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67)

막장 경기 (2)

뭐,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

이것도 어찌 보면 국제전이다.

비록 군대 사람들만 모아놓아 놓고 하는 거긴 하지만. 어쨌든 국제전이란 거다. 그래서인지, 내 입장에선 좀 신기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좀 노골적으로 팔로 상대 수비 돌려버렸는데도 휘슬을 안 분다고?’

솔직히, 드리블 돌파를 한다곤 했지만 체력이 없어서. 걍 그냥 힘으로 밀어버리는 식으로 뚫고 있는데. 휘슬을 안 분다. 전혀.

‘그럼, 어디 한 번 이것도 되나?’

그 생각과 함께, 한번 좀 더 대놓고 팔을 사용해봤더니.

“Putain!”

-삐익!

이제서야 휘슬을 불었다.

‘음, 아예 대놓고 손으로 잡는 정도여야 휘슬 부는구나?’

뭐, 파울 불리긴 했지만 이 위치에서의 프리킥 정도야 큰 문제도 아니지.

확실히 리그전이랑은 많이 다르다. 다들 좀 플레이가 거칠고. 심판도 휘슬을 좀 덜 분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애초에 같은 리그에 있다면 서로 선후배 관계다보니, 아무리 프로다 프로다 해도 심한 파울은 조금 자제하는 면이 있고, 정말 심하다 싶으면 심판에게 항의하고 하면서 엄청 큰 반칙까진 안 하지만.

‘오늘 보고 끝낼 사람들끼리 뭔 상호 존중을 하겠어.’

그래서일까.

-arbitre! Arbitre! que fais-tu?

-Das ist genug!, ah, That’s enough!

완전 도떼기 시장이 따로 없는 느낌이다.

알제리 선수들은 뭔 말을 하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언어, 그러니까 프랑스어만 쓰고.

심판은 영어를 쓰긴 하는데, 종종 앞에 이상한 언어가 튀어나오는 거 보니 독일 사람이라 독일어가 종종 튀어나오고 있는 것 같고.

“야, 저거 뭔 소리같냐?”

“글쎄, 심판한테 대충 왜 파울만 주는 거냐고 묻는 거 아니겠냐? 정 궁금하면 니가 좀 물어보던지.”

“···아니, 사양할께. 나 영어 약한 거 알잖아.”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외국인 무서워. 영어 무서워. 저리 가세요.

뭐, 하여튼 중요한 건. 정말 대놓고 하지만 않으면 저 심판은 다 봐주는 것 같다는 거다.

-삐익!

그럼 뭐. 마음껏 써줘야지.

-Recule! Reculez!

뭔 소린진 모르겠지만, 아마 욕이겠지?

‘아, 편안- 하네.’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다.

자고로 피지컬이 딸리는 선수들이라면 티나지 않는 반칙 스킬을 몇 개씩은 가지고 있는 것이 생존 방법 아니던가.

그동안 측면으로 전환해서 만나는 선수들이 그렇게 피지컬이 좋지 않기도 했고, 여기 와서 피지컬이 좋아진 것을 느끼기도 해서 별로 안 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휘슬 안 불면 이야기가 다르지.’

몸싸움할 때, 스킬 원. 팔꿈치를 애용하라. 내 허리에 손 올리고 팔꿈치로 옆에 붙은 상대방한테 툭툭 밀어대면.

-야 꺼져! 시발놈아!

이런 반응이 오기 마련이다. 물론 저 친구들은 알제리 사람들이니까.

“Casse-toi connard!”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를 쓴다. 뭐, 그래도 대충 원래 듣던 말이랑 비슷한 말이겠지? 자고로 욕은 만국 공통어 아니던가. 몰라도 표정이랑 몸짓에서 다 드러난다.

‘흠, 그리고 심판 보니까 내 쪽이 아나라 딴 쪽 보네’

그럼 뭐, 또 꼼수 써줘야지. 볼 오는 순간 점프 못 하게 살짝 유니폼도 좀 잡아당겨 주고. 대충 피하려 들면.

“Merde!”

자국 안 남게 손톱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잘 찝어서 살짝 허벅지를 꼬집어주면 만사 오케이다.

그렇게 좀 몇 번 긁어주자. 이 친구도 좀 열받았는지.

“Putain bordelle de la merde!”

표정 보니 대충 -이 개같은 새끼야! 같은 느낌의 말을 쏘아붙였다.

근데, 친구야. 이런 프리킥 기회에서 그렇게 욕할 시간이 있니?

“마이볼!”

“야! 뻥 차! 뻥 차!”

