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67)

선택의 순간 (1)

2015년 10월 18일.

-삑, 삑, 삐이익-!

[경기 끝났습니다! 고양이, 리그 1위 대구를 잡아냅니다!]

“이예에에에쓰!”

“우와아아아! 만세, 만세, 고양 만세! 사랑해요! 고양! 친정팀 만세!!”

“준혁아! 고양 쪽한테 선물 보내라! 상품권이라도!”

우리가 이 난리를 치는 이유? 당연히 있었다.

“시발, 요즘 리그 개판이어서 꼼짝없이 플레이오프 준비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기회가 왔다! 왔다고!”

분명 리그 중반까지는 우리의 순위표는 이랬지만.

현재, 39라운드를 치루고 있는 지금의 순위는, 이랬다.

왜 이랬냐고? 지난 2달간. 우리의 경기 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9월에 주전으로 뛰던 선임 선수들이 병장 물 먹고 살짝 해이해짐과 동시에 말년휴가까지 취소되면서 멘탈이 조금 터졌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패를 좀 쌓았고.

10월의 군인체육대회가, 그야말로 사람을 잡았으니까.

2일, 4일, 4일, 6일, 8일, 10일, 14일, 17일.

야구처럼 하루에 두 경기씩 뛰는 더블헤더 일정까지 소화해가면서, 이번 달에만 총 8경기를 뛰었다.

그래서, 10월의 리그 성적도 당연히 꼬라박았고, 덕분에 그 여유롭던 기세도 다 꺾이면서 결국 2위로 내려왔던 거였다.

그래도.

‘하아- 그래도,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래도, 시즌 전반기에 많이 벌어둔 덕분에 현재 우리는, 1경기를 덜 한 상태로 승점이 2점 뒤진 상태.

우리가 다음 경기에서 승리만 한다면, 다시 1위를 재탈환할 수 있다는 거다.

다만.

“아, 맞다. 우리 다음 경기 명단 어떻게 나왔냐?”

“···싹 다 후보더라. 주전급은 너랑 나밖에 없을걸.”

“젠장, 진통제 더 먹어야 하나?”

우리가, 이 최악의 상황에서 앞으로의 경기에서 이겨나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라는 거겠지.

-*-*-*-

2015년 10월 20일, 안양종합운동장.

-삑! 삑! 삐이익!

[아, 상주 상무,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선제골을 잘 넣었는데. 수비 집중력이 너무 떨어져 있었네요, 마지막 고비를 잘 넘기지 못했습니다.]

***

<2015 K리그 챌린지 39 Round>

[경기 종료]

FC 안양 2 : 1 상주 상무

[골]

FC 안양 : 김효기 50, 72

상주 상무 : 이창훈 5

***

그 순간, 고요하던 인터넷 중계방에서, 채팅이 꽤 올라왔다.

-ㅋㅋㅋㅋㅋㅋ

-꼴 좋다. 심보를 고약하게 쓰니까 벌 받는 거야.

-ㅇㅈ ㅋㅋㅋㅋ.

-안양 파이팅!

평소에는 아주 가끔 스포츠 토토를 산 사람들의 반응이나, 불법 베팅 홍보만이 올라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꽤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그런 것과는 별개로, 캐스터는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진행을 시작했다.

[요즘 상주 상무가 평소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K리그 챌린지의 최강자, 상무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요?]

[아무래도, 오늘은 어쩔 수 없다고 봐야죠. 지금 필드에 있는 선수 중, 리그 5경기 이상을 소화한 선수가 딱 둘뿐이었습니다. 박태준 선수와 이준혁 선수뿐이었죠.]

그랬다. 오늘 상무는 국대급, 주전급 선수라고 할 수 있는 이형, 박동기, 배환일, 이기승, 박포진 등등을 모조리 제외하고.

초기 FA컵에 잠깐 출전시켰거나, 체력안배용 스쿼드 플레이어에 불과한 선수들을 대거 투입했다.

[왜 이렇게 나왔던 걸까요? 오늘 경기는 자력으로 1위를 다시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고, 끝나고 나면 그래도 25일까지 5일간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 주전을 쓸 법도 했는데 말이죠.]

그런 캐스터의 의문에, 해설위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게, 참 복합적인 문제라서 말씀드리기 힘든데, 그래도 한 마디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상주 상무가 너무 잘해서 더 힘든 상황에 부닥쳤기 때문이라고 봐야겠네요.]

[···오, 흥미로운 분석이군요.]

나름 오래 방송해 온 짬이 있어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넘어가긴 했지만, 캐스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

-???

채팅방에 수많은 물음표가 찍히는 동안, 방송을 내보내던 카메라맨은 조금 더 설명을 유도해보라는 표현을 했다.

