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바라던 것 (2)
2016년 10월 30일.
“어, 어? 으와아아아!”
-탁.
와아, 세이프. 아, 안 넘어졌다.
“야,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아니 별 일 아닙니다 형님, 그냥 넘어질 뻔했던 거예요.”
여기 화장실 바닥 왤케 미끄럽냐. 젠장.
“어어, 다행이네, 안 다쳤어?”
“예, 다행히요.”
“그래, 그럼 빨리 나가자. 우리 구단에 도는 소문 알지?”
“하하.. 넵. 들었죠.”
이 구단에는 농담이지만 농담같지 않은 소문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화장실을 조심하라는 말.
-화장실에 절대 오래 있지 마라. 부상당한다.
처음 들을 때는 뭔 말인가 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 하다- 싶긴 했다.
옛날에 훈련장 같이 쓰던 야구단에서 세면대 잡고 팔굽혀펴기 하다가 가을야구 출전 못할 뻔하게 된 야구선수에서부터, 양치질하다가 치약이 눈에 들어가서 경기중에 눈이 안 보여서 교체당한 선수. 화장실 다녀오다 넘어져서 발목 돌아가서 1군 마운드에 그 이후로 돌아가지 못한 선수까지.
그야말로 무슨 마가 끼었는지 화장실에서 부상당한 선수가 잊을만하면 꼭 나왔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게 화장실이니 웬만하면 오래 쓰지는 말라고 했는데.
‘잘못했다간 나도 그 꼬라지 될 뻔 했네.’
진짜 다행이다.
-자자, 모두 모여라! 이제 애들 손 잡고 입장해야 하니까!
그 말과 함께 언제나와 같이 아이들 손을 잡고 입장을 준비하던 도중 처음 보는, 그러나 이름은 많이 들은 사람을 자연스레 마주하게 됐다.
“어, 안녕하세요, 이준혁 씨··· 맞으시죠?”
“어··· 안녕하세요? 정훈 선수?”
정훈.
대학리그 때 한 번인가 상대편으로 만나봤던. 솔직히- 그 때는 서로 통성명도 안 하고 지나갔던 선수.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제주전엔 항상 빠져버려서 제대로 인사한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한 친구.
그래서인지,
“······”
“······”
그렇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나니 서로 어색함의 극치였다.
“저기, 태성이한테 가끔 이야기 들었습니다. 대단하시던데요.”
“아, 아닙니다. 이역만리 동유럽에서 활동하시면서 주전 먹으셨잖아요. 그게 더 대단하신 거죠.”
게다가- 에이전트에게 듣자하니 그 곳에의 활약으로 이탈리아에서도 오퍼가 왔다고 들었다. 아탈란타라는. 세리에 A의 팀에게서 무려 5년 계약을 말이다.
‘비록 중하위권 팀이긴 하지만, 그래도 세리에 A에서 5년 계약을 제시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말이지.’
다만 군대 문제 때문에 철수하고 K리그로 돌아온.
“어··· 고맙다. 말 놓을래?”
“···응, 그러자.”
나와 동갑내기인 선수.
“그, 그럼 좋은 경기 해보자.”
“···그래.”
그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필드에 나가자. 포지션에 따라 움직이던 때 오스마르 주장이 한 마디를 던졌다.
“Hey, 준혁, 왜 그래? 왜 그리 부끄러워 해? 보통 그냥 웃으면서 인사하더니, 왜 그리 이상하게 굴어.”
“그래 맞아. 저 놈 막는 건 나라고, 니가 왜 긴장타냐.”
···뭐, 그렇긴 하지만.
‘···긴장이 안 될 수가 있나.’
“야, 이준혁, 정신 차려라. 너 왜 이렇게 얼빠져 있어?”
“하하, 죄송합니다 선배님, 화장실에서 넘어질 뻔했더니 좀 놀랐었네요.”
그러자, 선배님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뭐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구만, 필드에서도 조심해라-”
굉장히 자비로운 판결을 내려주셨다. 다행히 먹힌 모양이다.
“예, 조심할께요.”
-짝.
그래. 오늘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오늘 경기는 절대로 질 수가 없다.
지면 안 된다.
-저번 여름부터 대표팀에 자네와 정훈, 둘을 두고 한 명을 부르길 고심한 결과, 슬슬 자네가 내정되어 가는 분위기네. 이번 제주전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군.
어젯밤 통화 이후, 이런 메세지를 받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말이지.
