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사랑 나라사랑 (2)
고양의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할 수 있는 황범규는 지금 이 상황이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야, 범규야 오랜만이네! 진짜 반갑다. 야.”
그도 그럴 것이, 지난 겨울에 쫓겨난 이준혁이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무슨 속셈으로 찾아온 거지?’
그렇지만, 표정은 숨기는 게 좋다고 생각한 범규는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오랜만이다 준혁아.”
그렇게 인사치레로 간단하게 서로 어떻게 지냈나를 물어보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범규는 준혁이에게 슬슬 용건을 물어봤다.
“근데, 너 왜 나 찾아온 거야?”
“응? 그야 오랜만에 친구랑 밥 한 끼 먹으려고 온 거-”
“말 돌리지 말고 이야기해. 너 원래 이런 거 좋아하는 성격 아니었잖아.”
물론 진짜로 만나려고 왔을 수도 있었겠지만. 범규는 이 녀석이 괜히 찾아온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소시지 같은 가공육은 별로라고 겁나 싫어하던 놈이 굳이 이 집까지 와서 나한테 한 턱 쏜다고?’
차라리 대한민국에서 EPL 득점왕 나온다는 소리가 더 그럴싸할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압박하자 바로 준혁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그렇게 티났냐?”
“그래, 말해 임마. 뭐 부탁할 게 있어서 이렇게 비싼 것까지 쏘는 거야?”
그렇게 말한 순간, 준혁은 범규의 손을 바싹 잡으며 말했다.
“야, 나 좀 살려주라.”
“응?”
“살려달라고, 나 팀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범규는 그 말을 듣고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 맨날 우리 구단 욕했었잖아.”
매일 이 거지같은 구단 나가고 싶다며 중얼거리던 놈이 어째서?
그런 범규의 반응에, 준혁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일단 내가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것도 아니었잖아. 구단이 계약 해지를 먼저 요청했다고.”
그랬다. 일단 준혁이 먼저 나가겠다고 말해서 나간 게 아니였다. 더럽고 치사한 구단이었지만, 그래도 먼저 계약 해지를 요구하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나가 보니까 밖은 지옥이더라. 하하. 내가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무에서 보니까 아니더라고. 난 병신이었어.”
그 감정이 뜸뿍 담겨진 말에. 범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녀석도 고민이 많긴 하겠네.’
분명 준혁이 저 놈이 상무라는 행운을 잡은 쪽이긴 했지만 그것도 뛰어야 의미가 있는 거다. 당장 9라운드가 되어가는데 리그에서 교체 출전 한 번에 선발 출전 단 한 번 뿐이지 않나. FA컵? 솔직히 그건 버리는 대회고.
이대로라면 준혁은 1년에 경기 10경기도 출전 못하는. 백업 중에 백업이 될 터였다.
“그래서 말인데, 범규야, 감독님한테 말씀해서 자리 좀 만들어 줄 수 있냐? 내가 이렇게 부탁한다. 나 그냥 연봉 인상도 안 바랄테니. 제발.”
그런 준혁의 모습을 보고, 범규는 고민했다.
‘이거, 음··· 내가 감독님한테 말씀드려도 되나?’
솔직히 말해서, 준혁이가 돌아온다고 말하면? 솔직히 환영이다. 실력적으로는.
물론 피지컬 작고 공중볼이 약하다는 단점은 있어도, 저 친구만큼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볼 배급 해 주는 미드필더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다만, 팀에서 쫓아낸 이유가 있긴 했는데.
‘팀에서 시키는 봉사 활동 진짜 극혐했었지···’
이딴 짓 할 시간에, 경기장 찾아오는 팬분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우리들 시합이나 더 잘 해야지 도대체 뭣 하는 거냐고 매일 불평했었다. 그래서 감독님이 눈꼴사납게 보면서 방출한 거였는데···
그렇게 생각한 범규는, 일단은 한 발 뺐다.
“그거, 내가 그냥 말한다고 해서 감독님이 들어줄 가능성은 좀 낮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뭔가를 더 내놔봐라.
라는 범규의 말을 다행히 알아들은 준혁은, 바로 숨겨왔던 패를 꺼냈다.
“아, 당근이지. 나도 양심은 있어. 내일 상무 라인업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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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랬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크크, 고 놈, 하긴 상무에서 쫄릴 만도 하지, 풀백이 되어 버렸는데도 그 정도밖에 출전 못 했으니.”
