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167)

jeu dénué de sens (5)

5월 말.

유럽 쪽 축구 관련직 종사자들에게 있어서는 리그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 다가오기에 강등이나 우승같은 이벤트가 없다면 조금씩 한산해지는 때지만.

오히려 반대로 더 바빠지기 시작하는 곳도 있다.

“그럼, 모두 모였나? 회의를 시작하지.”

-짝짝.

가볍게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킨 마르세유의 수석 스카우트는,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올해 우리는 아직 리그 4위 싸움은 남아있지만, 어쨌든 일단 유로파 리그는 확정지었다.”

그리고 그 뜻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스쿼드를 보강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 말에 스카우트 부서의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빅 리그의 괜찮은 전력을 가진 팀이 유럽 대항전에 진출할 경우, 예선과 토너먼트 대회들을 거친다는 가장하에 보통 10경기 이상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고작 10경기 추가가 뭐가 달라지는 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명백히 다르다.

프랑스에서 유럽 대항전에 나가지 않는 팀은 토너먼트 대회에서 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최대 49경기, 보통 45경기 이하를 치르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10경기가 넘게 추가된다는 것은?

일이 최소 20% 이상 늘어난다는 소리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OO야, 문제집 너 한 달에 한 10권씩 풀었지? 이젠 학년도 올라갔으니 조금만 늘리자. 12권씩만 풀어.

이런 소리와 같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원래처럼, 평소처럼’ 해서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아니, 모두들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유튜브를 덜 보든, 잠을 덜 자든, 밥 먹는 시간을 줄이든, 한 문제당 걸리는 시간을 줄이든 간에 기존의 생활방식에서 변화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한 가지 단서가 더 붙는다면?

-아, 그리고 그 2권은 우리가 골라준 고난이도 모의고사 모음집 문제집으로 풀어라. 쉬운 것만 풀면 실력이 안 느니까.

정말로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버티다 버티다 한 번쯤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고.

이 마르세유에 있는 사람들 중, 그것을 모를 정도로 무능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최소 완벽한 더블 스쿼드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스쿼드의 보강이 필요하지, 자, 각자 생각하는 영입 리스트를 차례차례 말해보도록.”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수많은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는 스트라이커를 말했고, 누군가는 미드필더를 말했고, 누군가는 수비수를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저는 레프트 윙포워드 쪽에 아디마 디아카비(Adama Diakhaby)를 영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어떤 포지션이든 예외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 팀의 에이스가 있는 레프트 윙어 포지션이라고 해도.

당연히.

“저는 레프트백에 조르당 아마비(Jordan Amavi)를 영입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레프트백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음- 둘 다 좋은 선수지. 영입만 되면야 확실히 좋을 거야. 하지만 그 선수들이 순순히 오려고 하겠나?”

“···아마도 주급을 대폭 인상시켜주거나, 경기 출전 보장을 어느 정도 해주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선수들 중에서 백업으로 만족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레알 마드리드처럼 모두가 원하는 대기업이거나. 맨시티나 파리같이 연봉을 타 구단에 비해 배 이상으로 주는 곳에서도 경기에 뛰지 못해 불만이라는 선수가 매년 나오는데.

마르세유같은 중견기업은 어떻겠는가. 여기에서 탐낼 정도로 실력이 좋으면서도 팀에서 백업으로 만족하고 주급도 예산 내에서 해결할 수 있을만한 선수를 찾기란 쉽지 않다.

거기에다. 중견 기업들의 선수들이 자주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우리 팀, 집안 단속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바르셀로나 쪽에서 저희 막심 로페즈(Maxime López)를 노리는 듯합니다.”

“하, 재계약한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노린다고?”

“예,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 쪽에서도···”

“젠장, Zizou(지단). 당신이 우리 마르세유에게 이러면 안 되지!”

마르세유에서 잘하는 선수라면, 빅 클럽들이 탐낼 만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란 소리이니, 여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들이 이적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며 플랜을 짜야 한다.

그렇기에-

“···일단 지키는 게 최선이지만, 혹시 모르니 우리 팀에서 중앙 미드필더 멀티 포지션이 되는 선수들을 정리해보자고.”

여러 개의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선수들이 필요한 거다.

