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진 헤니 the Stalker (1/16)

포가튼 머맨 1권

(1) 진 헤니 the Stalker

에이든 테일러는 오늘도 눈이 부셨다. 짙은 갈색이 군데군데 섞인 금빛의 머리는 완벽한 모양새를 유지했고, 탁한 회색빛이 가미된 푸른 눈은 오늘도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아찔했다. 시니컬하게 웃을 때면 한쪽 뺨에 패이는 보조개가 눈에 띄었다. 아니, 잠깐만 지금 누구한테 웃고 있는 거지? 카페테리아에서 에이든을 훔쳐보던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진의 검은 앞머리는 눈썹을 덮을 정도로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눈을 크게 뜨자마자 머리카락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따끔따끔한 느낌에 눈을 비비려 퍼뜩 손을 들었지만, 달각하고 걸려오는 안경 때문에 빠르게 비비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눈물이 찔끔 맺혀 버렸다.

이놈의 머리도 잘라야 되는데……. 진은 성가신 앞머리를 대충 휙휙 넘기고는 안경을 벗었다. 뿌옇게 날아가 버리는 시야에 진은 허겁지겁 눈물을 닦고는 안경을 다시 장착했다. 안경을 벗은 시야는 모래가 잔뜩 일어난 바닷물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라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에이든 테일러가 눈부시게 웃어 준 사람이 대체 누구야! 진이 안경을 다시 콧대에 걸었을 때에는 그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젠장. 진은 작게 혀를 찼다. 그가 사라졌다면, 진도 더 이상 카페테리아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17분밖에 못 봤군. 진은 먹는 둥 마는 둥하던 싸구려 샌드위치 박스를 정리했다. 물컹한 샌드위치를 집자 손가락에 잔뜩 소스가 묻어서, 냅킨에 손가락을 문대고 있던 중이었다.

“어이, 진. 코치가 찾아.”

“아아… 어, 알겠어!”

진의 추잡스러운 모습에 말을 건 상대방은 작게 인상 썼다. 허둥지둥하며 박스를 정리하고, 이상한 인디언 문양 같은 게 잔뜩 그려진 가방을 한 쪽에 둘러맨 진은 정말 별종이었다. 이 케일스 대학에서 단연 눈에 띄는 놈을 꼽자면 에이든 테일러의 뒤를 이을 놈이었다. 물론 서로 아주 다른 방향이긴 했다.

“저 진이 그 진이라곤 아무도 생각 못 하겠지…….”

“알렉스, 뭐라고?”

“…별말 안 했어.”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던 알렉스는 여전히 질린다는 표정으로 앞장 서 걸었다. 그리고 뒤따라 걷기 시작한 진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왜 저러지. 아주 잠깐 동안 진의 머리에 의문이 맺혔지만, 금방 사라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육지에 너무 많았다.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냥 어깨를 으쓱해 버리고 말면 되는 일이었다.

“다음 달에 있을 대회 때문이야?”

워커의 끈이 풀린 채로 터벅터벅 걷던 진이 알렉스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알렉스는 얕게 한숨을 쉬며 진을 돌아보았다.

“그걸 알면 에이든 테일러 훔쳐보는 건 자제하고, 훈련 시간 좀 맞춰서 오라고.”

“아… 티나…?”

“미친놈.”

알렉스는 결국 풀린 끈을 밟고 앞으로 넘어진 진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진 헤니가 에이든 테일러를 스토킹하고 있음을 모르는 놈은 이 케일스 대학교에 한 명도 없을 거라고.

***

그러니까 내가 별종이라 했잖아. 지금 물살을 가르고 있는 진 헤니는 카페테리아에 출몰하는 그 음침한 진 헤니가 아니었다. 그는 물갈퀴나 지느러미가 달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물 안에서 자유로웠다. 땅을 밟고 걷는 것보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게 더 편해 보이는 지경이었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는 폼과 조바심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페이스 유지까지. 유연하고도 유려한 헤엄이 끝나고, 그가 물속에서 나와 코치와 이야기를 나눴다. 진이 수영모와 수경을 벗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맑게 웃었다.

‘오늘 기록도 엄청 나네….’

턱을 괴고 진의 모습을 보고 있던 알렉스 그레이가 작게 인상을 썼다. 알렉스는 진 헤니가 등장한 6개월 전부터, 초전박살 나고 있는 자신의 기록들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내 기록들도 깨기 쉬운 기록들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대체 뭐 하다 온 놈이야?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렉스 뿐만이 아니었다.

“저 새끼는 대체 어디서 뭐 하다 온 새끼야?”

“알면 뭐 달라지냐?”

