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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rigger (4/16)

(4) Trigger

에이든은 LA 슬럼가 한쪽,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바 안에서 낡은 TV를 보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그를 제외하고 손님이라곤 없었다. 허름한 가게 한 구석의 테이블에 앉은 그는 TV가 보여 주는 뉴스에 집중했다.

[ 며칠 전 일어났던 에이든 테일러와 그의 연인, 진 헤니 폭행 사건에 대해서 상원의원 후보인 한스 테일러는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는 상황입니다. ]

[ 29세 이하 유권자 선호도가 지난주보다 약 10포인트 가량 떨어진 것을 보았을 때, 이 침묵이 선거에 독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에이든 테일러가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은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더러운 기분이 가시질 않는단 말이지.

“야, 여기!”

에이든은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문 쪽을 바라봤다. 오늘도 어김없이 입에 물려져 있던 대마는, 테이블에 지져져 검은 그을음을 남기고 버려졌다. 에이든을 부른 남자는 약간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뉴스가 씨발, 존나 뜨던데? 걔네 좀 쓸모 있었어?”

한 손가락도 빠짐없이 두꺼운 금반지를 끼고 있는 남자가 에이든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남자가 앉자 싸구려 소파가 푹하고 주저앉으며 먼지를 토해냈다. 에이든은 무감한 표정으로 대마 한 대를 새로 꺼내 물었다.

“오랜만이네, 꼴랴.”

“그러니까! 너 존나 약 좀 끊었다고 연락까지 씨팔, 그렇게 드문드문 할 거야?”

경박한 목소리였다. 말 한 마디에 욕이 하나씩이었다. 요즘 약장사가 얼마나 안 되는지, 중국 새끼들이랑 새로 거래를 텄는데 얼마나 답답한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근황이 이어졌다.

에이든은 주절주절 이어지는 니콜라이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재를 털었다. 다른 손으로는 앞에 놓인 맥주병을 톡톡 치는 중이었다. 입도 대지 않은 맥주병에선 물방울이 흘러, 테이블에 젖은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후덥지근한 낮이었다.

마치 땀이라도 흘리는 것 같은 맥주병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가, 슬쩍 눈을 들어 바 입구를 쳐다봤다. 입구에는 두 명이 더 있었다. 니콜라이가 데려온 새끼들이었다. 문에 스쳐지나가는 모습이 언뜻 보일 때마다, 바지춤에 넣어진 권총 끄트머리가 살짝 보였다.

“대마? 시발, 너 전보다 더 독한 걸로 피우나 보다? 냄새가 좀 다른데.”

“아, 뭐… 그럴 일이 좀 있어.”

“그딴 약 같지도 않은 비실비실한 거 입에 물어서 뭐 하냐. 할 거면 좋은 거 좀 줄까? 이번에 존나 좋은 거 하나 들어왔는데.”

“약은 이제 됐어.”

약이란 약은 다 싫어서. 에이든이 질린단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 좆같은 약 먹기 싫어서 피우는 건데, 왜 또 약을 하래. 말 같지도 않은 말장난을 늘어놓자 니콜라이가 미친놈이라며 낄낄 웃었다. 실없는 대화였다. 지루한 이야기의 중간, 에이든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에이든의 눈에 옅은 이채가 감돌았다.

「오늘 봤으면 해. 저녁에. - 진 헤니」

「6시쯤. 그때 그 호텔방에 있을게. - 진 헤니」

그 대회 이후로 3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에이든은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에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먼저 연락이 왔다는 것도 의외인데, 메시지의 내용은 훨씬 흥미로웠다. 그는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4시가 되고 있었다.

“꼴랴, 도와준 것도 있으니 인사는 확실히 할게.”

“당연하지. 내가 그 존나 좋은 인사 받으려고 도와준 건데.”

묘한 눈빛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던 에이든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 말에 니콜라이는 두터운 두 손을 맞부딪히며 쩍하는 소리를 냈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난 말이야. 씨팔, 네가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해서 존나 좋아, 에이든. 알지?”

니콜라이가 금니를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에이든이 입고 있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려는 제스쳐를 취하자 그는 안달이 난 손을 테이블 위로 가져갔다. 돈이든, 명함이든. 무언가 에이든 테일러에게서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럼. 중요하지. 기브 앤 테이크.”

“뜸 들이지 말고 당장 내놔!”

채근하며 보채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느긋한 손길로 에이든이 꺼내 든 것은 흰색의 봉투였다. 초대장? 니콜라이가 눈을 빛내며 그 봉투를 받아 들었다.

“네 개 잘 썼어. 이번에 크게 선상 파티가 있는데, 씀씀이가 큰 친구들이니까 잘 챙겨 주고.”

“몇 장 정도 나오는데?”

“한 장.”

십만 달러. 쓰레기 네 개를 던져 주고 얻은 것 치고는 큰 대가였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니콜라이가 품에서 스위스 군용 나이프를 꺼냈다. 찰칵 소리를 내며 펴진 칼이 봉투를 갈랐다.

안에서 초대장을 빼어들며 추잡스럽게 웃는 그를 보다, 에이든이 턱을 쓸었다. 성마른 손바닥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처럼 턱과 입술 근처를 오갔다. 거래는 아주 깔끔했다. 원했던 것은 모두 얻었고, 자신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적당한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에이든 테일러는 깔끔하게 끝난 거래와는 다르게, 잔뜩 손해를 본 것 같은 찝찝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시 따져 봐도 어떤 게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푸른 눈이 싸구려 나무 테이블 위를 오갔다. 신난 니콜라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에이든의 귀에 단 한글자도 입력되지 않았다. 아, 그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엔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군용 칼을 집어 들었다. 반질한 은색의 칼이 빛을 반사했다.

“꼴랴, 내가 뭐 하나 돌려주는 걸 깜빡한 것 같아.”

“어? 시발, 뭐 더 주려고? 나야 존나 좋지!”

그가 만지작거리던 은색의 칼을 아래로 향하게 쥐었다. 답을 찾은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야, 이번 파티에 차일드가 애들도… 아악!”

쾅소리와 함께 나무 테이블이 쩌적하며 갈라졌다. 신나게 말하던 니콜라이는 손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아픔에 소리를 질렀다. 그의 왼손이 피를 뿜고 있었다. 별안간 꽂힌 칼에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 이 씹…!”

“내가 왜 아직도 기분이 더러운지 곰곰이 생각을 해 봤어. 아무래도… 네가 보낸 새끼 하나가 내 배에 칼 꽂으려고 한 것 때문인 것 같아.”

“씨팔, 이 개새끼가!!”

“꼴랴, 이쯤 한 것만 해도 솔직히 내가 많이 참은 거야.”

차분하고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에이든의 표정은 짜증과 신경질이 가득했다. 니콜라이의 손바닥 아래 깔린 초대장이 핏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시발, 그때 그 새끼가 못 꽂은 칼은 오늘 내 총알로 대신 꽂고 가라, 씹새끼야.”

니콜라이가 다른 한 손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에이든에게 겨누며 말했다. 에이든이 그 말을 듣고 작게 인상을 썼다.

“하긴 못 꽂긴 했는데.”

에이든의 머릿속에 피가 질질 흐르던 손바닥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 건 더러운 거야.”

안에서 들리는 소음에 밖에 서있던 두 놈이 눈치를 보며 바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둘 다 총을 장전한 상태였다.

“여기서 나 죽이고 십 만 달러 다 날리려고? 내가 죽으면 그거 가지고 못 들어가지.”

니콜라이는 화가 머리까지 오른 얼굴로 에이든과 손 아래 깔린 초대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흰색의 초대장에는 금박으로 ‘에이든 테일러’라 박혀 있었다. 그걸 이제야 발견한 니콜라이가 득득 이를 갈았다. 시발, 죽이면 진짜 못 쓰겠군. 고민되는 눈치였다.

돈 말곤 정신도, 생각도 없는 미친 재벌가 새끼들에게 팔 수 있는 마약. 그 묵직한 상자들과 봉투의 무게를 생각해 보던 니콜라이가 들고 있던 권총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옆에 서 있던 두 남자도 에이든에게 겨누고 있던 총구를 내렸다.

니콜라이가 이를 갈며 손등에 꽂힌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그리곤 어금니를 잔뜩 씹으며 끄트머리가 붉게 젖은 초대장을 주워들었다. 축축한 종이조각은 그의 바지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든 테일러가 비리게 웃었다. 이제야 아주 조금 찝찝함이 가신 마음으로 그가 일어섰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

진은 호텔방 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틈틈이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너무 약속 시간에 촉박하게 보냈나.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말을 못할 것 같았는걸. 마음은 먹은 김에, 오늘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그리고 나디아 역시.

「나디아, 너 진짜 오려는 거 아니지?」

「나 진짜 잘 지낸다니까. 정말이야! 그때 말했던 그 첫사랑이랑 데이트하느라 바쁘니까 절대 오지 마.」

「나디아, 제발 전화 좀 받아 봐.」

마지막 메시지에 덧붙여진 우는 이모티콘이 진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평상시에 나디아의 메시지를 씹었던 벌을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릎 위에 올려진 오른손에는 푸른색의 반깁스가 둘러져 있었다. 3일 전 대회에서 꿰맸던 손을 다 터뜨려 놓은 진 헤니는, 병원에 가서 엄청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루 만에 전부 벌어져 버린 상처는 피와 의료용 실 따위가 엉겨 붙으면서 더 처참한 모양새를 했다. 아무리 방수용 테이핑을 했다고 한들, 물에 잔뜩 닿은 상처는 붓고 화끈거리고 진물이 났다. 의사는 진이 손으로 아무것도 못하도록 손에 반깁스를 채우길 선택했다. 당연히 훈련이고 뭐고 전부 할 수 없었다.

약간은 둔한 움직임으로 무릎 위를 초조하게 두드리던 손이,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우뚝 멈췄다. 진은 반사적으로 시계를 올려다봤다. 시계는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에이든 테일러 때문에 진이 조금 긴장한 얼굴을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지만 막상 에이든을 볼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진창이 됐다. 아냐, 오늘 분명히 말하기로 결심했잖아. 진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차분히 마음을 정리했다.

에이든은 쓰고 있던 검은색 모자를 벗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진짜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 헤니를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아직 딱지가 앉아 있는 진 헤니의 입술과 얼굴을 훑어보다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얼굴의 붓기나 멍은 많이 빠진 모양이었다.

에이든이 담배 케이스에서 대마를 꺼냈다. 거의 하루 종일 피우는 수준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또 좆같은 목소리가 들릴지 몰랐으니까.

“…안녕, 에이든.”

“용건은?”

뭐, 묻지 않아도 뻔했다. 더 이상 못하겠다거나,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고 따지거나. 그때 못했던 말을 하겠지. 진 헤니의 눈빛은 뭔가 단단히 결심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흠… 선거 직전까지 쓰려면, 돈을 더 올려 준다거나 조건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진 헤니가 아니어도 된다는 옵션은 고려되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선택지를 두고 진 헤니를 설득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사실 그런 선택지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에이든은 상대방이 먼저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대화의 턴을 넘겼다. 굳이 이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조급해 보일 뿐이었다.

진은 잠시 망설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직 딱딱하게 자리한 피딱지가 느껴졌다. 속으로 할 말을 가다듬던 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때의 보수를 못 받았어.”

“뭐?”

예상과는 다른 말에 에이든이 되물었다.

“그때… 아무것도 못 받았다고.”

“아.”

단호한 검은 눈에 에이든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한쪽 뺨에 예쁜 보조개가 생겼다. 그거라면 아주 쉬웠다. 그는 점퍼의 주머니에서 체크북을 꺼냈다. 이번 일은 조금 후하게 쳐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수표에 금액을 적는 에이든 테일러를 보다가 진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돈은 됐어.”

숫자 ‘1’ 뒤로 ‘0’ 네 개를 적어 넣던 에이든의 손이 멈췄다. 진이 약간의 의아함을 담고 있는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걸 얻었으면, 나한테도 내가 원하는 걸 줘.”

흥정이었다. 대충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에이든은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진이 그 고갯짓에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을 달싹였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조금 떨리는 듯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에이든 테일러가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진의 입에선 한동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망설이는 진에게 에이든이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진의 입이 꾸욱 다물렸다. 아무것도 없는 빈 테이블 위를 오가던 눈이, 푸른 눈동자를 직시했다.

***

“원하는 걸 달라고 해서 성심성의껏 주고 있는데…….”

“…윽!”

“이쪽은 다 받아먹질 못해서 어떡하지.”

에이든은 아직 반도 들어가지 못한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잔뜩 힘이 들어간 진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쥐어오는 손길에 붉게 달아오른 접합부가 움찔거렸다. 엎드려 있는 진 헤니는 받아들이기가 버거운지 침대 시트를 쥐어뜯는 중이었다. 오른손에 있던 깁스는 어느새 침대 저 멀리에 떨어져 있었다.

“하… 지금 당장 달라고 한 적은 없… 아윽!!”

억울함을 호소하던 진이 깊게 들어오는 에이든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꽉 다물렸던 곳을 뚫고 들어오는 묵직한 것 때문에 진의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들어가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었지만 영 힘들어 보였다.

“그래? 나는 지금 당장 주고 싶어서 말이야.”

에이든은 진의 뒷머리를 그러쥐며 말했다. 뒷머리를 잡고 옆으로 돌려 내리누르자, 발갛게 달아올라 잔뜩 풀어진 진의 얼굴이 보였다. 입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원하는 걸 가졌으니, 제게도 자신이 원하는 걸 달라 말하던 진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몇 번이나 뜸을 들였다. 에이든은 맞은편에 앉아 느긋하게 진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진은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고, 뭔가 입을 떼려 하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멈추길 반복했다.

- 내가 원하는 건…….

바닥 어딘가를 헤매던 진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에이든을 향했다. 붉게 변한 눈꼬리와 귓바퀴를 보던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의 목울대가 크게 울리는 걸 보던 그가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껐다. ‘진 헤니가 원하는 것’의 의미를 알아들은 에이든 테일러가 눈을 휘어 웃었다.

제법 깜찍하던 흥정을 생각하며 에이든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조금 전까지 더럽던 기분은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간 지 오래였다. 그가 상체를 내려 진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상체가 거의 맞닿으며 더 깊어지는 삽입에 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까 손가락으로 휘저을 땐 분명 흐물흐물 했는데 갑자기 왜 그래, 진.”

“하… 아윽!”

“힘을 빼야 넣어 주던지 할 거 아니야.”

달라며? 귓가에 낮게 뱉어지는 음성에 진이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등줄기에 잔뜩 소름이 오른 채였다. 얼굴을 돌려 숨기려고 하자, 에이든이 다시 진의 뒷머리칼을 잡아 돌렸다. 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눈물에 푹 젖은 검은 속눈썹을 바라보던 에이든 테일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진의 귓바퀴를 물었다. 귀를 짓씹던 입이 혀를 내밀어 깊은 곳까지 침범해 들어갔다. 귀 안에서 울리는 젖은 소리와, 참을 수 없게 뜨거운 감각에 진의 상체가 결국 휘청였다.

“하아…! 그만… 아!!”

“하…….”

진 헤니가 숨을 깊게 내뱉는 순간,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것이 뿌리 끝까지 삼켜졌다. 에이든의 입에서도 짙은 한숨이 터졌다. 집어넣기만 했는데도 움칠거리며 성기를 씹어대는 진 때문에 에이든이 어금니를 씹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에이든은 상체를 세워 엎드려 있는 진을 내려다봤다. 탄탄한 등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옆구리부터 날개뼈까지, 손으로 덧그리듯 몸을 쓸어 올리자 진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몸이 약간 앞으로 움직이며, 꽂혀 있던 성기가 아주 조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다 넣어 놨더니.”

에이든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진의 허리를 두 손으로 세게 쥐었다. 강한 힘으로 진의 몸을 고정한 그가 이윽고 성기를 때려박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으… 아! 잠, 깐…! 윽! 너무… 하아! 너무 빨라!”

땀에 젖은 몸끼리 부딪히며 철썩이는 소음을 만들어 냈다. 처음부터 치받듯 움직이는 에이든 때문에 진이 몸을 피하려 했지만, 꽉 잡힌 허리 때문에 앞으로 기어나갈 수도 없었다.

내벽을 잔뜩 비비며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커다란 성기에 진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배 안쪽에서부터 간지럽게 피어올랐다. 깊게 쑤셔지는 탓에 오싹함이 전신을 내달렸다. 어딘가 잘못될 것만 같은 공포와 더불어 몸 안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신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입에서 마구잡이로 터지는 소리를 참기 위해 진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깨물린 아랫입술에서 작게 툭하는 소리가 났다. 아슬아슬하게 피딱지가 앉아 있던 상처가 다시 벌어져 핏방울을 뱉어냈다. 입술이 다 터져 버린지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행위는 격렬했다. 아! 아아! 소리를 참으려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 입이 벌어지고 신음이 터졌다.

쾅쾅 때려박듯 움직이는 에이든의 성기가 안쪽을 마구잡이로 후벼댔다. 내벽을 짓이기던 것이 깊은 곳 어딘가를 꾸욱 누르자 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눈앞이 희게 번졌다.

“하악! 아으… 안, 돼!”

다시 잔뜩 조이며 오물거리기 시작하는 구멍에 에이든이 움직임을 멈추고 사정감을 참았다. 에이든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진의 허리를 잡고 있는 커다란 손에 잔뜩 핏줄이 섰다. 잠시 숨을 고르며 인상을 찡그리던 그가 쥐어짜듯 움직이는 안에서 성기를 빼냈다.

몸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던 것이 단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에 진의 몸이 벌벌 떨렸다. 허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아직도 에이든의 성기가 안을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아서 진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깊게 숨을 몰아쉰 에이든이 한 손으로 진의 엉덩이를 쥐어 벌렸다. 젤과 체액이 진득하게 묻은 구멍이 붉게 달아올라서 풀어졌다 조여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집요하게 그 모습을 들여다보던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의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반쯤 몽롱하게 풀린 진의 눈이 에이든을 향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벌써 이러면 안 되지.”

“흐으… 잠깐. 잠깐만…!”

숨을 잔뜩 몰아쉬며 진이 애원했다. 밭은 숨을 내쉬는 그 입을 바라보던 에이든이 손을 진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입술에 잔뜩 묻어 있는 붉은 핏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눌러 문질렀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아픔에 진이 고개를 돌려 그 손길을 피하려 했지만 에이든의 커다란 손에 턱이 잡혀 당겨졌다. 에이든이 비릿하게 웃으며 피가 묻은 엄지손가락을 진의 입 안으로 가져갔다.

엄지손가락이 진의 혓바닥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피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헤집듯 움직이는 손가락에 예민한 점막이 한껏 달아올랐다. 반사적으로 진의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안에서 문질러지는 손가락이 젖은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목울대를 울려 침을 꿀꺽 삼킨 진이었다.

에이든은 살짝 뒤로 젖혀져 꽤나 관능적인 곡선을 만들고 있는 진의 턱과 목덜미를 바라보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혓바닥에 시선을 빼앗겼다. 새빨간 피가 묻은 혓바닥이 척 보기에도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진의 턱을 잡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하… 시발, 진짜.”

탄식처럼 욕을 뱉던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급히 진의 입술을 삼켰다. 당장에 입을 갖다 대지 않으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하게 혀를 얽었다. 비린 맛이 나는 진의 혀를 감아올리던 에이든이 진의 입천장을 쓸었다.

“으응…!”

막힌 입에서도 신음이 터졌다. 에이든이 진의 뒷목을 강하게 쥐었다. 진의 입안과 혀를 음미하듯 빨던 그는 아직도 피가 새어나오는 입술을 물었다. 그리곤 찢긴 상처를 핥아 올리자 진의 아랫입술이 약하게 떨렸다.

에이든이 진의 입술을 물고 빨며, 자신의 아랫배에 닿아오는 진 헤니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꼿꼿하게 일어서 선단 끝에서 투명한 물을 흘리던 것이 에이든의 손에 문질러졌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힘을 주어 성기를 흔들기 시작하자 진의 허리가 들려올라갔다. 진이 고개를 저으며 맞닿아 있던 입이 엇갈렸다.

“에이든…! 아으! 하… 아아!”

안 그래도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에 쏟아지는 자극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이 질질 흘러나온 투명한 액을 문댔을 때는 본능적으로 에이든의 상체를 밀어냈다.

“그만! 흐윽! 그만…! 제발…!”

진이 그만해 달라고 애원을 해도, 에이든은 멈춰 줄 생각이 없었다. 진의 허리와 다리가 바르작댔다. 진이 손을 뻗어 제 성기를 쥔 손을 떼어내려 허둥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 아랫배가 빠듯하게 차오르고, 이내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아흐윽! 아아!!”

진의 상체 위로 정액이 후두둑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에이든이 제 성기를 진의 몸에 쑤셔 넣었다. 사정을 하며 강하게 조여 오는 구멍에 에이든이 사납게 웃었다. 그가 바르르 떨리고 있는 진의 다리를 한껏 벌리며 허리짓을 시작했다. 쩍쩍거리는 마찰음이 요란하게 공간을 울렸고, 이젠 신음이 아니라 흐느낌에 가까운 진의 소리가 호텔방을 가득 채웠다.

