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컵 (6)
-삐! 삐! 삐이익-!
아··· 아.. 씨발!
-퍼버버버- 벙!
[아! FC 서울의 빨간 불꽃이 터집니다!]
[상주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안타깝겠습니다! 분명 10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죠!]
그랬다.
후반전에 기어이, 이형 선배님의 발끝부터 시작되어, 기승 선배님이 기가 막힌 킬패스로 임협상 선배님에게 찔러준 그 아름다운 공격이 통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젠장. 이게 뭐란 말인가.
2분, 2분을 남기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몰리나가 한 건 해줍니다!]
이런 꼴이라니.
***
<2015년 KEB하나은행 FA컵 결승전>
[후반 종료]
FC 서울 2 : 2 상주 상무
[골]
FC 서울 : 아드리아노 - 70, 몰리나 - 90+1
상주 상무 : 한운상 - 67, 임협상 - 81
***
고작 2분, 2분을 남겨두고 원상복귀라니.
[아, 이거 이러면, 상주는 FA컵이 2번 연속 연장전이네요!]
[그리고 작년과 똑같이 FA컵 결승전이 연장전까지 계속됩니다!]
너무나도 허탈했다.
[아, 득점 장면을 다시 한 번 보시죠.]
[예, 지금 보시다시피, 상주 상무가 포백 라인이 살짝 정리가 안 되어 있던 틈을 타서, 몰리나가 잘 파고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버텨오던 상주 상무 입장에서는, 방심한 게 너무 아쉽겠는데요?]
그 말에, 해설자는 고개를 저으며,
[음, 이건 방심보다는, 그냥 상주에 한계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말을 이어갔다.
[시즌 말의 경기를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즌 극후반일 경우 응원하는 팀이 시즌 초반의 모습보다 더 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때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그 어느 스포츠에서나. 형편없는 실력이나 수준을 보여주는 경기는, 보통 시즌 초반보단 중반, 후반에 오히려 잘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왤까요? 분명히 한 해 동안, 전술을 갈고 닦으면서 익숙해져야 할 텐데 말이죠.]
뭐, 이유야 많다, 감독의 전술이 읽힌다던지, 아니면 감독이 교체된다던지, 팀 케미스트리가 엉망이 된다던지··· 여러 개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는데.
[시즌 말은 선수들이 지쳐 있기 때문에, 어떤 스포츠이던지 간에 누가 더 잘싸우냐보단, 누가 덜 엉망으로 싸우냐는지를 겨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로테이션이라는 말이 있는 거고. 후보 선수가 중요하다는거다.
상대방보다 ‘덜 엉망인 경기를 해서’ 꾸역꾸역 이길 수 있게 해주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시즌 말, 이 FA컵 결승전은-
[결국 최소한 후반 몇 분은 체력전이 될 수밖에 없는데, 상주 상무는 그 점에선 굉장히 불리하죠, 시즌 말 굉장히 힘겨운 일정이었으니까요.]
물론, 결승전이라는 상황이 그들의 정신력을 극도로 집중시켰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가 온 거였다.
[음, 그래도 상주가 시즌 초반에는 꽤나 여유로웠지 않았습니까? 로테이션도 큼지막하게 돌리면서 체력도 아껴주고?]
[아무리 휴대폰 배터리를 평소에 꼬박꼬박 아껴썼다고 해도, 급할 때 오래 쓸 수 있는 건 아니죠.]
배터리의 용량은, 정해져 있는 법이다. 배터리를 아껴쓰면, 그냥 배터리의 수명, 그러니까 내구도가 관리될 뿐이다.
선수도 같다. 선수를 평소에 아껴쓴다고 해서, 나중에 살인적으로 몰려있는 일정을 잘 견디는 건 아니다.
게다가, 상주는 또 하나의 악재가 있었다.
[상주는, 이 경기가 끝나고 또 다음 경기도 생각해야 하잖습니까.]
[···아, 그렇네요. 아직 챌린지 리그 순위가 확정나지 않았죠?]
