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태워라 (4)
2016년 05월 21일
작년의 성남과 올해의 성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똑같이 4-2-3-1이었고, 세부적인 전술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작년의 성남은 홍의조와 김두현이라는 원 톱과 그를 받쳐주는 공격형 미드필더 두 명이 공격진을 끌고 가다시피 했는데.
올해는 그 둘에게 몰빵되던 공격 부담을 많이 줄이면서도, 리그 3위의 득점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삐이익-!
[티아고오오-! 티아고의 동점골 입니다!]
올해 K리그 전반기를 휩쓸고 있는 브라질산 완전체 윙어. 티아고가 있었다. 어느 정도길래 휩쓰냐고 말하냐고?
[이것으로 티아고가 총 8골 4도움으로! K리그 단독 득점 선수에다가, 공격포인트까지 단독 1위로 올라섭니다!]
지금이 11라운든데 12공격포인트다. 그것도 윙어 주제에, 리그 1위 북패에서 그렇게 공격 찬스 빵빵하게 지원받는 스트라이커 아드리아노보다 한 수 위라는 거다.
'하, 어이가 없네. 뭐 저딴 식으로 골을 넣어.'
물론 저 친구의 득점력도 어이가 없긴 한데, 지금 어이가 없는 이유는 골을 넣은 방법이었다.
[와, 저런 묘기와 같은 코너킥 슈팅이라뇨. 저런 건 시청자분들이 축구 게임에서나 볼 수 있었을 텐데요.]
코너킥으로 골 넣기, 게임에서나 보이는 골을 넣어버린 거였다.
'뭐 저딴 식으로 골을 넣냐. 저 새끼, 오늘 슈팅 폼이 아주 미쳤네.'
저러면 이거, 정말 좋지 않다. 너무 좋지 않다.
수비수 입장에서 가장 짜증나고 힘들어지는 거 1번을 꼽으라면 대부분 자신 상대로 알까기 드리블같은 걸 하는 걸 꼽지만, 나는 솔직히 드리블 돌파보다는 저런 괴상망측한 슈팅들을 꼽고 싶다.
‘수비의 근간을 부숴버리는 행동이잖아···’
보통 수비란 건 학습을 통한 계산과 확률의 영역이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싸워봤던 공격수들의 플레이들을 경험하고, 그 선수가 어떤 플레이를 좋아하는지를 배움으로써.
그 지식에 의존하여 상대방이 필드 위에서 어떻게 플레이할지를 계산한 후, 그 중 상대방 공격수가 가장 잘 써먹고 성공 확률이 높은 플레이들을 막고, 성공 확률이 낮은 플레이만을 강요하는 거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저런 코너킥 직접득점은 공격수가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수비수 입장에선 오히려 권장해야 할 플레이다.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으니까.
‘그런데 저런 플레이가 성공해 버리면, 뭐 어쩌라는 건지. 참.’
코너킥으로 골 넣는 게, 어디 상상하기 쉬운 일인가. 보통 코너킥 상황에선 내가 박스 안에서 마크해야 할 선수에나 집중해야지.
“에이 씨, 엿같네.”
뭐, 그래도 괜찮다. 비록 기책을 동원하여 저 쪽이 한 골을 넣긴 했어도. 기책일 뿐이고.
[이제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1대 1!]
***
<2016 K리그 클래식 11Round>
상주 상무 1 : 1 성남 FC
[골]
상주 상무 : 임협상 10
성남 FC : 티아고 19
***
우리가 미리 한 골을 넣어 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저 친구들을 공략할 방법도 마련되어 있었고,
“선배님, 어때요?”
“응, 니가 말한 대로다. 저 놈들, 협력 수비는 확실히 별로야.”
좋아, 예상대로구만. 역시나다.
‘확실히 윤선영 그 친구가 빠졌다는 게 크네.’
지금 성남은, 시즌 전, 수비진의 기둥뿌리로 여겨졌던 주전 수비수 윤선영이 없는 상황이다. 나는 그 점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4년 가까이 부동의 주전이었던 센터백이 빠지는 팀이 멀쩡할 리가 있나.’
생각해 봐라. 지금까지 A라는 사원과 같이 일해 왔는데, 인수인계할 시간도 거의 안 주고 갑자기 B라는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통보받으면 어떨 것 같은가. 거기에다 A가 원래 팀에서 꽤 잔뼈가 굵고 믿음직한 사원이었다면?
당연히, 삐걱거린다. 서로의 일하는 방식이라던가, 문화 같은 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 B라는 사람이 초초초특급 에이스가 아닌 이상에야 당분간은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 A가 더 능력도 좋다면? 뻔하지 않겠는가. 당분간은 팀 전체가 힘들어진다.
“네가 말한 대로, 초반엔 연계 플레이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아.”