에이든은 엉망으로 젖어 울고 있는 진을 보다, 상체에 아직 남아 있는 멍자국들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진의 구멍에 성기를 푹푹 박아 넣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그러자 상처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진이 숨을 들이켰다. 옆구리의 피멍을 꾸욱 눌러오는 손바닥 때문에 몸이 잘게 경련했다.

“하아, 아파?”

“흐읍…! 하, 하지… 아읏! 누르지, 아! 하악!”

“하, 아프기만, 한 게, 후… 아닌 것 같은데.”

상처가 짓눌리며 진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문제는 그 아픔까지 쾌감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었다. 푸르게 든 멍에 힘이 가해지자, 그곳에서부터 전기가 오르듯 몸이 울렸다. 한번 사정한 뒤 조금 힘을 잃었던 진의 성기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진은 믿을 수 없는 제 몸의 반응에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에이든이 목을 울려 낮게 웃었다. 손바닥으로 상처를 다시 꾹 누르자, 매끈한 진 헤니의 복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탄탄하게 잘 빠진 몸 위로 번져 있는 멍이 꽤나 감흥을 불러일으켜서, 에이든의 허리짓이 한층 거세졌다. 쩍쩍 몸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씨팔, 미, 치겠네.”

“에, 이든! 아! 아윽…! 하, 죽을 것… 같, 아으응!”

잔뜩 흔들리며 휘발되는 정신에 진이 본능적으로 에이든에게 손을 뻗었다. 에이든은 제 어깨를 잡아오는 손을 흘끗 보다, 느른하게 웃으며 그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붕대가 감긴 그 오른손에 입을 가져다 댔다. 붕대 위로 이를 세워 잘게 씹자 구멍이 한껏 조여졌다. 진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그의 성기가 다시 한 번 정액을 뱉어 내고 있었다.

진의 허리가 잔뜩 위로 들리고, 탄탄한 허벅지가 벌벌 떨리고 있었지만 에이든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땀에 젖어 있는 검은 머리칼과, 파르르 떨리는 검은 속눈썹.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은색 눈동자가 제게 애원하고 있었다. 검은 눈은 언제나처럼 당장에라도 뽑아 없애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고, 동시에 좆같이 아름다웠다.

몸이 이따위가 될 때까지 맞고도 제 몸을 먼저 살피던 그 검은 눈, 손이 다 헤지고도 저를 원한다며 똑바로 마주쳐오던 그 눈.

에이든의 눈동자가 탁한 빛을 뿜었다. 푸른 눈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소유욕과 광적인 흡족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신경질과 짜증은 이제 아무렴 상관없었다.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정도로 거세던 움직임이 멎고, 에이든이 탄식을 뱉었다. 여전히 진 헤니의 오른손에 이를 세운 채였다.

***

진은 가물가물한 시야를 어떻게든 잡아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에이든과 몸을 섞은 건 세 번뿐이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음을 떠올렸다. 두 번 달라고 했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진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끙하는 소리와 함께 상체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진이 옆구리를 감싸 쥐었다.

“아으…….”

에이든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집요하게 상처들을 짓누르거나 이로 짓씹어댔다. 다시 꿰매 놓은 오른손을 에이든이 잘근댈 때마다, 진은 그만하라 애원하며 눈물만 줄줄 흘려야 했다. 그 애절한 부탁은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를 세울 때마다 진의 성기가 꺼떡거리는 걸 본 에이든이 절대 멈춰 줄 리 없었다.

계속해서 울고, 소리를 질러대던 목이 텁텁했다. 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침대 밖으로 내렸다. 그대로 일어서려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돌려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한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왜… 안 갔…….”

“뭐야, 줬으면 꺼지라 그거야?”

방금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에이든의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샤워 가운만을 입고 나온 그는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푸른 눈에 옅게 감도는 만족감이 그 증거였다. 검은색 담배 케이스에서 대마를 꺼내 불을 붙이는 동안에도 그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진은 울긋불긋한 제 상체를 내려 보다가, 침대 옆 옷걸이에 걸려 있는 로브를 주욱 당겨 꺼냈다. 맨몸으로 일어나기에는 조금… 창피했으니까. 방금 전까지 온몸을 물고 빨던 사이에 맨몸 하나 보여주기가 부끄러운지, 진은 뒷목까지 새빨개지고 있었다.

에이든은 멀찍이서 그 얼척 없는 모습을 지켜보다 헛웃음을 켰다. 돈 대신 에이든 테일러를 달라던, 꽤나 도발적이던 흥정과는 다시 거리가 멀어진 그였다.

“부족하면 말해.”

“아, 안 부족해.”

벽에 기대 담배를 태우며 에이든이 짓궂게 말했다. 진이 그 섬뜩한 말에 고개를 저으며 퍼뜩 대답을 붙였다. 진을 보는 에이든의 뺨에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그래? 내가 몸 팔아 보는 건 또 처음이라, 한 번에 얼마씩인지 감이 잘 안 오네.”

“몸을 팔…….”

“한 번에 천? 아냐, 너무 싼가? 오천 달러? 네 번이니까 이만 달러네. 충분해?”

아주 만족스러운 섹스 뒤, 대마까지 입에 문 에이든 테일러는 평소답지 않게 실없고, 말이 많았다. 싱글싱글 웃으며 이만 달러 따위를 말하고 있는 그를 보며, 진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계산이 말도 안 됐다. 아주 터무니없었다. 네 번…? 분명 기억을 하는 데까지만 해도 네 번 넘게 사정한 진 헤니로서는, 에이든의 셈법이 영 엉터리처럼 느껴졌다. 계산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돈으로는 환산을 해 봤자였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니 다른 걸 달라고 요구한 거였으니까.

진은 대회 당일, 또 다시 물속에서 끔찍함을 느껴야만 했다.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보다 편안하고 행복해야 할 물속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리고 그 끔찍함을 보상받을 수 있는 방법은 돈 따위가 아니었다.

팔을 뻗고, 다리를 저을 때마다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손바닥이 철썩이며 물을 가를 때마다 진은 당장에라도 오른손을 잘라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절대 중간에 포기할 수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를 떠나, 다시 섬 속 좁디 좁은 세계로 돌아간단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을 휘젓는 진 헤니의 몸엔 그를 향한 온갖 욕심이 들어차 있었다. 그런 관계를 원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그저 너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툭툭 벌어지고 있는 오른손의 살점과 함께 터져나가고 없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 속, 어느 날의 그때처럼 진 헤니의 눈엔 맑고 순수하지만, 절대 순진하지 않은 욕망이 넘실댔다. 갖고 싶었다. 이 정도면 욕심을 조금 더 부려도 되지 않느냐고, 머리 한 구석이 말했다.

그를 가지는 데 방해가 된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 왔는지 따위는 그에게 말하지 않아도 됐다. 네 인생을 망쳐 버렸다던 그 검은 눈이 자신이라고, 나라고 왜 말해야 해? 그랬다가는 이마저도 가질 수 없어질 게 뻔했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죄책감 따위는 사치였다.

뭐든 내줄 수 있었다. 대신, 자신도 원하는 것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진 헤니는 그 어떤 것보다 에이든 테일러를 원했다.

“…아침까지 있다 갈 거야?”

“아무래도 부족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진이 잔뜩 쉰 목소리로 물은 말에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있다가 가.”

그렇게 대꾸한 진이 몸에 걸친 로브의 끈을 질끈 묶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침대를 벗어나 컨디바로 향했다. 에이든은 그런 진을 아래위로 찬찬히 훑어보며 담배를 깊게 빨아 올렸다.

에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때와 똑같은 감상이 에이든의 머릿속에 지나갔다. 진 헤니는 훌륭했다. 생각보다 잘 짜여져 성감을 불러일으키는 몸? 거지같던 안경과 앞머리가 사라지자 드러난 꽤나 봐 줄만 한 눈매?

아니, 그딴 건 비교도 안 되지.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결국 저를 원한다고 매달려오는 점에서 진 헤니는 아주 흡족한 물건이었다.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그 모든 행동이 에이든 테일러의 마음 깊은 곳 저 밑바닥을 긁어댔다.

다 타들어간 담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에이든이 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물을 마시던 진이 고개를 들었다. 에이든이 끈이 질끈 묶여진 진의 로브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또 푸를 건데, 뭘 이렇게 꽁꽁 매 놨어.”

“……!”

“아침까지라며?”

나른한 목소리, 그 뒤로 로브의 끈을 거칠게 잡아 푸는 에이든의 손길이 뒤따랐다. 아직 밤은 길었다.

***

아침이 가까운 새벽이었다. 그 긴 밤 내내 에이든에게 시달렸던 진은 어렵사리 눈을 들어올렸다. 목은 텁텁했고, 몸 여기저기가 화끈거렸다. 밤새 소리를 지른 목이 물을 달라 성화였다. 진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몸을 내리려 했다. 혹시 에이든을 깨울까 싶어 침대 위를 힐끗 보던 진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슬픈 꿈을 꾸는 어린 아이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꿈속의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아이 같았다. 커다란 침대 위, 에이든의 몸 역시 커다랬지만 진에게는 작고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에이든…?”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진의 입에서 뱉어졌다. 그는 물을 마시러 가려던 것도 잊었는지 에이든을 살피기 바빴다. 웅크려 있던 에이든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뱉어지자 진의 표정이 굳었다.

“에이든…!”

에이든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어쩔 줄 모르던 진의 손이 에이든의 어깨에 얹혀졌다. 진은 작게 에이든의 몸을 흔들었다. 식은땀이 맺히고 있는 에이든의 이마를 보며, 진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어디가 아픈 건지, 힘든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그때 배에서처럼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지.

“에이든, 일어나 봐…!”

진의 검은 눈에 걱정과 함께 초조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

- …이든!

귀가 웅웅거렸다. 소리가 제대로 입력되질 않았다.

- 에이든…!

물을 머금은 솜처럼 잔뜩 늘어져 있던 몸이 누군가에 의해 덜컥이며 흔들렸다. 뇌가 함께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에이든은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려 소리의 근원을 쫓았다.

- 에이든이… 에이든이 열이 많이 나요. 어떡, 어… 어떡해요?

- 이리 비켜.

가까스로 초점을 맞춘 시야에 엉망으로 울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열 살? 열 둘? 그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눈에선 눈물이 세 갈래, 네 갈래로 길을 만들며 제멋대로 흐르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처럼 보이는 남자가 조그마한 몸을 살짝 뒤로 밀치며 가깝게 다가왔다.

이마에 손을 얹어 보던 남자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아이에게 말했다.

- 일단… 옆에 있는 물수건으로 식은땀부터 닦아 주고 있어라.

- 네…!

아이는 히끅거리는 와중에도 씩씩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자리를 떠났다. 아이의 손에 비해 커다랗고 묵직한 물수건이 물에 적셔지고, 짜이길 반복했다. 아이는 중간중간 팔을 들어 흐르는 눈물을 벅벅 닦으며, 힘없이 누워 있는 에이든을 살폈다.

- 벌… 흐윽, 벌 받는 건가 봐, 에이든….

차가운 물수건의 감촉이 이마 위에 느껴졌다.

- 거짓… 흡, 내가 거짓말해서… 그래서, 그런가 봐….

- …….

- 나는 그냥… 흑, 같이 오래… 오래 있고 싶었….

아이의 눈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검은 눈동자가 겁으로 질려 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듯 아이는 에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 네가 가는 게 싫어서 그랬어, 흐윽, 가는 게 싫어서….

그 말을 끝으로 흐느끼는 소리가 커졌다. 아이는 세상이 떠나갈 듯 울었다. 아니, 이미 떠나간 듯이 울었다. 깨끗하게 돌아오지 않는 정신에도 에이든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느끼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 죄책감 따위가 서럽게 터져 흘러 볼 위를 흠뻑 적시고 있었음을.

- 괜… 찮아.

- ……?!

- 안, 죽어.

쿨럭거리는 기침과 함께 뱉어진 에이든의 말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앳된 에이든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강한 척을 해 봤지만 그 목소리론 아주 무리였다.

아이의 울음은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뚝 멈췄다. 아이가 놀란 와중에도 더듬더듬 에이든의 이마를 만져 열이 떨어졌는지를 확인했다. 아직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이라 손을 갖다 대자마자 다시 울상을 지었다.

- 거짓말… 무슨 거짓, 말 했는데? 아저씨한테 다 이를, 거야.

짓궂게 놀리듯 말하는 에이든이었지만 아이는 평소처럼 밝게 웃어 주질 않았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검은 눈에 일렁일렁 차올랐다. 너무 울어 잔뜩 빨개진 눈두덩이와 코끝이 애처로웠다.

- 전화… 전화 왔었는데…….

흐느끼며 말하는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 전화를 바꿔, 흐윽, 바꿔 주면 가 버릴 거잖아.

너를 데려갈 거잖아. 가지 마, 에이든. 아이의 절절한 애원 뒤로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애초에…, …오면 안 된다고…, 당장…, ……와야 돼!

- 그럼 아픈…, ……는 거예요? 말이 되는 소릴 해요!

- 벌써…… 째 연락이 안…, 이젠……, …게 더 이상…….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고, 에이든의 열도 떨어지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화난 어른들의 목소리와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작은 몸이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타고 오르는 홧홧한 통증에 결국 에이든이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고 난 뒤, 에이든 테일러는 자신이 허공을 헤매고 있다 느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새까만 곳을 떠다니던 그의 정신과 몸이, 일순 땅으로 끌려가듯 강하게 낙하했다.

눈을 떴을 때 에이든은 원목 바닥에 손톱을 박고, 끌려가지 않으려 온힘을 다하고 있었다. 작고 여린 손톱이 딱딱한 바닥에 문대지며 뒤집히고 깨졌다. 깨진 손톱 사이로 나무 바닥에서 일어난 가시들이 박혀들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맨바닥을 부여잡고 어린 에이든이 소리쳤다.

- 가기 싫어요! 무서워요!

- 에이든, 그 방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병이 다 나을 거란다. 무서운 곳이 아니야.

- 저는 아픈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간호사 두 명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아이의 몸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필사적으로 반항하던 어린 에이든의 몸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작은 발이 바닥을 차고, 악에 받친 입이 제 팔을 붙잡고 있는 간호사들의 손을 물어뜯었다. 가기 싫어. 가기 싫어…! 어린 몸이 온힘을 다해 도망치려 버둥댔지만 모두 허사였다.

- 오늘도 또 벽에 그 그림을 그렸잖아. 그게 네가 아직 아프다는 말이란다. 치료를 하면 되니까 걱정 말…….

- 까먹는단 말이야!! 안 그러면… 자꾸 까먹는단 말이야!

- 그걸 까먹어야 다 나은 거야. 알겠니?

- 이거 놔! 놓으라고!! 흐윽… 제발, 제발 놔주세요. 제발요!

어린 에이든이 서럽게 소리쳤다. 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으면 자꾸만 흐릿해졌다. 전부 다. 노을 아래에 앉아 바람을 맞던 그날 저녁이, 그리고 옆에서 조잘대던 들뜬 목소리가. 밝게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얼굴과 제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면 신비로운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이던 검은 눈…. 그 모든 게 전부.

자신을 낫게 해 준다는 약이었지만, 몽땅 거짓말이었다. 흰색의 약은 기억을 좀먹었다.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전부 뭉개버리고, 사실이 아니라며 제게서 앗아가려 했다.

구해 주세요. 흰 방으로 질질 끌려들어가며 에이든이 기도했다. 도와달라고. 제발.

하지만 아무도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고, 무거운 방문이 쿵소리를 내며 닫혔다. 진정제가 든 주사바늘이 여린 목에 꽂혔다.

- 에이든,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 병원에 와야 했던 건 다 그 사람들 때문이야. 거기에 있느라 네 머리가 지금 아픈 거란다.

- …아니에요. 그게 아니…….

- 계속 그 인어를 봤다고 말하면 또 그 방에 가야 해, 에이든. 그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라는 헛것이 자꾸 보이면 약을 더 먹을 수밖에 없단다.

네가 미친 사람 취급 받는 건 다, 그것 때문이야. 흰색 가운을 입은 어른들이 약에 혼몽하게 풀어진 어린 아이에게 속삭였다. 아닌데. 그것 때문이 아니라……. 약에 절여진 머리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때문에. 그래서… 내가…….

시야가 다시 점멸했다.

“…이든!”

몸이 무거웠다. 잠겨 있던 의식이 조금씩 돌아왔지만, 몸은 아직도 저 아래에 묻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이든은 눈을 뜨려 했지만 제 맘대로 되지 않았다.

“에이든…!”

강하게 몸을 흔드는 손길에 에이든이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절대 뜰 수 없을 것 같던 눈이 뜨여졌다. 눈을 뜨자마자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이 보였다. 툭하고 건들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진 헤니였다. 검은 눈동자가 에이든을 살폈다. 에이든이 멍한 시선을 그 눈동자에 고정했다.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푸른 눈은 아직도 악몽 한복판을 헤매는 듯 보였다.

약간은 붉은 기를 띄는 전등 하나만이 켜져 있는 호텔방, 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에이든을 내려 보고 있었다. 에이든의 눈에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또렷해지는 시야에 에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어제처럼 펼쳐지던 장면들이 전부 흩어져 사라졌다. 부여잡아 보려 해도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기억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것들은 다시 에이든 테일러의 뇌 한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겼다.

“하…….”

“괜찮아…?”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에이든은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제 몸을 살피고 있는 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시감이 뒷목을 타고 올랐다. 잡힐 듯 말듯한 기억에 푸른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무언가를 찾듯 진을 바라보던 에이든이 눈을 꾹 감았다. 별안간 왼쪽 어깨의 흉터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무언가 단단하게 응어리져 정체를 알 수 없던 무언가 위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기억을 둘러싼 흰 막들이 잘게 찢어지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무의식 저편에서 작은 잡음이 일었다. 마치 살려달라는 소리처럼 들리는 잡음이.

***

레오나 테일러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보고서들을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스 테일러의 선거 기간 동안 LA에 머물게 된 그녀는, 임시로 임대한 사무실에서 선거에 관련된 자금 기록들과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금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것까지 전부 손대게 돼 버려 일이 쌓여 있었다. 가뜩이나 일도 많아 죽겠는데, 같이 일하는 것들마저 영 마음에 안 드네. 그렇게 생각하는 레오나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마뜩치 않은 그녀의 표정을 힐끗 쳐다보던 중년 남성이 덩달아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칼튼 씨, 지금 저랑 장난해요?”

“이미 의원님 선에서 통과된,”

“이게 통과됐다고요? 여기랑 여기, 총 이백만 불이 뚫렸네요. 눈이 달렸다면 당연히 보이겠죠?”

레오나는 신경질이 섞인 손길로 보고서에 빨간 동그라미를 쳤다. 멕시코와 러시아에서 들어온 돈이었다. 보고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 재무제표는 나를 당장 구속시켜 달라 외치는 수준으로 터무니없이 작성돼 있었다. 조금만 살펴봐도 덜 세탁된 돈들이 툭툭 튀어 올랐다. 이딴 걸 발견하지 못하는 쪽이 오히려 멍청한 수준이었다. 칼튼이라 불린 비서실장은 대답 없이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분명 꽤나 능력 있다 소문이 자자한 돈 세탁업자를 거친 보고서였다. 하지만 레오나 테일러는 한 번 쓱 훑어보더니 모든 오류를 짚어냈다. 한스 테일러가 한창 기업 로비스트로 활동할 때보다 더 숫자에 귀신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여자였다.

칼튼 윌리엄스는 뉴욕 증권가에서 도는 소문이 다 헛소문이 아니었음을 몸소 실감하고 있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스 테일러를 잡아먹고도 남았을 거란 그 소문.

레오나가 대답이 없는 칼튼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마약이랑 무기 밀매에 다리 걸치고 있는 거 여기저기 티내고 싶어서 그래요?”

“…아닙니다.”

“아니면 이딴 푼돈으로 다 같이 망하고 싶어서?”

“수정해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레오나는 척 보기에도 자존심이 잔뜩 상해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칼튼 씨, 지금 기분 나빠요?”

“…아닙니다.”

그러게 일을 잘하면 됐잖아요. 덧붙여진 레오나의 말에 칼튼은 작게 죄송하다 대답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새끼들이었다. 저런 게 비서실장으로 있는 것도 그렇고,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한스 테일러도 이제 슬슬 노망이 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보고서가 통과될 수가 없었으니까.

레오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상에 던졌다. 짜증 섞인 손이 긴 금색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때 레오나 테일러의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요.”

“레오나 님, 그때 요청하셨던 자료입니다.”

단정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그녀의 비서였다. 레오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오나의 손에 서류봉투가 올라갈 동안, 칼튼은 검은 수트를 입고 있는 비서를 습관적으로 훑어봤다. 그 저급한 시선을 발견한 레오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칼튼 씨.”

“예.”

레오나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눈은 그런 데에서만 잘 굴러가나 봐요. 그렇게 열심히 보고서를 검토했으면… 이딴 거지같은 종이 쪼가리가 나한테 올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죠.”

“그…….”

“나가요.”

레오나가 차게 식은 얼굴로 책상 위의 보고서를 들어 그에게 던졌다. 보고서는 퍽 소리를 내며 칼튼의 몸을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서류철을 주워 올리던 칼튼이 어금니를 씹었다. 바짝 힘이 들어가는 그의 턱을 바라보다 레오나가 제 손에 새로 들린 서류봉투로 시선을 돌렸다.

