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컵 (7)
[네, 상무가 연장전 들어서면서 두 명의 선수를 교체합니다. 박포진 선수, 김태열 선수가 투입되고 이기승, 한운상 선수가 빠지네요.]
[아, 이기승 선수, 후반전 마지막에 활동량이 확연히 줄어든 모습이었는데, 결국 빠지네요, 부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상암의 관중들은 더욱 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작년 K리그 최강 팀의 주전 미드필더이자 리그 베스트에 뽑히는 선수가 빠졌다는 것은, 분명히 희소식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요, 상주 상무가 궁여지책으로 4-3-3을 꺼내들었습니다.]
[나쁜 판단은 아닙니다. 이기승 선수가 빠지게 되었는데도 수적으로 밀린다면, 미드필더에서 답 없이 밀려버릴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숙련도가 좋을지가 문제죠.]
하지만, 부상이라는 놈은 모두에게 평등한 법, 서울도 선수 교체가 있었다.
[아, 차두리 선수가 빠졌네요. 고광민 선수로 대체됩니다.]
쓰리백 전술에서는, 측면 수비수, 그러니까 윙백이 혼자서 측면을 다 감당하기 때문에 자연히 체력 소모가 클 수밖에 없고, 더 몸을 갈게 된다.
그럼에도 버티고 버티던 차두리였지만··· 결국 후반 90분을 다 뛰고 나자, 한계가 온 것이었고, 말한 대로 감독이 교체를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두 팀 모두 마지막 한 장의 교체 카드만을 남겨놓게 되는군요. 남겨둔 이유는 연장 후반의 전술 변화를 생각하고 남겨두는 걸까요?]
그런 캐스터의 추측에, 해설위원은 살짝 다르게 생각했다.
[글쎄요, 제 생각엔 아마도 승부차기를 생각해야 할 수도 있으니 거기에 대비해서 카드를 남겨둔 듯 합니다.]
승부차기.
아무리 연장전 직전까지 기세가 좋었던 팀이더라도.
아무리 연장전 직전까지 기세가 다 죽어가던 팀일지라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갈릴 수 있기에 항상 이변이 쏟아져나오는 잔인하디 잔인한, 소위 11m의 러시안룰렛으로 불리는 녀석.
솔직히 그래서 모든 감독들이 바라지 않는 녀석이긴 하지만,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연장전 쯤 되면, 슬슬 감독의 머릿속에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작년 FA컵 결승이 승부차기로 끝났으니,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일까. 연장전에 들어서자,
[아- 이거, 서로, 결정적인 찬스가 안 나오네요? 둘 다 내려앉았습니다.]
서로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단, 살짝 무승부도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하긴 둘 다 내려앉기 좋은 포메이션이긴 하죠.]
서울의 3-5-2은, 측면 윙백들의 전진 정도를 줄인다면 바로 5백, 즉 수비수 5명으로 전환되는 거나 다름이 없기에 원래부터가 그냥 드러눕는 수비축구를 하기가 아주 쉬운 포메이션이고.
상주의 4-3-3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21세기에 새롭게 정의된 4-5-1식 4-3-3은 심심하면 텐백을 써 대는 그 무리뉴가 만든 전술인 만큼, 작정하고 내려앉을 경우에 매우 강력한 수비를 자랑하는 전술이란 말이다.
다만,
[아, 중앙에서 오스마르, 오스마르!]
둘 중 그래도 좀 더 공격적인 팀이라고 한다면, 서울이었다. 애초에 작년에 승부차기로 인해 준우승한 팀이 승부차기를 좋아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15분에 다가가기까지.
[아, 왜 이러는 걸까요? 서울, 영 공격이 안 풀리는 모습이네요.]
상주의 골대는 영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몰리나! 아, 공을 받지 못합니다! 패스 미스!]
[아, 몰리나 선수도 나이가 나이인만큼 지친 모습이군요, 하긴 이번 시즌 30경기를 넘게 뛴 상황에서 이런 연장전까지 소화하기는 너무 가혹하긴 합니다.]
