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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황녀 자리를 준다는 것은 후계권을 넘긴다는 뜻이었다.
베리우스 황제는 잠시 고심에 빠졌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현명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엘레나가 케이타 제국의 황후로 가면 전쟁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최근 양국 간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가이아 제국은 눈부신 성장을 했는데, 만약 엘레나가 황후로 간다면 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허락한다.”
베리우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엘레나는 칼립소를 정면으로 보며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칼립소, 이번엔 내가 당신에게 청혼하는 거예요. 나의 청혼은 받아주겠어요?”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한쪽 무릎을 꿇고 엘레나의 고운 손에 입을 맞췄다.
“당신에게 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데, 뜻밖의 선물을 주는군.”
“칼, 이번에도 당신이 내게 왔잖아요. 그 보답이에요.”
“하아. 당신은 정말…….”
칼립소는 벅찬 눈으로 엘레나를 보더니, 손을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나도 당신에게 선물을 주겠소.”
“무슨 선물이요?”
“가이아의 황녀에서 케이타 제국의 황후로 온 것에 감사를 표하며, 양국 간의 불평등 협정을 재논의하겠소.”
칼립소의 약속에 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주변의 신하들 역시 기쁨에 소리치며 경배했다.
이를 바라보는, 베리우스 황제와 엘리자베스 또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엘 역시 기쁜 미소를 지으며, 엘레나 곁으로 갔다.
“언니, 축하해요.”
엘레나는 아리엘을 꼭 안았다.
“가이아 제국을 잘 부탁해. 내가 도울 테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아리엘의 눈꼬리에도 눈물이 맺혔다.
* * *
케이타 제국도 소식을 듣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특히 데릭은 좋아서 체면에도 불구하고 팔짝팔짝 뛰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칼립소에게 황제가 전사했을 때의 계획을 실행하라는 명을 받고 그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있던 차였다.
‘황제께서 돌아오신다니!’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모든 케이타 제국 신하들의 한마음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데릭은 충심을 다하여,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섬길 것을 다짐했다.
둘의 혼인 준비는 어느 때보다 빠르고,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양국의 국경일이 선포되었으며, 풍성한 음식과 연주가 혼인 전후로 일주일 내내 제공되었다.
거리에는 풍악이 울렸으며, 갖가지 색깔의 꽃잎이 날렸다.
혼인식은 가이아 제국에서 진행하도록 했다.
가이아 제국에는 주변 국가들의 여러 가지 귀한 물건을 진상하였으며, 각 나라 왕족들의 참가 행렬이 잇달았다.
드디어 혼인식 날.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랬으며,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새들은 평화롭게 하늘을 날았으며, 온갖 색색깔의 꽃잎이 바람에 나부꼈다.
백성들에게는 금전이 뿌려졌으며, 잘 훈련된 친위대는 검을 차고 깃발을 휘두르며 행렬은 이어갔다.
웃음과 음악이 가득한 가운데 가이아의 최고 음유시인이 나와 시를 낭송했다.
베리우스 황제와 엘리자베스 황후의 축복을 시작으로 혼인 예식이 경건하게 시작되었다.
고행의 길을 떠난 대신녀 대신 캐서린이 대신녀의 자리를 맡아 둘을 축복하며, 식을 진행했다.
“가이아의 제1황녀 엘레나와 케이타 대제국의 황제 칼립소의 혼인을 선포합니다.”
캐서린의 말이 떨어지자, 축포와 환호가 넘쳐났다.
“그럼, 마지막으로 피의 의식을 치르겠습니다.”
피의 의식이란, 백포도주에는 신부의 피 한 방울, 적포도주에는 신랑의 피 한 방울을 넣어 바꿔 마시는 가이아 황실의 전통 의식이었다.
캐서린이 엘레나의 손가락에 금빛 침을 놓았다.
백포도주에 한 방울 떨어지니 백포도주는 연한 분홍빛이 되었다.
캐서린은 칼립소의 손가락에 역시 금빛 침을 놓았다.
뚝.
적포도주에 떨어진 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이제 잔을 바꿔 마시세요.”
신녀의 말에 칼립소가 엘레나에게 눈빛을 맞췄다.
“괜찮겠소?”
혹시나 이로 인해 또다시 치유력이 옮겨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그때도 피를 주어서 생긴 일이지 않는가.
“물론이죠.”
엘레나가 망설임 없이 적포도주잔을 들었다.
“염려 말아요. 만약 그런 일이 생겨도, 우리에겐 보름의 의식이 있잖아요.”
빼앗기면 찾아오면 그만.
찾지 못해도 당신을 보호해 주면 그거대로 그만.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야 물론이지. 참기 힘들다는 것만 빼면.”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이 건배를 하자, 엘레나는 붉은 입술로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칼립소 역시 옅은 분홍빛의 백포도주잔을 들어 한 번에 마셨다.
“이로써 두 사람의 혼인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합니다.”
캐서린 신녀가 선포하자, 엘레나가 칼립소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박수 소리와 함께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밝았던 세상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것이다.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렸다.