관중석에서는 작은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이 의미 없는 소음의 원인은 진 헤니였다. 안경 벗는 게 훨씬 나은데, 너드 새끼들 종특인가.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렌즈를 꼈을 때 눈도 못 뜨고 줄줄 울던 걸 봤어야 했다는 둥, 무의미한 대화들이 오가고 있었다.

“코알라인지 쿠알라인지, 그 섬이 대체 어디 있는 건데?”

“몰라. 저번에 한 번 듣긴 했는데……. 거기가 일정 시간이 되면 섬으로 가는 길에 물이 차서 완전 고립된다던데. 워낙 바닷가 한 가운데 떠 있어서 관광 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그럼 쟤는 뭐 원주민 같은 거야?”

“미친, 원주민이 뭐냐, 원주민이.”

“왜? 저번에는 아이폰으로 사진 어떻게 찍는 거냐고 물어봤다고.”

그건 좀 너무했네. 소음이 잠시 사그라들었다. 진 헤니는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서는 모든 수영 대회의 기록을 몽땅 갱신했다. 정말 몽땅. 이전 기록은 애들 장난이었다는 듯, 압도적인 시간차로 모든 기록을 갱신하고 단숨에 국가대표 후보군으로 올라섰다. 그때 신기록의 비결을 묻는 지역 신문 기자에게 그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수영을 배워 본 적이 없어서…….

앞이 안 보여서 그런지 약간은 멍하니 풀린 검은 눈이 당황스러워 보였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기자도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기자의 표정에 진은 더 당황했다. 당황하고, 더 당황하고, 얼렁뚱땅 끝났던 인터뷰였다. 그 인터뷰 현장에서 진의 옆에 있던 알렉스는 피나는 노력과 각고의 훈련으로 탄생시켰던 자신의 기록들에게 애도를 표해야만 했다.

그리고 관중석에서 자신을 가지고 뭐라고 얘기를 하든 말든, 진은 상기된 표정의 코치와 다음 달 예정인 대회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진, 다음 아레나 수영 대회에서도 이 정도 기록만 유지하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문제없을 테니까 컨디션 관리 잘 하고.”

“네, 그럴게요.”

“그 뺀질거리는 에이든 테일러 따라 다니는 시간도 좀 줄이고 말이야.”

“…….”

정말 다 알고 있나 보네. 진은 괜히 멋쩍어져 뒷목을 긁적였다. 그렇게 티가 났나. 그럼 에이든도 알고 있을까? 코치는 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며 그를 격려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입력되지 않았다. 이미 진의 머릿속엔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것만이 빼곡했다.

‘에이든도 날 알고 있을까?’

진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대충 머리를 위로 쓸어 넘긴 채 생각에 잠겼다. 에이든 테일러에게 당장에라도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멀찍이서 그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진 헤니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에게 에이든을 평소와 달리 아주 가깝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가까운 어느 날, 예기치도 못하게.

***

그날은 미친 듯이 화창했다. 이렇게 쨍쨍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사람들이 해안가로 몰려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주말을 허투루 넘길 수는 없을 테니까.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 중에는 에이든 테일러도 있었다. 에이든이 주말을 즐기러 나왔으니, 당연히 진 헤니도 그 장소에 함께였다.

하필이면 이번 주말은 해변가에서 크게 파티가 있는 날이었고, 사람들은 후끈후끈한 백사장의 열기와 넘치는 성적 긴장감에 정신을 반쯤 빼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귀가 터져라 울리는 클럽 음악에 모두가 몸을 자랑하듯 흔들었다.

그 모든 열기들 가운데 진은 망원경을 달그락 거리는 중이었다. 프레임이 두꺼운 안경이 처치곤란이었다. 얕게 치미기 시작한 짜증에도 그는 망원경을 내려놓을 줄 몰랐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 황홀한 금발 머리를 볼 수 없으니까…!

에이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와이안 셔츠만 걸친 몸이 단단해 보였다. 진의 목울대가 한번 크게 울렸다.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진 않았겠지. 괜히 주변의 눈치를 보는 진이었다.

망원경으로 그의 몸을 샅샅이 훑던 진의 움직임이 어느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에이든의 왼쪽 쇄골에서 어깨까지는 큰 타투가 자리해 있었다. 올드스쿨 스타일로 볼드하게도 새겨놓은 타투는 천사 같은 얼굴과 대조되어 분위기를 묘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사실 진이 보고 있는 건 타투 따위가 아니라, 그 타투 아래에 가려진 큰 흉터였다. 주욱하고 무언가에 깊게 찢긴 상처. 진은 망원경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또 다시 눈앞에서 거슬리기 시작한 앞머리를 휘휘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백사장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눈에 띌 사람은 띄는 법이었다. 아, 에이든 말고 진의 이야기였다. 눈 밑으로 내려온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에, 해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긴팔 티까지. 진은 몰랐지만 에이든과 함께 온 일행들은 그의 존재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물론 그 옆에 서있던 에이든 테일러도.

