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을 경기 (1)
2015 K2리그, 정식명칭 K리그 챌린지리그는 총 11개의 팀이 경기를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홀수 팀이 존재하기에, 10팀이 경기할 때 남는 한 팀은 무조건 쉬게 된다는 것이다. 옛 말로 표현하자면, 깍두기라고나 할까.
그리고 2라운드의 쉬는 팀은, 바로 우리 상주 상무였는데, 이번 3월 말에 국가대표 A매치 평가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국가대표 공격수가 있는 만큼, 일정에 편의를 봐 준 것이었다.
그랬는데.
[아- 지금 부상이 좀 있나요?]
[예, 지금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지금 부상당한 선수는 이정현 선수 같은데요. 방금 전 코너킥 상황에서 경합하다 안면 쪽에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 지금 약간 출혈이 있습니다. 눈 부위가 좀 찢어졌어요.]
이 무슨 불운인지. 시즌을 시작 한 지 얼마 안 되어 상무는 주전 공격수가 부상당하게 되었다.
-*-*-*-
2015년 03월 31일
“휴, 다행이다. 정현이 녀석 진짜로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하네. 그냥 이마가 찢어진 정도랜다.”
그렇게 내가 군의관한테 받은 정보를 가져 오자. 태준이 녀석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그래? 그럼 얼마짜리 부상인데?”
“일주일짜리래. 오늘 A매치경기도 조금 무리하면 뛸 수는 있고, 우리 2라운드 경기 할 때는 뛸 수 거라고 판단이 내려졌다는데.”
그 소식에, 태준이는 조금은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랑은 별 상관 없네.”
순간적으로 나는 그 실망한 듯한 목소리에 후배가 다친건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할 뻔 했지만.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나도 태준이 같은 상황이었다면 적극적으로 부상을 바라는 건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라도 자리가 남길 바랬을 테니까.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자. 태준이가 먼저 사과해 왔다.
“미안, 실언했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아냐, 그럴 수 있지, 이제 경기 시작되니까 경기나 보자.”
이후 조용히 TV 광고를 보던 도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야, 태준아. 넌 국대 뽑혔었지?”
“그렇지, U-23이고, 고작 2경기 뛰었지만.”
“그럼 그 때 같이 지냈던 사람 중에서 오늘 뛰는 사람 있냐?”
그 말에,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동자를 위로 굴리던 태준이는, 역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저 A매치 보니깐 궁금해져서.”
“실없기는.”
그래도 나름 골똘히 기억을 떠올린 태준이는 대답해줬다.
“별로 많지도 않네. 내 기억이 완벽할진 모르겠는데, 그 때 같이 뛰었던 선수 중에선 동언이랑 영건이밖에 없는 거 같은데.”
“그래? 생각보다 적구나.”
U-23이면, 프로거나, 사실상 프로확정인 녀석들 뿐인데도 말이지.
“그래, 적지. 게다가 나는 잠깐 있었을 뿐이니까 많이 친해지지도 못했어. 오히려 친한 사람은 너 아니냐? 영건이가 니랑 동기잖아.”
그 말에, 나는 쓴웃음지었다.
“글쎄, 그 때는 나름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걔가 일본 가고, 벌써 연락 끊긴 지 3년은 됐거든, 솔직히 잘 모르겠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게다가 친구관계도 어느 정도는 급이 맞아야 오래가지. 2학년 끝나고 J리그 진출하면서 통 크게 1억을 기부하면서 떠난 놈이랑 나랑은 좀 차이 나지 않냐.”
2학년 끝내고 J리그로 계약금 수억씩 받으면서 간 놈이 졸업 후 내셔널리그로 빠진 놈이랑 친구 사이를 유지하기란, 정말 힘든 법이다.
그리고 그런 내 말에 태준도 동의하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네, 국대 보고 자격지심 안 들려면, K리그 최상급은 되어야지?”
그 말을 듣자, 우리는 모두 큭큭- 웃었다. 그도 그럴 게, 중학교, 고등학교, 아니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같이 놀던 놈들이었는데.
어느새 저 녀석들은 우리가 어렸을 적에 우상처럼 생각하던 그 자리에 서 있고.
우리는 TV로 저 녀석들을 지켜봐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참 서글펐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경기가 좀 지루해서였을까.
“오, 저기 신갈고 최대 아웃풋 2 벤치에 있네. 소감이 어떠냐?”
“시끄러 임마, 보겸이랑 연락 안 한지 벌써 2년은 되어간다.”
“왜 임마, 넌 그래도 K리거잖아.”
