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67)

전역식 (3)

끄응-

“자, 다들 다시 한 번! 하나-둘!”

하나- 둘.

“좋아, 스트레칭 끝, 이제 일어나라. 이제 곧 있으면 경기니까.”

“옙.”

그렇게 스트레칭 과정을 마치고 우리가 하던 훈련에 초대받은 꼬맹이들이 오더니,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아저씨, 왜 엎드려 뻗쳐 하는 거예요?”

“바보야, 군대니까 기합 주는 거지! 넌 그것도 모르냐?”

어, 이거 얘네들은 모르나?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엎드리면서 근육 풀어주는 거야.”

이렇게 엎드려서 한 발, 한 발 번갈아가면서 다리 겹쳐주면 근육 올라오는거 방지되는 스트레칭이다.

“너희가 축구 자주 와서 보다 보면 이런 장면 좀 보일껄?”

농담이 아니라 다리에 쥐 올라오려고 할때 이렇게 다리 푸는 게 아주 유용하다고. 나 포함해서 수많은 선수들이 경기 중에도 쓰는 스트레칭이란 말이다.

그러나.

“에이, 거짓말하지 마요.”

“맞아, 어른들은 우리가 뭘 모르는 줄 안다니까?”

“그래, 우리도 알거 다 아는데.”

저 꼬맹이들은 그렇게 믿지 못하겠다는 티를 팍팍 내더니 또 쫄래쫄래 딴 데 구경하러 가버렸다. 하이고.

“준혁아, 내버려 둬라. 애들이잖아. 오해할 수도 있지.”

“아니 그래도 좀 억울하잖아요. 이건.”

우리가 병장인데다 전역 직전인데 누구한테 기합을 받겠는가. 기합을 주면 몰라도.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수건이랑 옷가지나 든든하게 챙겨, 오늘 비 오는 거 알지?”

“···예, 알죠, 알고말고요.”

강우확률 80%라는, 사실상 무조건 비온다는 예보 때문에 여기에 워터 에어바운스인가 뭔가하는 공기 채워서 만드는 물장구치고 노는 놀이터도 설치 취소했다고 했으니까.

“오케이, 그럼 됐고, 싸인용 볼은 챙겼어?”

“에이, 그건 너무 나갔습니다 형님. 제 싸인 받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다 동기 형 싸인볼 받고 싶어하겠죠.”

그래, 풀백 싸인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많겠어? 솔직히 풀백이 어떤 팀에서 인기 상위권이라는 건 둘 중 하나의 의미다.

1. 팀에 있는 공격수, 미드필더들이 그 선수와 비교하면 다 상병신 수준의 선수들뿐이다.

2. 원래 겁나게 잘나가던 팀이 몰락하면서 잘나가던 때의 선수들이 다 나가버렸지만, 그 선수는 아직 그 팀에 남아있는 경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좋은 풀백이었던 이영표 선수는 프로로서 뛰는 팀의 클래스가 꽤 높으셨던 덕에 1번 쪽 케이스가 될 수 있었고, 차두리 선수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솔직히 2번 요소도 컸다.

‘뭐, 굳이 따지자면 차범근 감독님 아들이라는 점에다가 그 간때문이야 광고 덕분도 있겠지만···’

하여튼 그런 일이 아니고서야 풀백이 인기 많을 이유는 없고, 우리 팀은 지금 당장 골을 푸짐하게 넣어준 공격수들이 넘쳐난다.

9골 10도움의 동기 형님

9골 4도움의 협상 형님.

9골 2도움의 태준이까지.

모두 좋은 기록을 달성한 선수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왜 경기장에 찾아온 사람들이 내 사인볼을 원하겠는가.

“야, 니도 공격포인트 꽤 많아서 사람들 좀 좋아하는 편 아냐? 너 2골 6도움이잖아. 수비수 중에선 최다 공격포인트라고.”

“···뭐, 그렇긴 한데. 그래 봤자 풀백이잖아요.”

인기 많아 봤자 풀백이지.

그러나, 내 말을 듣던 기승 형님은 단호히 내 말을 잘랐다.

“풀백이니까 니가 쌓은 공격포인트가 더 빛나는거지. 솔직히 수비수 공격포인트랑 공격수 공격포인트를 같다고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하긴 그렇···긴 하지? 당장 공격수가 10골 넣으면 평범하다고 하지만. 미드필더가 10골 넣으면 탑클래스라고 하는 경향은 아직도 있으니까.