“쟤는 진짜 징하다. 이쯤 되면 그냥 한 번 자 주고 말아라, 에이든.”

“야, 시발!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한 번 떡치는 걸로 떨어질 위인이냐? 그리고 막 갑자기 에이든을 존나 묶어 놓고 감금하고 그러면 어떡해.”

그 말에 무리에 있던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진의 표현에 의하면, 푸른 눈의 천사인 에이든도 그 모든 음담패설을 들으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데킬라를 입에 털어 넣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삼켰다. 에이든이 진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진은 너무 눈에 띄었고, 스스로를 숨길 생각도 그닥 없어 보였다.

“그래도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이면, 완전 에이든 취향…….”

“조용히 해, 좀…….”

낄낄대던 웃음소리가 가시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에이든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 눈을 돌렸다. 취향이니 뭐니 말을 꺼냈던 놈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에이든은 데킬라를 한 잔 더 입에 털어 넣더니 바에 잔을 내려놨다. 탁하고 크게도 울리는 소리에 두 놈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갖고 있는 거 있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에이든은 살벌하게 예뻤다. 시각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랬다. 한쪽 뺨에만 들어가는 보조개는 왜 진이 그를 천사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포인트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외의 모든 건 빨간 비상등을 울려댔다. 좆 됐단 소리였다. 쪼리를 찍찍 끌며 다가온 에이든에게 그 둘 중 하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여, 여기.”

짙게 웃으며 대마를 받아 든 에이든은 입술 끄트머리에 물고는 자리를 떴다. 주변에 있던 여자들의 눈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들은 에이든을 방해라도 할까봐, 빠르게 길을 텄다. 에이든은 걸으며 입에 물고 있던 것에 불을 붙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셔 대마에 불을 붙이던 에이든은 몇 모금 빨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터벅터벅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발을 옮겼다. 다시 돌아오는 그의 모습에 대마를 건넨 놈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190cm가 넘는 에이든이 남자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에이든은 싱긋 웃으며 방금 전까지 타들어가고 있던 대마를 남자의 어깨에 지졌다.

“아으윽!!”

“냄새가 너무 싸구려라… 못 피우겠네, 나는.”

대마를 지져 끈 에이든은 이제야 볼일이 끝났다는 듯, 뒤돌아 나갔다.

그렇다. 진은 모르겠지만,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에이든 테일러는 천사와는 아주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는 정말이지… 뭐랄까.

그래, 개차반이었다.

***

“아, 놓쳤잖아?!”

진이 사색이 됐다. 어느 순간 에이든이 시야에서 사라진 까닭이었다. 슬슬 어두워지고 있어서 그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망원경과 함께 분주하게 두리번거리던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의 자리에선 에이든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릎 깨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며 진이 백사장을 가로질렀다. 해가 지자 가족 단위로 놀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조금 한산해졌다. 다만 여기저기서 분위기가 잔뜩 끈적거려서 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걸어야 했다. 걷다가 애정행각을 하고 있는 커플이라도 볼라 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삐걱댔다.

방금 전까지 에이든 테일러의 잘 짜여진 근육을 보며 침을 삼키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귓바퀴와 목덜미가 새빨개져서는 고장 난 로봇처럼 걸었다. 진은 어찌저찌 백사장 한 복판을 탈출해선, 파도가 찰박거리는 곳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왜 없지.”

분명 삐걱대면서도 에이든의 황홀한 금발을 샅샅이 찾으며 걸었는데……. 인위적인 염색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그 탁하면서도 맑은 머리색을 내가 놓칠 리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찾아?”

“어……?”

“뭐 찾냐고.”

삐거덕 거리며 뒤를 돌아본 진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댔다. 그 모습에 에이든은 물고 있던 대마를 바닥에 던져 발로 즈려밟았다. 입에 머금고 있던 마지막 연기를 길게 내뱉은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나 찾아?”

집요하게 부딪혀 오는 푸른 눈에 진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해가 완전히 저문 해안가엔 철썩이는 소음이 시끄러웠다. 데시벨을 재 봤다면 진 헤니의 심장 소리가 더 컸겠지만.

진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에이든이 한 걸음 더 내딛자, 진은 몸을 뒤로 돌려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이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다. 문제는 온 힘을 다해 봤자, 남들이 빠르게 걷는 수준의 속도로밖에 달리지 못했다는 거지만.

에이든은 그 이상한 꼬라지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단번에 진을 따라잡았다. 젠장! 뭔 달리기가 저렇게 빨라?! 진은 에이든의 속도가 거의 우사인 볼트급으로 느껴졌다.

“으악!!”

