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67)

기록되지 않을 경기 (5)

한 골을 먹힌 이후에도 저 쪽의 전술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끈끈하게 역습 한 방을 노리기 시작했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아직 무승부잖아? 우리는 이대로 갈 꺼다. 어디 뚫을 수 있으면 뚫어봐.

이런 마인드가 철저히 보였다. 그래서일까.

***

후반 10: 15

상주 상무 1 : 1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골]

상주 상무 : 박태준 - 44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 김민제 -33

***

후반전이 시작된지 10분 남짓이 지났지만, 아직 경기 전광판의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공이 아웃된 사이를 틈타 선배 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준혁아, 이거 아까처럼 한번 작정하고 한 쪽 파고들다가 다른 쪽 노려보면 안 되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한 후반전 끝날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직 그러기 힘들어 보이는데요.”

아직 저 놈들 골 먹힌 지, 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한 30분 정도밖에 안 지났다. 정확히는 그 골을 먹히고 난 다음에 후회하고 저거 조심하자고 한 시간 15분 정도, 그리고 뛰기 시작한지 10분.

그래서 아까 그 전술이 통하기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저 사람들이 붕어도 아닐텐데 15분동안 피드백받아 놓고 바로 또 거기에 실점하는 걸 바라는 건 요행이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솔직히, 그냥 묵직하게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고양에 있을 때 있던 일인데, 우리 팀 전술이 이랬다.

-우리가 약하니, 상대 팀이 한 걸음 뛸 때 우리는 두 걸음 뛰어야 객관적인 실력차가 줄어든다!

요약하자면, 뻔하디 뻔한 체력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솔직히, 현대 축구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게 체력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많이 뛸 줄 아는 선수들이 이제는 기술은 좋지만 게으른 선수들보다 중용받기도 하는 시대가 왔으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강팀과 약팀의 가장 큰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체력이라는 거다.

그 02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님이 우리나라에 부임해서 하신 말씀이 있다.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좋은 편인데, 체력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리고, 박지성 선수가 자서전에서도 한 말이 있다.

-내가 대표팀 선수들과 첫 훈련을 했을 때, 가장 부족한 게 체력이라고 느꼈다.

이 소리는, 결국 잘하는 선수는, 체력도 약한 선수보다 훨씬 더 좋다는 거다.

그리고 선수의 체력이 빠지기 시작하면, 실수가 많아진다.

내가 고양에 있을 때 팀의 문제가 바로 그거였다. 감독은 우리들이 강팀보다 강한 체력을 가지고 그들을 압박하길 원했지만. 결국 항상 먼저 지치는 쪽은 우리였고, 전반엔 잘 나가더라도 후반에 실수하면서 역전당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완전히 반대였다. 내셔널리그 1위 팀과 챌린지 리그 1위 팀과의 경기다. 우리 팀이 더 체력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초반에 골 먹힌 것도 우리가 너무 헤이해진 탓에 생긴 실수였지.

하지만, 지금 선수들은 1대 1의 팽팽하지만, 0대 1로 지다가 한 골 넣었기에 딱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고. 적팀은 지금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끝이라는 생각일 거다.

그러면, 우리가 더 유리하다.

“그래? 뭐, 알겠다.”

하지만.

“에이 선배님, 그래도 그냥 기다리는 건 재미없죠.”

우리가 유리하다고 해서, 막 시간만 보내는 건 악수 중의 악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람 의욕 없애는 게 바로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 정확히 못 말하면서 ‘어쨌든 기다려’ 라는 말 아닌가.

뭐라도 할 일을 줘야 한다.

‘일단, 할 일 줄 때 고양 때랑은 다르게 선수들 실수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을 테고.’

정말로 오랜만에, 내가 있는 쪽 팀이 강팀이라서 상대적인 실수의 양도 우리가 더 적지만, 절대적인 실수의 양도 훨씬 적었다.

이러면 볼을 전개할 때 고양에 있을 때처럼 저 사람이 실수할 것까지 생각하면서 공을 볼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럼, 좀 어려운 것 좀 해 보자.’

그렇게 판단한 나는, 바깥쪽으로 스로인을 하러 나간 우측 풀백에게 오른손으로, 손가락 4개를 들어올리며 사인을 보냈다.

