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야 하오 (1)
2016년 12월 15일.
-드르륵.
“오, 우리 준혁이, 왔냐!”
“하하, 예, 조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형님.”
“자, 자, 얘들아, 준혁이 왔다.”
오오, 다들 반가운 얼굴들-
“오오, 이! 준! 혁! 국가대표님! 환영합니다!”
“워어어어!”
···음, 갑자기 안 반가워지네, 동기 형님. 약 빠셨어요?
“어라, 형님, 이상하네요. 국가대표님이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아마 자기 발로 움직여야 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오, 그렇네? 국가대표님, 하나도 움직이실 필요 없습니다. 자자, 가만히 계시면 제가 패딩 벗겨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뇌 속에 있던 언어 필터링이 바로 해제되었다.
“싸랍, 박태준. 손 저리 치웜마. 어디서 감히 XY염색체가 XY염색체가 입고 있는 옷을 벗기려고 드는 거야.”
내가 입고있는 옷을 벗길 수 있는 사람은 XX염색체로 한정되어 있다. 이 녀석아. 난 이성애자라고.
“어허, 끈끈한 전우애가 넘치는 우리 상주 상무 6기 전우끼리 그런 심한 말을 하다니. 우리 준혁이 그라믄 안 돼. 국가대표로서 품위가 있어야지.”
“그래, 그저 나는 순수한 전우애로 너의 옷을 벗겨주려 한 것이란다. 그런데 왜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냐. ···혹시?”
···하, 이런 망할 인간들 같으니. 아무래도 이 쪽도 필살기를 써야겠구만.
대한민국 축구계, 아니 체육계에서 부동의 진리.
“태현 형님, 저기 촌남 놈들이 저 놀려요.”
“그래, 그래. 야, 너희들 너무 준혁이한테 그러지 마라. 얘 운다.”
선배님 방패다. 하하.
“와, 태현 형님, 같은 팀이라고 편드실 필요 없습니다. 얘 속 시커메요.”
“맞아요 형님, 그거 아십니까? 얘 수원 팬인 건 아시죠? 준혁이 얘 서울 가기 전까진 저랑 같이 있을 때는 서울 맨날 북패라고 하고 다녔어요.”
그렇게 과거의 말들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칠 뻔했지만.
“응, 그래도 돼, 괜찮아.”
다행히, 방패는 그대로 굳건했다.
“와, 형님, 너무 오냐오냐 해주는 거 아니에요? 서울 찐 안티였다니까요 쟤?”
“맞아요, 우리 같은 공인들은 멸칭 쓰는 게 별로 안 좋다고 해도 계속 쓰고 다녔는데.”
그도 그럴 것이.
“괜찮아, 수원 상대로 FA컵 뺏어와주는 데 일등 공신 중 하나였는데 뭐.”
그래, 우리는 지난 FA컵 결승전 1차전에서는 1대 2, 2차전에서 2대 0 승리를 따내며.
총합 3대 2로 FA컵 우승컵을 3전 2기 끝에 따냈으니까.
그리고.
“아아, 하긴, 그러고 보니 쟤가 마지막 골 어시스트했죠? 그래서 봐주는 거예요?”
···2차전 두 골 중 한 골은 내가 어시스트 했고 말이다. 에효.
“그래, 우승컵 가져다줬는데 과거에 뭔 말을 했든 무슨 상관이냐. 당연히 이뻐해줘야지. 하하. 자, 여기 앉아라.”
“에엡”
그 덕분에, 태현 형님의 방패는 아주 굳건했다.
‘에휴ㅡ 덕분에 경기 끝나고 나서 내 혈관에 흐르는 푸른 피가 살짝 울적했지···’
그래도 다행이었던 게 있다면.
“아 맞다. 수원 이야기하다가 생각난 건데, 오늘 소식 들었냐? 서정운 감독 경질되었다는 거?”
“그럴 만했죠.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진 데다가 결국 FA컵도 못 따냈잖아요.”
“준혁이 너 슬프겠다? 나름 어린시절 영광을 함께한 선수인데?”
“···아, 아뇨 아무런 감정 없어요.”
그 경기 이후 수원의 서정운 감독이 짤렸다는 거랄까.
‘드디어 가시는구나. 다행이다.’
선수로써는 언제나 환영받았던 레전드시지만, 감독으로서는 솔직히 조금 부족하셔서 욕 나올 때도 많았습니다. 감독님. 이미 살짝 늦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좋은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을 때 빨리 헤어지죠.
“그럼 올해 2관왕 했으니, 우리 오늘 저녁 서울 쪽이 쏘는 거 맞죠?”
“시끄러 임마, 최소한 너희들은 쏴. 너희들도 득 봤잖아.”
그 말에, 동기 형님이 싹 웃으며 말했다.
“암요. 알죠, 이 자리가 왜 열렸는데요. 자, 그럼 건배합시다-!”