결국 그는 에이든의 손에 뒷덜미가 잡혀선 뒤로 고꾸라져야 했다. 땅바닥에 요란하게 부딪힌 진은 삐딱한 고개로 저를 바라보는 에이든의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도 진이 안경을 꼭 잡고 있는 이유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에이든 테일러를 볼 기회가 쉽게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 진은 멀리서 훔쳐볼 때는 꿈도 못 꿀 각도로 에이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계 탄 날이었다.

그리고 에이든은 뒷덜미를 잡혀 백사장을 구르는 와중에도, 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간 고민했다. 잠깐 고민을 하던 에이든은 씨익하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남들이 봤다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한 서늘한 미소였다. 하지만 진 헤니에겐 이 세상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섹시한 미소일 뿐이었다.

진이 그 악마 같으면서도 천사 같은 미소에 넋을 빼고 있는 동안, 에이든은 진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진 역시 작은 키나 체구는 아니었지만, 에이든은 한 손으로 휘딱 그를 들어올렸다. 그리곤 질질 끌고 물에 가깝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어?”

에이든은 진을 끌고 허리까지 잠길 만큼 바다로 들어가더니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멍하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바다 한 가운데에 선 그 모습에 진이 넋을 놓았다. 달빛에 흠뻑 젖은 그는 황홀했다. 진이 가장 사랑하는 찰랑거리는 파도와 그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에이든 테일러라니.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하지만 에이든은 무심한 눈으로 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검은 머리랑 검은 눈만 보면 다 죽여 버리고 싶더라고.”

……응?

“아, 그건 좀 곤란…!!”

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고개가 물 안으로 처박혔다. 갑자기 코로 들이차기 시작한 찬 물에 진이 순간 당황해 팔을 휘저었다. 자신의 뒷머리를 잡고 있는 손을 뜯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다시 고개가 위로 들려 올라갔다.

“컥…! 아니, 잠깐…!!”

“이유가 뭐냐면 말이야.”

그리곤 다시 사정없이 처박혔다. 침착하자, 침착해. 진은 당황했던 속을 진정시켰다. 여긴 물속이야. 바다 속. 따뜻하고 안락한 바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이다. 물에 대가리가 잠겨 있는 진의 마음이 차분해질수록, 물 밖에서 숨 쉬고 있는 에이든의 속은 답답해졌다.

“내가 이 검은 머리랑 눈 때문에 인생이 좆같아졌거든.”

에이든은 이젠 허우적거리지도 않는 진을 쳐다봤다. 죽어 버렸으면. 이 세상에 있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놈이든 년이든, 다 없어지면 되지 않을까? 그럼 내가 편해지지 않을까? 술과 대마에 절은 에이든의 머리가 이성적인 생각을 거부했다.

“네가 내 얼굴을 보고 헉헉대든 말든 솔직히 관심 없어.”

“…….”

“네 잘못은 딱 하나야.”

물속에 처박혀 있는 진에게 그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진은 정말, 이래도, 지금까지! 꺼내 줄 생각이 없는 에이든 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말 죽이려고?! 나는 천사 같은 너를 따라 온 것밖에 잘못이 없는데?! 이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진의 뇌는 바닷물에 절어 제 기능을 잃은 게 확실했다.

진은 있는 힘껏 에이든의 손을 쥐어뜯었다. 에이든이 그 마지막 발악에 진을 물속에서 끌어올렸다.

“하악…! 진짜, 죽이려고?!”

한 마디를 하는데 끊임없이 기침이 나왔다. 짠 바닷물이 입에서 잔뜩 토해졌다. 게다가 안경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진이 휘청이며 물미역처럼 얼굴을 감고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물속에 꽤 오랜 시간 처박혀 있느라 산소를 급하게 들이마시는 건 덤이었다.

진이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에이든의 팔뚝을 잡았다. 초점이 나간 동공이 제멋대로 잔뜩 넓어진 채였다.

“에, 에이든?”

진이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에이든을 불렀다. 물줄기가 진의 콧대를 타고 흘러, 코끝에서 툭하니 떨어졌다. 에이든의 표정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말이 없는 에이든 때문에 진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다녔다.

“그… 눈에 띄지 않게 훔쳐볼게.”

“…뭐?”

“그래! 눈에 안 띄게끔 잘 쫓아다닐게!!”

엄청난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는 얼굴로 진이 방긋 웃었다. 에이든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하지만 지금 진은 눈에 뵈는 게 없었기 때문에 해맑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눈에 안 띄게 잘 훔쳐보는 거… 망원경을 좀 더 비싼 걸로 사면 가능하지 않을까? 진은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에이든의 한쪽 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은 영문을 모른 채 가만히 미소 짓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진의 쌍꺼풀 없이 큰 눈이 깜빡일 때마다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드러났다. 진의 머리칼을 잡고 있던 에이든의 팔이 순간 움찔했다.

