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해, 새로운 시즌 (1)
2015년 12월 31일.
오케이, 지금 저 친구의 팔을, 머리를 보면··· 안쪽으로 움직인다.
‘영건이의 위치는 내 오른쪽에서 살짝 뒤. 그리고 밖으로 지금 꽤 나와 있는 상황.’
이 상황이면-내가 움직여야 하는 방향은 이쪽. 그리고, 최종 패스 라인은- 여기다!
삐이익-!
“그러췌! 잘했어! 이제 아주 능숙한데?”
후유- 맞았네.
“좋아,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본격적인 수비로 들어가니까,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매일같이 느껴진다.
‘센터백하고 수비형 미드필더랑 제대로 발을 맞추는 게, 돌파 수비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크로스에서도 이렇게 중요하구나’
이제까지 이걸 수박 겉핥기로밖에 몰랐으니 리그에서 내가 1대 1은 그럭저럭 막아도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던 거였군. 그래도 티가 안 난 건 우리가 그냥 항상 가둬놓고 패서 그랬던 거였고.
“수고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어? 정말이십니까?”
웬일이래?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건가? 오늘은 일찍 끝나야지, 마지막 트레이닝 날이고, 연말인데.”
아, 어느새 그렇게 됐구나?
‘까먹고 있었네.’
요즘 그냥 진짜 군대 들어가서 휴식했던 이틀 정도를 제외하고는 하루하루 먹고, 운동하고, 자고, 이것만 반복하다 보니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다 보니 진짜로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저번 트레이닝과는 달리 마냥 거의 공짜 수준의 무료봉사는 아니셨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하지만, 돈을 들인 것 이상으로 내가 하루하루 달라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고.
“아닐세, 나도 자네들을 가르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네. 특히 전설적인 감독들의 전술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게 너무 만족스럽더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특히 중간부터는 현직 국가대표이자, 중국에서 유럽의 유명 감독들한테 배움을 받을 기회가 있었던 영건이가 같이 합류하면서 단체 훈련의 질이 훨씬 높아졌을 때.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훈련장 정리만 끝나면 바로 해산하게.”
““수고하셨습니다아-!””
그렇게 학생들과 함께 훈련장을 치우던 와중에, 내 눈에 굉장히 거슬리는 게 발견됐다. 영건이가 누워서 그냥 쉬고 있었던 거였다.
“얌마, 넌 왜 안 치워?”
“야, 난 공짜로 재능 기부하러 온 사람이야. 이런 것까지 하긴 귀찮음. 내 몸값이 얼만데.”
허이구, 새애끼. 틀린 말은 아니라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네.
“선배님들은 치우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그럴까? 나도 쉴까? 내가 4년이나 선밴데 치우는 것도 좀-
‘아냐 아냐, 쟤는 몰라도 나는 치워야지.’
건방져지려면 올해 K리그에서도 잘하고 나서나 건방 떨자.
그렇게 같이 치우면서 애들을 다 보내고 나자, 조용히 누워있던 영건이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도 느꼈지?”
“······”
“우리랑 같이 수비 호흡 맞춘 친구들, 꽤 하네, 잘하면 바로 광주에서 주전 먹을지도 모르겠다.”
“하아- 그러게나 말이다.”
그랬다. 영건이가 같이 학교에서 훈련한다는 소리에 축구학과와 축구부 후배들 중 꽤 하는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몰려와 단체 훈련을 진행했었고. 그 중, 우리와 수비 호흡을 자주 맞춘 두 명은···
“당장 K리그 챌린지 가도 무조건 주전 먹을 것 같은데.”
K리그 주전까지는 내가 많이 경험해보지 못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경험해 본 챌린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둘은 K리그 챌린지 기준으로는, 대구에서도 주전 경쟁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신인 선발에 뽑혔던 거였겠지만···’
그래도, 한 대학교에서 갓 대학을 졸업하는 12학번, 그러니까 93년생 친구들이 바로 프로에 뛰어들만한 실력을 갖춘 선수가 2명이나 나온다는 건 꽤 축하할 일이었다.
그리고.
‘긴장되네.’
