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놈 (3)
-툭
아직이다. 뒤로, 뒤로
-툭
-아직이다. 뒤로, 더 뒤로.
-투우욱
지금! 아- 망할.
“크으! 아, 아깝다.”
“아깝긴 뭐가 아까워 임마. 지금 세 번 연속으로 뚫리고 있구만.”
“시끄러 임마.”
그랬다. 지금 저 녀석이 볼을 가진 상태에서 내 쪽으로 달려오는 1대 1에서, 나는 보통 1번 막으면, 저 놈은 두세번을 뚫고 있었다.
‘물론 이 1대 1이 공격수 쪽에 엄청 유리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게 맞다. 젠장.
“휴, 너 진짜 볼 컨트롤 좋다. 어떻게 그렇게 발에서 볼이 그렇게 잘 안 떨어지냐?”
“얌마, 내가 안 그랬음 어떻게 K리그에서 살아남았겠냐. 스피드도 평범한 수준인데.”
아, 하긴 그렇겠구나.
‘하긴 저런 재주가 없었으면 저 녀석은 1부가 뭐야, 네셔널따리였겠지.’
프로필상 키가 172cm, 그런데 나랑 키와 거의 차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좀 차이가 나는 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마도 이 녀석 프로필상 키는 신발 신고 잰 거고. 진짜 키는 170이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보다 3cm나 작다는 거다.
그런데도, 저 놈은 1부에서 지금까지 무려 50경기를 넘게 뛰었다. 올림픽 대표까지 뽑힐 뻔했고. 이게 뭔 소리겠는가. 이 녀석, 개인기 하나는 진짜라는 거다.
‘스읍,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좀 심각하긴 하다.’
설마 이렇게까지 돌파를 못 막을 줄이야.
그래도, 희망적인 부분도 있긴 했다. 바로-
“아 씁, 임마! 좀 살살 해. 살살!”
“지랄, 나 지금 손도 별로 안 쓰고 있다? 이건 니가 그냥 못 뚫는 거야.”
서로 붙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1대 1에선, 반대로 내가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
‘확실히, 측면에선 내가 피지컬이 좋은 편이야.’
몰론 이 녀석의 피지컬이 약한 편이긴 한데, 그래도 폐급은 아니다.
‘폐급이면 런던 올림픽 때 예비 명단에 뽑히지도 않았겠지.’
그런데도, 지금 내가 이 녀석을 조금 힘 주면.
-퍼억
“윽!”
이 녀석, 꽤나 쉽게 쓰러졌다.
“오케이. 이걸로 이 1대 1은 내가 2연승이다.”
“으, 임마, 좀 살살 해라. 연습인데!”
“하하, 미안, 근데 안 그러면 또 뚫릴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내 반응에, 태준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럼 뚫리는 게 당연한 거지 임마! 으디서 풀백 변환한 지 두달밖에 안 된 놈이 날 완벽히 막으려고 들어?”
“응? 뭐라고? 지난 시즌 0골따리 공격수가 하는 말이라 안 들리는뒈에에-?’
“···아오 이 새끼. 말을 말자 말을.”
그렇게 언제나 그렇듯 딜교에서 승리한 나는, 지나가는 듯이 슬쩍 말을 던졌다.
“그래서, 내 수비 어떠냐?”
그리고 안타깝게도, 태준이 녀석은 내 기대와는 다른 말을 해 줬다.
“뭐, 엉망이지.”
“···..”
쓰읍, 뭐 내가 당연히 전문 풀백보다야 수비 못 한다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까이면 좀 아픈데.
“움직이는 걸 보면 전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치곤 기본적인 걸 대부분 알긴 아는 것 같긴 한데, 그 아는 걸 가지고 1대 1에서 잘 써먹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 알고 있다고 다 가능하면 다들 진작에 국대도 가고 EPL도 가고 그랬겠지.”
그 말에, 나는 오랜만에 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태준이 녀석의 말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너한테 절대적으로 부족한 건 딱 봐도 경험이야, 경험. 풀백으로 뛰는 경험. 그거나 연습해라. 그럼-”
“야, 야, 야, 잠깐 스톱.”
