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1)
-4초, 5초.
“땡! 자, 다시 처음부터. 세션 시작하자.”
“아 씨, 벌써 5초 됐냐? 뭐 이렇게 빨라? 제대로 잰 거 맞아?”
이놈은 아직도 의심하네.
“코치님, 지금 몇 초에요?”
“초시계로 한 4.88초 됐으니까 제 반응속도까지 생각하면 거의 정확히 5초 맞다.”
그 말을 들은 태준이는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뭐, 왜, 뭐.”
“아니, 너 달리면서 초를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세는 건데?”
“시간 맞추기 내기 몇 년간 하다 보면 너도 이렇게 될걸.”
초시계나 스탑워치 가지고 시간 더 정확하게 못 잰 사람이 정확하게 잰 사람한테 매점 쏘기 같은 내기 하게 되면 알아서 잘 재게 되어있어.
“하여튼, 다시 처음부터.”
“···준혁아, 근데 이게 그렇게 도움이 될까? 이런 2대 3 훈련은 되게 기초적인 훈련이잖아.”
하이고 이 녀석 봐라.
“야, 니 장점이 뭐냐?”
“드리블이지.”
그래, 이 녀석의 장점은 드리블이다. 이 녀석이 고딩시절 89년생 최고 유망주로 꼽혔던 건, 단연코 완벽에 가까운 드리블 덕분이었다.
괜히 이 녀석이 10골 이상 넣은 시즌이 없는데도 프로에서도 박메시라는 거창한 별명이 붙은 건 그런 이유다.
“그리고, 솔직히 니 단점이 뭐냐?”
“···드리블이지.”
그러나, 지금 이 녀석의 최대 단점을 꼽으라면, 그것도 드리블이다.
“그래, 드리블러의 숙명이긴 한데, 넌 너무 컨디션에 따라 경기력 등락이 심해.”
드리블러들의 특징이 그거다.
잘 풀릴 때는 그냥 혼자서도 상대방을 다 유린할 기세로 박살 내고 다니며 팀을 캐리하지만, 잘 안 풀릴 때는 그야말로 모든 걸 쳐 말아먹고 만다는 점.
바로 이게 태준이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볼 컨트롤은 솔직히 당일 컨디션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도 많으니 특히 더 그렇지.’
우리는 볼 컨트롤 감각을 매일 발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걸 매일 같게 유지할 수는 없다.
애초에 시대의 2인자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경기 잘 안 풀린다고 짜증을 미친 듯이 부리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짓을 벌이는 게 일상인데, 우리가 매일 컨트롤 감각을 좋게 유지한다? 그건 불가능이다.
그러니 저런 유형을 성장시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다.
첫 번째는 고점을 미친 듯이 높이는 것. 태준이의 경우엔 드리블이 터졌을 때 훨씬 폭발적으로 수비진을 찢어버리고, 골을 넣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거다.
그렇지만- 이건 솔직히 힘들다.
‘게임이나 현실이나 능력치 높은 걸 더 능력치 높게 성장시키는 건 힘든 법이니.’
애초에 뭐든지간에 그렇다. 운동이건 공부건 90점을 100점으로 끌어올리는 건, 30점을 50점 맞게 끌어올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시즌을 소화하느라 바쁜 와중에 훈련을 통해 고점을 성장시킨다- 는 건, 솔직히 너무 어렵다.
그래서, 지금 태준이와 내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30점을 50점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뻥!
“나이-스! 이번엔 빨랐다!”
바로, 저점을 올리는 것.
그중에서도 수비수가 따라붙었을 때 드리블을 돌파 못 해도 질질 끄는 버릇을 고칠 수 있도록 볼 잡으면 5초 안에 패스, 혹은 투 터치 안에 무조건 패스하게 하는 훈련 위주로 진행했다.
‘물론 이거 한다고 버릇이 바로 고쳐지진 않겠지.’
애초에 드리블 질질 끌어대서 욕먹어댔던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들 중 약점을 고친 선수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적다. 그걸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 망가진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도, 이렇게 움직임을 익혀두면 저점 뜰 때 아예 경기장에서 마이너스인 수준에서는 벗어나서 0.5인분은 할 수 있을 테니까.’
-삐이익!
-자! 자! 이제 그만! 그만하자. 저녁 5시 반이다! 팀 훈련 종료!
어 뭐야, 훈련 끝났네.
“야, 그럼 이제 따라 나와, 팀 훈련 끝났으니까 가볍게 웨이트다.”
“···조금만 더 쉬다 가면 안 되겠냐?”
