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Fake Lover (3/16)

(3) Fake Lover

수영장으로 향하고 있는 진은 뻑뻑한 눈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적응을 하려고 노력해도, 노력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었다. 그에겐 콘택트렌즈가 노력으로 되지 않는 존재였다. 진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비비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나 눈앞을 잘 보호해 주던 커튼이 없으니 눈이 부신 느낌이었다. 눈알을 찌르던 앞머리가 사라져서 편하긴 했지만, 이 역시 적응을 하려면 시간이 꽤나 필요할 것 같았다.

진 헤니는 지저분했던 머리를 깔끔히 뒤로 넘긴 채였다. 어제 미용사가 얼마나 혼을 내던지……. 대체 머리가 이 지경으로 엉망이 될 때까지 미용실에 안 오고 뭐했냐며, 진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냥 깔끔하게만 잘라 달라는 진의 요구를 싸그리 무시하고, 미용사는 예술의 혼을 불태운 것처럼 보였다. 멋쩍은 표정으로 눈을 꿈뻑거리는 찌질이 하나의 삶을 갱생시켜 보겠다 다짐한 게 분명했다. 그는 미개척지를 개척하는 콜럼버스가 된 기분으로 진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내며 말했다.

-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가 되게 해 줄게요.

- 네…? 아니, 그렇게까지는 전혀 필요 없는…….

- 나만 믿어요.

진은 머리를 다 자르고 나서 헤어스프레이로 어떻게 머리를 셋팅해야 하는지 주입 교육을 당했다. 그리고 오늘 그럭저럭 흉내를 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아침에 스프레이를 들고 한참을 씨름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머리를 만져 놓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물에 들어가야 함을 깨달았다. 진은 스프레이 때문에 약간은 딱딱하게 굳어 뭉쳐 있는 앞머리를 검지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려 보다 손을 내렸다.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진은 스스로의 바보 같음에 한숨만 푹푹 쉬며 걸었다. 그는 락커룸에 도착하자마자 당장에 렌즈를 빼기 위해 가방을 뒤졌다. 이놈의 렌즈통이 대체 어딜 간 거야. 분명 챙겼는데…! 누군가가 락커룸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진은 렌즈통을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조금 전 들어온 알렉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제 락커룸을 열면서 웬 낯선 사람의 뒷모습을 경계 중이었다. 뭐야, 누구야. 저긴 삼 일 동안 무단으로 훈련을 빠지고 있는 개또라이 진 헤니 락커인데. 알렉스가 작게 인상을 썼다. 친구인가? 아닐 텐데, 진 헤니는 친구 같은 거 없는데.

진 헤니의 락커를 뒤지고 있는 남자는 적당히 핏되는 검은색 반팔 티를 입고 있었는데, 넓은 어깨와 상대적으로 슬림한 허리의 라인이 눈에 띄었다. 체형을 보니 수영 선수인 것 같긴 한데……. 진 헤니가 수영부를 나가고, 걔가 쓰던 락커를 배정받은 건가? 아니, 걔가 수영을 그만 둘 리가 없는데……. 알렉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요. 그 락커가 주인이 있는,”

“…알렉스?”

알렉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진 헤니 아닌 진 헤니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뭐냐?”

“렌즈… 렌즈가 안 빠져…!”

“야, 일단 진정해 봐.”

지금 진은 눈알이 뽑힐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정말 눈알이 빠질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손가락으로 몇 번을 헤집은 눈이 빨갛게 충혈 돼 있었다. 익숙하지 않아 눈 안에 생채기를 잔뜩 낸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덩달아 허둥댔다. 진이 그런 알렉스의 티셔츠 끝자락을 꼬옥 잡았다. 눈물이 쉴 새 없이 줄줄 흘렀다. 알렉스는 갑자기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해 들어오는 진 때문에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렀다. 문제는 몸을 뒤로 물리니까 곧바로 따라 붙는 진 헤니였다.

“야, 진정하고 눈… 좀 감아 봐, 일단.”

“눈?”

“건조… 건조해서! 안 빠지는 걸 수도 있으니까.”

알렉스는 아직도 제 티셔츠 자락을 붙잡고 있는 손에 쩔쩔맸다. 왜 쩔쩔매는지는 알렉스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진은 눈을 감으라는 알렉스의 말에 바들거리며 눈을 꾹 눌러 감고 있었다. 알렉스는 눈물에 푹 젖은 진의 까만 속눈썹을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턱주가리를 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계속 감고 있어…?!”

“…우선 이 손 좀 놔 봐.”

진은 망설이다 티셔츠를 쥔 손을 놓았다. 알렉스는 락커 문 안에 붙어 있는 거울 앞으로 진을 질질 끌고 갔다. 진의 뒷덜미를 쥔 채였다.

“야, 눈 뜨고 거울 잘 봐.”

살며시 눈을 뜬 진의 앞으로 거울이 보였다. 진의 뒤에 탐탁지 않은 표정의 알렉스가 서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은 당장에 자신의 눈을 구해줄 사람이 알렉스 밖에 없단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을 호소했다. 울먹이는 그 표정에 알렉스의 표정이 더 무섭게 구겨졌다. 역효과였다. 알렉스는 짧게 혀를 차더니 거울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네 눈 잘 보고. 손을 이렇게.”

진은 거울을 통해 보이는 알렉스의 손 모양을 어색하게 따라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약하게 렌즈를 쥐어 봐.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하라는 대로 진이 눈 가깝게 손가락을 갖다 댔다.

“렌즈를 쥐어야 되는데 눈을 감으면 어떡해!”

“아프단 말이야…!”

“아씨…!”

결국 알렉스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아, 진짜 이 덜떨어진 놈을 어떡하지! 머리를 한참이나 헝클던 그가 진을 돌려 세웠다. 무언가 결심한 결연한 표정이었다.

“눈 감지 마. 실명하고 싶지 않으면.”

어금니를 씹으며 말하는 통에 실명시켜 버리겠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진이 침을 꿀꺽하니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눈을 감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꺼풀에서 드러났다. 진은 눈을 할 수 있는 대로 크게 뜨고는 감지 않기 위해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알렉스는 한쪽 손으로 진 헤니의 눈을 아래위로 크게 벌려 고정했다. 그리곤 나머지 한쪽 손을 조심스럽게 눈 가까이 가져갔다. 진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질린 게 보였다. 알렉스는 심장 수술을 집도하는 흉부외과 의사가 된 기분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 눈동자에 닿자 진의 몸이 움찔거렸다. 렌즈를 봐야 하니 둘의 몸은 부득이하게 가깝게 붙어 있었다. 알렉스의 얼굴에 진 헤니의 불규칙한 숨이 닿았다. 덩달아 왜 숨을 참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렌즈를 빼는 데 몰두해 있었다.

알렉스가 손가락에 걸린 렌즈를 조심스럽게 붙잡아 잡아 뺐다. 몇 번이나 눈을 감을 뻔했지만, 진은 필사적인 의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 집중했다. 둘의 엄청난 집중력은 진의 오른쪽 눈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진은 후련해짐과 동시에 시야를 잃어버리는 느낌에 잠시 휘청였다.

“이렇게 이쪽도 빼면 돼. 됐지?!”

알렉스는 손가락에 있던 렌즈를 렌즈통에 던지듯 넣어 놓고는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진은 절박한 손길로 알렉스의 티셔츠를 다시 잡아챘다. 아니, 잡지 말라고!! 알렉스의 머릿속에 소리 없는 절규가 가득했다.

“빼, 빼 줘!”

“네가 빼!”

“알렉스, 제발…!”

울먹이며 빼 달라고 사정하는 진 때문에 알렉스는 이제 정말 울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물에 뛰어 들어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었다. 아니면 저도 모르게 꿀꺽이며 울린 목울대라도 도려내 없애 버리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

진 헤니는 삼 일이나 무단으로 훈련을 재꼈지만, 그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수영 실력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침울했다. 아, 뭐, 애초에 좀 별난 놈이란 건 알았지만……. 노력으로 메꿀 수 없는 재능의 차이를 통감한 표정이었다.

훈련에 성실히 나오라는 코치의 꾸지람 아닌 꾸지람에 진이 맑게 웃었다. 네, 그럴게요. 살뜰하게도 웃는 모습에 코치도 그냥 진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치고 말뿐이었다. 같은 선수인데 취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졌다.

“저 새끼 심지어 식단 관리도 제대로 안 한다고.”

짜증나는 새끼. 조용히 진을 씹던 다른 선수들은 옆에 앉은 알렉스 그레이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정말 죽이고 싶나 보다. 알렉스의 표정은 살벌해도 너무 살벌했다.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말없이 알렉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표정 풀어라, 야.”

“너 같으면 표정이 풀리겠냐. 진 헤니 저 새끼 오기 전까지 알렉스가 계속 주 대회든 뭐든 다 1위였는데! 아니, 솔직히 훈련이나 열심히 하면 내가 말을 안 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냐. 조용히 좀 해, 이 눈치 없는 새끼야.”

알렉스는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든 말든, 벤치에 앉아 진 헤니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주 격렬히, 심각하게 짜증이 치솟았다. 죽여야 하는 대상 1순위는 진 헤니가 아니었다. 저런 미친, 또라이 같은 놈을 보며 잠시나마 멍해졌던 알렉스 그레이 자신이었다.

물속에서 방금 나온 진 헤니의 몸에서 물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선수용 반신 수영복을 입은 진은 수경과 수영모를 벗고 머리를 탈탈 털었다. 머리를 털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흐린 시야를 뚫고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진이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시야를 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결국 수경을 눈앞에 가져다 대야만 했다.

알렉스는 제게로 향한 진의 시선에 인상을 구겼다. 수경을 대충 눈에 대고 있던 진은 낯익은 얼굴에 방긋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알렉스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지금 나한테 인사하는 거야, 뭐야. 진은 대답 없는 상대방에 무안할 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 더 큰 몸짓으로 손을 흔들었다.

“진짜 죽일 수 있는 방법 없나.”

나지막히 뱉어진 알렉스의 말에 주변이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누가 봐도 알렉스의 눈알은 맛이 가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 스스로도 제 자신이 드디어 맛이 갔다고,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

에이든에게서 주소와 시간만 달랑 적힌 메시지가 온 건, 훈련 후 집에 돌아갈 때쯤이었다. 오라는 소리겠지…? 진은 적힌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음을 확인하곤 거의 뛰듯 집으로 향했다. 머리도 다시 만져야 했고, 무엇보다 나름대로 차려 입을 필요가 있었다.

진은 훈련할 때보다 약 다섯 배는 더한 집중력으로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렌즈를 끼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한참을 끙끙거렸지만 적힌 시간보다 삼십 분은 이르게 도착하는 기염을 토했다. 게다가 그 주변을 초조하게 떠돌아 다녔음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했다. 에이든을 기다리는 내내 심장이 벌렁벌렁했는데, 더한 상황은 에이든이 도착하고 나서 벌어지고 있었다.

진은 갑자기 쏟아지는 낯선 상황들에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이건 아주… 아주, 아주 곤란했다. 애인인 척이 이런 건 줄 알았더라면 한 번 고사했을 수도……. 차라리 그냥 세, 섹스나 하는 게 낫겠어. 진은 식은땀이 뻘뻘 나기 시작한 등줄기를 애써 모른 척했다.

“왜, 입맛에 안 맞아?”

앞에서 달큰하게 웃는 에이든 테일러는 진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경우였다. 에이든과 진은 요새 헐리웃 셀럽들이 즐겨 찾는다는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디너 테이블에는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송아지 고기에 함께 곁들이면 좋다 추천 받은 화이트 와인 따위가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진은 그 모든 것에 하나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고 있어서, 고기를 입으로 집어넣었다간 그대로 다시 토해낼 것 같았다. 진은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삐걱삐걱 부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분명 제 몸인데 제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감각이 미칠 듯이 예민해짐과 동시에 바보처럼 둔해졌다.

“병신처럼 굴지 말고 똑바로 해.”

에이든이 예쁜 미소를 유지한 채 작게 속삭였다. 진은 뜨끔한 표정이 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서툰 손길로 앞에 놓인 고기를 썰었다. 진은 애인인 척 두 번 했다간 땅 아래에 차게 식어 묻히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너무 아름다운 에이든의 얼굴에 심장마비가 오거나, 아니면 에이든이 멍청이처럼 구는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거나.

진이 허둥대며 고기를 입에 넣을 동안, 에이든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주변을 훑어봤다. 그의 예상대로 주변엔 가십에 목마른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건질 게 없을지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파파라치들만 셋이 넘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에이든이 심심치 않게 봐 왔던 기자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에이든이 앉은 테이블을 힐끗대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는데, 가끔 핸드폰으로 바쁘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에이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곤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얼뜨기 같은 진에게 손을 뻗었다. 화이트 와인으로나마 긴장한 목을 축이던 진은 손에 닿아 오는 체온에 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하마터면 꼴사납게 사례가 들릴 뻔했기 때문에.

“다 먹으면 같이 갈 곳이 있어.”

“아, 응.”

에이든이 자신의 한쪽 손을 가볍게 잡고 있었다. 진은 닿아오는 살갗의 감촉에 뒷목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에이든이 그런 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꼬리에 진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이든 테일러는 천사가 분명해. 인간이 저렇게 생길 리 없어, 저렇게 웃을 수 있을 리 없어…….’

진은 황홀하다는 눈빛으로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 멍하니 풀린 눈에 에이든이 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리곤 앞에 있던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뭐라 해석한 건지는 몰라도, 진이 따라 웃었다. 누구와는 다르게 아무런 의도나 목적 없이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앞에서 맑게 웃는 진 헤니 때문에 에이든은 조금 더 냅킨에 손을 문댔다. 불쾌한 체온이 손에 들러붙어 닦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아무리 닦아도.

***

에이든은 어정쩡한 포즈로 서서 도와달란 눈빛을 하고 있는 진을 무심히 쳐다봤다. 봐 둔 옷이 있다더니, 자신이 입게 될 옷일 줄은 몰랐는데……. 진은 몸을 두르고 있는 고가의 옷들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옷 입는 걸 도와주던 점원이 마지막 매무새를 정리해 주곤 자리를 떠났다.

“잘 어울리네.”

이 말은 65% 정도가 에이든의 진심이었다. 저 얼굴이 바닷물에 잔뜩 절여졌을 때도, 호텔방에서 벗은 몸을 처음 봤을 때도 느낀 거였지만 진 헤니는 생각보다 훌륭했다. 굉장히 여러 가지 의미로. 항상 벙벙한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다녀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잘 가꿔진 몸이었다. 전체적으로 팔다리가 긴 데다 어깨가 곧게 펴져 있어서 그런지 뭘 입혀도 잘 어울렸다.

