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 (1)
다들 알고 있지만 자주 잊고 있는 사실 하나.
상주 상무는, 군경팀이긴 하지만 ‘프로’ 구단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 팀에도 군대 쪽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나름 구단 직원으로 고용되어서 일하는 직원들이 많진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고 프로구단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거다.
제주도 원정 표 같은 거 끊고, 원정경기 일정에 따라 미리 호텔 끊고 그런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저번 전북과의 경기에서처럼 전투식량 나눠준다던지 같은 마케팅도 한다.
물론, 이런 의견도 있다.
-아니 뭐 군경팀에 마케팅 같은 걸 해? 게다가 그딴 이벤트를?
뭐, 그 분들의 생각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렇다고 해서 마케팅 자체를 난 욕하고 싶진 않다.
아니 이 팀에도 팬들이 있고, 잠재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팬들이 있는데 마케팅을 해서 어떻게든 팬들을 끌어모야야 할 것 아닌가.
그 청년 FC가 시청률 꽤나 끌어모으고, 이브랜드가 근본이 없는데도 팬들 꽤나 끌어모은 게 바로 마케팅, 그러니까 포장빨 덕분 아니던가.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라도 마케팅 하는 거 좋게 봤는데···
“지금 하는 걱정중에 내 걱정은 뺍···으윽. 아 시발 오글거려서 못해먹겠네 진짜!”
이건 도대체 뭐야 진짜!
“NG, 다시 합니다. 지우지 말고 기록 남기세요, NG 모음집 만들 때 쓰게.”
“네?”
아니 이걸 남긴다고?
“잠깐만요, 이거 유튜브에 올라간다고 했죠?”
“네.”
“이 흑역사를 남긴다고요?”
“예.”
아, 행사 같은거 따라다닐 때마다 선배들이 욕 해서 눈쌀 찌푸렸는데, 이게 이래서였구나 시발?
“켁, 켁, 푸흡...”
“풉, 크흡, 이야- 최고다 최고!..크흡···”
“푸, 으하하핫. 으하하하..”
안 당할 때는 몰랐는데 내가 막상 당하니까 도저히 욕을 참기가 힘드네.
“아 진짜, 이거 꼭 제가 해야돼요?”
“넵, 하셔야 합니다.”
단호박이시네 시벌.
“태양의 후예도 끝났으니, 그거 기념으로 또 하나 찍어야죠.”
“그놈의 태양의 후예가 도대체 뭔데 그러는 건데요!”
“이거 뭔지 모르세요? 시청률 30%가 넘는 드라만데?”
그게 대수야?
“전 시청률 40퍼 찍은 제빵왕 김탁구도 안 봤는데요.”
내가 단 한 화도 빠짐없이 다 보고 한번 더 본 건 초딩 때 본 허준이랑 대장금뿐이다. 늦게 자면 키 안 큰다는 소리 아득바득 무시해가면서 봤는-데.
생각해보니까 그 때 늦게 자서 키 안 큰 건가 젠장.
“자, 빨리 하고 쉬러 갑시다. 저희도 지금 광양까지 와서 이렇게 카메라 들고 싶진 않아요.”
그놈의 드라마가 나한텐 웬수구나 웬수. 하.
키 못 크게 만들고, 이렇게 흑역사까지 남기려 하다니.
“형님들, 과자 드실래요?”
“오, 땡큐, 이런 건 뭐 먹으면서 봐야 꿀잼이지.”
“오올, 준비성 좋네, 우리 온규, 저 크로스 싸개보다 낫다!”
시이벌··· 그것도 선배님들이랑 동기들 다 있는 데서 말이지.
“선배님 여러분, 제발 어디 좀 놀러나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대한민국의 밤 문화가 얼마나 화려한데! 이렇게 창창한 20대들이 호텔에 쳐박혀서 젊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건 매우 잘못된 일이다.
“제가 술값 다 대드릴테니 제발···”
그러나.
“응, 안됌. 요즘 시국에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저 망할 웬수들은 들어먹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시발 핑계를 대도 댈 만한 걸 대야지, 이 대한민국처럼 밤에 싸돌아다녀도 되는 나라가 얼마나 있다고-
“맞아. 형이 형님이 서림식당 갔다가 얼떨결에 도둑 잡았던 거 보면 몰라?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위험하다고. 밤엔 이렇게 얌전히 호텔에 있어야지.”
“맞아, 맞아. 그게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조심해야지.”