뭐래.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3일밖에 안 됐다. 이 녀석아, 네 눈물은 고작 그 정도 값어치밖에 안 됐던 거였냐?
“제주 원정에서 빠져서 진득하게 훈련할 시간 생겼으면 알뜰하게 써야지. 누워있을 시간 있으면 빨리 움직여 새꺄.”
“···으어어어. 그래, 가자···”
그래도 이젠 말하면 따라오기는 하는 거 보면 많이 좋아지긴 했네.
그래, 키만 메시가 아니라 실력도 짭 메시 수준까진 되어 보자고. 태준아, 니가 살아야 나도 공격포인트 더 많이 올릴 테니
***
<2016 K리그 클래식 5Round>
[경기 종료]
제주 UTD 4 : 2 상주 상무
[골]
제주 UTD : 송진형 1, 안현범 5, 64, 문상윤 46
상주 상무 : 김준성 87, 임협상 90
***
-털썩.
오늘의 경기를 마치고 원정 숙소로 돌아온 박 감독은, 짧게 내뱉었다.
“힘들군”
시즌 초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시즌 전에 말했던 3위로 가는 것이 조금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주에게 이렇게 꽁꽁 당해 버리다니.’
박 감독이 개막 전에 3위를 차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팀은 제주였다.
전력상으로만 보면 수원 블루버드가 더 유력한 3위 후보였지만, 그들을 꼽은 이유는 팀 스타일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공격진, 약한 수비라는 점이 말이다.
그렇기에 이 경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완패를 당해 버릴 줄이야.
“휴우- 힘들구먼.”
물론, 따지고 보면 나쁜 성적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패배한 경기는 우승 후보 서울과 작년 상위 스플릿에 든 제주에게 패한 거니까. 질 만한 상대한테 진 거다.
그러나. 질 만한 상대한테 지는 팀은 강등권에서 벗어나는 건 가능해도. 상위권을 차지하기란, 부족하다.
‘무언가 방법이···’
-똑똑
“감독님,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김 수석? 들어오게.”
-벌컥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다음 포항과의 경기 선발 문제 때문에 오게 되었습니다.”
“응? 벌써 말인가? 지금 경기 끝나고 바로 숙소로 돌아왔-.”
그러나, 박 감독은 말하다가 바로 깨달았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지금 정해야겠군.”
현재 시간은 4월 13일 20:00.
다음 경기는 4월 16일 16:00.
벌써 다음 경기가 68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대구에서 문경까지 돌아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더더욱 지금 전술과 선수 명단을 정해놓아야 했다.
“참 이 직업도 쉴 틈이 없단 말이지. 김 코치, 자네는 선수시절 코치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 알았나?”
“아뇨, 몰랐습니다. 하루하루 살 찌는 모습 보고 편하게 사는구나- 싶었죠.”
그 말에, 둘 다 쓰게 웃었다.
“크크, 하긴 다들 그렇겠지? 나도 선수 때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전 건강검진이라도 매년 받으니까 다행이죠.”
“하, 군무원이라는 건가? 부럽구만. 난 안 받은 지 2년이 넘었는데.”
그 순간, 수석 코치가 짖궂게 웃었다.
“부러우면 감독님도 말뚝을 박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런, 안타깝지만 사양하겠네. 건강검진 안 받아서 건강 나빠지는 것보다 군인 되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클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며 박 감독은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그럼, 오늘은 이걸로 전술을 정리해 보지.”
“네? 전술판이- 아, 없군요.”
“그래, 그것도 다 짐이지 않나, 승격하고 원정 예산이 작년에 비해 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제주도 원정 때문에 여유롭진 않으니, 아낄 수 있으면 좀 아껴야지.”
-톡, 톡.
“일단 쉬운 것부터 하자고, 포백이 낫겠지?”
그 말에, 수석코치는 쓴웃음을 지었다.
“놀리시는 겁니까? 제가 그건 실수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K리그를 관통하고 있는 전술은 쓰리백이었다.
그 동안 측면을 너무 잘 공략당하기에 쓸 수 없다던 쓰리백이, 유럽에서 안토니오 콘테가 무패 우승, 역대 최다 승점 우승의 기록을 써내려가게 되어 연구했던 성과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한 거였다.
당장 1위를 달리고 있는 서울이 쓰는 전술이 쓰리백이었고, 수원 블루버드도 정상급 풀백이 부상당해버리면서 쓰리백을 연구한다는 소문이 들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수석코치도 쓰리백을 조금 준비했었지만-
“그거 썼다가 서울한테 4대 0으로 털린 이후 저도 쓰리백 쓸 생각 버렸습니다. 그만 놀려주십쇼.”