몸을 훑어 내리던 에이든의 눈길이 이번엔 진 헤니의 까만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곤란하다는 빛으로 맞춰 오는 까만 눈동자, 커다랗지만 쌍꺼풀이 없어 묘한 눈매까지. 에이든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쁜 기억을 떠올린 사람처럼 얼굴이 차게 굳었다.

소파에 앉아 진의 몸을 감상하던 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에이든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멈칫했다. 나는 에이든 테일러의 애인이다. 애인이다……. 진이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되뇌었다. 힘주어 떠진 눈이 우스꽝스러웠다.

에이든은 진이 입고 있는 셔츠의 깃을 정리했다. 흰색 와이셔츠 깃 끝에는 까만색과 주황색으로 자수가 놓여 있었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심플하지도 않게. 깃을 정리하던 에이든은 두어 개 풀려 있는 셔츠의 단추를 꼼꼼히 채우기 시작했다.

목 끝까지 꽉 다물린 셔츠에 괜히 진은 꿀꺽하니 목울대를 울렸다. 약간은 답답하게 조여 오는 통에 인상을 찌푸려졌다. 진의 불편한 기색을 모를 리 없는 에이든은 개의치 않았다. 목의 단추를 잠그던 에이든의 손끝이 턱과 목 언저리를 스쳐지나갔다. 뒷목을 감싸듯 쥐는 커다란 손에 진이 몸을 굳혔다. 목 뒤로 오소소 소름이 일어났다. 에이든은 엄지손가락으로 잔뜩 긴장한 목덜미의 살을 쓸어내렸다. 진의 눈동자가 급하게 흔들렸다. 둘을 쳐다보는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얼어붙은 진을 보며 에이든이 다정하게 말했다.

“난 단정한 편이 좋아서.”

“거짓말은.”

그리고 에이든의 말에 대답한 건 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에이든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여성이었다. 여자의 까만 수트 위로 사만다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진은 달아오른 얼굴이 들킬까 싶어 약간 고개를 숙였다.

“너무 오랜만에 오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둘에게 다가온 사만다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맞이하듯 에이든을 가볍게 안았다. 에이든도 그 인사를 굳이 뿌리치진 않았다. 둘의 인사를 멀뚱히 보고 있던 진은 제게로 향한 호기심 어린 눈에 일순 당황했다.

“인사 안 시켜 주는 거야?”

“아, 이쪽은 진이에요. 진, 이쪽은 사만다.”

사만다가 개구진 표정으로 웃었다. 진은 어색하게 싱긋 웃으며 인사할 뿐이었다. 사만다는 노골적으로 진을 관찰했다. 이 셔츠 이번에 한정판으로 나온 신상인데, 용케도 알아봤네. 에이든을 향한 중얼거림과 함께였다.

진은 목 끝까지 단추를 모두 채우고 있지만, 왜인지 두 사람 앞에 벌거벗겨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의 두께부터 팔의 길이, 팔목과 발목의 라인까지를 해체하듯 뜯어보는 사만다 때문이었다.

“키가 한 184센치 정도 되려나. 어깨 너비나 허리나… 팔 길이도 그렇고. 흠… 자기, 수영해?”

대답은 진의 동그래진 눈으로 충분했다. 그 즉각적이고도 순진한 반응에 사만다가 크게 웃었다. 수영이라……. 생각지도 못하게 알게 된 정보에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만다가 에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이든, 이 친구는 거짓말 같은 거 시키면 안 되겠는데. 이렇게 표정 관리가 안 돼서야… 괜찮겠어?”

“괜찮겠죠. 안 괜찮아도 뭐, 필요한 건 사진 몇 장이라.”

“뭐야, 부정도 안 하네. 재미없게.”

사만다는 김샌다는 표정으로 에이든을 흘겨봤다. 중간에서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진 헤니 하나였다. 진은 팔 길이에 딱 맞게 떨어지는 셔츠의 팔목 부분만 지분거렸다. 사만다는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그 손짓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데리고 다니는지는 알 것도 같고…….”

약간의 웃음기와 함께 뱉어진 말에 에이든이 피식 웃었다.

“계산이나 하시죠.”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사만다는 뒤로 삼켜진 말을 알아들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능구렁이 같은 여자였다. 에이든의 카드가 긁히는 동안, 진은 제가 입은 옷의 가격이 대충 얼마인지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한번 착용해 버렸으니 옷으로 돌려주기도 너무 애매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셔츠와 똑같은 디자인은 이제 한 장 남아 있었다. 진은 조심스럽게 셔츠의 안을 살폈다. 가격이 적힌 택을 들어 올리자마자 진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셔츠 하나에 사천 달러라니. 눈이 질끈 감겼다.

셔츠 하나가 사천 달러니까, 바지랑 신발까지 하면…….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옷이나 신발 같은 건 안 돼. 차라리… 차라리 돈으로 달라고 하는 게 낫겠어.

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에이든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 패션계에서 가장 핫하다는 브랜드, 요셉룸은 돈 좀 있다 싶으면 너도나도 못 사서 안달인 곳이었고, 동시에 구매를 허가 받기 위해선 여러 인증 절차가 필요한 곳이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은 얼마인지, 차는 무엇을 타고 다니는지. 하다못해 발 사이즈는 얼마인지까지 물어보는 이상한 곳이었다. 문제는 구매 승인의 기준을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돈이라면 충분히 많던 한 얼간이가 요셉룸에서 퇴짜를 받아 몇날며칠이고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에이든이 대체 승인의 기준이 뭐냐고 물었을 때, 사만다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디렉터가 또라이야. 오너도 또라이고. 그리고 디렉터랑 오너가 동일인물이야. 됐지?

치를 떠는 사만다에게 에이든은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 소린지 알 수 없었으나 굳이 더 묻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에이든 테일러가 구매를 허가 받았다는 거니까.

에이든은 이번 시즌 옷들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라인만 집어 몽땅 배송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중 한정판으로 나온 것들은 진의 몸에 둘렀다. 진이 입고 있는 셔츠, 바지, 신발은 10개만 만들어져 판매되는 상품이었다.

진이 입고 샵을 나서는 순간 예상되는 반응들이 알만 했다. 자극적이게 뽑혀 나올 헤드라인이 뻔하니까. 미국은 천박한 가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라였고, 에이든은 뭘 던져 줘야 대중들이 개떼처럼 몰릴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얼뜨기 같은 얼굴로 맹하니 서 있는 진을 돌아보며 에이든이 비리게 웃었다. 꽤나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

늦은 밤, 에이든은 한 가십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자신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사진이라기보다는, 그의 연인에 포커스가 맞춰진 사진들이었다.

「테일러 가의 골칫거리, 에이든 테일러의 동성 연인 포착」

「당일 구매한 요셉룸 한정판 라인 전격 분석!」

뭐, 여기까지는 대충 예상했던 바고.

「상대는 진 헤니, 떠오르는 수영 유망주로 밝혀져… 국가대표 후보군 신기록의 주인공」

에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목을 끌기에 아주 적절한 타이틀이었다. 계산했던 것보다 일이 더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냥 대충 잘 쓰고 버릴 만한 걸 골라잡았는데, 알고 보니 금덩이인 느낌이랄까. 금덩이라 해도 어차피 쓰다 버릴 건 매한가지긴 했다.

“생각보다 재밌는 새끼라니까.”

등신처럼 굴길래 뭣도 없는 놈인 줄 알았더니, 예상보다 훨씬 이 역할극에 제격이었다. 게시물 아래에 줄줄이 달린 반응들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기본적으로 에이든과 진 모두 이목을 잡아채는 외모였기에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그날 쓴 돈의 총액을 계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정하게 허리를 감싸 안은 사진에는 ‘호모새끼들, 다 뒤져 버렸으면.’ 같이 적당한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에이든을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시작은 가십지겠지만, 선거가 가까워져오면 정치면을 장식하게 될 게 눈에 훤했다.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사진을 넘겨보던 에이든은 맑게 웃고 있는 진의 사진에서 손을 멈췄다.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진은 정말 사랑에 빠진 것처럼 수줍게 웃는 얼굴이었다. 에이든도 나름 표정을 지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진 헤니의 눈빛과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진의 눈에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애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진을 한참 보던 에이든이 표정을 굳혔다. 그리곤 흥미가 다 떨어진 얼굴로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 둔 채 냉장고로 향했다.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힌 냉장고에는 생수병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거친 손길로 작은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찬물에도 답답한 속은 가실 줄을 몰랐다.

- 너를 꼭 찾을게.

급작스럽게 재생되는 음성에 에이든이 우뚝 멈췄다.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에이든의 표정이 무섭게 구겨졌다. 그리고 사나운 표정으로 웃었다. 한참동안 또 괜찮더니, 약을 다시 먹을 때가 왔나. 자조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기가 무섭게 환청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에이든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 꼭 만나러 와야 해.

- 응! 그럴게. 꼭 갈게!

에이든이 포기한 눈빛으로 냉장고 옆의 수납장을 뒤졌다. 거친 손길에 서랍 속 물건들이 우르르 무너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작은 병을 발견한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찾고 있던 물건이 맞지만, 왜인지 에이든은 곧바로 약을 먹지 않았다. 약병을 꺼내 쥔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 아직도 보이니?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섞여 흐르는 기억에 에이든이 결국 욕을 짓씹었다. 떠 보듯이 던져진 의사의 물음에 어린 에이든 테일러는 뭣도 모르고 솔직하게 대답하기 일쑤였다. 진실을 말하면 언제나 알약이 그의 입에 주어졌고, 그걸 삼키는 날이 많아질수록 머리는 제 기능을 상실해 갔다.

약을 더 이상 먹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열 세 살짜리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어른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아직도 보이니?

아직도 보이냐고? 에이든의 얼굴에 절망적인 미소가 가득했다.

- 너를 꼭 찾을게.

꽤나 잠잠했던 환청들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한 건, 누군가 때문이 분명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에이든이 피식하니 웃었다. 뒷골이 울리기 시작하는 느낌에 그가 신경질적으로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마치 독약을 삼키는 사람처럼 알약 하나를 입에 넣고 삼켰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한 멍한 정신 사이로 방금 본 진 헤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부인해 왔지만, 아무래도 자신은 정말로 미친 게 분명했다.

***

진은 가라앉은 얼굴로 앞에 걸린 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천 달러나 하는 흰색 셔츠라니…….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이 터졌다. 평소처럼 머리는 산발인 데다, 불편했던 렌즈를 빼고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진은 제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명품 셔츠를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든 테일러의 의도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책상에 혼란하게 쌓여 있는 책 더미들 가운데에서 일기장을 찾는 일이었다. 매일 쓰던 거였지만, 요즘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쓰지 못했다. 반성해야 했다.

휘청거리는 책 더미 사이에서 일기장을 발굴해 낸 그는 바닥을 굴러다니던 펜 하나를 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미 책상은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서, 그는 불편하게 허리를 구부려 침대에서 일기를 써야 했다.

「날씨 : 맑음」

한참 말을 고르던 진은 여느 때와 똑같이 일기의 첫 문장을 시작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오늘도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살뜰히 웃던 에이든의 얼굴이 떠올라서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그 얼굴을 가까이서 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비현실적일 때가 많았다. 오늘처럼 다정하게 웃는 얼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라서 더욱 심장에 해로웠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고, 지금은 에이든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뭣 때문에 내가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움이 된다면 뭐든 상관없어.」

들뜬 마음으로 일기를 쓰던 진은 마지막 문장을 쓴 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다음 문장을 이어갔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예쁘게 웃어 주고,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는 게 너무 행복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게 설령 다 거짓일지라도, 괜찮아.

진은 생각보다 더 별로인 제 자신에게 실망한 채로 일기장을 덮었다. 대가 따위 필요 없다 생각했던 스스로가 창피했다. 꾸며낸 거라도 상관없으니 에이든이 웃어 주는 게 좋았다. 이용하는 거라도 상관없으니 에이든의 곁에 있는 게 좋았다. 멀리서 혼자 훔쳐보는 것보다 훨씬, 훨씬.

***

「주말에 시간 비워」

에이든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진이 슬슬 망원경을 다시 꺼내야 하는지 고민할 때쯤이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다. 고작 3일이었다. 하지만 하루라도 에이든 테일러를 보지 않으면 허전한 진 헤니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다.

애인인 척을 하라는데 망원경을 들고 쫓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진은 몰래 찍어 둔 에이든의 사진으로 솟구치는 본능을 억눌러야만 했다. 진은 먼저 연락을 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이 이 LA 땅에 있는 모든 이유는 에이든 테일러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목적이 사라져 버리니 진은 뜻하지 않게 훈련에 매진하게 됐다. 원래도 진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다른 선수들은 저 또라이 새끼가 드디어 작정을 했다면서 수근대기 바빴다. 전에는 연습도 안 하는 주제에 기록이 잘 나와서 재수 없다고 씹어 대더니, 연습을 하니 짜증난다고 씹어댔다. 연습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였다.

가끔 몸을 풀고 있으면 아니꼬운 시선이 느껴지곤 했지만 이미 너무 익숙한 것들이라 진은 무감하게 스트레칭을 할뿐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평소와 결이 다른 눈빛들이 섞여 있어서 조금의 의아함을 품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에이든 테일러가 아닌 타인에게는 무관심한 그였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예쁜 에이든 테일러, 노을 아래에 선 에이든 테일러, 웃는 에이든 테일러, 찡그리고 있는 에이든 테일러. 진은 팔로 물을 가로지를 때마다 에이든을 떠올렸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나마 억눌러야 했다. 그렇게 인내의 나날을 보내던 진은 3일 만에 온 연락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아니, 잠깐만. 주말이면 바로 내일이잖아? 어… 그러고 보니 주말이면 둘 중 어느 날을 말하는 거지? 토요일? 일요일? 의아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쳐다보던 진은 빠르게 해답에 도달했다. 그냥 둘 다 비우면 되는군! 그리곤 다시 맑게 웃었다.

훈련이 끝난 뒤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던 알렉스 그레이는 티셔츠에 한쪽 팔만 끼워 넣은 채 바보처럼 웃고 있는 진을 미친 사람 보듯 바라봤다. 핸드폰을 보며 실실거리고 있는 걸 보니 소문이 진짜인가 보지? 알렉스는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누가 봐도 연애하는 사람 얼굴이잖아. 잘 어울리네. 둘 다 또라이라는 점이.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연애하느라 기록이나 떨어져라.’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알렉스는 괜히 속으로 저주의 말을 퍼붓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생각은 좀 유치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마음에 새기던 스포츠맨쉽이라곤 코빼기도 찾아 볼 수 없는 발언이었다.