[음, 설명해 드리죠. 지금 상주 상무가 처한 문제점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혹한 일정입니다. 타 챌린지 팀이 지난 3주간 3경기를 소화하는 동안, 그들은 10경기를 소화했습니다.]

그 말에, 상주 상무가 망하길 바라고 중계까지 와서 비난의 채팅을 날리던 청년 FC의 팬들도 잠깐 손가락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한 달에 7경기를 소화하는 월드컵이 굉장히 힘든 일정이고, 한 달에 10경기를 소화하면 선수들이 갈리는 미친 일정이라고 하는데. 3주에 10경기라니. 이건 미친 걸 넘어서 광기 아닌가.

[그런데, 사실 이 중에서 한 경기는 상주가 만일 축구를 잘 못 했다면, 소화 안 해도 됐을 경기입니다.]

그 말에, 캐스터는 드디어 해설위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달았다.

[아, 그렇군요! FA컵 4강전이 있었군요!]

[예, 그렇습니다.]

10 ~ 17, 20일의 경기 일정이면, 그래도 정비할 시간이란 게 있었겠지만,

10, 14, 17, 20일의 경기 일정이니, 정비고 뭐고 가능할 리가 있었을까. 이동하고 휴식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그 경기만 아니었다면 일주일간 푹 쉬었다가 리그를 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됐죠.]

[그렇군요,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니,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그런 캐스터의 말에, 해설위원은 이번에도 잠시 고민하다.

[···글쎄요, 저는 상주가 FA컵 결승에 진출한 게, 축하할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른 답을 냈고.

[···예? FA컵 결승 진출이 축하할 일이 아니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캐스터는 이번에야말로 벙쪄버렸다.

물론, 4강이 되도록 지상파 방송국의 생중계가 단 한 경기도 없는 대회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FA컵은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팀을 가리는 토너먼트 대회로, 상금도 2억에 달한다. 그런데 축하할 일이 아니라니?

[물론 상주 상무가 FA컵 결승에 진출한 건, 아주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상주 상무의 경우엔 다른 팀보다 조금 덜 축하할 일인 건 확실합니다. 우승해도 반쪽이거든요.]

그 말에,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아, 그렇군요. 상주 상무는 군경팀이죠.]

[예, 군경팀이기에, 우승할 때 주어지는 가장 큰 혜택인,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주어지지 않죠.]

그렇다, 상주 상무는 군경팀이다. 그리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는 규정상 군경팀이 뛸 수 없다.

FA컵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혜택이, 바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본선 티켓인 것을 생각하면, 상주 상무의 우승은 반쪽짜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FA컵 경기가 잡혀버린 바람에 시즌 막판까지 전혀 휴식기 없이 리그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 이거 ㄹㅇ임?

-ㅇㅇ, 다 끝나고 11월 말에 할 수도 있긴 한데, 상주 상무가 승강 플레이오프 갈 수도 있고 하니 웬만하면 리그 도중에 할걸.

-ㄹㅇ? 꼬시다 ㅋㅋ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간, 모두 놓치기 마련이죠. 슬슬 상무는 선택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리그냐, FA컵이냐.]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여기서 물러나 보겠습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2015년 11월 1일

-삐이익! 삐익! 삐익!

와, 이겼다··· 시발, 이겼다! 이겼다고!

이걸로 승점은 대구랑 65점 동률이지만, 득실 차 2점 차이로 우리가 1위 탈환이다!

당연히, 마음은 날아갈 뜻이 기뻤지만.

“으어어··· 끝났다···”

“으어어···그래, 이겼다. 이겼어···”

모두둘, 다들 주저앉아 버리거나. 벌러덩 누워버렸다.

기뻐할 기운도 빠진 상태였던 거다.

“야, 얘들아, 일어나라.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고, 뛰어야 근육 안 뭉친다.”

코치님의 그 말에, 모두가 상대팀에게 인사를 하러 간신히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코치님, 이미 그 영역은 지난 지 오래예요···”

현재 우리 팀이 치른 경기는 리그 37경기, FA컵 5경기, 세계체육대회 5경기로 총 47경기.

정상적으로 시즌을 진행했더라도, 이미 뻗을 시기였다.

“알아, 알아, 그래도 움직여, 움직여야 남은 경기에서도 큰 부상 안 당한다. 얼른 일어나서 인사하고 쿨다운 한 다음, 얼른 가서 라면 먹자.”

“···으어어, 알겠습니다아···”

아, 그래, 라면은 불기 전에 먹어야지, 암.

“근데 안성탕면 말고 신라면은 없어요?”

그 말을 듣자, 코치님이 눈을 부라렸다.

“안 돼, 매운 건 절대 금지다. 라면 끓여주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많이 양보한 거야 이놈들아, 싫으면 다시 스파게티나 먹어.”