···아 망할, 저 거짓말같은 말이 진짜라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네. 아무래도 안되겠다. 전략을 바꾸자.
“아니 촬영하는데 저렇게 감정몰입 방해하는 사람들 놔둬도 돼요?”
자고로 촬영이라 함은! 진정으로 배우자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도리 아닙니까!
“별로 상관 없는데요,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고요.”
“네?”
그건 또 뭔 소리야.
“어차피 저희도 이준혁 선수한테 배우같은 연기 안 바래요. 그냥 오글거리고 망가지는 영상을 찍으려는 거죠. 조금 연기 더 어색하다고 해서 큰 문제 없습니다.”
“······”
···음, 그래, 그렇구나. 이 인간들, 뭔 짓을 해서든 날 촬영하려고 들겠구나.
“자, 자 그럼, 다시 시작합니다. 스탠바이-큐!”
“···지금 하는 걱정중에 내 걱정은 뺍니다.”
···태양의 후예 저주한다! 송중기! 당신도 저주한다!
앞으로 태양의 후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쓰레기같은 드라마이며 이를 반박할 시 니가 직접 이딴 패러디 영상 찍어보고도 그딴 소리 나오는지 어디 두고보자 새끼들아아-!
-*-*-*-
-삑! 삐리릭-!
“어, 이제 끝났냐?”
“으어어어···”
젠장, 하, 돌겠다 진짜···
“너 왜 그렇게 기운 빠져있냐?”
“···나중에 보면 알거야···”
말하기도 싫다 진짜. 도핑 테스트 할 때보다도 더 온 몸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라고···
“엄청 힘들었나 보네, 휴가증은 받았어?”
“어··· 2박 3일이다.”
진짜 이거라도 없었으면 나 절대로 이딴 거 안 했다···
하아- 젠장.
“태준아, 이 호텔은 컴퓨터용 책상 없냐?”
“아마 없는 것 같아. 그냥 저 동그란 탁자 하나던데?”
쯥, 영상을 불편하게 봐야 하겠구만.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노트북 놓고 영상 못 볼 수준은 아니니.’
그렇게 작고 동그란 탁자에다가 노트북을 놓고, 내 플레이 영상을 찍은 영상 중 하나를 돌려 보기 시작했다.
‘흠- 여기··· 오케이. 여기. 우리가 공격하는 장면에서, 잠깐 멈추자.’
-딸깍.
내가 이 때, 지금의 나라면 어떤 플레이로 이어나갔을까?
‘음, 아마도 지금 이 상황에서의 나라면··· 일단 치고 달린 다음에 기승이 형이랑 2대 1 연계 했으려나.’
그러나, 영상에서 보여지는 내 모습은 살짝 달랐다. 그냥 바로 드리블을 하다가 우리 쪽 스로인으로 연결되었던 것이었다.
‘음- 내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했네.’
이 때는 왜 이렇게 플레이했지, 축구화 바꾸고 아직 드리블 뽕에 가득차 있었나?
‘그리고 수비할 때는··· 아이고, 젠장, 그렇게 판단하면 안 되지···’
그냥 안으로 과감하게 들어왔어야지, 녀석아.
‘게다가 파울 작전 써 놓고 파울 타이밍까지 조금 느리네. 어휴, 저거 봐봐, 잘못했다간 페널티 박스 안쪽으로 들여보낼 뻔했다.’
그렇게 내가 옛날 영상을 보면서 자꾸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일시정지 버튼을 많이 누르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다가.
“야, 준혁아, 잠깐 나 너한테 궁금한 것 좀 물어봐도 돼냐?”
태준이가 나한테 질문을 던져왔다.
“뭔데?”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
뭐야, 이건 또 뭔 소리야.
“나 요즘 너랑 며칠동안 같이 훈련하면서 느낀 게 있거든? 너 꿈이 K리그 뛰는 거였잖아.”
“그렇지.”
“그리고, 넌 지금 포진 형님하고 거의 동급의, K리그에서 꽤 괜찮은 좋은 풀백으로 취급받고 있고.”
“···그렇지?”
그래, 나도 이제 꽤 올라왔다. 그래서 태양의 후예인지 궁예인지 하는 저 드라마 패러디 영상 찍은 거기도 하고, 하.
“그럼, 꿈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되지 않아? K리그라는 꿈은 이루어졌고, 솔직히 말해서 넌 미드필더까지 보니까. 적어도 보장금액 8천 정도는 제시하는 팀, 엄청 많을걸.”
