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2)
2016년 04월 16일
[자, K리그 클래식 2016 6라운드 경기, 상주와 포항, 포항과 상주와의 경기가 시작합니다!]
-삐이익!
[예. 사실 포항으로서는 원정이긴 하지만, 승리를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양 팀의 역대 상대 전적은 21승 4무 2패밖에 하지 않았을 정도로 극 카운터거든요.]
분명 상주의 홈인데, 시작부터 뭔가 힘이 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던 해설자를 보고 캐스터는 급히 한 마디를 추가했다.
[그래도 축구공은 둥근 법이죠! 분명 상대 전적이 포항이 앞서긴 하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이변이 일어날 수 있죠. 말씀하시는 사이, 상주 상무! 코너킥 준비합니다.]
-삐익!
[왼쪽에서 올라갑니다. 바깥쪽 포스트, 헤더-!]
[···박동기! 헤더! 헤더! 골! 골입니다! 박동기 선수, 경기 시작 1분 만에 헤더 골을 넣습니다!]
***
<2016 K리그 클래식 6Round>
[전반 1분]
상주 상무 1 : 0 포항 스틸즈
[골]
상주 상무 : 박동기 1
포항 스틸즈 : (없음)
***
-충성-!
‘어휴, 이거 봐라. 여유 있으니까 이런 세레모니도 하는구만?’
경례 각도가 다들 완벽하시다. 나는 아직도 이거 손바닥 한 틈도 안 보이게 만드는 게 영 익숙하지 않아서 좀 신경 써서 하지 않으면 실수하는데.
-바로-!
‘휴, 끝났다.’
그렇게 경례를 끝내고 수비라인으로 돌아가려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대박이네. 그 포항 상대로 1분 만에 골이라니.”
그 말에, 옆에 붙어있던 온규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뭐야, 준혁이 너 포항 팬이었냐? 수원 팬 아니었어?”
“아, 그건 아님.”
나는, 수원의 팬이다. 수원 블루버드의 팬이다. 이건 내가 죽을 때까지 아마 변하지 않을 거다.
아직 우리 집 근처에 수원밖에 없던 초등학교 시절, 슈퍼컵 우승을 시작으로, 대한화재컵 우승, 그리고 아디다스컵 우승에 K리그 우승까지 하던 그때 수원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왜 포항한테 골 넣은 거 가지고 그렇게 신기해해?”
그거야-
“내가 미드필더 출신이잖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머리가 좀 굵어지고, 프로가 하는 플레이들이 어떤 뜻이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는 고등학생 시절,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팀을 꼽자면 포항이었다.
내 중학교 때 시절까지만 해도 그때까지의 K리그는 아직은 체력을 위시한 수비축구를 한 다음, 뻥 차서 축구 하는 팀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걸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뻥축을 하지 않으려면 잘 짜진 공격 전술의 마무리를 공격수들이 골로 잘 완성해줘야 한다.
그런데 K리그에서 그래 줄 만한 좋은 공격수들은 그때까진 다 일본으로 가거나 아주 가끔은 유럽으로 가는 게 정석이었으니··· 그래서 그런지, K리그는 대부분 선수비 후역습이 진리처럼 여겨졌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2005년에, K리그에 백패스 금지라는 공격적인 패스 축구를 꺼내든 미친 팀이 하나 나타났고, 그게 바로 포항이었다.
그들은 보는 눈이 즐거워지는 공격적인 패스 축구를 제대로 보여주면서 K리그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K리그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K리그의 아스널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우승컵도 몇 개 따냈으니, 에미레이츠 시절 아스널이 아니라 하이버리 시절 아스널이지.’
뭐, 하여튼 그건 둘째치고, 선제골 넣었고, 이 날씨라면.
“태준아.”
“왜?”
“준비 단디해라.”
그런 그들이라고 해도, 먹힐 가능성이 있겠지.
“미숙하긴 하겠지만 그동안 준비한 걸 보여줄 때다. 그동안 연습했던 2대 1 연계 해 보자.”
“···뭐야, 벌써 패스 축구해보게? 우리 연습한 지 아직 며칠 안 됐어!”
아아, 알지, 알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연습한 지 일주일 정도 만에 바로 패스 축구를 해 보자는 말이 나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렇지만.
“지금 저놈들 선 실점했잖아. 무조건 올라온다.”
선 실점을 한 팀은, 절대로 수비적으로 굴 수가 없다.
당연한 게, 이미 한 골 먹었는데 왜 수비적으로 하겠는가. 유럽 챔피언스리그처럼 골 득실까지 다 따지는 경우가 많은 토너먼트 대화라면 모를까. 리그에선 웬만해선 그렇게 안 한다.
