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67)

행운 (2)

아무리 국방부 시계가 느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란 놈은 모두에게 공평한 법.

“야 이 새끼야! 총구! 제대로! 전방으로만! 들어!”

총도 쏴 보고.

“으우ㅘ아아아아!”

“손으로! 손으로 눈 비비지 마라! 더 따갑다! 손대지 말고 수통에 있는 물 써!”

엿 같은 화생방도 하고,

“훈련은 전투다. 각. 개 전, 투!”

별의별 엿, 아니지, 착한 말, 착한 말···

하여튼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같이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는 생활을 몇 주간 하면, 슬슬 친해지면서 사람들이 슬슬 자기 자랑이라든지, 썰이라던지를 자연스럽게 풀기 시작한다.

“야, 이 행님이 부산 통이다. 통. 부산에서 내 이름 모르는 사람이 읍다. 니들이 딱 내려오면! 풀코스로 딱! 대접해준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형. 뭔 허풍을 떨고 있어.”

"마! 붓싼 풀코스 모르는 시끼가 있네. 모르면 직접 내려왐마!”

뭐 이런 식으로 허풍을 떨기도 하고.

“뭐야, 이거 니 동생이냐?”

“응. 근데 왜?”

“오오오오! 매형!”

“아 씹. 꺼져라.”

이런 식으로 가족사진을 보고 서로 처남이니 매형이니를 다투기도 하는 등등. 그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저기, 긴가민가했는데. 이형 선수 맞으신가요?”

“어, 그래.”

드디어 내 옆자리 훈련병의 신분이 밝혀졌다.

“뭐야, 진짜로요? 진짜로 형님이 그 이형이예요?”

“응.”

그리고, 그 날 부로, 우리 생활관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

사실, 국가대표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얼굴을 알아보고 사인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축구선수··· 그래, 예를 들어 박지성 선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길가에서 가다가 그 선수를 스쳐 지나갈 때, 보통 사람들이 알아보리라고 생각하긴 힘들다.

일단 그들 중에서 매일같이 기사를 찾아보고 축구를 열심히 챙겨봐서 선수의 얼굴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별로 많지 않고,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은 지나가다 그 선수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름을 들어본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라고 할지라도, 만일 출근길, 혹은 퇴근길에서 만난다면

‘와, 미쳤어, 얼굴 봐, 오늘 눈 호강했다.’

‘와, 겁나 예쁜 외국인이다.’

이 이상의 반응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빨리 출근해서 지각하지 말아야 하고 빨리 퇴근해서 집에서 치킨에 맥주를 마시고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이 어떻게 유명인이 자신 옆을 지나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상무팀이 입단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알아도 별로 관심이 없을 줄 알았다.

‘애초에 개처럼 구르는 훈련병 주제에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있으려나?’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일반인들이 축구에, 그러니까 정확히는 고등학교, 대학리그, K리그에 관심을 많이 가지지는 않는단 말이다.

‘해외축구나 야구라면 모를까.’

그래서 나는 솔직히, 사람들이 이제까지 이형 선수를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알아도 별 관심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자기 앞날이나 걱정할 훈련병이 뭔 유럽 해외파도 아닌 선수에 관심을 갖겠어?’

그랬는데.

“형, 형님! 국대 이야기 좀만 더해 주세요!”

“여기! 여기 병영일기에 싸인 좀 해주세요!”

“형! 형!”

지금, 내 눈앞에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해축 선수고 나발이고, 국대가 짱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혼란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나는 뭘 하고 있었냐 하면.

-쩝쩝쩝

조용히 옆에서 꿀을 받아먹고 있었다.

‘음, 마이구미가 복숭아 맛도 있었구나. 포도 맛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분명히 조교들이 소지품 검사를 철저하게 했지만, 국가대표 선수가 눈앞에 나타나자 이 녀석들은 어떻게 된 건지 나름대로 꿍쳐 뒀던 간식거리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마구마구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미친놈들, 핫팩에 젤리 넣을 생각은 어떻게 한 거래?’

겨울이랍시고 핫팩을 한가득 들고 와서 준비성 철저하다고 조교한테 칭찬받더니 그게 젤리랑 초콜릿 주머니였을 줄이야.

‘역시 인간이란 막히면 답을 어떻게든 찾는구나.’

마치 기숙사에서 외출 금지와 폰 금지였음에도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거나 전화를 빌려서 피자와 치킨을 공수해 오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마냥 공짜로 먹기만 한 건 아니었다.

-유럽은 도전 안 해요?

같은 평범한 질문만 나오면 별일이 없었겠지만.

-K리그 선수들은 연봉 얼마나 받아요?

조금 실례되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고.

-진짜로 국내파 해외파 파벌싸움 같은 거 있어요?

어떤 놈은 발언했다간 큰일 날 짓을 질문하는 놈도 있었기에.

“야, 야, 그런 거 실례야. 적당히 싸인 받고 돌아가.”

얻어먹은 것도 있었고 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권한으로, 적당히 민감한 질문들은 컷 하면서 매니저 노릇을 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어느새.