운동화의 앞코를 바닥에 탁탁 치는 것을 끝으로 옷 갈아입기를 마친 알렉스는 락커룸을 나서려 했다.

“어? 알렉스, 잘 가! 주말 잘 보내.”

“……?”

진이 알렉스에게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알렉스는 그런 진을 보며 얕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이후로 묘하게 나를 친구로 인식하고 있는 느낌인데. 눈물이 그렁그렁 해서는 저를 올려다보던 그때의 진 헤니가 떠오른 그는 순식간에 뭐 씹은 얼굴을 했다.

주말 잘 보내란 인사를 했을 뿐인데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알렉스 때문에 진이 멋쩍은 표정을 했다. 음… 뭐 잘못 말한 거라도 있나. 평범한 인사였는데.

“그… 잠영 폼이 많이 좋아졌던데, 대회까지 힘내!”

어색해진 공기에 괜히 한 마디를 덧붙여 보았으나 오히려 알렉스의 표정은 더 오묘해지기만 했다. 이것도 아닌가? 칭찬이었는데…….

알렉스는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락커룸을 나갔고, 진은 그저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주섬주섬 락커 안에서 물건을 챙기는 진 헤니는 알 리가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문을 박차고 나간 알렉스 그레이가 스스로 미친놈이라고 욕하며 머리를 헝클어댔다는 것도,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하곤 몇 번이나 마른세수를 했다는 것도.

***

싸구려 아파트 앞에 주차된 남색 페라리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진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차에 다가섰다. 주말은 생각보다 빠르고도 느리게 진을 찾아왔다. 토요일에 막연히 에이든의 연락을 기다리던 진은 끝까지 오지 않는 메시지에 ‘일요일을 말하는 거였군!’ 따위를 생각했다. 바보였다.

차창에 가깝게 다가선 진은 조심스럽게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진은 성큼성큼 걸어 차 안으로 몸을 넣었다.

“안녕, 에이든.”

진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드디어 에이든을 만났으니, 당연히 들떴다. 눈이 잔뜩 휘어져 웃는 게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에이든은 진이 그러거나 말거나 차를 출발시켰다. 진은 흐린 낯으로 웃었다. ‘그래, 진. 오랜만이야.’ 따위의 다정한 말은 바랄 수 없었다. 알고 있는 일이었기에 진은 슬프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약 5일 만에 만난 에이든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인상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진이 티나지 않게 눈동자를 굴려 에이든을 훔쳐봤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약간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차게 가라앉은 에이든의 표정을 보며 진이 입을 달싹였다. 잠시 고민하던 진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에이든, 혹시 무슨 일 있,”

“네 목소리 들을 기분 아니니까 그냥 닥치고 가.”

말이 다 끝맺어지기도 전에 싹둑 잘렸다. 참아 주기 힘들다는 듯 어금니를 잔뜩 씹으며 말하는 에이든에 진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작게 인상을 찡그린 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이든을 살폈다.

차가 시내의 도로를 빠져나가고,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까지 진은 눈으로 에이든을 살폈다. 아무래도 얼굴이 너무 좋지 않은데……. 그렇게 한참동안 에이든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진은 갑자기 거칠게 멈춰 서는 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뒤따르던 차들의 클락션 소리가 요란했다.

“또라이 새끼야!! 고속도로에서 뒈지고 싶어?!”

하마터면 페라리를 들이받을 뻔했던 뒷차의 운전자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상대적으로 한적한 도로였기에 다행이었다. 진의 눈앞이 아찔하게 점멸했다가 돌아왔다. 동시에 섬뜩함이 등허리를 내달렸다. 진은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그제야 토해내듯 몰아 쉴 수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에이든을 쳐다보자 탁한 눈이 진을 향했다.

“오늘은 웬만하면 짜증나게 하지 마.”

“…….”

“진짜 죽여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죽기 싫으면 그만 쳐다보라는 소리야. 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에이든의 목소리가 잔뜩 흔들리는 것도, 탁한 눈이 조금 충혈 돼 있는 것도 모두 걱정스럽기만 했다.

“에이든, 어디가 아픈 거면,”

“하, 시발.”

에이든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욕지기를 뱉었다. 제게로 박히듯 향해진 진의 검은 눈이 에이든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하… 그래, 아프지. 아주 많이.”

사납게 웃으며 에이든이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갈 만큼 차에 빠르게 속력이 붙었다. 무슨 일이냐 묻고 싶었지만 결국 진은 포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동차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질식해 죽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차의 시동이 꺼진 곳은 요트가 줄지어 서 있는 선착장이었다.

***

에이든 테일러는 요트 선실 안에 있는 바에서 보드카를 꺼내 들었다. 입에 문 담배는 계속해서 타들어가며 연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맞은편에 선 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에이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든은 요트에 오르기 전에도 한참이나 담배를 물고 있었다. 요트와 그 뒤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잔뜩 굳어 있던 그 표정은 바닥에 버려지는 담배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몽롱하게 풀려갔다. 그냥 담배라고 하기엔 냄새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진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든이 줄창 물고 있는 건 담배가 아니라, 대마였다.

평소처럼 한두 대 피우고 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대마를 피워댔고, 에이든 입가에 의미 없는 미소가 짙어질수록 진의 눈빛은 무거워졌다. 그의 눈이 완전히 나른하게 풀렸을 때쯤, 두 사람은 요트에 몸을 실었다.

“왜, 너도 한 대 줘?”

제게 박혀 떨어질 줄 모르는 진의 시선에 에이든이 웃으며 말했다. 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든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에 물고 있던 것을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얼음과 술이 가득한 글라스가 진의 앞으로 놓여졌다. 물론 에이든은 이미 한 잔을 다 털어 넣고 잔을 다시 채우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 늙은 여자 생일이야, 아마도.”

실실 웃으며 술을 따르던 에이든이 말했다.

“그래서 생일 선물을 주는 중이지.”

“…….”

“뭔지 맞춰 봐.”

차 안에서 닥치라며 어금니를 물던 사람과는 딴판이었다. 평소 그답지 않게 말이 많아진 에이든은 어떻게든 취하려는 사람처럼 무식하게 보드카를 위장에 쑤셔 넣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이 또 다시 글라스를 채우려는 에이든의 손을 막았다. 생각보다 단호한 손길에 에이든이 피식 웃었다.

“술 못 마시잖아…….”

“아, 그러고 보니 스토커니까 모르는 게 없겠네? 그럼 뭔지 쉽게 맞출 수 있잖아. 맞춰 보라니까?”

에이든이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진의 손을 떨쳐냈다. 격한 움직임에 쥐고 있던 글라스에서 술이 잔뜩 넘쳐 쏟아졌다. 제 손을 적시는 그 액체를 바라보다 에이든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 내 꼬라지를 보고 그 여자가 할 말은 두 마디야.”

“에이든, 이제 그만…….”

“하나는… 에이든에게 붙은 미친 망령이 드디어 떨어져 나갔나 봐요!”

에이든이 우스꽝스럽게 줄리아 테일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진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때와는 다르게 제 눈앞에서 망가지고 있는 에이든의 모습에 참담한 표정을 했다. 그의 눈은 탁했고 동시에 비정상적인 이채가 감돌았다. 약에 취한 이들이 으레 그렇듯.

“시발, 그리곤 있지도 않은 신한테 감사기도나 드리겠지.”

에이든이 들고 있던 술을 한 번에 삼켜 내곤 던지듯 잔을 내려놨다. 옆에 있던 보드카 병을 들고 술을 따르려던 그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병을 탈탈 털다가 욕지기를 뱉었다. 휘청이는 몸으로 다른 술병을 찾는 에이든의 손을 진이 막아섰다.

“배… 타서 그러는 거지, 너.”

무겁게 뱉어진 진의 목소리에 에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뭐야, 진짜 다 알고 있잖아? 소름 돋게.”

“내리자.”

진은 에이든의 손에 들린 병을 뺏고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안 돼. 아직 다른 한 마디를 못 들었잖아.”

에이든의 몸은 약과 술에 절여져 휘청거렸기에 진은 손쉽게 그를 데리고 나갈 수 있을 줄로 알았다. 하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오히려 진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끌었다.

“아윽…!”

쥐어뜯듯 잡힌 어깨에 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코앞에 보이는 에이든의 푸른 눈동자에 진이 숨을 삼켰다.

“요트를 탄 걸 보니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병이 있다고 생각해봐. 아마 그 성격에 적어도 한 달은 제대로 잠도 못 잘걸.”

또 다른 병? 진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에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원래 약간의 희망이 있어야 그 뒤에 따라오는 절망이 한층 더 좆같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진?”

“……?”

“올해 그 여자 생일선물로 또 다른 정신병을 얻은 에이든 테일러를 주는 거야.”

입 맞출 듯 가깝게 다가온 에이든이 속삭였다. 내리깔아진 속눈썹과 그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이 아찔했다. 지금 당장 에이든을 데리고 이 요트에서 내려야 했다. 그게 맞는데…….

“그럴 수 있게 도와줄 거지? 응?”

아랫입술을 누르고 들어와 혀를 문지르는 엄지손가락에선 보드카의 맛이 났다. 달게 웃는 에이든의 얼굴에 진의 눈이 질끈 감겼다.

***

진은 몸으로 내리꽂히는 물줄기 아래에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는 중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널 도와주는 걸까, 에이든.’

처음부터 물었어야 했어. 처음부터 무슨 일인지, 뭣 때문에 내가 필요하다는 건지 전부…. 진이 깊게 한숨을 뱉었다.

진이 샤워를 하러 들어오기 직전까지, 에이든은 바 옆에 있던 박스를 꺼내 그 안에 있는 초콜릿을 끊임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소파에 잔뜩 늘어진 채였다. 모든 일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고 이후에 후유증이 없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요트 앞에서 표정이 좋지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스스로가 너무 멍청이 같았다.

- 에이든…! 여기 길도 모르면서 혼자 어딜 갔던 거야…!

- 아니거든, 나는 길 같은 건 다 알아…!

- 거짓말하지 마.

잔뜩 심술이 나서는 앞서 걷던 앳된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진은 자신을 발견한 어린 에이든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안도감을 놓치지 않았다. 에이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주춤주춤 걸었다. 그러다가도 뒤에 진이 없을까 걱정이 되는지 힐끗 돌아보곤 했다. 원래 큰 도시에 사는 애들은 다 그런가?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싶었다.

- 길 좀 모르는 게 뭐가 어때서…….

- 모르는 게 있으면 혼난단 말이야…….

혼잣말처럼 뱉어진 진의 말에 풀죽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열세 살의 진 헤니는 두려움을 머금은 푸른 눈을 보며 말했다.

- …내가 비밀로 해 줄게. 그러니까 나한테는 모른다고 해도 돼. 그럼 됐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럼 되는 거지? 재차 말한 진이 에이든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방긋 웃었다. 에이든은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니,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웅얼거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 나는 여기가 어딘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날 잘 데리고 다녀야지. 다 너 때문이야.

그제야 솔직하게 뱉어진 작은 원망의 말에 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하자 에이든이 진을 흘겨봤다. 째릿하는 그 눈초리에 진이 맹하게 웃었다. 오리처럼 입이 불퉁하게 나온 에이든은 진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 배고파…….

- 응. 얼른 가자.

어린 진은 그의 손에 깍지를 끼며 옅게 웃었다. 한참 옛날 일이었지만 당장에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들에 진이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냥… 뭐가 필요한 건지 말해 주면 좋을 텐데.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든지도. 나한테만이라도…….’

진의 표정이 흐렸다. 슬픈 낯으로 옛날 생각을 하던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듯 샤워기의 물을 잠갔다. 에이든 테일러라면 뭐든 들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어딘가 아파 보이는 그를 데리고 요트에서 내리는 일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

단 것을 끊임없이 원하는 혀에 에이든은 좋아하지도 않는 초콜릿을 몇 통이나 비워야 했다. 몸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제정신이 아니길 바란 거지만. 헛웃음이 실실 나고, 감각이 몽땅 흐물거렸다. 그 와중에도 선체가 흔들리는 느낌에 뇌 한 구석이 뾰족하게 곧추 서는 것 같았다.

아무리 크고 고급스러운 크루징 요트라도 물 위에서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마가 아무리 정신과 육체를 다 늘어지게 만들었대도, 본능에서 기인하는 두려움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밑바닥에서부터 몸을 잡아먹는 것처럼 타고 오르는 섬뜩함에 에이든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물에 그냥 들어가는 것 정도는 괜찮길래 이것도 나름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아직 여기까진 아닌가 보네.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눈알에 잔뜩 몰리는 열기에 눈을 감고 있던 에이든은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힘들게 눈꺼풀을 올렸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진 헤니였다.

“…….”

“…….”

두 사람 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에이든은 저를 질책하듯 바라보는 까만 눈에 피식 웃었다.

“왜? 실망이라도 한 표정이네.”

소파에 잔뜩 기대 누워 에이든이 웃었다. 진은 아무 말 없이 옆에 엉망으로 펼쳐져 있는 초콜릿 박스와 굴러다니는 술병 따위를 바라보다 말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뭐야?”

“네가 해야 하는 일?”

“그래, 내가 해야 되는 일.”

진은 뭔가 결심한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진 헤니를 바라보는 에이든 테일러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와달라고 했잖아. 도와줄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대신 빨리 요트에서 내리기로 해…….”

그 말에 에이든이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약간 휘청하는 그 몸을 진이 덥썩 잡았다. 코앞에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제 안색을 살폈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네가 오늘 해야 될 일은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비싸다는 요트 위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에이든 테일러의 남자 애인 역할이지.”

“알겠어.”

빠르게 돌아오는 대답에 에이든의 표정이 묘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던 에이든은 진이 입고 있는 샤워 가운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멱살이 잡혀 질질 끌려가던 진이 멈춘 곳은 2층 선실에 딸려 있는 갑판이었다.

“자신 있나 봐?”

에이든은 진을 던지듯 갑판으로 밀어 넣곤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난간에 가깝게 서 있는 진의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에이든은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넓은 바다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갑판으로 발을 옮겼다.

에이든은 성큼성큼 걸어와 진 뒤에 자리한 난간을 쥐었다. 진 헤니는 에이든의 두 팔 안에 갇혀 불안한 낯을 했다. 얼굴을 가까이 한 에이든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가 말했다.