이런 예상 외의 상황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리 같은 포지션에 다른 선수를 영입해 두는 것이지만. 축구라는 게임의 특성상 그건 비상상황에만 일하는 잉여 인력을 고용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기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사람들을 많이 고용하는 것보다는 적게 고용하고 싶어한다. 그게 평소에 일하지 않는 잉여인력이라면 더더욱.

“로페즈와 비슷하게 3선에서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라면, 파예와 상송뿐이죠.”

“···젠장. 그렇다고 해도 파예는 안 돼. 왼쪽 윙어는 더 부족하다고.”

그렇다고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고이게 만들 수도 없는 법.

“···그렇다면, 리 이 친구를 한번 테스트해 보자고 하는 건 어떨까요?”

“···리? 그 친구, 피지컬이 약해서 중앙 미드필더로는 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나?”

“그래도 밑져야 본전입니다. 로페즈는 뭐 피지컬이 좋아서 바르샤가 노리고 있습니까? 시야가 넓다고 했으니, 한번 감독에게 말은 넣어 보죠.”

-*-*-*-

2017년 05월 16일.

왼쪽, 오른쪽.

-툭.

이제 그럼 다시 뒤로? 앞으로? 왼쪽? 오른쪽? 어디··· 아 젠장. 늦었다.

-삐익!

“[리, 살짝 느려졌다! 조금 더 빠르게!]”

“Oui(예.)”

후우, 젠장할.

‘오랜만에 중앙 미드필더로 돌아오니 아주 그냥 죽겠네. 하하. 도대체 얼마만이냐 이거.’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거나, 간혹 뛰다가 중앙으로 옮겨간 적은 있지만. 아예 처음부터 여기로 나가겠다고 하고 연습하는 건··· 진짜 한 1년이 넘어가는 것 같은데.

‘하아- 반가운데, 반갑지가 않다. 오랜만에 이 자리 연습하니깐, 아주 죽겠다. 죽겠어···’

고작 연습인데도 정말 너무 할 일이 많다. 젠장.

“Prêts···!(준비!)”

아 젠장, 또 세션 시작이네.

“-partez!(시작!)”

-삐익!

‘그래, 간다 가.’

사실 중앙 미드필더의 움직임이 그리 어렵거나 특별한 건 아니다.

일단 공을 받기 위해서 빈 공간으로 움직이고.

“Lee!”

-뻥.

그리고 이걸 받기 전에, 주변에 누구 있는지 좀 보고.

-툭.

이제 이걸 받고 난 후엔 패스 줄 곳을 다시 한 번 더 슬쩍 보면서 뿌려주고.

-뻥.

이렇게 패스한 다음엔 빈 공간으로 또 움직인다. 이걸 반복하면 된다.

사실 정말 기본적인 Pass & Move인 만큼, 그 어디서든 축구 선수라면 기본적으로 할 줄 알고 또 해야 하는 거지만.

중앙 미드필더를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절대 없다. 왜냐고?

“Lee-!”

-뻥.

‘이걸 경기당 보통 적어도 80~100번은 반복해야 하니까!’

패스 80~100번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온다면, 일반적으로 축구에서 패스가 한 400~600개 정도를 왔다갔다 한다.

즉, 좀 심할 경우 중앙 미드필더 한 명은, 한 팀의 공 5분의 1을 차지한다는 거고. 이는 남들보다 두 배는 머리를 더 열심히 굴려야 한다는 거다.

‘와 시발. 나 옛날엔 중앙 미드필더 어떻게 했던 거지. 정신 없다. 진짜.’

그나마 이것도 내가 풀백이라서 원래도 불 터치가 적은 편은 아니었기에 어떻게 어떻게 이어가고 있긴 했는데.

-삐이익-!

“[리, 이번에도 오른쪽만 보는군! 왼쪽도! 왼쪽도 봐라! 다시!]”

“···Oui!”

이번엔, 풀백에서 뛰면서 생겨버린 습관이 문제였다.

‘하아, 젠장. 나도 어느새 풀백에 뇌가 절여졌구나, 옛날보다 왼쪽으로 고개를 덜 돌리네.’

왼쪽 풀백에 완전히 적응했는지 상대방 골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개를 180도에 가깝게 돌리던 옛날과는 달리, 훨씬 각이 좁아져 있었다.

‘씁, 이건 고치기도 힘든데, 왼쪽 풀백 할 때는 오히려 이득인 습관이니.’