“예, 일단은 그렇게 가시는 게 저 친구들 더 흔들 수 있을 겁니다. 임채민 저 친구가 최소한 피지컬은 몰라도, 경기 감각은 다 안 돌아왔을 게 뻔하거든요.”
“그렇지, 지금 출전이 부상 이후 두 번째 출전이니까.”
게다가 B가 1년간 현장에서 뛰지 않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직빵이고.
“좋아, 일단은 연계 위주로 플레이하마, 감독님도 그걸 더 좋아할 테고.”
“그렇죠. 슈틸리케 감독님은 그런 스타일 좋아하잖아요.”
슈틸리케호의 황태자, 이정현. 골은 K리그 챌린지에서도 10골을 못 넣을 정도였지만 등 지는 플레이 하나만으로 국가대표에서 10경기를 넘게 소화한 후배 녀석.
그런 스타일을 중용했던 감독이 연계 능력을 안 볼 리가 없다.
“오케이, 롱패스 뻥뻥 날려라. 오늘만큼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다 받아준다.”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효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쭉쭉 나와 이형 선배가 볼을 올려주면.
[길게 이어지는 롱 패스! 박동기! 경합에서 볼을 따냅니다!]
박동기 선배님이 볼을 따 내주고.
[박동기, 황수일에게 바로 연계!]
[황수일, 슛-! 아, 골키퍼 막아냅니다.]
[하지만 좋은 시도였습니다. 계속 저런 유효슈팅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건 공격이 잘 풀리고 있다는 신호죠!]
양 쪽의 임협상 선배님과, 황수일 선배님이 굉장히 편하게 슈팅을 날릴 수가 있었던 거다.
[역시 성남은 윤선영 선수의 공백이 뼈아프군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2010년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성남을 떠난 적이 없던 선수의 공백을 고작 한달만에 잘 메꾸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래서일까. 먼 길을 온 성남 팬들 중 일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야이 상주 상무 이 노양심 새끼들아-!
그 말을 듣고, 캐스터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 성남 원정 팬분들이 격양된 느낌이네요.]
K리그를 꽤 잘 아는 해설자는, 살짝 웃으며 저 팬을 옹호했다.
[그럴 만 하죠, 지금 이 경기에서 이기면 성남은 시민구단으로서 서울과 전북의 2강 구도를 깨뜨리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는데, 영 경기력이 불안하니까요.]
게다가. 이유가 더 있었는데.
-시발 느네 짜고 쳤지! 어! 데려갈라믄 시즌 말이나 시즌 끝나고나 데려가지, 하필이면, 왜 지금 국방부로 끌고가는 건데에에!
윤영선 선수의 공백이 생긴 이유가.
그 선수가 부상당해서도, 어디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서도 아닌.
상주 상무로의 입대 때문이었으니까.
-*-*-*-
상주 상무는, 시즌 중에 보통 3~5명의 선수를 데려온다.
당연한 게, 그러지 않으면 시즌 중반에 선수들이 전역하는 순간 선수 숫자가 모자라서 기권패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게 국군체육부대의 모집 규정과 맞물리면, 재미있는 일이 발생하는데, 국군체육부대에 입대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신청 당시 선수 신분이 대한체육회 등록 아마추어 선수이거나, 해당 종목의 협회/연맹에서 추천된 프로 선수여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 중 축구, 그러니까 우리 상주 상무는 사실상 아마추어 소속인 선수를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 모두가 추천된 프로 선수들이고. 한국 프로축구연맹의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선수가 프로축구연맹에 등록되어 있는 선수여야 한다.
그리고 한국프로축구연맹에 등록된 선수는 ‘현역’ K리그 클래식 선수거나, K리그 챌린지 선수들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상주 상무에 지원서를 집어넣기 위해선 최소 원서를 집어넣는 시점에서는 K리그 구단에 정식으로 소속되어있어야 한다는 거고, 시즌 중반에 입대하는 선수들은 전부 K리그 선수들이란 소리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성남 팬들의 상주 상무를 보는 심정을 정리하자면?
강등권 넘나들던 팀이 갑자기 강해져서 우리랑 경쟁할 수준까지 올라오고, 거기에 만족 못 하고 우리 팀 주전 센터백까지 빼앗아가면서 자기네들보다 순위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느낌인거다. 좋게 보일 리가 있겠는가.
뭐 그렇다고 봐줄 생각 따윈 없었다.
-야 이 양심도 없는 새끼들아! 페어플레이 해라! 니들이 우리 약점 만들어놓고 이러기 있냐! 신검도 통과 못했다면서 왜 꾸역꾸역 데려간건데!
애초에 저런 원정팬들의 극찬은, 오히려 우리가 더더욱 저 곳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공격하기도 쉽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선수는 28경기 2골 2도움의 김동희.
솔직히 말해서, 거의 위협을 느끼질 못 하겠다.
