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컵 (2)
2015년 11월 15일, 일요일, 13 : 30,
상암월드컵경기장.
FC서울의 승리를-
짝짝!
FC서울의 승리를-
짝짝!
FC서울 오늘 승리하리라- FC서울의 승리를!
짝짝!
‘와우.’
그 동안 많은 응원가를 들어봤지만, 오늘은 차원이 다르다.
‘아직 경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2만 명이 넘게 들이차고 응원가를 부르니까. 장난이 아니야. 이게 상암이구나. ’
···물론, 상암이라서, 그렇게 많이 왔다는 거 치곤 아직도 1층에 빈자리가 좀 있어보이는 건 옥에 티긴 했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으로 보는 엄청나게 많은 관중에,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야, 야, 정신차려 임마, 수원 팬이라는 놈이 이런 거 보고 감탄하냐? 너도 이 정도 관중은 많이 봤잖아.”
옆에 서 있던 태준이가 태클을 걸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신기했다.
“아니, 그래도 선수로서 이러는 건 처음이라서. 좀 신기하네.”
내 기억 속의 최다 관중은 한 5천 명 수준이다. 대전이 2부리그에 있을 때 원정으로 갔던 때, 그리고 저번 FA컵 성남전, 그리고··· 청년 FC 그 때.
하여튼 그 때도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러 와 줘서 정말 놀라웠었는데, 지금은···
‘2만 5천이라니.’
세상에. 도저히 못 믿을 관중 숫자다.
-알레 알레 알레오~오~오~~ 알레오~
아직 경기장 스타디움 안임에도 이렇게 우렁차게 울리는 응원가가 아니고선, 못 믿었을거다.
“아이구, 챌린지 촌놈 티 팍팍 내네. 서울은 원래 이런 거 몰랐어? 수원 팬이라면서 뭐 이런 거 가지고 놀라? 너 수원 팬 아니지?”
···근데 이 귀여운 놈이 자꾸 껍신거리네.
“응, 아무리 팬 많이 와도 2만 명도 못 채우는 종합운동장이나 쓰는 성남 팬은 꺼지세요.”
으디서 근-본 수원에 돈지랄만 하다가 돈지랄 못하니 빌빌대는 성남 따위가 비비려고 한단 말인가.
“응, 뭐라고요오-? 2010년에 FA컵 하나 들고 5년 넘게 우승컵도 없는 놈들이 하는 소리라 안 들리는데에-”
“······”
씨발. 저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네. 성남은 작년에 FA컵 먹었지···
‘이이씨, 망할 전북만 아니었어도 리그 한 번 정도는 더 먹었을 텐데, 맨날 2등해가지고···’
그렇게 생각해보니, 조금 짜증났다.
서울은 12년에 리그 먹었는데, 왜 우리는 08년 이후로 리그 우승이 없는 거냔 말이다. 트레블 노린다고 하면서 지나고 보면 맨날 2~3등만 하고.
그런 생각을 하자.
‘좋아, 이겨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네.’
조금 더 승부욕이 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원의 팬으로서, 서울이 우리보다 리그도, FA컵에서도 더 최근에 우승했다고 하는 건, 못 봐주지 않겠는가. 이게 뭔 감정인지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은, 리버풀이 맨유 우승 싫어하는 거랑 똑같다고 보면 좀 알거다.
물론, 솔직히 조금 쪼잔한 이유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감정이든지 간에 끌어모아서 승부욕을 불태워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 오 우~리의 서울~ 오 우~리의 서울~ 서울~은 오~늘도 승리를향해 전진, 전진하리라~
저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르는 응원가에 잡아먹혀 버릴 테니까.
-자자, 이제 선수들, 입장 해주세요!
그래. 지금.
-입장 시작합니다!
드디어, 나는, 상암에 왔다.
-*-*-*-
[예! 이번 한 해 한국축구의 최강팀은 누구인가를 가리는, FA컵! 그 결말이 지금 오늘 나오게 됩니다! FC 서울 대 상주 상무! 상주 상무 대 FC서울의 대결!]
평소와는 달리, 오늘따라 캐스터가 평소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에, 기합이 바짝 들어간 느낌이었다.