-야, 한 번 연습 때 했던 거 해보자. 오른쪽 공격 4번이다.

그걸 본 오른쪽 풀백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거 하겠다고요? 일주일 정도만 연습했으면서?

후배님의 그 표정에, 목을 슥 한번 그어주자 비로소 저 놈이 군말 없이 나에게 스로인을 던졌다. 그래. 이렇게 말 잘 들으니 얼마나 좋니 후배님.

“···준혁아,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에이 선배, 이렇게 여유로울 때 전술 연습도 하고 그러는 거죠.”

배웠으면 실전 연습도 한번 해 봐야 하지 않겠어?

-*-*-*-

경기를 가만히 지켜보던, 김 코치는 지금 상황을 보고, 딱 한 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 미친 놈.”

분명, 지난 일주일 정도 동안 저 친구들에게 바르셀로나 식 플레이를 요구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런 플레이를 하라는 건 아니였어.’

당연한 것이, 고작 일주일 연습해 놓고 바르셀로나식 플레이를 할 수 있으면 누구나 모두 그 플레이를 연습하지 않겠나. 솔직히 말해서 1년, 2년동안 그 전술만을 쓰겠다고 연습을 해야 간신히 흉내라도 내면 다행인 플레이가 그들의 플레이다.

-환일이 형 내려와요! 우현이 넌 올라가! 올라가라고!!

그런데, 저 미친놈은 배운 지, 고작 일주일만에 바르셀로나가 우측 공격 전술에서 보여줘야 할 포지셔닝을 완벽하게 외워버리고 선수들한테 명령까지 내리고 있었다.

물론, 선수들이 선수들인 만큼, 완벽하게 동일하진 않았고, 실수도 나오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건 다 지키고 있군”

4~5명의 선수가, 계속해서 오른쪽에서 마름모를 그리면서 공을 가진 선수가 고립되지 않도록 만들고. 측면에 있던 상대 선수들이 그걸 보다못해 중앙으로 2명 이상 끌려나오면, 풀백을 달리게 만들어 텅텅 빈 측면을 공략한다는.

바르셀로나 식 오른쪽 공략의 핵심은 그대로였다.

그걸 보자, 김 코치는 문득 영남대와의 연습경기 후에 그 쪽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이준혁이란 친구, 중미가 아니라 풀백으로 쓸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래서 맞다고 말해주자. 조금 무례한 눈으로 쳐다봐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만 했다.

‘진짜로 머리 하나만큼은 참 좋은 친구구만. 빌드 업 중요시하는 감독들이 보면 그야말로 침 질질 흘릴 놈이었어.’

그럼에도 빛을 보지 못했던 건, 아마 축구 인생 내내 약팀에서만 뛰었기 때문일 것이다. 약팀에서는 빌드업이고 뭐고, 단순한 플레이 몇 개에 맞춰서 기계적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으니까 저 친구의 능력을 펼치기도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상주 상무.

표면상의 전력으로는, K리그에 가서도 중위권, 상위권의 선수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리고 강팀일수록, 저런 빌드 업을 잘 하는 미드필더는 절실하다.

‘물론 기승이가 있으니 미드필더로 리그 경기에서까지 주전을 주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이 FA컵만에서는, 얼마든지 미드필더로서 뛰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저 녀석이 이 팀의 핵심으로서 기동할 경우. 얼마나 큰 효과를 볼지가 궁금해졌다.

“이준혁-! 반말로 해라! 반말로! 동기끼리 존대쓸 필요 없다!”

물론, 전술 명령하면서도 저렇게 존댓말 써서 늘어지는 습관은 고쳐야겠지만.

***

경기 종료

상주 상무 3 : 1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골]

상주 상무 : 박태준 - 44, 배환일 - 55, 한경인 - 78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 김민제 -33

***

“자, 우리 준혁이는 닭다리 두 개 먹어라! 오늘 진짜 수고 많았다!”

음··· 저기? 선배님?

“선배님, 부대 안에서 이렇게 대놓고 치킨 시켜 먹어도 돼요?”

“야, 당연하지, 임마,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야.”

아니 사람 사는 곳이긴 해도, 원래 군대 오면 배달 음식은 못 먹는 거 아니였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군대간 놈이 전화할 때마다 맨날 치킨 먹고 싶다고 징징거리길래 안에서 먹는 거 불가능인 줄 알았는데?