‘물론 리그에서도 골 득실로 희비가 갈리는 경우는 좀 있어서 시즌 말에는 관리하지만···’
애초에 그건 시즌 말에나 생각해야 할 문제인데다.
[아, 포항 선수들, 라인을 올립니다.]
[그렇죠, 만회를 해야 하기도 하고, 올해 K리그는 실점이 의미가 전혀 없으니까요]
올해 K리그는 득실점보다 다득점 우선 법칙이 적용되는 리그. 라인을 내리고 걸어 잠가 봤자 얻는 이득 따윈 하나도 없으니, 당연히 라인을 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라인을 올린다면, 공간이 늘어나고,
당연히 - 공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지금, 해 보자고.”
그러나, 태준이는 아직도 살짝 불안한 표정이었다.
“···야, 암만 그래도 우리 연계하는 거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엄청 부족했는데,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안 될까?”
하아- 진짜.
“태준아, 지금 너 드리블 자신 있어? 이렇게 비 많이 내리는데?”
그 질문에.
“···”
태준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오늘, 비 겁나게 오고 있다. 진짜 많이 오고 있다. 시즌 초반이라 잔디 관리상태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라 웅덩이가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게 잔디가 젖어있으면, 너라고 해도 드리블 실수 나오잖아.”
잔디가 많이 젖어있어서, 그야말로 볼로 패스를 하면 주르륵 볼이 빠르게 굴러가니, 드리블하기가 배로 힘들어지고.
공이 평소와는 다르게 튀니 변수가 많은 바운드볼 및 롱패스는 되도록 봉인해야 하는 상황인, 수중전.
“그러니까 지금 해 보자고, 지금만큼 시도해보기에 완벽한 상황이 나오기도 힘드니까.”
내 말에 잠깐 망설이더니, 태준이는 짧게 대답했다.
“···안 되면?”
“···”
그 순간,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짜악!
등짝을 갈겨버렸다.
“악! 아 얌마 뭐 하는 짓이야!”
“얌마, 뭐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신갈고 에이스라고 말하고 다니던, 고딩 시절 89년생 랭킹 1위였던 우리 태준이, 어디로 간 거냐고.”
뭐 이게 포지션 변경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안 되면, 그냥 오른쪽 주다가 또 시도해보고 또 시도해보는 거지. 선제골 넣어서 여유도 있잖아.”
“······”
흠, 표정이 미묘한데, 이거 뭘 더 말해줘야 하-
-야, 이준혁! 그만 떠들고 빨리 라인 복귀해!
아 시발. 너무 떠들었다. 저 인간들 어느새 중앙 라인에 볼 들고 왔네?
“야, 하여튼, 말아먹어도 되니까 괜찮아. 나 공 몰고 가면, 연습한 대로 해 보자고, 연습한 대로, 오케이?”
그 말과 함께 나는 등을 돌려 죽을힘을 다해 복귀하느라, 그 녀석이 무슨 표정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 측면에서 이준혁 선수, 박태준 선수에게 바로 논스탑 패스!]
나는 내가 말한 대로, 충실히 태준이한테 패스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 박태준 선수, 우왕좌왕하다 볼을 빼앗깁니다.]
단번에 잘 되진 않았다. 당연한 게, 일주일 정도 연습해놓고 바로 잘 되기를 바라면 도둑놈 심보지.
그래도.
[아, 이준혁 선수, 볼을 빼앗고! 바로 다시 박태준 선수에게 볼을 줍니다.]
[아까 실패했는데도 망설임 없이 볼을 넘겨주고, 바로 연계되는 움직임을 가져가네요!]
나는 계속해서 태준이에게 볼을 몰아줬다.
그게, 팀을 위해서 훨씬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우리 팀 윙어가, 수일 형님이랑 협상 형님이 나름 잘하고 있긴 하지만, 그 두 분을 제외하곤 솔직히 별로야.’
그렇다고 한 시즌을 두 명의 윙어만으로 치뤄나가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당장 오늘만 해도 협상 형님이 지난 제주와의 경기를 풀타임으로 치르고 난 후 지쳐 계셔서, 오늘 경기에서는 휴식을 취하고 계시지 않나.
그러니, 이런 선제골을 넣어서 여유가 있는 때에 태준이라는 친구에게 자신감을 살려주는 것이야말로, 팀을 위해서 옳은 일이다.
-뻐엉-!
[아, 박태준, 슈팅-! 그러나 골대를 벗어납니다.]
[···좀 많이 벗어났네요.]
“야! 잘 했어! 그래도 끝까지 마무리 됐네!”
이렇게 말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다르게 말할 것이다.
[아, 상주 상무, 영 공격이 풀리질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주 상무 입장에서는 황수일 교체카드를 꺼내들어야 할 수도 있겠어요, 오른쪽은 괜찮은데, 왼쪽 공격이 지금 너무 안 풀립니다.]