축하하던 사람들도 기이한 현상에 탄성을 질렸다.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은 오직 방금 혼인을 올린 두 사람뿐이었다.
온 세상이 어둠에 갇혀 있는 동안, 칼립소는 엘레나의 입맞춤에 열렬히 호응하며 깊게 입술을 겹쳤다.
한참 동안 계속된 달콤한 입맞춤이 끝나고, 엘레나가 천천히 입술을 물리자, 달이 점점 해에서 물러섰다.
신비로운 기적의 현상에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두웠던 세상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초승달 모양의 해가 점점 드러나 반달 모양으로, 그리고 완전히 제모습을 갖춰 온 세상을 다시 환하게 비추었다.
“나의 황후여, 온 마음을 다 바쳐 당신을 섬기겠소.”
“나의 황제여, 온 마음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두 사람의 마지막 선언이 끝나자, 온 나라는 축제에 휩싸였다.
술과 음식이 가득하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아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잔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누구도 예외 없이 연회를 즐겼다.
“엘레나, 엘레나는 어디에 있느냐?”
취한 베리우스 황제가 엘레나를 찾자, 아들라스 경이 속삭였다.
“황녀 전하는 신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아……. 그래, 그래야지.”
베리우스 황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 * *
가이아 황실의 신방은 온통 꽃잎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드디어, 우리 둘만 있게 됐군.”
“이날을 정말 기다렸어요.”
“나만큼 기다렸을까.”
칼립소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엘레나에게 내려갔다.
입술을 살짝 머금다 놓아준 칼립소가 믿기지 않는 듯 웃었다.
붉은 눈동자에 욕망이 짙게 배었다.
엘레나는 손을 들어 칼립소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정말 신비로워요. 왜 진작 몰랐을까요.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빛을 가졌는데…….”
“내 눈동자가 이렇게 감사한 건 처음이오.”
엘레나의 입술이 눈가에 닿자, 칼립소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뺨에, 그리고 입술로 내려오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서로의 호흡이 엉켰다.
엘레나의 허리가 당겨지고, 몸이 밀착되었다.
달콤한 숨은 어느새 진득하게 바뀌었다. 열기가 번진 몸은 더한 것을 요구했다.
“침대로 가지.”
“자, 잠깐만요. 먼저 씻고요.”
“그게 문제라면, 같이 씻어.”
더 이상의 반론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칼립소가 엘레나를 번쩍 들었다.
거침없는 행동과는 반대로 욕실로 들어가자, 욕조 앞에 엘레나를 소중한 도자기처럼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칼립소는 예복을 거칠게 벗었다.
상반신을 탈의한 칼립소는 조각 같았다. 쫙 짜여진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을 엘레나가 홀린 듯 바라보는 동안, 칼립소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엘레나의 드레스의 매듭을 풀었다.
둘의 예복이 바닥에 흐트러지고, 둘은 함께 욕조에 들어갔다.
마음은 급하지만, 칼립소는 오늘 밤은 느긋하게 즐길 생각이었다.
칼립소가 자신의 위로 엘레나를 끌었다.
매끄러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하얀 거품으로 그녀의 팔을 닦았다.
“그런데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항아리의 물이 변했지?”
“그건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뭐?”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예요.”
놀란 칼립소가 엘레나의 몸을 뒤집어 자신에게 얼굴을 돌리게 했다.
“당신이 일부러 했다고?”
“그럼요.”
엘레나는 살포시 웃었다.
“말했잖아요. 이번엔 내가 당신을 선택했다고. 내가 가진 성수는 본질을 밝혀주거든요. 검은 염료를 탔지만, 본질의 맑은 물을 되살려주죠. 그래서 당신 차례가 왔을 때 금빛 잔에 미리 성수를 부어놨어요.”
“맙소사,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하늘의 기적에 감복했는데.”
칼립소는 크게 웃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난 줄 알았어.”
“기적은 오늘 일어났죠.”
달이 해를 가린 순간.
갑작스럽게 어둠이 찾아오고, 다시 밝아졌던 신비로웠던 순간.
둘이 영원히 하나가 된다고 약속한 날.
오늘은 기적과 같았다.
칼립소의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내 신부가 되었으니.”
엘레나가 칼립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엘레나의 하얀 손가락에 얽혀 들어갔다.
“어차피 안토니안의 머리카락도 대신녀의 해석일 뿐이에요. 그동안은 신전의 해석에만 매여 있었는데, 이젠 내가 계시를 해석하기로 한 거 뿐이에요.”
칼립소는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눈으로 엘레나를 봤다.
“어디까지 반하게 할 셈이지?”
“음……. 아마 평생?”
칼립소가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이미 참을 만큼 참은 그의 아래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잠시만요. 침대에서…….”
“밤은 길고, 이젠 참을 필요가 없지.”
“맞아요.”
촤르륵.
욕조에 물이 넘쳐흘렀다.
둘의 첫날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 완결
By.[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