체력 소모란 모두에게 평등한 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주도 지쳤지만,
[FC 서울의 골킥! 바로 역습! 들어갑니다! 오스마르, 다카하기! 김현성, 김현성! 아, 패스 미스가 나와 버리네요..]
[빨리, 빨리 쏴야죠! 슈웃-! 아, 김온규 선수가 몸으로 막습니다.]
서울도 지쳐있었다. 비록 일정이 상주만큼 박살난 일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즌 말인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이 정도까지 오면, 기술? 테크닉? 숙련도? 그런 게 모두 의미없어진다.
아니, 정확히는 단 두개만이 남는다. 체력, 그리고 그 체력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끌어다 쓸 정신력.
이 두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아, 김태열, 김태열 중거리 슈웃!]
[아, 하지만 골대 옆으로 빗나갑니다!]
···물론 상주도 정상은 아니였기에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하면서.
[연장전 전반, 종료됩니다!]
연장전의 15분이, 종료되었다.
***
<2015 KEB하나은행 FA컵 결승전>
[연장 전반 종료]
FC 서울 2 : 2 상주 상무
[골]
FC 서울 : 아드리아노 -70, 몰리나 - 90+1
상주 상무 : 한운상 - 67, 임협상 - 81
***
우부부부부- 퉤, 우부부부부- 퉤.
‘시벌, 게토레이가 참 달디 달긴 하지만, 입천장 찢어질 것 같네.’
그렇게 열심히 다들 입을 헹구고, 뱉고, 그러다가 마시기도 하는 사이에 한 2분쯤 지났을까.
-삐이익-!
심판이, 우리를 재촉하는 휘슬을 불었고, 우리는 다시 필드로 나가야했다.
‘후, 진짜 숨 쉴 틈만 딱 주는구나, 저 심판은.’
연장전에 들어갈 때는, 그래도 잠깐 모여서 이야기할 시간이라도 조금 준다. TV 광고 같은 게 짧게라도 들어가면서 우리가 휴식할 시간이 주어지니까. 심판도 전술을 수정할 시간을 주고.
그러나 연장전 전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때는? 그런 거 없다. 심판에 따라 다르지만, 만일 심판이 빠른 진행을 원하면,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한 2분? 3분? 정도의 시간밖에 안 준다.
그러니,
“자, 다들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을 테니 짧게 말하겠다. 내가 해줄 말은 단 하나다. 모두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 화이팅!”
“화이팅!”
우리는 마지막까지 힘내자는 말을 아주 짧게 하고, 다시 진형을 옮겼다.
15분, 15분 안에 단 한 골. 단 한 골이라도 넣으면. 우리의 승리고, 그게 아니여도 승부차기로 간다면 서울이 트라우마가 있을 테니 더 유리할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을까.
[아, 연장전 막판에 고요한이 투입됩니다]
[볼 배급과 킬패스는 온전히 다카하기에게 맡기고, 미들싸움을 완전히 압도해 보겠다는 거겠죠? 고요한 선수가 올 한 해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체력과 활동력만큼은 입증된 선수니까요.]
서울은, 마지막까지, 끝까지 우리를 강하게 압박해 왔다.
이 정도면 따라잡겠지, 이 정도면 따돌렸겠지. 할 만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그게 아니라며, 너희는 아직 간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 했다.
물론 우리도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봤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 고요한 선수, 그야말로 미드필더진을 갈아 버리고 있습니다! 엄청난 활동량입니다!]
워낙 연장 막판에 들어온 선수라 우리와 절대적인 체력의 차이가 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통산 출장 200경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선수와 우리의 클래스 차이일까.
분명 올 한 해, 중미 자리에서 영 별로인 모습을 보여주다가 주전 경쟁에서 밀려난 별 거 아닌 선수라고 들었는데도. 그 선수가 들어오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카하기, 다카하기! 아, 태클로 끊습니다. 하지만 골라인 아웃! 서울의 코너킥!]
