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에이든 테일러 the Madman (2/16)

(2) 에이든 테일러 the Madman

진 헤니의 뺑뺑이 안경은 방금 전까지 부풀어 올랐던 성기를 단숨에 숨죽이게 만들었다. 천년의 욕정도 식게 만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건임이 확실했다. 에이든은 창문에 붙어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보려는 진이 어처구니 없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랄 게 없는 건가?

진이 다시 한 번 자동차 창문을 두드렸다. 에이든은 창문을 열 생각은 않고,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시동이 분명 걸려 있는데… 왜 대꾸가 없지? 진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다시 두드려 볼까 하던 그는 뭔가 깨달은 낯빛을 했다. 진의 표정을 보던 에이든이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진은 페라리 창문에 입김을 불었다. 우스꽝스럽게 벌려진 입에서 뜨거운 공기가 뱉어져, 창문에 김이 서렸다. 진은 손을 들어 뿌옇게 김이 서린 곳 위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기 쉽게 거울에 비춘 것처럼 쓰는 중이었다. 가끔은 헷갈리는지 손가락을 주춤거렸다.

‘아…ㄴ…ㄴ…ㅕ…ㅇ’

‘시…계……!‘

시계? 에이든은 왼쪽 손목에 새로 채워진 은색 시계를 보다 다시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은 눈을 꿈뻑이며 대답 없는 창을 쳐다봤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진은 소매로 슥슥 김이 서린 것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벌렸다.

또 뭘 쓰려고. 더럽게. 에이든이 버튼을 눌러 창문을 내렸다.

진은 붕어처럼 입을 벌린 채,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에이든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진은 스르르 입을 다물었다. 멋쩍은 표정이었다. 진은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시계를 꺼내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하하… 안녕? 그때 그… 시계, 두고 가서.”

“넌 자존심도 없어?”

에이든이 진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에이든은 시계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민 손이 무안해져, 진은 괜히 시계만 만지작댔다. 진이 아무리 바보라도 그의 말 속에 비웃음이 깔려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간 고민하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민할 필요 없이 사실을 말하면 되는걸, 뭐.

“응. 너한테 자존심 같은 거 없어, 난.”

진의 말에 에이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

< 연락처 >

엄마

아버지

세계 최강 핫걸 나디아

코치

파파존스

에이든 테일러 (NEW!)

진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몇 번이나 안경을 벗어 깨끗하게 알을 닦았다. 핸드폰을 새로 구매한 지 6개월 만에 6번째 연락처가 등록됐다. 무려 에이든 테일러의 핸드폰 번호가. 진은 다시 훈련을 하러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정신이 자꾸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관계로 결국 길가의 벤치에 앉아야만 했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새빨갰다.

갑자기 너무 좋은 일이 한꺼번에 생기는데, 곧 죽는 거 아니야?!

언제나 숨어서 에이든 테일러를 지켜봐야 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에이든이 나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 준 걸지도 몰라. 조금 더 가까워지면, 조금만 더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럼 그때 꼭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그때 얘기를…….

「달링,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 세계최강 핫걸 나디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는 느낌에 진이 퍼뜩 고개를 내렸다. 뭐야, 난 또… 에이든인 줄 알았네.

진은 메시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그리곤 에이든 테일러와 보내는 따뜻한 주말 따위를 생각했다. 주변 공원에 같이 산책도 가고, 남들이 잘 모르지만 분위기가 좋은 펍 같은 곳도 가면 좋을 텐데. 아… 에이든이 술이 약하니까 맥주만 마셔야겠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진의 입꼬리가 점점 하늘로 치솟았다.

같이 서핑 같은 것도 하면 좋을 텐데. 아, 물을 싫어하려나? 한 번 물어볼……. 또 다시 핸드폰이 요란하게 징징거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진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세계 최강 핫걸 나디아」

끄응하는 소리를 내던 진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응…….”

[ 뭐야, 이 짜증난다는 목소리는?! 누나가 전화를 하면 벨소리가 울리고 1초 만에 바로 받으라고 했어, 안 했어? 허니, 지금 도시로 올라갔다고 우리의 인연까지 다 끊을 셈인 거야? 아주머니가 달링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시는데! 왜 집에 연락을 안 해? 자꾸 나한테 물어보시는데 나도 뭘 알아야 말이지. 그리고 왜 내 메시지는 읽어놓고 답장을 안 해. 읽는 거 모를 줄 알았어? 그거 읽으면 읽음이라고 다 뜨거든, 이 멍청아! ]

이럴 줄 알았다. 진은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곤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래서 전화를 안 하는 거지! 나디아에게 한 번 물렸다간 하루 종일 전화기를 손에서 놓을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녀는 너무 집요했고, 진을 너무 과보호하려고 들었다. 진짜 친누나도 아닌 주제에…!

[ 지금 너 속으로 진짜 친누나도 아닌 주제에 왜 이렇게 참견이냐고 생각했지, 진. ]

“…….”

