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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99화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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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타 제국은 살얼음판이었다.

엘레나가 떠난 이후, 칼립소 황제는 항시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렇다고 정사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칼립소는 정사에 열심히 임했고, 케이타 제국은 안정됐다.

“폐하, 건강이 염려됩니다.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데릭은 오늘도 밤늦게 일하는 칼립소에게 읍소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아.”

칼립소는 현재 닥친 현안은 물론, 앞날의 계획까지 세밀하게 짜두었다. 심지어 그가 부재할 경우의 대처방안까지도.

물론 그런 일은 필요했다.

원래 전쟁을 즐기던 칼립소는 자신이 전사를 했을 경우,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미리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지금 평화의 시대에 굳이 이렇게까지 세세히 마련해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요즘 칼립소 황제를 볼 때면 빨리 일을 해치우고, 어디론가 떠날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던 중 가이아의 사신이 케이타 제국에 도착했다.

“폐하, 인사드립니다.”

“그래.”

가이아의 사신은 덜덜 떨며 용건을 전했다.

“폐하, 가이아 제1황녀 엘레나 님의 공개구혼에 대해 알리고자 합니다.”

“공개구혼이라.”

칼립소의 눈썹이 올라가자 좌중은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때 정부였던 여인의 공개구혼이었다.

사신은 긴장하여 칼립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건은 뭐지?”

“몸에 붉은 표식이 있는 사내는 신분과 국적 여하에 상관없이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탁의 계시에 있는 붉은 태양을 찾기 위한……것입니다.”

사신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몸에 붉은 표식이 있는 자들은 모두 지원대상이 된다는 건가?”

“네, 그러합니다.”

모두 긴장한 가운데, 칼립소만 홀로 미소 지었다.

「당신은 눈이 참 아름다워요.」

‘엘레나, 이런 식으로 날 부르다니, 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하여, 소식을 전합니다.”

사신은 말을 마치고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신탁의 계시에 의해 정해진 정혼자는 안토니안이 아닌가?”

“그는 황실을 능멸하였습니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

칼립소의 광대가 하늘로 치솟았다.

“알겠다. 소식을 전했으니, 돌아가거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칼립소는 사신을 융숭히 대접해 돌려보냈다.

그 날은 달이 밝은 보름이었다.

사방이 캄캄해지도록 칼립소는 밀린 업무를 보았다.

그 모습은 보는 데릭은 왠지 초조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칼립소는 현안을 처리한 후, 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데릭이 황급히 따랐다.

“폐하…….”

“왜 그러지?”

“혹시, 가이아 제국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데릭.”

“예, 폐하.”

“오랜만에 술 한잔 할까?”

칼립소의 표정에서 불안한 기운을 느낀 데릭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공개 구혼에 응하시려는 것은 아니시지요?”

“짐작한 대로다. 응할거야.”

칼립소는 무겁게 말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데릭은 무릎을 꿇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가이아 제국 제1황녀의 공개 구혼입니다. 황녀의 신랑이 되는 자는 가이아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의 후보자들 중에서도 자국의 후계권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지원한다고 합니다.”

데릭의 목소리가 떨렸다.

“……폐하께서는 케이타 제국의 존엄하신 황제 폐하십니다.”

무릎을 꿇고 데릭은 머리를 조아렸다.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가이아 제국에서 케이타 제국의 황제를 그들의 황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케이타 제국의 황제 자리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데릭, 짐이 전쟁 중에 전사했을 때를 대비하여 세운 계획이 있지?”

“폐하……!”

“내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 그대로 행하라.”

“폐하,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데릭, 어차피 이대로는 살아도 죽은 것이다.”

칼립소는 데릭의 어깨를 안았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데릭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 * *

며칠 동안 수천 명의 사내들이 가이아의 황궁에 들어갔다가 실망하며 돌아갔다.

옆 나라인 리브로 왕국의 차남도 호기롭게 붉은 머리를 날리며 들어왔지만, 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다.

주변국들의 귀족 자제들부터 왕족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수많은 자들이 황궁을 찾았다.

아무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가이아 제국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의 행렬은 늘어났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후보가 있었다.

사내는 단출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눈에 띄는 자였다.

키는 일반 사내보다 목 하나는 더 크고, 탄탄한 체격과 기품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하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튜닉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맨 채,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황궁에 들어섰다.

“……아니! 이분은…….”

안내를 맡은 가이아의 대신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가 무릎을 꿇었다.

칼립소가 황궁에 들어서자, 가이아의 신하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케이타 제국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직접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베리우스 황제 역시 칼립소가 왔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인사하려 했다.

