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태워라 (1)
텐 백(Ten Back).
사실 본산지인 잉글랜드에서는 이와 같은 진형을 해설할 때 텐백이란 말은 찾아보기 힘들고, Parking the bus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버스 세웠다는 뜻이다. 뭐, 그러니까 굳이 따지면 콩글리쉬인 셈이지만···
그래도 버스 세웠다는 표현보다는 기존의 포백(four-back), 쓰리백(three-back) 등의 용어에서 파생된 텐백이라는 용어가 훨씬 더 직관적으로 보이기에 꽤나 애용되고 있는 용어. 이 용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이렇다.
-축구에서 뛰는 11명 중에서 10명이 수비한다.
그리고, 축구에서 1명은 골키퍼라서 포메이션에 안 나오니까.
[아, 인천 유나이티드, 전반전 내내 거의 올라오질 않고 있었는데, 후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공격수까지 수비에 가담했어요.]
이걸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전원 수비란 소리다. 그리고 그 소리는. 승리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너희에게서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
-무승부만 거둔다면, 만족하겠다.
물론 텐백이 보기 힘든 전술인 건 아니다.
리그 경기일 경우 막판 무승부만 하면 잔류, 무승부만 하면 우승, 무승부만 하면 대륙대회 진출이 확정되는 그런 상황이라면 연례행사처럼 나오고.
토너먼트 대회라면 연장까지 버티고 승부차기를 노려서 승리한다는 플랜이라도 세울 수 있기에 텐백은, 솔직히 경기들을 보다 보면 아주 흔하게 보인다.
하지만.
[리그 초반 경기에서 이런 철저한 텐백이라니, 조금 의외입니다.]
[그러게요, 이건 또 꽤나 진귀한 장면이죠.]
아직 리그가 절반도 채 돌지 않은 상황에서 텐백이라는 건, 중계진들도 조금 당황스러웠고.
‘···골치 아파졌군.’
박 감독 역시, 머리가 아파왔다.
사실, 예측하지 못 했던 건 아니었다. 애초에 광주전에 이준혁이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돌려서 실험해봤던 이유가 시즌 중반 정도부터는 슬슬 상주 상무를 상대로 텐 백을 꺼내들 팀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했던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우리 상대로 이렇게 빠르게 텐백을 쓰는 팀이 나타날 줄은 몰랐군.’
다만, 그게 겨우 10라운드에서 나타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지.
‘김 감독이 저번 FA컵 4라운드 경기에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자신감을 조금 되찾았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작년에 임금체불이 터졌음에도 인천이라는 영세한 팀을 이끌고 강등당하지도 않고, 나름 강등권에서는 잘 벗어난 김도운 감독이 자신들을 이렇게 평가하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저 행동은, 상주 상무가 강팀으로 인정받았으니까 좋아해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길이 더욱 험난해질 거라는 것을 예고하는 소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이거 이러면, 골치가 아파오는데.’
물론, 텐백을 파훼하는 방법이야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축구사에서 축구가 탄생된 이후로 몇 번씩이고 나온 전술의 파훼법이 아직도 전혀 안 나왔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좋은 크로스와 그 크로스를 잘 받아줄 몸싸움 좋은 공격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키 크고 몸집 큰 친구가 피지컬로 상대 수비진을 찍어누르고, 그 선수가 만들어내는 그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크로스를 올려주다 보면, 그 크로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양쪽 사이드로 선수들이 이동하게 되면서 계속 수비진이 벌어지게 되고. 그렇게 벌어진 틈을 이용해 더욱 더 공격수가 날뛸 수 있도록 편안하게 만들어주면서, 골을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거다.
그리고 상주 상무는, 그것을 수행하기에 완벽에 가까운 선수들이 있었다. 이형이라는 빨랫줄 크로스를 날려줄 풀백과, 190이 넘는 장신 공격수 박동기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 이형의 크로스-! 그러나 요니치가 막아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 파훼된다면, 텐백이라는 전술은 진작에 사장되었을 거다.
당연한 게, 프로 수준에서의 축구는 결국 웬만하면 숫자싸움이다.
만일 축구 경기에서 레드카드 받아서 상대팀 선수 중 한 명이 퇴장당한 상황이 나온다고 생각해 보아라. 그럼 축구 경기를 보는 팬 중 백이면 구십구는 지고 있다가도 이렇게 외친다.
-야 이제 우리가 유리해!
