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97화 (9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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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의 신뢰도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거야?”

안토니안이 벌컥 화를 내며 다그치자, 데이지는 당황했다.

“그게 아니라…….”

“난 네가 갇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왔어. 그런데 넌 고작 그거 하나 못 알려줘? 그것도 내가 준 거잖아!”

“안토니안, 그런 게 아니에요.”

안토니안이 화를 내자, 데이지는 그가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럼 왜 이야기를 안 하는 건데?”

데이지는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침대 밑에 금고가 있어요.”

“그래? 어디?”

“내가, 찾아줄게요.”

데이지는 힘없이 일어났다.

그러자 안토니안이 황급히 부축했다.

2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데이지는 마룻바닥과 똑같은 모양의 금고를 열었다.

“여기 있었구나.”

안토니안은 반지와 목걸이에 가문의 인장을 확인했다.

“맞네.”

“안토니안, 이제 됐죠? 날 빨리 데리고 나가줘요.”

“그래, 그래야지.”

안토니안이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데이지, 그동안 즐거웠어.”

“……무슨 말이에요?”

안토니안이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런 안토니안을 데이지는 불안하게 따랐다.

카몬 대장이 2층으로 올라와 있었다.

“물건은 찾으셨습니까?”

“그래. 이런 거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해?”

“죄송합니다.”

안토니안은 목걸이와 반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카몬.”

“네, 도련님.”

“처리해.”

안토니안이 냉정하게 일어섰다.

“토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데이지가 다급하게 팔을 뻗자, 안토니안이 냉정하게 쳐냈다.

필사적으로 쫓아가려는 데이지 앞을 카몬 대장이 가로막았다.

“토니! 가지 마요. 살려줘요!”

데이지의 절실한 외침에도 안토니안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카몬에게 앞길을 막힌 데이지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토니! 토니! 배 속에 당신 아이가 있어요.”

안토니안이 걸음을 멈췄다.

“토니!”

안토니안은 뒤돌아 데이지에게 다가섰다.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데이지는 일부러 배를 감쌌다.

거짓말은 아니다.

주피터의 열매를 먹지 않은 지 꽤 되니까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주피터 열매를 안 먹은 거야?”

“몇 번, 잊어버렸어요. 그러니까 토니, 제발 날 버리지 마요.”

데이지가 안토니안의 팔을 다급히 잡았다.

“너 정말 위험한 여자였네.”

“토니…….”

“아버님 말씀이 맞았어. 그럼, 더욱더 이대로 둘 수 없지.”

“토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안토니안이 데이지의 팔을 내팽개쳤다.

“카몬, 깔끔하게 처리해. 문제 생기지 않게.”

데이지는 싸늘하게 돌아서는 안토니안을 보며 발악을 했다.

“이 나쁜 놈! 너 거기 안 서?”

안토니안은 시끄럽다는 듯이 귓가를 쑤셨다.

“벼락 맞아 죽을 놈! 아버지랑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래? 이 은혜도 모르는 놈, 내가 널 죽일 거야! 내가 널 가만히 놔둘 거 같아?”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어깨를 으쓱하며 춤추듯 내려가는 안토니안을 보고 데이지는 절망을 느꼈다.

안토니안이 떠난 후, 카몬이 데이지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이제 우리도 그만 끝내지?”

데이지는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쳤다.

“이리 와. 좋은 말로 할 때.”

카몬이 웃으며 다가오자, 데이지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어디를 도망가려고?”

데이지는 무작정 뛰었다.

하지만, 2층에 올라서자 뒤에는 카몬이, 앞에는 사내들이 막아섰다.

방법이 없었다.

데이지는 복도에 있는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악!”

손쓸 틈도 없이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자, 카몬은 당황했다.

“이년이!”

카몬은 창문 밑을 바라봤다.

꿈틀거리더니 데이지가 움직이려 했다.

“거기 서지 못해!”

데이지는 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났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발목이 시큰거렸으나,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어떻게든 여길 벗어나야 해.’

하지만 데이지가 막 정원으로 발을 딛는 순간, 뒷목이 잡아채졌다.

“하악!”

“이년이 어딜 도망가려고?”

여유 있게 창문에서 뛰어내린 카몬이 뒤에서 데이지를 잡은 것이다.

카몬은 데이지를 그대로 쓰러뜨리고, 위에 올라탔다.

“제발, 살……려주세요.”

“가만히 있으면, 고통 없이 보내줄게.”

카몬은 차분한 표정으로 하얀 장갑을 꼈다. 그리고 몸부림치는 데이지의 가는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섬뜩한 느낌에 데이지가 발버둥 쳤다.

“가만히 있으래도!”

“으읏…….”

카몬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그의 머리 위에 강한 충격이 닿았다.

정신을 잃은 건 데이지가 아닌, 카몬이었다.

* * *

데이지는 숨을 죽였다.