젠장. 어쩔 수 없군. 그냥 안성탕면이라도 잘 먹어야지.

.

.

.

.

.

후- 후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오와와와아, 아 뜨거.”

“크아아아아- 으아. 개쩐다.”

아, 라면 진짜 오랜만에 먹는다. 한 1년 만인가? 1년은 살짝 안 된 거 같긴 한데.

“후후, 후룩- 후룩-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그렇게 한참 동안 다들 아무 소리 안 하고 조용히 평균 3봉지 정도를 비웠을 때쯤. 코치님이 제지하셨다.

“어휴, 라면 냄새, 야, 얘들아, 슬슬 그만 먹어라.”

“아뇨! 부족합니다! 최소한 2봉지씩 더 주세요!”

“아, 안 돼 이것들아, 적당히 처먹어. 나중에 또 저녁 시간 되면 밥 먹을 놈들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 반응 속에서, 모두가 군의관을 바라보는 순간. 군의관은 조금 고민하는 ‘척’ 하더니, 결론을 내렸다.

“음- 괜찮을 겁니다. 지금 다들 체지방 함량은 오히려 떨어진 상태니까, 오늘 하루 정돈 치팅하세요.”

그리고 그 순간.

“우와와아! 장영훈! 장영훈! 장영훈!”

“장영훈! 장영훈! 장영훈!”

모두가 경기 끝났을 때보다도 더 거친 목소리로 호응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웃었지만, 나는 살짝 쓴웃음이 나왔다.

‘젠장. 우리 진짜로 개고생하고 있구먼.’

사실, 우리가 시즌을 보내는 동안 완벽하게 식단을 관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도 사람이다 보니 중간중간에 이것저것 건강에 안 좋다고 소문난 것들을 조금씩 집어먹기는 한다.

예를 들자면, 몰래 피자랑 치킨을 시켜 먹는다던가. 하는 건 애교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한 3파인트, 그러니까 1리터를 사 와서 통째로 비워 버린다든가 하는 사람도 있다.

뭐, 그걸 코치님들도 모르는 게 아니고, 팀닥터들은 당연히 더 잘 안다. 그래서 최소한 앞에 있을 때는 저렇게 안 풀어주는 편인데 이렇게 풀어줬다는 건.

‘우리가 지금 몸에 지방이 없어질 대로 없어진 상태라는 거구만. 8% 언저리인가 보네.’

축구 선수가 지방이 없고 근육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축구 선수의 ’적절한’ 체지방 함량은 8~11%다. 그 이하로 떨어지면 민첩성은 조금 더 좋아질지 몰라도, 체력의 감소 문제가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근데 대부분 이걸 모르는 이유는, 살이 쪄서 잘 못 뛰는 운동선수는 꽤 흔하고 못 하는 게 확 티 나지만, 살이 너무 빠져서 경기력이 안 좋아지는 경우는 훨씬 드물기 때문이다. 티도 덜 나고.

그런데, 군의관의 모습을 보니까 우리는 지금 팀 전체가 그 드문 케이스였다.

‘흐- 진짜, 우리 몸이 한계까지 왔다는 소리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새로운 라면을 집어 들던 가운데.

“자, 자, 다들 라면 먹느라 바쁜 건 알지만, 중요한 공지가 내려와서 지금 말해줘야겠다. 먹으면서 들어라.”

감독님이 라커룸에 들어오더니, 안내 사항을 전달해주셨다.

“FA컵 결승전 일정이 발표되었다. 11월 15일, 일요일이다.”

그 순간, 나를 포함한 몇몇은 젓가락을 움직이다가 의문을 표했고, 빠르게 모두 들이킨 후에 질문했다.

“감독님, 저희 14일 안산하고 리그 경기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연맹이 바보 같고 허접한 곳이라고 해도. 그래도 연맹이다. 우리보고 하루 걸러서 경기를 하라는 미친 짓을 하진 않······을 텐데.

“그래서 안산과의 경기가, 22일로 미뤄졌다.”

음, 다행이야. 믿고 있었다고, 연맹.

그러면, 우리의 일정은 앞으로 7일, 11일, 15일, 22일로 확정···

‘아, 미친.’

젓가락이 그대로 멈췄다.

“그래, 11일, 우리는 전직 스페인 국대였던 선수를 데려와서 후반기 리그 성적 1위를 찍고 있는 수원과의 경기를 치르고, 쉴 틈도 없이-”

“......”

“K리그의 영원한 우승 후보, FC 서울과의 경기를 치르러 상암 원정을 가야 한다.”

그 말에, 모두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 시즌 중반에 물어봤던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보겠다. 무엇을 선택하고 싶으냐?”

리그냐, FA컵이냐.

“......”

이번엔, 대답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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