팬들도 아는 거다. 프로 수준쯤 되면 서로 수준 차이가 많이 나지 않기에 한 팀이 레드카드를 받고 10대 11의 싸움을 할 경우, 10명 쪽에 갑자기 전성기 메시가 투입되는 게 아닌 이상에야 11이 거의 무조건 유리해진다는 것을.
그렇다. 텐 백은 공격을 거의 포기하고 수비에 과도하리만큼 많은 숫자를 투자한 전술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쉽게 뚫리겠나. 쉽게 뚫리면 아무도 그 전술을 쓰지 않으니 이미 사라졌겠지.
게다가.
[아! 박동기, 경합하지만! 요니치! 또 막아냅니다!]
[시즌 초 조금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슬슬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2015 K리그 베스트 일레븐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는 요니치입니다!]
인천에는 작년 최고의 센터백이라 할 수 있는 요니치가 존재하는 만큼, 박동기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이 수비수가 제대로 기량을 발휘한다면 뚫기가 힘든 게 현실이었다.
그러니 박 감독도, 그 하나만 믿고 있진 않았다.
-성준이! 자주 올라가서 중거리 때려! 형이 너도 중거리 때려!
텐백을 파훼하는 다른 방법인, 중거리 슈팅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선수들이 페널티 박스 안으로 잔뜩 내려가 있다면, 미드필더에서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페널티박스 바깥의 압박 또한 매우 약해진다.
때문에 만일 미드필더 지역에서 위협적인 중거리 슈팅을 날릴 수 있는 선수들이 있다면, 그들이 슈팅을 날리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파훼 방법이다.
물론 페널티 박스 안에 시루 안 콩나물처럼 선수들이 빽빽하게 들어가 있어서 슈팅이 제대로 들어갈 확률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유효 슈팅 정도만 되어도 괜찮다.
수비수들의 발을 맞고 튕겨진 공을 공격수가 주울 수도 있고, 서로의 다리에 맞아 굴절이라도 되는 순간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되니 수비수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허나
[아, 인천, 작정하고 수비를 하니까. 그야말로 철벽입니다. 철벽.]
이 역시 통하지 않았다. 인천은, 팀 역사에 우승이 하나도 없고, 작년에도 8위로 시즌을 마친 K리그의 전통적인 약팀이다. 그 말은?
[작년에도 종종 텐백을 보여줬던 만큼, 수비적인 완성도가 아주 높네요.]
[예, 상주가 중거리 슛을 저렇게 시도하는데도, 선수들이 요지부동이네요. 전혀 뒷공간을 내주거나, 수비가 벌어질 기세가 없어 보입니다.]
당연히 옛날부터 텐백을 종종 써먹었다는 거다, 그리고, 전술은 여러 번 사용할수록 숙련도가 높아지는 법이니. 인천은 텐백의 숙련도만큼은 K리그에서 제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덧 후반전에 돌입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요, 인천의 골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요, 오히려 때리는 상주 상무 쪽이 지쳐 보입니다.]
그리고, 때려도 때려도 무너지지 않는 인천의 모습에서, 지친 상주 상무 쪽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 인천! 공을 빼앗았습니다. 바로 크게 올립니다. 케빈, 케빈-!]
그리고 그 순간, 박 감독은 심장이 철렁했지만.
[아-! 너무나 아쉽습니다. 케빈의 슈팅이, 골문을 벗어나고 맙니다.]
[인천 입장에선 너무나도 아쉬운 찬스였겠습니다. 한 방에 역전이 가능했을 텐데 말이죠.]
‘후우- 다행이긴 하지만, 아찔했군.’
김도운 감독, 확실히 무서운 친구다. 비록 지레 겁을 먹고 전원 수비라는 전술로 일관하긴 했지만, 그 전원 수비를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 생각이 듬과 동시에, 감독은 쓰게 웃었다.
‘이거, 너무 방심했구나.’
다음 경기가 성남전이라는 생각에, 인천 경기는 그냥 이 정도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경기를 이겨야만 K리그가 한 바퀴를 돌았을 때, 시즌 전 목표했던 순위. 3위를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었다.
그들이 비록 0승으로, 현재 K리그의 압도적인 꼴찌를 달리고 있는 팀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K리그 클래식의 선수들이고, 작년 그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서 당당히 살아남은 자들인데.
‘무승부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현재 시간 후반 20분. 지금의 기세를 보면 솔직히 말해서 한 골을 넣는 것보다, 우리 팀 쪽의 수비가 뚫려서 박살날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렇다면, 무승부 정도만 거둬도 나름 괜찮다. 그렇게 되더라도 어제 성남은 패배했고, 오늘 우리들이 비긴다면. 그래도 득점 차이로 3위는 차지하지 않던가.
