 헤니에 대한 기사들은 일정 시점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곧 국가대표 선발전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했던 스스로가 믿기질 않았다.
「진 헤니, 미국 수영계를 이끌 유망주」
「대중이 사랑하는 스포츠 스타 1위, 수영선수 진 헤니」
비슷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많은 기사들이 보였다. 그 기사들을 읽어 내리던 에이든은 무언가를 발견하곤 표정을 굳혔다. LA포스트에서 진 헤니에 대한 기사를 쓴 기자들의 이름이 지나치게 중복되고 있었다.
「조지 맥도넬」
「톰 재플린」
「제시카 윌슨」
그의 눈썹이 삐뚤게 들려올라갔다. 신문의 2면과 3면을 읽던 그는 급한 손길로 모든 신문의 첫 장을 다시 폈다.
「베버리힐스 고급 맨션가, 주거 침입 범죄 기승 - 조지 맥도넬」
「이민자 의료 보험안 개정에 대한 시위, 폭력으로 번져… 경찰관 2명 사망 - 톰 재플린」
「실종됐던 백인 남아 변사체로 발견, 용의자는 중국인 3명으로 밝혀져 - 제시카 윌슨」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고 있는 범죄 기사 밑에는 히스패닉과 아시안들의 사진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심지어 범죄의 용의자나 피의자가 해당 인종이 아닐지라도, 사진자료가 모두 그딴 식이었다. 기사는 눈에 뻔히 보이도록 ‘인종’과 관련된 부정적인 여론을 몰았고, 진 헤니에 대한 기사와 박자를 맞추듯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실리고 있었다.
푸른 눈이 가늘게 뜨이고, 커다란 손바닥이 턱 주변을 오갔다. 한참이나 기사들을 들여다보던 에이든 테일러는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했다. 한스 테일러의 선거 캠프가 답지도 않게 백인이 아닌 인종을 받아들이던 게 생각난 까닭이었다.
“하, 이런 씨발…!”
전부 레오나 테일러의 짓이었다. 거친 손길로 신문을 집어던진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벤츠의 차키를 급히 들었다. 당장 진 헤니에게 가야 했다. 가서 대체 무슨 짓거리들을 해 온 건지 물어야 했다. 일이 더 틀어지기 전에, 지금 당장.
차에 시동이 걸리고, 시동이 걸린 차는 화를 내듯 으르렁거렸다. 차 내의 불이 모두 들어오고, 지난 밤 진 헤니가 켜 놓은 라디오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뱉기 시작했다.
[ 속보입니다. 에이든 테일러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수영선수 진 헤니가 10년 전…… ]
에이든 테일러는 제 귀에, 제 머리에 입력되고 있는 모든 내용들에 움직임을 멈췄다. 거칠게 출발할 것 같았던 검은 차는 한참이나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심각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경박한 시트콤 예고로 넘어갈 때까지.
“하…….”
그의 입에선 계속 헛웃음이 새고 있었다. 핸들을 쥔 손에 핏줄이 일어섰다. 운전석에 몸을 기댄 채, 에이든 테일러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눈을 떴을 때, 푸른 눈에 떠 있는 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차가 아래에 스키드 마크를 남길 정도로 빠르게 출발했다. 늦은 저녁, 도로를 달리는 차가 많이 없는 것은 아주 다행이었다. 지금 에이든 테일러는 눈에 거슬리는 건 전부 다, 죽여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
진은 답장이 없는 메시지창을 보며 핸드폰 화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바다에 가자고 한 건 좀… 너무 그랬나? 그래도 바다에 가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뭔가 용기가 날 것도 같았다.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 말을 하면, 그때 생각이 날 것도 같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화면만 보던 진은 갑자기 들리는 노크소리에 현관을 바라봤다. 이 시간에 누구지……? 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색 수트를 입은, 키가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를 아래로 깔끔하게 내려묶은 여자였다. 창백해 보일 만큼 흰 피부인 그녀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 헤니 씨 맞으신가요?”
“맞는데… 누구세요…?”
여자는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며 뒤를 잠시 돌아봤다. 그녀의 뒤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까만 수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진은 그의 손에 들린 묵직한 보스턴백을 보다,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그의 눈엔 의문과 옅은 두려움이 떠 있었다.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전달하라 하셔서요.”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진의 발밑으로 그 보스턴백이 던져졌다. 그녀와 함께 왔던 남자가 커다란 몸을 숙였다. 그리곤 가방의 내용물이 보이도록 지퍼를 활짝 열어젖혔다. 진은 안에 담긴 수많은 달러묶음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이번 일에 대한 작은 성의라고 하십니다. 진 헤니 씨가 아니었다면 조금 귀찮아졌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여자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듯이 들고 왔던 신문을 진에게 내밀었다. 진은 가늘고 흰 손이 건넨 신문을 받아들었다. 신문을 읽던 그는 1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릴리는 신문을 빠르게 읽어 내리는 진을 바라보다, 수트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댔다.
“네, 레오나 님.”
[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돈이랑 신문만 주고 오라니까. ]
“신문 전달이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네, 별로 얼굴 맞대고 싶지 않은 새끼가 곧 올… 하, 이미 왔네. ]
레오나 테일러는 골목으로 들어오는 검은색 벤츠를 보다 욕을 씹었다. 굳이 마주칠 생각은 없었는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녀는 차에 기대 서 있던 몸을 일으켰다. 살벌한 표정의 에이든 테일러가 차에서 몸을 내렸다. 그의 푸른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레오나는 저와 빼닮은 그 얼굴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내가 씨발, 이래서 저 새끼를 보기 싫었던 건데.
