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의 결실 (1)
“야, 너 왜 거짓말하고 있냐?”
“예?”
아니 이 선배는 또 뭔 소리야.
“아니, 굳이 왜 핸드폰 없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여기 숙소에 남아서 종이로 뽑은 전력분석표나 보고 있는 거냐고.”
아, 그 소리셨군.
“날씨도 꿉꿉한데 뭐하러 밖에 나가요.”
오늘이 5월 29일이다. 5월 29일. 슬슬 에어컨을 키는 곳도 나오는, 여름에 가까워지는 때란 말이다. 게다가 오늘따라 날씨도 좀 습도가 높은 편이고.
이런 날씨인데 뭐하러 아무리 못 쳐줘도 4성급인 호텔 밖에서 나돌아댕기면서 힘을 뺀단 말인가. 그냥 방 안에 쳐박혀 있는 게 속 편하지.
무엇보다, 지적할 점이 있었는데.
“그리고 거짓말이 아니라 저 진짜 핸드폰 없어요.”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기는.”
“······”
1초, 3초,
“···숨길 필요 없다니까. 나도 핸드폰 쓰고 다 쓰고 있어. 핸드폰 다 쓰고 있다니까?”
5초, 10초.
“···아니 진짜? 진짜로 핸드폰 없다고?”
“예.”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진짜로 내가 핸드폰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동기 선배는 연락망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하고, SNS랑 카톡까지 뒤져본 후에야 내 말을 믿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너 SNS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너 왜 카톡도 안 뜨냐?”
“스마트폰을 안 쓰는데 뭔 카톡이에요.”
그렇게 말해주자, 이젠 숫제 미친놈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셨다.
“아니··· 하···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너 나이 몇이야? 너 사실 89년생이 아니라 79년생이지? 고3도 아닌 놈이 스마트폰을 왜 안 써?”
“형. 제 폰은 어차피 거의 시계에요. 시계를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사요.”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동기 형은 노려보던 시선이 아니라 슬슬 뭔가 안쓰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왜. 동정하지마. 더 비참해진다고.
“에휴- 뭐. 됐다. 하긴 닌 아직도 머리 칼같이 밀어버리는 놈이었지.”
“아니 그건 그냥 군대기도 하고 여름엔 더우니까···”
“보통 사람은 그렇다고 안 밀어도 되는 머리를 밀어버리진 않아요. 이 놈아.”
···억울하다. 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보통 사람인데. 왜 태준이도 그렇고 내가 핸드폰 안 하고 머리 민다는 사실 하나 가지고 다들 저리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거란 말인가?
“뭐, 하여튼 그건 제쳐두고, 보고서에서 뭐 특이한 점은 있냐?"
“예, 일단 김용진인가 하는 놈이 포변했네요.”
“어디에서 어디로?”
다행히, 이번에는 질투가 엄청 나거나 하는 유형의 포지션 변경은 아니었다.
“스트라이커에서 센터백으로요.”
공격수에서 수비수로의 포지션 변경이었으니까. 물론 센터백이 찬밥대우 받는 자리는 아닌데. 스트라이커가 금수저라면, 센터백은 은수저? 아니면 값비싼 스뎅 수저? 정도다. 나쁜 건 아닌데, 신분 하락이긴 하다.
일회용 수저 수준인 풀백으로 포변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이것도 영 기분 좋은 포지션 변경은 아니라는 거다.
“그래? 그놈 나온데?”
“예, 아마 전력보고서엔 이놈이 나올꺼라는데요.”
“···뭐야,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거래?”
“뭐 정보 물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했겠죠.”
우리나라에서 솔직히 상무란 모든 팀들이
-제발 우리 선수들 좀 많이 뽑아가서 잘 돌봐주시면 안 될까요?
하면서 구애하는, 초-인싸남 아니던가. 나 같이 대부분의 팀들에게 거절당하는 아웃사이더와는 다르게. 당연히 어떤 뒷구멍으로든 술술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할 거다.
“그래? 근데 강원이 미쳤나? 왜 우리 상대로 수비 경험도 별로 없는 녀석을 쓰고 있어?”
“···흐음, 글쎄요.”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했다. 수비의 중심이자 핵이 되어줘야 할 센터백은 수비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난이도가 높은 포지션이다. 실수 한 번이 바로 치명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런 시즌 초까지만 해도 공격수로 분류되던 친구를 우리 팀과의 경기에서 수비수로 내세우다니.
‘뭔가 이유가 있나?’
그런 내 의문은, 다음 날 바로 풀렸다.
