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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혼인을 어찌 설명하려고?”
“대신녀님께 힘을 보태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알겠다.”
하를 공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를 공작가와 신전은 선대부터 인연이 깊었다.
신전의 농토며 재물 관리를 맡아왔기 때문에 긴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신녀 역시 하를 공작이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사이였다.
대신녀에게 청을 드리면, 둘의 혼인식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바에는 밀어붙이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하를 공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손만 내저었다.
* * *
그날 저녁 대신녀의 전언이 있은 후, 황궁은 분주해졌다.
“쿨럭.”
베리우스 황제는 기침이 나오는 몸을 일으켰다.
“엘리자베스, 엘레나의 혼인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어떻겠소?”
“그래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어차피 치러야 할 혼인식이었다.
예를 갖추어서 하는 것보다는 일단 치르는 것이 중요했다.
“준비는, 이전에 해둔 것이 어느 정도 있으니, 빨리 진행할 수 있어요.”
“엘레나를 부르시오.”
베리우스의 전언에 엘레나가 들어왔다.
“엘레나.”
“네, 아바마마.”
“대신녀께서 다음 주에 예식을 치르자고 하시더구나. 안토니안 역시 빠르게 예식을 치르자는 입장이고, 나 역시 그리 생각한다. 어머니 생각도 같고.”
“아바마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보거라.”
“전, 안토니안과의 혼인은 원하지 않습니다.”
“엘레나! 제1황녀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거냐?”
“…….”
“아가, 네 뜻은 알지만 이제는 결정을 내릴 때야. 넌 가이아의 제1황녀, 신탁의 계시를 받은 유일무이한 황녀야. 부디 신탁의 계시를 지켜 제국을 지켜다오.”
엘리자베스가 간절히 말하자,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안토니안을 불러주세요.”
“지금 말이냐?”
“네.”
엘레나의 요청에 안토니안은 황궁으로 서둘러 입궁했다.
오늘따라 안토니안의 붉은 머리카락이 한층 더 짙어 보였다.
“폐하, 폐하를 뵈옵니다.”
안토니안이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엘레나가 그런 안토니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안토니안, 아직도 나와의 혼인을 원해?”
“그야, 당연하잖아.”
“안토니안, 어리석구나.”
“무슨 소리야?”
“그동안 시간을 준 건, 네 스스로 정리하길 바라서야. 그쪽이 모양새가 좋으니까.”
“엘레나! 어찌 그런 무례한 말을 하는 거니? 안토니안은 이 나라의 황제가 될 사람이야.”
“아바마마, 제가 안토니안과 혼인하는 것은 오직 신탁의 계시 때문입니다. 신탁의 계시에 맞게 가이아의 제국을 이끌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신탁의 계시에 대해 거론하자 베리우스 황제의 얼굴빛이 진지해졌다.
“그 말은 신탁의 계시에 적합하지 않다면, 안토니안과 굳이 혼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신탁의 계시에 따르면 「가장 밝은 달로 태어나 붉은 태양을 만나 제국의 번영을 이룰 것이니. 검은 구름의 방해를 이기고 언약의 피를 나눌 반려를 맞아,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반복하는 이유가 뭐냐?”
“안토니안이 붉은 태양이라는 증거가 ‘붉은 머리카락’ 때문이죠?”
“몸에 붉은 태양 빛을 가진 귀족의 아이는 안토니안뿐이었어.”
엘리자베스가 차분히 말했다.
엘레나는 병을 높이 들었다.
“카메룬 성수입니다. 어떤 것이든 그 대상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하지요. 제가 성인이 되던 해에, 대신녀님께 직접 받은 겁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왜 하는 거니?”
엘리자베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반면에 안토니안의 낯빛은 창백해졌다.
엘레나는 한 걸음씩 안토니안 앞으로 나갔다.
“……엘레나.”
촥.
안토니안의 붉디붉은 머리카락에 성수가 뿌려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엘리자베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토니안의 붉은 머리카락이 성수가 닿자, 검은색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런…….”
안토니안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무릎을 꿇었다.
촤르륵.
나머지 성수까지 모조리 부어버리자, 안토니안의 머리색은 완전히 검게 변했다.
“이로써 붉은 태양보다는, 검은 구름 쪽에 가깝겠네요.”
엘레나가 자조하듯 말했다.
“안토니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베리우스 황제가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토니안은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더니 엘레나를 향해 살벌하게 눈을 떴다.
“데이지, 그년이 말했지? 네가 납치한 거지?”
“데이지? 아, 네가 저택에 두었던 애인을 말하는 거야?”
연이은 충격에 엘리자베스가 놀라 말했다.
“애인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이니?”
엘레나가 한 걸음 뒤로 나왔다.
“아바마마, 안토니안은 평민 여자와 내연 관계였습니다.”
“뭐……?”
베리우스 황제의 안색이 굳었다.
“폐하, 오해십니다. 소신이 밖에 있을 때 잠깐 친절히 대해준 아이인데, 그로 인해 엘레나가 질투를 한 것뿐입니다.”
“질투라니? 진실을 알려준 이한테 고마워할 뿐이야.”
엘레나는 베리우스 황제 앞에 섰다.
“아바마마, 애초에 신탁의 계시를 머리 빛깔로 판단했다면 안토니안은 붉은 태양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토니안과의 혼인은 할 수 없습니다.”
“……알았다.”
베리우스의 눈에는 화가 서렸다.
“안토니안, 언제부터 황궁을 속였지?”
“폐하, 소신은…….”
안토니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은 황궁과 신전을 동시에 능멸하는 일인지 진정 몰랐더냐!”
안토니안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두려움에 떨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혼인식을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지가 없어진 시점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어야 했다.
“여봐라. 당장 이놈을 하옥하라.”
