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167)

jeu dénué de sens (8)

Box to Box midflieder.

우리나라에선 박투박, 여기에선 B2B라고 줄여부르는 이 포지션은 사실 내가 옛날에 고양, 그러니까 군대가기 전에도 종종 맡았던 포지션이었지만.

그 때는 그냥저냥 쓸 만한 수준 정도였다. 물론 내가 체력은 좋은 편이고 시야가 넓다는 장점은 있었다고 해도.

중앙 몸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신체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수비는 열심히 하다가도 괜히 어이없는 몸싸움이나 수비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카벨라, 슛-!]

-떠엉-!

[아, 아쉽게도 골대에 맞아 버립니다!]

[바로 길게 밖으로 차내는 바스티아! 클리어링! 역습 기-]

-텅.

[아, 리가 어느새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저 선수 언제 달리기 시작한 거죠? 분명히 방금 전에는 페널티박스 근처에 있었는데.]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

‘역시, 슈팅 때릴 때부터 내려가 있길 잘했어.’

이젠 더 이상, 저럴 때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나중에야 허둥지둥 대응하는 게 아니라. 저 공격이 실패했을 때 지는 리스크라던지,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하게 보인다.

‘필드 뒤에서 계속 저런 역습을 본 짬밥이 확실히 도움이 되네.’

-퉁

[리, 공을 잡습니다.]

휴, 그래도 공중볼은 아직도 내 약점 중에 하난데, 다행히 이 정도면 낙구지점 잘 잡는 데 성공했구나.

‘자, 이제 바로 앞으로 몸 돌려서 정면으로 다시-’

-퍽

[아, 크리벨리,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몸싸움을 걸어오는군요.]

[그렇죠, 바스티아 입장에선 저런 기회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데요! 당연히 잡아야죠.]

아 씹. 이 새끼, 내가 볼 잡은지 1초도 안 됐다. 그런데 등 뒤에서 바로 몸싸움 걸어와?

‘젠장, 확실히 중앙은 치열함의 차원이 다르구나.’

윙어를 상대로 풀백이 수비할 때는 앞을 내줘도, 어떻게든 안으로 파고드는 것만 막아낼 수 있으면 최소한의 수비는 했다고 검증받을 수 있지만.

여기는 그냥 뚫을 수만 있으면 바로 엄청나게 강력한 기회로 이어지니 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싶으면 절대로 내가 2초 이상 볼을 가만히 잡도록 나두질 않-

-꼬집.

‘아, 씨발. 꼬집기까지 쓰네. 이 새끼.’

좋아, 정면은 포기.

-꼬집.

“Ah!”

그래도 공은 우리 꺼다.

-뻥.

[아, 그러나 침착하게 볼을 세르티치에게 전달하는 리, 계속 마르세유의 공격입니다.]

휴, 공 지켰다. 188cm짜리 공격수 상대로.

‘아예 뚫고 가기까진 영원히 안 되겠지만, 그래도 공 지킬 정도로 몸이 좋아지긴 했구나.’

신체 능력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좋아진 것도 있겠고, 더티 플레이도 좀 크긴 하지만. 어쨌든 지켜냈다.

[지금까지 모습을 보면 리의 중앙 미드필더 전환은 역습 저지 측면에서는 굉장히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예, 확실히 판단이 빠르군요, 리 선수, 팀이 슈팅을 하자마자 바로 뒤로 슬금슬금 나와 있었습니다. 중앙 지역이 조금 더 단단해졌어요. 이건 로페즈 선수에겐 없던 능력입니다.]

다만, 모든 게 좋지만은 않았다.

일단 개인적인 문제로는.

“휴-우, 체력적으로 훨씬 힘들다. 확실히.”

아니, 못 할 정도는 아닌데 여기가 풀백 때보단 조금 더 지친다.

‘물론 움직이는 활동량 자체야 풀백도 뒤지지 않고, 지금 이 활동량이 못해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몸싸움을 피하는 어린 선수들이나 스피드로 승부하려고 드는 선수가 많아 몸을 덜 부딪칠 수 있는 측면과는 다르게.

중앙은 몸싸움을 피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팀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기에 아무리 몸싸움이 싫더라도, 잘 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몸을 부대껴야 하기에 같은 거리를 달려도 체력 소모가 더 많았다.

‘그나마 중미가 풀백에 비하면 스프린트가 조금이나마 적은 편이지만, 난 박투박이니 그것도 포함 안 되긴 하지.’

진짜 징하게 뛰어다녀야 한다.

‘그러니··· 아마도 내가 이 포지션으로 풀타임 뛰거나 하진 못하겠네.’