에이든의 푸른 눈은 상처 받아 밑바닥을 절절 기는 사람의 것이었다. 유약함과 나약함, 배신당한 것에 대한 슬픔. 에이든 테일러의 눈에 가득 찬 쓰레기 같은 감정들에 레오나 테일러는 혀를 찼다.
그녀가 기분이 나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처럼 에이든 테일러가 덜떨어졌단 걸 알게 될수록,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의문이 커지니까. 저딴 병신 같은 걸 대체 어디다가 쓰겠다는 거야?
“내가 지금 좀 자존심이 상하려고 해서 하나 묻는데, 너 뉴스를 보고 나서 온 거야? 아니지?”
“하,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해. 아니라고 말해. 뉴스가 나오기 전에 내 짓인 거 알았다고.”
솔직히 지금 알아챈 것도 좀 늦었잖아.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레오나가 말을 덧붙였다. 이것마저도 아니면 정말 기분이 좆같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이든 테일러가 레오나의 위로 위협적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반쯤 제정신이 아닌 푸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에이든이 말했다.
“네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이런다고 그 새끼가 고마워 할 것 같아?”
“뭔 개 같은 소리야? 내가 고마움 따위나 받으려고 이딴 수고를 하는 줄 알아?”
“그럼, 뭐? 한스 테일러의 인정, 그딴 건 아니지?”
빈정거리며 뱉어진 말에 레오나 테일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 눈에 에이든 테일러가 헛웃음을 뱉었다.
“정신 차려. 넌 죽었다 깨나도 그 새끼한테 원하는 건 못 받아.”
“그러는 넌 가질 수 있을 거 같아?”
“뭐?”
그녀의 말에 에이든의 푸른 눈이 일렁였다. 그 모습에 레오나 테일러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걸었다. 약점인 걸 저딴 식으로 티내면, 모른 척 해 줄래야 해 줄 수가 없었다.
“불쌍한 내 동생. 사랑이 그렇게 받고 싶어서 어떡하지?”
“…….”
“맨손으로 칼 정도 막아 주면 다 되나 봐? 쉽다 해야 할지, 어렵다 해야 할지…….”
정신은 너나 차려. 걔가 널 진짜로 사랑하는 것 같아? 너를? 레오나 테일러가 어금니를 물며 말했다. 제 자존심을 상처 입혔다면 응당 저 새끼의 것도 난도질해야 했다. 난도질에 큰 힘은 들지 않았다. 진 헤니와 에이든 테일러, 그 둘의 사이는 이 정도만 말해도 알아서 박살 날 관계였으니까. 애초에 신뢰나 믿음, 사랑 따위는 에이든 테일러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사랑은 무슨 씨발, 역겹게. 똑바로 생각해. 십만 달러 정도면 손바닥 찢기는 건 우스울 수도 있잖아? 잘 아는 애가 왜 그래?”
“닥쳐.”
“레오나 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레오나가 걱정됐는지 서둘러 내려온 그녀의 비서였다. 조급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주인에게 도착한 릴리 콜린스는 험악한 분위기에 잠시 얼어붙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너희 아버지한테 당선 축하한다고 전해 드려. 좋은 딸을 두셨네.”
서늘한 표정의 에이든 테일러가 그녀를 지나쳤다. 지금은 레오나 테일러 따위한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레오나 테일러도, 좆같은 한스 테일러도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 좁은 복도와 계단을 지날수록 탁해지고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문 바로 앞에 놓인 보스턴백과 그 안의 현금을 보며 알 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앞에 넋을 놓고 서 있는 진 헤니의 손엔 신문이 하나 들려 있었다. 내용은 뻔했다.
“내일 자 신문인가 봐?”
“에… 에이든, 이거 내가 설명할 수 있,”
“아, 설명…….”
에이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에게로 다가섰다. 언젠가 따뜻함을 짙게 머금었던 검은 눈 안에는 충격과 두려움, 공포 따위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는 제게로 닥쳐온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 진 헤니의 얼굴은 절박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얼굴을 보며 비리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앞에 놓인 묵직한 보스턴백을 발로 밀며 안으로 조금 더 들어섰다. 진은 뭐라 말을 덧붙이려 입을 뗐지만 목소리는 뱉어지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그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막혀오는 숨에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에, 이… 든…!”
진 헤니의 목을 쥔 손엔 금방 목을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푸른 눈이 재미있다는 빛을 띠고 있었다. 에이든이 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한가 보네?”
진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목을 조르고 있는 커다란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무리였다.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해 보려고 했지만 입에선 컥컥거리는 소리 말곤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설명이 아니라… 아니란 말이 제일 먼저 나왔어야지, 진.”
진 헤니의 손에 들려 있던 신문이 바닥에 뒹굴었다.
「10년 만에 밝혀진 에이든 테일러 실종, 유괴 사건의 전말」
「그의 연인인 수영선수 진 헤니가 연관돼 있음이 밝혀져 충격」
제멋대로 펼쳐진 신문 1면에는 어린 에이든 테일러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진과 에이든, 두 사람의 사진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