그런 내 반응에, 경인 선배님이 웃으며 말했다.

“야, 야. 원래 경기 이기면 외박 정도는 주는 게 일반적이잖아. 그런데 리그 경기도 아니고 FA컵 3라운드라고 짠돌이 부대장이 외박 안 줘서 당직사관이 배달시키는 건 눈감아주겠다고 쇼부 쳤어. 이 정도는 괜찮아.”

“아···”

그렇구만. 그럼 안심하고-

“···혹시 콜라는?”

“제로 콜라다. 이 녀석아.”

그 말에 내가 덥썩 닭다리를 베어물자, 경인 선배가 씩 웃으며 후배들에게 명령했다.

“자, 다들 먹자!”

“예!”

그렇게 전투적으로 말 없이 다들 닭을 해치우다가, 슬슬 한 사람당 2마리씩 해치우고 나자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대화 주제는 당연히 오늘 경기었다.

“야, 진짜 오늘, 경인 선배, 감사합니다. 얼마만의 공격 포인트냐.”

“글쎄, 한 1년만 아니냐? 작년에 너 여름부터 출전 못 했으니까.”

“···에이, 형,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아, 말 나온 김에 핸드폰 좀 빌려주세요. 오늘 기사에 제 이름 떴나 좀 보게.”

“여기 있다.”

그렇게 선배한테서 핸드폰으로 오늘 경기 결과를 검색해본 후배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경기 결과가 안 나와?”

“응? 경기 결과는 뜨지 않았어?”

“아니, 결과는 떴는데, 그냥 32강 진출팀이 어디어디인지 말하고만 끝나는데요. 우리 팀 경기에 대한 단독 기사는 하나도 없어요.”

그 말을 듣고, 몇몇 나보다 어린 후배들은 두 눈을 크게 떴고.

“와 씨. 우리 기사 하나도 안 났다고요?”

“와- 그래도 보통 기사는 뜨지 않아요? 진짜 FA컵 사람들이 관심 없구나.”

나보다 선배이신 분들의 반응은 침착했다.

“쯥, 그렇게 됐구만. 확실히 3라운드는 아직 기사 뜰 때가 아니긴 하지.”

“야, 이 놈들아. FA컵은 단독 기사 뜨려면 보통 한 8강은 가야 돼. 어려서 잘 모르는구만?”

그러자 후배 녀석 중 한 녀석이, 질문을 던졌다.

“작년에는 16강 경기인데도 기사 많이 나지 않았어요?”

“야, 그건 약팀이 승리해서 그런 거야. 상대적으로 약팀이 승리하면 기자들은 신나서 기사 쓰기 시작하거든. 아마 오늘 우리가 졌으면 단독 기사 떴을 걸? 상주 상무, 세미프로 팀에게 충격적인 패배. 이런 식으로.”

그 말을 듣자, 기사에 뜨지 못해 얼굴이 찌푸려진 후배의 얼굴이, 조금 다른 의미로 찌푸려졌다.

“그래, 상상만 했는데도 욕 나오지? 솔직히 기사 안 뜨고, 박제 안 당한 게 다행인 거야. 강팀이 약팀을 잡는 그런 일은, 별로 사람들이 클릭을 안 하잖아. 쓸 이유도 없는 거지.”

그래, 우리의 경기는 흔하디 흔한. 강팀이 약팀을 잡는 경기였다.

그렇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럼, 우리 다음 FA컵 경기도 기사 안 쓰이려나요?”

“흠, 글쎄? 32강전 추첨 상대가 서울이나 전북이면 기사 나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기사 써질 리는 없지 않을까?”

“···그냥 기사 안 뜨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까?’

32강부터는, K리그 클래식 12개 팀이 참가한다. 운이 조금 나쁘면 K리그 팀을 만나게 된다는 소리다.

‘그걸 생각하면 바로 떨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K리그 팀을 만난다고 순순히 떨어지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우리는 FA컵으로 얻게 되는 출전 기회 한 경기 한 경기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러니, 만일, 혹시라도 K리그 팀을 만난다면.

“거기, 그 경기 대충 쓴 기자 이름 뭐냐?”

다음에야말로 기자들이 반드시 우리의 경기를 기록하도록, 쓰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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