머저리 같은 새끼가 떫은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가고, 레오나는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종이를 꺼내들었다. 한 장씩 종이를 넘길 때마다 그녀의 눈엔 흥미가 쌓여갔다. 레오나는 마지막장까지 종이를 살펴보고 난 뒤엔 눈을 휘어가며 활짝 웃었다.

“쿠알라 아일랜드…. 안토니오 헤니 아들이라고? 하하!”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는 그녀의 모습에 앞에 서 있던 비서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을 발견한 레오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 그냥 좀 재밌어서. 고생 많았어요, 릴리.”

“더 필요하신 건 없을까요?”

더 필요한 거라……. 서류 위로 자리한 그녀의 손가락이 톡톡 소리를 만들어냈다. 레오나의 머리 안에서 수십 가지 경우의 수가 저마다의 상황과 사건을 만들었다 사라졌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별로고. 아, 이게 좋겠네.

레오나가 아주 마음에 드는 상황 하나를 솎아냈다. 에이든 테일러 그 뭣도 아닌 새끼가 꼴 같지도 않은 언론 플레이를 해댄다면 같이 박자를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럼 그 새끼도 알겠지. 누가 자기 머리 위에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지금 홍보팀에서 입장문을 작성하고 있다 했나요?”

“네, 다시 수정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거 다 멈추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얼마 전 레오나에게 박살이 난 뒤 돌려보내졌던 한스 테일러의 입장문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소수자 혐오 범죄를 당한 것에 대한 입장문.

릴리는 레오나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별다른 질문 없이 그저 알겠다 대답했다. 젊은 층의 표는 입장을 발표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적어도 릴리가 알기로는 그랬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 있는 보스가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하는 게 옳았다. 그녀의 말이 정답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번 폭행 사건 피의자들 인종이 어떻게 됐죠?”

“히스패닉 둘, 동양인 하나, 백인 하나입니다.”

“일단 선거 캠프에 히스패닉이랑 동양인을 더 받으라고 하세요.”

릴리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녀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LA포스트에 박스 몇 개 좀 넣어 줘요.”

“그때 그 기자들에게만 보내면 될까요?”

“네, 그럼 돼요. 하나씩 쥐여 주면서, 진 헤니 선수 기사 좀 잘 부탁한다고 전해 줘요.”

관심을 그쪽으로 몰고 싶다면, 까짓 거 함께 몰면 되는 일이었다. 이제 ‘수영선수, 진 헤니’에 대한 기사는 곧 LA를, 아니, 미국 전역을 도배할 예정이었다. 그가 얼마나 수영을 잘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까지, 샅샅이.

앞으로 미국 수영계를 이끌어갈 유망주로서, 에이든 테일러의 연인으로서, 진 헤니는 관심의 중심에서 태풍의 눈 역할을 제대로 할 체스 말이었다. 그리고 그 진 헤니라는 말이 자신의 손에만 있을 거라 착각 중인 에이든 테일러가 눈에 선했다.

아니지. 좋은 말은 빼앗아 오면 그만이다. 공격적으로 찍혀 나올 기사를 생각하며 레오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입장문은 선거 직전까지 발표하지 않는 걸로 전달하세요.”

직전에 판을 뒤집을 거니까. 레오나의 얼굴에서 잔인한 미소가 짙어졌다.

***

서버가 테이블 위로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 상냥한 미소에 진도 함께 싱긋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호기심과 호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서버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네……. 서버가 주방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그 ‘진 헤니’를 가까이서 본 후기를 말할 동안, 진은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전히 대답이 없는 핸드폰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나디아가 연락이 없는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속으로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내던 진이 별안간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파득 놀랐다. 화면을 확인하는 손이 급했다.

「골드링/치즈롤 크러스트 피자 주문시 최대 9달러 할인! - 파파존스」

“젠장…….”

작게 험한 말을 읊조리던 진은 맞은편 자리의 주인이 등장하자마자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음식이 나올 동안 밖에 있던 에이든 테일러에게선 언제나처럼 옅은 대마의 냄새가 났다.

“먼저 먹지 그랬어.”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며 예쁘게도 웃는 표정이 역할극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진은 무어라 대답을 돌려줄까 하다가 그저 웃으며 앞에 놓인 숟가락을 들었다.

한가한 주말 오후, 베버리힐스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카페의 테라스 자리였다. 진은 머리 한쪽에 떠오르는 지난 ‘테라스’에 대한 기억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손짓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문제는… 먹으라 해 놓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빤히 쳐다보기 시작한 에이든 테일러였지만.

진은 전보다 훨씬 집요해진 에이든의 시선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제 앞에 놓인 미트볼을 크게 한 입 떠 넣었다. 오른손이 불편해서 그런지 영 동작이 굼떴다.

에이든은 앞에 놓인 그리스식 샐러드와 잘 구워진 소고기가 들어간 오픈 샌드위치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눈은 앞에 앉아 있는 진 헤니에게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끔 인상을 찡그리거나, 눈을 가늘게 뜨며 진의 얼굴을 뜯어보는 그였다.

“안… 먹어?”

우물거리는 입으로 진이 물었다. 입안에 큼지막한 미트볼이 들어 있어서 발음이 부정확했다. 에이든은 슬쩍 제 눈치를 보는 검은 눈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먹고 있어.”

“안 먹고 있는 것 같은데…….”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에이든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식적이기만 하던 에이든의 표정 위로 얕게 본심이 뚫고 나왔다.

진 헤니는 몇 번째 반복되는 이 역할놀이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듯했다. 그만 쳐다보라는 그 눈빛에 결국 에이든 테일러가 삐뚤게 웃으며 제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올렸다.

그냥 유별난 스토커에 볼품없는 너드 새끼인 줄만 알았는데, 벗겨 놓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고.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바보 새끼인 줄 알았더니, 제게도 원하는 것을 달라며 흥정을 시도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흥미를 자극했지만, 그걸 훨씬 뛰어넘는 무언가가 에이든 테일러의 본능을 긁어댔다. 다분히 파괴적인 정복욕으로 검은 머리에 검은 눈만 보면 닥치는 대로 제 아래 깔던 그 느낌과도 사뭇 달랐다.

직선적이고 무조건적인 애정, 혹은 집착. 살면서 그 어떤 이에게서도 저를 위해 칼을 맨손으로 덥썩 잡을 만큼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던 에이든 테일러에겐, 진 헤니는 존재 자체만으로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었다.

“너, 언제부터 LA에서 살았어?”

“…응?”

“LA에서 지낸 지 얼마나 됐냐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샐러드에서 올리브만 쏙쏙 골라먹던 진이 질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서 지낸 지 얼마나 됐냐고?

“여기 온 지는 6개월, 아니, 이제 7개월 됐는데… 왜…?”

“그럼 그 전엔 어디 살았는데.”

깊어지는 질문에 진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진은 포크로 샐러드를 왕창 집어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대답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에이든은 볼에 빵빵하게 음식을 집어넣고 인상을 쓴 진을 바라보며 물 컵을 들어올렸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진 헤니에게 ‘몸을 판’ 그날 이후로 에이든 테일러의 머릿속 어딘가, 그 어딘가에서 기시감이 가실 줄을 몰랐다.

진은 다시 빤히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에이던 테일러의 눈치를 보다 꿀꺽하며 입안에 든 것들을 삼켰다. 뭐라고 대답해야…….

“그건 갑자기 왜 궁금,”

“아, 저… 죄송한데, 진 헤니 선수 맞죠?”

진과 에이든은 갑자기 등장한 낯선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십대로 보이는 무리 하나가 그들이 밥을 먹고 있는 테라스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진은 또 다른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신지…….”

진이 눈을 꿈뻑이며 대답하자 뒤에 서 있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같이 서 있는 남자애들의 눈에도 호기심이 잔뜩 떠 있어서 진이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에이든은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도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 사인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사인이요?”

갑작스런 사인 부탁에 진이 눈을 크게 떴다. 사인을 해 달라고? 나한테? 왜…?

“네! 저기 저 뒤에 있는 제 친구가 진짜 팬이라서…. 안 될까요?”

수줍은 표정의 여자아이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뒤에는 얼굴이 빨개진 다른 여자아이가 있었다. 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이든을 쳐다봤다. 도움을 구하는 눈치였지만, 에이든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아침마다 각 언론사의 신문을 정독하는 에이든은 지금 상황의 이유가 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얼마 전 수영대회 이후로 모든 언론사들이 앞 다퉈 진 헤니에 대한 기사를 싣기 시작했으니까.

진 헤니가 가진 신기록들이 몇 개인지, 비공식적으로 월드 레코드를 깬 게 몇 개인지 따위가 온갖 신문에 널려있었다. 그 문제의 대회 날, 진 헤니의 몸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몸으로 어떤 기록을 낸 건지를 세세하게 분석해 놓은 건 덤이었다. 심지어는 어디서 본 적도 없는 그의 영법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그중에서도 LA포스트지에는 오른손에 테이핑을 하고 물살을 가르는 사진이 신문 2면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미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메이저 언론사인 LA포스트에서 2면을 그만큼 할애한다는 것은, 작정하고 진 헤니를 띄워 보겠단 속셈이었다.

에이든 역시 작정하고 진 헤니를 관심의 중심으로 몰아넣던 사람으로서, 작금의 상황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지금 당장 언론의 분위기로만 봤을 땐 승기가 완전히 제게로 기운 상황이었다. 자신의 ‘연인’으로 포장돼 있는 진 헤니가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수록, 한스 테일러의 숨구멍은 점점 조여들 게 뻔했다. 여러모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이든은 근래 들어 가장 즐거운 상태였다. 아주 여러 가지의 이유로.

단 하나도 잃지 않고, 원하는 것은 몽땅 얻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갖기 위해선, 무언가를 내놓는 게 맞는 거니까. 하지만 그 법칙 아닌 법칙이 진 헤니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에이든은 그 무엇도 내 주지 않았음에도 모든 게 제 손아귀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 헤니는 정말 흡족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아, 물론 몸을 내 주곤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꽤나 만족스러운 편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이든 테일러는 앞에 앉은 진을 바라봤다. 진은 여자아이에게서 수첩 하나를 받아들곤 끙끙거리는 중이었다. 그는 불편한 오른손 대신 왼손에 검은 펜을 들고는 집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진 헤니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아주 정직한 사인을 하고 있었다.

「진 헤니」

왼손으로 쓰느라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그 사인 아닌 사인 때문에, 결국 에이든은 바깥으로 헛웃음을 지어야 했다.

“제가… 사인이 없어서요…….”

“아… 괘, 괜찮아요!”

진이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친구 대신 사인을 받으러 왔던 여자아이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 대답했다. 물론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여자아이가 주춤주춤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진은 시무룩했다. 마치 집안을 다 어지르고 나서 주인에게 혼난 개새끼 같은 표정이었다. 무표정할 때면 생각보다 예민한 느낌을 풍기는 눈꼬리가 지금은 아래로 축 쳐져 있었다.

풀이 죽은 커다란 검은색 리트리버를 연상하던 에이든은, 제 눈치를 보며 뭐라 입을 달싹이는 진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망설이지 말고 말하란 소리였다.

“너…….”

“…….”

“너는… 사인 있어…?”

에이든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곤 눈썹을 매만졌다. 무언갈 참아 보려는 듯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간 채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진의 물음으로 헛수고로 돌아갔다.

“너도 없지…?”

“하… 하하, 돌겠네.”

결국 참으려던 노력이 무색하게 헛웃음이 터져 버린 에이든 테일러였다.

***

“좀 더 허리를 내려야지.”

“윽… 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매번 안 된다고 하면서, 결국엔 다 넣었잖아. 에이든의 나른한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차 안에는 습기와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그에 더해 주차장에 세워진 흰색 마세라티의 뒷좌석에서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위로 진 헤니가 올라 타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바지는 조수석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널린 채였다. 버클과 지퍼만 내린 상태의 에이든은 입에 문 대마를 빨아올리며 한 손으로 진의 허리를 쥐었다.

“아윽…!”

“이래서야 오늘 안에 집어넣을 순 있겠어?”

실실 웃으며 말하던 에이든이 쥐고 있던 허리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끄트머리만 간신히 들어가 있던 것이 푹 소리를 내며 조금 더 박혀 들어오자, 진의 허벅지가 파들거렸다.

“여, 여기서 말고… 흣!”

“싫어.”

에이든은 오늘치 역할놀이의 대가를 실시간으로 지불하는 중이었다.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 받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즐거워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대마의 기운이 에이든의 몸속으로 급속히 퍼지며, 느른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안 들어가… 흐윽, 진짜 안 들어간다고…….”

울먹이는 목소리에 에이든이 슬쩍 위를 올려다봤다. 진의 얼굴은 울상이었고, 제 어깨에 둘러진 팔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번의 섹스처럼 젤이 잔뜩 발라진 상태가 아니었다. 진은 정말로 몸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탄탄한 허벅지며 엉덩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커다란 것의 침입을 막아 보려 바짝 힘이 들어간 채였다.

정말 이래서는 오늘 안에 다 못 넣겠는데. 거의 다 타들어간 대마를 썬팅된 창문에 아무렇게나 지져 끄며 에이든이 뭔가 작정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럼 내가 좀 도와주지, 뭐.”

“아, 잠깐…!”

에이든이 선심 쓴다는 목소리로 말하며 반쯤 풀이 죽어 있던 진의 성기를 쥐었다. 별안간 예민한 곳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진의 몸이 주저앉으려 했지만,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 지금, 하, 지금 만지지 마…!”

“왜, 내가 도와준다니까.”

젖은 소리를 내며 에이든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쿨쩍거리며 왕복 운동을 하는 손 때문에 진의 성기도 점점 힘을 받아 단단해졌다. 빠듯하게 일어서는 성기의 느낌에 진이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으읏…! 하아… 그만, 그만!”

기둥을 잡고 빠르게 흔들던 손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선단을 꾸욱 누르자, 진의 몸이 파득 튀었다. 그와 동시에 약하게 삽입돼있던 에이든의 성기에도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몸을 뒤틀며 움찔거리는 구멍이 더 이상 참아 주기가 힘들었다.

진의 성기의 끝에선 맑은 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에이든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더 강하게 압박하며 흔드는 손길에 진의 턱이 뒤로 젖혀지고,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랫배가 빠듯해지는 느낌에 진이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아, 하악! 으… 하으으…!”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 색색거리는 숨을 뱉으며 사정 뒤의 여운에 젖어 있던 진은 엉덩이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에이든이 들어차 있는 그곳에서 느껴지는 질척함에 눈을 슬며시 떴다.

에이든이 입고 있는 셔츠가 제가 뱉어낸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본 순간 더 빨개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진의 반응을 감상하던 에이든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자, 이제 넣을 수 있지?”

에이든은 제 손에 묻은 진의 정액을 접합부에 펴 바르며 물었다. 엉덩이를 두 손으로 세게 쥐어 벌리며, 예민한 곳을 문대는 손가락 때문에 진의 몸이 바르작거렸다.

“넣어.”

“아… 하악!!”

에이든이 진의 몸을 힘으로 주저앉혔다. 진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안으로 밀어 넣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에이든은 참아 줄 생각이 없었다. 한 번에 끝까지 들어온 단단한 성기 때문에 진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깁스를 두르고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어떻게든 에이든의 어깨를 부여잡아 봤지만, 힘이 빠진 허리는 제대로 세우는 것조차 힘들었다. 에이든은 제게로 한껏 기대오는 몸에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척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빠듯한 구멍 안을 드나들었다.

“하악! 아… 아! 읏! 흐… 흐윽!”

한참 흔들리던 진은 지금 자신이 에이든의 성기를 박아 넣고 있는 장소가 주말 낮 시간의 베버리힐스임을 기억해냈다. 진은 선팅된 창문을 힐끗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바깥으로 터지던 소리가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흡… 윽, 으읍…!”

“후… 왜, 밖에 신경 쓰여?”

“흐윽…!”

밖이 신경 쓰이냐는 물음과 동시에 성기가 들어찬 구멍이 강하게 수축했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몸이 대신 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차체가 낮고 무거운 마세라티라도 두 성인 남자가 만들어 내는 흔들림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흔들림을 줄일 순 없으니 그나마 소리라도 죽여 보려는 진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에이든의 가학심에 불을 붙였다.

긴장한 구멍이 빠듯하게 조여 오는 느낌에 낮게 신음하던 에이든은 차창 멀리로 보이는 인영에 짓궂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아까 카페에서 사인을 해 달라 수줍게 말하던 그 아이들이었다.

“……!”

별안간 지잉 소리를 내며 살짝 아래로 내려간 뒷좌석의 창문에 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크게 떠진 눈이 에이든 테일러에게로 향했다. 진이 대체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에이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 읍!”

에이든은 허리를 세게 쳐올리며 진의 허리를 아래로 꾸욱 내려 고정했다. 깊게 꽂혀 들어오는 느낌에 진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진이 필사적으로 제 입술을 물었다.

“둘 다 실물이 나은 것 같던데?”

“맞아. 에이든 테일러는 얼굴이 예쁘게 생긴 편이라 몸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커서 깜짝 놀랐어.”

결국 진의 표정이 무너졌다. 발자국 소리가 커질수록 몸이 작은 자극에도 예민해지고 있었다. 바르르 떨리며 몸이 제멋대로 움칠댔다.

“하… 난 가만히 있는데 왜 그래, 진.”

몸 속 깊은 곳에 성기를 박아 넣고 그 모든 반응을 즐기고 있으면서, 에이든은 되려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진에게 말했다. 안에서부터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간지러운 감각에 진이 에이든의 어깨에 고개를 박고 흐느꼈다. 몸 안이 수축하고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성기를 쥐어짜는 듯한 느낌에 신음하던 에이든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는 제 어깨에 기대어 있는 진을 한 번 봤다가, 정액으로 엉망이 돼 있는 제 셔츠를 내려다봤다. 눈을 가늘게 뜨던 에이든이 진의 뒷머리를 잡아 제 어깨에서 떼어냈다. 그리곤 상냥하게 물었다.

“아까 나한테 사인 있냐고 물었던가?”

“하으….”

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저 열에 들뜬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이든은 진이 입고 있던 티셔츠의 끝을 잡아올렸다. 그리고 그 끝자락은 진의 입에 물려졌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고 있던 진의 탄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아직 창문이 열린 채라, 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 나는 사인 있지.”

잘 물고 있어. 입에서 놓치지 말고. 다정한 목소리가 에이든의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진이 몸을 뒤틀었다. 셔츠에 묻어 있던 정액을 손으로 훑어 올린 에이든이 진의 가슴팍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으응…!”

“가만히 있어야, 하… 사인을 해 주던지 할 거 아니야.”

에이든이 한 손으로 진의 허리를 틀어쥐며 말했다. 에이든의 손가락은 진의 거친 숨으로 들썩이는 진의 가슴, 오르내리는 배 위에 제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간지럽고, 안타까운 느낌에 진의 표정이 무너졌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아랫배가 멋대로 움찔거렸다. 정액이 묻은 에이든의 손가락은 이제 잘 갈라져 있는 진의 배에 머무르고 있었다. 배 위에서 손가락 끝이 움직이자 에이든의 것을 물고 있던 곳이 강하게 수축했다. 진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있었다.

“흐으…!”

“하… 볼 만하네.”

유려한 사인이었다. 에이든과 비슷하게 화려했다. 진 헤니의 몸 위로 ‘에이든 테일러’가 새겨졌다. 흰색의 체액으로 적혀진 이름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지만, 에이든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진의 몸 위로 적힌 제 이름도,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들썩이며 저를 재촉하고 있는 진 헤니의 몸도, 전부 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약하게 흔들고 있던 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티셔츠를 놓고는 다시 에이든의 어깨로 고개를 기댔다. 진의 입에서 애타는 숨이 터지고 있었다.

“흐으… 제발…….”

“제발, 뭐.”

어떻게 해 달라는 건진 진 스스로도 몰랐다. 빨리 움직여 줬으면 싶기도 했고, 동시에 당장 몸 안에 들어찬 것을 빼 줬으면 싶기도 했다. 열에 들뜬 머리가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동안, 본능에 솔직한 몸은 에이든의 어깨에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부벼댔다.

애가 절절 끓는 듯한 그 움직임에 에이든이 보조개를 만들며 짙게 웃었다. 에이든은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진의 엉덩이를 벌려 쥐었다. 제가 들어 있단 것을 확인하듯, 손가락으로 빠듯하게 벌어진 곳을 문지르자 어깨에 고개를 박은 진에게서 앓는 소리가 흘렀다. 귀 옆에서 바로 울리는 소리에 에이든이 낮게 탄식했다.

힐끗 창문을 보던 에이든은 인기척이 아예 사라졌을 때쯤, 몸을 일으켜 진을 뒷좌석에 눕혔다. 창문은 어느 새 닫힌 채였다.

“흐… 흡! 하아… 아! 으읍!”

진의 기다란 다리, 허벅지 뒤쪽을 잡아 눌러 몸을 거의 반으로 접은 에이든은 쩍쩍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이젠 그도 한계였다. 예민해진 몸이 마구 흔들리며 젖은 소리를 뱉어냈다. 검은 눈은 달뜬 열에 흐리게 풀린 지 오래였다.

