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논산역에 도착합니다.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 순간, 기차 안이 머리를 빡빡 깎은 젊은 남성들의 한숨으로 가득 찼다.
하아-
그리고 아직 머리를 깎지 않은 젊은 남자들은 그 한숨을 듣고 같이 한숨을 내쉬었으며.
하아-
갑자기 사람들이 단체로 한숨을 쉬자 이상하게 생각하던 일부 나이 드신 분들은 논산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무슨 일인지 다 알겠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쪽이었냐면, 당연히.
하아-
한숨을 쉬는 쪽이었다. 물론 내 한숨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한숨이었다.
‘이제 4주 동안이나 볼을 아예 만지지 못한다니.’
물론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선수에게 해당하는 상황이지만, 솔직히 이건 다른 사람들보다 나에게 더 치명적이다.
‘초특급 선수는 썩어도 써먹을 수 있는 선수가 되지만 어중간한 선수는 조금만 방심해도 아예 못 써먹을 폐급 선수가 되기 십상이니까.’
박지성 선수도 그렇고, 축구는 아니지만 메이저 빠따 역사에서의 찬호-팩 형님도 그렇고, 둘 다 명백히 상위권에서 놀던 선수들이었지만 실력이 살짝 다운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역대급 먹튀가 되어버린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2부리그의 B급 선수다. 이 4주간의 비 훈련기간이 정말 나한테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거다.
‘어떻게든 몸이라도 잘 만들어 놔야 할 텐데··· 쉬라니. 하아.’
그렇지만, 나는 그냥 이번 4주간은 그냥 쉬기로 했다. 어젯밤, 교수님이 한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말이 되나? 너무 열심히 해서 내 근육이 말라 있다니?’
그냥 위로해주려고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할 생각이었지만, 몇 번이고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사례까지 들려주셨다.
-내가 부산 쪽에 아는 트레이너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가 일부 선수들의 경우에는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라고 하더군.
그러면서 축구는 아니지만, 야구 쪽에서는 실제로 마사지랑 식이요법만 해서 훨씬 파워를 늘린 케이스가 있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다.
‘뭐 그게 맞으면 진짜 대박이긴 한데.’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운동을 덜 해서 파워가 더 올라가는 일도 있다는 게 말이나 되나.
다만,
‘그렇다고 지금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
한 성인 남성에게 가로 1.5m, 세로 2m보다도 작은, 좀 더 와닿게 말하자면 1평이 될까 말까 한 공간만을 할애해 주는 훈련소라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래 봤자 플랭크, 윗몸, 팔굽혀펴기 정도가 다일 거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보자. 4주간 그냥 뇌를 몽땅 비우고 최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보자는 생각이었지만.
-하아
막상 도착하니. 마음이 갑갑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We will soon arriving at Nonsan station, please···
그래. 여기는 논산.
이제 육군훈련소 입대까지, 약 3시간만이 남았다.
‘그래, 가자아- 적당히 훈련소로 버스 타고 간 다음 밥 먹으면 딱 되겠지··· 201번 타면 된다고 했었지?’
.
.
.
.
.
“씨발.”
내가 잘못 생각했다. 그냥 역 근처에서 점심 해결하고 올걸 그랬어.
‘진짜 훈련소 주변 식당들은 하나같이 개같이 비싸네.’
게다가, 그 가격을 쳐받아놓고 맛은 또 더럽게 없었다. 입대하니까 맛없게 느껴지는 것도 있겠지만. 이건 그걸 감안해도 진짜로 너무한 수준이다.
‘차라리 걍 편의점에서 도시락 사먹는 게 더 나았···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야. 입대하는데 고기 먹어야지, 고기.’
그렇게 중얼거리며 걷다 보니, 슬슬 여러가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소생은 여기에서 먼저 내립니다. 내리세요! 내려요!”
“아아아악! 엄마! 나 가기 싫어!”
“자기야, 나 잊으면 안 돼?”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연신 입으로 생각나는 욕을 내뱉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눈물과, 짜증과, 걱정과, 자포자기같은 인간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있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느꼈다.
드디어, 논산 훈련소에 왔다는 것을 말이다.
-*-*-*-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빠라라 밤 빰바빰 빰-바밤 빰빠밤-
몇몇 가족들과 함께 온 사람 중, 이미 전역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올 뻔한 그 트럼펫 소리를 들으며, 입소식을 진행하고 앞에 나와있는 사람이 마지막 말을 했다.