내년 우리는 60경기 이상을 치루게 되고, 아마··· 이번 6월부터, 웬만하면 나는 국가대표로 뛸 거다. 만일 내가 주전으로 뛰게 될 경우, 1년에 50경기 수준을 뒬 수도 있다는 거다.

내가 난생 처음 겪는 미친 일정인데, 여기에서까지 풀타임 뛰라고 하면?

글세, 아무리 봐도 30경기 정도는 어찌어찌 버텨도 그 이상부터는 나락가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다만, 확실히 공격적인 패스는 좀 줄었군요.]

그냥 뭘 해도 나름 괜찮게 할 수 있는 풀백과는 다르게 중앙 미드필더로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조금 제한된다.

체력이 조금 더 달리고, 압박이 오니 시야가 조금 좁아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공격적인 패스를 풀백 때처럼 팍팍 넣어주진 못한다.

그러니 당연히 - 득점 기회도, 조금 줄어든다.

***

[seconde mi-temps 21]

Marseille 0 : 0 Bastia

[Buts]

Marseille : (rien)

Bastia : (rien)

***

[뭐, 어찌 보면 당연한 겁니다. 저렇게 뛰어다니면서 패스까지 로페즈 수준으로 잘 해주면, 저 선수는 진작에 중앙 미드필더에서 주전을 차지하고 EPL이나 레알 마드리드에 가 있어야겠죠.]

다만, 그래도 감독님이 나를 투입하고, 내가 못 써먹을 녀석은 아닌 이유는.

[상송, 고미스에게- 아, 바스티아 쪽에서 막아내는군요.]

[원래도 공격적인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상송이 조금 더 많이 올라가는군요? 확실히, 마르세유의 공격패턴이 살짝 바뀐 듯 합니다.]

우리 팀에는 아직, 상송이라는 공격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선수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옛날 고양에서처럼 빌드업 리더가 4-4-2에서 나 혼자던 때와는 다르다- 이 말이지.’

내가 그 때는 4-4-2임에도 팀에서 거의 유일하게 플레이메이킹을 전담하는 중앙 미드필더였기에 안 풀릴 경우 옆으로 뺄 패스도 잘 각이 안 나왔고. 압박이 심했는데.

지금은 짧게, 그냥 넘겨주는 패스만 하면 된다. 내가 전방에 서서 그 정도 역할만 해 줘도 패스워크는 잘 돌아가고.

[리, 상송, 에브라, 상송, 고미스에게-!]

위협적인 공격은 적당히 나올 만큼은 나온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고미스! 골대 위로 날려버립니다!]

[아, 이건 넣어줬어야죠! 마르세유의 공격수들이 오늘따라 영 결정력이 부족합니다.]

못 넣을수도 있지만, 그건 공격수 탓인 거고.

내 탓은 아님. 내 탓은 아닌듯함.

골문에까지 공 제대로 해 줬는데 공격수가 오늘따라 세모발인 걸 우리보고 어쩌라고.

‘쯥, 그래도 이기는 게 더 좋은데. 바스티아 쪽이 영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하니 기회가 자주 나오질 않네.’

야, 너네 왜 이렇게 쫄보냐. 너희 지금 18위잖아.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오라고, 너네.이겨서 강등 플레이오프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탈출 한번 노려봐야지.

한 골, 한 골만 넣으면 강등에서 벗어나는데 그렇게 째째하게 굴 꺼야?

‘어차피 봐야 할 시험 내일로 미룬다고 성적 더 잘 나오는 거 아니야. 이 녀석들아.’

그러니까 좀 나와라, 나-

-와아아아-!

···엉, 뭐냐? 갑자기?

[아, 이런, 바스티아 팬들에게는 비극적인 소식이군요! 현재 강등 경쟁 팀인 로리앙이 보르도와의 경기에서 동점 골을 집어넣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스티아가 다시 19위로 내려갑니다!]

“[리-! 바스티아가 19위래!]”

오오, 됐다. 됐어.

[아, 바스티아 선수들, 갑자기 막 올라오는데요?]

[그렇죠, 당연합니다! 지금 이대로 있다가는 바로 강등입니다! 모두 공격해야죠!]

그래, 올라오는구나. 아주 좋아, 좋다고.

[아, 바스티아, 나가면서 상송 쪽에는 그래도 전담 마크를 붙여둡니다.]

[아, 저는 이거 굉장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송 선수를 잘못 놔뒀다간 역습의 첨병이 될 수 있으니까요. 최소한의 보험은 들어놔야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하다. 하지만.