“웃어.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무는 느낌에 진의 입이 벌어졌다. 여린 입술의 살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가볍게 진의 혀끝을 건드리던 에이든은 눈을 뜬 채 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꾹 눌러 감은 속눈썹이 파들거리는 게 알겠다고 결연히 대답하던 것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 웃기지도 않은 모습에 에이든이 입술을 뗐다. 멀어지는 입술에선 잔뜩 젖은 소리가 났다.

“멍청하게 굴 거면서 빨리 내리잔 소리는 왜…….”

뒷말은 진의 입에 먹혀 들어갔다. 뒷목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에이든의 몸이 진과 가깝게 붙었다. 우악스럽게 끌어당긴 것에 비해 진이 조심스럽게 에이든의 입술을 머금었다. 진은 눈을 살며시 들어 이게 맞냐는 표정으로 에이든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잡아끌긴 했는데… 뭘… 해 봤어야 알지.’

진은 홧홧하게 오르는 열과 부끄러움에 뒤에 있는 바다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진은 혀를 넣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에이든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가볍게 닿기만 해도 저릿저릿한 느낌이라 더 이상은 무리였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에이든의 뒷목을 감싸고 있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몸이 잔뜩 밀착해 있어서 심장 소리가 전해질까 봐 무서웠다. 아냐, 심장 소리야 그렇다 치고 조금씩 힘을 얻고 있는 하반신 때문에 진은 딱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샤워 가운 아래에는 속옷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 하반신을 뒤로 빼 봤지만…….

“흐읏…!”

갑자기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에이든의 허벅지에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그 소리를 기점으로 입술이 더욱 깊게 맞붙었다. 입천장과 치열을 훑는 혀 끝 때문에 허리와 손끝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아!”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있는 에이든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압박하듯, 하지만 동시에 문지르듯 움직이는 허벅지 때문에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진의 성기가 완전히 단단해지고 있었다.

성감을 끌어올리는 키스와 스킨십에 진의 입에선 앓는 것 같은 숨소리가 터졌다. 저도 모르게 나머지 한쪽 팔을 들어 에이든의 어깨를 둘렀다. 그에 화답하듯 에이든의 손이 벌어진 샤워 가운 앞을 가르고 들어와 허리를 쓸어 내렸다. 안 그래도 어깨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가운이 흘러내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잔뜩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다음으로 에이든의 입이 향한 곳은 보기 좋게 뻗어 있는 진의 목덜미였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박혀 오는 이빨에 저릿저릿한 느낌이 진을 감쌌다.

“수영 선수라고 했지, 참.”

“흐으… 갑자기 그건 왜…….”

에이든이 가볍게 웃었다. 목에 입을 붙인 채였기 때문에 진 역시 그가 웃고 있음을 알았다. 목에 있던 에이든의 입은 그 선을 타고 올라와 귓바퀴를 씹었다. 순식간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수영복 입으면 볼만 하겠네.”

에이든이 귀 바로 옆에서 속삭였다. 재미있다는 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안 좋은 예감이 내달렸다. 진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에이든이 진의 팔뚝을 쥐고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약발 떨어지기 전에 얼른 해치우고 가자고.”

에이든이 방금 전까지 늘어져 있던 소파에 진을 밀치며 말했다. 소파로 다가오던 에이든은 바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잔 중 하나를 들어 입으로 털어 넣었다. 진 헤니를 보면 언제나 그랬듯, 또 좆같은 갈증이 일기 시작했다.

***

진의 머릿속은 진탕이 된 지 오래였다. 처음 에이든과 몸을 섞었을 때에는 키스도, 전희랄 것도 없이 몸을 들이받는 듯한 행위였기 때문에 이렇게 애가 타 미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는데…….

“아… 하아윽!”

몸 여기저기에 입술을 누르고 있는 에이든 때문에 진은 몸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미 가슴 주변에는 붉은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탄탄한 몸은 타액이 잔뜩 묻어 번들거렸다.

에이든은 진의 옆구리에 빨아들이듯 입 맞추다가 이내 아프지 않게 이를 세워 물었다. 진의 허리가 뒤틀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에이든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슬아슬하긴 해도 어쨌건 몸에 입혀져 있던 샤워 가운이, 지금은 손목에 묶여져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응! 그만, 잠… 하아,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니…! 아!”

진이 애원하든 말든, 옆구리를 잘근잘근 씹어대던 에이든은 입을 더 아래로 옮겨갔다. 아랫배와 골반깨를 지분거리기 시작하는 행동에 진의 바르작거림이 커졌다. 에이든이 자꾸만 위로 뜨는 진의 허리를 강하게 붙잡아 내리 눌렀다.

입을 뗀 에이든은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속옷 안에 갇혀 있는 진의 아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속옷 밖으로 솟아있는 끄트머리가 붉게 달아올라 움찔거렸다. 진은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적나라한 시선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에이든이 어깨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는 진을 보다가 속옷을 한 번에 끌어내렸다. 이미 성기의 끝에서는 묽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려 속옷도 젖어있는 채였다. 예민해 빠진 몸이었다.

“대체 어디서 얼만큼 굴러 먹었길래 몸이 이따위인지를 모르겠네.”

꺼떡이는 진의 성기를 보며 에이든이 비웃듯 말했다. 진은 아니란 부정의 말도 못하고 입술을 꾸욱 깨물 뿐이었다. 에이든이 피식 웃으며 소파 옆의 서랍장을 열었다. 덜걱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의 바짝 선 성기 위로 차가운 액체가 뿌려졌다.

“아윽! 뭐하는…!”

성기를 타고 흘러내린 액체가 회음부까지 길게 떨어졌다. 그 끈적이고 차가운 느낌에 진이 몸서리쳤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줬으니까, 서비스 차원이라 생각해.”

그대로 커다란 손이 진의 성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체온과 맞붙어 열기를 더했다. 끈적이는 액체가 찔꺽이는 소리를 만들고, 단단한 손바닥에 마찰되는 여린 살이 못 참겠다는 듯 움찔거렸다.

“흐읏… 자, 잠깐!”

저도 모르게 허리가 흔들렸다. 진은 난잡하게 움직이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려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런 진의 노력이 무색하게 끝부분을 굴리듯 문지르는 엄지손가락에 숨이 잔뜩 삼켜졌다. 숨을 집어삼킨 배가 아래로 꺼지고 불규칙하게 뱃가죽이 경련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에이든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이젠 아닌 척 해 봤자였다. 에이든 역시 우스울 만큼 이 행위에 몰두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서비스 차원이라는 조악한 이유로 그냥 진 헤니의 몸을 만지고 싶을 뿐이었다.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술을 물어 오던 것도, 그 뒤에 제 눈치를 보느라 살짝 치켜뜬 눈도 전부 에이든의 모든 감각에 불을 붙였다. 대마를 줄창 피워댄 뒤 뭉근하게 달아올라 있던 오감은 갑판에서의 키스 후에 끝을 모르고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휘둘리는 것 같은 더러운 느낌에, 박아 넣는 것 이외엔 생각도 하지 않았던 첫 섹스 때와는 달랐다. 진 헤니의 몸에 천박한 흔적을 남기고자 시작했던 행위는 생각보다 더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잔뜩 찡그려져 애원하듯 뜨여진 검은 눈에 에이든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휘둘리면 시발, 뭐 어때.’

평소의 그였다면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며 성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흐느끼듯 우는 진 헤니의 목소리에 이미 그의 아래도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당장에 뚫고 들어가고 싶었다.

에이든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배 안에는 난잡하고, 음란한 소리가 가득했다. 진은 아래를 쥐고 있는 에이든의 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의 아랫배와 허벅지를 훑고 있는 손 역시 참을 수 없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하… 아으! 흐윽…!”

진의 입에서 우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동시에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진은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사정감이 전신을 뒤덮고 눈앞이 희게 번진다 생각했을 때, 아래를 쥐고 흔들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절정의 근처에서 턱하니 멈춘 손에 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 아흐으윽!!”

안타까운 느낌에 진이 울먹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애간장이 탔다. 진 역시 절절 끓는 욕구와 본능에 진 지 오래였다.

“에이든… 에이든…!”

조르듯 칭얼거리는 음성에 에이든이 꺼내 두었던 젤을 다시 쥐었다. 진의 성기 위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젤을 짜는 그였고, 그것마저 못 견디겠는지 진의 몸이 뒤틀렸다. 젤은 여태까지 에이든의 손에서 마찰되며 뜨거울 정도로 데워졌기 때문에 그 위에 차게 올려지는 액체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흐윽… 제발…!”

허리가 수치를 모르고 흔들렸다. 끓어오르는 감각에 진의 눈꼬리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온몸을 두들기듯 찾아오는 쾌감에 처음 몸을 맡긴 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감상하듯 뜯어보고 있는 에이든 역시 이제는 한계였다.

성기에서부터 길게 흘러내린 액은 진의 엉덩이까지 타고 내려가 있었다. 에이든은 잘게 경련하는 허벅지 뒤쪽을 한 손으로 내리 눌러 진의 몸을 반으로 접었다. 눈앞에 훤히 드러난 곳이 이미 젤에 젖어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굳이 젤 같은 거 필요 없이 이쪽은 알아서 젖는 것 같은데.”

그럴 리 없음에도 에이든이 수치심을 더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결국 진의 눈꼬리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이든이 그 처연한 꼴을 보다가 손가락 세 개를 구멍에 단번에 쑤셔 넣었다.

“아하악!”

강제로 열리는 감각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문제는 그마저도 쾌감으로 받아들인 몸이 사정했다는 데에 있었다. 진의 배와 가슴팍에 제멋대로 정액이 뿌려졌다. 아픔과 사정 후의 쾌감이 뒤섞여 몸이 덜덜 떨렸다. 크게 벌어진 입에선 숨소리 말고 아무것도 나오지 못했다.

“흐읏! 아파…!”

“참아.”

하나하나 공들여 풀어 줄 시간 따위 없었다. 마음 같아선 손가락이 아니라 당장에 좆을 쑤셔 넣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여기저기 피칠갑을 하게 될 게 분명했다. 뒷처리가 귀찮아지느니, 이 정도 작은 수고는 감수해 줄 의향이 있었다.

쿨쩍이는 소리를 내며 에이든의 손가락이 급히 움직였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안에서 왕복 운동을 하는 느낌에 진의 정신이 아찔해지고 있었다. 가볍게 사정하면서 약간 힘을 잃었던 성기도 어느새 다시 한계까지 부풀어 있었다.

손가락에 차지게 들러붙는 구멍에 에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급하게 손가락을 빼낸 그가 벌름거리는 그곳에 성기의 끝을 맞췄다.

“흐으… 하, 아윽!”

“하, 힘 풀어…….”

여린 살을 벌리고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하는 굵은 성기에 진의 몸엔 바짝 힘이 들어갔다. 벌벌 떨리는 허벅지에 에이든도 한숨을 내뱉었다. 끝부분이 들어갔을 뿐인데 둘 다 못 견딜 만큼 애가 탔다. 움칠거리는 구멍이 에이든의 성기 끝을 씹어 먹듯 하고 있었기에 에이든이 결합부 위로 젤을 짰다. 더 기다리는 건 무리였다.

“하아… 아! 으읏! 하아악!”

“…윽!”

퍽 소리가 날만큼 강하게 성기를 쑤셔 넣은 에이든이 작게 신음했다. 경련하는 내벽에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어금니를 물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달라붙은 그곳은 그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딸려가기를 반복했다. 뱃속이 엉망으로 후벼지는 기분에 섬짓함이 진의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하악! 아… 흐, 손, 으응! 손, 풀어 줘, 아아!”

뒤로 묶여있는 손 때문에 진에게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졌다. 잔뜩 뒤로 젖혀져 무거운 몸에 짓눌리는 중인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애가 닳았다. 진이 허리를 흔들며 에이든을 채근했다. 불규칙하게 맞부딪히는 몸에 에이든이 욕을 뱉었다.

에이든이 목 안으로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진 헤니 등 뒤로 손을 넣었다. 엉망으로 묶여져 있는 샤워 가운을 풀어 내리자 진이 그대로 에이든의 어깨를 안아왔다. 진은 갈급한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급히 입술을 붙였다. 에이든에게 닿고 싶었다. 잔뜩 얽혀드는 혀에 에이든이 하반신을 치받듯 움직였다. 선실엔 질척이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격한 움직임에 입술이 제멋대로 비껴나가고 그 사이로 두 사람의 탄식이 터졌다.

“아윽…! 나… 에이든! 나…!”

“하, 씨발…!”

절절 끓는 진의 신음에 에이든의 입에선 절로 욕지기가 터졌다. 허리짓이 빨라지고, 진의 입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에이든이 생각했다. 몇 개째인 줄 모르고 대마를 태워 댔을 때보다 더, 머릿속이 엉망이라고.

***

진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눈을 떴다. 당장에 내리자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언제 잠든 지도 모르게 잠들어 버린 거였다. 온몸의 신경이 다 짓이겨지는 듯한 섹스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여기저기를 후드려 맞는 것 같은 아픔에 몸을 작게 웅크렸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뒤로 묶인 채 커다란 몸을 받아내야 했던지라, 어깨가 징징 울리는 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섹스의 후유증이 여간 큰 게 아니었다. 끄응하는 소리를 내며 힘들게 몸을 일으킨 진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샤워 가운을 대충 걸친 진은 조금 열려 있던 욕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에이든이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잔뜩 흩어져 있는 알약들과 무참히 깨져있는 유리컵으로 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진이 다급한 손길로 뾰족한 유리의 파편들을 수건으로 덮어 밀어내고 에이든과 눈을 맞춰 앉았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이 새빨갰다.

“에이든…! 에이든!”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탁하게 풀린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허둥대던 진은 샤워 가운을 잡아오는 손길에 에이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 또 헛 게 다 보이네.”

에이든이 지친 표정으로 웃었다. 진이 그 표정에 잔뜩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 내가 뭘 어떻게 해 줘야……. 답답했다. 에이든, 내가 어떻게 해 줘야 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같은 말만 속으로 반복하던 진은 툭 떨어지는 에이든의 눈물에 모든 사고를 멈췄다.

진은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는 에이든을 멍하니 바라봤다. 커다란 눈이 감기며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 가짜인 거 알아. 아는데…….”

쉬어 버린 목소리로 느리게 말을 뱉던 에이든이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젠 그냥 좀… 진짜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진의 샤워 가운을 쥐고 있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에이든이 말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고 해 줘. 네가 진짜라고 해 줘.”