우리는, 점점 웅크리기만 해 갔고, 그렇게 계속해서 위기만 반복되기 시작하자.
“야! 지금 몇 분 남았어!”
“2분! 2분 남았다!”
다들 연장전 들어 잘 보지도 않던 전광판을 보고, 시간을 재길 시작했다. 시작했다. 밀리니까 남은 2분간 어떻게든 버티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
노력할 만큼 노력해 봤고, 정말로 할 수 있는 전부를 해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짝 밀리고 있었다.
‘정말, 더럽게 힘들구나, 더럽게 힘들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축구에선 선수 시절에 뻑뻑 담배 피우거나 마약 빨아댄 선수들이 역대 최고 레전드고, 그 외에도 매일같이 문란하게 놀러 다니고 몸 관리도 제대로 안 하면서 유럽 빅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도 수두룩한데.
나는, 정말 한눈도 거의 안 팔고 이렇게 죽을 것처럼 뛰었는데도, 왜 이렇게 FA컵이라는 우승컵 하나 들어올리기가 이렇게 힘든 걸까.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정말로, 불공평하다.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아니, 두 배, 세 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자부할 수 있음에도 나와 그 선수들 사이에는 정말이지 까마득한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크로스, 올라갑니다! 이웅희! 헤딩!]
[막았습니다! 막았어요! 양원동! 엄청난 선방!]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좌절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당장 1년 전, 14시즌이 끝나기 직전의 나에게
-야, 너 상주 상무 합격했고, FA컵 결승전까지 올라가고, 방송국 단독 인터뷰도 녹화이긴 하지만 짧게 한 번 할꺼야.
이렇게 말해보자. 과연 내가 믿었을까? 아니다. 개소리하지 말라며 성질이나 냈겠지.
분명 인생이란 내가 바라는 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나보다 재능이 뛰어난 놈들은 바가지, 아니 매일같이 트럭째로 쏟아진다.
하지만, 하루하루 버티고 포기하지 않다 보면, 단 하나만큼은 확실해진다.
[양원동! 세컨 볼! 수비수, 걷어냅니다! 바로 역습입니다! 상주 상무!]
[이준혁, 공 받습니다! 고요한, 바로 달려듭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그게 아니라면 1년 전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아, 바로 짧게 연결! 김태열이 받습니다!]
조금 더 발전해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놀랍게도, 생각치도 못했던 것들이 벌어진다.
당장, 비록 이제는 많이 흐릿해진 기억이긴 하지만, 월드컵 16강에 한 번도 오른 적 없는 팀이 월드컵 4강에 올랐던 마법같은 일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 외에도 계속해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런 마법같은 일이 벌어지는 그런 곳. 그곳이 바로 이 무대다.
그러니. 안 될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될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그런 거 다 필요 없이.
그냥 생각 자체를 버리자. 될 거라는 생각도, 안 될 거라는 생각도.
[김태열, 다시 리턴! 이준혁, 달립니다! 달려요!]
물론 나는 잘난 놈이 아니니까 내가 여기에서 막 각성해서 메시처럼 드리블로 모두를 다 제끼고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오스마르! 이웅희! 달려듭니다!]
하나 하나의 선택을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그냥, 내 눈앞에 있는 이 선수를 어떻게든 꺾어버리겠다는 것만을 생각하자.
모든 감정따윈 잊어버리고, 저 선수들의 신체균형이 어떤지, 보폭이 어떤지, 그리고 나의 발은, 어디에 있는지. 이런 것들을 말이다.
누가 더 잘하든,
누가 더 못하든, 그런 걸 생각하지 말고.
[아! 알까기! 알까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박동기에게! FC 서울! 대 위기!]
[슈웃-! 막았습니다만! 공은 골대로 계속 흘러갑니다!]
[선수들, 달려듭니다!]
마지막까지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는 거다.
마법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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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익-! 삐익! 삐이이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