“아으…! 아! 하아… 아아! 에, 이든!”

참아 보려 했던 신음이 결국 제멋대로 터졌다. 애타게 에이든의 이름을 부르던 진이 사정하며 한숨 같은 말을 덧붙였다. 좋아. …너무 좋아.

“하, 씨발…!”

그 순간 에이든의 몸이 터질듯 부풀고, 단단한 근육들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제 성기를 씹어 먹는 것 같은 아래에 에이든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하. 아무리 생각해도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

“그래서, 아까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에이든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힐끗 그 모습을 보던 진이 시선을 서둘러 창밖으로 돌렸다. 에이든이 입고 있던 셔츠는 말 못할 것들로 엉망진창이었다. 에이든은 귓바퀴가 새빨갛게 돼서는 별 대답이 없는 진을 흘끗 쳐다봤다. 할 건 다 해 놓고, 심지어 좋다느니 할 말도 다 해 놓고 부끄러워하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뭐야.’

맹하게 굴거나 몸만 큰 개새끼처럼 굴 때면 딱히 연기처럼 느껴지지도 않아서 더 헷갈렸다.

‘하긴, 애초에 전부 다 ‘척’이었다면 못 알아볼 리가 없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이든 테일러는 삐뚠 미소를 입에 걸며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차 안에 넣어둔 여분의 티셔츠였다. 그걸 본 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대체 차에 왜……. 아니, 아니다. 차 안에 여분의 옷이 왜 있는지 따위는 묻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LA에서 지내기 전에 어디 살았냐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한 손으로 흐트러진 금색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한 번 더 물었다. 진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의 눈치를 보다 답했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

에이든은 뭐라 말하려 입을 뗐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갑자기 사나워진 분위기에 진이 물음표를 띄웠다. 그래서 전에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고 물으려던 에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어느 구닥다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멘트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 싸구려 삼류소설 같은 대사 대신 자신이 잠깐씩 지냈던 곳을 하나씩 열거하기 시작한 그였다.

“뉴욕? 보스턴? 시카고?”

“전부 다 아닌데…….”

“근데 왜… 하, 미친.”

“……?”

근데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또 문제의 그 대사를 뱉을 뻔한 에이든이 헛웃음을 쳤다. 진은 의아한 낯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작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뭔가 망설이던 그는 에이든을 떠보듯 한 마디를 던졌다.

“섬… 에서 살다 왔어.”

“섬?”

백미러에 비친 에이든의 눈치를 보는 진이었다. 에이든의 눈썹이 살풋 찡그려졌다.

“하와이에선 지낸 적 없는데.”

“…….”

에이든은 섬이라고 하자마자 하와이로 단정지어 버렸다. 그리고 진은 그 오해에도 아무런 정정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에이든은 ‘쿠알라’라는 섬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섬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섬이기도 했지만, ‘인생을 망친 검은 머리’를 기억하는 그가 ‘쿠알라’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 검은 머리가 자신이라면, 그는 당연히 ‘쿠알라’라는 섬을 알아야 했다. 난파된 요트와 함께 파도에 떠밀려온 열세 살의 에이든 테일러가, 열세 살의 진 헤니와 만난 곳이 바로 그곳이니까.

진의 머릿속 어딘가 얌전히 묻어놨던 의문들이 다시 고개를 빼꼼 들려 하고 있었다. 에이든이 기억하는 그 검은 머리와 눈이… 내가 아닐 수도 있는 걸까? 그럼 내가 나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생각들이 제멋대로 엉키고 꼬였다.

‘아냐, 그랬다가 정말 나일 수도 있잖아…….’

- 내가 이 검은 눈 때문에 인생이 좆같아졌거든.

- 제발 네가 진짜라고 해 줘…….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말들이 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거짓말쟁이.’

정리되지 않는 모든 생각들 가운데로 불쑥 양심이 파고들었다. 저 멀리 집어치웠던 죄책감이 다시 마음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아냐, 거짓말은 한 적 없어. 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야. 조악한 변명이 추한 욕심을 에워쌌다. 나중에, 나중에 기회를 봐서 꼭 얘기할 거라고 혼자 의미 없는 약속을 하는 진이었다.

“다른 데서는 지낸 적 없어?”

“아, 응. 없어.”

삐쭉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복잡한 마음들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진이 대답했다. 입에 흐린 미소가 걸린 채였다.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 손으로 버린 진이었다.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를 대체 어디서 본 건지 생각해 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에이든은 그냥 막연히 진이 자신을 너무 따라다녀서, 그래서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할 수 있었던 모든 말들이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

진은 이제 왼손으로도 익숙하게 렌즈를 뺄 수 있었다. 능숙하게 렌즈를 빼 통에 넣은 진은 책상 위의 안경을 찾아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땀으로 찝찝하던 몸을 씻은 참이었다.

한 달 전쯤 잘랐던 머리가 이제는 꽤나 길어져, 다시 눈을 찌르려 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도 열심히 감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은 개의치 않고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채로 좁은 집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붕대랑 소독약을 어디에 뒀지…?’

원래도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은 곳이었지만, 오른손을 사용하는 게 불편해지고 난 뒤에는 집안 꼴이 훨씬 엉망이었다. 진은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옷더미와 책들을 대충 들춰보는 중이었다.

“아, 여기 있다…….”

봉투는 책상에 엎어져 있던 가방 아래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진이 왼손으로 주욱 봉투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는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앉아 한 손으로 봉투를 뒤적거렸다. 소독약과 거즈, 새 붕대를 꺼낸 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왼손으로 혼자 동여매기엔 조금 어려웠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칭칭 둘러져 있던 붕대가 풀리고, 상처에 눌어붙은 거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꿰맨 상처는 아직 아물려면 한참 먼 듯 보였다. 아직도 피고름이 고이고 진물이 흐르는 손바닥에서 진이 거즈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아으…….”

찐득하니 들러붙어 있던 거즈가 여린 손바닥의 살들을 붙잡고 놔 주질 않았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진이 잠시 손을 멈췄다. 너무 아팠다. 가만 숨을 고르던 진이 다시 거즈를 잡아당겼다. 즈즈즉 소리를 내며 떨어진 거즈가 엉망진창이었다. 물살을 가를 때 다 터져 버린 손바닥은 다시 깔끔하게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큰 흉터를 남길 게 분명했다

진은 울퉁불퉁한 상처를 보다 소독약을 집어 들었다. 한숨이 짙어졌다. 소독약의 뚜껑을 열던 진이 손을 멈칫했다. 소독약과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통을 다시 내려놨다.

내일… 내일 병원에 가서 해 달라고 하자. 지금 그는 너무 지쳤고, 찢어진 손바닥에 제 손으로 소독약을 문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진은 화끈거리는 손바닥에 소독약을 바르는 대신,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침대에 눕기를 선택했다.

손을 뻗어 봉투를 뒤지던 진이 잡히지 않는 진통제에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봉투 안에 있었는데… 가방에 있는 건가? 가방을 뒤적이던 진은 손끝에 걸리는 미끈한 봉투 하나를 집어 올렸다.

“…….”

진은 언젠가 가방에 넣어 둔 뒤 잊고 살았던, 아니, 잊으려 노력했던 흰색의 알약을 내려다봤다. 클로자핀이라는 이름의 알약.

진이 왼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의 얼굴이 잔뜩 울상이었다. 돌아오는 차에서부터 위태로웠던 마음이 결국 부서졌다. 나한테 진짜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서럽게 뱉어진 혼잣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진의 눈에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

“흐윽…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난 그냥…….”

눈물이 제멋대로 떨어지고, 표정이 무너졌다. 진의 마음 안에 서러움과 죄책감,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얕은 원망이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네 곁에 있고 싶은 것뿐인데, 정말 그게 전부인데.

많은 걸 바랐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진은 단지 에이든 테일러라는 세계에 편입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곁에서 그의 세상을 함께 사는 것이 진이 바란 전부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좁은 섬을 떠났고, 에이든에게로 도착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에이든 테일러는 어딘가 위태로웠고, 그 모든 위태로움의 원인이 자신이라 말하고 있었다. 진이 마구잡이로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감췄다.

왜 자신이 네 인생을 망친 사람이냐 따져 묻고 싶은 반항심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게 나일 리가 없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열세 살의 진이 한 것이라곤 작은 몸으로 어떻게든 에이든 테일러를 물에서 건져 올린 것뿐이었다. 어린 진까지 거센 파도에 휩쓸려 물 아래 잠길 뻔했던 그날. 그날은 파도가 매섭고 하늘에서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바닷가 근처에는 절대 가지 말라던 아버지의 당부를 어기고, 진은 기어코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모으러 나갔다.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좁은 섬에서, 진의 유일한 행복은 그 찬란한 조각들을 모아 제 비밀스러운 장소에 모아 두는 일이었다. 어린 진은 얼굴에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비를 대충 손으로 문대 닦으며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아이가 발견한 것은 유리조각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해변 근처, 금빛의 무언가가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람이었다. 작은 몸이 파도에 일렁이는 걸 발견한 진은 어쩔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 어른을 불러야… 아니, 그랬다가 떠내려가면…!

파도 위로 일렁이는 금빛의 머리와 마을 쪽을 번갈아 바라보던 진은 눈을 꾹 감고 바다로 달려가기를 택했다. 높게 치는 파도에 잠시 희게 질려야 했지만, 잠깐의 망설임 뒤에 아이는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진이 처음으로 물 안에서 무기력함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파도를 뚫고 그 몸을 붙드는 데 성공했지만, 작은 몸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그 파도에서 빠져나오기에는 무리였다. 진은 저까지 함께 바다에 잡아먹히는 기분에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코와 입으로 마구 들이차는 물을 뱉으며 어린 진이 필사적으로 물을 갈랐다. 파도가 몇 번이고 그 둘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아무리 물을 갈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 안 돼, 안 돼. 제발…!

진이 온힘을 다해 파도를 타넘었다. 여차하면 둘 다 바다 아래에 묻힐 뻔 했던 그때. 성난 파도를 뚫고 건져 올린 것은 진 헤니의 새로운 보물이자 새로운 세계였다.

섬에 같이 있었을 땐, 분명 좋은 기억밖에 없었다. 정말이었다. 자신이 에이든 테일러의 인생을 망쳤단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거라곤, 그 반짝이는 것을 조금 더 오래 갖고 있고자 욕심을 부렸던 일밖에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

진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그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너면서 왜 내가 잘못했다고 해, 왜. 내가 누군지 밝힐 수 없는 건 전부 다 네 탓이야.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헤진 손바닥이 아팠다. 에이든 테일러라면 다 괜찮다고 되뇌며, 꾸역꾸역 꿰매 놓았던 마음이 멋대로 터져 서러움을 뱉어냈다. 숨죽여 울던 진이 그 삐져나오는 모든 마음들을 다시 욱여넣기 시작했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검은 눈이 점점 단호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 위로 또 다시 욕심과 자기합리화가 찾아들었다.

‘난… 난 잘못한 거 없어. 그게 내가 아니란 것만 확실해지면 꼭 말할 거야.’

왼손으로 엉망인 얼굴을 슥슥 닦은 진이 다시 진통제를 찾아 입안에 넣었다. 새 붕대를 꺼내 둘둘 둘러 감는 손이 급했다. 아무래도 상처를 보면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안 될 일이었다.

붕대로 상처를 급히 감춘 진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턱에 고인 눈물을 옷소매로 문질러 닦고는 다시 한 번 숨을 깊게 들이켰다 뱉어냈다. 그리곤 세수를 하기 위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향하던 진은 현관문에서 들리기 시작한 소음에 발걸음을 멈췄다.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와 캐리어의 바퀴가 만들어 내는 소음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던 소음은 진의 아파트 문 앞에서 뚝 멈췄다. 진이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문 열어, 진.”

나디아의 목소리였다.

“당장 문 열라고 했어, 진 헤니.”

진은 멍하니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코끝과 눈두덩이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진짜 나디아라고? 진짜로…? 안에서 대답이 없자 나디아가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 문 열어!”

안 열면 여기서 막 소리 지른다?! 손으로 쿵쿵 대던 소리는 이내 발로 차는 소리로 바뀌었다. 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집안을 둘러봤다. 나, 뭐, 뭐 숨겨야 되는 거 없겠……. 급하게 눈을 굴리던 진은 언제나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일기장과 에이든 테일러의 사진꾸러미로 달려갔다. 급히 그것들을 그러모아 품에 안아 들곤 숨길만 한 곳을 찾기 시작한 진이었다.

“진 헤니!!”

“야! 너희 정신 나갔어?! 씨팔, 시끄럽게 지금 뭐 하는 거야!”

바깥이 시끄러웠다.

“뭐? 씨팔…? 이 개좆만한 새끼가 씨발, 누군 욕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아?!”

“이 썅년이 지금 뭐라고 했냐?”

“개좆만한 새끼라고 했다, 이 썅놈아. 어쩔래?”

기어코 맞은 편 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물건더미를 들고 있던 진이 그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으…! 이거 어디, 어디에…! 진은 들고 있던 것들을 책상 아래에 마구잡이로 던져놓곤 그 위로 옷가지들을 올려 덮었다.

허겁지겁 달려가 문을 열어젖히자 앞집 남자의 어깨에 정수리를 처박고 꾹꾹 밀고 있는 나디아가 보였다. 그녀가 머리를 처박고 있는 남자의 어깨엔 칼이 꽂혀 있는 해골이며 알몸인 여자 모양의 타투 따위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진이 그 험악한 것들에 꿀꺽 목울대를 울려 침을 삼켰다.

“그… 저기, 나, 나디아? 저기…….”

“야, 쳐 봐. 쳐 보라고.”

“아, 이 씨발년이… 이걸 진짜 때릴 수도 없고!”

“씨발년……?”

남자의 어깨를 머리로 꾹꾹 밀고 있던 나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희번뜩 빛났다.

“너 지금 뭐라고…….”

“나디아!”

진이 급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남자와 나디아의 사이로 몸을 낑겨 넣었다. 진은 나디아를 제 뒤로 두곤 남자에게 말했다. 나디아를 뒤로 숨긴다고 숨긴 거였지만, 애초에 진과 키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그녀였기에 별로 효과는 없었다.

“어… 안녕하세요. 그… 말이 좀 심하신데… 저희가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거고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넌 또 뭐야?”

“일단… 시끄러운 건 죄송한데, 사과하세요…….”

우락부락한 남자의 어깨를 힐끗 보면서도 더듬더듬 할 말은 하는 진이었다.

“…비켜, 진. 하… LA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사람 죽이는 일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나디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뒤에서 작게 들리는 섬뜩한 말에 진이 경악하며 속삭였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남자는 앞을 가로막은 진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뭔가 알아챈 눈빛을 했다.

“아, 너 걔잖아?”

“……?”

남자의 눈빛이 추잡해졌다. 진은 별안간 기분 나빠진 시선에 인상을 찌푸렸다.

“게이는 수영 같은 건 못하게 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되는데 말이야.”

“…….”

“아니면 탈의실에서 재미 좀 보고 있는 건가?”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뱉어진 말에 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금니를 씹던 진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뗀 그 순간, 쿠당 소리를 내며 남자가 뒤로 쓰러졌다. 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뒤에서 뻗어 나온 야무진 주먹이 남자의 콧등을 가격하고 멀어지는 중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가 코에서 흐르기 시작한 코피를 손으로 닦으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나디아가 진을 밀치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 이 개새끼가…. 진짜 오늘 하나 재낀다, 내가.”

“이 미친년… 아악!”

“그래, 나 미친년이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나디아에게 달려들었지만, 진이 붙잡아 그를 붙잡아 보기도 전에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나디아가 무술 영화에나 나올 법한 손길로 이미 남자를 바닥에 처박은 뒤였으니까.

***

진은 아무 말 없이 빤히 저를 쳐다보는 나디아에게 맹한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나디아는 웬 거지같은 새끼 하나를 매치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다시 묶는 중이었다. 탐스럽게 구불거리는 흑갈색의 머리가 깔끔하게 위로 올라가 원래 모양새를 찾았다.

“웃음이 나와?”

“하하… 웃기라도 해야지 뭐 어쩌겠어…….”

울 순 없잖아…. 작게 덧붙여진 진의 말에 나디아가 허공에 한숨을 뱉었다. 누가 봐도 방금 전까지 운 얼굴인 주제에, 하나도 설득력이 없었다. 나디아는 옷가지가 대충 치워진 소파에 앉아 옆에 앉은 진을 천천히 뜯어봤다.

평소에 미끈하게 잘 올라가 있는 눈매가 퉁퉁 부어서는 꼭 모기에라도 물린 것 같았다. 속상한 마음에 잔뜩 인상을 쓰는 나디아였다. 지금 진 헤니의 꼬라지는 방금 전까지 엉엉 운 것으로 보이는 눈두덩이 외에도 속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손은 왜 그래?”

나디아가 진의 오른손을 보며 말했다. 진이 엉성하게 붕대가 둘러진 오른손을 저도 모르게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냥 좀… 어디서 다쳤어.”

“어디서?”

“그냥 좀… 어디서…….”

나디아는 바보처럼 웃는 진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했다. 절대 먼저 말 안 하겠지. 캐물어 봤자 제 입으로 말할 리가 없었다. 괜히 아는 척 티냈다가 골치 아파지느니 모른 척 뒤를 캐는 편이 나았다.

진은 이 상황에 대해 나디아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아직도 쿠알라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고, 핸드폰이라거나 노트북 따위는 절대 갖고 있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여태까지 그가 그래 왔던 것처럼.

나디아는 사실 뉴욕에서 지낸 지 벌써 6개월째였다. 진이 LA로 떠나자마자 쿠알라에서의 삶을 청산한 그녀였다. 솔직히 말해서 진 때문에 그 좁은 섬에 붙어 있었다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진이 그나마 속마음을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터놓는 사람은 나디아 밖에 없었기 없었다. 그래서 나디아도 그를 두고 훌쩍 어디로 떠날 수 없었다.

물론 중간중간 몰래 바깥으로 다녀오곤 했지만 진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알았다간 당장에 저도 떠나겠다며 짐을 쌀 게 뻔했으니 나디아도, 진의 부모님도 모두 모르는 척하며 살아온 날들이었다.

진의 손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의 머릿속에 얼마 전, 아니, 얼마 전이랄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만 키면 볼 수 있는 영상이 떠올랐다. 별 쓰레기 같은 새끼들한테 둘러싸여서는 얻어맞던 진의 모습과 맨손으로 잭나이프를 잡아 막는 장면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속으로 작게 욕을 씹던 나디아는 멀뚱멀뚱 앉아 있는 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아저씨가 저 덜 떨어진 걸 밖에 안 보내려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저게 저렇게 멍청이 같이 큰 게 다 아저씨 때문이야.’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생각을 하던 나디아는 슬쩍 제 눈치를 보는 진 때문에 또 다시 한숨을 쉬어야 했다. 정말 저걸 어쩌면 좋지.

“나… 돌아가야 되는 거 아니지? 가야 된다고 해도 나 절대 안 갈,”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응?”

나디아가 진을 흘겨봤다. 뭔가 서운한 기색이었다. 진은 그런 나디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달싹거리기는 중이었다. 몸은 다 컸는데 왜 저 버릇은 안 고쳐지나 모르겠네. 나디아가 피식 웃으며 그런 진을 와락 껴안았다. 어정쩡하게 품에 안긴 진이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이내 어색하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지극히 진 헤니스러운 손짓에 나디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달링, 보고 싶었어.”

“그 단어, 엄청 오랜만에 듣네, 하하.”

“그러니까 왜 전화를 안 받냐고, 이 썩을 자식이.”

퍽하는 소리와 함께 등짝을 치고 지나간 손이 아주 매웠다. 아으… 아까 사람 하나를 재낀다며 눈을 희게 뜨던 때도 느꼈지만, 무슨 무술 수련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진은 등짝에서 홧홧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하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뱉었다.

“뭘 잘했다고 자꾸 웃어?!”

“하하…….”

슬프기만 하던 마음이, 아주 조금 즐거워지는 순간이었다.

***

다음 날 케일스 대학교 정문 근처, 알렉스 그레이는 뜬금없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멈춰 서야 했다. 핸드폰으로 오늘치 식단과 훈련량, 목표했던 유산소 운동의 시간 따위를 체크하며 걷던 그는 앞을 가로막은 여자를 보며 무슨 용건이냔 얼굴을 했다.

“알렉스 그레이, 맞지?”

“그런데?”

“진이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너한테 가 보라고 해서.”

나디아 놀즈는 이미 일찍이 수영부 락커룸에 다녀온 뒤였다. 손이 그 모양이니 물에 들어 갈 리는 없고, 대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말이지. 락커룸 안에 있는 아무나를 붙잡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알렉스 그레이’를 찾아가란 소리였다. 그래서 나디아는 지난 수영대회 인터뷰에서 봤던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을 찾으며, 정문 앞을 죽치고 있던 참이었다.

알렉스는 진 헤니의 행방을 대체 왜 자신에게 묻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동시에 코치에게 뒷목이 잡힌 채 재활실로 끌려간 그를 기억해 냈다. 지금도 재활실에 있을 것 같긴 한데…….