확률이 적다고는 하지만, FA컵을 따도, 만일 리그 경기에서 지고 대구가 1위를 차지한다면 상주 상무 입장에서는 지옥이 펼쳐진다.
2위가 되는 순간 승강 플레이오프로 떨어지고, 그렇게 되면 승격하기 위해서 2경기를 추가적으로 이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2경기에서 혹시 패배라도 하면?
내년에도, 상주는 K리그 챌린지에 남아야 한다.
[반면, 서울은 이 경기에 뒷일 걱정따윈 하지 않고 힘을 쏟을 수 있죠.]
이미 K리그 시즌 우승은 전북의 우승으로 정해졌으니 남은 경기는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이 경기만 이기면 리그 순위에 상관없이 아챔 본선 진출이다.
무관의 시절을 벗어나 우승컵을 들 수도 있고,
더 이상의 순위싸움에 휘말릴 필요 없이 아챔 티켓을 얻을 수도 있으니.
FA컵만 우승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반면에 지면? FA컵 특성상, 우승자가 자격이 없을 경우 본선 티켓은 준우승자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리그 3위에게 간다. 시즌 마지막까지 지옥이 되는 거다.
그러니, 전력을 다할 수밖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거다.
[결국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이렇게 되면 서울이 훨씬 우세합니다. 연장전에 뾰족한 수가 있지 않은 이상, 상주는 힘들 거예요.]
-*-*-*-
찌익-찌익-
“······”
딸그락- 딸그락.
“······”
연장전 우리의 진영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서로 테이핑을 다시 감는 테이프 소리나.
진통제 병을 꺼내면서 딸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두 개가 아니면, 이미 쓰러졌을 테니까.
심지어,
“···감독님, 저,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교체 부탁드립니다.”
그 둘로도 안 되는 사람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 기승아, 수고했다.”
그 교체에 우리 진영은 한층 더 고요해졌다.
‘이기승 선배님의 교체···라.’
두 번째 골 어시스트를 해낸 장본인이자,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날카로운 패스를 날리면서, 상대편 수비수가 중앙 미드필더 주도권 싸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게 만든 사람이 빠진다는 건?
우리가, 미드필더에서 간신히 2인, 아니 내가 간간이 가담했으니까 2.5 인 정도이려나. 하여튼 그 정도로 서울의 3인 미드필더 조합을 버틸 수 있었던 근거가 사라진다는 거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태열이, 몸 풀어뒀지? 연장전, 시작하자마자 바로 투입이다.”
“···옙! 감독님!”
우리 진형에 남은 카드는, 10경기 남짓 뛰었던 김태열 선배님 뿐이다.
저 선배님의 실력이 나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K리그 베스트에 들었던 이기승 선배님에 비하면···
조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결국, 연장전 동안 우리의 중앙은 훨씬 밀릴 수밖에 없다는 거다.
‘젠장, 그렇다고 4-3-3을 쓰기도 힘든 게, 최태현 선배님이 오늘 뛰기는 좀 그러니···’
올해 미드필더 주전이자, 가끔씩 리그에서 쓰던 4-3-3의 포메이션에서 거의 항상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시던 최태현 선배가 있으면 지금 이 상황에 딱이겠지만. 그 선배는 오늘 아예 출전 명단에 없다.
FC 서울 소속이셔서, 본인도, 감독님도 고사한 탓이었다.
뛰어서 우리가 이겨도, 져도 문제니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 거였다.
결국, 포메이션 변경도 힘들다.
그 생각을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한 모양인지,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
그 순간.
짝짝-!
감독님이 박수를 치며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다들 지난 90분간 수고했다. 우리는 지금 이 전쟁을 지금까지는 훌륭하게 치뤄 왔다. 내가 그것을 알고, 너희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다.”
“······”
“하지만, 이대로라면 우리는 잘 싸웠지만 졌다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거다.”
이 말을 듣고,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잘 싸웠지만 졌다.
이 말은, 그 어떤 프로도 좋아할 수가 없는 말이다.
