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컵 (3)
축구에서 좋은 수비란, 그리고 좋은 수비수란 무엇일까?
먼저 좋은 수비부터 정의해보자면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보통 상대가 득점하는 과정을 어렵게 만드거나, 아예 진행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면 좋은 수비라고 할 것이다.
그럼, 좋은 수비수란 좋은 수비를 많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단언컨데. 아니다.
좋은 수비수란 거기에 한 가지 전제조건이 더 붙는다.
- ‘상대방이 득점하기 편하게 놔두는 치명적인 실수’ 가 없을 것.
수비라는 게 그렇다.
내가 가보진 않은 영역이지만, 수능에서 상위권 백분위로 갈수록 어려운 문제를 맞추냐, 맞추지 않느냐보다는, 푸는 문제들에서 실수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갈린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진실이라면, 수비가 바로 그런 녀석이다.
당장 89분을 잘 수비해도, 마지막 1분을 제대로 수비하지 못한다면 나쁜 수비수라고 욕 먹는 게 수비수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보면···
[아, 차두리, 위협적인 크로스-! 윤일록! 아, 골대를 벗어납니다. 상주의 골킥!]
나는, 아직도 좋은 수비수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빌어먹을.’
그래, 알고는 있었다.
K리그 챌린지에서는, 그럭저럭 봐줄만한 수비라고는 하지만. K리그 기준에서는, 아직 내 수비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 쯤은.
당장, 내가 풀백으로 전환할 마음을 먹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기초적인 개념 지식을 때려 박아주시던 교수님도 그러지 않았는가.
-당장 챌린지 리그 정도만 되어도 자네의 어설픈 수비는 찢겨버릴 가능성이 높으니, 최대한 큰 구멍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만 하자고.
그리고, 지금까지의 나는 놀랍게도 그것만으로도, K리그 챌린지에서 나쁜 수비수라는 소리까진 안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스피드가 됐기에 조금 판단이 느리더라도 달라붙을 수가 있었고,
피지컬적으로도 나를 압도한다고 말 만한 풀백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K리그 팀과의 경기에서도 엄청나게 다르지는 않았다. 확실히 좀 더 공-수 전환이 빨라서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K리그 2에서 수비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차두리라고 해서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퍽!
‘윽, 젠장. 밀렸다.’
[차두리, 상대방을 제치고 돌파합니다. 바로 러닝 크로스-! 아, 아쉽지만 빗나갑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생각이 얼마나 헛된 생각이었는지 나는 온 몸으로 느껴야 했다.
[참, 이 선수가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지금도 보면 웬만한 선수와의 속도 경쟁, 그리고 몸싸움을 하더라도 결코 밀리질 않거든요.]
[그렇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그리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언제나 유럽 체구를 가진 선수들하고도 잘 싸워줬던 차두리거든요.]
‘젠장할, 서른 여섯인가 서른일곱인가 나이 드신 걸로 아는데 이 피지컬은 도대체 뭐야?’
이번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는데, 왜 은퇴한다고 하는건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키, 키부터가 일단 사기다. 저거 신발 벗어도 180cm 가까이 되어 보인다.
힘? 사람들이 로봇이니 뭐니 하던 때가 있었던 만큼, 나도 힘이 나쁜 편까진 아니지만. 저 선수에게는 못 당했다.
‘그나마 내가 우위에 있는 점이라면 스피드랑 체력일텐데··· 그 우위도 솔직히 많이 우위는 아니야.’
스피드? 솔직히 내가 아주 약간 더 빠르긴 하지만, 차두리 선수도 준족이다. 솔직히 크게 차이나지 않고, 순간적인 판단을 누가 더 빠르게 하느냐에 따라 갈리는 정도다.
그리고 체력? 그나마 차두리 선수가 나이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나마 이게 내가 조금이나마 나은 점이 될 수 있겠지만.
마지막, 은퇴하는 경기에서.
그것도 결승에서, 체력을 아낄 사람이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사실상 내가 피지컬적으로 우위인 부분은. 없다.
그리고 그 소리는.
[아, 상주 상무, 다시 오른쪽으로 공격을 전개 시도합니다.]
[그렇죠, 이형 선수와 임협상 선수의 공격만큼은, K리그에서도 통할 정도로 강력한 조합이니까요!]
지금 당장은 괜찮겠지만. 점점 우리의 공격루트가 오른쪽으로 한정되면서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렇다면 전반전 동안에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겠지만, 후반전으로 가면서 상대방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공격은 나빠지기만 할 거다.
나 때문에, 말이다.
아직 전반전이 15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나는, 지금 당장은 저 차두리 선수와 1대 1로 맞서 싸우면. 진다.
‘훗, 서글프네.’
그렇게 발전했다고 생각했음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니.
-짝!
하지만. 좌절할 시간따윈 없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 경기는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결승전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도, 인생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결승전이다.
‘내년에, 전역하니까.’
2016년 9월 14일. 나는 이 구단에서 떠나가게 된다.
K리그가 3월 말에 시작해서 11월에 끝나니, 시즌의 3/4 정도는 소화하겠지만. 10월, 11월에 열리는 경기들은 소화할 수 없다는 거다.
그리고, FA컵은 아무리 빨라도 결승이 보통 10월에 진행된다.