“그래, 자, 자, 다들 비어있는 친구들은 한 잔씩만 받고.”
-쪼르륵.
“자 그럼, 우리 FC 서울의 FA컵 우승을, 축하하기. 위하여!”
““위하여!””
그리고, 그 건배사는, 바로 또 이어졌다. 축하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거기에다 전남의 아챔 진출을 축하하기. 위하여!”
““위하여!””
그랬다. K리그 최종전에서 기어이 울산을 꺾고 5위라는 성적을 따내는 데 성공한 전남이 AFC 진출권을 따낸 거였다.
그 밖에도 승격에 성공한 대구라던가, 간신히 잔류에 성공한 성남이라던가.
정말로, 축하할 일들이 가득했다.
“크- 하. 술 맛 좋고! 오늘은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달려보자고!”
“예!”
우리가 모두 잘 풀린 이런 날에 축하하지 않으면 언제 축하를 하겠는가.
“이야- 하여튼 이번 시즌, 다들 축하한다. 우리 상무 동기들 다- 잘 돼서 보기 좋네.”
물론, 예외는 있긴 했지만.
“응? 너희 때문에 형이 형님은 잘 안 풀리지 않았냐?”
그것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에이 형, 그건 아니지, 형이 형은 이제 전북으로 이적했잖아.”
“아, 하긴 그렇네, 그럼 잘 된 거 맞네.”
그랬다. 형이 형님은, 어제부로 울산에서 전북으로 트레이드되었다. 이제 리그뿐만 아니라 FA컵도. 아챔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K리그는 이적 시장에 돌입하게 된 거였다.
“그러고 보니, 태준이 너 부산에서 오퍼 왔다고 들었는데, 갈 거냐?”
“안 가요, 안 가. 제가 왜 부산에 갑니까. 저도 아챔 한번 나가보고 싶거든요? 동기 형이나 수원 가세요.”
“시끄럼마.”
그리고, 이 말은.
“그러고 보니 준혁이 너는 이번 겨울에 바로 나갈 거냐? 이곳저곳 찔러보고 있다고 들었는데.”
“예, 오퍼가 괜찮다 싶으면 망설이지 않고 한번 가 보려고요. 지금 아니면 저도 나이가 있으니까.”
곧, 유럽의 겨울이적시장도 열린다는 소리다.
“이야, 참 이놈 건방진 놈이야, 응? 2부리거따리가 2년 만에 바로 유럽 진출을 입에 담다니, 아주 건방지다니까?”
“그러게, 벌주 좀 마셔야겠지? 자, 5대 5짜리 소맥 비율이다. 마셔라, 마셔라.”
그리고 그 말에, 나도 싱긋 웃으면서.
“예엡!”
쭈우욱- 한 잔 들이켰다.
“크하, 원 샷입니다. 한 잔 더!”
그러자, 선배님들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너 뭐야, 너 이준혁 아니지?”
“그래, 맞아. 이 녀석아. 축하할 일 있을 때 술은 절대 입에도 안 대고 탄산도 제로만 마시던 바른생활 사나이, 범생이 이준혁, 어디 간 거야?”
그 말에, 나는 크게 웃음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니, 시즌도 끝났는데, 한 번쯤은 마셔줘야죠.”
물론, 안 마시는 게 유럽 진출하는 데 쌀 한 톨 만큼이나마 더 도움되긴 할 거다.
그래서 시즌 중에는 저런 걸 절대로 금하는 거고.
하지만- 나는 기계가 아니다. 기뻐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당연히 기뻐하고 싶고, 나도 술 마시고 싶고, 같이 놀고 싶다.
그리고- 올해는 정말이지. 기뻐할 일 투성이였다.
K리그 우승에, FA컵 우승에, 리그 베스트 11에, 국가대표까지 뽑혔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이루고 나서도, 중간에 나 자신에게 작은 상으로 약간의 일탈 하나 주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쌓이고 쌓여서 터져버리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유럽에 가면, 더 이상 이 사람들과 몇 년간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더 힘들고, 더 고되게 나를 채찍질해야-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저도 먹고 뒈져 볼 테니, 쭉쭉 주세요!”
오늘만큼은. 오늘 하루만큼은 먹고 뒈진다!
“···뭔가 이상한 기분인데, 오-케이, 좋아. 그럼 우리 준혁이를 위해서 내가 특별한 폭탄주를 만들어주지. 야, 여기 이온음료 있냐?”
응? 술에 이온음료를?
“그게 뭐예요?”
“···뭐야, 뭔지 모르냐?”
“옙.”
그 순간, 선배님들의 표정이 모두 원상복구됐다.
“···음, 역시 범생이 준혁이네.”
“그래, 바른생활 사나이 맞구만.”
“···저기 형님들, 그 범생이라는 말은 좀 안 해주시면 안 됩니까.”