[ 넌 내 손바닥 안이란 걸 잊지 마. 제발. ]

“무슨 일인데…….”

풀죽은 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디아가 작게 키득거렸다. 별건 아니고……. 작게 띄워진 운에 진이 괜스레 긴장을 했다. 당장 쿠알라로 돌아오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에이든 테일러의 전화번호를 이제 막 가지게 됐는데!

[ 네 천사랑은 잘 지내나 싶어서. 섬에서 나간 뒤로 경과보고는 왜 안 하는데? 누구 덕에 나갔는지 잘 생각해, 너. ]

“아, 그거…?”

[ …뭐야 갑자기 간지러워지는 목소리는. ]

진은 ‘허헝’하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활짝 웃었다. 평소엔 위로 찢어져 있는 긴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진의 얼굴이 해사하게 피어났다.

“오늘 전화번호… 받았어.”

[ 뭐?! 진 헤니!! 6개월의 성과가 있었구나. 짜식!! 누나는 아주 네가 대견해. 어?! 아주!! 그래서 첫 데이트는 언젠데? ]

“응? 아직 그런 건 없는데…….”

[ 그래? 흠… 뭐, 일단 연락처를 줬다는 건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거니까 너무 급할 필요 없겠지. 바보처럼 굴다가 놓치지 말고. ]

“그런 거겠지…?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거겠지?”

진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비록 그를 물에다가 익사시키려 했고, 화장실에서 억지로 그 큰 걸 몸에 구겨 넣으려 했지만 이미 그 사실들은 쿠알라 섬 저 너머 바다에 떠내려 보낸 지 오래였다. 달빛보다 더 황홀한 에이든 테일러를 보며 걸었던 백사장, 자신의 침대에서 아이처럼 잠든 에이든의 얼굴. 진의 머릿속엔 이따위 것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실로 엄청난 왜곡이었다.

그 뒤로도 나디아와의 통화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역시, 한 번 받는 데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아니, 나 지금 훈련 가야 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진이 거의 빌듯이 그녀의 말을 저지했다. 그래도 훈련을 간다고 하면 순순히 물러나 주는 나디아였으니까. 아, 여기서 순순히를 오해해선 안 된다. 지극히 상대적인 ‘순순히’니까.

[ 그래, 훈련 간다는데 더 잡아 둘 수야 없지. 연애하느라 대회에 소홀하지 말고. 진, 아무튼 아주머니께는 잘 말씀드릴게. 연애도 연앤데, 메달이랑 트로피 없으면 바로 돌아와야 되는 거 알지? 정신 잘 차려라. 끊는다! ]

전화가 뚝하니 끊겼다. 핸드폰을 쥔 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잔뜩 들떠 있던 얼굴이 가라앉았다. 진은 뜨끈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 메달이랑 트로피 없으면 바로 돌아와야 되는 거 알지.

벌써 대회가 2주 뒤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헤엄치는 것 따위…… 그런 건 일도 아니었다. 컨디션 조절만 잘 하면 문제없을 테니까. 진이 빙그레 웃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지금, 쿠알라로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LA카운티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들이 거주한다는 선셋 스트릿 북쪽, 에이든 테일러의 남색 페라리가 큰 저택 앞에 주차돼 있었다. 저택의 정문에서부터 15분을 더 차로 가로질러야 ‘진짜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이곳은 그의 생물학적 부모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에이든은 2층 거실 소파에 깊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한 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에는 ‘진 헤니’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에이든의 표정이 묘했다. 기분이 아주 나빠 보이기도 했고, 아주 신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 자신조차도 스스로의 기분을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었다.

‘응. 너한테 자존심 같은 거 없어, 난.’

까고 있네. 맑게 웃으며 답지 않게 진중하게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치 에이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이 품은 감정은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 목소리가 가증스러웠다.

에이든의 표정이 험악해질 때쯤, 그의 맞은편 소파에 불청객이 자리했다. 시야에 덜컥 걸리는 긴 금발머리에 에이든의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에이든과 아주 닮은 그녀는 4살 터울의 누나, 레오나 테일러였다.

“1층에 안 내려오고 뭐 해?”

“거기 엿 같은 게 좀 많아야지. 알면서 뭘 물어?”

1층 거실에는 그의 어머니가 모아 둔 박제된 새들이 가득했다. 속 알맹이가 모두 후벼 파여져 껍데기만 남은 그 망할 새들은 언제나 역겹게 아름다웠다. 나이가 먹는다고 해서 깃털이 초라해지지도 않았고, 시끄럽게 울어대지도 않았다. 그것들이야말로 그 중년 여성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완벽하고, 동시에 몽땅 뒈져있지.

“그냥 예의상 묻는 거 알면서 뭘 또 솔직하게 받아치고 그래.”

레오나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든도 빈정대는 표정을 똑같이 되돌려 줬다. 사이좋게 마주 웃고 있었으나, 두 사람이 서로를 쓰레기 취급 중인 건 지나가던 개도 알 수 있을 만큼 분위기는 냉랭했다.

