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에는 세금이 있다. (3)
전(前) 고양 미드필더, 현(現) 이브랜드 백업 스트라이커인 주민구는 지금 일어난 일이 꿈만 같았다.
단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안녕하세요 주민구 씨, 고양 FC HR팀입니다. 귀하의 자질과 열정만큼은 매우 높이 평가되었으나, 아쉽게도 저희는 다음 시즌에 주민구 씨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번에는 꼭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저,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박박 긁어대는 멘트로 가득한 문자를 받고. 그야말로 허탈함에 빠져서 소주를 몇 병이나 깠었는지.
‘아니 시발- 자질과 열정이 높게 평가되면 왜 같이 안 간건데에-! 아쉬우면 좀 계약 해 주지 그랬냐! 이런 문구 필요 없다고··· 차라리 그냥 짧게라도 내가 왜 최종 계약에서 밀려났는지를 말하라고···’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문자로 재계약 대상자가 아니라는 걸 빠르게 알려준 덕택에 다른 팀을 알아볼 시간이 있었다는 것 정도였고. 그래서 일단 여러 곳의 입단 테스트를 봐 왔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죄송합니다. 주민구 선수는 저희가 원하는 선수가 아니네요.
-자네, 미드필더 맞나? 무슨 볼 운반 능력이 이 모양인가? 몸싸움만 잘 한다고 해서 미드필더인 게 아니야.
-
-내 팀에 활동량이 별로인 미드필더는 필요없다.
중간에 뭔가 빈 것처럼 보이지만, 빈 게 아니라 그 곳은 아예 불합격이라고 말해주지도 않았던 것 뿐이다.
하여튼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부족함을 지적받으며 테스트 불합격 통보만 받자, 그야말로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발, 내가 준혁이 형처럼 볼 배급 할 줄 알고 활동량 좋았으면 바로 그냥 고양에서 주전 먹었겠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트라이아웃 뺑뺑이를 돌린 끝에, 다행히도 팀을 찾을 수 있었다. 대전 쪽에서 자신을 백업 수비형 미드필더로 영입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꺼내왔던 것이었다.
‘휴- 그래도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물론 단년에 최저 계약이지만, 그래도 나름 팀을 구했다는 데에 만족하며 대전으로 짐을 옮길 준비를 하던 도중
-Hello, Min-gu I’m seoul ebrand manager, Is this a good time to talk?
갑자기 날라온 문자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그 문자를 떠올리자, 주민구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으며 이 문자를 준 장본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감독님! 싸랑합니다! 싸랑해요! 으하하하!”
“Oh, zom ddul어져!”
감독님이 뭐라고 하긴 모르겠지만,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이 엘리트 수제자의 감격어린 포옹을 거절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감독님을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추던 와중. 뒤에서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우리 민구, 포텐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 순간, 민구는 감독님을 얼싸안는 것도 그만두고 바로 차렷 자세가 되었다.
“가, 감사합니다! 원희 선배.”
감독님도 감독님이지만, 국가대표 36경기 출전에 영국 프리미어리그까지 찍먹해본 선수 앞에선 자연스레 자세를 똑바로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야,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재능 있는 걸 재능 있다고 하는 건데 뭐.”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하여튼 너 컨디션 좋아 보이니까. 너 위주로 볼 몰아줄게, 알겠지?”
“예! 감사합니다!”
“···그래, 알아들은 것 같으니, 후반전에도 잘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구는 그 말이 끝나자 선배님이 조금 이상한 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시는 듯 하긴 했지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신나게 앞장서서 경기장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막상 경기장에 도착하고 보니, 살짝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라? 저 형님이 왜 저기에 있는 거지? 미드필더신데?”
그런 민구의 의문은 후반전이 시작되고 나서 5분동안 준혁의 움직임을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준혁 형, 풀백으로 포지션 변경했구나.’
왠지 옛날보다 상체 근육이 조금 빠진 느낌이 들더니, 그게 단순한 군대 짬밥으로 인한 변화가 아니라 포지션에 맞춘 변화였나 보다.