자고로 풀백이란 대충 체력 좋고 싱싱한 놈 아무나 가져다 쓰다가 나이 들면 버리면 되는 포지션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풀백으로 갔는데도 주전이 아니라면 불안하긴 했을 테지.
“그래서, 그 놈들 무슨 포지션 쓴다고 했느냐?”
“FA컵에서 충주한테 썼던 전술 그대로 간답니다. 다만 자기는 풀백으로 빠지는 점만 다르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무영 감독은 상무를 비웃었다.
“하, 상무가 우리를 아주 만만하게 봤군.”
상주 상무가 충주 FC와의 경기에서 썼던 바르셀로나식 전술. 일명 티키-타카 전술은 분명히 막강했다. 그 전술을 잘 활용한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은 모두 각각 세계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팀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무적의 전술은 없는 법이고, 그 전술도 이제 한물 가 버렸다는 것이 이무영 감독의 생각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쓰는 전술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 생각과 함께, 이무영 감독은 선수들을 돌아봤다.
“자, 다들 잘 들었지? 저 놈들은 우리를 얕보고 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 식 전술에 가장 카운터적인 축구를 하고 있는데, 그런 전술을 쓰겠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지.”
동시에, 이무영은 전술 보드를 보여주며 선수들을 주목시켰다.
“그러니 우리가 쓸 전술은, 그대로다. 시메오네식 4-4-2다.”
시메오네식 4-4-2.
13/14 시즌, 세계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한다고 할 수 있는 두 클럽.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누르고 리그 우승에 성공한 명장 시메오네가 새롭게 정의한.
기존의 공격적이고 중원이 약한 4-4-2가 아닌. 수비적으로 아주 완벽하고, 중원 싸움에서 아주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전술로서 바르셀로나 식 점유율 축구에 대한 완벽한 카운터 전술이었다.
올 해 이무영은 이 전술을 철저히 벤치마킹하였고, 그 결과는 현재까지는 잘 먹히고 있었다, 8라운드까지 고양은 6실점만을 내주며 안양과 함께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등극했으니 말이다.
이러니 이무영이 상무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우리는 내일, 저 한물 간 티키타카 전술을 쓰는 오만한 친구들을 부수고 3위를 차지할 것이다. 알겠나?”
““예!””
그렇게 말하고 선수단이 해산되려던 찰나. 범규가 말을 꺼냈다.
“그럼, 만약에 저대로라면 준혁이 다시 받아주실 겁니까?”
그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이무영 감독은 얼굴이 찌푸려질 뻔 했다.
‘받아주긴 뭘 받아줘? 그 놈을 왜?’
감히 자신에게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태클 걸던 놈을 무엇 하러 받아준단 말인가.
물론 그와는 별개로. 뽑아 먹을 것은 뽑아먹을 생각이 만만한 감독은 생각과는 별개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당연하지, 걱정하지 말고, 전화해서 군 복무 잘 하고 있으라고 해라. 그리고 다음에도 명단 알 일 있으면 이렇게 꼭 찾아오라는 말도 덧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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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경기 명단을 살펴본 이무영 감독은 생각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에 매우 즐거웠다.
“명단도 예상대로 나온 걸 보니, 진짜 사실이었나 보군?”
아무래도 이준혁, 그 녀석이 정말로 다급했던 모양이다.
‘흠, 원래는 받아줄 생각 따윈 없었지만. 어디 한 번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고민 좀 해 볼까?’
그래도 착한 윗사람으로서, 아랫놈이 반항 좀 했다고 아예 싹을 잘라버리기보단 관대하게 용서도 좀 해주고 그래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물론, 그와는 별개로 쉽게 계약서를 찍게 해줄 생각따윈 없었다. 자고로 유리한 상태에서 하게 되는 갑질이야말로 최고로 즐거운 법.
‘대충 연봉도 최저연봉으로 깎아버리고 백의종군하게 하고, 풀백도 볼 수 있게 됐으니 이젠 그냥 만능 땜빵으로 대충 쓰다가 버리면 되겠지.’
어떻게 그 녀석을 괴롭힐지를 상상하다 보니, 이무영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신나게 조금 더 전술적인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어이! 저기 왼쪽 풀백 별로지 않냐! 집요하게 저 곳만 파라!”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지 이제 4개월 정도가 막 지났을 녀석이 수비력이 좋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이무영 감독은, 집요하게 준혁을 파고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크크, 미리 이렇게 가스라이팅을 좀 해 두면, 데려올 때는 조금 고분고분하지겠지.’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어느새 40분이 되기까지.