손대선 안 될 것에 손을 댄 사람처럼, 에이든은 진의 검은 머리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곤 곧바로 몸을 돌려, 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시발. 욕을 읊조리는 에이든의 표정이 살벌했다. 마치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진은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에이든의 형체를 따라 물길을 헤쳤다. 별말 없는 건 계속 따라다녀도 된단 소린가? 그럼 좀 더 좋은 망원경을 사야겠네. 다음 달 수영 대회에서 꼭 1등을 해서, 상금을 타야겠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승부욕이 발동 중인 진이었다.

***

마일리처럼 엉덩이를 흔들어 보라는 노래가 펍에 크게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주변에서 그 노래 박자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든, 뭐라 말하며 웃고 낄낄대든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다. 노래와 장소에 퍽 어울리지 않는, 거지같은 그때의 대화가 머릿속에 끝없이 재생됐다.

- 거짓말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정말로 봤다니까요! 그건…….

- 미친 게 확실하군. 제정신이 아니야. 내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에이든은 손에 잡히는 잔을 아무거나 들었다. 내용물이 뭐든 크게 상관없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알콜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다시 가서 한 번 말해 볼까.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볼 만할 텐데.’

에이든은 정말 웃겨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커다란 그의 웃음소리는 가벼운 노래 가사에 짓눌려 허공에 흩어졌다. 그는 또 다른 잔 하나를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웃음이 짙어졌다.

- 어머, 정말 인형처럼 생겼네요. 빚어 놓은 것처럼 생긴 이 얼굴 좀 봐요. 역시 부인께서 미인이셔서 그런가 봐요.

- 아버지를 닮아 머리까지 비상하다던데… 정말 부러워요, 부인.

- 그럼요, 우리 에이든이 얼마나 완벽한 아이인데요.

또 다른 잔이 비워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눈으로 올라오는 열기에 에이든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눈이 뜨끈해지는 만큼 눈빛 역시 사나워졌다.

무언가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거나하게 약과 술에 취한 일행들은 그가 어디를 가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에이든의 보폭은 컸다. 어디로 가야할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발걸음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펍의 가장 구석진 곳,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까지 걸어간 에이든이 목표물을 포착했다. 멱살을 잡아 올리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표물의 검은 티셔츠가 따라 올라왔다.

“어, 음… 어떻게 봤지.”

하하. 어색하게 뱉어진 웃음소리에 에이든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해 보자 이거지. 놈이 새로 맞춘 안경도 영 거지같았다. 저렇게 프레임이 두꺼운 안경들은 대체 어디서 구해 오는 건지. 너드 새끼들이 단체로 맞추는 곳이라도 따로 있는 건가.

에이든은 오늘도 따라 붙은 스토커 새끼의 멱살을 쥐곤 어디론가로 향했다. 진은 허둥대며 걸었다. 오늘도 워커의 신발 끈이 잔뜩 풀어 헤쳐진 채였다. 저번처럼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진은 아래를 살피며 걸어야 했다.

워커에 시선을 두고 있던 진은 에이든의 걸음걸이가 잔뜩 위태로움을 눈치 챘다. 진이 여태껏 봐 온 바로는 그는 술이 약했다. 한두 잔만 마셔도 금방 취기가 오르는 게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삼키지만, 사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이든 테일러니까.

진은 이제 자신의 발이 아니라 에이든의 발을 보며 걸었다. 어디에 걸려 넘어지진 않을까 싶어 땀까지 나는 지경이었다. 살면서 두 번이나 에이든의 손에 멱살이 잡힐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은 이상한 기분과 함께, 오늘따라 상태가 안 좋은 그가 의아했다.

땅바닥에 처박혀 있던 진의 시선은 목적지에 도착함과 동시에 들려 올라갔다.

“나는… 난 별로. 괜찮은데.”

화장실은 왜? 잔뜩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던 진은 제일 구석진 칸 안에 거칠게 밀쳐졌다. 대체 무슨 용도를 위한 화장실인지 변기가 없었다. 알고 있는 바로는 화장실이란 건 분명 이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진은 구석에 몰린 채, 이 상황에 도움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처지에 놓인 지 전혀 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나는 최대한 눈에 안 띄도록 한 건데… 네가 날 너무 잘 찾,”

“닥쳐.”

목울대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술기운이 올랐는지 에이든의 눈이 붉었다. 진은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다, 일순간 흐려지는 시야에 맹한 소리를 냈다. 그의 커다랗고 투박한 안경은 에이든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진의 얼굴에서 벗긴 안경을 바닥에 툭 던졌다.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상 안경인데. 진이 얕게 인상을 썼다. 아냐, 에이든 테일러가 벗기고 싶다면 벗기는 거지, 뭐. 팔자 좋은 생각을 하던 진은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 지금 무슨…!”