‘아니 근데 나처럼 경기에 못 나가시던 선수도 아니신 분이 왜 저렇게 포변했냐.’
솔직히 키가 작아서 공중 볼 하나도 못 따내고, 몸싸움을 심하게 걸면 볼 전개를 제대로 못 한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저 형만큼 활동량 좋고, 볼 잘 배급해주시는 미드필더가 없었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신 거지?
‘쩝, 안 됐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 그렇다고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선배를 봐 줄 생각 따윈 없었다.
“여기-!”
오히려 상대방의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또 파헤치는 게 프로인 법이다. 그리고 민구는 프로답게, 포지션 변경한 지도 얼마 안 되었을 저 선배를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힘으로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냥 피지컬로 우겨넣으면 뚫리시겠지.’
애초에 키도 거의 10cm 가까이 차이나는 분인데, 그냥 뚫리지 않겠는가. 보라. 이렇게 달라붙어 봤자 툭 하고 밀어버리면 밀리시지-
뻥-!
뭐, 뭐야?!?
-*-*-*-
‘흐, 역시 아직 그 습관 안 고쳤구나. 이 녀석. 볼 받으면 무의식적으로 무조건 오른발로 받는 거.’
사실 우리나라가 양발을 잘 쓴다 뭐다 하지만, 단지 유럽에 비해 양발을 더 잘 다룰 뿐이지, 결국 선수가 경기를 뛰다 보면 정말 극소수의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주로 쓰는 발과 조금 쓰는 발이 갈리기 마련이다.
이해하기 쉽게 일반적인 경우에 빗대자면, 나 같은 왼손잡이들이 글 쓸 때도 공책에 막 손 때문에 번지고 그래서 불편하니까 대부분 오른손도 쓸 수 있도록 연습하고 해서 평소 생활은 양손잡이로 생활하지만. 결국 아무 생각 없이 물건을 들어올릴 땐 왼손부터 나가지 않던가.
그리고, 그건 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결국 선호하는 동작이, 선호하는 발이 플레이를 하다 보면 생기게 되고, 습관으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뻐엉-!
‘그렇게 계속 오른발만 사용해 봐라. 이 녀석아. 몇 번이고 공 받자마자 뻥뻥 차줄테니’
그렇게 몇 번이고 오른발로 공을 받으면 바로 공을 내가 뻥 차버리는 상황이 반복되자, 이 녀석도 슬슬 깨달았는지 오른발이 아닌 왼발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식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닐 텐데?’
-퍼억
“으어?”
거 봐, 역시 안 쓰던 발로 플레이를 하려다 보면 이렇게 실수하게 되어 있다. 애초에 그 습관을 바꾸겠다고 생각해서 단번에 그게 되면, 그건 터미네이터거나 메시겠지.
그렇게 녀석의 볼 터치 미스로 튀어나온 볼을 곧바로 가로챈 나는, 앞에 나와 같이 투입된 태준이에게 소리쳤다.
“태준아-! 앞으로- 뛰어-!”
그 말과 동시에 태준이가 앞으로 뛰기 시작하고, 나 역시 달리기 시작하자 당연히, 내 앞으로 선수가 달려왔는데, 어제 영상을 봤던 존슨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었다.
민구보다 더 큰 키의 모습으로 달려드는 그 모습은, 흡사 얼핏 보면 공포 같아 보였지만.
-뻐엉
나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저 녀석의 가랑이 사이로 볼을 차넣고, 스피드 싸움을 걸었다.
‘미안하지만, 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게 너무 뻔히 보였거든.’
어제 동영상에서 나왔던 녀석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육각형 공격수의 모습이었지만. 오늘 전반전 잠깐, 후반전 잠깐동안 본 네 모습은 정말 둔하고 느린 공격수다.
‘아마도 몸 관리 실패했거나 했겠지.’
아무리 네놈이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혹은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가 그렇게 프로의 기본도 안 지킨 너 하나 제치지 못할 정도로 못나진 않았다.’
