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래는 (1)
2016년 5월 29일
“에라이 씨발.”
“아, 망했다. 이거.”
-삑! 삑! 삐이익-!
[로페즈! 로페즈의 골! 전북이! 전북이 막판 대역전극을 펼칩니다!]
[3대 2! 전북이 후반에만 3골을 넣으면서 승점 3점을 따내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래, 졌다. 썅.
***
<2016 K리그 클래식 12Round>
[경기 종료]
전북 현태 3 : 2 상주 상무
[골]
전북 현태 : 레오나르도 64, 최규백 69, 로페즈 81
상주 상무 : 김환성 47, 박동기 52
***
이 결과를 보고 옆에 있던 태준이가 중얼거렸는데.
“하, 진짜 이길 수 있었는데, 너무 아깝다. 망할. 저번처럼 공격적으로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후반에 소극적으로 굴다가 너무 얻어맞았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뭐, 그래도 수비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잖아. 상황이 상황인데.”
“···그건 그렇지.”
어떤 상황이었냐고?
[아, 후반전에 이형 선수가 퇴장당한 게 너무 컸네요.]
[예, 그 이후로 거의 공격을 못 하고 수비만 하다가 끝내 역전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침 TV 해설위원이 친절하게 말해주네, 그래, 형이 형님이 후반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퇴장당해 버린게 너무 컸다.
자, 생각해 봐라. 절대적인, 지금까지 무패인 팀 상대로 2대 0으로 이기고 있는데, 우리 팀은 퇴장당해서 선수 한 명이 부족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솔직히 축구 조금만 아는 팬이 감독을 하든 퍼거슨 할애비가 감독을 하든 똑같이 수비적으로 굴 거다.
‘그리고 퇴장 당한 게 하필이면 형이 형님이라는 게 너무 컸어.’
숫자도 적고 수비적으로 굴면, 공격 루트가 사실상 단 하나밖에 안 남는다. 웅크리고 있다가 빠르게 역습.
그리고 역습을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선, 빠르고 정확한 크로스가 필요한데 그 크로스를 가장 잘 뿌리는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있었다면··· 아냐, 이건 너무 나갔다.’
내가 나간다고 뭔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좀 아니다. 10명과 11명은 하늘과 땅 차이-
“하, 이렇게 되니까 존나게 아쉽네, 저기에 너 있었으면 좀 나았을 거 같은데.”
어?
“뭐 그렇게 놀라? 솔직히 말해서 풀백으로 뛸 때 러닝 크로스는 니가 가장 좋잖아. 솔직히 크로스 하나만큼은 이형 선배님보다 니가 더 나을껄?”
···저 놈이 칭찬이라니?
“너 뭐 잘못 먹었냐?”
순수한 의문이 담긴 질문이었는데, 태준이 이 녀석이 얼굴을 팍 찡그렸다.
“아, 칭찬해 줘도 지랄이야 이 새끼는. 다시 웨이트나 하자 대상아, 내 자세도 좀 잡아줘라.”
“옙, 태준 형님.”
···진짜 칭찬이었다고?
‘휴우- 요즘 나에게 왜 이리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슬슬 좀 믿기가 힘들어서 의심이 간다···
아니, 물론 처음에야 마냥 기분 좋았다.
-그러니, 제안하겠네. 리. 9월 전역 이후. 마르세유로 올 생각이 있나?
저 제안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하늘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국대 떨어진 걸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유럽이라는 유혹은, 그리고 마르세유라는 클럽은 아주 좋은 냄새를 풍기는 미끼였다. 모든 생각을 다 잊게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승부조작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그런 붕 뜬 생각들이 전부 사라지고 난 후.
나는 조금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내가 간다고 하면···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한다.’
하아- 여기서부터가 난관이다. 진짜.
비록 내가 운동선수들 사이에선 나름 공부 열심히 한 편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운동선수다. 축구 공부를 빼고는 솔직히 공부와 담을 어느정도는 쌓고 살았단 말이다.
그런데, 이 나이 먹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라고? 솔직히, 유럽이라는 꿈이 있으니 가면 열심히야 하겠지만, 정말 많이 스트레스 받을 게 너무 뻔히 보인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개막장 구단주가 있다는 것도 너무 마음에 걸려.’
