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연전, 난적 (2)
2015년 06월 24일. 광양.
K리그에서의 전남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전형적인 약팀이다.
리그에서 최고로 높이 올라간 기억이, 아직 우리에게 익숙한 K-리그라는 명칭이 붙여지기 전의 한국프로축구대회 시절, 97년도에 기록한 2위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런 약세는 쭉 계속되어, K리그 전환 이후로 최고 기록이 4위고, 최근 5년간 10-7-11-10-7위를 기록하는 등.
이 팀은, 어느 면으로 보나 확실하게 약팀이라고 할 수 있겠다. EPL의 위건이나 선더랜드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K리그의 진정한 생존왕은 따로 있긴 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역사 속에서도 이 구단은 자랑할 만한 점이 하나는 있다. 그것은 바로 FA컵만은 3회 우승을 차지하며. 역대 우승 횟수 2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 시즌만큼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작년에 나쁘지 않았던 득점력은 유지하고, 약해졌던 수비력을 보강하면서 현재 리그 4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쫘아악
[아, 이형 선수, 순간적으로 놓칠 뻔 했습니다만, 간신히 바깥으로 볼을 차냅니다. 역시 오르샤!]
[전남의 코너킥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번 시즌 들어서 처음으로 우리보다 ‘강력하다’ 고 말할 수 있는 팀을 만나게 된 거였다.
“후- 야, 마크 놓쳐서 미안. 저 놈 장난 아니다.”
“어느 정도에요?”
“글쎄, 솔직히 왜 전남에 있는지 모를 정도야. 솔직히, 유럽 국대에서 본 얘들 수준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세상에, 그 정도라고?
‘시발, 저런 놈이 왜 한국까지 온 거야? 그냥 조국인 크로아티아 리그에서나 뛰지.’
전남이 돈 많이 줬나?
“감독님이 말씀하신 대로다. 아무래도 바로 약속된 작전대로 시작해야겠어. 난 이제부터 수비에 좀 더 집중할테니, 너한테 볼 몰아주마 준혁아. 할 수 있지?”
“예!”
작전, 실행이다.
-*-*-*-
[아, 상주가 왼쪽을 집요하게 파기 시작하는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해설위원님?]
[좋은 생각입니다. 지금 전남의 약점을 꼽자면, 오른쪽이니까요.]
실제로. 전남은 강력한 왼쪽에 비해, 오른쪽 라인은 매우 약했다.
왼쪽 라인은 현재 전남을 이끌고있다시피한 드리블러 오르샤. 2002 월드컵 멤버 헌영민이 버티고 있기에 K리그에서도 상위권에 꼽힐만한 라인이지만.
오른쪽의 안용우, 이슬찬은 각각 전남에 들어온지 2년 된 신인, 올해가 입단 4년차인데 이번 시즌 전까지 프로 통산 8경기밖에 안 되던 유망주로 이루어진 라인이다.
[그러니 상주 입장에서는 왼쪽을 더욱 더 파고들어야 합니다. 전술적으로 4-4-2가 4-2-3-1을 이겨내기 위해선, 측면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삐익-!
[아, 파울입니다. 상주의 프리킥! 박태준 선수의 돌파가 빛났습니다.]
‘아, 이런, 아깝다.’
방금 태준이가 뚫으면 바로 노마크로 페널티박스까지 달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되기 전에 파울로 끊어버렸다.
‘후- 몇 분 뛰지 않았는데도, 확실히 K리그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네.’
피지컬적인 면에서는 생각처럼 엄청나게 큰 차이가 나진 않는데, 판단의 템포가 남달랐다. K리그 2였다면, 아마도 우왕좌왕하다가 제대로 마크하지 못한 채로 태준이에게 드리블할 공간을 내주거나, 조금 늦은 파울로 페널티킥을 줬겠지만.
여기 친구들은, 훨씬 우왕좌왕하는 경우도 적고, 파울을 해서라도 끊어낼 타이밍을 정확하게 아는 듯했다.