“자, 다들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걱정 말라고 인사 드립니다. 부모님들께서도 너무 심려치 마시고요,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희가 가족처럼-”
그 말을 듣자, 나는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풋, 아 진짜 저 가족처럼은 진짜 안 들어가는 데가 없네. 가장 만만한 게 가족인가.’
좀 창의성을 발휘해 달란 말이다.
뭐, 하지만.
‘운동부보다야 양반이겠지. 뭐 거기보다야 심하겠어?’
.
.
.
.
.
“전원, 엎드려!”
그 순간, 몇몇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움찔했고, 조교들은 훈련병들이 바로 엎드리지 않자. 모자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엎드리란 말 안들리나! 어! 교육생들 긴장 안 해?”
그 말이 끝나자, 이제야 모든 훈련병들이 바로 엎드려 뻗쳐 자세를 취했고, 나 역시 남들이 하는 대로 무난히 따라했다.
“일어서, 엎드려! 빨리빨리 움직입니다!”
그렇게 뜬금없이 조교 놈들이 군기를 잡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귀여웠다.
‘음, 뭔가 군기 잡으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말이지.’
솔직히 운동부 출신인 사람들에게 이 정도는 정말 애교다. 애교.
‘뭐 매타작도 안 하니 말이지.’
운동부에서 폭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곤 하지만, 솔직히 제대로 없어지기 시작한 건 폭력 결사반대를 외치는 박지성 선수가 맨유로 이적하면서부터 그러한 ‘말없이, 폭력 없이 행동으로 팀을 이끄는 선수’를 우상으로 삼는 세대가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어린 친구들의 첫 번째 세대가 바로 우리 같은 80년대 말 출생자들. 학번으로 따지면 한 06학번부터다. 그러니까 폭력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바로 내 직속 선배님 세대분들이 지도자를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거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대가리 굴리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 새끼들아! 지금부터 소지품 검사를 시작한다. 가지고 있는 거 다 꺼내!”
온갖 불닭볶음면스러운 매운맛 부조리를 선행학습해본 내 입장에서 이 정도는 진라면 순한맛이란 거다.
‘오히려 중학교 시절 추억만 생각나네, 하하. 중학교 시절에는 항상 어디서 구해왔는지 야구빠따를 들고 쳐왔었지.’
그래서 몰래 부러뜨려 놓으니까 씨발 다음엔 알루미늄 빠따를 가져왔었지 아마?
그렇게 내가 옛 기억을 되살리던 사이.
“너 이 새끼 이건 뭐야! 거울을 가져와! 군인 정신이 글러먹은 녀석!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화장하고 살 꺼냐!”
몇몇 놈들의 소지품이 걸리기 시작했고. 상황이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나는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부터 익히던 스킬을 사용했다.
바로, 바닥 보고 아무 생각이나 하기.
‘음, 바닥 아스팔트가 꽤 빤딱빤딱하네. 새로 타르칠한지 얼마 안 된 건가? 아까 입소할 때 보니까 주차장에 있던 아스팔트는 상태가 별로였던 것 같은데 왜 이리 차이나지? 보통이면 이거 새로 깔 때 저기도 새로 깔 텐데? 그냥 도로에 들어오는 차량의 차이인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면 저쪽은 가끔씩 추가적으로 도로를 새로 깔기도 하려나? 아니지 그건 아닐꺼야 예산이 배정될 때마다 할 테니까. 그럼 예산은-’
그렇게 내가 조교놈의 기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어느새 내 옆에까지 조교놈이 왔고.
“좋아, 소지품 검사 끝났고, 지금부터는 모두 이동간 제식훈련을 간략하게 실시한 후에 강당으로 이동한다. 모두 일어- 섯!”
그렇게 내가 조교의 명령에 따라 일어서면서 조교와 눈이 마주치자.
“어?”
조교도, 나도 순간 당황했다.
‘뭐야, 저놈이 우리 조교라고?’
지금 우리를 기합 주고 있던 놈이, 바로 내 대학교 2년 후배 녀석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
-치익
후욱-
“선배님,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아니 됐다.”
운동선수가 뭔 담배야.
