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67)

jeu dénué de sens (4)

나의 가장 큰 무기라고 한다면 뭘까.

머리? 크로스? 그것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이고,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는 재능이 하나 있다.

바로, 스피드다.

내가 첫 시즌부터 꽤나 많은 기회를 받고 빠르게 풀백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그리고 K리그 클래식에서 정상급 풀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솔직히 내 스피드가 K리그 최정상급이라는 것이 정말 컸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에 와서는 지금까지 이 스피드를 거의 보여줄 일이 없었다.

‘아마 오버래핑을 리그앙에선··· 딱 한 번 했었지? 릴 전에서.’

뭐, 이유를 따지자면 할 말이야 많았다. 처음에 데뷔하자마자 뜨거운 압박을 맛봐버렸는데도 K리그애서 하던 것처럼 앞으로 공격적으로 나가기가 어디 쉽나?

‘게다가 팀 전술이 오른쪽 측면이 자주 나가는 쪽으로 되어 있으니 더더욱 자제해야 했고.’

원래 기본적으로 풀백 중 한 명이 공격을 나가면, 상대방이 텐 백을 쓰면서 걸어잠그지 않는 이상에야 한 명은 비교적 덜 나가는 게 상식이다. 수비진에 2명만 남아있으면 역습을 방어하기가 힘드니까.

이런 점들이 겹쳐져서 자연스레 내 주 활동구역은 하프라인 아래쪽이었다.

‘아마 그래서 가르시아 감독이 나에게 롱 볼 관련하여 자료들을 주고 공부하라고 한 거겠지.’

오버래핑을 통한 적극적인 가담을 하는 선수는 이미 오른쪽에 있으니 뒤쪽에서 턱턱 크로스를 뿌려주는 풀백이 팀에 더 필요하기도 했고,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그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뭐, 실제로도 3도움이나 했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내 얼굴에 자연스레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적게 출전하고 3도움이라면 정말 좋은 스탯이고, 불만을 가질 이유따윈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 원래 내 스타일은 아니야.’

그래, 그건 내가 선호하는 플레이가 아니었다.

나는 원래 K리그 클래식에 올라가고 나서 K리그 풀백 중에서 최다 공격포인트 쌓던 놈이란 말이다.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공격형 풀백이었지, 수비형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전환하고 첫 시즌에는 수비가 불안해서 뒤에서 짱 박혀서 크로스를 올릴 때도 꽤 있었지만··· 수비가 조금씩 안정화되면서 나는 위로 많이 올라가 있는 상황이 훨씬, 훨씬 더 익숙해졌으니.

결론적으로- 위로 올라가보라는 세르티치의 말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매력적인 선택지라는 거였다.

“{레킥, 후보찬한테 내 쪽이 조금 더 올라갈거라고 말해줘.}”

“Okay.”

게다가 이렇게 공격진이 영 활약을 못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풀백이 위로 올라가서 공격진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고기도 하고 말이다.

‘뭐, 물론 내가 평범하게 올라간다고 해서 뭐 바로 뾰족한 수가 생기진 않겠지.’

당장 페널티박스 안이 저렇게 빽빽하고, 저기에서 크로스를 받아줄 듬직한 스트라이커도 없는 상황인데 풀백이 측면을 좀 더 뚫는다고 해서 뭐 크게 달라지겠는가.

그러니-

“[앙귀사!]”

“[?]”

“[좀 더 중앙에서 짧은 패스에만 집중해!]”

조금 평범하지 않게, 중앙을 노려야 한다.

‘하프 스페이스(Half-space)에서 한번 놀아보자고.’

-*-*-*-

기본적으로 축구장에서 선수들의 포지션을 높이에 따라서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이 세 가지로 나누듯이. 세로로 필드를 나눌 때도 세 가지로 나누는 게 일반적이다.

왼쪽 측면, 중앙, 오른쪽 측면.