“왜?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야?”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갔다. 지익 하는 소리가 외설적으로 귓바퀴에 감겼다. 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지춤을 틀어쥐었다.

“아니! 나는 이런 걸 원하는 게… 아윽!”

브리프 안으로 불쑥 들어온 손에 진은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니라고 하는 것치곤 반응이 너무 빠르지 않아?”

에이든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의 눈은 살벌했다. 동시에 생기가 넘쳤다. 어떤 눈빛인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겠지만, 정말 그랬다. 진은 비웃듯 뱉어진 에이든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반쯤 일어선 물건에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야. 나는 진짜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억울함 가득한 외침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목울대에선 끙끙거리는 소리만 뱉어졌다. 귀와 목까지 붉어진 진을 내려 보던 에이든은 그의 몸을 뒤집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벽에 이마를 박은 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뒷통수를 내리 누르는 손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난 검은 눈이 정말 싫어.”

열에 들뜬 에이든의 목소리에 진의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

다리가 후들거렸다. 진은 남의 손바닥 안에서 힘을 얻어가는 제 하반신을 내려다봤다. 잇새로 소리가 샜다. 아니, 정말로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세상이 핑핑 돌았다. 진은 굉장히 하찮은 힘으로 에이든의 손을 쥐어뜯으려 했다. 손을 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아…! 놔, 놔 줘!”

대답은 없었다. 뒤에서 들리는 거라곤 에이든의 숨소리뿐이었다. 목덜미에 와 닿는 숨 때문에 진이 어깨를 움츠렸다. 움찔거리는 그 몸짓에 진의 것을 쥔 에이든의 손에 속도가 붙었다.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끝에서 맑은 액이 흘렀다.

“아읏! 잠깐만! 잠깐…!”

안 돼, 안 돼. 진의 허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안에서 진이 바르작거리자 뒤에 서 있던 에이든이 무게를 실어 눌러왔다. 벽 구석에 짓눌린 채 진이 신음했다. 엉덩이에 닿아오는 단단한 느낌에 머릿속에 빨간 불이 밝게 켜졌다. 에이든의 숨이 거칠었다. 귀에 와 닿는 숨소리에 진의 뱃속이 징징 울리고 있었다.

배와 허리가 잔뜩 무거워지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이 진을 뒤덮었다. 입이 크게 벌어지고 참아 왔던 소리가 창피한 줄 모르고 뱉어졌다. 진에게서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터지자, 에이든이 낮게 탄식했다.

뒤돌아 있는 진은 볼 수 없었지만, 에이든은 손장난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집요한 눈빛이 진의 뒷덜미를 눈으로 범했다. 그는 드디어 제 자신이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미치지도 않았는데 미친놈 취급을 받는 것보다 정말로 미친놈인 게 덜 억울할 테니까.

“아아! 이제 못 참겠… 하윽!”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진의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화장실 벽에 진이 뱉어낸 액체가 흘렀다. 그리고 곧바로 하반신에 찬바람이 들이쳤다. 골반쯤에 걸쳐져 있던 바지가 아예 내려간 까닭이었다. 사정 후 탈력감에 정신을 빼 놓고 있던 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나는 정말 이런 걸 원하는 게 아,”

“상관없으니까, 닥쳐.”

진 헤니가 자신을 스토킹하는 목적이 뭐든지 에이든에게는 좆도 상관없었다. 이래도, 저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뇌는 술 때문에 흐물해진지 오래였고, 제 주변에서 한참 동안 걸리적거리던 이 검은 머리 새끼를 어떻게든 조져 놓고 싶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에이든은 어느새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를 진의 애널에 갖다 댔다. 버둥거려도 소용없었다. 진은 돌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술 취한 미친놈에겐 역부족이었다. 거긴 뭘 넣으라고 만든 곳이 아니라고…!! 진은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뻑뻑한 곳에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에이든 때문에 진은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성기의 끝이 쿡하고 밀려들어오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살이 잔뜩 벌어져 이물감이 엄청났다. 더 이상 들어왔다간 찢어질 게 분명했다. 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흐윽…! 아, 안 쫓아다닐게! 정말로…!!”

에이든이 지금 원하는 말이 이거라면, 해 주면 될 일이었다.

“하아… 안 믿어.”

‘젠장,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군.’

성기가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압박감에 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손을 뒤로 뻗어 에이든의 움직임을 저지해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뱉어내려는 애널 때문에 에이든도 움직임이 여의치 않았다. 에이든의 입에서도 낮은 신음이 흘렀다.