-뻥

많이들 올라온 상태에서 그렇게 나한테 욕하는 데에만 집중했다간 순식간에 역습 쳐맞는다는 걸, 너도 알 텐데 말이야. 물론 우리 팀 공격이 골이 될 확률이 높진 않···

-삐이이익!

어, 근데 들어갔네···?

***

<2015 Men's Military Football Tournament - Group A>

[The second half]

South Korea 1 : 2 Algeria

[Goal]

South Korea : Y. Lee 54.

Algeria : Abid 10, Benkablia 42

***

조금 운이 좋게 골이 들어가긴 했지만 한 골을 우리가 따라잡자. 모두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 중 첫 번째는.

-빠악.

알제리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반칙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우, 열 좀 받았나보네?’

근데 미안한데, 친구야.

-삐익-!

그렇게 동작 크면 경고 받아요.

“Pourquoi? Pourquoi!”

그렇게 억울하다는 표정 짓지 마렴, 솔직히 하더라도 나처럼 심판이 안 볼때 해야지. 볼이 오고 있는데 그렇게 티나게 하면 당연히 경고라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개판이 되었던 우리들도, 살짝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긴 아무리 휴가를 못 받았어도, 개같은 일정에 짜증나더라도. 지는 걸 좋아하는 프로는 없다. 리그 순위싸움이 치열해지면 말년 휴가를 자진 반납하는 선수가 매년 꽤나 나올 정도니.

‘아마 그래서 대대장도 별 생각 없이 우리 휴가를 단체로 금지시키고도 저리 뻔뻔한 거겠지만···’

하여튼 중요한 건 이거다.

패배의 분위기로 가득차 보이는 이 축구장에, 미세한 승리의 기운이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이 불씨를 좀 더 피우는 거겠지.’

-삐익-!

오케이, 마침 재미있는 기회도 나왔다. 딱 하프 라인 살짝 위쪽에서 스로인이라니.

“박 선배님, 그리고 태준아. 내가 스로인 해도 되냐?”

“응? 뭔 짓 하려고? 그냥 중앙에 있어.”

“아니, 니 등 좀 쓰게.”

그 말에, 태준이는 숫제 미친놈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야, 연습게임에서 하던 짓 하게? 그게 통하겠어?”

“야, 통한다니까? 우리 연습게임에서 이걸로 재미 좀 봤잖아.”

이거 실제로도 있는 전술이라고.

“하, 맘대로 해라. 박 선배님, 제 뒤에서 언더래핑 준비해주세요.”

“응? 뭐 하려고?”

“예, 제가 아마 등으로 선배님한테 패스 줄 겁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

박포진 선배가 좀 이상하게 바라보긴 했지만, 뭐. 별로 상관없다. 이 기술은 조금 어이없을 뿐이지. 충분히 좋은 스로인 전술이니까.

‘자, 태준아, 연기, 연기 잘 해라.’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공을 잡고 던지려 할 때, 태준이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급한 듯이, 측면 다 뚫어버릴 기세로.

그러자, 알제리 쪽 수비수가 두 명이나 그 쪽으로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que diable?!”

나는 볼을 태준이의 등에 맞춰서, 포진 선배에게 원 투 패스를 해냈다.

그 순간, 잠시 당황했는지 선배님의 볼 터치가 살짝 길긴 했지만, 다행히 알제리 놈들도 저 쪽으로 볼이 갈 꺼라고 생각을 안 했는지 반응이 살짝 늦었고, 그 틈을 타 선배님은 빠르게 수비수들이 달라붙지 못한 상황에서 중앙으로 침투했다.

페널티 박스와 중앙 센터라인 사이. 거기에 수비수가 안 달라붙는다면.

-뻐엉-!

아주 맛깔난 스루 패스를 넣을 기반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삐이익-!

‘빙고! 페널티킥!’

그 순간, 우리 선수들의 눈빛이 모두 돌아왔다.

그래, 이거다.

정말 쓸데없는 경기라고 해도. 설령 원치 않게 시작된, 의욕 없는 경기라고 해도 승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승리를 원한다.

그것이 프로라는 길까지 온, 승부욕에 미친 놈들이니까.

“자, 자 PK 넣고 깔끔하게 역전 가죠! 가즈아!”

***

<2015 Men's Military Football Tournament - Group A>

[Game end]

South Korea 2 : 2 Algeria

[Goal]

South Korea : Y. Lee 54, J.P Park 74(PK)

Algeria : Abid 10, Benkablia 42

***

“흠흠, 역시 감독님이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조 1위를 따내고 메달을 확정짓다니, 자랑스럽습니다. 사단장님도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와 시발. 웨엑. 저게 방금 전반전까지 우리보고 욕했던 인간 맞냐? 태세전환이 우디르급이네.