“1부에서 경기 거의 못 뛰는 것보단 2부리그에서 주전먹는 게 차라리 낫지.”
우리는 경기 내용을 면밀하게 지켜보기보단, 그냥 신나게 추억거리들을 풀기 시작했다.
성룡이가 있었던 금호고 이야기라던가, 예비 명단에 들어 있는 신갈고 영범이라던가, 아니면 신갈고의 라이벌인 언남고 우민이 이야기라던가 말이다.
그건 아마도 경기가 지루해서도 있겠지만.
저기에 있는, 우리와 분명히 함께하던 순간들이 있던 저 친구들이.
[아- 저기 교체 사인이 나오는군요. 차두리가 나갑니다.]
[예, 그렇군요. 차두리 선수가 국가대표로서 마지막 발걸음을 갖습니다. 나가면서 주장 완장을 기성룡 선수에게 전달해 주는군요.]
우리가 그토록 우러러보던 우상들과 저렇게 함께하고, 주장 완장도 차고 하는 게, 참 믿기지가 않기도 하고,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뭘 했나 싶은 자괴감이 들어서였을 거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너무 늦은 걸까.”
어두운 소리를 잘 하지 않던 태준이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한 결과, 이렇게 말했다.
“글쎄. 늦은 건 맞겠지.”
분명히 우리는 이제 젊다. 고 말할 나이는 아니다. 스물일곱 살. 만으로 25세.
대한민국 1부와 2부를 합친 프로축구 선수들의 평균 연령이 25.7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이제 나이가 서서히 무기가 아니라, 무게가 되기 직전의 때다.
“하지만, 아직 막차 기회 정도는 남아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우리는 군대를 K3나, 현역으로 가는 대부분의 선수들과는 달리, 우리는 군대라는 2년간의 경력 단절 시기가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되는 선수 안엔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뛰자고. 저 놈들이 걸을 동안.”
그 말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태준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씨발. 내가 어! 고등학교 축구 1황이었던 신갈고 에이스 박태준인데.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음, 음···. 저기.
“저기 미안한데, 승열이가 에이스 아니였냐?”
“에라이 임마,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사람이 이럴 땐 좀 넘어갈 줄도 알아야지.”
“그래도 진실은 언제나 밝혀져야 하는-”
“아, 쌰랍. 어떻게 된 놈이 유도리가 없어!”
음··· 미안하다. 이런 놈이라. 하하.
“에라이, 됐다. 이거 더 봤자 기분 잡치기만 할 것 같아. 연습이나 하러 가자.”
오? 얘가 왠일이래? 먼저 훈련하자고 하다니?
‘갸륵하구만.’
내가 먼저 훈련하자고 하고 훈련 나가자고 여러 당근을 내밀어야만 하던 놈이, 훈련을 자발적으로 하려는 모습을 보이다니, 아주 좋은 일이다.
다만 한 가지만 사실을 까먹었다는 게 옥에 티다.
“야, 지금 저녁 9시다. 9시. 지금 훈련장 가기는 늦었고, 뭣보다 우리 저녁 점호 해야돼.”
우리, 이래봐도 군인이긴 하단 말이다.
물론 그런 것치곤 외박 외출이 겁나게 잦지만, 나름 아침점호 저녁점호는 꼬박꼬박 챙기고, 이거 안 하면 진짜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것도 안 지키냐면서.
“······”
“그러니까, 우리 지금은 플랭크나 하자.”
“아- 망할, 뭔가 좀 마음먹고 하려고 하면, 꼭 뭔가가 가로막냐.”
“그냥 내일부터 나랑 운동하자고. 그럼 되잖아.”
“후우- 그래야겠다.”
그렇게 대답을 들은 나는, 즉석에서 A4용지를 꺼냈다.
“그럼 여기에 싸인해.”
“···뭐야, 이건.”
“뭐긴 뭐야, 각서지. 싸인 맨 아래에 하면 내가 나머지 내용은 알아서 만들게.”
“···어떤 내용 써놓으려고?”
어떤 내용이긴.
“너나 내가 약속 안 지킬 경우에 벌금 내기라던가? 그런 거 적어둘거야.”
“에휴- 그래, 알았다 알았어. 적당히 만들어라.”
그러더니 진짜로 태준이 녀석이 싸인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고 애썼다.
‘흐흐흐, 임마. 백지각서를 쓰다니. 네가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이 불쌍하고 어여쁜 친구 같으니, 이런 사기 행각에 당하면 어쩌니.
내 이를 어엿비 여겨 딱 스물여덟 조항만 넣어주도록 하마.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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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사기꾼 자식아!”