“…….”

“제발.”

바닥에 흩어져 있는 알약을 바라보던 진이 표정을 차게 굳힌 건 순식간이었다.

***

싸구려 가십과 천박한 섹스 스캔들이 지배하는 로스엔젤레스답게, 초호화 크루즈에서 행복해 보이는 테일러 가의 ‘게이’ 막내아들은 빠른 속도로 기사화됐다. 그리고 레오나 테일러는 SNS에 도배되듯 올라오는 에이든의 사진에 삐뚠 웃음을 지었다.

‘요트라…. 아직도 열 세 살배기 맞다니까.’

광고하듯, 한편으론 시위하듯 크루즈에 몸을 실었을 에이든 테일러를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 와중에 일부러 까만 머리로 고른 거야? 정성하고는…….

그 거지 같던 저녁 식사 자리 이후, 한스 테일러는 여차하면 정말 에이든을 병원에 집어넣을 작정이었다. 레오나는 그의 표정에서 모든 인내심이 바닥났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익과 손해에 민감했고, 그건 핏줄이라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원…….”

그 철없는 새끼의 생각이 여기까지 빤히 읽혔다. 몽땅 다 연출된 사진들이겠지만 적어도 사진 안에 있는 에이든과 그 애인은 정말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병원에 처넣었다간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뻔했다.

얼마 전에 같은 당의 의원이 호모섹슈얼의 교정치료 따위를 입에 올렸다가 비난과 비웃음을 샀던 일이 레오나의 머릿속에 지나갔다. 그녀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책상에 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어 냈다. 생각이 깊어지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치던 레오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에 신경질적인 얼굴을 했다. 짜증이 가득한 손길로 발신인을 확인한 그녀는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잔뜩 굳은 얼굴에서 누구보다 상냥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네, 어머니.”

[ 레오나, 얘야. 혹시 뉴스 봤니? 우리 에이든이 글쎄… 아니지? 응? ]

“엄마…….”

[ 동성애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정신병이야! 처음엔 배에 오른 걸 보니 이제 그 해괴망측한 망상을 떨쳐냈나 싶었는데… 남자인 것도 모자라서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까만 머리를 데리고 탔지 뭐니?! ]

이렇게 에이든 테일러 그 개새끼의 계획대로 되고 있는 게 가장 거지같은 부분이었다. 아무리 정신 나간 놈처럼 굴어도 결국 테일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티가 났다. 바깥으로 원하는 얼굴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새끼였고, 어떻게 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지 계산할 수 있는 놈이었다. 보고 배운 게 다 그것뿐이었으니까. 하여간 성가신 새끼였다. 그때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 에이든이 좀… 아픈 건 원래 알고 계시던 거잖아요.”

[ 치료를… 하면 되겠지? 그때처럼…! ]

“병원에 갈 정도로 아픈 건지 아직 잘 모르니까. 제가 에이든을 만나서 얘기해 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픈 동생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누나의 목소리로 레오나가 말했다. 전화 너머에 있는 줄리아 테일러는 그제야 진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나인 네가 하나뿐인 동생을 잘 도와줘야 한다는 둥, 가족이란 원래 그런 거라는 둥. 별 꼴 같지도 않은 말들이 지나갈 동안 레오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줄리아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 그나저나 레오나, 저번에 만난 그 사업가랑은 또 헤어진 거니? 네 나이면 이제 결혼을 해야 할 때야. 알지? 너까지 이렇게 엄마를 속상하게 할 거니? ]

“네, 알아요. 저희 가족이랑 꼭 어울리는 사람을 찾느라 조금 시간이 걸리네요.”

시발, 그놈의 결혼, 결혼.

[ 네가 어서 안정된 삶을 찾길 오늘도 기도하마. ]

“감사해요, 엄마.”

시답잖은 인사를 끝으로 전화가 끊기고, 레오나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안정된 삶 좋아하시네.”

레오나의 머릿속엔 여태까지 부모가 자신에게 갖다 준 모든 얼간이들이 떠올랐다. 병신 같은 새끼들. 잘 나가는 사업가 혹은 법조인이라는 남자새끼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오나 역시 잘 나가는 헤지펀드 매니저였고 그들의 돈이나 권력 따위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그 새끼들이랑 왜 결혼을 해야 해?”

머저리 같은 새끼들은 자신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다는 이유로 만나자마자 천박한 눈을 했다. 생각하는 거야 뻔했다. 그들에게 레오나는 테일러 가와 다리를 이어 줄 여자, 한스 테일러의 딸인 금발 머리 여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레오나의 부모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세 살 때부터 미친 소리를 해 오던 에이든을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는 노력도 다 그런 의미였다. 레오나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아무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 왔대도, 그들이 원하는 건 다른 데 있었다.

테일러 가를 이끌어 갈 아들. 결혼하면 성이 갈리는 딸인 레오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자리였다.

심지어 에이든이 별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부모란 사람들은 아들이라면 다 상관없어 보였다. 그의 미친 행동들은 단지 어린 날의 방황처럼 치부되어 넘어가곤 했다. 사나운 낯의 레오나가 모니터 화면에 크게 띄워진 기사 사진을 노려봤다. 그녀가 비린 웃음을 지으며 테이블 위의 인터폰을 들었다.

“나예요. 사람 하나 좀 알아봤으면 해서.”

에이든 테일러를 병원에 처넣을 수 없다면, 그 상대방을 망가뜨리면 될 일이었다.

***

진은 락커를 열어 둔 채로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는 중이었다.

- 내가 이 검은 머리랑 눈 때문에 인생이 좆같아졌거든.

- 내가 미친 게, 아니라고 해 줘. 네가 진짜라고 해 줘.

알듯 말듯 깔끔하게 짜 맞춰지지 않는 퍼즐들 때문에 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날 밤, 잔뜩 약해진 모습으로 에이든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배의 선체가 조금만 흔들려도 숨을 참았다. 굳은 표정으로 그 앞에 앉아 있던 진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간적으로 어깨뼈를 울리는 통증에 진이 작게 신음했지만, 제 아픔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손에 닿은 에이든의 등이 잘게 떨리고 있었고, 그것만이 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진이 에이든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진은 정신을 잃은 에이든을 두고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엉망진창인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담요를 질질 끌고 와선 에이든의 차가운 몸을 둘러 덮었다. 불규칙하게 숨을 쉬고 있는 그의 옆에 진이 털썩 주저앉았다. 혹여나 찬바람이 들이칠까 에이든에게 담요를 살뜰히 싸맸다.

선잠에 들었다가 간간히 눈을 떠 에이든의 상태를 살피고, 또 다시 가볍게 눈을 감아 잠을 청했던 밤이었다. 열이 오르진 않았는지 이마와 목덜미를 한 번씩 매만지며, 이마에 맺혀 식어 버린 땀을 꼼꼼히 닦았다.

‘감기 걸리겠네…….’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를 돌보던 새벽의 끝자락, 또 다시 진이 반사적으로 눈을 떴을 때 이미 에이든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휑한 자리에 진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짚고 일어서던 어깨에서 또 다시 찌릿하니 통증이 올라왔다.

통증에 신음하던 진이 아직도 바닥에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약을 발견하곤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한 알을 주워들었다. 그때 챙긴 그 약은 작은 지퍼백에 담긴 채 진의 가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약국에 갖고 가면 무슨 약인지 알려주려나…? 진이 락커 안에 걸린 제 가방을 빤히 노려봤다.

“야, 뭐하냐? 얼른 들어가야 돼.”

“…어? 아, 고마워.”

진이 멋쩍게 웃으며 알렉스에게 대꾸했다. 아, 벌써 시간이……. 진은 그제야 입고 있던 검은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목을 빼내려는 순간 알렉스의 손에 티셔츠가 붙잡혀 아래로 쑥 내려왔다.

“…너.”

“어?”

“그 꼴로 평소처럼 수영복을 입을 생각은 아니겠지.”

맹하게 ‘어?’ 따위를 말하고 앉아 있는 진 헤니 때문에 알렉스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눈에 알렉스가 한숨을 쉬며 진의 티셔츠를 살짝 들췄다.

“이거.”

“아…!”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면 전신 수영복을 입고 오든지 해라. 꼴사나우니까.”

몸 여기저기 찍혀 있는 붉은 흔적들에 진이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창피함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이건… 그…….”

“됐어. 뭐가 됐든 듣고 싶지 않으니까 설명하지 마.”

설명할 건덕지나 있는 건가, 저게.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알렉스가 뒤돌아 수영장으로 향했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이며 귀까지 빨개진 진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작게 인사했다.

“고마워.”

고맙긴 뭐가 고맙다는 건지. 가슴팍이며 허리며 여기저기 물고 빤 흔적들 사이, 날개뼈 있는 부분에 크게 자리한 멍울이 마음에 걸렸지만 알렉스는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그래, 시발. 내가 알게 뭐야.’

짜증이 그득그득 들어차는 속내를 모른 척하는 알렉스였다.

***

알렉스는 진의 옆 레인에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은 한 번 입고 내팽개쳐 놨던 전신 수영복을 꺼내 입은 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난 목에 붉은 흔적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알렉스는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저 또라이 같은 놈이 또라이 같은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뭔 짓을 하든 뭔 상관이야.’

그 짜증 어린 속마음이 무색하게도 그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진을 쫓았다. 젠장. 그만 봐, 그만 보라고! 알렉스는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는 자신 때문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온갖 쌍욕을 하던 와중에 출발 신호가 울렸다.

알렉스가 물속으로 깊게 잠수하듯 미끄러져 들어갔다. 알렉스와 진은 다른 레인의 선수들이 모두 수면 위로 올라갈 때까지 물 안에 잠겨 있었다. 그리곤 한참 뒤에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알렉스는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알렉스도 잠영으로 꽤나 먼 거리를 가는 편이었지만, 평소 진 헤니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는 지느러미라도 달린 것처럼 물 안에서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곤 했으니까. 알렉스는 자꾸만 흩어지는 집중력에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그가 작정하고 헤엄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무언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처럼 팔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짧고도 긴 경기가 끝나고 알렉스가 물위로 상체를 일으켰을 땐, 레인 중간에 멀찍이 서 있는 진 헤니를 볼 수 있었다.

알렉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알렉스뿐만 아니라 수영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악에 찬 눈을 하고 있었다. 중간에 경기를 포기한 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수경을 벗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갑게 정적이 끼얹어진 경기장에서 소음을 만들어 내는 건 진 헤니 하나였다. 그는 철썩이는 소리를 내며 물을 갈라 걷고 있었다. 레인의 끝에 도착했을 때, 진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수영장의 턱을 짚고 몸을 끌어올리려 했다.

“아윽…!”

하지만 그 순간 어깨와 등을 타고 오르는 통증에 그대로 몸이 무너졌다. 철퍽 소리를 내며 앞으로 넘어진 진의 모습에 알렉스가 레인을 넘어가 그의 몸을 뒤에서 받쳤다. 뒤에서 밀어 올리는 힘에 진이 가까스로 물 밖으로 몸을 빼냈다. 알렉스는 곧바로 진을 따라 위로 올라섰다.

“처치실에 좀 다녀올게요.”

그리곤 당황한 표정의 코치에게 말했다. 알렉스는 옆에서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는 진에게 타올을 둘렀다. 제 몸에 덮여진 타올을 보던 진이 차가운 표정의 알렉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 괜찮,”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따라 와.”

알렉스가 굳은 표정으로 진을 앞서 걸었다. 진은 젖은 머리를 털며 한숨을 쉬었다.

물 안에서 무기력함을 느껴 본 건 태어나서 두 번째였다. 날 때부터 물에서 살았던 진 헤니에겐 아주 끔찍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경고하듯 욱씬대는 어깨를 그대로 방치한 게 문제였다. 헤엄을 치기 위해 팔을 뻗자마자 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팔을 쓰면 안 돼.’

절대로 무리해선 안 됐다. 정말로 고장 나는 수가 있으니까. 진은 곧바로 수영하는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모두가 다 헤엄치는 가운데 혼자 레인에 우뚝 서 있는 것은 생각보다 큰 정신적 충격을 가지고 왔다. 진은 넋이 나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이러면…….

레인 한 가운데 멍하니 서 있던 그때를 떠올리며 진이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정신을 빼고 터덜터덜 걷던 진은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앞서 걷던 알렉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진이 잘 따라오고 있음을 확인하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앞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처치실에 도착한 알렉스는 진에게 앉아 있으라 말하곤, 익숙한 손길로 스프레이며 근육이완제 따위를 찾아왔다. 진은 아무도 없는 처치실 가운데 의자에 멍하니 앉아 그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맹하니 넋을 놓고 있는 진의 뒤로 의자를 끌고 온 알렉스가 자리했다.

“뭐해. 위를 내려야 뭘 해 줄 거 아니야.”

“아… 어.”

질책하듯 말하는 알렉스 때문에 진은 괜히 움츠러들었다. 진은 수영복의 뒤쪽에 위치한 지퍼를 내리려 팔을 올렸으나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입을 때도 힘들게 하더니, 이젠 제 맘대로 벗지도 못할 정도로 어깨가 아려왔다.

어깨를 쥔 채 끙끙거리는 진 헤니를 보던 알렉스가 얼굴을 구겼다. 그리곤 신경질적으로 진의 수영복 목 쪽에 달려 있는 지퍼를 잡아 내렸다. 오른쪽 어깨와 날개뼈 부분에 새까맣게 멍울이 자리해 있었다.

“너는 어깨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고 괜찮단 소리가 나오냐?”

“하하, 안 보여서 몰랐네…….”

“하하 좋아하시네.”

알렉스가 들고 있던 스프레이를 멍 근처에 분사하며 빈정댔다. 진은 알렉스에게 등을 내 준 채 가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 대답 없이 축 쳐진 어깨 때문에 알렉스의 속은 복잡했다. 진 헤니는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괴물처럼 수영해야 했다. 잔뜩 풀이 죽어서는 레인 중간에 멈추는 진 헤니 따위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됐다.

다른 선수들이 말하는 것처럼 식단도 훈련도 성실히 하지 않아도 척척 신기록을 세우는 게 가끔 배알이 꼴리긴 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물살을 가르는 진 헤니의 움직임에 같은 선수로서 고무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더 진 헤니를 이겨먹고 싶었다. 누구보다 강하게. 주변에선 진 헤니만 없었다면 그가 대회의 주인공이었을 거라 말하며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알렉스는 사실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단순한 이유였다.

있는 게 훨씬 재밌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좆같이 재미없었다.