“일어나시죠. 오늘은 케이타 제국의 황제가 아닌, 엘레나 황녀의 신랑 후보로 온 것이니까요.”

그의 말에 베리우스 황제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붉은 태양이 아니라 오히려 검은 구름에 가까운…….”

험악해지는 칼립소의 표정에 베리우스 황제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칼립소는 베리우스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한껏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의 눈은, 태양을 닮은 붉은빛이지요.”

그 말에 좌중은 고요해졌다.

피를 먹은 듯한 새빨간 눈동자를 저주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지, 태양이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갑옷, 검은 말로 이루어진 그의 군대 덕분에 검은 구름이 틀림없다고만 여겼었다.

하지만 오늘 칼립소는 달라 보였다.

검은 갑옷은 하얀색과 금빛이 어우러진 튜닉으로 바뀌었으며, 칠흑같이 풀어헤쳤던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묶였다. 덕분에 환하고 잘생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고, 붉은빛 눈동자는 무섭기보다는 신비로워 보였다.

마치 빛나는 태양처럼.

게다가 탄탄한 체격과 주위에 풍기는 아우라는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남신 같은 모습이었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엘레나만이 차분했다.

기다렸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칼립소를 응시할 뿐이었다.

“잘 있었소?”

앨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잘 지냈어요.”

잘 지냈다고는 하나 엘레나 역시 케이타 제국에 있을 때보다 얼굴이 수척해졌다.

물론 칼립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칼립소의 얼굴은 예전 보름밤의 비밀을 알 때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보고 싶었소.”

칼립소가 한 걸음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엘레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검은 물항아리를 앞으로 다가갔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다녀갔으나, 검은 물을 맑게 하지는 못했다.

“피를 내세요.”

검은 항아리를 보는 칼립소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 물을 맑게 만들라는 건가?”

칼립소는 황당한 어조로 말했다.

“언약의 피를 나누어, 검은 구름의 방해를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거예요.”

“우린, 이미 피를 나누지 않았나?”

칼립소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피를 나누어야죠.”

엘레나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금빛 잔에 담긴 물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잔에 담긴 물이 옅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피를 내어요.”

칼립소는 엘레나의 눈을 찬찬히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피를 섞은 물을 붓는다고 하여, 검은 물이 변할 리가 없었다.

눈을 마주친 채로, 칼립소는 검으로 팔뚝을 그었다.

툭툭.

선혈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많이 낼 필요는 없어요.”

엘레나는 차분하게 금빛 잔을 들어 칼립소의 피를 받았다.

엘레나의 피가 담겼던 금빛 잔은 아까보다 진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부어 볼게요.”

엘레나가 금빛 잔을 들어 검은 물이 든 항아리에 부었다.

두근.

칼립소는 오랜만에 심장이 뛰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검은 물항아리에 집중되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금빛 잔에 담긴 핏빛 물이 떨어지는 순간, 검은 물이 점차 투명하게 변했다.

기적 같은 현상에 모두 웅성거렸다.

“여러분, 축하해주세요. 드디어 나의 반려를 찾았네요.”

엘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칼립소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금빛으로 수놓은 천으로 칼립소의 팔에 난 상처를 감았다.

“이런 기적이 일어나다니!”

칼립소는 감격 어린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당황한 것은 베리우스 황제였다.

엘레나가 신랑감 후보의 범위를 다른 나라까지 확대한다고 했을 때 흔쾌히 수락한 것에는 평민보다는 그래도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칼립소 황제의 경우는 달랐다.

다른 나라의 왕족의 경우에는 가이아 제국을 맡겨도 되지만, 칼립소의 경우에는 이미 케이타 제국의 황제였다.

만일, 칼립소가 황위에 오른다면 가이아 제국이 케이타 제국의 속국이 되는 것이 아닌가.

베리우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하지만 물항아리의 변화를 본 지금, 신탁의 계시가 분명한 상태에서 거부하기도 곤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엘레나는 가이아의 제1황녀요. 엘레나와 혼인하게 되면…….”

“아바마마, 전 칼립소 황제와 혼인하겠습니다.”

“……엘레나.”

“다만, 가이아의 황녀 자리는 내려놓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케이타 제국의 황후로 가겠습니다.”

“뭐?”

놀란 것은 베리우스뿐이 아니었다.

칼립소 역시 놀라 엘레나를 바라봤다.

“케이타 제국의 황후로서, 가이아 제국을 위대한 제국으로 만드는 것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

“신탁의 계시에는 제가 꼭 가이아 제국의 황후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습니다.”

좌중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엘레나가 짚은 것이다.

“아바마마, 제가 없는 동안 황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준 아리엘에게 제1황녀의 자리를 넘기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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