바로, 지상파 방송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만의 지상파 방송이냐! 이건 놓칠 수 없어!’
그래서인지, 캐스터는 오늘을 대비한 공부도 하고 오면서 열정적으로 진행을 펼치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주 뜻깊은 날입니다! K리그가 아니라, K리그 챌린지, 즉 하부리그 팀이 최초로 FA컵 결승전에 오른 날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다행히, 해설위원도 공부를 하고 왔기에,
[예, 그렇습니다. 2005년 울산 현태미포조선이 내셔널리그 소속으로 결승에 오른 적은 있긴 한데, 정식적인 하부리그라고 보긴 어려우니 말이죠]
그러한 TMI에 가까운 진행이 처음이었지만, 잘 받아칠 수 있었다.
[예, 그리고 2년 연속 기업구단과 시민구단의 맞대결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 시민구단들이 생겨날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는데, 생각보다 잘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게다가 작년에 바로 그 시민구단이 우승을 차지했으니까요.]
그렇게 신변잡기를 몇 마디 한 후.
[예, 경기 시작 전, 라인업이 빠지면 섭하죠! 먼저 홈 팀 FC 서울의 선발 라인업입니다!]
[이야, 확실히 서울, 공격진과 미드필더진 이름값이 아주 화려합니다.]
12년도부터 연령별 대표팀을 월반하기 시작하며, 서울이 무려 10억에 달하는 바이아웃을 주고 데려오고, 14년도 아시안 게임에도 뽑히면서 홍의조와 함께 92라인에서 두 번째 공격수를 다투고 있는 윤일록.
20골-20어시스트라는 미친 기록에 도전할 정도로 강력했던, 서울의 영광의 시절을 함께했고, 이번 시즌도 K리그 어시스트 2위를 찍은 살아있는 K리그의 전설이자 서울의 전설 몰리나.
그리고 여름에 대전에서 이적해오며 훨씬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현 K리그 득점 2위의 아드리아노까지.
그야말로. K리그를 가끔씩 보는 팬들이라면 모두 알 만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상주의 라인업입니다!]
[한 쪽은 변형 3-5-2, 한 쪽은 정석적인 4-4-2군요! 경기 시작 전 분석을 해 보도록 하죠, 해설위원님은 이번 경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을 들은 해설위원은 조금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다른 건 몰라도, 공격진 하나만큼은 서울이 훨씬 막강하군요.]
상주도 K리그 챌린지에서 2위와 득점이 10점이나 차이나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퍼부은 만큼 약한 공격력은 아니였지만···
[그렇죠, 아무리 상주가 강력하다곤 해도 그건 K리그 챌린지 기준이니까요. K리그 득점 2위, 도움 2위의 조합만큼은 못 하죠.]
물론 과거를 추억하는 서울 팬들 입장에선 역대 최강이라 불리던 왕년의 ‘데몰리션’ 조합보단 못 하지만, 그래도 서울이 수비적인 쓰리백 전술을 쓴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막강한 공격력이었다.
게다가, 상주는 악재가 더 겹친 것이.
[예 그것도 있고, 지금의 상주는 센터라인이 다 갈아엎어진 상태니까요.]
[아, 그렇죠! 상주의 주전들 여러 명이 지금 전역한 상태죠!]
[그렇죠, 대표적으로 국대 공격수 이정현 선수부터 시작해서 중앙이 다 갈아엎어졌습니다.]
중앙의 골키퍼, 중앙 수비수, 중앙 미드필더, 중앙 공격수가 모두 바뀌다니, 솔직히 웬만한 팀이 이러면 시즌 접어야 할 위기다.
물론 그 자리를 대체한 선수들이 더 업그레이드 된 선수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기존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선수들이 전역하고 나서야 주전을 차지한 선수들이 더 기량이 뛰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제가 보기엔, 중앙은 사실상 뭐, 서울의 압승이라고 봅니다. 솔직히 중원에 배치되어 있는 선수들의 숫자 차이만 봐도, 이건 명백해요.]