“진 헤니는 왜 찾는데?”

경계 어린 목소리며, 미심쩍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이며……. 나디아는 진 헤니의 얘기가 나오자 뾰족해진 알렉스의 태도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스도 나디아의 표정이 오묘해지자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큰 키, 잘 태닝된 피부. 라틴계와 동양계가 섞인 오묘한 이목구비에, 운동선수인 건지 탄탄한 몸이 눈에 띄는 여자였다. 무엇보다 강하게 풍기는 양아치 같은 느낌으로 봤을 때, 에이든 테일러를 따라다니느라 친구라곤 한 명도 없는 진이 알 법한 사람은 아니었다.

“왜 찾냐고? 아…… 그 새끼가 나한테 빚진 게 좀 있어서.”

실실 웃으며 말하는 나디아를 보며 알렉스가 알 만하단 표정을 만들었다. 그럼 그렇지. 어디서 또 바보처럼 뭐 하나 건덕지를 잡힌 게 분명했다. 속으로 작게 혀를 차던 알렉스가 얼굴색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시작했다.

“진 헤니는 오늘 안 나왔어. 손 아파서 당분간 훈련에 아예 안 나올,”

“나디아?!”

“……젠장.”

뒤에서 들려오는 진의 목소리에 알렉스가 망했단 표정을 지었다. 그 모든 걸 꽤나 재미있게 관찰하던 나디아가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진을 보며 활짝 웃었다. 진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그녀를 보며 알렉스가 대체 넌 누구냐는 눈빛을 보냈다. 나디아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진, 얘가 너 훈련에 아예 안 나온다던데?”

“응? 오늘 아침에 나랑 같이 스트레칭 했잖아, 알렉스. 까먹었어?”

“…….”

제게 삿대질을 하며 얄밉게도 말하는 나디아 때문에 알렉스의 눈에 옅은 짜증이 어렸다. 알렉스가 저를 째려보는 것을 느낀 진이 왜 그러냐는 얼굴을 했다. 왜……? 그 말간 얼굴 때문에 알렉스는 더 복장이 터져야 했다. 알렉스는 떫은 표정으로 나디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친구라고 말했으면 바로 알려 줬을 텐데.”

“친구라고 말했어도 안 믿었을 것 같던데, 뭘. 웃기는 애네.”

나디아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진 헤니 만났으니까 됐지? 그럼 난 간다.”

매고 있던 백팩을 추켜올리며 알렉스가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나디아가 그 가방을 덥석 쥐었다. 그녀는 알렉스를 뒤로 질질 끌어오며 아주 늦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디아 놀즈야. 진 헤니 누나고.”

“……친구야.”

작게 오류를 정정한 진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알렉스를 보며 웃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디아는…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어……. 진은 그녀를 말리기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 체념 어린 진의 얼굴과, 막무가내인 나디아를 보며 알렉스가 황당하단 표정을 했다.

“그래, 뭐. 친구라고 치고. 내가 진 헤니 친구고 너도 진 헤니 친구니까, 우리도 친구네. 그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

“안 바쁘면 같이 좀 가지? 진은 면허도 없어서 가려면 한참 걸린단 말이야.”

같이 가 줄 거지? 그렇게 물으며 웃는 나디아의 얼굴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알렉스는 같이 안 가면 정말 죽여 버리겠다는 뉘앙스를 읽을 수 있었다. 진에게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신호를 보내 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진은 인상을 찡그린 알렉스를 보다 작게 속삭였다.

“미안…….”

진은 멋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알렉스가 그런 진을 빤히 바라보자, 백팩을 쥐는 힘이 세졌다. 나디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하… 어딜 갈 건데.”

결국 알렉스가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들었다. 깊은 한숨은 덤이었다. 나디아는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인 알렉스 그레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산타모니카로 갈까? LA 바다는 어떤지 구경 좀 하자.”

진 헤니는 그 썩을 에이든 테일러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꽤나 진을 챙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놈이라도 이용해야 했다.

***

평일 오후 시간이었지만 산타모니카 해변은 나름 복작거렸다. 선 베드를 펴 놓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나, 모래성을 만들며 깔깔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진의 기분을 한층 밝게 만들었다.

나디아는 들뜬 진을 보며, 역시 바닷가로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분명 거나하게 운 것 같은 얼굴이 여태 신경 쓰였던 그녀는, 어떻게든 진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디아, 저기 봐. 관람차도 있고 놀이기구도 있어.”

“타고 싶어?”

“…아니. 타고 싶진 않아.”

진이 겁먹은 목소리로 아이 같이 말하는 탓에 나디아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쨍하니 푸른 바다에 적당히 비린 물 냄새, 시원하게 철썩이는 파도. 놀이기구가 만들어 내는 우르릉거리는 소음과 함께 즐거운 비명이 산타모니카 해변을 울리고 있었다. 나른하고 여유로운 느낌에 나디아도 덩달아 기분이 들떴다.

“야, 너 산타모니카 안 와 봤어?”

“응, 처음 와 보는데 여기 엄청 좋다.”

알렉스가 묻자 진이 밝게 대답했다. 진은 오랜만에 본 진짜 바다에 지금 그 누구보다 신나 있었다. 에이든이랑 같이 오면 좋겠다. 진이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으며 생각했다. 양말까지 전부 벗어 주머니에 마구 쑤셔 넣은 그는 맨발에 느껴지는 모래의 감촉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왼손에는 신발을 든 채였다.

‘나중에 꼭 같이 와야지.’

진 헤니의 마음이 제멋대로 부풀었다. 어린 날의 그 언젠가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노을이 질 시간이 되면 에이든과 함께 해변가에 쪼그려 앉아서 유리조각을 줍던 때가 생각났다. 하긴… 그때 에이든이 등장한 뒤로 유리조각 줍는 것도 별로 재미없긴 했어.

유리를 모으는 일은 시시해진지 오래였지만, 진은 함께 찾자고 굳이 에이든을 꼬셔 내곤 했다. 그리곤 동글동글한 유리는 줍지도 않고 그걸 찾기 위해 집중한 에이든의 옆모습만 한참 구경하다 돌아왔다. 그때를 생각하며 진이 흐릿하게 웃었다.

한편 알렉스는 젖은 모래를 푹푹 밟으며 바다 가까이 걸어가는 진을 보고 있었다. 산타모니카를 안 와 봤다고? LA에 살면서? 알렉스의 얼굴에 충격과 의아함이 감돌았다. 진짜 에이든 테일러, 그 또라이 새끼를 따라다니는 것 말곤 아무것도 안 한 게 분명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새끼를 좋아하는 거야?’

얼굴? 그거 말고 뭐가 있어? 돈? 진 헤니가 돈 때문에 사람을 좋아할 리는 없으니, 그건 제외였다. 얼굴로 나머지의 모든 쓰레기 같음이 괜찮을 수가 있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진의 뒷모습을 보던 알렉스는 옆에서 툭 쳐 오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가 그를 보며 수상하게 웃었다.

“야, 너 에이든 테일러랑 좀 알아?”

안 그래도 그 거지같은 새끼를 생각하던 차에 이름이 들리자, 알렉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내가 그 새끼를 어떻게 알아.”

꽤나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적대감에 나디아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몰라?”

“알고 싶으면 진 헤니한테 직접 물어봐.”

나보단 잘 알 테니까. 덧붙여진 말에 나디아가 오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한테 물어봐 봤자 들을 수 있는 거라곤 그 천사가 얼마나 예쁜지, 웃는 게 얼마나 황홀한지 따위밖에 없어.”

“뭐?”

“심지어 이름도 안 알려 주고 맨날 ‘천사’라고만 말했다고. 나는 그래서 걔 이름이 열세 살 때부터 여태까지 엔젤인 줄 알았다니까. 못 믿겠지? 진짜야.”

별 끔찍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나디아가 뭔가 결심한 듯 진을 불렀다.

“진! 너 저기 가서 아이스크림 좀 사 와.”

“어? 아이스크림? 갑자기?”

멀찍이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얕은 물에 발을 담구고 있던 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저벅저벅 젖은 소리를 내며 나디아와 알렉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냥 좀 사와. 먹고 싶어서 그래. 아까 그 관람차 있는 쪽에 가면 있는 것 같더라.”

“무슨 맛?”

“아이스크림은 바닐라지.”

나디아가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발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며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이스크림은 바닐라지.

“알렉스, 너는?”

“난 됐어.”

알렉스의 대답을 끝으로 진이 운동화를 엉망으로 구겨 신고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그 뒷모습을 보더니, 진이 작은 점으로 보일 때쯤 표정을 굳히고 알렉스를 돌아봤다.

“알렉스, 나 부탁 하나만 들어 줘.”

갑자기 진지해진 그녀의 눈빛에 알렉스도 덩달아 긴장한 표정을 했다.

나디아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진 헤니가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섬 밖의 세상은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살았던 것? 아니면 어렸을 때 만났던 그 첫사랑을 찾으러 LA에 간다 하더니만, 알고 보니 그게 쓰레기 같은 에이든 테일러였다는 것? 그것도 아니면, ‘천사’에 대한 진 헤니의 집착은 손바닥이든 뭐든, 다 가져다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 그래서 그게 너무 걱정돼서…

“국가대표 선발전 끝나면, 진을 데려가고 싶어.”

어떻게든 진을 뉴욕으로 데려가야겠다는 것?

***

아이스크림을 사러 올라왔던 진은 심부름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그는 가판대 위의 반짝거리는 것들에 온 시선을 빼앗겨 그 근처를 벗어나질 못했다. 그중에서도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푸른 원석이 박혀 있는 가죽 팔찌였다. 각도에 따라 가끔 짙은 회색빛이 감도는 것이, 에이든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이건 얼마예요?”

“12달러예요. 색이 오묘하고 예쁘죠?”

네, 엄청, 엄청 예뻐요. 진은 혼자 속으로만 대답했다. 입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빤히 그 팔찌를 보던 진이 주머니에서 꼬깃한 지폐뭉치를 꺼내들었다. 불편한 손으로 낑낑 대며 지폐를 솎아내는 게 불쌍했는지, 가판대의 점원이 진의 손에서 1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쏙쏙 골라갔다.

“아, 감사합니다.”

“손은 아직도 덜 나으신 거예요?”

“네?”

진은 제 손을 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하는 점원에게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그때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생각보다 아는 체를 해 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이었다. 그때 수영경기를 많이들 봤나 보네…….

“너무 상처 받지 마세요. 세상에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 네.”

점원이 가죽 팔찌를 작은 상자에 담아 건네며 말했다. 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상자를 받아들곤 어색하게 웃었다. 핸드폰에 설치돼 있는 어플이라곤 기본어플 밖에 없는 진 헤니에겐 정말 뜬금없는 위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날의 영상이며 사진을 온 미국 사람들이 다 봤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진은 얼떨떨했지만 친절하게 웃는 점원에게 작게 감사인사를 하며 가판대를 벗어났다. 그리곤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밝게 웃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든한테 주기엔 조금 싸구려일까? 그때 갔던 옷가게도 그렇고… 평소에 입는 옷들은 다 엄청 비싼 거 같던데…….’

뭔 이딴 걸 선물이라고 주냐며 팔찌를 버리는 에이든 테일러가 상상됐다. 진의 도톰한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조금 기가 죽은 얼굴로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진이 그 상자를 바지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그래도 주고 싶은 건, 주고 싶은 거였다. 온갖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가득한 산타모니카,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기쁜 목소리들과 신이 난 발소리들. 그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진 헤니는 당장에 이곳에서 느낀 모든 것들을 에이든 테일러와 나누고 싶었다.

그 옛날, 에이든 테일러가 말했던 것처럼 진이 알던 세상보다 바깥은 훨씬 넓고,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것들 틈에서 진은 매순간 에이든 테일러만을 생각했다. 진이 발견한 것들 중 가장 찬란한 빛을 띠는 것은 에이든 테일러뿐이었으니까. 이것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바다 깊은 곳보다 더 푸르고 오묘한 눈, 빛을 받을 때면 태양보다 더 밝은 머리칼. 그런 에이든 테일러에게 설령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해도,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선물하고 싶다 생각했다. 알려 주고 싶었다.

지금 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 가운데, 나는 지금 네 생각이 난다고. 네가 너무 보고 싶다고.

버리면 뭐…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다른 걸 선물하면 되니까. 진이 씁쓸한 빛으로 웃었다. 얕게 가라앉으려는 마음에 진이 고개를 털었다. 아이스크림 얼른 사 가야겠다. 나디아한테 혼나겠네……. 발걸음을 서두르는 진이었다.

***

알렉스의 눈빛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요상하다는 게 맞나. 둘이 똑같은 건가? 진은 뭔가 탐탁지 않은 눈길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알렉스를 보다, 나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있어?’

진이 눈으로 그렇게 묻자, 나디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아,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한참 기다렸잖아. 하여튼 굼떠가지고.”

나디아는 진의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 콘 하나를 빼 가며 투덜댔다. 물론 진심이라곤 한 톨도 묻어나지 않는 투덜댐이었지만 진은 알 리 없었다.

내가 늦게 와서 그런 건가? 아이스크림 사 오느라 그런 건데… 좀 봐 주지. 진이 알렉스의 눈치를 봤다. 알렉스는 뭔가 정말 싫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저를 빤히 보더니만, 바다 쪽으로 고개를 홱하니 돌렸다. 진은 그 모습에 웅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것도 있는데…….”

진이 알렉스의 뒷통수에다가 아이스크림 콘 하나를 내밀었다. 알렉스가 그 목소리에 다시 진을 돌아봤다. 손도 불편한 주제에 꾸역꾸역 콘 세 개를 들고 온 진이었다.

“정말 안 먹어?”

“…너 진짜 식단 관리 안 해?”

알렉스는 제게 내밀어진 아이스크림이 조금 녹고 있는 모습을 보다 진에게 물었다. 진은 이미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가득 베어 문 채였다.

그래, 물어본 내가 멍청이다. 알렉스가 얼척 없다는 표정을 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서 굴리던 진이 알렉스에게 콘을 다시 한 번 내밀었다. 진의 눈이 순수한 경탄으로 물들어 있었다.

“엄청 맛있어. 진짜로.”

“…….”

“다 녹는데…! 너 안 먹으면 진짜 후회한다?”

알렉스는 진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며 오늘치의 식단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적절하게 분배된 탄수화물에 단백질, 지방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청정한 식단이었다. 매일 그렇게 먹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먹…….

“알렉스, 진짜 먹어 봐.”

“하…….”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 알렉스를 향했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며 조금 녹아 흐르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진이 해맑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통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얘기까지 들었는데, 마음이 모질어질 수가 없었다.

- 진의 부모님이… 아니, 진의 아버지가 그렇게 키웠어. 절대로, 아무것도, 바깥의 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섬 안이 제일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니까.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스무 해가 훨씬 넘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게 말이 안 되는…….

- 맞아. 말도 안 되지.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야.

진이 오기 전까지 백사장에 앉아 나눴던 이야기들이 알렉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뇌가 진탕으로 녹아 흐르는 아이스크림이 된 기분이었다.

- 섬 안이 전부인 걔가 하는 일이라곤 맨날 바닷가에 나가서 잘 깎여진 유리조각을 줍는 일이었는데, 그걸 모아둔 유리무덤이 있거든? 근데 나 그거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몰라. 절대, 절대로 안 알려 줬어. 그 유리가 다 뭐라고.

나디아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 그런 진이 처음으로 바깥에서 온 무언가를 발견한 게 열세 살 때야. 나는 진이 어린애 하나를 구했다고 말만 전해 들었고.

- …지금 그게 에이든 테일러라는 거야?

못 믿겠다는 표정의 알렉스를 보며 나디아가 흐린 눈빛을 했다. 지어낸 얘기라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단 걸 나디아도 알고 있었다. 무슨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으니까.

- 그래, 그게 에이든 테일러였어. 나도 이제야 알았지만…….

- …….

- 그 뭣도 아닌 유리조각조차 어디 있는지 안 알려 주고, 말도 안 해 주는 애가 에이든 테일러에 대해선 알려 줬겠어? 시발, LA에 간다고 했을 때… 그게 그 망나니새낀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보냈을 거야.

알렉스는 모래바닥을 발로 푹푹 찍으며 험한 말을 뱉는 그녀를 바라봤다.

- 내가 왜 그때 나갈 수 있게 도와준다고 나대가지고, 아오! 진 헤니, 진짜!

- …나한테 이런 거 말해 주는 이유가 뭐야?

애꿎은 바닥에 화풀이를 하던 나디아가 심각한 표정의 알렉스를 돌아봤다. TV에서 인터뷰 하는 걸 봤을 때도 그렇고, 오늘 낮에 만나서 대충 낌새를 보기에도 그렇고. 알렉스 그레이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 헤니를 아끼고 있음이 확실했다.

지금 이 모든 얘기를 듣고 나서, 답답하고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봐도 말 다 한 거지, 뭐. 본인은 자기 표정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눈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나디아는 그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호의와 걱정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가 필요했다. 제가 진과 24시간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었고, 진 헤니는 물어도 대답을 안 할 게 뻔했다.

- 국가대표 선발전, 한 달 뒤지?

- 맞아.

- 그때까지만 쟤가 무슨 짓하고 다니는지, 특히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좀 알려 줘.

나디아는 여차하면 선발전 전에라도 진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 새끼 옆에 있자고, 손바닥이 그 꼴이 돼서도 악을 쓰고 경기에 나가는 진 헤니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에이든 테일러 옆에 더 뒀다가는 손바닥이 찢기는 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거의 다 알고 있듯,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새끼였고 일부러 온갖 사고와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으니까.

-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만 하면… 굳이 LA에서 수영할 필요 없잖아?

- 그건 그렇지만…….

- 다시 섬으로 돌려보내는 건 나도 싫어. 한 번 나온 이상 진도 절대 안 돌아가려고 할 거야. 대신 여긴 안 돼. 에이든 테일러는 안 돼. 평화롭고 행복한 곳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대체 왜 에이든 테일러랑 있어야 하는데?!

알렉스는 나디아의 격양된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알렉스? 다 녹아…….”

“…….”

진은 아이스크림을 이미 다 먹고, 아래 있는 콘까지 와작와작 씹어 먹는 중이었다. 알렉스는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제 손을 타고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쳐다봤다. 제멋대로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처치곤란이었다. 뒷주머니에 냅킨 몇 장을 챙겨온 진이 주섬주섬 그것들을 꺼내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알렉스는 내밀어진 것을 받아들곤 한숨을 쉬었다.

“더 녹기 전에 얼른 먹,”

“그래, 먹는다, 먹어.”

결국 알렉스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입을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던 진이 환히 웃으며 물었다.

“엄청 맛있지?”

“…그래, 맛있네.”

아이스크림 좀 먹어 달라는 부탁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못 먹을 건 또 뭐야. 내일 운동 더 빡세게 돌리면 돼……. 알렉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차가운 게 입안에 가득했지만, 진이 말했던 것처럼 엄청나게 맛있진 않았다.

그냥… 어떤 맛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뿐이었다.

***

오늘은 드디어 에이든 테일러를 만날 수 있는 주말이었다.

“안녕, 에이든.”

오늘따라 더 신나 보이는 진의 목소리에 에이든이 조수석을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진은 정말로 들떠 있었다. 진은 저 멀리서 에이든의 차를 발견하곤, 거의 뛰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도착한 참이었다.

에이든은 제게 방싯 웃는 그 얼굴을 보다가, 별걸 다 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 표정에 진은 더 밝게 웃어 보였다. 결국 에이든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한참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진 헤니도 정상은 아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진 헤니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진 이유를 상상도 못할 게 뻔했다. 평소 에이든 테일러가 조수석을 돌아볼 때라곤, 닥치라고 말하거나 다른 데로 눈깔을 돌리라 말할 때뿐이었지만 이번엔 그 두 마디 중 어떤 것도 듣지 않아서 기쁜 진이었다. 기쁜 포인트가 이상했지만, 어쨌든 기쁜 건 기쁜 거였다.

‘오늘은 에이든도 기분이 좀 괜찮아 보이는데… 물어볼까.’

방긋 웃던 진이 제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하자 에이든이 고개를 까딱했다. 우물쭈물 하지 말고 말하란 그 사인에 진이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다.

“그… 오늘 꼭 가야되는 곳 따로 없으면… 내가 가보고 싶은 데가 있는데…….”

살짝 에이든의 눈치를 보며 진이 말끝을 흐렸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를 몰라 진이 긴장한 얼굴을 했다. 에이든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진을 빤히 보다가 대꾸했다.

“어딘데.”

에이든이 핸들을 잡자 차에 시동이 걸렸다. 밑에서부터 우르릉하는 진동이 올랐다. 작동하기 시작한 엔진은 진이 목적지를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 역시 진 헤니가 ‘가 보고 싶은 곳’을 말하길 기다리며 담배 케이스에서 대마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 정도는 뭐.’

어차피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와 ‘꼭 가야 되는 곳’ 따위는 없었다. 뭐, 여러모로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 서비스는 충분히 베풀어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어딜 가든 사진만 몇 장 찍히면 그만이었으니까.