베리우스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친위대 대원들이 나섰다.
“이놈들……. 어찌 감히 나에게……. 내가 너희들의 대장인 걸 모르느냐!”
“폐하의 명이십니다.”
친위대의 대장을 맡았지만, 안토니안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다. 때마침 황제의 명이 있으니 친위대원들은 적극적으로 안토니안을 끌고 나갔다.
* * *
며칠 동안 가이아의 황궁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신탁의 계시를 가지고 황궁을 기만한 죄는 컸다.
“아들라스 공.”
베리우스는 친위대 대장에서 물러났던 아들라스를 찾았다.
“네, 폐하.”
“하를 공작을 잡아 오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아들라스는 안토니안의 소식을 듣고 도망치려는 하를 공작을 체포했다.
대대로 공신이었던 하를 공작 역시 감옥에 갇히고, 직위를 파면당했다.
또한 하를 공작가의 재산은 몰수당했다.
한바탕 태풍이 몰아치고 나자, 베리우스는 엘레나를 불렀다.
혼인은 무효로 하였으나, 아예 혼인을 없는 일로 할 수는 없었다.
신전 쪽에서도 잠잠했다.
조사 과정에서 하를 공작가와 대신녀 간의 연관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신녀는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고, 고행의 길을 떠났다.
“엘레나.”
“네, 아바마마.”
“너에겐 미안하구나.”
베리우스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레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무작정 혼인을 밀어붙인 것이 후회됐다.
베리우스는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도 알겠지만 혼인을 마냥 미룰 수는 없다.”
베리우스 황제는 기침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런 소란 끝에 아무와도 혼인을 하지 못한다면, 엘레나의 입지는 위태로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다시 케이타 제국에서 엘레나를 데려갈까 두려웠다.
“아들라스 공의 장남이 영민하다 들었다. 하여 네 신랑감으로 적당할 것 같은데, 어떠냐? 아니면 다른 눈여겨보았던 귀족 자제 중에 마음이 가는 아이가 있으면 말하거라. 이번엔 뭐든 네 뜻을 들어주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베리우스 황제는 혼인에 있어 엘레나의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아바마마, 그러면 이번 혼인은 저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허락한다.”
베리우스 황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
“아바마마, 비록 안토니안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신탁의 계시는 유효합니다.”
“…….”
베리우스 황제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느냐?”
“아바마마, 제 신랑감을 공개 모집하겠습니다.”
“뭐……?”
“신탁의 계시를 이룰 것입니다. 국적, 신분을 막론하고, 차별을 두지 않겠습니다.”
“국적, 신분을 가리지 않겠다고?”
“네, 자신의 몸에 붉은빛이 있는 자는 모두 신청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흐음…….”
베리우스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귀족의 자제 중 붉은빛을 띠는 자는 안토니안뿐이었다.
만약, 신분을 막론하지 않는다고 하면 평민 또는 천민의 자제가 왕실로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서둘러 안토니안을 정혼자로 삼은 것이다.
평민의 핏줄이 왕위에 오를 바에는 차라리 외국의 귀족과 혼사를 맺는 편이 나았다.
“허락한다.”
베리우스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황궁은 분주해졌다.
가이아 제국 전역은 물론 각 나라에 사신을 보내, 소식을 알렸다.
가이아 제국의 제1황녀 엘레나의 공개 구혼이 시작되었다.
* * *
소식이 전해지자, 황궁에는 긴 행렬이 늘어섰다.
몸에 붉은빛이 있는 자들은 각지에서 다양하게 모여들었다.
붉은 머리카락부터, 몸 안에 있는 붉은 점, 붉은 손톱, 붉은 치아까지 끝없는 행렬이 늘어섰다.
수없이 밀려드는 지원자들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아가, 어떤 기준으로 신랑감을 고를 거니?”
“오직 신탁의 계시대로 행할 예정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엘레나는 투명한 항아리를 준비했다.
투명한 물 가운데 검은 먹물을 주전자로 붓자, 금세 구름처럼 캄캄하게 물에 번졌다.
“언약의 피를 나누어, 검은 구름을 없애줄 이를 찾겠습니다.”
엘레나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칼을 가져댔다.
뚝뚝.
붉은 핏방울이 항아리 안에 떨어졌다.
검은 먹물이 붉은 핏방울을 흡수했다. 하지만 여전히 검은색은 변하지 않았다.
“이 물을 깨끗하게 해 줄 이와 혼인하겠습니다.”
“알겠다.”
엘레나의 제안대로 행렬을 받아들였다.
검은 구름의 방해를 이길 ‘붉은 태양’을 선발한다는 이야기에 좌중은 수군거렸다.
첫 번째로 들어온 이는 가이아 제국에서 세바스찬 다음으로 유명한 상인이었다.
최근 케이타 제국과의 무역으로 거액을 번 상인은 제법 풍채가 좋았다.
하지만 신분제도가 엄격한 황궁에서 이런 일이 아니면, 황녀의 신랑감 후보로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녀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레나는 위엄있게 인사를 받은 후, 간결히 말했다.
“붉은 표적을 보여라.”
“알겠습니다.”
상인이 소매를 걷자 팔목 안쪽에 붉은 점이 있었다.
“피를 내거라.”
“예.”
손가락에 칼을 대자, 붉은 선혈이 뚝, 흘렀다.
하지만 검은 항아리의 빛은 변하지 않았다.
“다음, 들어오거라.”
다음에 들어온 이는 친위대의 병사였다.
“황녀님을 뵈옵니다.”
평소에 엘레나를 흠모하였으나,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이였다.
친위대의 병사는 붉은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친위대의 병사 역시 물항아리의 빛을 변하게 하지 못했다.
하루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나, 검은 물빛을 변하게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