아주 직관적이고,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은 선수들의 포지션 높이에 대해서 기존의 3등분으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세세하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미드필더라고 해서 다 똑같은 미드필더가 아니라 어느 위치에 있냐에 따라 공격형, 중앙, 수비형으로 나누고, 공격수도 측면에 있으면 ‘윙포워드’, 중앙에 있으면 ‘최전방 스트라이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에 발을 맞추듯 00년대 들어 포메이션도 4-4-2와 같은 선수를 3등분으로 나타내는 포메이션보단 4-1-4-1, 4-2-3-1, 4-3-1-2와 같은 식으로 세세하게 나누는 표현을 하는 게 일반적인 시대가 찾아오자.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유럽의 몇몇 전술가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필드가 선수의 높이에 따라서는 이렇게 세세하게 나누어졌는데, 세로로도 여러 등분으로 나누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필드를 3등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필드를 5분할해 봤고.

그 중에서 2번과 4번같이. 측면이기엔 중앙이고, 중앙이라기엔 측면에 가까운 이 애매한 공간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하프-스페이스(Half-Space)라고.

[아, 역습을 막아냅니다! 그리고···]

-뻥.

[왼쪽으로 볼이 연결되는군요. 리. 또 다시 돌파를 시도합니다!]

[후반전 들어서면서 이 선수, 위로도 아주 자주 올라가는군요!]

나는 오늘만큼은 측면이 아니라, 이 공간도 파볼 생각이었다.

‘측면보다는, 여기가 영향력이 더 높으니까 말이지.’

중앙에 가까운 공간일수록 축구에서 영향력이 더 큰 건 상식이니까.

그리고- 한 가지 경우엔, 조금 더 확실한 장점이 있다.

[아, 그런데 선수들 나오질 않고 있네요?]

예쓰!

‘역시, 저 쪽도 수비진이 발을 많이 맞춰본 상태가 아니야!’

공무원이 민원이 들어왔을 때 자기 일인지 아닌지 애매하면 다른 부서로 넘기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수비수들은 자신이 수비하는 공간인지 아닌지 애매한 곳으로 볼이 다가오면 반응속도가 느리다.

내가 수비해야 하는 공간인지, 옆에 있는 사람이 수비해야 하는 공간인지 판단을 잘못하면 자신의 공간을 내준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때문에 적이 하프스페이스로 파고들 경우, 서로 어떻게 수비할지를 미리 상세하게 맞춰둬야 하는데, 저 쪽의 조합이 그리 자주 발을 맞추지 않은 상황이라면?

하물며, 그게 윙포워드가 이 공간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

풀백이 침범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라면?

[나와야 합니다! 나와야죠! 저기는 가만히 비워두면 위험합니다!]

당연히 수비진의 반응속도가 느리다.

[아, 들은 걸까요? 바로 두 명이 나오는군요!]

그리고 공무원의 민원 처리는 뒤늦게나마 적극적으로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시간을 투자해 주면 해결이 가능하지만.

‘핫, 두 명이 동시에 나오네.’

축구는, 과잉진압 따윈 절대로 좋지 않다. 제한된 11명이 하는 축구에서, 한 선수의 움직임을 과민하게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에게 공간이 생긴다는 소리고.

-뻥.

[아! 카벨라! 카벨라가 어느새 중앙에!]

[카벨라! 은지! 은지 슛-!]

그게 페널티박스 안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철썩.

“이야-하! 나이스, 은지!”

역시 토트넘에서 망했다고는 하지만, 괜히 EPL까지 갔던 건 아니구만?

공간 나오니 골 결정력은 있네. 만세!

-*-*-*-

-삑! 삑! 삐이익-!

[아! 이런, 보르도도 끈질기네요! 기어이 득점을 만들어냅니다!]

[왼쪽에서 풀리지 않으니, 오른쪽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게 잘 먹혔군요!]

***

[seconde mi-temps 44]

Bordeaux 1 : 1 Marseille

[Buts]

Bordeaux : Rolán(89)

Marseille : N'Jie(60)

***

[이거 가르시아 감독 입장에서는 정말 화나는 상황이겠는데요?]

[그렇죠, 승점 3점을 가져갈 기회였는데, 역습 한 번에 확 쪼그라든 상황 아닙니까.]

그러나 해설들의 말과는 달리 가르시아 감독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고.

‘흠. 실점했군.’

딱 이 정도 감상이었다.