“죽은 새들 말고도 너한테 엿 같은 게 이 집에 한둘이 아닐 텐데, 오란다고 또 오는 심리가 뭔지 도통 모르겠네.”

“간단한데. 엿 같아서 나도 엿 먹이려고 오는 거지. 그거 아니면 내가 이 집에 왜 와?”

미친 소리 한두 번 정도 해 주면, 두 늙은이 전부 못 견뎌하는 꼴이 재밌잖아. 에이든이 말을 덧붙였다. 레오나는 그런 에이든을 빤히 쳐다볼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눈동자 가득 연민을 띄우기 시작했다.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차라리 관심 받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을 해, 안쓰러운 내 동생. 매번 그렇게 관심 못 받아서 안달난 열세 살짜리 같아서 어쩌지.”

레오나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독 열세 살을 힘주어 말하는 의도가 뻔했다.

“열세 살짜리랑 싸워서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굳이 말까지 거는 너도 알만 하네.”

“내가 널 뭐 하러 이겨, 에이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픈 애 이겨서 뭐하겠어?”

별 얘기를 다 듣는다는 듯이 레오나가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아픈 애라…. 레파토리가 식상해도 너무 식상했다.

“그럼 아픈 애한테 시비 걸지 마. 추해, 너.”

에이든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잔잔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 일렁였다. 레오나 테일러에겐 역시 이게 가장 효과가 좋았다.

“왜, 정신도 온전치 못한 애한테 추하단 소리 들으니까 자존심 상해?”

에이든의 말에 파란 눈에 짜증과 살의가 스쳐 지나간 것은 아주 잠시였다. 순간 가식적인 표면을 뚫고 나온 레오나 테일러의 진짜 얼굴에 에이든이 실실 웃었다. 하여튼 다들 좆같고 재미있다니까.

“에이든, 여기 있었구나.”

계단 아래에서부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잔뜩 구겨졌던 레오나 테일러의 표정이 순식간에 갈무리됐다. 에이든은 껄렁한 자세 그대로 제 이름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랑 같이 있었네. 하긴 남매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얘기가 많을 텐데, 이 엄마가 너무 눈치 없이 끼어들었구나.”

따뜻하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오는 중년의 여성은 에이든의 어머니, 줄리아 테일러였다.

“레오나, 너는 뉴욕에서 오느라 피곤할 텐데 몸은 좀 어떠니?”

“저는 언제나 괜찮아요, 어머니. 에이든이 걱정이죠.”

레오나의 말에 줄리아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레오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 기분 더러운 꼬라지를 감상하던 에이든의 눈이 줄리아 테일러의 유리알 같은 눈과 마주쳤다.

“에이든, 오랜만에 보니 정말 좋구나. 엄마는 정말… 고마워. 네가 이렇게 와 줘서.”

에이든은 손에 느껴지는 찝찝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손을 꼬옥 쥐어오는 줄리아 테일러의 손은 인간 같지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지나치게 희고 가늘었으며, 따뜻했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에이든을 바라보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을 대하는 줄리아의 모든 것이 애틋함과 다정함을 품고 있었으나, 그 어떤 것에서도 온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에이든을 대하는 그녀의 모든 것은 마치… 그래, 완벽한 어머니를 흉내 내는 인형 같았다. 알맹이 하나 없이, 지저귀는 소리 하나 없이 1층에 머무르고 있는 그 많은 박제된 새들처럼.

***

테이블 위에 먹음직한 요리들이 올려졌다. 에이든은 아직 비워져 있는 제 맞은편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줄리아는 그 자리의 주인을 기다리느라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가 왜 이렇게 안 오지…….”

그리고 줄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의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에이든은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구둣발 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백인 남성은 육십이 다 돼 간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체격이 좋았다. 동시에 멋스럽게 정리돼 있는 금색의 머리와 무심한 푸른 눈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가 수트의 단추를 풀며 에이든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에이든 테일러를 복사해 둔 것처럼 생긴 남자, 한스 테일러였다. 볼 때마다 자신과 소름끼치게 닮은 그의 얼굴에 에이든은 첫 시작부터 기분이 거지같아짐을 느꼈다. 늙은이들 기분 좀 엿같이 만들어 보자고 오는 건데, 이래서야… 손해 보는 장사인 것 같은데.

테이블을 죽 둘러보던 한스 테일러는 에이든의 경박한 옷차림에서 잠시 멈칫했다. 한스 테일러의 푸른 눈이 차가웠다. 에이든이 입고 있는 흰색의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 꽤나 격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에게 에이든의 차림은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제 옷을 향한 늙은이의 시선을 느낀 에이든은 싱긋 웃어 보였다. 한스 테일러가 같잖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며 앞에 놓인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올렸다. 칼을 들어 올리면서 에이든을 향한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은 채였다. 에이든 역시 제 앞에 있던 식기를 들었다.

단란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

“우리 네 가족이 다 모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어제 너무 들떠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니까요, 글쎄.”