나한테는 긴장할 일이었다.
나는 내일부로 세는 나이 기준 28살이다. 그리고, 저 친구들은 24살이다. 내가 실력이 조금 더 낫다는 생각은 있지만, 저 친구들이 4년 더 어리다.
그리고 그건. 실력이 내가 더 낫더라도 저 친구들을 선호하게 될 이유가 된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툭.
“뭐, 그래도 너무 불안해하진 마, 너도 발전했잖아?”
영건이가 어느새 일어나 나에게 어깨를 툭 치며 다가왔고,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 내가 정말 많이 발전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저 친구들도 발전하고 있잖아. 에휴- 참, 쉬운 게 없다, 없어.-”
위만 쳐다봤었는데, 어느새 아래에서 쫓아오는 후배들도 있네.
“으으- 하여튼 훈련도 끝났는데, 넌 어디 갈 거냐?”
“뭐, 전주에 와서 부모님이랑 시간 잘 보냈으니, 이제 서울 올라가야지, 넌? 바로 휴가 복귀?”
“아니, 아직 하루 남았어.”
12월 18일에 나와서 1월 1일 복귀니까, 아직 하루가 남았다.
“아하, 다들 새해는 바깥에서 보내고 싶었나 보네?”
“뭐 그렇지.”
애초에 군대에서 새해 보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리고 선배님들이 군대에서 새해는 평범한 휴일처럼 푹 쉬는 게 아니라, 막 이것저것 행사하느라 쉬는 시간이 방해받는다며, 반드시 휴가로 피하라고 일러준 기억도 있었기에 꼭꼭 새겨듣고 모두 주말에 나가기로 합의한 거였다.
“난 용인으로 올라가려고.”
그래도 휴가 나왔는데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는 만나 봬야 하지 않겠냐.
-*-*-*-
-삐리릭- 삐릭!
“어, 준혁이냐.”
“예- 아버지.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아니다. 치킨이 생각보다 늦게 와서, 딱 맞춰서 온 것 같구나. 손 씻고 옷 벗고 앉아라.”
그 앞엔, 운동선수들이라면 평소에 먹고 싶어도 웬만하면 피하게 되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달콤한 케이크, 튀김옷이 잔뜩 입혀진 후라이드와 양념 치킨.
비시즌이기에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치팅.
···물론 이게 경기력에 영향 주면 안 되니까. 이날을 위해서 체지방을 무려 8.2%까지 맞춰놨다.
그러니까.
“예엡!”
오늘 하루만큼은, 마음 놓고 즐기면 되겠지.
그렇게 대충 손을 씻고 식탁에 도착하자. 조금 이상한 걸 하나 볼 수 있었다.
“아버지, 그건 웬 와인이에요?”
“선물 받은 건데. 오늘 따보려고 한다.”
와인? 치킨에 와인···?
“···치킨에 와인이 어울릴까요?”
구운 치킨이면 몰라도, 최소한 이런 후라이드 및 양념치킨엔 맥주가 국룰이거늘.
“글쎄. 나도 선물 받은 거라서 잘은 모르겠구나.”
“그럼 그냥 맥주 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버지 클라우드 좋아하시잖아요.”
내 그런 물음에, 아버지는 살짝 웃으셨다.
“뭐, 치킨만 준비되어 있다면 네 말이 맞겠지만 케이크도 있고, 한우도 사다 놨으니 그거 구워서 안주로 먹어도 되고, 과일도 있다.”
아,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게다가 이런 날엔 뭔가 분위기 좀 잡고 싶지 않으냐?”
음, 하긴 그렇지. 분위기 잡는 덴 와인이 가장 좋지.
“그리고 이거 선물 받는지 좀 돼서 해치워버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김치냉장고에 넣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되어가니.”
“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
그 순간.
-똑!
와인 코르크 마개가,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
“······”
어휴, 하긴 아버지가 와인 딸 일은 별로 없으셨겠지.
“아버지, 제가 딸게요. 오프너 줘 보세요.”
“···그래.”
.
.
.
.
.
.
“자, 그럼 또, 우리 아들의 K리그 진출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쨍!