***
<2016 K리그 클래식 36Round>
[전반 25분]
제주 UTD 0 : 0 FC 서울
[골]
제주 UTD : (없음)
FC 서울 : (없음)
***
사실 같은 레프트백끼리는 같은 팀에 있는 경쟁상대가 아닌 이상 큰 감정이 들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게. 감정이 생기려면 마주쳐야 하는데, 경기를 하다 보면 측면의 선수들은 반대편 측면의 선수들과 싸우게 되지 같은 편과는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같은 팀에서 주전 경쟁을 하거나 하는 게 아닌 이상. 실제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저 선수를 뛰어넘겠다.
-저 선수를 이겨먹겠다.
싶은 감정이 드는 상대를 꼽자면, 보통 같은 측면에서 노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쪽 측면에서 노는 풀백과 윙어들이다.
직접 마주치고, 또 계속 싸우게 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니까.
그렇지만.
[아, 두 팀 모두 왼쪽을 통해 공격을 풀어나가고 있네요.]
[그럴 수밖에 없죠. 현재 각 팀에서 공격 전개를 할 때 위력적이고 꾸준한 선수가 두 팀 모두 왼쪽에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역시 두 선수 모두 K리그 베스트 11 경쟁자답게.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살짝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스포츠라는 게 기본적으로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는 컨텐츠다 보니 비교를 많이 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 비교를 하는 것이 편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같은 포지션에 위치한 선수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저는 저 두 선수 중 한 명 정도는 국가대표에 뽑힐 만 하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둘 다 안 뽑히고 있으니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왜 안 뽑히는 걸까요? 솔직히 저 두 선수만큼 올해 K리그에서 기복 없이 좋은 활약을 보이는 선수가 없는데 말이죠.]
-ㄹㅇ ㅋㅋ 솔직히 맞말이다.
-해설자 훈철이랑 이기제는 왜 뺌?
-ㅄ아 훈철은 올해 부상당하고 이제야 폼 끌어올리고 있고 이기제는 기복이 심하잖아.
[그러게 말이죠. 슈틸리케 감독이 작년 무명의 이정현 선수를 발탁하면서 큰 성공을 거뒀던 것처럼, 이 두 선수 중 한 명 정도는 이번 평가전에 발탁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아 ㄹㅇ? 벌써 또 국대 시즌 돌아옴?
-ㅇㅇ 캐나다랑 우즈벡이랑 함.
[게다가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저는 저 두 선수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토리가 있더라고요.]
[어떤 스토리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둘 다 순탄한 길을 걸어온 엘리트가 아니라는 거죠.]
-? 뭔 소리야 정훈 쟤는 군대 때문에 K리그 온 거지 원래 크로아티아 국대 얘기까지 나온 놈이라메
-어 ㄹㅇ임?
-ㅇㅇ 귀화요청 받았다던데?
-ㅁㅊ 그럼 한국선수랑 모드리치랑 같이 뛰는 거 볼 수 있었던거 아님?
-그거 짭이라던데?
-짭은 아닐껄?
[제가 알기로, 저 두 선수는 모두 풀백이었던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한 명은 윙어였고, 한 명은 중앙 미드필더였죠.]
-에이 그 정도 가지고 뭔 ㅆㅂ
-그러게 풀백은 원래 그런 곳이자나 차두리도 윙어였다가 풀백으로 포변했구만.
[그리고 둘 다 K리그 챌린지에서조차 외면받았던 선수입니다.]
-???
-ㄹㅇ? 친정 울산이라고 들었는데?
[아, 그런가요?]
[얘, 최근 들은 사실인데, 정훈 선수는 충주 험멜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었다고 합니다. 이준혁 선수는 고양에서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죠.]
-아 ㅆㅂㅋㅋㅋㅋㅋ
↳왜 웃음? 그럴수도 있지
↳아니 둘다 챌린지에서 막하막하인 놈들이거든ㅋㅋ 한놈은 작년 꼴찌고 한 놈은 올해 꼴찌인 팀이잖앜ㅋㅋ
[그리고, 둘 다 기회를 받고 나자, 자신들의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한 선수들이죠. 사실 이런 선수들이야말로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이런 게 스포츠의 묘미거든요.]
엄청나게 안 좋은 평가를 받고.
엄청나게 쓸모없어졌다고 평가받던 선수라고 해도.
우연한 ‘기회’ 한 번으로 인생이 180도 달라지기도 하는 그런 곳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반전이 일어나는 곳.
[그게 스포츠니까요.]
그렇지만- 스포츠란 세계에서.
결국 승자와 패자는 나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베스트 11에 오를 수 있는 사람도 단 한 명 뿐이고.
결국- 국가대표란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도.
단 한 명만이 뽑힌다.
[과연 이 미생에서 완생이 되어가는 둘 중에서 누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까요!]
-*-*-*-
-티잉-!