그렇게 녀석을 스피드로 제쳐내자, 순식간에 앞이 뻥 뚫렸고, 상대편 수비진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야! 저기 저 놈한테 달라붙어!
-여기! 여기 뒤로 침투하는 놈도!
그렇게 순식간에 나에게 선수가 달라붙고, 위로 올라가는 태준이에게도 상대 팀 선수들이 달라붙으면서 왼쪽 측면에 인원이 살짝 쏠리던 순간.
뻐어엉-!
나는 망설임없이, 오른쪽에서 위로 몰래 올라가고 있던 이형 선배에게 긴 크로스를 보내주었다.
-···어! 야! 막아! 막아!
‘속아줘서 땡큐.’
너무 순진한 친구들이네, 저 친구들, 내가 태준이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꼭 태준이한테만 패스한다고 생각하다니.
‘저기 저 오른쪽에 훨씬 더 믿음직스러운 국가대표가 있는데, 저길 막을 생각도 했어야지.’
그리고, 이형 선배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텅텅 비어버린 오른쪽 측면을 신나게 파고들어 크로스를 날려 준 결과는.
삐이이익-!
“이예에에-!”
아주 달콤한 골이었다.
***
경기 종료 .
상주 상무 2 : 2 서울 이브랜드
[골]
상주 상무 : 이정현 - 50분, 여해성 - 77분
서울 이브랜드 : 주민구 - 22, 44분
***
경기 종료 후, 양 팀의 선수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이브랜드 쪽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고, 상무의 선수들은 살짝 웃고 있었다.
아무리 무승부라고 하지만, 지고 있다가 따라잡은 팀의 모습과 이기고 있다가 따라잡힌 팀의 기분이 같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이브랜드는 자신들의 전력이 충분히 K리그 2에서 통한다는 것을, 상무는 15군번 선수들의 실전 감각을 되살렸다는, 나름대로의 거둔 성과가 있기는 해서 서로크게 얼굴을 붉히지 않고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가운데.
나는 지금 찰싹 달라붙은 후배 녀석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아니, 선배님, 그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빨리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진짜라니까.”
“아니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오른발 위주로 쓴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 제 움직임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다 파악하는 건데요.”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내 옷을 챙겨서 나갔다. 저 말에 대해 딱히 할 만한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긴 무슨. 몇 번이나 엿 될 뻔했는데.’
저 녀석, 분명히 자주 가져가는 움직임이라던가 습관 같은 것들을 내가 다 알고 있는데도 조금이라도 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꽤나 위협적인 슈팅을 날렸다. 고작 공격수로 전환한 지 3개월 남짓한 녀석이 말이다.
‘재능이란 거, 참 무섭구나.’
그래, 이 정도면 인정해야 한다. 저 녀석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힐 공격수가 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놈이 분명하다.
분명 이대로 성장하기만 한다면, 오늘처럼 나한테 막히는 게 아니라 나 따윈 언제든지 휙 제껴버리고 언젠가 K리그까지 진출해서, 득점왕을 노리고, 혹시 어쩌면 국대까지 노려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였지.’
그게 중요하다. 결국 축구라는 건 결과로 말하는 거다.
상대방이 어떤 가능성이 있던간에,
상대방이 평소에 나보다 얼마나 더 잘하던 간에.
지금 벌어지는 경기에서 어떻게든 우위를 차지하고 이기면 되는 거다.
“자, 모두들 수고했다! 많이 힘든 경기였지만 너희들은 잘 이겨냈다. 훈련이 끝난 기념으로 오늘 저녁은 자유시간이다! 적당히 마시고 내일 아침까지만 집합해라!”
“우와아아아-!”
그러니, 지금은 내가 저 녀석을 이겨냈음에 순순히 기뻐하자.
그리고 다음에도 이 기분을 느끼기 위해.
“이형 형님.”
“어, 준혁아, 왜?”
“혹시, 부대로 돌아가면 저랑 플레이 하나 연습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연습하고 노력하자. 다음에도 아주 조그마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