“너, 3일 뒤가 대회인 건 알면서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냐?”

“알아.”

“그럼 같이 수영하는 사람들이 만만한가 보네.”

“그런 게 아니라…!”

알렉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진이 허둥댔다. 뒤를 돌아보려는 움직임에 알렉스는 진의 뒷목을 꽉 눌러 잡아 고정했다. 그 상태로 진의 목이며 어깨에 근육이완제가 잔뜩 발라졌다.

“한 번만 더 경기 중간에 포기하면 죽여 버린다.”

“미안.”

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콧등을 긁적였다. 뒤에 앉은 알렉스는 어깨와 이어지는 목에 이완제를 바르다가 별로 보고 싶지도 않은 흔적들을 또 다시 마주해야 했다. 그 꼬라지와 어깨의 멍을 번갈아 보던 알렉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얼마나 대단한 섹스를 해댔길래 이 모양인지. 세상엔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쓸데없이 너무 많았다.

“물리치료나 받으러 가. 딴 데로 새지 말고.”

“응, 고마워.”

진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뜩찮은 표정의 알렉스가 손에 묻은 젤을 휴지로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페이퍼 타올을 잔뜩 뽑아 진의 손에 쥐여 줬다.

“…딴 데로 새지 말라고 했다.”

경고하듯 다시 한 번 말하는 알렉스에게 진이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맹한 얼굴에 알렉스가 조금 더 무서운 얼굴을 했다. 그제야 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대답을 했다.

“그럴게…!”

페이퍼 타올로 목에 묻은 근육이완제를 닦아 내는 진 헤니를 뒤로 하고, 알렉스가 처치실을 나섰다. 그가 조금 마르기 시작한 머리를 손으로 탈탈 털며 생각했다.

‘대회가 3일 전인데, 더 이상 얼빠진 짓은 안 하겠지.’

처치실에 있는 진의 머릿속에 얼빠진 생각이 그득 들어찬 건 꿈에도 모를 알렉스였다.

***

“클로자핀인 것 같은데.”

“…네?”

“향정신성 약이라고요.”

앞에 근육 이완용 젤이며 파스를 잔뜩 쌓아 둔 채, 진이 약사에게 내민 것은 지퍼백에 든 알약 하나였다. 향정신성 약이라는 말에 진이 벙찐 얼굴을 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뭐, 환청을 듣거나 헛것을 보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거나, 조현병을 앓는 환자들이 복약하죠. 어디서 난 건데요, 이거?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환자한테만 처방하는 건데.”

- 또 헛 게 다 보이네.

약사의 말에 지난밤이 불현 듯 떠올랐다.

- 다 가짜인 거 알아.

- 네가 진짜라고 해 줘. 제발…….

샤워 가운을 쥐어오던 절박한 손길이 생생했다.

- 내가 이 검은 머리랑 눈 때문에 인생이 좆같아졌거든.

진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희고 작은 알약을 바라봤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많은 의심과 짐작들에 입술을 씹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그 검은 머리가, 그의 인생을 망쳤다는 검은 눈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진의 머리 안에 빼곡히 들어찼다. 눈을 바쁘게 굴리며 생각하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정말로 그게 나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때 약사가 알약이 든 지퍼백을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는 진에게 내밀었다. 넋을 빼 놓고 있던 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놀랐다.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약사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 이게 그러니까 클로…….”

“클로자핀이요.”

“네…. 감사합니다.”

지퍼백을 받아든 손에 축축하게 땀이 차올랐다. 지금 손에 들린 알약 하나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다. 약국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내내, 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주 많이.

***

치기의 후유증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열이 가실 줄을 몰랐고, 제 몸에 둘러졌던 담요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에이든은 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술을 위장에 채워 넣었다. 위스키가 든 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그는 다시 병을 들어올렸다.

“하… 뭐야.”

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투명한 유리병을 보며 에이든이 욕지기를 뱉었다. 그는 황량한 맨션 한 가운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물론 주방이라고 부르기 굉장히 민망한 곳임이 분명했다. 제대로 된 식기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에이든이 냉장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생수 몇 병이 전부인 커다란 냉장고 안에서 찬바람이 흘러나왔다. 그가 짜증 섞인 표정과 신경질적인 손길로 냉장고 안을 더듬었다. 중간중간 몸이 휘청이는 건 덤이었다.

아무리 헤집어도 그가 원하는 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냉장고에 있는 술은 이미 동난 지 오래였다. 깊은 한숨이 에이든 테일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 요즘 왜 이렇게 맘대로 되는 게 없지. 좆같게.

냉장고 문이 부서지는 건 아닐지 걱정될 만큼 그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며 만들어진 큰 소음에 에이든이 이를 악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눈을 꾹 눌러 감은 채 자조적으로 웃었다. 줄창 피워대던 대마와 샷으로 때려 박던 술기운이 가시자마자 몸이 극도로 경직되던 그때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날 에이든은 분명 초호화 크루즈에 몸을 싣고 있었으나, 코와 입으로 물이 들이닥치는 아득함에 휩싸여야 했다. 기도를 막기 시작하는 실체 없는 물을 뱉어내기 위해 끝없이 기침을 했다. 당연히 모두 헛수고였다.

한참이나 컥컥대다 바 위에 올려뒀던 약병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었다. 반쯤 제정신이 아닌 뇌가, 별 미련도 없는 생을 위해 바닥을 질질 기는 동안에 에이든은 무의식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음을 느꼈다.

주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의 몸은 바에 도착하자마자 미친 것처럼 약병을 찾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이 바쁘게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고, 손이 아무렇게나 그 위를 헤집었다. 덜컥하고 걸리는 차갑고 작은 유리병을 잡자마자 밭은 숨이 터졌다. 자꾸 헛도는 손은 약병을 부수듯 열어 입에 아무렇게나 쏟아 넣었다. 삼켜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전부 토해내야 했지만.

그가 어느 정도 ‘제정신’이란 것을 찾았을 때는 더 이상 게워낼 것도 없어 위액만 줄줄 흐를 때쯤이었다. 자신은 지금 화장실에 있었고, 귀를 찢을 듯한 이명과 앞에서 점멸하는 빛무리에 시야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대로 잡히지 않는 시야 앞에 검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검은 눈은 걱정된다는 빛으로 꼼꼼히 자신을 살폈다. 자신이 무어라 말한 것 같기도 했지만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에이든은 몸에 칭칭 둘러진 담요를 뜯듯이 벗어내고 요트에서 몸을 내렸다. 차가운 대리석 타일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진 헤니는 그대로 둔 채였다. 에이든은 요트로부터, 그리고 진 헤니로부터 도망쳤다.

그 뒤로 이 모양이었다. 그는 요트에 탄 그날을 기점으로 끊임없이 환청에 시달려야 했다.

- 내가 널 찾을게.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약속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에 더해 희뿌옇게, 먼지가 잔뜩 끼인 것 같은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형체 없는 기억 속에서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뿐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흰 막이 쌓인 것처럼 선명하지 못한 기억들이 뇌 한쪽을 두드릴 때마다 그는 주먹을 말아 쥐어야만 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한, 손바닥을 축축이 적시기 시작하는 식은땀. 물살이 거센 바다에 잠긴 것처럼 팔과 다리가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쾌함. 그리고…….

- 내가 널 찾을게.

“씨팔, 진짜.”

결국 허공에 헛웃음이 터졌다. 잔뜩 충혈된 눈을 손으로 덮어 가리며 에이든이 정신 나간 웃음을 뱉어냈다. 사실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환청을 단번에 쫓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수납장 어딘가에 있을 약, 그 약만 먹으면 모든 게 해결될 일이었다.

약. 그래, 그 빌어먹을 약.

- 에이든, 약을 거르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 하지만… 그 약을 먹으면 너무 졸리고, 또… 그날 뭘 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요. 무서워요…….

- 안 돼. 그래도 참고 먹으렴. 전부 다 널 위해서란다.

뒷목을 뻐근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기억에 결국 그가 수납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세 살, 헛소리를 하는 그를 치료해야 한다며 에이든의 부모가 선택한 것은 정신병원이었다.

정상인 사람도 미칠 수밖에 없을 흰색의 방이 떠올랐다. 그 방 안에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일정 시간마다 한 번씩 의사나 간호사들이 들어와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 아직도 그걸 봤다고 생각하니?

-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진짜 본 거예요! 제가 그때 물에 빠졌을 때 분명 검은 인어를 봤다니까요…!

- …오늘도 약속을 어긴 모양이구나, 에이든 테일러. 약을 거르면 안 된다고 했잖니!

뜨문뜨문 이어지는 거지같은 기억들에 결국 그는 수납장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신경질 가득한 손이 문을 뜯듯이 열었다. 텁텁하게 마른 입 안으로 알약 두 개가 자리했다. 그 거지 같은 흰 알약을 씹어 삼키기 전, 에이든의 푸른 눈이 차게 빛났다.

-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귓바퀴 언저리에서 역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한스 테일러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것을 보듯, 그는 어린 자신의 아들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곤 했다.

- 저게 정상이 될 때까지 집에 들일 생각은 하지도 마.

- 악마에 씌인 게 분명해요…! 에이든, 기도하고 회개하면 된단다…! 그럼 그 더러운 게 몸에서 떨어져 나갈 거야!

한스 테일러가 싸늘히 말하면, 줄리아는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작은 손을 잡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어서 내 완벽한 아이로, 흠결 하나 없이 예쁜 아이로 돌아오라는 기도였다.

정상이 될 때까지라.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턱과 어금니가 입 안의 알약을 부수고, 또 부쉈다. 허공을 바라보며 약을 씹어대던 에이든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다시 소파로 향해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나야. 얼빠진 애들 몇 명 좀 구하고 싶은데.”

여태까지 꼴 같지도 않은 연인 놀음으로 시선을 잘 모아 뒀으니, 슬슬 제대로 시동을 걸 차례였다.

***

진은 오늘도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에이든의 차에 오르기 전,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를 몇 번 털어 넘겼다. 대회가 바로 내일인 이 시점에 대체 어딜 가냐는 눈빛들이 뒤따랐지만 진은 개의치 않고 락커룸을 나선 참이었다. 뒤에서 작은 욕지기와 거칠게 닫히는 철제문 소리 따위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 헤니의 모든 정신은 곧 만날 에이든 테일러에게로 쏠려 있었다. 에이든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우선 몸은 괜찮아진 건지를 묻고…. 그리고…, 그리고…….

차에 가깝게 걸음을 옮기며 진은 작게 입술을 씹었다. 어디서부터 너한테 설명을 해야 할까. 내가 사실은 너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고, 너를 찾고도 한참을… 멀리서 보는 것밖에 못했다고. 네가 나를 잊었을지도 몰라서, 네가 나를 잊고 싶을지도 몰라서. 그게 다 몽땅 무서워서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너는 무슨 말을 할까.’

진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도 결국 차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얼마 전까지 쑤시고 아팠던 어깨도, 허리도 전보다 가벼워진 그였지만 마음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차창을 두드리려 손을 듦과 동시에 달칵하는 소리가 들리며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 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열린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차 안으로 몸을 밀어넣자, 몇 번 맡았다고 이젠 익숙해진 에이든의 향수 냄새와, 언제나 아주 얕게 나고 있는 담배 냄새가 코 안으로 훅하니 끼쳐 들어왔다.

“안녕, 에이든.”

조수석에 앉아, 차에 올라탄 손님은 쳐다볼 생각도 없는 운전자를 향해 진이 인사했다. 여느 때처럼 하나도 티 없는 얼굴로 맑게.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인사를 받아 주거나, 되돌려 줄 마음은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진은 눈을 잔뜩 휘어 웃었다. 그리고 복잡하던 마음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아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거짓말은 한 적 없어. 그냥, 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을 뿐이지. 나중에 기회를 봐서 꼭 말할 거야. 정말이야.’

아무도 추궁하지 않았지만 진은 제 스스로 열심히 변명을 덧붙이며 복잡한 생각을 털어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맑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마음대로 잘 되지는 않았지만.

진은 부러 더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힐끗 에이든의 안색을 살폈다. 배 안에서보다야 괜찮아 보였지만, 에이든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픈 데는 없냐 묻고 싶었지만 지난 고속도로에서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안부를 묻는 대신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에이든을 살피는 것뿐이었다. 에이든을 바라보던 진은 별안간 마주친 푸른 눈동자에 흠칫 어깨를 굳혔다.

“아… 그… 미안.”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푸른 눈과 마주치자마자, 진은 반사적으로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 쳐다보지도 말라던 고속도로 위에서의 경고가 생각난 까닭이었다. 진 헤니의 바보 같이 맹한 표정과 작고 소심하게 뱉어진 사과에 에이든 테일러가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초조한 기색으로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바깥을 관찰하듯 눈을 굴리던 그는 번화가로 진입하고 있는 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쪽으로 가면 멜로즈 에비뉴인데.

평소에 집밖을 나와 봤자, 에이든 테일러 뒷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게 전부인 진 헤니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유명한 거리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리를 기억하는 방식이 아주 편파적이긴 했다.

‘여기 거긴데. 에이든이 자주 쇼핑하러 나오고, 가끔은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앉아서 커피 마시던, 거기.’

진이 눈을 꿈뻑이며 거리에 대한 정보 아닌 정보를 떠올릴 동안, 차는 목적지에 다다라 움직임을 멈췄다. 차가 세워진 곳은 멜로즈 에비뉴에서도 사람들이 바글거리기로 유명한 복합 쇼핑몰 단지 한쪽이었다.

“내려.”

“응.”

드디어 들은 에이든 테일러의 목소리였다. 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남색 페라리에서 몸을 빼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나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지난번처럼 진을 보며 따뜻하게 웃었다.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남자처럼.

진은 그 천사 같은 미소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그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오늘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한 번 해 봤다고 그때처럼 엄청 어색하진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에이든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뭐 사려고?”

“아니.”

“그럼?”

진의 물음에 에이든은 별다른 대답 없이 어디론가로 향했다. 진은 에이든의 뒤를 따랐다. 에이든이 향하는 곳은 그가 평소에 자주 찾던 카페였다. 오붓하게 테라스 자리에 앉아서, 몸 위로 떨어지는 햇볕을 멍하니 맞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에이든 테일러와 함께 해서 안 좋은 것들은 없겠지만.

