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67)

막장 경기 (1)

2015년 9월 24일, FA컵 4강 추첨식

FA컵 4강전 추첨은 아주 단순하다.

각 팀의 감독들이 ★(0), 1, 2, 3이 적힌 숫자를 뽑으면

1번 팀 VS 3번 팀

★(0) 팀 VS 2번 팀

대진표가 이렇게 짜지고, 숫자가 낮은 팀의 홈 경기장에서 한 판 붙는거다. 그리고 이건 결승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니까.

-상주 상무, 3번.

“아아아악!”

“아 썅, 이러면 결승전까지 자동 원정이잖아. 또 원정이냐!”

우리는 4강, 결승 모두 원정을 치뤄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거다.

“야, 우리 10월 일정 어떻게 되냐?”

“리그 경기는 4일 한번 밖에 없긴 한데. 다른 게 문제죠.”

“···아, 맞다. 젠장, 그 세계군인체육대횐지 뭔지 한다고 했지?”

세계군인체육대회.

솔직히 뭔 대회인지 여기에 오기 전까진 하나도 몰랐고 관심도 없던 대회긴 하지만, 여기에 와서 보니까. 정말 이 쪽에선 중요하게 여기는 대회였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부대에서

-리그 승격보다 이 대회가 더 중요합니다. 리그 승격 못 해도 이 대회에서 1등하면 임기 연장해드리죠.

-이번 경기는, 사단장님께서 직접 참석하셔서 경기를 지켜본다고 하셨습니다. 꼭 좋은 성적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했다던데. 하하. 참···

‘우리한텐 전-혀 안 중요한 대횐데 말이지···’

막말로, 이거 관심 있는 사람 있기는 해? 관중들도 하나같이 그냥 군인 친구들 끌고와서 응원시킨다고 하던데, 그럼 그 친구들이 경기 대충이라도 볼까?

‘절대 그럴 리 없지.’

K리그 보면 봉사시간 채워준다거나, 공무원들한테 억지로 표 강매시켜서 억지로 보게 한다고 해서 그 친구들이 경기 제대로 봤나? 아니지. 그냥 다들 핸드폰하고 논다.

‘응원할 마음 없는 사람들 앞에서 경기 뛰는 건 정말 기운 빠지는데···’

그럼 이거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중계라도 하나? 그것도 아니다. 아니면 뭐, FIFA에서 정한 공식 A매치에 속하기라도 하나? 아니다.

결국 우리에겐 전혀, 전혀 쓸모없는 대회라는 거다.

물론, 경기를 뛰는 것 자체가 선수에겐 중요한 경험이자 자산이 되니. 우리들도 웬만하면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거 우리 일정 어떻게 된다고 했었지?”

“30일, 2일, 4일, 6일, 8일 다섯 경기는 확정이고, 저희가 4등 밖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10일 경기까지 한번 더 할껄요.”

“···이야, 우리 진짜 죽어나가겠구나.”

일정이. 너무 미쳤다.

축구선수들이 갈려나가는 일정의 기준은 보통 월드컵을 기준으로 삼으면 편하다. 총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동안 7경기 정도를 치루면 엄청나게 빡빡한 일정이라는 거다.

근데, 그 월드컵도 평균 4일 간격으로 경기를 치르는데. 이 미친 대회는 무려 2일에 한 번씩 경기를 치뤄야 했다.

그 소리는 이걸 진심으로, 전력을 다 해서 뛰면? 100% 어디 한 곳 작살난다는 거다.

물론, 그나~마.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에이, 뭐, 쉬엄쉬엄 뛰자고. 걔네들이 쌔 봐야 얼마나 쌔겠어?”

“그래, 맞아. 그냥 쉬엄쉬엄 뛴다고 생각하자고.”

그렇다. 우리는 상주 상무.

본업이 군인이고 취미로 축구를 하는 평범한 군경팀들과는 다르게. 전원이 프로팀 소속이고 입대 후에도 프로리그에 소속되어서 경기를 소화하고 있는, 어찌 보면 세계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할수밖에 없는 군경팀이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영 안심이 되질 않았는데.

‘다른 팀은 몰라도, 알제리는 좀 위험해 보인단 말이지.’

현재 우리 팀이 속한 A조는 우리를 제외하면 알제리, 카타르, 프랑스, 미국이 속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솔직히 미국과 프랑스는 모병제니까 별로 걱정이 되질 않았지만 카타르랑 알제리는 조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두 나라는 징병제니까 말이지.’

대한민국 상무 팀이 강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바로 프로 선수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로 끌려오게 되는. 징병제 제도 때문이다.