상주 상무의 중앙 미드필더 2명, FC 서울의 중앙 미드필더 3명. 한 명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 차이는 매우 크다. 중앙 미드필더의 숫자만 가지고 전술을 분류하는 방식도 있으니 말이다.
[이걸 보면 중앙은 솔직히 상주가 먹을 수 없어요. 물론 이기승-김환성이라는 조합이 수비력과 패스 전개를 모두 갖춘 좋은 조합이긴 하지만, 그래도 몰리나-다카하기-오스마르의 조합은 공격력, 패스 전개력, 수비력 모두가 갖춰진 완전체입니다.]
중앙 공격이 약하고, 중앙 미드필더의 조합도 밀린다. 그 말은, 사실상
-상주 상무는 이길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리고 캐스터 역시 그런 뜻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는 말씀은, 상주가 서울을 이기기가 힘들다는 말씀이신가요?]
[······.]
[해설위원님?]
[어렵긴 하죠. 어렵긴 합니다.]
프로 축구는, 웬만해서는 선수의 실력이 차이난다고 할지라도 그 차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수의 숫자 배치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데.
지금 해설위원이 보기에 상주는 선수의 숫자 배치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중앙에서 3명 대 2명의 대결로 서울이 유리한 상황이고, 서울의 수비 쪽에서도 3명과 2명의 대결입니다. 이미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는 두 곳에서 서울이 훨씬 더 유리해요. 개인적으론 4-3-3을 쓰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설위원이 왜 박 감독이 저런 전술을 썼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몇 번 써 보지 않은 4-3-3을 서울과의 경기에 꺼내들긴 힘들었겠지.’
이미 선수들이 4-4-2에 많이 익숙해져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지는 것만큼 허무한 것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불리한 상황인데도 이렇게 나오시다니.’
개인적으로, 해설위원은 상주 상무가 무난하게 갈 경우 승리 가능성을 30% 정도라고 봤고, 대부분이 이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4-3-3이라는 도박수를 낼 경우엔, 승리 확률을 절반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겠지만, 허무하게 질 수도 있을 거라고 봤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해설위원은, 박 감독이 후자를 선택하길 바랬지만. 결국 박 감독은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그건, 해설위원에게 이렇게 보였다.
-승리를 위해, 모험을 하지는 않겠다.
‘안타까운 일이구만, 박 선배님, 모험을 멈춘 감독에게 성장이란 없는 법인데, 더 크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여기에서 멈춰버리셨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설위원은 감췄다.
[그래도, 상주에게 아예 파고들 구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자고로 해설위원이라면, 그 어떤 싸움이라고 해도 국대 경기가 아니라면 50대 50의 싸움으로 포장할 줄 알아야하는 법 아니겠는가.
[측면. 측면을 지독하게 파고들면, 승산은 있을 겁니다.]
-*-*-*-
-측면, 측면을 잘 파고드는 것만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쓰리백이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은 수비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쓰리백이 현대 축구에서 도태되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 측면을 파고들지 못해서니까 말이다.
그러니, 포 백인 우리가 측면을 파고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고.
-그리고, 우리는 측면 라인업만큼은 이번 시즌, 중반 이후로 바뀐 적이 없지.
선수들의 조직력만 봐도 그게 맞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렇지만, 명심해라, 측면을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기력하게 패할 수밖에 없다.
중앙을 내준만큼, 측면에서 엄청나게 많이 벌어가야 했다는 거다.
-명심해라. 상대방의 측면 공격에 비슷하게, 반반을 간다면 우리는 힘도 못 쓰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감독님의 말씀을 떠올린 나는, 다시 한 번 내 앞에 있는 선수를 쳐다봤다.
‘···저 선수를 상대로, 말이지.’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왔던 선수 중. 가장 높은 고점을 가졌던 선수.
그리고, 이번 연도 여름에야 국가대표를 은퇴했을 정도로. 올해 은퇴를 한다고는 해도 아직 정정한 현역의 선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선수.
대한민국 대표팀이 가장 높게 날아오른 2002, 2010 월드컵의 주역이었고
대한민국 A매치 76경기를 뛴, 전설 중의 전설.
‘차두리···’
내가 이 선수를, 막아야.
아니, 압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