식기가 달각이는 소리만 가득한 테이블 위로, 줄리아의 들뜬 목소리가 던져졌다. 에이든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리를 덜덜 떨며 핏물이 뚝뚝 흐르는 소고기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가 앞에 놓인 고기를 썰 때마다 식기와 나이프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레오나가 그 경박한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한스 테일러는 눈앞의 에이든이 천박하게 굴든 말든, 고기를 부드럽게 조각내 입으로 가져갔다. 정갈한 손놀림이었다. 맞은편의 에이든은 나이프를 거칠게 고기에 쑤셔 넣었다. 설익은 고기에서 튄 핏물들이 그릇 여기저기에 튀었고, 그 꼴을 보던 줄리아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냅킨으로 입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좋은 소식까지 전하게 돼서 더 기쁜 것 같아요, 한스. 그렇죠?”

줄리아는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좋은 소식? 에이든이 약간의 호기심을 얼굴에 띄웠다.

“너희 아버지가 이번에 상원의원에 출마하실 거야.”

“레오나, 네가 선거캠프를 좀 도왔으면 좋겠는데. 자금관리 쪽으로 붙어.”

“네, 그럴게요.”

레오나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한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앞에 있던 글라스를 들 뿐이었다. 관심 받고 싶어서 안달 난 게 누군지 모르겠네. 에이든이 삐뚠 미소를 입에 걸었다.

“네 어머니랑 같이 선거 캠프 일도 돕고, 대내외적인 활동도 같이 해야 할 거야.”

“그럼 저는요?”

단조로운 한스 테일러의 목소리 뒤로 에이든의 신난 목소리가 따라왔다. 그릇에 박혀 움직이지 않던 한스 테일러의 무거운 시선이 그제야 들어 올려졌다.

“저는 뭘 하면 좋을까 싶어서요.”

“…….”

“인종차별주의자? 아니면… 섹스중독에 문란한 막내아들? 뭐, 원하시면 그거 다 한꺼번에 해 드릴 수도 있고.”

“에이든…!”

줄리아가 사색이 되어 에이든의 말을 끊으려 들었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워낙 청렴하고 결백하신 성격에 비자금은 이미 레오나가 깔끔하게 세탁해 뒀을 거고, 대내외적으로 이미지 관리는 어찌나 잘하시는지 제가 뭐 하나 구린 걸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에이든이 여상한 표정으로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입안에 든 것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하게 뭉개졌다. 그는 물을 한 입에 털어 넣고 커다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하나 있긴 있더라고, 구린 거.”

한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로 제 자신을 가리키며 에이든이 웃었다.

“여기.”

“에이든 테일러.”

한스 테일러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레오나와 줄리아까지 모두 긴장한 기색을 했다.

“이미 정신병자 아들은 하고 있는데, 여태까지 딱히 별 소득은 없더라고요. 재미없게.”

“그래. 네 말대로 네가 정신 나간 짓 하고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깟 걸로 내 이름에 흠집 내는 건 불가능하단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서 이번엔 좀 다른 걸 해 볼까 하는데.”

그제야 한스 테일러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갔다. 에이든이 그 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상원의원 선거인단은 보수적인 백인층이 대다수. 더군다나 한스 테일러는 그 꽉 막힌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표를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엘리트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논란이 될 만한 사안들은 교묘히 피해갔다. 그래서 상류층 백인이 아니더라도 한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공화당 후보치고는 다양한 지지층이 모여 있었기에 이번 선거도 따 놓은 거라 봐도 무방했다. 그의 낙선을 바라는, 누군가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말이었다.

“게이 아들은 어떨까 싶은데.”

에이든의 말에 레오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이든이 뭘 염두 해 둔 건지 안 봐도 뻔했다. 머리 깨나 썼는데. 그녀의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자리했다. 한스에게 들킬까 싶어 작게 고개를 숙이는 건 덤이었다.

“뭐, 이번에 제대로 입장 표명하실 기회도 만들어 드릴 겸.”

보수적인 백인 기득권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호모포빅 하지도 않은 입장. 어디 한번 잘 만들어 보시고. 그딴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에이든이 생각했다.

한스는 밝게 웃으며 말하는 에이든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균열이 갔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하게 돌아온 지 오래였다.

“에이든 테일러, 그런 얕은 수로는 아직 한참 이르지.”

“…….”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라는 거야.”

“접시 물에 코 박고 뒈지기도 하는데, 얕은 게 뭐가 중요해요. 죽기만 하면 됐지.”

한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피가 좀 섞였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단 걸 명심해.”

“언제는 봐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래, 실제로 많이 봐주고 있지.”

에이든과 똑 닮은 중년 남성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를 오늘 부른 이유는 딱 하나야. 내가 지닌 것들 중에 유일하게 너는 수지타산이 안 맞더구나. 덕분에 굉장히 손해를 보고 있지.”

“…….”

