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67)

친정사랑 나라사랑 (3)

[네, 상주 상무가 1대 0으로 앞선채로 후반전 시작했습니다. 해설위원님은 후반전의 양상을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예,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상무가 매우 유리하고, 고양이 매우 어렵다고 볼 수 있겠네요.]

[어떤 부분에서 그런 해석이 가능할까요?]

캐스터가 마이크가 비지 않도록 긴 설명을 유도하자, 다행히 해설위원도 그 말을 알아듣고 자세한 리뷰를 하기 시작했다.

[고양은, 올해 굉장히 괜찮은 팀으로 거듭났습니다. 수비적인 단단함을 통해 리그 최소 실점이라는 팀을 만들면서 리그 4위까지 올라왔죠.]

물론 방금 1점을 먹어서 2위로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적은 실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이럼에도 고양이 고작 4위였던 이유가 있었는데.

[그렇지만, 고양에는 명백한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공격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죠. 오늘 경기가 9라운든데, 팀 득점이 아직 고작 5득점밖에 못 했다는 점은 너무나도 큰 약점입니다.]

현재 득점 선두인 대구의 조나탄이 혼자서 6골을 넣었고, 2위인 수원의 자파가 5골을 넣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정말 적은 수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은, 수비가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진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 고양은 선제골을 먹었고, 이러면 무승부라도 거두기 위해서 견고한 수비벽을 스스로 무너뜨리야 합니다. 잘못하다간 크게 당할 수도-]

[예, 말씀드리는 순간, 박동기! 골! 골입니다! 박동기 골!]

[아, 고양 감독이 열 좀 받은 모습인데요, 머리를 쥐어뜯고 있습니다. 저러면 나중에 고생할텐데 말이죠.]

-*-*-*-

아, 아쉽다.

오늘만큼은 내가 라이트백이었어야 하는 건데.

-야! 제대로··· 막..!

저 망할 감독의 목소리와 몸짓과 표정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게 나무나도 아쉽군. 내가 라이트백이었다면···

‘쩝, 아냐, 오히려 이게 낫다. 내 표정이 안 들킬 테니.’

그렇게 내가 입맛을 다지고 있을 무렵, 고양 유니폼을 입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야 준혁아, 너 거짓말 쳤던 거냐?”

음, 이 목소리는 범규로군. 칫, 눈치챈 건가. 이왕이면 모른 채로 넘어가줄 것이지. 눈치는 쓸데없이 빨라요.

하지만-

“야, 무슨 소리야. 난 정보 다 넘겨줬잖아, 이게 내 탓이야?”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는 법. 오리발 내밀기 시전이다.

“내가 넘겨준 정보 중에서 틀린 거 있었어?”

라인업? 맞았잖아. 난 라인업은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해줬다?

바르셀로나식 4-3-3 쓰는 거? 그것도 맞았잖아. 단지 그것보다 쪼끔 윙어들이 내려오고 골 넣으려는 시도를 거의 안 하면서 느릿느릿- 굴었을 뿐이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전술이 되긴 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4-3-3이긴 하잖아.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잘못 없음.

“그보단 빨리 돌아가라.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로 말하다가 내가 정보 넘겼다는 사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한 후 나는 잽싸게 저 녀석의 표정을 살펴보지도 않고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야, 준혁아, 너 입꼬리 엄청 올라갔다.”

“흐흐, 그래? 조절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서 더 말했다간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역시 복수는 짜릿해, 최고야, 늘 새로워.

“근데 너 왜 이렇게 저 친구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거야?”

“야, 당연히 숨겨야지, 우리 아직 고양하고 경기 남았어.”

K리그 챌린지는 총 11팀이 40경기를 치루는 구조인 만큼, 이 경기를 끝내고도 우리는 고양과의 경기가 3경기나 남는다. 아직 더 뽑아먹을 승점이 남았다는 거다.

그런데 뭐 하러 쟤네 앞에서 표정을 드러내고

-아, 사실 다 가짜였고 니네 엿먹인 거야.

같은 표현을 해서 황금알을 낳아줄 거위의 배를 가른단 말인가.

“의심받지 않아야 다음에도 이렇게 가짜 정보 넘겨주고 골 폭격 해 줄 수 있잖아.”

“···너를 교활하다고 해야하는 건지, 똑똑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다.”

요 녀석이? 반응이 왜 이래? 내 인내심을 찬양해주지는 못할망정 재나 뿌리고 있어? 아무리 성인군자와 같은 마인드를 가진 나라도 이건 참을 수 없다!