답답하다고, 그냥 쓰던 선수 쓰자고.
요즘 황볼트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폼 좋은 황수일이 있는데, 왜 굳이 이러냐고.
아직 시즌 초반인데.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시기의 중요한 경기인데. 왜 이런 실험적인 짓을 하냐고.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에 겁을 내면, 무슨 변화가 있는데?’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지금만큼 좋은 상황도 없다. 저 친구도 드리블보단 패스를 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환경이 갖춰졌고, 일찍 선제골을 넣어 여유도 만만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서 제자리걸음이란, 곧 쇠퇴다. 이제 우리는 어릴 때처럼 가만히 남들 시키는 것만 해도 실력이 팍팍 늘어나는 젊은이가 아니니까.
그러니 이럴 때가 찾아온다면, 실험을 시도해서
[아, 이준혁 선수! 다시 패스!]
[이야, 집요하네요!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계속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변화할 기회를 계속 줘 봐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박태준, 드리블 합- 아닙니다! 찔러주는 패스!]
[완벽한 스루 패스입니다! 이준혁! 이준혁!]
.
.
.
.
.
.
-삑! 삑! 삐이익-!
***
<2016 K리그 클래식 6Round>
[경기 종료]
상주 상무 3 : 0 포항 스틸즈
[골]
상주 상무 : 신준영 - 1, 77, 이기승 - 44
포항 스틸즈 : (없음)
***
-짝!
“악!”
아니 이건 또 뭡니까, 동기 형님.
“준혁아, 너 오늘 나한테는 왜 크로스 안주냐?”
“아오, 형님은 골 넣었잖아요. 그러니까 태준이도 골 맛좀 보라고 몰아준 거죠.”
그 순간.
-짜악!
“아오! 왜요 진짜!”
동기 형님이 한 대 더 때렸다. 아니 왜?
“준혁아, 동기 형 골 취소됐어, 준영이 골로 기록 바뀌었단다.”
“······”
죄송합니다. 선배님, 전 몰랐읍니다. 알면 선배님한테도 좀 드렸을 겁니다.
“아냐 아냐, 괜찮아, 준혁아, 계속 이렇게만 해라, 골도 아직 한 골밖에 못 넣은 주전 공격수 말 들을 필요 없어. 최다 득점자인 내 말을 따르거라.”
“야 이기승! 새꺄! 뒤질래? 너도 이제 겨우 두 골이잖아!”
그러나 기승이 형은 귀를 막으며 깐족거릴 뿐이었다.
“응 뭐라고? 미드필더보다 골 못 넣는 공격수 말이라 안 들리는데에에-”
“···180도 안 되는 루저가 까불어? 기승아, 너 오늘 죽었다고 복창하그라.”
“어, 어어, 야, 잠깐, 탭, 탭탭! 살려줘!”
어이구야, 개판이네, 나같이 착하고 순수한 어린이는 이런 데에 끼면 안 되겠지, 빨리 스파게티 받고 도망가자.
그렇게 빠르게 도망가 원래 스파게티 흡입하던 위치로 가 보니.
“왔냐.”
이미 태준이는 와 있었다.
“엉.”
“밖 시끌시끌한데, 뭔 일이야?”
“동기 선배가 넣은 골, 준영이 골로 바뀌었단다.”
“아, 그렇구만.”
그 말을 하고 난 이후, 난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들어줬다.
“전반 막판에 보여준 그 패스, 멋졌다.”
“시끄러 임마, 그 전까지는 계속 삽질하고 있었고, 결국 니 패스 받고 기승 형님이 골 넣은거라 내 어시스트로 기록되지도 않을 텐데.”
그 말에, 나는 싱긋 웃었다.
“원래 연계란 그런 거야, 임마.”
득점, 그리고 도움 정도만이 주목받는 축구에선, 참 주목받기 힘든, 드리블보다야 훨씬 덜 화려하고, 드리블보다 훨씬 덜 주목받는 플레이.
자신이 골에 관여했다고 해도, 기록되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것.
그게 바로 연계 플레이다.
그렇지만-
“감독님이 되게 칭찬해주시지 않았어?”
“······”
맞구만.
“그럼 된 거지. 임마. 직장 상사한테서 칭찬받는 것보다 확실하게 일 잘한다는 보증이 어디 있어? 그리고 이거 하다 보면 니도 어시스트 할 기회는 쭉 생긴다고.”
그 말에, 태준이는 피식 웃고는.
“그래, 그렇긴 하네.”
포크로 스파게티를 콕 찍어먹으며. 덧붙였다.
“계속 연습, 같이 하자. 도와줘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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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 가장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것과 다른 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