그런데, 알제리와 카타르는 둘 다 징병제다.

그나마 카타르는 18~35세의 남성들을 상대로 4개월(대학교 졸업시 3개월)만 군대에 보내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병 달면 제대시키는 곳이지만.

알제리는 다르다. 우리보다는 짧긴 해도 무려 18개월 복무다.

그 중 12개월은 사회복무요원, 그러니까 공익이지만 어쨌든 군인 소속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상무 팀이 돌아간다는 거다. 그래서 저번 그 군대 올림픽인가에서도 우승했다고 하고 말이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훨씬 강하긴 하다.

카타르는 최근에야 징병제가 실시되어서 빵꾸가 아직 많다고 들었고. 알제리 선수일 경우, 정말로 축구 잘 하는 알제리 선수들은 Ligue 1(리그앙)으로 빠지니까.

그래, 프랑스. 박주영 선수가 뛰던, 5대 리그의 그 프랑스 리그 말이다.

대표적으로 현재 맨시티에서 뛰는 사미르 나스리가 그랬고, 레알 마드리드의 카림 벤자마도 그렇고. 역대 최고의 선수 랭킹을 내세우면, TOP 10 근처에서 놀고 있는 프랑스의 레전드 선수. 지네딘 지단까지.

알제리 국적가지고 축구 잘 하는 선수들은 전부 리그앙으로 바로 진출하고 병역도 프랑스 국적 따버리면서 면제받는다.

그러니, 2진 팀들과의 싸움이기에 정상적이라면 우리가 질 거라고 생각을 하진 않지만···

“에이 몰라, 썅. 나 이제 전역인데 말년 휴가나 보내줘, 보내달라고오! 왜 말년인데 연가도 못 쓰는데!”

···이게 문제다.

군인에게 있어서 목숨만큼 중요한 게 무엇인가. 바로. 휴가다. 휴가만 받는다고 하면 전투력이 상승하고 없던 전투력도 만들어내는 게 군인이란 말이다.

그리고, 휴가 중에서도 제일 꿀맛인 휴가는 길게 쓰는 휴가다. 버스 안에 갇혀있는 시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2박 3일, 3박 4일짜리 짧은 휴가가 아니라. 15일 풀로 나가는 그런 휴가.

그리고 그건 우리도 다르지 않아서, 보통은 전역 직전에 말년 휴가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편인데···

-응, 안 돼. 일정 바빠. 그냥 전역할 때까지 뛰렴.

이게 말이냐. 이게 말이야? 솔직히 이건 내가 선임이었어도 정의의 납탄 마렵다.

“아아아아아! 씨이바알!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 전지훈련 하기 전에 그냥 연가 다 쓰는 거였는데···”

···사람이 저렇게 애처로워질 수가 있구나.

‘나는 꼭 이번 시즌 끝나면 바로 연가 써야지.’

좋은 교훈을 얻었다.

-*-*-*-

8 October 2015, Sangju Civic Stadium.

-삑! 삑-! 삐이익-!

[Ah, the first half is over (어, 전반전이 종료되었습니다.)]

[To be honest, there is a slight difference in skill.(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실력 차이가 좀 나는군요.)]

[Yes, it seems that 1st place has been decided.(예, 1위가 결정된 것 같습니다.)]

***

<2015 Men's Military Football Tournament - Group A>

[Half time end]

South Korea 0 : 2 Algeria

[Goal]

South Korea :

Algeria : Abid 10, Benkablia 42

***

‘와, 전반전 진짜 개처럼 털렸네. 하하.’

솔직히 첫 골은 방심한 게 맞는데, 두 번째 골은··· 방심이 아니라. 그냥 실력으로 저 쪽이 넣었다.

‘아프리카 리그 선수들이라고 솔직히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였구나.’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농담이 아니라. 내가 느끼기론 K리그 수준인데···’

선수들의 오프 더 볼 플레이는 조금 더 떨어져도, 개인플레이에서 나오는 탄력과 기술이 엄청났다.

-짝짝!

“자자, 다들 정신 차려라, 그렇게까지 차이나는 상대는 아니야. 정신 차리고 후반전에 집중하면 이길 수 있다. 후반전 작전 수정이 있으니 잘 들어라.”

그렇게 감독님이 우리에게 후반전을 설명하려던 찰나.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돼긴 뭐가 안 돼! 씨발, 나와 봐.

-꽝!

“야! 이 새끼들아! 늬들 뭐야!”

우리에겐 전혀 반갑지 않은 등장인물이 나타났다.