“태준아, 골 넣기 싫니? 오른쪽이랑 중앙에만 패스 줄까?”

“···죄송합니다.”

음 좋아. 그래도 빠르게 용서를 비는구나.

그렇다면 용서해줘야지. 나는 관대하니까.

“태준아, 이젠 수비 도울 필요 없다. 위로 쭉 올라가 있어. 위로 전달해줘.”

“오케이.”

그 말과 함께, 우리는 포메이션을 다시 변경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상무의 진형이 조금 바뀌었군요? 이건 어떤 의미가 있일까요?]

[이야- 잔인하군요 상무. 그야말로 고양을 박살내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90년대에나 보이던 전술이 등장했네요.]

‘자, 이번에도 4-3-3이다. 조금 오래된 4-3-3이지만 말이지.’

양 측면에 위치한 공격수가 물러서지 않고 상대 진영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압박해서 아예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리는. 이제는 거의 잊혀져가는 클래식한 4-3-3.

닥치고 공격. 무조건 공격, 어쨌든 공격하는 닥공 전술.

‘제만식 4-3-3 맛 좀 봐라 이녀석들아.’

-*-*-*-

Zedenek Zeman. 일명 제만이라고 불리는 감독의 축구철학은 그가 한 다음 말을 들으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0대 0은 지루하다. 차라리 4-5로 지겠다.

그렇다. 닥치고 공격. 무조건 공격, 어쨌든 공격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즐겨 쓰던 4-3-3 전술은 매우 공격적이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잘 안 쓰이는 전술이니만큼 약점이 있긴 하다.

[아! 빨라요! 빠릅니다! 고양! 역습 들어갑니다!]

바로, 역습 쳐맞기 아주, 아주 좋은 전술이라는 거다. 이 점이 너무 커서 21세기에 들어서 이 전술을 메인 전술로 삼는 팀은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아! 고양의 역습이 막힙니다! 이준혁 선수, 완벽한 세이브!]

[거의 한 골을 막은거나 다름없는 수비였습니다!]

여기에 있는 고양의 공격수들은, 다들 하나씩 나사가 빠져있다. 지금 고양의 투 톱으로 나온 공격수 두 명은 김유성 선수, 오기재 선배다.

그런데 김유성 선수는 작년까지만 해도 광주의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기재 선배는 작년 고양에서 22경기 1득점 어시 하나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겨 준 공격수다.

‘그 1득점도 내가 진짜 떠먹여다주다시피 해서 얻은 득점이었지.’

그러니까. 아직은 설익은 내 수비로도.

[아, 또 막힙니다! 고양의 역습!]

[왼쪽을 자꾸 노리고는 있는데, 하나도 통하지 않고 있어요!]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는거다.

그리고 축구에서 역습 실패하는 순간은, 뭐다?

[아, 상주 상무, 바로 역으로 역습 들어갑니다!]

[빠릅니다! 빨라요!]

역으로 역습 쳐맞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내 앞에서 범규가 나를 급하게 막아세웠다.

하지만 범규야.

[아, 이준혁! 수비수 제칩니다!]

넌 나를 막기엔, 너무 느려.

‘풀백인데도 단거리 달리기 테스트를 하면 나보다 훨씬 느렸지.’

그렇게 가볍게 제쳐주면서 동시에 패스를 할 공간을 찾는 순간, 내 앞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상황이 나타났다.

‘어쭈, 막으러 안 와?’

내가 공을 가지고 페널티 박스 근처까지 갔음에도 나한테 달라붙는 게 아니라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가서 공격수들 움직임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슈팅할 거라는 생각을 안 하나 보지?’

허 참. 하하. 이 새끼들 봐라?

‘내가 미드필더일 때 슈팅을 정말정말 아끼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내가 감히 슈팅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쪽인가 보지? 이 깜찍한 인간들.

‘좋아, 뭐, 이렇게 먹기 좋게 판이 깔아졌으니, 보여주마.’

내 슈팅이 비록 성공률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파워 하나는 있다고 자부한다. 니놈들이 그렇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지.

‘일단 페널티 박스 안쪽에는 좀 사람이 많으니, 거기까지 들어가진 말고.’

살짝 바깥, 살짝 수비수가 안절부절하면서 달려들려고 하는 이 지점에서. 골대 크로스바. 자. 뒈져라!

뻥-!

[들어갔어요! 들어갔습니다! 이준혁 선수의 완벽한 돌파 후 마무리입니다!]

