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넘어서 (2)
“준혁아, 뭐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냐?”
“아, 기승이 형? 별 건 아니고요, 그냥 관중석에 사람 얼마나 왔나 한번 대강 세어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기승이 형이 살짝 웃었다.
“넌 경기장에서 거의 맨날 관중 수 세어보더라?”
“하하, 그런가요? 프로 들어올 때부터 습관적으로 이러네요.”
“왜 그런거야?”
왜 그러냐뇨, 그야.
“저는 저희들을 봐 주는 팬 수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중학교 시절, 축구만 하는 게 아니라 농구도 자주 했었기 때문에 농구를 조금 아는데, 농구계에서 이런 말을 하신 분이 있다.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 봤냐? 너희들처럼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대도 대접받는 이유는 팬들이 있어서다. 팬들에게 잘해라.
그래, 우리가 있는 이유는 결국 우리의 경기를 좋아해주고 봐 주는 팬들이 있어서니까.
“그리고 이렇게 세어봤을 때 봐 주는 팬들이 늘어나 있다는 걸 깨달으면, 그것만큼 기쁜 게 없더라고요.”
“그래? 오늘 저번 홈 경기보다 늘었어? 전북하고 경기라서 오히려 줄었을 것 같은데.”
뭐, 사실 기승이 형의 말이 맞긴 하다. 축구 팬들도 사람이라서, 지는 경기를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강팀과의 경기는 좀 꺼려한다.
‘물론 그 강팀이 라이벌 팀이거나 하면 그래도 지는 꼬라지를 보겠다면서 달려들지만.’
상주는 딱히 원한이 있는 팀도 없다. 아니 솔직히 타 팀 팬들이 원한을 가질 수가 없는 팀이다. 왜냐고? 일단 군경팀이니까.
‘자기네 팀 선수가 와 있는데 마냥 미워하기도 좀 그렇지.’
뭐 일단 끌고 갔다는 점에서부터 좋아하는 공주님을 끌고 간 마왕? 처럼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 2년 정도 경기력 유지시켜주고 난 후에 다시 돌려주는 마왕님이라 딱히 큰 원한이 생기기도 힘들다.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자기네 팀 선수들이 신세 질 팀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직관 오는 K리그 팬들이 상무를 보는 시선은 애매하다. 뭔가 짜증나긴 하는데 마냥 미워하기도 그런 팀?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상주는 지금까지 항상 하위권을 깔아주던 팀이라는 거다. 애초에 타팀팬 입장에서 승강제 이후 항상 오르락내리락해주는 승점 자판기처럼 보이는 팀을 싫어할 리가?
‘아, 대구같이 아깝게 1부 못 올라오는 팀은 싫어할 수도 있겠네. 상무 때문에 자기네 자리 뺏겼다고 생각할테니.’
하여튼, 그래서, 오늘 얼마나 왔냐고?
“모두 합해서 한 천오백? 그 정도는 온 거 같은데요.”
“오, 그래? 벌써 그 정도면 진짜 많이 오긴 왔네. 아직 시작하려면 좀 남았는데.”
아마 이러면 경기 시작할 때엔 3천은 무난히 넘을 것 같다. 작년엔 개막전 수준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 관중은 보기 힘들었는데.
“그럼 빨리 몸이나 풀자, 우리 휴가를 위해서라도.”
“형, 2박 3일 휴가가 그렇게 고파요? 전 딱히 나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데.”
솔직히 장기간 휴가 나가는 거라면 몰라도, 단기간 나가봐야 뭐하냐.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만 엄청 오래 걸리는데 돈은 돈대로 쓰고 지치기밖에 더 해?
“솔직히 이런 데가 어디있어요? 밥 잘 주고 잠 잘곳 주고-”
“야, 군대 짬밥 많이 먹더니 이 놈이 세뇌됐나, 얘 슬슬 코치님 닮아가네? 그렇게 좋으면 말뚝 박지 그러냐?”
“···그건 사양할게요.”
군대는 돈을 많이 안 주잖아.
“그래,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마지막 스트레칭이나 하자. 알겠지?”
“넵.”
끄으응-
“어, 근데 준혁아, 지금 보니까 저 중 한 60%는 전북 팬 아니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마지막 스트레칭이나 합시다. 형님. 그래도 홈이니까 이 정도로 온 거죠.”
전북이랑 하는 건데도 홈 관중도 절반 정도는 모였잖아요. 이 정도만 해도 숫자 늘어난 건 맞아요.