조금 전까지의 무거웠던 마음은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진은 약간 들뜬 마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잠깐 앉아 있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꺼내며 에이든이 말했다. 진은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웃었다. 화창한 날씨에, 적당한 바람까지. 날씨는 완벽했다. 서버가 친절하게 웃으며 메뉴판과 식기를 준비해 주는 동안 진은 옅은 미소를 띠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은 맹해 보이는 얼굴로 메뉴판의 메뉴 하나하나를 정독하고 있을 때쯤, 테이블 주변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진이 작게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주변으로 네 명의 남성이 위협적으로 둘러 서 있었다.

“무슨 용건이신지…….”

진이 네 명을 찬찬히 훑어보며 물었다.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임을 느낀 진이 잔뜩 경계하는 눈빛을 했다. 네 사람은 서로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진과 가장 가깝게 서 있던 남자가 손을 뻗어, 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우악스럽게 잡혀 끌려올라가던 진이 제 옷을 그러잡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꾸욱 잡아 눌렀다. 진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차게 굳어 있었다. 손목을 잡힌 남자는 생각보다 강하게 쥐어오는 악력에 주춤거렸다.

“뭐, 뭐야. 말… 마, 말이 다르잖아. 모, 모르는 거 아니야?”

“……?”

작게 인상을 쓰며 진이 남자의 손목을 뜯어냈다. 얼마나 센 힘으로 떼어낸 건지, 남자는 검붉은 자국이 남아 저릿저릿한 손목을 감싸며 끙끙거렸다.

‘말이 다르다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진이 인상을 구겼다. 테이블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이 한 발자국 걸음을 뒤로 물렀을 때, 키가 작고 눈이 잔뜩 빨갛게 충혈된 남자가 눈치를 보더니 진에게로 달려들었다.

별안간 뺨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몸이 작게 휘청거렸다. 입 안이 터진 건지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진이 자신을 주먹으로 후려친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는 진을 때린 뒤 무언가 초조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 그냥 얌… 얌전… 히, 몇 대, 맞으면 돼!”

아까 전의 그 남자도 그렇고, 이 남자도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진은 그제서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남자들이 모두 약쟁이들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손을 작게 떨며 끊임없이 주변의 눈치를 봤다.

주변은 갑자기 일어난 소동에 웅성거렸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중 진 헤니를 알아본 일부는 핸드폰으로 영상을 촬영하기 바빴다. 몇몇은 경찰에 전화를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멀찍이 서 있던 뚱뚱하고 몸집이 큰 남자가 진의 목과 어깨 언저리로 손을 뻗어왔다. 상황 정리가 안 돼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진이 그 두툼하고 기분 나쁜 손을 매섭게 쳐 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생각보다 아주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뱉어진 경고의 말에 네 사람이 다시 서로의 눈치를 봤다.

“어, 어떡하지…?”

“이거, 이것만, 하면 준다고 해, 했어. 그냥 빠, 빨리 끝내고 가자!”

“근데… 걔, 걔도 때려야 되는, 되는 거 아니야?”

“시, 시발… 난 그 새끼, 때려도 된, 된다 그래서 온 건데.”

네 남자가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동안, 진은 살며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으로 손을 움직였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진의 손끝이 핸드폰에 막 닿았을 때, 네 사람 중 가장 성질이 더러워 보이는 남자가 나머지 세 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한꺼번에 제게로 향하는 네 사람에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뒤로 몸을 돌려 뛰려 했지만 이내 뒷덜미가 잡혀 세워졌다. 뒤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하는 손길에 진이 잔뜩 인상을 쓰며 남자들에게 물었다.

“너희 누구야. 대체 왜…….”

“우, 우리도 시키는 대로, 하, 하는 거야.”

“누가 이딴…….”

누가 이딴 걸 시켰냐는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담배를 피고 있는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푸른 눈에 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에이든은 진 헤니가 네 명의 정신 나간 약쟁이에게 둘러싸여 당하고 있는 모든 것을, 그저 관망하듯 지켜볼 뿐이었다.

진이 멀리 보이는 그 푸른 눈동자에 대답을 구할 동안, 에이든이 짧게 남아 있던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태우고 바닥에 꽁초를 툭하니 던졌다. 그의 입에서 희뿌연 담배 연기가 뱉어졌다. 옅어지는 담배 연기, 그 사이로 웃고 있는 입이 보였다.

에이든 테일러는 아까 차에서 내렸을 때처럼 다정하고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예쁘게도 웃으며 어깨를 작게 으쓱해 보이는 그였다. 흔들리던 진의 눈동자가 일순 멈췄다.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진의 검은 눈이 에이든 테일러에게 물었다. 에이든은 약간은 굳은 얼굴로 새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진 헤니의 눈에 그는 다시 한 번 보조개를 만들며 웃어 보일뿐이었다.

진이 작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체념한 눈빛으로 반항하던 몸의 힘을 뺐다. 반항이 적어진 진의 복부에 주먹이 꽂혀들었다. 배에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진이 작게 기침을 뱉었다. 뒤로 결박된 어깨에서 다시금 찌릿한 통증이 타고 올랐다. 얻어맞고 있는 몸 한 군데도 빠짐없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중에서도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막연히 그 어딘가가 가장 아픈 것 같았다.

최대한 몸에 오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진이 몸을 웅크렸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주먹과 발길질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내일이 대회였고, 진은 메달이 필요했다. 메달 다음에 또 다른 메달, 그리고 또 다른 메달이 필요했다.

진은 이번 대회의 3위까지만 다음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음을 상기했다. 3위. 하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비현실적인 지금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언제쯤 끝날까 싶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에이든의 담배가 다 타들어갔을 때쯤 걸음을 옮기며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담배를 바닥에 버리며 왼손에 채워진 시계를 힐끗 바라봤다. 이쯤하면 됐겠지.

주변을 살피던 네 남자 중 한 명이 움직이기 시작한 에이든 테일러를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그리곤 다른 세 명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몸을 숙이고 있던 진은 별안간 뚝 멈춘 네 사람에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에이든 테일러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역할은 그냥 애인이 아니었나 보네. 지친 마음 끝으로 진이 실없는 생각을 했다.

에이든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역시 가까워졌다. 네 사람은 주춤거리며 진 헤니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팔을 뒤로 결박하고 있던 커다란 남자가 손을 놓자, 진이 등을 웅크리며 어깨를 쥐었다.

“아윽….”

“진!”

에이든은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들어왔다. 에이든 테일러가 나타나자 네 사람 중 인상이 가장 더럽던 남자가 작게 욕설을 뱉었다.

“저 새…… 에 …을 박아… 내 몫이야.”

진은 입안에 고여 있던 핏물을 뱉으며 작게 들린 소리에 인상을 썼다. 에이든이 진에게 가깝게 다가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진의 입술은 터진 지 오래였고, 후려 맞은 뺨과 광대가 푸르게 멍들어 있었다.

에이든은 가증스러운 걱정을 한껏 띄우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흐린 검은 눈과 마주했다. 진의 눈빛에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건데? 속으로 작게 실소한 에이든 테일러는 새로운 역할놀이를 이어갔다.

“진, 괜찮…….”

“……!”

진 헤니에게 괜찮냐고 묻던 에이든 테일러의 고개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옆으로 비틀어졌다. 에이든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욕을 씹었다. 한 대 정도는 맞아 줄 생각이긴 했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네.

에이든은 맞는 순간 사나운 눈을 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눈빛을 갈무리했다. 에이든은 손을 들어 입술을 타고 흐른 피를 닦아냈다.

“경찰이다! 손들어!”

“젠장…! 이건 야, 약속이랑 다르… 다르, 잖아!”

더듬더듬 뱉어진 항의의 말에 에이든이 짜증난다는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무슨 약속?”

“분명…!”

“내가 무슨 약속을 했다는 거야.”

에이든은 가깝게 서 있는 이들이 아니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 하나가 중얼거리며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고… 시발, 재수 없, 없게 구는 것부터, 전부 다 좆같았어.”

인상이 더러운 남자는 가깝게 다가오는 경찰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에이든에게 달려들었다. 빛을 반사해 살벌한 빛을 뿜는 칼날에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발, 죽어버려!”

“……!”

남자가 내지른 손은 에이든 테일러의 배, 그 바로 앞에서 멈춰졌다. 에이든은 잭나이프를 꾸욱 잡고 있는 진 헤니의 손을 내려다 봤다. 칼을 틀어 쥔 진의 손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장 체포해!”

흉기를 소지하고 있음을 발견하자마자 경찰들이 테이저 건을 사용했다. 몸에 오르는 전기에 툭하고 쓰러진 남자는 몸을 덜덜 떨며 게거품을 물었다.

진은 남자가 쓰러지자마자 칼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희게 질린 표정이,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잭나이프에는 피가 흥건했다. 에이든은 바닥에 나뒹구는 칼과 진의 손에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는 핏물에 작게 인상을 썼다. 눈앞의 장면들이 몽땅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

“…에이든, 너 괜찮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에이든 스스로도 몰랐다. 저도 모르게 진을 부른 그였지만, 그 한숨 같은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선수를 빼앗겼다. 괜찮냐고? 지금 나한테 괜찮냐고 묻는 거야? 여태까지 가증스러운 얼굴을 유지하던 에이든 테일러의 표정이 박살났다.

무섭게 구겨지는 그의 표정에 진이 함께 인상을 썼다.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에이든을 살피던 진은, 그가 입고 있는 티셔츠 어디에서도 핏자국을 찾을 수 없음을 확인하곤 안심한 눈빛을 했다. 에이든의 상체를 헤매던 눈은 이내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진은 핏방울이 맺혀 있는 에이든의 입술을 보곤 다시 인상을 썼다. 에이든 테일러는 그 모든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쫓았다.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낀 진이 푸른 눈동자를 마주봤다.

“그래도 크게는 안 다쳐서 다행…….”

저도 모르게 에이든의 터진 입술을 매만질 뻔한 진은, 들어 올린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보곤 황급히 손을 내렸다. 진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죄다 찢어졌음을 깨달았다. 죄다 헤진 손에서 화끈한 고통이 올라오고 있었다. 에이든은 당황한 낯의 진을 보며 말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미쳤어?”

“어…?”

“미쳤냐고.”

에이든 테일러는 확신했다. 진 헤니는 미친 게 분명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에이든의 눈에 화인지, 짜증인지 모를 것들이 가득 들어찼다. 둘 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모든 것들에 신경질이 났다.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는 알고 있는 거지?”

“…….”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를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진은 화를 내는 에이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든이 칼에 찔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다행이라 말했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에이든은 화가 난 듯 했고, 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은 죄다 터져서, 뺨은 잔뜩 부어오른 채로, 손톱 따위에 긁힌 건지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한 얼굴이 에이든 테일러를 향하고 있었다. 의아함이 가득 찬 검은 눈동자에 에이든이 헛웃음을 지었다. 진 헤니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는, 아직도 바닥에 뚝뚝 핏자국을 남기고 있는 진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 헤니는 미쳤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그리고 에이든 테일러의 마음에 가득한 화와 신경질, 이해할 수 없는 진 헤니의 행동에 대한 모든 의아함은 그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아주 미세한 만족감을 동반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의 빛이 오묘해졌다.

***

응급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뒤였다. 진은 오른손을 열 두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그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이 찢어졌는데 수영을 해도 괜찮은 걸까. 물론 안 괜찮겠지. 마취된 손에는 별다른 감각이 없어서, 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꾸욱 쥐어 보려 했다.

국소마취제를 사용했을 뿐인데 왜인지 모르게 온 머리가 멍하다 느끼는 진이었다. 그의 머리는 복잡한 생각을 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불쑥 치닫는 울컥함을 내리누르려 노력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게 나았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아주 많이 슬퍼질 테니까.

차 안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진 헤니의 주소를 찍고 움직이고 있는 내비게이션이 가끔 방향을 알려 주는 소리가 전부였다. 아무 소리가 없는 대신, 두 사람의 숨소리와 언제나와 같은 에이든 테일러의 향수 냄새, 그 위에 강한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에이든 테일러는 백미러를 통해 진 헤니를 살폈다. 진은 비정상적으로 차분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고, 더 이상 이딴 짓은 못 해먹겠다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붕대가 칭칭 감겨진 제 오른손을 골똘히 쳐다볼 뿐이었다.

에이든도 그런 진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에이든 테일러가 진 헤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괜찮냐고 묻기엔 안 괜찮은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안 괜찮은 상태야말로 에이든 테일러가 계획했고, 의도한 바였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잠깐 다녀갔던 경관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 이번 일은 그가 원하는 대로 풀리고 있었다.

- 네 명은 바로 경찰서로 이송됐고, 진술서를 작성 중에 있습니다. 범행 동기는 아마…….

중년의 경관은 거기까지 말하고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에이든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뻔했다. 그리고 그 뻔한 추측을 원한 게 에이든이었다. 경관은 불편한 말을 제 입으로 하지 않아도 됨에 안도하며 말을 끝맺었다.

모르긴 몰라도 미친 듯한 속도로 기사화 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번엔 싸구려 가십지 뿐만 아니라 정규 시간대의 뉴스에까지 속보로 뜰 게 눈에 선했다. 미국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사건.

정황상 아들과 그 연인이 게이라는 이유로 폭행당한 상황에서, 한스 테일러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을 피해갈 수 없을 터였다.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이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에이든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찝찝함이라기보다는… 답답함에 가까웠다. 왜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무언가 꽉 막힌 것 같은 감각에 덧붙여 신경을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 50m 앞, 좌회전입니다. ]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맞춰 핸들을 꺾는 손길이 거칠었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

창밖으로 허름한 아파트가 보이자 차가 멈추고, 진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잔뜩 지친 검은 눈이 에이든 테일러에게로 향했다.

“갈게.”

“…….”

진이 차에서 몸을 절반 정도 빼냈을 때, 에이든이 진의 팔을 잡았다. 팔이 잡아끌린 진이 뒤를 돌아보자, 부시럭거리는 흰색 비닐봉지가 내밀어졌다.

“아, 어. 맞다…….”

소독약과 거즈, 진통제 따위가 들어있는 봉지였다. 에이든은 뭐 씹은 얼굴로 그 봉지를 진의 손에 쥐여 줬다. 뭔가 잔뜩 맘에 안 드는 눈치여서, 진은 봉지를 챙겨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에이든의 차는 예상과는 달리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아파트 공동 현관을 향해 걷던 진이 뒤돌아봤을 때, 그때서야 차는 후미진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을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고요히 응시하던 진이 한숨을 쉬며 열쇠를 찾아들었다. 오른손이 불편해서 열쇠 하나를 꺼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왼손으로 힘겹게 바지 주머니를 뒤지던 그는, 몸을 조금 비틀었을 뿐인데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둔통에 작게 신음해야 했다. 열쇠를 찾던 손을 멈춘 진이 눈을 꾹 눌러 감았다.