빠른 스피드가 강점이라곤 하지만, 나 역시 스피드만큼은 K리그 최상위권이다. 그래서 작년에 1대 1 수비에서의 습관이라던지 같은 게 거의 폐급 수준이었는데도 어떻게든 커버가 됐던 거였고.
그렇다고 키가 큰가? 그것도 아니다. 저 친구, 공식 키 169cm다. 피지컬이 명백히 내 하위호환이다.
‘바디 밸런스라도 나보다 압도적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잖아.’
그래서인지, 돌파도 내 위주로 이루어졌다. 옆쪽의 티아고를 막아야 하는 이형 선배보다는, 내 쪽이 수비 부담이 훨씬 덜 했으니까.
[아, 이준혁 선수, 돌파! 돌파입니다!]
그리고 자연히 수비 부담이 덜해지니, 크로스도 훨씬 쉽게 올릴 수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 먹혀들어가면서.
-삑! 삑! 삐이익-!
[아, 이준혁! 크로스-! 박동기! 다시 볼 따내고! 황수일! 골! 골입니다! 상주 상무, 2대 1로 앞서나갑니다!]
[전반전! 상주 상무가 스코어 2대 1로 앞서나갑니다!]
자연스레, 우리가 앞서는 상태로 전반전이 끝이 났다.
.
.
.
-삑! 삑! 삐이익-!
-*-*-*-
전반전이 끝나자, 다들 웃음을 지으며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나, 그 가운데에서 나는.
“······”
평소와는 달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오늘 난 잘 했다.
상대편 윙어를 꽁꽁 묶어내는 걸 넘어, 측면의 공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그 덕분에 어시스트는 아니지만, 기점이 되는 패스를 해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평소라면 이 정도면 만족했을 거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 아직 부족할 꺼야.’
이 정도로는, 국대에 뽑힐 리가 없었다.
상대방을 묶었다고는 하지만, 묶은 상대가 고작 시즌 2골 2도움의, K리그에서 평균 이하에 가까운 윙어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내 공격력도 폄하될 수도 있다. 수비 부담이 적어서 저럴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그 정도라면 그저 ‘K리그의 좋은 풀백’ 정도의 선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고작 반 시즌 정도밖에 안 나왔다면, 뽑을 이유가 없다.
최소한 지금 눈에 들어왔더라도, 뽑히기까지는 더 걸리겠지.
그러니 국대를 위해서라면 지금 조금이라도 더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 이상으로 풀백이 뭔가를 더 뭔가를 하겠다고 하는 건 전술이 미리 맞춰져 있지 않은 이상 하지 말아야 할 짓이지.’
게다가 내가 이번 시즌 들어서 가장 성장하게 된 것 중 하나가, 공격을 하면서도 수비의 밸런스를 어느정도 알아서 맞추기 시작했다는 건데, 그걸 버리는 순간 본말전도다.
그러니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후반전에 성남이 홍의조 선수와 그 선수를 투입하길 기대해야 한다는 건데···
‘···큭, 나도 정신이 나갔구나.’
쉬운 승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국대라는 자리가 아른거리니, 그냥 바로 뒤바뀌는구나. 나도 참 내로남불이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언제 올 지 몰라.’
주전 풀백 2명이 정상이 아니고, 후보 풀백 한 명은 장기부상이라는 우연이 겹쳐지면서 간신히 찾아온 기회다. 절대로 날리고 싶진 않다.
그러니- 부디.
오늘만큼은 나의 앞길에, 벽을, 고난을, 준비해줘.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국대로 갈 수 있을 테니까.
.
.
.
.
.
.
[아,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성남이 선수교체가 있습니다.]
[예, 먼저 유창현 선수가 홍의조 선수로 교체되었네요.]
[서울전 이후 휴식을 주려고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결국 투입시켰네요.]
“······”
참, 그래도 이런 소원은 잘 들어주는구나? 날먹하고 싶다는 소원은 한번도 안 들어주면서, 이렇게 난이도 올려달라는 소원은 참 잘도 들어준다.
그래도,
‘···뭐, 아예 안 들어주는 것보단 나은가.’
지금만큼은 이게 반가웠다.
[그리고- 오른쪽 윙어의 김동희 선수가-]
그래, 지금 내 눈앞에 있던 선수가 교체되었다.
28경기 2골 2도움의 평범한 선수에서.
작년 FA컵 때, 막아낸다곤 했지만, 솔직히 등 뒤만 간신히 안 털리면서 운 좋게 막아냈던. 그리고 결국 한 골은 내 주게 만든-
A매치 62회 출전에 빛나고, 작년에도 7골 8도움을 기록한 선수로 말이다.
[- 김두현 선수로 교체되었습니다.]
나의 앞에, 1년 전엔 온전히 넘지 못했던 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