“물론 동기보다야 못하겠지만, 나름 너 그래도 인기 적은 편은 아닐 테니까 사인볼이랑 펜 제대로 준비해둬, 혹시 모르잖아. 사인볼 이벤트 때 니 싸인 원하는 사람 있을수도 있으니까.”

···에이, 그건 너무 나갔습니다 형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

.

.

.

.

“이준혁 선수! 싸인 좀 해주세요!”

“저도요! 저도 싸인 좀 부탁드립니다.”

뭐지, 개꿀잼몰칸가?

-*-*-*-

-짝!

“자, 다들 들었나? 오늘 이 경기장을 찾아준 관중 숫자가 5천 5백 명 정도라고 한다.”

“······”

미친, 겁나 많이 왔네. 개막전 때보다 더 온 거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저 중에서 약 3천 명 정도가 우리 홈팀 관중 숫자다.”

그리고 원정 팬으로 인한 뻥튀기가 아니라. 우리 팀 팬들이 그렇게 많이 온 거라니. 허허.

“너희들이 지난 한 해를 얼마나 잘 보냈는지를 보여주는 듯 싶어서, 참 만족스럽구나.”

“······”

그 말에, 참 여러가지 감정이 몰려왔다.

“자, 일단 경기 시작 전에 너희들에게 말해줄 변동사항이 있다.”

“예!”

“일단, 첫 번째로 형이는 오늘 뛰지 않는다.”

“······?”

그 말에, 다들 의아함을 느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인 만큼 선수 명단이 병장인 선수들로만 구상되어 있었고, 그 중 주전이었던 선수들을 선발로 내세운 후 되도록 빠르게 경기를 결정짓고 나머지 인원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중, 팀의 주장이자 큰형님. 그리고 상주 상무의 유일한 국가대표인 이형 선배님은 당연히 뛰는 걸로 계획이 짜져 있었는데 형이 형님이 빠지다니.

“그 이유는-”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감독님.”

“···그래, 그게 낫겠구나. 앞으로 나와라.”

그렇게 앞으로 나온 형이 형님이 한 말은.

“미안하다, 나도 솔직히 마지막인 만큼 뛰고 싶었는데 슈틸리케 감독님이 직접 연락을 하셨어. 너는 월드컵 최종 예선을 뛰어야 하니 내일 뛰지 말라고.”

내 청력이 잘못된 건 아닌가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 진짜로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얼빠진 목소리가 우리들 사이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거짓말같지? 그런데 진짜야. 나도 어이없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거 무시하면 안 되겠죠?”

“안 되지. 당연히.”

그 확인사살에 모두가 한숨을 쉬었고, 나도 한숨을 쉬었다.

‘씨발, 슈틸리케 그 새끼는 도대체 머가리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나 안 뽑은 것 정도야 이해할 수는 있다. 이해는.

내가 비록 K리그에서 가장 막강한 공격력과 나름 봐 줄만한 수비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나는 아직 수비에서는, 특히 헤더 측면에선 많이 보완해야 하는, 약점이 좀 있는 선수니까.

···그러니까 그건 이해했다. 이해는 했다고. 그런데··· 이건 좀 아니잖아. 왜 국가대표팀 감독이 국내 리그 팀의 선발 명단에 간섭질하고 있냐.

‘지가 무슨 시발 한국 축구의 신인줄 아나. 하면 하라는 대로 다 해줘야 하게.’

···뭐 물론 한국 축구에서 성인 국가대표팀은 신에 가깝긴 하다.

애초에 대한민국에서 스포츠에 관심이 크게 없는 아저씨들이라고 해도, 국가대표팀의 주요 선수 몇 명은 이름 들으면

-아, 그 선수?

이러면서 알아보는 게 기본이고, 당장 K리그가 KBO리그에 비해 인기가 없음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 스포츠를 꼽으라면 축구와 야구로 팽팽하게 갈리는 이유가 바로 국가대표팀 덕분이니까.

그러니, 그 국가대표팀 경기 중 가장 중요한 대회인 월드컵 예선은 아주 중요한 대회인 것도 맞다.

당장 우리나라가 월드컵 진출 못하면 진짜 그야말로 폭동이 일어날 테고, 솔직히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프로 경기보단 국가대표 경기가 우선시되는 건 전 나라 공통이기도 하니까.

당장 이탈리아는 안정환 선수가 2002년 때 골든골 넣으니까 별의별 난리를 쳤고, 그 영국도 국대 이슈 터지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던가.