“하…….”

에이든이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온통 그 걱정으로 희게 질렸던 진이었지만, 제정신을 찾고 나서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불쑥불쑥 울컥함이 올라왔다. 서러움이었다. 공동 현관의 등이 꺼지고, 그 아래에서 진은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진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에이든 테일러라면, 다 괜찮다고. 머리로는 괜찮다고 되뇌었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는지 결국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진은 차오르려는 눈물에 고개를 털었다. 그리곤 그나마 자유로운 왼손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다시 열쇠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려던 그는 뒷주머니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핸드폰에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핸드폰을 꺼내든 그는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응, 나디아.”

[ 진. ]

“…무슨 일 있어?”

[ …아니, 무슨 일 없어. ]

나디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근데 목소리가 왜…….”

[ 나 다음 주에 너한테 갈까 하는데. ]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건너편에서는 진의 물음에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러라고 하셔? 가서 나 데려오라고?”

[ 아니야.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디아, 나 못 가. 아니, 안 가!”

[ 그런 거 아니래도! ]

높아지는 진의 목소리에 덩달아 나디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자신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감정적이었다. 이래선 안 됐다. 건너편에서도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그냥… 그냥 너 잘 지내는지 보고 싶어서 그래. ]

“잘 지내.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어, 나디아. 나 정말 잘 지내.”

[ 확실해? ]

확실하냐는 그녀의 말에 진이 잠시 움찔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진의 눈이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검은 눈이 잠시 흔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진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까 올 필요 없…….”

[ 다음 주에 너 지내는 데로 갈 테니까, 그냥 그렇게 알아. ]

“뭐? 나디아!”

통화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진은 엉망진창으로 꼬여가는 상황에 지친 표정을 했다. 하루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

대기실로 향하는 진 헤니의 뒤로 시선이 다닥다닥 따라붙었다. 진은 지난번에 한 번 입고 내팽개쳐 뒀던 전신 수영복을 챙겨 경기장에 도착한 참이었다. 옆구리며 등, 몸통 여기저기 검푸른 멍울이 있는 채로 반신 수영복을 입기엔 무리였으니까.

하지만 전신 수영복을 입어 봤자 다 부르튼 입술이나 아직도 붓기가 가시지 않은 광대뼈까지 가릴 순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오른손에 칭칭 감겨진 방수용 테이프 아래로 아직도 핏기가 비치고 있었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을 땐 시선의 강도가 더했다. 진은 애써 그 모든 눈길들을 무시하며 제게로 배정된 락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기가 무섭게 쾅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너, 돌아가.”

“…….”

알렉스 그레이는 생각보다 처참한 진 헤니의 꼬라지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진이 그런 알렉스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 나 괜,”

“누가 봐도 안 괜찮아. 그 꼴로 지금 수영을 하겠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다시 병원이나 가.”

“…나 오늘 대회 꼭 나가야 돼.”

진이 잔뜩 지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에도 같은 주제로 한참이나 코치와 실랑이를 해야 했기에 이젠 좀 그만하고 싶었다. 코치와 알렉스 말대로 누가 봐도 대회에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맞았다.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코치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컨디션 관리를 못하는 선수는 필요 없다며, 무책임하고 건방지게 대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이 코치의 마지막 경고였다. 엄하게 꾸짖는 그 목소리에도 진은 같은 대답을 돌려줬다. 이번 대회에 꼭 나가야 한다고. 코치는 무슨 말을 하든 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진에게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백기를 들었다.

알렉스는 경기에 나가야 된다고 말하는 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평소의 진 헤니와는 다르게, 그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의 안색을 살피던 알렉스가 다시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진이 말을 덧붙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알렉스. 근데…….”

“…….”

“근데 이번엔 그냥 무시하고, 모른 척 해 줘. 다른 사람들처럼.”

말을 마친 진은 다시 락커의 문을 열었다. 삐거덕거리는 철제문이 열리자마자 진이 왼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던져 넣었다. 그는 화끈거리는 오른손을 애써 외면하며 짐을 풀었다. 알렉스는 아무 말 없이 아직도 진 헤니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중이었다.

그는 가방을 뒤지는 진 헤니의 손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엉망으로 테이핑 돼 있는 그의 오른손을 바라보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코치가 자신의 버릇을 잘못 들여도 한참 잘못 들인 모양이었다.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진 헤니를 찾아오라는 둥, 먼 타지에서 왔으니 너라도 잘 챙겨 주라는 둥. 알렉스 그레이에게 진 헤니는 물가에 내 놓은 애처럼 언제나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신 말고는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 그밖에 챙길 사람이 없었다. 그래, 버릇이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지.

“방수용 테이프 내놔. 거즈랑 소독약도.”

거의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알렉스가 진에게 말했다. 진은 뜬금없이 방수용 테이프를 달라하는 그에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그따위로 테이핑 해선 절대 물에 못 들어가니까, 내놓으라고.”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보던 진이 알렉스의 짙은 초록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의중을 읽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던 진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곤 가방에 챙겨온 테이프를 그의 널따란 손바닥 위로 올려놨다.

“손도 내놔.”

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 쥔 알렉스가 능숙한 손길로 테이프를 뜯어냈다. 한 손으로 조악하게도 감아 놓은 테이프가 뜯겨나갔다. 테이프 아래에 살과 눌어붙은 거즈를 살짝 들어올리고, 그 위로 소독약을 발랐다. 소독약을 바를 때마다 움칠거리는 진 때문에, 알렉스는 슬쩍슬쩍 진의 기색을 살피며 손을 움직였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컸다. 알렉스는 거의 누더기가 돼 있는 손바닥에 속으로 혀를 찼다.

모든 건 다 그 미친 에이든 테일러, 개새끼 때문이었다. 그 새끼랑 얽히고 나서, 진 헤니에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알렉스는 상처 위로 거즈를 덮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테이프를 두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왼손으로 붙일 때와는 다르게 꼼꼼하고, 정갈히 둘러지는 테이프에 진이 피식 소리를 내 웃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아니, 그냥.”

그냥… 이 상황이 웃겨서. 작게 덧붙여진 말에 알렉스가 진을 흘겨봤다. 질책하듯 보는 시선과 다르게 손길은 다정했다. 비교도 안 되게 깔끔한 테이핑이 끝나고, 진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바닥 구경 그만하고 수영복이나 입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알렉스가 진의 오른손을 놓았다. 대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에이든 테일러는 다 태운 대마가 수북이 쌓여 있는 테이블 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TV 화면을 보며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뉴스 채널을 찾던 그는 생중계 중인 수영 경기에서 채널을 멈춰야 했다. 화면에선 진 헤니가 엉망인 얼굴로, 이어폰을 꽂은 채 걸어 들어오는 중이었다.

[ 남자 자유형 200미터, 선수들이 입장합니다. ]

LA 지역, 대학부에서 제일 수영을 잘하는 선수 8명이 입장했다. 그들은 각각 배정받은 레인 앞에 앉아 입고 들어온 트레이닝복을 탈의했다. 각 레인 선수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진 헤니가 호명되자마자 경기장에 환호성이 크게 울렸다. 진은 조금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관중에게 인사했다.

[ 진 헤니 선수, 어제 기사를 보아하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닐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지금 경기에 나와도 되는 컨디션인지를 모르겠습니다. ]

[ 예, 아마 기권을 할 거라 예상을 했는데요. 아무래도 오늘 경기에 국가 대표 선발전 티켓이 걸려 있는 만큼 무리를 해서라도 경기에 참가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

[ 평소 모든 기록이 신기록이었던 선수라 오늘 경기가 어떻게 풀릴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

‘그 꼴을 하고 경기에 나갔다고?’

에이든의 눈이 화면 속 진 헤니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아무리 테이핑을 한다 해도 손이 다 찢어진 채로 수영을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에이든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화면에 잡힌 진이 수경을 내려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내 선수들이 스타트블록 위에서 준비 자세를 잡고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깐의 정적.

[ 경기 시작됐습니다!! ]

출발 신호와 함께 경기장 내에 함성이 터졌다. 진 헤니가 누구보다 빠르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긴 잠영 후, 매끄럽게 물 위로 올라온 그는 빠른 속도로 선두를 치고 나갔다.

[ 네! 현재 진 헤니 선수가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

[ 그 뒤를 알렉스 그레이가 바짝 따라붙습니다. ]

에이든이 물속에서 헤엄치는 진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은 50미터 지점까지 1위를 유지했고, TV 속 해설진들은 진 헤니의 평소 기록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그 상기된 목소리들이 오가는 동안 수중 카메라가 진 헤니를 비췄다. 그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 아~ 아무래도 무리였나요? 진 헤니 선수, 50미터 기점으로 점점 속도가 떨어집니다! ]

[ 알렉스 그레이, 존 코너 선수가 치고 나옵니다. ]

[ 100미터, 알렉스 그레이, 존 코너, 아이작 카터 순서로 통과하네요. ]

에이든은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에게 유리한 시나리오는, 이 경기에서 진 헤니가 아주 거지같은 성적을 내는 거였다. 그래야 그 사건이 수영 유망주의 꿈을 짓밟았네, 뭐네 하면서 언론들이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계획에도 없던, 아니, 사실 똑바로 말하자면 나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던 진 헤니의 수영 경기가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은 확실했다. 단 하나도 잃지 않고, 원하는 것은 몽땅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수영 중인 화면 속 진 헤니를 바라봤다. 푸른 눈은 의중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분명 그런 상황이긴 한데…….’

에이든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화면에 집중했다.

[ 가장 중요한 100미터에서 150미터 터닝 구간입니다! ]

[ 네! 어? ]

[ 어…? 진 헤니 선수, 지금 영법을 교체했나요?! ]

경기장에 환호성이 크게 울렸다. 화면에선 진 헤니가 무서운 속도로 앞선 선수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에이든의 한 쪽 눈썹이 삐뚤게 올라섰다.

[ 오른손에 충격을 덜 받기 위해 양팔의 리듬을 변주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

[ 후반부에 영법을 교체하는 선수들이 있기는 하지만…! ]

[ 제가 수영판에 있는 30년 동안, 저런 자유형 리듬은 처음 봅니다. ]

마지막에 말을 덧붙인 해설자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였다. 진 헤니는 몸에 모터라도 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속도로 물살을 갈랐다.

[ 마지막 터닝 포인트, 알렉스 그레이, 진 헤니, 아이작 카터 순서로 통과합니다! ]

[ 진 헤니가 역전합니다!! ]

역전이었다. 제일 앞서 가고 있는 선수와의 간격이 얼마 되지 않았다. 중계를 하는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 알렉스 그레이, 막판 스퍼트를 올립니다! ]

[ 아이작 카터 선수! 마지막까지 흔들리면 안 돼요! 진 헤니 선수는 다시 조금씩 스트로크에 힘이 빠지고 있습니다. 팔꿈치의 각도가 내려가고 있어요! 안 됩니다! ]

모든 선수들이 철썩이며 물살을 가르고, 또 갈랐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 양상에 경기장은 한껏 달궈져 있었다. 해설진들의 목소리도 계속해서 격양됐다. 모두가 마지막 턴에 숨죽여 집중했고, 이윽고 끝을 알리는 버저가 울렸다.

[ 남자 200미터 결승! 알렉스 그레이, 아이작 카터, 진 헤니 순서로 막을 내립니다! ]

[ 알렉스 그레이, 1위 자리를 탈환합니다! ]

[ 진 헤니 선수, 국가 대표 선발전 티켓을 기어코 가져가네요! ]

수경과 수영모를 벗고 전광판을 바라보는 진 헤니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그는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 얼굴엔 핏기가 없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 몇 번이나 자신의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핏기 없고, 곧 죽을 것 같은 얼굴과는 다르게 전광판을 바라보는 눈이 집요했다. 평소에 자주 보여 주던 바보 같은 눈빛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었다. 에이든은 화면을 보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 계획이 틀어진 것도 아니고, 손해를 본 것도 없었다. 더 재미있게 풀릴 순 있었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즐거운 기분이었다.

물 위로 올라서 물건을 챙겨 나가려는 진 헤니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출구 쪽엔 기자들이 바글거렸다. 상기된 표정의 기자와 카메라가 따라붙자, 진이 약간은 당황한 얼굴로 카메라를 쳐다봤다.

[ 진 헤니 선수!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

[ 아, 제가 지금 좀……. ]

[ 컨디션 난조임에도 불구하고 메달을 목에 거신 소감은요? ]

힘이 다 빠져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얼굴이 TV 화면에 가득했다. 에이든은 화면에 잡힌 진의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테이프 아래의 거즈가 검붉은 피로 흥건하다는 것도. 방수용 테이프를 뚫고 나오지 못한 핏물들은 그 아래 고여, 상처가 다시 다 터졌음을 보여줬다.

[ 진 헤니 선수! 이번 국가대표 선발전……. ]

[ 제가 대신 인터뷰해도 될까요. ]

진이 기자와 카메라 무리에 붙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인상을 쓰고 있을 때쯤이었다. 옆에서 불쑥 등장한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기자의 질문을 가로막았다.

[ 1등은 제가 했는데, 아무도 저한테 안 오시네요. 섭섭하게. ]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중간에 끼어있던 진 헤니의 몸을 슬쩍 밀었다. 힐끗 돌아보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나가.’

들리진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은 울기 직전이던 진 헤니의 얼굴에 작은 안도가 감돌았다 사라짐을 알아챘다.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 하하! 이번 대회 우승자께서 먼저 찾아 주시니, 저희야 땡큐입니다! 알렉스 그레이 선수, 이번 경기 어떠셨나요? 드디어 다시 1위의 자리를 탈환하신 소감은? ]

[ 사실 이번 경기에서의 1위는… 저한테 큰 의미가 없어서요. 운이 심하게 좋았습니다. 운은 좋았는데, 기분은 별로네요. ]

[ 의미가 없다 하신 건… 아무래도 평소 라이벌 관계로 거론되던 진 헤니 선수의 컨디션 난조 때문인가요? ]

 진 헤니가 기자들 틈 사이로 사라지고, 인터뷰가 계속됐다. 알렉스 그레이라 불린 남자는 기자의 질문에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이내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 진 헤니 선수의 팬 중 한 명으로서……. ]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카메라를 뚫을 듯했다.

[ 앞으로 거지같은 것들이랑은 엮이지 않길 바랍니다. ]

경고처럼 뱉어진 말에 에이든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꽤나 즐겁던 마음에 신경질이 들러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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