이 소리는, 내년에 상주 상무가 우승이라는 영광을 차지하더라도. 나는 그 끝을 함께 축하해줄 수 없다는 거다.
올해가, 이 팀에서 끝까지 뛸 수 있는 마지막 시즌이고. 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이 팀에 영광을 선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아 차두리 선수, 다시 한 번 돌파 시도!]
그러니, 다시 한 번 다짐하지만, 좌절해 있을 시간따윈 없다.
좌절해도 되는 건, 경기가 끝나고 패배했을 때 뿐이다.
지금은 당장은 내가 약자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아, 이준혁 선수,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수비하네요, 저러면 크로스는 잘 못 막을 텐데요?]
포기할 건 포기하면서.
[차두리 크로스-!. 하지만, 이번에도 골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남아 있는 부분들을 쥐어짜내 봐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성공만 한다면,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방법이 말이다.
‘······통할까?’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꽤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이 전술의 원류인 4-3-3에서 실행하는 방식도 아니고, 4-4-2에서 실행하는 거니까.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간신히 어찌어찌 버티고 있는 우리 쪽의 균열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젠장, 이건 아니야. 그냥 수비적으로 하다가 한 박자 빠른 역습을 하는 게 더 나을 -’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네는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급급한 프로 쪽인데도 해도 될까? 라고 하면, 일단, 하고 본다는 게 참 특이해. 그건 최고를 노리는 선수들이 가지는 태도거든.
어젯 밤, 감독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
그리고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지었다.
사실, 나는 나를 절대 도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행적은, 겁에 질린 자의 행동뿐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기껏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그러니까 포항의 U-18팀에 입단해 놓고, 얼마 안 되어 다른 학교로 바로 전학을 갔다.
전국 각지에서 실력 있는 선수들이 모인 그 곳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시절에 우승했을 때, 드래프트 지명 제안이 들어왔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영건이라는 빛나는 재능을 가진 친구를 보고. 프로가 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프로를 포기하고, 선생님이라는 도피처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고양에서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을 때도 동일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K리그 챌린지에서 한 팀의 주전으로서 뛸 수는 있는 수준이었고. 다른 구단을 알아보면서 약 2년간 더 도전할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은퇴를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프로라는 선택지는 선생님이라는 안락하고 안전한 선택지보다 훨씬 더 불확실한 미래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무에서 연락이 왔을 때도 그랬다.
은퇴하고 선생님을 하기로 했다면, 과감하게 그냥 선배들 시선이나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그냥 상무 입대를 포기했어도 됐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혹시나 선생님이 실패한다면, 이 쪽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할 텐데. 그걸 거절하면 이 바닥에서 낙인 찍힐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는, 돌이켜보면 항상 선택을 미루거나, 도전에서 도망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오스마르, 몰리나에게 패스, 몰리나-?]
[아, 상주 상무가 가로챕니다! 그리고 바로 빠르게 중앙 쪽으로 연결합니다!]
[잠깐, 처 친구,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죠? 차두리 선수가 저기 있는데 마크를 안 하고 중앙에서 협력 수비를 했네요?]
결과만 보면 참 웃기게도, 난 지금 정반대의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결국 프로에 도전했고.
나는 결국 은퇴하지 않았으며.
당당히 지금 FA컵 결승전이라는 이 자리에 서 있다.
물론 따져보면 다 이유가 있긴 했다.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프로의 길을 선택했고. K리그에서 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풀백이라는 가시밭길을 자처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항상 도전하는 인간처럼 보여졌고. 그 때문일까.
마지막이라는 생각하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행동과, 경기에서의 플레이가 어느새 도전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니. 부디, 내일 보여주게. 자네가 둘 중 어떤 선수인지 말이야.
이런 기대까지 받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이웅희, 다카하기- 가로챘습니다! 바로 오른쪽으로 전개하는 이준혁!]
[어어, 이거 좀 이상한데요, 이준혁 선수? 왜 저렇게 뛰죠? 일반적인 풀백의 움직임이 아닌데요?]
하지만, 지금, 나를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도전했다고 말하기 위해서.
[아, 이준혁 선수, 중앙으로 침투를 굉장히 자주 하기 시작했는데요. 이건 무슨 변화인가요? 해설위원님?]
[······]
[해설위원님?]
[아, 아 예, 죄송합니다. 저걸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도박적인 전술을 꺼내들었다.
펩 과르디올라가 바이에른 뮌헨에서 선보이긴 했지만, 수행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 까다롭기도 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굉장히 마이너한 전술을 말이다.
‘티키타카도 어렵긴 하지만, 솔직히 오히려 이 전술보다도 안 쓰이지.’
펩 과르디올라의 바이에른 뮌헨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기엔 조금 부족했기도 했고, 많은 감독들이 티카타카보다 오히려 쓰는 데 힘을 덜 기울이는 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대로 활용한다면. 그리고, 풀백이 제대로 활동만 한다면
중앙의 숫자싸움에 우위를 점하고, 빌드업에 도움이 되는 전술이기에
전술가들 사이에서는 꽤나 연구되고 있는 이 전술을.
[인버티드 풀백(Inverted Fullback) 전술입니다.]
설령,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난 도전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