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ébut (2)
2017년 03월 04일
“와아. 미친.”
내가 미친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놀랐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였다.
‘말이 안 나오네. 또 원정에 비행기 타? 그것도 전세기로?’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뭐 제주도 원정이 아니고서야 비행기를 탈 일이 없다. 왜냐하면 KTX나 버스 타면 보통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4시간 안으로 도착하니까. 경기 당일 출발해도 충분하단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에 와 보니, 여기는 오히려 비행기를 안 타는 원정이 더 드문 것 같다. 당장 메츠, 아니 메스인가? 하여튼 사람들 발음하는 걸 보면 메스가 더 맞는 발음인 Metz. 그 도시로의 원정을 갈 때도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했고.
지난번 낭트(Nantes) 원정 때도 비행기를 타고 갔다고 했으니.
‘그럼 버스는 거의 이용 안 하는 건가? 돈 아끼려면 버스가 좋을 텐데.’
뭐, 물론 그러면 선수 입장에서야 좋지만···
솔직히, 프랑스 클럽들이 K리그 구단보다 돈 많다고는 해도 에이전트님한테 에이전트비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아직도 안 주고 있다는 걸 보면 돈 안 아끼는 건 또 아닐텐데?
“뭐··· 하여튼, 대단하네. 진짜 대단하다. 돈 엄청 쓰네.”
그렇게 좌석에 앉아서 중얼거리자.
“Uh? Lee. que veux-tu dire?”
또 말이 걸려왔다. 젠장. 뭔 소리냐고 하는 거 맞지? 이걸 프랑스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가장 짧게 할 수 있는 방법이···
“juste surpris(그냥 놀란거야.)”
휴, 좋아. 완벽했-
“Hmm? Pourquoi es-tu surpris?”
아니, 왜 놀랐는지를 꼬치꼬치 설명하라고 들어 얌마! 그냥 좀 넘어가줘! 내가 그런 말을 어떻게 프랑스어로 설명해!
{음, 프랑스어론 힘든거야? 그럼 영어로 해.}
···고맙긴 한데, 이건 영어로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은데? 나는 전세기란 단어가 영어로 어떤 단어인지 모른다고.
‘하아-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자. 전세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좋아. 대충 막 써 보자.
“That airplane whole rent make me surprise.”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영어지만! 대충 비슷하긴 하겠지. 자, 잘 알아들어 줘라. 부디···
{···어, 뭔 소리야?}
···젠장. 표정 보니 알겠다. 못 알아들었어. 어떻게 말해야···
{펠레, 그거 그냥 전세기가 놀랍다고 말하는 걸 꺼예요.}
오.
{아, 그래? 아시아는 안 그래?}
{우리나라나 한국은 프랑스보다 작아서, 이렇게까지 자주 비행기를 타지는 않거든요. 매번 전세기를 빌리지도 않고.}
오, 오. 대충 들어 보니깐 잘 해결되는 거 같은데. 그리고 지식도 늘었다.
‘전세기가 chartered plane이구나.’
음음 좋아. 외워두자.
{음. 좋아, 이해했어.} [그럼 비행기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친구.]
[어, 어 고마워요.]
하아- 다행이다.
{그 말 맞지?}
“하- 응, 고마워. 아니 ありがとう. 사카이.”
{하하, 아니야. 괜찮아. 나도 유럽에 오니깐 이게 좀 신기하게 느껴졌거든. 한 버스로 4시간 이상 걸리면 전세기를 사용하는 게.}
···잠깐, 뭔가 말이 이상한데.
{그럼 그 안으로 끊는 곳이 몇 곳이나 돼?}
{한 대여섯 구단?}
하. 20개 구단 중에서, 아니 우리 구단만 빼고 19개 구단 중에서 6개 구단만 빼고는 전부 비행기를 탄다.. 라.
‘프랑스도 은근 겁나 넓구나? 서울 부산의 원정거리보다 먼 곳이 1/3도 안 되다니.’
뭐 미국 메이저리그처럼 원정경기 할 때마다 매일 비행기 타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원정경기의 2/3는 비행기를 탄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전세기를 쓰는 거구나.’
그게 더 싸게 먹히니까. 게다가 유럽 대항전을 노리기라도 한다면 더더욱 신경쓸 수밖에 없겠지.
{고마워, 의문이 풀렸네.}
그렇게 안심하고 비행기 밖으로 경치나 한번 보려고 할 때-
{고맙기는, 그런데 너 통역사 아직 못 구했어?}
쑥 들어오는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몇 명 간신히 찾긴 했는데. 급여가···}
{아···}
그래, 젠장. 계약할 때 구단이 통역사를 전액부담 하는 옵션을 넣지 못해서, 통역사를 구할 경우, 내가 전액 부담해야 했다.
