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있었던 일. (2)
뭐, 그냥, 뻔한 이야기다.
그냥 아들이 건강검진 받는 김에, 한번 같이 받아보자고 해서 가볍게 한 검사였는데. 어머니에게서 암이 나왔다. 담낭암. 5년 생존율 5% 미만의 그 개 같은 암.
이미 초기가 지나서 완전 절제도 불가능한 상태지만, 정말 온 힘을 다 해봤다.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기고, 아버지와 내가 돈을 최대한 아껴가며 병원비로 써가면서 최대한 애써봤지만 결국 완치엔 실패하고, 95%가 되어버린.
엄청 흔하진 않지만. 생각보단 많은. 그런 뻔한 이야기였다.
“오랜만이네요. 엄마.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솔직히. 그때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아무 생각이 들지가 않더라고요.”
그때는 오히려 펑펑 울기보단, 그냥, 그냥 머릿속에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한 2년 동안, 나도 슬슬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그래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며칠간은 그냥 오히려 더 훈련에만 집중했다. 그냥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잊고 싶어서 몸을 굴리고, 또 굴렸다.
그리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프로의 정신이기도 했으니까. 그 어떤 가정사가 있든, 뭐든 간에 일에는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런데, 내가 경기가 있어서 49재에 참가가 어렵다고 전화할 때.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일갈하셨다.
-야, 이 새끼야! 그건 프로 정신이 아니라, 인간이길 저버리는 거야! 당장 튀어와!
···종목은 다르지만, 프로에서 7년은 공을 던지신 아버지시기에 날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답했었다.
-아버지처럼 저는 1군에 턱걸이하던 선수가 아니에요. 전 주전이라고요! 주전! 저 빠지면 팀에 엄청 큰 민폐라고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분이 별로였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 게 너무 미안했고. 정말로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는지. 근본적인 회의감이 든 거였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이렇게 산 걸,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서 싱숭생숭한 상태로 지내다가 어느 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찹쌀떡 파는 아저씨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감정이 터져버렸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목 놓고 울었어요. 2학년 때 바로 프로 갈 생각을 하고 엄마가 건강검진 받았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전화도 거의 한 달에 한 번 하는 정도였던 것도 후회되고. 49재랑 경기랑 겹쳐서 그때 제대로 재에 참석 못 한 것도. 그냥. 너무 모든 감정이 갑자기 몰려오더라고요.”
옛날에 엄마한테 짜증 냈던 거부터 시작해서. 집에 있을 적에 안마라도 조금 더 잘해드릴 걸, 독립 후엔 매일 전화라도 드릴걸. 그런 후회가 뒤늦게 끝없이 몰려왔다.
그렇게 훈련도, 경기도 한 두어 달 동안 개판처럼 뛰면서 공격 포인트 한 개도 못 올리고, 패스도 엄청 못 주고 하니까. 처음엔 이해해주던 사람들도 은근슬쩍, 점점 날 선 반응을 보여주는 게 느껴졌다.
-쟤, 뭐야? 처음엔 오히려 별로 반응 없더니 왜 인제 와서 저래? 할 거면 진작에 좀 하지. 여름 영입 기간도 끝나서 영입도 못 하는데.
시즌 막판의 치열한 순위싸움에서 대차게 말아먹는 주범이었으니. 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나중에 어떻게든 마음을 추슬러서. 그나마 폼을 어느 정도나마 복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반기처럼 잘하진 못했고. 생각해보면 그래서 계약 해지된 거였지 뭐.
“뭐, 그래도 그 이후로, 많이 좋아졌어요. 군대도 나름 상무로 가고. 생애 처음으로 K리그 팀이랑 붙어서 이겨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어요. 자세한 건 방명록 편지 남길게요. 엄마도 궁금하셨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후, 나는 유골함 항아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당분간은 휴가니까. 그동안만이라도 매일 올게요. 내일은 기일이니까. 제사는 못 지내더라도 엄마가 좋아하는 감자전이랑 파전이라도 사 가지고 와서 찾아올게요.”
그리고 이제 방명록을 쓰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는 자리에서, 조금 예기치 못한.
아니, 사실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 벌어졌다.
“···준혁이냐?”
그래, 어머니 기일이 다가오는 이상. 여기에 오실 게 뻔할 뻔 자였는데, 오히려 안 마주치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그리고, 비록 자원입대라 내가 군대 갔다는 입영통지서가 날아오진 않았겠지만, 내가 옷가지를 집으로 보냈으니 군대 갔다는 사실 자체는 아셨을 테고.
거기에다. 군복까지 입고 있으니. 눈에 안 띄기가 더 어려웠겠구나. 하하.
···그래도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타이밍 맞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근 1년 만이네요.”
다만 확실한 건 나만 당황한 건 아니었다는 거였다. 당황한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 둘은 방명록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마 실제론 30초겠지만, 마음 속으론 30일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간신히 여기에 온 이유를 떠올리며, 원래 하려던 행동을 시작했다.
“···아버지, 혹시 방명록, 제가 써도 되겠습니까?”
“어, 어, 그래. 많이 쓰거라. 난 다 썼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방명록에 내 리그 기록을 준비해왔던 펜으로 적고 있자. 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어디에서 지내고 있느냐?”
“어, 상무에서-”
“아니, 그건 알고 있다. 저번에 FA컵에서 골 넣은 것도 봤어.”