화끈거리는 아래에 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결국 찢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금 더 들어왔다가는 피를 볼 게 확실했다. 진이 안간힘을 짜냈다. 술 취한 미친놈을 상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진이 버둥거리며 뒷통수를 누르고 있던 에이든의 손을 치워 냈다. 그리고 뒤로 손을 뻗어 강하게 밀어내자 에이든이 휘청거렸다.

몸을 억지로 열고 들이찼던 것이 주르륵 빠져나가는 감각에 진이 몸서리쳤다. 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생각보다 쉽게 밀쳐진 에이든을 돌아봤다.

“……?”

그래, 어쩐지 너무 쉽다 했어……. 술을 그렇게 마실 때부터 알아봤지. 진이 후들거리는 제 다리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잘 들쳐 매고 갈 수 있겠지? 술기운에 주저앉은 에이든 테일러를 바라보며 결국 피식하니 웃어 버린 진 헤니였다.

***

에이든은 눈을 뜨자마자, 엄청난 두통에 어금니를 씹었다. 평소보다 배로 울리는 골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다. 분명 펍 구석에 음침하게 앉아 있는 스토커 새끼한테 갔던 것 같은데…….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 에이든은 시야에 잡히는 주변 풍경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거지같은 방 꼬라지는. 낡은 침대와 작은 책상, 행거가 쑤셔 넣어진 좁은 방이었다. 정말 그랬다. 쑤셔 넣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끼익거리며 소리를 지르는 싸구려 매트리스, 책상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먹다 남은 피자 박스, 그 옆에 마구잡이로 쌓여져 있는 검은 옷들까지. 가관이었다. 방을 돌아보던 에이든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검은 티에 검은 트레이닝 바지임을 발견하곤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옷들 중에 자신의 것들을 골라냈다. 시계는 어딜 간 거야. 잔뜩 짜증이 섞인 손길이 물건을 헤집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허공에 멈췄다.

「오늘은 에이든 테일러가 해변에서 주말을 즐겼다. 흰색 하와이안 셔츠를 입었는데, 천사가 따로 없었다. 에이든 테일러는 사람이 맞긴 할까? 에이든 테일러의 머리카락은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걸까?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절대 인간이 아닐 거다. 그런 황홀한 금빛을 내는 머리카락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니까. 멀리서 봐도 쨍하니 푸른 눈동자도 마찬가지야. 가까이서 본다면 정말 황홀하겠지. ―라고 생각만 했었는데! 그렇게 코앞에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시발! 아, 욕은 자제하도록 하겠다.

아주 화가 난 표정과 아주 화가 난 목소리가 섹시했다. 욕을 안 하려고 해도! 그를 보고 욕을 안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어쨌든! 달빛을 잔뜩 받아 그 성스러움이 배가 된 에이든은 은혜로웠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을 믿지도 않는 저에게 이런 은혜를!!

그는 화가 많이 나서 내 머리채를 잡고 물에다가 얼굴을 처넣었는데, 물에 나를 집어넣었다 빼는 그 움직임이 천사가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날아갈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는 천사가 분명하다.」

에이든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었다.

“어, 아… 일어났네.”

얼이 빠져 일기장을 내려다보던 에이든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인상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진 헤니가 있었다. 진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방긋 웃었다. 환하게 웃던 진은 아무 대답이 없는 에이든에 제발이 저려 구구절절 변명을 시작했다.

“옷이 너무 더러워서 갈아입히기만 했어…! 나 진짜 아무 짓도 안 했어!”

어제 억지로 당했던 사람이, 억지로 하려던 사람에게 결백함을 어필하고 있었다. 어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서 바지가 너무 더러웠다는 둥, 어차피 앞이 잘 안 보여서 아무 것도 못 봤다는 둥 변명이 길었다. 특히, 아무 것도 못 봤다고 말할 때는 얼굴이 빨개져서 설득력이 바닥을 쳤다.

에이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벙긋대는 진을 외면하고, 입고 있던 검은 티를 훌렁 벗었다.

이런… 안경이 있었어야 되는데. 진은 멍한 눈으로 생각했다. 진이 속으로 음험한 생각을 하든 말든, 에이든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문으로 향했다.

문을 부술 듯이 닫으며, 그가 초라한 방을 떠났다. 진이 멋쩍게 웃으며 그가 벗어 둔 옷가지들을 주워 올렸다. 더듬거리며 물건을 정리하던 진은, 물체의 거리 가늠에 실패해 침대 모서리에 발끝을 부딪쳐야 했다.

“아윽… 아파라!”

발을 쥐고 주저앉은 진의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생각 없이 풀썩 앉았다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아픔에 두 배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끙끙대던 진은 발 옆에 채이는 은색의 물체에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진 헤니의 초라한 공간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 그것은, 에이든 테일러의 시계였다.