우리는, 잘 싸웠지만 졌다는 말보다는.
못 싸웠어도 승리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는 집단들이니까.
“다들 이 말은 듣기 싫을테지,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우리는 평소에 싸우는 것보다 훨씬 잘 싸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너희들이 FC 서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를 원한다면, 우린 평소에 하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해야만 한다. 이미 너희들이 더 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훨씬 더 말이다. 기승이의 공백이 보이지 않도록.”
그러고 끝인 줄 알았지만, 거기에 감독님은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하지만, 그건 어렵겠지.”
그 끝말에, 나는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이대로 포기하시겠다는 소리를 하시는 건 아니겠죠?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했다. 항상 우리에게
-FA컵을 선택할 테냐, 리그를 선택할 테냐?
그런 말씀을 하시던 분이니 말이다.
‘···젠장, 이렇게 끝나는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리고 추가 교체다, 박포진, 네가 들어간다.”
감독님이 추가 교체를 명하셨고, 순간적으로 나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선수 교체라는 건 아직 감독님이 경기를 포기 안하셨다는 소리긴 하지만, 박포진 선배님이 뛴다는 건, 왼쪽 풀백 자리의 교체를 의미했기에. 그리고 그건···
‘···내가 교체인가.’
그렇지만, 간신히, 간신히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게 어디야.’
이렇게 되면 측면이라도 훨씬 더 탈탈, 탈탈 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이라면 90분 동안 뛰면서 체력이 바닥난 나보다야, 포진 선배가 훨씬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물론 경기가 결정지어지는 타이밍에 내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지만.
···승리를 위해서라면, 설령 내가 못 뛴다고 해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내가 역할을 완전히 못했던 것도 아니고. 90분은 뛰었잖아. 이 정도면 됐어. 대충 차두리 선배님 드리블이 어떤 느낌인지 설명을 해드려야··· 겠다.’
그렇게 내가 마음속으로 포진 선배님에게 빠르게 전달해줄 정보 몇 가지를 추려내고 있던 도중. 조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운상이가 빠진다.”
잠깐, 뭐라고?
“기승이가 빠진 이상, 가만히 있으면 중앙에서 하염없이 밀릴 수밖에 없지, 그러니, 연장전 우리의 전술을 4-3-3, 정확히는 4-1-4-1로 바꾼다. 이준혁, 너는 왼쪽 중앙으로 이동한다.”
그 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이 조금 놀랐다.
분명 시즌 도중에 가끔 보여주던 4-3-3이긴 했지만.
그리고, 전술적으로만 따지면 이 방향이 분명 맞기는 하지만···
숙련도가 엄청나게 높지는 않다고 생각하여, 회의 끝에 기피했던 포메이션인데 감독님이 먼저 꺼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포메이션을 꺼내들자.
“저, 감독님, 이게 맞습니까?”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지금, 이걸로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감독님은 싱긋 웃었다.
“물론, 포메이션 하나 변화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 기껏해야 중앙싸움에서 밀리지 않게 버틸 수 있게 된 느낌일 테니 말이다.”
그랬다. 뭐 엄청난 변화는 아니였다. 이 포메이션으로 변화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길 거라는 보장은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믿고 싶다. 지난 1년간 여기가 자네들의 친정팀이 아님에도 내 지시를 잘 따라와준 너희들을 믿고 있고-”
“······”
“너희들이 트로피를 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렇기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쓸 수 있는 카드는 모두 꺼내들어 발악할 생각이다.”
그 순간, 우리들의 진영은 아직 조용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감독님께서 저렇게 우리를 믿는다는 말씀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모두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는 각오가 다시 선 것이었다.
그게, 승리라는 단어를 들으면 항상 불타오르는 프로라는 자들이니까.
“자, 그럼 너희에게 묻겠다. 포기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런가? 그럼, 올 한 해가, 정말 최고의 날들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원하는가!”
“예!”
“그러고 싶은 것이 맞는가!!”
“예!!”
“그럼 가자! 가서, 승리를 따내라!”
FA컵.
최후의 30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