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3)
2016년 09월 12일
“야, 준혁아.”
“넵, 형님.”
“넌 왜 마지막 모임에 고작 참깨라면에 닭가슴살 하나 넣고 끝내려고 하냐? 태준이처럼 좀 화려하게 사먹지.”
···선배님, 저라고 간짬뽕+공화춘에 참치캔과 햄을 곁들인 그 환상적인 조합을 모르겠습니까. 저도 먹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나가자마자 계약해야 하니까요, 관리 좀 해야죠.”
그건 초대형 칼로리 폭탄이잖아요 형님. 계약이 코앞인데, 최대한 트집잡힐 건 피해야죠.
“아, 그렇긴 하지. 참.”
“예, 저희가 경기를 뛰기라도 하면 괜찮겠지만, 저희 지금 2주 넘게 쉬었잖아요.”
그래, 28일 이후로 13일 오늘까지, 우리는 K리그 2경기 정도를 안 뛰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자면, 우리는 한 3키로 정도는 살을 빼게 만들 운동을 두 번 걸렀다는 소리기도 하다.
“그리고 또 저희 훈련량도 줄었고요.”
게다가 이제 더 이상 상주 상무 선수가 아니니까 팀 단체 훈련, 그 중에서도 특히 전술 훈련은 아예 참가하지 않다 보니 훈련량까지 줄은 상태니. 솔직히 먹는 게 정말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물론 그걸 감안해서 개인 운동을 조금 늘리기는 했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훈련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장 시즌 중의 개인 운동 중에서 알아서 늘릴 수 있는 운동이래봤자 저중량 고반복 운동뿐인데 이건 운동량을 조금 늘려봤자 칼로리 소모가 쥐뿔만큼밖에 안 오른다.
“그러니 조절해야죠.”
그런 내 말에, 동기 선배님은 조금 웃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에이, 얌마, 너 너무 빡빡하게 사는 거 아냐? 솔직히, 이제 우리 이 지긋지긋한 군대도 내일이면 떠나고, 두둑하게 재계약 제안도 받았는데 이 정도는 기뻐할 수 있잖아?”
···뭐, 그 저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긴 하네.
‘하긴 당장 그런 고액 연봉계약 제안을 듣고 저 정도도 기뻐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긴 하지.’
전남에서 동기 형님은 내년 연봉을 무려 4억 보장에, 태준이는 3억 5천을 보장하는 계약을 안겨주고 2년을 더 연장하는 계약을 제안했다고 했다.
물론 K리그의 연봉 계약은 한 번 계약하면 계약 기간동안 연봉이 유지되는 게 아니라 매년 다시 연봉을 다시 협상하는, 유럽보다는 국내 프로야구와 비슷한 연봉 체계지만.
야구선수들이 그렇듯이 저렇게 한 번 고액 연봉을 받고 나면 나중에 좀 못하더라도 올라간 연봉이 웬만하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동일해서. 어쨌든 기뻐할 일인 건 맞다.
게다가 공격수는 출전 수당이랑 승리 수당 외엔 거의 옵션이 없는 수비수에 비해 훨씬 인센티브도 많다는 걸 생각하면···
저 사람들 연봉은 올해처럼 10골 넣을 시 6억? 그 수준까지 갈 수도 있다는 거다. 거기에 플러스로 전역까지 겹치니, 당연히 저 반응이 정상적이다.
“그러니깐, 솔직히 좀 더 가져와서 먹자, 다른 사람들은 다 뭔가 잔뜩 가져와서 먹는데 너만 너무 빈약해. 건강 걱정이면 마지막 날인데 술도 없는 걸로 충분하지.”
오히려 그런 기쁨에도 불구하고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지 않고 간단하게 푸짐하게 먹는 것 정도로 이 기쁨을 표현하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자제심인 거다.
‘···흠 어쩐다. 나도 뭐 하나 더 들고 올까?’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옆에 있던 태준이가 말해왔다.
“형님, 그냥 냅둬요, 얜 수도승이 따로 없는 놈이에요.”
“뭔 소리야, 나도 사람이거든?”
당장 시즌 중에 내가 아이스크림 먹는 걸 몇 번이나 본 놈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냐.
“아냐, 너 미친 놈 맞아.”
“···왜, 민초 좋아해서?”
억울하다. 민초가 얼마나 맛있고 사랑스러운 맛인데! 어찌하여 세상은 이리 민초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들로 가득하단 말인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 민초가 그 무엇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
“그게 아니라, 넌 아이스크림 한 입만 먹겠다고 하면 딱 한 입만 먹고 버려 버리잖아.”