분명히 그 스카우트가 말했었다. 아직도 만족 못 하고 이번 여름에 선수를 팔아제끼려고 한다고. 이게 뭔 소리인가.
‘마르세유 같은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우승을 노릴 만한 팀이 13위가 되었는데도 그 모양 그 꼬라지라는 거잖아.’
이건, 진짜로 구단주가 축구 구단의 성적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고, 투자할 마음도 없을 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구단주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구단을 운영할 경우, 그 팀은 보통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당장 수원이 지금 그 꼬라지잖아.’
그래, 수원 블루버드. 내가 응원하는 팀.
이 팀은 사성이라는 부유한 모기업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2010년 정도까지 수원의 별명은 개랑이라는 살짝 멸칭에 가까운 말을 제외하고도 푸른색 유니폼이라는 점과, 자금력이 풍부하다는 점이 합쳐져 K리그의 첼시, 혹은 레알 수원같은 아주 멋들여진 별명도 있었다.
하지만 비용대비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모기업에서 예산을 삭감하기 시작했고, 그 때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의 수원은 옛날 2010년 정도 때에 비해 총 예산이 절반이 넘게 삭감되었다.
그 결과는? 2010년 FA컵 우승 이후로 단 한 번도 우승컵을 들질 못하는 굴욕을 겪었고, 올해의 순위는 시즌 초라고는 해도 리그 9위, 11승점이라는 정말이지 처참한 성적이다.
‘K리그 최다 우승팀이라는 명문 이미지가 다 떼어지고 진지하게 올해는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지. 젠장.’
그 로또풀이라고 놀림받던 리버풀도 강등을 걱정하진 않았는데 말이지. 대 굴욕이다.
뭐, 물론 반례 역시 존재한다. 당장 K리그만 해도 시민구단으로 전환하고 나서 투자금액이 팍 줄어든 성남이 2014년에 FA컵 우승을 했고.
EPL에선 당장 이번시즌에 이루어진 레스터 시티의 우승을 보라. 그들은 고작 맨시티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연봉을 받고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런 것을 보면 구단주나 모기업의 투자와 성적이 항상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볼 경우엔 결국 어느정도는 비례관계에 있지.’
당장 맨시티와 첼시가 어떻게 강해졌던가, 만수르와 로만이라는 두 구단주가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팍팍 써대면서 클럽을 성장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국가대표 레프트백 김진우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분데스리가의 호펜하임도 그렇다. 놀랍게도, 그 팀은 원래 8부리그 팀, 그러니까 그냥 아마추어 팀이었다.
그런데 구단주 디트마르 호프가 이 팀의 유소년 팀에서 뛰었다는 인연으로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면서 1부리그에 올라온 거다.
이런 걸 보면 결국 클럽은 구단을 소유하고 있는 구단주가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다.
그리고, 마르세유의 구단주는 명백하게 구단을 망치고 있고, 망칠 인간이다. 그 인간 때문에 당장 내가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프랑스로 날라갔는데 마르세유가 강등이라도 당한다면?
그 순간, 나는 꼼짝없이 프랑스 2부리그에서 뛰어야 하고, 모두에게서 잊혀진 선수가 될 거다. 기껏 유럽까지 가놓고도 국가대표를 절대 꿈꿀 수도 없을 거다. K리그 선수가 유럽 2부리그 선수보다는 중용받으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 스카우트, 막상 날 원한다고는 해 놓고 단 한 번도 구체적인 액수를 제안하진 않았어.’
그리고 그렇다는 건··· K리그에 비해서 엄청나게 더 좋은 오퍼는 아닐 게 뻔하다. 아니, 오히려 더 적은 액수를 오퍼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시아 리그에서 유럽으로 갈 경우, 연봉을 오히려 깎기를 요구하는 구단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자들이 더 많다.
-너 유럽에서 뛰고 싶지? 그런데 어쩌냐, 너희 나라는 나름 잘 살아서 그런지 그 리그에서 받는 돈이 적은 편이 아닌데 아시아인이라 검증된 것도 적고 불확실하거든? 그러니까 오고 싶으면 연봉 깎아서 와라.