“···!”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서 편지를 잘못 쓸 뻔했다.
‘아버지가, 내 경기를 찾아보셨다고?’
축구에 큰 관심까진 없고, FA컵이라 중계 영상 찾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분이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라 네가 지금 묵고 있는 장소를 말하는 거다.”
“······”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장소를 말했다간, 분명히 호텔로 찾아오실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대답 없이 빠르게 방명록을 완성 짓고.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아버지.”
떠나려는 순간.
“잠깐.”
아버지가 나를 불러세우셨다.
“내일, 집에 와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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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15일.
“자, 됐다. 네 엄마가 음식 맛 좀 볼 시간 동안, 우리도 같이 식사하자꾸나.”
“···예.”
그렇게 오랜만에 먹게 된 집 밥은, 기억나는 그대로였다.
양파 많이 넣고, 조금 맵게 볶은 두루치기.
밑반찬으로 풋고추에 된장.
김치는 양념장 안 아끼고 살짝 새우젓 많이 넣은 녀석으로.
거기에다 아마도 점심이나 아침밥으로 드시고, 다시 끓인 듯한 살짝 졸아있는 된장찌개에, 항상 집안에서 끓여 먹던 보리차까지.
정말, 1년 전 집의 모습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
“······”
다만, 말이 더 없어졌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솔직히,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한테 언제나 아버지는 어려운 존재였다.
원래 어릴 적 내가 촉구한다고 했을 때부터, 아버지는 탐탁잖게 생각하시는 쪽이셨기에 자주 대화를 나누기엔 어려운 분이셨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는, 서로 병원비 대느라 바쁘게 돌아다녀서 바빴으며.
지난 1년은 어머니 49재와 경기가 겹쳐서 못 간다는 소리를 하고 대판 싸우고 전화도, 문자도, 편지도 단 하나도 안 보내고 지냈는데. 이제 와서 뭔가를 말한다는 게 참··· 어려웠다.
‘훈련소에서 인터넷 편지 하나도 안 왔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화 많이 나셨을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부드럽게 대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잘못했다는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어디 아픈 덴 없냐?”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건강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그냥 나는 한 마디밖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뭐가 죄송한지는 알고 있고?”
“전화 못 드린 거, 49재 못 지킨 거···”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젓더니,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씀을 하셨다.
“준혁아. 부모로서 가장 기운이 빠질 때가 뭔지 아냐? 내 자식 소식 남한테서 처음 듣는 거다. 그게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말이다.”
-후.
“내 자식인데, 내가 가장 잘 알아야 하는데, 왜 남한테서, 국가한테서 네 일을 건네 들어야 하느냔 말이다.”
“······”
“난 그게 무엇보다 화난 거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쥐어 짜낼 수 있었다.
“49재 못 지킨 것 때문에 화나신 게 아니고요?”
내가 그렇게 묻자, 아버지는 한숨을 한 번 더 쉬시더니. 물끄러미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물론 그때는 화났지.”
“···”
“하지만, 끊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더구나. 너도 나만큼 아팠을 텐데, 너도 힘들었을 텐데. 너도 생각이 있을 텐데. 내가 너무 화를 낸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
“너도, 나도 이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미숙했던 거지.”
“···”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묵묵히 식사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적당히 식사에 집중하면서, 아버지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 말을 듣자. 항상 강해만 보이시던 아버지의 조금 다른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병원에서도 양복 깃을 유지하시던 분이 조금 꾸깃꾸깃해져 있는 양복 와이셔츠 입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별로라 하셨지만, 어머니가 매운 걸 싫어하셔서 고추를 뺀, 어머니가 하시던 된장찌개에 가까운 된장찌개가 보였다.
그리고, 거실에서 제사를 지내기 전까지, 어지러워져 있던 부엌과 거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든 곳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지난 1년간 힘들어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향이 다 끝났구나. 네 엄마도 잘 드셨겠지.”
“···”
“제사도 끝났으니, 가 봐도 좋다. 상은 내가 치우마.”
그러고, 식탁을 치우면서, 아버지는 떠나려던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준혁아, 이것만은 기억해 주거라. 난 절대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내 아들을. 내가 어떻게 계속 화난 상태로 볼 수 있겠니.”
“······”
“그럼, 숙소에 돌아가거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고, FA컵 4강에서도 좋은 결과 있길 바라마.”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저기, 아직 못 잡았어요.”
“응?”
“아직, 방, 못 잡았습니다. 여름철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놀러 다녀서요.”
물론 사실 이미 방을 잡아놓았지만, 상관없었다.
그깟 돈이야, 중요한 게 아니었다.
“17일에 복귀해야 하니까. 이틀은 있어야 하는데, 묵을 장소가 마땅치가 않네요.”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지으셨다.
“그럼, 여기에 있을 거냐?”
“···예.”
“그래, 그럼 네 방은 청소해 놨으니까, 들어가서 좀 쉬어라.”
그 말을 듣자. 다시 한번 가슴이 울렸다.
‘아빠, 아빠 방도 청소 안 했으면서, 언제 청소해 놓으셨던 건가요.’
그래서.
“아버지.”
“응?”
왠지. 왠지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물론 지금 하는 게 부자연스럽다는 건 알지만.
나는 굳이 이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