평소 에이든 테일러였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진 헤니가 가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그는 답지 않게 핑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에이든은 대마에 불을 붙이며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인 진의 옆모습을 돌아봤다. 어딜 가고 싶길래 쉽게 말을 못하는지 의아한 눈치였다.

“에이든, 너… ‘라라랜드’라는 영화 봤어?”

“뭔 랜드?”

“너도 안 봤구나.”

진은 왠지 모르게 에이든과 동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만 안 본 건 아니었어. 진은 지난 산타모니카에서 알렉스가 말해 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진은 산타모니카에서 사람이 가장 복작거리는 맛집인 부바검프에서, 얇게 썰린 감자로 둘둘 말린 새우를 미친 듯이 흡입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알렉스는 산타모니카도 안 와 보고 뭘 했냐며 그를 타박했다. 물론 입에 맛있는 새우가 한 가득 들어 있는 진에게 모든 타박의 데미지는 ‘0’에 수렴하고 있었다. 벌써 진 헤니의 앞으로 빈 접시가 수북했다. 나디아가 말없이 진의 앞으로 레모네이드 잔을 밀어놓았다.

그 타박 중간중간, 알렉스는 여기는 꼭 가 봐야 한다며 냅킨 위로 삐뚤빼뚤하게 무언가를 적었다. 진은 앞에 있는 레모네이드를 들이키며 그 냅킨을 힐끗댔다. 그리피스 천문대?

- 라라랜드에 나온 뒤로 사람이 너무 많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가 봐. 좋으니까.

- 라라랜드가 뭐야?

다 마신 레모네이드 컵에선 꼬로록하는 소리가 났다. 바닥까지 다 빨아먹을 듯 빨대를 빨아올리며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스는 그 모습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열심히 천문대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알렉스의 설명을 들으며 진은 연신 눈을 반짝였다.

알렉스는 그리피스 천문대의 야경이 아주 아름답다 말했다. 그리고 진 헤니는 아름다운 것들을 에이든 테일러와 함께 보고 싶었다. 진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이 가고 싶은, 그곳.

“그리피스 천문대에 가 보고 싶어.”

아, 난 또 어디라고. 진의 말에 에이든이 톡톡 소리를 내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다.

[ 안내를 시작합니다. ]

낭랑한 내비게이션의 음성과 함께 진의 웃음이 밝아졌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작은 상자가 달그락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

에이든 테일러는 무감한 표정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말의 그리피스 천문대는 미친 듯이 사람으로 북적였다. 걸어가는 중간에 누군가 제 앞을 막거나, 정신 나간 망아지 같은 애새끼들이 걸리적거릴 때면 에이든은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나는 살의를 내리눌러야만 했다.

“와…….”

인상을 쓴 채 앞만 보던 에이든의 시선이 진에게로 향했다. 진 헤니는 노을 같은 건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작게 감탄했다. 그 검은 눈에 노을이 스며들어 오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해 지는 거, 이렇게 높은 데서는 처음 봐.”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진이, 에이든을 돌아보며 말했다. 밝은 미소와 함께였다. 그 모습을 본 에이든이 작게 인상을 쓰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노을이 LA 땅 위를 뒤덮었고, 노란빛과 주황빛의 그것이 알 수 없는 울렁임을 느끼게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울렁거림의 이유는 전부 다 복작거리는 인간들 때문이라 생각하는 그였다.

별안간 인상을 쓰는 에이든 때문에 진이 살짝 그의 기색을 살폈다. 밝았던 표정이 잠시 흐려졌지만 이내 다시 맑게 웃었다. 어쨌든… 이곳에 같이 있단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그 옛날, 둘이 해변에 앉아 노을을 봤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노을빛을 받으면 더 황홀하게 빛나는 금빛의 머리였다. 혹시 만져 봐도 되냐고 묻기도 했었지. 사르르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금색의 머리칼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에이든 테일러는 아름다웠다. 땅 밑으로 모습을 감추는 저 태양보다 훨씬 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붉은빛을 띠던 하늘이 조금씩 보랏빛과 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조금씩 찾아드는 어둠이 땅에 깔린 불빛들을 불러들였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 별이 박힌 것만 같았다.

속으로 작게 감탄하던 진이 옆에 있던 커플의 애정행각을 발견하곤 흠칫 표정을 굳혔다. 어두워지자 여기저기서 찐한 스킨십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오른쪽에 있던 커플이 입을 쪽쪽 맞추다, 결국 목에 팔을 두르기 시작했을 땐 저도 모르게 조금 옆으로 자리를 피한 진이었다.

스멀스멀 멀어지기 시작한 진 헤니를 보곤 에이든 테일러도 주위를 둘러봤다. 알 만 했다. 원래 이런 곳이니까.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뭣도 아닌 저 하늘과 땅바닥을 보면서 감상에 젖는 곳.

“로지, 나랑 결혼해 줄래?”

그래, 바로 이렇게.

작은 상자를 꺼내든 남자가 여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작게 반짝이는 반지가 든 상자, 그것을 바라보던 여자가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다. 그녀는 세상 모든 걸 가진 사람처럼 웃으며,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여자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남자가 환히 웃었다. 로지라는 이름의 여자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남자가 벌떡 일어나 여자를 꽉 껴안았다.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옆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지고 있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제 뒤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프러포즈에도 건조한 표정을 유지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무의미한 약속의 현장이었다.

사랑을 담보로 평생 함께 하자는 약속은 휘발성이 강했다. 무엇보다 담보의 신용도가 최악이었다. 차라리 두 사람의 재산이나 집안을 합쳐 더 부유한 삶을 살아 보자 약속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작게 고개를 젓던 에이든 테일러는 제 소매를 잡아끄는 손길에 시선을 돌렸다.

“에이든, 조금 비켜 드려…!”

“……?”

진은 에이든의 소매 끝을 질질 잡아끌어, 감격에 젖어 있는 그 커플로부터 조금 멀리 떼어 놓았다. 황당한 표정의 에이든이 그 손길에 이끌려 자리를 옮겼다.

진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에이든의 뒤를 힐끗 쳐다봤다. 평생을 약속한 연인은 아직까지 서로 이마를 붙이고 끌어안은 채, 몇 번이고 사랑한다 속삭였다. 그 모습을 보는 진의 입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산타모니카에서 에이든을 생각했던 때처럼, 진의 마음이 제멋대로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땅 위로 황홀하게 펼쳐져 있는 야경, 여기저기서 속삭이는 사랑. 이번엔 에이든과 함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이 주머니에 넣어 둔 작은 상자를 떠올렸다. 그리곤 주변을 조심스레 살폈다. 자리를 옮긴 곳은 다행히 아까보다 사람들이 드문 곳이었다. 속으로 잠시 고민을 하던 진이 슬쩍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그… 어…… 에이든.”

“……?”

에이든이 우물쭈물 대는 진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어쩔 줄 몰라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다. 에이든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며 들려올라갔다.

“그… 내가 음,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진의 목이며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뭐라고…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는 진이었다. 네가 기뻐… 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긴장한 손이 바지 주머니 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걸 보자마자 에이든의 표정이 화닷 구겨졌다. 방금 전까지 목격했던 일련의 무언가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무섭게 구겨진 그 표정을 보다 진이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어… 그, 프러포즈는 아니니까 안심해. 절대 아니야!”

“…….”

“진짜 아니야! 그냥 파, 팔찌야.”

진이 안심하라는 뉘앙스로 얼른 상자를 열어 에이든에게 보여 줬다. 상자 안에는 푸른 원석이 박힌 가죽 팔찌가 들어 있었다. 상자도, 팔찌도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전에 산타모니카를 처음 가 봤는데, 거기 있길래… 네 생각이 나서…….”

에이든은 앞에 내밀어진 싸구려 팔찌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별다른 대꾸나 반응이 없자 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에이든의 표정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 어색한 공기 때문에 진이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그, 여기 박힌 게 네 눈동자 색이랑 비슷해서…….”

“…….”

“평소엔 푸른색인데 빛에 비추면 안에 회색빛이 돌아. 엄청 예뻐.”

그렇게 말하며 진이 환히 웃었다. 에이든은 상자를 받아들지도 않고 빤히 그 팔찌를 보고만 있었다. 무언가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한참 바라보던 에이든은, 갑자기 소리 내 웃기 시작한 진을 쳐다봤다.

조금 긴장이 풀린 건지 진이 뺨과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며 웃고 있었다. 쌍꺼풀이 없이 매끈하게 찢어진 눈매가 즐거운 기색을 티내듯 접혀 있었다.

“하하… 조금 있다가 줄걸 그랬나 봐. 하필 방금 전에 프러포즈 하는 걸 봐서… 하하!”

정말 재미있다는 목소리로 밝게 말하는 통에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서도 작은 헛웃음이 터졌다. 진과는 다르게 어이없음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진이 맑게 웃으며 에이든의 손에 상자를 쥐여 줬다.

“버려도 괜찮아, 에이든. 그냥… 그냥 주고 싶었어.”

“…….”

“받기만 해 줄래?”

진 헤니가 생각했다. 너를 위해 준비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대신… 가진 모든 게 너를 위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걸 어떻게 할지는 전적으로 에이든의 선택이었다. 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손에 그 전부를 올려 두는 일뿐이었다.

‘버려도 돼. 그냥 이런 게 있단 것만 알아 줘.’

에이든 테일러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능숙한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는 만들어 낸 미소와 함께 진의 허리를 끌어안거나, 뺨이며 입에 입 맞출 수도 있었다. 아까 전, 세상 모든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웃던 그 연인의 흉내를 낼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진 헤니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굳어 있었고, 입 밖으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버려도 괜찮으니 받아 달라며 건네진 것 때문에, 에이든 테일러의 기분은 아주 별로였다. 제 배를 뚫고 들어오려던 잭나이프를 진 헤니의 손이 막아 쥐었을 때와 비슷했다.

조금 화가 나는 것도 같았고, 답답한 기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떤 기분인지를 알 수가 없어 가장 신경질이 났다.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은 낯설기만 했다. 에이든은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굳어 있었다.

값비싼 반지와 함께 평생 함께 해 달라 말하는 허황된 프러포즈라면 나았을까. 에이든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네 눈동자가 생각났다며 건넨 조악한 팔찌는 반칙이었다. 버려도 괜찮으니 받아만 달라는 건 전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부 다, 하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어야만 했다.

***

에이든은 천문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흰색 마세라티엔 시동이 걸린 지 오래였지만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은 중간에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운전석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톡톡 치며 한동안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진에게 물었다.

“너, 내가 왼손도 마저 찢어 달라고 하면 찢어 줄 수 있어?”

“……뭐?”

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에이든을 돌아봤다. 앞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에이든도 진을 마주봤다. 에이든은 꽤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진은 직선으로 꽂혀 들어오는 눈빛을 마주했다.

대답해. 무겁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대답을 채근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냥, 좀 필요해서.”

에이든이 별거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진이 저도 모르게 붕대가 둘러진 오른손을 만지작거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제 오른손을 보던 진이 입술을 씹었다.

“…언제 필요한 건데?”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진이 다시 에이든과 눈을 맞췄다.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 달에 선발전이 있어. 그 근처만 아니면…….”

“…….”

“선발전에 꼭 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그때는 좀 곤란해…….”

에이든이 진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진은 정말 곤란하다는 기색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은 그 얼굴을 보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갑자기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한 에이든 때문에 진이 눈치를 봤다.

“그 근처만 아니면 찢어도 되는 거고?”

“아…….”

“대답해.”

“너한테 필요한 거라면 그렇게 할…….”

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빠르게 출발하는 차의 반동에 진의 몸이 앞으로 조금 휘청거렸다. 진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에이든을 돌아봤다.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 전에 없이 사나운 빛을 뿜고 있었다.

***

“씻어.”

에이든이 테이블 위로 아무렇게나 차키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지난번의 호텔방도 아니었고, 진의 싸구려 아파트도 아니었다. 진은 현관을 지나기 전, 차고에 세워져 있던 남색의 차를 떠올렸다. 에이든이 가장 많이 타고 다니던 그 차. 제 착각이 아니라면 이곳은… 에이든 테일러의 집이었다.

진은 엄청나게 넓고 고급스러운 동시에, 아무런 생활감이 없는 맨션을 두리번거렸다. 온통 반짝이고 값비싸 보이는 것들 가운데, 저만 유독 튀어 보이는 기분이었다. 아주 좋은 물건에 묻어 있는 흠집이나 얼룩 같은……. 에이든이 대마를 입에 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뭐 해, 씻으라니까.”

진이 그제야 지금 상황을 납득했다. 아무래도 오늘의 대가를 받을 차례인 것 같았다. 진이 어디로 가야 하냐는 눈빛을 보내자 에이든이 턱 끝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진이 흐리게 웃으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에이든은 지금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아 보였다.

‘언제부터? 팔찌를 줬을 때부터일까…?’

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에이든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인 건 알고 있었다. 그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하다는 보석들을 모두 엮은 팔찌도 어울릴까 말까였으니까.

꼭 받아달라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냥… 그때 느꼈던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네게 전해 주고 싶었을 뿐인데……. 버려도 괜찮다고 제 입으로 말해 놓고는, 막상 에이든이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자 속이 상해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조금 힘 빠진 걸음으로 진 헤니가 욕실에 들어갈 동안, 에이든 테일러는 주머니에 넣어 놨던 문제의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 조악한 상자를 한동안 내려다보던 그는 약간 신경질이 섞인 손길로 테이블 위에 그것을 던져 놓았다.

에이든은 짐짓 여유로운 척을 하며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았다. 무심하게 던져놓았던 손길과는 다르게 눈이 상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예민하게 치솟기 시작한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려 그가 대마를 깊게 빨아올렸다. 불꽃이 타들어가며 매캐한 연기와 재 따위를 만들어 냈다. 폐 깊숙한 곳으로 그 연기를 밀어 넣어 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던 에이든이 테이블 위의 상자를 다시 주워들었다. 달각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척 보기에도 값싸 보이는 팔찌가 들어 있었다. 제 눈동자를 닮아, 생각이 나서 샀다던 팔찌.

발갛게 볼을 물들이곤 쑥스럽게 웃던 진의 얼굴과 밤바람에 흩날리던 검은 머리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고 차 안에서 입술을 씹으며 제 붕대를 만지작대던 그 손길도.

- 너한테 필요한 거면 그렇게 할게.

그렇게 말하던 진 헤니의 검은 눈은 조금 슬퍼 보였을지언정 한 톨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입에 물고 있는 대마가 치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에이든의 표정이 험하게 구겨졌다.

에이든 테일러는 손에 들린 푸른 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조금 초조한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딱 소리를 내며 닫힌 상자가 다시 테이블 위를 구르고, 그 옆으로 몇 모금 빨지 않은 대마가 지져져 버려졌다.

소파에서 일어선 그가 욕실을 향해 걸었다. 신경질이 가득했던 파란 눈은 어느새 무거운 빛으로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큰 보폭으로 걸으며,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위로 끌어올려 벗었다.

텅 빈 맨션에는 에이든 테일러의 발자국 소리와,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만이 가득했다. 굳은 얼굴로 욕실에 다다른 그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샤워기 아래에서 멍한 표정으로 물줄기를 맞고 있던 진의 고개가 들려올라갔다. 희뿌옇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수증기들 사이로 까만 타투로 뒤덮인 어깨가 보였다.

“아, 금방 나갈…….”

급하게 삼켜지는 입술에 진의 고개가 꺾였다. 샤워기에서 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물줄기는 두 사람의 몸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져 젖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에이든이 진의 뒷목을 강하게 움켜잡으며 벽에 그 몸을 가뒀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모든 희뿌연 것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냈고, 찾아냈으니 망설임 없이 손에 그러쥐었다.

밀착해 오는 단단한 몸과 얽혀오는 뜨거운 혀에 진의 머리가 아득해졌다. 강하게 얽어 오는 혀에 눈이 질끈 감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질척이는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하…….”

에이든의 커다란 손이 진의 골반부터 옆구리를 쓸어 올리자, 맞닿은 입술 사이로 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터진 숨에서 단내가 진동했다. 샤워기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소음을 만들어 냈지만, 에이든 테일러의 귀엔 진의 입에서 터지는 안타까운 숨소리만 가득했다. 진 헤니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그의 감각에 입력되지 않았다.

에이든이 진의 엉덩이를 움켜잡으며 몸을 더욱 밀착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벽과 에이든의 몸 사이에서 진이 신음했다. 한참이나 진의 입술을 물고 빨던 에이든이 진의 턱과 목선을 따라 입술을 옮겼다.

참을 수 없이 안타까운 느낌에 진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진의 팔은 저도 모르는 새에 에이든의 목을 감고 있었다. 에이든이 이를 세워 진의 목을 가볍게 물었다. 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에이든의 어깨를 그러쥐는 것뿐이었다. 검은 눈에 열이 가득 차오른 채였다.

***

진은 몽롱하게 풀린 표정으로 색색거리는 숨을 뱉고 있었다. 한참 동안 에이든의 성기를 머금었던 곳이 제멋대로 벌름거렸다. 에이든은 잘게 떨리고 있는 진의 몸을 보다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정액을 손가락으로 쓸어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깝다는 듯 작게 혀를 차는 건 덤이었다.

에이든이 덜덜 떨리고 있는 진의 다리를 가르고 그 사이에 자리했다. 진이 급한 손길로 에이든의 허벅지를 막아 세웠다. 이미 엉망이 된 그곳에 또 다시 단단한 끄트머리가 닿는 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정신이 잘 차려지지 않았지만, 정말 더 했다간 죽을 거라고 본능이 말했다.

“하… 이제, 이제 됐어. 흐으… 충분하니까 그만… 하악!”

에이든은 그 애처로운 애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다시 한 번 제 성기를 쑤셔 넣었다. 그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한숨이 터졌다.

“아윽, 그만… 하아, 그만 줘도 돼…!”

“뭘?”

에이든이 박힌 성기를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으며 묻자 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입에선 대답 대신 앓는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진의 의지와는 다르게 구멍은 에이든을 빨아 당기듯 경련하고 있었다.

“흐으으… 오늘 대가는 충분히, 후으… 받았으니까…….”

진이 에이든 테일러의 상체를 밀어내며 말했다. 물론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는 그 단단하고 커다란 몸을 밀어 봤자였다.

“아, 그거.”

에이든 테일러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대답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진의 허리를 고쳐 잡으며 싱긋 웃었다.

“그건 나중에 따로 줄게.”

“……?”

진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냔 얼굴을 했지만, 에이든은 뻔뻔한 낯으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침대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연속된 사정으로 달아오른 몸에 또 다시 고문 같은 쾌감이 찾아들었다. 예민해진 몸이 벌벌 떨리며 제멋대로 에이든의 성기를 쥐어짰다.

“아윽! 아아! 하… 흐으… 흐윽…!”

한계를 웃도는 자극에 진이 결국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그 흐느낌에도 때려 박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던 에이든은 우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숨을 몰아쉬는 에이든의 얼굴과 몸에도 땀이 흥건했다.

“하… 왜, 힘들어?”

“흐… 내가 아까부터, 그만, 흐윽, 그만하라고…….”

에이든이 진의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무언가를 참는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이 몸 안으로 자신을 박아 넣고 싶은, 폭력적인 욕망을 내리누르며 에이든이 느리게 허리짓을 시작했다. 아무리 울며 애원해도 절대 몸을 빼 주진 않는 그였다.

에이든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성기를 박아 넣고, 다시 선단 끝까지 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감질나게 안을 오가는 성기 때문에 진의 바르작거림이 커졌다. 빠르게 쑤셔질 때는 느껴지지 않던 성기의 모양과 굴곡이 선연히 느껴지고 있었다.

“하… 아으… 에이든…! 그만!”

“후, 힘들다 그래서 천천히 하잖아.”

에이든이 억울하단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기의 끝이 또 다시 깊게 처박혀 들어왔다. 단단하고 굵은 것이 어딘가를 꾸욱 짓누르자 진의 몸이 파득 튀었다. 그 언젠가 느꼈던, 온몸의 감각이 아랫배 아래로 몰려드는 섬뜩함이 찾아왔다.

“하악! 아, 안 돼!”

진이 몸을 비틀어 도망가려 하자 에이든이 사납게 웃었다. 그리고 진의 상체와 허리를 손으로 잡아 고정했다. 아직도 그 깊숙한 곳을 꾸욱 누르고 있는 성기 때문에 진의 반항이 거세졌다.

“놔, 놔 줘! 흐… 안 돼…!”

“뭐가?”

“제발… 제발, 에이든…!”

“응? 뭐가 안 되는데.”

몸이 이상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진이 고개를 저으며 몸을 뒤로 물리려하자, 에이든이 상체를 고정하던 손을 내려 아랫배를 압박했다. 제멋대로 함몰했다 위로 올라오기를 반복하던 진의 복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아, 하악!”

뒤로 꺾이는 고개와 들리는 허리를 보던 에이든이 어금니를 씹으며 다시 제 허리를 빠르게 치받기 시작했다. 아랫배 위에 얹힌 손이 내리누르는 힘을 더하고 있었다. 배 안쪽 어딘가가 푹푹 짓이겨지며 진 헤니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 아윽! …하아악!”

안 돼, 안 돼…! 진이 고개를 도리질치며 에이든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내 눈앞이 희게 번졌다.

“윽…!”