“다시 그 병원으로 가고 싶으면 말만 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때 다 나아서 돌아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시 한 번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즉 다시 정신병원에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죽은 듯이 있으란 소리였다. 베풀어 준다는 뉘앙스가 느껴져서 역겨웠다. 열세 살 때의 기억이 순식간에 에이든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 오늘도 보이니?

- …뭐가요?

약에 혼몽한 열세 살짜리 남자애의 눈빛과 어리숙한 발음에 만족스럽게 웃던 한스 테일러와 줄리아 테일러였다. 그때를 떠올리던 에이든의 눈에 비정상적인 이채가 돌았다.

“제 쪽도 별로 맞지는 않아서요. 그 시발 좆같은 수지타산. 이번에 한번 맞춰 드리려고요.”

에이든이 그 말을 끝으로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큰 보폭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화난 걸음걸이에 무거운 워커의 무게가 더해져 발소리가 요란했다.

차고에 세워진 자신의 차에 몸을 넣으려던 에이든은 강하게 느껴지는 구역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억지로 위장에 넣었던 것들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자신의 패배였다. 발갛게 충혈된 에이든의 눈이 사납게 뜨여졌다. 그가 어금니를 득득 갈며 핸드폰을 찾아 들고 있었다.

***

진은 너무 화려하고, 너무 고급스러운 주변 풍경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이런 데를 와 봤어야지……. 그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프런트 직원에게 키를 받는 데 막 성공한 참이었다. 직원은 진 헤니라는 이름을 세 번인가 더 확인했다. 신분증도 한참을 돌려주질 않았다. 진짜 네가 맞냐는 뉘앙스였다. 진은 어렵게 얻어 낸 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결국 그는 훈련을 하는 데 실패했다. 나디아와의 통화가 끝난 뒤 수영장에 도착한 그는, 락커에 옷을 벗어 넣는 중이었다. 하지만 옷을 벗기가 무섭게 락커 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디아라고 생각한 진은 잠시 고민했다. 끄응, 훈련 중이라 못 봤다고 할까. 하지만 마음 약한 진은 결국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에이든 테일러」

그리곤 믿기지 않는 화면에 잠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너무 간절히 바라다보니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전화에선 정말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당장 찍어 보내는 주소로 오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진은 그 길로 다시 벗어 둔 옷가지들을 꿰어 입었다.

17층.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면서 진이 심호흡을 했다. 호텔……. 아무리 세상물정 모르는 진이라지만, 호텔의 용도를 모르진 않았다. 아, 물론 여러 용도가 있겠지만, 자신과 에이든 테일러가 호텔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진이 약하게 주먹을 쥐었다.

엘리베이터가 쩍하니 입을 벌려 내리기를 재촉했다. 주춤거리던 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제 갈 길을 가는 엘리베이터가 야속하기만 했다. 6개월을 쫓아다녔고… 언제나 훔쳐보았으며…… 함께 있는 모습들을 상상해 온 건 맞지만…….

진은 사실 속이 복잡했다. 화장실에서 뒷목을 짓누르던 손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에이든에게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닌데. 스토커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이었다. 진은 자신의 천사에게 따뜻하고, 포근한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 것들을 말해 주고 싶었다.

6개월 전, 섬을 떠나와 에이든 테일러를 찾아냈을 때. 그는 여전히 아름답고 황홀했지만, 뭐랄까… 그래, 지쳐보였다. 어렸을 때랑 똑같은 순수함이나 맑음을 유지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허구헌 날 대마와 술에 빠져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물론 그것도 나름대로 진 헤니의 심장을 후벼 파는 구석이 있었다. 엄청나게 섹시했으니까.

복잡한 발걸음은 결국 그를 호텔방 앞으로 데려갔다. 에이든 테일러가 오라면 오는 거고, 가라면 가는 거였다. 마음이 복잡하든, 원래 원했던 게 이게 아니든, 진 헤니에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호텔방의 문이 열리고, 샤워가운을 입은 채 담배를 태우는 에이든이 보였다. 방 안으로 한 발을 내딛자 뒤에서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에이든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웠다.

***

“진짜 골 때리네.”

“…….”

진 헤니는 오라 했더니 왔고, 씻으라 했더니 씻고 나왔다. 에이든에게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빈정거림이 뱉어졌다. 에이든은 좆같은 저녁 식사 이후 심사가 단단히 비틀려 있었고, 누구 하나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지 않는 이상 풀릴 기분이 아니었다.

잔뜩 뒤틀려 있는 에이든에게 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방 안에는 대마 냄새가 가득했다. 얼마나 피워댄 건지 알 수도 없었다. 매캐하게 올라오는 특유의 냄새에 진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자존심 같은 거 없다더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침대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에이든이 실실 웃었다. 젖은 앞머리가 자꾸 안경에 물방울을 뱉는 통에, 진은 몇 번이고 머리를 쓸어 넘겨야 했다. 에이든이 입 안에 머물고 있던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벗어.”

진은 맹한 얼굴을 했다. 에이든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안경, 벗으라고.”