‘더 이상 무리하지 말고 라인을 내리라고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수비적인 미드필더인 태현이를 투입하려고 생각하던 도중.
“응? 자네 뭣 하는 건가?”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 중에서, 의외의 인물이 보였다.
“이준혁 자네, 여기서 뭣 하고 있는 거지?”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지?”
“환성 선배님의 중거리도 안 먹히니만큼, 저도 나갈 준비를 해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박 감독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아니, 너는 오늘 뛰지 않는다. 이준혁. 포진이가 부상당하지 않는 한, 너는 오늘 투입 없다.”
박 감독은, 오늘 인천이 텐 백을 쓰는 것을 보고 이준혁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당연한 것이, 애초에 광주전에 저 친구를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써봤던 이유가 텐백 대비용으로 사용해본 것 아니었던가.
물론 뜬금없이 광주전에는 수비적인 부분의 재발견을 하는 데 그쳤지만,
지난 11일 열린 FA컵에서 텐 백을 들고 나온 단국대를 상대로 저 친구가 미드필더로서 텐 백을 효과적으로 분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며, 앞으로 상대방이 수비적으로 나오면 저 친구를 종종 써먹기로 결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계속 이준혁을 투입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저 친구가 4월 30일 전북전, 5월 1일 전남전에서는 풀백으로. 5월 5일 광주전, 5월 11일 단국대학교와의 경기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기 때문이었다.
풀백과 미드필더라는 체력이 엄청나게 소모되는 포지션에서 뛰면서, 골키퍼가 아닌 이상에야 쓰러질 법한 일정을 소화했다는 소리였고. 만일 오늘 경기까지 소화한다면 16일동안 5경기를 뛰는 살인적인 일정이다.
박 감독은 선수를 그렇게 혹사시키고 싶지 않았다.
“너는 지난 경기동안 충분히 잘 해줬다. 너의 몸을 아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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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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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말씀이군요, 감독님. 저를 관리해 주신다고 말씀해주시다니. 소속팀이 없으니, 혹사 시킨다고 뭐라고 따지고 들 사람들도 없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감독님. 뛸 만 합니다. 30분도 안 되는 시간 정도야 충분히 소화 가능합니다.”
지금의 저에겐, 필요 없는 말입니다.
“···자네,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미래를 팔아서, 현재를 사는 행위지요.
“제가 어려운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혹사라고도 하는. 현대 프로 스포츠계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일이란 것을.
하지만. 감독님.
“그러나, 감독님, 감독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 시즌에 무슨 수를 써서든 최대한의 결과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감독님은 입을 다물었다.
“······”
그래, 아시지 않습니까. 감독님. 제가 이번 시즌, 정말 웬만큼 잘하지 않으면, 계약을 하더라도, 그게 끝입니다.
대학교 졸업, 그리고 4년 동안 2부와 내셔널리그만 뛰다가. 1부리그에선 고작 이번 1시즌. 그것도 부상이 아예 하나도 없다는 전제하에 최대 약 20경기 정도만을 소화할 선수. 그게 나다.
이런 성적을 보고, 덜컥 장기계약을 제시할 팀은 많지 않다. 보통 1년 내지 2년일거고, 길어 봤자 3년일 거다.
그리고 만일 초반에 제대로 하지 못하면? 팀이 상호 해지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동안 보여준 것이 있다면 기다려줄지도 모르겠지만 내 커리어는, 비루할 대로 비루하다. 구단들이 절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지는 않을거다.
그러니- 지금. 내가 가장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지금.
무슨 수를 써서든 한 번이라도 더 많은 경기를 뛰어야 한다.
“물론 제가 투입되는 것이, 팀의 승리에 방해라고 생각하시면 투입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투입하는 것이 저희의 승률을 높인다고 생각하시면···”
그렇다면.
“저를 투입해 주십시오. 감독님.”
내 말이 끝나고 난 후, 감독님은 짧게 말씀하셨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흐, 후회?
물론 후회할 거다. 아마 늙어서 무릎이 고생하고, 온 몸이 아파오면서 젊었을 때 고생 좀 덜 할걸, 하면서 분명히 투덜댈 꺼다.
하지만- 지금 기회를 더 받지 못한다면.
그런 후회를 할 기회마저도 없을 거다.
그러니.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그러니 감독님은, 그저 팀의 승리만 생각해 주십시오.”
***
상주 상무
이준혁 IN / 김성환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