진의 몸이 강하게 수축하며, 성기가 정액이 아닌 묽은 물을 뿜었다. 잔뜩 조여드는 아래에 에이든이 목 안으로 탄식을 삼켰다. 하마터면 그대로 사정해 버릴 뻔한 그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에이든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진의 탄탄한 아랫배가 들썩이고 있었다.

“하… 하으…!”

“후… 안 된다는 게 이거야?”

에이든이 나른하게 웃으며 진의 배를 쓸었다. 배 위가 맑은 액으로 흥건했다. 손에 쓸린 그 액체가 찰박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진은 날아가 버린 정신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벌어져 다물릴 줄 모르는 입술을 보며 에이든이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그가 상체를 내려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돼 있는 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직도 잘게 떨리고 있는 다리를 제 어깨에 걸며 속삭였다.

“진, 좋아?”

“하… 흐으….”

엉망이 된 얼굴,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 바로 앞에서 에이든이 물었다. 입술의 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진이 내뱉는 숨에서 달큰한 냄새가 났다.

“대답해.”

“좋아… 하, 흐윽, 에이든, 좋아해…….”

진의 검은 눈에서 눈물이 타고 내려왔다. 안타까운 목소리로, 애처롭게 대답하는 진 헤니였다. 좋아해. 좋아. 몇 번이나 탄식처럼 뱉어진 고백에 에이든이 눈을 휘어 웃었다.

“좋…….”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에이든이 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진은 본능적으로 그 목을 감싸 안으며 신음했다.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두 사람의 몸이 맞붙었다. 진 헤니와 에이든 테일러의 혀가 질척이며 얽혔다. 목을 꽉 껴안은 그 팔의 느낌에 에이든이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감긴 눈 아래, 푸른 눈이 비정상적인 소유욕으로 빼곡했다.

***

어슴푸레한 새벽녘, 에이든 테일러는 옆에서 들리는 끙끙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진 헤니의 얼굴이 보였다. 진이 뒤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에이든은 진의 오른손이 베개 밑으로 들어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 모습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헛웃음 지었다. 그리곤 살며시 베개 밑에 낑겨 있는 손을 끄집어냈다. 아무래도 베개 밑에 손을 넣고 자는 게 버릇인 모양이었다.

‘바보 아니야, 이거.’

깔려 있던 손을 빼 주자, 찡그려져 있던 진의 눈썹이 조금 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에이든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금색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을 마시러 향하던 그가, 테이블에 던져 놓았던 상자를 힐끗 쳐다봤다. 에이든은 잠시 자리에서 멈춰 서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부엌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테이블로 향했다. 커다란 맨션에 조심스레 소리를 죽여 걷는 발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손 위에 올려진 상자가 달각 소리를 내며 열렸다. 상자에서 팔찌를 꺼내 들여다보던 그는, 별안간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표정을 굳혔다.

- 에이든, 이 유리 좀 봐. 파란색인데 회색빛이 돌아. 네 눈동자 색이랑 비슷하다, 그치?

머리를 맴도는 앳된 목소리에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 평소엔 푸른색인데 빛에 비추면 안에 회색빛이 돌아. 엄청 예뻐.

어젯밤, 팔찌를 건네며 말했던 진 헤니의 목소리와 그 어린 음성이 제멋대로 뒤섞였다. 에이든의 푸른 눈이 잠시 흔들리다, 뒤에서 색색거리며 자고 있는 진을 돌아봤다. 진에게 꽂혀진 시선이 무언가를 찾듯 움직였다.

언제나와 같은 환청이어야 할 목소리는 평소보다 지나치게 선명했고, 뚜렷했다. 마치, 기억 속 음성처럼.

***

테이블 뒤, 소파에 앉아 있는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은 심각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깊게 기대앉아 앞에 놓인 신문을 한 장, 한 장 정독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지금 그는 그딴 재미없는 것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에이든의 푸른 눈은 테이블 저 끝에 있는 상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상자 안에 있는 팔찌에게서. 일부러 멀찍이 떨어뜨려 놨지만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에이든, 이 유리 좀 봐. 파란색인데 회색빛이 돌아. 네 눈동자 색이랑 비슷하다, 그치?

어젯밤, 환청 아닌 환청을 들은 뒤로 그는 확신했다. 진 헤니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진 헤니가 자신을 많이 따라다녔기 때문에 느끼는 기시감, 혹은 익숙함?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열세 살 언저리, 그때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뚜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머릿속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뒷목에서부터 알 수 없는 불쾌감이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상자를 뚫을 듯 쳐다보기만 하던 그가 결국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팔찌를 빼내 가까이 들여다보는 그였다. 이게 내 눈동자랑 비슷하다고? 에이든의 눈썹이 살풋 찡그려졌다.

푸른색의 원석은 오묘한 빛이었다. 쨍한 하늘색이었다가도, 짙은 회색빛을 보여주기도 했다. 빛을 머금은 곳에선 윤기와 광채가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평생을 보고 살아온 제 눈동자였지만, 이 돌맹이와 비슷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제 눈은 그냥 파란 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팔찌를 들여다보던 에이든은, 작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저기… 에이든?”

“……?”

드레스룸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 진 헤니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여기 있는 옷들은 아무래도 조금…….”

“…….”

“정말 아무거나 입… 어도 되는 게 맞나 싶어서.”

어제 욕실에서도 난리법석을 피웠던 두 사람은, 진이 욕실 안에 벗어 둔 옷이 엉망으로 젖는 것도 모르고 서로를 물고 빠는 데에만 몰두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진은 입고 돌아갈 옷이 없음에 크게 당황해야 했다. 에이든 역시 축축하게 젖어 욕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진의 옷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진은 어쩔 수 없이 샤워가운을 걸치고 입을 옷을 찾아 드레스룸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안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으라는 에이든의 말에 진이 굉장히 어색한 손길로 옷들을 뒤적였다. 하지만 전부 다 비싸 보여 차마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 게다가 에이든의 옷을 정말 제 맘대로 꺼내 입어도 되는 건지 눈치가 보였다.

에이든은 문틈에 고개를 내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룸으로 가까워지는 에이든에 진이 문에서 조금 몸을 물렀다.

“그냥 아무거나 입으라니까.”

“전부 아무거나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약간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진의 소심한 반항이 뒤따랐다. 작게 덧붙여진 말대꾸에 에이든 테일러가 한쪽 눈썹을 삐뚤게 들어올렸다.

“아무거나 막… 오백 달러짜리 입으면 어떡하라고…….”

뭔가 잔뜩 억울한 목소리가 웅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시무룩한 표정의 진이 차마 에이든을 보며 말하진 못하고, 허공을 보며 꽁알댔다. 아무래도 비쌈의 기준이 오백 달러인 모양이었다.

에이든은 굉장히 소박한 그 기준에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 드레스룸에 오백 달러짜리는 절대 없을 거였다. 오천 달러짜리라면 모를까.

에이든이 대충 진의 체격에 맞는 옷을 찾기 시작했다. 행거에 걸린 셔츠며 티셔츠들을 뒤지던 그가 흰색의 셔츠 하나를 뽑아 진에게 내밀었다. 이정도면 맞겠네. 자신에게는 어깨가 지나치게 딱 맞는 옷이었으니, 진 헤니에게는 넉넉하게 맞을 터였다.

진이 어색한 손길로 그 옷걸이를 받아들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이제 됐냐는 표정을 짓더니 드레스룸을 나갔다. 진은 문을 닫고 나가는 그를 보다가 손에 들린 셔츠로 시선을 돌렸다.

잘 다려져 있는 셔츠에서는 에이든이 평소 자주 뿌리는 향수 냄새가 났다. 살짝 눈치를 보던 진이 문이 꼭 닫힌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시원한 냄새가 났다. 아냐, 시원하다기보단… 조금 더 깔끔한? 깨끗한? 청량한? 뭐라고 해야…….

“입으라고 줬지, 냄새를 맡으라고 준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

에이든 테일러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사 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청바지 하나를 든 채였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진의 몸이 움찔 튀며 셔츠에 박고 있던 고개를 급히 들어올렸다. 그래 봤자 이미 에이든 테일러에게 모든 걸 들킨 뒤였다. 진의 목과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슨 변명을 하려는지 입이 벙긋벙긋거렸지만 겨우 뱉어낸 말에는 큰 영양가는 없었다.

“그게… 어, 언제… 들어왔…….”

“…….”

에이든은 저 진 헤니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저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빨갛게 익어 곧 터질 것만 같은 진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냄새는 그만 맡고 얼른 입고 나와. 태워다 줄 테니까.”

“……응.”

진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덮으며 대답했다. 정말… 부끄러워서 당장 죽고 싶었다.

***

진은 에이든의 차가 학교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 창문 밖으로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백미러로 아직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그의 귓바퀴를 보다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삐뚠 미소에는 옅은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진 헤니의 꼴은 꽤나 볼만 했다.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올렸는데도, 어제의 흔적이 셔츠의 카라 밖으로 슬쩍슬쩍 보였다. 게다가 나름대로 자신에겐 조금 작은 셔츠를 골라 입혀 놨는데도 품이 컸다. 누가 봐도 진 헤니의 옷은 아니어 보인단 소리였다.

진 헤니를 뒤덮고 있는 꽤나 직접적인 뉘앙스에 에이든 테일러가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에이든은 그저 그 꼴이 웃겨서 웃은 거였지만, 찔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닌 진이 그 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곧 죽어도 에이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진 않는 그였다.

“나… 여, 여기서 내려 주면 돼.”

체육대 건물이 보이자 진이 급히 말했다.

“어디.”

“여기…!”

에이든이 물었지만 진은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창문에 대고 팔을 휘적휘적거렸다. 진은 그냥,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제발 빨리 내리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 여기가 어디냐고.”

“아니, 여기… 여기라니까…!”

그 휘적대는 손으론 도무지 알 수 없는 ‘여기’가 어딘지를 에이든이 끈질기게 물었다. 결국 진이 조금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하며 운전석을 돌아봤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직선으로 마주친 파란 눈동자에 진이 숨을 들이켰다. 동그랗게 뜨이는 그 눈에 에이든의 입술이 삐뚤게 올라갔다. 그 눈빛이 짓궂었다.

선명한 푸른 눈과 언제 봐도 아름다운 그 얼굴에, 진의 얼굴이 다시 목부터 머리끝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평소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볼 기회가 많지 않던 진에게 지금 이 거리와 그 표정은 굉장히 심장에 무리를 주고 있었다. 아주 가끔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볼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전부 검은 눈이 흐리게 풀려 눈물을 가득 머금었을 때뿐이었기 때문에 본 거라고 칠 수 없었다.

“가, 갈게!”

가까이서 눈을 맞춰 오는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너무 예뻐서 심장이 터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빨리…! 빨리 내려야 했다. 당황한 진은 아직 멈추지도 않은 차에서 내리려 문을 달각거렸다. 허둥대며 ‘어, 왜 안 열리지?’ 따위를 말하는 진 헤니였다. 정말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차가 멈춰야 문이 열리지, 진.”

“……젠장.”

진의 입에서 그와 어울리지도 않는 험한 말이 뱉어졌다. 더 놀렸다간 정말 얼굴이 터질 것 같으니 이쯤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에이든이 차를 멈췄다. 입술에 걸린 짓궂은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체육대 본관 앞에 차가 멈추자마자, 진은 쏜살같이 몸을 내렸다.

체육관으로 가던 알렉스 그레이는 웬 흰색 차에서 내리고 있는 진 헤니를 발견했다. 얼굴은 새빨개져가지곤 허둥거리는 게 누가 봐도 바보 같은 진 헤니가 맞았다.

왜 저래? 물론 진 헤니가 바보 같은 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해서 알렉스가 작게 인상을 썼다.

진 헤니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알렉스를 발견하곤 호다닥 그쪽을 향해 달렸다. 에이든의 차는 아직 그 자리에 가만 멈춰 서 있었다.

“알렉스!”

“너 뭐…….”

알렉스 그레이는 옆으로 바짝 붙어오는 진 헤니를 보다 말을 멈췄다. 얘는 대체 언제쯤 자기가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를 자각할까. 얼룩덜룩한 진의 목덜미를 보며 알렉스가 작게 한숨지었다.

알렉스가 저를 한심하단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말거나, 진은 알렉스의 팔을 붙들고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알렉스의 뒤로 몸을 조금 숨긴 채였다. 그리고 알렉스는 서둘러 흰색의 차를 지나가려는 진과 멀뚱히 세워진 차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차와 가까워지자 흰색 마세라티의 창문이 지잉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모른 척 빠르게 지나가려던 진의 노력은 몽땅 헛수고로 돌아갔다.

“진, 그럼 주말에 봐.”

“어…? 어, 응…!”

“…….”

에이든 테일러가 환히 웃으며 진에게 인사했다. 다정하게 인사하며 예쁘게도 웃는 얼굴 때문에 진의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진은 빨리 벗어나려던 것도 잊고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이 살갑게 웃으며 진을 보다가, 그 옆에 서 있는 알렉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는 그를 보며 에이든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알렉스 그레이의 눈썹이 삐뚤게 올라섰다.

창문이 다시 올라가고, 차가 떠날 때까지도 알렉스 그레이의 표정이 펴질 줄을 몰랐다.

에이든 테일러 역시 차게 식은 얼굴로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더러운, 그 초록색 눈이 제 차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꽤나 직선적으로 꽂혀 들어왔던 그 눈빛은 분명한 적대감을 띄고 있었다. 그때의 그 인터뷰에서처럼.

‘하, 주제를 알아야지.’

에이든은 뭔가 빼앗긴 사람처럼 구는 알렉스 그레이를 생각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져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가져 본 적이 있는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이든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신경이 잔뜩 예민해지는 기분에 그가 담배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대마를 입에 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이 채 가기도 전에 상대방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 예, 도련님. 칼튼 윌리엄스입니다. ]

“저예요.”

핸드폰 너머에선 중년 남성의 목소리와 그 앞을 걷고 있을 또 다른 남성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은 비서실장인 칼튼 앞에 걷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말했다.

“의원님은 잘 지내시고요?”

[ 예, 잘 지내십니다. ]

“아닐 텐데……. 내가 열심히 안 괜찮게 만들고 있는데, 잘 지낸다고 하면 어떡해요. 짜증나게.”

에이든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끝으로 앞서 걷던 구두소리가 저 멀리로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에이든의 입에 삐뚠 미소가 걸렸다. 한스 테일러가 없어졌으니 본론을 말할 차례였다.

“다른 건 아니고, 자료 하나가 좀 필요해서요.”

[ 어떤 자료인지, 언제까지 준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

에이든이 입에 물고 있던 대마에 불을 붙였다. 잠시 두 사람 가운데로 침묵이 자리했다.

“…진 헤니에 대한 건 전부 모아 주세요.”

앞으로 그에 대한 건 몽땅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어야 했다. 그 알 수 없는 기시감의 이유가 무엇인지까지도, 단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 전부 다 모으면 되겠습니까? ]

“네, 전부 다요.”

그 맹목적인 모든 건, 하나도 빠짐없이 제 것이었다.

***

언제부턴가 일과가 끝나면 만나는 게 당연해진 세 사람은, 카페에서 각자의 일로 바빴다. 진 헤니는 나디아의 새 핸드폰을 들고 요란법석을 떨고 있었고, 알렉스 그레이는 굉장히 짜증난 표정으로 진 헤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디아는 오늘따라 분위기가 아주 험악한 알렉스 그레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옆에서 연속 사진 촬영법 따위를 신나게 설명하고 있는 진의 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 설명 대부분이 엉터리였다.

진은 나디아도 섬을 탈출했으니, 꼭 제 돈으로 그녀에게 핸드폰을 사 주고 싶다 말했다. 나디아는 그 기특한 생각에 환히 웃으며 진의 등짝을 후렸다. 고맙다고 말하며 등짝을 후려치는 통에 진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지만, 이내 그냥 방싯 웃어 보였다. 나디아의 애정표현은… 원래 좀 그랬으니까.

물론 나디아는 훨씬 전부터 핸드폰이 있었다. 하지만 ‘난 원래 핸드폰이 있었어.’ 따위는 말할 수도 없으니 그냥 얌전히 그 기특한 선물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진은 보지 못했지만,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에 잠시 표정이 흐려진 그녀였다.

“그럼 너희 집에서 쓰던 이 번호는 지울까?”

“응, 그래.”

앞으로 원래 번호로는 전화를 못하겠군. 나디아가 속으로만 생각하며 대답했다. 진은 제 핸드폰을 꺼내 톡톡 소리를 내며 나디아의 새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새로 산 사람보다 진이 더 신나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전이랑 똑같이… ‘세계최강핫걸 나디아’라고 저장해…?”

“당연하지.”

“진짜…?”

“아니면 우주최강핫걸도 괜찮아.”

정말 그래야 되냐는 눈빛에 나디아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진이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그냥 원래대로 할게…….”

그래… 예상했었잖아. 신명나게 움직이던 진의 엄지손가락이 유독 그녀의 이름을 입력할 때는 속도가 느렸다.

“근데 진, 쟤 왜 저래?”

“응? 뭐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진이 나디아의 물음에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 그레이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사실 학교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기 직전, 알렉스에게 불꽃같은 잔소리를 들은 진은 그 이유를 대충 알고 있긴 했다.

“…내가 바보라서 그렇대.”

“뭔 소리야? 넌 맨날 바본데 오늘만 갑자기 쟤가 그럴 리 없잖아.”

그 소리에 진이 나디아를 살짝 째려보다가 알렉스의 눈치를 봤다. 제 기색을 살살 살피는 그 검은 눈에 알렉스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진이 그 표정변화에 움찔하며 시선을 나디아에게 돌렸다. 그리곤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여 말했다.

“…내가 진통제 먹으려고 했거든.”

“진통제?”

“선발전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어떤 멍청한 운동선수가 진통제를 먹냐고, 대체.”

나디아의 물음에 알렉스의 화난 목소리가 뒤따랐다.

“재수 없으면 그 진통제 하나 때문에 도핑 걸리는 거 몰라? 출전 자격 박탈당하고 싶어?”

작게 속삭여 말한 게 다 소용이 없었다. 진은 크게 되물은 나디아가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욕실에서… 물이… 아무튼…… 그래서 손바닥이 욱신거려서…. 진 헤니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변명을 속으로만 주절주절 늘어놨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일이라 진은 억울함을 혼자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신이 잘못했단 걸 알아서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의 손바닥은 이제 거의 다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약간의 통증을 동반하고 있었다. 워낙 큰 상처였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그런데 물을 흠뻑 묻혔으니… 염증이 생기지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알렉스는 잔뜩 풀이 죽은 진을 보며 답답하단 표정을 했다. 진은 괜히 손에 들린 새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진통제를 안 먹게 관리를 잘해야 될 거 아냐. 운동선수가 몸 상태 하나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 게 말이 돼?”

“알겠다니까…….”

“자기 몸이 어떤지는 네가 제대로 알고 챙겨야지. 네가 아니면 누가 챙기냐고.”

“알겠어…….”

이거 분명 체육관에서도 들었던 말인데……. 또 다시 쏟아지기 시작하는 알렉스의 잔소리에 진이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알렉스는 인상을 구기며 진을 바라보다, 그의 목에 붙여진 파스를 보며 혀를 찼다. 체육관에서 옷을 갈아입기 전, 꾸중을 늘어놓으며 그 얼룩덜룩한 목에 파스를 붙여 놨던 알렉스였다.

에이든 테일러를 만나고 오는 주말만 지나면 진 헤니의 몸 꼬라지는 언제나 말이 아니었다. 그 정신 나간 새끼 때문에 저 아무것도 모르는 게. 하, 됐다. 내가 뭔 상관이야. 알렉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디아는 진 헤니의 목, 그 위의 파스에 시선이 박혀 있는 알렉스를 보다 오묘하게 웃었다.

‘뭐… 대충 알 만하네.’

그녀 역시 오늘 진에게서 훅 끼쳐 들어오는 낯선 향수 냄새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딱 봐도 지 옷이 아닌 걸 입고 와서는 맹하게 웃는 게 복장을 다 터뜨려 놨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 멍충한 놈을 지 맘대로 주무르고 있을 그 망할 에이든 테일러 새끼, 그 새끼를 언젠가 재껴버리겠다 다짐하던 그녀였다.

나는 뭐 그렇다 치고. 알렉스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 손으로 눈을 가려 덮고 있었다. 나디아가 보기에는 알렉스 그레이도 진 헤니만큼이나 멍청이가 확실했다.

‘자기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는 놈이 하나가 아닌 것 같은데.’

나디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새끼들은 원래 이렇게 하나 같이 다 덜 떨어진 건지, 아니면 제 주변만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알렉스 때문에 진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알렉스… 네 핸드폰도 구경해도 돼?”

“안 돼.”

“아, 응…….”

슬쩍 묻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진은 풀이 죽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그 모습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하… 봐라, 봐.”

진이 맑게 웃으며 그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잠금을 풀어달라는 듯 슬쩍 내밀어오는 그 손길에 알렉스가 엄지손가락을 버튼 위에 올렸다. 진을 잔뜩 째려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은 채였다.