아무튼 늘었음, 아무튼 늘었다고.
‘근데 그 꼬맹이는 왔을라나?’
오늘 꽤 준비한 게 많아서, 와줬으면 좋겠는데.
-*-*-*-
으웩.
“아, 토 나올 것 같네, 이거 왜 이렇게 맛 없냐.”
<전주비빔밥? 우리는 전투식량비빔밥! 선착순 증정.>
‘괜히 선착순 증정이라는 말에 궁금해서 한번 손대 봤다가 피봤네.’
생각해보니 선착순 증정인데 경기 시작 20분 전까지 다 안나가고 있었던 걸 보고 의심했어야 했다. 젠장.
‘그냥 전북 팬인 척 하고 옆에서 비빔밥 받아먹는 게 몇 배는 나았을 것 같은데.’
전북 유니폼을 입지는 않았지만 상주 유니폼을 입고 온 것도 아니고, 이 팀이 K리그 최강이라길래 한번 보러 왔다고 했으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경기는 또 뭐야.’
-오 오 렐레! 오 오 렐레-! 오 오 렐레 !오 오 렐레-!
‘그렇게 호언장담하더니만, 경기 시작하자마자 한 골 먹고 말이지.’
***
<2016 K리그 클래식 7Round>
[전반 2분]
상주 상무 0 : 1 전북 현태
[골]
상주 상무 : (없음)
전북 현태 : 한교원 2
***
데이터 무제한이신 엄마 폰을 빌려와서 경기와 같이 듣는 중계 내용으로도, 난리였다.
[아, 한교원 선수의 굉장히 좋은 슈팅이었습니다. 수비수와 미드필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스피드를 이용해서 상대 진형을 흐트려놔 놓고 바로 직선 슈팅! 아주 깔끔한 플레이었어요.]
[1대 0으로, 전북이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경기를 보러 온 한 꼬마는 실망했다.
-우리 꼬맹이가 실망하지 않을 경기를 보여줄 수 있으리란 확신은 있지.
‘그렇게 호언장담해놓고, 저런 짓이나 하고 말이야.’
축구를 직접 보는 입장에서 가장 화나는 게 초반 실점이다. 당연한 게, 황금같은 시간을 투자해 기껏 경기장에 왔는데 초반부터 이렇게 실점해 버리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뭐 이제 선실점했으니 뻔하디 뻔한 경기가 되겠네.’
저녁에 보는 EPL에서도 항상 그러지 않던가. 약팀이 먼저 실점하면 약 팀은 결국 어떻게든 라인 올려서 공격적으로 나오라고 감독이 명령하긴 하지만, 항상 선수비 후 역습만 해와서 별로 익숙하지가 않아서 실수하게 되고.
그러나 한 골 두 골, 더 먹힐까봐 선수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결국 두 골, 세골 먹히면서 지는 거.
그게 일반적이다. 그게 당연한 거고.
‘에휴, 난 뭘 기대하고 여기에 온 거래?’
어차피 이렇게 뻔한 이야기가 될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저 상황이면 제대로 봐줄 리도 없잖아.’
이기고도 바쁘다며 싸인 거절했던 적들이 있는 선수들인데.
그렇게 뚱한 표정으로 경기를 바라보며 그냥 일찍 집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어? 상주 상무, 라인을 올리긴 하는데··· 이건, 이건 뭐죠?]
중계진의 놀라는 목소리에 경기장을 다시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와, 이건 뭐죠? 상주 상무, 전북 상대로 센터서클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그에 근접한 수준으로 망설임없이 라인을 끌어올리네요? 무슨 자신감인 거죠?]
그 말을 듣고, 꼬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이건 별로 좋지 않은 판단 같은데?
‘전북이 지금 발 빠른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최전방에 김신욱도 아니고, 이종호다. 그 광양 루니로 유명했던 이종호.
그런데.
[어, 선수들 움직임에 너무 망설임이 없는데요.]
선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런 것 정돈 신경 안 쓴다는 움직임이었다.
[이기승, 볼을 잡자마자 바로 전방으로- 롱 패스! 황수일 받습니다! 아 권태순! 멋진 선방입니다!]
[아, 놓치긴 했지만, 아주 깔끔한 연계였습니다. 마치 예상된 듯한···]
그 순간, 잠깐 음성이 멈췄다가,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땐, 조금 격양되어 있었다.
[이거 설마, 상주가 연습했던 걸까요? 전북 상대로 공격적인 전술을?]