어차피 이번 경기는 선수들에게 딱히 이기는 것을 기대하고 기용한 것이 아니고, 표본을 만드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흠··· 어디 보자. 실점 과정이···’

그렇게 이번의 실점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조용히 떠올린 가르시아 감독은, 펜을 들고 선발 명단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

GK : Florian Escales

RB : Tomas Hubocan

CB : Dória

CB : Karim Rekik

LB : Jun Hyuk Lee

MF : Frank Anguissa

MF : Maxime López

MF : Grégory Sertic

LW : Rémy Cabella

RW : Bouna Sarr

FW : Clinton N'Jie

***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짤막한 평가를 적어내렸다.

GK : Florian Escales - inutile(쓸모없음)

RB : Tomas Hubocan - inutile

‘뭐, 골키퍼는 어차피 3옵션이니 큰 문제 없지만, 라이트백은 새로운 백업을 좀 알아봐야겠군.’

그랬다. 이번 경기는 사실상 테스트에 가까웠다.

이번 해 후보였거나, 후보로 밀려난 선수들이 다음 시즌에도 이 마르세유라는 팀과 함께할 선수인지.

그리고 다음 시즌, 마르세유를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영입해야 하는 포지션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알아보는.

소위 살생부를 만들기 위한 경기였단 말이다.

그리고 오늘의 경기는, 그 관점에서 보면 꽤나 만족스러운 경기였다.

1대 1로 나름 팽팽했으니. 선수들의 약점도 강점도 정말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도리아는 성장이 멈춰버렸고, 레킥은 성장하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주전 센터백까지 자라날거라는 생각은 안 들고··· 흠.’

그렇게 위에서부터 선수들의 이름 옆에 짤막하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가르시아는

LB : Jun Hyuk Lee

이 쪽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저 친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물론,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저 선수는 명확하게 자신의 내년 플랜에 명확하게 들어가 있었다.

뭔가를 가르쳐 줘도 돌아서는 순간 까먹는 금붕어 같은 선수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몇 가지 자료들을 가르쳐주자마자 바로 나아지는 모습을 보인. 코칭이 가능한 선수를 왜 버리겠는가.

다만-

‘정확한 평가를 하기가 어려우니, 그게 참 골치로군.’

그게 문제였다. 조직의 수장이라면 부하의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그에 알맞은 업무를 주는 것이 필수적인 것처럼.

팀을 이끄는 감독이라면 선수의 능력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어떤 선수를 처분하고, 처분하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고. 또 선수들에게 알맞은 역할(role)을 줄지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 친구는, 도대체 어떤 평가를 해야할지가 너무 난해했다.

가르시아는, 저 선수를 팀에 부족한 크로스 옵션을 추가해줄 괜찮은 선수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수비시에 인버티드 풀백의 움직임을 가져가다니. 이건 내가 팀 작전으로 연습시키거나 한 적이 없는데.’

인버티드 풀백은, 사실 가르시아는 별로 좋아하는 전술은 아니었다. 풀백이 그렇게 행동할 경우엔 측면이 빌 수밖에 없고. 이는 자칫하면 밸런스의 파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브로도의 전술은, 누가 봐도 젊고 빠른 선수들을 내세워 역습하는 전술이었고.

그걸 막아내기 위해서 풀백이 중앙으로 들어오는 건 수비형 미드필더와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는 아주 좋은 작전이었으니.

‘게다가 수비진 분열을 노리고 하프 스페이스를 파고든 건···’

공격적인 재능이, 꽤나 넘쳐나다는 소리기도 했다.

‘···판단하기가 힘들군.’

그래서- 가르시아는. 어차피 다음 시즌도 같이 갈 이 선수에 대해서는 평가를 생략했다.

‘뭐, 내년에 데려가지 않을 선수가 아니고, 아직 확인할 것도 남아 있으니까 급할 필요는 없지.’

그래, 아직 확인할 게 하나 남아 있었다.

다음 경기는 바스티아전.

정말로 약하디 약하며, 압박 강도도 낮은 팀.

“그런 팀과의 경기에서 하나 확인할 게 남아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가르시아 감독은 다음 경기 명단표의 초안을 꺼내들었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MF : Jun Hyu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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