“저기, 대대장님, 이러시면-”

“안 되긴 뭐가 안 돼! 내가 늬들보고 뭐 많은 걸 바랬어? 승격 못 해도 좋으니까 그냥 이 대회만 이기라고 했잖아. 저 약해빠진 알제리 따위한테 지는 게 말이나 돼?”

“······”

“그리고 뭐 그렇게 안 뛰는 거야. 수사불패 정신 몰라? 죽을 각오로 뛰란 말이야! 늬들 FA컵 때는 그렇게 열심히 뛰었으면서 왜 지금은 그렇게 못 뛰는 건데?”

그 말에. 몇몇 선배들이 얼굴이 찡그려지더니.

“에이, 씨발. 못해먹겠네.”

기어이 폭발했다.

“뭐, 뭐?!?”

“못 들었습니까? 못 해먹겠다고요. 씨이발.”

“너··· 너, 상무 짤리고 싶어?”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는지. 대대장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를 꺼밀었지만.

“해 봐, 씨발, 해 보라고. 어차피 우리 전역 4일 남았거든요? 대. 대. 장. 님?”

선배님들은 전혀 위축되는 기미가 안 보였다.

“아니, 씨이발. 휴가 짜르는 것까진 정말 괴롭고 짜증나지만 이해했어. 우리도 여기에 와서 혜택 본 것도 있고, 팀이 바쁘니까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휴가까지 미뤘던 거라고.”

“근데, 솔직히 말해봅시다. 대대장 아저씨. 우리 이거 끝나고 나서, 도대체 당신들이 우리한테 뭘 줄건데?”

그 말에, 대대장이 침묵하자. 선배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들이 우리가 이렇게 뛰다가 부상당하면, 뭐 평생 책임져줄 꺼야? 아니, 최소한 병원비라도 대줄 마음이 있긴 해?”

“······”

“그렇지? 없지? 위-대하신 대한민국 군대가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 대대장의 말문이 막혀버리자. 선임 중 한 명이 외쳤다.

“얘들아! 다들 적당히, 적당히 알아서 뛰자. 절대 뛰지 말고, 걍 슬렁슬렁 해 버리자고.”

“그래, 휴가도 포기하면서 뛴 우리가 왜 이딴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나가자! 나가!”

그 말과 함께.

-꽝!

아직 쉬는 시간이 남았는데도. 선배님들이 라커룸 문이 무슨 왠수라도 되는 것 마냥 강하게 닫으면서 나가버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저, 저, 저 새끼 뭐야? 박 감독! 저 자식 뭐요?”

대대장은 전혀 우리를 이해할 마음따윈 없었다.

“박 감독! 저 자식들, 전부 교체하세요! 교체해버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저 새끼! 주둥이 겁나게 나불거렸던 저 새끼라도 교체시켜!”

“···하아, 예,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쯤 되자 웃음이 나왔다.

‘와, 아주 시원하게 망했네.’

이렇게 개판인 건, 처음 본다. 진짜. 내가 고양 때 가장 분위기 험악할 때도 이 정도 개판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휴가 짤린 말년 병장을 괜히 무섭다고 하는 게 아니구나.’

어쨌든, 이 개판 5분 전, 아니 이미 개판이 된 상황이 되자.

“휴, 박포진?”

“예!”

“풀백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이준혁? 너는 형순이 자리 맡아라. 전달 끝. 다치지만 마라.”

감독님도 교체만 시키고 손을 놔 버렸다. 답이 없다고 판단한 거였다.

“···야, 준혁아, 이거 괜찮은 거냐?”

어리석구나, 태준아.

“괜찮을 리가 있냐. 망한 거지.”

뭐, 근데.

‘별로 뭐 기분 나쁘지는 않네.’

애초에 이건 솔직히 지면 뭐 또 어때? 이런 기분으로 왔으니 말이지.

그래서일까.

“야, 태준아.”

“응?”

“우리, 연습 왔다고 생각하고 경기하자. 너 그냥 막 드리블 해봐, 나도 막 드리블 할 테니까.”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제안을 태준이에게 했다.

“···그래도 되냐?”

태준이가 걱정했지만, 나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절대 이길 수 있는 분위기 아니잖아.”

지금 우리 팀이 5연전 짼데, 이렇게 체력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의욕까지 없는 상태. 이렇게 개판인데 이기면 그게 기적이다. 크크.

그러니까.

“지더라도, 그동안 못해본 거 실컷 해 보고 씬나게 져 보자고.”

이 막장인 경기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실험이나 해 보자.

-*-*-*-

[잘 했다! 잘 했어! 이 정도면 스카우터 눈에 확 들어오겠지?]

[당연하지! 우리도 알제리에서만 뛰는 게 아니라 프랑스로 가 보자고! 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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