‘뭐 내가 한 연봉 100만 유로 이상씩 받는 선수거나 했으면 통역사 당당하게 제공해달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었으니···’
그래서 저렴한 급여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해 줄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어 능력자에 놀고 있기까지 한 인원?
그걸 찾는 게 쉬울 리가 있나.
{그럼, 당분간은 계속 영어 쓸 생각?}
{아마도.}
{···저기 리, 이렇게 된 거 그냥 나처럼 프랑스어 공부는 조금 줄이고, 나처럼 영어 위주로 써 보는 건 어때?}
···음, 그것도 고려 안 해본 건 아니긴 하다.
솔직히 프랑스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머리 빠개질 것 같거든. 묵음이랑 남성형 여성형 구별 등등이 너무 거지같아.
그리고 숫자는 왜 그렇게 세는 건지도 모르겠고 말이지. 아니 시발, 뭔 숫자 읽는 방법이 60+10, 40*2, 40*20+10 이러는 건데?
{그리고 영어만 능숙하게 써도 충분히 축구 할 수 있어. 다들 뭐, 축구 할 때 right! Left! 못 알아듣는 건 아니잖아? 영어 통역사는 유럽의 어느 구단에서도 항상 고용하고 있고.}
···그리고 이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려고.}
이왕 칼을 뽑은 거, 무라도 베야지.
최소한 B1(일반적인 대화가 가능한 수준)은 따보겠다.
그렇게 말하자.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사카이는 안전벨트를 매고, 익숙하다는 듯 수면안대와 목배게를 꺼내며 빠르게 꿈나라로 빠져들 준비를 마쳤다.
‘···비행기 아직 이륙도 안 했는데 벌써 잠들 생각이냐. 비행기에 엄청 익숙한 모양이네.’
하긴, 저 친구는 일본 국가대표팀의 주전이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도 뛴 선수나까 비행기에 익숙할 수밖에 없겠지.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이 유럽 최상위의 무대를 나보다 4년은 더 빨리, 경기수로는 100경기는 더 많이 경험해본 선수니까.
거기까지 생각에 닿자. 나는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이번 원정, 자네는 선발일세, 45분 제한이긴 할 테지만.]
그 한 마디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M, Merci! Merci beaucoup!”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는 말만을 외치지 않았던가.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연락을 돌리면서 기뻐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들을 접할 때마다. 좀··· 느껴진다.
‘···새삼 이럴 때마다 정말 뼈져리게 느껴지는구나.’
내가 정말로, 정말로 많이 늦었고.
이 유럽에서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수라는 것을 말이다.
‘휴우- 아니다. 이런 생각 해 봤자 도움 안 돼. 상대편 분석 자료나 봐야지.’
···하지만, 자료는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후욱, 후욱.
“으아!”
버피 테스트 끝났다. 만세!
“하아- 이제야 땀 좀 나네. 휴.”
부정적인 생각 있을 때는, 운동으로 날리는 게 최고지, 암. 암. 그렇고 말고.
“휴우- 호텔 방 혼자서 쓰니깐 이게 좋네. 방에서도 운동할 수 있는 거.”
원래 우리나라의 경우엔 엄청 고참이 아니고서야 독방을 쓰는 경우가 없다고 봐야 하기에, 운동하고 싶으면 따로 장소를 찾거나 밖으로 나가서 한바탕 뛰는 건데.
여긴 개인주의가 발달해서 그런가? 아니면 마르세유가 돈이 많아서 그런진 몰라도 전부 독방이었다.
‘뭐, 덕분에 안 나가고도 이렇게 방에서 쿵쿵댈 수 있는 거지.’
층간소음 없는 호텔 만세.
“휴우- 이제 그러면, 다른 운동도 좀 하자, 뭐가 생각 날리게 할 만큼 좋은 운동···”
-띵디디 띵 띠디~♬
어 잠깐. 이거 카톡 벨소린데.
“···뭐야, 왠 보이스톡?”
지금 시간이 저녁 9시니까. 에이전트님이 전화를 거시더라도 카톡을 한 번 보내고 전화거실 텐데. 누구인 거···
***
아버지
***
“아빠?!?”
아니, 뭐야, 이건 또. 지금 한국은 새벽일 텐데?
프랑스에서 7시간 더하면 한국 시간이니까. 지금 한국은 새벽 3시다!