***

수영 전, 몸을 풀던 이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왜 저래? 몰라.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다른 진 헤니 때문에, 모든 이가 눈에 물음표를 띄웠다. 진은 오늘따라 차분했다. 아니, 차분하기 보다는 멍했지만, 평소처럼 바보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레나 대회가 2주 뒤니까, 다들 컨디션 관리 잘 하고.”

코치가 앞에서 뭐라 떠들든, 진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며 스트레칭 중이었다. 탄탄한 상체의 근육들이 긴장하며 조여졌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익숙한 폼으로 허리 근육을 풀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엉덩이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 아무튼 그곳에서 둔통이 올라왔다. 며칠 전처럼 제대로 앉지도 못하게 아픈 건 아니었지만, 불편함이 가시질 않았다.

하긴, 너무 컸지……. 신이 에이든 테일러에게 주지 않은 건 대체 뭘까…? 정답! 없다! 속으로 오만가지 주접을 떨며, 그날의 에이든 테일러를 생각했다. 정확히는 제 침대에서 잠에 빠진 에이든을.

그때 진은 자신보다 10cm는 큰 몸을 거의 들쳐 업느라 땀범벅이 된 채였다. 헉헉 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시원한 물을 쉼 없이 들이키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바닥에 주저앉았으니… 옷이 더러울 텐데. 물을 다 들이켠 진은 침대에 널부러진 에이든을 보며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혀야겠지…? 이건 맹세코 사심이 아니었다. 정말 그는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다. 진은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겨 옷더미로 향했다. 말 못할 곳에서 올라오는 아픔에 가끔씩 멈춰 서야 했지만, 입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린 채였다.

진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품이 넉넉한 것들을 꺼내 들었다. 다 같은 검은 티로 보이겠지만, 절대 아니었다. 눈이 잘 안 보여도 재질로 다 알아볼 수 있다고! 진은 자신의 명석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옷가지를 들고 침대 맡에 도착한 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러운 옷을 입고 잠든 에이든을 도저히 가만 둘 수 없었다.

- 잠시 실례…….

진이 에이든의 티셔츠를 조심스레 끌어올렸다. 잠에 깊게 빠진 건지, 가끔 인상을 쓰는 것 외에는 미동도 없었다. 진은 깨끗한 티셔츠에 에이든의 머리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팔을 넣어 주려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시야가 깨끗하진 않았지만, 뿌옇게나마 그의 왼쪽 어깨를 덮고 있는 타투가 보였다. 진은 저도 모르게 그 타투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울퉁불퉁한 피부가 만져졌다. 타투가 가리고 있는 상처 때문이었다.

- 미안해, 에이든.

진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 미안해.

진은 에이든의 옷을 모두 갈아입히고 난 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진이 스트레칭을 마무리하며 생각을 접었다. 평소라면 몸이 시원했을 텐데, 찌뿌둥함은 가시질 않았다. 체기가 잔뜩 얹힌 것처럼, 모든 게 둔하고 둔탁하기만 했다.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물에 들어가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진이 수경을 쓰며 수영장의 레일로 다가섰다.

‘아, 맞다. 시계… 시계 돌려줘야 하는데.’

하지만 물 안에 들어가서도 에이든 테일러에 대한 생각은 끊이질 않았고, 그의 답답함도 가실 줄을 몰랐다.

***

같은 시각, 에이든 테일러는 미친 하반신을 내려 보며 실소했다. 남색의 페라리에 시동이 걸린 채였지만, 운전석에 앉은 에이든은 출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억에서 삭제됐던 며칠 전 그날 밤이 뜬금없이 머릿속에 재생된 까닭이었다.

- 아아! 이제 못 참겠… 하윽!

문제는 재생까지는 상관없지만, 재생과 동시에 하반신이 반응했다는 데에 있었다. 제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던 음성, 가빠지던 숨소리까지. 기억이 몽땅 되살아나면서 성기는 반쯤 발기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축축한 음성과 물에 젖어 반질거리던 낯짝까지 떠올랐다. 속눈썹에 맺혀 있던 물기가 마음 끄트머리에 있는 가학심을 부추겼다.

‘게다가 맞부딪혀 오던 그 까만 눈.’

이제 완전히 부푼 성기에 에이든이 한숨을 쉬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래서는… 이젠 미친놈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한데.”

에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핸들을 쥐었을 때였다. 누군가 짙게 썬팅된 차창을 두들겼다. 창문을 두들긴 사람은 안이 잘 보이지 않아, 창문에 바짝 붙어선 채였다. 차 안에서 그 광경을 모두 관람 중이던 에이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경 공장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어디서 자꾸 저딴 안경을 구해 오는 거야?

똑똑 소리의 주인공은 거지같은 안경을 쓴, 진 헤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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