그 말에 후배 녀석이 픽 웃었다.
“그렇군요, 선배는 그런 분이셨죠.”
그 말과 함께 묵묵하게 담배를 피우던 녀석을 보며, 나는 한마디 했다.
“너 축구 그만뒀냐?”
“예.”
“언제?”
“뭐, 제 계급장 보시면 대충 예상되지 않습니까.”
그 말과 함께 후배 녀석이 상병 계급장을 툭툭 건드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작년 말에 계약 해지당하고 축구 포기한 건가.’
지금 상병 계급장이면 그 시나리오가 딱 알맞아 보였다.
“K3(4부리그)도 못 노렸어?”
“예, 얄궂게도 몸이 겁나게 튼튼해서 공익으로 빠지지도 못하더라고요.”
그 말과 함께 훅- 한 대 내뱉더니, 후배 녀석이 나에게 질문을 들어왔다.
“선배도 입대하는 거 보니, 계약 해지당하셨나 봅니다?”
“···뭐 그렇지.”
고양이랑 계약이 끝나서 무직 상태인 건 맞으니까.
“그럼 선배도 축구 그만두시는 거예요? 여긴 현역병 쪽이라서 K3도 가는 것도 아닐 텐데.”
그 말에 오해가 깊어질 것 같아서, 바로 솔직하게 말했다.
“어··· 운 좋게 이번에 상무 됐다.”
“···???”
그 말과 동시에, 후배 녀석이 눈을 순간적으로 크게 소리 지르려다-
“오! 어, 휴, 축하드립니다. 선배.”
목소리를 다시 간신히 죽였다. 불침번 중인데 떠드는 거라서 걸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 그런데 계약 해지당했다는 건 뭡니까?”
“계약 만료 통보받고 다음 날에 상무 합격자 발표 났거든.”
“네? 푸흡-”
그 소리에 뭐 그런 일이 다 있냐며, 적당히 소리를 죽인 채로 웃던 녀석은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면 구단 쪽에서 다시 계약하자거나 그런 제의 안 왔습니까?”
“뭐, 오긴 왔었다.”
사실 계약 해지당하고 핸드폰도 저 구석탱이에다 처박아두고 잘 안 봤기 때문에 몰랐었지만, 나중에 보니 상무 합격 공지가 뜬 이후로 그 단장한테서 연락이 계속 왔었다.
‘상무 가게 되었으니 잡아만 두면 중견 멤버로 쓸 만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긴, 우리나라 축구 선수 대부분은 20대 후반에 현역병으로 입대하거나, 또는 K3로 가는 바람에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지기에 전성기의 끝자락이라고 할 만한 20대 극 후반에 진짜 전성기를 맞이하는 친구는 별로 없다.
그래서, 내가 있던 팀을 비롯해 대부분의 구단이 선수들이 20대 극 초반으로 아주 젊거나, 30대 이상이 대부분이기에, 그 간격을 메워줄 선수는 꾸준히 수요가 있었고. 아마 고양은 내가 상무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를 그 멤버로 낙점했었을 거다.
“어, 그러면 왜 다시 계약 안 하셨습니까?”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나 방출시킨 팀을 왜 다시 돌아가냐?”
나도 가오가 있지. 씨발. 내가 아무리 축구가 좋아도 나 방출시킨 팀에 다시 찾아가고 싶진 않다.
그 말을 듣고, 후배 녀석이 낄낄 웃었다.
“크, 멋지십니다. 선배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쇼. 몰래몰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야, 그럴 필요는 없어 임마.”
아마 올해 초에 입대했을 텐데, 그럼 병장에 가까운 것도 아니고 막 상병 된 거잖아. 그래놓고 뭔 소리를 하고 있어.
“에이, 군대에서도 운동부 출신은 다들 알아서 우대하는 거 모르십니까? 제가 조교 에이습니다. 에이스.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때 그 은혜를 이렇게라도 갚아야죠.”
그렇게 말하더니. 후배 녀석은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말을 했다.
“하여튼 이거 참 기가 막힌 우연이네요. 엘리트 축구 선수가 이렇게 비슷한 번호에 몰려 있다니.”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모르셨습니까? 선배님 옆 번호, 이형입니다. 그 이형이요.”
잠깐, 이형? 그 이형?
‘국대 우측 풀백이 내 옆 번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