사실상 내 본업은 이제 왼쪽 풀백이다. 본업을 버리고 부업에 집중하다가 본업이 망하면? 그거야말로 본말전도다.

‘···휴우, 어렵다. 어려워.’

-삐이익!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아 예, 알겠습니다. 젠장. 분부대로 합죠.

‘휴- 확실히 적응되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네.’

뭐, 그래도.

“[포제션 체인지! 수비 상황으로 바꾼다!]”

아예 나빠진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 여기다.’

-퍽.

“Damn(젠장!)”

오케이, 막았다.

‘수비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긴 했네.’

옛날과는 달리, 수비할 때 그냥 열심히 뛰어댕기다가 어이없는 태클이나 바디 체킹을 하는 게 아니라.

이젠 정확히 필요할 때 반칙을 저질러서 역습을 끊어버리거나, 애초에 뒷공간을 커버할 줄도 알게 됐다.

‘풀백하고 연계하는 것도, 엄청 능숙해졌고 말이지.’

내가 풀백이라면 어떤 움직임을 원할지. 그리고, 내가 저 달려오는 공격수들을 상대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풀백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기에.

-촤아악.

“bien joué!(좋았어!)”

정말 옛날 그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하던 수비가 아니라.

제대로 팀에 도움이 되는 수비를 할 수가 있었다.

‘스타일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옛날엔 그냥 볼 뿌리는 느낌이었는데. 조금 더 수비쪽에 능숙해졌다.

‘···이게 저 감독님이 원하는 스타일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풀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하기엔, 이 정도가 딱 적당해 보인다.

맘에 안 들면?

“[그럼 다시! 세션 시작!]”

“Oui!”

그냥 풀백 가면 되지 뭐.

어차피 서브 포지션인데 가볍게, 가볍게 생각하자고.

-*-*-*-

2017년 05월 19일

“허어.”

-철썩.

-[나이-스으! 하하, 드디어 고개 다시 돌아간다. 젠장.]

-뭐라는 거야? 프랑스어 써, 리! 한국말 쓰지 말고!

“웃기는 놈이군, 설마설마 했는데 고작 사흘 연습해 놓고 중앙 미드필더에서도 그럭저럭 녹아든 모습을 보이다니.”

물론, 아직 로페즈에 비하면 패스 과정에선 실수가 좀 있긴 했다.

사실 고작 사흘 연습해놓고 로페즈가 뿌려주는 패스를 완벽하게 대체 가능하다면 저 친구가 바르셀로나에 있어야지.

그렇지만- 저 선수는 다른 방식으로 팀에 더 기여가 가능했다.

-퍽.

“반칙으로 끊어내야 할 때를, 아주 잘 아는군? 아무리 피지컬이 약해도 수비수로 뛴 경험이 있다는 건가.”

사실, 좋은 미드필더라고 해도 열 번에 두 번은 패스를 실패하고,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고 해도 한 번은 패스를 실수한다.

그러니- 패스를 많이 하는 중앙 미드필더에게 있어서 패스 미스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무조건 일어나게 되는 일이란 말이다.

하지만 중앙에서의 실수란, 그 무엇보다 실점 위기로 이어지기 쉬운 무서운 실수다.

그러니 중앙 미드필더는 아무리 볼 전개에 관여하는 선수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수비력이 있는 게 감독이 쓰기 편한데.

‘로페즈를 패스 쪽에서 살짝 다운그레이드하고, 수비 쪽에서 살짝 업그레이드하면 저 친구였구만?’

웃기는 일이었다. 오히려 중앙 미드필더로서 더 써먹기 편한 선수가 저 선수였다니.

“봉파르, 수정할 것 없이 선발 명단 그대로 확정지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스카우트 팀과 희의를 하려고 하던 감독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저 친구, 이번 바스티아전에 나가면 첫 홈 경기인가? 어쩌다 보니, 원정 경기에만 기용하게 됐었군.’

뭐, 압박감 주는 방식으로는 최상이라는 소리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다. 4위 결정전이니.

‘한 5만 명은 넘게 오겠지.’

첫 중앙 미드필더 선발에.

오렌지 벨로드롬의 압박감을 견뎌낼 수 있다면-

‘내년, 스쿼드 짜기 정말 편해지겠군.’

과연 저 친구가, 이번에도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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