“아, 응.”

침대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진이 안경을 벗어 손에 쥐었다. 평소에 안경과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긴장이 되는지 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에이든의 미소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머지도 전부 벗어.”

“아, 그…….”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으르렁거리듯 뱉어진 말에 진이 눈을 꼭 감았다. 대충 예상해 놓고는, 막상 상황으로 닥치자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고 있었다. 주춤거리던 진의 손이 샤워 가운의 매듭을 잡았다. 진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리곤 계속 해야 되냐는 눈빛을 했다. 하지만 에이든은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진이 잡고 있던 끈을 잡아 풀었다. 다시 눈을 꼬옥 감은 채였다.

진의 몸을 가리고 있던 샤워 가운의 앞이 훤히 벌어지고, 얇은 천이 풀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감긴 눈은 떠질 줄을 몰랐다. 진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가까이 와.”

“…….”

“더.”

에이든의 표정이 묘해졌다. 딱 봐도 뼈대가 얇진 않았지만, 이런 몸일 줄은 몰랐는데. 에이든의 눈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진의 몸을 꼼꼼히 훑어 내려왔다. 탄탄하게 붙어있는 근육들이 의외였다.

‘생각보다 쉽겠는데.’

애초에 섹스 상대를 가리는 편이 아니긴 했지만, 검은 머리와 눈이 아니었더라도 진 헤니는 한 번쯤 박아볼 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에이든의 시선이 보기 좋게 짜여진 복근을 지나 반쯤 일어선 성기에 멈췄다.

“질끈 감은 눈이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 반응인데.”

“아, 읏…!”

“대체 뭘 기대하는 건지.”

에이든의 손가락이 성기의 끝을 툭툭 쳐 오는 통에, 진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빼려 했다.

“움직이지 마.”

낮게 뱉어진 에이든의 말에 진이 울먹이는 표정을 했다. 그건 오히려 에이든의 가학심에 불을 붙이는, 아주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위로 올라 와서 엎드려.”

그 말에 진은 움직이려던 발을 멈췄다. 감았던 눈을 뜨고 에이든을 바라봤다. 차라리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게 감사한 지경이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만 알려줘.”

“왜 이러냐고?”

에이든은 별걸 다 묻는다는 말투였다. 거리를 좁힐 줄 모르는 진의 모습에, 결국 에이든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진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에이든은 그 하찮은 저항에 피식 웃으며, 샤워 가운을 벗어 내렸다.

“내 맘이지.”

가볍게 뱉어진 말에 진은 다시 눈을 감았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에.

***

“하아… 아으읏! 그만……. 제발, 그만…!”

벌써 손가락이 세 개째였다. 굵은 손가락이 뒤를 쑤실 때마다 엎드려 있는 몸이 벗어나려 움찔거렸다. 하지만 목덜미를 강하게 누르고 있는 손 때문에 피할 수도 없었다. 진의 입에선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진의 높게 들린 허리와 엉덩이에 에이든은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생각보다 쉽겠다는 말은 휘발된 지 오래였다. 쉬운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진 헤니의 몸에 몰두해 있었다.

윤활제를 거의 한 통을 다 짠 탓에, 구멍은 지나치게 질척댔다. 축축한 소리가 에이든을 부추겼다. 그가 안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넓게 벌렸다. 강제로 벌어지는 감각에 진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진이 작게 흐느꼈다.

“남자 따라다니는 스토커치곤 반응이 너무 순진하네. 여기저기 헐겁게 대 주고 다니던 몸인 줄 알았더니.”

“흐… 흐윽! 그런 거 아니… 아!”

에이든이 빈정대며 손가락 네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었다. 진이 얼굴을 묻고 있는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크게 벌어진 입에서 흐르는 타액과 생리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사실 이 상황에서 진을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건, 안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에이든이 콧방귀를 끼는 건 다 이런 이유였다. 이젠 진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진은 잔뜩 발기한 채 끝에서 맑은 액까지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제 하반신이 당황스러웠다. 진이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손가락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안을 채우고 있던 묵직한 것이 한 번에 빠지는 감각에 진이 몸을 움츠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 으읏, 안… 안 돼, 안 돼!”

“힘… 풀어, 시발.”

빠져나간 자리로 다른 것이 밀고 들어오려 했다. 손가락으로 아무리 풀었대도 무리였다. 가장 굵은 부분이 애널 끝을 파고드는 감각에 진이 몸서리쳤다. 지난번 화장실에서 잠깐 몸에 들어왔던 느낌과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에이든의 성기는 한계까지 부풀어 있었다.

진이 손을 뒤로 뻗어 에이든을 저지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에이든은 제 허리를 밀어내려 하는 진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상체가 함께 당겨지며 결합이 깊어졌다. 구멍이 잔뜩 벌어지며 꾸역꾸역 성기가 밀려들어왔다.

“아직, 중간까지 밖에 안 들어갔으니까, 힘 풀어.”