[김용진! 또 막아냅니다!]
[예, 상무의 두 공격수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역시나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192cm라는 키가 진짜 사기긴 하다···’
물론, 축구는 키의 영향을 굉장히 덜 받는 스포츠이긴 하다. 당장 축구의 살아있는 신인 리오넬 메시의 공식적인 키가 169cm, 아마 167cm정도 밖에 안 되지 않는가. 역대 1, 2위를 다투는 축구선수인 마라도나도 165cm인가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축구에서 키가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당장 그 메시도 키 때문에 호르몬 주사 맞아가며 키를 억지로 키웠고, 가깝게는 김신욱 선수가 국대에 꾸준히 뽑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키니까.
결국, 키는 또 다른 중요한 재능이다. 그리고, 오늘 저 친구는 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었다.
‘휴- 이러면 별로 안 좋은데.’
우리의 공격수 조합이 이정현-박동기 조합인 만큼. 뻥뻥 차올리는 크로스를 통해 페널티 박스 안으로 빠르게 볼을 보낸 후 두 공격수에게 그 공중볼들을 장악하게 하는 게 감독님이 원하던 A플랜이었을 텐데. 우리의 그 플랜이 무너졌다.
뭐, 그나마 다행인 건.
[볼 빼앗았습니다! 강원 FC 역습! 역습 들어갑니다! 서보민!]
‘수비적으로 뒤로 쭉 쭉, 빠르게 물러나면서, 리듬을 타면서. 하나, 둘, 셋. 옳지.’
[아! 이준혁 선수! 침착하게 볼을 빼앗습니다.]
[아, 서보민 선수가 너무 급했군요. 빠르게 드리블하다 볼 터치가 너무 길어지는 실수가 나왔어요. 이준혁 선수가 그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수비의 가장 큰 구멍이었던 내가 슬슬 수비가 무엇인지 감을 잡기 시작했기에, 그리 나쁜 수비력이 아니었다는 거였다.
‘옛날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달려들어 발부터 뻗었겠지만. 이젠 아니거든’
미드필더 시절에는 상대방이 공을 잡으면 바로 압박해서 플레이 자체를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침착하게 물러나는 이런 게 영 힘들었지만. 그동안 훈련을 거듭하고 경기에서 학습한 결과, 어느새 기초적인 수비 자세 정도는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볼을 빼앗은 후에도 선택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시야가 좁아서 달려나가나 크로스밖엔 생각 안 했지만.
[준혁 선수, 바로 옆으로 볼을 돌립니다.]
이제는 볼을 돌린다는 선택지도 여유롭게 가져갈 수가 있었다. 사실 이게 오히려 더 익숙하기도 하고.
그렇게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자, 슬슬 필드 위의 상황이 보였다.
'오늘은 영 우리 공격이 성공을 못 하네.'
강원이 피지컬적으로 밀어버리던 우리에게 카운터를 먹였을 뿐만 아니라, 30분 즈음이었나, 이형 선배가 정말 기가 막히게 날린 바나나킥 프리킥도 저 골키퍼가 잘 막아낸 걸 보면 골키퍼가 오늘 좀 되는 날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우리가 라인을 마음껏 끌어올려서 공격할 수도 없었던 게.
[아, 패스 미스! 오늘따라 패스 미스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요, 선수들의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 모습입니다.]
강원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패스 미스가 엄청나게 나오고 있었다.
온도만 올라갔으면 그래도 괜찮을 텐데, 아침에 비까지 와버려서 오늘 선수들의 움직임이 하나같이 조금 둔하고, 실수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아! 골대를 벗어나는 슈팅!]
[아, 이거 아쉽네요. 오늘따라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실수가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저득점 경기가 나올 듯한 기세가 보였다.
***
<2015 K리그 챌린지 12Round>
전반 종료
강원 FC 0 : 0 상주 상무
***
“좋아. 다들 전반전에 수고 많았다. 쉬면서 들어라.”
짧은 격려가 끝나고, 감독님은 바로 후반전 지시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진에선 동기는 빠진다. 오늘 수고했다. 그리고 운상이가 들어간다.”
“예, 알겠습니다.”
역시, 공격진은 교체되었다.
‘저 녀석들을 상대로 몸싸움에서 압도하지 못하니, 빅 맨이 두 명씩이나 있는 건 오늘은 비효율적이긴 해. 스피드가 필요하겠지.’
그래서인지 전통적인 빅&스몰인 이정현-한운상 조합을 넣는 듯했다.