“···? 그게 왜 문제야?”
아니,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아이스크림은 설탕 범벅에 지방 덩어리 범벅인데 먹더라도 한 입 먹고 딱 끝내야지.
“거 봐요 선배님, 얜 이런다니까요?”
“···미친, 진짜 한 숟가락만 먹고 버려 버린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아까워서라도 일단 산 건 다 먹게 되지 않나?”
“···니가 왜 수도승이라고 하는지 알겠다. 부처가 따로 없네.”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야.
“저 정도면 정상인이죠. 수도승 소리는 선수생활 하는 동안 탄산, 술, 설탕 평생 피하는 사람한테나 붙여요.”
“야, 그런 놈이 어디 있어? 그런 건 환상 속 유니콘 같은 놈들이지.”
“아니 있긴 있어요, 예를 들어···”
예를 들면··· 아 씹, 생각해 보니 이거 다 지키는 사람 내가 알기론 호날두밖에 없네? 근데 그 인간은 수도승이라기엔 성격이 완전 애새끼 중의 애새끼라서 예시로 들기도 뭐하다.
“그래, 생각해 보니 없지?”
“···예예.”
그래, 그냥 수도승 소리 듣자. 뭐 나쁜 의미도 아니잖아. 식단 관리 잘 한다는 뜻인데.
“하여튼, 이제 그럼 다들 모이자. 전역 전 마지막 모임이니까.”
-*-*-*-
“그럼, 상주 상무 6기 전역을 위하여!”
“위하여!”
비록 알콜은 아니지만, 각자 바리바리 사온 음료수와 감독님이 나눠주신 무알콜 가지고 나름 건배 흉내를 내고 있었다.
“야, 준혁아, 넌 뭔 솔의 눈을 가지고 왔냐?”
“왜요, 솔의 눈이 얼마나 맛있는데.”
“···와, 저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그거 방향제 맛이던데.”
···왜 사람들은 민초와 솔의 눈을 싫어하는 걸까. 이것만큼 먹고 나서 머리랑 속이 시원해지는 게 없는데.
‘크윽, 하지만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이니까. 언젠가는 이 두 음료가 인정받는 날도 올 꺼야. 민초여 자라라, 더높이 날아라···’
그렇게 속으로 민트초코를 상징하는 노래를 되뇌이며 천천히 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는 막간을 동안, 선배님들은 군대 말년이 들면 부쩍 많아진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아, 나가서 이제 어떻게 하냐···”
바로, 전역 후의 미래에 대한 걱정 말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전역 후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나 태준이, 동기 형님처럼 기량이 상승하며 밝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게요. 휴, 한 것도 없이 2년 나이만 먹었네요···”
“···그러고 보니 태열이 넌 작년은 괜찮았는데 올해는 몇 경기 못 뛰었지?”
“예··· 벤치에도 못 앉는 경우도 많았고···”
여기에서 경기를 거의 못 뛰고 전역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령 본인의 실력이 향상되고 좋아졌더라도.
“난 돌아가면, 이번 시즌 끝나고 바로 이적 신청할꺼야.”
“진짜?”
“그래, 지금 팀 꼬라지 보면 올해 승격은 글렀고, 그러면 돌아갔을 때 내 연봉도 팀이 어렵다면서 깎을 게 뻔한데, 다른 팀 알아봐야지. 올해 내가 못 한 것도 아니니까.”
“···하긴, 협상이 너도 이제 슬슬 연봉 후려치기 당하면 복구하기 어렵지?”
소속되어 있던 팀이 강등당해 버리면서 자신은 잘못한 것도 없고 실력이 올라갔는데도 연봉이 깎일 위험에 처한 선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전반적으로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자, 그럼 또, 우리가 전역 전에 1위 등극했던 것을 축하하며, 다시 한 번 건배!”
“건배!”
승리란 녀석은, 그리고 우리가 전역하기 전 1위라는 성적을 한 순간이라도 달성했다는 성취감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진짜 아쉽다. 아쉬워, 한 2월달에 입대했으면 우승컵 들면서 전역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게, 진짜 아깝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로. 물론 그렇다고-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말뚝 박아. 아니면 전역 연기신청하던가.”
“아 샤랍.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할 사람이 어딨냐.”
군대에 더 있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 나도 올해 계약 끝나는데, 어디로 갈까, 너희 조언 좀 해줄 수 있냐? 나 좀 어디로 가면 좋을지?”
“전북 가시죠 선배님.”
“···아 시꺼 임마. 거기 갔다간 연봉은 많이 받을지 몰라도 경기 못 나가서 계약 끝나면 바로 은퇴당할 게 뻔하잖아.”