말도 안 돼. 저딴 걸 다 넣었다간 큰일 날 게 분명했다. 진이 힘겹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못, 못 하겠어. 에이든…! 하악!!”

진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지만 다 허사였다. 에이든은 진이 이름을 부르자마자 퍽하는 소리가 나도록 나머지 성기를 갖다 박았다. 에이든이 중얼거렸다.

“하아……. 할 수 있네.”

뿌리 끝까지 다 집어먹은 애널이 움칠거렸다. 결합부를 내려 보던 에이든이 진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구멍이 빨갛게 부어 벌름거리는 모양새를 보다 골반을 틀어쥐었다.

“아으읏! 하… 하아! 아파… 아… 아아!!”

에이든이 허리를 갖다 박는 박자에 맞춰, 진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아파, 아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아래에 단단한 것이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경했다. 밑이 빠지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윽! 에… 이든…!”

“닥쳐.”

울먹이며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에이든이 엎드린 진의 상체를 들어올렸다. 입으로 에이든의 손가락이 들어와 혀를 휘저었다. 다물 수 없는 입에서 신음과 타액이 흘렀다. 엎드려 있을 때와는 들어오는 각도가 달라진 탓에 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고 줄줄 우는 주제에, 진의 아래는 바짝 서 있었다. 에이든은 입에 쑤셔 넣었던 팔로 진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아랫배를 강하게 당겨 안았다. 위도, 아래도 압박감이 심해지자 진의 흐느낌이 커졌다. 동시에 에이든의 입에서도 짓씹듯 욕이 뱉어졌다.

철썩거리는 마찰음의 간격이 짧아졌다. 진은 이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이상한 감각에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갔다. 견딜 수 없겠다 생각했을 때, 몸 안에서 에이든이 빠져나갔다. 절정 문턱에서 멈춰진 움직임에 진의 몸이 벌벌 떨렸다.

에이든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진을 침대에 눕혔다. 원래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이었지만, 눈물이 가득 차올라 시야가 번졌다. 에이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진은 저도 모르게 에이든의 얼굴로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에이든은 제 뺨에 와 닿는 손을 잡아채 진의 머리 위로 짓눌렀다.

“손대지 마.”

에이든은 나머지 한 쪽 손으로 진의 무릎께를 들어 올리고는, 한 번에 물건을 쑤셔 넣었다. 뒤에서 치받을 때보다 더 깊게 에이든이 들이찼다. 뱃속 어느 지점을 집요하게 문지르는 탓에 진의 허리가 절로 움직였다. 보채듯 움직이며 구멍을 잔뜩 조이는 진 때문에 에이든도 이제 한계였다.

“흐으윽! 하… 아읏! 아! 아아!”

“하… 젠장…!”

두 사람의 몸에 동시에 힘이 들어갔다. 한 번도 만져진 적 없는 진의 성기에선 울컥울컥 정액이 토해졌다. 잔뜩 수축했던 몸이 이완되고, 탈력감이 찾아들었다. 아직도 벌벌 떨리는 진의 위에서 에이든이 몸을 뗐다.

멍하니 자신을 올려 보는 검은 눈이 싫었다. 땀에 젖어 얼굴에 붙어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도. 눈물이 걸려 있는 검은 속눈썹도, 전부. 에이든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진 헤니의 얼굴을 외면했다. 하지만 또 다시 강하게 느껴지는 갈증에 신경질적으로 물을 들이켜야만 했다. 사나운 낯으로 물을 마시던 에이든이 다시 진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건 아주 잠시 뒤의 일이었다.

***

방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얼마나 피운 건지 알 수도 없게, 에이든의 앞에는 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진은 잔뜩 번지는 시야에 인상을 찌푸렸다. 안경이 어디 있는……. 모르겠다. 안경을 찾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진은 그냥 찾는 것을 포기했다.

진은 퉁퉁 부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목 안에서 느껴지는 칼칼한 느낌에 진이 손으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만져지는 살갗이 화끈거렸다. 쿨럭거리며 잔기침이 뱉어졌다.

그 뒤로도 에이든은 몇 번이고 진을 붙들고 안을 파고들었다. 심지어 몸짓이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진은 끊임없이 애원해야 했다. 그만, 못하겠어, 힘들어. 진이 울며 사정을 해도 그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맞지만 않았을 뿐이지, 몸 상태는 맞은 것보다 더 참담했다. 진은 화풀이하듯 제 몸으로 쏟아지던 행위들을 떠올리다 한숨을 작게 쉬었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돼 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

뜬금없이 던져진 말에 진이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 멍청한 표정을 바라보며 에이든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껐다.

“너만큼 뒤탈 없는 놈도 없잖아. 어디서 구해 오자니 나중에 뒤끝만 지저분해질 게 뻔하고.”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 대답 없이 멀뚱히 있는 진에게 에이든이 말했다.

“앞으로 세 달만 애인인 척 좀 해. 대가는 섭섭지 않게 지불할 테니까.”