어딜 도망갈려고 그래. 이대로 순순히는 못 보내준다.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경험을 쌓아주는 데 아주 좋은 도구··· 아니아니 사람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물론 다른 선배들이랑도 할 순 있겠지만, 이 놈처럼 편하게 막 몸 써가면서 수비하긴 좀 눈치 보이고, 무엇보다 이렇게 쓰는 드리블 기술이 다양한 놈은 드물단 말이다.
“좀만 더 하자, 좀만.”
내가 그렇게 나오자, 태준이 녀석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야, 임마. 오늘 주말이야. 주말이라고, 3주간 빡세게 운동하고 처음 맞는 휴식일이란 말이다. 좀 쉬자. 너도 좀 쉬어.”
하지만 나는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야, 이렇게 우리가 운동장 독차지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냐. 이럴 때 이런 훈련 안 하면 언제 해?”
그랬다. 사실, 40명이 한꺼번에 축구 훈련을 하다 보면 축구장은 어쩔 수 없이 비좁디 좁아지기 마련이고, 이렇게 널찍-하게 운동장을 쓸 기회는 잘 안 나온다.
“이런 기회 잘 안 와서 그러는 거야. 응? 조금만 더 도와줘. 내가 그 슈, 슈넬? 그 치킨도 살게.”
그러나 태준이 녀석은 매정하게 내 손을 뿌리쳤다.
“임마, 정신 차려. 여기 남해거든? 문경 아니야! PX 없어! 어디서 먹을 걸로 사람 꼬시려 하고 있어?”
“그래도 조금만 더 봐줘라. 내가 원할 때마다 봐주면, 내가 선수 월급 다 너한테 줄게, 응?”
“이 씹, 어디서 사기를 쳐 새꺄! 우리 군인이잖아! 월급 15만도 안되는 돈 가지고 니 연습 노예가 되라고? 절대 안해!”
그렇게 우리가 언성을 높이다가.
“뭘 안 한다는 겁니까?”
갑자기 들려온 제 3자의 목소리에, 우리들의 목소리는 뚝 끊겼다.
“어, 군의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별 건 아니고, 이준혁 선수의 도핑 테스트 결과가 나와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지난 3주 전의 굴욕적인 일들이 떠오르면서 이 겨울에 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재검사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제발 그건 아니여야 한다. 제발.
“음,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닙니다. 호르몬 수치가 좀 높긴 했지만. 정상 범주 안으로 나왔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휴- 다행이네요.”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자. 군의관은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럼 이제 제 궁금증으로 넘어가죠. 훈련 중이시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말싸움하신 겁니까?”
“어, 그게 말이죠. 훈련 좀 같이 하자고 하는데 이 녀석이 자꾸 도망가려고 해서 말입니다.”
그 순간 태준이 녀석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망은 무슨 도망이야. 아니 군의관님, 생각해 보세요. 저희 3주간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도 쉬는 시간을 주셨고요. 그런데 쉬는 게 잘못 된 겁니까?”
그 말을 들은 군의관은, 아주 깔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훈련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누가 뭐라고 할 수는 없죠.”
그 말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태준이 녀석은 얼굴이 밝아졌지만.
“하지만 저는 트레이너입니다. 누가 훈련 열심히 더 열심히 하고 더 열심히 안 했는지를 감독님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죠.”
이 말이 끝나자 우리의 얼굴이 180도로 바뀌었다.
“그렇죠? 하하. 역시 코치님이십니다. 태준아. 연습해야지?”
“와··· 씨이. 너 진짜. 나중에 저녁 밥 사라.”
“오케이. 그건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1대 1 훈련을 몇 시간동안 계속 하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로- 가지말고! 지금! 바로!’
-투욱
“이예-에쓰!”
“아, 망할.”
드디어 거리 두는 1대 1에서도, 내가 연속으로 저 녀석의 볼을 빼앗는 데 성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아, 쓰읍, 야, 이제는 슬슬 그만하자. 슬슬 어두워진다. 저녁 시간이야.”
“아, 벌써 그렇게 됐냐?”
“그래, 어느새다. 임마,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비싼 거 안 사주면 죽을 줄 알아.”
“오케이, 고기 사주마 고기, 오리고기 어때?”
그렇게 우리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훈련을 끝내려던 찰나.
“잠깐만요, 이준혁 선수, 잠깐 멈춰보시죠.”