우음- 확실히, 치킨이랑은 별로 안 어울렸는데, 케이크랑 과일이랑은 아주 잘- 어울리네.
‘칠레 와인인가? 이름은 까르···미네르? 이렇게 읽는 거 맞아?’
에이 모르겠다. 술이란 건 기분 좋게 마시기만 하면 되는 거지.
“준혁아, 이제 슬슬 제야의 종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TV 좀 돌려봐라.”
“어,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래, 지금 핸드폰으로 시간 보니까. 11분 전이다.”
“···맙소사.”
한잔, 한잔, 비우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진 줄도 몰랐구나. 거의 4시간이 순식간에 녹았네.
“그럼 이것만 보고 슬슬 마무리할까요?”
“그래, 그게 좋겠구나, 마침 와인도 얼마 안 남았고.”
“옙.”
취하긴 했어도 리모컨 누를 정신 정도는 남아 있지.
-꾹
-어느덧 을미년도 10분이 체 안 남았고, 여기에 모이신 분들이 새로운 해, 병신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푸흡-
‘아니 잠깐, 내년 연도가 60갑자로 병신년이야?’
와 미치겠네, 이거 내년만큼은 60갑자 해를 오히려 보통 연도보다 더 쓸지도 모르겠다. 크크.
“참, 그러고 보니까, 이걸 안 물어봤구나. 너희 내년에 들어올 사람들은 이미 정해졌지?”
“예, 이미 발표 났습니다.”
그래, 11월 25일에 이미 발표 났다.
“그러면 그중에서 네 자리에는 누구누구 들어왔느냐?”
“뭐, 미드필더는 워낙 자주 뒤바뀌어서 뭐라고 하기 힘들고··· 왼쪽 풀백에는 전북에서 뛰던 이제명이란 선수가 들어왔습니다.”
이제명.
K리그 정규리그 통산 89경기의, 나름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
K리그의 맨시티라고 할 수 있는 전북에서 2013년 주전이었지만. 그다음 시즌부터 바로 밀려나고 밀려나며, 결국 작년과 재작년에는 각각 8경기, 3경기를 출전한 선수.
그리고, 91년생··· 선수.
큭큭- 그래, 생각해보면 지금 이 모습이 초라하기도 하다.
지금 저 친구가 커리어를 멈추고 당장 내가 K리그에서 부동의 주전을 차지하더라도 3시즌은 버텨야 저 위치에 오를 수가 있으니까.
내가 2살이나 많은데도 말이다.
‘···내년 내가 몇 경기를 뛸 수 있을까?’
지난 시즌, 내가 리그에서 선발로 뛴 경기는 총 32경기.
저번 시즌에 치른 총 51경기 중에서 32경기다. 3/5 수준.
그리고, 내년 9월 14일, 아마 한 30라운드 정도에서 내가 전역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마 내가 이번 시즌 앞으로 뛸 수 있는 경기 수는 18~19경기··· 정도겠네.’
물론 전역 직전에 열리는 여름 이적시장에서 K리그 팀과 계약하면 조금 더 출전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시즌 중반에 들어가는 거니 바로 주전을 차지하긴 쉽지 않을 거다.
후우-
“준혁아, 웬 한숨이냐?”
“이 나이 먹고 K리그 출전에 기뻐하는 것도 참 누가 보면 비웃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 갈 걸음은 훨씬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1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난 은퇴할 마음이 없다.
나의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은퇴할 때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거다.
“축구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요.”
90분 내내 두들겨 맞다가도.
마지막 추가시간 단 한 방에 역전이 가능한 게임.
그게 축구니까.
“···그래, 내 아들답구나.”
쪼르르-
“딱 마지막 잔이니, 이번 해 마지막 이번 건배사는 네가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뭐라고 할까?
‘음- 이왕이면 멋있고 좋은 건배사를 하고 싶은데.’
근데 취해서 그런지, 긴 건배사는 생각 못 하겠다.
그러니 그냥, 간결하고, 심플하게 가자.
“올해보다 더 나은 내년을 위하여!”
“위하여!”
-땡~
한 해가 지나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