“그리고 미드필더는, 오늘따라 자꾸 패스 실수가 나오고 있더군. 오늘 아침 비가 내려서 잔디가 미끄럽다곤 해도 너무 실수가 많았어, 후반전엔 조금 침착하게, 중앙에서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미드필더와 공격진 위주의 피드백을 짧게 한 후, 감독님은 우리에게도 다가왔는데.
“그리고, 수비진은 이 정도면 됐다. 끝까지 집중력 잃지 말고 무실점으로 끝낼 수 있도록 하자.”
딱 이 한 마디만 하고 끝냈다. 그래서인지 수비진들의 얼굴은 살짝 밝아졌다.
“예! 알겠습니다.”
다른 포지션들에겐 지적했던 사람이 지적을 안 한다는 것만이야말로 가장 잘했다는 소리니까.
그러나, 나는 조금 불만이었다.
‘흠, 이대로면 너무 무난한데.’
물론 개막전으로부터 2개월 만에 ‘수비가 구멍이었던 선수’ 가 ‘그래도 나름 기본은 갖추어가는 수비수’ 정도로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상향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뭔가··· 뭔가 부족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서 만족해버릴 수는 없어.’
당장 오늘 만나는 선수만 봐도, K리그 챌린지 득점 순위권에 있는 동기 형을 완벽하게 꽁꽁 틀어막은 것을 보면 여기에서 괜찮다며 물러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을 인정해버리면 나의 2개월이, 저 친구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싶게 위해서라도 지금은, 조금···
그래, 소위 ‘나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최선의 전술은 뭘까.’
일단, FA컵이나 고양 때 처럼 전체적인 전술을 내가 조정할 순 없다. 그 때는 감독님이 권한을 나에게 주셨고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셨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는 건 부분 전술 위주로 풀어 나가야 한다는 건데.’
나랑 같이 움직임을 맞쳐줄 수 있을 법한 사람이···
‘저기 있네. 포진 선배님.’
문제는··· 저 선배님이 나를 도와 주실까 하냐는 거다.
‘왼쪽 풀백 주전 경쟁자나 다름없는데.’
그래도 일단 찔러는 봐야지.
“저, 포진 선배님.”
“응? 준혁이냐? 무슨 일이냐?”
오, 표정이나 말하시는 거 보면 나에 대해서 별 거부감 없으시네? 다행이다.
‘다행히 나 같이 주전에 목 메는 유형은 아니셨나 보구나.’
하긴, 입대 전 성남에서 30경기씩 선발로 뛰신 분이니까. 그럴 만 하다.
그렇게 선배가 나에 대한 악감정이 없음을 확인하자, 나는 안심하고 말을 걸 수 있었다.
“저기, 혹시 후반전에 저랑 같이 한 번 이렇게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
삐이익-!
[예,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양팀의 후반전 45분이 시작됐습니다. 오른쪽의 주황색 유니폼이 강원, 왼쪽의 하얀색 유니폼이 상주입니다. 전반전에 서로 실수가 많았던 경기였는데요, 후반엔 어떨까요?]
캐스터의 그 말이 끝나자, 해설위원이 조금 뜸을 들인 후에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글쎄요, 오늘 경기는, 솔직히 말해서 두 팀 모두 실수가 많았던 만큼, 섵불리 예단하기가 힘들군요.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어떻게든 선취골을 집어넣은 팀이 오늘의 승리를 가져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런 개싸움은 유효타를 먼저 꽂아넣은 쪽이 계속해서 유효타를 꽂아넣을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선빵필승이랄까.
그렇게 후반전에도 중앙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던 가운데. 살짝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박포진 선수가 중앙 쪽으로 가는 움직임을 보여주네요?]
[아, 아무래도 중앙 싸움에 가담을 하기 위해서겠죠? 지금 중앙에서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말씀드리는 순간 박포진 선수, 돌아서서 패스를-]
뻥-!
[아아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23번! 23번 이준혁 선수가 앞에서 어느새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준혁 선수, 왼발 크로스! 이정현 선수가-!]
[아! 안타깝게도 크로스바를 맞고 마는군요.]
.
.
.
‘씁, 좀 아깝네.’
그래도, 꽤나 놀란 모양이다. 상대방 표정이 볼만하네.
‘내가 그동안 너무 심심하게 크로스랑 패스 위주로만 플레이했지?’
내가 개막전에서 그러긴 했지, 전반전에도 그랬고. 하지만, 그렇게 방심하다간 박살날 각오 하렴.
“형, 몇 번 더 해보죠. 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케이.”
나는, 수비에서만 2개월의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