클럽 팀 감독들이 요즘 국가대표팀 일정이 너무 살인적이라고, 클럽 일정을 존중해야한다고 심심하면 말하는 건, 달리 말하자면 그 나라들도 별로 다를 바 없이 국가대표팀이 훨씬 더 파워가 쎄다는 소리기도 하다.

그러니 이해해줄 수도-

‘···아냐, 그래도 시-발. 소속팀에 누구 뛰어라 마라를 명령하는 건 좀 너무 나간 거 맞아··· 이건 그 인간이 선 넘은거지.’

이건 좀 이상한 일이 맞다.

‘···하긴 정현이가 국가대표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정현이 소속팀에 그 선수 K리그 딴 팀에 팔라고 소속팀에 압박 넣었다는 썰도 있었지?’

하도 웃겨서 그 썰 들었을 때는 웃고 넘겼었다. 선수 팔고 말고는 소속팀 자유인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싶어서.

그런데 지금 보니 썰이 아닐 확률이 엄청 높아 보였다.

‘···에휴, 그나마 전력상으로는 큰일이 아니라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왜냐하면.

“그래서, 오른쪽 풀백은 오늘은 포진이가 좀 고생해줘야겠다. 괜찮겠느냐?”

“당연히 괜찮습니다. 감독님.”

“고맙다.”

우리 팀에는, 박포진 선배님이라는 좌우를 오가며 18경기를 소화한 엘리트 풀백이 있으니까. 그리고 선배님의 포지션은 원래 우측 풀백이고.

그러니 별 이야기 없이 그렇게 넘어가겠거니- 했는데.

“다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있는데, 주장 자리가 공백이라는 거지.”

감독님이 한 마디를 덧붙이셨고.

“······?”

우리들은 의문에 빠졌다.

‘뭔 소리래?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환성 형님이나 포진 선배님이 주장 완장 달면 되잖아.’

우리팀의 1주장은 형이 형님, 2주장은 환성 선배, 3주장은 포진 선배로. 나이 순, 그리고 소속팀에서 주장 완장 달아본 선수 위주로 정한 아주 합리적인 주장 선정이었다.

그래서 시즌 내내 별 탈도 없이 그냥 이 순대로 쭉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런 의문을 잔뜩 담은 우리들의 눈길 앞에서, 감독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표정만 봐도 알겠군, 부주장도 다 정해져 있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

“하지만 말이야. 이번이 자네들의 마지막인 만큼 우리는 최대한 오늘 경기에 지금이 아니면 못 볼, 특별한 볼 거리를 만들어 줄 의무가 있어. 그게 프로 스포츠의 의미이기도 하니까.”

하긴, 저 말도 맞다.

당장 박지성 선수가 맨유에서 주장 완장 한 번 달았을 때, 신나게 캡틴 박이니 뭐니 아주 그냥 기사가 쏟아져나왔던 걸 떠올려 보면, 주장 완장을 누가 달았느냐도 은근히 기삿거리가 되는 소재다.

“그래서- 코칭스태프들이, 올해 부주장, 3주장을 제외하고, 주장 완장을 달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한번 짧게 상의해봤네.”

그 순간, 선배님들이 모두 침을 꿀꺽 삼키는 목소리가 작게나마 들렸다. 아마도 반짝이는 노란 완장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한 듯했다.

‘에휴, 저 반짝이는 노란 완장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애초에 완장이라는 건 달아서 좋을 게 단 하나도 없다. 당장 학교에서 반장 뽑을 때를 봐라.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반장하고 싶다고 손을 들고 다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반장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던가.

‘당장 나 고등학교 때도 반장하고 싶다고 손 든 사람 한 명밖에 없어서 그냥 바로 반장했지?’

책임이라는 걸 진다는 건,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요즘은 학생부에 적힐 거 늘어난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좀 늘어났다고도 하지만, 솔직히 그 친구들도 그런 점수 없으면 안 하려고 들껄.’

아니면 책임은 적고 학생부에는 기록되는 부반장을 노리던가.

‘뭐 하여튼, 87년생 선배님들 중에서 아무나 뽑겠지.’

86년생 형님들이 모두 후보에서 박탈되었으니 당연히 그 다음엔 87년생 선배님들로 뽑지 않겠나.

‘흠, 아마 그럼 태열 선배가 주장 하게 되려나-?’

그 정도면 딱 적당하겠다, 나이도 그렇고. 성격도 무난무난하시니.

‘아니면 뭐 비록 88년생이시지만 동기 형님이 올 한 해 가장 많이 뛰었으니 그 형한테 달아줄 수도 있겠-’

“이준혁, 앞으로 나와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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