‘1위 진출했다고 저렇게 태도가 뭐 휙 바뀌냐?’

그렇게 내가 뭐 씹은 표정으로 경기장을 보고 있을 때.

“bonjour?”

···내가 매우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뭐야. 왜 이쪽으로 오는 건데. 저리 가. 저리 가라고.

“quel âge as-tu ?”

왜 나한테 와서 굳이 프랑스어로 말 걸고 있는 거야? 최소한 영어로 하라고 이 새끼들아.

“tu ne parles pas français?”

아, 안 되겠다.

“Speak English or korean. OK? I can’t speak french.”

그렇게 내가 외국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길고 긴 문장을 만들어 대답해준 후.

나는 도망쳤다.

“He- WAIT!”

애초에 외국인이랑 영어로도 대화하기 힘든데 왠 이상한 놈들이 프랑스어 들고 달려오고 있는건데. 외국어 더 듣기 싫다. 머리 아파. 한글을 사랑합시다.

그렇게 관계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구석탱이로 도망가자.

“어, 너 여긴 왜 왔냐? 대대장이 나 찾아라더냐?”

그··· 대대장님한테 반기를 든 권 선배님이 나왔다.

“아, 아뇨. 그냥 외국인 피해서 여기 온 겁니다. 선배님.”

“야, 나 전역하기 직전인데 아직도 선배라고 하냐, 거리감 느끼게. 그냥 형이라고 해.”

“아.. 네, 형.”

그렇게 잠시 뻘쭘하게 서 있자, 선배님이 질문을 던져왔다.

“대대장 지금 어떻더냐?”

“뭐,어쨌든 조 1위로 결승전 진출하니까 아주 싱글벙글하던데요.”

고작 조 1위 가지고 왜 이런 소란을 피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긴 조 1위가 바로 결승전 치루고 2위하면 그냥 바로 3, 4위전 뛰는 구조라서 대대장이 저렇게 난리친 거였다.

“그래? 그럼 대충 덮겠구만. 최악이 반성문 좀 쓰고 근신이겠네.”

그렇겠···지? 그건 다행이네.

“저기, 선배님.”

“응? 왜?”

“만일 저 대대장이 가만히 안 있었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대대장은 대대장이다. 여기는 군대고, 솔직히 독하게 마음먹으면 우리 그냥 별의별 죄목 아무거나 붙여서 조져버릴 수 있지 않나?

그런 의문이 함축된 질문에, 선배님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야, 그럴 일 없어. 저새끼들도 뒤 구린 거 많아서 크게 우리한테 갑질 못해. 너 저번에 실기평가할 때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어떻게 이런 놈이 서류 통과했나- 같이 말이야.”

있긴 했지, 2부리그에서 만나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로 왔나 싶은 분들 한두명··· 어, 잠깐. 설마.

“뒷돈 받아먹고 서류 통과해줬다고요?”

“그래, 암암리에 몇몇 놈들은 그렇게 하거든. 실기는 완전 실력이니깐 거기에서 조금 걸려지긴 하지만, 실기보다 서류 비중이 더 높아서 한 두어명은 그렇게 들어온다고.”

미친.

“뭐 뽑는 데 인원수에 제한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넘어가는 거지만, 이거 들추면 솔직히 난리날껄. 그니깐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면서 서로 안 들추고 가는 거다.”

“······”

근데 그건 자폭이 될 수도 있···

“그리고 솔직히 그거 아니어도 여차하면 정현이 있으니까 걔 필두로 상무의 국가대표 선수 혹사라든지 그런 걸로 여론전하면 돼.”

아, 그렇군. 그 방법도 있구나. 국대 만세 만만세.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던 선배는.

“아. 그래도 그건 좀 아쉽네.”

갑자기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 성인 국제전이자, 결승전이 될지도 모르는데. 못 나가다니 좀 아쉽다.”

“······”

“우승.... 우승 좀 해 보고 은퇴하고 싶은데 그 날이 올려나? FA컵도 4강까지 올라왔는데, 못 뛰고 간다는 게 참 아쉽다. 아쉬워. 그냥 영창 가더라도 11월까지 뛰고 싶은데, 안 되려나?”

그 말에, 나는 침묵했다.

아마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했을 거다.

“훗,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너희는 남은 경기, 잘 마무리해라. 난 슬슬 대대장 만나러 간다.”

“···수고하세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이것도 우승하고, 꼭 FA컵도 들어라. 우승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니까.”

“···예!”

그렇게, 한 세대는 떠났다.

그리고, 우리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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