‘후우-예상했지만, 힘든 싸움이긴 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위치를 잡으려던 나는 프리킥 장면을 보고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저거, 저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에 잠깐 경기 진행을 멈추고 주심을 찾았다.
내가 알기로, 규정상 프리킥을 찰 때 상대편 선수는 공에서 9m하고도 조금 더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저 쪽은 거의 7m? 5m? 그 정도밖에 거리가 안 떨어져 있었다.
‘저러면 공 차기 엄청 불편한데. 저건 조정 필요하지 않나? 주심이- 아, 저기 있?’
그러나, 애써 찾은 주심의 표정은 영 무표정해 보였다.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젠장할, 하긴 이런 거 우리나라는 하나하나 안 따지는 편이긴 하지. K리그라고 다르진 않구나.’
저 흐리멍텅한 심판의 표정을 봐도 그렇고, 여기가 전남의 홈이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내가 내가 지금 집중적으로 따져봐야 변하는 건 하나도 없을 거다.
‘오히려 쓸데없이 왜 이런 거 가지고 따지고 들냐면서, 심판의 권위를 무시했으니 옐로 카드! 이러고 끝나겠지.’
하지만. 나 이준혁, 다른 건 몰라도 축구에서 손해보는 짓은 정말 하기 싫은 남자.
‘어디서 감히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꼼수를 쳐 부리고 있어?’
방금 파울은 규정을 이용하는 거니까 영리하다고 칭찬해줄 수 있지만, 이건 좀 선 넘는 거다.
-알레알레~ 알레알레~ 알레알레 알레~ 알레~
거기에 시끄러운 상대편의 응원가까지 들리자,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지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저 친구 엿 안 먹이고는 내가 못 배기겠다는 생각을 하며 태준이에게 다가갔다.
“태준아.”
“응? 왜?”
“2단계 작전 들어갈 때인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태준이는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꼭 그래야겠어?”
“어, 지금 잘못했다가는, 우리 꼬이게 생겼다. 저 어린 것들이 홈 팀이라는 거 적절하게 이용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를 좁히고 있잖아.”
“······”
그러나, 아직도 태준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야, 그럼 비켜 봐. 내가 프리킥 찬다.”
“어? 어, 그래.”
[아, 이준혁 선수가 볼을 차려나 보군요? 크로스가 어울리는 거리라서 그럴까요?]
[크로스를 올리는 거라면 그렇겠죠. 다만, 여전히 페이크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프리킥을 차려는 자세를 보여준 순간, 시야를 가로막은 저 어린놈을 쳐다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간접 프리킥 잘 넣어봤자 별로 쓸모없어.’
어차피 간접 프리킥으로 득점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열리는 모든 득점을 합해봤자 20% 초반 남짓하단 말이다.
‘그러니, 지금은 저 놈들이 위축되게 만드는 게 훨씬 나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반적인 프리킥을 찰 때와는 다른 곳에 슈팅을 날리기로 생각하고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둘 중 누가 찰까요? 이준혁, 이준혁이 처리합니다. 왼발 크로스-?]
-뻐-엉!
[오우! 위험했네요, 전남의 이슬찬 선수. 자칫하다간 머리에 맞을 뻔 했습니다.]
[예, 다행히 몸통에 맞았군요. 다시 한 번 프리킥입니다.]
“죄송합니다. 실수였습니다.”
“···다음번엔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인정하고 넘어간 후 다시 위치로 돌아오자, 태준이가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뭐, 왜, 뭐.”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당연하지. 임마. 2단계 작전 기억 안 나?”
그 말을 듣더니, 태준이는 헛웃음지었다.
“그래도 아까 그건 좀 너무했던 거 같은데···”
“야, 이거 유럽축구 보다보면 자주 나오는 상황이거든?”
유럽 축구를 보다 보면, 이렇게 프리킥 상황에서 상대편이 공을 정면에서 막을 때가 있는데, 나는 그 때 본 방식을 따라했을 뿐이라고.
“봐 봐, 저 놈, 한 방 먹으니까 정상적으로 멀어졌잖아.”