그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서 대충 집히는 대로 현금을 뽑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백 달러짜리 뭉치가 테이블 위에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애인인 척이라니……. 그런 걸 왜…….”

“그냥 하라면 해. 좆같이 토 달지 말고. 어차피 네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 오히려 너무 과하게 좋은 조건 아닌가 싶은데.”

진이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꾹하니 입을 다물었다. 에이든의 말이 맞긴 했다. 몰래 훔쳐보는 게 전부였던 그를 가깝게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자신에게 말하는 에이든 테일러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든 테일러의 눈동자를 볼 수 있는 기회니까…….

진에게 좋은 제안이었지만, 기쁜 제안은 아니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승낙하기에 찜찜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왜 갑자기 애인인 척이 필요한 것이며, 세 달이라는 기간은 또 무엇인지. 진은 심사가 단단히 비틀려 있는 에이든이 걱정됐다.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너무나 뻔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찝찝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그가 에이든 테일러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에이든이 그런 진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돈으로 그 개 같은 머리 좀 잘라. 아무래도 그 꼴로는 내가 데리고 다니기 좀 쪽팔리잖아.”

“…돈은 필요 없어.”

답지 않게 단호하게 뱉어진 진의 목소리에 에이든이 피식 웃었다. 돈이 필요 없기는 왜 없어.

“나는 너한테 돈밖에 줄 게 없으니까 그냥 받아. 너도 돈 때문에 나랑 붙어먹는 걸로 해. 깔끔하게. 다른 뭐라도 더 있는 것처럼 되면 좀… 역겹잖아.”

에이든의 빈정대는 목소리에 진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해 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했다. 그럼 받은 돈은 나중에 돌려줘야겠다. 머리를 자르고… 다시 렌즈도 껴야겠지…? 진은 벌써부터 눈이 시큰거리는 듯한 느낌에 작게 신음했다.

“당장 내일부터 하는 걸로 해.”

말을 마치자마자 에이든은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진을 보며 에이든이 같잖다는 표정을 했다. 어차피 챙길 거면서 순진한 척은.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돈을 싫어한다면 사람이 아니거나, 어디가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아무리 지고지순한 척을 해 봤자, 세상에 대가와 보상이 필요 없는 감정이란 없었다.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됐다. 절대로.

***

그 뒤로 꼬박 이틀이었다. 태어나서 자랑할 거라곤 건강한 몸뚱이밖에 없던 진 헤니가 고열에 땀을 뻘뻘 쏟으며 앓아야 했던 시간 말이다.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아 약을 먹는 것도 곤란했기 때문에, 진은 꼼짝없이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한 몸살을 견뎌야 했다.

진이 조금만 뒤척여도 싸구려 침대가 신경질적으로 삐걱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어디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했다. 아무도 안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맹세코 정말 그… 그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물론 기분은 좋았던 것 같지만……. 좋았나? 열에 달뜬 머리는 제대로 된 생각이 불가능해진 게 분명했다.

아무리 섹스 경험이 없는 진이라도, 그날 밤의 뉘앙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은 그날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수개월간 그를 관찰하며 얻은 데이터를 참고해 보았을 때, 에이든은 기분이 안 좋으면 웃음이 헤퍼지는 경향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몸이 걸레짝이 돼서는, 몸을 걸레짝으로 만든 사람을 걱정 중인 진 헤니였다. 눈으로 뜨끈한 열이 몰리고, 더운 숨이 코끝에서 뱉어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천장에 고정하곤 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날 에이든이 어땠더라…….

사실 섹스 중엔 에이든의 모습을 거의 보질 못해서 떠올릴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다. 안경을 벗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을 엎드린 자세로 있었다. 그래서 진은 에이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에이든은 진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려 들었다. 그래서 진은 그의 몸에 손을 올리지도,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자세로 새벽 내내 시달려야 했다. 손목이 뒤로 붙잡힌 채 한참을 흔들리느라 어깨며 손목 컨디션도 최악이었다. 그 행동에 화풀이 이외에는 딱히 붙일 만한 단어가 없었다.

- 나는 검은 눈이 제일 싫어.

- 세 달 동안 애인인 척 좀 해.

뭘까. 진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에 얕게 인상을 썼다. 에이든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검은 게 싫다고 말하던 에이든 테일러도, 애인인 척 좀 하라던 에이든 테일러도 모두 복잡한 표정이었다. 에이든은 자신이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진에겐 복잡하고 씁쓸해 보였다. 삽시간에 답답해지는 마음에 진이 눈꺼풀을 꾸욱 눌러 닫았다.

물어보면 대답을 해 주려나. 당연히 안 해 주겠지. 작게 한숨을 쉬며 진이 생각을 접었다. 화풀이였든 뭐든 상관없었다. 그가 무슨 일로 진을 찾았든지, 뭣 때문에 세 달 동안 남자 애인이 필요하든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에이든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이유가 뭔지를 알게 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진 헤니에게 에이든 테일러를 거절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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