‘와 시발, 위험했다.’
진짜 잘못하면 선제골 먹힐 뻔했다.
“광민이! 닥치고 달려들어! 크로스 줄 공간 주지 마! 체력전 가라고! 체력 넘치잖아!”
“···알겠어요 형님!”
그 국가대표이신 태휘 형님이 저렇게 긴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성공 확률이 낮디 낮은 크로스가. 위협적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저 선수가 볼을 잡을 때마다 긴장해야 했고.
[박주영 선수도 열심히 수비가담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죠, 제주의 공격 중 많은 부분이 저 선수의 발끝에서 시작되거든요! 잘 막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그 쪽의 선수들이 수비가담을 해 줬다.
“야! 광민아! 바로 잡아! 끊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풀백이라는 포지션에 대해서 아직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현대 축구에서 풀백이 경기를 지배한다는 말도 믿지 않았고 말이다.
물론 현대 축구에서 풀백의 영향력이 커져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크로스를 제대로 날리고 드리블도 괜찮은 풀백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내가 알 리가 있나. 내가 당해보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야! 막아-!”
지금 보니, 꽤나 위력적이었다.
왜 저 선수가 베스트 11에 거론되고 있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아, 이준혁 선수가 볼을 잡으니 곽해성 선수, 바로 달라붙습니다!]
[당연하죠.본인들이 정훈 선수를 통해 공격 전개를 하는 게 주 공격 루트인 만큼, 이준혁 선수를 놔두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나에게 달라붙은 수비들도,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게, 스피드, 그리고 크로스지.’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내가 키가 더 작고 공중볼에서 많이 부족한 편임에도 나를 조금 더 우위로 놓는 사람들이 많게 만든 요소였다.
최소한, 공격에서는 내가 더 위력적이라고 평가받았다.
‘···나를 상대할 때 다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던 감정을 느꼈던 건가?’
저것보다도 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국가대표를 뽑는 경기라고 생각해서 긴장했던 몸은 풀리고.
[이준혁 선수, 돌파를 시도합니다!]
[아, 깔끔하게 벗겨 버립니다! 아주 시원한 돌파였어요!]
그저 자신감만이 넘쳐흘렀다.
나의 적들이 보여주는 저 반응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서 달콤한 각성제요, 기분 좋은 일이었고.
어느덧 국가대표라는 자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는 소리이기도 했으니까.
-삑! 삑! 삐이이익-!
[서울 FC의 득점입니다! 득점의 주인공은- 아드리아누! 후반기 들어서 조금 주춤했던 아드리아누가 최근 들어 다시 물 오른 득점력을 뽐내고 있습니다!]
“나이스!”
-짝.
“나이스으-! 2년 연속 득점왕 가보자! 아드리아누!”
“준! 고맙다! 어시스트 고맙다!”
그리고 그 박수를 치고 돌아서자. 더 이상 떨리지가 않았다. 저번처럼 국가대표 명단이 나오려고 들 때마다 하늘에게 빌고, 불안했던 나날이 거짓말 같게도 말이다.
‘···하하, 사람 마음가짐이란 게 참 중요하구나.’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면··· 설령 뽑히지 않더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뽑힌다면 더 좋겠지만···’
그 때처럼, 하늘에게 빌거나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내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국가대표라는 자리도.
‘그렇게 멀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그러니, 그저 지금은- 우리의 우승만을.
남은 2경기를 전승하는 것만을 생각하자.
“자! 자! 이제 진형 갖추죠! 골 더 넣고 전북 득점에서 눌러 버리자고요!”
단 한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
<2016 K리그 클래식 36Round>
[경기 결과]
제주 UTD 0 : 2 FC 서울
[골]
제주 UTD : (없음)
FC 서울 : 아드리아노(34), 윤일록(71)
***
<슈틸리케 감독, 캐나다-우즈벡전 선수명단 발표>
입력 2016.10.31 10:10
금일 울리 슈킬리케 축구대표팀 감독은 다음달 11일 캐나다와의 평가전과 15일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5차전 우즈베키스탄전에 나설 25명의 대표선수 명단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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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호 대표팀 명단
FW : 황의찬, 이정현, 김신욱
MF : 한국형 기성룡, 정영우, 김보겸, 남희태, 이청룡, 구지철, 손흥빈, 이제성, 지동언
DF : 김기휘, 곽태휘, 홍정오, 장연수, 김창수, 최철순, 이준혁, 윤석영, 훈철
GK : 김진연 권태순 김승구
***
위 25인은 모두 8일 오후 파주 NFC에 소집되어 11일 천안에서, 15일 서울에서 경기를 치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