자고로 피 끓는 남자라면 범생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듣기보단 재미없는 놈을 비하하는 의미로 더 많이 쓰지 않던가. 상남자 중의 상남자들이 되어야하는 운동선수가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수치다.
“저 은근 범생이는 아니라고요. 감독님한테 대들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래, 그래, 그럼 이거 두 병 비우면 범생이라는 말 더 이상 안 해주마.”
“어, 옙.”
···뭐, 괜찮겠지, 나 술 잘 안 마셔서 그렇지 약한 편은 아니니까.
별 일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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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시발.
“오오, 준혁이 얘 진짜 의외로 술 쎄네?”
“그러게, 얼굴 좀 빨개지긴 했는데 아직 평범해 보인다.”
조금만 더 마셨어도, 꽐라 될 뻔했네. 나 좀 취했다.
“태현이 너는 서울에 계속 있을 거야?”
“아니, 나가려고, 제주에서 좋은 제안이 왔어.”
···어, 뭐라굽쇼?
“형도 서울 나가요?”
“그럼, 당연하지. 이제 다시 포백으로 돌아올 기세던데. 그러면 수미인 난 설 자리가 없잖아.”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넌? 넌 어디 알아보고 있냐?”
“글쎄요··· 아직 확정은 안 됐는데요.”
그래도 굳이 꼽자면.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 이 네 곳을 가장 열심히 에이전트가 알아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선수에 있어서 가장 좋은 리그는?
솔직히, 독일 분데스리가다.
파독 광부 시절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미 건너가 있는 나라가 독일이기도 하고.
외국인 선수 규정도 ‘사실상’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리그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도 듣다 보니 규정이 있긴 했지.’
1군 선수단 중 4명의 유스 선수는 15세~21세 사이에 해당 클럽의 유스팀에 속해있어야 하고, 8명의 선수는 15~21세 사이에 3년간 독일 클럽에 속해있던, 속칭 ‘홈 그로운’ 선수여야 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분데스리가가 외국인 선수들에게 가장 열린 리그로 알려지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많이 가는 이유는 일단 EPL처럼 리그에 선수 출전시 이런저런 조건이 주렁주렁 걸리지도 않고.
두 번째는 분데스리가의 저 규정은 사실상 UEFA 대륙컵, 그러니까 챔스나 유로파 대회 규정이랑 똑같다는 점이다.
‘뭐, UEFA룰은 저기에다가 경기 당일 6명의 홈그로운 선수단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까진 포함시켜야 하긴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1군 로스터 숫자 등록이 99명까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막말로 리그만 집중하는 구단이면 저 12명 선수를 그냥 등록해놓고 단 한 경기도 출전 안 시켜도 된다.
그래서 '사실상’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리그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분데스리가는 너무 수준이 높단 말이지···’
냉정하게 말해서, K리그에서 당장 분데스리가로 가서 성공한다?
이건 정말로 쉽지 않다. 솔직히 명백한 1위 리그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라리가와 독일 분데스리가 격차보다. 분데스리가와 이탈리아 세리에A 격차가 조금 더 크다.
그래서, 현재 다른 곳도 알아보고 있는 거였다. 벨기에나. 포르투갈 같이 수준이 비교적 분데스리가보단 낮으면서. 비슷하게 외국인 선수 제한이 없는 리그들 위주로 말이다.
‘뭐, 프랑스는 마르세유 때문에 작전 뿌리기 쉽다고 들어간 거였고.’
“그럼 넌 어디로 가고 싶어?”
어디로 가고 싶느냐···
“뭐··· 솔직히 포르투갈이 가장 끌리던데요.”
어떤 지표로 봐도, 포르투갈 리그 정도면 K리그보단 확실하게 실력이 높기도 하고. 그 정도 리그면 내가 살아남았을 때 유럽에서 나름 뛰어봤다! 고 할 만한 정도는 되니까 말이다.
“게다가 에이전트 쪽에서 그러더라고요, 유럽 나갈 경우 치안 때문에라도 솔직히 포르투갈이 가장 나은 선택일 수가 있다고.”
벨기에는 인종차별 끝판왕이고, 프랑스는 치안이 요즘 나날이 개판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래? 치안이 어느 정돈데?”
“축제 같은 데 가다가 잘못하면 총 맞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헐.”
진짜 유럽, 알면 알수록 개판이다.
-까톡!
응, 뭐지?
-이준혁 선수, 잭팟입니다. 포르투갈 리그에서 두 팀이나 물었어요. 비밀문자로 남길 테니, 다른 사람한텐 보여주진 마시고 알고만 계세요.
오오, 그래? 어느 팀···
-보아비스타와 벤피카에서, 이준혁 선수에게 관심을 표현했습니다.
···어, 미친? 뭐야. 벤피카라고?
포르투갈 리그의 최강팀, 그 벤피카가 나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