놀랍게도 사회에서 들으면 ‘열정페이’ 라고 불리면서 욕할 법한 이 거지같은 논리가 먹힌다. J리그의 수많은 선수들이, K리그의 일부 선수들이 그런 열정페이를 받아들이고 중소규모 리그로 떠난다.
유럽이라는 세계 최고들의 선수들이 모인 그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고, 그 적은 돈마저도 고맙다고 생각하는 아프리카와 남미의 유망주들이 넘쳐나니까.
그리고, 그렇게 열정페이에 몰려드는 선수들을 그들은 소모품으로 생각할 거다. 아니, 무조건 그렇게 생각한다. 정상적으로 어떤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이라면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은 놈만을 뽑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
그걸 생각한다면, 나는 솔직히··· K리그에 남는 게 더 좋은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내가 재산이라도 좀 있으면 모르겠는데. 내가 지난 몇 년간 프로로서 벌어들인 돈은 어머니 병원비를 위해 사용하느라 거의 모으지 못했고, 그나마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모은 돈과 지금 여기에서 모은 돈이 다다.
‘아마 선수 생활 접으면서 남았던 돈이 1천 5백, 그리고 여기에서 수당 꼬박꼬박 챙겨서 번 돈이 2천 정도니까 제대할 때 쯤엔 한 4천5백 정도 되려나?’
28살에 순 자산 4500만원.
솔직히···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적게 모은 돈은 아니지만, 앞으로 약 2~3년만 지나면 은퇴를 고려해야 할 수도 있는 축구선수라는 점을 따지면 절대 많이 모았다고는 말 못한다.
그리고 솔직히 마르세유 쪽이 나한테 제안하는 계약은 길어봤자 3년일 거고. 이 계약에서 내가 삐끗하거나 마르세유 구단이 혹시 삐끗하기라도 하면 이 계약을 마지막으로 바로 은퇴다.
유럽에서 뛰었다고 해도, 굳이 K리그 선수를 놔두고 2부리그 유럽 선수를 찾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부상이라는 변수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이지.’
반면, K리그에 남는다면 장기계약을 노릴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부상당하더라도, 내가 안심하고 부상을 회복할 기간을 가질 수도 있으며.
설령 강등당하더라도 오로지 축구만 잘하면, 나만 잘하면 된다.
나만 잘하면 팀이 강등당하더라도 다른 팀을 찾아서 이적할 수도 있고.
정말 일이 잘 풀리면, 국가대표에도 승선을 한 두번 정도는 노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두 개가 아니더라도 한 구단에 오래오래 남아서 뛸 수 있을 때까지 뛰면, 미리 따 둔 라이센스를 이용해서 플레잉 코치로 전환하고 자연스레 코치직을 맡으면 대부분의 축구선수들이 갖는
-미래에 뭘 하면서 먹고살지?
이런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러니, 솔직히··· 내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K리그가 답이다.
여기에 남으면 더 이상 프로로서 생존을 걱정할 필요는 없고,
리스크도 없이 좋아하는 축구를 오래오래 할 수 있다.
‘······’
하지만, 지금 포기한다면 유럽이라는 꿈은.
나의 어릴적의 꿈은 영원히 날아간다.
그게 날 망설이게 만들었다.
‘···젠장, 이건 정말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빨리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도 명백하다. 당장 한 달 정도 뒤에 여름 이적시장이 시작되고, 그 때 구두로 가계약 정도는 맺어두지 않는다면 나는 붕 뜬 신세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축구구단의 예산집행은 보통 여름과 겨울에 일정 예산을 받아서 집행하는 거니 말이지.’
그러니, 여름 이적시장 때 어떤 태도를 보일지를 미리 생각해 놓아야 한다. 그 때까지 내가 어떤 쪽을 원하는지 내 마음을 확실하게 정해두지 않는다면. 플레이에도 지장이 갈 테니까.
그러니까.
-딸깍.
“아버지?”
“어, 그래. 준혁이구나, 무슨 일이냐."
내 주변의.
나보다 더 현명한 인물들에게, 물어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