“하하, 그래, 미안하네, 그럼 포백이지?”
“예, 저희는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지금 최고의 풀백진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두 말이 필요없는 국가대표 오른쪽 풀백 이형.
주 포지션은 오른쪽 풀백이지만, 양 쪽 풀백 어디서든지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성남 FC의 전 주장 박포진.
그리고, 포지션을 변경한 지 1년만에 놀라운 성장을 해내며 왼쪽 풀백의 주전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준혁까지.
상주 상무는, 그야말로 풀백 하나만큼은 걱정없이 대충 게임에서 선수들 체력 관리하듯이 한 놈 빼고 나머지 두 명 쓰고만 반복하면 오케이었다.
“일단 왼쪽에 이번에 휴식 준 준혁이 넣고, 오른쪽엔 둘 중 덜 지친 쪽으로 집어넣자고.”
“예, 센터백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른쪽 웅희 고정에 이번에 수고한 해성이는 빼고, 온규를 넣는 게 좋아 보이는군. 이게 밸런스도 가장 잘 맞는 것 같네.”
여기까진 쉬웠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그럼 여기서부터가 문제군.”
작년과는 다르게 올해 상무의 전술은 아직 확실하게 잡혀있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해 상무는 아직 5경기에 불과하지만 지난 시즌 주 전술로 썼던 4-4-2와 더불어, 4-3-3을 써보기도 하고, 4-1-4-1을 써보기도 했으며. 서울전에서 써보고 바로 폐기했지만 3-4-3까지 써봤다.
그래서 팬들이 이런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아니, 왜 굳이? 지난 시즌 잘 했잖아? 그냥 그대로 가면 안 돼?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시즌 썼던 상무가 사용했던 4-4-2는, 이제는 구시대의 산물이 된 클래식 4-4-2였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공격적인 전술’ 이라는 거다.
그 덕분에 챌린지에서도 퀄리티 있는 팀과 겨루면 꼭 실점을 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클래식에서 그런 전술을 그대로 쓴다? 강등 당하고 싶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우리가 시메오네식 4-4-2라던가, 지금 EPL 우승 경쟁을 하고 있는 레스터의 전술을 미리 배워왔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시메오네식 4-4-2는 강력한 골잡이가 없으면 반쪽짜리고, 레스터식 4-4-2는 작년 가을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아주 최근 전술이다. 유럽에서도 연구가 아직 확실하게 되어있는 전술은 아니었기에 굳이 그 전술을 생각하진 않았고.
그래서, 결국 아직도 전술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4-4-2는 버리는 게 맞겠지?”
“예. 너무 실점이 많으니까요.”
“하아- 이러면 득점이 문제로군, 아직은 협상이랑 동기가 잘 해주고 있다곤 하지만, 그 둘만으로는 분명 부침이 올 텐데···”
그 때, 김 수석이 의견을 내봤다.
“감독님, 한번 태준이를 써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박태준이? 그 친구를?”
잠깐 고민해본 감독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글쎄, 옛날 포항이면 몰라도 요즘 포항은 롱볼 축구라서, 그 친구는 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자고로 라인을 내리고 롱볼 축구하는 친구들을 깨뜨리는 데는 드리블 돌파도 좋긴 하지만, 그보다는 주변의 친구를 이용할 줄 아는 친구 아니던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최근 들어서 훈련에서 간결하게 2대 1 패스를 연결하는 빈도가 높아졌다고 하는군요.”
“흠? 그 친구가 그런다고?”
“예, 이준혁 그 친구와 달라붙어서 간결한 움직임 위주로 같이 훈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감독은, 그래도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애초에 탐욕스런 드리블러가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가 있겠는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
“···감독님?”
푸하핫-!
“가, 감독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아, 아닐세, 아니야.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떠한 계기를 통해 한 번에 바뀌기도 한다.
당장 작년 초까지의 자신이라면, K리그에 승격하고 나서도 생존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이 모습을 보라, 분명히 나쁘지 않은 성적임에도 더 나아가고 싶어하고, 3등이라는, 어찌 보면 허황된 목표처럼 보이는 등수를 향해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하루하루 놀랍게 변화해가는 그 친구에게 영향을 받아서, 말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이준혁이 그 친구가, 이번에도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탐욕스러운 드리블러를 패스 연계를 할 줄 아는 친구로 바꿔낼 수, 있을까?
“좋아, 그럼 그 친구를 한 번 넣어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