“이야, 너 수류탄 겁나 잘 던진다? 그냥 가볍게 던졌는데 저 멀리 날아가 버리네?”

“아, 아닙니다. 형님. 그보단 양말은 준비하셨습니까?”

“그래, 니 말대로 준비했다. 이거 쓰면 각개 때 편하다 이거지?”

국가대표와 말을 트게 되었다.

-*-*-*-

그렇게 국가대표와 말을 트게 된 이후에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야, 씨발. 이거 어떻게 하냐.”

“그러게요. 미친.”

욕설을 서로의 앞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물론 욕이 나쁜 건 안다. 그래서 나도 솔직히 후배들하고 있을 때, 웬만해서는 욕 안 쓰려고 한다. 믿기진 않겠지만. 난 고등학교 때까진 욕 정말 한 달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밖에 안 했다.

그렇지만 여기 군대에선 도저히 욕을 참기가 힘들었는데.

“아니 이 겨울에 밖에서 텐트 쳐서 자라는 게 말이 돼?”

하하. 1월에 밖에서 텐트 치고 외박해야 하는데 욕이 안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 씨발. 방한용품도 쥐꼬리만큼 주면서 말이지.

“하아- 게다가 밥은 또 뭐야. 쌀 주네. 썅. 밥 어떻게 하라고?”

그나마 이건 해결책이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제가 냄비밥 할게요.”

“어? 준혁아. 너 밥 할 줄 아냐?”

“예. 냄비 밥 경력 3년 차입니다.”

그 말을 하자. 이형 선배는 나를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봤다.

“야, 뭘 했길래 요즘 세상에 전기밥솥도 안 쓰고 3년이나 냄비로 밥해 먹은 거야?”

“처음엔 전기밥솥 없어서 하기 시작했는데. 나중 되니깐 거기에 숭늉 해 먹는 게 맛이 좋아서 계속하게 됐어요.”

냄비밥으로 밥 다 먹은 이후의 숭늉 입가심은 예술이다. 예술. 이건 해 본 놈만 안다.

그렇게 내가 능숙하게 냄비밥을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형 선배는 감탄하며 텐트는 자기가 알아서 치겠다고 했다.

‘오, 이거 좋네’

추워 죽겠는데 쇳덩이 만지고 있느니 이게 낫다. 보급품으로 주는 장갑은 너무 쓰레기라서 겹쳐서 쓰지 않는 이상 보온이 영 별로란 말이지.

‘반면에 이건 얼마나 좋단 말이냐. 이렇게 불 옆에 있으니 그래도 땃땃- 하니 미세하게나마 몸 녹일 수도 있고 말이자.’

이런 걸 바로 개꿀이라고 하는 거겠지?

“어? 준혁이 형 냄비 밥 전문이에요? 그럼 저희 밥도 좀 해주세요!”

···취소다. 안 개꿀이다. 젠장.

-*-*-*-

“야, 이거 진짜 개불편하다. 바닥에 돌 너무 많아. 어떻게 자라는 거지.”

“뭐. 그래도 나중 되면 잠 잘 오지 않겠어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말이다.

“지랄. 나는 오늘부로 캠핑족들을 이해 못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춥고 불편한데 뭔 놈의 캠핑이야. 캠핑은.”

그 불평을 들으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으니까.

‘축구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캠핑 같은 걸로 힘을 굳이 더 뺄 이유가 뭐야?’

그래도.

“별은 참 많네.”

“그러게요.”

경치는 참 좋았다. 빌어먹게도.

“으. 진짜 거지 같다. 그래도 얼마 안 있으면 이 훈련도 다 끝나지?”

“예, 다 끝났죠.”

그 엿 같던 행군도, 뭐도, 그냥 다 끝났다. 드디어.

“이것만 끝나면 드디어 우리 둘 다 상무대로 가니까. 고생 끝이네.”

“그렇-?”

잠깐 뭐? 저 선배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뭐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거 좀 섭섭한데.”

“···그때 한 번 본 게 단데 기억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2부 리그 선수다. 1부 리거가 기억할 가치가 굉장히 없는 선수다. 그러니 나를 기억한다면 그 교육 때 한 번 보고 기억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게 너무 신기했다.

‘나는 전혀 특출난 게 없는 놈인데.’

그나마 내가 1부리거로 가득한 상무에서 2부리거라는 점이 특이한 점이긴 하지만, 난 상무의 유이(唯二) 한 2부리거다. 유일(唯一) 한 2부리거도 아니고, 유이한 2부 리그 선수란 말이다.

‘기억할 건덕지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기억하는 건지 모르겠네’

혹시, 내가 뭐 옛날에 엄청난 재능을 뽐내서 전북에서 날 영입하려고 들기라도-

“1부리거들은 다 기억하고 있었고, 2부리거 두 명만 기억하면 되는데 그걸 못 하면 말이 안 되지.”

음, 그렇구나. 내 망상이었군.