잠금이 풀리자마자 화면에 가득 보이는 것은 체크리스트였다. 진은 어마어마한 그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디아도 놀란 진의 모습에 고개를 빼고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드릴 50 x 15 / 완료」

「킥 100 x 9 / 완료」

「풀 100 x 8 / 완료」

「인터벌 100 x 20 / 완료」

「스타트 대쉬 25 x 10 / 완료」

「아침 : 에너지 바 3개, 계란 후라이 10개, 토마토 파스타 2볼, 쉐이크 500ml」

「훈련 전 : 식빵 10개, 샌드위치 5개, 어니언 스프 2볼, 우유 500ml, 쉐이크 500ml, 오렌지 1개」

체크리스트는 그 밑으로도 날짜별로 정리되어 한참이나 늘어져 있었다.

“미친…….”

“…….”

그의 체크리스트에는 단 하나도 ‘완료’ 표시가 되지 않은 게 없었다. 한참 전으로 되돌아가 다시 쭉 읽어내려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완료’였다.

나디아는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고, 진은 조금 표정이 굳은 채 알렉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 안쓰럽다는 눈빛이어서 알렉스가 한쪽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뭐야, 왜 그렇게 보는데?”

물론 진 헤니 역시 어느 정도 훈련을 함께 따라가곤 있었지만, 그것들을 강박적으로 지키지는 않았다. 아프고 힘든 날에는 조금씩 훈련을 조절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자유형이, 또 어떤 날은 평영을 훈련하는 게 재밌었다. 그래서 진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수영이 달랐다.

다른 선수들이 보기에는 아니꼬워 보일 수 있단 건 진도 알았다. 제멋대로 하니까…. 그래도 진은 물속에서 수영하는 자기 자신이 최우선이었다. 오늘 자유형을 더 열심히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알렉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이건 조금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컨디션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이 많은 날들 중, 하루 정도는 아프거나 몸이 별로였을 텐데…….

“알렉스, 넌… 이렇게 수영하면 재밌어…?”

“…재밌냐고?”

알렉스는 별말을 다 듣는다는 얼굴을 했다. 진은 체크리스트를 조금 씁쓸한 얼굴로 넘겨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수영은 물에서 자유롭자고 하는 건데, 하나도 자유로워 보이지 않아서 묻는 거야.”

“…….”

“물론 선수니까… 기본적인 훈련은 필요하겠지만, 결국엔 물에 있는 네가 즐거워야 하는데 즐거운 게 맞나 걱정돼서…….”

알렉스 그레이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에 인상을 찌푸렸다.

‘수영하는 게 즐겁냐고?’

무어라 대답하려던 알렉스는 말이 턱하니 막혀서 결국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스스로도 수영이 재밌는지, 즐거운지, 하나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6살 때부터 시작했던 수영은 그에게 그저 습관이고, 해야 하는 일일 뿐이었다. 그냥 하라기에 그렇게 했고, 그래서 자신은 많은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한 번도 그것들에 토를 달거나 왜 해야 하는 건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알렉스는 별안간 던져진 질문에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누구도 제게 수영이 재밌냐고 물었던 적은 없었다. 메달을 따면 기분이 좋긴 했다. 누구보다 빠른 기록을 가지는 건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것들이 오래가진 않았지만.

“알렉스, 너… 수영하는 걸 좋아하긴 하는 거지?”

“…….”

“일단 좋아하는지부터 생각해 봐…….”

진이 다시 조심스레 물었지만 알렉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 옆에 있는 나디아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무래도 알렉스 그레이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하라고 하기에 하고,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는 사람.

나디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를 위해 전부를 내팽개치고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 놈 하나랑,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삽질 중인 놈 하나를 바라봤다. 이 덜떨어진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까마득해진 그녀였다.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아는데?”

“흠…….”

알렉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그 물음에 진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두 바보 사이에 끼어 있는 나디아의 한숨이 짙어졌다.

***

알렉스는 벽 한쪽에 가득 걸려있는, 혹은 세워져 있는 메달과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모아온 것들은 이제 더 이상 놓을 자리가 없어 처치가 곤란한 수준이었다.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이 메달과 트로피들이 낯설다고 느꼈다. 노력에 대한 보상은 언제나 그의 손에 주어졌고, 이것들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자신이 매일매일 해 온 훈련에 대한 당연한 보상.

하지만 알렉스 그레이는 이 트로피들을 모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진 헤니가 말한 문제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영을 좋아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 좋아하는 건… 음…… 내일이 기대되는 거 아닐까…? 나는 그렇던데…….

진 헤니는 한참이나 끙끙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일의 나는 어떻게 수영할지, 내일 물에 들어갔을 때는 또 어떨지. 오늘이랑 다를지. 그런 게 기대되는 거 아니겠냐고. 알렉스는 그 말이 이해될 듯 하면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애초에 진 헤니와 자신은 결부터가 달랐다. 그는 언제나 물속이 더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었고, 자신은 물 안에서 누구보다 공격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진이 수영하는 걸 볼 때면 신기한 기분이 들었던 거고. 진 헤니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자신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벽에 걸린 메달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진 헤니가 아픈 몸으로 나갔던, 그 대회에서 목에 건 금메달이었다.

피가 흥건한 손을 부여잡고 몸을 덜덜 떨던 그 창백한 얼굴이 떠오르자 알렉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는 신경질 섞인 손길로 그 메달을 벽에서 떼어냈다. 여태 그가 가져온 훈련에 대한 보상들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가치를 지닌 메달이었다. 벽에 자랑스럽게 걸어 두기엔 수치스러울 정도로.

화가 난 손길이 그 메달을 책상 서랍 아무 곳에 던져 넣었다. 그 쇳덩이가 만들어 낸 쿵하는 소리 뒤로 핸드폰의 진동이 뒤따랐다. 알렉스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하다, 조금 인상을 풀고 피식 웃었다.

「알렉스, 내가 주ㅈㅔ넘게 말한 것 같아서 미안해. - 진 헤니」

「그래도 너무 로봇처럼 ㅇᅟᅮᆫ동하진 마. 그러다 주거. 넌 인가니야. - 진 헤니」

「나는 친구가 둘뿐이어서, 니가 죽으면 너무 외로울 거야 :( - 진 헤니」

알렉스의 입술이 꾸욱 다물렸다. 그치, 나는 인간이지……. 참으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자꾸 웃음이 새려고 했다.

「…나 혼자만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 ㅇㅏ니지???????? - 진 헤니」

“하하….”

마지막에 도착한 메시지에 결국 알렉스는 소리 내 웃어야 했다. 친구가 아니라고 답장하면 무슨 반응을 하려나. 짓궂게 웃으며 메시지에 답장을 하려던 손가락이 별안간 오는 전화에 흠칫 멈췄다.

「세계최강핫걸 나디아」

“아니, 대체 언제 이따위로 저장을 해 놓은 거야.”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야. ]

“왜.”

[ 너 다음 주 주말에 다 같이 유니버셜 스튜디오 가기로 한 거 잊으면 안 돼. 너 없으면 우리 차 없이 가야 되니까 넌 필참이야. ]

“알겠다니까.”

아무래도 그녀는 선발전이 가까워져 오는 이때에, 진을 에이든 테일러로부터 떼놓으려는 것 같았다.

주말엔 무조건 놀이공원을 가야 한다고 우기는 그녀 때문에 진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하긴 했지만, 결국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나디아가 나중엔 잔뜩 속상한 표정으로 눈물연기를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 야. ]

“왜.”

[ 나는 참고로… 뭐, 등신이긴 하지만 착실하니까. 착실한 등신에 한 표야. ]

“뭐?”

[ 아무튼, 끊는다. ]

등신, 화이팅. 전화가 끊기며 작게 덧붙여진 말에 알렉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끝까지 자기가 등신인 줄도 모르는 등신이었다.

***

릴리 콜린스는 옆자리를 힐끗 바라봤다. 자신의 상사는 스도쿠에 열중하고 있었다. 레오나 테일러가 자주 타고 다니는 회색의 롤스로이스 뒷좌석에는, 언제나 그녀를 위한 스도쿠 책이 준비돼 있었다.

네모난 숫자 박스들을 잠시 바라보던 레오나는 몇 초 만에 비어 있던 모든 칸에 숫자를 적어 넣고, 다음 장으로 넘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릴리는 품에 가지고 다니는 작은 수첩을 꺼내 ‘스도쿠 책 구매’를 메모해 두었다. 아무래도 이번 책도 오래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릴리, 심심해요?”

“예? 아닙니다.”

“릴리도 하나 할래요?”

레오나가 상냥한 얼굴로 다른 책 한 권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릴리는 잠시 어쩔 줄 모르다가 내밀어진 책을 받아들었다. 릴리 콜린스는 모시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상사가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언제 잔인한 얼굴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릴리는 제게로 내밀어진 책을 슬쩍 펴 보았다. 그리곤 수트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아 쥐었다. 본격적으로 풀어 보려는 그녀의 모습에 레오나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밖에다 릴리 이름 써 놔요. 내 거랑 안 섞이게.”

“아, 네.”

또 한참동안 차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사각거리는 연필과 만년필 펜촉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레오나는 하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숫자들의 조합에 흐뭇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뒤로 도착한 메시지 한 통이 그 흐뭇함을 몽땅 망쳐 놨지만.

레오나 테일러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시 연필을 내려놓았다. 진동의 범인은 사진 한 장이었다.

“하… 진짜 연애라도 하는 거야, 뭐야.”

그녀에게 보고된 사진에는 에이든 테일러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두 사람이 찍혀 있었다. 아무리 밖에서 개같이 살았어도 절대 집으로는, 그 누구도 들이지 않던 에이든 테일러였다. 어울리지도 않게 깔끔을 떠는 그 성격에, 바깥에서 굴려먹던 걸 제 공간으로 들일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오르는 짜증에 레오나가 거친 손길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꼴같잖게 시발, 연애는 무슨. 저 깊은 곳에서부터 역겨움이 차오르고 있었다.

‘아냐, 아니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던 레오나 테일러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스도쿠의 모든 빈 칸을 채웠을 때보다 훨씬 더, 정말 훨씬 더 흐뭇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녀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레오나 테일러는 저를 의아한 낯으로 보고 있는 순종적인 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릴리, 그거 알죠?”

“네?”

“원래 실망은 기대했던 사람한테 하는 거고, 배신은 믿었던 사람한테 당하는 거잖아요.”

뜬금없는 말에 릴리 콜린스는 별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레오나 테일러는 그녀의 대답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믿지도 말고,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

“잘 알면서 왜 그랬지? 병신같이?”

레오나 테일러가 정말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릴리 콜린스는 그녀의 푸른 눈에서 알 수 없는 생명력이 번뜩임을 볼 수 있었다. 레오나의 입꼬리가 끝도 없이 치솟았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그의 주제를 알려 주고자 계획했던 모든 일들은, 조금 더 재미있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러면 진 헤니를 한 번 쓰고 버리기가 조금 아까워지는데…….’

레오나 테일러가 잔뜩 휘어진 입을 한 손으로 가려 덮으며 생각했다. 에이든 테일러의 계획 혹은 뭣도 아닌 그 잔머리들, 그것 이외에 깨부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전부 다 박살내고 싶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열 손가락 끝부터 눈알 하나까지. 그리고 하찮기 그지없는, 이 나약하고 주제 모르는 감정까지.

진 헤니라면 너 같은 새끼도 사랑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나 보지? 지금 레오나 테일러의 기분은 근래 들어 가장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산이 부서져 형체도 남지 않을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철저하게 실망하고, 철저하게 배신당해 망가질 에이든 테일러는 정말 참을 수 없이 기대됐다. 지금 당장 그 꼴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잘게 토막 날 에이든 테일러를 생각하니 허기가 지고 입맛이 돌았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느낌에 레오나가 사납게 웃었다. 빨리 배를 채우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운전기사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도착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아주 맛있을 것 같네. 릴리도 많이 먹어요. 어머니께서 입맛이 정말 까다로우시거든요. 다 맛있을 거예요.”

레오나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으며 릴리 콜린스는 차에서 몸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상사와 함께 커다란 저택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자신의 주인과 비슷한 느낌의 집이었다. 세심하게 정돈돼 있는 정원과 작은 뜰, 하지만 그 뒤로 위압적인 느낌의 저택이 서 있었다. 그곳은 정말 테일러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

1층 거실엔 옅은 포르말린 냄새가 나고 있었다. 박제된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레오나 테일러의 시선은 그녀의 어머니 어깨 너머로 보이는 구관조에 꽂혀 있었다. 금색의 꼬리가 길게 내려와 있는 구관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새는 날개를 펴고 당장이라도 바깥을 향해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안에 있어야 할 피와 내장 따위가 다 후벼 파여져,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녀는 오랜만에 아주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한 뒤, 1층 거실에 앉아 나름대로 가족의 분위기를 내는 중이었다. 부모님과 자식이 모여 앉아 근황을 얘기하고, 어쩌고저쩌고. 뭐 그런 하찮고 쓸데없는 것들.

“그래서 레오나, 요새 바깥이 흉흉하니 너도 몸가짐을 조심하고 다니렴.”

그녀의 어머니가 뭐라 떠들든 박제된 새에 시선을 주고 있던 레오나는,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줄리아 테일러를 바라봤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이가 지긋이 먹어서도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봐도 무리 없을 정도였다. 그 얼굴을 보며 레오나가 속으로 역겨움을 삼켰다.

“뉴스를 보니까 요즘 백인 고소득층이나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유행이라잖니. LA는 그 천박한 히스패닉들이나 근본도 없는 아시안이 많으니까 더 조심해야 한다.”

“그래요?”

레오나는 줄리아의 말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했다. 정말 놀랍다는 듯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한스 테일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레오나는 그런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역시 하나둘씩 봐주기 시작하면, 그게 다 당연한 권리인 줄 아는 거지. 그래서 처음부터 봐주면 안 되는 거란다.”

그 말에 한스 테일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 테일러는 그것이 자신의 말에 대한 동의인 줄 알았겠지만, 그의 끄덕임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레오나는 제게로 향한 그의 인정에 작게 고개를 숙였다. 한쪽 입술이 삐뚤게 올라간 것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세상엔 생각 없이 뉴스를 보는 사람이 정말 많지. 뉴스라고 하면 전부 사실이고, 진리일 거라 생각하는 멍청한 것들.’

레오나의 푸른 눈이 차가운 빛을 뿜었다. 줄리아 테일러의 뭣 모르는 말들은 곧 LA에 사는 대부분이 말하게 될 대사였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신이었다. 언제나 사실은 편집하기 나름이었고, 이야기는 조금만 비틀어 다시 쓰면 그만이었다. 제가 원하는 대로.

“레오나, 한창 불이 붙어 있는 사안에 물을 타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야. 자칫하면 그 물을 다 뒤집어 쓸 수도 있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그녀의 앞으로 한스 테일러의 무감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줄리아 테일러는 자신이 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며 테이블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레오나는 그 유약하고 겁쟁이 같은 말에 고개를 약간 모로 기울였다. 한창 때에 온갖 기업과 언론을 쥐고 흔들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되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물 타는 거 대신 다른 불을 붙이려고 하잖아요. 더 크게.”

“레오나 테일러.”

“실망하실 일 없어요. 그냥 믿고 맡기세요.”

전 에이든 테일러가 아니거든요. 레오나가 제 앞에 놓여 있던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한스 테일러가 그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레오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불리한 입장문 대신, 곧 다른 걸 발표하게 될 거예요. 에이든 테일러가 벌여 놓은 일들 따위는 뭣도 아니게 만들 입장문을요.”

“의원님, 아래에 변호사가 도착했습니다.”

주인을 모시러 온 칼튼 윌리엄스가 그들의 대화 중간을 끊고 들어왔다.

‘변호사?’

레오나 테일러의 눈이 한스 테일러와 칼튼 윌리엄스의 기색을 읽기 위해 가늘게 뜨였다. 한스 테일러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다, 칼튼을 돌아봤다. 그제야 칼튼은 아차 싶은 표정을 하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명백한 제 실수였다.

마뜩치 않은 표정의 한스 테일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지며 말했다.

“네가 남자애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

“그 정도 배짱에….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아까워.”

고개를 작게 저으며 혀를 차는 그였다. 두 남성의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티테이블에서 멀어졌다. 멀어지고 더 멀어져, 아예 들리지 않을 때까지 레오나 테일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모멸감과 치욕으로 차갑게 물들었다.

‘뭐…? 아까워…?’

이 테일러 가에 있는 새끼들에겐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한 번 보여 준 뒤론 두 번 다시 잊지 못하게. 두 번 다신… 씨발, 저딴 개 같은 소리는 하지 못하게.

레오나의 푸른 눈은 점점 잔인한 빛이 짙어졌다. 그녀는 소파 팔걸이에 놓았던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가죽은 강한 힘으로 쥐어지며 드득하는 소리를 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뭉툭하게 깎인 손톱이었지만 곧 가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레오나는 제 손톱 끝을 바라보다 어금니를 물었다. 슬슬 더 큰 불을 놓을 때가 오고 있었다.

***

대리석 바닥과 두 남자가 신은 구두가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복도에는 한동안 구둣발 소리만 가득했지만, 한스 테일러의 입에서 뱉어진 싸늘한 목소리가 그 적막을 깼다.

“죽을 날 받아 뒀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은 건가, 칼튼?”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칼튼에게 향했다. 칼튼 윌리엄스는 비슷한 실수를 한 번이라도 더 했다간 곧장 날아갈 자신의 목을 생각했다. 비유적인 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목이 날아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레오나 테일러가 관리하는 기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LA포스트랑 같이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아마 1면과 2면 전부를 관리하고 있을 테지.”

“예,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수영선수에 대한 기사도 전부 레오나 테일러가 찍어내는 거겠군.”

한스 테일러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믿으라고 했던가? 이래선 믿어 주는 척을 하기도 어렵겠는데. 에이든과, 그리고 레오나 테일러와 놀랍도록 닮은 그의 얼굴에 서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그들 사이에 신뢰나 믿음 같은 단어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녀 또한 정말 자신을 믿어 달라 말한 것이 아닐 터였다. 그들은 그런 가변적인 것들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믿음? 얼마나 믿는지는 뭘로 보여 주지? 신뢰도 마찬가지였다. 증명해 보일 수 없었다. 그것들은 언제나 손쉽게 부서지고 예상과 기대를 빗나갔다. 자신이 준만큼 돌려받기도 어려웠다.

그딴 얄팍한 것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확하고, 명확하며 깔끔한 게 필요했다. 그런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철저한 손익계산뿐이었다. 숫자는 언제나 눈으로 보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으니까.

이것은 누구의 것이며, 저것은 누구의 것인지. 어떤 사람이 얼마만큼 먹을 것이며, 누가 어떤 이익과 손해를 자신에게 줄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칼튼, 자네가 보기에 레오나 테일러는 어떤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됩니까?”

그가 칼튼을 떠보듯 물었다. 조심스레 되묻는 칼튼에게 한스 테일러가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중년의 비서실장은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뗐다.

“성능은 우수하나, 성능 대비 투자 가치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맞는 말이었다. 한스 테일러가 그 정확한 분석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딸은 훌륭한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지만, 크게 이익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녀가 쓸모를 다하는 방식은 또 다른 집안과의 연줄을 만들 때가 유일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결국 이 판에서 여자는 안 될 일이었다.

이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 살을 좀먹을 수도 있는 게 레오나 테일러였다. 자신의 딸은 여자치고 가진 야망과 욕망의 크기가 너무 컸다. 그녀는 잘 갈무리하고 있다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푸른 눈 밖으로 그 욕심이 언제나 뚫고 나왔다.

그 건방진 눈빛. 언제 제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을지 모를 년이었다. 한스 테일러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런 건 싹부터 잘라 없애야지. 제 딸이라도 고작 어린 여자애 하나가 자신을 잡아먹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복도를 울리던 구두 소리가 멎고, 잠시간의 침묵이 찾아왔다. 한스 테일러가 칼튼을 돌아보며 말했다.

“레오나 테일러까지 그 수영선수한테 관심을 몰고 있는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보는 손해가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는 수준이라 판단되면, 적당한 때에 둘 다 치워도 좋네.”

“둘이라 하심은…….”

“칼튼, 내가 말을 어렵게 했나?”

한스 테일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의 비서실장을 쳐다봤다. 칼튼 윌리엄스는 곧 공증 받게 될 그의 유언장을 상기하며 대답했다. 그가 가진 대부분을 에이든 테일러의 앞으로 돌려놓은, 그 유언장.

“…죄송합니다. 말씀하신바 알아들었습니다.”

면목 없다는 듯 작게 숙여진 고개를 보다 한스 테일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근본도 없는 놈 하나와 저를 빼닮은 얼굴로 건방진 눈을 하는 어린년 하나를 떠올리며 그가 생각했다. 주제를 모르는 것들은, 주제를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단호한 걸음으로 앞서 걷는 한스 테일러를 보던 칼튼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메시지였다.

「실장님, 진 헤니에 대한 자료가 거의 완성됐습니다. 이번 주 내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에이든 테일러가 지시했던 그 자료였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곤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수영선수 하나 때문에 여기저기 꼴이 엉망이 되는 중이었다. 물론, 정말 엉망이 되기 전에 치워지겠지만.

칼튼 윌리엄스는 그런 진 헤니에게 차가운 애도를 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값비싼 대리석 바닥이 공허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권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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