“젠장! 왜 저 녀석 하나 제대로 못 뚫어내는 거냐!”
왼쪽이 뚫리지를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이무영 감독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생각보다 저 녀석이 수비적으로 잘 배운 모양이군?’
뭐 저렇게 쓸데없이 빨리 배운단 말인가. 이왕 돕기로 했으면 수비도 좀 대충 했어야지.
‘후, 그래, 저래 봤자 어차피 내 밑으로 돌아올 놈인데. 이리 열 낼 필요는 없지.’
그렇게 애써 자신을 위로했지만, 한번 짜증이 나기 시작하자 영 모든 게 불쾌하게만 보였다.
“에잉, 쯧. 저 놈들은 바르샤식 4-3-3이라면서 뭐 저리 사리고 있어. 뭐 의미없이 볼만 돌리고···?”
순간, 감독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이거, 저 놈들 이제 보니 바르샤식 4-3-3이 아닌데?’
바르셀로나식 4-3-3은, 애초에 측면 미드필더, 그러니까 윙어가 아래로 내려와 있지 않는다. 최전방 공격수와의 패스 플레이를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시작할 때는 올라가 있던 상무 공격수 녀석들이, 지금은 그냥 센터라인 수준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걸 깨달은 이무영 감독은 급하게 외쳤다.
“야! 라인 내려! 라인 내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철썩.
[골! 상주 상무의 선취골입니다!]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터진 멋진 골이에요!]
***
<2015 K리그 챌린지 9Round>
전반 종료
고양 FC 0 : 1 상주 상무
[골]
상주 상무 : 김환성 - 43
***
참 변함이 없는 감독이다. 저 인간.
역동적인 토털축구를 하고 싶다면서, 결국 까놓고 보면 또 그 나물에 그 밥인 전술. 어떻게 P급 라이센스 딴 건지 모르겠다니까.
‘아마도 그 때는 시험이 어렵지 않았나 보지?.’
뭐, 그래도 생각보다 선제 골 넣는 데 꽤 오래 걸리긴 했다. 전반 30분 안에 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40분이 넘어서야 선수들이 슬슬 퍼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나름 선수들 체력에 신경 쓰긴 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던 나에게, 태준이가 다가왔다.
“야, 이거 작전대로 된 거 맞지?”
“엉, 봐봐, 저 친구들 다들 쫙 체력 빠졌잖아. 너도 느껴지지 않았어?”
“응, 확실히 저 친구들. 느려졌어.”
그래. 작전대로다.
분명, 시메오네식 4-4-2가 바르셀로나식 4-3-3의 카운터인 건 맞다. 하지만, 4-3-3에는 아주 여러가지 변형 전술이 있고, 그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공격적인 바르셀로나식 4-3-3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수비적인 4-3-3으로 변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거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고 시메오네식 전술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랍니다. 이 인간아. 고양 선수들 체력은 그 전술 감당 못 해요.’
시메오네식 4-4-2는, 선수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저렇게 어중간한 팀이 사용할 경우엔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잘 막더라도, 한 5분에서 10분 정도는 일반적인 전술을 사용한 것보다도 못한 수비력이 나온다는 거다.
하물며 고양은 4일 전에 경기를 한 주전 선수들이 뛰는 상황이니만큼, 나에겐 저 친구들이 체력 상황이 좋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그 점을 노려 전반 막바지까지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는 데에만 집중했고. 결과는 뭐, 보시다시피 성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수비적인 전술에 집중한 팀이 가지는 단점.
“이제 저 놈들, 선제 골 먹혔으니 라인 올리면서 한 골이라도 넣으려고 발악할 거야.”
결국 골 먹히면 그 쪽도 공격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데, 수비라는 과목에만 집중하던 얘들이, 갑지기 공격이라는 과목까지 잘 하라고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천만에 말씀.
-짝짝.
“자, 자, 다들 주목!”
박수 소리에 모두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웃으며 모두에게 딱 한 마디만 했다.
“다들 전반전 동안 잘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골 잔치 한 번 벌여보죠!”
드디어, 친정집 식구들에게 골 요리를 실컷 먹여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