누군가에 의해 구출된 것은 다행이었으나, 한편으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눈에는 안대가 가려진 채, 한동안 말에 태워져 달렸다. 그러더니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서야 안대가 풀렸다.

“누……구세요?”

“안심하세요. 해치진 않을 테니.”

“살려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데이지는 그제야 사방을 둘러봤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기품있어 보이는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도 있었다.

“여긴, 어딘가요?”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요.”

남자가 나가자, 데이지는 몸에 힘이 빠져 침대에 앉았다.

목숨을 구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나, 마음은 지옥이었다.

며칠 사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깔끔하게 처리해. 문제 생기지 않게.」

안토니안의 차가운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쁜 놈…….’

귀족과 어울려서 평민이 잘된 일이 없다고 들었으나,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감히 날 버려?’

결국 황제가 될 때 방해가 되니 처리하는 것이리라.

사랑한다고 믿었었는데, 데이지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불쌍한 아버지 역시 희생양이 된 것이 분명했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는 자인 줄 알았으면, 진작 황실에 그의 비밀을 고했을 것이다. 그렇게 연줄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현명했을 테니까.

끼이익.

문이 열리고,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자신을 구출해 준 남자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데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남자는 데이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뒤로 물러난 후, 누군가에게 예를 표했다.

“만나시겠습니까?”

“그래.”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여인이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우아한 얼굴, 기품있는 자태를 본 데이지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녀 전하시다, 예를 갖추거라.”

데이지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황녀 전하, 인사드립니다.”

엘레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데이지를 물끄러미 봤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데이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겨우 살아났다 싶었는데, 황녀의 앞으로 끌려갈 줄은 몰랐다.

“무슨 죄를 지었지?”

엘레나의 말소리는 담담했다.

“……제가 감히, 황녀 전하의 정혼자와 …….”

데이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데이지가 잇지 못한 말은 필릭스가 대신했다.

“안토니안 님과 내연의 관계였습니다. 하를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안과의 사이를 이야기해도 엘레나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안토니안이 버린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가여운 것.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 쓸 수 있는 패는 아니겠군.”

엘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둘의 사이가 열렬했다면, 이를 가지고 협상을 벌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혼인 전의 여자 관계는 충분한 흠이 되지만, 파혼을 할 만큼 강력하진 않았다.

“황녀 전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가 너를 죽인다고 하였느냐? 걱정 마라. 쓸모가 없다고 했지 죽인다고 하진 않았으니.”

엘레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공포에 질린 데이지에겐 별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내쳐지면, 자신은 갈 곳이 없었다.

나가자마자 하를 공작가에서 자신을 끝까지 추격해 죽일 것이다.

“황녀 전하……. 전…….”

데이지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안토니안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비밀이라니?”

“……은신처를 확보해주세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필릭스가 나섰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협상을 하려 드는 게냐?”

엘레나가 손을 들어 필릭스를 저지했다.

“되었다. 말해 보렴.”

“그럼 제 안전도 보장해주시는 겁니까?”

“목숨과 은신처를 보장해 주지.”

엘레나의 말에 데이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 * *

하를 공작가에는 심각한 기류가 흘렀다.

기사들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데이지를 놓친 것이다.

하를 공작은 고심에 빠졌다.

‘도대체 누가 데려간 거지?’

카몬 대장과 그 부하들이 모조리 정신을 잃은 것을 보면 보통 솜씨가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황궁 쪽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만약 황궁 쪽이라면 지금까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황궁에선 얼마 전 인장을 새긴 목걸이와 반지를 받고도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하를 공작은 도무지 짐작 가는 데가 없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을 능멸한 죄로 처형을 받게 될 것이다.

‘바보 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평생을 두고 계획한 일이었다.

대신녀에게 신탁의 계시를 들은 후, 안토니안이 태어나자마자 설계한 일이었다.

‘다 된 밥을 죽으로 만들어?’

세바스찬은 깨끗하게 처리했다지만, 데이지가 문제였다.

이쯤에서 물러나야 할까.

하를 공작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황녀 측에서 몇 번이고, 파혼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고 했다.

황후에게 부족한 제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물러나면 모양은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까웠다.

그때 안토니안이 비장한 표정으로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하를 공작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안토니안을 바라봤다.

“오늘 폐하께 알현을 드릴 생각입니다.”

“뭐? 파혼을 하려고?”

하를 공작이 놀라 벌떡 일어나자, 안토니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혼인식을 앞당길 생각입니다.”

“흐음.”

하를 공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데이지의 행방을 모르지 않느냐. 성급히 굴지 마.”

“그러니까 서둘러야지요.”

하를 공작은 고심에 잠겼다.

원래라면 혼인식은 다음 달이었다.

“아직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때, 혼인식을 올리면, 향후의 일이 더 간단해집니다. 베리우스 황제께서 병환에 있을 때,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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