음, 어디서 채무자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는군.
“이준혁 이 새끼야. 이거 무효야, 무효, 다시 써!”
음, 온갖 상스러운 표현을 쓰면서 채권자를 압박하려 드는 모습이 심히 불량 채무자로구나. 정말이지 무도한 채무자다.
고작 내가 하는 공수 훈련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오고 저 녀석이 위반하면 월급 압수라고 적어놓은, 백지각서치고는 아주 양심적인 행동을 했거늘 어찌 나의 이런 착한 마음을 몰라준단 말인가. 역시 세상은 불합리하다.
그렇게 내가 계속해서 무시하자. 채무자 녀석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계약서 원본을 찾으려 들었지만, 소용 없는 짓이지.
“야, 낙장불입이야. 이미 코치님한테 박제당했잖냐.”
그랬다. 수석 코치님이 저녁 점호에 바로 그 계약서를 보더니.
-오, 맙소사. 이렇게까지 훈련에 열정을 보이는 친구가 있다니! 아주 좋군! 아주 좋아! 자네, 내가 최선을 다 해서 돕도록 하겠네!
이런 상황이 벌어져 버렸다.
“씨발··· 개 새끼··· 최소한 니도, 니도 써어어···”
응 안 들려, 안 들려, 에베벱.
니가 선택한 백지 각서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거라.
그렇게 내가 나도 몰라유- 하는 반응을 보이자. 태준이 녀석이 이젠 숫제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니, 씨발. 그 계약서 보고 감탄했으면 3라운드 때 후보로 데려가기라도 해 주던가. 왜 이렇게 남겨놓고 가는 게 어디 있는데!”
“글쎄? 듣자하니, 3라운드 경기가 원정이라서 우리 신병들은 웬만하면 안 데려간 거라고 하던데.”
그 말을 듣자, 태준이는 이건 또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원정인 게 무슨 상관인데?”
“우리는 원정 경기가 사실상 외박이잖아.”
“···아.”
솔직히 나도 듣기 전까진 생각지도 못한 이유이긴 했지만. 듣고 나니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상무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갓 일병 단 놈이 밖에서 술 마시고 놀아대는 꼬라지라도 보이면 솔직히 엄청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말에, 태준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럼 뭐야. 우리는 또 10일 동안 경기 없는 거야?”
“아마도?”
“하- 씨. K리그 챌린지 40경기 맞냐? 무슨 리그 경기가 열흘에 한 번씩 있는 건데.”
그렇게 태준이가 한탄하던 도중. 뒤에서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경기가 없어서 불만인 건가? 자네?”
“누- 아, 아닙니다! 김 코치님! 아닙니다!”
“아냐, 그렇게 부정할 필요 없어, 선수라면 경기에 못 뛰게 되면 불만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김 코치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태준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 자네에게 기회를 주겠네.”
그 말에, 태준이의 눈이 번뜩였다.
“서, 설마 4라운드 리그 경기에-”
“아니, 아니, 그건 아닐세, 거기는 서울 이브랜드와의 경기라서, 솔직히 후보에 불과한 자네를 마음대로 넣으면 내 월권이야.”
그렇지만.
“FA컵 경기에는 넣어줄 수 있지. 어떤가? 11일에, 우리 홈에서 FA컵 3라운드가 열리는데, 거기에 뛸 생각 있나?”
그 말에, 태준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살짝 끼어들었다.
“코치님, 혹시 저도 경기에 뛸 수 있습니까?”
“응? 준혁이 자네도?”
“예, 솔직히 너무 오래 쉰 것 같습니다. 경기 감각을 좀 되찾고 싶어서요.”
“으음··· 하지만 자네는 4라운드에 후보 명단엔 들 텐데, 괜찮겠나?”
괜찮겠냐고? 당연하지.
‘후보 명단에 든다고 내가 뛸 일이 무조건 생기는 건 아니잖아.’
개막전 같은 경우는 정말 어이없는 실수가 나와서 내가 들어갈 수 있었던 거고, 아직 주전이 쌩쌍한 리그 4라운드에 내가 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 경기라도 뛰는 게 낫다.’
무엇보다.
“괜찮습니다. 리그 경기는 15일에 열리니, 체력적으로도 부담 없습니다.”
그 경기가 끝나고도, 리그 경기까지 4일의 휴식시간이 있는 만큼 회복할 시간은 충분하다.
코치님도 같은 생각이셨는지. 내 말이 끝나자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열정이 넘치니 좋군. 너도 넣어주마!”
첫 출전 후, 22일,
무려 3주만에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