‘···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나니.
“아빠? 아니, 아버지, 이 시간에 뭔 일이에요? 뭔 일 있어요? 뭔 일 있는 거 아니죠?”
나도 모르게 말이 와다다다 나왔다.
“···귀청 떨어지겠다 이 녀석아. 그냥 오늘따라 잠도 안 오고 우리 아들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했다.”
“···새벽 3시에요?”
“뭐, 그러는 날도 있는 거 아니겠냐.”
그런 아버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온 몸에 안도감과 함께 긴장감이 쭉 풀려버리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아- 다행이네요. 전 또 뭔 일 있는 줄 알았다고요.”
그런 내 말에, 아버지는.
“뭔 일은 니가 뭔 일 있겠지.”
갑자기 심장을 푹 찔러오셨다.
“네가 카톡 보낸 거 이제 봤다. 내일 데뷔전 있다며?”
“···아? 예, 하하. 그렇죠.”
“축하한다. 드디어 데뷔하는구나.”
“···하하, 예, 그렇죠.”
그렇게 몇 번 대화를 나누자.
“음, 생각보단 덜 기뻐하는구나? 뭔 일 있는 거냐?”
아버지는 조금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보셨다.
“···아니에요, 별 일 없어요.”
“별 일 없기는, 거짓말 하지 마라. 부모가 자식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식이 부모 속이지는 못해. 바른대로 말해라.”
“······”
하 씨, 젠장. 왜 나는 눈치가 별로 안 좋은데, 왜 아버지는 저렇게 눈치가 빠른 거냐. 나 주워온 자식은 아니겠지.
“···그냥, 이런 거에 기뻐하는 게 너무 보잘것 없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나는 이미 많이 늦었다.
아마도, 내가 세계 최고의 풀백이 된다던가 하는 일은 불가능할 거다.
“···그리고 그런데도, 제가 상대편 선수들을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을 거 같아서요.”
그래, 로리앙.
그들이 리그앙 20위 팀이라고는 하지만. 거기에 있는 선수들을 조금이나마 훑어본 바로는··· 글쎄. 결코 내 아래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선수들이다.
‘···솔직히 전북이나 리에주가 로리앙보다 앞선다고 말하기는 힘드니까. 앞서봤자 많이 앞서는 정도도 아니고.’
그게 리그앙이다.
비록 최상위 4개 리그에 비해서는 실력이 확연하게 떨어지는 게 사실이고. 그렇기에 EPL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수준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래도 유럽 빅리그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리그이기에. 직접 경험해보는 내 입장에서는··· 정말, 대단한 친구들만이 가득한 그런 리그.
“그런 감정이 겹쳐지니까, 그냥 좀 허탈해지더라고요.”
“······”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운동하면서 많이 날렸거든요. 내일 경기 별로 문제 없을 거예요, 하하.”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는.
“준혁아. 바보같은 소리하지 마라.”
한 마디를 던지셨다.
“어러니 저러니 해도, 너를 데려가고 싶다고 맨 처음부터 말한 클럽이 마르세유 아니냐.”
“···그렇죠.”
“그럼, 그 마르세유가 널 뭘 보고 영입했을 것 같느냐?”
그 순간, 정말 이제는 오래되어 기억 뒤편에 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재능, 자네는 재능이 있네.
“실력이다. 네가 그 친구들만큼, 아니 그 이상만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데려간 거야.”
“······”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리고 준혁아. 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거라. 넌 이미 국가대표도 들어가보고, K리그 우승팀에서도 주전으로 뛰어본, 한국 최고의 선수 중 하나야.”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이미 유럽에서 데려가고, 국가대표에서도 뽑은, 한국 최고의 선수 중 하나다. 충분히 유럽에서 살아남을 자격이 있어. 그걸 잊지 말고 당당해져라.”
“······”
“그럼, 끊는다. 기운 내라.”
-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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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리, 좋아, 이 순서대로야. 이대로 나가면 된다.]
“Oui.”(알겠습니다.)
그렇게 경기장으로 나가기 직전, 사카이가 말을 걸어왔고.
{리, 갑자기 엄청 표정이 좋아졌는데. 뭔 일 있었어?}
그 말에, 딱 한 마디를 답변해줬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 아무것도 변화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랑 전화했다고 해서 내가 피지컬이 확 늘어나거나 그런 거는 아니니까.
하지만.
‘자신감이 다시 생겼지.’
그리고, 그거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23번, 남한에서 온- 이- 준 -혀크-!]
자, 드디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