“하여튼 그동안 고마웠다. 어휴, 뭔 질문이 그렇게 많은지.”

“아닙니다. 후배로서 마땅히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하하. 나중에 상무 가면 내가 바깥에서 밥 한 끼 사마.”

“감사합니다.”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 계속해서 야간 근무를 서던 중에

“아, 그러고 보니, 나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이형 선배가 나한테 질문을 해 왔다.

“예, 말씀하십쇼.”

“너 말이지, 왜 굳이 축구선수인 거 티 안 냈냐? 티 내면 나처럼 무릎에 무리 갈 수도 있는 훈련 같은 건 양해받고 빠질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왜 아득바득 일반인처럼 군 거야?”

이유라··· 이유야 뭐 간단하다.

“그냥. 축구선수라는 티를 내기가 싫어서요.”

내가 뭐, 축구선수라고는 하지만. 정말 초라한 커리어다. 고작 내셔널 리그에서 1년. K2 리그에서 2년 뛴 게 단데 그런 특별 대우를 바라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야, 그렇다고 행군을 해?”

“뭐, 할 만하던데요.”

그리고 그거 하나 한다고 무릎 안 나간다.

그런 나의 반응에 이형 선배는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허 참, 신기한 놈일세.”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별로 공감하는 반응인 것 같진 않았다.

‘하긴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니까.’

하지만 솔직히, 좀 짜증 나는 사실이지만 나 같이 뒷배도 실력도 없는 놈이 남들처럼 해 처먹으려고 했다가는 절대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좀 극단적인 예시지만. 내가 선수인 거 밝히고 행군 같은 거 빠진다고 생각해 보자. 무려 지금 소속팀도 없는 녀석이 말이다. 그럼 최악의 경우엔.

-삐슝빠슝! 2부리거, 그것도 전직 선수가 자기 운동한답시고 훈련 거부한다! 대한민국 군대, 이대로 괜찮은가?

이런 기사가 실릴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게 기사 나오고 상무팀 공정성 문제 조사 들어가고 괜히 말 나오고···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러니, 차라리 그까짓 행군 딱 해버리고 말 나올 여지를 차단해 버리는 게 낫지.’

하여튼, 그렇게 내가 딱 잘라 말하자 이형 선배는 거기에 대해선 별말 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난 후엔 내가 어떤 선수였는지를 궁금해하길래 적당히 대답해주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근무 교대 시간이 되었고.

“교관님, 그럼 저희 근무 교대하겠습니다.”

그렇게 근무 교대를 하고 텐트로 가려던 도중.

“야, 잠깐, 174번 훈련병?”

중사 마크를 단 교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선배를 불렀다.

“174번 훈련병 이! 형! 부르셨습니까!”

“너 국가대표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 확답을 듣자, 교관은 한 가지 부탁을 선배한테 해 왔다.

“저기 있잖아. 이제 훈련도 다 끝났고 해서 말하는 건데. 너 혹시 우리 부대원들이랑 같이 축구 한판 뛸 생각 있냐? 우리 부대에 축구에 미친 놈들이 되게 많아서 그런지, 그놈들이 너랑 꼭 한 번 뛰고 싶어 하더라고.”

그 말에 이형 선수는, 가볍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좋아, 시원시원해서 좋구먼!”

그때, 옆에서 근무를 서던 조교 한 명이 태클을 걸었다.

“중사님, 그러면 팀 어떻게 짭니까? 국대가 있으면 밸런스 파괴 아닙니까.”

“뭐, 저 친구가 팀 돌아가면서 뛰면 되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 중대에도 도형이 녀석이 대학교까지 축구 했잖아. 반대편에 도형이 넣으면 되겠지.”

“그래도 국댄데,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얼추 밸런스가 맞아야 좀 더 재밌죠. 국대 있는 쪽은 선수 한두 명 더 빼는 식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얌마, 그러면 뭔 재미야. 그래도 11대 11로 해야 재미있지.”

그렇게 둘의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173번 훈련병 이준혁. 혹시 제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말해봐.”

“저도 끼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이형 선배 반대편에 붙으면 얼추 밸런스가 맞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중사가 꽤 놀란 눈치로 내게 물었다.

“응? 뭐야, 너도 축구선수였어?”

그래, 지금껏 전혀 티를 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

솔직히 나도 원래는 조용히 그냥 상무로 갈 생각이었지만.

‘패배의 걱정 없이 고수와 붙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스타도 그렇고, 롤도 그렇고, 바둑도 그렇고, 고수랑 붙다 보면 실력이 느는 법이지만, 진짜로 고수랑 붙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런데, 고작 조용히 있고 싶다는 이유로, 2부 리거라는 사실을 밝히는 게 쪽팔린다는 이유로 이렇게 나보다 확실하게 실력이 위인 상대와 맞붙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고?

“예, 이번에 상무에 같이 입단합니다.”

나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

“오, 그럼 니가 저 174번 친구 전담마크 해라, 그 정도면 얼추 밸런스 맞겠지?”

“충분합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고수와 맞붙을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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