[아주 멋진 돌파에 멋진 슈팅입니다! 이것으로 경기는 3대 0! 상무가 고양을 박살냅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골 리플레이를 틀면서 분석하려던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조금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 지금 이준혁 선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

<2015 K리그 챌린지 9Round>

경기 종료

고양 FC 0 : 6 상주 상무

[골]

상주 상무 : 김환성 - 43, 박동기 - 52, 이준혁 - 64 배환일 - 75, 한운상 - 88, 박태준 - 90

***

“대승리네.”

“그러게, 대승리다.”

6대 0. 아주 완벽하다. 2위 탈환에, 골 득실까지 +10으로 벌리는 데 성공했다.

“대구는 오늘 어떻게 됐냐?”

“아, 대구는 무승부했다는데.”

“오, 진짜?”

그 소리에, 나는 함박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지금 대구는 9전 5승 3무 1패, 승점 18점에 득실 +6이고,

반면에 우리 상무는 8전 5승 1무 2패, 승점 16점에 득실 +10이니.

아직 대구가 1위라곤 해도, 우리가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는 반쪽짜리 1등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왠지 야식으로 먹은 스파게티가 한층 더 소화가 잘 될 거 같은 느낌이구만.’

그렇게 기분 좋게 버스로 이동하다가.

“근데, 나 너한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태준이가 질문을 던져왔다.

“뭔데?”

“너 세레모니 그거 뭐냐? 그것도 속일려고 안 한 거야?”

그 말에, 나는 잠깐 생각한 후에 대답해줬다.

“솔직히, 그게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그게 아니었어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

“왜? 뭣 때문에 큰 절 세레모니를 한 거야?”

“···난, 프로의 시작을 고양에서 했어.”

물론 ‘돈’ 받는 걸 프로라고 한다면, 내셔널리그에서 뛴 게 시작이지만.

“처음으로 나한테 싸인해달라고 해 주고, 나한테 이겨서 고맙다고 해 준 분들이 다 저기에 있었다고.”

“······”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더라. 저 분들 하나하나 다 기억나서.”

이벤트 덕분에 자전거에 당첨됐는데, 그런 것보단 우리 선수단 유니폼을 달라고 한 어린아이.

식당에서 만났을 때, 경기 잘 좀 하라면서 투덜거리시던 아주머니.

연패했을 때, 힘내라며 응원해줬던 학생들.

그리고, 연패 박을 땐 해체하라고 욕했지만, 연패 탈출하니까 아이처럼 환호성지르면서 좋아해주시던 어르신.

나는 그 분들이 있었기에 진정으로 내가 프로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그 분들 덕분에 그 거지같은 구단에서도 정말 행복하게 뛸 수 있었다.

“이제는 그 곳을 떠나긴 했는데, 그래도 그 분들에게만큼은 너무 감사한 마음뿐이라서. 그렇게 했어.”

“···언제는 평관 600도 안 온다면서 불평하더니만.”

“하하, 그냥 그런 분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불평이었지. 프로 선수가 팬이 많길 바라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태준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그 느낌 알지, 인천에서는 꽤 많이 느껴 봤으니까.”

“응? 너 지금 소속 전남 아니냐?”

“야, 내 친정은 전남이 아니라 인천이다. 인천. 작년에 고작 260분 뛰게 해준 팀은 친정 아님.”

아, 그럼 인정. 최소한 450분은 넘겨야지 백업이라고 이름 붙일 수라도 있으니.

“오히려 지금 여기가 나한텐 더 친정에 가까워. 벌써 나 3경기나 선발출전했잖아? 컵 대회 포함이긴 하지만.”

“그렇구-어? 저 사람들 뭐냐?”

이동하다 보니, 갑자기 우리의 앞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와! 이준혁 선수, 맞으시죠?”

“어, 예, 맞습니다.”

“오늘 진짜 그 드리블 좋았어요. 감탄이 절로 나오던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물론 그 큰 절 세레모니는 상주 팬 입장으로서 좀 그랬지만.”

···음, 그건 죄송합니다.

“에휴, 뭐, 친정 팀이니 봐주는 거예요. 대신 싸인 좀 멋지게 해 줄 수 있죠?”

“예, 예!? 물론이죠.”

“여기 유니폼에 해주세요! 6대 0 꼭 적어주시고!”

“저는 여기 공에다가!”

하하. 이거 영광이네.

“예, 여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싸인을 해주고 나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야, 좋냐?”

“말이라고 하냐?”

비록, 조금 복귀가 늦어져서 선배님들에게 한 소리 듣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주 일요일에 경기가 또 있어서 밖에서 하루도 못 쉬고 바로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의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이 맛에 프로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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