그렇게, 이적 이야기가 나오자 우리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어느 팀이 좋다, 나쁘다의 이야기로 번지기 시작했고.
“그러고 보니 준혁이 너는 팀 정했냐?”
내 이야기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사실, 전역 후 미래라는 말로 이야기를 할 경우 가장 가까운 미래가 바로 나니까 당연한 건가.
“하하, 아직 못 정했어요, 제안 왔던 감독님들 한 번 만나보고 결정하려고요.”
그렇게 아직 정해지지 않닸다는 말로 면피하려고 했지만.
“어쭈, 이 녀석 어디에서 오퍼 들어왔는지 숨기려고 하네. 얌마, 동기들끼리 금액은 몰라도 어디 팀 갈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쨔샤. 그것도 숨기려고 드냐?”
“그래 이 녀석아, 어차피 우리도 다 알거든? 검빨팀이랑, 노란팀한테서 오퍼 받았잖아.”
···선배님들은 내 머리 꼭대기에 서 있었다.
“아니, 어떻게 아신 거예요?”
분명히 안 들키려고 나는 입도 뻥긋 안 했는데 이미 내 이적썰이 거의 다 풀려있네.
“얌마, 당연히 모르는 게 이상하지. 여기에 전남이랑 서울 선수들이 몇 명인데, 안 들키기가 더 힘들지 않겠냐?”
···아, 하긴 그렇구만. 이건 내가 멍청했다.
“뭐 그렇게 이제와서 깨달았다는 표정 짓고 그래, 원래 이 바닥이 비밀 엄수가 생명이라고 해도 며칠 뒤면 퍼질 정보 다 퍼지는 건 알면서.”
“···아니, 몰랐는데요.”
“응? 왜 몰라? 너도 이적해본 경험 - 아. 맞다. 넌 처음이지?”
“···예, 처음이예요.”
···그래, 난 제대로 된 이적시장 경험이 올해가 처음이란 말이다!
내 이적이래봤자 용인에서 고양으로 옮겨간 거 한 개 뿐이었다. 내셔널리그에서 신생 프로구단으로 이적한 사건 하나.
‘거기에 있던 선배님들도 그런 이야기는 잘 안하고 대충 그냥 팀 동료들이랑 연봉 어떤 얘는 얼마 받는단다- 이런 소리만 했지.’
이런 식으로 내가 입 다물고 있어도 정보 몽땅 다 퍼지는 줄은 몰랐다고··· 알았으면 좀 더 이리저리 말하면서 조언 부탁했지.
“하긴, 너 아직 K리그는 올해가 처음이지? 자꾸 까먹는단 말이야. 올라오자마자 날뛰어서.”
···감사합니다?
“하여튼,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그냥 거기 말고 어디에서 오퍼왔는지는 한번 말해 봐, 금액은 우리가 괜히 질투심 느끼고 할 수 있으니까 말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들이 너한테 오퍼한 팀들 분위기 어떤지는 좀 가르쳐 줄 수 있다.”
음··· 하긴 그렇네, 이런 건 에이전트도 잘 모르고 하니, 감독님들이랑 이야기하기 전에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전남이야 뭐, 태준이랑 동기 선배만 있어도 대충 분위기 괜찮게 굴 수 있을 것 같으니 넘어가고.
“서울은 어떤데요?”
“최상위권이라고 봐야지? 올해 우승 희망 안 보였으면 몰라도, 전북 승점 감점당하면서 걸어볼 희망이 하나 생겨서 엄청 분위기 파이팅하는 분위기라고 하더라.”
흠, 그렇군.
“그럼 혹시 수원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수원에서? 걔네가 널 왜? 걔넨 훈철이 있잖아.”
“야, 바보야. 훈철이 걔도 입대할 때 됐잖아. 그거 대비용인가 본데?”
오우, 바로 왜 영입하는지도 나오네, 역시 선배님들의 집단지성은 대단해.
“예, 수원에서도 오퍼가 왔더라고요. 혹시 어떤지 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선배님들 모두가 살짝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더니.
“준혁아, 너 이것만 말해봐라. 수원 오퍼가 딴 곳보다 훨씬 좋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뇨.”
“그럼 웬만하면 수원은 가지 마라.”
“···!? 네? 아니, 왜요?”
그 순간. 나는 수원의 팬으로서 정말이지 믿기 힘든 소리를 들어야 했다.
“거기, 지금 베테랑들이 개판 났거든. 너 지금 거기에 가면 100% 휩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