“그래, 그렇긴 한데···”
태준이가 뭔가를 말하려는 그 순간, 나는 멀머리를 끊었다.
“야, 나도 안다, 우리나라에선 이거 비신사적 행위로 간주된다는 거.”
하지만,
“난 오늘, 무슨 수를 써서든 이기고 싶어.”
그래, 난 이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상대방의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는 악의적인 태클 정도를 제외한다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솔직히 유럽에선, 오히려 상대팀한테 옐로카드 준다. 경기 방해라고.
‘그러니, 난 후회하지 않아.’
이렇게라도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더 압박을 주고. 무슨 수를 써서든 골을 넣고 어시스트를 하고 싶다.
“그러니까. 난 안 바꿀 꺼야.”
그 말을 듣고, 태준이는 잠깐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
-짝
“2단계 작전, 지금 바로 시작하자.”
“좋아, 그래야지.”
-*-*-*-
삐익-!
[아- 양 팀 선수, 아직 전반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양 팀의 파울이 스무 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굉장히 거칠어지고 있는데요. 해설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제 생각에는 상주 상무가 의도한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해설위원은, 상세히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전남은 드리블의 팀입니다. 전형적인 타겟형 스트라이커인 스테보가 중앙에서 묵직하게 받쳐주고 있고, 그 주변에 드리블에 능한 선수들을 배치해 놓아서 공격을 조립한 쪽이죠.]
-삐익-!
[그러니, 저렇게 적극적인 파울로 드리블을 끓어버리는 건, 아주 좋은 선택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체력 뺄 수 있고, 템포 죽일 수 있고, 아주 영리한 방법이에요.]
그랬다. 우리의 2단계 전술은 바로, 파울작전이었다.
조금 역습한다 싶으면 파울. 드리블 치면 파울.
그러면서 점점 경기를 거칠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되고 나면, 결국 플레이는 점점 더 피지컬적으로, 단순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게 감독님의 말씀이셨다.
그리고, 피지컬은, 여기에 들어오게 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변화하게 된 부분 중 하나였다. 평범하게 괜찮았던 수준에서 K리그 선수들에게 전혀 뒤쳐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앞서는 부분이 되어버렸다.
[이준혁 선수, 돌파 시도합니다! 안용우 선수 선수, 몸싸움을 시도하지만- 밀려납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지금까지 풀백으로 출전할 때 즐겨오던, 스피드를 활용한 직선적인 움직임을 여전히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내가 할 플레이도 정해져 있었다.
[이준혁, 박태준. 원-투 패스를 주고받으며 빠르게 전진합니다.]
[전남은 이슬찬 선수가 달려듭니다! 경합 벌어집니다!]
-쿵
‘크윽. 아까 한 방 먹은 거에 대한 복수냐?’
꽤나 아프게 달려붙고, 심판이 안 보이는 곳을 꼬집기까지 해왔다.
하지만, 느껴지는 질량은 그동안 내가 연습해왔던 친구들에 비하면-
[이준혁, 빼앗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갑니다!]
조금 부족했다.
그렇게 오른쪽에 위치한 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달려나가자. 내 앞에 훤히 뚫린 왼쪽 공간이 보였다.
패스, 슈팅, 크로스 셋 모두 선택 가능한 상황.
[상주, 절호의 기회!]
페널티박스 안 쪽에 선수들이 세 명이나 있으니, 보통이라면 여기에서 크로스를 사용했겠지만-
-뻐엉-!
[이준혁, 한 박자 빠른 슈팅-!]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논스톱으로, 슈팅을 때려버렸다.
그 편이, 더 예상하기 어려우니까.
-······
그리고, 침묵에 빠진 전남의 홈구장에서, 나는 잠시 멍 때리다가.
"이야-아! 씨발! 됐다! 됐다고! 이야아아-!"
신나서 온 그라운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준혁 선수의 멋진 슈팅! 멋진 골입니다!]
[전반전 40분, 현재 스코어 1대 0으로, 상주 상무가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