지금껏 우릴 지켜보던 군의관이 잠깐 우릴 멈춰세웠다.
“지금, 다시 한 번 아까처럼 수비 자세를 잡아 보실 수 있겠습니까?”
“어.. 예, 그러죠.”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아니 엄청나게 깐깐한 원칙주의자인 저 군의관이 쓸데없이 나를 멈추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얌전히 기본 수비자세를 다시 잡았다.
“음- 이준혁 선수. 그 상태에서 스텝을 뒤로 옮겨보세요. 수비 할 때처럼 재빠르게.”
그렇게 내 스텝을 몇 번 유심히 살피던 군의관은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음··· 혹시나 했는데, 이준혁 선수? 혹시 스텝을 옮길 때에 무게중심을 정확히 중앙에 두시는 쪽입니까?”
“어, 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항상 그렇게 해 왔다. 그래야만 방향 전환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반응이 이상했다.
“뭐야 시발? 너 진짜 그렇게 수비했다고?”
“큭큭-, 와- 골때리네요 이거.”
뭐야, 무슨 일인데.
“시발. 말도 안 돼. 내가 이런 기본도 없는 새끼한테···”
“이거 특이 케이스로 남길 만하네요. 진짜. 저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저기, 두 분, 제가 뭘 잘못한 건지 이만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만 좀 쳐웃고. 뭔데 도대체.
“큭큭- 보아하니 태준 선수는 아시는 것 같은데, 한 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하아, 예, 알겠습니다.”
군의관님의 말에 대답하면서 나한테 다가온 태준이는 내가 어쩌다가.. 를 중얼거리다가, 조금 짜증나는 목소리로 나한테 말했다.
“야, 미드필더랑은 다르게. 수비수는 기본적으로 한 쪽을 자르면서 뒤로 물러나는 게 기본이잖아.”
“뭐··· 그렇지.”
“그래, 그렇지? 그럼 무게중심이 어디에 가 있어야 할까요?”
그 순간, 나도 뭔가 어? 하는 느낌이 들면서 표정이 변하자, 태준이는 고함을 질렀다.
“그래, 시발. 수비수가 무게중심을 뒤쪽에 둬야지. 뭔 중앙에 두고 있어 임마!”
그. 그렇네. 그렇구나?
“그럼 나 지금까지···”
“그래 시발, 쓸데없이 조온-나게 어렵게 수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럼 지금까지 나 니 어떻게 막은 거야?”
“몰라 시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때, 군의관님이 아주 명쾌한 해답을 내주셨다.
“그건 아마, 이준혁 선수가 하체 힘이 몸무게에 비해 훨씬 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힘의 배분으로도 최소한의 접지력이 확보되었기 때문 같군요.”
어··· 그러니까 그 말씀은?
“몸이 좋으니까 머리가 멍청해진 케이스네요.”
···그 말을 듣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뭐지? 뭐냐고, B급 라이센스 만점을 받을 정도로 잘 돌아갔던 내 머리가 왜 갑자기 이렇게 나빠진 거지? 이건 꿈이야. 꿈일거라고. 하하. 하하하···.’
그렇게 내가 멘탈이 바스러지는 가운데, 군의관이 나한테 말을 걸었다.
“뭐, 너무 좌절하지 마세요. 군대잖아요. 군대. 군대만 오면 서울대 출신도 바보 되는 게 일상이에요. 그냥 군대 와서 뇌 리셋된 거라고 생각하시죠.”
···저 군의관 양반이 이렇게까지 위로해주는 거 보니깐 오히려 확실하게 알겠다. 내가 정말로 바보같은 짓 한 거구나. 제기랄.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됐다고 생각하세요.”
“···이게 뭐가 잘 된 겁니까.”
“잘못된 습관을 너무 늦기 전에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이것만 고치면 준혁 선수의 수비력은 훨씬 급상승할 겁니다.”
아, 그래. 그건 좋긴 하구나. 내 수비력이 급상승할 여지가 보여졌다는 거니까.
그래 좋은 거.. 좋은 거야. 좋은 거··· 맞겠지?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떻게 보면 머리 대신 고생시켜도 될 만큼 내 몸이 좋은 편이라는 소리기도 하잖아.’
아무튼 좋음. 무조건 좋은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