“······그렇지?”
당장 시즌이 시작하기 전, 이브랜드가 5천을 제시했었다.
이대로만 하면, 저 정도 금액은 충분히 따낼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루틴을 아직도 계속 할 수 있는 거냐?”
“뭔 소리야, 저녁 분석하는 것만 빼면 너도 이 정도 훈련량은 꽤 해 봤잖아?”
내가 하는 훈련이래봤자, 별 거 아니다.
오전 운동 시작하기 한 1시간 전에 피지컬 훈련으로 땀 빼고. 팀 오전훈련 마치고 나서도 한 10분 더 운동하고.
그리고 밥 먹고 아주 잠깐만 오침했다가. 30분 전에 일어나서 미리 개인기 발끝 좀 연습하고. 오후 훈련 끝나면 웨이트 하고···
“그냥 평범한 운동선수의 하루잖아.”
그런 내 말에, 태준이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야, 내가 바보냐, 나도 축구선수야. 그게 일반적이진 않다는 거, 너도 알잖아?”
“······”
“백 번 양보해서 하루이틀은 그럴 수 있어, 한 달 정도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1년을 넘게, 그렇게 훈련에만 열중한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지. 다들 가끔 술도 마시고, 여자도 끼고, 하다못해 게임이나 먹는 거로라도 탐욕을 부리는데 넌 그것도 아니잖아.”
그래, 저 말이 맞다.
우리는 고등학교의 운동선수들 중에서, 1등급짜리에 속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1등급짜리 학생들이 모두 공부만 하고 살진 않는다. 당연히 술도 마시고, 가끔씩은 놀기도 하고, 나름 사람답게 산다.
그리고 축구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 선수들이, 일반적인 사람보다야 더 노력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우리도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넌 그게 가능한 거야? 난 지금 니가 하니까 같이 할 수 있는 거지만, 어떻게 너 혼자서, 그 많은 훈련을 소화하고 버텨낸 건데? 지난 1년간?”
그 태준이의 근본적인 의문에.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지난 3년간, 난 계속 제자리걸음이었어.”
나는, 최소한 지난 3년 정도 동안은, 내 개인의 기인기량은 솔직히 제자리걸음- 혹은 퇴보만을 거듭해 왔다.
주전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시야가 좁아지고. 주전으로 자리잡은 이후엔 하루하루 얼마를 버는가에만 정신이 팔리고.
그리고,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은 어딘가에 대해 신경쓰고 하면서, 대학교 때의 기량에서 나의 성장은 멈춰버렸고, 결국 방출당했다.
그래서, 나는 축구선수를 그만두고자 했다. 내셔널리그로 돌아가거나, 동남아로 휙 떠나 버린다는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이미 3년간 정체되어 있던 기량과, 스물여섯 살. 두 달만 더 지나면 스물일곱 살이란 내 나이에 마음이 꺾였던 것이었다.
더 이상, 나는 성장이 불가능한. 앞으로 더 나아질 일이 없는 선수라고 생각했으니까.
나 자신부터가, 내가 더 실력이 늘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여기 와서 완전히 달라졌어.”
여기 와서. 나는 성장했다.
입대 전의 나보다. 작년 말의 내가 더 성장했다는 게.
작년 말의 나보다. 올해의 내가 더 성장했다는 것이.
그 어떤 방향으로 보더라도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성장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내 노력이 보상받고 있는데. 왜 훈련을 멈추겠냐.”
“······”
“오히려, 이것도 시즌이라서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이는 거야.”
부상당하면 말짱 도루묵이니.
“독한 놈···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글쎄, 최소한 군대 전역할 때까진 이렇게 살지 않을까?”
아, 그리고 정정할 거 하나 있다.
“태준아, 그리고 나도 식탐은 있다. 저번에 휴가 나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라고.”
물론 많이는 안 먹고, 한 달에 한 번, 가장 작은 용량 사서 먹을 거지만.
“···뭔데?”
“민트초코.”
“···씨발, 민초단 새끼 저리 가라. 난 잘거야. 불 꺼.”
···왜 사람들이 전부 다 저런 반응이지?
‘에휴, 맛알못들 같으니.’
뭐, 맛알못들과 입씨름해 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이 영상만 보고 빨리 나도 잠이나 자련다. 컨디션 조절하게.
-딸깍.
-20150624, 전남전.
-딸깍.
1년 전과,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줄 내 첫 K리그 상대팀을 내일 만나는데, 컨디션이 별로면 안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