-*-*-*-
[고오오올-! 상주 상무, 전반전 21분만에 동점골을 넣습니다!]
“수일 형님-!, 사랑합니다. 역시 형은 최고의 스프린터에요.”
“저리 가 임마, 니가 좋아해도 하나도 안 기쁘다. 넌 태준이랑 절친이잖아, 저기 벤치에 있는 태준이랑 놀아.”
역시 공격수, 쪼잔하다. 그런 거 가지고 저렇게 쫌생이처럼 굴다니.
“에이, 경기장에서 그런 게 어디있습니까. 골 많이 넣으면 신이고 형님이죠.”
나 같이 착한 수비수들이 참아준다. 휴.
“그나저나 이 전술 연습한 보람이 있네요, 전북 상대로 이렇게 먹힐 줄이야.”
“그러게, 우리 쪽은 확실히 편하다. 너희 수비 쪽은 모르겠지만···”
그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우리 쪽에서는 어려운 게 맞지.’
안 그래도 박살난 수비가, 더 박살날 가능성도 높아지니 말이다. 특히나 저 쪽이 원 톱으로 스피드가 있는 선수를 내세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도, 감독님은 이 전술을 고집하셨는데.
-그래서, 라인을 내리면 잘 막아낼 자신은 있고?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수비 전술이라는 건, 기계적인 움직임의 연습을 연습하고 또 연습함으로서. 같은 사람들끼리 발을 열심히 맞추고 또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발 좀 이제 맞춰졌다- 싶으면 전역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수비진에 계속해서 대대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
당장 지금 명단만 해도 봐라. 오늘 센터백 조합인 온규-웅희 선배 조합은 작년까지는 한 번도 발 안 맞춰본 조합이다. 지금까지 실전에서 발 맞춘 것도 진짜 한 2경기? 정도밖에 안 되고.
‘그리고 웅희 선배는 지난 시즌 서울에서 쓰리백에 익숙해졌던, 오른쪽 수비수를 맡던 선배님이지.’
그래, 지난 시즌, FA컵 결승전 때 FC 서울에서 뛰었던 그 이웅희 선배 맞다.
그래서 코치님이 쓰리백을 시도해봤던 거기도 했다. 저 이웅희 선배님 믿고, 뭐 결과는 4-0으로 개털렸지만.
"그러니, 이런 작전도 한번 도전해 보는 거다. 다행히 우리 선수 개개인의 스피드는 좋은 편이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싶다는 선수들의 표정이 보였는지, 감독님은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물론 너희들이 걱정하는 바는 안다. 전북은 강하다, 정말로 강하다.”
“······”
“하지만 우리도 상위권을 노리는 한, 어쩔수 없다며 포기하기보단, 어느 정도는 붙어봐야 할 벽이기도 하고.”
-탕!
“무엇보다, 우리의 홈이다.”
“······”
“물론 우리의 팬 수가 적은 만큼 분명히 전북 팬들이 더 많이 오겠지만. 이번 7라운드 경기는 분명히 상주시민운동장, 우리의 홈에서 열린다. 홈에서 우리 팬들에게 우리가 90분 내내 맞기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가?”
그 말에 거절을 표할 선수는 없었고.
***
<2016 K리그 클래식 7Round>
[전반 22분]
상주 상무 1 : 1 전북 현태
[골]
상주 상무 : 황수일 21
전북 현태 : 한교원 2
***
다행히, 그 전술은 통했다.
결국, 우리의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자, 그럼 감독님은 어떻게 나오시려나? 라인을 내리시려나?’
전북 상대로 1대 1, 그리고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김신욱 선수가 아니라 이종호 선수가 나왔다.
그렇다는 건,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이상, 라인을 내리고 붙는 전술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거다. 상대는 스피디한 선수들을 위시한 공격으로 계속 나올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그대로 가라고 하시는구만.’
그래, 여기는 상주 상무의 홈, 상주시민운동장이다.
전북이라는 큰 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우리를 응원해주시기 위해 찾아온 팬들에게.
벽을 만나더라도 물러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공격적으로 나설 것이다.
“···준혁아? 슬슬 나한테도 크로스 좀 주지 않을래? 나 지금 원톱 주전인데 아직도 1골째다.”
-꽈아악.
아, 아, 어깨 아픕니다 선배님.
“믿는다아?”
“···물론입죠.”
···그리고 선배님한테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슬슬 스트레스 받으시는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