[크리벨리, 슛-!]

[아, 아깝게도 수비수 몸에 막힙니다!]

[이러면 다시 마르세유의 공격이죠!]

세상은 아쉽게도, 계획처럼만 흘러가는 게 아니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마르세유, 바로 리 선수에게 공을 가져다주고, 리 선수, 바로-]

설마, 내가 짧은 패스만 하니깐 패스 능력이 아예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미안하지만, 아예 나를 견제하지 않는다면.

-뻥.

한 방은 날릴 패스 능력은 있다고.

[어? 어? 리, 바로 토뱅에게 논스톱으로 찔러줍니다! 토뱅! 슈웃-!]

[골키퍼 쳐내지만! 고미스! 다시!]

-우아아아아-! 아!

-Gomis! Gomis! Gomis-!

하, 고함 소리만 들어도 알겠네.

[골! 골입니다! 마르세유가, 결국 이 경기의 승자는 마르세유로 정해질 것 같습니다!]

하아, 됐다.

‘이제, 끝났구나.’

아마 몇 골이 더 터질 수도 있겠지만.

느낌이 온다. 나의 이번 시즌은, 이걸로 아마 끝났다.

.

.

.

.

.

.

삑! 삑! 삐이-익-!

[경기 종료됐습니다! HTC와 함께하는 2016-2017 시즌 리그 1이! 막을 내렸습니다!]

***

[jeu terminé]

Marseille 1 : 0 Bastia

[Buts]

Marseille : Gomis(70)

Bastia : (rien)

***

(프랑스 축구 챔피언십 2016-17 시즌 순위 결과)

***

-탕! 탕!

-O-lympi-queu de marseille o-lympi-queu de marseille, O-lympi-queu de marseille, Oh oh oh oh oh···.

음, 단순히 구단 이름 부르면서 총 소리, 홍염, 아주 그냥 온갖 잔치들을 벌이는구나. 즐거워 보이시네.

“···풋, 좀 무서울 지경이네.”

뭐, 그래도 참 보기 좋은 광경이기도 하다. 이겼잖은가.

이겼으니, 최소한 지금은 웃으면서 볼 수 있다.

-[수고했다, 멋진 활약이었어.]

“······”

그 말은, 내년 시즌 내가 확실하게 플랜에 들었다는 소리겠지.

“[리- 안 갈 꺼야?]”

“[···잠시만 좀 있다가.]”

“[그래, 쫑 파티 있으니까, 거기에만 늦지 마라.]”

그렇게 세르티치를 돌려보내고 난 후, 나는 가만히 관중석 쪽을 보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번 시즌도, 끝났구나.”

그래, 끝났다.

고작 4개월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고.

그렇게 경기를 많이 뛰지도 않았었으며.

누군가는 리그 강팀과의 경기도 아닌 jeu dénué de sens(의미없는 경기)들에서만 뛰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봄 동안.

정말 많이 배웠고.

정말 많이 늘었다.

한 때 2부리그에서도 통하지 않았던 중앙 미드필더는 더 이상 없고.

리그앙이라는 유럽 빅리그에서도 풀백으로는 꽤 괜찮은 평가를 받고, 중앙 미드필더도 겸업이 가능한 선수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래.

더 이상 프로로서 생존에만 급급하던 이준혁이란 선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은 더 많지?’

유로파 리그에서 만날 수 있는, 챔스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강팀들. 그리고 리그에서 아직 못 겨뤄본 파리 생제르맹, 모나코, 니스 등등의 리그 강팀들.

아직도, 내 눈앞에 남아있는 벽들은, 한없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나에 비해서 얼마나 강한 걸까?

이 너머까지도, 내가 갈 수 있을까?

‘···뭐 대봐야 알겠지만, 뭔가 여기에서 확 특출난 성장을 하지 않고서는 그 너머까지 넘기엔 무리겠지.’

그러니.

“앞으로 다음 시즌까지, 2개월 남았나?”

이번 여름에도, 쉴 시간따윈 없겠구나.

물론 나는 이제 한국 나이로는 29살. 만으로 27세다.

더 이상의 성장은 아마 전문가들이 다들 불가능하다고 할 거다.

하지만 스포츠란, 예상을 빗나가기에 스포츠인 거다.

그리고 축구는, 구기 종목 중에서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스포츠다.

그러니-반드시 모두의 평가를 뒤엎고.

-O-lympi-queu de marseille o-lympi-queu de marseille, O-lympi-queu de marseille, Oh oh oh oh oh···.

이곳에서. 저 사람들이

모두가 나를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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